2. Stare at you
「백경철과 채무로 얽혀 있던 두 명이 오늘 백나언 씨 집을 방문했습니다.」
기원이 무표정한 낯으로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나언이 기원을 찾은 건 대부업체 직원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이틀이 지난 저녁이었다. 조익현 비서실장의 차를 타고 집으로 찾아온 나언이 쭈뼛대며 고개를 숙였다. 기원은 나언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를 거꾸로 훑어 살폈다.
지난번과 같은 외투에 같은 바지 차림이었다. 안의 니트만 노란 것으로 바꾸어 입었는데 그것조차 외투와 색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혼자 둥둥 떠 있었다. 눈을 감고 손을 뻗은 후 아무거나 닿는 걸 입은 것 같았다.
기원은 메인 거실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에서부터도 한참을 걸어야 나오는 메인 거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모던 클래식 조명이 빛을 내고 있었고, 조명을 따라 산란된 빛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 위로 반짝였다. 심해처럼 어두운 바닥은 빛이 반사되는 부분만 언뜻언뜻 청록색으로 빛났다.
가운데에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소파와 어울리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최근에 발간된 매거진과 수입해 온 오브제들이 곳곳에 공간을 분리하기 위한 인테리어로 배치되어 있었다. 마치 최고급 호텔의 로비처럼 꾸며진 공간을 느리게 가로지른 기원이 먼저 소파에 앉았다.
이윽고 규칙적인 기하학무늬가 새겨진 티 포트와 잔 2개를 챙겨 나온 사용인이 그를 따라 소파 쪽으로 가까이 왔다. 적당히 따스한 온도의 차가 따라지는 동안에도 나언은 거실의 애매한 위치에 서 있기만 했다. 차를 한 입 들이켠 기원이 뒤로 고개를 살짝 돌려 턱짓으로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만 서 있고 앉아요.”
나언의 발이 그제야 움직였다. 지난번 집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과 자세였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주제도 모르고 고개를 빠득빠득 들고선 튕겨 대는 쪽도 우스웠고, 이제 와 손을 곱게 앞으로 모으고 종종걸음으로 소파에 앉는 쪽도 귀여웠다. 따지자면 후자의 쪽이 조금 더 마음에 들었다.
대각선에 위치한 자리에 앉은 나언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눈을 크게 떴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깊고 보드랍게 감싸는 착석감에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특유의 예민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항상 생각이 많아 복잡했던 얼굴이 며칠 사이 더 볼만해졌다. 걱정거리를 하나 더 보탰다간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처럼 퍼석하게 질려 있었고 머리는 지저분하게 길어 큰 눈을 반쯤 가렸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입가가 터져 검붉은 딱지가 앉아 있는 것이 유독 잘 보였다. 피부가 하얀 탓이었다.
기원은 긴장으로 굳어 바스라질 것만 같은 나언에게 가볍게 말을 걸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밖에 춥죠? 여기 무릎 담요 하나만 가져다주고 전부 나가세요.”
저녁 시간이라 저택 내부 곳곳에서 바쁘게 일하던 사용인들이 모두 하던 것을 멈추고 사택으로 돌아갔다. 시키는 기원의 목소리와 대답하는 여자의 소리가 전혀 크지도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감사합니다.”
곱게 개켜진 청회색의 담요를 받은 나언이 담요를 펴며 시선을 애매하게 내렸다. 기원은 붉은 피딱지가 말라붙은 나언의 손톱과 손등 위의 화상 자국을 바라보며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잠깐 고개를 들어 기원의 시선을 살핀 나언이 담요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가렸다.
백주언의 간병인을 통해 들은 바로는, 나언이 아버지의 빚에 대해 알게 된 이후 발작적으로 병실을 찾았다고 했다. 보호자의 허락 없이 타인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특실 병동임을 알면서도 늘 바깥을 흘긋대며 정처 없이 복도를 돌아다녔고, 잠깐 병실을 잘못 찾은 옆방의 보호자와 시비가 붙었다고도 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그들이 도망치려는 백나언을 데려가 잔뜩 굴려 놓은 것으로 안다. 다급함에 판단력이 흐려진 나언이 당장 어딘가 비벼 볼 구석이라곤 한 번이라도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있는 제 쪽임을 알기에, 기원은 이른 시일 내에 나언이 자신을 찾으리라 생각했다.
앞머리를 버릇처럼 쓸어 올린 기원이 나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몸도 성치 않아 보이는데 멀리까지 무슨 일로 왔어요?”
다 알면서 놀리듯 묻는 말에 나언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미 피딱지가 앉아 붉게 터 있는 손끝을 자꾸만 만져 대던 나언은 이내 연한 분홍색의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짓씹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어떻게 두어야 할지 모른 채로 그렇게 시간을 죽이고만 있었다.
기원은 손목을 털어 시계를 확인했다. 기원의 작은 행동에도 소스라치게 눈치를 보던 나언이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비서님께서 병원비 입금해 달라고 연락을 주셨는데요.”
기원은 옅은 색의 찻물을 천천히 들이켰다. 나언이 대답이 없는 기원의 눈치를 한 번 살피곤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번에, 사, 사귀면 주언이 병원비, 해결해 주신다고….”
“말본새가 예쁘네.”
기원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마치 그 웃음이 기원에게로 옮아간 것처럼 나언의 얼굴은 유례없이 질려 갔다.
“그래서 뭐. 지금 돈 때문에 억지로 앉아 있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건가?”
“…예? 아니, 아니요….”
나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그제야 제 말이 실언이라는 걸 깨닫고는 주섬주섬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해요.”
“이제 나랑 만날 마음이 좀 들어요?”
기원의 말에 고개를 든 나언과 눈이 마주쳤다. 나언은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사귀자는 말을 털어놓는 사람의 표정이 저렇게 비장한 건 처음 봤다. 개중에서도 툭 찌르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눈가가 제법 절박해 보였다.
기원은 자꾸만 웃음이 터지려는 입가를 손으로 쓸어 겨우 정돈했다.
“입술이 터졌네.”
“아….”
기원의 말에 나언이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었다. 기원의 눈이 다시 손등의 담뱃불 자국을 훑었다.
“예쁜 손도 누가 지져 놨고.”
“…….”
시선이 닿는 느낌에 나언이 퍼뜩 손을 내렸다.
“피곤할 텐데 올라가서 씻어요. 2층에 나언 씨 방 있어요.”
기원의 말에 나언이 기원의 쪽을 바라보았다. 멍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닿아 오고, 기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하면서도 얼떨떨하게 앉아 있는 나언을 향해, 기원이 웃으며 물었다.
“그 점퍼 최지원이 사 줬죠?”
“…네.”
“지금 그 비싼 옷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 줄 알아요?”
나언이 퍼뜩 고개를 숙였다. 요 며칠 이 옷만 입고 다녔다. 이러고 땀을 흘리고 공장 흙바닥을 구르고, 보일러의 훈기가 잘 머무르지 않는 방에서 이불 대용으로 덮고 자기도 했다. 수치심에 귓가에 열이 올라 몸을 가만히 두지 못했다. 나언은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피딱지가 앉은 굳은살을 괜히 꾹꾹 눌렀다.
“여기 봐요, 백나언 씨.”
나언의 어두운 눈동자가 기원을 바라보았다.
“나는 백나언 씨가 잘생겨서 좋아요. 그러니까 백나언 씨가 여기에 어거지로 앉아 있는 꼴도, 이 악취도 봐주고 있는 거고.”
“…….”
“나랑 만나기로 한 이상, 냄새부터 좀 어떻게 해요.”
기원은 앉아 있는 나언을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나언이 풍겨 대는 악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
기원은 나언이 2층으로 올라간 뒤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 오후로 돌렸던 스케줄을 처리했다. 기원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늦은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기원이 씻고 식탁으로 향하자, 식사를 책임지는 김영현 실장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 왔다.
“손님분 식사도 함께 차릴까요?”
기원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김 실장의 손짓에 식탁 위에 나언의 식기가 놓였다. 나언은 저녁 식사를 하라는 사용인의 전언에 1층으로 내려왔다.
냄새가 난다는 기원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멀리서부터 기원의 취향인 바디 워시 향이 진하게 풍겨 왔다. 한 통을 모두 부어 목욕을 한 것 같았다. 기원을 맞이한 나언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타인이 의자를 빼 주는 호의에는 적응을 못 하고 허둥지둥하다 볼썽사납게 자리에 앉았는데, 기원은 민망해하는 나언을 적당히 못 본 척해 주었다.
저녁은 정갈한 한식 차림이었다. 나언은 개인 식기에 먹을 만큼 담긴 반찬과 밥, 국을 차례로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수저를 들었다.
“…….”
조용히 음식을 씹던 나언은 얼마 먹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식사를 하며 계속 위 주변을 문지르더니, 소화가 잘되지 않는 듯 표정이 거북해졌다. 게다가 입을 벌릴 때마다 찢어진 입가가 아픈지 눈도 찡긋댔다.
기원은 불편한 티를 어떻게든 내는 나언이 발칙하면서도 귀여웠다. 나언은 새 모이만큼 밥을 씹으며 무언가 말을 걸고 싶은지 큰 눈으로 기원을 이따금 쳐다보았으나 기원은 일부러 그 시선을 무시해 버렸다.
저는 언제까지 여기서 지내야 하나요.
정말 집으로 못 돌아가는 건가요.
기원은 식사를 하며 나언이 던질 질문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나언은 생각보다 영민했다. 기원이 수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얌전하게 앉아 있던 나언이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주언이를 볼 수 있을까요?”
고분고분한 질문이 마음에 들었던 기원이 불시에 웃었다. 기원의 입매를 본 나언의 눈빛이 흐려졌다. 정말 지원과 한 치도 닮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부드럽게 웃음 짓는 얼굴에서 저도 모르게 지원을 떠올린 것이다. 죄책감과 슬픔이 가슴속에서 뒤엉키며 나언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말 잘 들으면 계속 예뻐해 줄 거예요.”
말을 잘 들어야 주언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 나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식사를 마무리한 기원은 물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물었다.
“그럼 한번 벗어 볼래요?”
“…예?”
기원의 말을 들은 나언이 멍청하게 되묻는 소리를 냈다. 기원은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조금 더 기다려 주기로 했다. 식탁 위에 남은 음식들이 천천히 식어 갔다.
“여기서요?”
“되묻는 것 안 좋아합니다.”
나언이 다이닝룸을 슬쩍 둘러보았다. 조용한 식사를 위해 다들 자리를 피해 주었지만 확실히 이 공간을 벗어나는 건 보지 못했다. 분명 요리 공간 뒤쪽에 사람이 모여 있을 것 같았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뱉는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두리번대던 나언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기원과 눈이 마주치고는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쿵쿵대는 제 심장 소리가 귓가까지 들려왔다.
나언은 입고 있던 헐렁한 네이비색 홈웨어로 손을 뻗었다. 몇 번 목 주변을 서성이던 손이 단추를 천천히 풀어 가기 시작했다. 단추를 끄를 때마다 품이 큰 상의가 조금씩 옆으로 벌어졌다. 미끄러운 새틴 재질의 옷은 벌어지는 순간 어깨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빛 한 번 받지 않은 것 같은 하얀 어깨와 마른 가슴이 드러났다. 잠시 손을 멈추었던 나언이 소매에서 팔을 빼어 상의를 완전히 벗었다.
윗옷을 벗은 나언은 허리춤에 손을 집어넣었다. 엉덩이를 살짝 들어 바지를 발목까지 끌어 내렸다. 바닥으로 부드럽게 떨어져 내린 상의와 하의를 주워 들어 대충 개켜 바닥 한편으로 밀어 두었다. 그대로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았다. 입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얇은 옷이었지만 없어지고 나니 살갗에 닿는 온도가 싸늘했다. 나언은 추위에 집중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용히 손을 모으고 기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벗으라는 말 안 들려요?”
“네? 벗었는데….”
하지만 기원의 건조한 목소리에 나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 몸 아래를 살폈다. 속옷 말고는 입은 것이 없었다. 기원은 당혹에 물들었던 나언의 얼굴이 점차 상황을 파악하며 더할 나위 없이 식어 가는 것을 살폈다.
“위층에 오, 올라가서 벗으면 안 될까요…?”
“싫으면 관두세요.”
흥미가 떨어진 장난감을 대하는 말투였다.
기원의 표현에 의하면 ‘예쁨’을 받아야 하는데, 한 번에 말을 듣지도 않고 되묻기까지 했다. 이대로 기원이 자신을 두고 가 버리면, 주언이를 보는 방법에 대해 더 물을 수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겁을 집어먹은 나언이 손을 들어 속옷을 끌어 내렸다.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으나 나언은 꿋꿋이 발목에서 속옷을 빼어 내 벗어 두었던 홈웨어 위에 올려 두었다.
아래위로 검은색의 니트와 진을 차려입고 있는 기원의 앞에서 나언은 하얀 몸뚱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나언이 다시 식탁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기원의 손이 나언을 제지했다.
“여기로 와서 앉아요.”
기원의 긴 손가락 끝이 가리킨 건 식탁 아래의 차가운 바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