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인스타 스타
“최근에 선생님이 그러는데, 제가 물이 올랐대요.”
사샤가 카펫 위에서 프론트 스플릿을 한 채로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확실히 발레 리허설 수업을 받으니까 더 재미도 있고 실력도 느는 기분이에요. 발레는 춤이자 연기니까요.”
“힘들지는 않고요?”
사샤가 고개를 저었다.
“발레를 하면서 몸이 편하기를 바라면 안 돼요. 힘든 건 당연한 거예요.”
“…….”
“그래도 재미있어요. 바 워크보다 훨씬.”
그렇게 말하며 사샤가 씩 미소 지었다. 원래도 춤을 빼면 그 삶을 무엇으로 채울까 의심이 될 만큼 발레에 몰두하던 사샤였지만, 지금은 카렐이 봐 온 그 어느 때보다도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고된 연습을 하면서도 나름 즐기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샤의 태도에 카렐은 조용히 감탄했다.
가끔 사샤는 자신의 일에 관해 보통 사람과 조금 다른 관점의 발언을 종종 하곤 했는데, 카렐은 그런 점에서 사샤의 천재성을 감지하곤 했다.
“아, 핸드폰으로 리허설을 조금 촬영한 게 있는데 보여 드릴까요?”
사샤가 핸드폰을 주섬주섬 꺼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카렐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샤가 직접 녹화한 동영상에 시선을 주었다.
화면 안의 사샤는 꼬챙이처럼 말라 보였다. 아마도 창을 통해 쏟아지는 밝은 빛 때문에 몸의 외곽 부분이 날아가서 더욱 그런 듯했다. 가는 몸의 소년은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팔다리가 하늘하늘 움직이더니 곧 허공으로 팔짝 날아올랐다.
그걸 유심히 지켜보던 카렐의 미간이 좁아졌다. 집중하고 싶은데, 영상의 퀄리티가 좋지 않았다. 이 안에 있는 것이 사샤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조명이 없어서인지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래 봬도 영화사에 몸담고 있었던 카렐은 영상의 질이 영 거슬렸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부드럽게 물었다.
“직접 찍었나요?”
“네, 핸드폰을 거울벽에 세워 놓고 셀카 모드로 찍었어요. 핸드폰이 자꾸 무너져서 찍기 힘들어요. 아! 이것도 찍어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한창 스트레칭을 하는 자기 모습을 담기 위해 다시 핸드폰을 세워 두려고 용을 썼다. 카렐은 이리 달라고 손짓하고는 자신이 찍어 주었다.
사샤는 앞으로 뻗은 발목 아래에 수건 하나를 받치고는 프론트 스플릿을 했다. 180도가 넘게 다리 각도가 벌어진 채로 앞으로 허리를 깊이 내렸다가 다시 뒤로 등을 젖혔다가를 반복했다. 자기 전 간단한 스트레칭 동작이 이 정도이고, 평소 사샤가 스플릿을 할 때는 양쪽에 의자를 가져다 놓은 채 발목을 걸치고 허공에서 제 체중으로 버티고는 한다. 카렐이 보기에는 거의 서커스였다. 유연성과 함께 엄청난 근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동작이었다.
“흠…….”
카렐은 사샤의 다리가 더 늘씬하고 길어 보이는 각도를 찾아 이리저리 화면을 움직였다. 그런 카렐을 바라보는 사샤는 무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카렐은 사진을 열 장 정도 찍었고, 최종적으로 세 장을 남겼다. 꽤 괜찮게 나온 듯해 확인을 위해 사샤에게 건넸다.
“사진은 이렇게 나왔습니다.”
“우와, 진짜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사샤는 한동안 핸드폰을 조작하는 데 푹 빠져 있었다. 친구에게 사진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카렐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사샤가 적당히 스트레칭을 마치고 올라와 눕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저기 카렐…….”
“네?”
“소원이 하나 있어요.”
“뭐죠?”
‘소원’이라는 단어에 쉽게 마음이 움직인 카렐은 애정을 담아 다정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사샤가 카렐의 허리께를 더듬으며 말했다.
“카렐을 리프팅해 보고 싶은데…….”
“나를요?”
“네.”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은 정색하며 일어나 앉았다.
“내게 받아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날 들어 올리고 싶다는 뜻이 맞습니까?”
사샤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늘 160㎏을 들었거든요. 카렐도 번쩍 들어 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도 알겠지만, 바벨과 움직이는 사람은 조금 다른데…….”
“그래도요. 해 보고 싶어요.”
사샤가 겁도 없이 덤벼들었다. 발레에 있어서 진지해 보여도 가끔 서커스 같은 짓을 시도해 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역시 소년인 모양이다.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짓을 하고 싶어 안달을 내는 것을 보니 뭐랄까…….
그래도 초롱초롱한 사샤의 눈빛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카렐은 결국 한숨을 쉬면서 사샤에게 이끌려 침대 매트리스에서 내려왔다.
“어디 한번 해 봐요.”
카렐이 카펫 위에 바로 선 채 허락의 말을 내뱉자마자 사샤가 달려들었다. 곧바로 허리를 끌어안고는 카렐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으읏…… 으으윽.”
“정말로 할 수 있겠어요?”
“하, 할 수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사샤는 하악, 하악 숨을 몰아쉬었다. 카렐은 미간을 좁히며 무모한 도전정신에 혹사당하고 있는 사샤의 무릎과 앞 허벅지를 살살 어루만져 보았다. 그 와중에 사샤가 다시 카렐의 허리를 끌어안고 둘러메기를 시도했다. ‘끙’ 하는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어림도 없었다.
사샤는 아름드리 고목처럼 단단한 카렐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땅바닥에서 들어 올리려고 쉬지 않고 용을 썼다. 카렐은 혹 저나 사샤가 다칠까 봐 도리어 두 다리에 강하게 힘을 준 채로 버텼고. 사샤는 카렐이 평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면서 끙끙거렸다.
“아마 무게보다도 신장 차 때문일 겁니다.”
카렐은 그냥 사샤가 포기하기를 바라면서 땀이 촉촉하게 맺힌 사샤의 앞이마를 손으로 다정히 쓸어 주었다.
“그러니까 자기 전에 힘쓰지 맙시다.”
“조금만 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건 어때요. 리프팅 말고 업히는 거로.”
“저에게 업히고 싶다고요?”
“그게 낫지 않아요?”
어떻게든 카렐을 들어 보고 싶었던 사샤는 그 제안에 쉽게 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샤는 카렐을 등에 업는 데 성공했다.
“으읏……. 으으윽.”
후들거리는 다리로 사샤는 번쩍! 일어났다. 카렐은 조금 감탄하면서 온몸에 힘을 주느라 꽉 조여진 사샤의 앞 복근으로 손을 뻗어 살살 더듬어 보았다. 사샤는 지나치게 집중해 간지러움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성공하고 나니 기뻤는지 사샤는 ‘와아아!’ 소리 지르며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까지 했다. 검은 머리카락이 카렐의 시야 안에서 찰랑찰랑 흔들렸다.
다행히 사샤가 만족하는 것 같아서 카렐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름 덜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샤는 순진하고 착한 편이지만 저만의 고집이 있어서, 하고 싶은 일에 협조해 주지 않으면 얼른 잠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움직이게 만들어서 힘을 쏙 빼놓지 않으면 또 자는 사이에 카렐의 유두를 몰래 빨거나 아래를 만지작거리며 잠을 방해할 게 분명했다.
“이번에는 내가 해 보죠.”
사샤의 등으로부터 바닥으로 무사히 안착한 카렐이 말했다.
“뭐를요?”
“리프팅이요.”
가는 허리 위에 양손을 올리자 사샤는 갑자기 뒤로 물러났다.
“저는 자신 없어요…….”
“뭐가요?”
“리프팅은 받는 쪽도 균형을 잘 잡아야 돼요. 그런데 저는 남자역이니까 리프팅을 해 주기만 하지 받아 본 적은 별로 없어서요.”
“한 번도 안 해 봤나요?”
“가끔 남자애들끼리 장난칠 때만…….”
“그럼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해 봐요.”
카렐은 다시금 사샤의 허리를 커다란 양손으로 꽉 잡았다. 그러자 안 그래도 부피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녀린 사샤의 배가 철갑을 두른 듯 단단해졌다.
“와, 대단한데요.”
교본 같은 발레의 풀업 자세였다. 아랫배를 끌어올려 힘을 주고 꼬리뼈는 바닥에 눌러 찍는 느낌으로 내린다. 허리와 엉덩이, 골반까지가 얼마나 탄탄하게 단련되었는지가 손끝으로 전부 만져졌다. 카렐은 손 안에 느껴지는 육체에 감탄하면서 양팔에 힘을 주었다.
“겁납니까?”
“조금요.”
“난 절대 당신을 놓치지 않으니 걱정 마요.”
“백 퍼센트 믿어요.”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샤는 카렐이 제 몸을 들어 올리기 직전에 반사적으로 균형을 잡았다. 그건 거의 본능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공중으로 들어 올려질 때 가볍게 포인한 발바닥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리프팅을 도왔다. 덕분에 카렐은 마치 날아오르는 깃털을 받치는 기분으로 사샤를 공중에 들어 올릴 수가 있었다.
“짠!”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환상적인 호흡이었다. 사샤는 하늘 높이 올라가자 무척 신났는지 포즈까지 취했다. 균형을 유지하며 한쪽 다리를 뒤로 들어 올린 아라베스크 자세였다.
“좋아요?”
사샤의 몸을 직접 받쳐 들고 있지만 여전히 묘기 공연을 보는 기분으로 카렐이 지상에서 물었다.
“네, 엄청 신나요.”
“한결같이 높은 곳을 좋아하는군.”
카렐은 높은 곳을 좋아하는 사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다음 번에는 사샤를 공중에 던져 올렸다.
“악!”
의지와 다르게 붕, 날아오른 사샤는 허공에서 양팔을 퍼덕였다. 천장이 보통 건물의 3층 높이만큼 높은 저택이 아니었다면 머리를 천장에 쿵, 박고 말았을 것이다.
“카렐!”
원망 섞인 비명을 지르며 떨어지는 사샤가 땅에 닿기 전 카렐은 그 몸을 정확하게 받아 들었다. 양손을 사샤의 겨드랑이 아래쪽으로 뻗어 흉곽을 껴안고 제 품으로 받아 안았다.
사샤는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품에 안겨 있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어요! 저를 땅에 내던지는 줄 알고요.”
“그런 일은 없어요.”
“이건 리프팅이 아니에요. 우리는 여자 댄서들을 허공에 던지지는 않아요! 점프를 도와줘서 날아오르게 할 때는 있지만…….”
“그런가요? 방식은 좀 다르지만, 아무튼 내가 아는 건 이런 겁니다. 치어리더들을 이렇게 던져서 품으로 받아 들곤 했죠.”
카렐이 무심결에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 결과로 사샤가 조금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카렐? 그 말은, 치어리더들을 안아 봤다는 거예요?”
“흠…….”
“네? 방금 저한테 해 준 것처럼 이렇게 꼭 안아 줬단 말이에요?”
“…….”
“대답해 봐요, 솔직하게. 빨리요.”
카렐은 사샤가 내보이는 것이 어린애 질투심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리고 진짜로 화를 낸다면 그 주체가 소년일지라도 다루기가 곤란해진다.
카렐은 질투심으로 얼룩진 귀여운 얼굴에 쪽쪽 키스를 하면서 사샤를 안고 침대로 갔다.
“자, 이제 마지막 스트레칭을 합시다.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자 의외로 순순히 제안을 받아들인 사샤가 조금 약이 오른 얼굴로 말했다.
“……좋아요. 그런데 카렐도 해야 해요.”
“저도 말입니까?”
“네, 네. 스트레칭은 허리와 골반에 무척 좋아요. 카렐도 해서 같이 건강해져요.”
사샤의 눈에 봐주지 않을 거라는 경고가 서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다지 유연성이 없는 카렐은…… 아니, 그의 유연성은 성인 남성 기준으로 정상이었다. 발레 댄서인 사샤의 기준이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그러나 카렐은 무자비하게 제 다리를 벌려 대는 사샤 때문에 비명을 삼켜야 했다.
“턴 아웃 하세요, 턴 아웃! 그냥 벌려서는 안 돼요. 이렇게 발을 플렉스 한 채로 바깥으로…….”
“윽, 사샤……. 사샤? 당기지 말아요. 이미 한계입니다.”
카렐은 식은땀을 흘리고 아랫입술을 꾹 짓씹어 대며 말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샤는 기세등등해졌다.
“카렐! 사람 맞아요? 나뭇가지가 아니고요? 왜 이렇게 뻣뻣하죠?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카렐 뼈가 잘못 만들어진 것 같아요!”
처음에는 카렐의 건강을 위해 스트레칭을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시작했던 사샤는 점차 이 상황에 몰입해 갔다. 카렐의 형편없는 유연성에 경악하면서 더욱더 다리를 찢기를 종용했다. 항상 다리를 180도 넘게 좍좍 찢어 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사샤의 눈에 양다리를 겨우 100도 각도로 벌리는 카렐은 큰 병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이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카렐은 앞으로 스트레칭을 더 많이 해야 해요. 카렐, 할 수 있어요!”
“당신 기준이 너무 높은 겁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윽!”
사샤가 제 허벅지 한쪽을 양손으로 쭉 미는 그 순간 카렐은 분명히 들었다. 뻑! 하고 질긴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를.
“…….”
카렐은 이마에 송골 맺힌 땀방울을 매달고 진지한 눈으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지금 찢어지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
그러나 카렐의 통증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샤는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아! 그거는요. 왜 그러냐면 유연성보다 힘이 더 좋아서 그러는 거예요. 저도 자주 그랬어요. 공중에서 그랑 점프를 뛰면서 다리를 뻑! 차면 근육이 빡! 하고 찢어져요. 이거 되게 오래가요.”
“오래간다고요?”
“네. 그런데 잘됐어요.”
“잘됐다고요?”
“남자애들은 유연성이 빨리 늘지 않으니까 일부러 찢기도 하거든요. 한 번 찢고 나서 계속, 계속 같은 곳을 찢어 주면 엄청 빠르게 유연성이 늘어나요. 카렐, 축하해요.”
“축하한다뇨.”
카렐의 목소리가 의도치 않게 음산해졌다.
“내가 지금 부상을 입은 게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자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
“그래도 카렐도 이제 곧 저만큼 유연해질 수 있어요.”
카렐의 표정이 짐짓 심각해 보였는지 사샤가 어물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정도는 댄서면 누구나 겪는 거예요.”
“나는 발레 댄서가 아닙니다.”
“음……. 카렐? 엄살 부리지 마세요. 그리고 나무토막으로 사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제 주장을 굽히지 않던 사샤는 잠시 후, 문밖으로 쫓겨났다.
“흘린 땀을 좀 씻고 오세요.”
카렐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샤의 등을 두드려 침실 바깥으로 몰아냈다. 그저 카렐이 시키는 대로 전신에 물을 끼얹고 상쾌해진 사샤는 기분 좋게 침실 문 앞에 돌아와서야 카렐이 삐졌다는 것을 알았다.
문을 두드리고 목소리를 높여 봐도 카렐은 사샤를 다시 침실에 들여 주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거실 소파에서 자야 할 판이었다.
“카렐…….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
“정말이에요. 앞으로 절대 심한 스트레칭은 강요하지 않을게요.”
“…….”
“제가 약이 올라서 그랬어요. 카렐이 치어리더들을 안아 줬다고 생각하니까 조금 질투가 나서……. 카레엘…… 까렐. 문을 열어 주세요…….”
사샤는 문밖에서 구슬픈 고양이처럼 쉴 새 없이 울어댔다. 카렐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사샤를 내보내고 확인해 본 허벅지 안쪽에는 그새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근육 크기가 우람한 만큼 멍의 존재감도 무서우리만치 컸다.
“까렐…….”
한참 후에야 카렐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깜빡 잠들었습니다.”
“거짓말…….”
사샤는 눈치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를 골탕 먹이려고 잠든 척한 거다. 허벅지 근육을 찢어 놓았다며 문밖에 세워 놓고 화풀이를 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따질 수 없었던 사샤는 곱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카렐의 뒤를 따라 총총 걸어서 다시 침실로 들어왔다.
사샤가 침대에 눕자 카렐이 방 안의 등을 모두 껐다. 착각이 아니라면 매트리스에 올라와 눕는 것만으로도 카렐이 낮은 신음을 흘린 것 같았다. 다리 근육이 찢어진 통증이 얼마나 심한지 알기에 사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천장을 바라보고 나란히 누웠지만 얼른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사샤는 카렐의 팔뚝을 어루만졌다.
“카렐…… 우리 그냥 자요?”
“…….”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나요?”
사샤의 은근한 어필에 카렐이 딱딱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안타깝게도.”
“…….”
“나는 부상 중이라서 격한 운동은 할 수가 없어요.”
“카, 카렐…….”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사샤의 눈이 흔들렸다.
“당분간 섹스는 어렵겠어요. 그렇게 알아 둬요.”
“안 돼…….”
사샤는 허약한 비명을 지르며 이불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 스르륵 잠에 빠졌다. 잠든 채로도 사샤는 웅얼거리며 ‘안 돼, 안 돼.’를 중얼거려 댔다.
묵직한 한숨을 내쉬며 사샤 쪽으로 돌아누운 카렐은 잠든 사샤의 코끝을 손가락 마디로 꽉 잡고 흔들었다. 아주 작은 복수였다. 코가 빨개졌지만 푹 잠든 사샤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말썽꾸러기.”
내일은 의사를 만나 봐야겠지.
한가한 일상에 드물게 일정이 생겨 버렸다. 카렐은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한숨과 함께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 * *
“이런 부상은 근육을 절대 쓰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특히 부상 부위 다리를 절대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푹 쉬세요.”
“푹 쉬라고요?”
당분간 어차피 푹 쉴 예정이었기 때문에 일정상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의사의 목소리에 단호한 기색이 섞여 있어 카렐은 조금 당황했다.
“수영도 안 됩니까?”
“그렇습니다. 수영은 물론이고 달리기나 스트레칭도 안 됩니다.”
“승마는 어떻죠.”
“승마도 하면 절대 안 되는 것 중 하나죠. 이 안쪽 근육에 무리가 많이 가니까.”
“그럼 되는 게 뭡니까.”
카렐의 황당한 표정을 들여다본 의사가 껄껄 웃었다.
“기분은 알겠지만 이 틈에 쉬어 두세요. 스트레칭으로 인한 근육 파열에는 무조건 근육을 쓰지 않고 쉬는 게 정답입니다.”
“하아…….”
카렐은 깊은 한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고는 막 생각난 말을 덧붙였다.
“제가 전문가……에게 들었는데 이렇게 한번 찢어진 근육을 계속 반복해서 찢으면 유연성이 크게 늘어난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들은 의사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벌써부터 표정으로 안 된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런 짓을 반복하다가는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어요. 운이 좋으면 괜찮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평생 염증이 재발하는 허벅지 근육을 갖게 될 겁니다.”
“하지만 발레 댄서들은 그런 식으로 근육을 늘린다고 하던데요.”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생들이 그런 실수를 많이 저지르죠. 특히 십대 때는 수시로 경쟁과 테스트를 반복하니 압박감이 더 심할 겁니다. 하지만 가장 안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절대 추천하지 않아요. 그런 방법을 고수한다면 10년, 20년 후에 단 반년이라도 더 오래 춤추고 싶을 때 과거를 후회하게 될 거라고 말해 주고 싶네요.”
의사 진료를 마친 후에 카렐은 생각에 잠겼다. 제 상처를 돌보러 온 병원이었지만 결국에는 사샤를 걱정하며 진료실을 나서게 된다.
그런 식으로라도 유연성을 늘리고 싶었던 어린 사샤를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묵직해졌다. 그리고 그 몸 어딘가에 반복적인 통증이 남아 있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카렐은 지금도 한쪽 허벅지에 지속적으로 전해지는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피멍이 든 채로 욱신거리는 이런 통증을 무시하면서 지금까지를 버텨 온 사샤가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예쁜 몸을 소중히 하지 않고서…….”
그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차에 올랐다.
* * *
운동 절대 금지령이 내려진 카렐은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소일거리나 해댔다. 24시간을 철저하게 쪼개고 하루에 수면도 여섯 시간 내외로 조절하며 스케줄에 맞춰 살던 것이 고작 몇 주 전이지만 이제는 그때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빈둥대는 것이 어찌나 적성에 맞는지 평생 이렇게만 살고 싶었다.
현재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어퍼웨스트사이드 저택에는 바깥과 차단된 중정이 있어 식물을 가꿀 수가 있었다. 카렐은 상의를 벗어 던진 채로 피부를 그을리며 정원을 가꾸고, 미술품에 앉은 먼지를 공들여 떨어냈다. 가끔은 필름카메라로 찍은 사샤의 사진들을 인화해 꼼꼼히 살펴보고 그에 어울리는 액자를 인터넷으로 주문해 저택 여기저기에 장식하곤 했다.
부상을 핑계로 카렐은 점점 더 게을러졌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사샤가 제 몸을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근육을 가꾸는 것은 잊지 않았고, 종종 태닝 오일을 온몸에 바른 채로 수영장 옆에 누워 있었다. 또한 사샤를 먹이기 위한 저녁 식사를 직접 만드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런 그가 하루 중 집에서 가장 멀리 나가는 때는 통학하는 사샤를 가끔 픽업하러 나갈 때뿐이었다. 그것도 내킬 때만 하곤 해서 어느새 사샤는 이 집에서 가장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카렐이 빈둥댈수록 사샤는 미래에 카렐을 자신이 먹여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져 열심히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간만에 두 사람 모두 일정이 없던 일요일, 카렐과 사샤는 편한 옷차림을 하고 오랜만에 드라이브를 나섰다.
“난 차에서 못 내려요.”
카렐의 말에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파파라치가 기승이거든요.”
최근 공식적인 발표도 없이 조용히 업무 일선에서 물러난 카렐의 소식을 들었는지 반대급부로 그의 사생활을 캐기 위한 파파라치가 잔뜩 붙었다. 카렐이 외출을 줄인 이유에는 그것도 있었다. 이해심 많은 연인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금세 카렐의 사정을 이해해 주었다.
덕분에 맨해튼으로 진입한 이후 두 사람은 절대 함께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직접 운전대를 잡은 카렐은 자기 쪽의 차창도 내리지 않았고 차 안에서도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혹시라도 저를 알아보는 이들이 있을까 봐 진지하게 경계를 세우는 카렐과 달리, 사샤는 그저 몰래 하는 데이트에 평소보다 더 큰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와, 이건 첩보 영화 같아. 끝내준다.’
게다가 선글라스를 높은 콧대에 올린 채로 운전하는 카렐이 제법 멋져서 사샤는 시시때때로 고개를 돌려서 운전석의 카렐을 바라보곤 했다.
“걷기 좋은 날씨인데 아쉽네요.”
카렐의 말에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도로 사정이 나쁘지는 않아 제법 드라이브하는 기분이 났지만 그래도 골목골목을 직접 걷는 것만 못했다.
사샤는 인도를 따라 걸으면 발끝에 젖은 나뭇잎이 달라붙던 감촉을 그리워하면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렐은 한때 사샤가 이벤트 공연을 하던 첼시 마켓을 지나 허드슨 강이 보이는 도로를 따라 달렸다. 트라이베카 부근에서 신호에 걸려 잠시 정차했을 때였다.
“카렐, 혹시 아이스크림 먹고 싶지 않아요?”
사샤가 차창 밖으로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지 대뜸 물어 왔다. 자신이 먹고 싶으면서 괜히 의사를 물어오는 것이 깜찍해서,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잠깐 차 세워 주세요.”
“기다려 봐요.”
능숙하게 차를 세운 카렐이 사샤에게 말했다.
“나도 사 줄 거죠?”
“네! 제가 사 줄게요. 무슨 맛이 좋아요?”
“당신이 먹고 싶은 거로 두 가지 사 와요.”
사샤는 흥분한 기색으로 날래게 차에서 내렸다. 뒷모습만 봐도 잔뜩 들뜬 게 느껴졌다.
사샤는 여전히 카렐과의 데이트에서 비용을 대고 있었다. 카렐이 차고에서 잠자고 있던 차들을 꺼냈고, 사샤에게 동전의 형태로 용돈을 잔뜩 주고 있지만 사샤가 카렐의 미래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다는 재산이 차고 넘친다는 것은 들켰지만, 회사에서 잘린 것이 아니라 안식년을 즐기는 중이라는 것은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사샤는 카렐에게 그런 식으로 돈을 펑펑 써대다가는 언젠가는 대저택들도 팔아 버리고 길바닥에 나앉게 될 거라면서 처연한 목소리로 바가지를 긁곤 했다. 물론 그런 참견도 애교 있게 느껴졌기 때문에 카렐은 그저 묵묵히 듣는 편이었다.
차창 밖으로 막 사샤가 진격한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외벽이 전부 투명한 통유리로 되어 있어 안쪽의 인테리어가 어렵지 않게 들여다보였다. 사샤는 제 주문 차례를 기다리면서 주머니 속 동전을 세고 있었다.
동전 한 번, 메뉴판 한 번, 그리고 진열된 아이스크림들을 한 번. 사샤는 짧은 사이에도 시선을 여기저기 옮기며 산만하게 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당황이라는 감정을 모를 것만 같은 차분한 미소년이 고작 아이스크림의 맛을 고르는 것으로 얼마나 극심한 내면의 동요를 겪고 있는지가 뻔히 보였다. 저만 아는 그 속내마저도 귀여워서 카렐은 무의식적으로 픽, 미소를 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을 마치고 가게에서 나오는 사샤의 양손에는 토핑이 가득 올라간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토핑 욕심을 조절하지 못하고 아주 양껏 쌓아 올린 걸작이었다. 카렐은 슬슬 차를 굴려 사샤에게 다가갔다.
그러던 카렐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눈에 띄었다.
두 명의 여자가 다가와서 사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카렐은 곧바로 제 생각을 수정했다. 무척 반가워하는 여자들과 달리 사샤의 표정을 보니 모르는 사이임은 분명했다. 그런데도 사샤는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무언가의 미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카렐이 차에서 내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 여자 중 한 명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사샤는 긴장한 표정을 한 채로도 그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 주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장을 찍어 주자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왔던 것이다. 그걸 보며 카렐은 저도 모르게 당황 섞인 눈으로 턱을 매만졌다. 사람들이 몰려와 사샤를 둘러싼 작은 벽을 만들었다.
결국 사샤는 몰려든 모두와 사진을 찍어 준 다음에야 풀려났다. 사샤가 차로 돌아왔을 때 아이스크림은 이미 녹아서 뚝뚝 흐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아! 너무 빨리 녹았네요. 날이 더운가 봐요.”
“…….”
“미안해요. 다시 사 가지고 올까요?”
사샤는 사진 촬영에 응하면서도 제 몫의 아이스크림을 야금야금 핥는 것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사샤 몫의 아이스크림은 퍽 줄어 있었다. 그러니까 녹은 것은 카렐의 것뿐이었다.
“음……. 됐어요. 출발하죠.”
“미안해요, 카렐.”
“난 정말 괜찮으니까 손이나 닦으세요.”
다시 차 바깥으로 나가면 여전히 몰려 있는 사람들에게 또 붙잡힐 것이 뻔했다. 애초에 사샤가 먹고 싶어 했던 것이니 사샤만 맛있게 먹었다면 상관없기도 하고…….
카렐이 권한 대로 사샤는 끈적끈적한 손을 티슈로 닦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흘끔 바라본 카렐이 물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당신을 알아보죠?”
“그건…… 음.”
“…….”
“제가 학생 공연의 주역이 되어서가 아닐까요?”
당당한 사샤의 말에 카렐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런 거로요?”
“왜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단어 선정이 조금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받아치는 사샤의 목소리가 톡 쏘아붙이는 듯했다.
“그건 아니지만…….”
카렐은 말끝을 흐렸다. 길거리에서 저토록 사람들이 몰리는 건 셀럽이나 틴에이저 팝스타 정도다. 발레는 그에 비해 그다지 대중적인 취미는 아니었고, 심지어 사샤가 발탁된 것은 발레단의 정식 시즌이 아니라 학생들의 졸업 공연이었다. 그런 것으로 길에서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을 모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당신은 아직.”
그러나 카렐은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옆모습을 노려보는 사샤의 눈초리가 제법 매서웠던 것이다.
“카렐?”
“네.”
“저는 주목받고 있어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고요.”
“…….”
그런 이성적인 소리를 하면 사샤의 자존심을 잘못된 방향으로 건드릴 것만 같았다.
“아마 앞으로 더 유명해질걸요? 요즘에 카메라가 막 저를 찍으러 와요. 인터뷰도 하고요…….”
“인터뷰?”
입을 뗀 동시에 카렐은 그게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아마 다큐멘터리 촬영을 말하는 거겠지. 카렐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의 승인하에 진행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괜히 그런 것을 상기시켜 주는 대신 카렐은 대강 수긍했다. 혹시 이 조그마한 남자아이가 벌써부터 할리우드 스타병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을 하면서.
“네. 카렐도 인터뷰해 본 적 있어요?”
“글쎄요…….”
카렐은 말을 얼버무렸다.
“매일 마이크를 여기에다 차게 하고 저한테 성가신 걸 물어요. 어제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가 하고 싶었는지 그때도 뛰어났는지를 물었어요.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했고요. 아! 그런데 저한테 인터뷰 스킬이 아주 뛰어나다고 했어요. 그리고 아마 칭찬 같은데 저한테 락스피릿이 있다고 했어요.”
“락……스피릿.”
카렐이 짧게 신음했다.
‘대체 어떤 꼴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저는 충분히 유명인사라고요.”
“알아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카렐의 대답이 미덥지 않았는지 사샤가 끈질기게 굴었다.
“왜 그런 식으로 대답해요? 모르는 거 같은데요? 요즘 카렐은 집에서 노니까 잘 모르나 본데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카렐도 뒤처진 꼰대가 되고 싶지 않으면 인터넷 기사를 잘 검색해서 살펴보세요.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름이 곧 기사들을 뒤덮을 테니까.”
“문화예술 면 외에서 오르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유명세라는 홍역을 치르는 것이 얼마나 성가신지도 모른 채 그저 야망에만 불타고 있는 사샤가 걱정스러웠다. 카렐은 일단 차를 잠시 멈춘 다음 사샤의 뒷덜미를 잡아채듯 끌어와 키스를 퍼부었다.
악센트가 강한 발음으로 매섭게 쏘아붙이던 입술은 맞대고 보니 지나치게 말랑거렸다. 망아지처럼 날뛰며 차 천장에 머리를 박을 듯 흥분하던 것도 누그러들고, 사샤는 그저 키스만으로 비음을 흘리며 녹아 버렸다.
“집으로 가죠.”
카렐은 일부러 더 낮은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엄지로 눈 밑의 광대 부근을 조심스레 문질러 주자 사샤가 동공이 풀린 눈으로 ‘좋아요.’ 하고 흐물흐물 대답했다.
그리고 뭔가의 불길함을 지울 수 없었던 카렐은 그 길로 뒤의 데이트 계획을 모조리 취소하고 집을 향해 차를 돌렸다. 주말을 맞이해 계획했던 오랜만의 야외 데이트는 그대로 종결되어 버렸다.
* * *
“그러니까 SNS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지?”
카렐은 조금 어이없는 얼굴로 물었다.
“네. 저는 친구 신청했더니 받아 주던데요. 모르셨습니까?”
카렐이 기다리던 대답을 들고 방문한 유능한 비서 게오르크는 바캉스 티가 확 나는 셔츠를 걸치고는 소파에 방만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카렐의 안식년이 시작함과 동시에, 덩달아 제법 긴 휴가를 얻은 그는 푹 쉬다가 불시에 불려온 것이 조금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카렐은 픽 웃으며 말했다.
“표정 풀어. 어차피 멀리 떠날 예정도 없었으면서.”
“그렇긴 한데요. 아무튼 부르시면 저는 업무 모드가 켜져 버린다고요.”
게오르크가 손가락을 탁, 튕기며 스위치가 눌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 것치고는 제법 사적인 의상과 태도인데…….”
“클레멘츠 씨도 만만치 않습니다.”
게오르크는 대충 팔을 걷어 올린 카렐의 셔츠 소매를 지적하며 말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부드럽게 흘러내리게 둔 카렐의 금갈색 머리카락은 뙤약볕에 타서 더 밝은 빛을 띠고 있었고 그새 피부도 캐러멜 색이 나도록 구웠다. 조금만 더 방치한다면 슈트가 잘 어울리는 거대 기업의 COO가 아니라 자동차 정비공이나 농장 일꾼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아무튼, 사샤는 네가 놀러 온 줄 아니까 업무 모드는 내리고 적당히 편하게 있어.”
“…….”
“아, 네 몸값이 얼마냐고 물으면 대략 천만 불 정도라고 대답해 주고.”
“왜죠?”
“아직도 내가 잘린 줄 알아서, 게오르크를 다시 사다가 내게 바쳐야겠다고 벼르고 있거든.”
“아직도요?”
게오르크가 무표정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짓궂으시네요. 가난을 질리도록 겪은 소년이 또 돈을 가지고 고민하게 하시다니. 가혹합니다.”
그 말도 무척 와 닿는 바가 있어 카렐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마침 두 사람의 뒤에서 타닥타닥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 그들은 대화를 멈추었다. 제 얘기를 하는지도 모른 채 사샤가 한 손에 간식 바구니를 들고 주방에서 나와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사샤 세드린?”
게오르크는 고개만 젖혀 소파 뒤의 사샤를 불렀다.
“게오르크?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사샤가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가던 것은 게오르크가 오는 길에 사 가지고 온 유명 베이커리의 바나나 푸딩과 머핀이었다. 게오르크는 특히 디저트에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고, 원래부터도 그의 입맛을 맹신하던 사샤는 그가 사 오는 디저트를 게오르크 자체보다도 더욱 반겼다.
모형처럼 예쁜 머핀을 들어 보이면서 사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정원에 가서 먹을 거예요.”
“좋은 생각이네요.”
“그런데 게오르크는…… 아직 형편이 괜찮은가 봐요.”
“예?”
“카렐이 돈을 못 주는데도 말이에요…….”
게오르크는 고개를 돌려 눈앞의 카렐을 바라보았다. 카렐은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제 잔혹한 상사가 일도 하지 않는 무료한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 활력을 찾는지 알 것 같았다.
게오르크는 표정도 바꾸지 않고 말했다.
“음, 저는 집이 꽤 유복합니다.”
“그래요……?”
“네. 그러니까 누구든 저를 사 가려면 아주 비싼 값을 지불해야 할 걸요. 한 천만 불 정도.”
그 말에 사샤는 티가 나게 시무룩해져서는 중정으로 나갔다. 사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게오르크는 더는 참지 않고 껄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렐은 게오르크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사샤를 속이고 있는 자신을 짓궂고 가혹하다고 하더니 피차일반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아무튼 사샤가 조용히 물러나자 카렐은 다시 본론을 꺼냈다.
“SNS에 대해서 더 자세하게 말해 봐.”
“어떤 걸 말입니까?”
“일단 내게 그런 걸 하고 있다는 얘기는 안 하던데.”
“그건 십대들에게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보고를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죠. 심지어 요즘 아이들은 사진 촬영만큼 동영상 편집을 자연스럽게 한다지 않습니까. 사샤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하며 게오르크는 제 핸드폰을 꺼내 사샤의 계정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고는 카렐을 향해 핸드폰을 내밀었다.
“많이도 올렸군.”
사진들은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 사진이 멋들어진 것도 아니고, 크게 사생활이 드러난다거나 문제 될 소지가 있는 사진도 없어 보였다. 예전에 카렐이 보고 나서 영상 퀄리티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거의 그대로 올라가 있었다. 그 외에는 사샤의 셀피나 발레 스트레칭 중인 모습이 거의 다였다.
카렐은 그중에 아무거나 손이 가는 사진을 눌러 보았다. 포스팅은 사진뿐만 아니라 작은 텍스트가 캡션처럼 덧붙여진 형태였다. 카렐은 어설픈 문법과 맞춤법으로 있는 힘껏 용을 써 작문을 해 놓은 사샤의 글귀를 하나 읽어 보았다.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가관이었다.
[눈물 한 방울.. 그거는 사랑의 이름이다
눈물 두 방울.. 그것은 아품의 이름이다.
사랑의 결정체…….
티어스.]
“이게 뭐야.”
카렐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쓰고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사샤의 감성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또 다른 사진을 눌러 보았다.
[심장에 칼을 꼿는 아품,
그것 주금에 고통이다,,
로미오는 심장에 칼을 꼿고 주거버렷ㅅ다…….
나는 각끔 한 남자를 이해한다
그애이름은 로미오]
핸드폰을 들고 있는 카렐의 손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것처럼 떨렸다.
사관학교 출신에 몸 쓰는 취미를 즐기는 것 때문에 육체파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과 반대로, 카렐은 문학적 소양이 제법 있는 편이었다. 예술품을 가리는 심미안도 있었고, 그 심미안을 가꾸고 소비할 만한 재력도 있었다. 그렇게 날카롭게 벼린 심미안으로 찾아낸 보석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원석의 사샤 세드린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보는 눈이 높은 그에게 지금 보고 있는 사샤의 글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카렐은 깊게 침음했다. 하지만 왜인지 중독적이라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카렐은 치를 떨면서도 다른 사진을 눌러 보았다.
[사랑이다!
라고 아는 순간는 마치 머리꼭데기에 창을 맞는거 갇다..
근데 사랑에 처음 느끼면 그럴데는 잘 몰으고
나중에 알을수도 있다
왜녀하면 사랑앞애 모두가 바보이니가
나도 바보였다…….]
[너네도 사랑을 알아?
알면 하트 눌러죠
하트 만이 가지고 십다]
[정말 만은애들이 하트모양을 눌러졋어.
조금 감사헤서 오늘은 내가 먹은거 보여줄개
맛있엇어]
[어제 올린건 하트가 별로업구 댓글도 작아서 심심했어
기분 별로야.]
[아랏다,, 너네 음식 사진 별로야?
나는 가장 좋은대요
자기 전에 보면 행복개져
역시 너네 사랑 애기 제일 좃지?
수준이 놉구나]
“하아…….”
팔로워들과 조금 소통을 하나 싶더니, 음식 사진은 제 얼굴 사진보다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 몹쓸 사랑 타령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샤는 최근 ‘로미오와 줄리엣’ 작품의 주역을 맡으며 그들의 사랑 이야기에 푹 빠진 듯했다. 사샤가 쓴 모든 아포리즘은 로미오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의 주리엣,,
나의 제이 아니고 케이..]
“맙소사.”
제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걸 그나마 칭찬해 줘야 할까. ‘나의 케이’라고 은근하게 언급한 것은 카렐 클레멘츠의 K를 의도한 것이 틀림없었다. 댓글들은 카다시안 패밀리를 말하는 거냐고 밈 삼아 비웃고 있었지만 카렐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자신은 이미 10년도 전에 때려치운 짓을 현재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공간에 남기고 있는 사샤를 보니 말문이 막혔다.
“감상이 어떠십니까?”
게오르크가 물었다.
“줄리엣 취급은 처음 받아 보는데.”
카렐은 끅끅 웃고 있는 게오르크를 향해 핸드폰을 던졌다. 가볍게 핸드폰을 받아 든 게오르크가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육중한 줄리엣이군요.”
“…….”
“197㎝의 줄리엣.”
카렐은 가타부타 대답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퍽 착잡해 보였다.
“그래도 나름 시적이지 않습니까? 예술가라서 그런지 제법 감수성이…….”
“…….”
“우리도 다 저런 때가 있었죠.”
“나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카렐은 천천히 거실 가운데로 걸어와 소파에 앉으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직접 쓸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어.”
카렐은 책을 읽는 취미도 없으면서 무작정 쓰기부터 하는 사샤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게오르크가 사샤의 편을 들었다.
“발 빼시깁니까? 그리고 창작자와 소비자는 다르죠!”
“아무튼 이건 꽤 유효한 숫자네.”
카렐은 화제를 돌렸다. 사샤의 팔로워를 가리키자 게오르크가 수긍했다.
“그렇죠. 이게 현대에서는 자산이라는 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길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던 거군.”
직접 사용하는 SNS는 아니었지만 카렐은 그 안을 조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플랫폼의 특징과 주요 기능, 인플루언서의 영향력과 그 시스템의 작동 방식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그날 사샤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비상식적일 정도로 사람을 모은 이유도 이해했다. 그 가게는 이 SNS의 유저들이 선호하는 종류의 사진을 올릴 수 있는 일종의 ‘인증 스폿’이었던 것이다. 타깃이 완전히 겹친다고 볼 수 있었다.
사샤는 이미 2만여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게 보통의 십대가 가질 수 있는 숫자던가? 카렐은 미간을 찌푸렸다. 실제 활동하는 프로 발레 댄서들조차 팔로워가 그 10분의 1인 2천 명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반대로 사샤는 아직 정식 발레단에 입단해 프로필이 알려진 것도 아니었고, 파급력이 있는 매체에 얼굴을 비춘 것도 아니었다. 고작 학생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숫자라니.
예전 로잔 콩쿠르에 참여하기 전에 찍었던 간단한 자기소개 영상 조회 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것을 떠올린 카렐은 불편함을 숨기지 못했다.
“흠……. 이유가 뭘까.”
“정말 모르셔서 물으시는 건가요.”
“…….”
“화려하잖습니까.”
게오르크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공중에서 한 바퀴 휘둘렀다. 마스크를 뜻하는 제스처였다.
“발레 연습 장면도 많이 올려요. 꽤 볼거리가 많죠. 얼굴만 전시해도 눈요기가 될 텐데 이런 영상을 보면…….”
게오르크는 사샤가 바를 잡고 선 채로 오른 다리를 사이드 데벨로페로 들어 올렸다가 천천히 땅에 탕뒤로 내리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들어 올릴 때는 무게가 느껴지지 않더니 내릴 때는 중력이 느껴지지 않도록 힘을 완벽히 컨트롤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렐은 사샤의 운동 능력보다도 레오타드를 입어 그대로 윤곽이 드러난 사샤의 엉덩이를 심기 불편하게 지켜보았다.
힘이 세게 들어가 엉덩이 보조개가 폭 파인 것까지 착 달라붙은 레오타드 아래로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였다. 게오르크는 제 상사가 무엇 때문에 그런 얼굴을 하는지 모른 채 열정적으로 말했다.
“저는 솔직히 발레에 관심이 없었는데도 사샤가 하는 걸 보니 사람이 좀 다르게 보이더군요. 그 천방지축이 이렇게 진지한 순간도 있구나, 하고.”
카렐은 픽 웃었다.
“사샤는 언제나 진지하지. 발레에 대해서는 항상 그래.”
“그러니 사람들이 호감을 느끼는 겁니다. 맞춤법이 좀 엉망이라도 진지한 소년이라는 게 투명하게 눈에 보이니까. 심지어 외모도 매력적이죠.”
“한마디로 매력 만점이라는 소리군?”
“누구에게든지요.”
게오르크가 떠나간 후에도 카렐은 한동안 사진 아래 조각조각 흩어진 사샤의 일기들을 읽어 보며 시간을 보냈다.
[눈에눈 코에는 코]
눈에는 눈, 이에는 이겠지…….
사샤가 멋대로 개정한 함무라비 법전을 읽던 카렐의 눈은 그다음 줄로 향했다.
[남자애개는 강렬한 복수심이 코자고 있다.]
코 자고 있다? 잠자고 있다를 쓰려던 건가.
사샤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지인 율리안이 잔뜩 가져다준 그림책들의 영향 때문인지 가끔 그릇된 동사를 사용했다. 그림이 많은 책은 자존심이 상해서 읽기 싫어하더니만 숨어서 성실히 읽고 있던 모양이다.
[복수심에 끌고잇는 남자는 무섭다
대략 그런 남자는 냉정하고 용서를 모른다..]
일부러 많은 어휘를 사용하고 싶어 할수록 의미가 불분명해지는 사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 카렐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찬찬히 추측을 해 보았다.
함께 올려진 사진은 꽤 익숙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사샤가 저를 리프팅하겠다며 덤비고, 자신은 사샤를 천장에 닿도록 높이 던져 버렸던 날의 사진이었다. 카펫 위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사샤가 렌즈를 통해 눈을 마주치며 방긋 웃고 있었다.
카렐은 저도 모르게 화면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직접 찍은 셀피와 다르게 자신이 찍은 사진 속 사샤의 표정은 생동감이 넘쳤다.
처음에는 사진과 글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잘 읽어 보니 사샤가 그날의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보고 복수심이 넘친다고 비난하고 있군.’
카렐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허벅지에 피멍을 들게 해서 잠깐 침실 문을 열어 주지 않은 걸 가지고 ‘복수심 운운’ 하고 있는 것이 깜찍했다.
핸드폰 화면 안을 바라보고 있는 카렐의 눈은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그냥 볼 때는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일기였는데…….
그 전말을 알고 보니 더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큰일이군.”
사샤 세드린이라는 소년과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은 객관적인 타인의 시선으로 보아도 사샤는 매력적이었다.
가장 위험한 것은 사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은 욕망을 건드리도록 순진해 보였다는 점이다. 또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이었다. 잠깐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그 인생에 대해 궁금증이 들만큼.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발레를 하는지.
또, 사랑 타령을 해대는 만큼 진짜 사랑을 해 보았는지.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어.”
사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진 것은 큰 고추’뿐인 카렐 클레멘츠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조금 긴장했다. 사샤는 아직 경험의 폭이 좁고 만나 본 사람도 많지 않았다. 모든 걸 경험할 만큼 경험하고 또 놀만큼 놀아 보고 나서 사샤를 선택한 자신과 달리, 어린 연인은 세상의 유혹과 자극에 취약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 가능성은 사샤가 스타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그를 지지할 준비를 끝마친 카렐마저 조금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래의 애인 단속이 제 예상보다도 녹록지 않으리라는 염려가 들었다. 강력한 라이벌들이 무수하게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카렐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팔로워가 늘어나고 댓글이 잔뜩 달리는 사샤의 계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도 소유욕이 강한지라 아름다운 꽃에 날아드는 벌떼들을 그저 흐뭇한 마음으로만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불안감이 엄습하는데도 사샤의 행동을 제한하고 단속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샤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 보고 또 자유를 누려야 했다. 그래야만 사샤 세드린의 매력이 가감 없이 세상에 알려질 테니.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남자의 숨은 애인으로 존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하며 카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찢어진 허벅지 근육에 통증이 와 절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부상이 발목을 붙잡았지만 그래도 몸을 단련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아니, 해야만 했다. 앞으로 달려들 수많은 라이벌 사이에서 평생 사샤의 눈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저 역시 몸 관리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