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로드아일랜드 저택에서 (24/30)

  4. 로드아일랜드 저택에서

카렐은 가로등 아래 사샤를 업은 채로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젖혀 처마 바깥쪽, 구멍이 난 것 같은 하늘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물에 젖어 이마를 가리며 내려온 금갈색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눈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닦아내고 싶었지만 사샤를 업고 있어서 손이 자유롭지 못했다.

혈기왕성한 십대 때도 빗속을 이렇게 달린 적이 없었다. 카렐은 조금 전의 추격전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샤는 잘도 맨발로 타다닥 뛰며 도망을 갔다. 물을 먹어 갈수록 무거워지는 슈트에 바닥이 딱딱한 가죽구두를 신은 제 복장은 빗속에서는 분명한 핸디캡이었다. 나이 서른셋에 양복을 갖춰 입은 채로 달아나는 애인을 쫓아 허리 높이의 담을 뛰어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거기 계셨군요.”

상관을 발견하고 멀리서 가볍게 달려온 게오르크는 한 손에 거의 파라솔만큼 큰 검은 장우산을 펼쳐 든 채였다. 우산 바깥으로 주르륵 흘러내리는 물의 장벽만 봐도 비가 얼마나 쏟아지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우산을 가져왔……습…….”

바로 앞까지 다가온 게오르크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쓰고 있던 우산을 건네다 말고 한숨부터 쉰다. 우산이 소용없을 만큼 완전히 젖었다는 것을 알게 된 탓이다.

카렐은 어깨를 멋쩍게 으쓱였다. 그 움직임에 잠을 방해받은 사샤가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카렐은 다시 사샤의 엉덩이를 도닥여 줬다.

“세상에. 이 꼴이 뭐랍니까.”

게오르크는 카렐의 등에 업혀 졸고 있는 사샤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며 말했다. 찢어져 너덜거리는 티셔츠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을 본 게오르크의 표정은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러게 말이야. 내가 발견했을 때는 웬 노숙자에게 발길질을 하고 있더군. 길에서 몸싸움이 벌어져서.”

“예? 몸싸움이요? 위험했던 거 아닙니까.”

“나도 그럴 줄 알았는데…….”

카렐은 피식 웃었다. 카렐이 사샤를 발견했을 때, 그는 길거리 노숙자를 때려눕히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샤가 크게 울고 있어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랐으나 사샤에게 얻어맞은 노숙자는 일어나지도 못했다. 사샤를 발견하자마자 우산을 내던진 자신이 허겁지겁 뒤를 쫓아가며 그 곁을 지나갈 때까지도 말이다. 팔이 작게 경련하는 걸 보니 제대로 급소를 맞은 듯했다.

그리고 카렐은 911을 불러 주는 것으로 선량한 시민의 도리를 다하고는 그대로 다시 사샤를 쫓아갔던 것이다.

잠시 후 그 킥을 저도 맞게 될 줄은 모르고…….

“아니……. 이건 피입니까? 누구 피죠?”

게오르크가 심각한 얼굴로 카렐의 소매 얼룩을 보면서 또다시 외쳤다. 사샤가 깬다며 쉿, 하고 주의를 준 카렐은 한숨을 쉬었다. 코피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얼굴에 묻은 것도 다 빗물에 씻겨간 듯했다. 사실을 숨길 수 있게 되자 카렐은 제 비서에게 사샤에게 얻어맞아 코피를 흘렸다고 사실대로 말하기가 싫어졌다.

“게오르크, 앞으로 절대로 사샤에게 원한을 사지 마.”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발레 댄서는 복서의 몸을 가진 수도승이라고 했지. 그 말이 사실이었어. 사샤는…….”

카렐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게오르크는 의문이 남은 표정을 한 채로 일단 차를 가지러 갔다.

잠시 뒤, 카렐과 사샤의 코앞에 차가 섰다. 카렐은 물을 뚝뚝 흘리면서 사샤를 조심스럽게 차 안에 태웠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커다란 비치타월로 사샤의 젖은 몸을 닦고 크게 둘둘 감싸 주었다.

“많이 피곤할 거야. 빨리 쉬게 해 주고 싶은데.”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카렐은 사샤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안 그래도 면역력이 떨어져 각종 번거로운 병을 매달고 있는 상태인데, 심지어 폭우를 맞았다. 끼니도 거르고 미친 듯이 달리기를 하고 노숙자와 몸싸움까지 벌였다.

그런데도 태평하게 자고 있다.

‘내가 사샤를 너무 약하게 봤나. 생각보다 약체가 아닐지도.’

사샤의 머리카락을 수없이 어루만지던 카렐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이 몸이 아주 조금이라도 축나거나 상하는 것은 절대로 원치 않았다. 소중한 이가 앓으면서도 병원을 뛰쳐나가 길거리를 떠돌아다닌 걸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철렁 가라앉는 듯하다.

카렐은 사샤의 동그란 이마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사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초점이 덜 잡힌 눈이 허공을 헤맸다.

“와아, 카렐…….”

눈을 뜨자마자 카렐이 보여서 좋았는지 사샤의 얼굴에 미소가 퍼졌다. 카렐은 사샤의 뺨을 툭 건드렸다.

“웃기는.”

“우리 키스해요.”

사샤가 웅얼거렸다. 카렐은 피식 웃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잠에서 깬 사샤가 한 말도 이것이었다. 사샤가 원하는 것은 그저 애정 표현에 답해 주는 것, 그리고 아마도…… 계속 함께 있는 것.

그건 카렐도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다.

카렐은 고개를 숙여 사샤의 촉촉한 입술에 아주 가벼운 키스를 해 주었다. 사샤는 키스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잠에 빠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른 숨이 흩어졌다.

“게오르크.”

“네.”

“목적지를 바꾸지.”

“어디로 말입니까?”

충직한 비서는 이유도 묻지 않고 내비게이션을 조작했다.

“로드아일랜드 저택으로.”

카렐의 말에 게오르크가 비스듬히 뒷좌석을 건너다보며 말했다.

“도착 시간이 많이 지연될 텐데요.”

카렐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상관없어.”

“…….”

“눈을 떴을 때…… 거기에 있게 해 주고 싶어.”

카렐의 말에 게오르크가 답했다. ‘방문하신다고 저택에 알리겠습니다.’

그리고 차는 목적지를 바꾸어 먼 길을 달렸다.

* * *

깊은 밤, 사샤는 낯선 곳에서 눈을 떴다. 그걸 바로 알아챈 이유는 달빛이 스며든 방 안 높은 천장에 천장화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돔 여러 개가 있는 것 같은 아름다운 저택 천장에는 아기 천사들과 풍성한 꽃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마치 오래된 궁전 같았다.

사샤는 부드러운 이불에 몸을 비비며 눈을 깜빡였다.

“에취.”

기침을 하는 순간 코에서 뭔가가 퐁 빠져나왔다. 코를 틀어막은 휴지였다. 이상하다. 또 코피가 났나? 그러나 휴지에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곁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어요? 콧물이 하도 흘러서 잠깐 막아 놨습니다.”

“카렐!”

사샤는 당황하면서 제 코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카렐의 말과는 다르게 코 밑은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바로 곁에 누워 있던 카렐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마주쳤다. 그는 짙은 남빛의 실크 가운을 걸친 채였다. 가늘게 눈을 뜬 카렐이 고개를 기울이며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약이 잘 듣는군요. 콧물이 이제는 멎었나 봅니다.”

사샤는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코 아래를 슥 훔쳤다.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카렐의 말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카렐이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누구보다도 섹시하게 그를 유혹하고 싶었으나 코에 휴지를 틀어막은 채로 키스를 요구했던 것이 약간의 트라우마로 남았던 사샤는 곧 의기소침해졌다.

“카렐, 여기는 어디예요?”

“음…….”

카렐은 대답을 하는 대신 상체를 일으키고 자연스럽게 스탠드 불을 켰다. 그는 이 낯선 침실에 무척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카렐이 다이얼을 돌려 전화를 한 통 걸자 잠시 후 누군가가 찻잔을 트레이에 받치고 들어왔다.

“마셔요. 잠이 잘 올 거예요.”

카렐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사샤는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파란 장미가 그려진 잔에는 금테가 둘려 있었다. 아름다운 잔이었다.

“어딜까요? 맞혀 보세요.”

카렐은 다시 베개를 등에 받친 채로 편하게 누웠다. 사샤는 호록, 차를 마시고는 골똘히 생각했다.

“음……. 여기는 다른 호텔이에요.”

“아닙니다.”

“음……. 그러면 미술관이에요.”

“미술관? 그럴 리가요.”

의외의 대답을 들은 카렐은 연달아 부정했다. 사샤는 손을 들어 제 주장의 근거를 뒷받침했다.

“저기 보세요. 저기 비싼 그림들이 많이 걸려 있잖아요.”

사샤는 눈앞에 보이는 벽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 확실히.”

턱을 매만지던 카렐이 느긋하게 말했다.

“새로운 발상입니다. 칭찬해 줄게요. 미술관이라는 답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래요?”

“아무튼…… 미술관만큼 컬렉션이 좋기는 하죠.”

더 이상 떠오르는 답이 없었기 때문에 사샤는 침묵했다. 차는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맛이 없었다.

갑자기 신경질이 난 사샤는 왜 나에게 이런 것을 먹이냐고 침착하게 따져 물었고, 카렐은 수면제가 통하지 않으니 민간요법이라도 써야 하지 않겠느냐고 논리적인 말투로 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어릴 때 새끼 돼지를 키워 본 적이 있었는데 돼지들을 재울 때 생강과 라벤더, 제라늄을 섞어 먹이면 그렇게 잘 잘 수가 없더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샤는 미묘하게 그 말이 거슬렸다. 욕인지, 그냥 비유인지, 생각 없이 한 말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아무튼 생강이 들어갔다는 카렐의 설명을 들으니 더더욱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샤가 잔을 내려놓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카렐이 남은 것을 꿀꺽 마시고 잔을 치웠다.

“아무튼 여기가 어딘지 어서 맞혀 봐요.”

카렐이 누운 자세를 고치며 다시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그래요? 금세 맞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흠…….”

“힌트를 줄게요.”

“네.”

카렐이 운을 떼자 사샤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몸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누웠다. 그 무의식적인 행동에 웃음을 터뜨린 카렐이 눈을 휜 채로 말했다.

“아일랜드.”

딱 한 마디 힌트였다. 사샤는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아일랜드?”

“네.”

“네? 설마……. 우와!”

깨달음이 온 순간 사샤는 불시에 크게 외치며 카렐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온 힘을 다해 내던진 체중은 둘째치고, 동그란 정수리가 턱에 부딪혀 카렐은 혀를 씹을 뻔했다.

“사샤, 잠깐…… 진정해요.”

“여기가 그 저택이에요? 카렐의 진짜 집이냐고요!”

사샤는 흥분해서 콧김을 식식 뿜고 있었다. 사샤가 말라서 뾰족한 무릎으로 제 허벅지를 짓누르며 기어오르는 바람에 카렐은 2차로 혀를 씹을 뻔했다.

이 가녀려 보이는 몸이 얼마나 무식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깨달은 직후, 카렐은 조금 몸을 사릴 필요를 느끼는 중이었다.

“맞아요. 아침을 먹고 나서 집 구경을 시켜 줄게요.”

“네. 말도 보여주실 거죠? 말은 어디 있어요?”

맥락 없는 말에 카렐은 당황했다.

“말? 아……. 지금 대부분 훈련소에 가 있는데.”

“네? 그러면 지금 말은 없어요?”

“아닙니다. 지금은, 음……. 두 마리가 있겠군요.”

“두 마리면 아주 충분해요. 카렐하고 저하고 둘이서 사이좋게 한 마리씩 타면 되잖아요.”

깜찍한 말에 카렐은 사샤를 꼭 끌어안고는 그 눈가에 성가실 정도로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사샤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마치 칭찬을 받은 양 기뻐했다.

“그런 걸 기대했군요. 알겠습니다. 승마를 가르쳐 줄게요. 그래도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합니다. 앞으로 졸업도 해야 하고 입단 오디션도 봐야 하는데 그 중요한 시기에 다치면 안 되니까…….”

“꿈만 같아요. 카렐…….”

사샤는 카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러고는 흥분했는지 콧김을 뿜으며 헐떡여댔다. 카렐은 조증 증세를 의심했다.

이토록 과열된 반응이라니.

그래서 사랑스러운 거지만.

카렐은 말없이 사샤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래도 생강과 라벤더, 제라늄을 섞어 끓인 차는 효력이 없는가 보다고 생각하며.

“아무튼 지금 더 자둬요. 내일 해가 뜨면 같이 저택 구경을 해야 하니까.”

“와아…….”

“토요일을 날리긴 했지만 아직 하루가 남았군요.”

“…….”

“당신과 같이 주말을 보내서 기뻐요.”

원래는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하고 싶었던 말이다. 조금 늦은 인사를 건네자 사샤가 벌떡 고개를 쳐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네. 서둘렀죠.”

“왜요?”

답이 뻔한데도 사샤는 직접 듣기를 졸랐다.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뜻이다.

“왜겠습니까?”

“…….”

“너무나, 지나치게, 극심하게 보고 싶어서.”

카렐의 품에 안긴 사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퍽 감동받은 눈치였다.

잠시 사샤의 뺨을 어루만지던 카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애틋한 애정 표현 뒤에 꼭 확인하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방식과 애정 표현에 서로 차이가 생겨 갈등을 겪는 연인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사샤를 상대로는 실수하고 싶지 않았다. 뭔가 어긋나고 있다면 고쳐야 했다. 사샤는 특히나 예민한 데다가 인간관계도 좁아서 대체로 모든 생각이 카렐을 향해 고여 있게 마련이었다. 카렐은 경험 없는 연인이 혼란스럽지 않게 자신이 이끌어 주고, 또 맞춰 주고 싶었다.

“사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죠.”

“…….”

“내가 없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 줘요.”

카렐의 말에 사샤는 스르르 눈을 뜨고 옆으로 굴렸다.

카렐이 내뱉은 말은 그간 자신이 들어왔던 것들과는 전혀 달랐다. 끼니를 얼마나 걸렀는지, 혹시 편식을 했는지, 또 어쩌다 포르노 사이트를 알게 됐는지, 얼마나 몸을 혹사했는지…… 그런 말이 아니라.

추궁하는 대신 사샤 자신의 생각을 물어본다. 그것이 의외여서 사샤는 카렐과 눈을 마주치고 더듬더듬 답을 했다.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솔직한 제 생각을.

“모르겠어요. 전 어른이 되고 싶은가 봐요.”

“…….”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카렐은 저를 어리게 볼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죠. 당신은 실제로 어리니까…….”

“그게 싫은 것 같아요…….”

사샤는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난 맨날 계단 아래에서 카렐을 올려다보는 것 같아요. 카렐은 저 위에 서서 여유 있는 모습이고, 항상 당당하고요. 기다리고 참을 줄도 알아요. 그게 싫어요.”

“…….”

“소중하게 여겨 주는 건 알고 있어요. 훌륭한 댄서가 되고 싶은 건 내 꿈이기도 하니까 몸을 아껴야 하는 이유도 알겠어요. 하지만 저는 평생 몸을 써요. 평생 아껴야 한다는 소리예요. 그래서 저는…….”

“…….”

“저는 카렐이 언제까지 저를 아낄지 궁금해요.”

“그랬군요.”

카렐은 눈을 내리깔며 사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경건한 입맞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땐…….”

“그 말?”

“카렐이 나를 형에게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카렐이 또 참는다고 생각했어요.”

“…….”

“어떻게 참을 수가 있죠? 덜 사랑해서인가요?”

카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레빈의 요청 앞에서 실제로 사샤의 졸업까지 동거를 미루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것은 사실이다. 일 때문에 바쁜 자신이 사샤가 요구하는 만큼의 시간을 들일 수 있을지도 자신할 수 없었고, 십대 시절 내내 뿌리 없는 부표처럼 살았던 사샤에게 마지막으로 가족과 함께 살 기회를 주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사람을 붙이고 살뜰히 돌보아 준다고 해도 지나치게 바쁜 자신은 툭하면 사샤를 혼자 두기 일쑤다. 잦은 전화 통화로 일상을 공유한다고 해도 타인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받아 줄 수가 없었다. 사샤는 막무가내 같지만 그런 면에서는 이해가 깊어서 회의 도중 전화를 끊어 버리면 두 번은 걸지 않았다. 바쁜데 미안해요, 라는 문자만 보내곤 했다. 그런 것들이 카렐의 가슴을 욱신거리게 했다.

“그럼 뭐예요? 저는 의심했어요. 날 덜 사랑해서 참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아닙니다. 아니에요.”

카렐은 진심을 정제한 단어를 찾아 헤매며 사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이마로 흘러내린 새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보석처럼 반짝이지만 그만큼 손이 많이 가는 소년. 예민하고, 기분파에, 툭하면 다쳐 오고, 혼자만의 스트레스로 끙끙 앓다가 면역력이 떨어지기도 하는…….

그래서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하지만 무척 사랑스러운.

“카렐, 제가 성가시죠?”

마치 마음을 읽은 듯한 사샤의 물음에 카렐은 나직하게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자주 다치니까요.”

카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십대 때는 다 그렇죠. 나도 생각해 보니 하이스쿨 때 많이도 다쳤어요.”

“어디를요?”

사샤가 호기심을 보여, 카렐은 ‘음……’ 하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운동을 하다 정강이뼈 골절을 당하기도 하고, 산악자전거를 타다 경사진 곳에서 굴러 약한 뇌진탕도 왔었죠. 사관학교에 있을 때는 부하가 폭발물을 잘못 다뤄서 바로 옆에서 폭발한 적도 있었고.”

“카렐! 죽을 뻔했네요?”

사샤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무서워요.”

“그 순간에는 진짜 죽는 줄 알았지만…… 멀쩡하잖아요. 아, 그때 다친 상처가 아직도 있습니다.”

“보여주세요.”

카렐은 몸을 일으켜 가운을 걷었다. 건장한 목근 같은 다리가 드러났다. 카렐의 말대로 무릎부터 허벅지까지 길고 날카로운 흉터가 남아 있었다. 사샤는 긴 흉터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안 아파요?”

“전혀.”

사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카렐의 허벅지에 입을 맞추었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 조금 우스운 이야기인데 벌에 쏘인 적도 있었습니다. 또, 사격을 하다가 개머리판에 잘못 맞아서 얼굴뼈에 실금이 간 적도 있었고…….”

이어지는 카렐의 고백에 사샤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사샤는 카렐의 몸을 더듬다가 가운을 전부 벗기려 들었다. 몸 여기저기에 남은 흉터를 전부 확인할 작정인 것 같았다. 카렐은 사샤를 안심시키며 후유증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

“생각해 보세요. 내가 약골이었다면 벌써 골병이 들어 지팡이를 짚고 다녔겠죠.”

“……그런가?”

“하지만 이렇게 튼튼하죠?”

사샤는 한때 옥사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옥사나가 네 애인이 항상 차를 타고 다니는 건 관절이 약해져서 그러는 것 아니냐며 깔깔 웃었을 때, 한순간 카렐을 의심했던 전적이 있기에.

“근데 카렐, 사격을 해요?”

“네. 취미입니다.”

“진짜 총이요? 카렐, 진짜 총을 쏴요?”

“진짜 총이죠.”

카렐은 솔직하게 답하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았다. 진짜 총이라는 사실에 눈을 초롱거리는 사샤를 보니 또 하나 성가신 일이 생길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카렐, 총은…… 어른만 쏠 수 있어요?”

“흠…….”

“총도 술이랑 같아요? 제가 몇 년 더 기다려야 되나요?”

사샤의 눈이 기대감으로 출렁였다. 카렐은 자신이 가진 걱정이 과민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 것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사샤에 한해서는 자신은 과보호가 맞았으니까…….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사샤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맨몸싸움도 한번 해 본 적 없었을 사샤는 저를 위협하던 노숙자를 본능적으로 흠씬 두들겨 팼다. 밤길에 허리를 낚아챈 거구의 남자를 발차기 한 번에 쓰러뜨리기도 했고.

발레로 다져진 체력을 이용해 사샤는 웬만한 스포츠에는 쉬이 입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조금 망설이던 카렐은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알겠습니다. 서머 코스 전에 사격장을 구경시켜 줄게요.”

“와!”

“그때까지 더 다치는 곳이 없다면. 그게 조건입니다. 약속합시다.”

“약속해요! 완전 자신 있어요.”

카렐은 또다시 뿔로 들이받는 순록처럼 제게 달려든 사샤를 꼭 받아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허공을 향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내가 십대일 때는 걱정 많은 부모님이 성가셨는데……. 이제 내가 그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군요.”

덜 자란 연인을 기르면서 부모에게 공감하는 날이 올 줄이야. 카렐은 기막혀하면서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스스로에게 헛웃음을 지었다.

“지나치게 사랑하고 아껴서 그러는 거니, 내가 그냥 실컷 걱정하게 해 줘요.”

사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제는 카렐의 잔소리가 사랑임을 알고 귀담아듣겠다고, 또 꼰대라고 비난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카렐은 일곱 살일 때도, 열일곱 살일 때도 이런 성격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카렐, 저도 걱정이 돼요…….”

“왜?”

“제가 없을 때 참 험하게 사셨네요. 심지어 저는 카렐이 아팠던 걸 보지도 못했어요. 조금 궁금한데…… 벌써 이렇게 상처투성이고요.”

“…….”

“이제 그러지 마세요.”

어린 연인의 의젓한 걱정에 카렐은 쿡쿡 웃어 버렸다. 동시에 흔쾌히 약속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절대로 다치지 않을게요.”

“이제 내 허락 맡고 다쳐야 돼요.”

“그러죠. 더 이상 이 몸에 흉터를 늘리지 않겠습니다.”

“네, 꼭 그러세요.”

카렐이 사랑 깊은 눈으로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사샤는 카렐의 단단한 목덜미에 의지하며 매달렸다. 카렐은 사샤의 동그란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면서 그 입술에 새가 쪼듯이 가벼운 키스를 내렸다.

그러다 문득 카렐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창으로 고개를 돌린 사샤는 희미하게 새벽 여명이 밝아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렐이 사샤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말했다.

“눈뜬 김에 일어날까요?”

“싫어요.”

사샤는 기겁했다. 카렐이 아침잠이 별로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일러도 너무 일렀다. 사샤는 다시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해 보았다.

“사샤…….”

어르는 목소리에 사샤는 일부러 이불 속에 숨었다. 그러면서 카렐을 다시 끌어당겨 함께 이불 속에서 뒹굴었다. 침대는 카렐이 다섯 명, 사샤가 열 명 정도 누워도 될 정도로 무척 커서 마치 새 둥지에 들어간 것 같은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사샤는 이불에다 살을 비비며 한참 꿈지럭댔다.

“저는 계속 이렇게 있을래요.”

“주말을 이불 속에서 보낼 셈인가요?”

“그건 아닌데…….”

“저택 구경하기로 했잖아요.”

사샤는 아직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렐이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비록 연기일지라도 카렐이 제게 부탁하고 안달하는 흉내를 내는 게, 사샤는 좋았다.

“하는 수 없군요.”

그러더니 카렐은 혼자서 드레스룸으로 향해 완벽하게 옷을 갖춰 입고 왔다. 그러고는 이불을 뒤집어쓴 사샤의 곁에서 다시 한번 일어나서 함께 아침을 맞이하지 않겠느냐고 신사적으로 청해 왔다. 그래도 싫다고 사샤가 고개를 젓자…….

카렐이 갑자기 왁, 하며 사샤를 덮쳤다. 빳빳이 다린 셔츠와 각 잡힌 바지에 심한 주름이 잡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샤의 위에 엎드려 누운 채로 그의 뺨과 목덜미, 납작한 복부를 앞니로 깨물어댔다. 사샤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간지러움에 발버둥 치면서 이불 속으로 피했다.

“간지러워요! 간지러워…….”

손으로 얼굴을 밀어내면 카렐은 손가락까지 입술로 물어왔다. 사샤가 몸을 웅크릴수록 카렐은 짓궂게 옷 안쪽을 손으로 거칠게 훑어댔다. 그의 손이 파고든 곳마다 짜릿했다.

결국 사샤는 카렐이 저를 더는 깨물지 못하게 온몸을 이불로 칭칭 감는 데 성공했다. 얼굴까지 파묻은 채로 애벌레처럼 이불을 단단히 여미자 카렐이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리 나와요.”

사샤는 몸을 꿈지럭거리면서 쿡쿡 웃었다. 카렐이 침대 매트리스를 손으로 퉁퉁 두들기는 진동이 전해졌다.

“어서.”

“싫어요.”

“순순히 말로 할 때 나오지 않으면…….”

“않으면?”

사샤는 이불 틈으로 눈만 빼꼼 내민 채 카렐을 바라보았다. 구깃구깃해진 셔츠를 팔까지 걷어붙인 카렐이 느슨하게 앉아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억지로 당하게 될 겁니다.”

그 말에 사샤는 등줄기가 쭈뼛하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의 기대감으로 작은 소름이 돋았다. 카렐은 일부러 경고하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카렐이 저와 ‘놀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또 억지로 당하게 될 거라고 말하는 행위는 아마도 ‘간지럼 태우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함의를 느낀 사샤는 카렐을 도발하고 싶어졌다. 카렐이 참지 못하고 제게 달려들어 강제로 덮치는 상황이 궁금했다. 그러면 정말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오싹했다.

사샤는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들었다. 얼굴까지 완전히 숨긴 채로 다시 한 마리 애벌레가 되어 웅크리고 있자 카렐이 픽,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웃는 것이 들렸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악!”

카렐이 불시에 사샤의 허리를 붙잡았다. 숨죽이고 있던 사샤는 카렐에게 허무하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온몸에 힘을 주고 바닥에 납작 붙었다. 끙끙거리며 복근과 등의 힘으로 버텼다.

“으읏, 으으윽.”

사샤가 안간힘을 쓰며 버티자 이제 당황하는 쪽은 카렐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아주 쉽게 사샤를 달랑 들어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힘으로는 사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렐은 단단한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사샤를 다시 한번 힘주어 끌어당겨 보았다.

“으읏, 으윽…….”

“사샤? 아침부터 이런 일로 힘 빼지 맙시다.”

카렐의 말대로 섹시한 레슬링은 어느새 진지한 힘겨루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사샤의 예상과는 달리.

그런데도 무언가의 오기로 사샤는 버티기에 돌입했다. 카렐에게 자신이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흣, 으으…….”

“잠깐, 잠깐……. 우리 너무 진지해지고 있어요.”

카렐은 턱을 악물며 말했다. 전신의 근육에 힘이 들어간 돌덩이 같은 사샤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힘을 쓰게 된 상황에 카렐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어제 사샤에게 얻어맞고 코피를 흘릴 때부터 당황스러운 일 천지였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죠.”

카렐은 사샤를 일단 한 번 놓아주고 손바닥을 털면서 심호흡했다. 완력에서 진 것이 아니라, 본래 레슬링은 버티는 쪽이 유리한 것이라고 내심 합리화를 하며.

그러고는 사샤의 어깨와 한쪽 허벅지를 손으로 넓게 잡았다. 순간적으로 들어간 악력에 사샤의 피부가 다치지 않도록.

그러고는 읏차, 하며 사샤를 단번에 들어 올렸다.

“악!”

사샤는 허무할 정도로 휙 딸려오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카렐은 그의 몸을 휙, 하고 가볍게 돌려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체지방률이 지극히 낮은, 마른 근육질의 몸이 균형을 잡으려 버둥대다가 반사적으로 카렐에게 꽉 달라붙었다.

“하아, 하아…….”

불시에 몸이 뒤집힌 사샤는 당황을 숨기지 못한 눈을 크게 뜬 채로 카렐을 바라보았다. 카렐은 하,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에서 어찌나 용을 써댔는지 이불을 들추고 나니 사샤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더운 숨을 몰아쉬는 사샤의 등줄기에서 주르륵 땀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어떻게…….”

사샤는 억울한 얼굴로 부들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낙엽처럼 카렐에게 가뿐히 들릴 수 있는지 아직도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털이 부숭부숭한 아기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

“나름 맹수였군요.”

카렐은 퍽 의연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내심으로는 언젠가 사샤와 진지하게 완력으로 붙을 날이 온다면, 그때에도 지금처럼 쉽게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사샤를 절대로 상처 입힐 수 없으니 진심으로 붙는다면 그에게 떡이 되도록 맞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몸싸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귀엽다고 우습게 보면 안 되겠어요…….”

카렐이 한숨 쉬며 말하자 사샤가 억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힘을 키우려고 운동 진짜 열심히 했어요. 매일 클래스 끝나고 헬스장에도 갔는데.”

“그랬나요?”

“네. 카렐이 출장 갔을 때 매일매일요. 중량도 많이 늘렸어요. 스쿼트 중량을 120㎏으로 하고 있으니까 카렐을 업고 앉았다 일어났다 할 수도 있어요.”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네. 무리하지 말라고 해서 120㎏까지만 해요. 150㎏도 할 수 있는데.”

카렐은 할 말을 잃었다. 이 바짝 마른 몸으로 그 정도의 중량을 친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카렐을 한번 업어 볼까요?”

사샤는 그새 신이 나서 진짜로 시험해 보고 싶은 눈치였다. 몸을 납작하게 숙이고 고목 같은 카렐의 허리를 양팔로 끌어안은 채 어떻게든 한번 들어 올려보려고 끙끙댔다. 엎드린 사샤의 등 근육이 조각처럼 갈라졌다. 카렐은 사샤가 쓸데없이 힘을 빼지 않도록 도로 일으키며 이마에 키스해 주었다.

“그렇게 몸이 축날 정도로 운동을 하다니…….”

“그래도 선생님들이 더 힘을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좋은 댄서가 되기 위해서?”

가까운 곳에서 카렐의 녹색 눈과 사샤의 눈이 마주쳤다.

희미하게 새어든 아침 햇살 덕분에 카렐의 눈동자에는 금색과 올리브색의 광채가 동시에 보였다. 사샤는 그 아름다운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카렐이 저를…….”

“……?”

“엉망으로 만들어도 버틸 수 있었으면 해서…….”

“네?”

사샤는 퍽 당황한 듯 보이는 카렐의 따뜻한 뺨을 붙잡았다. 그러면서 눈을 뜬 채로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항상 봐주고 있잖아요.”

그 순간 사샤는 카렐의 동공이 자극으로 일렁이며 훅, 몸을 불리는 것을 목격했다.

겉으로 드러난 카렐의 표정은 여전히 침착하고, 사샤의 등허리를 받친 팔은 신사적이었다. 하지만 사샤는 그의 내부를 충동질하는 무언가의 실마리를 분명히 보았다.

“그러니까 한 번쯤은 카렐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 주세요.”

“……사샤.”

“저도 카렐의 진짜를 보고 싶어요.”

사샤는 출장 전의 관계를 떠올렸다. 카렐이 즐기던 방식을. 삽입 없이 아래를 치받던 폭력적인 몸의 무게를 상상했다. 또 빗속에서 저를 추격하던, 사나운 맹수 같던 카렐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대감에 몸이 오싹해졌다. 그렇게 그가 저를 동등한 욕망의 대상으로 봐 주었으면 했다.

“정말로 버틸 수 없으면 신호를 보낼게요.”

“신호를 보낸다라…….”

“네.”

“어떤 식으로?”

카렐이 부드럽게 물었다.

“음, 카렐의 어깨를 밀거나 막 때리는 건 어때요?”

“하하.”

“아니면 그냥 그만하라고 말하거나…….”

“세이프 워드 같은 거군요.”

카렐은 픽 웃으며 사샤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그런 건 없는 편이 좋아요.”

사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의외의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왜요?”

사샤의 뒤통수를 크게 감싼 카렐이 손이 사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난 그럴 때 더 흥분하니까.”

* * *

카렐의 밑바닥 욕망을 보기 위해서 준비할 것은?

따뜻한 물 샤워, 적당한 체력, 그리고 든든한 아침.

사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카렐은 거기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림 같은 아침 식탁 앞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사샤가 뭐든지 와구와구 퍼먹자 흐뭇한 미소로 그걸 보고 있던 카렐이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잘 먹는 건 좋지만, 과식하지는 말아요.”

“왜요?”

“배가 잔뜩 부른 채로 나와 하다가, 토할 수도 있으니까.”

“……!!”

“가끔 있더군요.”

카렐은 조금 면목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태도가 도리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사샤는 겁에 질렸다. 또한 그와 관계를 가질 때 커다란 것이 배 속을 잘못 찔러오면 가끔 속이 울렁이던 것을 기억해 냈다. 두려운 예감에 사샤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카렐은 태연히 물을 마셨다.

사샤는 갑자기 궁금증이 일었다.

“침대 위에 토하면 어떻게 돼요? 그러니까 제 말은, 세탁이 힘들잖아요.”

“…….”

“혹시 샌더도 토했나요?”

대답 대신 신문을 펄럭 펼쳐 들면서 카렐은 종잇장 위로 무언의 시선만 보냈다. 진짜로 알고 싶으냐고 되묻는 눈이었다.

생각해 보니 안다고 해도 잠깐의 호기심만 가실 뿐 제 정신건강에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사샤는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마저 식사를 마쳤다.

그다음 사샤는 카렐과 함께 로드아일랜드의 저택 이곳저곳을 탐험하며 보내는 데에 시간을 바쳤다. 어제 비를 맞으며 길거리를 떠도는 바람에 미열이 있었고 가끔 쿨럭쿨럭 기침을 했지만 본인 스스로는 그런 것을 자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이 저택은 꿈만 같았다.

처음 와 보는 곳인데도 묘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꿈에서 자주 본 곳 같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풍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집 안에 따뜻한 햇볕이 가득 내리쬐고 있어서 그런지도. 꼭 저택으로부터 환대받는 느낌이었다.

한때 사샤는 꿈을 꾸었다. 라벤더 밭을 걷는 꿈을.

꿈속에서는 작은 보라색 꽃이 곧 수확이라도 앞둔 것처럼 빼곡히 피어 언덕에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었다. 연두색 꽃송이를 떨어뜨리는 회화나무, 손끝에 걸리는 작은 들풀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언제나 멀리 저택이 보였다.

잔디 위로는 마치 가야 할 길을 안내하듯 돌길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그때 자신은 가지런히 놓인 돌조각을 밟으며 저택 안으로 이끌려 들어갔었다.

꿈과는 반대의 루트로 저택을 걸어 나가면서 사샤는 기시감에 시달렸다. 꿈인지 현실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저택 바깥의 아름다운 정원을 한 바퀴 산책하고 두 사람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팔각형으로 벽을 돌출시켜 높이 창을 낸 홀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늑한 풍경 속에서는 작은 먼지들이 춤추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바닥 소리가 정겨웠다.

사샤는 카렐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 벽에는 이 저택에 머물렀던 이들의 초상화와 오래된 흑백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층고가 무척 높은 커다란 홀의 천장부터 땅까지 뚫린 격자무늬의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이 보였다. 저 멀리 초록 잔디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 사샤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뿐만 아니라 응접실과 여러 개의 침실, 서재, 음악실, 다실 등 모든 방은 아름다운 색감의 실크와 독특한 벽지, 값비싼 골동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집에 애정을 가지고 오래 머물렀던 사람의 취향이 묻어나는 인테리어였다.

“집이 카렐의 취향이에요.”

카렐의 사무실을 떠올리며 사샤가 말했다. 성숙한 애인은 오래된 유물이나 골동품, 고전적인 디자인에 애착을 느꼈다.

그러나 그 말에 카렐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의 취향이죠.”

“누군가?”

바로 ‘사샤 세드린’의 취향이었다.

그러나 카렐은 그걸 그대로 고하는 대신, 사샤에게 물었다.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대저택을 크게 둘러보았다. 살면서 이렇게 호화로운 곳에 발을 들일 기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카렐이라는 행운을 만나기 전에는 더더욱.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저택은 압도적으로 아름다우면서 한편으로는 아늑하게 느껴졌다. 호텔보다 훨씬 넓었지만 혼자 있어도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제 단 하룻밤을 잤을 뿐인데 무척 정이 들었다.

“아주 마음에 들어요.”

사샤의 말에 카렐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원하는 답을 들은 직후, 카렐은 미리 준비했던 차 키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사샤의 눈앞에서 가볍게 흔들었다.

왜 나한테 차 키를 자랑하지? 그렇게 사샤가 엉뚱한 생각을 할 때였다.

카렐이 입을 열었다.

“운전을 할 줄 알아야…… 드나들 수 있겠죠.”

“……운전이요?”

“네. 운전기사가 따로 붙겠지만, 아무튼 여긴 차 없으면 오기 힘들 겁니다. 맨해튼과는 거리가 좀 있으니 언젠가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별장으로 쓰죠.”

“이사요? 어디로요?”

“여기 말고 다른 데가 또 있나요?”

사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이사를 간다구요? 누가요?”

카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농담하는 거죠? 당신밖에 더 있나요?”

그 직후 사샤는 카렐에게 강렬히 매달렸다. 매번 뿔을 들이받는 황소처럼 돌진하는 애인에게 이제 익숙해진 카렐은 날렵하게 허리와 허벅지를 탁 받치며 안정적으로 사샤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안긴 사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진짜 꿈에도 몰랐어요. 진짜예요?”

“그럼요.”

“그렇게 멋진 계획을 왜 빨리 얘기 안 해 주셨어요?”

“뭐, 고려해야 할 문제가 여러 가지 있으니까.”

“그게 뭔데요?”

“여긴 맨해튼에서 차로 서너 시간은 걸려요. 원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거주하면 많은 불편이 따를 겁니다. 은퇴 후에 오는 것을 추천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사샤의 목소리가 감격으로 떨렸다. 카렐이 듣기에는 살짝 위험할 정도로 감정적이었다.

“우리가 은퇴 후에도 같이 산다니.”

“은퇴 전까지도 같이 살 거고요.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집을 구해놨죠. 돌아가면 같이 인테리어를 해요.”

카렐의 말에 사샤가 헐떡였다.

“감격스러워요.”

“마치 지금까지는 같이 안 산 것처럼 감동하는군요? 우린 당신이 열여섯 살일 때부터…….”

“아니에요.”

사샤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텔은 아무나 살 수 있잖아요. 누구든 거기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그 펜트하우스 층 전체는 내가 실소유주인…….”

“아무튼 진짜 집은 아니잖아요!”

“…….”

“그리고…… 저 말고 다른 남자들도 살았다고 들었어요.”

분홍색 입술이 비죽거렸다. 카렐의 눈에는 귀엽게 오물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제법 질투의 색을 드러내는 말이었다.

카렐은 고개를 꺾고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일전에는 사샤가 이렇게 말할 때 정말로 상처받은 줄 알고 걱정을 했지만, 이제는 철부지 연인의 귀여운 질투가 끔찍하게 좋았다.

사샤는 심각한데 저는 기분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카렐은 표정 관리를 했다. 그리고 제게 코알라처럼 매달린 사샤를 다시 단단히 고쳐 안았다.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군요.”

“누구든 신경 써요.”

사샤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카렐은 지난날 아무나 펜트하우스에 드나들었다는 것에 대한 오해를 풀어 줄 필요성을 느꼈다. 그곳은 아무도 들이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이고, 그딴 식으로 소문을 내는 이들은 사실 펜트하우스에는 발을 들여 본 적도 없다고.

또 그들이 설령 호텔에 왔을지언정 아래층의 다른 호텔 방에 머물렀을 뿐이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누구나 들어오고 싶어 제게 술을 먹이고 갖가지 방법으로 유혹을 해댔지만 자신은 절대 무너지지 않았다고 열변을 토했다.

“흠…….”

“진짜입니다.”

“믿어 줄까요, 말까요?”

“제발…….”

카렐이 일부러 앓는 소리를 내자 사샤는 킥킥 웃었다.

“관대한 사샤 세드린 씨.”

일부러 약한 목소리를 내며 카렐이 사샤에게 키스로 용서를 구했다. 입술을 스치는, 조금은 건조한 감촉과 수염뿌리가 살짝 돋아난 까끌까끌한 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사샤는 일단 지금은 믿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기회가 전혀 없을 거라고 단단히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카렐은 고개를 조아리며 아무렴, 하고 말했다.

카렐의 품에서 뛰어내린 사샤는 다시 격자무늬 창을 바라보았다. 윗부분이 둥근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 창마다 스테인드글라스의 문양이 붙어 있었다. 햇살이 투과하며 아름다운 색채를 만들어 냈다. 사샤의 얼굴 위가 빛무리로 반짝였다.

“아무튼, 우리가 호텔이 아닌 집에서 정식으로 함께 살게 되면…….”

“네.”

“형에게도 알려줘야 할 텐데.”

형 레빈이 카렐에게 저를 데리고 살겠다고 요청한 것을 기억해 낸 사샤가 말했다.

카렐이 미소 지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까.”

“와. 믿음직스러워요.”

카렐이 일전에 한 번 레빈 앞에서 ‘내가 미성년자인 당신 동생을 꼬드겨 사귀고 있고 이제 데리고 살 예정’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다가 실패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사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희 형이 조금 고집이 있고 과격하고요. 꼬장꼬장거릴 때가 있어요.”

“그렇군요.”

“은근히 주먹도 세요. 칼도 잘 다뤄요. 저도 형이 무서워서 아직까지 말을 못 했는데…….”

“…….”

“카렐이 말해 준다니까 진짜 다행이에요. 카렐은 역시 어른이네요.”

카렐의 얼굴에서 아주 약간 미소가 사라졌다. 사샤는 그런 카렐의 뺨에 키스를 했다. 부드러운 키스에 카렐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피식 미소 지었다.

“형제가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점은 비슷하군요.”

“어떤 점이요?”

“주먹이 센 점.”

“주먹이요? 저는 사람을 때려 본 적 없는데요…….”

사샤가 겸손하고 수줍게 말했다. ‘주먹으로 때린 게 아니긴 하지.’ 카렐은 쿡쿡 웃으며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했다.

“그건 그렇고.”

“네?”

“잠깐 그쪽에 서 볼래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창문 앞에 사샤만 남기고 천천히 뒤로 걸어갔다. 주머니에 손을 걸친 채로 천천히.

“조금 더 앞쪽으로.”

사샤는 카렐이 턱으로 가리킨 창가에 가서 섰다.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에 잠시 시선을 주다가, 문득 카렐을 뒤돌아보았다.

창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받은 카렐의 모습이 사샤의 눈에 평소보다도 환하고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마주친 순간 카렐의 목울대가 크게 넘어갔다. 그는 순간적으로 말로 잘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리고 사샤가 짐작한 대로 카렐은 밀려오는 거대한 감상 앞에 말을 잃은 채였다. 역광을 받은 채로 저를 돌아보는, 무르익은 실루엣의 남자는 바로 카렐이 평생 원하고 갈망하던 것이었다. 한때는 현실에 존재할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믿었던…….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사샤 세드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감정에 이끌린 카렐은 그렇게 한참 사샤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친 채로 역시 물끄러미 카렐을 바라보던 사샤는 조금 눈을 내리고 습관적으로 발끝으로 롱 드 장브의 반원을 천천히 그렸다.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수많은 말을 삼키고 카렐이 겨우 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사샤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카렐은 언제나 내게 키스할 수 있어요.”

그러자 카렐이 천천히 걸어와 사샤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았다. 그러고는 사샤의 날씬한 손을 가져가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이런 식의 키스일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사샤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내 앞에 나타나 줘서 고마워요.”

“…….”

“나는 당신에게 평생 헌신하는 기쁨으로 살 겁니다.”

사샤는 카렐과 눈을 마주치려고 저 역시 무릎을 꿇었다. 앉은키가 달라 사샤는 양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서야 했지만 그렇게 하니 눈높이가 맞았다.

같은 시선, 마주친 눈높이.

두 사람은 같은 계단에 서 있었다.

“나도 그럴 거예요.”

두 사람은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침묵 속에서 키스했다. 햇빛 속에서 춤추는 작은 먼지들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 * *

며칠 후, 카렐은 레빈을 로드아일랜드 저택으로 불렀다.

언젠가는 실행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추진할 때가 왔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가 꼭 매듭을 짓겠다고 마음먹은 문제이기도 했다.

사실 카렐은 이 ‘고백’을 약간만 더 미루어도 좋지 않을까, 혼자 고민했었다. 훗날 사샤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 자연스럽게 사랑의 감정을 키워 갔다고 말하면 조금 상식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면서…….

후원자가 미성년자인 학생을 꾀어냈다는 비난의 눈초리를 염려해서 그런 것도 맞고, 어떻게 해도 불리한 입장은 피하고 싶어 계산속을 발휘하는 자신의 교활함이 작용한 것도 맞았다.

하지만 더는 미룰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 자신이 사샤를 맡아도 되겠냐는 친형 레빈의 요청을 들었을 때 확신했다.

‘그때는 왜 그리 긴장했는지.’

카렐은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끄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레빈 앞에서 초조하게 담배를 몇 개비고 꺼냈던 제 모습이 떠올라 픽 웃음이 났다. 그땐 마치 장인이나 장모님께 허락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상대를 설득할 만한 번드르르한 말과 약간의 뇌물을 미리 준비했겠지만……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요령을 발휘하지 못했었다.

“레빈 세드린이 도착했답니다.”

게오르크의 말에 카렐이 답했다.

“들어오라고…….”

자연스럽게 명령하던 그는 제 말을 즉시 수정했다.

“아니. 내가 나가서 모셔 오지.”

사샤에게는 부모님이 없으니 그의 형인 레빈이 유일한 보호자라 할 수 있었다. 사샤를 정식으로 데려가려면 그에 걸맞은 예우를 갖춰야 했다.

개인 집무실을 나가기 직전, 카렐은 재킷을 걸치고 적갈색 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했다.

문을 열고 발걸음을 내딛자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레빈이 보였다. 카렐 클레멘츠가 왜 저를 직접 불러냈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오셨습니까, 세드린 씨.”

“아, 예. 다시 뵙는군요.”

카렐은 문을 열고는 정중하게 그를 안내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 * *

‘나는 사샤 세드린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열다섯 살일 적 처음 만나 지금까지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정성스럽게 보필해 왔죠.’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사샤를 곁에서 보고 도와줄 수 있던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비난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진심이라는 것만은 알아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카렐이 준비했던 말의 요지는 이런 것들이었다.

제법 매끄럽게 말했지만 한 문장을 고할 때마다 레빈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사샤와 머리색도, 생김새도 많이 달라 형제라고 말해야지만 그제야 굳이 닮은 부분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다른 얼굴이라도, 놀라는 표정만은 닮았다.

“사샤를…… 사샤를 사랑하신다고요?”

“네. 진심입니다.”

입을 꾹 다문 레빈이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제법 정의로운 면이 있어 굽히느니 부러지는 타입이었고, 카렐 역시 짧은 시간에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사샤의 실제 부모들보다 허락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사샤는 너무 어려요.”

“…….”

“그러니까 제 말은, 육체적인 나이뿐만 아니라……. 그 애는 클레멘츠 씨가 어떤 사람인지, 사회적 지위는 어떤지, 그 격차가 얼마나 큰지…… 별로 자각이 없단 말입니다. 앞으로도 깨달을 수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

“진심이라고요? 그게 어떻게 진심일 수가 있습니까. 그 애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접근하셨을 텐데. 어른이 아이를 속여 넘기는 건 지나치게 쉽지 않습니까.”

어느새 레빈은 긴장을 떨치고 카렐을 추궁하고 있었다.

카렐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쉽게 이해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게다가 교활한 방식으로 접근한 것도 맞고, 그사이에 사샤를 상처 입힌 전적도 있었다. 그래서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렐은 ‘전생의 운명’ 타령을 하며 미친놈 취급을 받는 대신 스스로 ‘미성년자를 노린 호색한’이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한 상태였다.

“저는 클레멘츠 씨가 은인이라고 생각했는데…….”

말끝을 흐리는 레빈의 얼굴색이 창백했다. 제 동생을 외로움과 빈곤 속에서 구제해 준 은인이, 실상은 힘없는 아이의 인생을 쥐고 흔든 독재자라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얼마든지 비난하십시오. 마음이 풀릴 때까지…….”

“하……. 말도 안 돼.”

레빈은 한참 말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샤는 빈털터리입니다.”

“…….”

“클레멘츠 씨가 없으면, 나중에 그 애가 버려지면 그 애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제 말은…… 돈이나 후원뿐만이 아니라, 사샤는 아직 타인과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어 본 적이 없어요. 부모도, 오랜 고향 친구도 없는 사샤가 클레멘츠 씨와 헤어지게 되면……. 그러면 사샤는 외로움을 배워 버리게 될 겁니다. 사샤는 그걸 버틸 만큼 그렇게 강하지가 않아요.”

레빈의 말이 정론이었다. 세간의 상식으로는 그렇다.

저 역시 지금 당장 웬 재력가 놈팡이가 나타나 ‘나는 사샤 세드린을 열다섯 살 때부터 눈여겨보았고 내 마음은 진심이다. 사샤를 내게 달라’고 주장하면 똑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그나마 레빈은 말로 항의 중이지, 자신은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러 그 그릇된 생각을 폭력으로 교정해 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은 나를 믿지 못할 거예요.”

“…….”

“당신뿐만 아니라 세간의 신뢰를 얻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죠. 나는 그때까지 묵묵히 기다릴 겁니다.”

“…….”

“분명 시간이 증명해 줄 겁니다.”

카렐은 확신에 가득 차서 말했다.

사샤 세드린은 제 평생의 파트너가 될 것이고, 자신은 전생에도 후생에도 그의 영원한 숭배자로 남을 것이다. 현재만 보는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죽음도 건너왔다고 굳게 믿는 카렐의 어조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레빈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한 카렐의 얼굴을 불가해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더해서…… 내가 가진 게 많고 사샤는 빈털터리라는 그 말은 정정하고 싶군요.”

“그게 명백한 현실입니다.”

레빈의 말에 카렐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날 때부터 이미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을 쉽게 산 편이죠. 그게 나 스스로를 평가할 때 가장 마음에 차지 않는 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샤는 달라요.”

“…….”

“사샤의 안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능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신의 선물이죠. 그러니까 우리의 격차는 점점 벌어질 겁니다. 난 이미 많이 이룬 사람이고, 사샤는 앞으로 이루어 갈 길만 남았으니까. 지금은 사샤가 저 계단 아래서 나를 올려다보는 것 같아도…… 미래에는 내가 그를 우러러봐야 할 겁니다.”

“사샤가 그렇게 된다고 확신하는 겁니까?”

“물론이죠.”

카렐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레빈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깜짝 놀랄 만큼 압도적인, 세기의 아이콘이 될 겁니다. 그 애가 가진 재능은 그 정도예요”

“…….”

“범인은 믿을 수 없는 영역이죠. 믿기 어려우십니까?”

“아니, 저는 제 동생이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확신하시기에.”

“압니다.”

카렐은 레빈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다.

“물론 그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카렐은 품에서 펜을 딸깍거리며 꺼냈다. 테이블 아래에서 미리 준비해 둔 서류도 함께.

“일단은 서로 이해하기 쉽게 계약서로 남길까요?”

“무, 무슨 계약서입니까?”

“아주 만약의, 만약의 일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를 읽는 레빈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그건 카렐과 사샤가 헤어질 경우에는 사샤가 카렐의 재산 일부를 상속받는다는 조건의 계약서였다.

“지, 지, 진심이십니까?”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더 읽어 보시지요. 만약의 만약을 가정하여, 우리 두 사람이 아주 약간이라도 소원해져서 별거에 들어가거나 이별하게 된다면, 그 갈등 때문에 사샤가 받을 상처를 고려하여 나 카렐 클레멘츠가 어떤 미디어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고 약속하겠다는 조항도 있습니다. 이별의 상처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연인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후 사샤가 내 존재로 인해 받을지도 모르는 상처를 생각해 넣은 항목인데, 어떠신가요.”

물론 그렇게 헤어진다 해도 자신은 그림자가 되어 평생 사샤의 주변을 맴돌 테지만…….

그런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집착을 자연스레 숨기며 사려 깊은 파트너를 흉내 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카렐이 함께 가지고 태어난 교활한 천성이었다.

“제가 진짜로…… 여기에 사인해도 되겠습니까? 후회 없으시겠습니까? 클레멘츠 씨.”

엄청난 내용의 계약서 앞에서 이제 도리어 주저하는 쪽은 레빈이 되었다.

“의심이 간다면 지금 변호사를 한 명 붙여서 검토를 시켜 봐도 좋습니다.”

“아니……. 법적 효력을 의심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레빈은 그 뒤로도 심각하게 계약서를 수십 분간 더 들여다보았다. 카렐은 침착하게 물을 마시면서 그 인내의 시간 후 떨어질 허락을 기다렸다.

“사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회 없는 결정이 될 겁니…….”

그렇게 말하면서 카렐은 이것이 사샤의 보호자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거래처 직원에게 하는 말 같다고 느꼈다. 빌어먹을 습관이란. 그래서 조금 더 상황에 맞게 수정했다.

“사샤를 꼭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잠시 후, 레빈은 결심을 마친 듯 사인을 했다.

사샤 세드린의 이름 옆 대리인의 자리, 거기에는 ‘미성년자에 한해 법적 대리인의 동의로 대신한다’는 글씨가 작게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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