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로미오와 로미오 (29/30)

  4. 로미오와 로미오

“흑……. 흐흣.”

깊은 밤중,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윽…… 흑……. 흡…….”

카렐은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로 눈꺼풀을 스르르 밀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짙은 녹색 눈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잠시 허공을 헤맸다. 사위는 빛 한 점 없이 무척 어두웠다.

카렐은 얼마간 그 깊은 어둠 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그러나 그가 막상 잠에서 현실로 빠져나왔을 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꿈자리가 사나운가.

카렐은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눈을 감으려 했다. 잠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마도 금세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렐은 습관처럼 옆자리를 더듬었다. 사샤가 누워 있는 자리를.

“흐으…… 응.”

그러나 손끝에 잡히는 것은 없었고 허약하게 앓는 소리 같은 것이 다시 귓가로 흘러 들어왔을 뿐이다. 그것은 아까 전의 구슬픈 울음소리와도 닮아 있었다. 카렐은 다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깜빡였다.

“흐읍, 흣…… 허억. 으…….”

이번에야말로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꽂혔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이건 사샤의 목소리였다. 숨죽여서 삼키듯이 우는 목소리가 무척 서러웠다.

“사샤?”

등에 벼락이라도 내리꽂힌 느낌으로 카렐은 번쩍 눈을 떴다. 그러고는 상체를 완전히 일으켰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사샤의 모습을 찾았다.

“……흐으……으.”

“사샤?”

침대 가에 등을 돌린 채로 웅크리고 앉은 한 인영이 보였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달빛에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에 카렐은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사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샤, 무슨 일이에요.”

그러나 사샤를 등 뒤에서 조심스레 안아 달래려고 손을 뻗은 순간, 사샤는 크게 헛숨을 들이마시며 카렐의 손을 쳐냈다. 꼬리를 팡! 부풀린 고양이처럼 어깨를 경직시킨 채로 앉은자리에서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그러고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카렐을 바라보았다. 무척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눈이 마주친 순간 카렐은 사샤에게 뭔가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망막에 맑은 눈물이 어룽어룽 맺혀 있었다.

“사샤, 안 좋은 꿈을 꿨습니까?”

“……으윽…….”

“말해 봐요. 일단 불이라도 켤까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조심스럽게 사샤에게서 물러나 앉았다. 사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그러고는 손을 뻗어서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등을 눌러 전원을 켰다.

어둠 속에서 손끝으로만 전원 버튼을 찾기 어려워 카렐은 잠시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톡, 가벼운 소리와 함께 침실을 은은하게 비추는 주홍빛 등이 들어왔다. 그 불을 켜기 위해 카렐이 사샤에게서 시선을 돌린 것은 고작 5초도 되지 않았다.

“사샤?”

그러나 사샤는 그 5초 사이에 돌변하여 입술을 힘껏 깨물고 카렐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 그 공격적인 눈빛에 살짝 겁에 질린 것은 카렐 쪽이었다.

“사샤…….”

“누, 누구냐! 감히 나의 침실에…… 정체를 밝혀라!”

부자연스럽도록 연극적인 말투에 카렐은 헛웃음에 가까운 한숨을 흘렸다. 사어가 된 단어를 쓰는 걸 보니 셰익스피어의 연극이라도 흉내 내는 것인가 싶었다.

“이건 또 무슨 역할극이죠.”

카렐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가능한 한 이 상황을 해프닝으로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사샤는 굳게 다문 입술이 하얘지도록 꽉 물고는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샤가 평소와 많이 다르다는 걸 알아챘으면서도 카렐은 일부러 더욱 부드럽게 물었다.

“사샤, 왜 그렇게 긴장했죠?”

“닥쳐라!”

잔뜩 긴장해 솜털을 전부 세운 사샤를 보고 있자니 점점 불안감이 깊어졌다. 사샤는 공격적인 눈빛을 하고도 긴장을 지우지 못하고 전신으로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왠지 사샤에게만은 이 상황이 진지할 거라는 생각이 더욱 깊어졌다.

“사샤, 이리 와요.”

카렐은 침대를 가볍게 톡톡 두드리면서 몸을 낮추었다. 그러나 카렐이 다정하게 굴수록 사샤는 도리어 흰 뺨에 진주알 같은 눈물을 매단 채로 주춤주춤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보, 복수를 하러 왔나?”

사샤가 덜덜 떨면서 물었다.

“복수?”

카렐은 눈썹을 치켜떴다. 한밤중의 질 나쁜 악몽에 당한 것치고는 제법 세뇌가 오래간다고 생각하며.

“내가 당신에게 복수할 일이 무엇이 있지요?”

카렐은 눈을 마주치고 나직하게 물었다.

“아마도 티볼트의 죽음에 대해 감정이 남은 거겠지.”

“……티…….”

카렐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린 채로 더는 아무런 음성도 내뱉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의 앞에서 사샤는 자신 없이 눈을 굴리며 눈가를 손등으로 훔쳤다.

“하지만 내 친우 머큐쇼가 죽은 게 먼저요…….”

“…….”

“나는, 나는 어쩔 수가 없었어. 내 친구의 죽음을 갚기 위해서는…….”

사샤는 비통하게 코를 훌쩍였다. 그러고는 슬픔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앞으로 풀썩 엎드려서 어어엉, 하고 큰 소리로 울었다. 한참 푹신한 이불에 얼굴을 묻고 있더니만 몰래 이불에다가 콧물이 흐르는 코를 스윽, 비비는 행동도 취했다. 어찌나 자연스럽게 코를 훔치는지 말리지도 못했다.

아무튼 원통해하던 것도 잠시, 사샤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외쳤다.

“나는 이제 죗값을 치르기 위해 떠난다!”

어디로 떠날 거냐고는 묻지 못했다. 비장한 사샤의 앞에서 카렐은 그저 꿀 먹은 벙어리였다. 다행히도 연극에 취한 사샤가 묻지도 않은 것을 떠벌였다.

“나는 베로나에서 영영 추방당할 신세요. 가, 가족도, 친구도, 발레도 두고 떠나가는 내게 무슨 복수를 하러 왔소?”

사샤는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비록 그 말투는 어설픈 연극조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사샤 본인의 감정은 무척 진지했다. 카렐에게마저 그 기분이 전이될 지경이었다.

문제는 여기는 베로나도 아니고 사샤는 추방 선고 같은 것을 받은 적도 없다는 것뿐.

“아…….”

카렐은 굳은 채로 생각에 빠졌다.

연기 상대를 해 달라는 건가, 하고.

하지만 이 밤중에 연기로 저토록 구슬프게 울어 댄다고? 보는 사람도 없는데?

사샤는 카렐이 잠에서 깨기 전부터 울고 있었다. 카렐은 의혹에 휩싸였다.

현재 사샤의 대사로 미루어 스토리라인을 추측해 보면, 현재 사샤가 말하는 구간은 티볼트와의 결투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추방 선고를 받은 직후인 듯하다. 그 와중에 카렐은 조금 미묘한 점을 발견했다. 원작의 로미오라면 이대로 베로나에서 추방당해 줄리엣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가장 비통해하고 있을 텐데 사샤는 ‘발레를 두고 떠나간다’는 점을 언급했다.

아무래도 로미오의 설정과 현실이 섞여 본인도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카렐은 심증만 있던 것을 점점 확신으로 굳혔다.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서 조심스럽게 운을 떼 보았다.

“로미오?”

“내,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소?”

사샤가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처연히 물었다. 카렐은 들리지 않도록 침음했다.

아무래도 사샤는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모양이다. 학교에서 발레 연기를 위해 실제 극본을 읽어 보도록 권했을 수도 있었다. 예민하고 다른 이의 감정에 쉽게 동화되는 편인 사샤는 그 비극에 쉽게 젖어들었고……. 그래서 극중의 상황을 꿈으로 꾼 것일지도 모른다. 일시적으로 그 여파가 현실에까지 미친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쉬웠다.

생각을 정리한 카렐은 일단은 사샤를 달래자고 마음먹었다. 원통한 얼굴의 사샤는 이미 너무 많이 울어서 지쳐 보였다. 안 그래도 체력이 달리는 요즘인데 이런 일로 기력을 빼놓는 것이 무척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아까보다 한 꺼풀 기세가 누그러진 사샤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가끔 힘없이 목을 바닥으로 툭, 떨구고 있었다. 잠이 몰려와서 미칠 지경인 게 분명했다. 조금만 안정시키면 이대로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다.

카렐은 몸을 슬금 물려 침대 밑, 디저트 바구니에서 초콜릿을 하나 꺼냈다. 그 포장지를 일부러 ‘바스락’ 소리를 내면서 벗기자 사샤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로미오?”

“으응?”

사샤라는 이름은 몇 번이고 불러도 반응을 하지 않더니 로미오라고 부르면 재깍 반응을 한다. 카렐은 속으로만 탄식했다. 그러나 티를 내지 않고 초콜릿바를 눈앞에 들어 보여주었다.

“이런 걸 먹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맞아, 그래……. 내가 좋아하는 거야. 어떻게 알았지?”

로미오의 시대에 이런 공산품 초콜릿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사샤는 무릎걸음으로 기어 카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초콜릿을 받아 갔다. 고작 좋아하는 초콜릿바 하나로 그 눈에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것이 보였다.

“저는 뭐든지 다 알고 있죠.”

“……?”

사샤가 아작, 소리를 내며 초콜릿을 베어 먹었다. 그 어리숙한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로미오가 열여섯 살의 어린 소년이라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눈앞의 사샤를 보니 겨우 납득이 갔다.

친구의 죽음을 겪고, 또 살인으로 손에 피를 묻히고,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야 하는 열여섯 살의 로미오는 인생의 비극 앞에서 배우처럼 멋들어지게 참담해하기보다는 현재의 사샤처럼 아이같이 처절하게 울었을 것이다.

카렐은 잠을 방해하던 사샤의 흐느낌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샤의 로미오가 무척 애틋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카렐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나는 복수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음…… 그러면?”

“로미오 님의 유모가 떠나가는 길을 걱정하면서 이것저것을 챙겨 주라 하더군요.”

“아, 유모가?”

사샤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기실 사샤의 인생에는 단 한 번도 유모가 없었기 때문에 현실과 설정의 충돌을 겪은 듯했다.

사샤가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카렐은 사샤에게 새로운 초콜릿을 하나 더 까 주었다. 사샤는 카렐의 굵은 손이 고급 초콜릿의 섬세한 포장을 벗겨내는 것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카렐은 저도 모르게 사샤의 동그란 뒤통수를 큰 손으로 한 번 슥 쓰다듬어 주었다. 꿈이든, 착각이든 사샤가 정신적으로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오늘 밤은 안심하고 잠드셔도 됩니다. 제가 곁을 지킬 테니.”

카렐은 그렇게 말하며 사샤의 경호원을 자처했다. 이번에는 사샤의 등에 손을 두고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기듯이 안았다. 그러자 부드럽고 유연한 몸이 저항 없이 딸려왔다.

“정말이지?”

“네. 안심하세요.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흐음, 그래……. 그러면 조금 자야겠다.”

“얼른 주무세요. 자장가라도 불러 드릴까요?”

“그건 괜찮아. 나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카렐은 여전히 어설픈 연극조의 말투를 고수하는 사샤를 내려다보며 몰래 웃었다. 그러고는 베개를 가져와 사샤가 머리를 거기에 기대도록 만들었다. 머리를 대자마자 사샤는 작은 입을 크게 벌리며 새처럼 하품을 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조절할 수 없이 사랑스러운 마음이 솟구쳐서 카렐은 그 이마에 키스를 할 뻔했다. 동시에 곤한 잠을 방해한 코를 꽉 쥐어흔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얼른 주무시지요.”

“으음.”

사샤가 카렐의 품 안에서 편안한 자세를 취하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카렐은 제 허벅지와 옆구리 사이에 파고들어 코를 박은 사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닌 밤중에 갑자기 돌발 상황을 만든 이 작고 예민한 예술가 때문에 저도 잠에서 깨어 날벼락을 맞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었다. 심지어 이 독특한 이벤트가 매력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예술가들은 무언가를 창조해 낼 때 이토록 몰입하는 건가?’

사샤 세드린의 예술적 기질을 엿보는 것은 카렐의 요즘 새로운 삶의 활력이었다.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이 카렐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혹여나 로미오에 빙의한 사샤가 놀랄까 봐, 카렐은 사샤의 뺨에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러고는 충실하게 경호원의 흉내를 냈다. 머리카락을 사락, 넘겨주자 사샤의 눈이 가물가물 감기려 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러나 사샤는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애쓰면서 카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얼굴이 기억난다.”

“그런가요?”

“응…….”

사샤가 희미하게 웃었다. 카렐도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 집에서…….”

“집에서?”

“가장 힘을 잘 쓰는…… 일등 노예…….”

사샤는 거기까지 말하고 고륵, 코를 골면서 잠들어 버렸다.

“일등 노예……?”

찬물을 맞은 기분으로 카렐은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제 허벅지에 툭 기댄 사샤의 고개는 그가 완전히 잠들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당신, 일어나.”

카렐은 사샤의 뺨을 검지로 톡톡 건드렸다. 미동이 없었다. 카렐은 이어서 사샤의 어깨를 흔들어 댔다. 하지만 푹 잠든 사샤는 고른 숨을 내쉬며 힘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이거 다 연기지. 그렇죠? 나한테 한 방 먹이려고 대본을 쓴 거죠.”

“쿠우…….”

“사샤…… 당신.”

카렐은 노예 취급을 받은 수모로 눈썹을 파들파들 떨었다. 아무리 관대해지려고 애를 써도 사샤의 무의식 속 제 위치를 인정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다시 잠들기 위해 카렐은 욕조 가득 따뜻한 물을 받고 심신을 안정시켜야 했다.

“노예라니.”

카렐은 헛웃음을 지었다.

한참 후 잠자리로 돌아와 방 안의 모든 등을 다시 내린 카렐은 어둠 속에서 조용히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울다 지쳐 눈꺼풀이 땡땡 부은 사샤는 저만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카렐은 사샤의 코를 한 번 꽉 쥐었다가 사샤가 결국 입으로 숨을 쉬기 시작할 때야 코를 쥔 손을 놓아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사샤는 지난밤의 일도 잊고 나긋한 목소리로 카렐의 귀에 대고 ‘일어나요.’ 노래를 불러댔다. 사샤 때문에 조금 잠을 설쳤던 카렐은 그 달콤한 모닝콜에 간밤의 사샤가 했던 짓은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저를 벌어먹여 살리기 위해) 학교에 가는 사샤를 문간에서 배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카렐은 사샤가 로미오에게 빙의한 것은 그저 일회성 해프닝인 줄 알았다. 깊은 몰입과 나쁜 꿈이 빚어낸 그 날만의 이벤트.

그러나 사샤의 기행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가면무도회는 처음이야. 넌 가 본 적 있어? 거기선 사람들이 정말로 가면을 쓰나?”

카렐은 한밤중에 옷장을 죄다 뒤집어 놓으며 부스럭대는 사샤 때문에 또다시 잠에서 깼다. 사샤는 설레고 두려운 눈으로 카렐에게 천진난만하게 물어 왔다. 어둠 속에서 확장된 동공이 묘하게 꿈꾸는 듯했다. 카렐은 미간을 짚으며 ‘또 시작이군’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가면무도회 전날 밤인가.

내일이면 줄리엣을 만나게 되겠군.

“사람들이 날 알아보진 않겠지? 난 잘 이해가 안 돼. 가면을 써도 목소리나 몸태로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것 아냐?”

사샤는 옷가지 사이에 폭 파묻힌 채로 상기된 뺨을 하고 있었다. 카렐은 몰래 하품을 하면서 사샤에게 적당한 답을 주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사실 다들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는 겁니다.”

“그래? 그럼 가면은 왜 써야 하는 걸까…….”

그날 밤 카렐은 사샤가 만족할 만한 의상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골라 주고 나서야 그를 어지럽혀진 방바닥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멋을 부려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사샤는 치렁치렁한 옷을 고르고 싶어 했다. 머리에는 터번처럼 스카프를 둘렀다. 그 우스운 꼴을 기억하기 위해서 카렐은 그 난장판 속에서도 사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렇게 사샤를 다시 억지로 재운 다음 날에는 뒤집어진 드레스룸을 정리하느라 반나절을 날렸다.

그리고 어떤 날 사샤는 길거리에서 티볼트 패거리를 마주쳤다며 울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조용하게 넘어가고 싶은데 다혈질인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며 괴로워했다. 카렐은 그걸 보며 사샤의 로미오는 갈등을 싫어하는 편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소비해 지나치게 익숙해진 고전도 사샤가 해석하는 것을 보면 제법 새롭게 느껴졌다.

사샤의 머릿속에서 사건은 순차적이지 않았다. 덕분에 카렐은 오래전 읽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기억 속에서 더듬으며 사샤가 현재 어느 상황에 처해 있는지 짐작하고 순발력 있게 맞장구를 쳐 주곤 했다.

그 뒤로도 사샤가 로미오가 되어 말을 거는 일은 점차 잦아졌다. 밤이 아니라 대낮에도 종종 그럴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렐은 어느 시점이 될 때까지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내 칼을 받아라!”

그 일들이 있기 전까지는…….

어느 날 사샤는 카렐을 티볼트로 착각하고는 멜론을 잘라 먹던 과일용 나이프를 허공에 휘둘러댔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어느 곳도 보고 있지 않았다.

카렐이 군인 출신이 아니었다면, 얼른 손목을 쳐서 나이프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제압하지 않았다면 정말로 다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낀 카렐은 사샤의 뒷목을 쳐서 기절시켜 버리고 말았다. 사샤는 신음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곧바로 카렐의 품으로 축 늘어졌다. 기절해 버린 사샤를 끌어안은 채로 카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게다가…….

“일등 노예야……. 옷을 한 번 벗어 보거라. 너는 근육이 상당히 많은 것 같구나.”

사샤는 저를 계속해서 일등 노예라고 부르며 몸 이곳저곳을 제멋대로 만지며 희롱해 댔다. 뺨에 홍조를 띠고는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을 제멋대로 움켜쥐었다. 슬쩍슬쩍 가운의 앞섶을 벌려 안을 들여다보려고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카렐은 냉정하게 사샤에게 말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왜지? 너는 노예잖아.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해도 돼.”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요즘 시대에 사람은 평등하답니다. 그럼 저도 만지겠습니다.”

“앗, 안 돼!”

카렐이 그저 놀릴 작정으로 내뻗은 손에도 사샤는 과민하게 반응했다. 카렐의 손목을 잡아채고 날렵하게 그 손등을 찰싹 때렸던 것이다.

“노예와 주인이 공평한 법이 어디 있단 말이야.”

“…….”

“그러니 나만 만지겠다.”

“하아…….”

사샤는 카렐을 눕혀 놓고는 ‘와아…….’ 하고 작은 탄성까지 지르면서 그 몸을 이모저모 감상하기 시작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아 말랑한 가슴 근육을 손가락으로 푹 찌르고 유두를 희롱하기도 했다. 단단하고 납작한 배를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 복근이 간지러움으로 조여드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그 손길과 어설픈 연극조의 말투가 귀여웠던 것도 잠깐, 아래가 반응하기 시작하면서 카렐은 무척 갑갑함을 느꼈다. 사샤는 카렐이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샤가 완전히 제 자신을 로미오라고 믿기 시작하자마자 카렐은 노예 신분으로 강등되었고, 그 신분으로는 사샤를 범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함부로 ‘난 사실 당신의 연인이고 우리는 몸을 섞어 왔던 깊은 사이다’라고 주장하면 그것이 사샤의 나약한 정신줄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줄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미쳐 버리겠군,’

저를 잔뜩 흥분시켜 놓고 혼자서 코를 고롱거리며 잠들어 버린 사샤의 곁에서 카렐은 팔자에도 없는 자위를 해야 했다.

결국…….

“게오르크, 사샤를 상담사와 만나게 해 줘.”

생각보다 이 상황이 오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카렐은 상담사를 불렀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사샤가 공연을 마칠 때까지 이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면? 심지어 오래도록 고착화된 나머지 이후로도 후유증이 남아 한동안 이 역할극을 하며 지내야 한다면……. 끔찍했다.

게다가 공연 종료 시점까지 최소 3개월 이상이 남았다. 그사이 연인과 한집에 살면서 노예 취급이나 받아야 한다니. 물론 사샤는 노예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관대한 주인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샤에게 베로나의 노예 제도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카렐은 연인과 애정 표현 한 번 함부로 하지 못하는 수절 상태로 지내고 싶지 않았다.

[오늘 학교에서 만났답니다. 사샤가 오랜만에 상담사님을 만나 반가워했다고 하네요.]

게오르크의 보고를 받은 카렐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다시 정신과적인 문제와 연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올드 세드린은 평생을 조울증에 시달려 연인의 보살핌을 받았던 것이 기록으로도 남아 있었고, 어린 사샤 역시 십대부터 일찍이 조울증과 이인증 증상을 보여 치료를 받은 전적이 있었다. 좀 더 신경 써서 보살펴 주어야 했다.

게다가 이제는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사샤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 * *

보고를 위해 저택으로 온 상담사의 얼굴에는 여유가 깃들어 있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카렐은 내심 안도했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첫 마디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카렐은 다행스럽게 여겼다.

“사샤 세드린은 그냥 그런 타입의 예술가일 뿐이에요.”

“치료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는 겁니까?”

“네. 자아 인지와 현실 감각 모두 정상이에요. 그냥, 무어라 설명해야 하나…….”

상담사는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연기파 배우 중에 이런 타입이 종종 있잖아요. 사샤 세드린도 메소드 연기를 하는 타입이라고 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카렐은 저도 모르게 소파 뒤에 등을 기대었다. 고개를 모로 돌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 절제된 동작만으로도 카렐의 고충을 읽어낸 상담사가 말을 덧붙였다.

“아직 미숙해서 그렇죠. 이렇게 드라마가 강한 극의 배역을 맡아 본 건 처음이 아닌가요? 어리기도 하고요. 점차 역할과 자신을 분리해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잠깐…….”

그 순간 카렐은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댄 채로 깊은 의심에 빠졌다. 자아 인지와 현실 감각 모두가 정상이라. 그러면 자신을 일등 노예라고 부르는 건 과연 메소드 연기를 빌미로 한 사샤 나름의 못된 장난인 걸까, 아니면…….

“아주 가까운 이들조차 잊은 듯 구는 건 왜 그런 겁니까.”

“그것도 역할극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세요.”

“역할극?”

“오히려 현실 인지가 정상적이라는 반증이에요. 세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다 극중 인물이 될 수는 없으니까요. 사샤가 나름대로 제 주변인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고 있는 거죠.”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던 카렐에게 상담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어 왔다.

“실례지만 클레멘츠 씨는 무슨 역할을 부여받으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

왜인지 솔직하게 말하기가 조금 꺼려진 카렐은 그녀에게 되물었다.

“먼저 말씀해 주신다면.”

카렐은 양손을 맞잡고 무릎 위에 올린 채로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상담사가 입을 가리고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거부의 딸이라고 하더군요. 제 옷이 무척 비싸 보였대요. 듣기 나쁘지 않았어요.”

“…….”

“음, 클레멘츠 씨의 역할은 제가 추측해 보면…… 베로나의 시장?”

“……그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역을 주더군요.”

상담사가 무척 궁금해했지만 카렐은 결단코 제 역할을 입 밖에 내는 과오를 범하지는 않았다. 대신 등을 세워 몸을 앞으로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역할극이라. 그러면 대체 언제까지?”

“공연이니까, 무대가 끝나는 순간 빠져나오겠죠?”

예상한 바였다. 카렐은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상담사가 떠나고, 그녀를 배웅하고 온 게오르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가벼운 차림의 그는 여전히 일이 아니라 휴가 중에 친구의 집에 방문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 차림을 대놓고 위아래로 훑어본 카렐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저보고는 교회의 신부가 아니냐고 묻던데. 평생 종교를 가져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일단 그런 척을 해 주었습니다. 사샤의 눈에는 제가 그렇게 보이는 걸까요?”

게오르크가 거울을 보며 왠지 뻐기는 말투로 말했다. 군인 출신으로 단련된 육체와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 눈물점은 아무리 봐도 정숙한 교회의 신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가는 눈으로 게오르크를 지켜보던 카렐의 표정에는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오피스 바깥으로 나왔다고 너무 풀어지는 것 아니냐며 한마디를 하려다가 카렐은 그냥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치졸한 질투심의 발로가 아닌지 우려하는 마음 반, 그리고 오래 전 이십대 초반에 만났던 게오르크의 실제 성격이 제법 까불대는 편이라는 것을 기억해 낸 탓이다.

그때만 해도 두 사람은 상사와 비서의 관계가 아니었으며 카렐은 웨스트포인트의 장교였고 게오르크는 독일 장교 학교의 학생으로 교환 연수 시절에 만난 사이였다. 이제는 시절이 오래되어 게오르크도 최초 카렐에게 인간적으로 반했던 면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대신 그만큼 막역한 사이가 되었지만.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그러지 않아도 납득 못 하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

카렐을 돌아보며 게오르크가 말했다. 그러자 카렐이 소파에 느긋하게 등을 기대며 무신경한 말투로 사실을 흘렸다.

“나보고는 일등 노예라더군.”

“예?”

“몸집이 육중하고 힘을 잘 쓸 것 같다며 노예의 지위를 주었는데…….”

“…….”

“왜 안 웃지?”

카렐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바로 이런 순간이야말로 웃어서는 안 되는 때라는 것을 알았다.

대신 저만의 화법으로 카렐을 위로하기를 택했다.

“나름 칭찬 아닐까요? 사샤 세드린은 신체적인 면에서 타인에게 동경심을 쉽게 갖는 것 같으니…….”

“흠……. 허벅지를 만진 다음에 그렇게 정하더군.”

게오르크는 탄식했다.

“하필이면 사샤가 콤플렉스를 건드렸군요.”

카렐은 워낙 장신인데다 골격이 아름답게 균형 잡힌 편이라 언뜻 보기에는 늘씬한 체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가슴둘레나 허벅지 등의 사이즈를 수치화하면 보통 사람들은 ‘가능한 수치냐’면서 깜짝 놀라곤 했다. 특히 허벅지는 26인치로, 사샤의 허리보다도 굵었다.

카렐은 제 다리를 흘끔 내려다봤다. 가운데 각을 세운 고급스러운 옷감의 바지는 서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앉으니 터질 듯이 주름이 잡혔다.

이 엄청난 허벅지가 콤플렉스라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랑거리도 아니었다. 기성복이 맞는 것이 없어 때마다 옷을 맞춰야 하는 것도 꽤 번거로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사샤의 SNS는 꾸준히 보고 계시죠?”

“음…….”

더욱이 저를 건드려 대는 말에 카렐은 불편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사샤에게 친구 신청을 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사샤는 아직도 카렐을 팔로우해 주지 않았다. 그래도 카렐은 사샤가 언젠가는 자신을 발견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카렐은 제 SNS에 힌트를 남겨 놓았다. 둘만 알아볼 수 있는 코니아일랜드의 풍경 사진을 잔뜩 올려놨던 것이다.

처음에야 언제 알아봐 주려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기분도 설레기는 했는데…….

그 무신경한 애인은 아마도 카렐이 직접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계속 모를 예정인 모양이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사샤의 계정을 꾸준히 체크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라, 카렐은 게오르크의 물음에 답했다.

“요즘에는 업로드가 별로 없던데.”

“맞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게오르크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건네듯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사샤가 아니라 팬들의 반응입니다.”

“팬들?”

카렐의 물음에 게오르크가 답했다.

“사샤와 옥사나가 커플인 걸 기정사실로 정해 놓은 팬들이 대부분인 것 같아서 말이죠.”

“…….”

“두 사람이 무척 친한데다가 이번에 함께 주역도 맡았고, 연습하면서 가족보다 더 많이 붙어 있기도 하니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아, 오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클레멘츠 씨는 워낙 다양한 경험을 해 오신 분 아닙니까. 항간에 떠도는 헛소문에 상처받으시는 게 아닐까 추호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샤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게오르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샤 세드린은 꽤 충동적이니까요. 갑자기 이상한 불이 붙어 제 팔로워들에게 ‘진짜 애인 공개’를 하면 어쩌나…… 불현듯 걱정이 되어서 말입니다. 그쯤이 되면 수습해야 하는 일의 스케일이 무척 커지죠.”

“확실히 그건 문제군.”

심지어 사샤는 그 엉망인 글 실력을 가지고도 사람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하는 타입이었다. 떠도는 말들이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커플 팬이라는 게 상당히 골치가 아픈 겁니다. 자신들이 믿는 환상에 있어서 굉장히 강경하거든요……. 추후에 실제 연인이 생겨도 현실을 거부할 만큼.”

“…….”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샤 세드린과 장기적인 관계를 생각하신다면 말입니다.”

“…….”

“로미오가 귀가할 시간이네요.”

게오르크가 손목의 시계를 보며 말했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눈에 띄기 전에 가 봐. 또 널 사 오겠다고 난리를 치기 전에.”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저택 안에 혼자 남은 카렐은 제 뒷목의 거슬리는 부분을 쓰다듬었다. 최근 집에서 쉬고 있으니 칼같이 다듬을 필요가 없어 면도하는 부위의 머리카락이 조금 돋아나 있었다.

사샤가 이 부분의 감촉을 좋아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럼 공연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는 역할극을 이어 가도 됩니까?’

상담사를 떠나보내기 전, 카렐은 그렇게 물었었다.

‘공연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이요?’

‘네. 로미오와 줄리엣의 큰 줄거리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

‘로미오가 아주 약간의 일탈을 겪는다든지 말입니다.’

그 말에 상담사는 조금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면서도 ‘괜찮지 않을까요’라고 답했다.

카렐의 추측 역시 그러했다. 사샤의 망상조차도 빈틈이 많았으므로 완벽한 고전에서는 조금 벗어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 * *

온 저택이 침묵에 잠긴 밤, 사샤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카렐은 천천히 사샤에게 다가갔다. 잠들어 있는 사샤를 위에서 내려다보자 그 오밀조밀한 얼굴의 생김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감은 눈의 곡선이 꼭 웃는 것처럼 느슨한 선을 그리며 휘어져 있었다. 부드럽게 잠든 얼굴이 처연해 보이는 데에는 왼쪽 눈 아래 떨어지는 눈물점과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한몫했다.

“로미오.”

카렐은 조용히 속삭였다.

“로미오, 나의 로미오. 일어나요.”

매일 아침 사샤가 그러는 것처럼 이번에는 카렐이 사샤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사샤는 ‘으음’ 하고 작은 신음만 흘릴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카렐은 침대에 걸터앉아 가볍게 뒤척이는 몸을 끌어안았다. 침대 대신 제 몸을 바닥 삼아 등을 기대게 했더니 사샤는 알아서 편한 자세를 찾아 카렐에게 기대어 왔다. 일등 노예 취급을 해대도 몸의 습관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자느라 체온이 올라간 몸이 카렐의 피부에 나긋하게 감겼다. 몸과 손끝에 부드럽게 달라붙는 촉촉한 피부를 즐기면서 카렐은 사샤의 턱과 목덜미를 조심스레 간질였다.

“으음…….”

사샤는 눈을 감은 채로 고양이처럼 목을 울렸다. 한 줌에 쥘 수 있을 것만 같은 가녀린 목과 쇄골을 지나 가슴팍의 한가운데를 엄지로 길게 쓸었다. 납작한 복부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더 아래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카렐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더 은밀한 곳을 더듬었다. 몸의 어느 곳보다도 부드러운 말랑한 감촉이 손 안에 쥐어졌다. 사샤가 신음했다.

“흐읏…….”

사샤가 눈을 뜨기도 전에 카렐은 능숙하게 사샤의 것을 거친 손으로 애무해 완전히 발기하게 만들었다. 완전히 몸집을 키우게 하니 제법 손 안에 묵직하게 차는 크기가 된다. 한 번도 다른 곳에 쓸 일이 없는 그 모양 좋은 성기를 안타까워하며 카렐은 그것을 손으로 천천히 주물렀다. 분홍빛의 예쁜 성기가 바짝 서서 눈물을 흘려댔다.

카렐은 그것을 단번에 입에 머금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면서 사샤의 온몸을 애무했다. 작은 귀를 입에 넣어 질척하게 빨고 맹수처럼 그 목덜미에 물고 이를 세워 간질였다.

결국 전신의 피부가 불긋하게 상기된 채로 사샤는 눈을 떴다.

“앗……!”

잠에서 깨자마자 사샤는 자신이 완전히 발가벗고 있는 것에 크게 놀랐다. 그다음으로는 건강한 갈색 피부를 가진 남자가 마찬가지로 벗은 채로 저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겁에 질렸다.

“저, 저리 가!”

카렐이 몸을 겹치려 하자 사샤는 발로 카렐의 배를 밀어냈다. 그러나 철갑같이 단단한 복부를 아무리 걷어차 보아도 카렐에게는 말랑말랑하게만 느껴지는 발바닥이었다. 카렐은 큰 손으로 사샤의 발목을 가볍게 쥐었다.

“으응, 뭐 하는…… 흣……!”

“오랜만에 즐거움을 드리려는 겁니다. 익숙하시죠?”

“……무슨!”

“항상 이렇게 봉사해 드렸지 않습니까.”

“네, 네가?”

“예.”

“기억나지 않으시나 봅니다…….”

“으…….”

카렐은 웃지 않는 눈으로 사샤를 올려다보면서 천천히 쇄골로, 가슴으로, 또 복부로 입술을 내렸다. 눈이 마주치자 사샤의 검은 눈이 마구 흔들렸다.

그쯤에서 카렐은 사샤가 이미 저항할 의지를 반쯤 놓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기분 좋은 애무로 잠에서 깨기 전에 온몸을 녹여 놓은 보람이 있었다. 꿈과 현실 사이의 혼곤한 정신으로 그저 쾌락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항상, 으응……. 이런 것을 해, 했다고? 흣…….”

“수십, 수백 번도 더 반복한 일이죠.”

“아앙…….”

카렐이 성기를 한입에 머금었을 때, 사샤는 저도 모르게 콧소리를 흘리며 목을 젖혔다. 그러고는 자신이 낸 소리에 놀라 덜컥 제 입을 틀어막으며 허공에 발길질을 해댔다.

“흐읏, 응……. 빼, 뱉어, 어서…….”

사샤는 몸을 뒤틀었다. 전신이 뜨거운 물에 잠긴 듯한 쾌락이 아래에서부터 번져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몸을 뒤틀고 허리를 흔들어 봐도 묵직한 남자는 도무지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 입에 넣은 채로 ‘정말로 뱉을까요?’ 하고 혀를 굴려 묻기까지 했다. 지나친 자극에 사샤는 허리를 떨며 비명을 질렀다.

“나와! 나온단 말이야.”

그래도 카렐은 놓아주질 않았다. 결국 사샤는 손등을 눈가에 얹고는 애타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어엉…….

제발, 제발요.

버틸 수 없을 만큼의 강렬한 충동 앞에서 사샤는 엉엉 울며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렐은 바라던 바라는 듯이 진득한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일부러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핥았고, 뿌리까지 목에 담았다. 그리고 볼이 홀쭉해지도록 강하게 빨아들여서 사샤가 허리를 뒤틀고, 손을 모아 빌고, 목 놓아 우는 소리를 한참 즐기고 나서야 해방시켜 주었다.

“흐으, 으으응……. 읏, 끅…….”

결국 카렐의 입 안에 사정해 버렸을 때 사샤는 고작 단 한 번 절정에 오른 것으로 의지를 잃고 탈진한 상태였다. 맥없이 카렐을 올려다보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마주친 채로 꿀꺽, 무언가를 삼켰다.

방금 선명하게 움직인 카렐의 목울대로 넘어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챈 사샤는 겁에 질려 딸꾹질을 했다.

“끅, 마, 맛이 없을 거 같은데요.”

두려움에 사로잡혀 사샤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로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카렐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꿀처럼 달콤한데요?”

일부러 사샤의 말투를 따라 하며 내뱉은 그 말은 진심이었다. 카렐은 언제고 사샤가 흘린 것이라면 눈물이나 타액이나 가리지 않고 모조리 삼키고 싶어 했으니. 다만 몇 단계를 한껏 뛰어넘어 버리면 순수한 사샤 세드린이 놀라서 거리를 둘까 봐 욕망을 조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할극을 빌미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카렐은 점점 이 행위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카렐 클레멘츠가 아닌 노예의 탈을 쓰기를 자처하니 가릴 것이 없어졌기에.

“변태 같아…….”

사샤가 조용하게 중얼거렸다. 카렐은 능청맞게 고개를 끄덕였다.

“변태라니요. 이런 목적으로 저를 사 오신 게 아닙니까?”

“제가 노예를 샀나요?”

사샤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과거 제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는 기색이 언뜻 엿보였다.

“저를 본래 의도대로 이용해 주지 않으셔서 최근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새로운 연인이 생겨서 그런 건가요?”

“……연인…….”

혹, 원래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를 해칠까 우려한 카렐은 은근슬쩍 ‘줄리엣’의 존재에 대해 말을 흘렸다.

“줄리엣은…….”

극을 떠올린 사샤가 괴로운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 얼굴을 보자마자 카렐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는 제 안에서 위험한 욕망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일순 다른 이의 연인인 사샤 세드린을 제 육체 아래 깔고 있다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실제로는 가능할 리 없는 상황에 그는 도리어 흥분을 느꼈다.

카렐은 몸을 굽혔다. 낭창하게 휘어지는 허리를 양팔 안에 가둔 채로 서로의 배가 마주 닿도록 붙였다. 아랫배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카렐의 체온에 흠칫 놀란 사샤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어디까지나 밤놀이일 뿐입니다.”

“흣……. 뜨거워.”

“육체적인 쾌락과 영혼으로 하는 사랑을 분리해요.”

사샤의 귀를 핥으며 카렐이 나직하게 말했다. 사샤는 음성으로 느껴지는 진동에 허리를 떨었다.

“혹시나 죄책감을 느낀다면 더 잘된 일입니다. 그만큼 언약을 맹세한 이에게 더 충실하려고 노력할 테니.”

궤변이었다. 알면서도 카렐은 사샤를 유혹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리고 어리숙한 사샤의 로미오는 쉽게 휩쓸렸다. 자신이 잘 모르는 미지의 세계를 향해 저도 모르게 다리를 벌렸다.

이미 동정을 취한 상대에게서 두 번째로 동정을 앗아 가는 기분에 카렐은 미칠 듯이 흥분했다. 그의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음험한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

힘없이 벌린 다리 사이에 카렐의 허리를 품은 채로 사샤는 벌벌 떨었다. 카렐은 사샤의 이마를 다정히 어루만졌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아름다운 청년이 잔뜩 흐트러진 얼굴로 저를 두려워하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 눈물을 떨굴 것 같은 눈이다. 사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바로 그 표정이 카렐을 더욱 충동질했다.

사샤는 회음에 맞닿는 뜨거운 욕망에 불에 덴 것처럼 놀랐다. 그리고 마치 처음처럼 구는 사랑스러운 반응을 지켜보며 카렐은 도리어 천박하게 굴었다. 난잡한 방식으로 허리를 돌리고 짓궂게 꾹꾹 짓누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샤의 반응을 샅샅이 관찰했다. (사실, 사샤가 제정신이었더라도 이토록 비신사적으로 구는 카렐의 모습은 목격한 적이 없기에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역할극’이 가져다주는 해방감에 카렐은 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전신으로 사샤를 짓누른 채로 뿌리 끝까지 삽입했다. 연약한 구멍이 한계까지 늘어나며 묵직한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사샤의 귓가에 자세히 중계하며 묘사를 했다.

사샤가 수치심으로 눈물을 떨구면 그것마저 모조리 핥아먹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그를 다정히 얼러 가며 거꾸로 눕혀 제 성기를 입으로 받게 했다. 목과 안쪽의 너비를 가늠하면서, 이제 몸이 많이 자라 다치지 않을 거라며 뺨을 두드렸다.

그리고 사샤는 능숙한 카렐의 인도에 착실히 이끌리며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눈 밑부터 광대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목 안을 길게 긁힐 때 흥분으로 몸을 뒤틀었다. 커다란 좆에 뺨을 얻어맞으면서도 곱게 감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또, 제 타액으로 질척해진 카렐의 성기가 안을 꿰뚫고 이어 엄지손가락이 안을 벌리며 추가로 침입할 때에도 등을 떨면서 교성을 질렀다.

카렐은 사샤를 엎드리게 한 후 그 허리를 양손으로 꽉 잡아 조인 후 삽입했다. 이전까지 다정한 것에 익숙하고 또 그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샤에게 후배위를 시도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았다.

“앗!”

몸을 뒤집어 뒤를 돌게 만들자마자 카렐은 곧장 사샤의 아름다운 등에 반했다. 백조처럼 장성한 하얀 등이 어둠 속에서 선명한 근육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말랐지만 뚜렷한 역삼각형 모양을 그리는 어깨 위로는 처연할 정도로 가녀린 목이 힘없이 바닥을 향해 떨군 채였다. 카렐은 입술을 깨물며 퍽, 거세게 삽입했다.

“아아!”

“사샤 세드린, 사샤 세드린…….”

카렐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한때 미칠 듯이 동경하던 이의 육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현생에서는 만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사샤 세드린의 현신, 아니, 그 자체였다.

아직도 어린 티가 나는 흰 뺨과 순진한 표정과 달리 사샤의 등은 완연한 청년의 그것이었다. 카렐이 음낭이 회음에 부딪히도록 깊이 삽입할 때마다 조각같이 아름다운 등이 곧 날개라도 돋을 것처럼 파들파들 떨렸다. 또 그 아래 꽉 조여진 둔근은 어떤가.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단단했다.

사샤의 뒷모습에 완전히 홀린 카렐은 일부러 벅차게 빠른 속도로 삽입하면서 그 움직임을 남김없이 눈에 담았다. 사샤 세드린을 범한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이 그를 미칠 듯한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이번 생에 사샤 세드린의 이런 모습은 저 말고는 아무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사샤, 후우, 사샤…….”

“으응, 읏, 으…… 흣…….”

그를 빨리 발견한 것에 다시 한 번 안도하며 카렐은 조밀한 등 근육을 남김없이 핥고 또 입을 맞추었다.

오늘 카렐이 목격한 사샤의 완성된 육체는 다시금 그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후우, 흣……. 사샤, 사샤!”

“아, 카렐……. 으응, 아, 아앗!”

어느새 사샤는 카렐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카렐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안쪽 깊이 사정하면서 오래 참아 왔던 욕망을 뿌렸다.

절정의 순간 카렐은 사샤의 양팔을 등 뒤로 잡아채 바닥을 지탱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카렐의 사정으로 인해 역시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던 사샤는 양 손목이 붙잡힌 채로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희고 가는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샤는 시트도 그러쥐지 못하고 고작 뺨만 바닥에 붙인 채로 고스란히 카렐의 흥분을 받아내야 했다.

털썩, 바닥에 쓰러지듯 누운 사샤는 이내 자신의 등에 들러붙는 묵직한 체중을 느꼈다. 가슴을 압박하는 무거운 무게에 압사당하는 기분을 느낄 법도 한데 괴롭기는커녕 왜인지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렐은 사샤의 뒷덜미와 옴폭 팬 등줄기에 축축하게 고인 땀을 남김없이 핥았다. 천천히 혀를 내려 다정한 후희를 이어 가다가 엎드린 사샤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활짝 벌리고 더럽혀진 구멍도 주저 없이 핥았다. 언제나 하고 싶었던 행위였다. 지금까지는 순수한 애인이 놀랄까 봐 참아 왔건만.

바로 지금만큼은 참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카렐은 무척 만족감을 느꼈다.

“으응…… 응…….”

이미 완전히 탈진한 사샤는 카렐의 파렴치한 짓에도 힘없이 몸을 뒤틀 뿐이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카렐은 사샤가 꿈틀거릴 때마다 굼질거리며 새어 나오는 것들을 소리까지 내며 맛있게 핥았다. 다시 분홍빛이 돌도록 완전히 깨끗하게 만든 후에도 카렐은 아쉬운 듯이 얼굴을 떼지 못하고 한동안 거기에 코를 박고 있었다.

“사샤…….”

완전히 욕구를 채운 카렐은 나른하게 중얼거리며 사샤를 불렀다. 다시 위로 기어 올라오며 사샤의 흰 피부에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조금 지나쳤나요.”

그 역시 자신이 추구하는 행위가 간혹 상대를 수치스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순진한 사샤를 상대로는 친절하게 단계를 밟아 가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완벽히 제 취향으로 다듬어진 무용수의 육체를 눈앞에 두니 고삐가 풀려 버렸다. 카렐은 마음속으로 미래의 사샤에게 약간의 애도를 보냈다.

“사샤? 아니…… 로미오.”

“으음…….”

로미오라고 부른 순간, 가물가물 뜨인 물먹은 검은 눈동자가 카렐을 힘없이 돌아보았다. 섹스에 시달려 지친 사샤의 눈물점이 평소보다도 훨씬 색기 있어 보였다. 카렐은 다시 힘을 받는 무자비한 아래쪽의 욕망을 애써 모른 척하고 그 눈가에 조심스레 키스했다.

“혹시 지나쳤다면 사과의 말씀을.”

사샤가 눈을 감고 풀린 발음으로 말했다.

“……아니, 좋아.”

“마음에 드셨습니까?”

카렐은 쿡쿡 웃으며 물었다.

“그래……. 칭찬을 해 주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고고한 로미오는 축 늘어져 잠에 빠졌다. 마지막까지도 역할극에 충실한 대답에 카렐은 혼자 숨죽이고 웃어야 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카렐은 기쁘게 자신이 숭배해 마지않는 아름다운 육체를 공들여 닦아 주고는 아주 늦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사샤는 모든 걸 잊은 것처럼 또다시 카렐의 귀에 ‘일어나요’ 하고 속삭였고, 왜 카렐이 자꾸만 늦잠을 자는지,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쓸모없는 걱정을 하면서 학교에 갔다. 허리를 비롯해 상세히 설명할 수 없는 안쪽 어딘가가 얻어맞은 것처럼 둔하게 아픈 것에 어리둥절해하면서.

* * *

“사샤 세드린, 최근 얼굴이 조금 울적해 보여요. 역시 공연이 다가오니 긴장되는 거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다큐멘터리의 인터뷰 촬영이었다. 사샤는 힘없이 웃으면서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화면 속에 담긴 사샤의 눈가와 입술은 붉었고, 눈물점은 거기에 개성을 더했다. 첫 촬영보다도 음영이 확연한 얼굴은 그새 또 자란 것 같았다.

“생각보다 긴장되지는 않아요. 그보다도…….”

“그보다도?”

“제 로미오가 관객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돼서…….”

웃고 있는데도 사연이 있어 보이는 듯한 얼굴은 아마도 저 서글픈 미모 때문일 것이다. 사샤가 말끝을 흐리는 것만으로도 장내에는 기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인터뷰어는 사샤를 도닥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사샤 세드린, 당신은 정말 프로예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사샤는 느리게 고개를 딱 한 번 가로저었다. 그마저도 무척 우아해 보였다. 어느 순간 갑자기 이전에 없던 묘한 분위기가 생겼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도통 짐작하지 못했다. 성적인 경험치에 의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걸 걱정한다는 것부터 이미 학생 수준은 아닌걸요. 저 역시 관객으로서 당신 공연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제야 사샤가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 사샤가 울적해 보이는 것에 대해 이유도 없이 부채감을 느끼던 스태프들은 사샤가 웃자 그제야 겨우 안도했다.

‘오늘 인터뷰는 사샤구나.’

그리고 곁에서 제 인터뷰 차례를 기다리던 옥사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일전에는 ‘로미오’로서 인터뷰를 진행한 적도 있었다. 어찌나 우습던지…….

사샤가 배역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때때로 자신과 로미오를 동일시하곤 한다는 점은 옥사나는 물론이고 촬영 스태프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옥사나는 주변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내향적인 편인데다가 수줍음도 많고 낯도 가리는 사샤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재밌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리어 그런 사샤를 엉뚱하고 또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옥사나, 남자 친구가 저렇게 잘생겨서 걱정 안 돼요?”

불쑥 저를 향한 질문에 옥사나가 뒤돌았다.

“무슨 걱정이요?”

“다른 사람들이 눈독을 들이면 어떡하려고요? 아니면 옥사나보다 더 돋보인다거나.”

옥사나는 한심한 질문에 팔짱을 꼈다. 그녀가 차갑게 비웃는 모습에 일부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남자 친구 아니거든요. 그리고 일단 사샤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대체 눈이 얼마나 높은 거예요?”

“사샤가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애라는 건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거랑 취향은 달라요.”

옥사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게 소중한 첫 키스를 줘 버리면 어떡하느냐고 나무 밑에서 어어엉, 하고 볼썽사납게 울던 사샤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선했다. 눈높이가 같던 그때와 달리 이제 사샤는 저보다 키가 훌쩍 커 제법 남자다워졌지만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옥사나에게 사샤는 여전히 덜떨어진 남동생처럼 보였다. 아마도 평생을 그럴 것이다.

“아직도 저는 사샤가 그냥 남동생 같거든요. 어퍼스쿨 1학년 같아요. 우리가 곧 졸업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아요.”

“저렇게 키가 큰데도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체격뿐만 아니고 사샤는 발레 실력도 좋은데……. 그런 건 정말 믿음직스럽거든요.”

직후, 옥사나는 곧 자신들의 관계에 대해 좋은 비유를 찾아냈다.

“아. 우리 파 드 되는 항상 사샤가 리드해요. 사샤는 선생님들의 코칭을 제가 잘 이해하지 못할 때 누구보다 정확하게 몸으로 알려주거든요. 대신에 쟤는 사교성이 조금 떨어지니까 일상생활에서는 제가 이끌어 주는 거죠.”

“와, 정말 멋진 친구 사이네요.”

“별거 아니에요. 동료라는 건 다 그런 거예요.”

그때 저 뒤에서 스태프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받고 신이 난 사샤가 ‘헤헤’ 하고 웃는 얼굴로 화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옥사나가 얼마나 감동적인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게 분명한 얼굴이었다.

몇 걸음 걸어오다가 옥사나가 인터뷰 중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샤는 그 자리에서 멈칫한 채로 양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얼어 버렸다. 그걸 뒤늦게 발견한 옥사나가 ‘어휴’ 하면서 사샤 쪽으로 다가갔다.

이처럼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친구 사이’라고 선을 명확하게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다큐멘터리 예고 클립이 나간 뒤로 작은 아기새 같은 이 커플에 대한 웹상의 지지는 더욱더 높아졌음은 물론이다.

* * *

그 뒤에도 로미오와 노예의 비밀스러운 밤놀이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줄리엣을 향한 사랑이 변질될까 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십대의 로미오는 카렐이 베푸는 육체적인 쾌락에 쉽게 빠져들었다. 카렐 역시 사샤에게 쾌락의 신세계를 알려주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때. 내가 지금부터 당신을 강간할 거야.”

카렐은 내용과 어울리지 않게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고작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저열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자신에게 연기자의 자질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하는 요즘이었다.

“흐윽, 싫어……. 싫어.”

사샤는 도리질을 쳤다. 카렐은 일부러 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잡아 사샤가 뒤로 목을 젖히게 만들었다.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성대가 막힌 사샤는 그저 버둥대며 신음만 흘렸다.

“베로나의 언약자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말할까?”

“안 돼. 흣, 말하지 마. 비밀을 지켜줘요. 아앗, 앗, 으응…….”

그렇게 로미오와 일등 노예의 역할극은 날이 갈수록 무르익었다. 카렐은 때로는 감옥에 갇힌 중범죄자 흉내를 내며 사샤를 범했고, 때로는 빈민가의 구두닦이 흉내를 냈다. 그리고 사샤는 언제나 변함없이 비극 속의 로미오였다.

침실은 물론이고 욕실에서, 또 서재에서, 때로는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유리창에 기대어 선 채로 두 사람은 나란히 설 공간만 있으면 모든 곳에서 엎치락뒤치락 몸을 얽었다.

카렐은 키가 낭창하게 자란 사샤의 몸을 어렵지 않게 가뿐히 들어 올렸다. 그러면 사샤는 지탱할 곳 하나 없이 제 체중이 전부 실린 자세로 삽입 당해야 했고, 그렇게 허공에서 박힐 때마다 특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카렐의 기둥 같은 허리에 양다리를 얽은 채로 안아 올려져 당할 때는 지나치게 느낀 나머지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기분이었다. 사샤는 교성을 지르며 헤어 나오지 못했고, 카렐의 등과 뒷덜미에는 사샤가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늘어났다.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아 달리 그 영광의 흉터를 숨길 필요도 없는 카렐은 상반신을 벗은 채로 정원을 가꾸곤 했다. 사샤 역시 제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어느 순간에는 알아채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새 섹스에도 요령이 붙어 예전처럼 행위 자체가 사샤에게 큰 후유증을 남기는 일은 없어졌다는 점이다. 카렐이 정했던 엄격한 규칙은 역할극을 진행하는 사이에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섹스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사샤에게 발레 근육에 익숙해지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몸을 쓰는 법을 몰랐을 때는 온몸에 힘을 주느라 전신 근육통에 시달리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도리어 격렬한 섹스 후의 둔한 통증을 자극점으로 이용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사샤의 지나친 예술혼 때문에 제 연인을 24시간 중 적지 않은 시간 배역에 상납해야 했던 카렐.

그리고 언젠가는 제 연인이 이성을 잃고 저에게 덤벼 주기를 원했던 사샤.

어쨌거나, 둘 모두에게 해피엔딩인 일이었다.

* * *

뉴욕 발레단 부속 발레 스쿨 졸업 공연의 첫날, 오페라하우스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여름의 분수대는 태양을 향해 솟구치며 아름다운 물줄기를 뿌려댔고 희미하게 생긴 무지개 뒤로 오늘 공연을 위해 걸린 거대한 크기의 현수막이 보였다. 프로 발레단의 시즌 공연에 뒤지지 않는 오프닝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흑백 포스터에는 사샤 세드린의 이름이 주역으로 당당하게 새겨져 있다.

“보통 학생 공연이 이 정도로 주목을 받나요?”

카렐과 함께 링컨 센터를 찾은 게오르크는 차를 느리게 굴리며 바깥을 보며 말했다. 그는 막 발레복을 흉내 낸 원피스를 입은 어린 두 딸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향하는 할리우드 스타를 목격한 참이었다. 그녀 외에도 적지 않은 셀럽들이 공연을 관람하러 올 예정인지 입구에는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곁에서 오늘을 위해 오랜만에 슈트를 빼입은 카렐이 빳빳한 프로그램을 펼치며 대답했다.

“발레단에 링컨 센터에…… 뉴욕 시까지 달라붙었던데. 간만에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이슈라고 판단한 모양이야.”

카렐은 현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답했다. 짧은 설명에도 게오르크는 알겠다는 듯이 ‘아’ 하고 답했다.

“그러니 발레단도 그렇게 기록 영상을 찍는 데 혈안이 됐었군요.”

“음, 미래에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까.”

착실히 발레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세기의 발레 스타가 탄생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가 전 세계 유수의 발레단을 제치고 뉴욕에 남는다.

이 두 가지 이유만으로 맨해튼 전체가 나서서 설레발을 치고 있는 셈이었다. 물론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름이 주는 드라마틱함 때문이다. 오래전, 미국에 망명한 직후 뉴욕 발레단의 설립 멤버였으며 이곳에서 수많은 작품의 안무를 창작한 레전드 ‘사샤 세드린’과 동명이인의 후계자가 백 년 만에 다시 나타난 것처럼 보였으니까.

확실히 로잔 이후 사샤 세드린 단 한 명이 불러일으킨 화제성은 대단했다. 그의 존재감은 발레에 관심이 없는 대중까지 한 번쯤 돌아보게 만들 정도였으니. 사샤를 잘 모르는 이들은 그가 모델이나 신인 배우, 혹은 십대에게 광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팝스타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사샤는 외모만으로도 이목을 끌었다.

카렐은 현재 사샤의 공식적인 대리인을 자처하고 있는 레빈을 통해서 쏟아지는 무수한 접촉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제품 모델이나 패션지의 화보부터 시작해서 글로벌 모델 에이전시의 계약 제안, 향후 제작될 할리우드 영화의 오디션 건까지……. 사샤가 제안받는 일의 폭은 지나치게 넓고 다양했다. 사샤 세드린을 한 번 본 이들은 금세 그의 가치를 알아챘던 것이다.

카렐은 다시금 자신이 사샤를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를 곱씹었다. 그가 러시아의 시골 출신인 것에 감사했고 사이즈가 맞지 않는 비루하고 품이 큰 정장에 그 날씬한 몸을 숨기고 다니던 것에 감사했다.

“유튜브에 다큐멘터리 홍보 영상이 잔뜩 올라가 있던데. 나중에 사샤가 진짜 스타가 되고 나서 다 같이 다시 보면 재밌겠네요.”

게오르크의 말에 카렐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더 일찍부터 찍어 놓을 걸 그랬지.”

소년이 1년간 겪는 변화란 엄청나다. 카렐은 고작 160㎝밖에 되지 않았던 열다섯 살, 어린 사샤 세드린과의 첫 만남을 상상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우린 조용히 들어갈까.”

“그럴까요.”

“괜히 소란스럽게 만들 필요 없지.”

프로그램을 덮은 카렐이 말했다. 게오르크는 짧게 ‘알겠습니다’ 하고 답하며 북적이는 곳에서 차를 돌렸다.

* * *

카렐과 게오르크는 공연이 시작되기 직전, 모든 샹들리에가 내려온 이후에 객석으로 향했다. 카렐이 제자리를 찾아 앉는 것과 장내가 암전이 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최대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인 것이었지만 좌석이 정중앙인데다가 키가 190이 넘는 두 장신의 남자가 함께 들어서니 일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 그 찰나에 카렐의 등장을 눈치챈 일부 기자들은, 안식년을 선언한 이후 소리 없이 비공식 스케줄에 모습을 드러낸 카렐을 향해 놀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짙은 암전, 그리고 아름다운 현악의 선율과 함께 공연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카렐은 소대 뒤 어딘가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며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사샤의 옆얼굴을 상상했다. 그러나 빈약한 상상력으로 구현할 수 있는 것은 푸른 조명을 등 뒤에서 받은 사샤의 뒷모습뿐이었다.

사샤의 곧게 뻗은 등, 흰 뺨, 그리고 허공으로 들린 긴 속눈썹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보여줘요, 당신이 준비한 것들을.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빛나는지 알려줘요.’

그토록 바라보던 무대를 눈앞에 두고 사샤는 달려 나가기 위한 준비 자세를 취한다. 열여섯 살의 로미오가 되어 양팔을 가볍게 옆으로 펼치고는 등과 어깨를 쭉 뻗는다. 카렐은 사샤의 전신 근육이 단단히 긴장하는 것과 아름다운 등 근육이 펼쳐지기 직전의 날개처럼 조여지는 모습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일순 눈앞의 조명이 밝아지며 사샤가 무대 바깥으로 달려 나왔다. 그는 잠시간 정말로 조명이 강해진 것인지, 아니면 사샤의 존재가 그토록 강렬하기 때문인지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준비된 무대 위에서 사샤는 조금도 긴장한 기색이 없었다. 탄력으로 가득한 활기찬 육체가 무대 위에서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카렐의 등에 무의식중에 소름이 내달렸다. 자신이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완성된 사샤 세드린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레전드의 환생을 제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무척 감격스러워서 카렐은 메마른 목을 덧없이 삼켰다.

‘나의 로미오.’

카렐이 한밤중에 만났던 사랑스러운 로미오가 거기에 있었다. 조금은 어리숙하고 충동적인, 그러나 진심으로 사랑에 눈물짓고 운명 앞에서 괴로워하던 열여섯 살 소년.

그건 사샤 세드린 그 자체이기도 했고, 완전히 로미오와 일체가 된 전혀 다른 사람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카렐은 극에 완전히 집중하는 데는 실패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샤의 모습만 집착적으로 눈에 담는 그에게 로미오와 줄리엣에 관련된 서사는 전혀 입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로미오가 된 사샤 세드린의 다양한 모습을 눈에 담는 데만 온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사샤가 등장하지 않을 때는 소대에서 숨을 몰아쉬고 슈즈에 송진을 바르는 저의 연인 사샤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90분의 공연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귀를 먹먹하게 울리는 박수 소리에 카렐은 비로소 눈앞 무대 위에 빨간 비로드 장막이 드리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브라보!”

카렐의 곁에 앉아 있던 나이 지긋한 노신사가 별안간 일어나 손뼉을 쳤다. 오랜 클래식 팬이 고대해 마지않던 새로운 천재의 등장, 스타 탄생을 알리는 신호였다. 사방에서 휘파람과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주역의 인사를 기다리는 관객의 부름이 귀가 먹먹하도록 울려댔다.

잠시 후 장막을 젖히고 안에서 옥사나, 그리고 사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더는 커질 수 없다고 생각한 박수 소리의 데시벨이 천장을 뚫을 듯이 더욱 높아졌다. 그 환호 속에서 사샤는 우아한 레베랑스를 관객에게 돌려주었다. 카렐은 미소 짓고 있는 사샤의 눈이 비극의 여운으로 아름답게 반짝이는 것을 말없이 응시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카렐은 문득 앉아서 몸을 등받이에 기울인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적지 않은 수의 관객들이 기립하고 있었다. 사샤와 옥사나가 사라지고도 박수는 전혀 잦아들지 않았고, 그들은 다시 인사를 하기 위해 장막을 걷고 나와야 했다.

이제 무대 위의 비극을 완전히 걷어낸 사샤의 눈은 환희로 반짝이고 있었다.

사샤의 눈에 어린 행복을 보면서, 또 관객들의 벅찬 호응을 보면서 카렐은 지난날 제 판단이 옳았다고 확신했다. 무대 위 사샤의 모습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조금이라도 우려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저만 볼 수 있는 새장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풀어 주기를 택했다.

그리고 사샤 세드린의 가치를 다른 이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은, 침대 위에서의 사샤를 독점하던 것만큼이나 큰 기쁨이었다.

아마도 백 년 전의 그 역시 그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저 자신은 역사 뒤로 숨은 채 시대의 아이콘을 세상과 공유하면서도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금 일어나셔야 합니다. 관객 퇴장을 기다리다가는 기자들에게 붙잡히실 겁니다.”

게오르크가 곁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지.”

카렐은 수긍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객석 사이 복도를 빠져나가는 카렐을 보고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카렐 클레멘츠! 여기는 후원자로서 오신 겁니까?”

“실례하겠습니다.”

“클레멘츠 씨!”

기자가 분명한 이들의 외침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발목을 잡히나 했지만 관객들은 다시 장막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주역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카렐은 적당한 예의만 챙기고는 빠르게 객석을 빠져나갔다.

아직 비어 있는 로비로 나선 직후, 그들은 출연자 대기실로 향했다. 게오르크를 따라 뚜벅뚜벅 걷고 있는 카렐의 눈앞에는 여전히 사샤의 모습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한낮의 로비가 적응되지 않을 만큼.

무대 위의 사샤 세드린은 격정적이고 순수하고, 애절하고, 그리고 또…….

“자랐더군요.”

묵직한 출연자 전용 출입구를 밀어 열고 들어서던 게오르크가 말했다.

“누가?”

“사샤 세드린 말입니다. 천지 분간 못 하는 애송이였는데요. 언제 저런 성숙미가 생겼을까.”

그 말에 카렐은 조용히 웃었다.

“분장실에 가면 여전히 그 애송이가 있을걸.”

* * *

공연 첫날의 주역에게는 손님이 많았다. 배역을 받지 못한 발레 스쿨의 학생들, 진로를 프로 무용수가 아닌 다른 쪽으로 튼 아이들이 가장 먼저 우르르 몰려왔다. 내내 백스테이지에서 모니터를 해 주던 바딤과 올가를 비롯한 발레 마스터들, 학교의 스태프들도 꽃다발을 가지고 분장실을 찾았다.

사샤의 초대를 받고 온 대학생 레빈과 그녀의 룸메이트들, 그리고 그의 친구 율리안도 분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특히 율리안은 이 기념비적인 날을 꼭 기록해야겠다며 오페라하우스의 전경과 건물 밖, 로비에 장식된 사샤의 모습을 전부 빠짐없이 찍어서 가지고 왔다.

훌륭히 무대를 해낸 사샤를 보고 왠지 울컥하는 감상을 참을 수 없었다던 사샤의 형 레빈 세드린은, 관객들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객석에 앉아 있다가 오느라고 조금 늦었다. 그는 붉은 눈시울을 한 채로 사샤를 찾아오는 이들의 손을 잡고 한 명, 한 명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사샤는 정말 괜찮았어요. 그 정도면 과연, 날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벌겠더군요.”

비록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게오르크의 칭찬에는 경계심을 세우며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말이다.

모든 이가 물러난 후 사샤의 분장실은 꽃바구니와 카드로 가득했다. 이제 무대용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해야 할 차례인데 사샤는 씻는 것도 잊고 자신이 받은 축하 카드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이제야 제 차례가 되었다고 생각한 카렐은 조용히 사샤를 향해 걸어갔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카렐은 흠칫 놀랐다. 의상을 벗어 던진 사샤는 아름다운 맨몸의 상반신을 드러낸 채였기 때문이다. 그걸 본 카렐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무대를 마치고 더웠던 모양이지.’

무대 위에서 벗는 것에는 관여하지 않겠지만, 분장실에서 저런 사적인 모습을 아무렇게나 보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서서 카드를 하나하나 꼼꼼히 뜯어보던 사샤의 뒤에서 나지막하고 정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미오?”

사샤는 뒤를 돌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받은 그 어떤 꽃다발보다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다발을 손에 든 카렐이 거기에 서 있었다.

“카렐……!”

그를 발견한 사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카렐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사샤를 익숙하게 안아 들었다.

분장실에 오기 직전까지, 혹시 사샤가 공연의 여운에 젖어 아직도 비현실 속에 있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그러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 사샤는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마자 로미오를 벗어던졌다.

있는 힘껏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포옹하는 사샤 덕에 두 사람의 품 안에서 꽃들이 이지러졌다. 언제나처럼 두 사람은 풀 향기가 가득한 키스를 먼저 나누었다.

다정한 소리를 남기며 떨어진 입술도 아쉬워 두 사람은 몇 번이나 키스를 나누었다. 사이사이에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샤는 빛나는 눈으로 카렐을 응시했다.

“멋졌어요. 사샤.”

“진짜인가요.”

사샤가 웃으며 물었다. 카렐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공연을 보셨어요?”

“당연하죠.”

“본다는 말 없었잖아요. 그래서 나는 카렐은 마지막 날 오는 줄 알고…….”

“그래서, 실망했어요?”

“그럴 리가요.”

사샤가 활짝 웃었다. 물기 어린 눈은 공연의 여운이 불어넣은 생기로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카렐은 다시 한 번 사샤의 눈가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무대 위의 사샤 세드린이 지금은 제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성공적인 공연 축하해요.”

“고마워요.”

“이다음은 발레단의 프로 데뷔 무대가 되겠군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샤가 수줍게 답했다. 무대 위에서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남자치고는 지나치게 겸손한 태도였다. 역시 사샤는 아직 예술 감독에게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 알려줄까.

하지만 조금 고민하던 카렐은 말을 삼켰다. 머지않은 날 사샤가 직접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할 수 있도록. 사샤 세드린은 이 공연 직후, 최초로 오디션 없이 뉴욕 발레단에 발탁되는 첫 번째 무용수가 되지만 아직 사샤는 모르는 일이었다.

“카렐…….”

사샤가 괜히 카렐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별것 아닌 그 손길도 사랑스러워서 카렐은 사샤의 손을 쥐고 눈을 응시하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실은 조금 걱정하면서 왔습니다.”

“어떤 걸요?”

“나를 아직도 일등 노예라고 부르면 어쩌나, 하면서.”

“아…….”

사샤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카렐은 흥미로운 눈으로 사샤의 표정을 탐색했다.

그 역시 궁금했던 것이다. 어디까지가 사샤의 메소드 연기였고, 어디부터 자신을 놀려 먹던 것인지.

“내 이름을 아예 영영 잊는 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있었죠.”

“…….”

“예술가의 연인으로 산다는 건 이런 고충도 있구나, 씁쓸했던 적도 있고…….”

“…….”

“솔직히 말해 봐요. 재밌었나요?”

사샤는 붉어진 뺨과 귀를 하고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할극을 통해 카렐이 취한 이득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교활하게 본심을 숨긴 말에 사샤는 또 속아 넘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카렐에게 약간의 죄책감까지 느꼈다.

“언제부터?”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말 마지막에만 조금 그랬어요. 공연 시작하기 얼마 전에요…….”

“어떻게?”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가끔 어떤 사람들은 내가 미쳐서 춤을 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성을 완전히 놓으면 몸을 컨트롤할 수 없어요.”

“…….”

“그래서 저는 아마 무의식중에 그 중간을 찾았던 것 같아요. 로미오가 되기를 원했지만 나를 놓고 싶지도 않았어요.”

카렐은 말없이 사샤의 눈가와 뺨 사이 어딘가에 꾹, 입을 맞추었다. 조심스럽게 제 춤에 대한 지론을 말하는 사샤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사샤 세드린을 완전히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네. 이제 완전히 저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사샤가 카렐의 뺨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예전에 약속했잖아요.”

“언제? 아…….”

작은 사샤를 떠올린 카렐은 나지막이 수긍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은 채로 그 역시 사샤의 보드라운 뺨을 만지며 말했다.

“사라지지 말아요.”

“네.”

“나의 사샤 ‘로미오’ 세드린.”

‘그게 뭐예요.’ 쿡쿡 웃으며 사샤가 카렐의 목덜미를 양팔로 끌어당겼다. 카렐은 제 목덜미에 뺨을 비비적거리는 사샤를 다시 한 번 단단히 안으며 중얼거렸다.

“잘 어울리니 아예 미들 네임으로 삼아요.”

그리고 로미오와 로미오는 오페라하우스의 가장 깊은 분장실에서 아무도 몰래 다정한 키스를 나누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