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장의 문이 열리고
수요일 오후 4시, 맨해튼 발레 스쿨의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쳤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고전적인 종소리와 함께 학생들은 자유롭게 흩어져 각자의 가방을 챙겼다.
발레 레오타드 차림의 학생들 사이에는 유독 머리가 새까맣고 몸이 늘씬한 체형의 남학생이 한 명 섞여 있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학생.
그리고 그 학생의 얼굴을 보게 되면 모두가 제 상상보다 더 빼어난 미인이라는 사실에 놀란다. 맨해튼 발레 스쿨의 졸업 학년, 사샤 세드린. 아직도 한창 성장 중인 러시아 출신의 열일곱 살 소년은 일주일 전 이사를 마쳤다. 로드아일랜드의 저택으로 완전히 짐을 옮긴 것이다.
사샤 세드린이 러시아 대부호의 자제라는 소문이 최근까지도 무척 꾸준했던 것과 다르게, 사샤 본인은 그 배경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최근 사샤는 자신이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집으로 완전히 이사했고, 또 로드아일랜드에 별장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무척 들뜬 표정으로 거리낌 없이 말했다. 발레 마스터들과 일반 과목 선생님, 트레이너, 그리고 동기생들에게까지도.
‘어퍼웨스트사이드? 거기에 있는 집들은 정말 어마어마하잖아.’
‘로드아일랜드도 마찬가지야. 유서 깊은 명문가들의 저택이 잔뜩 있을 텐데.’
‘신은 불공평해. 사샤 세드린에게 너무 많은 걸 주셨어.’
그리고 오늘, 모두의 부러움을 살 만한 일이 한 가지 더 생겼다.
수업이 끝난 직후였다. 학생들이 복도로 빠져나가기 전, 관리사감 줄리아가 행여나 학생들을 놓칠까 염려하면서 스튜디오로 빠르게 들어왔다. 그녀는 연습실에 흐르는 스트레칭 음악을 끄고는 모두의 주목을 끌었다.
“잠깐 여기 좀 보렴. 오늘 아주 중요한 공지가 있거든. 졸업 공연 관련 발표란다.”
그녀가 말한 내용에 연습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집중한 가운데 숨죽인 흥분과 긴장, 기대감이 읽혔다.
맨해튼 발레 스쿨은 매년 학교 연례행사로 졸업 공연을 한다. 유서 깊은 명문 발레 스쿨의 이 전통적인 졸업 공연은 전 세계 발레 골수팬들의 주목을 받곤 했다.
주역을 맡은 유망주들은 대대로 프린시펄로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물론 주역을 맡은 모든 학생이 프린시펄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역대 프린시펄들은 모두 주역을 거쳤다.
“졸업 공연의 작품은……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아름다운 고전 발레의 작품명을 듣자마자 학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발레 테크닉만큼이나 원숙한 연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보통은 경험 많은 댄서들이 주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 공연을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은 잔뜩 들떴다.
사샤 세드린 역시 뺨을 발갛게 물들인 채로 줄리아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역은…….”
줄리아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사샤 세드린, 그리고 옥사나 스미노바.”
웅성거리며 탄성이 터졌다. 모두의 이목이 사샤와 옥사나에게로 쏠렸다. 그 가운데서 사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축하한다는 듯이 사샤의 어깨와 등을 툭툭 두드렸다. 부표처럼 맥없이 흔들리며 사샤는 작게 입을 벌렸다.
“그 외 자세한 역은 여기 게시판에 붙여 놓을게. 모두 확인하렴. 그리고 더욱 놀랄 만한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단다. 뉴욕 발레단의 내년 봄 시즌 공연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또 한 번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꼭 훌륭히 소화해 내길 바란다.”
줄리아의 발표를 듣게 된 모두는 자연스레 예상했다. 이번 졸업 공연을 잘 끝내면 내년 발레단 입단 가능성이 커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사샤. 옥사나. 잠시 시간을 내주겠니? 하교 전에 할 일이 있어.”
그 직후 사샤는 옥사나와 함께 얼떨떨한 얼굴로 학교 스태프들에게 불려 나갔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함께 연습실을 나가는 올해의 주역 두 사람을 선망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질투마저 포기한 얼굴로.
사샤와 옥사나가 줄리아를 따라 도착한 곳은 빈 연습실이었다. 거기에는 이미 세팅된 카메라와 조명들이 놓여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난생처음 보는 카메라 장비들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서 있던 사샤와 옥사나에게 한 스태프가 다가왔다.
“긴장할 거 없어. 간단한 인터뷰야. 발레 스쿨과 발레단이 같은 작품을 만들어 가는 것을 기록 영상으로 남기기로 했거든. 나중에 다큐멘터리로 제작할지도 몰라.”
“다큐멘터리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사샤는 벌벌 떨었다. 옥사나가 너무 긴장한 사샤의 손을 꼭 쥐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나중 이야기지만. 아무튼 앞으로도 이런 촬영과 인터뷰가 여러 번 있을 거야. 그리고 지금은 주역으로 캐스팅된 직후의 소감을 촬영하려고 불렀어.”
그건 사샤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스태프가 별거 아니라며 굳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고 떠나간 뒤에도 사샤는 진정하지 못했다.
“옥사나. 나, 나, 나는 너무 떨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먼저 할게. 별거 있어?”
사샤가 하도 긴장하는 바람에 옥사나가 먼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터뷰는 정말 순식간에 끝났다. 패닉에 빠진 사샤는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었다.
조금 전과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마음 상태로, 사샤는 긴장한 얼굴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사샤 세드린? 마이크는 다 찼어요? 그럼 이리 와요. 여기 앉으면 돼요. 왜 그렇게 떨고 있죠? 카메라 공포증 같은 거라면, 꼭 카메라 렌즈를 볼 필요는 없어요. 나를 보고 말하면 됩니다.”
빨간불이 깜빡이는 카메라의 화면 안에는 고풍스러운 발레 스쿨 연습실을 배경으로 사샤의 얼굴이 담겼다. 심도가 깊어 배경은 흐릿하고 사샤의 얼굴에만 또렷하게 핀이 맞은 화면이었다.
화면 안에 담긴 사샤의 머리카락은 빗지 않아 앞머리가 아무렇게나 갈라졌지만 워낙 조형이 아름답고 입체적인 얼굴이라 그런 것마저 사연을 더하는 장식이 되어 줄 뿐이었다. 게다가 다들 얼굴이 조막만 한 소년의 생김을 뜯어보며 감탄하느라 머리가 헝클어진 것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사샤의 커다란 검은 눈은 곧 굴러떨어질 것처럼 사정없이 떨어대서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알아차렸다.
“사샤, 긴장 풀어요. 자연스럽게 하면 돼요. 그냥 친한 형이랑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네.”
“앞으로는 더 자연스러워질 겁니다.”
사샤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녹화 중인 카메라의 오디오 볼륨이 출렁였다.
“아까 여자 친구는 꽤 잘하던데요. 그렇게만 해요.”
그때 한 손에 에너지 드링크를 든 옥사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샤는 옥사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너처럼 하래’. 옥사나는 그저 신이 난 얼굴로 양손을 들고 머리 높이에서 마구 흔들었다. 힘내라는 뜻 같았다. 사샤도 양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첫 번째 질문부터 시작할까요? 졸업 공연의 주역으로 뽑혔는데 기분이 어때요?”
“어……. 저는 기분 좋아요.”
인터뷰어가 경청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어쩔 줄 모르고 다시 도와 달라는 얼굴로 옥사나를 바라보았다. 옥사나가 팔을 마구 휘둘렀다. 사샤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리고 사샤의 말이 그게 끝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인터뷰어가 조금 당황하면서 다시 질문했다.
“음……. 소감을 좀 더 길게 말해 보면 어때요? 발표를 들었을 때의 기분이라든가. 아!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뭐 그런 이야기를 해도 좋겠네요.”
인터뷰어의 말을 들으며 사샤는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이제 조금 감이 잡혔다.
“기분이 좋았던 이유는……. 음, 저는…… 저는 알고 있었어요. 제가 주역이 될 줄요.”
풉, 옥사나는 마시던 에너지 드링크를 뱉을 뻔했다.
“왜냐면 저는 가장 뛰어나거든요. 입학했을 때부터 그랬어요…….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조금 있지만 눈이 붙어 있다면 다들 알아요.”
팔짱을 끼고 저를 바라보는 인터뷰어의 표정이 미묘해서 사샤는 또 옥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옥사나는 입을 일자가 되도록 꾹 다물고 ‘흐으음’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아니라고? 당황한 사샤는 묘한 표정의 인터뷰어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저, 저는 뉴욕 발레단에 입단해서 프린시펄이 될 거예요. 최연소 프린시펄이요. 적어도 스물두 살에는 되는 게 목표예요. 카…… 아니, 저기, 댜댜랑 약속했거든요. 그러려면 졸업 공연에서 당연히 주역을 맡아야 돼요. 이 정도 경쟁에서 지면 앞으로 프린시펄은 될 수 없어요.”
사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무사히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마쳤다. 항상 톱을 유지하는 것은 엄청나게 힘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카렐과 함께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얼마나 학교생활에 매진했는지 생각하면 억울해서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였다.
“아……. 좋아요. 이해했어요. 사샤 세드린.”
“……?”
“그런 성격이군요. 좋아요, 괜찮아요. 적당히 편집을 하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다행스럽게도 잘 넘어간 것 같다. 사샤는 무릎 위에 두 손을 모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죠. 로미오와 줄리엣은 실제로는 사샤 당신과 또래예요. 하지만 발레 버전은 조금 달라요. 능숙한 감정 연기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표현력이 풍부한 원숙한 댄서들이 잘 소화하곤 하죠. 당신은 어떻게 연기할 건가요?”
“음……. 그건.”
사샤는 말을 머뭇거렸다. 키가 자라며 따라서 벌어진 어깨는 제법 남자다운 골격이 되었지만 아직도 입술만큼은 여리고 붉었다. 그 어린 입술이 오물오물하다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뱉었다.
“저는 사랑이 뭔지 알아요.”
“으하핫!”
인터뷰어뿐만이 아니라 카메라에 눈을 가져다 대고 있던 카메라맨과 그 외의 스태프들도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샤의 귀가 붉어졌다. 눈물까지 찍어낸 인터뷰어가 말했다.
“아, 이런 깜찍한 대답은 예상치도 못했어요. 사샤 세드린, 내가 장담할게요. 당신은 꽤 유명해질 거예요. 보는 재미가 있군요.”
“……감사합니다.”
“당신 여자 친구를 말하는 건가요? 연애한 지는 얼마나 됐죠?”
그의 뒤에서 옥사나가 외쳤다. ‘아니에요!’라고. 하지만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사샤도 힘을 보탰다.
“옥사나는 제 여자인 친구예요. 하지만 여자 친구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 둘게요.”
“저희 안 사귀어요!”
“믿어 줄게요.”
“…….”
그 뒤로 질문 두어 개에 더 답한 후 첫 번째 인터뷰가 끝났다. 마이크를 반납하고 나서 사샤는 옥사나에게 다가갔다.
「이걸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해야 된다니까 벌써 힘들어.」
「왜? 대답 잘하던데. 특히 주역이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렇게 말하며 옥사나는 다시 푸하하! 하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그 아저씨 표정은 그렇지 않았는데……. 정해 놓은 대답이 있는 것 같아. 근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르겠어.」
「아아. 네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도 그거 조금 느꼈거든.」
옥사나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방을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키 차이는 이제 제법 컸다. 미리 자라서 2학년 때 성장이 멈춘 옥사나와 달리 사샤가 아직도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옥사나는 계속 제 키가 더 자랄까 봐 조금 걱정을 했었다. 토를 신으면 10센티가 더 커지기 때문에, 여자 댄서의 키가 너무 커지면 파트너를 찾기란 더더욱 힘들어진다. 학생 때는 더더욱 그렇다. 사샤가 아니었다면 실력과 체격이 맞는 파트너를 구하는 건 더 힘들어졌을지도 몰랐다. 파트너가 그대로 나란히 주역이 되다니.
이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사샤와 옥사나는 서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튼 우리 둘이 한다니까 좋다.」
「나도 좋아.」
사샤가 옥사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2년 차부터 사샤의 키가 쑥 자라며 옥사나의 파트너를 맡을 수 있게 된 뒤로 두 사람은 내내 파트너였다. 사샤는 본인이 주역을 맡고 싶은 것만큼이나 옥사나가 뽑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옥사나는 학교생활 중 발목을 크게 다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한 적이 있었다. 가벼운 부상에도 몸을 사리게 되는 것이 사람인데, 통증을 이기고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해야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옥사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주역 파트너가 되었다.
정말이지 무척 뿌듯하고 기쁜 일이었다. 굳이 순서를 정한다면 카렐과 연인이 된 것 다음으로 기뻤다.
「바로 집에 갈 거야?」
옥사나가 물었다. 사샤는 주저 없이 답했다.
「응. 애인이 기다려.」
「맞아. 동거한다고 했지. 정말 환상적이야. 엄청 좋지?」
「응. 엄청 행복해.」
「나도 나중에 집 구경시켜 줘.」
「알았어. 꼭 초대할게. 시간 되는 주말 알려줘.」
복도 끝에서 두 사람은 헤어졌다. 사샤는 옥사나와 가벼운 키스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옥사나는 손을 흔들며 여자 기숙사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샤워실로 향한 사샤는 언제나처럼 섬세하지 못한 손길로 대충 땀을 씻었다. 뒤늦게 가방을 뒤졌을 때야 오늘도 속옷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지.
사샤는 또 노팬티로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학교를 나섰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어깨 한쪽에 비스듬히 멘 짐백 끄트머리에는 발레 슈즈를 넣은 검은 망사주머니가 질끈 묶여 있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탁탁 내려온 사샤는 약속한 도로가에 나와서 차 한 대를 기다렸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씻는 사이 메시지가 와 있었다. 카렐로부터였다.
[조금 늦어요. 미안합니다. 최대한 빨리 갈게요.]
메시지를 보는 것만으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작게 미소 지은 사샤는 빠르게 답장을 입력했다.
[괯낳아요 저도느저버렷으니까요]
하나를 보낸 후, 또 하나를 더 보냈다.
[근대 빨리 오세요]
사샤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도로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얼른 카렐에게도 조금 전 저에게 일어난 일을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이 주역으로 발탁된 것, 그 작품이 언제나 하고 싶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것, 마이크를 차고 인터뷰를 해 본 것 전부…….
그렇게 그의 품에 안겨 잔뜩 떠들고 싶다.
그러면 카렐은 언제나처럼 은은한 미소를 짓고 ‘그랬어요?’ 하며 제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잠시 후 검은 리무진 한 대가 도로를 미끄러지듯 와서 사샤의 앞에 섰다. 창이 반쯤 내려갔다. 안에 앉은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슈트를 입은 팔과 핏줄이 돋아난 손등, 그리고 손목에 찬 시계만이 내려다보였다.
“안녕.”
나직한 음성에 사샤는 짐백을 휙 허리 뒤로 던지듯 둘러메고 차 문을 열었다. 따뜻한 빛을 머금은 올리브색 눈동자와 빛을 반사하는 모래색 머리카락. 언제나 뛰어들어 안길 수 있는 든든하고 너른 어깨를 가진 어른스러운 연인.
사샤가 차에 오르자마자 은색의 묵직한 시계를 찬 카렐의 손이 다가와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카렐!”
“늦어서 미안합니다.”
사샤는 카렐에게 뛰어들어 와락 안겼다. 몸무게를 온통 실어 내던지는 듯한 포옹에 카렐이 눈을 휘며 웃었다. 뼈가 도드라진 사샤의 무릎이 그의 허벅지를 꾹 찔러 누르기 전에 카렐은 다리를 벌리며 사샤가 들어와 앉을 틈을 만들어 주었다.
“보고 싶었어요. 학교에 있는 내내 계속, 계속, 계속이요.”
달콤한 말로 애교를 부리며 사샤가 카렐의 목덜미에 뺨을 비볐다.
“나도 그랬어요.”
카렐은 사샤를 든든하게 받쳐 안았다. 달려들 때 질주하는 힘은 이제 아기고양이가 아니라 재규어에 가까웠다. 근력을 키우는 데에 집중해 이제 정말로 몸이 제법 무거워졌던 것이다.
사샤가 성장한 몸을 자각하지 못하고 예전처럼 달려들면 카렐은 제법 고통을 느꼈다. 물론 버티지 못할 만큼이라는 말은 아니다. 나뭇가지 무게에서 통나무 무게 정도가 된 것이랄까.
“카렐, 알려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카렐은 다정히 말하며 사샤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 주었다. 오늘도 학교 샤워실에서 물을 끼얹고 나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어 가닥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저에게 잘 보이려고 이 머리를 젖은 채로 싹싹 빗어 갈라진 밤껍질처럼 쓰고 나왔었는데……. 이제 제법 멋을 알아서는 그대로 헝클어진 채로 둔다. 사샤가 지나가는 말로 말하기를, 친구들이 머리 빗는 것을 보고 촌스럽다고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정말 사교란 하등 쓸모없는 것이라고, 카렐은 생각했다.
‘이편이 보기에 훨씬 섹시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입 안에 넣고 굴리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게 귀엽던 어린 사샤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얼른.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줘요.”
“후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하고 싶어 안달 난 표정을 지었으면서, 도리어 카렐이 청해 오자 사샤는 애타게 만들고 싶었는지 품에서 쏙 빠져나갔다. 그러더니 제대로 앉아 스스로 안전벨트를 맸다.
차에 오르면 아무리 짧은 거리를 가더라도 꼭 안전벨트를 하라고 신신당부하던 것은 카렐 쪽이었다. 그걸 매어 주는 것 역시 카렐이었고. 하지만 이제 사샤는 알아서 벨트를 맨다. 사샤가 스스로 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정작 카렐은 서운함을 느꼈다.
“카렐? 여기 보세요. 서운한 표정 짓지 말고요.”
“내가 언제…….”
“지금 표정이 그랬는데요.”
이제 제법 카렐의 표정을 살필 줄도 알게 된 사샤가 눈을 마주쳐 왔다.
“말씀드릴게요. 무슨 일이냐면요…….”
그리고 얼마 후, 사샤가 내뱉은 말에 카렐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정말입니까?’ 하고 몇 번이나 물었고, 그때마다 사샤는 몇 번이나 ‘정말이에요!’하고 답해 왔다.
카렐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또 사랑이 가득한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축하해요, 진심으로. 정말…….”
“고마워요, 카렐. 많이 축하받았지만 카렐이 축하해 주는 게 제일 기분 좋아요.”
그렇게 말하며 사샤가 카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굴곡 있는 도로를 지나가며 차체가 부드럽게 흔들리자 사샤의 머리가 통, 통, 어깨에 찍혔다. 불편할 텐데도 머리를 떼지 않는 사샤의 뺨을 감싸고 카렐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잘된 일이네요…….”
카렐은 조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날개를 달고 날아갈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이를 줄은 몰랐다.
사샤 세드린은 17세의 여름, 맨해튼 발레 스쿨 졸업 공연의 주역으로 발탁되었다. 그건 발레단 입단과 성공의 길로 가는 가능성이 커졌다는 뜻이었다.
다른 이들이 사샤의 가치를 몰라볼 리 없다. 외모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고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재능은 더했다. 거기에 이 어린 나이까지 합쳐졌으니 시너지가 엄청날 것이다. 사샤의 존재는 단숨에 화제가 될 것이 분명했다.
스타의 자질을 갖춘 사샤 세드린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과 기회가 있을 것인가.
얼마 전 카렐은 레빈에게 확신하며 말했었다. 사샤 세드린은 세기의 아이콘이 될 거라고.
‘그 시작이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카렐은 제게 기댄 사샤의 어깨를 다정히 문지르며 상념에 잠겼다.
내 몫의 사샤 세드린.
이제 모든 이가 알아채겠지.
이 영혼과 재능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카렐은 사샤의 이마에 소리 없이 입을 맞췄다.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고 무대로 나아갈 사샤의 모습이 그려졌다.
카렐의 애타는 마음도 모르고 사샤는 그저 끊이지 않는 애정 표현에 행복해하며, 보답하듯이 고개를 들고 새처럼 입술을 부딪쳐 왔다.
라 발스 : 그랑파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