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무실의 주인님
자고 자고 또 자고 일어났는데도 졸렸다. 꿈에 그가 나오지 않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피곤했는지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가 지나 있었다. 어두운 것을 싫어하고 불면에 시달리느라 이렇게까지 깊게 푹 잔 적이 없었는데 시계를 제대로 본 건지 의심스러웠다. 루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윽!”
온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쳐 대는 것도 모자라서 가슴에 옷이 쓸리며 따끔거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티셔츠를 올리고 거울에 몸을 비춰 보니 젖꼭지가 퉁퉁 불어 있는 데다가 몸에 붉은 자국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루는 거울을 보다가 퉁퉁 부은 젖꼭지를 꾹꾹 눌러 보았다. 살 껍질이 벗겨져 까끌까끌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곳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고 쓰렸는데도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아앗.”
통증과 함께 묘한 느낌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며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루는 가슴을 만지면서 다른 손을 바지 안으로 넣었다. 기둥을 몇 번 훑으니 선단에서 촉촉하게 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어제 재혁과 함께 있는 동안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이곳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처음엔 쿠퍼액이 나중엔 정액이 그다음엔 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액체가 쉬지 않고 계속 나왔다. 그렇게나 싸질러 놓고 지금 또 이러는 자신의 몸이 원망스러웠다.
지금도 재혁이 남겨 놓은 흔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와 함께했던 플레이가 떠오르며 액이 질금질금 샜다.
그가 질린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의 집에서 조금 더 있다가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다고 평생 손으로 흔들기나 하며 망상만 하다가 죽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플레이라니. 게다가 꿈에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오르가슴이라니! 지금 하는 손장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음란한 개새끼라고 욕하고 함부로 싸지 못하게 방지링을 끼우고 한껏 괴롭히다가 마지막에 뒤로 박아 줬을 때는… 몸 전체가 커다란 구멍이 된 것만 같았다. 그만큼 강렬한 자극이 전신을 때리듯 감쌌다.
죽을 것만 같아서 그를 붙잡고 한 번 더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는데 생각만 있을 뿐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실패했다. 그러나 싫어서는 아니었다.
“흐읏, 응…….”
루는 재혁을 생각하며 기둥을 천천히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숨을 쉬지 못하도록 목구멍을 찌르던 성기, 아프다고 울어도 늘어나기만 하던 손가락과 구멍을 찢을 것처럼 난폭하게 박아 대던 허리 짓, 음란한 개새끼라고 욕하면서 손찌검을 할 때 머릿속을 치고 가던 불꽃, 팬티로 눈을 가리는 바보 같은 모습을 보였을 때의 수치심과 이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자신을 다정하게 안아 주던 주인님…….
루의 전신이 뻣뻣하게 굳으면서 경련하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꿀렁였다.
‘개새끼가 아무 데나 질질 싸지. 참아.’
재혁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리는 듯했다. 루는 이를 악물고 그가 해 줬던 것처럼 좆의 입구를 아프게 막았다.
“으읏… 아, 싸고 싶어요……. 아파아…….”
혼자 허리를 들썩이며 사정이 임박한 성기를 실컷 농락하고 괴롭혔다. 침대 시트가 젖을 정도로 정액이 줄줄 흘렀지만 뒤를 쑤시지 않아서 그런지 허전했다.
분명 평소 자위할 때보다 더 느끼는 데다가 심지어는 뒤를 쑤실 때보다 빨리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데도 뭐 때문인지 어제 느꼈던 오르가슴을 다시 느낄 순 없었다.
단 하루 만에 그에게 길들어 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사정의 여운보단 불만족스럽다는 생각만 가득 찼다. 뒤를 쑤시면 달라질까 봐 딜도를 가져와 뒤를 쑤셔 봐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루는 아플 정도로 성기와 구멍을 괴롭히다가 또 한 번 사정하는 것에 실패하고 몸을 늘어뜨렸다.
어떡해.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루는 그런 자신의 상태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울 것같이 힘든 일은 많았지만 늘 참아 왔다. 남자라는 이유로 혹은 안 그래도 불쌍한 처지인 사람이 울기까지 하면 더 비참해진다는 이유로 참고 또 참아 버린 것이 쌓여 있다가 재혁을 만나고 터져 버린 것이 분명했다.
“진짜 개새끼 같아.”
튀지 않는 조용한 사람, 어디에도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하게 제 할 일을 잘하는 모범생, 그마저도 특출나진 않아서 사람들의 시기나 질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사람.
자신의 성향도 자기를 닮아 이렇게 조용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 * *
“신루… 루… 시발.”
재혁은 루의 이름을 부르며 욕을 지껄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었다. 아니, 잘못했다. 집에 못 가게 묶어 놓는 건데. 그가 마지막에 자꾸 헷갈리게 하지 말라고 한 말 때문에 당황해서 그를 곱게 보내 주고야 말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플레이가 끝나면 현자 타임이 왔고 그러면 꼭 지켜야 할 매너 때문에 후처리했을 뿐 붙잡고 싶어서 화가 났었던 적은 없었다.
고민하다가 머리를 흔들었다. 원래 돔이라는 족속들은 섭이 예상한 반응을 보여 주지 않으면 화가 나는 법이라고……. 룬가 뭔가 하는 개새끼도 그냥 다른 섭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달래지긴커녕 오히려 화만 더 치솟았다.
재혁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열고 루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플레이 후에 그가 먼저 연락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자존심이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감정적으로 굴복시키고 난 후에 자존심을 챙겨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발! 왜 전화 안 받아.”
“하, 하하… 하하…….”
“왜 웃냐?”
늦은 밤, 재혁은 루에 대한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을 차지하는 것에 화가 나서 제우스를 찾았다. 이 클럽의 주인이자 재혁의 친구이기도 한 성현이 오자마자 파트너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화만 내는 자신의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개새끼가 감히 김재혁 전화를 피해? 일부러 안 받는 거 아닌가?”
재혁의 얼굴이 앞에 있는 사람을 죽일 것처럼 싸늘하게 변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 많이 봐줬지?”
성현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섭 하나 맘대로 조절하지 못해서 화나 놓고 왜 여기 와서 화풀인지 모르겠다. 재혁과 오랜 친구로 지내고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조금 더 놀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무 죄 없는 클럽 기물이 파손될 거 같아서 조용히 입을 닫았다.
“왜 왔냐? 파트너 있을 땐 안 오잖아.”
“파트너 찾으러 온 거 아냐. 술 마시러 온 거지.”
“그럼 곱게 술이나 처마시고 갈 일이지. 나는 왜 불러서는…….”
재혁은 성현의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도 저쪽에선 반응이 없었다. 성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너 플레이 약속 전화로 안 잡잖아, 새꺄.”
“…….”
또 무시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번이 열 번째. 안 받으니 더 오기가 생겼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바닐라냐?”
“아니.”
다시 눌렀다. 열한 번째. 시발.
“바닐라 아닌데 규칙 몰라?”
“어.”
성현의 입이 딱 벌어졌다. 바닐라가 아닌데 규칙을 모른다면 상대는 동정이거나 성향을 늦게 깨달은 초짜인 경우밖엔 없었다. 오늘따라 놀랄 일 천지였다.
“너 초짜 안 만나잖아.”
“어쩌라고!”
성현은 입을 다물었다. 오늘 재혁에게 뭔갈 물어봐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긴 어려울 것 같았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고 다음 약속을 잡는다면 미친놈이 잠잠해질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엔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럴 땐 안 건드리는 게 최고였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뭐, 뭐… 어?”
성현은 재혁이 자기에게 한 말인 줄 알고 하마터면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혼잣말이었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저렇게 가 버리다니……. 역시 돔에게 파릇파릇한 신입 섭은 위험하단 걸 다시금 깨달았다.
성현은 그동안 재혁에게 경고했었다. 신입 섭을 길들이는 재미에 빠지면 연애 감정 때문에 힘들어질 수 있으니 경계하라고. 그때마다 재혁은 항상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자기는 플레이에 마음 따위 섞지도 않을뿐더러 처음에 대한 환상 같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는 남자가 아니니 괜찮다고. 그 말은 지금까지 잘 지켜졌다. 그래서 성현은 자신의 친구가 정말 타고난 돔이라고 믿었다.
그랬던 놈이 신입 한 방에 무너진다니.
저 새낄 저렇게 만든 신입이 누군지 궁금해지면서 입에 침이 고였다. 최고의 돔을 무너뜨린 희대의 섭인데 초짜에다가 친구의 소유라는 배덕감까지 겹쳐 미친 듯이 꼴렸다.
“너 뭐냐?”
독기를 품은 재혁의 눈이 입맛을 다시는 성현을 노려보았다.
“내가 뭐?”
“눈빛 왜 그래?”
“뭐…뭐?”
“침 닦아라. 여기 데려올 일 없다. 초대하거나 돌리는 거 내 취향 아닌 거 알잖아.”
“…뭐.”
하여간 여우 같은 새끼.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빨라서.
재혁은 성현에게 단단히 경고하고는 얼음도 타지 않은 위스키를 목에 털어 넣고는 다른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루가 자신을 피한다면 절대 피할 수 없게 덫을 놓으면 될 일이었다. 생긴 것도, 우는 것도, 순종적인 자세도, 플레이를 잘 해내지 못해도 시키면 뭐든 하겠다는 자세도 모두 취향이었다.
“후…….”
스스로 생각해도 핑계일 뿐이었다. 취향이 까다롭긴 했으나 찾으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덫까지 놓는다고? 대체 왜?
회사에선 아무 생각도 없었으면서 그가 적극적으로 다가오자마자 홀려 버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왜 그에게 집착하는가에 대한 것은 우선 그를 가지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연애 디엣 따위… 해 버리면 되잖아. 끝을 모르고 부피를 키워 가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다.
다행히 루가 아닌 상대는 늦은 시간임에도 전화를 빠르게 받았다.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오가고 재혁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민했습니다.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죠.”
* * *
루는 전화기를 들고 달달 떨었다. 샤워하고 나와서 이대로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아 핸드폰을 집에 두고 집 앞 공원을 달린 게 문제였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또 달려도 가시지 않는 열기 때문에 평소보다 오래 뛰어서 집에 오자마자 쓰러졌다.
새벽에 깨서 다시 샤워한 후에 출근 준비를 마치고 핸드폰을 켜 보니 재혁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무려 열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어떡해…….”
액정은 새벽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전화하는 건 그의 단잠을 깨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무시하면 그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겁이 났다. 손톱을 깨문 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좁은 원룸을 왔다 갔다 했다. 그래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화나셨겠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그가 먼저 연락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플레이가 끝났고 평일엔 플레이하기 힘드니까 다시 연락이 오는 건 주말이라고 생각해서 핸드폰에 신경을 안 썼다. 어차피 재혁이 아니면 연락 올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왜?
머리가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속이 메슥거려서 아침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월요일이었지만 이른 아침 출근길은 조용했다.
지하철에 앉아 가슴을 누르며 크게 심호흡했다. 지난주에 재혁을 생각하느라 실수가 잦았다. 이번 주도 그러면 안 될 터였다. 죽도록 고생해서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입사한 회사였다. 남들보다 몇 배로 노력해도 남들처럼 살아가기 힘든 삶이라는 걸 한순간도 잊어선 안 된다고 루는 주먹을 꽉 쥐었다.
플레이와 일상을 구분하는 것이 에세머의 기본 소양이라고 책에서 배웠으니까 자기도 그럴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그를 만나게 될지는 상상조차 못 했기에 가능한 다짐이었다.
* * *
다른 회사로 가는 길이 이렇게 기대되었던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마지막 업무가 끝나고 재혁은 원래라면 본사로 들어가야 했지만 성현의 술집에서 했던 충동적인 전화 한 통이 그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재혁은 오늘부터 본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루의 회사로 출근한다. 개새끼인 줄 알았던 여우 새끼한테 완전히 홀려서 직장까지 바꿔 버린 것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며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물렀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내 연락을 무시하래.”
대상이 옆에 없는데 꼭 있는 것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조금만 있으면 그 귀여운 얼굴이 제 눈앞에서 일그러지는 꼴을 볼 수 있다는 게 더 꼴려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긴 했지만.
대표실에 들러 간단한 인수인계를 마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플레이 파트너가 마음에 든다고 몇 번이나 고사했던 스카우트 제의를 단번에 받아들이다니.
인수인계를 마치고 대표실을 나서려는 재혁에게 이 대표가 물었다.
“그런데 팀장님, 왜 하필이면 기획팀입니까. 저희가 제시한 자리는 전무이사였는데요.”
“압니다.”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엔 짧게 대답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자신의 성벽을 소문낼 이유도 없는 데다가 판에 박힌 대답 따위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 대표는 재혁이 온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는지 쓸데없는 말이 많았다.
“기획팀에 마음에 든 여직원이라도 있었나 봅니다. 하하.”
시발, 재미가 없으면 실속이라도 있든가.
욕설을 뱉고 싶은 걸 이를 악물어 참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내키지 않지만 판에 박은 대답을 해야 할 때였다.
“오늘부터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무이사 자리 좋지요. 그런데 대표님.”
“네, 말씀하세요.”
“제가 컨설팅을 해 보니까 말이죠. 기획이 워낙 엉망이라서 말이지요. 기획이 엉망이니 하는 사업마다 제대로 성과를 못 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은 법인데 말이죠.”
대표의 얼굴이 구겨졌다. 지위 구분 없이 무능력하면 좆같이 구는 버릇이 직장을 옮겼다고 해서 달라졌을 리 없었다.
“그럼 말씀 끝나셨으면 가 보겠습니다. 엉망인 기획안 폐기 처분하고 오늘부터 새롭게 쌓으려면 좀 바빠서요.”
“네, 뭐…….”
사무실로 돌아가는 재혁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전 회사의 짐은 사람을 시켜 옮기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그리고 송별회니 뭐니 하는 것은 그쪽에서도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 하나 없어지면 좋아서 날뛸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테니 크게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재혁의 머릿속에는 이제 곧 만나게 될 루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 * *
회사에 도착했더니 아침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월요일 아침은 굵직한 회의가 많은 날이기도 해서 긴장감이 돌긴 했지만 오늘은 회의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아서 더 이상했다.
루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 전원을 켜며 옆자리에 있는 이 대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대리님.”
“쉬…….”
이 대리는 루를 바라보며 집게손가락을 입에 댔다. 다른 소릴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가뜩이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 대리의 태도가 평소와 달라 루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무슨 일이지. 제발 내 실수 때문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루는 허리를 곧게 펴고 지난주에 실수한 일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바로 고쳤고 알고 있는 내용이라 이렇게까지 크게 터질 일은 없었다. 자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하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업무 준비를 해 놓고 커피를 타 오려고 눈치를 보는데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아 루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때 파티션 너머에서 진 과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로 오신 팀장님 모시고 올 테니까 모두 자리 비우지 말고 있어요.”
“네.”
여기저기에서 소심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자리에 있는 이 대리를 바라보았다. 이 대리가 종이에 뭔갈 적어서 보여 주었다.
[팀장님 바뀜. 오늘 새로 옴. 나도 누군지는 모름. 입 닫고 조용히 있을 것.]
루는 이 대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은 중저음이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기획팀 팀장을 맡을 김재혁이라고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움직여 루도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귀신같이 보이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루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재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목구멍이 꽉 조이는 기분이었다.
팀장님이 여기에 왜 있을까? 외주 일은 분명히 끝났다고 했는데. 아니, 그보다 새로 온 기획팀 팀장님이라고? 루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주변에서 사원들이 김 팀장님이 다시 오신 줄은 몰랐다며 정말 반갑다고 잘 부탁드린다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했지만 루의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머리가 새하얘졌고 등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재혁은 회사를 옮기는 것에 대해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어제 왔었던 연락이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연락을 받지 못했다. 용기가 없어서 다시 걸지 않은 일이 이렇게 커다란 실수가 되어 버리다니……. 속이 메스꺼웠다.
재혁이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인사말을 하며 자신은 그렇게 친절한 상사가 되지 못할 거라는 농담 섞인 협박을 할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 그러면 모두 바쁘실 텐데 여기까지 하죠.”
말을 끝낸 재혁의 시선이 사무실 전체를 훑어보다가 누가 봐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루에게 닿았다.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신루 씨였죠?”
루는 눈만 깜빡거리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신기루를 보는 것처럼 시야가 뿌옜다. 옆에 있던 이 대리가 루의 팔을 아프게 꼬집어 주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네, 네네.”
바보같이 대답을 여러 번 해 버리고 말았다. 여기 회산데…….
루를 빤히 들여다보던 재혁은 그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가 놓으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픕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래요. 컨디션 관리도 능력이죠. 월요일 아침부터 이러는 건 보기에 안 좋습니다.”
상사로서 부하 직원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하라는 지적에 더 가까운 말이었다.
재혁이 팀장실로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바짝 긴장한 루의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 대리가 위로한답시고 말을 걸어왔다.
“거, 사람이 아플 수도 있지. 첫날부터 깐깐하게 굴기는. 근데 진짜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뇨. 대리님, 저 잠시 화장실 좀.”
“그래, 어서 다녀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핑 돌아서 몸이 휘청했다. 책상 모서리를 잡고는 어지러움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발을 뗐다. 자리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그는 왜 여기에 왔을까? 그가 갑자기 회사를 옮긴 게 혹시 나 때문일까?
루가 재혁과 만나며 두려워한 것은 아웃팅을 당하는 것과 버려지는 일 두 가지였다. 아웃팅을 당하게 되면 성향자인 재혁 또한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고 그러면 당연히 버려지게 될 것이다. 각각 다른 일처럼 보이지만 아웃팅당하는 것과 버려지는 일은 사실 똑같은 일인 셈이었다. 불안감에 다리가 벌벌 떨렸다.
‘여긴 회사야. 생각 그만하고 정신 차리자.’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하고 다리에 힘을 주고 발을 빠르게 옮겼다.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후회했다.
“티, 팀장님.”
티슈를 빼서 손을 닦던 그가 거울에 비친 루를 바라보더니 티슈를 버리고 가까이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올라와 허리 옆을 지나가는 바람에 눈이 질끈 감겼다. 당장이라도 허리를 감아 올 것 같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눈을 살짝 떠보니 ‘딸깍!’ 소리만 들렸다. 그가 화장실 문을 잠근 것 같았다. 어깨가 움찔했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날카로워서 감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줄 알았는데 시선만 느껴져서 더 죽을 것 같았다. 루가 덜덜 떨며 먼저 말을 꺼냈다.
“팀장님, 여기 회사…….”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무, 문을 잠그셔서요.”
“그럼 활짝 열고 말해 볼까요? 나는 그래도 되는 사람인데 괜찮겠습니까?”
“아, 아니요! 아닙니다.”
손이 느릿하게 올라와 루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왜 이렇게 떱니까. 누가 여기서 잡아먹기라도 한답니까?”
“…아닙니다.”
“그래요. 할 말이 많긴 한데…….”
재혁이 여기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간이 콩알만 해진 루가 재혁의 말을 막고 나섰다.
“아, 안 돼요!”
재혁이 인상을 팍 썼다. 무서웠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루는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것만 같은 심장을 손으로 누르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뭐가 아니고 뭐가 안 된단 말입니까. 도대체가. 내가 뭐라고 말할 줄 알고?”
“저 여기 어렵게 들어왔습니다. 팀장님도 어렵게 만나긴 했지만…….”
발음이 꼬이지 않게 침착하게 또박또박 말하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말하자 가슴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라서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바보 같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안 될 텐데……. 당장 나가 버리라고 하거나 파트너고 뭐고 자격 박탈이라고 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 할 텐데…….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재혁이 화를 낼까 봐 몸을 덜덜 떠는 것밖에는.
그러나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짧게 말하고 조용히 화장실을 나갈 뿐이었다.
“압니다. 그래서 점심시간에 보자는 겁니다. 사람들 눈 신경 쓰일 테니까 시간과 장소는 문자로 알려 주겠습니다.”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재혁이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행인 것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과 담담히 전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는 것이었다.
루는 그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쓰러지듯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가 찰싹찰싹 소리가 나도록 뺨을 쳤다.
세면대에 찬물을 틀어 물을 끼얹고 거울을 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자신이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비웃고 있었다.
“바보 같은 새끼.”
점심시간이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기대를 하며 얼굴에 묻은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어.”
“죄송합니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렸는데도 사수인 이 대리는 루의 상태를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챘다. 이 대리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상태 안 좋으면 반차라도 쓰고 집에 가지 그래?”
어떻게든 점심시간을 피하고 싶었던 루에게 반차를 쓰라는 말은 솔깃한 제안이었다. 이제껏 죽을 정도로 몸이 아파도 학교를 빠지거나 아르바이트 한번 빠져 본 적 없었다. 남들에겐 쉬운 기회가 자신에겐 최선을 다해야만 얻을 수 있었으므로 고작 혈색이 안 좋다는 이유로 회사를 쉴 순 없었다.
하지만 재혁과 맞닥뜨리는 건 인내심이나 참을성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생각만 해도 속이 매슥거리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루는 급한 일을 처리해 놓고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만날 시간과 장소를 가르쳐 준다고 했지만 재혁에게선 아직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제발 잊어버리길…….’
하지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액정에 메시지가 떴다.
[회사 앞은 좀 그러니까 점심시간에 적당히 둘러대고 주차장으로 내려와요.]
혹시나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은 없어져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역시 내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저 속이 안 좋아서 점심은 못 먹을 것 같습니다.]
메시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바로 전화가 왔다. 이 대리의 눈치를 보다가 잠시 나와 계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팀장님.”
―내가 지금 루 씨와 밥이나 먹자고 부르는 것 같습니까?
“아니요.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저는 근무 중엔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주말에 따로 부르시면…….”
루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재혁이 말을 가로챘다.
―내가 가기 전에 오는 편이 좋을 겁니다.
뭐라 다른 말을 덧붙일 여유도 없이 바로 전화가 끊겼다. 루는 넋이 나간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핸드폰을 들고 서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지지징.
[E―3번 구역입니다. 5분 주겠습니다.]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은 2분 전이었다. 주차장까지 3분 만에 가지 않으면 재혁이 사무실까지 오겠다는 뜻이었다. 더는 고민하고 생각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무리한 요구를 할 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은 플레이할 때 겪어 보았던 그의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루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주차장까지 뛰어갔다.
숨을 헐떡이며 주차장에 도착해 재혁의 차를 찾았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주위를 둘러보며 문을 두드리자 창문이 열렸다.
“타요.”
다리가 떨려서 조수석에 타는 것만 한참이 걸렸다. 루가 타자마자 재혁이 옆으로 상체를 구부려 왔다. 눈을 질끈 감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벨트가 몸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내려왔다.
재혁이 웃음기를 섞어 불량한 농담을 던졌다.
“실망하게 해서 미안한데 나도 회사에선 좀 가리는 편이라.”
“…….”
그러나 루는 웃을 여유가 없었다. 벨트만 쥐고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견디고 있을 뿐.
운전하는 내내 재혁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연신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도 루에겐 한마디의 말도 걸지 않았다. 화를 내는 것보다는 눈치가 덜 보였지만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또 그것대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루는 평일 점심시간의 창밖을 바라보다가 재혁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또 창밖을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팀장님, 점심시간이 길지 않은데 너무 멀리까지 가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신입이라 눈치가…….”
재혁이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얼굴로 루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것만으로 기가 죽어서 하던 말이 쏙 들어갔다.
“기획팀 팀장이랑 같이 있는데 누구 눈치를 본다는 말입니까?”
“제 위에 몇 분이나 더 계시니까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재혁은 들리지 않는 듯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는 벌써 15분째 운전 중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그가 차를 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불안했다. 이대로 더 가면 교외로 빠질 텐데.
루는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원래 도미넌트가 제멋대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일상생활에 피해를 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연애 디엣 관계도 아니고 그냥 플레이 파트너면 매너를 지켜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자기 입으로 일상생활까지 통제하는 건 귀찮다고 해 놓고!
억울함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입을 떼려고 하면 말이 막히고 그와 눈만 마주쳐도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아서 반항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잘리면 어떡하지?
설마, 팀장님이니깐 잘리진 않을 거야. 아닌가? 내가 싫어서 자르려는 핑계를 만들려고 이러는 걸 수도 있잖아!
불안감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차는 복잡한 시내를 지나 한적한 곳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팀장님, 지금 돌아가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습니다.”
“압니다.”
“아시는데… 왜…….”
재혁은 루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덤덤하게 물었다.
“겁납니까? 나 때문에 회사에서 잘릴까 봐?”
“…네.”
“뭐든 할 수 있다며?”
“네?”
뭐든 할 수 있다고 말한 건 플레이 상황에서였지 인생을 통째로 바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러는 팀장님은 일상 통제는 안 하시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 건 귀찮아하신다고. 그런데 지금 하시는 일은 제 일상을 건드리시는 일이에요. 저는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멋대로…….”
이런 식으로 말하면 버럭 화를 내며 길 한복판에 자길 버려두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웠는데 재혁은 계속 웃기만 했다.
“내가 언제 루 씨 일상을 통제했습니까. 회사에서 옷이라도 벗겼어요? 아니면 딜도라도 뒤에 박고 있으라고 시켰어요?”
“……!”
그런 게 일상 통제였다니. 상상도 못 한 위협 앞에 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놀라 입을 닫고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혀, 협박하셨잖아요. 안 내려오면 직접 찾아오실 거라고!”
“그랬지. 내가 말했잖아. 나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글러 먹은 인간이라고. 도망가라고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냐?”
“…….”
앞뒤도 논리도 맞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지만…….’이라는 말만 무한 반복하다가 그의 옆얼굴만 노려보았다. 그는 어떤 건물 앞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루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묵묵히 운전만 했다.
* * *
재혁은 루에게 얘길 해 주고 데려올 생각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컨디션 조절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혼냈으니 반차를 써도 충분한 명분이 될 터였다. 반차 처리 했고 나는 외근 처리 해 놓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나와 함께 있다가 집에 데려다줄 테니 그렇게 죽을상 할 필요 없다고.
그러나 차에 타자마자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눈치를 보는 꼴이 미치게 꼴렸다. 그러다가 화가 났다.
워낙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니 꼴리는 건 이해할 수 있었는데 화가 나는 건 이해할 수 없어서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느라 운전하는 내내 골몰했다.
‘내 기분은 왜 이렇게 좆같은가.’
답은 쉽게 나왔다. 루가 자신을 쓰레기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레이 파트너라는 이유로 부하 직원에게 갑질하는 폐기물.
처음 자신에게 왔을 때 순진하게 팀장님이 좋다며 뭐든 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심사가 뒤틀렸다.
좋아한다고 했으면 믿어야지. 어디서 버릇없이.
재혁도 알았다. 연인도 아닌 고작 플레이 파트너일 뿐인 상대를 제 맘대로 휘두르고 싶다는 생각은 어쩌면 진짜 쓰레기 같은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나름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랬는데 루가 일상 통제는 귀찮다고 하지 않았냐며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걸 들으니 울컥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괴롭힐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무단 조퇴로 경위서를 써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며 플레이를 해야 할 것이다. 울며불며 자신에게 매달릴 루를 생각하자 벌써 좆이 터질 것 같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루는 입술을 깨물며 벨트를 꽉 쥐고 시계만 노려보고 있었다. 딱한 사람.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서 20분 남은 점심시간이 더 늘어나진 않을 텐데. 묘한 만족감이 가슴을 채웠다.
“내려요.”
“시, 싫습니다.”
그래, 순종적인 사람을 좋아하지만 여기까진 귀엽다. 이 정도의 반항은 양념이지. 그런데 더 하면 재미없을 텐데. 재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목소리를 깔았다.
딸깍. 벨트를 푸는 버튼을 눌렀을 뿐인데 소스라치게 놀라며 생명줄처럼 잡았다.
“머리채 잡혀서 질질 끌려가고 싶은 거 아니면 내려.”
루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재혁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는 거로 봐선 플레이인지 아닌지 계산하는 것 같았다.
재혁은 바로 내려서 끌어낼까 고민하다가 강아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강압에 못 이겨 억지로 하는 것보단 스스로 말을 듣는 걸 더 좋아하는 성향 때문이었다. 한참 생각하더니 루가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네, 주인님.”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안아 주고 싶은 걸 참느라 시트에 허벅지를 꽉 붙였다.
차에서 내려 에세머들을 위한 플레이 룸 입구에 회원 카드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쭈뼛거리며 들어서는 그의 팔을 잡아채듯 당겼다. 힘없이 딸려 온몸이 품 안에 감겨들었다.
“티, 팀장님?”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맞춘 듯 꼭 맞는 몸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안는 맛이 있었다. 게다가 성인 남자한테서 왜 이렇게 달콤한 냄새가 나는 걸까? 그러고 보니 같은 보디 샴푸를 썼을 때도 그에게서 나는 체취가 유달리 달콤했었다.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누가 올지도 모르는 로비에서 한참 그를 안고 있다가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 내려 다시 전용 카드로 예약한 방의 문을 열었다.
루가 자신의 영역 안으로 발을 들여놓고 나서야 재혁은 숨을 몰아쉬었다.
재혁이 소파에 몸을 기대며 꽉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푸는 동안 루는 입구에 서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 보려고 그를 주시하다가 눈이 마주쳤다. 루는 바로 시선을 피하더니 울상을 지었다.
그러고는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힘들고 무서울 텐데 빠르게 체념한 그가 똑똑하고 예뻐서 두고 볼까 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좆같았다.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놀란 토끼 눈을 한 루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그제야 기분이 나아졌다. 시발, 그럼 설마 시선을 피해서 기분이 좆같아진 거라고? 내가?
서브의 시선 따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이제껏 눈을 제대로 마주치는 서브를 보면 건방지다고 혼을 냈으면 냈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고 기분 나빠진 적은 없었는데…….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리 와서 앉아요.”
턱짓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당연히 꼬리를 흔들며 와서 앉을 줄 알았는데 개새끼가 목을 빳빳하게 쳐들었다.
“벗겠습니다. 빨리하시고 저를 보내 주세요.”
루는 태연한 얼굴로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었다.
“시발.”
재혁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거칠게 그의 팔을 당겨 맞은편에 앉혔다. 돔으로서의 품위도 지키지 못하고 왜 이렇게나 화가 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시선을 돌려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울분에 가득 찬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데? 얘기 좀 하고 간단한 플레이 후에 보내 준다잖아. 누가 감금이라도 한대? 돔을 그렇게 못 믿어서야 파트너를 어떻게 한다고.
재혁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격양된 마음을 눌렀다.
“밥은 내 볼일 다 끝나고 먹여 주겠습니다.”
“밥 생각 없어요.”
반항하는 거라고 생각한 재혁이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더니 루가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볼일은 플레이잖아요. 플레이하려고 옷 벗겠다고 했는데 못 벗게 하셨으면서…….”
루의 표정과 말엔 억울함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왜 그러냐는.
그제야 요동치던 가슴이 잔잔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지금은 몰아붙일 때가 아니라 달래야 할 때였다. 몰아붙이는 건 생각보다 더 소심하고 도덕적인 루가 스스로 무단 조퇴를 했다고 생각하게 하는 거로 충분했다.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물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나? 동그랗게 뜬 루의 눈이 놀란 듯 흔들렸다.
“간다는 말도 없이 가 버려서 데려다주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듯 가 버리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어도 유분수지. 걱정돼서 전화를 많이 했어요. 혹시 피한 겁니까?”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루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자기 다정하게 변한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굳이 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 것은 재혁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다. 파트너 이상의 역할을 요구하지 말라고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해서 조심하느라 그랬던 거였다.
갑자기 일어선 재혁이 냉장고에서 음료를 꺼내 루에게 건네주고는 자기도 마셨다. 음료를 마시는 간단한 동작일 뿐인데 액체가 넘어가는 소리가 귀를 사로잡고 움직이는 목울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음료를 마신 재혁이 루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긴장으로 등이 꼿꼿해졌다.
“그럼 전화를 안 받은 이유가 뭡니까?”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겁니다. 그것보다!”
고개를 돌려 마주친 눈이 깜빡거렸다. 루를 따라 눈을 한번 감았다 뜬 재혁이 부드럽게 물었다.
“네, 그것보다 뭐요?”
“저는 팀장님이 이해가 안 됩니다. 플레이 파트너일 뿐이라고 선을 그으셨잖아요. 귀찮은 건 질색이라고 하셨고요. 그리고 일상 통제를 안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전화도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은 거였지만 다시 전화하면 귀찮을까 봐 못 한 건데 쓰레기니 어쩌니 말씀하시는 게 이해가 안 돼요.”
“휴…….”
재혁의 입에서 나온 뜨거운 한숨이 귀를 간지럽혔다. 루의 어깨에 턱을 댄 채 한참 동안 숨을 내뱉던 재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을 겁니다. 모두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갔다고. 지금까지는 누가 가든 말든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루 씨는…….”
루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촉각은 잔뜩 곤두서 예민한데 자신이 듣고 있는 말에는 현실감이 없었다.
“옆에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돼요.”
힘주어 바짓단을 잡고 있느라 새하얀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어딘가로 숨고 싶은데 숨을 곳도 없고 뭐라도 대답해야 하는데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플레이 파트너로 옆에 있자는 거지 연애를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 종일 마음 졸이며 고민했던 문제들이 순식간에 다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회사에서 잘려도 괜찮고 자기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맹목적이고도 위험한 생각이 루의 마음을 차지해 버렸다.
재혁이 이런 자신의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이어 갔다.
“나는 회사도 옮겼는데 잘릴까 봐 무서워? 응?”
놀리듯 묻는 말에 루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잘려도 돼요. 다른 데 가죠, 뭐.”
“…뭐?”
“괜찮다고요. 그냥 하시고 싶은 대로 하세요.”
“아까는 보내 달라며?”
“그건… 팀장님이 저 싫어서 자르려고 핑계 만드시는 줄 알고…….”
“…….”
적당히 놀려서 겁먹고 곤란해하는 걸 보려고 한 말이지 자기 비하에 빠져 소설을 쓰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재혁이 좋아서 수작을 걸고 있는 중인 게 뻔한데 이런 행동이 어떻게 싫어서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이 사람은 뇌 안에 뭐가 들어서 사람을 이렇게 미치게 하는 건가? 거울을 안 보나?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전부 눈뜬장님이었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가 막히는데 루가 고개를 돌려 생긋 웃으며 속을 뒤집어 놨다.
“저 안 버리시고 계속 옆에 있게 해 주시면 그러면 저 잘려도 괜찮아요! 그래서 오늘 오래 있어도 돼요.”
“…….”
겨우 진정시켜 놓은 마음에 폭풍이 몰아쳤다.
맹목적인 순종 앞에서 재혁은 너무나도 무기력한 사람이었다.
느긋하게 플레이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모르겠다. 루가 잘려도 상관없다는 말을 내뱉은 이후로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던 끈이 탁 하고 풀어진 기분이었다.
벗으라고 명령하고 기다려 줄 시간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눈이 벌게진 재혁은 침대로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루를 소파에 눕혔다.
“제가 벗…….”
루가 조그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그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아 그대로 입술을 부딪쳤다. 부드러운 입술을 억지로 열어 혀를 밀어 넣었다. 좁은 소파라 움직일 수 없는 게 당연한데도 양쪽 다리로 그를 더 옭아맨 채 도망가려는 혀를 급하게 휘감았다. 빨고 또 빨아도 부족한 느낌이었다.
딱딱한 입천장과 뺨 안쪽의 여린 살을 헤집고 혀뿌리가 뽑힐 듯 세게 빨아 당겼다. 보상이었던 키스를 플레이도 하기 전에 미리 준 건 처음이었다. 달콤해서 더 어이가 없었다.
입술을 뗐는데도 루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재혁에게 빨린 입술이 아픈 듯 혀로 몇 번 핥더니 눈을 반쯤 떴다. 다시 짧게 입술을 부딪쳤다. 그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왜 플레이를 하지 않는지 물어보는 듯한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달아오르지 않는 거지? 아, 그래. 이 남자 서브였지.
정신을 차린 재혁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질 것 같은 목을 잡고 눈에 힘을 줬다. 그제야 루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봐 주었다. 뜨겁게 달아올라 붉어진 눈이 마음에 쏙 들었다. 악력을 조절하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단추 풀어.”
하얗고 긴 손가락이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서서히 감기는 눈과 붉어지는 피부가 섹시했다. 그러면서도 명령을 어기지 않으려는 듯 끝까지 단추를 푸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단추가 풀렸을 때 재혁이 목에서 손을 거뒀다. 고개를 돌려 캑캑거리는 그의 턱을 잡고는 다시 입을 맞췄다. 급하게 셔츠와 바지 그리고 속옷을 한 번에 다 벗겨서 던져 버렸다.
감상하듯 위에서 내려다본 루의 젖꼭지는 퉁퉁 부어 있었고 몸 여기저기 제가 남긴 흔적들이 열꽃을 피우고 있었다. 보자마자 좆이 터질 듯 부풀었다. 플레이고 뭐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뒤는 풀어야 하니까 그를 단번에 안아 들고 침대에 던졌다.
젤이, 그러니까 젤이 어딨더라. 머리가 돌아 버린 듯 이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여기에 한두 번 와 본 것도 아니면서 침대 옆 서랍에 있는 젤도 제대로 못 찾는다는 게 말이 되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거칠게 서랍을 빼고 젤을 꺼내 고개를 돌렸다.
루가 양쪽 무릎을 팔에 걸치고 다리를 한껏 벌리는 자세를 하고 부끄러운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겨우 돌아온 이성이 다시 나갔다. 젤 한 통을 다 쓸 기세로 손에 짠 뒤에 곧바로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으읏!”
손가락을 급하게 넣었는지 루의 허리가 비틀렸지만 곧 달콤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유 없이 안을 헤집고 쑤셨다. 원래라면 이럴 때 제대로 못 한다고 능욕하고 아무 데서나 세운다고 허벅지를 때려 줘야 하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다.
곧바로 전립선을 자극해 손가락 개수를 늘리고 빠르게 흔들었다. 꽉 다물려 있던 구멍이 녹진하게 풀린 것을 확인하고는 구멍에서 손가락을 뺐다. 다리 사이로 들어가 급하게 좆만 꺼내서 단단하게 부푼 귀두를 구멍에 대고 비볐다.
“흐읏… 아, 아아!”
머리 옆의 매트리스를 단단하게 짚어 몸을 지탱하고 단번에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밀어 넣었다. 빡빡하게 조여 오는 압박감을 느끼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풀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픈지 고개를 흔들며 울고 있는 루를 보니 더 참기가 힘들었다. 조절해 줘야 한다는 생각은 하는데 허리는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루의 숨이 넘어갈 것 같을 때마다 입술을 붙여 주었다. 꼭 처음 경험하는 사람처럼 목이 타고 배가 들끓었다.
“흐으… 아아, 티, 팀장님.”
“응, 알아. 조금만…….”
그를 달래며 발목을 붙잡아 입을 맞추고는 어깨에 하나씩 걸쳤다. 더 깊게 들어가 좁아지는 곳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로 그의 몸을 접듯이 다리를 밀자 루가 기다렸던 것처럼 재혁의 몸을 껴안았다.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루의 뜨거운 호흡이 가슴에 닿고 그가 흘린 눈물이 시트에 떨어졌다.
“괜찮아?”
사정을 봐주지 않고 마구잡이로 쑤셨으면서 한 김 식히고 나서야 겨우 질문할 수 있었다. 가엾은 루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응… 네. 그렇지만 저어…….”
“응, 왜?”
“콘돔…….”
뒤만 풀면 된다는 생각에 콘돔도 끼지 않았구나. 진짜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루가 쪽 하고 입을 맞추며 말했다.
“괜찮아요. 저… 성병 없어요.”
“…루.”
가슴에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좆이 터질 것처럼 부푸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결합하고 있을 때 이런 감정은 처음이어서 재혁은 요망한 말을 뱉은 루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거칠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러다가 루의 허리를 잡아 들어 올렸다. 입구까지 기둥을 잡아 빼고 다시 느리게 끝까지 박아 넣었다. 얕게 천천히 그가 느끼는 곳까지 밀어 넣어 문지르듯 자극했다.
“으… 으으.”
좋아서 느끼는 표정에 허리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루는 재혁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끙끙 앓았다. 얼마나 울고 신음했는지 내뱉는 숨이 도로 안으로 먹혀 들어갈 정도였다. 재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기계처럼 허리 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루가 한동안 숨을 쉬지 않으면 행동을 멈추고 물었다.
“힘들어?”
“네. 저어… 으읏!”
묻기만 하고 또 박아 댔다. 루의 몸을 저 끝까지 올릴 기세로 허벅지를 잡아 올린 재혁이 아래에서 위로 찍어 올리듯 깊숙하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공중에 들린 다리가 흔들리고 교성을 질렀을 때 재혁이 기둥을 끝까지 밀어 넣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뜨거운 정액이 쉬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지쳐서 눈도 뜨지 못하는 루의 이마를 쓸어 주고 입술에 입을 몇 번 더 맞춰 준 후에 내벽에 정액을 처바르듯 더 깊게 성기를 박아 넣었다. 콘돔 없이는 절대 안에 사정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 남자의 구멍 곳곳에 제 것을 발라 두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씻어 낼 걸 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이라도 자신을 새겨 놓으려는 재혁의 부질없는 행동은 이후 몇 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씻고 하면 안 돼요?”
“응, 안 돼.”
사정이 끝나고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데도 재혁은 성기를 깊숙하게 넣고는 턱을 루의 목에 묻은 채 몸을 일으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명령이나 체벌을 기대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불편한 몸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부탁했다.
“그러면 저, 안에 좀 빼고 다시 하면…….”
이번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재혁이 자신을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때리지도 않고 놀리지도 않고 욕도 안 하고 명령도 안 하면 섹스를 왜 한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안에 들어찬 정액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이었다. 그게 재밌는지 재혁은 한 번씩 허리를 돌려 가며 루의 배에 정액을 밀어 넣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몸을 겹치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비슷한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언젠가 어린 루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보호해 줄 어른이 생겼던 날, 그날 엄마에게서 느꼈던 품이 이렇게 따뜻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는 팔로 재혁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옷도 다 벗지 못하고 급하게 몸을 겹쳐 그의 셔츠가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알몸도 아닌데 온기가 느껴지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저어…….”
“무거워요?”
“아니요. 그러니까…….”
“나중에 플레이 다시 시작할 거긴 한데 지금은 일단 끝났으니까 말해 봐요.”
루는 말하는 대신 눈을 질끈 감고 먼저 입을 맞췄다가 뗐다. 재혁이 고개를 약간 들고 바라보자 가뜩이나 당황한 루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냥 원래 끝나면 해 주셨잖아요. 오늘은 안 해 주니까요. 그래서.”
“…….”
괜히 말했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재혁의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기 시작하더니 안에 들어 있던 성기가 또 커지는 게 느껴졌다. 하긴, 플레이한 것도 아니고 섹스만 했는데 보상해 달라고 했으니 혼나도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안아 줬으면 좋겠는데 막상 플레이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재혁 앞에선 늘 이렇게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생겼다.
몸을 일으킨 그가 성기를 뒤로 물렸다. 드디어 괴롭게 하던 정액을 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반색하며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움찔거리는 내벽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웃었다.
“그거 알아? 넣을 때보다 뺄 때 얼굴이 더 야해지는 거.”
“으, 으으…….”
“안에 든 거 싸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네, 주인님.”
역시나 잘못 생각했나 보다. 성기가 빠진다고 해서 정액을 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재혁의 선단이 입구에 걸리는 듯하더니 곧 밖으로 빠져나갔다. 깊은 곳에서 나는 물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구멍에 힘을 꽉 주었다. 흘리지 않기 위해 허리를 추어올리자 재혁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갑자기 날아온 손찌검에 숨을 훅 들이켰다.
“흐윽! 흐, 흘려요.”
“엎드려.”
“네, 주인님.”
엎드리면서도 정액이 흐르지 않게 하려고 배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습관처럼 움직이는 구멍은 힘을 줘도 자꾸만 벌어졌다. 혼날까 봐 심장이 쿵쿵거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재혁은 침대 뒤쪽에 있는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뭘 가지고 올까. 입에 침이 고였다.
잠시 후에 그가 손에 들고 온 것은 가느다란 케인이었다. 휙, 휙! 허공에 케인이 줄을 긋듯 휘둘러지면서 내는 소리가 귀를 찢는 것 같았다.
“뭘 잘못했지?”
“…….”
휙! 순식간에 케인이 루의 엉덩이에 붉은 줄을 만들었다. 그런데 루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이 방에 들어와서 그가 명령한 것이라고는 정액을 담고 있으라는 것뿐이었고 루는 아직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러면 생각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키, 키스했어요! 허락도 안 받고요. 자, 잘못했어요. 더러운 입으로 주, 주인님 입술 빨아서요. 너무 좋아서 그랬어요.”
“…….”
“호, 혼나야 해요. 주인님 정액 담은 채로 매 맞을게요. 때려 주세요.”
“……?”
몇 대 맞을 거냐고 물었어야 했지만 둔기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했다. 루가 엎드려 있어서 자신의 멍한 얼굴을 보지 않아서 다행일 정도였다. 재혁은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자신을 느끼며 케인을 꽉 잡았다. 손바닥에 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열 대를 다 맞고도 내 걸 흘리지 않으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절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열 대를 천천히 때릴 생각이어서 그 시간 동안 정액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재혁이 루에게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그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데?
이런 질문을 던져 놓고 도저히 할 수 없는 미션을 주고 역시 그럼 그렇지 아무도 그런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마음을 붙잡고 싶었다. 덤으로 울리고 괴로워하는 걸 보면 자신도 좋고 그러면서 루는 더 흥분하게 될 테니까 여러모로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바보 같은 루가 고개를 돌리며 반색했다.
“정말요? 아무거나 다 들어주시는 거예요?”
재혁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루가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
“때려 주세요. 빨리, 빨리요.”
주인님한테 어디서 명령이냐고 야단쳐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었다. 어차피 두 대도 못 맞고 속에 있는 걸 줄줄 흘릴 것이다.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정액을 케인에 묻혀서 다시 구멍을 쑤시는 건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숫자 제대로 세.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할 테니까.”
“네, 주인님. 걱정 마세요.”
“…….”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루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지만 기우일 것이다. 이 테스트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은 이제껏 아무도 없었다. 경험도 없는 루가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손을 높이 올려 풀스윙으로 허공을 그었다. 짜악! 하고 엉덩이에 닿는 소리가 찰졌다.
“하나.”
허리가 약간 흔들리긴 했지만 정액도 흐르지 않았고 숫자도 잘 셌다. 하얀 피부에 그어진 붉은 줄에 다시 손바닥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휙!
“둘. 으읏!”
괴로운 듯 몸을 움츠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지만 정액은 흐르지 않았다. 독했다.
셋, 넷, 다섯, 여섯…….
연달아 쉬지 않고 열 대를 때렸다. 케인이 쉴 새 없이 허공을 그어 내렸고 루의 엉덩이에 붉은 줄이 북북 그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숫자를 한 번도 틀리지 않았으며 단 한 방울의 정액도 흘리지 않았다. 심지어 자세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몸에 얼마나 힘을 줬는지 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엉덩이가 아픈지 한 번씩 시트를 밀면서 발을 구르면서도 엉덩이에 힘을 주며 버텼다.
재혁은 눈앞에 있는 루를 보면서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랬던 적은 없었다. 아무리 고통을 잘 참는 서브라도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재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지도 못하고 있는데 루가 여전히 자세를 유지한 채 엉망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맞춰 왔다.
뺨은 눈물범벅이었고 입술은 파랬다. 정액이 배에 들어차 있으면 배가 불편했을 것이고 그 상태로 힘을 준 채 고통을 참아야 했으니 스팽만 했을 때보다 몇 배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생활을 오래 한 섭들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플레이를 어떻게……. 로터나 마개로 막지도 않고…….
이것만 해도 충분히 어이가 없는데 그렇게 불가능에 가까운 걸 해내고 루가 뱉는 말은 더 어이가 없었다.
“저기, 주인님. 저 검사해 주세요. 아, 안 흘렸어요. 진짜예요.”
“…….”
재혁이 회초리를 던졌다. 취한 사람처럼 어지러운 감각을 느끼며 평생 살면서 섭에게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을 뱉고야 말았다.
“내가 졌습니다.”
“정말요? 그러면 저 쉬어도 돼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때렸다.
도미넌트로 살면서 겪었던 불안과 자기부정과 설움이 한 번에 뒤엉켰다. 동시에 어렴풋이 떠오르던 기억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어리고 연약했던 동생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멋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한 그날, 울지도 않는 그에게 어른들이 던진 독설.
너같이 독한 새끼는 처음 본다는.
그러나 그는 그때 가슴으로 몇 번이고 울었다.
‘재성이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랬어요. 나는 분명히, 그러니까 분명히 가지 말라고 했다고요! 왜 말을 안 들어요!’
겉으로는 소리 지르며 화냈지만 마음으로 울고 또 울었다.
어리고 연약한 존재가 완전히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을 바라게 된 것은 그 뒤부터였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그의 욕구를 완전히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다.
트라우마가 습관을 만들었고 습관이 성향이 되어 남다른 성벽만 가지게 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잊고 있었던 그날이 생각나는지 모를 일이었다.
재혁은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안듯 루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물의 온도를 맞추고 다리를 벌리게 한 뒤에 미온수를 넣어 정액을 빼내는 동안 루는 아무 말이 없었다.
씻고 나와 머리를 말려 주는데 거울에 비친 자신을 힐끔거리며 그가 어렵게 말을 뗐다.
“팀장님.”
“압니다. 뭐든 다 들어줄 테니 머리부터 말려요.”
“네에!”
순식간에 루의 표정이 밝아졌다.
재혁의 완벽한 패배이자 오래 앓던 이를 빼낸 완벽한 치유였다.
거울에서 눈을 마주친 루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재혁은 웃는 그를 두고 타박하지 않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 두고 있었던 따듯한 무엇이 차오르는 느낌이 낯설고 생소해 거울 속의 그의 얼굴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 * *
참은 보람이 있었다. 정말 죽을 것같이 힘들었지만 이런 건 줄 알았다면 백 번이라도 더 참을 수 있었다. 다시 플레이 때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이 참았을 것이다.
오래 머뭇거리다가 한참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어렵게 뱉은 말이었다. 그가 절대로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쩌면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소원으로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빌려고 했다. 절대 헤어지기 싫으니까 소원은 신중하게 쓰고 그 전에 먼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재혁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저 그러니까요.’
‘뭘 그렇게 뜸을 들입니까? 한 입으로 두말 안 할 테니 말해 보세요.’
‘저 소원 말할 건 아니고요.’
그렇게 한참 뜸을 들이다가 우선 물어본 말이었다.
‘저 만약에요. 제가 소원으로 여, 연… 그러니까아…….’
‘연디하자고?’
‘히익! 아니, 아니에요! 그거 소원 아직 안 쓴 거예요. 아까워.’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깝다니?’
‘그게 그러니까…….’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하다가 답답함에 못 이긴 재혁이 결론을 냈다.
“그래서 연디를 하겠다는 겁니까? 말겠다는 겁니까? 싫으면 말고.”
“소원이랑 상관 없이요?”
“…뭐.”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루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원도 안 썼는데 재혁과 연애 디엣을 하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할게요! 잘할 거예요.”
재혁은 웃으며 말려 주고 있던 루의 머리를 흩트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감겨드는 촉감이 좋았다. 자신의 머리카락은 뻣뻣하고 굵은데 루의 것은 꼭 아이의 것처럼 얇고 부드러워서 만지는 맛이 있었다.
“엎드려요.”
재혁의 말에 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아차 싶었다. 약을 발라 주려고 엎드리라고 한 거였는데 오해를 한 것 같았다. 말을 짧게 하는 버릇은 이래서 안 좋았다. 재혁이 뭐라고 보충 설명을 해 주기도 전에 루는 되묻지도 않고 침대에 올라가 무릎과 양팔로 시트를 짚고 엎드렸다.
그 자세가 아닌데.
이제 그만 좀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루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다 재혁을 지나치게 동요시켰다. 침대에선 괜찮은데 회사에서도 이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정도로. 재혁은 엎드린 루 몰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려는 거 아닙니다. 약 발라 주려는 거니까 편하게 엎드리세요.”
“아… 네!”
루는 고개를 돌리며 잠시 민망하게 웃더니 배를 깔고 누웠다. 곁에 앉아 붉은 엉덩이에 연고를 발랐다. 따가운지 허리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아파요?”
“아니요. 괜찮아요.”
슬쩍 얼굴을 봤더니 표정을 찡그리는 게 아픈 게 분명해 보이는데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아까부터 뭐가 그리 좋다고 웃어요?”
“오늘부터 1일이니까요!”
장난기 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느라 힘 조절을 잘못해 엉덩이를 세게 눌러 버렸다.
“아아, 으!”
“아… 미안합니다. 다 발랐어요. 조금 더 이렇게 있다가 옷 입으면 됩니다. 그런데…….”
재혁은 잠시 말을 멈추고 다음 질문을 생각하다가 그냥 내뱉어 버렸다. 루를 만나고 지금까지 계획대로 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모든 루틴이 다 엉망이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자기답지 않다고 참을 이유는 없었다.
“말하지 않은 소원이 뭡니까? 나는 나와 연애하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재혁 쪽으로 고개를 돌린 루가 방긋 웃었다. 어린아이 같은 웃음에 다음 말이 더 기대되었다.
“저기, 주인님이 질문한 거 아니고 팀장님이 질문한 거죠?”
“네, 플레이 아닙니다. 존댓말 쓰고 있잖아요.”
“그러면 비밀이에요. 아껴 놨다가 나중에 쓸게요. 지금 쓰면 아까우니까요.”
궁금한 나머지 지금 당장이라도 루의 손과 발을 묶어서 말할 때까지 괴롭히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데 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자기 배에서 나는 소리에 자기가 놀랐는지 손으로 배를 가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하긴 점심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죄송해요. 별로 배고파서 그런 건 아니에요.”
루가 배가 고프다는데 내가 궁금한 게 뭐가 중요해.
재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루의 옷을 챙겨 침대에 올려 주었다.
“옷 입어요. 밥은 먹어야지.”
이렇게 좋은 음식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혼자 사는 남자들이 대부분 다 그렇듯 루도 평일엔 편의점 음식, 주말엔 배달 음식으로 죽지 않을 만큼만 배를 채웠다. 그마저도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므로 비싼 음식보다는 저렴한 음식으로 대충 때웠는데 맛과 영양이 고루 갖춰진 상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정식이었는데 정말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상차림에 정신없이 음식을 입에 주워 넣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앞접시에 음식이 계속 올려지고 있었다. 재혁이 자신은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루의 앞접시에 음식을 배달하고 있었다.
원래 도미넌트들은 이러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가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우리는 이제 연애하는 사이라서 그래!’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모르고 오해할 뻔했다. 배가 부르니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과 동시에 슬슬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무단 조퇴를 했는데도 사수인 이 대리에게 연락이 오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갈비찜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뼈를 접시 위에 올려놓은 뒤에 손을 닦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문자라도 와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연락이 와 있지 않았다. 혹시 벌써 잘린 건가? 아니면 나라는 사람이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뭐 합니까. 밥상 앞에 두고.”
나무라는 듯한 목소리에 핸드폰을 다시 옷 안으로 집어넣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들자마자 재혁이 물어 왔다.
“뭐 중요한 연락이라도 왔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밥 먹을 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하더니 핸드폰 보자마자 심각해지던데?”
“이상해서요.”
“뭐가?”
“그러니까요. 원래 잘 있던 사원이 갑자기 사라지면 찾아야 하는 거잖아요. 아무리 존재감 없고 그렇게 중요한 사람 아니라도 사람이 갑자기 없어졌는데 어떻게 아무도 연락을 안 할 수가 있어요? 저 설마 벌써 잘린 건 아니겠죠? 이렇게 잘리면 다른 데 취직하기도 힘든데 큰일이에요.”
울상을 지으며 주저리주저리 말을 내뱉으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놀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혁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물로 입가심을 하며 물었다.
“그러게요, 후회되겠어요. 그날 내가 돌아가라고 했을 때…….”
“아니요! 후회하지 않아요. 일이야 다시 구하면 되지만 팀장님 같은 사람은 쉽게 만날 수 없으니까요.”
재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가 가로채듯 말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스러웠다. 진심이 가득 담긴 얼굴이 예뻐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렵긴 할 거예요. 일을 쉬진 않았지만 그냥 아르바이트였으니까. 그래도 뭐, 아르바이트하면서 천천히 구하면 일자리 하나 못 구하겠어요? 저 성적도 좋았거든요.”
말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믿는 사람 앞에선 자신을 모두 까발리듯 말하는 스타일인가 보다. 이래선 더 놀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루 씨.”
목소리를 깔고 부른 제 이름에 마주쳐 오는 시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수한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진실을 말해 주었다.
“나에겐 아주 못된 버릇이 있어요.”
루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때리시는 거요? 괜찮아요. 제가 좋아하니까요.”
“물론 그것도 못된 짓이긴 하지. 그것 말고 더 못된 짓이 있어요. 사람을 못 믿어서 자꾸만 시험하려고 합니다.”
“시험이요?”
무슨 말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묻는 모습이 우스웠다. 재혁이 웃자 루가 따라 웃으며 다시 물었다.
“저는 통과했어요?”
“무슨 시험을 했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 맞다! 무슨 시험을 내셨어요?”
“나를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는지 시험했습니다. 불합리하고 말도 안 되는 요구인데 나를 믿고 따라와 주는지 아닌지.”
“어려워요. 저는 시험을 당한 기억이 없어서.”
재혁이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걸까? 호감이 가는 남자를 보며 배꼽 아래가 아니라 가슴이 뜨거워지는 일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별건 아니고. 루 씨, 회사는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서브… 아니, 애인의 사회생활을 망치는 쓰레기는 아니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반차 처리 했단 뜻입니다. 왜? 설마 내가 그것도 안 하고 왔을까 봐?”
루는 깜짝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회사에서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함께 있는 동안 조금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아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흑, 흐읍…….”
루는 울컥 솟아오르는 서러움을 누르려고 숨을 삼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도 뜨거워진 눈에서 흘러나오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가 핑계를 대서 회사에서 내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 졸였던 일이 바보 같았고 자신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말해 주지 않은 재혁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래도 좋았다.
재혁이 자신을 배려해 주는 도미넌트라서. 난생처음으로 주인님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을 한 남자가 사회에 섞여 사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를 사랑하는 데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다 잃을 거라고 생각했던 오늘 모든 걸 얻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울고 있는 자신을 가만히 보고 있던 재혁이 상 너머로 상체를 굽혔다. 따뜻한 손바닥이 감싸듯 뺨에 닿아 눈가를 문질렀다. 눈물이 그의 손을 적시고 마음도 함께 문질러졌다.
“우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어쩐지 그의 목소리도 젖어 있는 것 같았다.
“침대 위에서가 아닐 때 우니까 기분이 별로입니다. 그만 울어요.”
“네.”
끅 끅 넘어가는 숨을 정돈하며 그가 건네는 물을 마셨다. 자리를 옮긴 그가 다독이는 손길이 좋아서 약한 척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울지 않던 루가 재혁을 만나고 눈물(淚)을 되찾은 것은 어쩌면 그가 기댈 수 있는 어깨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자 눈물이 그치고 밝아진 시야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팀장님, 저 이제 침대 위에서만 울게요.”
재혁이 낮게 웃었다.
“좋은 생각입니다.”
루가 소매로 눈을 한 번 더 닦아 내고 재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팀장님도 침대 위에서만 저를 아프게 하셨으면 좋겠어요.”
“…….”
“저는 잘 참아요. 뭐든지 잘 참아서 눈 하나 깜짝 안 할 수 있어요. 그런데요.”
“그런데?”
“버려지는 건 못 참아요. 팀장님이 사람을 못 믿는 것처럼 저는 누군가가 제게 조금만 이상하게 굴어도 이별의 징후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재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루가 입을 다물자 팔을 넓게 펴서 그를 안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감히 주인님한테 협박이라니 버릇이 없네요. 내가 너를 아프게 하면 딴 놈 앞에서 울어서 나를 빡치게 하겠다니. 어떻게 이렇게 발칙하지?”
“…네?”
“시발, 그러면 절대 못 버리지. 딴 데 가서 운다는데 어떻게 버려.”
“예? 제가요?”
핀트가 완전히 어긋나 버린 대화였지만 루에겐 쉽게 버리지 않겠다고 자기식으로 약속한 주인님이 생겼고 재혁에겐 부당한 요구와 불가능한 명령을 조금의 의심 없이 완벽하게 해내는 강아지가 생긴 대화였다.
식당을 나오며 루는 오늘부터 1일이라며 50일은 언제고 100일은 언제니까 꼭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지만 재혁은 웃음을 참느라 미칠 지경이었다.
서울에 돌아온 건 해가 다 지고 도시의 불빛이 화려하게 반짝이는 늦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