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새장 밖의 질투
“카렐, 일어나요…….”
사샤가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여 왔다. 목소리의 감각만으로 느끼건대, 사샤는 카렐의 뺨에 거의 키스할 지경으로 가까이 다가와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달콤한 모닝콜이었다.
“일어나요…….”
눈 밑과 광대 사이, 어디쯤인가 파르르 떨리는 사샤의 속눈썹이 닿았다. 의지를 배반하고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도리어 질끈 감으면서 카렐은 잠에 푹 빠진 척했다.
뺨을 간질이는 사샤의 솜털과 새근새근 가만히 쉬는 숨결이 느껴졌다. 변성기를 완전히 지나 목소리만큼은 완연한 청년이 된 사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게다가 아주 낮아질 때 조금 갈라지는 허스키한 목소리는 신음을 연상하게 했다. 이미 아까부터 일어나 있었으면서도 사샤의 그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카렐은 일부러 눈을 감고 더 자는 척했다.
“어서요.”
“…….”
“저는 학교에 갈 거예요…….”
그러나 직후에 섹시한 망상을 깨 버리는 사샤의 발언에 카렐은 눈을 번쩍 떴다.
학교를 언급하다니.
눈을 뜨자 곧바로 시야 안에 사샤의 얼굴이 들어왔다. 너무 가까워서 초점이 잘 맞지 않는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민 사샤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었다.
“와아……, 드디어 일어났다.”
사샤의 얼굴이 미소로 물드는 것을 보며 카렐이 부드럽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죠?”
“이제 출발하면 딱 맞아요. 카렐이 일어나는 거 보고 가고 싶었어요.”
카렐은 게으르게 몸을 일으킨 후 사샤의 허리를 한쪽 팔로 끌어와 꽉 안고 눈가에 키스를 해 주었다. 사샤는 만족스러워하며 답례로 카렐의 양 뺨에 차례대로 쪽, 쪽 키스를 하고는 침대에서 팔짝 뛰어 내려갔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요. 잘 다녀와요.”
“카렐은 계속 집에 있을 거죠?”
“그럼요.”
카렐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도 하지 않는데 달리 갈 곳이 어디 있겠어요.”
“네, 그럼 집 잘 지키고 계세요.”
사샤는 손을 흔들며 너그럽게 인사를 하고는 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사샤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렐 역시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샤에게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랜만에 외부 일정이 있었다.
그새 더 밝은 빛으로 바래진 머리를 왁스를 발라 빗어 헤어스타일을 완성하고는 빈틈없이 셔츠의 단추를 채웠다. 외출 준비를 완벽히 마친 후, 그 자리에는 오랜만에 사샤와 처음 만났을 때의 복장을 한 카렐이 서 있었다.
사샤를 속이고 나간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곧 만나게 될 테니까.’
오랜만에 기사가 운전한 차에 오른 카렐은 그렇게 사샤의 학교로 향했다.
* * *
“로미오와 줄리엣은 보통 연기가 원숙한 이들이 해야 완성도가 올라가기도 하고, 오랜 발레 팬들도 그걸 인지하고 있어서 주역들의 나이를 따지지 않는 편이죠. 50세가 넘는 줄리엣의 티켓도 불티나게 팔리는 세상인데요.”
카렐의 맞은편에 앉은 것은 극장의 예술 감독이었다. 그가 집을 나와 걸음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사샤의 학교가 있는 링컨 센터였던 것이다.
‘잠시 후에 연습실에 몰래 가서 인사를 건네면 사샤가 무척 놀라겠지.’
카렐은 사샤를 놀래 줄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진중한 얼굴을 유지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들이지만 사샤와 옥사나는 정말 잘하고 있어요. 솔직히 기대 이상이랍니다.”
“실력이 출중하다는 이야기는 워낙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그 남학생, 사샤 세드린은 작년 로잔에서 이름이 가장 마지막에 불리기도 했고…….”
예술 감독의 얼굴이 감탄으로 물들었다. 발레 스쿨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장학재단의 이사장인 남자가, 후원하는 단체를 허투루 여기지 않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는 것에 감복한 눈치였다. 그녀가 기쁘게 답했다.
“역시 눈여겨보고 계셨군요. 네, 맞아요. 학교의 명예도 함께 올라갔죠.”
카렐은 발레에 가벼운 관심만 가진 대중인 척하면서 사샤를 추켜세웠다.
“그나저나 유명한 발레 스쿨에서 장학생으로 데려가려고 했을 텐데 사샤 세드린은 여전히 여기에 있군요. 뉴욕 발레단을 택한다던가요?”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아직 어떤 발레단의 오디션도 보지 않아서 뉴욕 발레단에 와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예술 감독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카렐은 본능적으로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오늘 예술 감독이 미팅을 요청한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올해 학생 공연과 내년 봄 시즌 발레단의 정기 공연 레퍼토리가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동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학생 공연의 주역들을 내년 봄 시즌에 투입할까 생각하고 있어요.”
“……정식 데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공연 횟수는 조금 적겠죠. 배치도 시즌 시작 전으로 조율할 거고요. 그래도 티켓 파워는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카렐은 의외의 제안에 곧 생각에 잠겼다. 예술 감독은 조금 긴장하면서도 기대하는 얼굴로 카렐을 응시했다. 그녀는 카렐의 침묵이 공연 퀄리티에 대한 우려인 줄 알고 카렐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직 덜 다듬어진 학생들을 본 공연에 올린다는 것이 미덥지 않게 느껴지실 수도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충분히 검토를 마쳤답니다.”
“그래도 단번에 프로 공연이라……. 학생들이 입단하면 보통 군무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그 둘은 아주 빠르게 프린시펄까지 올라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카렐은 의자 등받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아니랍니다. 저희는 그저 절대적으로, 실력으로 판단했을 뿐이죠.”
예술 감독의 흔들림 없는 눈을 보면서 카렐은 내심 놀랐다. 수많은 무용수를 받고, 기르고, 또 떠나보낸 그녀가 이런 눈을 하다니, 라고 생각하며.
사샤는 이미 자신이 발레단에 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수준을 지나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저희들을 택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 전도유망한 신인 댄서로 성장한 것이다.
프로 무용수가 된 사샤가 제 실력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엄격한 발레단의 규율과 피라미드식 경쟁을 뚫고 빠르게 탑의 자리에 오르리라는 것은 카렐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였다. 그러나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단번에 프린시펄로 앉히는 건 아니겠죠.”
카렐은 괜스레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 역시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닙니다. 입단 후 수개월마다 승급에 승급을 반복해서 스무 살에 프린시펄이 된 세기의 천재들도 있는데요.”
“…….”
맙소사. 이들은 사샤를 당장 그렇게 만들 생각이 있는 것이다.
예술 감독이 내린 평가에 카렐은 내심 놀랐다. 하긴, 눈이 있다면 모두가 알아볼 수 있었다. 카렐은 ‘사샤 세드린이 이렇게 대단하다’고 팔불출처럼 어딘가에 떠들고 싶은 욕구를 힘겹게 억눌렀다.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조금 생각해 보지요.”
“정말 기억에 남을 만한 아름다운 로미오와 줄리엣 커플이 될 거예요. 꼭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사샤와 옥사나 둘 다 십대이니, 어찌 보면 원작의 그들과 가장 가까운 나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잘만 연기해 낸다면 예술 감독의 말대로 아주 인상적인 커플이 될 것이 분명했다.
카렐이 일어나자 예술 감독이 배웅을 하기 위해 함께 일어났다. 복도로 나간 카렐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복도 끝을 가리켰다.
“학생들의 연습을 보려면 저쪽으로 가면 됩니까?”
예술 감독이 빙긋 웃었다.
“둘러보려 하시는군요. 저희 학생들에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카렐이 막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그런데 연습실은 반대쪽이에요. 저 복도 끝으로 가면 계단과 이어지죠. 스튜디오가 죽 이어져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참고하겠습니다.”
“지금 막 로미오와 줄리엣의 리허설을 하고 있을 텐데, 안내해 드릴까요?”
카렐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조용히 보도록 하죠.”
그러고는 예술 감독의 방을 떠났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카렐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사샤는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 막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내년 시즌 공연의 어엿한 주역이라. 있는 길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길을 뚫어 질러가는 수준이었다. 돌이켜 보면 전례는 있었다. 현재 스타 반열에 오른 무용수들에게도 가끔은 특혜가 주어졌다. 다만 그 케이스가 손에 꼽았고, 사샤가 그 반열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레전드도 고작 스물두 살에 프린시펄이 되었다고 했지.’
다가올 미래를 사샤는, 또 대중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카렐은 기대로 범벅된 마음을 안고 걸음을 옮겼다.
* * *
지은 지 오래된 건물에 위치한 고전적인 형태의 발레 연습실에는 높은 천장을 따라 세로로 긴 창문들이 달려 있었다. 오후의 일광이 축복처럼 쏟아지는 연습실 안은 빛의 마법으로 꼭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보였다. 새로 지은 신관 건물들과 달리 바닥이 탄성이 있는 나무로 짜인 것도 그 경치에 한몫했다.
카렐은 복도를 따라 걸음을 옮기다가 작게 뚫린 창을 통해 자신이 찾던 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브라보, 훌륭해!”
문이 닫혔는데도 바딤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카렐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빙긋 웃었다.
작은 창을 통해 동작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샤의 얼굴이 보였다. 사샤는 길게 쓰러지듯이 누웠던 가녀린 소녀의 몸을 단단히 받쳐 들고 다시 설 수 있도록 끌어당겨 주고 있었다.
사샤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은 파 드 되 파트너인 동갑내기 여자아이, 옥사나 스미노바였다. 사샤도 무척 가는 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요정 같은 여자 발레 댄서 곁에 서 있으니 제법 어엿한 청년의 태가 났다.
두 사람을 향해 바딤이 열정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샤, 그쪽에서 턴을 돌고 이 안으로 들어올 때 특히 글리사드 스텝에서 바닥을 더 눌러야 해.”
“이렇게요?”
“그래, 그렇게 말이야. 그 이유는…….”
“여운을 남기는 건가요? 시선을 이렇게 주면 더 좋아요?”
사샤는 턴 아웃 된 뒷발을 바닥에 지그시 플리에로 눌렀다. 그러면서 스텝뿐만 아니라 목과 시선이 먼 곳을 보게 했다. 바딤이 수긍의 뜻으로 짝! 한 번 손뼉을 쳤다.
“그래! 그러면 좋지. 결국에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느껴야 하니까 말이다. 조금 더 과장되게 표현해 줄 필요가 있어. 그리고 옥사나, 뒤로 누울 때 캉브레를 더 길게 뒤로 뻗어라. 두려워하지 말고 완전히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처럼 몸을 툭, 떨어뜨려.”
“지금보다 더요?”
“그래!”
바딤의 말에 옥사나는 대답 대신 사샤를 바라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소녀를 향해 사샤가 무어라고 중얼거렸다. 분홍빛 입술이 조그맣게 움직인다. 음성이 잘 들리지 않는 러시아어를 순독하면서, 카렐은 방금 사샤가 중얼거린 말을 곱씹었다.
‘내가 단단히 잡아 줄게. 날 믿어.’
제법 남자다운 말을 하는데.
카렐은 턱을 매만지며 흥미롭게 사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솔로로서 눈에 띄는 디바 타입의 무용수들도 많지만 이런 극에서는 파트너십이 중요하다. ‘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료’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완벽주의자들의 집단에서 협동을 강조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사샤 세드린의 파트너십이라…….
‘협동과 배려’는 자신이 아는 천방지축의 소년과 연관 짓기 어려운 단어였지만 사샤 세드린은 카렐이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프로인 모양이었다. 사샤는 두 사람이 추는 춤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 모습이 퍽 대견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에 반주에 따라 다시 두 사람의 춤이 시작되었다. 사샤의 검은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찰랑이며 격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토슈즈를 신은 소녀는 사샤의 품 안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공중으로 사뿐 날아올랐고, 사샤는 그 가는 허리를 붙잡고 가볍게 들어 올리며 두 다리를 단단히 땅에 받쳤다. 높이 날다가 빙그르르 돌며 풀썩, 떨어지는 소녀를 품으로 받아 허리를 팔로 끌어안는다.
음악이 시작되고 단 10여 초 만에 사샤는 금세 몰입하고 있었다. 카렐은 사샤가 바딤의 지시를 완벽히 흡수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재밌는 것은, 여기에서마저 재능의 차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분명 옥사나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수십 명 학생을 줄 세워 비교한다면 그녀 역시 눈에 띄게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딤의 지시를 의식하며 뒤로 한껏 목을 젖히는 옥사나에게서는 ‘지시를 수행한다’는 느낌이 묻어 나왔다. 일단 가르친 것을 단번에 몸으로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학생도 적지 않기에 바딤은 ‘브라보!’라고 외치며 크게 칭찬했다.
그러나 이어진 사샤의 움직임은―카렐이 느끼기에는―다른 차원에 가 있는 것 같았다. 사샤는 바딤이 말한 ‘여운’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살리기 위해 스텝의 무게 중심을 배분하며 시선까지 한 방향을 보게 만들었다. 덩달아 애절한 표정 연기를 잊지 않았다.
사샤의 작은 디테일이 주는 영향은 무척 컸다. 살짝 느리게 박자를 밀며 이동한 사샤 덕분에 옥사나에게도 리듬이 생겼고, 두 번째 반복한 동작은 아까보다 더 큰 감정의 전이를 불러일으켰다.
카렐은 그 순간 발레가 온몸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딤 역시 비슷한 감상인지 음악을 멈추지 않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로 두 사람의 춤을 사샤가 이끌어 나가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카렐은 금세 사샤의 춤, 그리고 연기에 매료되었다. 사샤는 춤을 추는 것뿐만 아니라 전달하는 방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었다. 멀리 유리문으로 큰 기대 없이 지켜보던 카렐마저 일순 몰입시키는 전달력이 대단했다.
결국 발레도 예술이다. 준비된 무대 위에서 갈고닦은 테크닉을 자랑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건 스포츠와 다름없을 것이다. 고작 리허설일 뿐인데도 사샤는 지금 서 있는 곳이 연습실의 나무 바닥이 아닌, 화폭 속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감상자를 다른 세계로 초대하는 감각이다.
평생 예술의 창작자가 아닌 탐미자로서 머물렀던 카렐은 순간 사샤에게 어떤 벽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꼈다. 홀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까지 단번에 빨아들이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건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타고나는 것일 테다.
동시에 그는 사샤를 보면서 무심코 ‘카리스마’라는 뜻의 어원에 대해 떠올렸다. 신의 은총, 신의 선물…….
빛살 속에서 땀을 흘리며 춤을 추는 사샤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의 사랑을 듬뿍 받은 것처럼 보였다.
음악의 한 페이즈가 잦아들었다. 카렐은 사샤와 옥사나가 준비된 한 신을 모두 끝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옥사나를 조심스레 포옹하며 마지막 포즈를 취한 사샤의 눈은 사리문 입술과는 달리 감정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그 직후, 잦아드는 음악과 함께 감정을 삼키고 품 안의 소녀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항상 아기 같다고만 생각했는데…….’
‘발레를 하는 모습을 보니 사샤 세드린이 달리 보인다’던 게오르크의 감상을, 카렐은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렇게 카렐이 땀이 맺힌 사샤의 흰 피부에 홀려 있을 때였다. 피아니스트가 누른 마지막 음과 함께 사샤가 옥사나에게 조용히 키스했다.
그 순간 팔짱을 끼고 있던 카렐의 손에 저도 모르게 움칠 힘이 들어갔다.
‘……키스를 했다?’
카렐은 연습실 안을 휘 둘러보았다. 가볍게 입술을 붙인 채로 눈을 다소곳이 감고 있는 두 소년, 소녀를 지긋이 바라보던 바딤은 한참 후에야 ‘좋아!’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피아니스트도 가볍게 미소 지으며 박수를 보냈다. 사샤와 옥사나는 서로 잘했다고 격려하며 허리와 등을 다정히 붙잡고 일어났다. 눈을 마주 보며 저들만 들리는 농담을 나눈다.
리허설이 완전히 끝났는데도 엉겨 붙은 두 사람의 포즈와 정말로 입술이 맞닿은 키스에 놀란 것은 자신뿐인 듯했다.
‘진짜로 입술이 닿을 것까지는 없지 않나.’
카렐은 은은한 충격에 휩싸여 한동안 거기에 서 있었다. 비록 카렐 스스로는 자신이 충격을 받았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는 다른 파 드 되의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연습실로 온 이유는 깜짝 방문으로 사샤를 놀래주고 그 얼굴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었건만……. 그 소기의 목적마저 잊어버린 카렐은 왠지 헛헛한 가슴을 끌어안고 멀거니 안을 바라보았다.
보다 보니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키스 따위는 아주 예삿일이었다. 그 정도로 충격을 받을 것이 아니었다.
사샤는 소녀의 몸을 허공으로 던졌다가 받으며 체중을 온몸으로 받고, 턴을 도는 소녀의 밸런스를 돕기 위해 그 허리를 마구 만졌으며, 뺨과 눈가에 수없이 키스를 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인 만큼 애정 신이 많았다.
‘사샤? 당신 지금 타인에게 키스를 하고 있어. 알고 있는 겁니까?’
카렐은 유리문 너머 들릴 리 없는 사샤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마치 텔레파시가 통하기라도 바라는 양.
게다가 가장 비극적인 장면―아마도 독약을 먹은 줄리엣을 발견한 부분―에서 사샤는 실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소녀의 몸을 애타게 더듬고 그 위에 드러눕기까지 했다.
발레에 있어서는 프로라는 것을 알지만 저렇게 연기할 필요까지야.
“…….”
카렐은 저도 모르게 다문 턱에 힘을 주었다. 작게 으득, 하는 소리가 났지만 저 자신은 깨닫지도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기 같은 사샤가 선보이던 마법 같은 예술의 경지에서 그저 감탄만 하던 카렐의 눈에는 이제 그 모든 동작이 거슬려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 감독이 ‘테크닉만큼이나 연기력이 필요해서 원숙한 무용수들이 주로 연기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제 와서는 조금 다른 의미로 와 닿았다.
원래 학생 수준에서 이런 애정 연기를 한다면 더 풋풋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학생이니만큼 부족한 해석을 정확한 테크닉으로 메꾸려 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사샤가 인스타그램에서 스스로 증언한 것처럼 사샤는 이미 사랑을 알고 있었고, 또 무르익은 애정을 나누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상대가 또래의 여자아이를 향해서라는 것이 카렐에게는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학생들이 연기를 해도 좋은 수위인지 모르겠군…….’
카렐은 결국 연습실 안에 들어가는 대신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나기를 택했다. 왜인지 뱃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라 사샤와 반갑게 인사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도를 빠져나오는 그의 미간에는 세로로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다. 예술의 가치보다 육체적 접촉을 신경 쓰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속이 뒤채는 것은 오늘 자신이 목격한 리허설처럼 수많은 시간을 저런 식으로 다른 무용수들과 몸을 맞부딪쳤을 가능성이다. 더해서 미래에도.
아마도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 테지만 그 순간 카렐 클레멘츠의 가슴 밑바닥에는 자각 못 한 질투심이 끓어 대고 있었다. 자신이 그 ‘어린 학생’에게 매일 밤 더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 * *
“사샤, 옥사나. 이쪽으로 와라. 오늘 리허설을 마치고 또 인터뷰가 있다고 하는구나.”
사샤는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마이크를 차고 인터뷰를 위해 준비된 장소로 향했다. 안면이 익은 카메라 스태프들과 인터뷰어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갑게 사샤와 옥사나를 맞았다.
사샤가 아직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카메라에 빨간불이 켜졌다. 사샤는 그 불빛을 유심히 보다가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인터뷰어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반가운 얼굴로 건들대며 말했다.
“리허설을 조금 봤어요, 멋지던데, 키스 신이 있네요?”
“네. 아주 아주 많아요. 왜냐하면…… 사랑 이야기잖아요.”
조금 느릿한 말투로 말하는 사샤에게 카메라의 포커스가 맞았다. 인터뷰어가 감탄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와, 익숙한 것처럼 대답하네요. 내가 십대 때 여자애와 키스할 기회가 주어지면 영웅이 된 기분이었을 텐데.”
사샤는 ‘영웅이 된 기분’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화면 속에 담긴 사샤의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결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졌다.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사샤에게 그건 그저 ‘연기’일 뿐이었다.
“영웅이 된 기분보다는 가끔 어색한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그건 왜죠?”
“제가 완벽하게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정말로 로미오가 되어서, 줄리엣을 사랑하게 되면 어색함이 없어야 해요. 그러니까…….”
“아, 눈앞에 있는 게 연기 대상이 아니라 친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군요.”
“네. 맞아요. 그럴 때는 빨리 몰입해야 돼요.”
“어떻게 몰입을 하는데요?”
“음악을 귀 기울여 들어요.”
인터뷰어는 ‘쉽고도 어려운 일’이라며 미간을 찡그렸다. 사샤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제가 그런 거로 음…… 들뜨면 옥사나는 한심하게 생각할 거예요. 솔직히 그런 친구들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맞지?”
“맞아요. 저는 사샤가 그런 애가 아니라서 좋아하는 거예요.”
불쑥 다가온 옥사나가 사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말했다. 사샤는 가볍게 팔짱을 끼며 수줍은 얼굴을 했다. ‘좋아한다’는 말은 누구에게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었다.
“그럼 옥사나와 파트너인 건 어때요?”
“옥사나는 정말 잘해요. 배울 점이 많아요. 그리고 저희는 제일 친한 친구고요…….”
사샤는 그렇게 말하며 뺨을 붉게 물들였다. 서로 소중하게 여긴다면, 그 마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아낌없이 표현하라고 말해 준 것은 카렐이었다. 그 조언으로 인해 사샤는 제 주변에 얼마나 좋은 사람이 많은지를 알게 됐다.
“아무튼 정말 귀여운 커플이에요. 두 사람이 잘되길 빌어요.”
“네. 저희 둘은 꼭 같이 프린시펄이 될 거예요…….”
사샤는 수줍게 중얼거렸다. 감히 미래의 꿈을 내뱉으니 심장이 순간 크게 뛰었다. 인터뷰어가 뜻하는 것이 조금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아챈 옥사나만이 가늘어진 눈을 했다. 그녀의 얼굴은 꼭 ‘어른들이란 꼭 이런 거로 유난이라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며칠 후, 바로 이 짧은 인터뷰 클립이 발레단의 공식 유튜브에 올라갔다. 다가오는 발레단의 새 시즌과 졸업 공연을 알리는 홍보용 클립이었다. 총 3분짜리 영상 중 사샤가 나오는 장면은 1분가량으로, 이 영상에 등장한 사람들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적어도 발레단의 마케팅 팀원들은 무엇이 셀링 포인트가 되는지 정확하게 알았던 것이다.
[sooolovley
너희 둘 정말 귀엽다:)
시간이 되면 꼭 보러가고 싶은데.]
[sasya.C
고마어요. 정말, 오면 열심미춤출개요]
[makemedance
이 영상에 나오는 남자애 로잔 파이널리스트 아니야? 와, 어디로 갈지 궁금했는데 아직 뉴욕에 있구나!]
[sasya.C
네 작년애일등 저에요 이사갔지만 아직 뉴욕이에요]
[catcat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다고요? 뉴욕행 비행기 벌써 끊었습니다.]
[sasya.C
아직 시작안해서 뉴욕 오면안대는데,, 그대신 제 인스타 여기로 오ㅅㅐ요]
인터넷에 올라오는 저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도 많고 또 그만큼 예민한 사샤는 발레단의 홍보 클립에 달린 댓글까지 모조리 읽으면서 자신이 언급된 코멘트마다 답글을 달아 주었다.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눈이 충혈될 때까지 샅샅이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에게는 굉장한 팬 서비스일 테지만 카렐은 사샤가 인터넷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을 우려했다.
아무튼 사샤는 남들이 떠드는 제 이야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사샤 세드린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제 SNS 주소를 알려주면서 사샤는 순수하게 놀랐다.
‘아직도 내 SNS를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인스타를 팔로우해 주는 사람이 제법 늘어나서 이미 많은 사람이 자신이 무얼 하고 사는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로잔 이후 제 행방을 궁금해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
“사샤, 뭘 그렇게 열심히 보죠.”
문득 귓가에 다정하게 닿는 목소리와 따뜻한 체온에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카렐이 귓가와 가까운 관자놀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이제 자려는지 샤워를 마치고 실크 가운을 입은 채였다.
“이거 보세요, 카렐. 제가 영상에 나와요.”
사샤는 자신이 인터뷰한 장면을 카렐도 봐주었으면 해서 그의 얼굴 앞에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불시에 눈앞 3㎝ 앞에 스마트폰 화면 빛을 쏘이게 된 카렐은 눈을 찌푸렸다가 정중하게 핸드폰을 다시 받아 들었다.
“발레단이 당신을 아주 알뜰하게 써먹는군요.”
핸드폰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카렐의 감상은 그게 다였다.
사샤는 화면 안에서 자신이 움직이고 또 말을 하는 것, 꽤 그럴듯한 대답을 해서 인터뷰어를 감동시킨 것(다분히 사샤의 착각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는 것 등등, 말하고 싶은 포인트가 무척 많았는데 카렐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써먹어요?”
“그래요. 그들은 자본주의적 관점으로만 접근합니다.”
“…….”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을 가지고…….”
모로 봐도 카렐은 이 홍보 클립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샤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이 제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나 봐요.”
“그럴 수 있겠죠. 아주 전도유망한 학생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사샤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가까워진 이마에는 쪽, 하고 가벼운 키스도 해 주었다. 팔의 상완을 조금 지그시 누르듯 여러 번 어루만져 주는 것은 카렐 특유의 스킨십이었다. 그 손길에 다시 마음이 사르르 녹은 사샤는 카렐의 넓은 가슴에 뺨을 기대었다. 상쾌한 물의 냄새와 함께 심장을 빠르게 뛰게 만드는 카렐의 체취가 묻어 나왔다.
“댓글에서 그러는데 사람들이 얼른 제 공연이 보고 싶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요? 카렐은 언제든지 보러 올 수 있는데요.”
사샤가 고개를 들며 눈을 반짝였다.
“연습실에 한 번 놀러 오세요. 그러면 티켓 값도 안 내고 공짜로 볼 수 있어요.”
“…….”
“제가 어떤 식으로 춤을 추고 연기하는지 보여 드리고 싶어요. 한 번 직접 보러 오세요.”
사샤는 카렐이 저를 보러 와주기를 고대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순수하게 말하는 사샤의 앞에서 카렐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다고는 고백하지 못했다. 다만 제 안의 불편한 치졸함만 발견했을 뿐이다. 거리낌 없이 연습실에 초대하는 것만 봐도 사샤 본인은 그 발레 안무에 아무런 의미 부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닐 텐데.
로미오와 줄리엣뿐만 아니라 많은 클래식 발레, 현대 무용, 그리고 안무가들이 사샤 세드린에게 주문할 작업물들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발레는 몸으로 하는 예술이고 다른 무용수들과의 신체적 접촉은 피할 수 없다.
사샤가 앞으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닥친 현실은 조금 달랐다. 아니, 다른 것은 현실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제 마음가짐일 것이다. 카렐은 드러나지 않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꺾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사샤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따라왔다.
그 시선을 모른 척할 수 없던 카렐은 이성적으로 답했다.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그래요.”
“보러 와주시는 거예요?”
“네. 무척 궁금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제 가슴에 올려진 사샤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사샤는 비로소 안심한 듯이 카렐을 침대 매트리스 삼아 도로 폭삭 안겼다.
* * *
“애초에 춤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유혹하기 위한 몸짓에서 시작한 것이다. 발레가 극단적인 조형미로 가공된 아름다움의 정점을 보여주는 예술이라고 하나, 그 역시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책을 덮으며 카렐은 중얼거렸다.
“공감해.”
아무리 그 표현 방식이 보수적일지라도 육체를 쓰는 예술이 그 몸 자체에 집중하지 않을 리 없다. 사람들은 춤을 보며 결국 사샤의 몸을 볼 것이다.
게다가 간혹, 아무리 예술로 포장해도 이건 변태 놀음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작품들도 있었다. 안무가 개인의 욕망이 그대로 무용수의 몸에 투영된 것만 같은 안무들 말이다.
카렐 역시 내면의 변태성을 갈고닦아 도리어 무기로 쓰는 종류의 인물이었으니 변태들의 포장 방식에 대해서는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용수로서 점점 레퍼토리가 많아질 사샤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어떤 변태적인 안무가에게 희생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담아내는 그릇이 무척 훌륭하니 사샤 본인이 예술로 승화시킬 가능성이 컸지만…… 그건 그것대로 약 오르는 일이었다.
게다가 스킨십의 문제도 좌시할 수 없었다. 카렐은 놀이 삼아 사샤를 리프팅하던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손 안쪽에 잡히는 늑골의 모양, 숨을 내쉬는 방식, 호흡의 길이, 근육의 긴장도 같은 것들이 손 안으로 전부 전해졌다. 그런 것들로 카렐은 사샤가 느끼는 감정을 손으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신체적인 접촉은 눈을 보고 대화하는 것만큼이나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샤가 타인, 특히 그냥 보기에도 매력적인 제 또래의 소녀와 이런 식의 접촉을 반복해서 한다는 것 자체가 불편했다.
문득 이에 대해 사샤가 직접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무용수들에게 몸은 도구일 뿐’이라고. 그래서인지 사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정 거리에 대한 상식이 조금 다른 편이었다. 보통 사람―바로 저 같은―이들은 사샤의 스킨십에 어떤 다른 함의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오해하고 착각할 가능성이 무척 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리허설 중, 사샤가 옥사나를 리프팅하다가 손이 미끄러져 거의 그녀의 갈비뼈 위쪽 밑가슴을 더듬었을 때, 카렐은 혼자 멈칫하며 놀랐었다. 또한 토슈즈 위에 올라서 있던 옥사나가 잠시 긴장이 풀려 미끄러지며 사샤의 엉덩이를 꽉 쥐었던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키스 신에서 입술이 닿는 척도 아니고 실제로 닿은 것이 여러 번이다. 그토록 사람의 얼굴이 가까우면 상대방의 체취와 긴장을 전부 다 읽을 수 있다. 저만 독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어떤 영역에 타인이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그리고 카렐의 마음을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현재 그 스스로가 질투하고 있는 것이 고작 열일곱 살의 어린 학생들이라는 점이었다.
한 가지 변명을 덧붙이자면, 카렐은 이전까지 이런 식의 질투심에 휘둘린 적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 연인이란 상호 존중 아래 일상과 잠자리를 공유하는 대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사샤 세드린’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이미 역사에 헌납한 레전드를 짝사랑한 전적이 있으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카렐은 소파에 푹 몸을 묻었다.
물론 사샤가 쉽게 다른 이에게 마음을 줄 거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은 끼어들 수 없는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동질감과 유대감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거슬렸다.
‘빨리 평정심을 찾아야겠어.’
카렐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래도 십여 년을 더 살았는데 사사로운 질투심 따위를 컨트롤하지 못해서 갈등 요소를 남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현명한 연상 애인으로서 제 행동거지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했다.
그러나 카렐이 마인드 컨트롤을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이번에는 사샤에게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