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3)

6. 너는 나의 타락 (2)

재혁은 괴로운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너무 빨라요.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던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고 뭐든 하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팀장님으로 돌아와서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대체 뭘 하려고 저러는지 두려운 마음과 동시에 아랫배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섹스는 다정했다. 음란한 말을 내뱉지도 않았고 급하게 짓쑤시지도 않았으며 하는 내내 뜨거운 애무와 키스만 이어졌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좋았지만 처음에 느꼈던 미친 듯한 오르가슴은 느낄 수 없었다.

망가뜨릴 거라고 경고한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다정한 섹스라 루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애니멀 플레이를 한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다니……. 질린 걸까? 그가 만족하지 못했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자리 잡자 괜히 더 주눅이 들고 눈치가 보였다.

“후으, 힘줘. 흘리지 마.”

“으읏, 네. 주인님 정액 잘 담고 있을게요.”

“그래, 착하다.”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 떼는 재혁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을 때 루는 지금부터 본게임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재혁이 말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목줄을 홱 당겼다. 뒤의 힘이 풀려 정액이 흐를 뻔했지만 참고 엎드린 상태로 침대에서 내려갔다.

“들어가.”

재혁이 목줄을 잡아끌고 데려간 곳은 욕실이었다. 씻겨 주려고 그러나 싶어 뒤의 힘을 풀려고 할 때, 그가 수납장에서 면도기를 꺼내며 턱짓으로 세면대를 가리켰다.

“앉아.”

말귀를 못 알아듣고 어리둥절해하자 재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목줄을 다시 당겼다.

“말 안 듣지?”

루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세면대 위에 앉았다. 재혁의 손에 들린 시퍼런 칼날이 금방이라도 제 목을 벨 것처럼 무서웠다.

“다리 벌려.”

“…팀장님.”

주인님이 아니라 팀장님이라고 말한 데다가 ‘멍멍’이 아니라 사람 말까지 했다. 너무 놀라서 내뱉은 말이지만 루는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든 다 하기로 해 놓고 고작 이 정도에 겁을 집어먹다니.

루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죄송합니다. 벌릴게요. 사람 말 한 것도 주인님이라고 안 한 것도 죄송해요. 그냥 너무 놀라서.”

“괜찮아. 사람 말 해도 돼.”

“가, 감사합니다.”

재혁은 보상하듯 칼날을 옆에 내려 두고 다가와 루의 머리를 품으로 당겨 안았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장 은밀한 곳의 털을 없애는 행위는 다른 곳에서 함부로 속옷을 벗을 수 없게 만드는 소유욕을 뜻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플레이 파트너 사이에서는 하지 않는 일이고 연애 디엣 관계에서만 하는 일이라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론과 현실은 달랐고 그의 정액을 담은 상태로 칼날을 보는 순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그치고 혼내도 할 말이 없었는데 오히려 보상을 해 주니까 더 미안했다. 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못 하겠으면 안전어를 외치면 돼. 내가 끌고 간다고 억지로 끌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야. 물론 나는 너를 망가뜨릴 거고 심하게 대할 거고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대로지만 네가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이 풀린 루는 친절하고 다정한 재혁을 냉혹한 주인님으로 만드는 단 한마디의 주문을 그의 귀에 속삭여 주었다. 재혁이 그런 마음으로 자신을 대한다면 얼마든지 응해 줄 수 있었다.

“…주인님, 더러운 좆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세요.”

루가 다리를 벌리자 다리 사이로 반쯤 발기한 성기와 정액으로 엉망이 된 구멍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땀과 정액이 성기 주변과 음모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걸 내려다보는 루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딜도를 꽂고 있는 모습도 이미 보여 준 적이 있는 데다가 루의 성기 주변은 다른 사람에 비해 깨끗한 편이었다. 그곳의 털도 머리카락처럼 털의 색이 옅은 편이었고 가늘고 숱이 없어서 흉하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오늘 내내 마음을 복잡하게 하던 문제들이 사라지고 오직 플레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구멍의 힘 풀어.”

“네, 저…….”

할 말이 있다는 듯 눈치를 보는 걸 보니 야한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것 같았다. 이런 때를 놓칠 순 없지. 재혁은 일부러 그를 더 부추겼다.

“그냥 풀면 안 돼. 물론. 제대로 말해.”

“네! 음란한 강아지… 아니! 수캐가 주인님 정액 싸는 거 봐 주세요.”

꼴리라고 말하는 건지 웃으라고 말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긴 했지만 재혁은 웃음을 꾹 참았다. 서브를 수치스럽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민망하게 하거나 죄책감을 느끼게 하다니. 그건 초보 돔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그러나 루를 앞에 두고 웃음을 참는 것은 고역이었다.

재혁은 이를 꽉 깨물고 명령했다.

“싸.”

“으응…….”

루가 힘을 풀자 구멍에서 흰 액체가 흘러내렸다.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정액을 닦아 내고는 그 위에 셰이빙 거품을 뿌렸다. 차가운지 루의 허벅지가 떨렸다. 재혁은 거품을 바르는 척하며 예민하게 부풀어 오른 기둥을 툭 건드렸다. 허벅지에 흐르는 짜릿한 느낌에 루가 허벅지를 떨며 신음했다.

“흐읏…….”

“움직이면 다쳐.”

피부 곳곳에 새하얀 거품이 두껍게 내려앉았다. 면도날을 기울여 피부가 쓸리지 않게 조심조심 털을 깎아 나갔다.

스윽, 스윽. 소름 돋는 소리에 루의 등에 식은땀이 났다.

죽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성기를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날을 움직이던 재혁이 샤워기를 들고 물을 뿌렸다.

“내려와.”

루는 차마 제 아래를 볼 수가 없어 눈을 감은 채로 세면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루의 몸을 돌려 욕실 뒤편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세웠다. 등에 느껴지는 재혁의 단단한 가슴에도 안정감이 느껴지지 않아 몸이 떨렸다.

“왜 이렇게 떨어. 면도는 끝났어. 네가 얼마나 예뻐졌는지 봐야지.”

“눈 뜰까요?”

“응.”

눈을 뜨고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본 루의 입이 딱 벌어졌다. 털이란 털은 한 올도 남김없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털에 감춰져 있던 부분까지 드러나면서 서 있는 기둥이 더 음란해 보였다.

재혁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어린아이의 용변을 도와줄 때처럼 루의 양다리를 안아 들었다. 거울 앞에서 쫙 벌어진 다리 사이로 구멍이 벌겋게 드러나자 루는 울고 싶었다. 이렇게 거울에 비춰서 그곳을 직접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때? 볼 만하지?”

“으으… 흑.”

“왜? 괴로워?”

“아니요.”

루가 그 장면을 더 보고 있기 힘들어 재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자 재혁은 그대로 그를 데리고 침대로 갔다.

로프를 꺼내 손을 다리와 연결해 묶어 사지를 결박했다. 다리가 벌어진 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다리 사이로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차오르는 흥분감에 몸이 떨렸다.

“조금 특별한 걸 해 볼까 하는데.”

“…네.”

“너무 발정 나서 아무 데서나 구멍을 벌리면 곤란하니까 참는 법을 교육할 거야.”

재혁은 서랍을 열어 안을 뜨겁게 달구는 효과가 있는 젤을 꺼냈다. 인체에 해가 없는 데다가 실제로는 아무 효과가 없지만 플라세보는 만들기 나름이었다. 젤을 구멍에 넣고 몸이 달아서 애원하는 루를 보고 싶었다.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충분히 벌린 후에 그 사이로 젤을 짜 넣었다.

“으… 흐으… 뜨, 뜨거워요, 주인님.”

“당연하지. 최음제니까.”

“최음제요?”

재혁은 마치 최면을 걸듯 느린 목소리로 차분하게 젤의 효과에 대해 속삭였다.

“처음엔 뜨거워지다가 나중엔 구멍이 가려워서 뭐든 쑤시고 싶게 되지. 볼까? 내 강아지가 얼마나 잘 견디는지.”

“…네.”

고분고분하게 대답했지만 심리적 효과는 강력해서 루는 아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재혁은 그 생각만으로도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젤이 들어간 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고 내벽을 문질렀다. 전립선을 피해 문지르고 길이가 짧은 진동기를 그 속에 넣었다. 자극은 되지만 끝까지 가지 못하면 괴로울 것이다. 울고 땀을 흘리고 뜨거운 젤을 쏟아 내며 견디는 걸 보고 싶었다.

사실 오늘 재혁이 루에게 내린 미션은 참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거였다. 주인님 앞에서 무너져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이 재혁의 계획이었다.

강력한 방법이라 이제껏 다른 섭들에게는 의존도가 높아질까 봐 쓰지 않던 방법이었지만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기 좋아하는 재혁이 가장 흥분하는 플레이기도 했다.

“벌써 질질 싸면 어떡해? 응?”

전원 버튼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자극이 되었는지 선단에서 프리컴이 줄줄 새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기둥을 훑듯이 자극하자 루가 신음하며 고개를 젖혔다. 더 만져 달라는 듯 허리를 내미는 꼴이 미친 듯이 꼴렸으나 손을 떼 버렸다.

재혁은 맞은편 테이블용 의자에 앉아 느른하게 등을 기대고 진동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금부턴 감상의 시간이었다.

“으으… 아! 주인, 주인님.”

자극이 센지 틀자마자 루는 몸을 뒤틀며 울었다. 작은 진동기는 구멍의 입구에서만 움직이고 전립선을 건드려 주지 않았고 최음 효과가 있다는 젤은 내벽뿐 아니라 온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게다가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재혁이 여기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확인하기 위해 그를 애타게 불렀다.

“주, 주인님! 계세요? 저… 그냥 옆에 있는지만…….”

다행히 그의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왜? 보고 있으면 더 흥분돼?”

사실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를 위해 그렇다고 대답해야 했다.

“네, 저 흥분하는 거 봐 주세요. 테스트 잘할게요.”

“그래, 얼마나 잘 참는지 보자.”

진동기의 단계가 올라갔는지 구멍이 더 많이 벌름거렸다. 뜨거운 내벽이 조여들어 진동기를 압박했다.

“으읏… 아!”

조금,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진동기는 전립선 근처만 맴돌 뿐이었다. 가고 싶은데 갈 수 없어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렇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모습을 그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점점 더 뜨거워졌다. 인제 그만하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었다.

“아, 아아! 주인님, 이상해요. 너,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될… 으읏!”

차라리 자신을 경멸하는 얼굴을 보거나 능욕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가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마저도 없으니 괴로움이 점점 더 심해졌다. 진동기가 돌며 질척이는 소리와 자신이 내는 신음에 몸이 더 달아올랐다.

“으읏, 제, 제발… 아아.”

“겨우 2분이 지났을 뿐인데?”

두 시간은 넘게 지난 것 같은데 겨우 2분이라니.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어서 뭐라도 쥐면 좀 덜할 것 같은데 그럴 수도 없어서 참기가 힘들었다. 섹스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리를 벌린 채 전립선까지 닿지 못하는 진동기를 넣고만 있을 뿐인데 날카로운 감각들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으흣… 아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가면 안 돼. 참으라고 했으니까 참아야 하는데……. 아아! 더는 한계였다. 루는 미친 듯이 울고불고하며 재혁을 불렀다.

“주, 주인님… 어, 얼마나 참아야… 저 더는… 아아!”

“10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조금 전에 2분이라고 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았을 텐데……. 이대로는 10분은커녕 5분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부드러운 목소리가 루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빨아 달라고 하면 빨아 줄게. 애원해 봐.”

“…네?”

“물론 그렇게 되면 테스트는 실패하는 게 되겠지만.”

루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시험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명령을 따르게 하는 데에 쾌감을 느끼는 도미넌트였다. 쾌감 따위에 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입 속의 여린 살을 아프게 깨물었다.

입 속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고통이 느껴지니 쾌감을 참는 게 한결 더 수월해졌다. 이대로 견디면 시간은 금방 갈 것이다. 그러면 테스트에 통과하는 거니까 재혁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루가 최대한 몸의 힘을 뺐다. 그 순간 가슴 부근에서 저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재혁이 젖꼭지 부근을 만지는 것 같았다. 꼬집듯이 잡아당기고 누르고 문지르는 동안 쾌감이 끓어올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흐읏… 주, 주인님. 거기, 거기는 안 돼요.”

“왜? 느껴서?”

“네, 너, 너무 느껴서요. 아아… 간지러워요. 흐으…….”

“참아야지. 아무나 여기 이렇게 만져 주면 구멍 벌리겠네?”

“아니, 아니요. 주인님한테만… 아아!”

재혁은 참으라고 해 놓고 양쪽 가슴을 손안에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젖꼭지를 끼워 비볐다. 불에 덴 듯 타오르는 느낌에 구멍이 조여들어 진동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흐읏… 아.”

찰싹! 가슴에 손바닥이 내리쳐졌다. 아프지 않고 뜨겁기만 했다. 안 돼, 참아야 해. 테스트… 테스트야. 흑흑.

울며 몸을 흔들었다. 루는 참기 위해 안대로 가려져 있는 눈을 꼭 감고 가장 슬펐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생겼던 엄마의 손을 놓았던 날,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날, 그러나 왜 자신이 버려져야 했는지 이유도 모른 채 버려진 건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손가락질받으며 어두운 방에서 밥을 굶어야 했던 날.

어둠이나 배고픔보다 버려졌다는 상실감이, 이제 내 옆에는 아무도 없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그날을 생각하며 참았다.

죽어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루는 크게 신음하며 울부짖었다.

“싫어! 싫어요. 주인님, 저… 저 버리지 마세요. 차, 참을 거예요. 저는… 주인님이 아니면 안 돼요. 음란하지 않아… 아니, 음란하지만 주인님한테만 발정해요. 다른 사람은 싫어요.”

가슴을 쥐어뜯을 듯 괴롭히던 재혁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아래에서 느껴지던 진동도 꺼졌다. 갑자기 모든 제약이 사라지자 퓨즈가 끊어진 전구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조용한 방 안에는 루의 훌쩍임만이 가득 찼다.

안대가 풀어지고 흐릿한 시야에 재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또 졌네요. 루 씨는 어떻게 한 번을 안 져 줍니까, 나한테.”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아프게 루의 마음을 흔들었다. 루는 눈을 깜빡여 눈물을 없애고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를 안아 주고 싶었지만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상태여서 어쩔 수 없었다. 대신 진심으로 말했다.

“지다니요. 저는 팀장님이 시키시는 대로 했을 뿐인데요. 저는… 그냥 버림받기 싫어서, 잘하고 싶어서요. 복종한 거뿐이에요.”

멋있게 말해서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는데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라 그러지도 못했다. 어쩌면 이렇게 잘하는 게 하나도 없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진득한 시선이 뺨에 달라붙었다.

“그거 압니까?”

무엇을 묻는지 몰라 아련하게 그를 바라보자 재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일단 풀어 주겠습니다. 잘 해냈어요. 사실 내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진 않았지만 당신은 오늘도 완벽했으니까.”

손과 발을 묶고 있던 줄이 풀리고 붉은 자국이 남은 곳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꼭 사정하고 난 뒤에 여운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런 게 정신적인 만족감이라는 걸까? 기분이 좋아져서 루는 재혁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비볐다.

재혁이 팔을 뻗어 루의 등을 끌어당기는 것과 동시에 쓰러지듯 등이 시트에 닿았다.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나는 오늘 당신을 한계까지 끌고 가서 망가뜨릴 생각이었습니다. 나한테 애원하게 해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걸 가르치려고 했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슴에 귀를 대고 있던 루의 얼굴을 떼어 눈을 맞춰 왔다. 따뜻한 눈빛이 좋아서 발끝이 간지러웠다.

“안 가르쳐도 정답을 알고 있는 게 어딨습니까. 그건 반칙이잖아.”

“제가… 그랬어요?”

진짜 몰라서 한 질문이었다. 정답이었다니. 그런 생각은 없었고 그냥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그러지 않으면 버림받을까 봐 했던 행동일 뿐인데 그게 정답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재혁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루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입술을 눌렀다 떼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 말도 해 줘야지. 플레이가 끝났다는 시그널. 못된 내 요구를 잘 참았습니다.”

잘 참았다는 말이, 뿌듯하게 만드는 보상의 한마디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나 슬프게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루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저 잘했으니까 키스도 해 주셔야 해요.”

“하!”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면서도 재혁은 기꺼이 입술을 깊이 묻어 왔다. 다정하지만 약간은 강압적인 섹스가 길게 이어졌다.

루는 실컷 울었고 재혁은 루를 한순간도 품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스팽을 하는 순간에도 무릎 위에 올려 두었고 사정 후 펠라로 청소를 시킬 때도 제 위에 거꾸로 엎드려서 하라고 하며 몸을 붙이는 데 집착했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지만 울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몸을 녹여 버릴 정도로 좋았다. 우는 게 이렇게 행복한 일인 줄 알았다면 더 많이 울었을 거라고 말하자 재혁이 아프지 않게 젖꼭지를 꼬집으며 말했다.

“내 앞에서만 울어요. 아니, 내 앞에서 울려고 이제까지 참은 거야. 알겠어요?”

“네.”

재혁은 루를 꼭 안고 잠이 들었다.

낮에 다녀간 우민 때문에 더러워진 마음이 정화된 것처럼 개운하고 편안했다. 도미넌트가 섭한테 한 방 제대로 먹었는데도 기분이 좋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성격 더럽기로 소문난 제우스의 지배자 김재혁이 어디까지 무너지는지 두고 볼 일이었다.

먼저 눈을 뜬 루는 습관적으로 시계부터 확인했다. 핸드폰의 액정은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잠을 깊게 이루지 못하는 그로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잠을 잔 셈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무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가벼웠다.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고 커튼으로 들어오는 이른 햇빛에 그가 단잠을 방해받을까 봐 조용히 일어나 커튼을 닫았다. 다시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영상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연애 디엣을 하는 커플의 일상을 보여 주는 영상이었는데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뒤 서브가 펠라로 돔의 잠을 깨우는 내용이었다. 상상만으로 볼이 붉어졌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루는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려 보며 시간이 가길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잠에서 깨야 할 때쯤 그는 조심스레 이불을 열었다. 풀린 가운 사이로 발기한 그의 성기가 보였다.

몸을 모로 눕힌 채 그의 성기까지 미끄러뜨려 다시 이불을 덮었다. 이불 속에서 루는 조심스레 입술을 열어 그의 성기를 물었다.

“흐음…….”

재혁이 다리를 옆으로 벌리며 단 숨을 내뱉었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뒷머리에 따뜻한 손이 닿았다. 평소처럼 목구멍까지 삼키길 바라며 머리를 누를 줄 알았는데 그저 쓰다듬기만 했다. 뜨거운 신음 속에 섞인 기분 좋은 듯한 웃음소리가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어서 루는 장난하듯 그의 성기를 혀로 간지럽혔다.

그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아침부터 어쩌자고 이래? 응?”

지나치게 다정한 음성에 뇌가 녹을 것 같았다.

“응석 부리는 거야?”

루는 대답 대신 중간까지만 물고 있던 성기를 더 깊이 물었다. 목이 조이는 듯한 압박감도 입술이 찢어질 것 같은 부피감도 다 견딜 수 있는 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결 때문이었다.

“후…….”

깊게 숨을 몰아쉰 재혁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들어왔다. 안압이 차오를 정도로 깊은 삽입에 놀라 머리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가 머리를 눌러 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치심을 숨겨 주던 이불이 사라졌을 때 고개를 들자 재혁과 눈이 마주쳤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듯 허리가 다시 나갔다 들어왔다.

“혀도 써야지.”

입을 가득 채운 기둥을 혀로 문지르자 머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열어. 흐읍.”

숨이 차고 열이 더 오르기 시작했다. 목이 꽉 막힌 느낌에 밤새 시달렸던 구멍이 조여들어 허리가 들썩였다. 그가 무릎으로 루의 가랑이 사이를 자극하며 허리를 빠르게 치대기 시작했다.

아래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집중한 채 그의 손에 머리를 맡기고 엉망으로 흔들렸다.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을 때쯤 목구멍 안으로 뜨거운 액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혀를 지나치지 않고 바로 들어오는 액체는 맛도 향도 없었다.

목울대를 움직여 정액을 삼키는 루의 얼굴에 뜨거운 시선이 달라붙었다. 사정을 끝낸 성기가 입 속에서 빠져나가고 눈을 비비고 있는데 그가 루를 안아 올렸다.

사정한 것은 재혁인데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에 루는 절정보다 더 아득한 기분을 느꼈다. 그의 목에 팔을 감자 재혁이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입 안 곳곳을 헤집는 키스에 정신을 잃어 갈 때쯤 입술을 뗀 재혁이 루의 뺨을 잡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눈 떠요.”

강아지가 아니라 나는 당신을 ‘루’로 대할 거라는 존댓말에 루는 옅게 미소 지으며 눈을 떴다. 그도 희미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 잘 받았습니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루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재혁이 짓궂게 농담했다.

“어떡하면 좋은지 모르겠네. 당신은 이런 말보다 더 험한 말을 좋아할 텐데. 안 그래?”

눈을 새초롬하게 뜬 루가 소심하게 그의 어깨를 밀며 대답했다.

“평소엔 아니에요. 칭찬을 받을 기회가 없어서 부끄러운 거지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그리고?”

“온종일 침대인 건 아니잖아요. 무서운 건 침대에서만 좋아해요!”

재혁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침대 위란 말이죠? 안타깝네.”

“네? 왜, 왜요?”

“흐음, 자동차나 안전이 보장된 야외 플레이, 화장실, 주방, 거실, 소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침대가 아닌 장소들에 루의 얼굴이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아니이! 그 말이 아니잖아요.”

재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매일 놀려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울리면 울고 웃기면 웃고 명령하면 명령하는 대로 때로는 명령하지 않은 것도 주인이 원한다고 생각하면 무엇이든 해내는 서브.

어쩌다 이런 사람이 굴러들어 왔을까.

재혁은 루를 품에 꼭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출근은 해야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