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3)

5. 너는 나의 타락 (1)

재혁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다음 날 출근하니 사람들이 모두 아픈 건 괜찮냐고 물어봐 줘서 양심에 찔렸다. 자기 때문에 일을 몇 배로 더 해야 했을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어제 못 한 일까지 마치려면 서둘러야 했다. 모니터를 켜고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집중해서 빨리 끝내야 하는데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은 파티션 너머의 긴 복도 끝 팀장실을 향해 계속 돌아갔다.

“어? 신루, 집중 안 하지?”

“죄송해요.”

“그래도 하루 쉬고 왔다고 컨디션이 괜찮나 봐. 요즘 통 기운을 못 차리는 것 같더니 오늘은 생글생글 잘 웃기까지 하고.”

“저 좀 피곤했나 봐요. 쉬고 왔더니 확실히 괜찮아지는 걸 보면요.”

“그래, 루 씨 인턴 끝나고 바로 왔잖아.”

이 대리의 말에 대답해 주고 있었지만 긴 시간을 떠드는 데 사용한 것도 아니고 말하면서도 눈과 손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데 지나가던 재혁이 괜히 시비를 걸었다.

“거기 두 분, 시간 많으신가 봅니다. 일이 적지요?”

가뜩이나 재혁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이 대리가 표정 관리를 못 해서 확 구겨진 얼굴로 루의 편을 들고 나섰다.

“제가 신루 씨 사수로서 조금 챙겨 준 것뿐입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재혁은 이 대리의 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지나갔다. 기분 나쁜 티를 감추지 못하는 사수를 보며 불편해진 루가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루 씨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이게 다 저 예민한 팀장 때문이지. 아침부터 대체 뭐에 또 꼬인 거야?”

“…….”

‘그러게요.’라는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어제 시간이 늦었다며 집에 돌려보내 주지 않아서 함께 밤을 보내고 새벽에 자신의 집에 들러 옷을 갈아입고 함께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내리려는 루의 팔을 붙잡고 키스를 해 줄 정도로 다정했는데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기분이 나빠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인터폰이 울렸다.

“네, 기획팀 사원 신루입니다.”

―막내니까 좋네요. 연결도 바로바로 되고.

“아… 저.”

―팀장이 부르는 건 좀 이상하니까 적당히 핑계 대고 들어와요.

“뭐라고…….”

―글쎄 뭐가 좋을까?

수화기 너머에서 서류철이 부딪치는 소리와 종이끼리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들뜬 듯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수한 게 있네. 지금부터 표정 엉망으로 만들고 내가 직접 지도한다고 했다고 둘러대고 오면 되겠네요.

루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고 재혁이 시키는 대로 얼굴을 굳혔다. 회사에선 이러지 않기로 약속했지만 사실 헤어진 지 얼마 안 돼서 보고 싶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표정을 엉망으로 굳히자 이 대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티, 팀장님이요.”

“응? 그 사람이 왜.”

“지, 지난주에 올린 기획안… 실수한 거 아셨나 봐요.”

“그걸 그 사람이 어떻게 알아. 내 선에서 다 고쳐서 올라갔는데.”

“잘 모르겠어요. 직접 가르쳐 주신다고 오라고 하시는데… 저 어떡해요?”

루가 최선을 다해서 연기해서 그런지 이 대리는 속아 주는 눈치였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마를 짚고 있었지만 대리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워낙 의리 있는 사람이라 ‘과장님께 한번 잘 말해 볼까?’라고 하는 걸 폐 끼칠 수 없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로 향했다.

무엇 때문에 불러 주는지 궁금한 마음이 반이었고 또 설레는 마음이 반이었다. 그가 외주팀 팀장으로 있던 마지막 날에도 이 복도를 지나갔던 게 생각나서 조금 웃겼다. 그땐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먼저 오라고 했으니까 웃으면서 반겨 줄 거로 생각했는데 재혁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영문을 모르는 루는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입구에 서서 그의 눈치를 보았다.

“팀장님, 저 부르셨어요?”

“앉아요.”

“네.”

소파에 앉아 그의 눈치를 보았다. 연애하는 사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허벅지에 손바닥을 비비며 초조한 마음을 누르려고 애썼다.

재혁은 루가 있는 쪽으로 오려는 생각도 하지 않고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렇다고 시선을 주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거기에 가만히 앉아서 루 쪽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더 불편했다. 눈을 어디에 둘지를 몰라서 테이블 모서리만 바라보았다.

“뭐 잘못한 거 있습니까? 왜 내 눈을 못 봐요?”

“저는 원래 팀장님이든 주인님이든 눈 잘 못 맞춰요.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요.”

말을 안 하고 있다간 회사에서 무슨 꼬투리가 잡혀 혼날지 모르니까 말을 하긴 해야 했다. 루의 말이 맞는 말이었는지 재혁은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도미넌트의 마음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이제 연애하는 사이니 이 정도는 물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입을 닫았다. 뭐든 괜히 나서서 말했다가 망칠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하는 게 나았다.

“루 씨는 궁금하지도 않은가 봅니다.”

“네?”

“보통 이렇게 불편하게 입을 닫고 있으면 왜 그러는지 물어보지 않아요? 나한테 관심이 없나?”

“…예?”

“그게 아니면 뭡니까? 눈도 안 마주치고 물어보지도 않고.”

“후…….”

한숨을 내쉬고 몇 번이나 눈을 비빈 루가 재혁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표정이 무서워서 기다린 거예요. 저는… 그러니까 저는요, 원래 나서기보다 기다리는 사람이고 눈치를 많이 봐서 꼭 해야 하는 게 아니면 굳이 안 해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난 재혁이 천천히 루에게로 다가왔다. 루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자세를 낮춰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는 얼굴은 더 엉망이었다. 새삼 자신이 루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느껴져서 속이 울렁거렸다.

“나한테 고백할 때와 플레이 파트너를 제안할 때는?”

“그때는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때 제가 그러지 않았으면 팀장님을 놓칠 수 있었으니까요.”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훅 들어오는 루의 반격은 언제나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해서 재혁은 오늘 자신이 뭐 때문에 기분이 안 좋았고 왜 그를 여기까지 불렀는지를 잠시 잊었다.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그를 당겨 안았다. 블라인드를 쳐 두었지만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도 안쪽을 볼 수 없었다.

“팀장님, 여기 사무실…….”

“사방이 다 막혀 있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어제는 잘려도 상관없다더니?”

“아니, 저 말고 팀장님이요. 저는 괜찮지만 팀장님은… 읍, 읏!”

하는 말마다 가슴을 뜨겁게 달궈서 지금 당장 입이라도 맞추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재혁은 깊게 키스하고는 숨이 모자라다 싶을 때 입술을 떼 주었다. 그때 책상 위 전화가 울렸다.

―팀장님, 손님이 찾아오셨는데요?

1층 보안과의 연락이었다. 누가 올 사람이 없는 데다 아는 사람이었다면 핸드폰으로 연락했을 것이다. 대충 뭐라도 팔아먹으려는 영업 사원이거나 이쪽 기획팀에 잘 보여야 하는 거래처일 게 뻔해서 돌려보내라고 말했더니 보안과 직원이 난감해했다.

―그게요, 후회하실 거라고.

문득 불안한 예감이 재혁의 머리를 스쳤다. 남에게 이런 일을 당할 만큼 쉽게 약점을 내주고 살진 않았지만 성 소수자에다가 에세머로 살아가는 것은 그것 자체로 약점이 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난생처음으로 지키고 싶은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공간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져서 시간을 확인했다. 가장 좋은 건 내려가서 만나는 거겠지만 그러기엔 회의 시간이 빠듯했다. 여러 가지로 계산해 보던 재혁은 결국 차악을 선택했다.

“올려 보내요.”

“네.”

* * *

루는 전화하는 재혁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쫓기는 사람은 재혁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무엇 때문에 불안해졌는지는 모르겠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쫓기는 사람처럼 루에게 당장 나가라는 말을 했다.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루는 어차피 재혁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바쁘게 일하는 사람을 불러 놓고 이상한 얘기만 하다가 갑자기 키스하더니 버럭 화내며 나가라고 해도 재혁이 하라는 대로 그를 사무실에 혼자 두고 나왔다.

루는 혹시 키스할 때 입 냄새가 난 건 아닌가. 갑자기 내가 싫어진 건 아닌가. 아니면 말실수를 한 게 있나 걱정하며 복도를 걸었다.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지날 때 ‘딩동’ 하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 내렸다.

마른 몸과 작은 얼굴이 인상적인 예쁜 남자였다. 밝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밝은 톤의 정장과 잘 어울렸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비슷한 이미지를 풍겨서 마음이 불안했다. 게다가 그가 향하는 곳은 재혁이 있는 사무실이었다.

‘누구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플레이 파트너를 할 때도 그는 다른 파트너를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이제는 연애하는 사이니까 더 다른 파트너를 만나면 안 되는 건데 회사까지 파트너를 부른 건가?

쓸데없는 의심을 하지 말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자리로 돌아온 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대체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길래. 괜찮아?”

이 대리의 질문에 루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지금 루의 머릿속엔 엘리베이터 앞에서 본 남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밖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대로 재혁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 *

회사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재혁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를 피하고자 핸드폰 번호를 바꿨고 제우스에 발을 끊었고 가도 정문이 아닌 후문으로 가서 성현만 만나고 온 지가 꽤 되었으니까.

그를 생각하면 정말 지긋지긋했다.

진짜 서브인 루를 만나고 생각해 보면 이제껏 서브랍시고 제 곁에 들러붙던 사람들은 모두 이기적인 욕망만 채우기에 급급한 족속들일 뿐이었다. 플레이 파트너를 제안하면 선을 모르고 덤벼들었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서 바라는 것만 많았다. 오늘 온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적당히 놀았으면 좀 떨어져 주면 좋을 텐데 우민은 정도라는 것을 몰랐다. 그를 만난 것은 제우스였고 단 하룻밤의 플레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재혁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우민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동원해 재혁의 회사에 그와 같은 직급으로 입사했다. 특별한 성벽의 사람으로 살아오며 무수히 많은 돌아이를 상대해 왔지만 우민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하긴 루 같은 사람도 처음이긴 하다.

그러나 한쪽은 지긋지긋했고 또 한쪽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졌다.

루를 보내고 우민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동안 마음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 미친 새끼가 제발 루를 건드리지 말기를.

문이 열리고 우민이 들어왔다.

“재혁 씨, 안녕?”

재혁이 대꾸하지 않자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우민이 시선을 내리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갑자기 사라진 게 이해 불가였는데요. 오다가 신기한 걸 봤지 뭐예요.”

오싹, 소름이 돋았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세요. 회의 들어가야 합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적의가 담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에이, 한때의 인연이라도 몸정이라는 게 있는데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죠? 재혁 씨가 나한테 이래서 좋을 게 없잖아.”

우민이 소파에서 일어나 재혁이 앉아 있는 책상 가까이 다가왔다. 재혁은 동요하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관심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에겐 적당히 관심을 줘 버리는 게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보다 현명한 방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우민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그래서 용건은?”

바로 앞에서 양손으로 책상을 짚고 선 우민이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천천히 말했다.

“궁금하지 않아요? 내가 오면서 본 신기한 게 뭔지. 설마 내가 뒷조사도 안 해 보고 그냥 쳐들어왔다고 생각한 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한 거면 날 너무 하찮게 본 거야, 당신.”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그러나 우민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는 이상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금물이었다.

“정우민 씨,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굴면 나도 가만있진 않을 겁니다. 선을 넘어서 좋을 게 없는 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민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인상을 폈다. 책상 모서리를 돌아 재혁의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재혁은 마치 조각상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에이, 자기도 참… 서운해서 어리광 부린 걸 그렇게 예민하게 굴면 어떡해. 응? 그러지 말자, 우리.”

가까이 오자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양팔을 돌려 그를 쳐 내고는 최대한 무섭게 그러나 정중하게 경고했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었으면 합니다. 그럼 회의가 바빠서 이만.”

재혁은 그길로 필요한 파일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등 뒤에 날카로운 우민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그 사람 신루… 맞죠? 해 봐요. 나도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보여 줄 테니까.”

문으로 향하던 재혁은 발을 멈췄다. 그의 입에서 나와선 안 되는 이름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기분이 느끼며 우민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죽일 듯이 노려보며 턱을 쥐고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플레이가 아닌 상황에서 타인을 이렇게 다루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루를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이성이 마비되고 행동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민에게 이런 마음을 들킬 순 없었다. 루에게 진심이라는 걸 들키면 우민은 더 미칠 것이다.

차가움을 가장한 가면을 쓰고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턱을 쥔 손에 힘이 서서히 풀리고 표정을 풀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민한 건 그쪽인 것 같네요.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나서 내가 실수했습니다. 그쪽은 즐긴 것 같지만. 아팠습니까?”

“당신과 플레이는 언제나 좋지요. 여기서 해도 되는데요.”

우민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흔들리는 눈빛은 재혁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의심에 가득 차 있었다. 재혁은 철저하게 감정을 숨기고 대응했다.

“아까 말했듯이 회의가 있어서 가 봐야 합니다. 그리고 우린 이미 끝났어요. 알잖아요? 규칙을 지키지 않은 섭과는 다신 관계하지 않는 것.”

우민이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재혁은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말을 이었다.

“정우민 씨, 내가 당신한테 이런 걸 왜 얘기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귀찮으니 말해 주죠.”

재혁을 바라보고 있는 우민의 눈동자가 뱀처럼 빛났다.

이건 플레이일 뿐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플레이할 때 이보다 더 독한 말로 섭을 능욕하면서 이 정도의 말은 괜찮다.

“신루 씨와 원나잇했습니다. 맞아요.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그건 나완 별로 상관없으나 우리 회사 사람입니다. 만약 경솔한 행동으로 나를 아웃팅시킨다면 그 결과는 알아서 감당해야 할 겁니다. 누가 잃을 게 많은지 잘 생각해 보세요.”

그러나 역시 유희를 위해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것과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거짓으로 내뱉는 것은 달랐다. 루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말을 제 입으로 내뱉는 건 포커페이스에 능한 재혁이라도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재혁은 우민 앞에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까 봐 급하게 발을 돌렸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누가 또 압니까? 얌전히 착하게 굴면 내가 당신을 상대해 줄 수도 있잖아?”

우민은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재혁의 말에 반색했다.

“진심…이세요?”

재혁이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그러니까 발정 나면 이빨 세우지 말고 꼬리를 흔들라고. 주워서 데리고 놀 마음이라도 생기게. 응?”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 손님인 우민만 혼자 남았다. 날 선 목소리에 담긴 살기를 읽지 못할 만큼 어리석진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있었다. 재혁을 저렇게 동요시키는 무언가가.

* * *

루는 불안한 마음에 몇 번이고 팀장실을 기웃거렸다. 그러나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재혁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나 무슨 일 있으시냐고 먼저 문자를 보내 봐도 답장이 없었다. 사귄 지 하루 만에 차이는 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밀린 업무를 하다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곧 퇴근 시간이라 타이밍이 좋았는지 루가 핸드폰을 드는 것과 동시에 재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야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가세요.]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퇴근하고 도망가면 가만히 안 둔다고 했었다. 도망갔다가 잡히면 두 배로 혼날 거라던 사람이 수상한 남자가 왔다가 간 직후에 변해서 신경 쓰였다.

손톱을 깨물며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적었다.

[저는 괜찮아요. 기다리겠습니다.]

혹시 반항한다고 생각할까 봐 몇 번을 읽었는데 이 정도면 괜찮은 것으로 보여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전화가 왔다.

―옆에 이 대리 있습니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듣기만 들어요.

“네.”

―야근은 핑곕니다. 내가 오늘 당신을 만나면 힘들게 할까 봐 그럽니다. 조절할 자신이 없거든. 성질대로 몰아붙일 거 같으니 오늘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낮은 목소리엔 감정이라곤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핸드폰을 잡은 손이 벌벌 떨리고 입에 침이 말랐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잠시만요.”

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비상구로 갔다. 숨을 삼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할 말을 골랐다. 가장 묻고 싶은 건 오늘 낮에 다녀간 사람에 대해서였지만 지금 그 말을 꺼내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저, 팀장님. 조절할 자신이 없을 정도로 힘드신 거면 제가 필요한 거 아니에요?”

―무슨 말입니까?

“저는 괜찮아요. 힘들게 몰아붙이셔도 감당할 수 있어요. 이대로 집으로 가면 저는 밤새도록 팀장님이 갑자기 왜 약속을 바꾸셨는지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테니까 차라리 팀장님 옆에서 힘든 게 나아요.”

루가 말을 마쳤음에도 저편에선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낮은 한숨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후회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좋아요. 퇴근하고 주차장에서 봅시다.

“네.”

퇴근하고 그의 집으로 가는 내내 그는 다정한 말 한마디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만나자마자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묘한 흥분이 몸을 감싸는 것도 잠시, 루는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오늘 왔다 간 남자에 대해서 잊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현관문이 무겁게 닫히고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씻으러 들어갔다. 루는 알아서 다른 욕실을 사용해 몸을 씻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로 침실로 들어갔다. 그는 샤워했음에도 셔츠와 바지를 갖춰 입은 완벽한 상태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툭 하고 루의 앞에 목줄이 떨어졌다. 영상으로 몇 번이고 봤던 것이라 착용법은 어렵지 않았다.

직접 매라는 말일까? 아니면…….

고민하던 루는 네발로 엎드린 채 입에 목줄을 물고 개처럼 기어서 그의 무릎 앞으로 갔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목줄을 받아 들고는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했던 손이 차가워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 들어야지.”

“네, 주인님.”

찰싹.

무자비한 손길이 예고도 없이 루의 등을 후려쳤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혁을 올려다보았다.

“개새끼가 사람 말을 언제 배웠지?”

“…….”

그가 원하는 게 입을 다무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고 눈으로만 잘못을 빌었다. 이 말인즉슨 자신은 오늘 그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벌써 서러움에 눈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울지 않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경고하는 그에게 오겠다고 한 건 자신이었다. 무엇을 요구해도 다 받아 줄 생각이었다. 불현듯 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람을 믿지 못해서 시험하는 걸 즐긴다는.

사랑을 시험한다면 기꺼이 그 시험에 다시 도전하고 통과해 줄 생각이었다.

재혁이 목줄을 서서히 감기 시작했다. 감으면 감을수록 목구멍이 조여들었다. 눈을 감고 그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키웠다. 안전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하지 못해도 그는 알아서 조절해 줄 거라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다리 벌려.”

고개가 뒤로 젖혀질 만큼 목줄이 당겨진 상태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다리가 벌어졌다. 느낀 게 없음에도 성기가 빳빳하게 서 있었다.

“하, 뭘 했다고 벌써 세워? 이러니 내가 마음을 못 놓지. 시발.”

“으, 으으!”

재혁의 발이 루의 허벅지를 쓸고 지나가더니 빳빳하게 선 성기를 지르밟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서 있던 성기가 압박을 받자 고통이 밀려들었다. 조여드는 목과 엉망으로 밟히는 성기에서 오는 압박감에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고통은 잠시였다. 망가질 때까지 누르고 있을 것 같던 발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떨어졌다. 대신 그보다 더 수치스러운 말이 루의 귀를 파고들었다.

“개새끼가 질질 싸는 바람에 발바닥이 엉망이 됐잖아.”

루가 울면서 고개를 숙이자 재혁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목줄을 느슨하게 풀어 주었다. 혀를 내밀어 그의 발을 핥았다. 금방 샤워하고 나온 발에선 같은 보디 샴푸의 냄새가 났다.

그의 발에 밟히는 것, 목이 졸리는 것, 발을 핥는 것 모두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성기가 더 팽팽하게 설 만큼 흥분되는 일이었다.

다만 이러는 그가 불쌍해 보여서, 마치 나 지금 힘든데 네가 날 좀 봐 주겠니라고 묻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정성스럽게 핥고 빨았다.

루의 입에서 발을 뺀 재혁이 상체를 숙이며 눈을 마주쳐 왔다.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자 커다란 손이 뺨을 쥐고 얼굴을 고정했다.

“너는 왜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도 망가지지 않지? 왜 깨끗하게만 보여?”

지금 하는 말은 주인님일까? 팀장님일까? 아니면 김재혁일까?

묻고 싶었지만 강아지는 말하면 안 되니까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끼잉.”

주인님이 한 말을 거역하지 않으려고 낑낑거리는 루가 미치게 귀여워서 재혁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다정하게 웃었다. 루는 정말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그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차가웠던 손에 온기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고 손목에서 느껴지는 맥박도 점차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울어 줘. 망가져 줘.”

명령이 아니라 부탁이었다.

“더 간절하게 나를 찾았으면 좋겠어. 내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루는 온 마음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원한다면 더 서럽게 울고 더 처절하게 망가질 생각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서로 같은 것을 원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루의 텍스처 2권에서 계속)

루의 텍스처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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