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비 오는 날의 가출 소동
카렐 클레멘츠가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한 것은 토요일 오전 7시였다. 비행기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것이 고작 세 시간. 피로가 다 풀리지 않은 눈에는 내리쬐는 햇살마저 피로로 다가왔다. 몸과 정신을 혹사한 결과였다.
2주간의 출장은 원래부터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꽉 조여져 있었다. 그러나 카렐은 잠자는 시간을 줄이고 제 호텔 스위트룸 거실에 업무용 테이블을 만들어 놓고는 새벽 시간까지 끌어다 쓰며 일을 마무리 지었다.
덕분에 그는 3일을 당겨 주말이 시작되는 타이밍에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전신을 감싸는 피로를 겨우 떨칠 수 있는 이유는 지금부터 향하는 곳에 있는 한 명의 소년 때문이다.
작은 사샤.
카렐은 가끔 애정을 담아 자신의 애인을 작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사샤는 처음에 그 괴상한 센스의 별명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곧 ‘카렐 눈에는 내가 작게 보이나요?’ 하며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별칭과 다르게 요즘 사샤는 부쩍 컸다. 뼈가 여물고 어깨도 더 벌어졌으며, 섬세한 골격 위에는 철저하게 세공된 근육이 틈 없이 붙었다. 막 입학하던 열다섯 살 무렵에는 또래보다 발육이 느렸지만 최근에는 몸의 골격이 퍽 달라져 하루가 다르게 태가 났다. 성인 이후로도 성장하는 이들도 적지 않으니 스물두 살까지는 쑥쑥 클지도 모른다.
상념에 빠진 채로 카렐은 호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잠깐의 적막 끝에 도착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그는 구두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았다.
사샤는 아직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방문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카렐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셰이드를 치지 않은 내부에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한 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거실 가운데에 위치하던 침대가 창가로 옮겨졌다는 점이다. 카렐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창가에 바짝 붙여 놓은 커다란 킹 사이즈 침대에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이 없는 사이 침대 위치를 바꾸었다.
왜?
카렐은 침대 곁에 섰다. 길고 날씬한 다리가 이불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와 있었고, 상체와 얼굴은 이불에 파묻힌 채였다. 잠결에 마구 뒤척거리고 이불을 발로 찬 말썽꾸러기의 흔적이었다. 이렇게 이불을 덮는 괴상한 방식은 처음 접해 보았다. 카렐은 피식 웃었다.
침대 끝에 걸터앉자 그 자리 위로 시트가 주름졌다. 카렐은 손을 뻗어 사샤의 얼굴을 가린 이불을 조심스레 들춰 보았다.
“흠…….”
사샤는 상의를 벗어 매끈한 반신을 드러낸 채로 기지개를 켠 고양이처럼 만세를 하고 자고 있었다. 빈말로도 섹시하다고는 할 수 없는 자세였다.
그 잠자는 자세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던 카렐의 얼굴이 갑자기 의혹에 물들었다. 빚은 듯이 오뚝하고 작은 사샤의 코 아래, 콧구멍에 하얀 휴지가 터질 듯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코피를 막으려는 듯이.
‘코피를 흘렸나?’
사샤를 내려다보며 몸을 기울인 카렐은 무심결에 침대 바로 곁의 통창에 눈길을 주었다가 심장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결단코 고소공포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호텔은 까마득하게 높고, 유리창 한 장을 통해 저 멀리 땅바닥이 곧바로 보이는 것이 갑자기 끔찍하게 느껴졌을 뿐이다.
“카렐……?”
그때였다. 초고층의 유리창 옆에 바짝 붙어 자는 고약한 취미의 녀석이 눈을 떴다.
사샤가 부스스 눈을 뜨자 피로 때문에 여러 겹 쌍꺼풀이 진 매끈한 아이홀 아래서 맑고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와……. 카렐.”
사샤가 배시시 웃었다. 카렐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까렐이 꿈에 나와따…….”
“내 꿈을 꾸고 싶었나요?”
“계속, 계속 빌었는데 한 번도 안 나왔어요.”
눈을 반만 뜬 사샤가 팔을 뻗어 카렐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잠결에 거리가 맞지 않아 턱과 입술을 더듬어대던 손이 겨우 뺨에 안착했다.
“카렐? 얼굴이 창백해요.”
카렐은 약한 고소공포증을 언급하는 대신 사샤에게 질문을 던졌다.
“침대를 옮겼군요?”
“네. 밤거리를 내려다보면서 자려고요.”
“무섭지 않아요?”
“신나는데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꿀 수 있어요. 그거 엄청 신나요.”
어물대는 사샤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었던 카렐은 그저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말대로라면 사샤는 공포증은커녕 높은 장소를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얼마 전 코니아일랜드에 갔을 때 관람차 꼭대기에 올라서 잔뜩 흥분한 채로 방방 뛰던 모습도 떠올랐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딱 보통 사람 수준인 카렐은 말없이 리모컨을 가져와 셰이드를 내려 창을 가렸다.
그사이 사샤가 카렐의 허벅지로 엉금엉금 기어와 달라붙었다. 겉면이 조금 빳빳한 재질의 슈트는 폭신한 깃털 이불과 달리 거칠었지만, 사샤는 거기 뺨을 비비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카렐은 진짜인가?”
“아니, 나는 꿈이에요.”
“이상해요. 진짜 같은데요?”
사샤가 시선을 올리며 물었다. 기가 막히게 조형된 아름다운 얼굴에는 여전히 소년미가 묻어 있다. 물론 코를 꽉 막은 정체불명의 휴지도 있고……. 외모의 분위기를 깨는 그 휴지에서 시선을 피하면서 카렐은 사샤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카렐, 우리 키스해요.”
“갑자기?”
“꿈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요.”
사샤가 제 이마에 닿아 있던 카렐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몸을 일으키는 대신 팔을 뻗어 카렐의 목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한쪽 콧구멍에 휴지를 틀어막은 채로 키스를 조르는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서 카렐은 입을 다문 채로 웃음을 참았다. 대신에 잠이 덜 깨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사샤의 팔에 이끌려 순순히 고개를 내리며 촉촉한 입술에 짧은 키스를 해 주었다.
사샤는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입술을 비볐다. 애교 있는 몸짓이었다.
“더 깊이 키스해요.”
솔직하게 요구하며 사샤는 입술을 열어 달라고 졸랐다. 카렐은 눈을 뜬 채로 사샤의 윗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살짝 벌린 입술 안쪽은 촉촉한 데다 녹을 듯이 부드러웠다. 그보다 더 연하고 부드러운 것이 안쪽에 있다. 혀가 이토록 여린 건 왜일까? 태어난 지 17년밖에 되지 않아서? 아니면 매끄러운 피부처럼 타고난 것일까?
카렐은 눈을 감으며 사샤의 호흡을 뺏는 깊은 키스를 했다. 가는 허리를 낚아채자 ‘흐앗’ 하고 작은 신음을 흘린 사샤의 몸이 낭창낭창하게 딸려왔다. 진한 키스에 호흡이 모자란 사샤의 흉곽이 크게 부풀어 오를 때면 카렐은 그제야 겨우 입술을 뗀 후 작은 턱을 빨아 주었다. 그리고 목덜미와 쇄골에도, 작은 귀에도 입을 맞추었다.
그러던 중에 사샤의 코에서 퐁, 하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바로 뭉친 휴지였다. 휴지는 카렐의 이마에 부딪히고는 바닥에 뚝 떨어졌다.
“앗…….”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사샤가 당황스러운 신음을 냈다. 카렐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딥키스에 호흡이 가빴던 사샤가 코로 씩씩대느라 잘 박혀 있던 휴지가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모른 척해 주려고 했는데, 마음대로 안 되는군.
물론 무척 귀엽지만 섹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드였다. 카렐이 물었다.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이게 뭔가요.”
그러면서 카렐은 시트 위로 굴러간 휴지 뭉치를 가리켰다. 사샤는 코를 덥석 가렸다.
“……코피가 심하게 났어요.”
과연, 휴지 끝이 까맣게 굳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카렐은 심각한 얼굴로 사샤를 돌아보았다.
“코피?”
“네. 앙투르낭을 뛰다가 얼굴로 떨어졌어요.”
“얼굴로 떨어졌다고요?”
카렐의 얼굴이 이번에는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샤는 이제 눈앞의 카렐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왜 카렐이 여기에 있지? 3일 후에 온다고 했는데! 반가우면서도 낭패감이 들었다. 다시 카렐이 돌아왔을 때는 그를 자극할 수 있을 만큼 섹시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마음먹었었는데. 휴지로 한쪽 코를 꽉 막아 버린 모습으로 맞이하다니 다 망해 버렸다.
사샤의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 갔다.
“발이 미끄러졌어요. 무게 중심이 너무 앞에 있었고요. 바딤이 그러는데 코피로 끝난 게 다행이래요. 혀를 씹었으면 잘릴 수도 있었다고 했어요…….”
“저런…….”
카렐의 얼굴에서 다시 한번 핏기가 쭉 빠졌다.
“괜찮은 겁니까? 정밀검사는 받았어요?”
“아, 아픈 곳은 없어요.”
“안 받았다는 소리군요. 금이라도 갔다면 큰일입니다. 어디 봐요.”
카렐은 사샤의 작고 매끈한 코를 더듬었다. 콧대와 콧등의 산이 분명한 코는 예술적인 각도를 그리며 사선으로 뻗어 있었다. 그러나 카렐의 얼굴이 짐짓 심각한 것을 알아챈 사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옥사나가…… 코가 조금 납작해진 것 같다고 했어요. 진짜예요?”
실제로 코뼈가 부러졌다면 지금은 입술까지 퉁퉁 부어 있어야 했다. 아마도 심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검사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 카렐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이건 꼭 병원에 가 봐야겠어요.”
“지금 당장요?”
“그래요.”
“그럼 재회의 섹스는 안 하고요?”
“사샤…….”
카렐은 한숨을 푹 쉬었다. 사샤는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이럴 수는 없어요!”
“병원이 먼저예요.”
“저는 너무 많이 굶었어요. 뒤가 허전해서 뭐라도 채워야……. 읍.”
카렐이 경악이 어린 표정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사샤,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나요?”
사샤는 카렐의 손에 입이 막힌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멋진 포르노 사이트를 하나 찾았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할까? 사샤는 카렐도 그 사이트를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잠깐 생각한 다음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카렐이 포르노에 푹 빠져서 현실의 저 대신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면 큰일이었다. 그러니 저만 아는 게 나았다.
* * *
“위로 높이 뛰는 점프를 하다가 얼굴로 떨어졌다는군요.”
“얼굴로요?”
“코피가 많이 났다고 합니다. 그렇지, 사샤?”
“에에.”
사샤는 양 볼이 카렐의 손에 잡힌 채로 붕어처럼 입술을 내밀고 대답했다. 심각한 얼굴로 사샤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카렐은 다시 사샤의 턱을 잡고 섬세히 앞뒤로 돌려가며 의사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본심을 숨긴, 대단히 정제된 단어들이었지만 논지는 뚜렷했다. 이 국보급의 얼굴뼈에 조금의 변형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속뜻을 알아들었는지 의사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사샤는 얼굴뼈의 엑스레이를 찍고, 골절이나 실금, 변형이 없는지 상세히 확인‘당했다’. 동시에 간단히 몸 상태도 검사했다.
그러나 문제는 얼굴뼈만이 아니었다. 검진을 마친 의사는 사샤가 끼니를 잘 챙겨 먹지 않아서 그사이 몸무게가 2㎏이 더 줄었고, 면역력이 크게 낮아졌다고 말했다.
몸의 증상은 더 명확했다. 뭔가를 잘못 주워 먹었는지 알레르기 반응 때문에 몸 구석구석 두드러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잠이 부족해진 데다가 매일 연습으로 몸을 혹사해 감기와 증상이 비슷한 편도염도 약하게 앓고 있었다. 열흘 남짓한 시간에 사샤는 포르노에 푹 빠져 몸 관리에 엉망이었다.
“세상에.”
카렐은 혀를 차며 사샤의 몸 이곳저곳 붉게 두드러기가 올라온 부위에 연고를 발라 주었다. 가녀린 몸을 앞뒤로 가볍게 뒤집어 가며 피부가 접힌 부위까지 꼼꼼하게. 가려움을 느껴 마구 긁어댄 부위 위에는 딱지가 앉은 곳도 있었다. 그렇게 연고를 전부 바른 후 카렐은 사샤를 통풍이 잘되는 곳에 널어놓았다.
반면 사샤는 무척 울적해졌다. 카렐이 돌아오면 그에게 애무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연고 마사지라니. 간지러운 손가락에 자극당한 몸으로 사샤는 끙끙거렸다.
그런 사샤를 보고 카렐의 얼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진지해졌음은 물론이다.
“열흘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죠.”
사샤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많은 변화가 있었다. 카렐이 출장을 가기 전과는 전혀 다른 엄청난 변화. 포르노는 정말 좋은 교본이었다. 그걸 즉시 체험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카렐은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닌 것 같아서 애석했다.
카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샤는 카렐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졌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대디.”
라고.
그 말을 들은 카렐의 반응은 굉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사샤를 바라본 그는 한 박자 느리게 질겁하듯 놀랐다. 그러고는 사샤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를 놀라게 만든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대디’라고 한 번 불러 본 대가는 무척 컸다.
“아까도 물었지만, 요즘에 뭘 보고 다니는 겁니까?”
“그건 비밀이에요…….”
“사실 안 봐도 알겠어요. 대체 그런 건 누가 알려줬죠?”
카렐의 목소리 톤이 위험할 정도로 낮아졌을 때 사샤는 겨우 알아차렸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병실 침대에 앉은 채로 사샤는 카렐의 지독한 추궁에 시달렸다. 사샤는 맥없이 고개를 수그렸다. 아까 뒤에 뭘 채우고 싶다고 했을 때는 어쩌다 나온 헛소리겠거니 하고 그냥 넘어가 주었던 카렐은 ‘대디’라는 말에 돌변했다. 한번 불러 봤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엄격하게 질책받았다. 카렐은 ‘대디’라는 단어에 흥분하기는커녕 도리어 그걸 끔찍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그 말은 금지입니다.”
“……싫었어요?”
카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유혹이라고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유혹이 아니에요. 오히려 난 당신이 그럴 때마다…….”
카렐이 하아, 하고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여전히 사샤의 나이 때문에 가끔 쿡쿡 찔리는 듯한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사샤 이전에는 이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상대를 연인으로 받아들이리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카렐에게 자꾸 그것을 주지시키는 것은 역효과였는데, 사샤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의 딱딱한 모습에 사샤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핸드폰 주세요.”
사샤는 기절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카렐은 단호하게 내민 손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렐…….”
“주세요.”
사샤는 이렇게 엄격할 때의 카렐을 거스르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이럴 때는 애교나 키스도 통하지 않는다. 수작 부리지 말라며 혼날 뿐이다. 사샤는 뭉그적거리면서 느리게 핸드폰을 주었다.
“그래. 이런 걸 아예 모를 리가 없지. 언젠가는 보게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카렐은 사샤가 뻔질나게 드나든 포르노 사이트의 접속 기록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가 연인이라기보다는 엄격한 부모님이 하는 행동에 가깝다는 생각에 약한 환멸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프리미엄을 꼬박꼬박 결제해 주고 있건만, 세상에 볼만한 게 얼마나 많은데 하필 이제 와서 포르노에 빠지다니. 카렐은 또다시 한숨지었다.
아무래도 사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대디 앤 트윙크’라는 키워드인 듯했다. 대체로 나이 먹고 몸집이 큰 남자가 미소년을 이렇게 저렇게 하는 영상이었다. 키워드만 봐도 그게 뭔지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카렐은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일러요.”
카렐은 고개를 들고 사샤와 눈을 마주쳤다. 사샤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무어라 변명이라도 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열일곱이잖아요.”
사샤는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카렐을 바라보았다.
“그것보다 더한 짓을 카렐하고 하고 있어요.”
“아닙니다……. 당신과 나는…….”
카렐의 말이 느려졌다. 사샤는 더 해 보라는 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진심으로 마음이 통해서, 동등한 입장에서의 사랑을…….”
“…….”
사샤가 똑바로 카렐을 바라보자 카렐이 팔짱을 끼고 시선을 외면했다. 사샤는 다시 물었다.
“아무튼 카렐은 그럼 이런 거 한 번도 안 봤다고요?”
“트윙크를 골라서 찾아보는 취미는 없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미성년자가 취향이 아니었기도 하지만, 사샤 세드린의 얼굴에 익숙해진 이상 다른 미소년은 절대 눈에 차지 않는 탓도 있었다.
그러나 카렐의 의도와는 달리 사샤는 그 말에 배신감을 느꼈다. 자신은 이 사이트를 알기 전에는 트윙크가 뭘 말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렐은 이미 알고 있는 걸 보니 그도 소싯적에 제법 포르노를 봤던 게 틀림없었다. 그랬으면서 저에게만 엄격하게 굴다니!
“카렐도 포르노 같은 거 보면서 왜 나한테만 보지 말라고 하는데요?”
“안 봅니다.”
“그럼 트윙크가 뭔지 어떻게 알아요!”
“…….”
“네? 카렐도 다 봤잖아요! 봤으면서!”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카렐의 손등 위에서 힘줄이 불끈했다. 사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듣기 힘들었다.
물론 카렐은 사샤에게 열일곱 살에겐 이르다고 훈계할 만큼 깨끗하지 않았다. 포르노는커녕 이미 십대 시절에 제 성향과 취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확인할 만한 경험까지 끝내 버렸으니까.
“아무튼…… 이 사이트는 18세 이상만 접근하라고 되어 있죠. 난 서른셋입니다. 포르노를 봐도 전혀 이상한 나이가 아니라는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다시 나이를 주지시키는 카렐의 말에 사샤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카렐과의 나이 차 때문에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 평생 어린 소년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사샤는 이상하게 초조한 기분에 시달렸다. 어엿한 성인이 되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은데, 이대로라면 관계가 바뀌지 않을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
“어쩌라고요!”
사샤는 악, 소리를 질렀다. 대드는 목청이 쩌렁쩌렁했다.
열이 오른 사샤의 얼굴에서 또 한 번 코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그걸 본 카렐은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렐은 꼰대야!”
동시에 벌컥 열린 문밖에서 또 한 사람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사샤의 형, 레빈이었다.
“사샤!”
레빈도 덩달아 소리 질렀다. 연락을 받고 막 병원에 찾아온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고, 카렐은 생각했다.
그렇게 카렐은 사샤의 코에 휴지를 틀어막아 주다가 어정쩡하게 손을 멈춘 채로, 사샤는 콧김을 뿜으며 씩씩대는 채로, 레빈은 그 장면을 보고 사색이 된 채로 얼어붙었다.
세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 * *
레빈은 졸도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카렐 클레멘츠가 어떤 인물인지 제 동생 사샤 세드린은 여전히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사샤는 맹수가 세상 물정 모르는 약한 새끼 동물에게만 베푸는 관대함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것이 틀림없다. 사자 갈기를 잡아당기고, 심지어 목덜미를 꼬집으며 기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인 이유를 알고 난 레빈의 얼굴은 그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렸다.
포르노를 보지 말라고 타이르는 기업의 황태자와, 그 말에 반항하는 망아지 같은 제 동생이라니…….
레빈은 딱딱한 나무벤치에 앉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의지할 데 없이도 사샤가 어엿하게 잘 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지도 모른다.
레빈이 기억하기로 자신과 사샤가 자란 집안은 최소한의 가정교육이라는 것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폭력과 학대로만 자신들을 대했고, 세상에 적응하는 법 대신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방법만을 가르쳤다. 어머니는 생활고에 지치고 무력한 나머지 어린 형제들이 빨리 자라 돈을 벌어다 주기를 희망했다. 그런 환경에서 사샤가 재능을 꽃피운 것이 기적이라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레빈은 사샤가 보장된 미래만큼 조금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지금이라도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혈육의 도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불렀습니까.”
고개를 숙인 레빈의 앞에 반질거리는 검은색 가죽구두가 뚜벅뚜벅 걸어와 섰다. 가죽이 접히는 부분마저 흠집이 없는 매끈한 구두를 눈으로 훑은 레빈은 고개를 들었다.
“아, 클레멘츠 씨.”
“사샤는 잠들었어요.”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샤는 잔뜩 흥분한 채였다. 어떤 수로 재웠을까 궁금해하는 레빈에게 카렐이 말했다.
“수면제를 먹였습니다.”
“……예?”
“한숨 자고 나면 진정이 될까 해서.”
“…….”
“내가 동물 마취제라도 썼을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군요. 일반적인 수면제에 불과합니다.”
“…….”
“못 미더운 얼굴이군요. 그래도 사샤에게는 가끔 필요합니다. 조증이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흥분을 하면 좋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등을 보이고는 레빈에게 살짝 턱짓을 했다. 따라오라는 듯한 동작이었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툭 찔러 넣은 채로, 부름에 응했으면서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주도한다. 주름 없이 반듯하게 펴진 슈트 아래 거대한 육식 동물의 근육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한 자의 여유였다.
“제 동생 때문에 당황하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음……. 엄살이 너무 없어서 놀라기는 했죠. 다치면 곧바로 병원에 가지 않고.”
카렐이 혀를 찼다. 그가 철문을 가볍게 밀자 EXIT 표식이 붙은 문이 삐거덕 열렸다. 짧은 복도를 지나자 둘은 곧바로 외부로 갈 수 있었다.
야외로 나오자마자 카렐은 슈트 안쪽 주머니에서 연초를 꺼냈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굳이 바깥을 택한 듯했다. 은색의 빈티지 라이터로 불을 붙인 그가 레빈에게도 담배를 권했다. 레빈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적법하게 일하는 노동자일 뿐 고용주에게 지나치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태연하기가 어려웠다. 그건 눈앞의 남자가 은인이라서, 또는 상사의 상사의 상사여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카렐에게서는 자연스레 위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본성을 내보일 수 있는 제 동생이 레빈은 신기하기만 했다. 아니면 카렐이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배려해 주는 것일 수도 있겠다.
“당신은 사샤와 많이 다르군요.”
한동안 레빈을 관찰하던 카렐이 말했다. 레빈은 그것이 긍정적인 뜻인지 아닌지 한참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릴 때부터 닮은 점보다는 다른 점이 더 많았고, 떨어져 산 지도 오래되었으니까요.”
“그래도 서로를 퍽 아끼죠.”
“무척 애틋하긴 합니다.”
카렐이 깊이 담배를 빨아들였다. 순간 폭 패는 뺨을 바라보자 그가 어딜 보냐는 듯 다시 눈을 마주쳐 왔다. 도무지 한눈을 팔 수도 없었다.
“사샤가.”
조금 뜸을 들인 카렐이 입을 열었다.
“따로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 안 하던가요?”
“예? 어떤…….”
레빈은 얼마 전 학교에서 걸려왔던 전화를 떠올렸다. ‘성 학대의 가능성’ 운운하던 전화를 말이다.
후원자가 그런 것을 알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실제로도 레빈은 아는 바가 없었다. 그저 사샤를 보호하고 싶을 뿐.
“연애를 한다든가 하는.”
그러나 이어진 카렐의 말에 레빈은 헛숨을 삼켰다. 후원자도 학교로부터 무언가 이야기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후원하는 학생이 발레가 아닌 영 흉한 곳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소리를 관대하게 받아들일 후원자가 몇이나 될까. 심지어 사샤는 포르노 중독으로 이미 따끔하게 한 소리를 들은 참이었다. 반성하기는커녕 반항 중이었고.
레빈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굽는 팔을 따라 동생을 변호했다.
“아…….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이제 졸업도 해야 하고 발레단 오디션도 준비해야 하고요. 한창 중요한 시기인데……. 사샤는 조금 단순해 보여도 목적이 있으면 열심히 하는 아이입니다. 한눈을 팔 리가 없습니다.”
“…….”
후원자 앞에서 동생의 흠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레빈은 다소 횡설수설했다. 그러나 카렐은 무언가 불편한 듯이 담배를 낀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래요. 당신은 모른다는 말이죠.”
“네? 네…….”
“한 가지 제안이 있는데.”
갑자기 화제를 바꾼 카렐은 그렇게 말하고는 뜸을 들였다. 그사이 담배가 무척 짧아졌다. 그대로 꽁초를 처리한 카렐은 놀랍게도 다시 한번 장초에 불을 붙였다. 연달아 두 개비를 피우는 것을 보고, 레빈은 왜인지 모르게 또 한 번 압도당했다.
“사샤 세드린에게…… 조금 더 안락한 보금자리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당신 말대로 목적이 분명하고 자립심이 강한 아이이긴 하지만, 더는 혼자 있지 않도록 말이죠.”
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카렐이 오기 직전에 본인도 생각하던 것이었다.
“현재 내가 지원해 준 곳은 학교와 무척 가까운 이점이 있지만, 생각해 보니 미성년자가 혼자 지내기에는 부적절한 곳 같습니다.”
“맞습니다. 클레멘츠 씨.”
“내 불만은 딱 하나. 너무 자주 다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방치하기까지 하고. 몸이 재산인데 말입니다.”
“마, 맞습니다…….”
카렐이 라이터의 뚜껑을 신경질적으로 딱, 딱 튕겼다. 레빈은 마른침을 삼켰다.
“곁에서 지켜보는 어른이 있으면 안심할 만하겠죠.”
역시 그런 건가.
“그래서 말인데…….”
카렐의 의도를 알아챈 레빈은 이때다 싶어 말했다.
“역시 사샤와 제가 함께 사는 게 좋겠죠.”
힘을 주어 강하게 내뱉은 말에 카렐이 레빈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부릅뜬 눈은 퍽 놀란 것 같았다.
“제가 여건이 안 되어 쭉 고민했지만…… 역시 사샤의 곁에는 어른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샤는 어렸을 때부터 학대받고 가정에서 응당 받을 수 있는 사랑도, 최소한의 교육도 전부 받지 못한 채로 세상에 내던져졌어요. 저 역시 혼자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며 부족함을 자주 느끼곤 합니다. 사샤는 더더욱 그럴 겁니다.”
“아, 잠시만. 내가 하려던 말은…….”
어쩐지 급하게 자신의 말을 막는 카렐을 보면서 레빈은 더욱 간절하게 말했다.
“저는 제 쪽에서 부모를 버렸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 외로움을 감당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사샤는 아닙니다. 자신이 원치도 않았는데 어느새 혼자가 되었어요. 그러니 형으로서 잠시라도 책임져 주고 싶습니다.”
“…….”
“실은…… 학교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사샤가 그…… 과한 놀이에 빠진 건 아닌가 의심하더군요. 이런 말씀 드리는 게 무척 민망합니다.”
“학교로부터 전화가 갔다고요?”
담배를 태우던 손을 멈칫한 카렐의 안면이 단단히 굳어 들었다.
“네. 아, 혹시 모르셨나요? 죄송합니다. 괜히 말했군요.”
“무슨 일이었는지 알려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카렐이 냉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류층답게 빙 돌려 말하는 간접적 화법은 레빈에게 ‘사실대로 고하지 않으면 후원을 끊어 버리겠다’는 협박처럼 들렸다.
“사샤의 몸에 어떤, 옳지 못한 놀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레빈 역시 마른침을 삼키며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마사지사가 발견했답니다. 사샤는 외모도 그렇고 주변의 유혹이 많을 테니까. 뭔가 도를 넘는 장난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면서.”
카렐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어느새 앞 머리카락도 약간 흐트러져 초췌해 보였다. 레빈은 그의 질린 얼굴을 흘끔 올려다보며 책임감을 느끼고 이어 말했다.
“물론 후원자님께 말씀드릴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그래도 걱정하시는 대로 몸을 쓰는 아이니까 조금 더 조심해야겠죠. 귀가 시간도 철저히 지키고 좀 더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제가 지켜보겠습니다.”
카렐은 줄담배를 피우며 대답을 미루었다. 긴장한 레빈은 두 형제가 함께 살 수 있는 환경을 지원해 주면 좋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한참 후에야 카렐이 조금 피로한 듯이 말을 내뱉었다.
“얼마 안 남았죠.”
“네?”
“사샤의 졸업 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입단까지도 그쯤 남았고요.”
그렇게 되뇌면서 카렐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가 몇 번째인지 모를 담배를 또 입에 물었다. 이렇게 골초였나? 레빈은 의문에 휩싸였다.
“짧지 않은 기간입니다. 저와 사샤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그 방법이 최선일까요?”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제가 잘 책임지겠습니다.”
“……저도 사샤가 호텔 생활을 끝내야 한다는 것만은 알겠습니다만.”
“그렇죠. 동의하실 줄 알았습니다.”
레빈은 반색했다.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사샤와 제가 함께 살 수 있게…….”
“고려를…… 해 보지요.”
그때였다.
삐거덕, 철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먼저 고개를 돌린 것은 카렐이었다.
“사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동생의 이름을 부른 카렐의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레빈도 그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나 조금 열린 문틈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저벅저벅, 빠르게 걸어간 카렐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복도에는 그 누구의 기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젠장. 분명히 있었는데.”
“저는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요.”
“들어갑시다.”
카렐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신경질적으로 라이터를 튕긴 후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설마 정말로 사샤를 본 것인가, 의심하면서 레빈은 카렐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사샤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다고 했다. 카렐이 과민한 나머지 무언가를 잘못 본 것이리라고, 레빈은 생각했다. 병실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런.”
사샤의 병실에 도착해 문을 열어젖힌 카렐은 낭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짧은 단어였지만 레빈은 순간 그가 욕을 하고 싶어 한다고 느꼈다. 병실 침대 위 이불은 누웠던 자리 그대로 동그랗게 뭉친 채 비어 있었다.
“들은 거야.”
카렐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홱 뒤돌았다. 레빈이 늦은 상황 파악을 하는 사이 그는 이미 사라진 사샤를 찾아 복도로 달려 나가고 없었다.
* * *
사샤는 달리고 있었다. 학학, 숨을 몰아쉬면서. 수면제도 듣지 않은 튼튼한 몸이지만, 그래도 약 기운이 돌아 자꾸만 다리에서 힘이 빠지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사샤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낮은 담장을 날듯이 가벼운 몸으로 폴짝 뛰어넘고 눈앞의 나무들을 이리저리 제쳤다. 지면을 탁탁 밟는 두 다리는 탄성 있게 튀어 올랐다. 마구 달리면서 사샤는 조금 전의 카렐을 떠올렸다.
‘고려해 보지요.’
거짓말쟁이.
사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출장에서 돌아오면 로드아일랜드 저택에 데려다준다고 했으면서.
그건 그때의 자신을 달래기 위해 적당히 가져다 붙인 변명이었나 보다. 형과 같이 사는 것도 좋고 그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카렐의 대저택에 모두가 함께 살 때의 이야기였다. 레빈의 제안을 카렐이 만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샤는 화가 났다. 외롭고 원망스러워서 사샤는 어느 순간 윽윽, 치미는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서럽고 답답한지 사샤도 이유를 몰랐다.
그 감정마저도 미숙하다는 증명인 것만 같아서 더욱 화가 났다.
‘카렐도 내가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었으면 좋겠어.
나는 이렇게 진지하고, 또 진심인데. 항상 안달이 나는 건 내 쪽 같아.
카렐은 내 기분 몰라. 여유로운 나의 애인. 내 부탁은 어린애 장난처럼만 보이겠지…….’
잠시 후 기력이 다해서 어쩔 수 없이 멈춰 선 사샤는 한결 느려진 걸음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하도 오래 달려서 다리가 지면 위에서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지하철 입구가 보였다. 처음 보는 역명이 쓰여 있었다. 여기는 자신이 모르는 곳이었다.
그래도 사샤는 무작정 지하로 내려갔다. 하지만 돈이 없어 지하철을 탈 수가 없었다. 괜히 지하철 지도를 보면서 사샤는 어디쯤이 로드아일랜드인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핸드폰 지도를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었겠지만 갑작스럽게 달려 나온 탓에 돈뿐만 아니라 핸드폰도 없었다.
평소 같으면 주머니가 텅 빈 채로 낯선 곳에 있다는 사실에 겁을 먹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겁도 나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미한 조증 기미 때문이었지만 연유를 모르고 사샤는 그저 한참 동안 역을 서성였다.
“불쌍해라, 예쁜 아가. 길을 잃었니?”
중년 여성 하나가 사샤의 물기 어린 간절한 눈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아니요.”
“그럼?”
“그냥 돈이 없어요.”
그러자 그녀는 사샤의 손에 지폐를 몇 장 쥐여 주었다. 사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갚을 필요는 없단다.”
“꼭 갚을게요! 내년에 링컨 센터로 찾아오세요.”
“어머나. 링컨 센터에?”
“네. 전 내년에 데뷔할 거예요. 춤을 추거든요.”
“어머나…….”
중년 여성은 ‘불쌍해라’ 하고 혀를 찼다. 사샤가 정신 나간 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샤는 고맙다고 반복해서 말하고는 표를 사서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제게 익숙한 지하철 역명 몇 개를 눈여겨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전철에 올라탔다.
사샤가 탄 전철은 윌리엄스버그로 향하는 것이었다. 친형과 이름이 같은, 친절하고 상냥한 프랑스 출신의 대학생 레빈이 사는 곳. 한때 외로움이 사무치면 말없이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버릇이 발동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사샤는 익숙하게 레빈의 집을 찾아갔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철문을 열고 안쪽 벽돌 틈으로 쭉 들어간 다음, 3층까지 올라가면 레빈의 집이다. 그새 졸음이 몰려와 사샤는 터덜터덜 낡은 복도를 걸었다. 뒤늦게 약 기운이 도는 것 같았다.
“사샤? 엄청 오랜만이네.”
“키가 더 컸어?”
레빈 대신 먼저 보인 그녀의 룸메이트들이 반겨 주었다. 눈길을 피하면서 사샤는 레빈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레빈은 저 안쪽에 있어.”
룸메이트들이 바닥까지 닿은 태피스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레빈이 저를 마중 나오지 않은 것이 이상했지만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샤가 주방 겸 거실을 가로질러 가는 사이, 레빈의 룸메이트들은 한때 조그마한 소년이었던 사샤가 키가 훌쩍 크고 늘씬해진 것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레빈?”
사샤는 안쪽을 향해 말을 걸었다. 소파 아래에 앉아 있던 레빈이 사샤를 돌아보고는 검지 하나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쉬이’ 하는 소리에 사샤는 걸음을 딱 멈추었다.
이내 사샤의 눈은 한곳에 꽂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레빈은 수건으로 작은 털 뭉치를 둘둘 감싸 쥐고 있었다.
“뭐야?”
혹시 인형인가 싶어서 드러난 정수리를 검지로 콕 찔러 보자 귀가 파닥였다. 깜짝 놀란 사샤는 손을 치웠다. 유심히 보니 분홍색 코가 작게 실룩실룩 움직이고 있었다.
“고양이다!”
“그래.”
“이렇게 작은 고양이 처음 봐.”
“나도 마찬가지야.”
레빈은 사샤에게 왜 갑자기 저를 찾아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사샤가 고양이를 실컷 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잠시 후에 직접 분유도 먹여 보게 해 주었다.
고양이의 이마를 한참 손으로 만져 주던 사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 고양이 자주 보러 와도 돼?”
“다음에 오면 고양이는 없을걸. 이 고양이는 이제 셸터로 갈 거야. 거기서 입양해 줄 사람을 만나게 돼. 나는 그냥 구조한 사람이고…….”
“그럼 레빈하고 같이 안 살아?”
“응. 나는 유학생이잖아. 언제 거주지가 바뀔지도 모르는데.”
그 말에 갑자기 사샤는 또 울적해졌다. 이유는 모른 채 기분이 가라앉았다.
“셸터로 간다고?”
사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누가 이 고양이를 책임져 줘?”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이.”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구.”
“…….”
“고양이는 잘 모르는 사람한테 자기 인생을 맡겨야 돼? 고양이를 데려가는 사람이 술주정뱅이일 수도 있어. 병에 걸린 사람일 수도 있고……. 고양이를 생각보다 조금 덜 사랑할 수도 있잖아.”
“…….”
“고양이한테는 주인이 전부인데.”
사샤가 말한 것은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술주정뱅이였던 아버지, 병에 걸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방금 전 자신을 속상하게 만든 카렐을 뜻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인 비유였으나, 레빈은 사샤의 그러한 무의식에서 묻어난 외로움을 어렴풋이 감지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을걸? 이 고양이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누구든 진심으로 사랑해 줄 텐데.”
“정말?”
“그래. 방금 너도 고양이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잖아.”
“……그래도 고양이가 불쌍해. 주인이 누가 될지도 모르고 기다려야 하잖아.”
사샤가 손등으로 눈가를 쿡, 찍었다. 반들거리는 눈물이 묻어 나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레빈은 바르작거리는 고양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풀어 놓았다. 고양이는 어설프게 걷고 씩씩하게 울며 사샤에게 다가왔다. 제법 늠름하지만 아직 아기라 어정어정 걸었다. 그걸 보는 사샤의 마음은 이상하게 뭉클해졌다. 집도 주인도 없는 힘든 상황인데도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씩씩하게 구는 모습이 가장 불쌍했다.
“사샤, 외로워?”
사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고양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기고양이의 정수리는 너무 작고 보드라웠다.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움직이면 다칠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했다.
손길을 느낀 아기고양이는 빽빽 울면서 사샤의 다리 위로 올라왔다. 힘겹게 매달려 산을 오르듯 등정했다. 사샤는 고양이를 조심스레 들어 올려 제 손 안에 감싸 쥐어 보았다.
눈을 마주치자 금세 조용해진 고양이가 그릉그릉, 하며 수상한 소리를 냈다. 고양이가 아픈 것 같다고 사샤가 겁을 내자 레빈이 그건 고양이가 기분 좋을 때 내는 소리라고 설명해 주었다.
“왜 기분이 좋아?”
“사샤 네가 마음에 드나 보지.”
“그래? 내가 누군 줄 알고…….”
사샤는 고양이에게 온통 혼을 빼앗겼다. 안 그래도 당장 이제부터 뭘 하면 좋을지 막막했는데, 고양이가 셸터로 가기 전까지 돌보아 주는 일을 하면 될 것 같았다. 같이 있으면 저도 심심하지 않고 고양이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생긴 셈이니까 무조건 이건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저녁을 먹은 후 레빈은 여상히 물어왔다. 저의 이런 치밀한 계획도 모르고.
“사샤, 집에는 몇 시쯤 돌아가?”
“응?”
“클레멘츠 씨가 걱정하실 것 같아서……. 비서가 데리러 오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레빈. 절대, 절대로 카렐한테 전화하지 마.”
“어……. 왜?”
“그냥. 아무튼 절대로 전화하지 마.”
“…….”
“카렐이 보고 싶어질 때까지 나 그냥 여기 있을 거야. 고양이랑 같이.”
레빈은 집주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방바닥에 드러누워 버린 사샤를 내려다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사샤는 가끔 이렇게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였다. 물론 그런 점까지 전부 평소의 사샤다웠지만, 뭔가 문제가 있는 건 분명했다.
그 앞에서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한 레빈은, 그러나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냉큼 사샤를 배신했다. 다른 방에 숨어들어 조용히 카렐의 비서 게오르크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그리고 그걸 알아챈 사샤는 레빈이 더 이상 제 편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하면서 몰래 그 집을 떠나고자 마음먹었다. 세상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샤는 마지막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고양이를 한 번 꼭 안아 주고는 날래게 일어났다.
‘야옹아, 안녕. 행복하게 살아야 해.’
마침 살그머니 빠져나오는 사샤를 발견한 레빈의 룸메이트 한 명이 ‘사샤, 어디 가?’ 하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레빈이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덕분에 사샤는 슬리퍼를 제대로 신지도 못하고 발가락 끝에 대강 걸친 채로 후다닥 집을 떠났다.
* * *
레빈의 집 건물에서 뛰쳐나왔을 때는 하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샤는 비를 맞으며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검은 머리카락이 가닥 져 이마에 달라붙었다. 저 멀리서 ‘사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사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레빈은 달리기로는 저를 따라잡을 수 없다.
다시 학학, 숨을 몰아쉬며 지하철까지 달린 사샤는 급히 좁은 지하철 입구로 뛰어 들어갔다. 혹시나 누군가가 쫓아올까 봐 계단을 빠르게 걸어 내려가며 주머니에 들어 있는 남은 돈을 살펴보았다.
아까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친절한 중년 여성이 준 돈은 딱 한 번 지하철을 탈 만큼밖에 남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조금 고민하던 사샤는 다시 충동적으로 지하철에 올랐다.
코니아일랜드. 사샤가 탄 열차는 코니아일랜드행이었다.
사샤는 문가에 기대섰다. 자리가 많았지만 비 때문에 옷이 젖어서 앉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칸 한쪽에는 홈리스처럼 보이는 이가 자리를 크게 차지한 채로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나 있었고, 누더기 같은 옷을 여러 겹 껴입었다.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남자를 피해 사샤는 등을 돌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남자는 마약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남자를 등진 사샤가 문에 어찌나 찰싹 붙어 있었는지, 그다음 역에서 올라탄 사람들은 문이 열린 즉시 깜짝깜짝 놀라댔다. 비에 젖은 음침한 소년을 향한 시선이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사샤는 사람들이 자신을 수상하게 여긴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타인들과 의도치 않게 눈이 마주쳤을 때 사샤 역시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불쌍해. 비에 푹 젖었네.”
“너무 대놓고 쳐다보지 마.”
“왜?”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 말을 들어 버린 사샤는 서러워졌다. 방금 전 자신이 홈리스를 보고 시선을 피했던 것처럼 다른 이들은 저를 피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방금 올라탄 이들은 손을 꼭 맞잡은 커플이었다. 데이트라도 했는지 제법 멋들어진 옷을 차려입고 있었다.
다시 닫힌 문을 통해 제 꼴을 들여다본 사샤는 한숨을 쉬었다. 자다가 일어나 카렐에게 번쩍 들려 병원에 가는 바람에 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다. 무릎이 늘어난 낡은 트레이닝복 바지에 호텔 슬리퍼, 웃옷은 안이 비칠 만큼 얇은 면 티셔츠였다. 심지어 옷이 비에 젖어 몸선이 비치고 있었다.
커플의 시선이 등 뒤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져 사샤는 다시 창에 이마를 박을 듯이 찰싹 붙었다. 젖은 옷이 성가시고, 조금은 부끄럽게 느껴져 양팔로 몸을 감쌌다.
깜깜한 지하철 문에 기대어 뺨을 붙인 사샤의 얼굴에는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사샤는 코니아일랜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유적으로 등록된 낡은 유락지구는 옛 풍경을 모르는 사샤에게도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해안으로부터 불어오는 선선한 바닷바람 때문에 카렐이 제 사진을 찍어 줄 때는 머리카락이 자꾸 이마를 간질였었다. 카렐은 솜사탕 기계 앞에서 오늘 하루 자신이 모든 비용을 완전히 지불했기 때문에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얼마든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덕분에 사샤는 솜사탕을 두 개나 받아 들어서 하나는 작게 뭉쳐 한입에 털어 넣는 사치를 부렸다.
거기에서 단둘이 롤러코스터를 타고, 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카렐과 관람차를 탔었다.
코니아일랜드뿐만 아니라 맨해튼 안, 사샤가 아는 어디든 카렐과 함께한 추억이 묻어 있었다. 왜냐면 전부 카렐이 알려준 곳이기 때문이다. 사샤는 맨해튼에서 학교에 다닌 지 3년째였지만 카렐을 만나기 전에는 뉴욕의 지리나 유명한 스폿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남들이 뉴욕에 오면 꼭 들르고 싶어 하는 흔한 관광명소도 알지 못했다. 학교 건물이 있는 링컨 센터와 콜럼버스 서클 주변, 붉은 벽돌로 지은 낮은 건물이 빼곡한 레빈의 집으로 가는 길, 5달러가 넘는 값비싼 라테를 파는 카페. 고작 그런 것들이 사샤가 아는 뉴욕이었다.
하지만 카렐이 알려준 뉴욕은 조금 달랐다. 처음 가 보는 곳들을 탐색하는 것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어디서든 ‘받아들여지는 기분’이었다.
일례로 카렐이 일상적으로 식사를 하는 고급 레스토랑들은 천장이 무척 높았고, 하나같이 거대한 샹들리에나 길쭉한 창문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사샤의 어깨를 곧 짓누를 것처럼 압도적인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느 레스토랑을 가든지 직원들은 카렐의 메뉴 취향을 알고 있었고, 함께 온 작은 손님의 취향까지 알고 싶어 했다. 시간이 지나자 사샤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맛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누구도 사샤의 짧은 어휘를 비웃지 않았다.
게다가 짐백을 크로스로 멘 채로 의자에 두 다리를 올리고 앉아도, 티스푼으로 수프를 먹고 나이프로 고기를 찍어 먹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카렐마저도.
그건 엄청난 변화였다. 사샤는 그전까지는 메뉴가 많은 식당에 가는 것이 무서워서 매일 같은 메뉴만 고르곤 했다. 옆에서 기다리는 직원을 세워 두고 영어가 빼곡히 적힌 메뉴판을 보며 초조하게 먹을 것을 정하거나,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천장 간판에 붙은 햄버거 세트의 조합을 살핀다는 건 언제나 심각하게 두려운 일이었다.
매번 라테만 먹었던 것도 그 외 메뉴의 영어 스펠링을 찬찬히 다 읽어 보기 전에 항상 뒤에 다른 손님이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렐이 있을 때면…….
‘사샤, 라테가 그렇게 좋으면 플랫화이트도 한번 먹어 봐요.’
‘그건 뭐예요?’
‘똑같이 우유가 들어가는 겁니다. 아, 단맛이 있는 건 싫어요?’
‘단것도 좋아요. 먹어 보고 싶어요.’
‘그럼 비엔나라고 쓰인 걸 골라요. 달콤한 크림을 얹어 주니까.’
그렇게 주문을 앞두고 카렐과 제법 긴 대화를 나누어도 아무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날 카렐의 추천대로 먹어 본 비엔나커피는 코가 찡하고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달고 맛있었다. 그러면 카렐은 흰 크림을 묻힌 사샤의 윗입술을 손끝으로 훔치며 사랑이 묻어나는 눈으로 바라봐 주곤 했다.
“카렐…….”
사샤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추억을 곱씹던 사샤는 저도 모르게 카렐의 이름을 부르며 울먹이고 있었다.
별안간 카렐이 너무나도 보고 싶어졌다.
사샤는 손등으로 눈가를 슥 닦았다. 아까 주사기로 고양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그 입가에 묻은 우유를 꼼꼼하게 닦아 준 것이 기억났다. 카렐도 그런 기분일까?
카렐이 저를 데리고 뉴욕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건, 자신이 새끼고양이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새끼고양이는 450그램이었다. 고작 동전 몇 개만큼의 무게였다. 카렐에게는 아무것도 어려울 것이 없다는 소리다. 정말 아무것도. 데리고 다니는 게 그다지 성가시지도 않고, 손을 깨물어 봤자 그에게 상처도 낼 수 없는 작은 고양이.
나는 카렐에게 어느 정도의 무게일까.
졸업 때까지 같이 살지 않아도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무게?
나는 카렐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데.
큽, 하고 코를 크게 훌쩍이자 순간 목구멍이 아릿했다. 편도염 증상 때문이었다. 사샤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면역력이 떨어진 몸은 비에 젖어 가끔 크게 벌벌 떨렸다. 수면제를 맞고도 없어진 카렐을 찾아 황소처럼 다시 일어나는 바람에 약 기운이 애매하게 돌아 정신도 멍했다. 체력이 떨어지자 마음도 약해졌다. 사샤는 멍하니 검은 창에 손을 올렸다.
형의 요청에 ‘고려해 보지요’라고 대답하던 카렐의 깔끔한 음성.
그때 카렐의 표정은 보지도 못했으면서 사샤는 제멋대로 그의 표정을 그렸다. 차가운 녹색 눈동자, 질렸다는 듯이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씹어뱉는 발음 같은 것들을. 카렐은 그 직후 ‘안 그래도 데리고 사는 게 성가시던 참이었습니다. 잘됐군요.’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상상만 해도 오싹했다. 망상이 제어할 수 없이 뻗어 나갔다.
문득 사샤는 두려움을 느꼈다. 지금쯤이면 카렐이 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라면?
‘오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해.’
차갑게 일갈하는 카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왕왕 울렸다.
원래도 상상력이 풍부하고 예민한 기질이 있는 사샤는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버릇이 있었다. 거기다 카렐이 저를 내보내려 한다는 피해의식까지 겹쳐 망상이 커졌다. 사샤는 비극적인 영화 대본을 머릿속으로 쓰기 시작했다.
‘말도 안 듣고, 밥도 먹지 않고 포르노에 탐닉하다니. 사샤 세드린이 홈리스가 되어도 상관하지 않겠어.’
카렐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 옆에서 얄미운 게오르크가 장단을 맞춰댔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고된 출장에서 돌아오셨는데 마음 편히 맞아 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죠. 피곤하셨죠, 하면서 어깨를 주무르고 샴페인을 한잔 내와야 도리 아니겠습니까? 살을 찌워야 하는데도 도리어 몸무게가 줄었고, 머리카락은 부스스한 데다가 코에는 틀어막은 휴지까지 꽂고 있었습니다. 사샤 세드린에게 봐줄 만한 건 얼굴밖에 없었는데 못생긴 채로 클레멘츠 씨를 맞이했습니다. 대역죄입니다.’
사샤는 상상만으로 울분에 찼다. 제 꼴이 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걸 다른 사람이 언급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으윽. 게오르크. 죽여 버릴 거야.”
사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상상 속의 게오르크를 향해 욕을 했다.
하지만 그 얄미운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창에 비친 제 얼굴은 눈가 음영이 깊어 특히 음침해 보였고 젖살이 빠져 뺨이 핼쑥했다.
게다가 앙투르낭을 뛰다가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코도 2㎜ 정도는 낮아졌을지도 모른다. 사샤는 손을 올려 코를 매만져 보았다.
‘심지어 포르노를 못 보게 한다며 따져 들고 병원을 뛰쳐나가기까지 하다니……. 그게 올바른 발레 댄서의 행동입니까? 너무 버릇이 없습니다. 가만두지 마세요!’
‘내버려 둬. 벌을 줄 가치도 없어.’
‘헉……. 역시 제 상상보다 냉정하시군요. 그냥 방치하실 겁니까? 미아가 되면 어쩌죠?’
‘배가 고파지면 집에 오겠지.’
그 순간 사샤의 납작한 윗배에서 꼬르륵, 하고 선명하게 배곯는 소리가 울렸다. 사샤는 허기진 윗배에 손을 올렸다.
카렐의 말이 정답이었다. 정말로 배가 고파지니까 집에 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제 와서 호텔로 몰래 들어간다고 그가 자신을 반겨 줄까? 영영 나가 살지 그랬느냐며 가늘어진 눈으로 훈계할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몸을 소중히 할 줄 모르는 발레 댄서는 최악이라며 이미 정이 떨어졌다고 소리칠지도 모른다. 당장 나가서 형과 살라고 저를 쫓아내고는 평생 로드아일랜드 저택에도 초대해 주지 않을지도.
계속된 제멋대로의 망상 끝에 급기야 사샤는 큰 두려움을 느꼈다.
“으윽, 흑…….”
서러워지며 목이 꽉 메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나저제나 카렐이 오는 날만 기다리면서 매일 밤을 지새웠는데. 단 한 순간도 카렐을 그리워하지 않은 밤이 없었는데…….
사샤는 후회했다. 지금쯤 카렐의 단단하고 따뜻한 품에 안겨 이불을 덮고 나란히 누워 있었어야 했다. 비를 맞고 돈도 한 푼 없이 지하철을 타고 떠도는 자신이 비참했다.
뛰쳐나온 것은 제 선택이었으면서 생각할수록 지금 상황이 서럽고 기가 막혀 사샤는 또 울고 싶어졌다. 윽윽, 하며 치미는 울음을 씹어 삼키고 코를 훌쩍이며 눈을 깜빡였다.
겨우 눈물을 참은 사샤는 괜히 고개를 세차게 털었다. 비에 젖은 개처럼 머리를 털자 미세한 수분기가 촥, 촥, 흩뿌려졌다.
어느새 지하철은 덜컹거리다 목적지에 닿았다.
사샤는 멍하니 서 있다가 별안간 여기서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조금 늦게 후다닥 빠져나왔다.
역사 안은 어둑했다. 여느 오래된 뉴욕의 지하철역들이 그렇듯이 칙칙한 회색 벽에는 무언가 녹아 흘러내린 것 같은 물 자욱이 천장에서부터 번져 있었다. 철제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의 형광등에는 불이 들어왔다가 말았다가 했다.
사샤는 두려운 눈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역사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사람은 저 멀리 두어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침 같은 칸에 탔던 홈리스도 세상에서 제일 느린 걸음으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사샤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빠르게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헉, 헉…….”
그리고 도착한 지상의 풍경은 사샤의 기억과는 퍽 달랐다.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이미 밤이 깊어 무척 깜깜했고, 놀이기구들에도 불이 전부 꺼져 있었다. 사샤는 잠시 주변을 분간하기 위해 시선을 헤맸다. 영업을 종료한 오래된 놀이공원에서는 내리는 비까지 더해져 스산한 분위기가 풍겼다.
비가 멈추지 않고 쏴아아 쏟아졌다.
사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몸을 움츠리고는 가까이 보이는 2층짜리 건물의 처마 밑으로 달려갔다. 한때 카렐이 핫도그를 사 주었던 가게 안은 매장을 마감한 뒤 스태프들까지 모두 퇴근했는지 깨끗하게 정리되어 비어 있었다.
사샤는 초록색 네온사인과 가게 안쪽 아이스크림 판매대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에 의지해 안을 잠시 살펴보았다. 혹시나 해서 빨간색으로 칠이 된 문을 살짝 밀어 보았지만 단단히 잠겨 있었다.
사샤는 폭우에 잠긴 놀이공원을 바라보았다. 카렐과 단둘이 왔을 때도 사람들의 소음이 없는 놀이공원은 적막한 편이었다. 그래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군악대의 음악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로 제법 낭만적이었다.
하지만 현재 가로등마저 꺼진 놀이공원 안에서는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를 꽉 메우는 것은 아까보다 더 심하게 내리는 빗소리뿐이었다.
사샤는 무슨 생각인지 다시 터덜터덜 비를 맞으면서 해변 쪽으로 나아갔다. 젖어서 물미역 같은 머리를 한 채로.
그때였다.
“헤이. 아가야.”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왠지 카렐의 목소리와도 비슷했다. 사샤는 처음에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시했다.
“헤이.”
다시 한번 선명한 목소리가 빗속을 뚫고 귀에 파고들었다. 사샤는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령인가? 갑자기 무서워져서 사샤는 양팔을 감싸 쥐고 벌벌 떨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
그때 바로 옆에서 훅, 덥고 축축한 숨이 느껴졌다.
“으아악!”
사샤는 자지러질 듯 놀라며 바닥에 미끄러졌다. 엉덩이부터 바닥에 떨어져 척추까지 징, 울려댔지만 너무 놀라서 통증은 느끼지도 못했다.
“으, 흐으으…….”
올려다본 곳에는 아까 지하철 칸에서 본 노숙자가 있었다. 마약을 한 듯 동공이 풀린 눈, 가까이 오자 훅 끼치는 악취가 끔찍했다. 사샤는 겁에 질려 바닥을 발로 딛고 일어났지만 발끝에 걸려 있던 푹신한 호텔 슬리퍼가 발바닥에 잘못 끼어 다시 한번 넘어졌다. 이번에는 무릎을 박았다. 비명도 안 나올 정도로 아팠다.
“아파…….”
“이리 와, 예쁜이!”
노숙자가 사샤의 머리카락을 함부로 움켜쥐었다. 사샤는 양팔을 버둥거리며 노숙자의 손등을 마구 할퀴었다. 통증을 느끼고 머리카락을 놓았던 노숙자는 다시금 팔을 뻗어 사샤의 얇은 면 티셔츠를 잡아당겼다.
목이 켁 졸릴 정도로 아픈 것도 잠시, 부욱 소리를 내며 옷이 찢어졌다. 하지만 사샤는 옷이 너덜너덜해진 것도 모른 채 앞으로 기다가 벌떡 일어섰다. 아직도 무릎이 욱신거렸다.
“어딜 가!”
이번에는 노숙자가 온몸으로 덮치려 했다. 사샤는 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날렵하게 몸을 굴렸다. 맨땅에 헤딩을 한 노숙자가 쿵, 이마를 박으며 바닥에 엎어졌다.
“하아, 하아…….”
사샤는 헐떡이면서 일어나 앉았다. 얼굴로 자꾸 비가 쏟아져 시야가 흐렸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훑은 뒤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그사이에 노숙자가 사샤의 발목을 콱 붙잡았다.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쳤다.
사샤는 ‘어어엉’ 하고 두려움에 질린 눈물을 터뜨리면서 세게 발길질을 했다. 정확히 턱을 얻어맞은 노숙자의 얼굴에서 빡, 하는 소리가 났다. 노숙자가 비틀거릴 때 사샤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맨발로 보도블록을 밟으며 타다닥 달렸다.
집에 가고 싶어. 카렐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흐어엉엉! 카렐, 카레엘……!”
사샤는 카렐을 애달프게 부르며 마구 달렸다. 눈가에 흐르는 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달리는 사샤의 허리를 확 낚아챘다.
“아아악!”
노숙자가 그새 쫓아온 것이다! 사샤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휘둘렀다. 그랑 롱 드 장브를 하듯 높이 우아하게 뻗어 찬 다리가 정확히 노숙자의 머리가 있는 쪽을 가격했다.
“윽!”
뻑, 하는 소리가 났다. 상대가 휘청거리면서, 허리를 잡은 팔에 순간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사샤는 다시 울면서 달렸다. 뜨거운 눈물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흐, 흣……. 흐어어…….”
“사샤!”
“흐아아…….”
“사샤!”
달리던 사샤의 발이 조금 느려졌다. 왠지 부르는 목소리가 카렐의 것과 무척 비슷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왠지 악에 받쳐 있었고……. 더해서 아까도 노숙자의 목소리가 카렐처럼 다정하다고 멈춰 섰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지 않은가. 사샤는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샤아아……!”
그 순간 다시금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렸다. 맹수가 포효하듯 배 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외침이었다.
사샤는 우뚝 멈춰서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저 멀리 빗속에서 우람한 체격을 가진 장신의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슈트 차림이었고, 무척 화난 듯 보였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모습에 집중하면서 자세히 보려고 눈을 크게 떴다.
“후우, 사샤……. 제길. 사샤!”
헝클어진 금발을 쓸어 올리며 다가오는 건 카렐이 맞았다. 분명 카렐이었다.
어떻게?
사샤는 자신이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그것도 카렐이 보고 싶을 때,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정확한 순간에 나타난 그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소리가 지나치게 낯설었다. 카렐의 저런 말투와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사샤.”
카렐은 사샤의 앞으로 걸어오며 슈트를 벗어젖혔다. 물을 먹어 무거워진 재킷이 바닥에 털썩 떨어지고, 그다음으로는 넥타이가 신경질적으로 끌러졌다.
사샤는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젠장.”
카렐이 소매로 코를 슥 훔쳤다. 그러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에 묻은 피는 금세 씻겨 내려갔지만 눈처럼 흰 셔츠 소매에는 선명하게 선홍빛 피가 묻어 있었다.
“카렐……. 코, 코피 나요.”
사샤는 어렵게 입을 뗐다. 카렐과 코피라니,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사샤가 그 말을 한 순간 카렐의 코에서 다시 한번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렐은 ‘미치겠군’ 하면서 다시 소매로 코를 닦았다.
“알아요. 아까부터 목 뒤로 자꾸 넘어와서 이미 실컷 마셨으니까.”
“왜 코피가 나요?”
카렐이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리께에 손을 짚은 채로 다른 곳에 시선을 주는 얼굴은 뭔가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카렐이 이만큼 화가 난 것은 처음 봐서 사샤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아주 정확한 가격이었습니다.”
“네?”
“내가 방심했어요.”
카렐의 눈이 무서웠다. 짙은 녹색 눈이 위험하게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사샤는 아까 허공으로 그랑 롱 드 장브를 찼을 때 제 단단한 발목에 느껴졌던 선명한 타격감을 떠올렸다.
그게 카렐이었다니!
“시…… 실수였어요.”
“힘도, 근력도 엄청나더군요.”
“네……. 칭찬 감사……해요?”
“하아…….”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쉰 카렐이 손가락만 까닥였다.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카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리 와요.”
“싫어요…….”
“이리 가까이 오세요.”
“왜요?”
가까이 가면 카렐이 복수를 할 것만 같았다. 맞은 만큼 갚아 주겠다며 얼굴을 이리 대라고 하고는 주먹질을 할 것 같았다. 그만큼 현재의 카렐은 위험해 보였다.
사샤만큼이나 장거리를 달려온 건장한 몸은 후끈하게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평소 슈트에 감싸여 잠자고 있던 근육이 불끈거렸다. 자신이 카렐을 때렸으니 저 역시 한 대 정도는 맞아 줄 의향이 있었지만 이건 불공평했다. 카렐과 저는 체급 차가 나니까 카렐이 조금 봐줘야 했다.
“살살 하겠다고 약속하면요.”
대담하게 거래를 제안하는 사샤의 목소리에 카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힘 조절이 필요한 건가요.”
“…….”
“알겠습니다.”
“반의반…… 정도로 해 주세요. 카렐하고 저는 몸무게가 많이 차이 나니까.”
“알겠어요. 그만 종알대고 이리 와요.”
카렐이 손을 까닥였다. 그는 한숨을 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빗소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잘 안 들려서 사샤는 귀를 쫑긋 세워야 했다.
“사샤, 당신이 와 줘야 해요.”
“…….”
“강제로 데려가고 싶지는 않으니까. 젠장……. 이미 협박하고 있군.”
카렐은 빗물에 젖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털어내면서 씹어뱉듯이 중얼거렸다. 뒷말은 혼잣말인 것 같았다. 카렐이 비속어를 이만큼 많이 쓰는 것도 처음 본다.
사샤는 공포에 질렸다. 조금 살아났던 의지가 수그러들었다.
사샤가 저도 모르게 살살 뒷걸음질 치자 카렐의 얼굴이 확 굳어 들었다. 놀래서 사샤는 다시 얼어붙었다.
“사샤, 제발.”
그래, 사나이답게 한 대만 맞아 주자.
사샤는 결연하게 다짐하며 카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코피 난 곳을 또 때리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한 걸음을 내딛자 카렐이 부릅뜬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다. 문득 사샤는 왜 카렐이 제게 먼저 다가오지 않았는지 궁금해했다. 복수하고 싶으면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때릴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내가 다가가야 한다는 걸까.
또 한 걸음 다가가면서, 사샤는 카렐이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있는 걸 알았는지 궁금해했다.
다시 한 걸음 다가가면서, 사샤는 카렐의 처음 보는 표정을 더 가까이서 관찰했다.
그건 단순히 화가 났다기보다는 그보다 더 복잡한 얼굴이었다.
마치 불안, 걱정, 분노, 초조함이 뒤엉켜 섞인 것 같은 얼굴.
팔을 뻗으면 겨우 손끝이 닿을 만큼의 틈 정도를 남기고 사샤는 잠시 멈춰 섰다. 카렐의 눈에 무언가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걸음을 다시 내디뎠을 때였다.
카렐이 세차게 포옹해 왔다.
순간적으로 발이 달랑 들릴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그에게 숨 막힐 정도로 안겨서 사샤는 끄윽, 하고 가슴이 졸리는 소리를 냈다. 맞닿은 카렐의 가슴에서는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사샤, 사샤…….”
카렐의 커다랗고 더운 손이 사샤의 드러난 등을 어루만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제야 사샤는 제 티셔츠가 형편없이 찢겨 나가 맨살이 드러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렐은 사샤의 뺨에 제 뺨을 비볐다. 귓가에는 카렐의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더럽고 축축하던 노숙자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카렐만의 향기가 났고, 빗속에 있는데도 전혀 식지 않은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사샤는 바르작거리며 카렐의 품에 더욱더 달라붙었다.
“걱정했습니다.”
“…….”
“너무…… 너무 걱정했어요.”
이보다 더 강하게 끌어안길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카렐이 그전보다 더욱 거세게 사샤를 끌어안았다.
제 망상은 전부 망상일 뿐이었고 카렐이 한시도 쉬지 않고 저를 찾아다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사샤는 눈물을 찔끔 흘릴 뻔했다.
“카렐, 미안해요. 미안해요!”
“당신은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이렇게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에 사샤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뱃속이 따끔거렸다.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내가 더 미안합니다.”
“엄청 보고 싶었어요. 엄청 후회했어요.”
“그랬나요.”
“네……. 그리고 배고파요.”
사샤가 훌쩍이며 덧붙인 말에 카렐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품에 꽉 안긴 채로 사샤는 질식할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허기보다 더 강한 잠이 가물가물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