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울어서 좋은 텍스처 (1)
“저기 팀장님…….”
훌쩍이면서도 끝까지 뭐라도 말하려는 루의 입을 막지 못하고 재혁은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다 들어 주는 게 먼저였다. 그래야 이 남자가 무슨 오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다음엔 달래야지. 너는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해 줘야지. 재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루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네, 뭐든 말해 봐요.”
“지금 쓸게요.”
“응? 뭘?”
“저, 전에 소원 남겨 둔 거 있잖아요. 제가 잘 참아서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한 거요. 팀장님은 제 소원이 사귀는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지만 제가 그거 아니라고 아껴 둔다고 했었잖아요.”
그때가 생각난 재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해서 물었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며 비밀이라고 했었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쓸 거라고 끝까지 말하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네, 기억납니다. 그 소원이 왜요?”
“저 그 소원 지금 쓴다고요. 어차피 그때도 지금이랑 비슷할 때 쓰려고 아껴 둔 거였어요.”
“……?”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대체 어떤 상황을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재혁은 입을 다물고 다정한 표정으로 루를 바라보며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나 루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리며 자신의 손목만 꽉 쥐었다. 쓰러졌다가 금방 일어난 사람이 악력은 어찌나 이렇게 좋은지 손목이 다 시큰거릴 정도였다.
기다리다가 지친 재혁이 물었다.
“소원 말해 봐요. 뭐든 다 들어줄 테니까.”
“저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요. 이제 말 잘 들을 테니까 말 안 들어도 된다는 그런 끔찍한 말 하지 마세요. 저 버리지 마시라고요. 저는 이제 팀장님 없으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어요. 제가 더 잘할게요. 흐… 흡.”
다 큰 남자가 제 손목을 잡고 매달리며 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자 또 못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우는 걸 보면 안쓰러워서 당장이라도 안고 토닥이고 싶어야 하는 건데 저러고 있는 게 또 한없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는 건 대체 무슨 이중적인 마음인 걸까.
재혁은 사랑스러운 눈길로 루를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진짜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루가 소매로 눈을 훔치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요. 다 할 수 있어요.”
재혁은 상체를 숙여 손으로 루의 뺨을 감쌌다. 눈물이 손에 묻어 나와 질척였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을 바라보며 무서움을 가장하며 물었다.
“감금은 싫다며?”
“…….”
놀란 토끼 눈은 역시나 심장에 해로웠다. 이 재밌는 구경을 놓칠 수 없어서 조금만 더 놀리기로 했다.
“그래 놓고 뭘 뭐든 할 수 있다고 합니까.”
입술을 삐죽거리고 망설이며 ‘저…….’라고 대답하는 자세가 이상했다.
재혁은 속으로 말했다. 루, 그거 아니야. 감금은 심했잖아. 그것마저도 괜찮다고 하지 마. 그럼 정말 당신한테서 못 헤어 나올 것 같으니까. 지금으로 충분하잖아.
재혁은 이런 말이 터져 나오려는 걸 참으며 루의 대답을 기다렸다.
“회사는 갈 수 있어요? 저 학자금 갚아야 하기는 해서요.”
“…하, 하하하…….”
재혁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채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함이며,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를 걱정하는 어쩔 수 없이 착한 모범생의 면모 하며, 재벌 아들이 직접 감금해 준다는데 학자금 대출을 걱정하는 독립심이라니…….
진심으로 웃는 재혁을 바라보는 루의 표정이 심각했다. 틀린 대답을 해서 심기가 불편해서 저러나 걱정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재혁은 더 웃다간 안 그래도 마음이 약한 루를 또 울릴 것 같아서 웃음을 멈추고 그의 곁에 앉았다. 그러는 중에도 꽉 잡은 손목은 놓아주지 않아 손을 한 바퀴 돌려 자신의 손이 루의 손등 위로 가게 해서 손을 잡아 주었다. 동그란 눈이 보기 좋게 휘어졌다.
“루 씨, 대체 뭐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말을 들을 필요 없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당신 곁에 있을 거라는 의미였습니다.”
“아…….”
루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물기가 가득했던 눈에서 채 마르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손을 올려 뺨에 흐른 눈물을 닦아 주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런 결정을 하고 온 사람한테 버리지 말라니… 말이 왜 그렇게 됩니까?”
루가 억울하다는 듯 인상을 쓰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요. 그리고 팀장님은 도미넌트잖아요. 도미넌트가 서브에게 ‘이제 내 말 들을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연디 그만하자는 말 아니에요?”
“헉…….”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머리를 한 방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루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그래, 돔이 명령을 들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건 이 세계에선 연디를 그만하자는 말과도 같았다. 루와 자신이 연디 관계가 아니라 그냥 일반 연인이라도 된다는 듯 착각한 것은 루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속을 들킨 재혁은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느라 바빴고 루는 자신이 또 뭔가 잘못한 게 있을까 봐 눈치를 보기 바빴다.
결국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재혁이었다.
“내가 잘못했네요.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내 말 잘 들으세요.”
루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너무 크게 대답해서 아직 제대로 다 풀리지 않은 목에 사레가 들려 캑캑거리다가 재혁이 주는 물을 받아 마시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루가 괜찮아진 것을 확인한 재혁이 결심을 내비쳤다.
“아까는 농담처럼 감금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동거죠. 아직도 나와 함께 사는 게 싫습니까?”
웃고 있던 루의 얼굴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분명히 동거가 싫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아 갑갑했다. 그가 되살아 온 오늘만큼은 어떻게서든 듣고 싶어 재혁은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대체 싫은 이유가 뭡니까?”
다그치듯 물었더니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다음에 물을 말이 무엇인지 뻔히 알 것 같아서 재혁이 먼저 선수 쳤다.
“팀장님 아니고 주인님이 묻는 거니까 대답해, 루.”
무언가 말하려고 벌어지던 입이 재혁의 말에 다물렸다. 루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 있다가 ‘저…….’ 하고 망설이는 소리를 내뱉었다.
슬퍼 보이는 표정과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뻐끔거리는 입술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재혁은 자신의 서브를 잘 알고 있었다. 주인님이 묻는 거라고 했으니까 대답하지 않고 도망가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을 건드린 것 같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 왔다. 몸을 부르르 떨다가 겨우 입을 열어 한숨을 내뱉다 토하듯 말했다.
“팀장님과 함께 사는 게 싫은 게 아니에요.”
“그럼?”
“말하자면 좀 긴데요. 제가 보육원에서 자란 건 아시죠?”
아,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기분은 진짜였나 보다. 이렇게 시작해야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동안 말하지 못했었구나. 묻지 말 것을…….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었다.
송곳 같은 질문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재혁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루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파양을 두 번 당했어요. 보육원에 있을 땐 저를 예뻐하고 귀여워하셨던 분들이었는데 1년도 채 안 돼서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와야 했죠. 크고 난 다음엔 버려진 이유가 저 때문이 아니라 양부모님의 사정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어렸을 때 겪은 일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어요.”
“루…….”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을 찌르고 가슴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것 같았다. 어찌해 줄 수 없는 과거라는 걸 알고 있다. 이미 다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그걸 왜 굳이 지금 물어서 루를 아프게 만들었을까. 원망할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루가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말하려고 했단다. 저 착한 사람은 주인님이 오해하는 게 두려워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니 재혁은 아파도 들어야 했다. 그게 건드리면 안 되는 걸 건드린 사람이 받아야 하는 벌이었다.
“보육원 원장이 틈만 나면 저한테 그랬거든요. 루, 너는 멀리서 보면 귀엽고 예쁘지만 곁에서 보면 너무 답답한 성격이라 아무도 너를 감당해 줄 수 없을 거라고. 평생 외롭게 살아야 할 거라고요.”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응징할 사람이 옆에 없는데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아닙니다.”
더 위로되는 말을 해 주고 싶은데 한다는 말이 고작 이거였다. 그래도 착한 사람은 팀장님이 그렇게 말해 줘서 기쁘다며 어깨에 얼굴을 묻어 왔다. 그러고는 하지 못한 말을 이었다.
“아니면 좋겠지만 팀장님 만나기 전까지는 사실이었어요. 저는 괜히 눈에 띄어서 싫은 소리를 듣는 게 두려워 조용히 살았고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없었어요. 다가오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저의 수동적이고 답답한 성격 때문에 벽을 치는 것 같다고 떠나갔어요. 팀장님처럼 저를 있는 그대로 봐 준 사람은 처음이에요. 그래서 저는 팀장님을 놔드릴 수가 없어요.”
재혁은 대답 대신 외롭고 아픈 남자를 꼭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말도 자신의 마음을 대신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품에 안긴 루가 그동안의 설움을 끅끅 토해 내는 소리가 들렸다. 최대한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괜찮아, 루. 곁에 있을게. 재혁은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루의 울음이 그칠 때까지.
재혁이 뭐라고 하든 다 들어줄 생각이었지만 루는 퇴원이 하고 싶었다.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병원에 너무 오래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래 회사를 빠져도 되나 싶어서 회사 때문에 퇴원하겠다고 말하자 재혁이 지금 속 편하게 회사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냐며 자기가 알아서 처리했으니 걱정 말고 쉬라는 말만 반복했다.
슬프거나 아플 때도 늘 혼자 감당해야 했었던 루는 문제가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좋았다.
병원에 있는 3일 동안 재혁은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루의 곁에 와서 함께 있었다. 1인실이라 충분한 공간이 있는데도 한시도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덩치들에게 맞은 곳은 흐릿한 멍만 남았을 정도로 나았고 재혁의 권유에 따라 정신과 상담도 함께 받았는데 이번 일로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소견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병원으로 와서 제 곁에 앉아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재혁을 보다가 소심하게 입술을 열었다.
“저, 팀장님.”
재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앞으로 밖에서 팀장님이라고 부르면 대답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래도 아직 재혁 씨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운데……. 주인님이라고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는 거로 봐서는 다른 호칭이 필요했다. 조금 더 고민해 보다가 쑥스러움을 참고 겨우 입을 뗐다.
“…형.”
화면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루를 향했다. 저를 보고 있는 그의 눈은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다.
“네, 루 씨. 그렇게 부르니까 좋군요.”
“음… 제가 형이라고 부르면 티…팀장님, 아니 형은 반말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웃고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서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닌가?’ 하고 심장이 조여들었다. 그렇게 틀린 말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형이라고 불렀을 때는 웃었으면서 갑자기 표정을 굳힌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재혁에게 미움받는 건 싫어서 곧바로 말을 고쳤다.
“아니, 그냥 평소에도 말 편하게 하시라고요. 형이라고 부르는데 저한테 ‘이랬습니다. 저랬습니다.’ 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굳어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는 듯 크게 웃는 재혁의 얼굴이 근사해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노트북을 닫아 버리고 가까이 온 그가 고개를 숙이며 목에 입술을 묻고는 크게 호흡했다.
“그래, 루… 나한테 부탁할 게 있어?”
“……!”
아직 말은 꺼내기도 전인데 어떻게 알았지? 하긴 자신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혁이 제 마음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게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까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루는 아직까지도 재혁이 그럴 때마다 놀랐다.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긋 웃으며 침대 위로 올라왔다. 팔을 뻗어 어깨를 감싸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왜 또 먼저 알아맞혀서?”
“네.”
“모르면 바보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계속 나만 보고 있는데!”
“아… 저, 내일은 퇴원할 수 있을까요? 회사를 너무 오래 빠지면 눈치가 보일까 봐 신경이 쓰이고…….”
여기까지 말했을 때 재혁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말을 그만해야 하나 싶어 눈치를 보고 있는데 그가 한숨을 쉬며 계속 말해 보라고 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은… 여기 1인실이라서 병원비도 너무 비쌀 것 같고요. 저 학자금 대출 아직 못 갚았고 월세도 내야 해서 돈 아껴 써야 하거든요.”
뭐든지 완벽한 재혁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계속 병원에 있다간 아득바득 지켜 왔던 생활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몰랐다.
재혁은 입을 다문 채 미간을 좁히며 루를 내려다보았다.
“나, 참……. 내가 애인 병원비도 못 낼 정도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보여? 루는 날 그렇게 생각한 건가? 나한테 얼마나 기대하는 게 없으면!”
그는 화를 누르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이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를 생각하며 눈을 깜빡거리던 루는 어쩔 줄 모른 채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눌렀다.
“너무 기대면 질릴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그냥 조심하려는 건데요.”
그가 감은 팔에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연인끼리 질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 병원도 나 때문에 오게 된 건데…….”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도 연인이라는 말이 좋아서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려고 했다. 무서운 주인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정한 팀장님만 남은 모습이 좋아서 입술을 꿈틀거리자 재혁이 피식 웃었다. 드디어 오해가 다 풀어졌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고 그를 따라 웃자 그가 웃음을 멈추고 인상을 쓰는 바람에 또 눈치가 보였다.
다음 날, 드디어 담당 의사의 허락이 떨어졌다. 대리님이 몸 아픈 건 어떠냐는 안부 문자와 함께 업무 내용을 메일로 보내 놨다고 했으니까 집으로 돌아가 못한 일을 처리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재혁이 차를 몰고 가는 곳의 방향이 이상했다.
“티, 팀… 아니, 형, 지금 어디로 가요?”
“당연히 내 집으로 가지.”
“……?”
재혁의 집으로 가는 게 왜 당연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운전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저 왜 형 집으로 가요?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집에서 챙길 것도 있는데.”
“집 비밀번호 내 핸드폰 번호 뒷자리로 해 놓은 건 아무 때나 들러도 된다는 뜻 아니었어?”
“그건 맞지만…….”
신호에 걸렸을 때 고개를 살짝 돌려 웃은 그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집에 가서 뭐 하려고? 짐을 다 내 집으로 옮겨 버렸는데.”
“네?”
“뭘 그렇게 놀라. 함께 살기 싫어서가 아니라 버려질까 무서워서 피한 거라며. 아니야?”
“그것도 맞지만요. 이렇게 갑자기요?”
“아픈 사람을 혼자 있게 할 수가 있어야지.”
말의 내용은 부드러웠지만 목소리에선 위압감이 느껴졌다.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다간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에 루는 입을 다물었다. 진짜 짐을 다 옮겨 버린 걸까?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았는데…….
목이 부러질까 봐 올려다볼 수조차 없었던 멋진 팀장님과 동거하는 일은 어렵기만 한 일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이루어져 버렸다.
재혁의 집에 도착한 루는 입을 크게 벌리고 탄성을 내질렀다. 방 하나에 자신의 원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재혁이 영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마음 같아선 싹 다 버리고 새로 사들이고 싶었는데 남의 물건을 함부로 버릴 수 없어서 참은 거야.”
루는 재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뺨에 입을 맞췄다. 물건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는 말이 꼭 저를 존중하는 것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 버렸다고 해도 별말 안 했겠지만 이런 사소한 배려가 좋았다.
“저한텐 중요한 물건일 수도 있으니까요. 돈을 모아서 여유가 생길 때마다 하나씩 장만한 물건들이라서……. 안 버려 주셔서 고마워요.”
“뭘,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재혁은 루의 팔을 끌고 좁은 침대에 앉혔다. 재혁의 시선이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가구를 새로 장만하지 않은 게 신경 쓰이기도 하고 내 뜻에 따라 준 게 고마워서 선물을 하나 하고 싶은데 갖고 싶은 게 있어?”
재혁의 질문에 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살면서 갖고 싶은 게 있냐는 질문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도 재혁이 물으니까 대답을 하긴 해야겠는데 떠오르는 게 없어서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부드럽게 묻는 재혁의 질문이 플레이할 때 ‘대답!’이라고 말하는 주인님 같아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갖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어서 그대로 대답했다.
“각서가 필요해요.”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각서라고? 무슨?”
“저를 떠나지 않겠다는 각서요.”
재혁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역시 괜히 말한 것 같았다. 대답하지 않으면 더 혼날 것 같아서 말했을 뿐인데 물어 놓고 대답했더니 화를 내니까 억울해졌다.
“그거 말고 다른 건?”
한숨 끝에 재혁이 다시 물었다.
“저… 그러면 페어리 갖고 싶어요.”
재혁이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삼켰다.
“우리가 함께 사는 기념으로 갖고 싶은 걸 물었는데 고작 진동기 따위를 말해?”
화가 났나 싶어서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던 루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진짜 갖고 싶은 건 이미 말했고 인상을 찡그려서 다른 걸 말했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하고 대체 어쩌라는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불쑥 어렸을 때 일기장에 썼던 내용이 생각나서 울컥했다.
중학교 졸업식 날, 친구들은 모두 신형 핸드폰이나 노트북을 선물받아서 자랑하기 바빴지만 자기는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만약 먼 훗날에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어봐 주는 누군가가 생긴다면 핸드폰이라고 말해야겠다.]
그때는 아픈 기억이었지만 재혁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루는 조그만 목소리로 핸드폰이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제야 재혁이 참 소원 하나 소박하다며 루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물었다.
“하고많은 것 중에 왜 핸드폰이야?”
“어렸을 때 일기장에 그렇게 썼던 게 생각나서요.”
이 말을 시작으로 어린이날이나 생일, 졸업식 등 각종 기념일마다 자신이 얼마나 쓸쓸하게 보냈는지, 선물을 껴안고 부모님과 사진을 찍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에 대해서 말했다. 말하는 중간중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러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재혁의 눈가가 젖어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매번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던 것처럼 이번에는 루가 재혁의 눈빛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외롭고도 힘든 세월을 어떻게 견뎠냐고, 너 참 아팠겠다고…….
달래듯 어루만지는 재혁의 시선에 눈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함께 살기로 한 날인 데다 그동안 재혁에게 주었던 마음이 외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는데도 왜 이렇게나 눈물이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따뜻한 음식을 먹고 함께 샤워까지 마친 후에 침대에 누웠다. 이마를 쓰다듬어 주고 때때로 입맞춤을 해 오는 재혁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혼자 재혁의 집에서 그를 기다리던 날, 플레이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입원하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늘은 퇴원한 날이니까 제대로 즐기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무엇 때문인지 재혁은 자신의 몸을 쓰다듬기만 했다.
먼저 말해도 될까? 개새끼 주제에 너무 밝힌다고 혼나면 어떡해.
그런 마음이 들자 플레이 제안을 먼저 할 수도 없었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로 누운 몸이 그와 닿을 때마다 움찔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성욕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인내심이 부족한 건 아니었는데 재혁과 함께 있으면 참기가 힘들었다. 이런 게 습관이나 세뇌인가?
재혁이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왜, 잠이 안 와?”
“…아니요, 그게 아니라…….”
“자꾸 뒤척여서. 많이 자야 빨리 회복하지. 마음 같아선 며칠 더 휴가를 썼으면 좋겠는데 싫다니까 어쩔 수가 없지.”
주인님이 아닐 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나른했다. 무슨 말이든 들어줄 것 같은 목소리에 용기를 얻은 루는 재혁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 진짜 괜찮은데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의사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재혁이 왜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냐고 묻는 표정으로 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루는 시선을 피해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괜찮으니까…….”
뭔갈 눈치챘다는 듯 피식 웃는 재혁 웃음소리에 민망해졌다. 이러면 더 고개를 못 드는데…….
“괜찮으니까, 뭐?”
“네? 아니에요. 그냥 괜찮다고요.”
재혁이 손을 올려 루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감촉이 뺨에 닿자 자동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 비벼도 좋은 손과 점점 가라앉는 재혁의 눈빛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러나 어두워지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풀렸다. 루는 오늘도 플레이는 없겠다는 생각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재혁이 루의 턱을 잡아 들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완전히 회복하면 그때 맘껏 괴롭혀 줄 테니 오늘은 참아.”
“…하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가 원하고 있는데 참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겨서 말을 보태어 봤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랗게 뜬 눈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껴안은 몸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오갔다. 재혁의 입에서 나오는 숨이 목에 달라붙자 루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재혁의 몸에 바짝 붙였다. 앞쪽에서 느껴지는 부피감에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뒤가 조여들었다.
‘아… 너무 좋아.’
재혁은 루가 허리를 부딪쳐 오는 걸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나… 참. 어휴.”
“어… 아니에요!”
“뭐가? 뭐가 아닌데? 응?”
“어쨌든 지금 생각하시는 거 아니라고요.”
“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은 좆을 비비지 말고 해야 진정성이 있지. 내 좆에다가 계속 박치기를 해 대면서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어 줘?”
아까부터 허리를 계속 움직이고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재혁의 성기가 부풀어 올라 먼저 닿았기 때문에 너무 자극적이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였다.
루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노려볼 수는 없어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혼자 투덜거렸다.
“그러는 티, 팀장님도 섰거든요. 그러면 팀장님도 진정성 없는 건데…….”
“그래서 나는 아니라는 말을 안 했잖아.”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었다. 아까부터 하고 싶어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부끄러워서 어디든 숨고 싶은데 숨을 데라고는 재혁의 품속뿐이었다. 그래서 루는 더 격렬히 그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어떻게 갈수록 애가 되어 가.”
싫지는 않은지 꼭 끌어안으며 하는 말에 루가 소심하게 대답했다.
“아이인 적이 없었으니까요.”
솔직하게 튀어나온 말에 목덜미를 잡고 있던 재혁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고는 등을 느리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단순히 그에게 소심한 반항을 했을 뿐인데 몇 배의 위로를 받는 기분이었다.
재혁이 입술을 귀에 바짝 대고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내 새끼도 하고 개새끼도 하자. 지금부터 하고 싶은 거 다 해.”
루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흐읏… 아! 주인님…….”
그는 오늘 확실히 이상했다. 잔뜩 혼나면서 울 걸 기대했는데 내 달라는 혼은 안 내고 긴 시간 몸이 다 녹을 정도로 애무만 계속해 댔다. 그가 물고 빨수록 성감이 치솟았다.
쾌감을 참기가 힘들어 허리를 비틀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붉은 입술이 제 것을 물고 질척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숨이 막히지도 않는지 그는 사정할 때까지 아래를 빨 생각인 것 같았다.
“아, 나…나올 것 같아요. 싸면 안 되는데…….”
성기에서 입이 떨어져 나갔다.
“싸도 돼. 오늘은 플레이 안 할 거니까.”
그러고는 다시 깊숙하게 베어 물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손으로는 고환을 주무르고 볼우물을 패며 빨아 대는 통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루는 제 것을 물고 있는 사람이 주인님이라는 것도 잊고 건방지게 그의 뒷머리를 손으로 눌렀다. 그러고는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그는 나무라지 않고 구역질도 참아 가며 목구멍 끝까지 성기를 머금었다. 콱 조여드는 느낌에 루는 더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아아… 좋아요.”
고개를 젖히고 잔뜩 힘을 준 채 뜨거운 것을 가득 토해 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지도 못한 채 몸을 떨던 루는 ‘히익!’ 소리를 내며 급하게 그의 이마를 밀었다.
“어, 어떡해! 죄송해요. 주인님… 뱉으세요. 아…안 싸려고 했는데. 쌀 줄 몰랐어요.”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안 싸려고 했는데 분명히 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히 주인님의 입 속에다가 정액을 싸지르다니…….
오늘은 플레이 안 할 거니까 싸도 된다는 말을 루는 다르게 이해했다. 사정하면 플레이를 안 해 줄 거라고! 그런데 싸 버리고 말아서 플레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꿀꺽.
이 와중에 재혁의 목울대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삼킨 거예요? 그걸 왜 삼키세요.”
재혁이 웃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 모습이 무척 섹시하게 보여서 입을 벌리고 바라보았다.
“너도 삼키잖아. 나는 왜 안 돼?”
“…….”
루가 눈을 크게 뜨고 재혁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삼키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자기 걸 주인님이 삼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개새끼 좆물을 삼키는 주인님이 어딨는가에 관한 생각 때문에 플레이하지 못해서 서운했던 마음이 날아가 버렸다.
재혁이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래서 우리 루는 좀 풀렸어?”
“네? 뭐가요?”
“꼴려서 나한테 좆 비볐잖아. 몸 아프니까 삽입은 못 할 테고 그래서 풀라고 빨아 주기까지 했는데 뭐가요라니!”
“어…….”
루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싸면 플레이를 안 해 주겠다고 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플레이는 안 하고 서비스만 해 줄 생각이었다는 말인가?
“히익!”
“왜 놀래?”
“아니… 이상하잖아요. 주인님이 서비스해 주고 저는 가만히 누워서 싸기만 하고.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재혁이 웃으며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뗐다.
“아기는 그래도 되니까. 오늘은 내 새끼 한 거로 하지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재혁을 보던 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우유는 제가 드린 거 같긴 하지만…….”
갑자기 민망해진 재혁이 루의 말을 들었으면서도 못 들은 척했다. 플레이도 아니었고 쑤시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루의 것을 입에 넣고 빠는 것만으로 만족감이 느껴지는 것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재혁은 순간 이래서는 진짜 플레이가 불가능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퇴원한 사람을 두고 플레이를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쓰레기라서 그런 거라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오늘이 지나면 루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생각이었다.
건강한 혈색으로 제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을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배 속이 끓었다.
‘릴랙스. 김재혁, 참아. 오늘 퇴원한 사람이라고.’
끓어오르는 열을 식히느라 일부러 느리게 호흡을 하는지도 모른 채 루는 재혁의 곁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잠에 푹 빠져 있었다. 좋은 꿈을 꾸는지 눈꼬리가 조금 휘어 있었다. 들키지 않게 살짝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잘 자. 우리 아기.”
아이인 적이 없어서, 힘들다고 말해 봐야 들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못 부렸던 투정이나 응석을 다 받아 줄 생각이었다. 형도 아빠도 주인님도 다 하면 될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롤플레잉도 허용되는 디엣 관계였으므로.
제 성향을 자각한 이후로 오늘만큼 만족스러운 때가 없었다.
그에게 아빠가 되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천사가 쉬는 숨이 목을 간지럽혀서 잠을 못 자도 좋았다.
“이번 주 주말엔 핸드폰을 사러 가자. 갖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모두 내 옆에서 다 할 수 있기를.”
루가 눈을 뜨고 있었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말을 내뱉으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 맞붙은 심장이 서로의 소리에 반응하며 속도를 맞춰 가고 있었다.
새까만 어둠이 물러가고 하늘이 푸른색으로 변하는 새벽이 되어서야 재혁은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품에 안긴 루의 체온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한 꿈을 꾸었다.
다음 날 루는 회사 사람들의 걱정과 안부를 들으며 빛나게 웃고 있었다. 다른 남자들 틈에 섞여서 걱정을 듣는 게 저렇게 좋을까 싶었다. 말로는 사람을 믿지 못해서 너무 가까이하는 건 무섭다고 하면서 사람들 속에 있는 루는 누구보다도 빛나 보였다.
그래서 재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답답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 혼자 외롭게 지낸 것이 아니라 루의 주변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떠날 것으로 생각해서 항상 몸을 사려 왔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밝고 사랑스러워서 누구나가 탐내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빠졌다. 저 보석을 가장 처음 발견한 건 저인데 발견해서 잘 닦아 놨더니 다른 사람들 눈만 호강시켜 줬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쩌면 저렇게 예쁘게 웃지?
재혁은 괜히 심사가 비틀려 루에게 문자를 보냈다.
[뭐가 그렇게 좋아? 회사가 그렇게 좋으면 야근시켜 줘?]
[아니요, 대리님이 저 걱정했다고 이제 아프지 말라고 해 주시니까요. 생각도 못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사실 오늘 오면 혼날 줄 알았어요. 제가 아파서 대리님이 피해를 봤을 테니까요.]
문자를 보고 또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이 남자는 생각이 다 그쪽으로만 돌아갈까. 그래서 재혁은 질투도 할 수 없었고 야근하라고 괴롭힐 수도 없었고 심지어는 삐진 척을 할 수도 없었다.
머리 쓰지 않는 순수한 서브미시브는 독약이었다. 순간마다 치명적으로 중독의 범위를 늘려 가는 독.
그러나 독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아도 그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도미넌트가 플레이하지 않아도 늘 풀발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금이 아주 만족스럽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인정하기엔 아직도 조금 쑥스러웠기 때문에…….
* * *
토요일 아침이었다. 남들은 다 쉬는 주말이었고 재혁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 루는 마음 편히 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밀린 일이 많았는데 그 몸으로 무슨 야근이냐고 뭐라고 하는 통에 정시에 퇴근해야 했다. 재혁이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건 역시나 불안했다. 살면서 한 번도 게으르게 살아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습관을 바꾸기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루는 재혁이 깨지 않게 조심히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깨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팔이 잡혔다.
“어디 가려고?”
“어… 그게 그러니까… 출근해야 할 것 같아서요.”
고개를 돌리자 잠에서 덜 깬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그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잠을 쫓아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다가 루의 팔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몸이 기울어지며 그의 품에 안겼다.
“오늘 토요일인 걸 잊어버렸어?”
“아니요, 아는데 영 불안해서요.”
한숨을 내쉰 재혁이 몸에서 루를 떼고는 시선을 내렸다. 다정하지만 불만이 드러나는 눈빛에 그 눈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그러게. 뭐가 그렇게나 불안할까?
생각해 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재혁이 팀장으로 있는 이상 그가 자신을 자를 리는 없을 테고 회사에서도 교통사고로 위장된 루의 사고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불안한 이유는 재혁 때문도 아니었고 회사 사람들 때문도 아니었고 오랜 세월 습관처럼 굳어진 부지런함 때문이었다. 남들 일할 때는 물론이고 쉴 때도 일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압박감이 원인이었다.
루에게 미움받는다는 것은 곧 버림받는다는 뜻이고 버림받는다는 것은 생존과도 직결되는 문제였으니까 불안함을 쉽게 떨치기가 힘들었다.
답을 기다리는 재혁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뭐라고 말해야 긴 시간 쌓인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루는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뭐가 불안한지 모르겠는데 그냥 불안해요. 학교 다니면서 등록금은 학자금 대출로 어떻게 한다고 해도 월세랑 생활비는 벌어야 했거든요. 알바를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 한번은 다단계도 잡혀갔었어요. 거기서 빠져나오느라 고생도 하고 이상한 일에 연루돼서 경찰서도 가고요. 이런 일들이 자꾸 겹치니까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눈을 마주치느라 잠시 떼어 놓았던 몸을 다시 겹치며 그가 말했다.
“우리 루, 고생했네.”
투정을 그만 부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저를 안고 등을 토닥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졌다. 징징거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자꾸 이러면 눈물을 참기도, 의연하게 굴기도 어려워진다. 루는 눈에 힘을 주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비비며 견뎠다.
“그러니까 저 회사 보내 주세요. 같이 살아도 출근은 시켜 준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부드러운 대답에 마음이 놓이는 순간 그가 말을 보탰다.
“주말에 출근해도 된다는 말은 한 적이 없어.”
어쩐지 그냥 잘 넘어간다 했는데 역시 아니었다. 재혁은 자신을 보내 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후…….’ 하고 짧게 한숨을 쉬자 그가 딱밤을 한 대 때렸다.
“앗! 왜 때려요.”
“맞는 거 좋아하잖아.”
“그건 맞지만…….”
진짜 왜 맞았는지 몰라서 이상한 얼굴을 한 채 그를 바라보자 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루, 뭘 잘못했는지 말해 봐. 정답을 맞히면 회사 보내 줄 수도 있어.”
루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재혁은 짓궂기는 했지만 이제껏 약속을 안 지킨 적은 없으니까 잘만 하면 출근해서 일을 다 마친 후에 다음 주부터는 기분 좋게 출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음… 아! 한숨 쉬어서요.”
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건 틀렸고……. 뭘 잘못했지? 아무리 생각해도 재혁이 꿀밤을 먹일 만큼 잘못한 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빨리 생각해야 하는데 생각이 안 나서 마음이 조급해 죽겠는데 재혁이 다섯까지만 센다고 하니까 머리가 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5, 4, 3, 2…….”
“아, 알겠어요. 잠시 멈춰 봐요.”
“이게 이제 머리를 막 쓰네? 그 말 해 놓고 시간 벌었잖아. 빨리 말해.”
“그러니까, 그게… 어… 포기할게요.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요. 그냥 출근 안 할게요.”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재혁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는 일엔 최선을 다하고 제 영역이 아닌 일은 빨리 포기해 버리는 것도 루가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재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포기가 너무 빠른데?”
“생각해 봐도 모르겠으니까요. 정답 알려 주실 거예요?”
재혁은 잠시 생각하는 듯 입꼬리만 꿈틀대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불안해했으니까.”
“네?”
루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안한 것 자체로 잘못이라니… 왜?
“감히 내 옆에서 불안해했잖아.”
“아…….”
루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재혁의 말은 맞는 말이기도 했고 틀린 말이기도 했다. 그의 옆에서 불안해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 곁에서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은 또 좋아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정을 누르고 참는 법만 익혔는데 재혁 앞에서는 새로운 감정이 생겨나고 겉으로 드러내지 못해서 안달 난 사람처럼 되는 게 이상했다.
그가 좋아서 울고 싶었고 또 그가 좋아서 자꾸만 웃음이 났다.
결국 회사는 가지 못하고 가 볼 데가 있다며 재혁의 손에 붙들려 따라 나온 곳은 커다란 백화점이었다. 물건을 사는데 백화점은 가 본 적도 없었던 루는 여기에 왜 왔는지 물으려다가 아까부터 재혁의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내리자.”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마자 안전벨트를 풀어 주며 한 말에 두말없이 차에서 내렸다. 한발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쫓아가며 눈앞에 보이는 넓은 등에 감탄했다.
주말 백화점 안은 멋있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누구도 재혁만큼 근사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재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는 게 보였다. 괜히 우울해져서 걸음이 느려졌다.
잘 가던 그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열심히 쫓아가던 루가 반동으로 인해 상체가 기울어졌다. 재혁이 넘어지지 않게 허리를 받치지 않았다면 백화점 한복판에서 슬라이딩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옆에 서서 걸으면 되잖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그리고 사람들이 형만 쳐다보는데요.”
주변을 한번 쓱 훑어보던 재혁이 누가 본다고 그러냐며 루의 손을 꽉 잡았다. 백화점 한복판에서 이러면 누구라도 의심을 할 것 같아 최선을 다해 손을 뺐다. 재혁이 끈질기게 다시 손을 잡아 왔다. 이러다간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날 것 같은데…….
저는 괜찮지만 재혁은 직급이 높은 사람이었고 제우스의 사장이 자신의 가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을 사과하기 위해 병문안을 왔을 때 들은 바로는 그의 집안은 누구나 들으면 알 수 있는 재벌가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루는 더 굳게 다짐했다. 이 비밀을 절대 새어 나가지 않게 잘 지키겠다고. 그의 일과 삶에 짐이 되진 않겠다고.
“손잡고 걷는 게 싫으면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걸어.”
결국 이렇게 타협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걱정되면서도 그의 옆에 딱 붙어 걸으니 재혁을 힐긋거리는 사람들에게 이 남자가 내 남자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저… 팀, 아니 형… 근데 백화점엔 왜 왔어요?”
“핸드폰 사러.”
간단하게 말을 마친 재혁은 루를 데리고 백화점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하며 백화점을 통째로 사들일 것처럼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핸드폰, 태블릿 피시까지는 고맙다고 잘 쓰겠다고 눈물까지 글썽였지만 노트북에 명품 정장에 시계까지 다 사겠다고 덤비는 재혁을 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제발 그만 사도 된다고, 이런 물건은 제게 필요 없다고 말해도 재혁은 귀가 들리지 않는지 무시하고 물건을 담기만 했다.
양손으로 다 못 들 만큼의 물건을 사고서야 쇼핑이 끝났다. 이걸 다 어떻게 들고 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던 루에게 재혁이 웃으며 직원을 불렀다.
“이 물건들 여기 주소로 배달 부탁드립니다.”
“네, 손님. 감사합니다.”
루는 멍하게 서서 직원의 손에 차곡차곡 정리되는 물건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재혁의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아침엔 분명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은 얼굴 가득 웃음기가 묻어 있는 게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싱긋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지만 루는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런 것들은 다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재혁이 루의 소매를 당기며 발을 재촉했다.
“배고프잖아. 밥 먹으러 가야지? 여기 꼭대기 층에 스테이크가 꽤 괜찮아.”
“…네.”
아침부터 나와 오전 내내 넓은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비슷한 옷을 갈아입느라 에너지 소모가 많이 되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재혁이 웃고 있어서 따라 웃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날에 왜 웃을 수 없는지 저도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데려간 곳은 풍경이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언제나처럼 비싸고 양은 적고 맛있는 음식이었다. 재혁도 배가 고팠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음식을 먹으며 이따금 루의 접시에 고기와 채소를 옮겨 주었다.
그와 함께하는 주말 데이트가 행복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벅찼던 사람과 함께 일어나고 밖으로 나와 쇼핑을 하고 식사까지 하는 건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준 고기를 씹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파양되기 전날, 양부모님도 그렇게 하셨다. 외식하고 선물을 받고 함께 웃고 떠들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 그들이 선물해 준 옷을 입고 새 가방을 메고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다. 끝까지 함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눈물 섞인 한탄과 함께 돌아오는 차 안에서 루는 생각했다.
이런 선물이나 값비싼 음식 따위 한 번도 바란 적 없었다고.
입에서 육즙을 터뜨리며 착착 감기는 1등급 한우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재혁이 자신의 마음을 눈치챌까 봐 루는 최대한 맛있게 고기를 씹어 삼켰다.
“맛있어?”
“네, 맛있어요.”
웃으며 대답하자 재혁이 기쁜 듯 추가로 주문한 스테이크를 루의 접시에 더 올려 주었다. 질긴 고무를 씹는 것보다 더 힘들게 씹어 삼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음료로 고기를 넘기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신은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고 앞에 있는 사람은 무책임한 양부모님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그냥 연인끼리 데이트를 할 뿐이라고.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즐거워하는 재혁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보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불편한 기분으로 식사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루는 당연히 지하 주차장으로 갈 줄 알고 지하 1층을 눌렀는데 재혁이 로비로 버튼을 바꿔 눌렀다. 그러고는 불쑥 물었다.
“또 말해 봐.”
“뭘요?”
“졸업식, 입학식, 생일, 크리스마스 때 갖고 싶었는데 가질 수 없었던 것.”
“…….”
그제야 루는 재혁이 왜 백화점을 통째로 살 정도로 물건을 쓸어 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집에 온 첫날, 동거 기념으로 갖고 싶은 걸 물었을 때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한 일이었다.
핸드폰 하나만 사는 줄 알고 있었는데 울먹거리며 했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 준 거였다. 루는 그것도 모르고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에 갇혀 파양되기 전날을 떠올리며 그의 진심을 의심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려 왔다.
벅차오르는 기분에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웃으며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재혁의 모습이 눈물 때문에 뿌옇게 변해 갔다.
재혁은 갑자기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루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의 팔을 잡았다.
루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나왔다. 쉬지도 않고 아래로 뚝뚝 떨어져 팔을 잡은 재혁의 손에 떨어졌다. 내려가는 동안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두 사람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격한 감정이 한 번에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루는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오래 울었다.
다 큰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는데 소리를 낼 순 없어서 이를 꽉 물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 준 유일한 사람 앞에서 마지막으로 지키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재혁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루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고개를 숙여 귀 가까이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왜 우는지는 모르겠는데 뚝 안 하면 여기서 아웃팅당할 것 같은데?”
역시나 재혁은 루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루의 눈에서 나오려던 눈물이 쏙 하고 들어갔다. 정신을 차린 루가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들이 한둘씩 내리고 있었다.
“이래선 쇼핑이고 뭐고 더 할 수 없을 것 같네. 집으로 가는 수밖에.”
다시 지하로 내려와 차에 올라탔다. 사람들이 없다고 생각하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왔다. 재혁이 안전벨트를 매 주려고 하다가 손을 멈추고 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시선이 닿자 울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우면서도 그가 저를 보고 있는 게 좋았다.
“왜 자꾸 울어.”
루가 울먹이며 대답했다.
“미안해서요.”
“뭐가?”
“흐읍… 그런 게 있어요. 절대 말 못 해요. 주인님이 물으셔도 말 못 해.”
“……?”
굳이 끝까지 물을 생각은 없었는데 주인님이 물어도 대답을 못 하겠다고 하니 더 궁금해졌다. 재혁은 얼굴을 가리는 루의 손을 낚아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무릎 위에 엎어 놓고 대답할 때까지 엉덩이를 때려 주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환자를 그렇게 대할 순 없었다.
다 나았다고는 하지만 그날의 일은 재혁의 가슴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가 끌려가서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고통을 받은 게 꼭 제 잘못인 것 같아서 그랬다.
그냥 넘어가기엔 궁금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플레이를 하기엔 루의 상태가 걱정되고…….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 생각에 빠져 있는 재혁을 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좋아, 그럼 내가 맞혀 볼게. 나한테 뭔가 해 주고 싶은데 받기만 해서 미안해?”
훌쩍거리며 잠시 생각하던 루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미안하긴 한데 그것 때문에 운 건 아니었어요. 그냥 안 물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혹시 쇼핑하다가 나보다 잘생긴 남자라도 봤어? 한눈판 게 미안한가?”
재혁은 자기가 물어 놓고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알면서도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냥 던져 본 거였다. 그런 재혁이 한심하다는 듯 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물은 건 아니죠?”
답답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서서히 인내심의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대체 왜!”
부드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음성이 거칠게 나갔다. 루가 어깨를 움찔하며 금방이라도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보통 이 정도까지 하면 고집을 꺾고 말해 줄 법도 한데 오늘따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지 도통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단 집으로 가자.”
재혁은 달래듯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너무 무르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문제라는 자각 없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관대해졌다. 지금 끝까지 묻지 못한 것도 모두 루 앞에서 무뎌졌기 때문이었다.
벨트를 다시 매 주고 못마땅한 얼굴로 어깨를 툭툭 치며 운전대를 잡았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와 한참 운전을 하다 보니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디엣 관계가 아니라 일반 연인 관계에서도 지금 이 일이 화가 날 일이고 이상한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루는 유독 거기에 약했으니까.
생각해 보니 일반 연애 관계에서도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연인에게 이유를 묻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대단한 해답을 찾아내기라도 한 듯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다정하게 루를 불렀다.
“루.”
“…네, 네?”
음악 트는 것도 깜빡한 나머지 적막만 흐르던 차 안에서 제 이름이 들리자 루가 깜짝 놀라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은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존대로 말했다. 루의 마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다.
“연인 관계에서 말이죠.”
“…네. 근데 형, 갑자기 존댓말을…….”
역시나 동요하는 게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는데 그 이유를 묻는 건 잘못입니까?”
예상대로 루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루의 얼굴이 황당함에 물드는 것을 보면서 재혁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럴 거면서 왜 단호한 척을 했을까.
기회를 잡은 김에 조금 더 밀어붙였다.
“아니면 울어 놓고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그 이유도 말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잘못입니까?”
일부러 ‘사랑하는 사람’에 힘을 주어 물었다. 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루는 유독 디엣 관계와 연애 관계를 구분 짓는 것에 민감했다. 그래서 그런지 연애하는 걸 확인받고 싶어 했고 확인해 주면 어린 애처럼 좋아하곤 했다.
루가 눈동자를 굴리며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아…….’ 하는 소리를 냈다가 머리도 긁적였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재혁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루가 그러는 걸 지켜보았다. 언제봐도 귀여운 장면을 재촉해서 놓치고 싶진 않았다.
“미안해요.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나쁠 것 같아요.”
재혁이 친절한 척하며 은근히 대답을 재촉했다.
“그래, 기분이 나쁘네. 그러니까 대답해야지?”
“너무 부끄러운 말이라 집에 가서 하면 안 될까요?”
이제까지도 기다렸는데 더 못 기다릴 것은 없었다.
집에 도착한 재혁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루를 바라보며 웃음을 삼켰다.
“무슨 차 줄까? 낮이니까 커피?”
“네.”
재혁은 빠르게 커피를 내려서 루 앞으로 가져갔다. 저 조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뭘까 항상 기대하게 만드는 것도 루의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한 손엔 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루의 어깨를 감쌌다. 루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 왔다. 새까만 동공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그러니까요. 계속 이런 얘기 해서 미안하지만… 이것도 저니까요. 숨기지 않을 테니 그냥 그대로 봐 주세요. 미움받을까 봐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형은 안 미워할 것 같기도 하고…….”
재혁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눈만 한번 깜빡였다.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겠다는 신호였다. 그가 알아들었는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파양되기 전날, 양부모님은 오늘 형이 했던 것처럼 다정하게 백화점에 데리고 가셔서 선물을 잔뜩 사 줬고 다 함께 외식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는데… 그다음 날 저는 그 선물들을 가지고 보육원으로 돌아와야 했거든요. 그때가 기억나서 그랬어요.”
뾰족한 가시가 한꺼번에 심장을 찌르는 기분이었다. 앞서 몇 번 들은 적 있는 말인데도 들을 때마다 아팠다. 어린아이가 겪었어야 했을 상실감은 어른이 되어 겪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것도 난생처음으로 행복을 맛봤다가 그다음에 바로 겪었을 불행이었다면 더더욱.
재혁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크게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정리한 뒤에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오늘이 불안했던 건 당연한 일인데 나한테는 왜 미안했어?”
루가 머금고 있는 커피를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쯤이면 자신의 연인이 당당해질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서브미시브를 두고 당당해지길 바란 적 없었다. 이 또한 사랑하고 난 뒤 바뀐 취향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의 남자가 더 소중해졌다. 어쩌면 취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신루 자체였다.
눈물엔 색깔도 질감도 모양도 없는 것처럼 자신의 취향도 형체가 불분명해졌다. 옷에 떨어지면 사라져 버리는 눈물처럼 취향이 루에게 흡수된 게 분명했다.
그래서 자신의 취향은 곧 신루가 되었다고 재혁은 생각했다.
“옆에서 불안해했으니까요.”
말을 마친 루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불안해한 게 잘못이긴 했는지 재혁의 미간이 살짝 구겨져 있었다. 그래서 빠르게 말을 보탰다.
“그런데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형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때가 생각나고…….”
말을 듣고 있던 재혁이 팔을 뻗어 작은 몸을 깊이 끌어안았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한 음성으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아. 내 옆에만 있다면 뭐든 해도 돼.”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루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으읏… 아니, 괘…괜찮다고 했잖아요.”
사정 방지 링이 끼워진 채 벌써 몇 분 동안 구멍이 괴롭혀지고 있었다. 오늘의 죄목은 사람들 많은 곳에서 운 것이었다. 곁에서 불안해한 게 잘못한 일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부분은 넘어갔으면서 감동받아서 운 게 왜 잘못이라는 걸까.
손가락으로 느끼는 부분만 교묘하게 문지르는 통에 벌써 몇 번이나 기절할 것 같은 절정감에 차올랐으나 방지 링이 끼워져 있어서 싸지도 못했다. 이렇게 억울할 데가 없었다.
“아, 아까는 괜찮다고…….”
재혁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어린 시절 상처 때문에 불안해한 게 문제가 아닌데?”
그럼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일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주인님이니까 마음대로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어리광은 부려도 된다고 했지만 진짜 궁금한 걸 물어보면 혼날 수도 있으니 알아서 조심해야 했다.
“으읏… 거기, 아,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렇게 쑤셔지고 싶어서 사람들 많은 데서 운 거 아니야?”
“…네?”
방금까지도 쌀 것 같았던 기분이 순식간에 식어 버렸다. 그에게 쑤셔지는 건 언제나 기대되는 일이었지만 그래서 울었다는 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혁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내가 미쳤지. 이렇게 야한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다니.”
“…저 밖에서 벗은 적 없어요.”
“울었잖아!”
정말 단단히 화가 났다는 듯 아래를 쑤시는 손가락이 갑자기 더 빨라졌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쾌감이 빠르게 차올랐다.
“으읏… 으… 주, 주인님.”
“입 다물어.”
그래도 루가 신음을 멈추지 않자 재혁은 옆에 가져다 놓은 입마개로 입을 막아 버렸다. 그의 몸 상태를 생각해 멍이 들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는 플레이는 할 수 없으니 최대한 분위기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요즘은 굳이 플레이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 어떤 서브와 하는 플레이보다 루와 하는 바닐라 섹스가 훨씬 더 꼴렸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발칙한 루가 플레이를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오늘만 해도 쇼핑하고 돌아와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그를 잘 토닥인 뒤에 따뜻한 물에 샤워하게 하고 재울 생각이었다. 많이 울었으니까 더 울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루가 꼼지락거리며 엉덩이를 고간에 비벼 왔다. 모르는 척 눈을 감았더니 몸을 홱 돌려 입술에 입을 맞췄다. 웃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인상을 썼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자길 보면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느냐고. 자기는 죽겠는데 왜 주인님은 시도조차 안 하냐고. 몸이 완전히 나았는데 안 해 주니까 서운하다고.
그러는데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서 재혁은 억지로 사람들 많은 데서 울었다는 말도 안 되는 죄를 만들어 옷을 벗긴 후에 젤을 듬뿍 짜서 구멍을 넓혔다. 자주 하지 않아서 어느새 좁아진 구멍에 잘못 넣었다가는 그가 힘들 것을 배려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것만 하면 또 왜 플레이 없이 구멍만 푸냐고 할까 봐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조절하며 사정 방지 링을 끼우고 입마개까지 채웠다.
적당히 조절하며 루만 흥분시킬 생각이었는데 맛있는 걸 앞에 두고 괜찮을 리가 없었다. 루가 흥분에 몸을 떨면 떨수록 누르고 있던 흥분감이 배 속을 홧홧하게 달궜다. 입마개를 하고 흥분에 절어 빨개진 얼굴과 제 손가락을 조여 대는 구멍과 하얗고 토실한 엉덩이가 색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씨발, 야해 빠져서는.”
방지 링을 끼운 성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더는 한계라는 듯 기대를 담은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같이 촉촉이 젖어서는 재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보고 어떻게 참아.
재혁은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내려 물이 줄줄 흐르는 성기를 꺼냈다.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이 제발 넣어 달라고 벌름거리고 있었다. 쓰읍, 침을 삼킨 재혁이 입술을 핥으며 입구에 성기를 갖다 댔다. 뜨거운 감촉을 느꼈는지 루가 허리를 움찔 떨었다.
찰싹.
“가만히 있어. 어딜 버릇없이 졸라.”
손찌검과 동시에 구멍이 조여들었다. 그 압박감에 단 숨을 내뱉은 재혁이 서서히 허리를 밀고 들어갔다. 마개가 끼워진 입에선 신음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충분히 풀어져 달아오른 구멍에서 조금 전 넣어 놓았던 젤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도 뭐가 그렇게 힘든지 시트를 잡은 손등이 희게 변했다.
“후으… 이 안에 딜도를 박아 넣고 있었어야 했는데. 좁잖아. 힘 풀어.”
다시 찰싹.
붉은 자국도 남지 않을 정도의 약한 스팽이었다. 큰 자극이 되지 않았을 텐데 루가 허리를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불쌍한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리광만 늘어서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방지 링을 끼워 놓은 지 한참 지났으니 참기가 힘들만도 했다. 그걸 다 알면서 재혁은 허리를 돌려 그가 느끼는 부분을 문질렀다.
퍽퍽 치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깊이 쑤셔 박아 뭉근하게 문질렀을 때 루가 자지러지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 바람에 잔뜩 조여든 구멍이 성기를 압박해 왔다. 잠시 허리 짓을 멈추고 숨을 고른 재혁이 방지 링이 끼워진 성기를 잡고 아래위로 움직였다. 손안에 들어온 성기가 뜨거웠고 열이 오르면 오를수록 진동하는 내벽에 미칠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하드한 플레이는 하지도 않았는데…….
루 앞에서 돔의 자존심 따위야 얼마든지 내던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막 플레이에 재미를 붙인 루가 자신과의 관계에 더 빠져들었으면 했다. 그래서 재혁은 당장이라도 방지 링을 빼고 빠르게 처박고 앞을 문질러 사정시켜 주고 싶다는 생각을 접었다. 더 깊이 루를 홀리고 싶었다.
성기를 쥔 손에 힘을 주고는 고개를 숙여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었다. ‘윽!’ 하는 소리가 입마개에 짓눌려 들리긴 했으나 더 좋아서 우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역시 입마개 따위는 하는 게 아닌데.
“숨도 못 쉴 정도로 세게 박을 테니 각오해.”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루의 입에서 입마개를 빼는 순간 듣기 좋은 신음 소리가 루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흐읏… 아, 너, 너무…….”
엎드려 있는 그가 보이지 않게 피식 웃은 재혁은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고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여러 번 빠르게 움직이다 깊이 박아 넣고 서서히 빼내는 걸 가장 좋아한다는 걸 알고 그대로 했더니 루가 몸을 부르르 떨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저… 링 빼 주시면… 흐읏! 더는 못 참…아, 응!”
입으로는 링을 빼 달라고 하면서 구멍은 꽉 조이는 데다가 표정은 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즐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고개를 숙여 그의 말랑한 귓불을 깨문 다음에 낮게 속삭였다.
“못 참겠으면 안전어를 말하면 되지 않아?”
“흐응… 그, 그게…….”
그래, 알고 있었다. 발칙한 개새끼는 입으로는 거부하면서 몸으로는 느끼는 중이었다. 그럼 응해 주는 수밖에…….
루의 머리를 잡아당긴 후에 다시 베개에 처박았다. 자극되었는지 안쪽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를 뒤로 물리는 것과 동시에 터뜨릴 것처럼 성기를 꽉 쥐었다.
“윽… 흐윽! 아, 아파요. 마, 망가져…….”
베개에 짓눌린 입에서 쾌감과 고통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오자 배 속이 끓는 느낌이었다. 입구에 걸려 있는 성기를 꿰뚫듯 한 번에 집어넣으며 방지 링을 빼내자 루가 고개를 흔들며 뜨거운 정액을 재혁의 손에 가득 싸질렀다. 손에 정액을 가득 묻힌 채로 루의 코와 입을 막고는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읍… 우욱.”
그만하라는 듯 좌우로 흔드는 허리를 제 몸으로 꽉 누른 채 깊이 처박으며 깊숙한 곳에 뜨거운 액체를 가득 뿌렸다.
“후으…….”
사정하고도 그대로 성기를 묻은 채 쓰러지듯 루의 등에 몸을 겹쳤다. 질척하게 젖은 손으로 루의 입 속을 헤집었다. 혀와 입천장을 골고루 문지르자 다시 구멍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자기 정액 먹고 느끼는 거야? 변태같이.”
“웁… 아니이… 주이님이 안 빼셔허서.”
손가락을 문 채로 끝까지 변명하는 루를 끌어안으며 허리를 움직이다가 박힌 성기가 다시 부푸는 것을 느꼈다.
결국 루가 제발 살려 달라고 이제 충분하다고 울며불며 매달릴 때까지 정사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