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3)

1. 위험한 팀장님

루가 재혁을 처음 만난 것은 다른 회사에 비해 보수적인 사내 분위기를 가진 회사에서였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제시간에 출근한 루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업무 일정을 정리했다. 대학 때 인턴을 수료했던 회사라서 사람들과도 친숙했고 무엇보다 업무가 익숙해서 좋았다. 내성적인 데다가 새로운 변화를 별로 즐기지 않는 루에게 잘 맞는 회사였다.

“루 씨, 그거 들었어? 컨설팅 나온 외주팀 오늘이 마지막이래. 그래서 회식한다는데 약속 있는 건 아니지?”

이 대리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컨설팅 나온 외주팀이 업무를 오늘까지 하든 내일까지 하든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외주팀 팀장 재혁을 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루는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이 대리에게 물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요? 그럼 김 팀장님도…….”

“본회사로 돌아가겠지. 왜? 생각만 해도 좋아? 그동안 많이 혼나더니.”

“아… 네. 그러네요. 좀 편해지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본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억지로 마음을 갈무리하고 모니터에 있는 글자를 눈에 넣기 위해 애쓰는 중에 이 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있다고 자료를 달라는데 이거 보안 자료라 문서로 봐야 한다고 하네. 루 씨가 좀 다녀오지? 나는 과장님 호출이라……. 미안해.”

“아,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다녀올게요.”

이 대리에게서 파일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대면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진땀이 났지만 대리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배짱이 두둑하지 못했다.

[컨설팅 외주팀 팀장 김재혁]

그의 이름이 써진 명패를 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재혁의 방 앞에서 긴장으로 가쁜 숨을 삼키고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문을 두드리려고 손을 올렸을 때 본의 아니게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엿듣게 되었다.

“제우스? 안 가. 바쁘다고 했잖아.”

재혁의 이름에서 ‘제우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루는 혹시라도 자신의 숨소리가 들킬까 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제우스… 제우스라니. 설마…….’

제우스는 루와 같은 성향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찾기 힘든 곳이고 회원제라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흥분으로 가슴이 떨렸다. 원래도 관심이 있던 곳이었지만 무서워서 갈 수 없는 곳이었는데, 팀장님이 클럽의 회원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침착하자. 그냥 이름만 같을 수도 있어.’

루는 간신히 마음을 다스리고는 사무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서 내 타입 서브 찾느니 플을 안 하고 말지.”

‘서브’, ‘플레이’라는 단어가 귀를 둥둥 울렸다. 더는 의심할 필요 없이 그 제우스가 맞았다. 서브를 찾는 거면 지배자일 확률이 높았다. 이 남자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로 고인 침을 삼키며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문이 열리고 재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온다는 걸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속으로 생각하고 있던 게 들킬까 봐 괜히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 그러니까, 저기… 아! 이 대리님이 보내셨어요.”

좀 놀랐는지 루를 바라보고 있던 재혁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치 왜 네가 왔냐고 질책하는 듯한 시선에 가슴이 조여들었다.

“아, 저는 기획팀 사원 신루라고 하…….”

루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루의 말을 막았다.

“압니다. 루 씨, 들어오세요.”

“…네.”

건조하고 사무적인 목소리였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는 표정 때문에 차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래도 원래 가지고 있는 오만하고 위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괜스레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들어오라고 해 놓고선 앞에 떡 버티고 선 채 비켜 주지 않았다. 좁은 틈으로 지나가라고 하는 말인 듯했다. 루는 몸을 돌려 옆으로 남자와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슬금슬금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에게선 묵직한 향기가 났다. 무슨 향수일까. 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루는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남자에게 흑심을 품은 자신을 책망했다.

안으로 들어오긴 했는데 앉으라는 말이 없어서 멀뚱멀뚱하게 선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손목이 덥석 잡혔다. 사실 잡은 건 아니고 앉으라는 뜻으로 끌어당긴 거겠지만 루가 놀라기에 충분한 악력이었다.

그의 손에 떠밀려 소파에 앉았다.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재혁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루의 얼굴에 짙은 시선이 떨어졌다.

“저기, 이거만 드리면 돼서요.”

테이블 위에 이 대리가 부탁한 서류를 놓자 재혁이 무심한 손길로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몇 장 넘기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루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사무적인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이제껏 보지 못한 웃음이라서 좋으면서도 소름이 돋았다.

“좋습니다. 맞네요. 직접 가져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만 일어나서 나가라는 뜻인 것 같았다.

루는 남자를 조금 더 보고 싶었고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정하고 정중한 태도로 대해 줘서 가슴이 간질거리고 말해 볼까 말까 고민도 되었다. 그러나 이제껏 말 한번 제대로 섞어 보지 못한 사이에 갑자기 주인님이 되어 달라고 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정하고 친절한 방패…….’

그것이 가까이에서 본 재혁의 느낌이었다.

“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쭈뼛거리며 일어나 문고리를 잡아당기려고 할 때 그의 목소리가 뒤통수를 때렸다.

“루 씨?”

“네, 네?”

깜짝 놀라 뒤돌아보는 루에게 재혁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 회식에 참석하십니까?”

“…네.”

“그래요. 그럼 이따가 봅시다.”

두근두근.

따로 둘만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고 회식 때 보자는 것뿐인데 말의 내용과 목소리가 너무 다정해서 가슴이 뛰었다.

회식 자리에 그가 참석하긴 했지만 외주팀 팀장과 기획팀 신입의 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함께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오늘이 아니면 더 볼 수 없는 사람인 데다가 연락처를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락할 명분이 없었다.

긴장되고 애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루는 평소보다 조금 더 과하게 술을 마셨다. 그를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고개도 돌리고 이대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운명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점점 체념해 갈 때쯤이었다.

재혁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가 전화를 받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무언가 예민한 촉이 루의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지금이다!’

루는 이 대리가 주는 술을 단번에 받아 마시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바람을 좀 쐬고 오겠다며 그를 따라 나갔다.

골목길 쪽으로 들어간 그는 주황빛 가로등을 혼자 받으며 벽에 기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럼 끊겠습니다.”

드디어 통화가 끊어졌고 그를 향해 골목길을 꺾었다.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아래에 있는 턱을 보지 못하고 다가서려고 한 바람에 넘어지고야 말았다. 재혁은 갑자기 자기 앞에서 넘어진 남자의 정체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듯했다. 루는 다급하게 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저기…….”

재혁은 핸드폰 손전등을 비춰 루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나온 겁니까? 아니, 그보다… 괜찮아요?”

루의 눈앞에 크고 단단한 손이 내밀어졌다. 민망하고 부끄러웠지만 술기운에 용기가 생긴 루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저기, 팀장님…….”

“나한테 할 말 있어서 나온 건 알겠는데 우선 일어서죠? 바닥 더러운 것 같은데.”

팔에 힘을 준 재혁이 한 번에 루를 일으켜 세웠다. 휘청, 상체가 쓰러지며 그의 단단한 가슴에 볼이 닿았다.

“피나는데… 괜찮습니까?”

소름 끼치도록 낮은 음성이었다.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날 선 감각에 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에게서 황급히 떨어진 루가 괜찮다는 걸 보여 주려고 무릎을 굽혔다가 폈다.

“아아!”

당황해서 몰랐는데 정말로 다치긴 했나 보다. 무릎을 굽혔다가 펴자마자 상처가 벌어지며 피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무릎을 살펴본 루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미안합니다. 어두워서 다친 사람을 그냥 두고 갈 뻔했네.”

“아닙니다. 제가 멋대로 나와서 넘어진걸요. 그리고 별로 많이 다치지도 않았어요.”

루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재혁은 그에게 흥미가 동하는 중이었다. 오늘 회사에서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엇 때문인지 명확하게 말할 순 없으나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남자였다. 그러나 섣부른 판단은 금지였다.

재혁은 복잡한 세계를 사는 사람이었다. 남자가 남자를 좋아할 확률, 거기다가 마조나 서브 성향이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호감을 표현할 때 극도로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내기는 좀…….’

재혁은 모험해 보기로 했다.

“다친 몸으로 다시 회식 자리에 가는 건 좀 그렇고. 짐 가지고 나오세요. 나는 어차피 핸드폰만 가지고 들어갔으니 연락만 하고 갈 참입니다.”

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놀란 게 그대로 얼굴에 드러나서 말한 쪽이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재혁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재촉했다.

“왜요? 내키지 않습니까?”

“아니… 저, 그게… 어디 가시게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는 꼴을 보니 배 속이 들끓었다. 말을 왜 그따위로밖에 못하냐고 엉덩이를 몇 대 쳐 주면 볼 만할 텐데 하는 생각에 목이 마를 지경이었다.

“제가 루 씨를 데리고 어딜 가겠습니까? 차에 가서 간단히 응급치료라도 해 주려고 그러죠.”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저 금방 나올게요.”

루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친 다리로 허겁지겁 가다가 다리를 쩔뚝거렸다.

그 뒷모습을 보는 재혁의 입꼬리가 올라가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진짜 자기 취향을 복제해서 그대로 옮기면 저런 사람이 나올까 싶었다. 그런데 그동안엔 왜 몰랐을까. 고민하던 재혁은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은 조직에서 튀지 않는다. 본인의 무심한 성격을 생각하면 그동안 루를 모르고 지나친 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잠시 기다리자 저쪽에서 루가 다리를 쩔뚝거리면서도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잡아먹힐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타세요.”

재혁이 조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명령하는 데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음성에 어깨를 움찔하던 루는 쭈뼛거리며 차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좀 기다려요. 약 사서 올 테니까.”

“저, 저기… 안 그러셔도…….”

“기다리라면 좀.”

억세게 나가 버린 재혁의 말에 루의 커다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혁은 문을 쾅 닫아 버리고 약국에 가서 소독제와 연고 그리고 반창고를 사서 돌아왔다. 운전석에 올라앉아 고집스레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루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탔으면 이쪽을 볼 법도 한데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그를 보며 느껴지는 가학심을 애써 누른 채 그의 허벅지를 잡았다.

“봐요.”

허벅지를 잡는 재혁의 손길은 성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깔끔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루가 입고 있는 정장 바지는 단이 좁아 끌어 올릴 수 없었다.

“벗어야겠는데?”

“네?”

“안 올려지잖아.”

“…아, 그렇죠. 그, 그러면 그냥 치료 안 해 주셔도 될 것 같…….”

“피는 나지 않습니까. 염증 생기면 어쩌려고요?”

“그건 그런데…….”

자기주장이라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쯤 되면 점점 더 성향이 확실해지는 것 같은데 그래도 속단은 금물이었다.

“벗어요. 남자끼리 뭐 어떻습니까.”

말을 던진 재혁은 더 재촉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불안한 듯 초조하게 어깨를 떨던 루의 주먹이 꽉 움켜쥐어져 있었다. 붉은 입술이 새하얘질 때까지 깨무는 게 귀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혁은 그를 기다리는 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루의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 갈 뿐.

루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렸다. 엉덩이를 들고 바지를 내리는 모양새가 우스워 보일까 봐 걱정되었다. 재혁을 힐긋거렸더니 비웃지 않아 다행이었다.

“저런, 생각보다 많이 다쳤네요.”

가까이 다가온 재혁에게서 깊고 진한 향기가 났다. 그와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열이 옮겨 오는 듯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찼다. 이렇게 더 붙어 있다간 제대로 된 고백도 하기 전에 정체를 들켜 버릴 것만 같아 불안해져서 조그만 목소리로 그를 말렸다.

“저 정말 괜찮은데.”

재혁은 말없이 깊은 눈으로 루를 응시했다. 안 그래도 좁은 차 안, 바짝 가까이 다가온 재혁 때문에 발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무섭게 생긴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속눈썹이 짙고 길었다. 짙은 눈동자와 어울리는 속눈썹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파르르 떨리는 것에 아찔해졌다.

안 그래도 관심 있던 재혁과 가까이 붙어 있자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서 미칠 것 같았다. 이러다 들킬까 봐 걱정됐고 무엇보다 가슴 깊이 숨겨져 있었던 본성을 건드리는 그의 모습에 마음이 동했다.

“따갑겠는데?”

재혁이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소독약을 뿌렸다. 약이 닿은 자리가 따끔거려서 주먹을 꽉 쥐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느껴서…….

“흐으.”

입술을 꽉 깨문다고 깨물었는데 결국 소리가 터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이럼 안 될 텐데…….

재혁은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제 손을 소독하고 연고를 살살 발랐다. 상처 부위에 손가락이 닿자마자 루의 다리가 들썩였다. 평범하지 않은 반응에 재혁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올려 루와 눈을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서로만 알 수 있는 무언의 메시지가 오갔다. 루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입술을 핥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좀 못 참아서요.”

변명하고자 한 말인데 분위기만 이상해졌다. 재혁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뭘 못 참는단 말입니까? 아픈 거? 아니면… 만지는 거.”

“다, 당연히… 아픈 거요.”

거짓말…….

재혁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래요. 루 씨는 아픈 걸 못 참는군요. 약 발랐으니 반창고만 붙이면 됩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네.”

진짜 그런지 보자.

재혁은 일부러 느릿하게 그의 허벅지에 손을 올린 채 한 손으로 반창고의 포장을 뜯었다. 루는 재혁의 손과 반창고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느라 눈을 굴리면서도 뭐라 한마디 하지도 못했다. 그 모습이 또 사람을 미치게 했다.

“저… 안 붙이세요? 제가 붙일까요?”

참을 수 없어서 한 말이었다. 아까부터 반창고는 안 붙이고 허벅지만 만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좋긴 했지만 팬티만 입고 있는 상태에서 설까 봐 조바심이 난 루의 말을 들은 재혁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연고가 흡수되길 기다려서 붙여야 합니다. 그냥 붙이면 밴드가 들뜨거든요.”

“…아.”

그럼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어야 한단 말일까. 참기 힘든데 재혁은 대화하면서 마주친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 주지 않았다. 속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눈을 보고 있자니 속내를 고백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자기가 먼저 시선을 돌려 버렸다.

“원래 그렇게 눈을 잘 피합니까?”

“네, 네에?”

“기획팀이면 발표할 일도 많을 텐데 사람하고 눈을 그렇게 못 마주쳐서야 어떻게 하려고.”

“아… 제가 좀 낯을 가리기도 하고… 아얏.”

말을 시켜 놓고 상처에 밴드가 붙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예민한 자리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에 정수리까지 쾌감이 몰아닥쳤다. 루의 아랫배가 조여들었을 때 재혁의 손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다 됐습니다.”

아쉬움에 입이 말랐지만 미친놈처럼 더 해 달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는 발목에 걸쳐진 바지를 끌어 올리고 벨트를 채웠다. 옷을 다 입자 재혁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를 치료해 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라 당황했다. 마치 무슨 볼일이 또 남았냐는 표정에 아연했다.

“저, 가…감사해요.”

“네, 별것 아닙니다. 오늘이 마지막이겠네요. 건강하시고 회사 생활도 잘하길 바랍니다.”

명백하게 내려서 각자 갈 길을 가자는 소리였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서럽고 아쉽게 들리는지 루는 그를 잡을 용기도 없으면서 바지를 꽉 쥔 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왜요? 무슨 할 말 있어요?”

“저, 미안… 아니, 고마워서 식사라도 제가 대접을 하면 어떨까 하…….”

“그럴 것 없습니다. 별로 힘들 것도 없었는데요, 뭐.”

“그…….”

뭐라고 잡으면 좋을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미칠 것 같았다. 회식 자리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제 성향을 고백하고 동정이라는 사실도 밝히고 가르쳐 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와 잠시 같이 있어 보니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 씨, 제가 치료를 해 드렸는데 모셔다드리기까지 해야 합니까? 술 마셔서 그러긴 힘듭니다. 가는 건 각자 갑시다. 내리세요.”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목소리와 말투인데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열이 올랐다. 더, 더 듣고 싶어. 내면의 목소리가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루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팀장님 좋아해요. 히익!”

루는 자신이 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충격을 받아 커진 동공이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뺨이 터질 것처럼 붉었다.

“감당도 못 할 거면서 고백을 하고 그럽니까. 사람 놀라게.”

재혁은 하나도 놀란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웃었다. 차갑기만 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근사하게 변했다. 숱 많은 속눈썹이 눈과 같이 접혀 루의 마음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그리도 겁이 많고 도전하기보다 도망가길 좋아했던 자신이 용기를 낸 것은.

“감당할 수 있는데요?”

재혁은 모르고 있겠지만 루는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제우스’.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몇 번이나 가려고 도전했던 그곳. 그 이름을 꺼냈다는 것만으로도 그에 대해 이미 차고 넘치게 정보를 가진 셈이니까.

그래도 걱정이었다. 그를 감당할 수 있는 자신의 마음과는 별개로 그가 거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에라도 자신감을 가진 적 없었다. 먼저 고백하긴 했지만 완벽한 재혁이 보잘것없고 경험치도 부족한 자신을 좋아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고백했던 패기는 어디 가고 절로 고개가 푹 숙어졌다.

“흐음… 아픈 걸 싫어한다고 하던데?”

재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죽을 것 같았다. 솜털 하나마저 자기 취향인 남자가 바들바들 떨며 고백해 오는데 싫을 리 없었다. 그를 몇 번 마주 대하면서 추측했던 성향은 이제 추측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그냥 받아 주어도 좋겠지만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의 경험치를 알지 못했고 강아지 같은 이 남자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픈 거 싫… 어… 그…….”

횡설수설 끝맺지 못한 말끝에 결국 눈동자만 굴렸다. 침을 삼키고 입술을 깨무는 루를 보는 게 즐거워서 시간을 유예하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자극적이라 당장 여기서 범하고 싶은 감정에 간만에 기분이 좋았다.

“말대롭니다. 나는 아픈 걸 싫어하는 사람과는 만나질 못해요.”

“아… 팀장님, 저 알고 있어요.”

루의 고백에도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변했다. 놀란 눈치였다.

“뭘?”

“저, 팀장님 성향이요. 좀 전에 회사에서 들었습니다. 엿들어서 죄송해요.”

“하, 하, 하…….”

시발.

재혁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요망한 강아지한테 제대로 놀아난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새끼가 다 알고 접근했다는 건데……. 호흡을 가다듬고 표정을 갈무리했다.

“루 씨, 내 성향을 안다고요? 얼마나 아는데?”

“네에?”

“안다면서? 그럼 얼마나 아는지 말해 봐요.”

몸을 굽혀 귀에 입술이 닿을 듯 가까이 다가와 던지는 질문에 배 속이 들끓어 올랐다. 저릿한 느낌에 아래가 서는 듯해서 허벅지에 잔뜩 힘을 주며 대답을 골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대답을 찾기 힘들었다.

“죄송해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내놓은 대답이 하찮고 볼품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루가 아는 것은 그가 성향자라는 사실뿐이고 서브를 찾는다는 것에서 도미넌트라고 예상했을 뿐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성향은 루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하드해서 다칠 겁니다.”

무섭도록 오싹한 말을 하는 것치곤 지독하게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루는 재혁이 자길 밀어내는 건지 당기는 건지 헷갈리기만 했다. 만약 밀어내는 거라면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저렇게 다정하게 밀어내는 건 반칙이니까.

“저, 저도 그래요. 괜찮아요. 얼마든지…….”

어떻게든 무엇을 해서라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말이 멋대로 튀어 나갔다. 그가 다정해서 정신이 나간 게 틀림없었다.

“시발, 미치겠네. 너 다친다고.”

재혁은 루를 향해 욕하면서도 눈을 휘고 입꼬리를 올렸다. 이쯤에서 포기하라는 듯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것이다.

물론 재혁은 진짜 거절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름이 눈물 ‘루’니까 우는 걸 보고 싶어서 거절하고는 싶은데 무섭게 거절하면 서브의 특성상 도망가 버릴까 봐 부드럽게 거절한 거였다. 이렇게 복잡한 생각이 든 게 얼마 만인지 창자 깊은 곳에 있던 욕망까지 모두 들끓어 올랐다.

“미, 미쳐도… 다쳐도 좋아요! 좋다고요!”

루가 살아생전 가장 돌았으며 미친 말을 한 날이었다.

재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자기 말을 잘 알아들은 게 맞냐고 채근하는 듯해서 몸이 떨렸다. 그래도 이미 벌어진 일이라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래요? 그럼 잠시 기다려.”

재혁은 그길로 전화를 걸어 대리 기사를 불렀다. 잠시 후 나타난 기사에게 주소지를 불러 주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뒷좌석에 함께 앉아 있는 지금 아무것도 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쭈뼛 소름이 돋았다.

재혁의 집까지 가는 동안 그는 한마디도 없었다. 어딜 가는지 왜 가는지 가서 무엇을 할 것인지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고 나서야 떨리는 입술을 뗐다.

“저… 팀장님.”

“네.”

“그러니까, 그게…….”

그가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루는 침을 꼴깍 삼키며 눈을 깜빡거렸다. 질문을 어떻게 해야 상황에 적절할까 하는 생각은 이어진 그의 말로 쏙 들어갔다.

“안 잡아먹습니다. 아직 결정 못 했거든.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냐는 조롱이었다. 수치심과 모멸감에 귓불이 뜨거워졌다. 손으로 귀를 쓱쓱 문지르자 재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감당할 수 있고 다쳐도 좋다면서 그렇게 벌벌 떨면 어쩌자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그냥 저는…….”

“뭐 됐습니다. 아직 내 사람도 아니니까.”

신랄한 거부가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재혁은 모르겠지만 처음 본 순간부터 그에게 반했던 루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웃고 울었다. 그동안은 주로 공적인 업무에 관해서만 대화를 주고받았기 때문에 울 일보다는 웃을 일이 더 많았다. 그러나 실제 곁에서 겪어 본 재혁은 생각보다 더 다정하면서도 차가웠다.

재혁의 집은 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대단했다. 문을 열자 넓은 거실이 보였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여기저기 구경하고 싶었지만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켜야 해서 그럴 경황이 없었다.

“앉으세요.”

재혁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무표정한 시선으로 루의 얼굴을 훑었다. 쭈뼛거리며 소파에 앉자 재혁이 물었다.

“차 마시겠습니까?”

“…그냥 따뜻한 물 마시겠습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주방 쪽으로 걸어간 재혁이 전기 포트를 눌렀다. 곧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리고 두 개의 머그잔을 든 재혁이 가까이 다가왔다. ‘탁’ 하고 테이블에 머그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마셔요.”

루는 머그잔을 들어 머금었다. 따뜻하고 달콤했다.

‘설마 코코아? 커피도 아니고?’

의외의 선택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웃으며 대답했다.

“카카오가 숙취 해소에 좋답니다. 마시고 술 좀 깨야지.”

“아…….”

따뜻한 게 배 속에 들어가니 확실히 속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풀리고 입 안에 단맛이 돌아서 홀짝거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 코코아를 마시다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고는 머쓱하게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그냥 물만 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목이 말라서요.”

“뭐 어떻습니까. 뭐든 잘 먹으면 좋지요.”

회사에서는 몰랐는데 그가 말하니 야하게 느껴졌다. 별말 아닌데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끝이 저릿했다. 잠깐 침묵이 지난 후 그가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은데 그에게 고정된 시선이 박힌 듯 돌아가지 않았다.

“제우스를 알아들은 걸 보면 경험자?”

불쑥 날아온 질문에 루는 캑캑거리며 들었던 머그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풀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그를 두고 그려 본 망상과 매일 밤 꿈으로 만난 주인님과 현실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이보다 훨씬 하드한 것도 꿈에선 잘만 했었는데 왜 이렇게 어려운지. 루는 자신이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경험한 적은 없어요.”

재혁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리고 위험한 짐승을 보는 것 같은 눈빛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순간 이대로 버림받을까 봐 너무 불안했다. 루는 어떻게든 매일 밤 자신을 괴롭히는 망상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이왕이면 그 상대가 재혁이었으면 했다.

“처, 처음이면 안 됩니까? 처음을 더 좋아하는 도미넌트도 있다고 하던데…….”

“그래요, 물론 그런 도미넌트가 있겠죠.”

마치 자기는 아니라는 듯 무심한 목소리와 단호한 표정이 루의 목을 옥죄었다. 그에 비해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렇게 들이대는 게 매력이 없다는 것도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그러나 자신의 성향을 깨달았으면서도 겁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다른 상대와 섹스는커녕 썸도 한번 타 보지 못한 루로서는 솔직하게 들이대는 것 외에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그려 보기도 했고 꿈에서도…….”

“꿈? 상대는?”

훅 들어온 질문에 루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상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재혁이었다. 어쩌면 그를 만나기 이전부터도 흐릿하게 만났던 주인님이 그와 비슷한 것 같았다고 착각이 들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하, 상대를 말하라는데 왜 죄송하대?”

“그, 그게요. 상대가…….”

“설마 납니까?”

“…….”

루는 고개를 떨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다른 사람을 두고 망상을 펼친 일을 상대 앞에서 고백하는 일은 수치스럽고도 괴로운 일이었다. 옷을 다 입고 있는데도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루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요. 저를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재혁은 입을 꽉 다문 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루는 떨군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팀장님을 반찬 삼아서 자위한 건 죄송해요.”

처벌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경멸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재혁이 만약 싸구려 도미넌트였다면 이 집에 들어온 즉시 자신을 범하고도 남았을 테니까. 비록 경험은 없었지만 여기저기서 들은 건 많았기 때문에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재혁이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플레이를 해 보지 않고서는 확실한 성향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나로서는 루 씨가 성향자였으면 좋겠지만 아닌 사람을 억지로 리드하는 건 꽤 귀찮고 상처가 되는 일이라…….”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던 루가 돌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재혁의 팔을 덥석 잡고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재혁은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그저 덤덤히 루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든 할 게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성향자 맞습니다. 매일 상상해요. 누군가에게 복종하고 맞고 당하는 장면을. 벗어나려고 해 봐도 안 됩니다. 도와주세요. 연인이 안 된다면 플레이 파트너라도 좋아요. 기회를 주세요. 해 보고 마음에 안 드시면 그만두셔도 좋습니다.”

“…….”

재혁의 싸늘한 반응에 루는 이대로 죽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서 저지른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매달릴 작정은 아니었다. 말해 보고 안 되면 적당히 포기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굳게 다물린 그의 입술에 숨이 조여드는 것 같아 더는 이렇게 있을 수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만히.”

짧은 명령에서 오싹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가슴을 조여 오는 듯했다. 루는 가슴에서 차오르는 열기를 내보내느라 입을 살짝 벌리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루 씨, 나한테 원하는 게 뭡니까?”

고저가 없는 목소리였다. 그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듯한 무덤덤한 눈길에 식은땀이 났다. 재혁은 지금 자신을 심사하고 있었다. 그러니 잘 대답해야 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던 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인님이 되어 주세요.”

“연애 DS를 하자는 말입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그냥 플레이만 해도. 제가 미숙해서 싫다고 하시면 언제든지 떠나셔도 좋아요.”

아무런 감정 표현이 없던 그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아직 자리에 앉지도 못한 그의 손을 당겨 옆에 앉혔다. 급하지 않은 느릿한 동작이었지만 루의 몸은 급작스럽게 당겨져 소파에 던져졌다.

“잘 들으세요. 이쪽 바닥엔 생각보다 미친 새끼들이 많습니다. 루 씨처럼 이렇게 순진하게 들이댔다가 몸과 마음에 상처만 입고 버려지는 서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남자와 남자 관계에선 더 빈번해요. 도대체가… 경계심이라곤 조금도 없어서.”

혼내고 비난하는 말이었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걱정해 준 적이 있었나 싶어 오히려 설렐 지경이었다. 재혁은 분명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루는 그의 말에서 안정감과 따뜻함을 느꼈다.

“저… 경계심 많아요. 겁도 많은 편이고요. 팀장님이라서 그런 건데…….”

“나를 언제 봤다고 믿습니까? 나를 압니까?”

“잘 모르지만 저도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원래 초식동물이 감은 더 좋은데…….”

재혁은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어느 남자가 자기를 두고 초식동물에 비유한단 말인가. 하나부터 열까지 취향 아닌 게 없었다. 그런데도 재혁이 이렇게까지 신중하게 루를 밀어내고 시험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남자 서브미시브를 원하는 도미넌트로 살면서 여러 명이 자신을 거쳤다. 자신의 외모와 분위기만 보고 루처럼 접근했던 서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만나고 보면 서브가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반한 변태 바닐라들이었고 하나같이 재혁의 플레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겉만 핥는 피상적인 관계들 속에서 진성 도미넌트인 재혁은 점점 지쳐 가며 관계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성욕 따위 없이 산다고 죽는 것은 아니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신중할 생각이었다.

적당한 취향의 남자도 후폭풍이 있었는데 만약에 루같이 취향을 그대로 옮긴 남자와 똑같은 사정을 반복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는 걸 알아도 재혁은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거부할 자신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벗겨 먹고 싶은데 이걸 놓치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럴 순 없을 것 같다.

“힘들 겁니다.”

“네.”

“내가 질려서 떠나기 전에 루 씨가 먼저 지쳐서 그만하자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왜냐면 저는…….”

루는 잠시 말을 멈췄다. 여기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그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다른 말로 돌려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경험만 없을 뿐이지 누구보다 내 성향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재혁의 시선이 루의 붉어진 뺨에 오래 머물렀다. 시선이 닿은 자리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루가 만약 경험자였거나 좋아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 파트너 제안에 응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의 미숙함과 무거운 마음은 재혁에겐 부담으로 다가왔다.

“루 씨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왜요?”

재혁이 사랑스러운 것을 쓰다듬듯 루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살짝 내려간 눈꼬리에 루의 가슴이 떨렸다.

“생긴 것도 하는 짓도 완전 취향이라…….”

“제가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던 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간지러울 정도로 뺨에 열이 올랐다. 재혁의 손가락이 뺨을 톡톡 두드리곤 떨어져 나갔을 때 루는 자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혁의 행동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하얀 피부도 마음에 들고 고개를 떨구는 것도 예쁩니다. 말끝을 흐리면 꼬투리를 잡아 엉덩이가 빨개질 때까지 스팽을 하면 어떨까 싶고 눈이 촉촉해지는 걸 보니까 울려 보고 싶습니다. 얼마나 더 크게 울지 궁금하거든.”

기대에 찬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루는 보이지도 않는 발가락을 꿈틀대며 덜덜 떨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피부 속 세포에 각인되듯 박혀 강렬한 자극으로 남았다.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벗겨 놓고 울리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이기심을 채우고 싶단 뜻이에요.”

재혁은 가까이 붙은 몸을 더 바짝 붙여 앉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 조르듯 목에 닿았다. 닿기만 했을 뿐인데도 마치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에 루는 눈을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플레이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하자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경멸하는 듯한 소리에 전율이 흘렀다.

“목에 초커를 감고 개가 되어서 내 발을 핥아야 할 텐데?”

목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살짝 눌렀을 뿐인데 목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루를 바라보고 있는 재혁의 눈빛이 점점 짙어졌다. 숨을 멈추고 눈을 내렸다. 그래도 몸 전체를 내리누르는 듯한 위압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집에선 옷은커녕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할 겁니다. 손은 묶여 있을 테고 눈은 가려져 있어서 빛을 못 봐도 괜찮겠습니까?”

목을 잡힌 채 덜덜 떨고 있는 루를 내려다보며 재혁이 비웃었다. 입꼬리를 올린 채 고개를 가볍게 옆으로 기울이는 동작에서 얕은 경멸이 느껴졌지만 그것마저 자극이었다.

“다 감당할 수 있어요?”

“네, 네네.”

루는 의지를 보여 주려고 일부러 여러 번 대답했다. 대답을 듣는 재혁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불쾌감이 아닌 강렬한 쾌감을 느끼는 자신이 변태 같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이 남자를 마주 보고 있을 이유도 없을 테니.

잘 참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아래가 어느새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루는 모은 허벅지를 더 바짝 오므리며 그의 팔을 잡았다.

“할 수 있어요. 솔직히 그 정도는 기본이잖아요. 더 하드한 거 없어요?”

잠시 전까지만 해도 겁을 집어먹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루가 갑자기 눈에 힘을 준 채 재혁을 도발하자 흥미가 더 동했다. 재혁은 피식 웃으며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풀어냈다. 도발할 거면 조금 더 그럴싸하게 할 것이지 팔을 잡으면서도 덜덜 떠는 주제에 도발이라고 하는 꼴이 우스웠다.

“루 씨, 정신 차려요. 우리는 아직 어떤 관계도 아닙니다. 제대로 관계 설정을 하지 않고 섭을 멋대로 다루면 그건 범죄자지 돔이 아니에요.”

“…….”

루는 입을 다문 채 눈을 깜빡였다. 재혁이 원하는 게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취향이라고 했다가 견딜 수 있냐고 물었다가 있다고 했더니 정신 차리라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조그맣게 툴툴거렸다.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경험만 없지 이론을 모르는 건 아닌데…….”

“이론을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잠시 말을 멈춘 재혁이 피곤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드리는 거잖아요. 하드한 것도 감당할 수 있다고요. 저 성향자인 거 확실하다고.”

“…….”

재혁은 루의 말에 쉽게 넘어가 주지 않은 채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자신이 미숙해서 플레이 파트너로 삼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루는 그의 말을 기다리다가 조금 더 당겨 보기로 했다. 취향이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저기, 팀장님… 저 울려 보고 싶고 때려 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

훅 들어온 루의 공격에 재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민에 휩싸인 재혁은 무표정을 가장하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발가벗겨서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좆을 쑤셔 박고 싶었지만 급히 먹고 체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신중히 공들여서 하나하나 속속들이 발라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성격대로 덤볐다가 눈앞의 초식동물이 무서워서 도망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빠르게 계산해 본 결과 그럴 걱정은 없을 것 같았다. 루는 성향을 일찍 알았음에도 경험이 없을 만큼 소심한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으니 승자의 여유를 가지는 편이 관계에 더 이롭다는 판단이 섰다.

“신루.”

재혁의 부름에 수줍음이 가득 담긴 루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참아 줄 때…….”

날카로운 눈동자에 광채가 서리는 듯했다. 루는 두려워하면서도 기대감에 손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기대감에 발기하는 중심을 그가 밟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망가세요.”

“네?”

재혁은 턱짓으로 현관을 가리키며 루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떠미는 대로 쫓겨나던 루가 끌려가지 않으려는 개처럼 발에 힘을 준 채 돌아보았다.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취향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쫓아내는 게 어딨어요?”

억울함이 잔뜩 드러나는 눈빛에 재혁의 눈이 잠시 일렁이는 듯했지만 그뿐이었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삼 일 주겠습니다. 생각해 보고도 나와 관계를 맺고 싶다면 다시 연락하세요.”

결국 루는 눈물을 머금고 재혁의 집을 나서야 했다. 일말의 미련도 없는 것 같은 태도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이럴 거였으면 왜 굳이 집까지 데려온 걸까. 루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루는 신경질적으로 옷을 벗어 던지고는 찬물에 샤워했다. 찬물로 샤워하기엔 일교차가 심해 추운 늦봄이었지만 샤워기 밑에 아무리 오래 서 있어도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니야, 내가 너무 경솔했는지도 몰라. 그렇게 쉽게 고백해 버리는 게 아닌데……. 도미넌트들은 상대를 휘두르길 좋아하지 끌려가는 걸 싫어하잖아. 내가 심했어.

루는 물을 맞으며 오늘의 고백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에게 3일간의 시간을 허락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꼭 슬퍼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3일 후에 어떻게든 다시 기회를 잡으면 될 일이었다.

서늘한 표정과 냉담한 목소리 그리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생각하자 다시 몸이 달아올랐다. 샤워를 끝낸 루는 침대에 올라와 한동안 일이 바빠 쓰지 않았던 젤과 딜도를 꺼냈다.

침을 꼴깍 삼키고는 콘돔을 씌운 딜도에 골고루 젤을 발랐다. 오랜만이라 잘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풀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았다.

목을 누르던 손과 싸늘하게 바라보던 눈빛을 생각하며 풀어지지 않은 구멍을 손으로 문질렀다.

“흐으… 읏.”

아직 넣지도 않았는데 좋다고 오물거리는 구멍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다른 한 손으로 성기를 잡고 아래위로 쓸었다. 아직은 완전히 발기하지 않아 말랑한 것을 조물거리자마자 딱딱하게 힘을 받기 시작했다.

구멍을 문지르던 손가락에 힘을 주어 끝부분을 살짝 넣어 보았다. 손가락을 넣은 것만으로도 ‘헉’하는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입술을 핥으며 재혁을 생각했다. 그가 바로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손이 미친 듯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들락날락했을 뿐인데 온몸이 전율하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더 했다간 싸 버릴 것만 같아 구멍에서 손을 뺐다.

오랜만에 하는 자위를 겨우 손가락으로만 끝내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 손가락이 빠진 구멍은 아쉬운 듯 벌름거리며 다른 무엇이 들어오길 고대하는 것 같았다.

딜도를 들어 젤을 듬뿍 짜 넣었다. 손가락 하나만 들어가 있던 자리는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아 아플 게 뻔했지만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찢어지고 싶어?’

그가 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로 묻는 듯했다. 들리지도 않는 환청을 들은 척 딜도를 아래로 가져가 서서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다물린 구멍은 벌어지지 않은 채 끝부분도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극심한 고통에 솜털이 곤두섰다.

‘제대로 안 해?’

그런 자신을 비난하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심호흡하며 다시 천천히 딜도를 밀어 넣었다. 여전히 빠듯했지만 끝부분으로만 수차례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니 서서히 풀려 가는 것 같았다. 안의 열기로 녹아내린 젤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냈다. 끝까지 딜도를 밀어 넣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팽팽하게 선 성기를 쓰다듬으며 진동을 올렸다. 온몸이 덜덜 떨리며 시야가 꺼졌다 들어오길 반복했다. 딜도를 잡고 왔다 갔다 할 새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가 버렸고 성기에선 정액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으으으… 아아! 주인님.”

그렇게 몇 번이고 절정에 허덕이다가 스위치를 내리고 눈물을 닦았다. 떨리는 손으로 딜도를 빼내고 아래를 씻고 속옷을 입었다. 그동안에 말할 수 없는 허무감이 가슴을 뒤덮었다. 이게 자위가 아니라 실제 플레이였다면 얼마나 더 짜릿할까.

대상을 몰랐을 때의 자위는 공허하긴 했으나 목마르진 않았다. 대상이 생긴 지금은 순간적인 갈증은 해소해 주었지만 여러 번 사정했음에도 목이 말랐다.

찬물을 마시고 침대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했다. 결국 그날 루는 하얗게 새벽이 밝을 때까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3일 동안 루는 영혼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하는 동안엔 멍한 정신으로 최소한의 일만 처리했으며 매일 밤 재혁에게 능욕당하는 꿈을 꾸었다. 이토록 강렬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날의 아침이었다. 마침 토요일이라 출근이 없는 날 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했다. 다른 게 아니라 플레이 파트너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아침부터 말하는 게 정상적인 사람의 행동 방식인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러다가 그냥 통화 버튼을 누르기로 했다. 처음 그의 사무실 앞에서 ‘제우스’라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정상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먼 행동만 해 놓고 이제 와서 정상을 운운하는 건 웃긴 일이었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심장이 쿵쿵 뛰어서 한 손으로 심장을 눌렀다. 핸드폰을 쥔 손이 자꾸만 미끄러지고 입에 침이 말랐다. 신호음이 꽤 오래 지속하는 동안에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싫어서 피하는 걸까?’

루가 이런 의심으로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사이 달칵거리는 소음이 들리고 드디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재혁입니다.

단정하고 낮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름을 밝히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도 떠는 바람에 대답이 늦어졌다.

“저기… 저는…….”

―압니다, 루 씨.

그는 목소리를 알아봐 준 걸까? 아니면 연락처를 미리 저장하고 있었던 걸까? 별것 아닌 일에 루는 작은 기대를 품었다. 한동안의 침묵을 뒤로 한 채 재혁이 물어 왔다.

―결정했습니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비난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겨우 3일 가지고 이 일을 쉽게 결정하면 안 된다고 따져 묻는 듯한 질문에 루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대답했다.

“했습니다. 저는 처음 마음과 변함이 없어요. 쉽게 물러설 거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 그렇게 가벼운 사람 아니에요.”

솔직하게 말하고자 한 말이 쓸데없이 길어진 것 같았다. 비장하게 말한 루의 말은 듣지도 못한 것처럼 핸드폰 너머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함에 이를 악물었다.

―만납시다, 그럼.

“네?”

몇 개의 절차를 건너뛴 것만 같은 말에 바보같이 되물었다. 만나고 싶다고 했고 만나자고 했으면 끝난 일인데 거기에 되묻는 건 뭐란 말인가. 루는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해서 말을 고쳤다.

“아, 알겠어요. 어디서 뵐까요?”

―제집 기억합니까?

집으로 오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기대감에 살짝 올라간 입꼬리로 밝게 대답했다.

“네, 기억해요. 전에 저 혼자 돌아왔잖아요.”

그가 낮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한 시간 후에 봅시다.

전화가 곧 끊어지려고 해서 루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저기, 팀장님.”

―네.

“그… 준비는.”

다시 웃음소리가 들렸다. 비난한 것도 아니고 수치를 준 것도 아닌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떤 걸 좋아합니까? 관장 플레이 좋아해요?

“…….”

애써 돌려 말한 걸 직접 물어 오는 바람에 대답하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째깍째깍 돌아가는 초침이 매정하게만 느껴졌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그냥 하고 갈…….”

“좋을 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핸드폰을 옆에 둔 루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요동치는 심장을 눌렀다. 드디어 기회가 생겼다. 어떻게든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찼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루는 빠르게 옷을 벗어 던지고는 욕실로 들어갔다. 공들여 씻은 뒤에 평소라면 절대로 바르지 않는 오일을 발랐다. 기분 좋은 향이 몸에서 진동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몸에 혀를 대면 건강에 나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시 씻었다. 뭔 바보 같은 짓인가 생각하다가도 그저 설레고 좋았다.

씻고 나니 이젠 옷이 문제였다. 회사에 출근할 때 입는 정장은 너무 무거울 것 같고 그렇다고 애처럼 입고 가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고……. 그가 자신을 취향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 더 잘 보이고 싶은데 정확하게 어떤 취향인지 몰라서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고른 것은 편안해 보이는 캐주얼 셔츠에 면바지였다. 셔츠는 몸에 너무 붙지 않는 것으로 고르고 그 위에 카디건을 걸치면 좋을 것 같았다.

“뭐, 어차피 가면 다 벗게 될걸…….”

그 생각을 하니까 또 앞섶이 불룩해졌다. 으… 시도 때도 없이 이러는 제 몸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는 어떨지 모르지만.

집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타며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문을 열자마자 목을 조르고 채찍을 휘둘러도 놀라지 말자. 그저 태연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그가 받아 줄 거라고……. 두근두근. 루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