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3)

11. 울어서 좋은 텍스처 (2)

“이게 다야?”

서슬 퍼런 시선이 성현의 눈을 노려보았다. 제 잘못도 아닌데 제우스에서 일이 터진 이후에 재혁 앞에서 기도 한번 못 펴고 있었다.

“직접 폭행을 저지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거기 있었던 놈들 명단 한 명도 빼지 마라며?”

기가 죽어 있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일 전화해서 사람을 닦달하는 데다가 오늘은 결국 찾아와서 장사도 못 하게 난리를 치는 바람에 성현도 한계에 다다랐다.

처음부터 재혁이 이상하다는 건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누구와 만나도 연락을 귀찮아하던 사람이 연락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수상쩍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김재혁이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빠지는 건 그를 알고 나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잘못한 일의 경중을 따져 제일 잘못한 우민부터 시작해서 루의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린 놈들의 명단을 적고 그 밑엔 거기서 심부름을 하던 사람 이름까지 목록별로 정리해서 넘겼다.

“어떻게 할 작정이야? 고소라도 하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것은 누구보다 성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대개 동성끼리 벌어진 일은 고소를 한다고 해도 접수조차 되지 않을 게 뻔했고 폭행 사건으로 고소해도 조사를 하다 보면 원하지 않는 아웃팅을 당할 수도 있었다.

자기가 좋아서 미친 듯이 물고 빨고 있는 섭을 강제 아웃팅시킬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성현의 생각이었다. 사실 고소하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건 제우스라서 재혁의 결정에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고소는 너무 약하지.”

살짝 웃음까지 지어 보이는 재혁의 말에 성현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어떻게 벌일지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 * *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함께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같이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별로 나쁠 것도 없었고 좋은 일도 없었는데 왜인지 재혁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있으면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오늘은 다정하고 인자해 보이기까지 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좋은 일이 있으면 자신도 알고 싶은데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 재혁이 의아했다.

“저, 팀장… 아니, 형!”

운전하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어, 왜?”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그리고 늦었는데… 우리 어디 다른 데 가나 해서요. 집 방향이 아닌 것 같은데.”

재혁이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를 머금었다. 저렇게 웃는 건 잘 없는 일인데 신기했다. 내심 쓸데없는 걸 궁금해한다고 혼날까 봐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웃어 주니까 기분이 좋았다.

“가 보면 알지.”

퍽 다정한 음성에 이유 따위 몰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혁과 함께라면 그 어디도 갈 수 있고 그 무엇도 할 수 있었다. 요즘의 루는 하루하루가 꿈처럼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하다가 언젠가 잠에서 깨어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루는 매일 밤 재혁에게 플레이하자고 졸랐다. 플레이하면서라도 울면 눈물의 총량이 많아져서 행복한 순간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라도 무섭고 힘들고 울었으니까 평소엔 많이 행복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루는 지금 이 순간이 고맙고 소중했다.

“여기는!”

재혁이 루를 데리고 간 곳은 제우스였다. 차 유리창 너머로 간판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루의 어깨가 달달 떨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눈앞에 바로 영상을 재생시킨 것처럼 그때의 일이 떠올랐다. 침이 마르고 심장이 떨려서 재혁이 직접 차 문을 열어 주는데도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혀엉… 여긴 못 가요. 저 그냥 집에 가서 혼날게요. 진짜… 못 가는데.”

재혁이 문을 연 상태로 상체를 숙여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는데도 요동치는 심장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옆에 있는데도 무서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입술을 쭉 내밀며 상체를 최대한 뒤로 뺐다. 재혁과 함께 있으면 별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장소가 주는 두려움이 너무 큰 탓이었다.

재혁이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고 앞으로 당기며 눈을 맞춰 왔다. 무서워서 고개를 떨궜는데 턱을 잡아 올리는 손이 단단해 피할 수가 없었다. 착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고요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같았다.

“루…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꼭 붙어 있을 테니까.”

어루만지는 목소리에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이대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온 거예요? 굳이 여기를. 형은 다 알면서, 왜…….”

재혁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다 아니까 왔지. 아픈 건 치료해야 하니까. 아니, 날 위해서 왔어.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겠더라고.”

루는 짧은 재혁의 말 속에 담긴 힌트를 해석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픈 건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한 자신의 상처를 뜻하는 것일 테고 용서가 안 되는 건 재혁의 마음일 것이다.

그제야 루는 ‘아…….’ 하며 탄식했다.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건 바라지 않았는데…….

재혁이 루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루가 날 좀 봐주면 좋겠는데.”

“네? 봐드리다니요?”

“널 위해서가 아니라 날 위해서 온 거라고. 그 사건 이후에 한순간도 마음이 편했던 적 없어. 뭐라도 해야지. 시발, 감히 누구를 건드려. 나도 아까워서 손끝 하나 마음대로 못 대는데!”

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매일 밤 손끝뿐만 아니라 더한 곳도 마음대로 주물렀으니까 손도 못 댄다는 말은 틀린 말이었다. 그러나 그걸 따지고 싶은 생각은 ‘아까워서’라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럼 손잡고 가 주세요. 절대 떨어지지 마시고요.”

재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이 터진 날 처음 와 본 제우스는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온다는 연락을 받았는지 성현은 그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시킨 대로 다 준비해 놨어?”

“누구 명이라고요. 당연히 준비 끝내 놨죠.”

비꼬는 말에도 재혁은 기분 좋은 듯 웃었다.

“반항은 없고?”

“반항이 없긴 왜 없어요. 존나 있었지. 진짜 김재혁 한 번만 더 나한테 이런 거 시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어.”

협박하는 게 분명한데도 재혁은 입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반항은 어떻게 말렸는데? 저기 덩치들 데리고?”

“아니, 네가 시킨 대로 했지. 여기서 얌전히 벌 받을래? 아니면 본가에다가 사진 뿌려 줄까? 이렇게 말하니까 다들 고분고분하던데?”

“잘했네. 역시 친구가 좋다니까.”

“친구 좋아하시네. 미친 새끼. 진짜 너는 돌아이 중에 상돌아이야.”

재혁이 루의 손을 끌고 걸으며 가볍게 대꾸했다.

“칭찬 고맙다.”

등 뒤에서 뭐라 뭐라 욕설이 들리는 것 같은데도 재혁은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을 보던 루는 아무래도 팀장님이 제우스 사장님께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있나 보다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복도를 따라 한참 걷다가 재혁이 멈춰 선 곳은 그때 일이 터진 방 앞이었다. 그 방 앞에서 루는 멈칫하며 재혁의 팔을 반대 방향으로 끌었다. 여기까진 올 수 있었지만 저 안에 들어가기는 무서웠다.

“저…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여기 오니까 역시 들어가진 못하겠어요.”

재혁이 루의 손을 더 단단하게 움켜쥐었다.

“알아, 흐음…….”

잠시 생각하던 재혁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눈을 빛냈다.

“루, 그럼 이렇게 하자. 너는 여기에 선 채로 안을 보기만 하는 거야. 물론 네 옆엔 내가 있을 거고. 안을 본 다음에도 들어가기 싫다면 그땐 그냥 돌아가자. 어때?”

그런 거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솔직히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궁금하기도 했다. 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재혁이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루는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본 사람들의 손과 발이 묶여 있었다. 너무 정신이 없고 어두워서 잘 분간할 순 없었지만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구가 작은 우민과 덩치가 큰 사내들의 실루엣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낸 루를 재혁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어때? 묶여 있으니까 안전할 것 같은데 그래도 들어가기 싫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재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곧장 루의 팔을 끌어 안으로 집어넣었다. 가장 먼저 우민이 고개를 들고 루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과 발이 묶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노려봐 주었다.

아무 죄도 없는 자기를 꼬드겨 목에 칼을 겨누고 윤간하려고 했던 상대였다. 자신이 잘못한 게 없으니 시선을 피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무엇보다 바로 곁엔 재혁이 제 손을 잡아 주고 있었다.

루는 재혁의 손을 꽉 잡은 채 우민에게로 다가갔다. 재혁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기꺼이 루에게 끌려가 주었다. 내심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둘 사이에 한 걸음 정도를 남겨 두고 바짝 다가간 루는 자신을 노려보는 우민과 눈을 맞추며 꽤 진지하게 물었다.

“저한테 왜 그랬습니까.”

단호한 목소리와 평소와는 다른 남자다운 루의 말투에 재혁은 속으로 ‘오…….’ 하며 응원을 보냈다.

루가 그렇게 묻자 우민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 재혁을 바라보았다. 원망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이었다. 물론 재혁의 시선은 오직 루를 향해 있었으므로 우민의 시선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루가 물었음에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재혁이 고개를 돌려 우민을 바라보았다. 루를 볼 때와는 급격하게 달라진 서늘한 눈빛이었다.

“대답 안 해? 네 주인님이 묻잖아!”

위압감이 느껴지는 재혁의 목소리에 잡고 있던 루의 손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우민 앞에서는 당당하게 굴었음에도 제 목소리 하나에 바로 떠는 루 때문에 웃음이 날 것 같아 재혁은 이를 악물었다.

우민이 묶인 손을 바르작대며 억눌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주인님이라니.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주인을 물고 도망간 개새끼 주제에 주인을 가려 모시겠다? 생긴 게 좆같으면 상황 판단이라도 잘하든가. 지금 네가 개길 상황이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조금의 온기도 느낄 수 없는 표정에 우민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그런데도 우민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사람처럼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재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픽 웃으며 입구를 바라보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한테 때리는 건 사랑의 표현이라서 너 같은 새끼한테 손을 더럽히고 싶지가 않네.”

그 말에 깜짝 놀란 루가 재혁과 그 옆에 있는 남자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재혁과 눈빛을 교환한 남자가 기다란 채찍을 높이 들었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우민의 몸에 붉은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우민이 잘못한 것도 맞고 재혁이 복수해 주는 것도 고마운 일이었으나 이런 식을 바란 적은 없었다. 무엇보다 이 일로 인해 재혁이 신고를 당해 힘든 일을 겪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웠다.

‘휘릭!’ 하고 채찍이 허공을 젓는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과 동시에 재혁의 팔에 매달렸다.

“저, 그만…….”

재혁이 루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팔을 들자 채찍을 휘두르고 있던 사람이 행동을 멈췄다.

“왜?”

“이렇게는 싫어요. 그냥 저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에요.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한테 왜 그랬는지.”

재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루의 표정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씨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던 우민이 울부짖듯 욕을 내뱉었다. 차라리 채찍으로 맞는 게 낫지 루의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동요하는 재혁을 보는 건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왜 그랬냐고?”

우민의 질문에 루의 시선이 돌아가자 우민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분노를 숨기지 않고 모조리 다 드러냈다.

“더러운 게 김재혁 옆에 붙어 있으니 떼 주려고 그랬지.”

가만히 루만 바라보고 있던 재혁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지시했다.

“개새끼 입 막아요.”

재혁이 루의 귀를 감싸며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말없이 따라 나온 루는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 재혁의 손목을 잡았다. 재혁은 막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건 너를 위한 게 아니었어. 저런 새끼 말 따위 듣게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풀 게 있으니까 너는 여기서 기다려.”

“같이 있어 준다고 했잖아요. 손 안 놓을 거라고…….”

루가 재혁의 손을 잡고 매달린 이유는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가해자들이 모두 묶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무섭지 않았다.

다만 지금 이대로 재혁이 들어간다면 저 사람들을 다치게 할 것 같았다. 저들이 다치는 건 상관없는 일이었으나 그로 인해 재혁이 곤란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다행히 재혁은 손을 붙잡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무서워?”

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성현의 사무실이었다. 입구에서 본 적 있는 사장 성현이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 만하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기다려.”

루는 재혁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여긴 안전하니까 잠시만 갔다가 올게.”

무슨 말을 해야 나쁜 짓을 하러 가려는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루는 어떻게든 그를 막기 위해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니, 형. 그냥 안 가면 안 돼요? 피곤해요. 저 쉬고 싶은데…….”

제가 생각해도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였다. 한번 마음먹으면 꼭 하고야 마는 그의 성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재혁이 한숨을 쉬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서류를 보는 데만 열중하고 있던 성현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루 씨, 그냥 놔줘요. 풀 건 풀어야 하고. 이 세계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건데 저쪽이 잘못했으니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해요.”

“하지만…….”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세상의 법이 통하는 세계였다면 귀찮을 거 없이 고소해 버리면 그만인데 그건 저쪽한테나 우리한테나 모두 피해만 주는 일이라.”

성현이 말한 세상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세계라는 건 아웃팅을 뜻한다는 걸 이해한 루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재혁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을 것도 같았다. 안심되는 마음으로 잡고 있던 손목을 살짝 놓았다.

재혁이 성현을 향해 ‘제법이네.’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사무실에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룸에 있을 걸 그랬다고 생각하다가 곧장 생각을 고쳐먹었다.

만약 거기 있었다면 폭력적인 재혁의 모습을 보고 기절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우민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던 주인님은 플레이할 때의 모습보다 백배 정도는 더 차갑고 무서웠으니까 굳이 그런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가 않았다.

루가 성현 쪽을 힐끔거리자 그가 보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나중에 재혁이한테 욕먹더라도 답답한 건 싫잖아. 안 그래요?”

저 사람도 돔일까? 움직임이 적은 행동이라든가 말하는 투라든가 짓는 표정이 오묘하게 재혁과 닮아 있었다. 시선으로 루의 얼굴을 훑던 성현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쁘네요. 재혁이가 왜 그렇게 미쳤는지 알 만큼.”

예의상 한 말이겠지만 재혁이 없는 곳에서 다른 돔에게 성적인 뉘앙스가 담긴 말을 들은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루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바짝 움츠리며 말했다.

“그런 말씀 상당히 불쾌합니다.”

성현은 미간을 찌푸리다가 표정을 풀고 웃었다.

“돔에 대한 충성심인가요? 멋있네요. 반할 만합니다.”

재혁과 친한 사이 같아 보여서 이것저것 묻고 싶었는데 친구의 연인에게 수작을 거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와 더는 말을 섞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돌려 테이블의 격자무늬를 눈으로 훑어가며 재혁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겁니다.”

“네? 뭘요?”

“김재혁이 지금 뭘 하고 있을지.”

속을 들켰다는 놀라움보다는 재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한 마음이 더 커서 그와 말을 섞지 않겠다는 결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럴 리가 없겠지만 여긴 은밀한 행위가 오가는 SM 클럽이었고 재혁이 그곳에서 자신에게 하듯 다른 섭과 플레이라도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싫었다.

“사장님은 꼭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저는 잘 압니다. 재혁이와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요.”

저가 모르는 부분을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속이 쓰렸다.

“궁금합니까?”

그렇다고 대답하기엔 자존심이 상했지만 알고 싶은 유혹이 더 컸기에 볼품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왔다. 가까이 붙어 앉을까 봐 엉덩이를 떼려고 했는데 다행히 그는 반대편에 앉았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한 대로 돌려준다가 이 바닥의 룰이긴 한데… 그러면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니까…….”

“애꿎은 사람들이요?”

성현은 설명하기 귀찮다는 듯 잠깐 얼굴을 찌푸리다가 다시 친절한 사장님 흉내를 내며 말을 이었다.

“돔의 섭을 건드리면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섭을 건드린다는 뜻이에요.”

“세상에!”

루가 깜짝 놀라자 성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놀란 마음을 달래 주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재혁이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그러면 어떻게…….”

“흐음, 정우민은 돔이 아니니까 아마 그가 돔의 역할을 하게 되겠네요. 나머지 사람들은 돔이니까 섭 역할을 할 거고.”

루는 저도 모르게 ‘헉’ 하는 소리를 내며 만약 자신이 재혁처럼 누군가를 묶어 놓고 명령을 내리고 괴롭힌다면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양쪽이 다 가능한 사람도 있다지만 자신은 절대 누군가의 돔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뭐, 그걸로 끝나면 역할 변경 플레이를 했다고 치고 넘어가면 되지만… 재혁이가 진짜 소름 끼치게 무서운 건 그걸 전시한다는 데 있지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 전시라니? 다른 사람들 보는 앞에서 그 일을 한다는 걸까? 아니면 영상으로 찍는다는 걸까? 여긴 클럽이니까 대놓고 플레이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여서 전자는 괜찮지만 후자면 문제가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었다.

“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영상으로 찍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볼 수 있게 하는 게 다니까요. 대신 몸에 쓰겠죠. 어떤 죄를 지었고 왜 이런 일을 당하는지.”

생각만으로도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돔 역할을 하는 섭은 모르겠는데 섭 역할을 해야 하는 돔은 그것 자체만으로 견디기 힘든 데다가 자신이 다니는 클럽에 소문까지 나면 절대 클럽 출입을 할 수 없을 터였다.

“저기… 그러면 사업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요?”

괜히 자기 때문에 성현에게 피해를 준 것만 같은 기분에 그를 향해 드러내던 적의가 수그러들었다. 심지어 미안하기까지 했다.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여긴 고급 클럽이라 쓰레기들은 급이 맞는 곳에 가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더 이득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니 다행이었다. 그러고 보니 재혁이 왜 자신을 그곳에 두지 않고 따로 뺐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울기만 해도 야하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남자의 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왜 웃습니까? 복수해 준다고 생각하니까 시원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할 말이 궁색해서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구원자처럼 재혁이 나타났다.

“오… 빨리 끝났네? 하드하게 굴리진 않았나 봐.”

“그럴 리가. 내 눈 더러워질까 봐 감시 맡기고 나왔지. 루 혼자 두기도 신경 쓰이고.”

“혼자라니. 난 뭐 사람 아니고 마네킹이냐?”

“내가 없으면 그 누구와 있어도 혼자라고 느끼는 사람이거든, 우리 루는.”

재혁이 근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말은 성현을 향하는 것이었지만 시선은 루를 향했다.

“허!”

성현의 코웃음을 뒤로하고 재혁은 루의 손을 잡고 사무실을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들이 있는 룸 쪽에서 새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타인에게 한 번도 해를 끼치고 살아 본 적 없어서 사람이 다치진 않을까 걱정되긴 했지만 인과응보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가 말했듯 이제 다른 사람은 아무도 중요하지 않았다. 루의 세계는 오직 재혁 한 사람으로 인해 돌아갔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재혁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 보이기도 했지만 루는 계속 찜찜한 기분에 휩싸여야 했다. 재혁이 자신의 기분을 모를 리가 없었지만 씻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다 루가 씻고 나오니 이상한 존댓말을 하며 루를 불러 세웠다.

“루 씨, 여기 와서 앉아 보세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에 제 물건이 모여 있는 방으로 가려던 루의 발이 멈췄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빨리 오세요. 내일 출근 안 할 겁니까?”

루는 쭈뼛거리다가 재혁의 옆으로 갔다. 소파 위에 앉아야 하나 바닥에 꿇어앉아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가 평소에 반말을 쓰니까 플레이할 땐 존댓말을 쓰는 게 좋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야 하냐는 루의 질문에 재혁은 평소에 존대를 하면 플레이할 때는 반말을 해서 플레이의 시작을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알리는 것처럼 평소에 반말을 하면 그 반대로 해야 이제껏 해 온 플레이가 어색하지 않아진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루는 매우 헷갈렸다. 존댓말을 쓰는 걸로 봐선 플레이의 시작일 텐데 그럼 역시 꿇어앉아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살짝 무릎을 굽혔을 때 머리 위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앉아요.”

그가 턱짓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루가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굴리며 물었다.

“주인님이에요?”

그가 냉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네, 그러니까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 똑바로 대답하세요. 피하면 죽기 직전까지 엉망으로 만들 겁니다.”

그와의 플레이로 죽기 직전까지 엉망이 되는 건 루도 바라는 일이었으나 똑바로 대답하긴 해야 했다. 괜히 그의 기분을 거슬러서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냥 불안해서요.”

“왜? 뭐가 불안하단 말입니까? 내가 나쁜 사람 같아서 무서워요? 그래서 연인 관계고 뭐고 다 무르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갑자기 왜 저렇게 해석되는지 알 수 없었던 루는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깊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가 루의 얼굴을 향해 있었다. 침이 꼴깍 넘어가고 배 속에 홧홧해지기 시작했다.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해서 정말 큰일이었다.

그가 픽 웃으며 느른하게 등을 기댔다.

“루 씨, 지금 뭐 합니까?”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가 가소롭다는 듯 시선을 내려 터질 것처럼 부푼 곳을 바라보았다. 얘가 언제 이렇게 갑자기 컸는지 모르고 있던 루가 다급하게 손을 앞으로 모았다.

“이건 그냥… 화장실 가고 싶어서.”

물론 거짓말이었다. 꼬투리 잡아서 혼낼 생각이 없는지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면 화장실 보내 주겠습니다.”

“네… 팀장님, 아니 주인님이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고요.”

그가 말끝을 잡아 바로 물었다.

“그럼 안 무섭다고?”

“아니요! 무섭긴 무섭지만 무서운 건 좋은 거지 기분이 찜찜할 일은 아니라는 뜻이었어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저번에도 주인님은 생각보다 다정하신 것 같다고 입을 잘못 놀렸다가 엉덩이가 터질 것처럼 맞았다. 물론 좋았지만 다음 날 회사에서 앉아 있기가 불편해서 그렇게까지 주인님의 화를 돋우는 건 주말에만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럼 뭐가 문젭니까? 집에 오는 내내 불만 있는 사람처럼 입을 쭉 내밀고 있질 않나. 오자마자 준비한 것처럼 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리는데 누가 눈치를 못 챕니까.”

“그러니까 주인님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랬어요.”

재혁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걱정? 대체 왜?”

“혹시 사람이 심하게 다치거나 원한을 품어서 해코지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이 돼서요.”

재혁이 픽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화를 낸 건 아니었지만 플레이 상황이라 그가 다가오자 어깨가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양손으로 가린 아래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재혁이 루의 어깨에 턱을 댔다. 뜨거운 숨이 귓속에 훅 하고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아래가 더 크게 부풀었다. 그가 손을 떼어 내고는 트레이닝복 위로 불룩한 성기를 톡 건드렸다.

“흐읏!”

“대체 이건 갑자기 왜 선 겁니까? 내가 뭘 했다고.”

갑작스러운 자극에 정신이 없어 몸을 꿈틀거렸다.

“대답.”

“그…그냥 주인님이 가까이 오면 원래 서요. 안 서는 게 더 이상한 건데…….”

“누가 마음대로 세우라고 했습니까?”

루가 억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싸는 건 허락받아야 하지만 세우지 말라고는 안 하셔서…….”

재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루의 어깨를 감싸 왔다. 볼에 살짝 입맞춤을 하는 행동이 주인님 같지 않아서 어색했다.

“대답했으니까 플레이 상황 종료.”

“…….”

세운 건 어떡하라고 플레이 상황을 종료시키는 건지. 차라리 아까 대답을 좀 느리게 해서 엉덩이라도 맞을 걸 그랬다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늦었다.

“뭐야, 왜 그렇게 아쉽게 입맛을 다셔.”

“그거야! 기대했으니까요…….”

재혁이 손을 올려 깨물고 있는 루의 입술을 아래로 내려 주었다. 그제야 루는 자신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입맛을 다신다고 또 놀림을 받을까 봐 저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또 인상을 쓰며 혼낼까 봐 눈치를 보는데 다행히 재혁은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한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놓였다.

“나를 걱정해 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야. 저들에게 해코지당할 만큼 내가 약하지 않고 법적으로 고소를 한다면 자동 아웃팅이기 때문에 절대 그렇게 될 일 없어.”

“아웃팅돼도 상관없다고 고소해 버리는 미친놈이 있으면 어떡해요!”

재혁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쟤들이 저래 보여도 다들 한가락 하는 집 자제들이라 아웃팅과 동시에 해외 출국이야. 걱정 마.”

“네.”

루는 그제야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재혁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는 건 언제나 기쁜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곤란해지는 걸 바라진 않았다. 지금도 이미 그에게서 너무나도 많은 걸 받은 기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루를 괴롭혀 왔었던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상처가 조금씩 치유되고 있었고, 무엇보다 숨겨야만 했던 자신의 성향을 알고도 더 좋아해 주는 사람이었다. 더는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져서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니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동시에 제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도 완벽한 재혁이 멋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웠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마음도 주고받아야 균형을 이룰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재혁에게 줄 수 있는 게 생각나지 않았다.

“저, 형!”

제 어깨에 턱을 대고 목덜미를 지분거리던 재혁이 고개를 들었다.

“응.”

불러 놓고 한참을 고민하던 루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갑자기?”

“그냥 오늘도 그렇고 어제도 그렇고 모두 다 고맙습니다. 형이 아니었으면 저는 매일매일이 외롭고 우울했을 텐데 형을 만나고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요. 저는 원래 힘든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어도 절대 울지 않고 참는 성격이었거든요. 왜 그랬냐면… 진짜 울어 버리면 더 슬퍼질 것 같기도 하고 옆에 있는 사람이 질려서 떠나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눈물을 참는 걸 습관처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어요.”

긴 말을 마친 루는 목이 메는지 테이블 위에 둔 물을 마셨다. 재혁은 그가 말을 이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형을 만나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어요.”

“울렸다고 고맙다는 말 듣기는 처음이네.”

“저도 예쁘게 운다고 칭찬받은 적은 처음이에요.”

“우리 서로 처음이라 좋네.”

그가 가볍게 말하고 몸을 부딪쳐 왔지만 루는 정작 중요한 말을 다 하지 못했다. 그에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래서 너무 좋은데…….”

“좋은데?”

“불안해요.”

“왜?”

“받기만 해서요.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형은 완벽하고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재혁이 웃었다. 근사하게 눈을 휘며 낮게 웃는 소리가 잔잔하게 마음을 울렸다. 가슴이 마구 술렁였다. 뭔가 달라고 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정말 심장이라도 빼서 줄 수 있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며 그가 무슨 말이라도 해 주길 기다렸다.

그가 시선을 내려 눈을 마주쳐 왔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예뻐서 숨을 한번 들이켜며 눈을 깜빡였다.

“네가 나한테 해 준 게 뭔지 알면 본전 생각나서 손해 보고 있다고 할지도 모르는데?”

“제가 뭘 해 드렸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진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저런 시선을 느낄 때마다 배 속이 홧홧하고 발끝에 힘이 들어간다는 걸 그는 알까. 지금은 진지한 말을 하는 중이니 참아야 하는데도 입에 침이 고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가 손을 올려 루의 뺨을 감쌌다.

“이렇게 예쁘고.”

기다란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빨갛고.”

턱에서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손길에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착한데… 더 바라는 건 욕심이야.”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그가 ‘쪽!’ 하고 볼에 입술을 부딪쳐 왔다.

“신루, 너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해도 선물이야. 그날의 아픔을 치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어려웠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 해도’라는 말이 심장을 때려서 그의 말을 이해 못 해도 좋기만 했다.

루에게 세상은 항상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해야만 한 것 중의 일부만을 돌려주는 험한 곳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행복한 듯 웃고 있는 얼굴을 보자 가슴이 간지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는 그냥 재혁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기분이 좋았다.

“내 선물, 신루.”

그가 웃으며 루의 이름을 부르더니 갑자기 목덜미를 잡았다. 곧 입술이 닿았고 뜨거운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허리를 잡고 입술을 더 가까이 붙였다. 그의 말을 잘 들은 것도 아니고 플레이도 하지 않았는데 달콤한 보상이 이어졌다.

진짜 선물은 자신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주인님, 김재혁이었다.

* * *

다시 돌아온 주말, 재혁은 한가롭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아직 깨지 않은 루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간밤에 격한 플레이로 비몽사몽인 그를 씻기고 재웠다.

늘 자신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아직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신기했다. 루를 홀린 듯 바라보며 지난주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드릴 게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라서 질문을 받았을 때 재혁은 적잖이 당황했다. 보통의 디엣 관계라면 섭이 당연히 돔의 눈치를 본다지만 연인 사이가 된 이후에도 루는 늘 자신의 눈치를 보았고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했다.

그런 그에게 동생을 잃은 상실감에 대해 말할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자존감이 약한 루는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 자신이 동생 대신이라고 생각할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혁은 그저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말해 주었다. 너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선물 같은 사람이라고.

상황에 맞게 말을 정리하긴 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취향이었던 데다 하는 행동 하나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까.

다행히 틀리지 않은 대답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루는 다시 해맑고 예쁜 사람으로 돌아갔다. 아침마다 귀여운 짓으로 저를 깨우고 회사에선 신입 중에 가장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일하고 집에 오면 제 밑에 깔려 엉엉 울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모르고 살았던 시간이 억울할 만큼 행복했다. 동그란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고 몇 번 쓸어내리다 촘촘한 눈썹을 덧그렸다. 거슬렸는지 작게 인상을 쓰는 모습에 손끝이 뜨거워졌다.

주말이라 깨울 생각은 없었는데 한쪽 눈썹을 다 덧그렸을 때 루가 눈을 떴다.

“잘 잤어?”

“네, 형은요?”

“보다시피.”

재혁이 웃자 루가 따라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더 자라고 하고 싶은데 오늘 같이 가 볼 데가 있어서 일어나야겠다.”

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어디 가요?”

“음… 안 물어봤으면 좋겠는데. 옷은 검은색으로 입어 줘.”

루의 눈동자에 물음표가 떴다가 사라졌다. 궁금하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말에 따를 것이다. 이 안정감이 좋았다. 상대가 자신의 말을 무조건 들어줄 거라는 확신.

순수한 눈을 바라보며 재혁은 어쩌면 이런 확신을 찾기 위해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재혁과 함께 온 곳은 봉안당이었다. 옷을 검은색으로 입어 달라고 한 게 이런 이유였구나 싶었다.

루는 질문 타이밍을 찾기 위해 눈을 굴리며 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말 없이 어느 봉안함 앞에 선 재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곁에 서 있던 루는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앞에 있는 함을 바라보았다.

누가 봉안함의 주인인지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 번째 줄 가운데 재혁의 사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어쩐지 그와 닮아 보이는 남자가 웃고 있었다.

[김재성]

가까이 다가가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데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동생이야.”

“아…….”

동생이 이렇게 어렸을 때…….

말주변이 없는 데다 사람을 대하는 법에 미숙한 루는 이럴 때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이 없었던 그는 가족을 잃은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그저 그와 눈만 맞추고 있었다.

그가 손바닥을 재성의 사진에 대고 슬픈 표정을 짓는데 그 마음이 오롯이 느껴져서 목이 메는 것 같았다. 곁에 다가가 그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쳐 보았다. 대단한 용기를 낸 일이었다. 재혁이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 왔다. 뭐 하는 거냐고 뭐라 하면 민망할 것 같았는데 다행히 그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날에 대해 자세히 말해 주기 시작했다. 그가 동생과 얼마나 우애가 좋은 형제였는지.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그러다 동생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까지.

그리고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동생이 죽은 이후로 나는 여기 올 자신이 없어서 외면했어.”

김재혁이라면 당연히 그럴 만했다. 동생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이 컸을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길 외면하는 동안 그의 속은 얼마나 더 타들어 갔을까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이런 말 핑계일 수도 있지만 내가 성향자가 된 건 재성이 때문이었어. 내 말만 들었어도, 아니 내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말하고 그를 말렸다면… 지금 내 곁에 있겠지.”

동생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 나왔다. 그의 아픔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아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손을 맞잡아 왔다.

아픈 말을 늘어놓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갈까?’라고 말하는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고 조용히 뒤를 따랐다. 루는 봉안당을 나오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당신이 못 한 것까지 내가 다 하겠다고. 형을 만나게 해 줘서 고맙다고. 당신이 아니었다면 형은 아마도 나 같은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사람이라고. 먼저 간 당신에게 이런 마음을 품어서 죄송하다고. 하지만 나는 이제 그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그가 다시 차를 출발시키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루.”

“네, 형.”

“네가 그랬지. 나한테 줄 게 없어서 불안하다고. 그 말에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선물이라고 말했던 것 기억나?”

루는 잠시 그때를 떠올렸다. 그 말을 하던 재혁의 표정과 목소리가 떠오르며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어떻게 잊어요.”

“그래, 존재 자체로 선물인 이유는… 네가 나를 오래된 상처에서 끄집어냈기 때문이야.”

“…….”

“어쩌면 평생 오지 못했을 여길 다시 올 수 있게 해 준 사람이 너라는 뜻이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뒤덮었다. 운전 중만 아니라면 그에게 안겨 입을 맞춰 주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차를 세우고 고개를 돌렸다. 일렁이는 눈동자를 바라보자 목이 콱 메는 기분이었다. 루는 숨을 삼키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아무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도 우리 루는 언제고 또다시 불안해할 것만 같아서. 불안이 쌓이고 쌓이다가 갑자기 나를 떠나 버릴 것 같아서…….”

그는 잔뜩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하다가 말을 잇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 재혁은 자신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들어도 그가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이 불안은 싹을 틔우고 자라날 것이다.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도 오래 묵은 상처는 조금의 틈에도 상처가 벌어져 존재감을 드러낼 테니까.

그러나 갑자기 떠난다고?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루는 절대 재혁을 떠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떠난다고 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물고 늘어질 거라고 생각하며 손을 꽉 말아 쥐었다.

“제가 어떻게 형을 떠나요.”

그렇게 말하는데 그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네가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불안했어. 너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 네가 나를 볼 때마다 이런 마음이었다고 생각하니까 뭐든 말해야 했어.”

“허억…….”

루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천하의 김재혁이 자기 때문에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네가 만약 내게 무언가를 숨긴다거나 자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하게 됐어.”

“저는 안 숨겼어요. 형이 나한테 질릴까 봐 겁나서 하지 못했던 말까지 다 했는데…….”

그의 생각이 어쩐지 억울해져서 투덜대자 재혁이 루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알아. 내가 그랬다는 말이야. 그래서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니까 끔찍하더라. 머리끝까지 화가 나던데? 루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닌데 상상만으로 미칠 것 같아서 여길 온 거야. 조그만 것 하나도 숨기지 않으려고.”

가슴이 간질거리고 손끝이 저릿저릿한 감각 때문에 좋은데 좋다고 말도 할 수 없었다. 너무 좋으면 그걸 입 밖으로 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입만 뻐끔거렸다.

그가 볼을 잡아당기는데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곧 차가 출발했다.

목적지는 지금 생각해도 꿈 같은 둘만의 집이었다. 사는 동안 여러 집을 전전하며 내 집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던 루에게 진짜 보금자리가 생긴 기분이었다. 어쩐지 이 집에선 아주 오랫동안 행복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종종 울겠지만 그때 흘리는 눈물의 텍스처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 혹은 환희일 거로 생각하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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