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3)

8. 비밀 플레이 (1)

못되게 굴던 재혁이 한동안 잠잠했다. 영업팀과 협업하여 내년 상반기 신제품 브랜드 런칭에 대해 기획을 해야 했기 때문에 바빴던 탓이었다. 다행히 부서가 같았기에 막내인 루도 함께 바빠서 제대로 된 플레이는 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섹스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루의 반대로 같이 살진 못했지만 재혁은 동거를 제안한 그날 이후로 거의 매일 루와 함께 자는 데 집착했다. 루는 그것까진 거부할 수 없어 살림을 합치지 않은 채 서로의 집에서 출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럴 거면 같이 사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루는 재혁이 자신에게 질릴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자연스럽게 서로의 집 비밀번호를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서 기뻤다.

오늘도 퇴근 후에 재혁의 집으로 가는 줄 알고 일을 마무리해 놓고 책상에 앉아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오늘은 일이 많아서 회사에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습니다. 루 씨는 집에 가서 오래간만에 편하게 쉬고 오세요.]

[저, 제가 같이 있어 드릴까요?]

조심스럽게 문자를 보냈더니 곧바로 답장이 왔다.

[루 씨가 옆에 있으면 일이 잘도 되겠습니다. 사무실에서 울고 싶지 않으면 집에 돌아가세요.]

루는 그의 문자를 보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아무도 없는 회사에 단둘이 남아 있으면 장소가 주는 색다른 느낌과 그동안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하지 못한 욕구불만까지 겹쳐서 큰일이 나 버릴 것 같았다.

[네, 그럼 내일 뵈어요, 팀장님.]

[그러게 같이 살면… 아닙니다. 조심히 가세요.]

마지막 메시지를 읽고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회사를 막 빠져나오려고 할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루는 전화를 귀 가까이 바짝 대고는 여러 번 팀장님을 불렀다. 한참 있다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시간쯤 있다가 집으로 루 씨 좋아하는 음식 도착할 겁니다. 나 없다고 밥 대충 때우지 마세요. 확인할 겁니다.

루는 다정한 그의 배려가 좋으면서도 어쩐지 쑥스러웠다. 얼굴을 붉히며 두어 번 헛기침하고는 전화가 아니면 하지 못할 말을 해서 재혁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제가 먹었는지 아닌지 어떻게 확인하려고요! 팀장님이 옆에 계시지도 않는데요.”

수화기 너머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일을 빨리 못 끝낼 것 같아서 지금 이렇게 도발하는 겁니까? 대체 얼마나 혼나려고?

“혼내주면 좋은데…….”

―하하.

결국 크게 웃은 재혁이 곧바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농담 아닙니다. 보낸 도시락 다 먹고 인증 사진 찍어서 보내세요.

“네.”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 루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고 나니 정말 딱 시간 맞춰서 도시락이 도착했다. 고작 한 끼를 먹는데 도시락 안엔 육해공의 산해진미가 가득 차 있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으라는 걸까.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고 했으니 밥을 남기면 꼬투리 삼아 괴롭혀질 게 뻔해서 다 먹어야 했다.

그가 사 주는 음식이 다 그랬듯 음식은 매우 맛있어서 깨끗이 비우는 게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그와 떨어져 혼자 있는 저녁이었지만 그의 사랑이 느껴져 전혀 외롭지 않았다.

루는 음식 사진을 찍으며 문득 재밌는 생각이 났다. 그에게 음식 사진과 또 다른 사진 하나를 더해서 메시지를 보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혼자 일하고 있는 그가 메시지를 받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여 줄지 무척 기대되었다.

* * *

재혁은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다가 시계를 보았다. 이 시간쯤이면 집에 가서 밥을 다 먹었겠다고 생각하며 핸드폰을 들었을 때 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사진이 두 장 와 있었는데 하나는 음식 사진이었고 또 다른 사진은 음식보다 더 맛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루는 야한 팬티를 입고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카메라로 돌린 채 브이 자를 그리며 웃고 있었다.

재혁은 멍하게 사진을 바라보다가 크게 웃어 버렸다. 원래도 나이답지 않게 귀여운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발칙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감히 주인님을 설레게 한 죄에 대한 벌을 어떻게 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재밌는 생각이 났다. 시간은 9시가 지나고 있었고 급한 업무는 대충 마무리가 된 상태였다.

재혁은 서둘러 하던 업무를 저장하고 재킷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집에 들러 간단한 플레이 도구를 챙겨서 루의 집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벌써 배꼽 아래가 묵직해져서 입이 말랐다.

‘입도 막고 있어서 강제로 당하는 느낌이라…….’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집에 도착한 재혁은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안대와 로프 그리고 평소에 쓰지 않던 향수를 뿌렸다. 무서움에 벌벌 떨며 살려 달라고 애원할 루를 생각하니 플레이 도구를 챙기는 손이 급해졌다.

밤 11시.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루의 집 앞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재혁은 까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썼다. 이걸로 숨길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어리숙한 루는 속을지도 몰랐다.

현관 번호 키에 불이 들어오고 재혁은 자신의 전화번호 뒷자리를 눌렀다. 며칠 전 루가 주인님은 언제든지 자기 집에 와도 된다고 말하며 비번을 바꿔 놓은 것이었다. 그 모습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였다.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 누워 있던 루가 깜짝 놀라 현관을 바라보았다. 이때 망설이면 정체가 들통난다. 재혁은 빠르게 루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채 최대한 무서운 어조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재혁은 아프지 않게 루의 목을 조르며 귀를 질척하게 빨았다. 팔을 잡혔는데도 다리로 시트를 밀며 버둥거리는 루가 귀여워 미칠 것 같았다.

진짜 누군지 몰라서 이러는 걸까? 목소리까지 냈는데……. 그래, 사람이 너무 놀라면 머리가 안 돌아갈 수도 있지.

“반항하지 마.”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줬더니 캑캑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건가 싶어서 재혁은 루가 자신인지 모르고 수긍한 거라면 나중에 진짜 혼을 낼 거라고 다짐했다.

재혁은 가지고 온 로프를 꺼내 루의 손을 묶고 안대를 씌웠다.

“하, 하지 마세요. 안 돼. 싫어! 읍…….”

소리를 지르는 게 귀엽긴 했지만 루가 입을 막고 하는 게 좋았다는 말이 기억나서 빠르게 그의 바지와 팬티를 벗겼다. 코를 막아 입을 벌리게 한 후에 벗긴 팬티를 그의 입 안에 짓쑤셔 넣었다. 코를 놓아주니 숨이 막혔는지 빠르게 가슴이 들썩였다.

“말 잘 들으면 금방 끝날 테니까. 조금만 참아.”

“읍… 읏.”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에 팬티가 처박혀 있으면서도 볼을 움직이는 게 음란해 보였다. 가지고 온 가위로 허벅지를 살짝 스쳤더니 무서운지 바르르 떨었다. 재혁은 목소리를 낮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좆 잘리고 싶으면 멋대로 움직여 보든가.”

버둥거리던 다리가 멈췄다. 재혁은 웃음을 참으며 루의 몸 위로 올라가 묶여서 풀 수 없는 잠옷을 가위로 자르기 시작했다. 훌쩍거림도 멎은 방 안, 서걱서걱 옷감이 잘리는 소리만 크게 들렸다.

가위를 눕혀 루의 젖꼭지를 살짝 스쳤더니 루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안대가 촉촉하게 젖어 드는 걸 보니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정도가 심했나? 나인 줄 모르는 거 아냐?’

이런 생각을 하며 아래를 보자 좆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어쩐지 속은 느낌에 가위를 침대 옆 탁자에 올려 두고 느긋하게 서서 그의 몸을 감상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듯 읍읍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강간 중이니까!

“구멍에 가위 처박고 싶지 않으면 다리 활짝 벌려.”

다리가 벌어지자 팽팽하게 선 좆과 움찔거리는 구멍이 보였다. 꼴려서 미칠 것 같았다.

음란한 광경을 보고 있던 재혁은 순간 고민했다. 젤을 챙겨 오긴 했지만 강간범이 젤을 쓰는 건 이상했다. 그렇다고 그냥 무턱대고 박아 대면 루가 아파할 게 걱정이었다.

돔 새끼 주제에 서브가 아픈 걸 걱정하다니…….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지만 그가 앞에 있으면 항상 그의 안전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해져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짧게 고민을 마친 재혁은 벨트를 풀고 속옷을 내렸다. 그의 가슴에 올라타 코를 눌러 입을 막은 팬티를 꺼내고 그 속에 제 좆을 들이밀었다. 싸기 직전에 빼서 정액을 젤 대신 사용할 생각이었다.

“입 벌리고 빨아. 깨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재혁은 루의 머리칼을 세게 잡고 입 속에 좆을 박은 채 평소보다 더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메인이 펠라가 아니라서 빨리 사정할 생각이었다.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소보다 루의 목구멍이 급하게 열린 탓일까. 몇 번 흔들지도 않았는데 사정감이 빠르게 느껴졌다. 좆을 빼려고 하자 루가 혀를 내밀어 귀두를 핥는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시발.”

욕을 내뱉고는 ‘누군 줄 알고 그렇게 맛있게 핥아.’라는 뒷말을 마음에 숨겼다. 입에 다시 팬티를 처박고 루의 몸을 돌렸다.

묶인 손에 좆을 비벼서 구멍 입구에다가 사정했다. 뜨거운 정액을 펴 바르니 구멍이 마치 넣어 달라는 것처럼 벌름거렸다.

“좆같네!”

꼴리기는 개꼴리는데 이유 없이 화가 났다. 누구 좆인 줄 알고 지금 구멍을 벌름거리는 거야. 인기 있는 도미넌트였으니 강간 플레이가 처음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 처음이었다.

구멍 안에다 정액을 바르며 쑤시니 루가 마치 느끼는 것처럼 허리를 틀었다. 열 받아서 엉덩이를 찰싹 때렸더니 엎어진 상태로 시트에 좆까지 비볐다.

엉망으로 울면서 버리지 말라고 주인님이 아니면 안 된다고 자기는 주인님 앞에서만 다리를 벌리겠다고 해 놓고 너무 느끼는 모습에 속이 쓰렸다.

재혁은 루의 구멍을 쑤시며 그의 등에 가슴을 붙이고는 목덜미를 깨물었다. 하얀 목에 잇자국이 생기자마자 손가락을 콱 조여 물었다.

“강제로 당하면서 느끼네? 손 안 묶어 놔도 될 뻔했어. 구멍이 왜 이렇게 벌름거려?”

“으으… 우욱.”

느끼는 게 분명한데도 한사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 걸 보는 재혁의 성기가 금방 사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빳빳하게 일어서고 있었다.

“나 오기 전에 딜도로 뒷구멍 쑤셨어? 존나 금방 풀리네.”

강압적인 분위기를 위해서 한 말이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손가락을 세 개나 넣어도 충분할 만큼 평소보다 구멍이 빨리 풀렸다. 재혁은 그대로 루의 등에 올라타 구멍에 좆을 비볐다. 한껏 풀린 구멍은 비비자마자 귀두를 빨아 당기듯 조였다.

“후…….”

* * *

루는 미칠 것 같았다.

그가 들어오자마자 재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루가 그를 몰라보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재혁은 모르고 있겠지만 루는 그가 AG에 처음 외주팀장으로 왔을 때부터 남몰래 좋아했었다. 훔쳐본 시간이 얼만데 고작 이런 이벤트 정도로 그를 몰라보는 게 이상했다.

낯선 향수 냄새와 얼굴 반 이상을 가린 마스크 그리고 처음 보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에도 그는 완벽한 주인님, 김재혁이었다.

어떻게 몰라볼까. 아무리 변신해도 루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도 플레이니까 한 번에 알아보면 분위기를 깰까 봐 어색하게 연기도 했다.

팬티로 입이 막히기 전에 ‘싫어요!’라고 말도 했고 다리도 버둥거렸다. 그러나 루는 자신의 무의식까지 속일 순 없어서 그가 가까이 다가와 음험한 목소리로 강간범을 흉내 내자 배가 끓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낸 부끄러운 문자에 답장이 없어서 그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에 재혁이 멋진 침입자가 되어 자신의 판타지를 실행해 주는데 흥분되는 게 당연했다.

이런 루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재혁은 입에서 팬티를 빼 주지도 않으면서 꼬투리를 잡기 시작했다.

“시발, 왜 이렇게 질질 흘려. 강제로 당하는 게 그렇게 좋아? 엉덩이도 야해 가지고.”

강간범이면 강간범답게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데 재혁은 그것도 못 하고 있었다. 평소 플레이 상황이었다면 재혁이 능욕하면 할수록 구멍이 더 조여들며 참기 힘든 쾌감을 느꼈겠지만 오늘은 억울하기만 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막혀 있어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가장 답답한 것은 재혁이 능욕하기 위해 놀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손가락으로 풀어 주는 강간범이 세상에 어딨을까? 이렇게 다정하게 섹스를 하고 있으면서 내가 정말 속을 거로 생각하는 걸까?

“힘 풀라고. 존나 조이네, 진짜.”

“읍… 욱.”

신음 소리라도 시원하게 내고 싶었는데 그럴 수조차 없었다. 그는 화풀이하듯 성기를 때려 박고 있었다. 아프고 싫어야 하는데 녹진하게 풀린 구멍은 오랜만의 플레이와 자극적이고 거친 섹스가 반가운지 그가 박으면 박을수록 뜨거워졌다.

“하아…….”

이러다간 금방이라도 싸 버릴 것 같아서 루는 묶이지 않은 발을 이용해 침대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재혁이 그의 허리를 받쳐 들면 또다시 쓰러졌다. 지금 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사 표현이었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재혁이 루의 머리를 잡아 돌렸다. 루는 눈과 입이 막힌 채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왜? 싫어? 이제 와서 얌전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요. 주인님, 그러니까 좀 풀어 보라니까요.’

평소엔 굳이 소리 내서 말하지 않아도 천재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을 잘 알아맞혔었는데 오늘은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안대 낀 눈에서 눈물이 줄줄 나왔다.

그가 플레이하며 거친 말을 하거나 아프게 하는 건 상관없지만 자신이 아무에게나 몸을 준다고 생각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건 진짜 모욕이었다.

“한 발 싸고 풀어 줄게.”

반항한 게 먹힌 걸까?

평소 재혁의 목소리로 돌아온 강간범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루는 할 수 없이 그를 빨리 싸게 해서 오해를 풀자고 결심했다.

그가 다시 입구에 선단을 걸친 채 양쪽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한 번에 깊숙한 곳까지 치고 들어오는 느낌 때문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얼마나 돌려 먹었으면 구멍이 이렇게 잘 벌어져. 내 손가락 하나쯤은 더 먹겠는데?”

성기가 들어가 있던 구멍에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넣을 것처럼 주변을 꾹꾹 눌러 댔다. 힘을 빼야 충격이 덜할 텐데 무서워서 구멍에 힘이 들어갔다. 넣고 있던 재혁이 엉덩이를 아프게 주무르며 허리를 빠르게 돌렸다.

“지금 조인다고 벌어진 게 조여? 시발.”

말과 달리 재혁은 힘들어 보였다. 내벽을 문지르듯 허리를 돌리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후’ 하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재혁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단한 것이 배 속 깊이 들어와 안을 헤집었다. 좁아지는 구간까지 들어온 성기가 뿌리까지 다 넣을 정도로 깊이 처박혔다.

“웁… 우욱.”

“예쁘게 생긴 게 신음 소리가 별로네.”

기가 찰 일이었다. 입을 막고 있는데 신음을 어떻게 내라고.

그러나 그는 입에 박힌 팬티를 빼 줄 생각은 없는지 욕설을 뱉으며 무릎을 더욱 넓게 벌리고 성기를 쑤셔 댔다. 단단한 기둥이 내벽을 문지를 때마다 안대 속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으읏… 웃.”

그가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숨이 모자랐다. 빠듯하게 물린 성기가 드나들 때마다 내벽도 같이 딸려 가는 느낌이었다. 한참 그에게 뒤치기로 시달리다가 문득 자신이 반항했을 때 오히려 더 고분고분해지던 그의 행동이 생각났다.

루는 그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 그가 흥분해서 더 빨리 쌀 수 있을지 생각했다. 재혁의 기분을 생각하면 머리가 빨리 돌아가 줘서 다행이었다.

발버둥을 치며 몸을 비틀었다. 당연히 그의 손에 금세 제압되고 거칠게 박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비틀었다. 상체를 숙인 그가 팔을 앞으로 돌려 입 속에 있는 팬티를 꺼냈다.

드디어! 자유의 입이 된 루는 발언권을 갖기 위해 다급하게 ‘주인님!’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곧 그의 손에 머리가 잡혔다.

재혁의 입술이 뜯어 먹을 것처럼 루의 입술을 빨아 당겼다. 온몸이 그에게 눌리고 짓밟히고 뜯기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차라리 그에게 먹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오해를 풀어야 할 것 같아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래도 재혁은 입술을 놓아주지 않은 채 열심히 허리를 흔들며 그의 입 속을 탐했다. 말하고 싶은데 그에게 입술이 빨리는 건 좋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모자란 숨에 헉헉대느라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게 죽어도 괜찮을 만큼 좋았다.

겨우 입술을 뗀 재혁은 뭐라고 말하려는 루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동시에 허리를 강하게 쳐올렸다. 깊게 들어온 성기가 전립선 위를 짓누르는 느낌에 절로 구멍이 꽉 조였다.

빠져나간 성기가 다시 몸 안으로 처박혔고 방금 자극한 그곳을 강하게 짓눌렀다. 전립선을 아프도록 누르는 동작이 빠르게 여러 번 반복되었다. 구멍은 반기듯 그의 움직임에 맞춰 벌렁거렸고 그는 루의 내벽이 꿈틀거리는 것에 맞춰 속도를 더해 갔다. 그에게 강하게 잡힌 어깨가 괴로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렸다.

“하아… 으읏! 아아!”

묶여서 불편한 밧줄을 지지대 삼아 꽉 잡았다. 재혁이 루의 골반을 틀어쥐기 위해 입에서 손을 뗐을 때 루가 겨우 입을 뗐다.

“주, 주인님! 저 처음부터… 아아! 으읏, 아, 알았어요. 주인님이라서… 아아!”

어떻게든 답답했던 부분을 최선을 다해 말했는데도 재혁에게선 아무런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대가 벗겨지고 표정을 볼 수 있다면 덜 답답할 텐데 눈앞이 깜깜해서 답답함이 깊어만 갔다.

“흐읏… 아아, 제, 제발… 처, 천천히.”

“시발, 누가 주인님이야.”

“마, 맞잖아요. 안 봐도 알아요. 향수 바… 흐읏! 꾸시고 해도 저는 알아봐요. 주인님 맞잖아요.”

찰싹!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내리치는 느낌이 났다. 사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손바닥이 부딪칠 때 구멍이 조여들어 전립선이 한 번에 자극돼서 그 순간 쌀 뻔한 걸 최선을 다해서 참아야 할 정도였다.

재혁이 열심히 허리를 쳐올리며 말했다.

“강간범한테 뒤가 뚫리면서 프리컴 줄줄 싸니까 수치스러워?”

“가, 강간범 아니고 주인님…….”

“강간범이라고 말해. 지금은 플레이 중이잖아.”

재혁의 허리 짓도 부드러워졌고 귀에 닿는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루는 여전히 기분이 별로였다. 재혁의 요구는 웬만하면 다 들어주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아니, 들어주기 싫었다.

이건 다른 놈 앞에서 절대 다리를 벌리지 말라고 했던 멀쩡한 주인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거니까 그럴 수 없었다.

루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허리를 뭉근하게 비비며 귓불을 핥았다.

“흐응…….”

느끼는 소리를 냈지만 루는 그래도 입을 다물었다. 재혁이 잠시 행동을 멈추고 물었다.

“왜 대답을 안 해? 가위 들고 와?”

루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의 것을 내보내듯 구멍을 조였다.

“내 주이…인님흐으은 나를 다치게… 흐읏, 하지 않아요. 흑.”

거세게 허리를 흔들던 그의 행동이 갑자기 뚝 멈췄다. 마치 배터리가 빠진 인형 같았다.

꼭 감은 눈앞에 갑자기 빛이 들어와서 안대가 벗겨진 걸 알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서 눈을 반쯤 뜨고 고개를 돌리니 재혁이 손목을 묶은 줄을 풀어 주고 있었다.

자유로워진 손을 앞으로 돌려 몇 번 흔들었을 때 몸이 돌아갔다. 재혁은 자신의 몸 위로 몸을 겹친 채 깊숙한 곳에 성기를 들여놓았다.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자신의 얼굴을 핥는 것 같았다.

“…….”

갑자기 부드러워진 재혁의 태도에 루는 입술만 달싹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렇게 나올 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한 번만 더 말해 봐요.”

존댓말이었다. 플레이가 끝났다는 시그널인데 갑자기 끝나 버린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이요?”

“조금 전에 내가 가위로 좆을 자른다고 했을 때 내게 했던 말이요.”

“아…….”

그 말에 감동이라도 한 걸까.

루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진짜로 그렇게 느껴서 한 말인데 눈가까지 촉촉해져서 되묻는 재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해 주었다.

“주인님은 나를 다치게 하지 않아요.”

“그래, 나는 너를 다치게 하지 않지. 뭘 시켜도.”

그는 마치 사랑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루의 목에 입술을 깊게 묻었다.

“한 번 더 말해 봐요.”

“주인님…은, 흐읏!”

말하라고 해 놓고 깊이 들어가 있던 성기를 내벽을 긁듯이 빼는 것과 동시에 빳빳하게 일어난 성기를 꽉 쥐었다. 쾌감이 터져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하아… 좋아. 따뜻해.”

재혁은 루의 성기를 빠르게 흔들면서 구멍에 들어간 제 성기가 쥐어짜지는 것처럼 조이는 감각에 집중했다.

“다리 잡아요. 후으…….”

루가 다리를 잡아 벌렸다. 그 덕에 음란한 구멍이 젤을 흘리며 눈에 드러났다. 재혁의 허리 짓이 빨라졌고 루는 다리를 잡은 채 그의 움직임을 견디며 사정했다.

“으읏… 흐으! 아아!”

깊은 곳에 넣은 거로도 모자라 성기를 흔들고 젖꼭지까지 깨무는 바람에 아프고 저릿하고 뜨겁고 간질거리는 감각이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퍼져 나가는 순간, 속에 뜨거운 것이 가득 퍼졌다.

완전한 멀티오르가슴이었다.

재혁은 붉은 자국이 남은 루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호흡이 다 가라앉지 않아 들썩이는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루가 자신을 알아보든 알아보지 않든 끝까지 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기분과 상관없이 플레이를 시작한 돔은 멈추지 않는 게 규칙이었고 서브도 그것을 바랄 테니까.

그러나 재혁은 중간에 모든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루는 오늘도 정답을 맞혔다.

플레이하면서도 집중할 수 없었던 이유는 비록 불가항력적이긴 했으나 루가 순순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소유욕에 들끓어 이성을 잃어 갈 때쯤 루가 자신이 주인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고 반쯤 풀린 마음으로 플레이를 이어 가려고 했을 때 주인님은 절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는 말을 함으로써 재혁의 마음을 사르르 녹였다.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루의 등 뒤에서 그를 안으며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손을 앞으로 돌려 느리게 배를 쓰다듬었다. 손에 닿는 피부가 부드러웠다.

“들어올 때부터 알았어요. 어떻게 몰라요?”

루가 몸을 돌려 눈을 마주쳐 왔다. 울어서 붉어진 눈가를 부드럽게 쓸었다. 손에 눈물이 조금 묻어났다.

“마스크를 쓰고 선글라스를 꼈는데 어떻게 알아봅니까? 우리가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닌데.”

루가 흐릿한 조명 아래서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피식 웃었다. 비웃음 같았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할 말이 있는지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그가 내쉬는 뜨거운 숨이 가슴에 닿아 잠재워 놓은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래 만난 사이가 아니라도 좋아하고 반가운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법이에요. 그리고 팀장님은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띈다고요. 잘생겼으니까요.”

재혁은 허탈하게 웃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데 잘생겨서 눈에 띈다는 말이 맞는 말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의 칭찬이 싫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강압적으로 당하는 걸 좋아한다고 해서 강간 플레이를 선물해 주고 싶었는데 내가 다 망쳤습니다.”

“네, 맞아요.”

재혁의 눈이 크게 떠졌다. 너무 오냐오냐 봐준 걸까? 당연히 그게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바로 수긍해 버리다니. 귀를 의심하며 재혁은 다시 물었다.

“뭐라고?”

미간을 찌푸린 표정에 겁을 먹었는지 루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망친 게 아니라 자꾸만 아무한테나 벌리느냐고 뭐라 하시니까요. 억울해서 제가 주인님인 걸 안다고 밝힐 수밖에 없었잖아요.”

할 말이 없어진 재혁은 루가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그를 꽉 끌어안았다.

“으윽… 숨 막혀요!”

“숨 막히라고 하는 겁니다.”

제 품에 안겨 버둥거리던 루의 움직임이 멎었다. 재혁이 안은 팔의 힘을 풀자 슬쩍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 왔다. 흔들리는 속눈썹을 지그시 내려다보자 루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도 좋았어요. 강압적이어서가 아니라 오늘 못 볼 줄 알았는데 봐서 좋았고 제가 한 말을 기억하고 이벤트를 준비했다고 생각하니까 평소보다 더 흥분됐어요. 고맙습니다.”

루가 고개를 들어 재혁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부끄러운지 곧바로 고개를 숙이는 그의 턱을 잡아 올리고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언어 전공자가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예쁜 말만 골라 할까 생각하다가 이 또한 콩깍지라는 걸 알고는 조금 웃었다.

항상 그랬듯 자신이 웃는 걸 보고 따라 웃는 루를 보는 게 좋았다. 섹스 후에 허탈감이 아니라 가득 차는 느낌을 받는 건 이 남자가 유일하다고 재혁은 그의 입술에 키스를 돌려주며 벅찬 감정을 느꼈다.

재혁은 그가 웃고 있을 때 생각해 두었던 말을 꺼내기로 작정했다. 함께 살길 바랐던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우민에게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차일피일 미뤄 둘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재혁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놀라는 건 아니겠지?’

재혁이 생각했을 때 루가 동거를 한 번에 찬성하지 못하고 오래 고민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육체적 지배는 잘 견디는 반면에 정신적 지배나 일상생활 통제는 견디기 어려워한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자신에게 먼저 고백해 온 루가 동거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최대한 그를 배려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한 재혁은 루의 턱을 살며시 쥐었다. 그를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루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루 씨, 내가 부탁이 있는데…….”

루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같이 살자는 대답을 빨리하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가 깨물고 있는 입술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을 이었다.

“명령이 아니라 말 그대로 부탁이니 그렇게 긴장할 것 없습니다. 거절해도 되고.”

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재혁은 그런 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아, 그래요. 물론 압니다. 루 씨가 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거. 그래도 오늘은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루가 자신의 추측이 제발 틀리길 바라며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동거하는 것 때문에 그러세요?”

재혁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재혁의 눈동자에 그늘이 졌다. 시선을 내리깐 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시선을 들어 눈을 마주친 그가 루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루 씨는 나한테 어디까지 허락해 줄 수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에 눈만 깜빡거렸다. 그가 말한 ‘어디까지’의 기준이 불분명했다. 그런 루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재혁이 되물었다.

“아니, 다시 묻겠습니다. 정신적인 지배나 일상생활 통제는 어때요?”

루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자신의 귀가 어떻게 돼 버린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침을 꼴깍 삼키고 긴장된 가슴을 누르며 그에게 물었다.

“이, 일상생활 통제는 주인님이 귀찮아하신다고…….”

그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아니, 나와 상관없이 당신이 어떻게 느끼냐고 묻는 겁니다.”

“저야…….”

평소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문제라서 금방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정신 지배나 일상생활 통제에 대한 개념도 모호했다. 루가 아는 것이라고는 영상을 통해 배운 감금 플레이 정도였으니까.

정말로 감금을 당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건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재혁의 질문이 정말 감금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루가 말을 잇지 못하자 재혁이 루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렵습니까? 내 강아지가 되고 싶다고 해 놓고?”

말의 내용에 비해 목소리는 진지하기만 했다. 그 틈이 주는 위화감에 몸이 떨렸다. 설마, 진짜 감금이라도 하려는 걸까? 동거를 거부했다고?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저, 감금하시려고요?”

목을 주무르던 재혁의 손이 뚝 멈췄다.

“뭐?”

“가, 감금은 조금 무서운 것 같아요. 저는 티, 팀장님도 좋아해서요. 물론 주인님도 좋긴 하지만요.”

재혁이 한 방 먹었단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루는 그가 왜 웃는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웃음이 멎기를 기다렸다. 한참 웃던 재혁이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길로 갑자기 다정해졌다.

“저는 원래 잘 웃는 사람이 아닌데 루 씨만 보면 왜 이렇게나 웃는지 모르겠습니다.”

머쓱해진 루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웃는 표정 엄청나게 멋있어요. 저는 팀장님처럼 크게 웃으면 약간 멍청해 보여서 안 웃는 연습 많이 해요. 그래도 늘 실패하긴 하지만. 저도 팀장님처럼 웃으면 좋을 텐데.”

“아닙니다. 루 씨가 웃는 얼굴도 멋있습니다. 그러니까 많이 웃으세요.”

“네!”

씩씩하게 대답한 루가 재혁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중요한 말을 하고 있던 게 기억나 그에게 다시 물었다.

“저기, 근데 감금하실 거 아니라서 웃은 거 맞죠?”

재혁이 불량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살짝 올라간 입매가 조금 무서웠다.

“왜요? 내가 그러길 바랍니까?”

“아니요! 그냥 제가 일상생활 통제가 뭔지 잘 몰라서요. 좀 쉽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재혁이 몸을 일으키며 자세를 고쳐 앉자 루도 따라 하려다가 뒤에 느껴지는 통증에 깜짝 놀라고는 그냥 누워 있었다. 재혁이 그런 루를 보며 조금 웃다가 이마를 쓸어 주며 말했다.

“거창한 건 아니고, 루 씨 핸드폰에 위치 추적 앱 하나 설치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족쇄를 차고 감금을 당하는 걸 생각하고 있던 루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쉬운 부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연인끼리 하는 거잖아요? 저는 좋아요!”

루가 해맑게 그의 부탁을 들어줬는데도 불구하고 재혁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진지한 얼굴로 루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건 탓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함께 사는 건 어려운 사람이 위치 추적 앱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동의합니까?”

루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으로 재혁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위치 추적 앱은 루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함께 사는 건 그가 자신에게 질려서 떠날까 봐 무서운 일이었지만 위치 추적 앱은 어차피 그가 아는 곳에서만 있을 건데 싫을 이유가 없었다.

할 말을 생각하다가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원래 보살핌받는 거 좋아해요. 관심받는 것도요. 아, 그렇다고 주목받는 걸 즐기는 건 아닌데 팀장님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상관없어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관심 가져 주면 좋겠어요.”

뭐라고 대답하든 감동한 표정으로 그를 꼭 껴안아 주었던 재혁이었는데 오늘은 의아한 얼굴로 질문을 더 해 왔다.

“그런 생각이면 함께 살면서 보살핌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요. 내가 더 관심을 줄 텐데?”

할 말이 없어진 루는 애꿎은 입술만 핥았다.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를 재혁이 이해할 수 없을 텐데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런 루를 보던 재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 아닙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진지하게 굳어 있었던 그의 표정이 풀어지긴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루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댄 채 생각하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가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하기 싫은 게 아니에요. 시간을 조금만 더 주세요. 용기가 생기면 그때 말할게요.”

재혁이 낮게 웃으며 루의 등을 꽉 끌어안았다.

눈을 뜨니 아침이 밝아 있었다. 커튼 틈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길게 선을 이었다. 씻은 기억이 없는데 몸이 깨끗한 거로 봐선 어제 위치 추적 앱을 설치한 후에 기절할 때까지 하다가 잠이 든 사이 그가 씻겨 놓은 것 같았다. 이럴 때 보면 그는 참 다정한 사람이었다.

몸을 돌려 옆자리를 보니 재혁이 자신 쪽으로 몸을 돌려 자고 있었다. 몇 가닥 흘러내린 앞머리를 조심스레 쓸며 잘생긴 얼굴을 감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옆에서 같이 잠들고 깨어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갖고 싶은 걸 쉽게 얻어본 적이 없었던 루는 지금의 행복이 꿈만 같아서 조심스레 어제 괴롭힘당한 가슴을 만져 보았다. 쓰리고 아픈 게 꿈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흐음’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손이 자신을 향해 뻗어 왔다. 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올렸더니 그와 눈이 마주쳤다.

“깼어요?”

“네.”

“루 씨는 잠이 없나 봅니다.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네요.”

잠이 덜 깨어 잠긴 목소리가 섹시했다.

“매번 먼저 잠드니까요.”

“그것도 그러네요.”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뗀 재혁이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이 아직은 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자 재혁이 픽 웃었다.

“발라 먹을 것처럼 눈을 떼지 못하더니 왜 시선을 피하고 그래요.”

“제가 언제…….”

그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선은 느껴지거든. 특히 당신처럼 뜨겁게 바라보는 눈빛이면.”

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았다. 깼으면 기척이라도 해 주지.

“일어나 있었던 거예요?”

“실눈을 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젖꼭지를 만지면서 날 보고 있더라고. 좋은 걸 놓칠 수 없어서 자는 척했지. 왜, 아침부터 당겨요?”

“아니요!”

루의 대답에 재혁이 눈가에 주름이 잡히도록 크게 웃었다. 어제 야근에 이벤트까지 준비한 탓에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 옆 탁자에 둔 핸드폰을 확인한 재혁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납시다. 아침 먹고 출근하면 되겠네요.”

“저… 아침 안 먹어도 되는데 따로 출근할까요?”

갑작스러운 루의 질문에 재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루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재혁에게 말해도 될지 안 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와 많이 편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말을 솔직하게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루는 할 말을 정리하는 듯 잠시 입술을 핥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요즘 들어서 회사에서 마주치는 거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아웃팅 걱정되시면 따로 가도 저는 괜찮아요. 평소에는 다정하게 대해 주시니까.”

재혁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조금 웃었다.

“난 또 뭐라고.”

짧게 한숨을 쉬더니 침대에 다시 앉아 아직 누워 있는 루의 발목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신경 쓰였습니까?”

“조금요.”

발목을 매만지는 재혁의 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깊고 묵직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아웃팅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인데 궁금합니까?”

그의 물음에 얼마 전 회사에서 본 낯선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었다. 낮고 길게 끄는 듯한 목소리에서 말하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일어나요. 밥 먹고 가려면 빠듯하니까.”

재혁이 루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함께 욕실로 들어가 각자의 칫솔로 양치를 했다. 거울 속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루는 조금 전에 보았던 무거운 시선 따위는 잊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와 공유하는 일상이 이렇게 행복한데 쓸데없는 의심으로 망쳐 버리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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