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오퍼 (Reoffer) 1-1. Stare at me (1/28)

1. Stare at me

문자가 울리는 소리에 무릎에 파묻고 있던 이마를 들었다. 손 닿는 곳에 팽개쳐 놓은 휴대 전화를 켜는 순간, 어둑한 단칸방의 유일한 불빛이 파리한 얼굴을 비췄다. 새벽녘 지원이 형의 비서님에게 연락이 도달했다.

글자를 읽는 순간 화면이 뿌옇게 번지며 소리 없는 눈물이 뺨 위로 투둑 흘러내렸다. 기다리면서도 기다리지 않았던 연락. 장례식장의 위치가 적힌 메시지였다.

화장실로 뛰어가 며칠 만에 몸에 물을 묻혔다. 무엇도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뺨은 핼쑥하게 살이 내렸으나 눈은 뜨기 힘겨울 정도로 부어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것도 잠시, 난 얼른 씻은 뒤 얼마 없는 옷가지 중 검은색 옷을 골라 입고 두둑한 패딩에 팔을 끼우며 걸어 나왔다.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

5년을 사귄 우리의 끝은 소름이 일 정도로 허무했다.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을 향하고 있는 지금도, 형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자꾸만 가슴이 뻥 뚫린 채로 아려 왔는데, 머리와 마음 사이에 느껴지는 감정의 괴리에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안쪽까지 들어가요?”

흘긋 룸 미러로 나를 살핀 기사가 물었다. 고개를 저었다. 택시 문을 열고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속까지 아린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형은 추위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가 죽기엔 너무 추운 날씨였다.

얼어붙은 땅을 밟으며 장례식장의 입구까지 걸어가는 걸음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문 바로 앞에서 보폭이 줄어들어 결국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이미 붉은 속살이 드러날 만큼 뜯어진 손톱 옆을 다시 잘근잘근 눌렀다. 숨까지 얼어붙은 듯, 호흡이 제멋대로 엉켜 들었다.

그러나 형을 배웅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은 썰렁하고 쓸쓸했는데, 장례식장 안은 정신없었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모여 목소리를 죽인 채 웅성댔고, 혹시 모를 기자를 쫓기 위한 인력도 보였다.

끝없이 줄지은 근조 화환에는 뉴스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기업 유지의 이름이 앞다투어 적혀 있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비하지 못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빈소를 둘러싼 하얗고 화려한 꽃이 생전의 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꽃 한 송이 들고 오지 못한 빈손은 무거웠다.

「故 최지원 님의 빈소」

검은 글자에 시선이 닿은 순간 차가운 돌덩이가 속을 꾹 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속이 새까맣게 꺼져 가는 기분을 참아 내며 남들처럼 줄을 섰다. 하나둘 안으로 들어가고, 어느덧 내 이름을 적을 차례였다. 손이 떨려 펜을 놓치자 보조하고 있던 사람이 다른 펜을 건넸다.

“여기.”

버릇처럼 꾸벅 고개를 숙인 난,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부비며 ‘백나언’을 써넣었다. 패딩 주머니 속에 있던 봉투를 꺼내 상자에 넣었다. 집에 있던 봉투에 넣어 온 오만 원권 한 장이 형에게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것조차, 형이 나에게 용돈으로 주었던 현금이었고.

차마 형에게 절을 할 순 없을 것 같아 적당히 빠져나오려 했는데 줄에 휩쓸려 영정이 놓인 곳으로 가 버렸다. 커다랗고 화려한 단상에 형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무너져 내리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사진 속 형의 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진이었다.

-잘 나왔다.

-그래? 지갑에 넣고 다녀.

-실물이 더 낫긴 해.

저 사진을 찍은 날, 잠깐 만나자는 말에 형의 차에 올라탔다. 형은 대단한 선물처럼 증명사진 하나를 건네주었다. 실물이 낫다는 상투적 칭찬에, 형은 사진 속 얼굴과 확연하게 다른 미소를 띠며 웃음을 터뜨렸다.

형이 무장 해제 된 채 맑게 웃는 건 나만 아는 얼굴이었다. 하얗고 고른 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큰 눈을 사르르 접으며 고개를 뒤로 젖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비슷한 색깔의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렇게 이유 없이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는 시간이 많았다.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며 자연스레 기업을 이끌어 가기 시작한 형. 형은 속이 엄청 여린 주제에 타인 앞에선 위엄 있게 보이려 괜한 무게를 잡곤 했다. TV나 기사에 담긴 형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그러나 단단한 형은 이상하게도 내 앞에선 잘 무너졌다. 긴장을 벗어 던지고 불안과 후회를 고스란히 보여 주기도 하며, 별것도 아닌 것에 잦은 웃음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귓가를 울리던 형의 목소리가 벌써 희미해지는 것 같아 괜히 귓불을 만져 보았다.

“오셨어요?”

“아, 비서님.”

그대로 빈소를 빠져나가는 나를 붙잡은 비서님이 알은체를 해 왔다. 비서님은 나에게 두 번 접힌 작은 쪽지를 건넸다.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습니다. 나언 씨 물건인 것 같아서요.”

“아…. 네.”

형과 내가 5년간 만나 온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원이 형의 지인 중, 나를 기억하고 유일하게 연락을 넣어 준 사람. 이제 더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그에게도 인사를 남겨야 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받은 것들은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겠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연애였다. 유일하게 형과 나의 관계에 증인이 되어 줄 그는, 언제나 잘 감춰 주었고 적당히 모른 체해 주었다. 바쁜 형이 놓치는 부분을 챙겨 주기도 했고, 내 동생 주언이를 지원이 형보다 더 나서서 챙겨 주기도 했다. 그도 나에게 할 말이 많은 것 같았으나 몇 번 입술을 달싹이고 말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도 할 수 없는 자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걸음을 돌려 먼저 빈소를 떠났다. 우리는 언제나 그런 관계였고, 그건 형의 죽음 앞에서도 변할 게 없었다.

형은 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사고에 휘말렸다. 사고가 난 새벽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지방 출장을 갔던 형은 일정을 무리하게 앞당겨 이틀 먼저 올라오겠다고 했다.

형이 교통사고가 크게 났단 소식을 비서님에게서 듣자마자 당장 형이 응급 수술 중인 병원으로 출발할 채비를 했다.

-가족들이 함께 있습니다. 오지 말아 주세요.

그러나 비서님에게서 연락을 받은 순간 올라탔던 택시의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렇게 작은 방 안에 갇힌 채로, 형에 관한 소식은 비서님에게서 전달받았고, 자세한 경위는 뉴스 속보를 통해 파악했다.

형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그의 죽음을 섣불리 인정하지 못했다. 지금 이건 조금 지독한 꿈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그는 살아 있고, 출장을 간 것이라고. 나에게로 천천히 돌아오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가끔 떠오르는 현장의 끔찍한 사진은 애써 외면하며 지냈다.

하지만 원래 일정대로라면 출장이 끝나 무사히 돌아와야 했던 날, 끝내 그의 사망 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이제 제발 정신 차리라는 의미같이 비서님의 연락을 받는 순간 심장이 따끔하게 아팠다.

세원 그룹 장남의 사고사라는 비보는 시사·경제면을 뜨겁게 달구었다.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형에 대해 내가 몰랐던 내용까지 매스컴을 탔다. 형은 생각보다 훨씬 아깝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떠들 거리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어떤 뉴스거리보다, 형의 크고 튼튼했던 차가 반파되어 나뒹굴고 있던 사진과 도로 위를 가로지르는 스키드 마크를 확대했던 사진이 머릿속에 오래 머물렀다.

마지막에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리해서 올 필요 없다고 하루만 일정을 미뤘어도, 30분만 미뤘어도 우리의 끝은 달라졌을까. 혹시 너무 아프고 괴로웠던 형이 내 원망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할 기회도 없는데, 난 어떡해야 하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빈소를 다녀오고 나서야 형이 죽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해야 했다. 그는 이제 이 허름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형은 죽었지만 형이 남긴 것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맞닿은 문제는 동생 주언이다. 당장 동생이 입원해 있는 병실과 치료비, 간병인 보조비를 모두 형이 해결해 주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 장례식장에서 비서님에게 정리하겠다는 말을 남겼으나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차마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이젠 가야 했다. 미룰수록 내가 떠맡게 될 병원비가 커져 갔다.

“추워.”

무방비한 겨울바람이 뺨을 스치자마자, 자각하지 못한 혼잣말이 흘렀다. 12월의 매서운 추위가 서울을 강타했다. 거위 털이 잔뜩 들어 있는 패딩을 목 끝까지 추켜올리고도 어깨가 옹송그려졌다. 버릇처럼 택시를 타려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이젠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국내에서 최고로 꼽히는 소아암 병동에 도착했다. 높은 건물과 깔끔한 외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택시에서 내려서 주언이를 보러 곧장 들어가느라 시선 한 번 주지 않았었다.

‘여기가 이렇게 좋았구나.’

병원을 두고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이제 주언이가 누리지 못할 병원 시설이 하나하나 눈에 밟혔다. 미련이 뚝뚝 흐르는 시선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가자 적당한 온기가 느껴져 패딩 지퍼를 내렸다.

병동 곳곳에 링거를 꽂은 어린아이들이 그득했다. 예전에는 그저 안타깝기만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젠 부러웠다. 그나마 선택받은 아이들이다. 불행을 겪으면서도 최선의 대비를 할 수 있는 곳에 있으니까.

고층에 위치한 1인 특실 병동에 도착했다. 간병인들 외에는 복도에 오가는 사람이 없는 조용하고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혼란스러운 1층과는 별세계로 느껴졌다.

“형!”

“안녕하세요.”

간병인 아주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밝게 인사했다. 인사를 나누고 며칠간 얼굴을 보지 못한 주언이의 상태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어젠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내더니 오늘은 컨디션이 괜찮다고 했다. 얼마 전 받았던 항암 치료를 조심스럽게나마 이겨 내고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나를 흘긋 보더니 걱정스런 말투로 말을 붙여 왔다.

“그나저나 어디 편찮으세요?”

“잠을 조금 설쳤어요.”

“어유. 간병하려면 건강해야 해요. 주언이는 제가 챙길 테니까 저기 보호자 침대에서 눈 좀 붙여요.”

아마 며칠 동안 형에게 골몰하고 있던 내 얼굴을 보고 물은 것 같았다. 아주머니의 말에 주언이도 흘끔 나를 올려다본다. 무언가 말하고 싶지만 간병인 아주머니 때문에 입을 꾹 다무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마 지원이 형에 대해 말을 꺼내고 싶은 듯했다. 역시나 간병인이 교대를 하는 사이, 주언이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형, 지원이 삼촌-,”

“응. 잘 보내 주고 왔어.”

아이의 얼굴에 충격이 번졌다. 주언이의 앞에서는 절대 슬프거나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싶어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도 모자랄 아이에게 죽음과 관련한 어떤 것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형이랑 엄청 친한 삼촌인데. 그치?”

“괜찮아.”

“…응.”

형이 자주 병실에 들른 건 아니기에 주언이가 정을 많이 붙이진 않았으나, 열두 살이면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인지할 나이긴 했다. 세탁해 온 담요를 아이에게 덮어 주며, 은연중에 말을 돌렸다.

“아픈 데는 없지?”

주언이가 휴대 전화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3차에 걸친 항암 치료를 받으며 주언이는 늘 이 병실에 머물렀다. 아직 항암 치료가 꽤 남았지만 3차라도 이 병원에서 맞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특실에서 장기 입원을 하는 호사는 누리지 못할지언정 앞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곳에서 주언이 항암 치료는 받게 할 생각이었다.

“형 잠깐 수납 좀 하고 올게.”

“웅.”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는 주언이는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갑자기 좋은 병실이 아니라 단칸방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주언이에게 할 변명을 열심히 생각하며 수납 창구를 향했다. 친절한 간호사가 나에게 용무를 물었다.

“백주언 환자 내일 퇴원하려고요.”

“네?”

6개월째 장기 입원 중인 아이를 갑작스럽게 퇴원시킨다는 사실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간호사가 되물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설명했다.

“사정이 생겨서요. 다음 항암 치료 맞춰서 입원할게요.”

“아, 잠시만요.”

무언가를 빠르게 입력하고, 주언이의 주민 등록 번호를 재차 물어본 간호사가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다음 항암 치료 일정까지 병원비가 수납되어 있네요. 환불 도와드릴까요?”

“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하자 간호사가 다시 한번 설명했다. 어제 수납 처리가 끝났다고.

‘어제?’

순간 지원이 형이 미리 수납했었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제 수납을 했다니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나는 우선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누가 주언이의 병원비를 수납했을까.

***

밤까지 병실에서 주언이와 시간을 보냈다. 주언이는 제 또래의 친구들에게서 인기 있는 모바일 게임을 즐겨 했는데, 아이를 상대해 줄 사람은 늘 나 하나였다. 게임에는 젬병인 내가 버벅대면 주언이는 언제나 나를 가볍게 이겼다. 시시할 법한데도 항상 게임에 몰두하는 모습이 유독 짠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분명 ‘형이랑 하는 거 재미없어.’ 하며 친구들과 팀을 꾸려 게임을 하러 갔을 것이다.

병원에 오래 머물수록 주언이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가는 것 같다. 또래의 아이들은 키도 크고 이것저것 경험도 하며 조금씩 커 가는 것 같은데, 병실에 갇혀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는 주언이는 점점 어려지는 것 같았다. 괜한 조바심이 일었으나 형으로서 느끼는 섣부른 걱정이리라 자위했다.

야간 타임에 오시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도착하기 전, 잠깐 주언이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되었다.

“형. 자고 가.”

충전기, 편한 옷 등 내 몫의 짐을 챙겨 오지 않은 것을 보고 주언이가 아쉬운 듯 말했다. 답지 않은 어리광을 부리며 내 옷 끝자락을 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나는 주언이의 손을 감싸듯 떼어 내며 말했다.

“미안. 형 내일 일찍 일이 있어서 차 끊기기 전에 가야 해.”

“알겠어.”

서운한 내색을 크게 하지 않는 녀석의 포기가 빠르다. 난 매끈한 주언이의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주언이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이가 먼저 잠드는 것을 확인한 후 발걸음 소리를 죽여 병실을 빠져나왔다. 어둑한 버스 정류장에 기대선 후 휴대 전화를 켜 아르바이트 공고를 살폈다. 병원비가 수납된 건 무언가 전산상의 오류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만약 비서님이 그러셨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셨을 것이고 그 외에는 다른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병원비를 뱉을 각오를 한 나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아르바이트 일을 알아보기로 했다. 다음 항암 치료까지 목돈을 마련해야 한다.

편의점, 피시방 등등 몇 가지 일을 눈여겨보던 도중 멀리서 버스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챘다. 타기 위해 카드를 꺼내며 연석 가까이에 섰다. 버스가 거의 정류장에 도착할 무렵, 옆 차선에서 엄청난 엔진 소리와 함께 검은색 차가 급가속을 해 버스 앞을 급하게 파고들었다.

끼익-.

귀를 찢을 듯한 마찰음과 함께 차가 멈추었다. 누구나 알 법한 외제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기까지 하니 행인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차로 집중되었다. 나도 흘긋 차를 쳐다보았다.

빵.

그때, 차가 경적을 울렸다. 늦은 시각이어서 도로에 다니는 차도 많이 없었다. 무슨 일로 허공을 향해 클랙슨을 울려 대는 걸까 싶었지만, 굳이 그쪽을 살펴보지 않았다. 문제의 차 뒤에 급하게 정차한 버스에 타기 위해 연석에서 내려서야 했기 때문이다.

빵, 빠앙!

다시 경적이 울렸다. 이번엔 제법 길고 여러 번 울려,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차를 흘겨보았다. 이상한 차라 생각하며 지나치는 순간, 차 뒷좌석의 창문이 느리게 내려갔다.

“백나언!”

“……?”

이름 석 자를 부르는 목소리에 우뚝 걸음이 멈추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창문 너머의 어둑한 그림자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다. 그사이 차 뒤에 정차했던 버스가 쌩하니 가 버렸다.

‘막찬데….’

본능적으로 손을 올리며 버스 꽁무니를 쫓아가려는 순간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그제야 가로등의 빛이 스며들어 차의 내부가 보였다. 입이 살짝 벌어지며 걸음이 멈추었다. 아는 얼굴이었다.

“잠깐 타겠어요?”

지원이 형의 하나뿐인 동생. 최기원이 눈을 맞춰 왔다.

***

내가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무턱대고 움직인 것에 놀라 고개를 빼어 기사님의 쪽을 바라보려 하니 최기원이 작게 웃었다.

“집으로 데려다주는 겁니다. 버스가 끊겨서 어쩔 수 없으니까.”

무리하게 버스 앞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놓치지 않았을 텐데. 그의 말에 어폐가 있었으나 정류장에서 걸어야 하는 버스보단 차를 타고 가는 편이 훨씬 편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바람을 완벽하게 차단한 내부는 기분 좋게 따뜻한 공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안녕하세요. 최기원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조금 늦은 통성명이었다. 널찍하고 부드러운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긴장 때문에 줄곧 불안했다. 등을 시트에 기대지 못하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지원이 형은 나에게 회사나 가족 이야기를 자주 하지 않았다. 그런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스트레스였기에 그저 나와 있을 땐 우리의 시간에 집중했다.

그러다 아주 가끔 지나가는 말로 동생에 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지원이 형과는 네 살 터울이라 했으니, 동생은 올해로 스물여덟일 것이다. 나보단 세 살 위인데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있어서인지 스물여덟보단 더 나이 들어 보였다.

형은 최기원을 별로 좋게 언급한 적 없었다. 가끔가다 전화를 할 때에 미친놈이라며 무섭게 욕하는 것도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형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동생이, 형과 사귀었던 옛 동성 애인을 찾아오는 일 이면에 좋은 이유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가 어떻게 나의 얼굴과 이름까지 아는지 궁금해졌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도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어디에 눈을 둘지 몰라 가만히 있으니 옆에서 먼저 말을 붙여 왔다.

“형이랑 오래 만났다면서요.”

그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꾸밈없고 직설적인 표현에 표정 관리를 못 했다. 눈썹을 끌어 올리며 그의 쪽을 바라보니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동자로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과 연애하는 건 철저하게 비밀이었다. 형도 분명 가족을 포함한 누구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려 했으나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은 그의 분명한 목소리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늦은 대답은 무언의 긍정을 의미했다. 그가 천천히 허리를 세워 앉더니 내 쪽으로 가까이 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꽤 오래전부터.”

“지원이 형이 말했다고요?”

되묻자 한쪽 입술 끝을 미세하게 끌어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고 여유로운 움직임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으나, 그의 표정은 무언가 장난을 거는 아이처럼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왜 웃지.’

형이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말을 하며 웃는 모습에서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형 주변을 정리하다 보니 형이 그쪽에게 이것저것 많이 신경 쓴 걸 알겠더라고요.”

빛이 언뜻 든 검은 눈동자가 내가 입은 패딩과 신발, 최신 휴대 전화를 차례로 훑고 지났다.

노골적인 시선이었다. 형이 취향대로 하나씩 사 준 것들이었는데, 아마 20대 중반이 쉽게 구매할 브랜드가 아닐 것이다. 나야 명품은 잘 모르고, 그저 형이 쓰라고 주니까 하고 다녔는데. 지금 최기원의 시선 끝에는 5년 동안 가족의 등을 쳐 먹고 살아온 사기꾼을 보는 노골적인 경멸이 느껴졌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동생 병원비는 제가 수납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상과 다른 말을 꺼내 놓았다. 주언이의 병원비를 수납한 이가 형의 동생이라니. 숙였던 고개를 들자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 있었다. 깜짝 놀란 내 표정에서 흥미를 느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말을 붙여 왔다.

“림프종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게 나을 텐데요.”

마치 오늘 내가 주언이를 퇴원시키려 했다는 것까지 다 아는 사람처럼 말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림프종이라는 병은 세균 감염에 취약했기에 깨끗한 병실에서 지내는 것이 주언이에게 훨씬 좋다. 하지만 장기 입원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주언이의 상태가 안정되는 대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소독과 청소는 하루에 몇 번을 닦아서라도 어떻게든 해결하려 했다.

“네. 그렇긴 한데….”

말끝을 늘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턱 끝을 살짝 들었다.

“병원비를 왜 수납해 주신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그의 얼굴에서 한쪽 눈썹이 움찔 위로 솟았다. 대화의 분위기와 어긋나게 자꾸만 묘한 웃음을 흘리려는 그와의 대화가 많이 불편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던 그가 말했다.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요.”

“…….”

“최지원이 갑자기 죽은 것도 어이없을 텐데. 아픈 동생까지 썩어 빠진 방에서 지내게 되면 힘들잖아요.”

낮고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였으나 담긴 말에는 은근한 가시가 있었다. 형을 최지원이라고 부른 것과 내 방을 썩어 빠졌다고 말한 게 기분 나빴으나 지금은 알량한 자존심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감정을 죽이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만 보았다.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내가 해야 할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추악하기 그지없지만 5년을 만난 애인의 동생 앞에서, 난 내 몫을 생각하고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형이 주언이를 챙긴 것은 연인의 동생이어서다. 물론 정말 고맙고 부담스러워 힘들긴 했으나 그걸 갚겠다는 부채 의식에 시달리진 않았다. 사랑했기에 건네준 호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기원에게는 넙죽 받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뒤늦게 갚겠다는 말을 덧붙이자 그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 아무런 대답 없이 차는 내 자취방을 향해 질주했다.

‘썩어 빠졌다’는 그의 표현이 어울리는 동네에 도착했다. 더는 차가 오갈 수 없는 골목 끝에 다다르자 차는 부드럽게 정차했다. 하늘과 땅 모두 시커먼 어둠에 물들어 사위를 분간하기 어려운 한밤중이었고, 방범용 가로등만이 외롭게 빛나는 곳이었다.

최기원은 고개를 돌려 차창 너머로 동네를 슥 훑어보았다.

그는 아무런 계산 없이 한 행동일 테지만, 그의 시선 끝에 걸린 옅은 혐오감 덕분에 더러운 곳에 동생을 데려가려 한 나를 욕하는 것 같다는 이상한 피해 의식이 들었다.

간간이 불이 들어오는 주황색 가로등 아래엔 몸이 뚱뚱할 정도로 묶여 있는 쓰레기봉투와 그 주변에 마구잡이로 버려진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하필 이 거리에서 유일하게 밝은 가로등 아래가 왜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로 정해진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쁜 벤치나 화분을 뒀다면 조금 나아 보일 텐데.

얼른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고리를 당겼으나 차 문이 잠긴 상태로 열리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달각였다. 하지만 최기원도, 기사님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잠깐 눈을 깜빡인 나는 슬쩍 뒤를 바라보며 최기원이 무언가 행동을 취해 주기만을 기다렸다.

“백나언 씨.”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나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최지원 어디가 좋았어요?”

“예?”

아마 차에서 대화하며 냈던 목소리 중에 제일 큰 대답이었으리라. 그가 던졌던 여러 가지 질문 중에 제일 황당하고 웃긴 질문이었으나 이번만큼은 그의 얼굴에 일말의 웃음기도 없었다.

“…죄송합니다.”

한참을 가만히 있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최기원은 대답 대신 차의 록을 풀었고 그제야 문이 열려 내릴 수 있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편 나는 최대한 빠르게 걸으며 집을 향했다. 정말 이상한 조우였다. 특히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선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는데, 그 탓인지 괜히 불쾌한 두통이 남았다.

원룸 건물에 들어서고 나서, 계단참에 있는 커다란 창으로 골목 아래를 살폈다. 그의 차는 떠나고 그가 있던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으나 괜스레 마음이 찜찜했다.

“어쨌든 고마우신 분이네.”

불을 켠 나는 괜히 밝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나저나 인제 보니 방이 엉망이었다. 지원이 형의 사고 이후로 무엇 하나 제대로 챙긴 것이 없었다. 옷과 이불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눈물 콧물을 닦았던 휴지는 손 닿는 곳에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었다. 서둘러 방을 정리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낮은 밥상을 물티슈로 닦고 접어 세우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깨닫고 손을 멈추었다. 곧이어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지원이 형을 5년 동안 만나면서, 형은 이 집에 온 적이 없었다.

동네가 너무 불결했고, 그 점이 부끄러워 형을 데리고 온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간 나는 형이 자주 들르는 오피스텔에서 지냈고, 이 집은 그저 계약만 되어 있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기원의 차는 망설임 없이 이곳에 다다랐다.

최기원은 나에게 주소를 물은 적이 없는데 말이다.

***

최기원의 모든 말과 행동이 미심쩍었으나 불쾌함을 표할 수도, 터놓고 물을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저 어떻게든 그가 알았겠거니 생각한 나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자리에 누웠다.

며칠간의 마음고생에 자각하지 못한 사이 지쳐 버렸는지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형의 죽음 이후로 1분이 하루 같았다. 그래도 일단 주언이에 대한 걱정은 한시름 덜었다. 다른 무엇보다 제일 다행이었다.

‘일어나, 나언아.’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다. 손길을 향해 볼을 파묻고 싶어 고개를 가까이 가져가 보았다. 귓가에서 낮게 웃는 형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갑작스러운 설움이 복받쳤다.

꿈속에서 형의 손에 얼굴을 묻고 옅게 흐느끼던 나는 미지근한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흐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어느새 찾아온 아침이 방을 환하게 만들었다.

“…….”

꿈에서조차 형의 죽음을 깨달을 만큼, 하루하루 형의 죽음에 적응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형의 품에서 잠을 깰 일은 없을 것이다.

팔을 들어 눈두덩이를 가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뺨을 거칠게 쓸며 꿈에 놓고 온 형에 대한 미련을 지우려 애썼다. 씁쓸한 낯으로 추위에 굳은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 꺼 버린 전기장판의 온기가 어슴푸레 남아 있었다.

오전에는 눈여겨보았던 편의점 아르바이트 면접을 봤다. 대학생의 종강 시기와 맞물려 요즘에는 아르바이트 지원자가 많다고 했다. 내일까지 회신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걸어 나왔다. 한 걸음을 내디디며 편의점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머리가 길어 지저분했다. 옆머리는 귀를 넘기고, 뒷머리는 어깨에 닿을 듯했다. 퀭한 눈은 언제는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붉게 터 있었다. 그러잖아도 마른 편인데 며칠 사이 살까지 더 내려 정말 볼품없었다. 이런 거지 같은 꼴을 하곤 외투는 비싼 것을 걸치고 있다니. 문득 내 옷차림을 살피던 최기원의 묘한 눈빛이 떠올랐다.

이러다가 일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오후에는 주언이와 함께 있으려 했는데, 다른 곳에 아르바이트 면접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바람에 귀 끝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정처 없이 동네를 걷던 나는 구인 공고를 붙여 놓은 빵집에 무턱대고 들어갔다.

자동문이 열리자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순식간에 입가에 침이 고였다. 이제야 정말 물 외에는 무언가를 제대로 먹은 적이 없다는 게 실감 났다. 나는 빵으로 돌아갔던 시선을 얼른 주인에게 맞추었다.

“아르바이트 면접 보려고요.”

“아. 저희 이미 뽑았는데, 저 종이를 안 뗐네요!”

직원이 머쓱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이 식빵 한 봉지만 사고 나왔다. 밝고 선명한 인상을 주는 것이 면접에 유리한 것을 알지만, 요즘은 맑게 웃는 방법을 잊었다. 오늘의 소득은 0이다. 아, 빵 한 봉지를 샀으니 –4,800원이 되어 버렸다. 나는 피자 빵처럼 맛이 진한 빵을 좋아했지만, 비슷한 가격에 몇 배나 양이 많은 우유 식빵을 사야 했다.

‘지지리 궁상이네.’

집에 돌아와 식빵을 뜯어 먹었다. 며칠 만에 제대로 하는 식사라 그런지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정신없이 한 개를 다 먹고, 하나를 더 꺼내어 반쯤 뜯어 먹던 중, 전화가 울렸다.

순식간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큰일이 아니면 전화를 잘 하지 않는 간병인의 전화였다. 전화기를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외투를 챙겨 바로 일어섰다.

-열이 많이 나요. 해열제 투여 시작했는데 잠깐 오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주언이가 아프다는 연락이었다. 아이는 정상인보다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지기에 행여 감기에라도 걸린 것이라면 치명적이었다.

며칠 전 많은 사람이 오갔던 장례식장에 간 것이 화근이었을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구석구석 얼어 있는 골목을 빠르게 빠져나와 도로변에서 손을 흔들었다. 빈 차 표시가 없는 택시가 쌩하니 지나갔다.

휴대 전화로는 콜택시를 부르고 눈으로는 도로 위의 모든 차를 샅샅이 살폈다. 배차에 실패했다는 메시지가 떠, 다시 호출 버튼을 누르는데 얼어붙은 손끝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미약한 짜증이 일어 입술을 짓씹었다.

끼익.

그때 SUV 한 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인도 쪽에 가까운 창문이 열리고, 운전석에 앉은 최기원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제와는 색만 같고 디자인은 전혀 다른 차였고 기사 대신 그가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그는 내 쪽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을 걸었다.

“급해 보이네요.”

“……네.”

대충 대답한 뒤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택시는 최기원의 커다란 차에 가려진 나를 못 보고 지나쳤다. 그때 차 안에서 최기원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안 탑니까?”

바보냐는 듯 나를 재촉하는 질문에 홀린 듯 문을 열고 올라탔다. 우릉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로 차의 엔진 진동이 느껴졌다. 그는 사납게 차선 변경을 하며 전혀 여유가 없는 차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지원이 형이 모는 차는 과장을 조금 보태어 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잊을 정도로 부드럽고 완만했다. 그러나 그의 검은 SUV는 부딪힐 것처럼 다른 차에 바짝 붙으며 공격적으로 주행했는데, 흔들리는 조수석에 앉아 있으려니 어쩔 수 없이 형 생각이 났다.

그는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리며 물었다.

“어디로 가요?”

“병원으로 가 주세요.”

수억이 넘는 차를 운전하는 그를 택시 기사처럼 대하는 기분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병원으로 질주하고 있으나 1초마다 속이 끓고 심장이 쿵쿵댔다. 물론 단순히 열만 나는 건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허둥대면 주언이도 그 분위기를 감지하고 불안해했기 때문에 무조건 침착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의 상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건 언제나 어려웠다. 주언이의 위기와 고통이 나에겐 매일 새롭게 겪는 고난이었다.

그때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내 손을 덮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더니 엄지를 가볍게 건드리고 빠져나갔다.

“피 나요.”

고개를 떨구니 그의 말대로 생살이 드러난 엄지손톱 옆에 새빨간 피가 고여 있었다. 그의 시선은 전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건넸다. 소재가 부드러운 밝은색 손수건이었다.

피를 닦기엔 아까워 그냥 가만히 쥐고만 있자, 그는 다시 손을 뻗어 손수건으로 내 손을 덮어 꾹 쥐어 버렸다. 붉은 피가 옅은 무늬의 천 사이로 번져 갔다.

여전히 그의 속내를 읽기 어려웠으나 적재적소에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것은 진실이었다. 나는 뒤늦은 감사 인사를 남겼다.

“감사합니다. 지나가는 길이셨나 봐요.”

“아니요. 백나언 씨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태연한 대답에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직진 차선에 서 있다 갑자기 좌회전 차선을 파고들었다. 뒤에서 클랙슨이 짧게 울렸다. 신경질적으로 쫓아 붙을 법한데도, 뒤차는 그의 차에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었다.

“하마터면 어긋날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저를 왜….”

“위스키 좋아해요?”

“…….”

“와인 쪽인가?”

술을 즐겨 하지 않았기에 어느 쪽도 아니었다. 난 자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 못해요.”

“최지원은 술 좋아했는데. 같이 안 먹었어요?”

무례한 질문에 목이 꽉 막혔다. 그의 말마따나 지원이 형은 술을 즐겨 했다. 오피스텔의 술 저장고에는 늘 품질 좋은 양주가 가득했다. 형이 호박색의 액체를 홀짝이는 동안 나는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커피를 내려 옆에서 함께 홀짝였다. 형은 웃으며 내 커피 잔에도 얼음을 동동 띄워 주곤 했다.

“같이 한잔해요.”

최기원은 핸들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병원으로 급하게 가는 내 표정이 누구보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텐데도, 그는 놀이터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 초등학생처럼 신이 나 보였다. 나는 형에게 골몰 되었던 상념에서 겨우 빠져나와 성마르게 대답을 남겼다.

“술을 마실 여유가 없어서요.”

“여유? 할 일 없는 휴학생이 여유가 없다고요?”

“주언이가 아프다고 해서 급하게 가는 길입니다.”

“알아요. 그런 표정으로 병원에 갈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마찰음과 함께 차가 정차했다. 차로 30분이 걸리는 거리인데, 그의 차는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병동 앞에 도착했다. 그의 오만한 대꾸에 내 표정이 가라앉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곧장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 말은. 어차피 당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밖이잖아요. 치료는 의사에게 맡겨요.”

궤변이었다. 나는 그가 던진 제안에 대답 대신 감사 인사를 뭉뚱그려서 남겼다. 최기원의 무례한 태도나 말투는 자꾸만 지원이 형을 고프게 했다. 더군다나 그와 왜 사적인 술자리를 가져야 하는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

덜컥, 덜컥.

차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한쪽 손으로 제 턱을 문지르며 앞만 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금 지끈대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문 좀 열어 주세요.”

그는 시동을 끄지도 않은 상태였다. 여차하면 출발할 것만 같아 나는 다시 한번 문고리를 만졌으나 무소용이었다. 결국 나는 눈썹을 끌어 내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저번에도 그렇고…. 설명을 좀 해 주시면 좋겠어요. 저희가 왜 술을 마셔요.”

여전히 그는 대답이 없었다. 잘 빚어진 돌멩이를 곁에 두고 말을 걸어도 이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형에 대해 이야기 나눌 사람이 필요한 거예요? 형 비밀 같은 거 제가 알까 봐요?”

내 말에 그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삐뚜름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저 표정만 보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받혔다.

도대체 왜 자꾸 지원이 형 이야기를 꺼낼 때 기분 나쁘게 웃냐고 그를 향해 한마디 하려는 순간, 최기원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제 어두운 밤에 보았던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빛도 들지 않는 짙은 흑색이었다. 그런데 햇볕이 부드럽게 차창을 통과하는 지금, 그의 홍채는 옅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검은 머리와 짙은 눈썹에 확연히 대비되는 채도의 눈동자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그는 그대로 한쪽 눈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술 먹자는 말에 씨발 이유가 필요해요? 설명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제안입니까?”

“…….”

“내가 마시고 싶으니까 마시자는 거잖아요.”

나른한 목소리 끝에 미약한 짜증이 묻어 나왔다.

뭐지, 지금 욕한 건가? 분명 쌍욕을 들은 것 같은데.

황당하다 못해 조금은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당장 주언이를 책임지고 있는 건 최기원이었다. 그의 성질을 긁는 것이 나와 주언이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으리란 걸 안다. 나는 여전히 문고리에 손을 올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손으로 당겨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결국 그가 원하는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

“마셔요.”

달칵.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최기원은 언제, 어디서 만나 어떻게 마실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려서는 나를 내버려 두었다. 나도 될 대로 되어라, 하는 마음이었다.

말하지 않은 집 주소를 꿰뚫어 알고, 병원에 급하게 가야 하는 나를 태우러 왔던 그는 왠지 내 용무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

주언이는 해열제를 맞고 안정을 찾았다.

아직 붉은 기운이 얼룩덜룩 남아 있는 하얀 몸뚱이를 내려다보던 난 작은 한숨과 함께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을 들어 눈가를 덮자 서늘한 긴장에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해열제가 금방 듣는 것을 보니 주언이에게 별다른 감염 소견은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린 난 문득 벽시계를 살폈다. 병실에 도착한 지 3시간이 지나 있었다. 간병인 아주머니께 인사를 하며 패딩 점퍼를 팔뚝에 걸었다. 내가 자고 갈 줄 알았는지 아주머니가 눈을 크게 뜨며 벌써 가시냐고 물어 왔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붕 뜬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네. 제가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해서요. …주언이 잘 부탁드립니다.”

잡힌 면접 일정은 없었으나, 허접한 핑계를 대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주언이의 컨디션이 나쁠 때 녀석을 병실에 두고 나온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최기원이 건넨 호의에 고개 숙일 수밖에 없던 순간과 나를 빤히 쳐다보던 회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도망치듯 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고, 보폭이 넓어졌다. 1층 로비를 빠져나올 때는 거의 뜀박질과 진배없는 속도였다. 챙겨 나온 패딩을 손에 든 채로 바깥을 살폈다. 다급한 시선은 곧장 최기원이 정차했던 곳으로 향했다.

“…….”

아찔하게도 그 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세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내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아니면 일을 보고 온 그가 때맞춰 이곳에 차를 세운 것인지 몰라도 그는 나를 내려 주느라 정차했던 그곳에 있었다.

똑똑.

차 가까이에 가 창문을 두드리자 대답 대신 차의 잠금이 풀렸다. 난 조수석에 앉으며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계속 여기 있었던 건가.’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키는 최기원을 곁눈질로 슬쩍 살핀 나는 괜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마가 보이도록 올린 검은 머리카락과 목 단추를 푼 셔츠 차림은 오전과 똑같았다.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지 않은 건 피차 쌍방이었다. 그가 얼마를 기다렸든 내가 이렇게 괜히 미안해할 필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자꾸만 눈치가 보였다.

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나서도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나는 창밖만 바라보다 침묵에 못 견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오래 기다리셨나요?”

“네.”

기다렸다는 듯 받아친 싸늘한 대답이 불편했지만, 딱히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끝내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은 난, 자존심을 부리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자 문득 형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가 짧아진 만큼 겨울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12월은 나에게 참으로 소란스러운 계절이었다. 부모 중 하나 있던 아버지마저 동생과 나에게서 도망쳐 버린 달이었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원망만 하며 지내 왔는데, 공교롭게도 12월에 처음으로 지원이 형을 만났다.

그 당시 난 추위를 피하기 좋은 작은 선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었고 형은 사귀던 여자와 처음 그곳을 찾았다. 이후 몇 번 더 이곳을 찾아오는 그와 자연스레 면을 텄고, 얼마 뒤 그는 홀로 선술집의 작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헤어짐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왔다는 형은 나에게 말동무를 해 달라고 했다. 감정이 섞여 든 건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무슨 장난인지 형은 12월에 다시 나를 떠났다. 하필 내가 겨우 마음을 열기 시작한 12월의 끝자락에.

나의 한숨 소리에 그가 이쪽을 잠깐 바라보는 듯한 인영이 느껴졌다. 나는 바깥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런 말을 꺼내 놓지 않았다.

어느덧 최기원의 차가 모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서울의 모든 지리를 자세하게 알고 있진 않지만, 그의 차가 술집이나 바가 있을 법한 동네가 아닌 한적한 주거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건 알아차렸다. 점점 사위를 두리번대는 빈도가 늘어났다.

“……?”

내게 서울의 이미지는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과 높고 첨예한 빌딩 숲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건물들 대신 커다란 조경수와 단독 주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서울에도 이러한 곳이 있구나 싶게, 띄엄띄엄 놓여 있는 집은 대개 2층 정도의 주택이었고 주택 주변은 세련된 정원이 감싸고 있었다.

차는 그러고도 한참을 달렸다. 언제쯤 도착할까 싶은 순간, 옅은 하늘색과 먹색으로 꾸며진 단독 주택의 차고로 들어섰다. 몸이 바짝 긴장했고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차를 놓고 술을 마시러 가려 하는 건가, 아니면 잠깐 집에 들르는 건가.

그는 다소 거칠지만 능숙하게 주차한 뒤 안전벨트를 풀었다. 문을 연 그가 긴 다리를 바깥으로 내놓고 내려서기 직전, 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덥석 질문했다.

“도착한 거예요?”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불시에 눈이 마주쳤고 눈을 피할 타이밍을 놓쳤다. 잡아먹을 것 같은 회색의 눈동자에 놀라, 괜히 아직 풀지 못한 가슴 앞쪽의 안전벨트를 꾹 쥐었다. 천천히 시선을 돌린 그는 팔을 뻗어 뒷좌석에 잘 개켜 둔 코트를 꺼내 들었다. 최기원은 바깥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내려요.”

고등학생 시절 갚지도 않을 돈을 빌려 가는 양아치 같은 말투였다. 나도 지지 않기 위해 괜히 미간을 옅게 찌푸리고 날 서게 받아쳤다.

“여기 최기원 씨 집이죠?”

“네.”

“저희 여기서 술 마시는 거예요?”

바나 이자카야 같은 곳 가는 거 아니었나요? 목소리가 빨라지며,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우수수 질문이 쏟아졌다.

내리려던 그가 ‘하’ 하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앞에서 종종 보였던, 지원이 형을 언급할 때처럼 기분 나쁜 웃음은 아니었고, 그야말로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진 듯 자연스럽게 웃었다.

“백나언 씨가 언제 나올 줄 알고 바를 예약해요?”

예리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그는 나를 기다렸나 보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일전보다 사그라든 목소리로 어깃장을 놓았다.

“그래도 집은 좀 그래요. 조금만 가면 그냥 술집도 많은데.”

“뭐가 그런데?”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내가 최기원의 사고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는 건지. 그는 정말로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낯에 언뜻 짜증이 어렸다 사라졌다. 그는 닫았던 차 문을 다시 열며 낮게 읊조렸다.

“보통은 내 집에 초대하면 굉장히 고마워하던데.”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린 듯했으나 최기원이 차 문을 세게 닫는 소리에 묻혔다.

순간 차 안으로 불어온 겨울바람 때문에 그가 자주 뿌리는 특유의 싸한 향수 향이 물씬 풍겨 왔다. 그리고 그 향만큼 싸늘한 대답에 눈만 끔뻑이던 난 그를 따라 내렸다.

최기원은 코트를 팔에 건 채로 앞서 걷고 있었다.

지원이 형과 한배에서 태어난 것이 의심스러울 만큼 너무나도 제멋대로인 사람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렵게 구는 그의 태도에 열불이 났지만, 속의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칠 순 없었다. 그에게 오늘 너무나 큰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

없이 살 땐 타인에게 호의를 받아 본 적이 없었기에 몰랐고, 지원이 형과 만날 때에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건네진 호의였기에 순수하게 미안하고 고맙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건넨 호의는 보이지 않는 목줄 같아, 자꾸만 속에서 차오르는 감정과 혀끝에 맴도는 말을 죽이게 했다. 그가 착해서 주언이를 도와준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부쩍 의기소침해진 난 앞서 걷는 최기원의 발을 바라보며 걷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웅장한 집을 보자마자 눈이 크게 떠졌다.

차고 쪽에서 사선으로 바라볼 때도 느꼈으나, 이 집은 한 편의 작품 같았다. 흔하지 않은 모양으로 지어진 이층집은 전체적인 색과 분위기가 영화에서나 나올 법했다. 단순히 돈을 써서 휘황찬란하게 지은 게 아니라 곳곳의 소품과 자재에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보통은 내 집에 초대하면 굉장히 고마워하던데.

그가 왜 그런 대답을 내놓았는지, 한 편의 걸작 같은 집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정원 곳곳의 꽃과 의자, 놓여 있던 조형물들에 하나하나 시선을 두며 걷다 보니 자연스레 아까 그의 말투에 받았던 상처가 잊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느라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나 보다. 커다란 현관문을 붙잡고 있는 그가 나를 삐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그가 잡은 문 사이로 쏙 들어갔다. 바깥에 신경 쓴 만큼 집 내부도 훌륭했다. 바깥과는 달리 안은 차분하고 어두운색이 주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눈이 닿는 곳마다 자연스럽게 놓여 있는 커다란 그림과 화병, 원목 의자나 테이블 등은 각각 개성 있는 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게 하나도 거슬리지 않고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른 고개를 숙이자 편하지만 깔끔한 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일회용 부직포 슬리퍼를 비닐에서 꺼내 바닥에 놓아 주었다. 과한 호의에 내 몸도 굽신대며 아래를 향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신으세요.”

“감사합니다.”

언뜻언뜻 무늬가 드러나는 바닥의 대리석은 너무나 매끄러워 사람의 인영이 살짝 비치기까지 했다. 행여 내 발에 묻은 먼지가 깨끗한 바닥에 자국을 남길까 얼른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그녀는 나와 최기원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최기원이 미리 기별을 넣었는지, 우리의 도착 시각에 알맞게 안줏거리가 식탁에 한가득 마련되어 있었다.

“앉아요.”

최기원이 정한 자리에 앉자, 식사 맛있게 하시라며 인사를 남긴 그녀가 다이닝룸을 빠져나갔고 한참 뒤, 이 집의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최기원은 다이닝룸 안쪽으로 걸어가 냉장고 속에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눈앞의 음식들을 보니 순식간에 허기가 졌다. 오늘 빵을 먹다 만 것이 섭취한 음식의 전부였다는 걸 깨닫자마자 배가 쓰리도록 고파 왔다. 이런 맛있는 음식을 미리 준비하고 있던 것도 모른 채 그에게 다른 데서 먹자고, 집은 불편하다고 말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아깐 죄송했어요. 정말 웬만한 술집보다 훨씬 나아요.”

“먹어요.”

최기원은 내 잔에도 얼음을 담고 술을 따랐다. 하지만 잔을 맞부딪히거나 살갑게 눈을 마주치는 행동은 없었다. 가볍게 손목을 꺾자 호박색의 술이 매끄럽게 넘어갔다. 나는 눈치를 보다 잔을 쥐고 한 입 머금었다.

소량을 머금고 있던 입속이 홧홧하게 느껴질 만큼 독한 술이었으나 앞에 놓인 안주와 잘 어울려 그렇게 넘기기 힘들지 않았다.

조금씩 수저질이 빨라졌다. 내가 음식을 빠르게 먹는 동안 그는 음식에 손을 대기보단 술을 더 많이 마셨다. 그러다 나 혼자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 슬쩍 속도를 늦출 때면 그제야 그는 적당량의 음식을 앞접시에 덜고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붉은 양념과 먹다 만 고기 조각 등이 놓인 내 앞접시는 그의 것과 달리 빠르게 지저분해졌다. 그가 조금 썬 고기를 씹으며 가볍게 말을 걸었다.

“동생은 괜찮아요?”

“네. 안정되는 것 보고 나왔어요.”

“다행이네요.”

처음으로 느껴 보는 최기원의 다정한 말투였다. 그 부드러움에 마음에 세웠던 빗장이 느슨해졌고 자연스레 형이 떠올랐다.

“형도 그렇고, 최기원 씨도. 두 번은 없을 천운이라 생각될 정도로 저에게 큰 도움을 주셨어요.”

최기원은 대답 대신 양주 병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내 잔에는 술이 잔뜩 남았는데, 그가 내 술잔 쪽으로 양주 병을 가져갔다. 약간 기울이기만 한 채로 술을 붓지 않고, 반 넘게 남아 있는 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배가 고파서….”

최기원이 몇 잔을 연거푸 마시는 동안, 나는 음식에 정신이 팔려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않았다. 상대와 술을 마시는 속도를 맞추는 건 주도 중 하나였다. 얼른 잔을 쥐고 술을 벌컥벌컥 마셔 비웠다. 그는 내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동그랗게 녹은 얼음 위로 독한 양주를 다시 부었다.

술이 훑고 지나간 목구멍이 뜨겁고, 부른 배 때문에 나른한 기운이 빠르게 올라왔다. 음식 때문에 공기가 후끈해져서 그런가, 귀뺨도 새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나는 손등으로 귀와 볼을 꾹꾹 누르며 말을 건넸다.

“지원이 형도 늘 이렇게 독한 양주를 마셨어요. 저는 술을 잘 못해서 이렇게 많이 마셔 본 적은 없는데 생각보다 마실 만한 것 같아요.”

“보기보다 말이 많네.”

취기를 빌려 어색함을 조금 풀어 보려 한 것인데, 차가운 일갈에 나는 입술을 작게 삐죽이며 입을 닫았다. 최기원은 손안의 잔을 가볍게 돌린 후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고 행동도 과하지 않았으나 그가 술을 마시는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아무리 같이 마셔 내려 해도 더 마셨다간 집에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취할 것 같았다. 끅, 끅. 볼썽사납게 딸꾹질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잔을 내려놓은 최기원이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든 갚겠다고 했잖아요.”

“예?”

“구체적으로 어떻게 갚을 생각인데요?”

잠깐 그의 질문을 멍하게 곱씹은 뒤에야 그가 말하는 것의 주어가 주언이의 병원비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얼른 표정을 정돈하고 믿음을 줄 만한 성실한 얼굴로 대답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얼마만큼의 신뢰를 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당장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최대한 빨리 갚겠습니다. 동생 열만 내리면 병실은 등급이 낮은 곳으로 옮기고요. 금액이 더 커지면 제가 갚기에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푸흡.”

그때, 최기원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맥락 없이 터진 그의 웃음에 내 말이 뚝 끊어져 버렸다. 그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정돈하면서도 자꾸만 실실 웃음을 터뜨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내 입꼬리가 조금씩 굳어 갔다. 웃는 낯에는 침 못 뱉는다는데, 최기원의 웃음은 사람을 정말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냅킨을 구겨 식탁 한편에 내려놓은 그가 빈 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튕기며 물었다.

“나랑 만날래요?”

느슨하게 풀어졌던 긴장의 끈이 다시 팽팽하게 조여지며 숨이 막혀 왔다.

탁, 탁.

그가 손가락으로 잔을 두드리는 소리가 다이닝룸을 공허하게 울렸다. ‘만나자.’라니. 한 번에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다. 겨우 자리를 지키고 앉아 그의 말을 곱씹고 있는 나를, 그가 턱을 괴고 바라보았다. 얼른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을 내놓았다.

“저 지원이 형이랑 5년 만났어요.”

최기원이 가만히 눈을 맞추기만 하기에 한 번 더 설명했다.

“그쪽 형이요.”

“잘됐네.”

그러자 그가 낮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당황을 집어삼키자 술기운이 점점 올라왔다. 나는 가까운 곳에 놓인 물 잔을 들어 물을 급하게 들이켰다.

한눈에 다 담지 못할 만큼 커다랗고 외딴 주택, 그리고 최기원과 단둘이 마주한 채로 술을 마시고 있는 지금 이 자리가 갑자기 앉아 있기 버거울 정도로 힘겨워졌다.

꿀떡, 꿀떡 소리가 나도록 물을 넘긴 나는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최기원의 눈치를 살폈다.

“뭐가 잘됐다는 거예요?”

“내가 저번에도 묻지 않았나? 최지원 어디가 좋았냐고.”

어쩐지 숨통이 조여 오는 것만 같아 목 주변을 애꿎게 만져 댔다. 최기원은 열이 잔뜩 오른 내 귀와 목, 턱, 그리고 입술까지 느리게 시선을 옮겼다.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눈빛은 어디에서부터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 눈치 없는 나조차도 시선의 흐름을 파악할 정도로 분명했다.

“얼굴? 돈? 뭐 그런 게 좋았을 텐데. 나랑 다 비슷하지 않아요?”

최기원이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리더니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올려다본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치, 애교를 부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결국 난 사납게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피했다.

‘미친 사람인가.’

형이랑 사귀었던 사람한테 사귀자고 제안하는 새끼는 미친놈 맞고, 그렇기에 최기원의 말은 죄다 실없는 헛소리였다. 그는 내 표정 변화가 재밌다는 듯 자꾸만 입꼬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리며 무방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취하면 가볍게 구는 사람인가.’

미약한 불쾌감과 함께 취하셨냐고 되물으려는 순간 최기원이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나랑 연애하면 백주언 치료 책임져 줄 수 있는데. 그 돈 안 갚아도 된다고.”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동생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나는 굳은 얼굴로 그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최기원의 입술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으나, 식탁 위의 어두운 조명을 담고 있는 눈은 여느 때와 달리 싸늘한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어쩐지 맹수의 한 종류를 떠올리게 하는 안광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느껴졌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다.

“아니요. 최대한 빨리 갚겠습니다. 그리고 주언이 괜찮아지는 대로 퇴원할 거예요.”

그와 말을 섞을 때마다 묘하게 그가 사회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최기원의 사고방식은 보통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주언이의 병원비가 걸려 있다고 한들, 5년을 만난 연인의 동생과 덥석 연애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에둘러 거절 의사를 표하며 그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앞으로의 계획을 덧붙였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일도 빨리 구할 거고, 급여 가불되면 당장 최기원 씨 돈부터 갚겠습니다.”

“그래요. 애써 봐요.”

나의 대답에서 함의를 읽은 듯한 최기원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나간 듯한 제안을 툭 던져 놓던 그의 태도와는 상반되게,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떨어졌다.

그 대화 이후로 난 급격하게 입맛을 잃었고, 잠깐이었지만 훈훈했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최기원은 일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두고 음식과 술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 나가는 최기원을 보니 그 묵직한 불편함을 느낀 사람은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잘 먹었습니다.”

결국 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아직 식탁 위에는 많은 음식과 술이 남았고 최기원은 태연하게 식사 중이었으나 나는 의자 뒤에 걸어 둔 외투를 챙겨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등 뒤에서 최기원이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나의 뒤를 따라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친놈.’

쌀쌀한 겨울바람을 정통으로 맞으니 더욱 정신이 또렷해지며 최기원의 제안에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조금 거칠어진 발걸음으로 커다란 정원을 지나 대문을 밀었다. 하지만 커다란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디 잠긴 곳은 없어 보이는데….

당황한 내가 대문을 여기저기 만지는 사이, 뒤에서 손을 뻗은 그가 대문 옆의 작은 화면에 검지를 찍으니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저도 모르게 고맙다고 대답할 뻔한 난 열린 문을 밀며 먼저 밖으로 튀어 나갔다.

집 앞의 도로에는 시동이 걸린 차 한 대가 대기 중이었다.

“타고 가요.”

“…….”

“여긴 택시 안 와요.”

미묘한 거부감에 목뒤를 주무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만나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기에, 이런 소소한 호의도 무시하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지금은 막차도 다 끊긴 데다 여긴 대중교통으로 오갈 수 없는 외진 곳이었다.

서울인지 헷갈릴 정도로 한적한 이 동네는 밤이 되자 너무나 어둑해졌고 꽝꽝 얼어붙은 먼 길을 돌아갈 생각을 하니, 눈 딱 감고 한 번만 비굴해지자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것이 그에게서 마지막으로 받는 호의라 다짐하며 시트까지 따끈하게 달아오른 차에 올라탔다. 차가운 밤을 질주하는 차창에 기대어 술기운에 몸을 늘어뜨렸다. 긴장이 풀리며 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한밤중에 도착한 방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계단참에 공지 사항이 붙어 있었던 게 기억났다. 한겨울에는 보일러가 동파될 수 있으니 최소한의 온도로라도 방을 데우라는 내용이었다.

괜히 자존심을 피우다 더 큰돈을 물어낼세라 나는 보일러 전원의 붉은빛이 꺼질락 말락 한 부분을 찾아가며 손으로 레버를 돌렸다.

그럼에도 좁은 방에 켜켜이 쌓인 추위는 가시질 않아 결국 입고 온 패딩 그대로 누워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잤다. 다행히 최기원과 마신 독한 술이 쉬이 깨지 않아 생각보단 쉽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몸 곳곳이 얼음처럼 끽끽 뭉쳐 있었다. 해가 늦게 뜨는 겨울에는 게을러지기 십상이었으나 창을 열어 환기하고 서둘러 씻고 나왔다. 이제 더는 슬픔이나 무기력함에 빠져 녹아 있을 수 없었다. 나 혼자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다. 주언이가 와야 할 방이기에 묵었던 먼지나 쓸데없는 짐 따위를 싹 정리할 생각이었다.

쌓아만 두고 입지 않았던 옷은 모두 세탁을 돌렸다. 이사 온 뒤 방치해 둔 전공 책과 간단한 살림살이에는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쓰지 않는 수건에 물을 묻혀 물건과 바닥을 정신없이 닦았다.

“내 인생 누가 챙겨. 내가 챙겨.”

길거리에서 들어 본 촌스러운 뽕짝 음에 괜히 가사를 붙여 흥얼댔다. 막상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의외로 힘이 났다. 벅벅 닦여 가는 묵은 때를 보며 괜히 비장해졌다.

형이 베풀어 준 모든 것들을 이제 더는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처음에는 조금 막막했지만, 이제 그 조급함과 암울함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단단한 원동력이 되어 줄 것이다.

-사랑은 받아 본 적 있는 사람만 줄 수 있어요.

대학교 1학년 1학기 심리 관련 교양 수업에서 한 교수님이 했던 말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 버린 지 몇 개월 되지 않았던 때라 유독 그 말이 아프게 들렸다. 어떻게든 동생과 잘 지내 보려 했으나 점점 떨어져 가는 생활비와 어린 동생의 투정에 유독 짜증이 치밀고 속이 답답했던 시기였다.

내 마음이 말랑하지 못하고 퍼석해져 자꾸만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건, 지긋지긋한 가난을 물려주다 못해, 낳으라고 한 적도 없는 동생까지 버려 버리고 도망쳐 버린 아버지 탓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나는 누구에게도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없겠구나 하는 패배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5년을 동고동락했던 연인의 죽음이라는 큰 시련 앞에서 이토록 빠르게 일어설 수 있는 건,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도 사랑이라는 걸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이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순수하게 나에게 사랑을 퍼부어 준 형에게 고마웠다.

‘형도 내가 방에 처박혀서 울고 있는 것보단 이렇게 움직이는 걸 좋아할 거야.’

그렇게 시작한 청소는 아침을 거르고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끝이 보여 갔다. 뒤죽박죽 놓였던 물건들을 차곡차곡 용도에 맞게 정리하니 이제야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잠깐 숨을 고르며 깔끔해진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몰두했던 일이 끝나고 나자 이제야 허기가 졌다. 저번에 사 놓았던 식빵을 팬에 구워 늦은 아침을 해결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런데 현관문 너머의 바깥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들렸다. ‘여기야?’ 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쿵쿵.

그리고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백나언 씨 집에 있어요?”

둔탁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 사이에 나를 찾는 질문이 끼어들었다. 집주인인가 싶었다. 아직 월세를 낼 때까지 기한도 남았는데 뭐가 이렇게 급한가 싶었다.

“네? 누구세요.”

걸쇠는 걸고 문을 열 걸 그랬나. 잠깐 고민이 스쳤으나 너무 다급한 노크 소리에 이미 문은 성마르게 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덩치가 큰 두 남자를 보자마자 나는 좋지 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백나언 씨 맞아요?”

“그런데요. 누구세요?”

긍정은 했으나 괜히 목이 메말랐다. 떨리는 손으로 옷 끝자락을 살짝 쥐며 손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식은땀을 훔쳤다.

“백경철 아드님이시고?”

“…….”

잊고 살고 있던 이름을 낯선 이가 경멸에 찬 어조로 불러 젖혔다. 무언으로 확신을 거듭한 둘은 좁은 현관으로 나를 떠밀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

그들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고 큰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저 나의 뺨 몇 대를 가볍게 두드리고, 뒷덜미를 세게 쥐었다 놓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나직하게 씹어뱉은 말은 그 어떤 것보다 공포였고 파괴적이었다.

“애매한 새끼들이 그나마 쥐고 있던 돈 한 번에 날리는 게 주식이라면, 버러지 새끼들이 자식 몫까지 날려 버리는 게 노름이지. 도박.”

“…….”

“빨리 원금이라도 갚아야 네 동생 장기까지 떼일 일은 없을 거야.”

“저… 동생은 아파서,”

“알어, 새끼야. 동생은 너 다음이다. 항암 치료 받은 장기보다야 튼튼한 쪽이 낫지.”

동생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동정심이라도 들게 하려 말을 꺼냈다. 그러자 둘 중 덩치가 조금 더 큰 이가 손바닥으로 내 등을 세게 문질렀다. 위로인지 협박인지 모를 무거운 손짓이었다.

“택도 아니게 특실에서 장기 입원 중이던데. 돈이 어디서 났냐?”

변색되어 버린 벽지와 테이프가 붙은 누런 장판을 눈으로 훑은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나에게 되물었다.

“쓸데없는 곳에 돈 쏟지 말고 내 돈부터 갚아라, 아가야.”

“……아버지 일인데 왜 저한테 그러세요.”

“백경철이는 이제 더 돈 나올 구멍이 없거든.”

아버지를 이미 팔아넘긴 것인지, 죽인 것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말이었다. 속이 울렁거려 손바닥으로 이마와 뺨을 마구 문질렀다. 아버지의 생사가 불확실한데도 당장 그가 걱정되기보단 원망스러워 죽을 것 같았다.

비분과 허탈에 숨만 시근덕거렸다. 떠났으면 그냥 내 인생에서 영영 꺼져 버릴 것이지, 이렇게 끝까지 우리를 물고 늘어지다니. 당장이라도 아버지라는 놈부터 죽여 가죽까지 싹싹 써도 된다며 줘 버리고 싶었다.

“동생 앞에서 망신당하기 싫으면 어여 갚아.”

두 남자는 구둣발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 떠났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당장 주언이를 데리고 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안락하게 꾸며져 있던 공간이, 흙 발자국이 가득한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그래요. 애써 봐요.

그리고 바로 어제, 최기원이 미소 지으며 나에게 건넸던 목소리가 귓구멍으로 치밀어 올라왔다. 애써 보라는 그 말이 너무나 내 상황과 알맞다. 나는 오늘도 참으로 애쓰며 이곳을 청소했고 그 끝은 이토록 처참했다. 최기원의 호의에 괜한 자존심을 내세우며 팔자에도 없는 ‘갚겠다.’는 말을 뱉은 나 자신이 너무나 가소로워졌다.

애를 쓰는 것과 실제로 가능한 것은 다르다. 끝없는 불안이 분노에 끓었던 마음을 파랗게 얼려 갔다. 무릎을 세워 앉은 나는 그대로 이마를 묻었다.

사채업자들이 떠난 후 난 곧장 주언이의 병실로 왔다. 아무런 언질 없이 저녁에 갑작스레 병원으로 온 나를 보고 간병인 아주머니와 주언이는 꽤 놀랐다. 하지만 이내 아이는 큰 눈을 반으로 접으며 맑게 웃었다. 왜 왔냐는 물음에 매끈한 뒷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 말았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는 아이의 귀 끝과 목뒤가 붉었다.

“…잖아?”

“…….”

“형?”

나를 조심스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주언이가 무언가 말한 것 같은데 전혀 듣지 못했다. 녀석이 슬쩍 내 눈치를 한 번 보곤 다시 조그맣게 말을 걸었다.

“아니, 블루베리 주스 가져다 달랬는데 이거 물이라고.”

“아, 미안해.”

방금 있었던 일에서 아직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간병에 집중하지 못했다. 허둥지둥 냉장고를 열어 주스를 다시 가져다주자 주언이는 고개를 젖혀 달큼한 주스를 들이켜면서도 내 눈치를 살폈다. 평소답지 못한 형의 모습에 주언이도 자꾸만 주변을 의식하는 듯했다.

아이가 잠깐 수학 문제집을 푸는 사이 은행 애플리케이션을 켜 계좌에 들어 있는 돈을 확인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 두었던 300만 원 남짓한 생활비가 있었으나 그걸 보자 더욱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버지가 그 양아치들에게서 빌린 돈은 자그마치 육천만 원이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이 돈과 합하더라도 빚을 갚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형, 이거 모르겠어.”

아이가 연필로 문제 하나를 가리키며 볼멘소리를 했다. 행여 주언이에게 들킬세라 표정에 신경 쓰며 휴대 전화를 껐다.

-빨리 원금이라도 갚아야 네 동생 장기까지 떼일 일은 없을 거야.

아주 잠깐 마주하고 있었지만 뼛속까지 느껴졌던 공포와 무력감이 가시질 않았다. 언제라도 아픈 아이를 데려가 돈을 얼른 내놓으라 협박할 것만 같아 신경이 곤두섰고, 간병인이나 간호사가 복도를 오가며 내는 자그만 발소리에도 놀라 바깥을 쳐다보게 되었다.

“주언아 이제 자자.”

최소한의 조명만 두고 병실의 불을 어둑하게 껐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오자 아주머니께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여기서 주무세요?”

“네. 오늘은 주언이랑 같이 있으려고요.”

“진짜?”

아이가 어깨를 끌어 올리며 되묻는다. 나는 주언이의 볼을 쿡 찌르고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 주었다.

“제가 주언이랑 같이 잘게요. 보호자실에서 주무세요.”

간병인 아주머니께서는 특실에 딸린 보호자용 침실에서 주무시고 나는 주언이 침대 아래에서 간이침대를 꺼냈다. 주언이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 마디 말을 건네던 아이가 끔뻑끔뻑 눈을 감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빠졌다.

드륵.

그때, 너스벨을 누른 적도 없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어둑한 그림자에 가려진 남성 인영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모습이 보였다.

“……!”

입술을 씹으며 곧장 문으로 뛰어갔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맣게 식은 가슴에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에게 찾아온 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면서 이젠 아픈 아이가 있는 병실까지 마음대로 들어오려고 하다니.

나는 병실로 들어오려는 남자의 가슴을 거칠게 밀어 병실 바깥으로 밀어냈다.

“아이쿠!”

남자는 내 손에 뒷걸음질을 치며 복도 벽으로 밀려났다. 쿵, 소리와 함께 남자의 등이 강하게 부딪히고, 복도의 어둑한 조명이 마음대로 침입한 남자의 얼굴을 비췄다.

짧은 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조금 통통한 몸을 가진 사람.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는 옆 병실에 입원 중인 아이의 아버지였다.

“어, 아야…. 아, 제가 병실을 잘못 들어갔네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입 주변을 쓸었다. 허억, 허억. 밭은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놀라게 한 건 죄송하지만, 이렇게까지 밀 일입니까?”

당황해 잠깐 얼을 타던 남자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가끔 주언이를 볼 때 오며 가며 마주친 적이 있기에 그도 내가 주언이의 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는 미약한 불쾌감을 내비치며 부딪힌 어깨를 탁탁 털었다.

“…죄송합니다.”

뒤늦게 상황을 읽은 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나를 흘겨보더니 제 아이의 병실을 찾아 들어갔다. 탁, 하고 병실의 문이 닫히고 나자 복도는 다시 적막만이 차올랐다.

난 어둑한 복도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 끝에 걸린 창문 밖을 응시했다. 네모반듯한 창틀 안의 새까만 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별 하나 제대로 뜨지 않고 까맣게 가라앉아 있는 밤이었다. 그렇게 복도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난 힘없는 발을 끌어 주언이의 곁으로 돌아갔다. 깊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옆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간이 되어 있지 않은 아침 식사를 느리게 삼켜 내고 있는 주언이의 곁을 지켰다. 아이는 휴대 전화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 놓고 밥을 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주언아. 혹시 무슨 일 있으면 형한테 바로 전화해.”

“알겠엉.”

밥을 우물대는 주언이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선 대답을 건성으로 했다. 반찬을 제대로 먹지 않는 아이의 숟가락 위에 시금치를 잔뜩 올려 주었다. 주언이는 휴대 전화를 보느라 밥 위에 나물이 산처럼 쌓인 것도 모른 채 입 안으로 숟가락을 집어넣곤, 씹고 나서야 인상을 쓰며 나를 흘겼다.

“채소도 먹어. 변비 걸려. 그리고 저거 보느라 밥 제대로 안 씹으면 휴대폰 압수할 거야.”

“형 안 가?”

잔소리를 시작한 내가 못마땅한지 주언이가 칭얼대며 물었다. 난 ‘갈 거야.’라고 대답하며 주언이의 숟가락 위에 콩나물을 한 움큼 올려 버렸다. 주언이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숟가락을 기울여 뭉친 콩나물을 털어 냈다.

“아무튼 잘 들어. 무슨 일 있는데 전화 못 하면 한 글자라도 좋으니까 문자라도 보내.”

“……무슨 일이 뭔데?”

아이의 질문이 예리했다. 난 괜히 짐을 챙기는 척 충전기 코드를 뽑아 돌돌 말며 주언이의 큰 눈을 피했다.

“그냥 뭐 많이 아프다거나. 갑자기 무섭다든가.”

“내가 애냐.”

어른스러운 척하려는 주언이의 대답에 억지로 실소를 터뜨린 나는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병실을 나서면서도 특실 담당 간호사에게 보호자 외에 외부인이 병실에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잘 봐 달라 부탁했다.

불안은 어둠과 외로움을 먹고 자라났다. 어둑한 병실에선 몇 번이고 올라오는 울음을 참으려 애썼으나 다행히 아침 해가 뜨고, 볕이 들어오자 흐려졌던 이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빚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나름의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진퇴양난이었다. 어느 쪽을 디디든 최악인 선택지밖에 없는 궁지에 내몰린 것이다. 주언이의 안위를 위해 지원이 형의 동생과 연애를 시작할 자신이 없었고, 숨만 쉬어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주언이와 길거리로 나앉을 수도 없었다.

‘튀자.’

결론은 하나였다. 서울을 튀는 것이다. 지방으로 일단 내려가 주언이의 다음 항암 치료까지 최대한 몸을 숨기며 지내는 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아무리 사채업자라고 한들 내가 그들에게 직접 돈을 빌린 것도 아니고, 타지에서 몸을 숨긴 나와 주언이를 찾는 건 어려울 것이다.

이 병원의 교수님께 항암 치료를 이어서 받지 못하는 건 안타깝지만 모두를 다 가질 순 없었다. 부산 같은 큰 도시의 대학 병원이라면 주언이의 치료를 비슷한 수준으로 이어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심이 서고 나니 행동이 분주해졌다. 당장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가방을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멀리 이동해야 하니 최대한 필요한 것들 위주로만 챙겼다. 오랜 이동 시간은 주언이가 버텨 주지 못할 것이므로 우선 비상금으로 고속 열차를 끊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보스턴백에 두 명분의 짐이 다 들어갔다. 그나마도 전부 마스크, 소독제, 진통제, 비타민 같은 주언이의 물건이 대다수였다.

‘퇴원 수속 밟고, 주언이 데리고 바로 택시를 타자.’

갑자기 병원으로 돌아온 내가 당장 퇴원하자고 말한다면 분명 주언이는 당황해할 것이다. 설명은 기차를 타고 나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이사에 무언가 어색함을 느끼겠지만 착하고 눈치가 빠른 주언이는 아마 더 되묻지 않을 것이다.

평일 오전은 한산했다. 택시를 타기 위해 골목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그때 뒤에서 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 나는 길의 한쪽 끝으로 몸을 붙여 걸었다.

응달진 골목 곳곳에 얼음이 끼어 있어 미끄러웠다. 발에 힘을 주고 걷느라 절뚝절뚝 걸음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대로 속도를 올려 나를 지나칠 것 같던 차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왔고 나와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10명 가까이 탈 수 있는 커다란 은색의 승합차가 나의 왼쪽으로 조금 더 바투 다가왔다. 느린 나의 걸음에 비해 승합차의 속도가 의심스러울 만큼 굼떴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불길한 예감에 멈칫거리는 순간, 승합차 역시 끽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춰 섰다.

“……!”

내가 그대로 뒤돌아 뛰고, 동시에 승합차의 문이 열리며 우악스러운 손길이 팔뚝과 뒷덜미를 잡아챘다.

“으-, 읍!”

그리고 커다란 손이 코와 입을 동시에 틀어막으며 나를 열린 승합차의 안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흔들며 발버둥 쳤지만,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무력하게 끌려 들어간 나는 승합차의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어둡고 두꺼운 천이 눈을 칭칭 감기 직전, 애써 머리를 뒤흔들며 반항했지만 문이 야멸차게 닫히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버둥대는 나를 강제로 일으켜 승합차 좌석에 앉혔다.

대충 기척을 느껴 보니 운전사를 포함하여 넷 이상의 사람이 차에 타고 있었다. 그중 둘은 양옆에서 내 어깨와 다리를 누르고 있었다. 까끌까끌하고 질긴 노끈이 손목과 발목에 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제멋대로 뒤틀린 손목에서 통증이 피어올랐다.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일이었다. 채무 관계 때문에 사람을 납치하면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 되는 대로 팔아 버린다고 했다. 머릿속으로는 주언이의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극한의 공포에 휩싸여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나는 끊어질 것같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애원했다.

“사, 살려 주세요.”

“…….”

“왜, 왜 이러세요.”

“…….”

하지만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차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느낌이 들며 몸이 제멋대로 흔들렸다. 그때, 오른쪽 사람의 손아귀가 조금 헐거워진 걸 느끼자마자 이를 악물고 몸을 마구 흔들었다. 빠져나오자마자 운전석 쪽으로 뛰어들어 사고라도 내 버릴 심산이었다.

“으윽!”

하지만 내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반대쪽의 남자가 나를 바닥으로 세게 밀었다. 쿠당탕 소리를 내며 머리를 좌석 시트 옆면에 세게 부딪혔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멍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내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바닥에서 바르작거리자 남자 중 하나가 나의 머리채를 붙잡아 좌석으로 끌어당겼다.

“아, 으….”

그때 끙끙거리는 내 옆구리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닿아 왔다. 서늘하고 소름 끼치는 감촉에 불시에 온몸이 굳었다. 보지 않아도 살을 꿰뚫을 정도로 날카로운 흉기가 겨눠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들바들 떨며 숨을 가까스로 몰아쉬자 누군가 귓가를 세게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아가야, 조용히 가자.”

“흐, 으….”

소리 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적요한 차 안에는 간간이 내가 흐느끼는 소리와 바퀴의 마찰음만 흘렀다.

***

차의 속도가 점차 줄어들었다. 문이 열리고, 남자 두 명이 나를 들어 차 밖으로 거칠게 끌어냈다. 끼익거리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고 그들은 딱딱한 시멘트 바닥으로 나를 집어 던졌다. 무방비하게 떨어지며 부딪힌 팔뚝과 갈비뼈에서 둔통이 일었다. 숨을 쉴 때마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풀어 줘.”

누군가 거친 손길로 눈을 가렸던 천을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빛에 눈가를 찌푸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느리게 초점이 잡혔다. 손발이 묶인 채로 차가운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있던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주위를 살폈다.

목재와 벽돌 등이 군데군데 쌓여 있는 폐공장 한가운데에 남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컨테이너로 지어진 이 공장은 딱 보기에도 스산해 사람이 잘 찾지 않는 곳인 듯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남자 중 두 명은 역시나 며칠 전 집으로 찾아왔던 이들이었다.

바닥에 가래침을 뱉어 낸 남자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백경철이 아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중이었어. 설마 도망이라도 치려고?”

손이 떨려 와 교차된 채로 주먹을 꾹 쥐었다. 나는 눈물 섞인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작정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저벅저벅 구둣발로 걸어온 남자가 내 배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웅크렸다. 차에서 넘어지고 부딪혔던 통증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에 나는 말없이 바닥에서 끙끙대며 앓았다.

“또 구라로 대답하면 다음엔 대가리가 터질 줄 알어.”

“하으, …윽.”

남자는 보란 듯이 내가 들고 있던 보스턴백을 열어 짐을 바닥으로 쏟아부었다. 뿌연 공사장 바닥으로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주언이의 약통 하나가 뚜껑이 열려 바닥에서 나뒹굴었다. 속옷과 옷가지, 통장 등 산발적으로 흩어진 짐은 누가 보아도 도망치려는 의도가 다분히 보였다. 눈물 때문에 자꾸만 눈앞이 흐릿해졌다.

“도망가려고 그랬냐고 물었어.”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결국 고개를 늘어뜨린 그대로 느리게 끄덕였다.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내 뺨을 툭, 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백경철이 아들 아니랄까 봐. 좋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 새끼네.”

“흐윽, 가, 갚을게요.”

“아가야, 갚는 것은 당연하고.”

내 얼굴로 뿌연 담배 연기를 뱉어 낸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눈을 깜빡이며 남자를 바라보는 순간 엄청나게 뜨거운 것이 손등 위에 닿았다.

“아악!”

나는 고개를 젖히며 소리를 질렀다. 본능적으로 팔을 빼려 애쓰자 주위에 있던 남자가 발로 어깻죽지를 눌렀다.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구부러진 담배를 보고서야 내 손등을 지진 것이 담배의 불씨라는 것을 깨달았다.

“각서를 써야 쓰겠는데.”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를 지르던 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턱이 덜덜 떨리고 식은땀에 온몸이 젖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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