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밀 플레이 (2)
밖으로 나와 재혁의 차를 탔다. 요즘 바빠서 그런지 정리 정돈이 완벽하게 되어 있었던 그의 차 안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며 재혁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어제 급하게 오느라 정리를 못 했습니다.”
“괜찮은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평소보다 흐트러진 거지 보통 사람들의 차보다는 훨씬 깨끗한 편이었다.
식당에 가서 먹기엔 시간이 어중간했는지 재혁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토스트와 커피를 사서 차로 돌아왔다. 회사와 좀 떨어진 공원에 차를 세워 두고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평소에도 늘 먹던 음식이었는데 재혁과 함께 먹어서인지 아니면 저곳이 유난히 음식을 잘하는 곳인지 평소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다.
정신없이 토스트를 먹고 있는데 재혁이 루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깜짝 놀란 루가 딸꾹질하자 그가 웃으며 손가락으로 루의 입술을 닦았다.
“입에 소스가 묻어서.”
“아…….”
루가 손을 올려 입을 닦으려고 하자 재혁이 반대편 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루의 입가를 핥았다.
“얼마나 맛있으면 그렇게 빨리 먹나 했더니 맛있네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토스트를 떨어뜨릴 뻔했다. 더 이상한 짓도 잘만 했으면서 단순한 행동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켁, 콜록!”
딸꾹질을 참느라 억지로 넘긴 토스트가 목에 걸렸다. 재혁이 웃으며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뜨거우니까 급하게 마시지 말고요.”
커피를 마시자 목에 걸린 게 겨우 내려갔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목이 따끔했다. 부끄럽고 민망해 죽겠는데 재혁의 시선이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시선을 피해 토스트를 먹는 척하다가 문득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손이 많이 가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귀찮거든.’
몸에 소름이 돋고 머리칼이 쭈뼛 섰다. 방금까지도 맛있게 먹던 토스트가 입 안에서 모래가 되어 구르는 것 같았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했는데 토스트 하나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를 귀찮게 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철렁했다.
들고 있던 토스트를 옆에 내려 두고 커피만 홀짝였다. 재혁이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잘 먹다가 왜 그만 먹습니까?”
“…다 먹었어요.”
“왜? 입술에 묻히고 먹는다고 내가 놀려서?”
“아니요. 그게 아니라.”
뭐라고 말을 붙여야 할지 헷갈렸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미 바보 같은 짓을 해 놓고 그런 게 아니라고 우길 수도 없었고. 그래서 쓴 커피만 마시다가 말을 돌렸다.
“팀장님은 안 드세요?”
“먹을 겁니다. 루 씨가 다시 먹기 시작하면.”
“네.”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다시 토스트를 쥐었다. 손 가는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가 더 싫어하는 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일 테니까.
그와 함께 보내는 일상이 좋아서 붕붕 떠 있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토스트를 다 먹고 회사로 가며 루는 결심했다.
오늘은 그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앞으로는 절대 신경 쓰이게 하지 않겠다고.
재혁의 배려로 회사에 먼저 들어왔다. 그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사람들 눈을 피해 따로 올 생각인 것 같았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팀장님이 출근하기 전이니까 새로운 업무 지시가 내려온 것은 없겠지. 조금 여유가 있나 싶어 커피라도 한 잔 마시려고 뒤돌았을 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재혁의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이쪽으로는 눈길도 한번 주지 않고 팀장실로 들어갔다. 회사에서 보는 재혁의 모습은 멋있는 동시에 차가워서 좋았고 거리감이 느껴져서 새삼스레 자신의 위치를 알게 했다.
커피를 타서 자리에 돌아오니 바로 옆에서 이 대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참 나… 왜 그렇게 신입인 사람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왜요?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김 팀장님 말이야. 또 루 씨를 부르네. 우리 외근 갔을 때 실수한 거라도 있어? 오늘 일찍 와서 점검했는데 일 처리 잘되어 있는 것 같던데.”
“아뇨, 그런 건 없었는데…….”
재혁과의 사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 대리의 얼굴에 연민이 스쳤다.
“단단히 찍혔나 봐. 사람 안 갈구는 사람이 유독 루 씨한테만 그러네. 오늘 가서 잘 좀 보여 봐.”
“네.”
이 대리 앞에서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로 향했다.
회사에서 재혁은 위압적이긴 했지만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무슨 일로 사무실 밖 담장을 넘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화난 이유가 궁금한 나머지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대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대체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내게 이따위 전화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에 다니던 회사 전화로 와서 받은 겁니다. 더 할 말 없으면 끊겠습니다.”
격양된 목소리가 툭 끊겼다. 말이 더 이어지지 않는 거로 봐서는 전화가 끊긴 것 같았지만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오라고 했으니 얼굴을 비쳐야 하는데 하필이면 이때 기분 나쁜 전화가 올 게 뭐람.
루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훔쳐 내며 한참 동안 서서 문고리를 노려보았다. 업무 시간에 이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어 떨리는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재혁이 시선을 올려 루를 바라보았다. 매서운 눈빛에 기가 죽어 움직이지도 못했다.
“저… 대리님께서 가 보라고 하셔서요.”
재혁은 입을 다문 채 루를 향해 손짓했다. 루가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책상 맞은편에 가서 걸음을 멈추자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가까이. 이리로 돌아와요.”
책상 모퉁이를 돌아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가자 재혁의 시선이 루의 온몸을 느리게 훑어 내렸다. 마치 알몸으로 서 있는 듯한 느낌에 귀가 화끈거렸다.
재혁이 시간을 확인하며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옆으로 빼놓고 한쪽 팔로 제압해 무릎에 앉혔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
재킷 속으로 파고든 손이 셔츠를 가르며 들어왔다. 흠칫 놀라 사무실 유리창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블라인드는 내려진 상태였다. 그래도 누가 갑자기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허리를 쓰다듬던 손이 배 앞쪽을 더듬었다. 그의 무릎에 앉은 채 불편한 자세로 뒤꿈치를 들고 목을 길게 빼자 그가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속삭였다.
“여기 아무도 없는데 누굴 그렇게 찾습니까.”
“흐으…….”
손이 올라와 부어오른 젖꼭지를 스치자 참고 있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스치기만 해도 아파서 일부러 사이즈가 큰 셔츠를 입었는데 뜨거운 손가락이 닿으니 숨을 참기가 힘들었다. 루가 허리를 비틀면 비틀수록 재혁의 손길이 더 과감해졌다.
가슴을 못 만져서 한이라도 맺힌 사람처럼 젖꼭지를 당겨서 루가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재혁은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사람이 올까 봐 무섭고 얼른 나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도 그의 웃음소리를 듣자 화가 풀린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만질 맛 나는데?”
커진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굴리던 그가 귓불을 깨물며 말했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화가 난 기분이 풀린다면 얼마든지 응해 줄 수 있었지만 자꾸만 부풀어 오르는 아래가 문제였다. 분위기가 깨질 걸 알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면 티가 날지도 몰랐다.
“저 근무 중이라서… 흐읏.”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젖꼭지가 잡아당겨지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짓궂게 웃으며 물었다.
“근무하세요. 서류철 줬지 않습니까. 이거 루 씨 숙제인데. 여기서 하면 되겠네.”
이 상태로 근무를 하라니… 제정신인 걸까?
루는 자기도 모르게 원망스러운 눈으로 재혁을 바라보다가 주인님한테 건방지게 굴었다는 생각에 곧바로 시선을 피했다. 한껏 달아오른 살덩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비벼지고 있었다. 짜릿한 쾌감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자위할 때도 여기 이렇게 만져요? 응?”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떨리는 손으로 서류철을 열었다. 일단 업무를 하라고 했으니 하기는 해야 하는데 종이 한 장 넘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대답해야지. 왜 이렇게 잘 느낄까.”
“아아.”
대답하지 않는 자신을 벌하듯 젖꼭지를 세게 비틀었다. 무릎을 붙여 견딜 수 없을 만큼 성기가 커지고 있었다.
“마, 만져요. 으읏. 마, 많이는 아니고… 그냥, 갈 때… 아앗.”
“으음… 여기 만지면 더 잘 느껴요?”
“흐으, 구멍이 조여들어서요.”
그가 마치 삽입하고 있는 것처럼 허리를 추어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이 뒤가 자극되면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확실히 같이 자극하니까 더 느끼네요.”
루는 참고 참다가 입술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신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간신히 물었다.
“지, 지금 티, 팀장님이죠?”
“네, 플레이 아닙니다. 그게 중요해요?”
루는 다급하게 재혁의 손목을 잡았다. 주인님의 손목은 잡으면 안 되지만 연인의 손목은 잡아도 된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다.
재혁이 손목을 빼며 진심으로 재밌다는 듯 웃었다. 화를 내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사람 간을 콩알만 하게 해 놓고 뭐가 그리 재밌는 걸까.
손을 셔츠에서 겨우 빼 놓았더니 이번엔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거기가 자극이 더 참기 힘든데……. 망했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자 그가 불량한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님이라고 할 걸 그랬습니다. 그러면 조금 더 괴롭힐 수 있었는데.”
“…….”
가슴을 빨기라도 한 것처럼 입맛을 다시며 뭉근히 허벅지를 더듬었다.
“흐읏… 팀장님.”
루는 신음을 삼키며 재혁의 손목을 잡은 채로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능욕도 스팽도 고통도 없었지만 그와 붙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자신이 성향자인지 아닌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냥 재혁이면 다 좋은 것 같았다.
“그날 밤처럼 소리를 내지 않게 해 줘요? 그럼 가슴을 조금 더 만질 수 있을까?”
루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더는 무리였다. 그는 정말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듯 허벅지에서 손을 떼고는 붉어진 뺨에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담백한 키스였다.
여린 숨을 급하게 내쉬느라 가슴만 들썩이는 루의 입술을 깨물었다가 떼어 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위로가 필요했어요. 루 씨가 뜨거워서 멈춰지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또 자신을 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한 채로 재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멋있게 내 손목을 탁 잡네요. 남자다워서 설렜습니다.”
뜨거운 페팅을 나눈 후에 느끼는 흥분감과는 다른 감정이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채웠다. 남자답다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은데 그 대상이 재혁이라서 기분이 이상했다.
웃음기가 없이 진지하게 말하는 거로 봐선 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루는 좋으면서도 아닌 척하느라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무례해서 미안… 아니, 죄송…해요. 너무 간지러워서… 아니, 간지러운 건 참을 수 있었는데 여기 회사이고…….”
횡설수설 말하는 루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재혁이 그의 머리를 쓸어 올려 주며 말했다.
“압니다. 멈출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재혁은 루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턱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그가 턱짓한 곳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서류철이 흐트러져 있었다.
“서류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냥 명분이긴 하지만 가지고 나가면 될 겁니다.”
연속으로 문질러진 젖꼭지가 아프고 묵직해진 하체가 아직도 불편했지만 그의 사무실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랑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더니 하늘 위를 나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하고 발이 둥둥 뜬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남자다워서 설렜습니다.’
그가 한 말이 온종일 귀에 맴돌아서 보고서를 쓸 때도,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면서도, 점심을 먹고 오면서도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가지 않았다.
[내 집에 먼저 가 있으세요. 루 씨 재킷 주머니에 카드 넣어 놨으니까 택시 타고 가세요.]
퇴근할 즈음 재혁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루는 급하게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그 속에 정말 신용카드가 들어 있었다.
도미넌트와 서브미시브의 관계는 불평등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지만 그에게 카드를 받아 쓰는 건 정말이지 불편했다.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의 사랑이 돈으로 치환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웃긴다, 신루. 밥 사 주는 건 좋다고 잘 받아먹으면서…….”
사실은 밥을 먹고 그가 계산할 때마다 몇 번이나 계산하려고 했지만 그가 다니는 음식점은 루가 반만 내기에도 부담스러운 곳인 데다가 재혁이 허락해 주지 않아서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팀장님일 때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으면서 계산만 하려고 하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면서 자기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루는 잠자코 그를 따라야 했다.
단순히 돈을 더 내는 것에 대한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라…….
더 좋아해서 감정적으로도 을인 사람이 경제적으로 의존까지 해 버리면 그에게 자신의 의미가 하찮아질까 봐 겁이 났다. 루가 하는 모든 고민의 근본은 바로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재혁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손해만 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카드는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메시지까지 보내서 명령했는데 그 말을 안 듣는 건 더 싫어할 것 같아서 루는 결국 한숨을 쉬며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 기사에게 재혁의 집 주소를 말한 루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면서 생각했다.
DS 관계에 연애가 붙으면 생각보다 일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고. 왜 재혁이 연애는 하지 않겠다고 말했는지 그 의도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고.
그와 안전한 장기 연애를 위해서는 더더욱 같이 살면 안 되겠다는 결론이 더 굳어져 갔다.
* * *
오늘 자신의 집으로 먼저 루를 보낸 것은 회사 일 때문이 아니었다. 일을 미루지 않는 성격인 재혁은 퇴근 시간에 맞춰 이미 일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회사를 나오며 지금 가는 곳이 자신의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지금 루가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전에 하지 못했던 강간을 실컷 해 주고 싶어서 배 속이 들끓었다.
“시발!”
욕이 절로 나왔다.
우민이 회사에 찾아왔던 날 그 앞에서 루와 아무 사이도 아닌 척하며 여유로운 태도를 보였지만 재혁은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우민은 재혁이 연애 관계뿐 아니라 플레이를 즐기는 것 자체에 학을 떼게 한 장본인일 만큼 집착이 강했으며 서브미시브인 성향과 다르게 한번 마음먹은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루와 함께 살며 그를 보호하려고 했던 거였다.
운전대를 잡은 재혁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오늘 전화가 왔을 때 더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가 말을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우민의 연락은 루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한창 일에 열중하고 있을 때 도착했다.
루의 사진 한 장과 ‘TH 호텔 302호, 8시’라고 적힌 게 내용의 다였지만 재혁에겐 그 어떤 협박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불안감에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어서 빨리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루를 자기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한 거였다. 혹시나 제집에 혼자 있다가 어떤 짓을 당할지 몰라서.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오늘따라 차가 막혔다. 초조한 마음으로 핸드폰으로 위치 추적 앱을 열어 확인했다. 다행히 루의 핸드폰은 자신의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루는 재혁의 집 앞에 서서 자신의 핸드폰 뒷자리를 눌렀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의 집 비밀번호가 자기 핸드폰 뒷자리라는 사실에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의 집에 함께 온 적은 있었어도 혼자 온 적은 처음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게 당연한데 입구에 서서 ‘저기, 아무도 없어요?’라고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재킷을 벗고 소파에 앉아서 재혁에게 연락하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을 때 액정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무시할까 하다가 이상한 예감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루 씨 핸드폰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밀었다. 루가 대답했음에도 저쪽에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 마른침을 삼키고 통화를 끝내려 했을 때 말이 이어졌다.
―아실지는 모르겠는데 여기 제우스입니다.
‘제우스, 제우스라고?’
그곳이 어디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루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원제 SM 클럽에서 자신에게 연락할 이유가 없었다. 소심한 성격 탓에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섣불리 회원 가입을 해 볼 생각조차 못 한 데다가 루에게는 거기 회원권을 끊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혹시 재혁과 관련된 일인 걸까? 핸드폰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네, 무슨 일입니까?”
―갑작스러운 연락에 많이 놀라셨겠지만 김재혁 씨와 관련해서 의논할 게 있습니다.
“…….”
루는 떠는 것을 표시 내지 않으려고 잠시 말을 멈췄다. 머릿속에 언젠가 회사에서 봤던 잘생긴 남자가 떠올랐다.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고 애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의논이신지.”
―전화로 할 말은 아니고, 지금 제우스로 왔으면 좋겠는데…….
묘하게 말을 흐리긴 했지만 말투는 위압적이었다. 지금 오지 않으면 당장 어떻게 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협박이 느껴져서 어깨까지 떨렸다.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반대편 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누르고 숨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재혁이라도 옆에 있으면 좋겠는데 일이 많다고 했으니 오려면 시간이 한참 남았을지도 몰랐다.
“저… 꼭 가야 하나요? 지금은 좀 곤란한데요.”
―뭐, 그렇다면 좋습니다. 두 분과 관련한 일이 퍼져 나가도 별 상관없다는 뜻으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럼 늦은 밤에 미안했습니다. 이만 끊겠습니다.
루는 다급한 마음에 끊어지려는 전화를 붙잡았다.
“아니, 잠시만요!”
―왜요? 생각이 바뀌었습니까?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이 사람은 둘의 사이를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런 증거 없이 협박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요즘 들어 재혁이 회사에서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 아웃팅이 두려운 것도 문제였지만 자신 때문에 재혁의 커리어에 흠집이라도 생긴다면 애써 만들어 놓은 관계가 한 번에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가 생각하느라 말을 잇지 못하자 상대방이 대답을 재촉해 왔다.
―할 말 없습니까?
“전화로 하면 안 되는 말입니까? 굳이 왜 만나자고 하시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 길게 느껴져 초조했다.
―지금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부탁을 하려고 전화를 드린 게 아닙니다. 선택은 루 씨가 하세요. 아! 그리고 김재혁 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 모든 게 다 엎어질 테니 알아서 잘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딱 한 시간만 기다리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손발이 벌벌 떨리고 호흡이 가빠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혁의 집에서 제우스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가도 되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그렇다고 가지 않기에는 모든 걸 망쳐 버릴까 봐 두려웠다.
한참 고민하던 루는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챙겨 입었다. 얼른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돌아오면 될 것 같았다. 집에 왔다고 했으니 일하면서 자신을 찾을 리는 없을 것 같았고 그가 퇴근하기 전에 얼른 돌아오면 될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집을 나서는 루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재혁은 분명 신호에 맞춰서 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아까부터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승합차 한 대가 신호를 무시한 채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뒤를 박고야 말았다.
크게 난 사고가 아니라 다치진 않았지만 짜증이 치밀었다. 일진이 사나워도 이렇게 사나울 수 있나 싶었다. 사고 처리를 위해 차에서 내렸더니 멀쩡한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보고 운전해야 했는데.”
“아니, 뭐 됐습니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니니 보상할 것도 없고 바쁘니 그냥 가셔도 됩니다.”
마음이 급하기도 했고 자신의 잘못도 아니니 보험사를 부르지 않고 대충 넘길 생각이었다. 상대방이 다시 차에 타려는 재혁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 안 되죠. 요즘 이렇게 괜찮다고 하고서 뺑소니로 신고하는 사례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골치가 아팠지만 상대방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라 뭐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우민과 한 약속 시각에 늦는 것은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그만큼 집에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질까 봐 걱정이었다. 루가 혼자 기다리며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재혁은 표정을 구기며 보험사에 전화를 걸었다. 교통 체증을 생각하면 아무리 일찍 도착해도 30분 이상은 걸릴 터였다.
“보험사 불렀으니 그쪽에서 알아서 처리해 줄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바빠서.”
가려는데 상대방이 다시 재혁을 잡았다.
“그럴 수야 있나요. 사고 현장을 보존해야죠. 보험사가 나중에 말을 바꿀 수도 있는데요.”
무언가 이상한 예감이 재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하게 표현할 순 없지만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상대방은 합리적인 척 말을 잇고 있었지만 하필 우민과 만나기로 하기 직전에 어이없는 사고가 터진 것과 보통은 그냥 넘어갈 만한 간단한 사고에 이렇게까지 까다롭게 구는 게 이상했다.
재혁은 초조한 마음으로 보험사를 기다리며 차에 올라타 루에게 전화를 걸었다. 씻고 있는지 루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 * *
루는 제우스의 입구에서 자기에게 연락 온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저, 도착했습니다.”
―사람 보냈으니 안내해 줄 겁니다.
곧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이 나왔고 그가 안내해 주는 대로 제우스의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쯤 들어가고 싶은 곳이었지만 갈 수 없었던 곳의 내부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어서 빨리 이 불편한 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남자를 따라 긴 복도를 걸었다. 남자가 복도의 가장 안쪽 룸 앞에서 발을 멈추더니 문을 열었다.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수도 없었기에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룸 안에는 전에 회사에서 봤던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오… 진짜 왔네요? 용기가 대단한데?”
비꼬는 듯한 말과 주변에 함께 있는 불량한 남자들의 시선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재혁 씨에 대한 게 뭔지 말해 주세요. 그 말 들으러 왔습니다.”
제대로 서 있기도 어려울 만큼 발이 떨리고 식은땀이 흘렀다. 어두운 조명에 앞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전화를 건 남자를 제외하고 세 명 정도 더 있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급해? 여기 앉아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천천히 말해도 되잖아?”
남자의 말에 주변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며 즐거워했다. 말을 건 남자 빼고는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무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순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술 마시러 온 것 아닙니다. 잘못 온 것 같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급하게 몸을 돌려 문고리를 열자마자 입구를 지키던 덩치들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억지로 뿌리치고 나가려고 했지만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루가 그들에게서 벗어나기는 힘든 일이었다.
우민이 그런 루를 비웃으며 덩치들에게 명령했다.
“꿇려.”
덩치들은 루의 무릎을 쳐서 한 번에 꿇어앉혔다. 무릎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딱딱한 바닥에 닿았다. 무릎에서 오는 통증보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일이 틀어진 것에 대한 후회가 더 컸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민이 루를 향해 다가와 한 손으로 턱을 잡아 올렸다. 혐오하는 표정이 역력한 우민의 눈빛과 눈을 마주쳤을 때 소름이 확 끼쳤다.
턱을 이리저리 돌리며 관찰하듯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우민이 말했다.
“흐음, 그렇게 예쁜 것도 아니네. 시발, 대체 어떻게 후린 거야?”
재혁을 말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지기 싫어서 눈에 힘을 주고 우민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우민의 손이 루의 왼쪽 뺨을 힘껏 내려쳤다. 불꽃이 튀고 붉은 자국이 남을 만큼 센 힘이었지만 물리적인 아픔보다 자존심이 더 상했다.
“어디서 노려봐. 내가 너 같은 애들 한두 번 본 줄 알아? 잘난 면상 믿고 돔 하나 잡아서 팔자 피려고 하는 것들 역겨워.”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적의를 보이는 우민에게 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좋은 회사 다니길래 좀 똑똑할 줄 알았는데 멍청하네? 이런 협박에 당하고. 재혁 씨도 실망이야. 고작 이런 애 때문에 나를 무시하고 말이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자기 때문에 재혁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몸이 제압당한 상태에선 움직일 수조차 없어서 루는 자신의 얼굴 앞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는 우민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시발! 좆같네.”
침을 닦아 낸 우민이 루의 멱살을 쥐고 그의 뺨을 몇 대 더 후려치다가 뒤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에게 말했다.
“너네 알지? 제우스의 지배자 김재혁이 현장에도 안 나오고 혼자 물고 빨던 서브가 바로 얘야. 꼴리지 않아? 돌리는 취향도 없으니까 오늘 아니면 기회 없어. 기회 줄 때 제대로 먹어.”
“유후!”
남자들이 기쁜 듯 휘파람을 부르자 덩치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루의 재킷을 벗기고 움직이지 못하게 손과 발을 묶기 시작했다.
“옷은 어떻게 할까요?”
“아직 벗기지 마. 하나씩 벗기는 재미가 있어야 하거든.”
손과 발이 묶인 상태로 안대가 씌워졌다. 루도 에세머이긴 했지만 한 번도 이런 식의 플레이를 원한 적은 없었다. 그에게 플레이는 상호 합의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감정이 우선시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은 루에겐 플레이가 아니라 폭력일 뿐이었다.
그들에게 기가 죽고 싶지 않았지만 심장이 떨리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손발이 묶인 채로는 빠져나갈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리하는 사이에 몸이 들려 소파에 앉혀졌다. 두툼하고 차가운 손이 뺨에 닿았다.
“몸의 힘 빼고 즐겨. 어차피 서브미시브라며. 힘줘 봐야 너만 손해야.”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남은 힘을 다해 말했다.
“당신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습니까? 제우스는 합의된 관계만 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폭행이에요.”
짝!
우민의 손보다 훨씬 더 센 힘으로 뺨을 맞는 바람에 루의 고개가 돌아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맞고 싶어서 용을 쓰네. 얌전히 굴어. 그래 봐야 당신한테 안 좋아. 김재혁 따까리라고 우리가 좆같이 보여?”
상황을 보니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단순히 돔이 아니라 모두 김재혁에게 앙심이 있거나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 같았다.
루는 너무 쉽게 함정에 빠져 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신중한 성격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재혁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왜 이렇게나 이성을 차리기 힘든지 모를 일이었다.
* * *
보험사에서 연락이 온 건 사고가 일어나고 정확하게 20분이 지나서였다.
―저도 당황스러운데 가는 길에 사고가 났습니다. 곧장 다른 보험사 직원에게 연락했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지나치게 이상한 일들이 겹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계략이 된다. 대충 전화를 끊어 버린 재혁은 곧장 위치 추적 앱을 켰다.
“제우스?”
루가 있는 곳의 위치를 확인하자마자 머리가 차게 식는 것과 동시에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당했다. 고작 정우민 같은 녀석에게. 김재혁이.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했다. 왜 빨리 눈치채지 못했을까.
정우민은 충실하게 약속을 정하고 만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거절할 걸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동선을 파악해 무작정 찾아오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었는데 루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
“시발!”
핸들을 내려친 재혁은 사고 현장이 어떻게 되든 말든 바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우민이 꾸민 짓이라면 안 봐도 뻔했다. 어떻게든 빨리 제우스로 가서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루를 구해 와야 했다.
신호를 무시한 채 내달렸다.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순간들이 몇 번 지나갔지만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재혁의 머릿속엔 오로지 빨리 제우스로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 *
남자들의 손은 거칠었다. 몇 대를 맞았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입술에서 실핏줄이 터지고 맞은 자리가 멍이 들었지만 루는 고분고분하게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남자들이 몸을 만지면 최대한 몸을 비틀어 반항했고 코를 잡아 입을 벌리게 한 후에 좆을 넣으려고 하면 살덩이를 깨물며 반항했다. 이러다 죽는 건 아닌가 싶게 맞으면서도 반항을 멈출 수 없었다.
재혁은 루에게 있어 평생 처음으로 사랑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성향을 있는 그대로 내보인 사람이었다. 플레이가 끝나면 귀찮다고 했던 말과는 달리 누구보다 다정하게 껴안고 돌봐 주던 재혁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목숨 걸고 반항해야 했다.
“와… 내 살다 살다 너 같은 독종은 처음 본다. 이렇게 처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 구멍이라도 찢어 놔야 말을 들을래?”
“그냥 죽여.”
입 속에 피가 고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 표현만은 분명했다. 지금까진 어떻게 잘 버텼지만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난다면 체력이 약한 루는 여러 명의 남자를 혼자서 당해 내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겠지만 버틸 때까진 버틸 생각이었다.
약하게 보일까 봐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대 속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재혁이 보고 싶었다.
이들에게 당하고 나면 자신의 실수로 벌어진 일 때문에 그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할 테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를 볼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야, 그만해. 말로 안 되니까 그거 가져와.”
“뭐?”
“뭐긴 뭐야. 나이프지. 설마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 반항하겠어? 목숨이 두 개도 아닐 텐데.”
우민의 말에 그저 플레이 정도로 생각하고 왔던 남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도 플레이와 범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고 있긴 했지만 나이프를 가지고 오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런 말은 없었잖아.”
우민이 야비한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왜? 쫄려? 너희 이미 선 넘었어. 영상에 찍힌 건 너희지 내가 아니거든.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텐데?”
“시발 새끼가 진짜!”
끝까지 반항할 수 있다고 믿었던 루의 어깨도 떨리기 시작했다. 손바닥과 주먹으로 맞긴 했지만 나이프는 진짜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게다가 우민이 저들의 약점을 잡은 상황이라면 저들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죽는 걸까.’
남자들이 망설이자 우민이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그들을 재촉했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안 해?”
“시발,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건 매한가진데 나도 모르겠다.”
거구의 남자가 나이프를 손에 쥐고는 루의 목에 가져다 댔다. 금속의 차가운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루는 그들이 살인까지는 저지르지 못할 거라고 믿으며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찔러.”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록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야, 저 새끼 안대 벗겨. 눈에 뵈는 게 없으니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날뛰지.”
루의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가 벗겨졌다. 어지러운 시야에 제 목에 칼을 대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칼 대고 있을 테니까 빨리해 버려.”
남자의 말에 다른 남자들이 일어나 좆을 문지르며 다가왔다. 루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 탓에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새하얀 목이 칼에 베여 피가 흘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칼을 쥐고 있던 남자가 놀라 칼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냐? 완전 돌아이네.”
다가오려던 남자들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때, 바깥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소음 속에 재혁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반가움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당하기 전에 그를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무, 무슨 소리야.”
“몰라, 좆된 거 아냐? 오늘 사장 안 나온다며?”
“다 따돌렸는데… 시발.”
우민이 당황한 얼굴로 상황을 살피기 위해 문 쪽으로 다가갔을 때 문이 활짝 열리며 재혁이 들어왔다. 일순, 시간이 정지한 듯 룸 안에 찬바람이 불었다.
루는 이 순간에도 재혁은 혼자인 것에 비해 상대편의 숫자가 더 많은 것만 걱정스러웠다. 소수자를 상대로 하는 SM 클럽이 위험한 것은 오늘처럼 사건 사고가 터지더라도 아웃팅 문제 때문에 신고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신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경찰과 함께 오지 못했을 테고 그가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상대하기는 무리일 텐데……. 그는 대체 어쩔 생각인 걸까.
그러나 신기한 것은 어찌 된 일인지 재혁은 가만히 서 있는데 명수가 많은 우민 쪽 사람들이 덜덜 떨고 있었다.
루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아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티, 팀장님…….”
“루.”
재혁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도 모든 불안과 공포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루의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남자들이 앞을 막자 재혁이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퍽퍽 소리와 함께 쓰러진 남자들이 뒷걸음질 치며 룸 밖으로 도망갔지만 우민은 재혁이 데리고 온 성현에게 붙들려 도망갈 수조차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혁의 시선은 오직 루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팔을 묶고 있는 줄을 풀고 재킷을 벗어 작은 몸에 덮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재혁의 얼굴을 확인한 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 진짜 팀장님이에요? 꿈꾸는 거 아니죠?”
“나 맞아요. 당신 애인.”
“…네, 애인이…요. 저, 미안해요. 말… 안 들으려고 한 게 아니라 팀장님한테 무슨… 일이…….”
“알아, 그만 말해, 루. 다 괜찮아.”
재혁의 대답에 마음이 놓였는지 루는 쓰러지듯 제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옷깃을 꼭 쥐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안쓰러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조심스레 루의 상태를 살폈다. 셔츠를 붉게 물들인 핏자국과 여기저기 뜯겨 나간 옷, 실핏줄이 터져 부르튼 입술과 군데군데 시퍼렇게 든 멍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에 있는 모든 걸 다 때려 부숴도 시원치 않을 만큼의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우민을 잡고 죽을 정도로 패고 싶었지만 루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것이 먼저였다.
울분을 참으며 그를 소중히 안고 제우스를 나왔다. 미친 것들에 대한 처벌은 나중에 하면 될 것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 생각보다 별일 없이 끝난 일에 안도하며 쉬고 있을 때, 다신 일어나지 못하도록 밟아 줄 생각이었다. 성현에게 말해 그 방에 있던 놈들의 명단을 알아 놓으라고 했으니 급할 것 없었다. 루가 저를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었던 시간만큼 그들도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 * *
우민은 성현의 직원들에게 잡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재혁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루를 안고 나가는 재혁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치 세상 가장 귀중한 보물인 양 감싸 안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누구라도 건드리면 죽여 버릴 것 같은 분위기로 가는 모습을 보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저 꼴을 보자고 저지른 일이 아니었다. 오늘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돈을 뿌렸다. 제우스의 사장 성현도 매수하려고 했지만 재혁과 오래 친구로 지내 왔던 그는 살인이 일어날까 봐 못 들은 척해 주겠으니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말고 이만 접으라는 말만 반복했다.
정말 안 좋은 일이었다. 저 애송이 하나가 뭐라고 저렇게 끼고 도는 걸까.
더 열이 받는 것은 여기 제우스뿐 아니라 한 발 건너면 다 아는 게이 에세머들 사이에서 자신을 거부했던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여기는 제우스였다. 회원권이 비싸서 저 애송이 같은 녀석들은 감히 발을 들여놓지도 못할뿐더러 온다고 해도 수준이 떨어져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아야 마땅한!
완벽한 집안에다가 남자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외모에 성격마저 화끈했으니 그런 우민을 거부할 수 있는 도미넌트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왜 너는 어째서…….
자신을 싫다고 거부하는 재혁이 처음에는 흥미로웠으나 가면 갈수록 그에게 오기가 동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재혁은 더 진절머리를 냈고 급기야는 회사까지 바꿔 버리고 말았다.
그랬던 재혁이 고작 저런 남자를 만난다는 게 우민의 자존심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이벤트는 꼭 재혁을 가지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금이 간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으아아아!”
우민은 미친놈처럼 머리를 흔들며 소리를 크게 질렀다. 오늘의 실패를 믿을 수도 없었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성현이 우민을 비웃으며 혀를 끌끌 찼다.
“어떻게 다 감당하려고. 지금 그렇게 화를 낼 때가 아닐 텐데? 정우민 씨, 이제껏 김재혁을 봤는데도 모르겠어? 이 녀석 돌아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그딴 건 관심조차 없었다. 그가 자신을 거절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집착했을 리도 없었을 테니까.
“닥쳐. 관심 없으니까.”
“아니, 알아 두는 게 좋을걸? 제우스 최고 호갱님이니까 네가 죽으면 내가 좀 아쉽거든. 그러니까 죽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니까 들어!”
“시발.”
성현이 재혁에 대해 해 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제우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어디나 그렇듯 사회에서의 지위나 재력과도 상관이 있었다. 어차피 비싼 회원권과 여기 주인 성현의 물갈이 노력 탓에 평범한 사람들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더 가졌냐 덜 가졌냐에 따라 편이 갈리고 계급이 생겨났다.
전설의 지배자라는 별명을 가지기 이전에 재혁은 장기적인 디엣 관계를 맺지 않는 조금 특이한 돔에 불과했다. 플레이 파트너 관계를 맺으며 확실한 플레이로 상대를 만족시킬 뿐만 아니라 뒤가 깔끔하다는 것으로만 유명했지 지배자 수식어가 붙는다거나 등장만으로도 주변에 있던 도미넌트들이 도망간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력도 되고 돈도 많이 가진 서브미시브, 기윤이 재혁에게 집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기윤은 우민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었는데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건 무조건 가져야 하는 성격이 특히 그랬다.
기윤이 재혁에게 플레이 파트너 관계 이상을 요구하자 재혁은 당연히 거절했고 그런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한 기윤은 재혁이 만나는 서브미시브마다 폭력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사람 만나기가 어려운 게이 에스엠 판에서 기윤의 방해는 도가 지나친 것이기는 했지만 재혁은 아쉬울 것 없는 태도로 일관했었다.
그러다가 자기가 만나는 서브도 아니고 이미 플레이 파트너 관계를 종료하기로 한 데다가 충실히 그 의견에 그러자고 따라 준 착한 서브미시브 하나가 기윤의 패거리들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재혁의 미친 짓이 시작되었다.
재혁은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벌벌 떨 만한 커다란 몸과 무서운 표정을 짓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 동생을 직접 지키겠다며 부모님을 졸라서 배운 수준급의 무술 실력까지 겸비했다.
그런 재혁이 자신의 옛 서브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직접 패서 입원까지 시켰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소문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사람을 패고도 경찰이 오지 않도록 조처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무서울 텐데 재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기업 컨설턴트라는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기윤의 집안 사업을 휘청하도록 만들기까지 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본래의 사실보다 훨씬 더 부풀려져 제우스의 전설로 남았다. 미친놈을 건드렸다간 정말로 삼 대가 멸할지도 모르겠다는 소문이었다.
성현에게 이야기를 다 들은 우민은 콧방귀를 꼈다.
“부풀려졌겠지. 나도 기윤 형님 아는데 아직도 멀쩡하게 회사 운영 잘하고 있거든.”
성현이 혀를 끌끌 차며 대꾸했다.
“그래서 네가 안 된다는 거야. 그걸 어떻게 해서 복구한 줄 알아?”
우민은 궁금해하면서도 자존심은 있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성현은 어차피 우민이 묻지 않아도 꼭 이야길 해 줄 생각이었으므로 끝까지 말을 전했다.
“공개 플레이 알지?”
우민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거짓말하지 마. 김재혁은 자기 섭 안 돌리잖아.”
“그래, 자기 섭을 안 돌리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면 기윤의 회사를 살려 주는 조건으로 공개 플레이 장에 데리고 가서 무릎 꿇린 다음에…….”
우민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기윤이 이곳에 들르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저 게이는 맞지만 성향자는 아니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김재혁 때문이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서울 게 없는 기윤이 발을 끊을 정도일까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오… 이제 흥미가 생겨?”
“개소리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해.”
“얼굴로 받게 했어. 얼굴에 싼 건 물론이고 바닥에 흘린 것도 다 핥아먹지 않으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서브가 돔 것도 아니고 섭 걸 먹게 했다니까? 그게 사람이야? 어휴… 내 친구지만 진짜 악마 새낀 줄 알았다니까?”
“…….”
“왜 그 소문이 너한텐 안 갔는지 모르겠는데… 그러게 사람이 좀 주위를 둘러보고 심보도 곱게 쓰고 살아야지. 네 좆대로만 사니까 곁에 있는 사람들이 진짜 필요한 정보는 안 주고 듣기 좋은 말만 해 주는 거 아니야. 아무튼 난 말해 줬으니까 몸조심하고 집에 가서 아빠한테 당분간 무리한 투자 하지 말라고 전해. 김재혁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숨죽이고 없는 듯 살아. 아, 내가 말 안 했었나? 그 새끼 재벌 승계받기 싫다고 자기 혼자 나와서 좆대로 살아서 그렇지 사실은 JM 그룹 도련님이야. 부디 몸조심하길.”
성현은 재혁이 시킨 것을 다 하고는 자기의 사람들을 데리고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재혁이 이곳으로 오는 중에 통화로 우민의 처리를 의논했을 때 우민을 잡아 놓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어차피 정우민이 도망갈 곳은 뻔하니 퇴로를 다 막아 놓았다고 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빠르게 계획까지 세워 놓은 재혁을 보며 우민은 그가 자신의 친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적으로는 만들지 말아야겠다. 피곤해도 보통 피곤한 놈이 아니었다.
* * *
응급실에 누워 있는 루를 보며 재혁은 동생이 죽었던 그날처럼 눈을 감고 신께 기도했다. 당신을 불신하며 살아온 걸 알지만 이번 한 번만 이 남자를 무사하게 해 달라고.
의사들은 루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잠시 실신한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동생의 죽음이 일생일대의 트라우마인 재혁에겐 의사들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동생이 쓰러졌을 때도 의사들은 걱정하지 말라고, 어리고 건강하니 반드시 의식을 되찾을 거라고 했었다. 그러나 끝내 동생은 일어나지 못했다.
“제발, 일어나, 루. 너만 일어나면 아무것도 안 바라. 나를 버려도 좋고 내 말을 듣지 않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고. 죽지만 마. 제발. 제발.”
동생이 죽은 이후로 눈물이 메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멍이 새파랗게 들어 누워 있는 루를 보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자신에게 안겨서 진짜 팀장님이 맞냐고 자기가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 게 아니라고 변명하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이렇게 안 일어날 줄 알았으면 마지막 말로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걸 그랬다며 재혁은 늦은 후회를 했다.
그때, 성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시키는 대로 말을 전했으며 사색이 되어 돌아갔다는…….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했다. 루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정우민 죽이고 자신도 루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콜록!”
잡고 있던 손이 떨리기 시작하더니 기침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재혁은 그길로 의사를 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루가 재혁의 손목을 잡았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손의 온기에 조바심 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루가 눈을 뜨고 온기를 가진 손으로 자신을 잡고 있다는 게 좋아서 재혁은 루를 향해 웃어 보였다. 루가 처음 플레이를 하던 그날처럼 따라 웃었다. 비록 여기저기 얻어터져서 찢긴 데다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상처투성이인 얼굴이긴 했지만 예쁘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옵니까?”
“저… 꿈일까 봐 자면서도 걱정했어요. 그런데 일어나니까 팀장님이 바로 옆에 있잖아요. 너무 좋아서요. 그리고… 켁, 콜록!”
루는 참았던 말을 폭발시키듯 빠르게 말했다. 저러면 안 될 텐데…….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면 저럴까 싶어서 말을 더 하게 하고 싶었지만 우선 물이라도 한잔 마시게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물을 따라 건네며 말했다.
“천천히 차근차근 말해요. 나 여기 있을 겁니다.”
“네.”
물이 목 안으로 넘어가는 소리마저 귀엽게만 들렸다. 루가 살아나서 손목도 잡고 물도 마시고 예쁘게 웃기까지 하는 모습이, 그가 하는 사소한 모든 것들이 다 감동이었다. 마치 세상이 온통 흙빛이고 루 하나만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물을 다 마신 루는 컵을 옆에 두고는 재혁의 팔을 끌었다. 끌면 끌리는 대로 재혁이 자리에 앉자 루는 뭐가 좋은지 또 웃다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했다.
“팀장님, 진짜 미안해요. 그 사람이 팀장님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어요. 제가 지금 오지 않으면 당장 풀어 버릴 거라고. 이건 협상이 아니라고요. 그냥 잠깐 오기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요…….”
재혁은 이런 순간마저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루를 보며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순종적으로 내리깐 눈, 더듬거리면서도 조곤조곤 자신의 잘못을 말하며 끝까지 사과하는 목소리, 절대 놓지 않을 것같이 꽉 잡은 손과 어깨를 떠느라 흔들리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 모두 슬펐다.
처음엔 루가 저러는 모습이 자신의 취향에 꼭 맞아 흥분된다고 생각했고 루는 정말이지 타고난 서브미시브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귀여웠고 마음이 갔다. 그러나 지금은 아팠다.
그래서 재혁은 이게 사랑이구나 했다.
상대방이 자신의 취향대로 행동을 해 줘도 그가 아파 보이면 같이 아파지는 게 사랑이구나.
재혁은 자신의 변화에 놀랄 새도 없이 루를 와락 끌어안았다.
“팀장님?”
“쉬… 여기 병원이니까.”
아는 형의 병원으로 온 덕분에 1인실을 급히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병원이어서 조용히 해야 하는 게 아니라 병실에서 스킨십을 하는 것 자체가 안 될 텐데 지금 그런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보면 나는 맨날 혼내기만 하는 사람인 줄 알겠습니다.”
루가 몸을 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치 ‘그런 거 아니었어요?’ 하고 묻는 표정이라 재혁이 미간을 찌푸렸더니 이내 또 순한 얼굴로 돌아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재혁은 루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얼마나 좋았으면 그를 잡은 손이 떨리기까지 했다.
“이렇게 다시 돌아왔으니 다 괜찮습니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됩니다. 이제 내 말 안 들어도 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동생은 그대로 떠나 버렸지만 루는 곁에 다시 돌아왔으므로 이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루는 재혁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답을 꺼내 놓았다.
“왜, 왜요? 저 말 안 들은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괜찮다면서요. 그런데 저 왜 버려요. 저 버리지 마세요. 흡…….”
“……?”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당장이라도 울려고 하는 루를 안고 토닥이면서 생각해 봐도 재혁은 알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