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혼자 잠들기는 싫어요
늦은 밤, 게오르크는 약속한 시각에 맞춰 다시 돌아왔다.
카렐은 가로등 아래 사샤를 업은 채로 서 있었다. 상관을 발견하고 멀리서 가볍게 달려온 게오르크가 카렐의 등에 업혀 졸고 있는 사샤의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며 말했다.
“방전될 때까지 뛰어놀았나 보네요.”
“학교 수업도 있었으니까, 피곤했겠지.”
“애는 애군요.”
카렐은 피식 웃었다. 게오르크를 기다리며 잠깐만 벤치에 누워 쉰다는 게 이렇게 되어 버렸다. 사샤는 카렐의 허벅지를 벤 채로 하늘을 끔뻑끔뻑 쳐다보다가 순식간에 잠에 빠졌다. 고르륵, 아주 작게 코까지 골면서.
차로 향하기 전에 게오르크는 카렐의 등 뒤로 돌아가 얼른 사샤를 받아 들려 했다. 카렐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차를 턱짓했다.
“깰 것 같으니까.”
“괜찮으십니까?”
“지나치게 가벼워.”
게오르크는 알겠다는 듯이 다시 차로 향했다. 잠시 후 차가 솜씨 좋게 바로 카렐의 앞에 섰다.
차에 오른 뒤 카렐은 사샤를 조심스레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곱게 안전벨트를 매주는 사이 사샤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초점이 덜 잡힌 눈이 허공을 헤맸다.
“으음…….”
“깼어요?”
카렐은 사샤의 이마에 쪽, 키스를 해 주었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카렐은 재킷을 벗어 사샤의 몸 위에 조심스레 덮었다.
“좀 더 자둘래요? 돌아가는 길은 꽤 막힐 겁니다.”
“음……. 싫어요.”
사샤는 고개를 저으며 카렐의 목에 매달렸다.
“키스해요.”
“…….”
“키스하다 잠들래요.”
카렐의 시선이 잠깐 게오르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굿나잇 키스라면.”
사샤는 손을 들어 점잔을 떠는 연인의 따뜻한 뺨을 돌려 저를 보게 했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기울어진 너른 가슴팍에 매달렸다.
카렐은 제게 나긋하게 감겨 오는 유연한 몸을 커다란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듯, 사샤는 고목에 매달리듯 카렐의 목덜미에 팔을 얽고는 키스를 졸랐다. 잠결에 평소보다 뜨끈해진 체온까지도 아기 같았다.
성실히 자라고는 있지만…….
카렐은 여전히 가냘프게만 느껴지는 몸을 토닥여 주었다. 옆태가 특히 날씬한, 가느다란 사샤의 몸판은 별로 부피감도 없었다. 그렇게 사샤의 등을 어르던 카렐의 시선이 무심결에 느슨한 저지 안쪽으로 향했다. 맨몸에 트레이닝복 상의만 걸쳐 옷 사이로 등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안쪽의 살갗에서 풋풋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카렐은 코를 기울이며 향기의 근원을 찾았다.
“으음…….”
카렐의 행동을 성애적으로 해석했는지, 사샤는 꼭 안긴 채로 자꾸 꿈지럭거렸다. 카렐의 뺨에 사샤의 작은 귀가 달라붙어 비벼졌다.
“학교 샤워실에서 샤워했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수업 끝나고 씻었어요.”
인공적이고 흔한 향이 옷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바탕 야외를 휘젓고 와서 머리카락이나 겉 피부의 향기는 날아가 버렸지만 드러나지 않은 살갗 안쪽에는 아직 고이 묻어 있었다. 마트에서 삼사 달러만 주면 살 수 있는 양산형 소비품인데도 사샤의 몸에서 풍기자 퍽 향기롭게 느껴졌다.
등을 어루만져 주자 향기가 한층 짙어졌다. 원래 후각이라는 것은 자각하기 전에는 희미하다가도 한 번 실마리를 잡으면 코끝에서 잘 떨어지지 않게 마련이다.
“흐응…….”
그사이 사샤는 일부러 카렐의 목덜미에 코를 박으며 신음을 해댔다. 밤도 늦었고, 추억의 한 페이지에 남을 만한 아름다운 데이트도 했다. 이다음 단계를 빠뜨리면 섭섭하다.
사샤가 의도한 것은 성적인 어필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카렐은 사샤의 의도와는 다르게 강아지가 코를 비비는 것으로 이 상황을 애써 치환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카렐은 얼른 다른 손으로 신음을 흘리는 사샤의 입을 틀어막았다. 상관의 귀갓길을 위해 밤늦게까지 수고하는 비서 앞에서 보일 모습으로는 별로 옳지 않단 생각이 들었기에.
하지만 그게 도리어 사샤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카렐의 커다란 손으로 얼굴이 반 이상 가려진 사샤는 유일하게 드러난 큰 눈을 깜빡이다가 카렐의 손바닥 안쪽에 쪽, 입맞춤했다. 혀를 내어 핥기도 했다. 카렐의 눈이 가늘어졌다.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훤히 그려졌다. 아무래도 사샤는 이대로 얌전히 출장을 보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키스만 하자면서요.”
운전석 앞쪽을 흘끔거리며 카렐이 작게 속닥였다. 그러자 사샤가 입을 뻐끔거렸다. 사샤가 헛소리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카렐이 즉시 손바닥을 얼굴에 밀착시켰다.
“흐우웅애응어어어?”
손바닥 안에서 불분명하게 흩어지는 말에 카렐은 쿡, 웃음을 흘렸다. 사샤는 흡, 하고 손바닥 안에서 숨을 들이마시고 또 파, 하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그 모습에 진심으로 웃음이 터진 카렐이 소리 내어 웃어 버리자 약이 오른 사샤는 얼굴이 벌게져서 카렐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런 적은 없는데요?”
“그런가요?”
“네.”
단호히 대답하며 사샤는 다시 카렐의 목에 매달렸다. 이번에는 키스를 하는 대신 까슬하게 수염이 돋은 카렐의 턱을 위아래 작은 이로 자근자근 긁었다. 그때 카렐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람쥐가 앞니로 제 턱을 긁어대는 것을 상상했다.
잠시 후 카렐은 사샤의 턱을 조심스레 잡아 제게서 조금 떨어뜨렸다.
사샤가 아쉬운 얼굴로 카렐을 빤히 바라보았다. 입술 안쪽으로 드러난 사샤의 치아와 카렐의 큰 엄지손톱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사샤는 치아마저 깜찍하게 작았다.
작은 턱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던 카렐이 말했다.
“얌전히 가죠.”
“……제가 뭘 어떻게 했다고요? 어떻게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사샤가 투덜거렸다.
“없는데 왜 몸을 가만두지 못하나요.”
카렐은 사샤의 엉덩이를 가볍게 찰싹 때려 주었다.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어르듯이. 그리고 불시에 엉덩이를 얻어맞은 사샤는 작은 충격에 휩싸였다. 왜일까. 그가 저를 다섯 살 난 어린애 다루듯 해서? 카렐이 항상 저를 은근히 애 취급하기는 했지만 이토록 본격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어서?
사샤는 제 유혹이 통하기는커녕 그를 성가시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시무룩해졌다. 카렐은 차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하는 듯했다. 저는 내버려 두고 창밖만 보는 카렐이, 사샤는 야속했다.
잠시 뒤 카렐이 도로 사샤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샤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의 다 왔네요.”
그 직후, 카렐은 사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다.
“게오르크, 음악 좀 틀까.”
“어떤 거로요?”
“아무거나.”
이어서 라디오 소리가 흘러나왔다. 게오르크는 상관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찾기 위해 몇 번 채널을 옮겼다. 이어 그가 손가락을 멈췄다. 클래식 채널이었다. 우아한 곡조를 듣던 카렐이 다른 제안을 했다.
“좀 더 시끄러운 게 좋겠는데.”
“그래요? 우리의 작은 세드린은 이제 곧 잠자리에 들 텐데, 자라나는 청소년의 바이오리듬을 흐트러뜨리지 않을까요.”
“음……. 사샤에게 물어볼까.”
사샤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갑자기 음악 타령을 하는 카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어 우퍼가 쿵쿵 울리는 클럽 음악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성실한 비서는 심지어 음량을 올리기까지 했다. 음악은 카렐, 게오르크, 사샤 그 누구의 취향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카렐은 그 소음이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이걸로 좋아.”
파란불로 바뀌고 다시 차가 출발했다. 도로를 달리는 차의 진동과 음악 소리 덕분에 적당한 소음이 생겼다.
‘입 벌려요.’
카렐이 음성 없이 속삭였다.
뜻밖의 말에 사샤의 눈이 커졌다. 카렐은 사샤의 뒷덜미를 큰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며 고개가 젖혀지도록 뒷목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이렇게 하면 상대는 자연히 입을 벌리게 된다.
카렐의 능숙한 인도에 따라 사샤는 자각도 없이 입술을 벌렸다. 그렇게 드러난 분홍색 입 안에 능숙하게 입을 맞추면서 카렐은 사샤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사샤는 쿵덕쿵덕 뛰는 심장을 억누르고 숨죽이며 키스에 응했다.
옥사나가 말했었다. ‘너의 나이 많은 애인은 밀고 당기기의 귀재가 틀림없다’고. 이 순간 사샤는 그 말에 강하게 동의했다.
엉덩이를 때려 의기소침하게 만들더니, 다음 순간 비서조차 눈치채지 못하게 소음 속에서 몰래 키스를 건넨다. 정말이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심지어 혼을 빼놓는 키스 스킬까지……. 혀와 입천장을 자극당해 흥분한 사샤가 저도 모르게 비음을 흘릴 때마다 카렐은 능숙하게 그 신음마저 삼켜 갔다.
커다란 손으로 가운데가 옴폭 파인 날씬한 등을 느리게 문지르던 카렐은 사샤의 등허리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트레이닝복 바지 안까지 부드럽게 손을 침범시켰다.
“……?”
속옷이 만져질 차례인데 손은 걸리는 것도 없이 곧바로 탄력 있는 엉덩이에 닿았다.
카렐은 입술을 뗐다.
“하…….”
이런 되바라진 십대가 있나.
바지 아래 사샤는 맨몸이었다. 카렐은 어이없는 한숨을 쉬며 속삭이듯 물었다.
“오늘 계속 이 상태였어요?”
멈칫한 사샤가 변명했다.
“어……. 속옷을 까먹고 안 챙겨 갔어요. 근데 아시잖아요. 저는 원래 타이즈 안에 아무것도 안 입는 걸 선호해요.”
“압니다.”
“학교 끝나고 샤워하고 나니까 속옷이 없었어요.”
“네. 그랬겠죠.”
“오늘만 이런 것도 아니거든요!”
사샤가 귀에 속닥거린 소리에 도리어 말을 잃은 쪽은 카렐이었다. 야생원숭이처럼 노팬티로 맨해튼을 누비고 다녔을 열다섯 사샤의 지난날을 생각하니 황망해졌다.
갑자기 뚝 멈춘 키스에 투덜거리던 사샤는 왠지 넋이 나가 보이는 카렐을 올려다보며 아직 엉덩이 위에 신사적으로 얹혀 있는 그의 손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양손으로 들어 중지를 조심스레 입에 넣었다. 치아가 손톱과 마디를 긁었다. 안쪽 보드라운 혀가 한 마디를 감쌌다.
“사샤…….”
또 섣부른 도발을 해 오는 어린 애인.
자신이 하는 것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진 유혹인지 자각이 없는 십대 애인을 두니 정말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다고, 카렐은 생각했다.
그것뿐인가. 오늘만 해도 바람둥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핫도그로 맞을 뻔했고, 오래전에 관계를 마무리 지은 전 애인들의 존재로 큰 비난을 받았으며, 지은 지 백 년이 넘어 삐걱이는 관람차 위에서 쾅쾅 발을 구르는 바람에 함께 비명횡사할 뻔했다. 이제는 같은 공간에 제삼자가 있는데도 야한 짓을 부추긴다.
카렐은 침착한 눈길로 사샤의 도발을 감상했다.
작은 입 안에서 손가락을 빨아들이는 가벼운 압력이 전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검은 눈이 빤했다. 카렐이 꼭 이렇게 타액이나 젤을 묻힌 후 제 뒤를 풀어 준다는 것을 학습한 뒤로 사샤는 종종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오곤 했다.
그사이 카렐은 사샤의 입 안 크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고작 손가락 정도를 끝까지 머금으면 목젖에 닿고 마는 작은 입. 사샤는 지금도 겨우 끝에서 두 마디 정도를 열심히 빨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 성장할 부분이 많이 남은 몸이었다. 교과서적인 섹스도 사샤에게는 아직 버겁다. 그 때문에 현재 두 사람은 서로 합의하에 엄격한 룰을 세워 지키고 있었다.
삽입 섹스는 하룻밤에 단 한 번만. 그것도 다음 날이 주말일 때만. 겁도 없이 첫 관계를 졸랐던 날, 몽둥이 같은 흉기에 안을 신나게 얻어맞고 사샤는 고열과 몸살에 시달렸다.
그 후로는 관계를 조금쯤 겁내는가 싶더니…….
“이러지 말아요.”
카렐의 말에 사샤는 보란 듯 빠는 압력을 높였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신사적인 경고였다. 아끼는 과일이 맛있게 후숙하도록, 멍이 들지 않도록 조심스레 다루고 싶었다. 오래 인내할수록 끝이 달다는 것을 카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샤는 잔뜩 열중했다.
잠시 후 사샤의 작은 입 안에서 푹 젖은 중지가 빠져나왔다.
“하아…….”
사샤는 만족스럽게 입맛을 다셨다. 카렐은 웃음기 없이 다시 경고했다.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요.”
“상관없어요. 2주나 못 보는데요?”
“…….”
“저한테는 그게 더 중요해요.”
“…….”
“2주 동안 외로울 때마다 카렐을 떠올릴 수 있게 오늘…….”
그러면서 사샤는 다시 카렐의 손을 양손으로 잡고 제 입가로 가져갔다. 이번에는 검지와 중지 두 개를 입에 담았다.
“거의 다 왔네요!”
그 순간 뜬금없게도 게오르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음악 소리를 뚫기 위해 일부러 크게 높인 음성이었다. 동시에 카렐은 사샤의 입 안에 담겨 있던 손가락을 빼내었다.
‘막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는데. 게오르크 바보.’
사샤는 게오르크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유혹은 이대로 실패로 돌아간 걸까? 의기소침한 사샤가 카렐에게 시선을 준 순간…….
맑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앞뒤로 살펴보던 카렐이 느리게 젖은 제 손가락을 혀를 내어 핥았다. 타액의 맛을 보는 것처럼. 그 얼굴이 무척 뻔뻔해 마치 과일즙이라도 핥는 것 같았다.
성적인 상상력이 빈약한 사샤는 고작 그 정도의 행동에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항상 이런 식이다. 사샤는 가끔 카렐이 불시에 보이는 변태성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실컷 카렐을 충동질한 것은 자신이면서도.
감당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샤를 향해 픽 웃은 카렐은 몸을 기울였다. 젖은 손가락은 손목째로 좌석 등받이에 걸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사샤는 숨을 죽이고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그 입술에 카렐은 일부러 젖은 소리를 내며 깊은 키스를 해 주었다. 백미러로 이쪽을 흘끔거리는 비서의 말문이 막힐 만큼, 또 깜찍한 도발을 해댄 소년이 만족할 만큼 농익은 키스를.
* * *
자정이 지나 거리는 무척 조용했다.
그래도 혹 보는 눈이 있을까 봐 우려한 카렐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사샤를 한쪽 팔로 들쳐 안고는 그 머리를 재킷으로 폭 덮어 싸매기까지 했다.
“편안한 밤 보내시길.”
“가 봐.”
게오르크의 인사말이 들렸다. 두꺼운 옷감에 가려 사샤의 시야는 깜깜했다. 저도 모르게 게오르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카렐이 움직이지 말라는 듯이 머리통을 꾹 누르듯 어루만졌다.
“좋아, 이제 가 볼까요.”
카렐이 재킷 위로 불쑥 튀어나온 동그란 머리통에 쪽, 가벼운 입맞춤을 내렸다. 재킷을 뒤집어쓴 꼬마 유령의 심장이 또 쿵쾅댔다. 조금 전 진한 키스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은 탓이다.
카렐은 빠른 걸음으로 호텔로 향했다. 자신이 떨어질까 봐 엉덩이와 등을 꼭 받치고 있는 카렐의 팔 힘, 가볍게 뛸 때마다 전해져 오는 살아 있는 뼈와 근육의 움직임, 따뜻한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맥박까지……. 그 모든 게 좋았다.
잠시 뒤 조용한 실내의 기척과 은은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로 사샤는 자신이 로비에 진입했음을 알았다. 사샤는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기 위해 고개를 조금 흔들었다. 하지만 흘러내린 재킷 사이로 틈이 빼꼼 생기자마자 짓궂은 카렐이 도로 재킷을 단단히 여몄다.
“……?”
영문을 모르고 사샤는 다시 어둠에 갇혔다. 카펫이 깔린 프라이빗 도어 안쪽에 진입했을 때 재킷을 치워 달라고 다시 한번 머리를 흔들었지만 카렐은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엉덩이에 턱, 하고 손을 올리고는 대놓고 희롱해 댔다! 아직 바깥인데 말이다. 대담한 손짓에 사샤는 조금 놀랐다. 하지만 좋은 징조라고 느끼고 카렐의 허리에 적극적으로 다리를 감았다.
재킷을 머리에 뒤집어쓰는 바람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위로 솟은 작은 엉덩이를 매만지던 느린 손길이 어느 순간 느슨한 트레이닝복 바지 틈으로 파고들었다. 피부에 스치는 건조한 손바닥이 짜릿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자 카렐은 사샤를 둘러멘 채로 벽에 기대어 섰다. 가볍게 둔부를 잡아 벌린 카렐의 손가락 끝이 감질나게 입구에 닿을 것 같아 사샤는 몸을 꿈틀거렸다.
“힉, 으응…….”
손가락 끝의 짧은 손톱이 입구를 긁는 느낌이 찌릿했다. 언제고 카렐의 손가락이 침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두려워졌다. 사샤는 숨을 몰아쉬면서 힘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애를 쓸수록 도리어 사샤의 뒤는 단단히 닫혔다. 침대 바깥에서 관계를 해본 적도 없거니와, 카렐에게 온 힘을 다해 달라붙어 있느라 몸이 긴장한 채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샤를 아는지 모르는지, 카렐의 손가락은 망설임 없이 다시 사샤의 뒤를 문질렀다. 갈라진 틈을 찾아 촉촉한 입구를 잠시 더듬고는 손가락을 천천히 밀어 넣으려 들었다.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폭 기댄 사샤는 신음을 삼켰다. 뒤로 꽂히는 손가락을 피해 부질없이 위로 기어 올라가려 했다.
“하지 말까요.”
나직한 목소리에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마른 손톱 끝이 안을 파고들었다.
“흣…….”
사샤의 입에서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아까 실컷 묻혔던 타액은 이미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뻑뻑한 감이 있는 안쪽이 손가락을 따라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딱 한 마디, 고작 한 마디를 삼킨 뒤는 단단히 닫혀 더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읏……. 카렐, 아파요.”
“괜찮아요. 다치지 않습니다.”
“흐윽……. 손톱 끝이 가끔 까칠거려요.”
“그래요. 알겠어요.”
카렐은 고개를 기울여 사샤의 귓가와 뺨에 키스해 주었다. 사샤는 카렐의 목덜미에 더 꼭 매달렸다. 귓가에 카렐이 다시금 속삭였다. ‘힘 풀어요’라고. 그러나 순간적으로 힘을 푸는 법을 잊어버린 사샤는 반대로 가장 익숙한 자세를 취해 버리고 말았다.
아랫배와 엉덩이가 돌덩이처럼 단단해지도록 힘을 꽉 주는 풀업 자세 말이다. 순식간에 손가락을 문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며 근육이 폭 파였다. 카렐은 사샤가 또 저를 도발하는 것인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가 멈추며 잠시 주변이 정적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카렐이 재킷을 젖혀 주었다. 사샤는 빨개진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조도가 낮은 조명 아래, 일견 무심해 보일 정도로 표정이 없는 카렐의 얼굴이 보였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으나, 이제는 그것이 카렐이 무섭게 집중했을 때의 얼굴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이번에는 약지를 내밀었다. 마디가 분명한, 남자답고 굵은 손가락.
“응……. 응…….”
사샤는 다시금 타액을 듬뿍 묻히며 손가락을 빨았다. 충분히 적셨을 때 카렐의 손가락이 다시 뒤를 더듬었다. 사샤는 카렐의 질긴 목덜미를 꽉 끌어안았다. 말랑말랑한 입구를 꾹 누르던 손가락이 이내 쉽게 쑥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손가락의 질량감이 느껴졌을 때 사샤는 혀를 씹을 뻔했다.
“흐앗…….”
관절이 꺾이는 부분이 내벽을 긁고 짧게 깎은 손톱 끝이 느끼는 곳을 눌렀다. 마디가 뚜렷한 남자다운 손이 안을 드나들 때마다 희미하게 질척이는 소리가 났다.
사샤의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렸다. 카렐의 목덜미를 꽉 안은 채로 주먹을 어쩌지 못하고 입술을 깨문다. 그 작은 반응을 가만히 끓는 눈으로 지켜보면서 카렐은 손가락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찌걱찌걱 질척이는 소리에 사샤는 등허리를 떨었다.
“하악, 흐응……. 응…….”
사샤가 넋 나간 사이, 카렐은 민첩하게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었다. 바닥에 이미 재킷이 떨어진 것도 모르고, 그것을 밟으며 복도로 걸어 나갔다.
그 와중에 사샤는 죽을 지경이었다. 특히 카렐이 걸어가며 몸이 흔들릴 때마다 예상치 못한 곳을 찔리는 바람에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촉촉하고 무른 안쪽을 마찰하며 빠르게 드나드는 손길에 사샤의 허리는 힘을 잃고 완전히 카렐의 품으로 쏟아졌다. 허리를 감싼 다리가 풀리려고 할 때마다 카렐이 다시 단단히 추켜 안았다.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선 직후 손가락을 빼낸 뒤에도 사샤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안겨 있었다. 고개를 수그린 채 얕은 호흡을 내쉬었다. 카렐은 그런 사샤를 살피며 조심스레 키스를 건넸다.
“해요, 카렐……. 하고 싶어요.”
사샤는 카렐에게 간청했다. 다시 그의 허리를 날씬한 다리로 꽉 조이며 졸라댔다. 하지만 카렐은 말없이 침대로 향했고, 심지어 허리를 굽혀 사샤를 가만히 내려놓으려 했다. 사샤는 고집스럽게 그에게 달라붙었다.
“안…… 안 할 거예요?”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요.”
“분위기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카렐이 쿡쿡 웃었다.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불퉁해진 사샤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눈을 내리깔고 셔츠의 단추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린다.
“당신은 매일 컨디션을 유지할 필요가 있어요. 아직은.”
“…….”
“삽입 섹스에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고.”
그 말은 사샤를 조금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섹스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는 카렐의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경험이 부족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래서, 불만이라는 걸까?
단추가 툭, 툭, 하나씩 풀어졌다. 부피감이 분명한 맨 앞가슴이 먼저 드러났다. 그가 팔을 움직여 셔츠를 벗는 순간 철벽이 허물어졌다. 남은 것은 육감적인 나신이었다.
사샤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크게 한 번 꿀꺽였다. 군침이 도는 건지, 압도당해 긴장한 건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평생 발레를 해온 사샤는 사람의 몸을 도구에 가깝게 인지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몸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몸을 만지거나, 힘을 주어 당기거나, 매달리거나, 번쩍 들거나 하는 행위는 무용에 있어서 아주 기본적인 동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맨살을 만지는 것은 사샤에게 전혀 어렵거나 의미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어린 사샤는 일반적으로 성적인 함의를 담은 스킨십도 자각 없이 해대곤 했다. 그리고 그건 지극히 상식적인 카렐을 가끔 곤란하게 만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몸은 도구일 뿐이라는 사샤의 인지를 처음 깨버린 것이 바로 카렐의 몸이었다. 선에 집착하는 발레에 맞춰 온몸을 조각상처럼 깎아내고 조형하는 사샤와 달리, 카렐의 몸은 마치 섹스어필만을 위해서 만든 몸처럼 느껴졌다.
옷에 감싸여 있을 때는 단단해 보이던 몸은 근육으로 꽉 차 의외로 굵직한 곡선의 향연이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힘으로 압도해 짓누르고, 매끈한 피부로 잔뜩 땀을 흘리는 것이 상상되는 몸. 저와는 완연히 다른, 어른 남성의 몸이다.
달빛을 반사하는 매끈한 피부를 보면서 사샤는 입을 헤벌렸다. 자신은 카렐처럼 변태가 아니어서 타인의 몸을 샅샅이 관찰하는 버릇은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언제나 순수한 자신을 이렇게 사로잡는다.
“오늘도 그런 눈으로 보네요.”
카렐이 픽 웃었다. 그러고는 마음을 결정한 듯이 말했다.
“이렇게 하죠.”
“네?”
“무리하지 않고 즐기는 쪽으로.”
무리하지 않고?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했다. 사샤는 그저 카렐을 정신없이 올려다보았다.
카렐이 몸을 굽히더니 예고도 없이 사샤의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어 입구를 검지로 훔쳤다. 가볍게 벌리듯이 안을 쿡, 찔러낸다. 얼마나 풀려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은 다소 무례한 손길에 사샤가 헛숨을 삼켰다.
“일단 젤을 씁시다.”
카렐은 젤을 손바닥에 죽 짜내는 것도 모자라 거의 반 통을 사샤의 아래에 치덕치덕 발랐다. 사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안에 쭉 짜 넣기도 했다. 무언가 꿀렁거리며 안을 채우는 기분에 사샤는 얼굴을 찌푸렸다.
“……읏, 조금 차갑고, 너무 많이 넣어서 흐를 것 같아요.”
“그럼 따뜻해질 때까지 안에 잘 머금고 있어요.”
“기분이 이상해요. 제가 카렐 손가락을 더 열심히 빠는 거론 안 될까요?”
“흠……. 당신이 뭔가를 빠는 걸 선호한다는 건 기억해 두죠.”
“…….”
카렐은 평소에도 젤을 후하게 쓰는 편이었다. 그때마다 사샤는 생각했다. ‘한 통을 다 쓸 거면…… 많이 해 주든가’라고. 그게 사샤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진짜 불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젤을 이렇게 많이 쓰면서 삽입은 언제나 딱 한 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가 나이가 많아서? 갈수록 오래 세우기가 어려워져서? 그건 절대 아니었다. (사실 조금 의심은 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직업 때문이다.
사샤는 발레 스쿨의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말인즉슨, 매일 학교에 가서 반복되는 일상을 소화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동정을 뗀 직후 몸살과 근육통에 시달리는 사샤를 보고 난 카렐은 자기가 정한 규칙에 무척 엄격해졌다.
콘돔 필수 착용.
통증이나 고통을 느낀다면 더는 진행하지 않을 것.
삽입은 딱 한 번만, 다음 날이 쉬는 날일 때만 관계할 것.
섹스가 교과서에 실려 있다면 쓰여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카렐의 원래 취향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사샤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표현하기엔…….
내일 출장이라는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오늘 이런 보너스도 없는 셈이다. 사샤는 일단 카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카렐은 고개를 숙여 사샤의 이마에 쪽,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더니 다시 손가락으로 아래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젤을 가득 묻힌 내부에 손가락 하나가 어렵지 않게 들어왔다. 익숙한 침대 위에 편히 누워 있어서 그런지 긴장도 쉽게 풀렸다. 이번에는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중지와 약지가 안에 부드럽게 꽂혔다. 찌걱이는 소리가 부끄러워 사샤는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손가락은 아주 수월하게 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카렐은 일부러 질척한 소리를 내고, 능숙하게 엄지손가락으로 회음을 간질여댔다. 젤이 따뜻하게 녹아 완전히 묽어졌다.
“아……. 응.”
사샤의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카렐은 스스로의 벨트 버클을 풀었다. 자연히 시선이 갔다. 지퍼를 내리고 속옷 안에서 튕겨 나온 것은 거대한 크기의 뱀이었다. 핏줄이 툭 불거져 있고 가끔은 멋대로 꿈틀거리는, 살아 있는 뱀.
저것을 몇 번 몸 안에 넣어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 사샤는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넋 놓고 감상할 틈도 없었다. 안을 채운 카렐의 손가락이 각도를 바꾸며 예민한 곳을 자극하기 시작한 탓이다.
“아……. 으읏, 응…….”
안을 짓누르고 뭉개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사샤는 학학대며 허리를 틀었다. 마치 성기 삽입을 흉내 내는 것처럼 검지와 중지가 안을 드나들었다. 녹아서 투명해진 젤이 애액처럼 튀며 질척이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카렐은 제 성기를 세게 주물렀다.
“아……. 으읏, 응……. 하으…….”
“후우…….”
이어 카렐이 사샤의 몸을 우스울 정도로 쉽게 달랑 들어 위치를 옮겨 주고는 저 역시 매트리스 위로 올라왔다. 무릎을 바닥에 대어 지탱한 채로 허벅지를 잔뜩 벌린 카렐은 누워 있는 사샤의 앞에 단단히 버티고 앉아 자위를 시작했다. 마치 마음껏 감상하라는 듯이.
“후우…….”
이건 두 사람 사이에서 최근 암묵적으로 합의된 순서였다. 카렐은 단 한 번의 사정으로는 잘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삽입 전에 꼭 자위를 하곤 했다. 그때의 카렐은 눈을 마주치는 것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 표정을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흥분을 잔뜩 삼킨 녹색 눈, 표정 없는 얼굴, 심부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낮은 신음…….
그때마다 사샤는 카렐이 저를 ‘먹어치워 버리고’ 싶어 한다는 착각에 종종 시달렸다. 이러다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으면 카렐은 한차례 사정 직후 누구보다 젠틀한 연인으로 돌아왔다. 사샤의 온몸에 다정한 키스를 내리고 뼈가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애무를 해 주었다.
사샤는 아직도 그 간극 사이에서 조금 혼란을 느꼈다. 젠틀하게 전희를 해 주면 온몸을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푹 담그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반대로 어디까지나 계산된 행위를 하는 것 같아 퍽 섭섭하기도 했다. 그가 여유를 잃고 제게 달려들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로 그러면 무서울 것 같기도 했다. 모순이다.
사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카렐은 젤 묻은 손바닥으로 스스로의 물건을 쥐고 위아래로 주물렀다. 한 점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 듯한 행동에 사샤는 몰래 벌벌 떨었다.
간혹 이처럼 카렐의 성욕과 적나라하게 마주칠 때 도리어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제 쪽이 된다. 이런 데서 심장이 졸아붙은 것을 들키면 어린애 취급을 받을까 봐 티도 내지 못했다.
“흣…….”
카렐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일부러 낮은 목소리로 끓는 신음도 흘려댔다. 흥분으로 머리에 열이 올라 사샤의 시야가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살짝 시선을 내려 카렐의 것을 살피자 원래도 무지막지하게 컸던 것이 거기에서 더 커진 채였다.
사샤는 살짝 겁을 집어먹었다. 아무리 제가 바란 것이기는 해도 막상 코앞에 닥친 삽입이 조금 무서웠다. 아무것도 모를 때에야 금기를 넘고 싶어 안달을 냈지만 후유증을 학습한 몸은 절로 움츠러들었다.
“다리 모아요.”
“……?”
사샤는 시키는 대로 착실히 무릎을 붙였다. 그러자 카렐이 한 손으로 가볍게 사샤의 두 발목을 한 번에 쥐고 허공에 들었다. 다리가 들려 시야가 차단된 통에 사샤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몰랐다.
“앗!”
젤이 다시금 넓은 부위에 흩뿌려졌다. 정확히는 엉덩이 바로 밑 허벅지와의 경계에, 모은 다리의 사이에, 그리고 회음부와 음낭 모두에. 차가운 젤의 감촉에 놀랄 새도 없이 카렐의 손이 그것을 성급하게 펴 발랐다.
“읏, 읏…….”
아래가 전부 축축하게 젖어 기분이 이상했다. 사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잠시 뒤 무릎이 굽혀지고, 뒤이어 회음에 열감이 있는 뜨거운 것이 닿았다.
“흐응…….”
모은 허벅지 사이로 비죽이 귀두 끝이 튀어나왔다. 흰 허벅지 사이로 머리를 내민 귀두의 색깔이 어둡고 적나라했다. 음낭과 성기를 스치며 미끄러지는 거대한 성기. 사샤의 입에서 다시 한번 비음이 흘렀다. 삽입보다 아프지 않고, 그보다 더 생생한 자극이 전해져 왔다.
“다리를 안아요.”
카렐이 다정하게 속삭였다. 사샤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자신의 두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유연한 몸이라 어렵지 않게 허벅지와 가슴이 맞닿았다. 카렐은 그대로 사샤의 얼굴 옆에 두 팔을 받치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 사이에 박을 겁니다. 기분 좋아요?”
“응……. 응, 조, 좋아요. 뜨겁고…….”
카렐의 우람한 성기가 모은 다리 사이를 드나들 때마다 사샤의 성기를 짓눌렀다. 젤을 넘치게 발라 잔뜩 미끈거리는 분홍색 성기와 음낭이 흥분으로 팔딱거렸다. 아래가 녹아내리는 기분에 사샤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엿한 무용수군요. 내전근 사이 조임이 괜찮아요.”
“……흐으, 으응…….”
“그래요. 허벅지 안쪽을 긴장시켜요.”
‘내전근’은 사샤도 아는 단어였다. 발레 클래스를 할 때마다 안쪽 근육을 써서 고관절과 허리까지 바닥에 딱 기둥을 세운 듯 단단히 서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었다. 무용수로서 받은 훈련이 섹스에도 제법 쓸모 있다는 사실에 사샤는 작은 보람을 느꼈다.
“읏, 흐으……. 윽, 윽…….”
“후우…….”
“응……. 카렐, 카렐……. 아아.”
“흣.”
점점 속도가 빨라지고 퍽, 퍽, 치받는 힘도 거세졌다. 삽입이 없는데도 격렬히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카렐은 갈수록 철퍽, 철퍽, 거의 몸무게를 실어 내려쳤고, 그때마다 사샤의 몸 전체가 흔들거렸다. 카렐의 짙은 녹색 눈이 사샤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학, 카렐, 읏, 으응……. 아, 아!”
전신이 꽉 짓눌린 채로 바윗덩이처럼 무거운 몸에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것 같은 감각에 사샤는 기묘한 충격을 받았다. 지나치게 빠른 데다 언제 끝날지 감이 잡히지 않아 더 두려웠다. 카렐은 이전에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삽입한 적이 없었다. 삽입 섹스를 할 때의 그는 절정에 다다를 때 속도가 빨라질지언정 언제나 다정했고, 사샤의 안이 다칠까 봐 내내 신경을 썼다. 하지만 피부의 마찰로 절정에 오르기로 마음먹자 이 정도로는 다치지 않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하면 안이 찢어져서 죽을 거야.’
사샤는 그간 카렐이 얼마나 관용을 베풀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삽입 섹스에 아직 익숙지 않다’는 카렐의 말도 이해해 버렸다.
“아읏, 흑, 흣, 으응……. 하응. 카렐, 카렐!”
“더, 불러요. 후, 더…….”
“카렐, 카렐!”
그때, 카렐이 한쪽 팔로만 바닥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사샤의 아래를 더듬었다. 무방비하게 허공에 노출되어 있는 작은 구멍을 엄지로 함부로 문지르고는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윽…….”
갑작스러운 자극에 허리를 뒤틀자 뒤이어 손가락이 푹 꽂혔다. 아프지는 않았다. 놀란 이유는 그가 손가락을 넣은 그 시점 때문이다. 잡아먹을 듯이 이마를 맞대고 아주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채로 카렐은 사샤의 안을 손가락으로 쑤셨다. 삽입을 흉내 내며 손가락 하나로만 안을 범했다. 느끼는 곳을 미친 듯이 찔려 사샤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카렐이 그것을 혀로 자연스레 핥아 갔다.
“아……. 카렐, 카렐……!”
사샤는 온몸을 뒤틀며 절정에 달했다. 분홍색 성기가 꿈틀거리며 흰 정액을 하얀 배에 뱉었다. 꿈틀거리는 앞을 달래 주면서 카렐은 저 역시 사정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읏…….”
오르가슴의 잔열이 남은 몸으로 벌벌 떨면서 사샤는 방금까지 손가락이 꽂혀 있던 곳에 무언가 뭉툭하고 뜨거운 것이 닿는 것을 느꼈다. 카렐의 성기 끝이었다. 그가 귀두를 입구에 문지르며 사정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들어가지 못해 안타깝다는 듯이. 실제로 반 틈 정도는 머리를 들이밀었을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사샤는 탈진해서 하아, 하아, 숨만 몰아쉬었다. 카렐의 질긴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이 보였다. 사샤의 뒤는 콘돔 없이 안에 싼 것처럼 잔뜩 젖어 더럽혀졌다. 카렐은 한참이나 그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관찰했다.
“흐으……. 카렐.”
카렐이 제 아래로 고개를 내렸을 때 사샤는 힘없이 시트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무릎을 모으고 싶었지만 그가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꽉 잡아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사샤의 다리를 벌리고 그가 아래를 핥아 주고 있었다. 사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아직 수치심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두 사람이 연인이 된 이후, 카렐은 새끼 고양이를 대신 그루밍해 주는 어미 고양이처럼 사샤의 몸 전부를 핥아대곤 했다. 그러나 제 치부까지 핥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카렐은 그게 애정 어린 후희 중 하나라고 말했지만…… 사샤는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카렐 본인이 뒤를 핥아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사샤가 부끄러워 몸을 떨 때마다 카렐은 그것을 흥분의 신호로 알고 더욱 게걸스럽게 핥아댔다. 이런 부끄러운 짓을 카렐이 아무렇지 않게 해댈 때마다 그가 경험이 많다는 것을 의식하게 된다. 이토록 거리낌 없이 하는 걸 보면 이전에 이런 짓을 많이도 한 게 분명했다. 사샤는 질투심 속에서 신음도, 울음도 아닌 것을 흘렸다.
“사샤.”
카렐이 다시 얼굴을 들어 땀에 젖은 사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머리카락을 어루만져 주었다. 한바탕 정신없이 휘둘린 기분에 사샤는 천장만 바라보았다.
“만족 못 한 건 아니죠?”
“……충분히 좋았어요. 정말이에요.”
“다행이네요. 이번에도 합격점을 받아서.”
그러면서 카렐이 사샤의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이 정도면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사샤는 삽시간에 다정해진 카렐의 변화를 신기하게 여기며 저도 모르게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끔은 이런 섹스도 괜찮죠? 삽입은 무리가 가니까.”
“네…….”
이런 것도 섹스구나, 생각하면서 사샤는 카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긴, 열중한 강도로만 친다면 지금까지 했던 모든 삽입 섹스보다도 더했다.
“카렐은요? 카렐은 좋았어요?”
사샤는 카렐의 짙은 금빛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카렐의 관자놀이에도 땀이 배어 있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뭔 줄 알아요?”
“……?”
동문서답에 사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참는 겁니다.”
“…….”
“아름답게 성장할 미래의 당신을 그리면서 인내하는 것도 즐거운 과정이죠.”
“…….”
“얼른 튼튼해졌으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사샤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깊이 숨을 들이쉬며 체향을 마셨다.
사샤는 금세 카렐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만족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사샤는 조금 전 카렐이 제 아래를 내려치던 강도를 떠올렸다. 삽입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실제로 당했다면 안이 망가졌을 것이다. 연약한 장내 점막이 멍투성이가 되는 게 눈앞에 훤히 그려졌다. 사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 운동할 거예요.”
카렐이 쿡쿡 웃었다.
“살도 찌울 거고요……. 근육도 더 크게 만들 거예요.”
“근육질 타입의 무용수가 되려고요? 그것도 좋죠. 아주 섹시하겠네요.”
“두고 보세요. 반년도 안 걸려요!”
정말로 몸을 키워야 해.
사샤는 절치부심했다. 카렐의 만족감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건 현재 프로 댄서를 꿈꾸고 있는 사샤가 직면한 것 중 가장 큰 문제였다.
매일 대여섯 시간의 리허설을 소화하고 밤에는 무대에 서야 하는 프로 댄서가 된다면 이 가냘픈 몸으로는 버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항상 옥사나처럼 체중 40㎏ 초반을 유지하는 깃털 같은 파트너만 만난다는 보장도 없었다. 카렐마저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했다. 또 그가 체중을 실어 짐승같이 몰아붙여도 버틸 수 있어야 했고.
그러나 카렐은 사샤의 다짐을 영 건성으로 듣는 것 같았다. 잠이 쏟아지는지 눈을 감고 대강 맞장구를 쳤다.
“그럼 다른 사람들도 당신이 섹시하다고 생각할 텐데……. 걱정이 큽니다.”
“맞아요. 각오 단단히 하세요. 저한테 고백하는 사람 엄청 많아질 거예요. 제가 키 큰 만큼 살을 찌우면요……. 카렐처럼 몸을 키울 수도 있어요. 제가 카렐을 한 손으로 들었다 놨다 할 수도 있다는 말이에요. 알겠어요?”
카렐은 대답 없이 눈을 감은 채로 빙긋이 미소 지으며 여전히 가냘픈 몸의 사샤를 제 품으로 쑥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사샤가 짹짹대든 말든, 그 부드러운 피부를 마음껏 주물렀다. 사샤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래서 카렐이 저를 주먹으로 패도 꿈쩍도 안 할 만큼 강해질 거예요.”
“제가 당신을 왜 때립니까.”
“이걸로 때릴 거잖아요. 이…… 이 뱀 같은 거로 안쪽을 마구. 이걸로 나를 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아요.”
“허…….”
그 말은 부정하지 못하겠는지 카렐이 말을 잇지 못했다. 사샤는 카렐의 품에 파고들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저도 카렐만큼 팔뚝이랑 허벅지가 두꺼워지고 싶어요. 비법을 알려주세요.”
“흠, 적당한 식사, 꾸준한 운동.”
실망스러우리만치 심심한 대답이었다.
“그게 뭐예요. 실망이에요.”
사샤는 투덜댔다. 그러다 별안간 조용해졌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걱정이 한 가지 있어요…….”
“흠…… 뭔가요?”
“제가 카렐처럼 우락부락해지면…… 그때는 제가 카렐 눈에 조금 덜 예뻐 보일 수도 있을까요?”
“…….”
“왜냐하면 카렐은 저를 열다섯 살에 처음 봤잖아요. 레전드랑 닮아서 그랬다고 해도 그때 저는 더 조그마했고…….”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멋쩍게 귀를 만지작댔다. 사샤의 말에 카렐이 눈을 휘며 웃었다.
“사샤?”
“네?”
“꿈 깨요. 당신은 아무리 몸을 키워도 나처럼은 안 돼요.”
“……뭐라고요? 저를 도발하지 마세요.”
사샤가 몸부림치자 카렐이 더욱 힘주어 사샤를 꼭 안았다.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사람마다 타고난 체질이 있으니 그렇죠. 얼마든지 먹고, 체중을 불리고, 중량을 치세요. 그래도 나처럼 될 수는 없을 겁니다.”
“치…….”
또 대놓고 자신은 카렐처럼 될 수 없다고 하니 기운이 빠졌다. 시무룩해진 사샤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린 카렐이 말했다.
“뭐, 몸을 키우는 데 성공해서 지금보다 몸이 두 배가 되거나, 아니거나…… 상관없습니다. 진심으로. 어떤 모습이든 당신은 사샤 세드린이지요.”
“…….”
“나는 그런 당신을 사랑할 운명으로 태어났고요.”
“…….”
“그거면 된 거 아닐까요.”
“와…….”
감탄이 나오도록 마음에 쏙 드는 대답이었다. 사샤는 그 대답에 만점을 주겠다는 의미로 쪽, 하고 카렐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카렐이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죠.”
그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사샤도 후응, 소리를 내며 카렐의 가슴 근육에 뺨을 비볐다.
“카렐, 조금 이따 우리 같이 씻어요.”
“그래요.”
“제가 머리 감겨 드릴게요.”
“부탁합니다.”
사샤는 카렐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물을 묻히면 갈색에 가까워지는 카렐의 금발은 저와 모질이 완전히 달라 만지는 재미가 있었다.
“사샤, 오늘 자기 전에는 꼭 허리에 파스 바르고 자요.”
“오늘은 삽입도 안 했는데요?”
“조금만 심하게 해도 근육통에 시달리잖습니까. 섹스는 한 자세로 오래 있을 때가 많으니까.”
“알겠어요…….”
잠시 후 카렐은 사샤를 가볍게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사샤는 카렐의 머리카락에 거품을 내서 그 어떤 때보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머리를 감겨 주었고, 카렐은 씻고 나서 보송보송 마른 사샤의 허리께에 직접 바르는 파스를 발라 주었다.
사이좋게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렐과 시야를 맞추려 베개 위로 어깨까지 몸을 올린 사샤의 발끝은 카렐의 종아리 가운데쯤 닿을 듯 말 듯했다. 사샤는 산만하게 자꾸 꿈지럭대며 카렐의 종아리를 건드렸다. 그게 성가시게 느껴졌던 카렐은 다시 사샤를 꽉 끌어안고 온몸으로 가두었다.
* * *
먼저 잠든 쪽은 카렐이었다.
사샤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반쯤 감은 눈으로 카렐의 잠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잠을 참는 것은 괴로웠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그래도 나았다. 카렐이 사샤가 잠들 때까지 팔베개를 해 주며 가슴을 끊임없이 토닥여 줬던 것이다. 나직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로, 언제 들어도 황홀한 완벽한 악센트로 양을 세 주었다. 그건 정말 고문이었다. 실제로 30분 정도는 진짜 자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었다. 아니, 잠들고 싶지 않았다. 카렐은 2주간의 긴 출장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그와 함께하는 한시가 아쉬웠다.
카렐은 잠시 후 6시 20분까지 공항으로 가야 한다. 이제 네 시간 정도가 남았다. ‘일어나면 내가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사샤의 이마와 눈가에 키스해 주었다. 크고 마디가 분명한 굵은 손마디로 머리카락을 아주 섬세하게 쓰다듬고 넘겨주기도 했다. 떠나기 싫다는 의지가 담긴 눈이 사샤의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밤이 되어 색이 짙어져 선명한 녹색이 된 그 눈이 사샤를 깊이, 아주 깊이 응시했다.
2주나 떨어져 있을 것에 대비하여 오늘 밤 연인 사이에 할 것은 모두 다 했는데도 무척 아쉬웠다.
‘2주라니…….’
절망감에 사샤는 아직 열기가 덜 가신 뺨을 이불에 비볐다. 맨살에 이불이 감기며 스쳤다. 카렐이 씻겨 주고 난 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침대 위로 올라온 덕분에 괜히 기분이 야릇했다. 왜인지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안쪽이 미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으음…….”
꿈틀대면서 사샤는 아직도 몸 안에 젤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그럴 수도 있었다. 카렐은 젤을 지나치게 많이 썼으니까. 관계 후에 카렐이 꼼꼼히 몸을 씻겨 주기까지 했는데 아직도 젤이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렐이 손가락을 넣어서 여러 번 빼 주었는데도 말이다.
‘카렐, 안이 미끈거려요.’
‘꼼꼼히 닦아 줄게요. 수용성이라 물에 잘 녹는 편이고, 그래도 시판 제품 중엔 이게 제일 낫습니다.’
‘흣……. 별로 기분이 안 좋아요.’
‘미안해요. 내가 깨끗이 닦아 줄게요.’
젤을 쓰는 건 아무튼 그의 사랑과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직후에 혼이 빠지도록 키스를 받는 바람에 마음이 풀려 버렸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시판 제품 중에 이게 제일 낫다니? 사샤가 직접 써 본 젤은 딱 하나뿐이었다. 카렐은 나머지 다른 제품들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써 주었을까?
사샤는 질투심에 가슴이 쿡쿡 찔리는 듯한 성가신 기분을 느꼈다. 최근 들어 이런 기분에 자주 휩싸이곤 했다. 카렐은 나이가 많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경험도 많고 관계에도 능숙했다. 자신의 앞에서 신사적인 척을 집어치우고 자기가 변태적이라는 인지도 없이 부끄러운 행위를 잘도 해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가 그런 경험치를 다 어디서 누구를 통해 쌓았을지 곰곰이 생각한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제 기분만 나빠질 뿐이다. 그래도 번잡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진짜 짜증 난다. 시판 젤 중에서 제일 낫다고? 카렐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고. 카렐도 엉덩이에 젤을 넣어 봐야 해. 한 통을 다 넣어 본 다음에 한번 빼 봐야 해. 그러면 얼마나 미끈거리고 신경 쓰이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사샤는 내심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젤을 이렇게 많이 쓰는 건지 궁금해했다. 딱히 오늘만 이런 것이 아니라 카렐은 언제나 젤 한 통을 꼭 다 썼다. 그게 평균인지 궁금해서 사샤는 예전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답들이 신통치가 않았다.
‘뒤로 느끼는 것이 섹스의 전부는 아닙니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게 뭔지 알아요? 참는 겁니다.’
‘얼른 튼튼해졌으면 좋겠네요.’
그의 완벽한 연인이 되고 싶다.
나도 카렐에게 성적인 만족감을 선사하고 싶다.
사샤는 숨죽여 생각했다.
경험이 많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쾌락이 어떤 것인지, 거기에 어떻게 다다를지도 아주 잘 안다는 뜻이다. 그가 지금의 저로 완벽히 만족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카렐은 언제나 장막으로 제 욕망을 가려 놓고 아주 살짝만 보여준다. 대담하게 다리를 벌리고 자위하거나 아래를 혀로 핥아 주는 게 그가 가진 욕망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건 지극히 일부였다. 사샤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장막을 걷었을 때,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시 그의 전 연인들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를 가진 연기자 부테라, 한때 카렐의 지원을 받았던 무용수 샌더, 그리고 연인은 아니지만 그의 지갑에서 돈을 멋대로 훔쳐 가던 ‘프렌드 위드 베네핏’의 존재도. 그들은 카렐을 성적으로 완전히 만족시켜 주었을까?
카렐은 삽입 전후로 꼭 자위를 했다. 지나치게 흥분하면 다치게 할지도 모른다며 자신을 억눌렀다. 그건 분명 사랑의 표현이었다.
카렐이 온몸으로 끌어안아 줄 때. 벗은 서로의 다리가 엉키며 맨살이 부드럽게 쓸릴 때. 타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예기치 않게 더듬어질 때. 그렇게 체온을 나누는 모든 행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은 충만감과 행복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들의 앞에서도 그런 배려를 했을까? 아니면 배려 따위는 내던져 버리고 흥분해 달려들었을까?
사샤는 눈을 깜빡였다.
‘나도 보고 싶어, 카렐의 한계를.’
현재 카렐은 차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욕망으로 들끓던 눈동자는 눈꺼풀과 색소가 옅은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힘이 들어갈 때마다 선명하게 드러나던 쇄골 부위의 뼈와 사샤가 크게 펼친 한 뼘의 손보다 면적이 넓은 대흉근도 시트 아래 잠들어 누워 있었다. 그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야릇해져서 사샤는 조용히 뒤척였다.
생각난 김에 사샤는 꾸물거리며 손을 뻗었다. 머리맡에는 커버에 펜을 꽂아 놓은 노트가 하나 있었다. 현재 사샤가 일기장으로 쓰고 있는 이 노트는 열다섯 살에 학교에 입학할 때 지급받은 것이었다. 발레 스쿨의 로고가 압으로 꾹 눌려 찍혀 있는 검은색 노트.
다른 아이들은 이미 다 써서 버린 것인데 수업 때 노트를 한 번도 적어 본 적 없는 사샤의 노트는 아직도 새것 같았다.
사샤는 펜을 들었다.
[☆좋은 점
자위할대 입술을 깨무러 좋앗음
뒤에 할타줄ㄸ ㅐ
귀를 입에다 다넣고 빨아주는거
씻어줫다. 또 머리카락이 에쁨
☆실은 점
젤이 첨벙청범하다
참는거 잘할때
출장가는거]
거기까지 쓰고 사샤는 노트를 덮어 놓고 끙끙 앓았다. 앞으로 2주나 볼 수 없다니.
생각해 보면 이 모든 게 망할 학교 때문이다. 카렐은 2~3일의 짧은 출장에는 학교에 미리 허가를 받고서 사샤를 대동하고는 했다. 특히 주말이 끼면 마음껏 따라다닐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갑작스럽게 정해진 출장은 어쩔 수 없다. 학교 따위 그만둬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카렐은 이 점에 있어서도 무척 엄격했다. 계속 발레를 할 예정이고 발레단에 입단하고 싶으면 남은 학기를 성실히 끝마치라고 했다. 그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샤가 해외 유수의 발레단 오디션 콜을 다 거절했으니 이제 남은 선택지는 발레 스쿨을 착실히 졸업해서 뉴욕 안의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뿐이었다.
사샤는 이불 안에서 버둥거렸다.
억울해. 억울해.
카렐을 어른이 되고 나서 만나면 좋았을걸.
하지만 그럼 카렐이 날 못 찾고 다른 애들을 후원해 주거나 할 수도 있었겠지?
억울해……. 2주나 출장을 가면 섹스를 미리 2주 치는 했어야 해.
“……사샤.”
그때였다. 곁에서 카렐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이불을 들춰내고 머리를 꺼냈다. 눈을 가늘게 뜬 카렐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안 오나요.”
카렐이 잠에 취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카렐…….”
사샤는 얼른 카렐의 따뜻한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묵직한 팔을 들어 사샤를 감싼 그가 무척 자연스럽게 사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팔을 살살 쓰다듬어 줘서 기분이 좋았다.
“얼른 자요. 피곤할 텐데.”
“저 때문에 깨셨어요?”
“글쎄요. 모르겠네요. 그냥 눈이 떠졌어요.”
이불 안에서 자신이 수선스럽게 굴어서 그의 숙면에 영향을 준 게 분명했다. 사샤는 잠시 숨죽이고 카렐을 올려다봤다. 그는 벌써 눈을 감고 있었다. 호흡도 무척 규칙적이다. 다시 잠든 것 같았다.
잠든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는 기분으로 사샤는 몰래 카렐의 뺨을 만지작댔다. 그다음으로는 콧등과 속눈썹도 만져 보았다. 눈가를 만졌을 때 카렐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으음’ 하고 카렐이 신음하는 소리에 깜짝 놀란 사샤는 얼른 손을 떼고는 다시 그를 관찰했다. 다행히도 금세 그의 숨이 편안해졌다. 다시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잠든 카렐을 마음껏 더듬어 보는 재미에 취한 사샤는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몸의 윤곽과 우람한 대흉근을 살살 만졌다. 크게 벌린 손의 한 뼘이 그의 가슴 짝 하나를 다 짚지도 못할 정도였다. 질 좋은 근육은 힘을 주지 않았을 때는 물주머니처럼 말랑거린다.
“와아…….”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사샤는 카렐의 흉곽을 제 손으로 이리저리 재 보았다. 그때 손바닥에 믿을 수 없이 부드러운 것이 스쳤다. 그건 카렐의 젖꼭지였다.
사샤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한 번도 존재를 의식해 보지 않았던 그것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카렐은 쉽게 피부가 그을리는 체질로, 여름이 아닐 때도 건강한 금갈색 피부를 유지했다. 사샤의 창백한 흰 손보다 훨씬 짙고 건강해 보이는 카렐의 피부 위 젖꼭지는 살짝 연분홍빛을 띠었다.
흥미를 느낀 사샤는 그의 가슴 위에 달라붙은 젖꼭지를 집게손가락 끝으로 살살 만져 봤다. 질긴 가슴 근육과 다르게 젖꼭지는 말도 안 되게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가끔 카렐이 제 가슴과 젖꼭지를 빨아 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샤는 충동을 느꼈다.
‘나도 빨래.’
잠시 후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사샤는 카렐의 젖꼭지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혀로 살짝 건드린 다음에 입 안에 머금었다. 그러고는 작은 입으로 온 힘을 다해 쪼옥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헉. 사샤!”
카렐이 헛숨을 내뱉으며 눈을 부릅떴다. 약 3초 만에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굳힌 그의 앞에서 사샤는 침 묻은 입술도 닦지 못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드니 카렐은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상체를 일으킨 채였다. 카렐은 황당한 얼굴로 추궁을 해댔다.
“대체……! 이 밤중에 자는 사람 상대로 무슨 짓이죠.”
사샤는 얼버무렸다.
“저한테 어필하고 있었어요. 반짝반짝했고…….”
“어필? 뭐가!”
“카렐의 젖꼭지가요……. 저한테 말을 걸었어요.”
평생 자기 젖꼭지가 어떤 어필이 된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카렐은 잠시 넋을 놓았다. 어린애의 되바라진 표현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내 젖꼭지가 말을 걸었다고요?”
“거의 그런 셈이에요.”
카렐의 황당함이 얼굴 전체로 드러났는지 사샤는 갑자기 얌전해졌다. 그 앞에 손을 모으고 반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갑자기 선생님 역이 된 카렐은 조금 더 막연한 기분을 느꼈다.
“아니, 후우……. 이리 와요. 사샤.”
“네…….”
사샤가 무릎걸음으로 엉금 기어왔다.
카렐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스스 쓸어 올리며 물었다.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근육이 잔뜩 성난 것처럼 부풀었다. 옆구리에는 상어 비늘처럼 우르르 작고 조밀한 근육이 돋았다가 사라졌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켰다.
“잠이 오지 않은 이유가 뭔가요.”
“네? 음……. 뭐가요?”
눈앞의 시각적 자극에 귀로 음성이 들려오는데도 뜻이 잘 와 닿지 않았다. 카렐은 사샤의 빤한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쉬워요?”
카렐이 진심을 꿰뚫은 것처럼 말해 왔다. 혹시 2주 치를 해 줄 생각이 이제야 들었나? 감당하는 것은 나중 문제다. 사샤는 미끼를 물었다.
“네……. 저는 팔팔한 십대니까요.”
기대감에 어려 답했지만 카렐은 사샤의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어쨌든 그런 짓은 하지 말아요. 그리고 오늘 정말…… 더는 안 돼요. 몸에 무리가 갑니다.”
“흥…….”
“함부로 도발하지도 말아요. 열상으로 다쳐서 학교를 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열쌍이요?”
“찢어진다는 소립니다.”
“어디가요?”
카렐은 정말로 몰라서 묻느냐는 얼굴로 사샤를 가볍게 훅, 끌어와 당겼다. 그러고는 벗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어린애에게 주사를 놓기 전 가볍게 때리는 것처럼. 갑자기 얻어맞아 ‘아!’ 하고 놀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샤를 가볍게 눕힌 카렐이 말했다.
“어디겠어요.”
“카렐? 저는 엄청 유연해요.”
“…….”
“설마 저를 찢어 버릴 거예요? 네? 저를 다치게 할 거냐구요. 저를 아프게……. 읍.”
카렐은 좀처럼 설득이 안 되는 사샤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으부부, 입술이 뭉개지며 카렐의 손바닥에 침이 묻었다. 신경 쓰일 텐데도 카렐은 손을 떼지 않았다.
그러자 사샤는 일부러 혀를 살짝 내서 카렐의 손바닥을 핥아 봤다. 카렐의 눈이 맹수처럼 가늘어졌고, 그 순간 사샤는 좋아서 등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빨리 자야 내일 학교에 가죠.”
“읍, 부부, 으우.”
“잔소리 듣기 싫으면 얼른 자요.”
“으!”
그러나 결국 사샤는 한마디 제대로 된 항의도 하지 못한 채로 카렐의 팔 안에서 꽉 조여졌다. 입은 막혀 있고, 등과 목덜미는 꽉 끌어안겨 가슴이 단단히 맞닿았다. 심지어 다리까지 얽어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그렇게 사샤는 카렐에게 억지로 안겨 다시 토닥임을 당하며 재워지는 고문에 시달렸다.
“후…….”
카렐이 긴 한숨을 쉬었다. 사샤의 등을 탕탕 두드리는 손길은 착각인지 몰라도 약간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 * *
카렐은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일어났다. 언제 자기 싫어 버텼느냐는 듯 사샤는 까무룩 잠에 빠져 있었다. 온몸을 기지개 켜듯이 쭉 뻗은 채로 자는 것이 꼭 나른해하는 고양이 같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자랐는데도 키만 컸을 뿐, 가는 팔다리가 낭창낭창했다. 근육질이 되어 카렐이 저를 패버려도 버티겠다니. 허황된 꿈을 꾸는 소년의 이마에 쪽, 키스를 남긴 카렐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매하게 잠드느니 일어나 나갈 채비하기를 택한 것이다.
따뜻한 샤워로 남은 피로감을 떨쳐 내고 드레스룸에서 옷가지를 입고 나와 축음기로 음악을 틀었을 때였다. 뒤를 돌아보니 침대 위에는 사샤가 일어나 앉아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나 때문에 깼군요.”
“카렐이 나가는 거 보고 싶었어요.”
사샤가 입을 한껏 벌리며 하품을 했다. 입이 찢어지도록 벌려도 새 부리처럼 작기만 했다. 작은 입이 귀여워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자 사샤가 목덜미에 자연스레 매달려 왔다.
뜨거운 샤워로 체온이 올라간 카렐의 목덜미에 감겨 오는 사샤의 팔은 차갑게 느껴졌다. 사샤는 키스해 달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입술만 닿고 쪽, 소리를 내고 떨어지자 사샤가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아니에요.”
카렐은 푸스스 웃으며 사샤의 입술 안쪽 점막과 촉촉한 혀를 가볍게 빨았다. 약한 마찰만으로도 사샤는 ‘으음’ 하고 듣기 좋은 신음 소리를 냈다.
가벼운 키스를 마치고 카렐은 금세 일어났다.
“얼른 더 자요.”
“네…….”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약속했어요?”
“그래요.”
“매일 통화도 해야 해요. 얼굴 보면서, 영상 통화로요.”
“당신만 괜찮다면.”
“그리고 돌아오면 꼭 로드아일랜드 저택에 갈래요.”
“약속하겠습니다.”
사샤는 이번에 가면 거기 들어앉아서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2주간의 헤어짐을 앞두고 연인은 애틋하게 서로의 손을 매만졌다. 장난치듯 얽은 손가락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손끝을 간질이는 감각에 사샤가 웃음을 터뜨리자 결국 카렐은 항복하며 허리를 낚아채고 상체가 뒤로 꺾일 정도의 깊은 키스를 해 주었다. 목덜미에도 쪽쪽, 간지러운 키스를 퍼부었다.
끝나지 않는 애정 표현 끝에 먼저 결단을 내린 쪽은 카렐이었다. 뒤돌아서고, 인사 없이 눈이 마주쳤다. 사샤는 손을 흔들었다. 손을 내리기도 전에 현관문이 닫히고 사샤는 혼자 남겨졌다.
풀썩 침대에 누운 사샤는 잠시 정적 안에 혼자 고립되어 있었다.
이제 앞으로 2주, 카렐이 없다는 실감이 아직은 잘 나지 않았다. 사샤는 울적함을 떨치기 위해 괜히 콧노래를 불렀다. 음조를 제멋대로 지어낸 의미 불명의 음악이었다.
‘일전에 5일 출장 다녀왔을 때는 한정판 레고를 사 줬지…….’
어릴 때 그런 걸 한 번도 가지고 놀아 보지 못했던 사샤에게 그건 엄청나게 탐나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너무 좋아하면 카렐이 어린애처럼 볼까 봐 티를 못 냈다. ‘이건 형한테 가져다줘야겠어요. 우리 형이 레고를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의젓하게 말했다. 카렐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었다.
‘내가 그걸 형에게 가져다준다고 말하는 바람에 카렐이 이제 레고는 더 안 사 오면 어쩌지?’
그게 걱정되었다. 사샤는 잠기운이 남은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그러면 술이 들어간 초콜릿도 괜찮아.’
하지만 그건 받은 직후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는 바람에 카렐이 못마땅해했다. 다시는 사 주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는 게 제 눈에도 보여 아차 했었다.
카렐은 아직 미성년자인 데다가 자제심이 약한 자신이 술맛에 푹 빠질까 봐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레전드 사샤 세드린이 엄청난 주당이었고 술 때문에 많은 곤란을 겪었다는 걸 알아서 더 그런 듯했다.
‘아무튼 괜찮아. 뭐든 상관없어……. 카렐이 무슨 선물을 사 올까? 엄청 기대된다.’
딱 2주만 기다리면 된다. 그러면 그의 선물을 받고, 또다시 함께 잠들고, 또 로드아일랜드 저택에 가서 말을 만져 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2주라는 시간은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졌다. 한숨을 폭 내쉰 사샤는 다시 털썩 고개를 떨어뜨리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사샤! 엉덩이를 꽉 조여라. 안쪽 근육에 힘을 주고 골반을 세워!”
바딤의 목소리가 벼락같이 귀를 스쳤다. 습관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던 사샤는 생각지도 못한 근육통에 놀랐다.
‘말도 안 돼! 삽입도 없었는데.’
어제 카렐이 잔뜩 마찰한 안쪽 피부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카렐이 파스를 발라 준 허리 말고 허벅지 뒤쪽도 잔뜩 땅겼다. 다리를 모아서 안은 채로 카렐의 체중을 뒤 허벅지로 받았기 때문인 듯했다.
아무튼 사샤는 바딤의 말대로 서 있는 다리 안쪽에 힘을 꽉 주고 골반을 펴며 턴 아웃 자세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통증 부위가 자극당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바딤이 칭찬을 해 주었다.
“바로 그거야! 정확해. 완벽해!”
잠시 후 센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딤의 칭찬이 줄줄이 쏟아졌다. 오늘따라 사샤가 턴 아웃을 인지하며 근육을 쓰는 모습이 아주 좋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섹스로 몸의 활용이 좋아진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어쩌면 일리 있는 말이기도 했다. 원래 고통이 존재를 자각하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다. 매일 무심코 사용하는 근육이 손상되면 도리어 사람은 그 근육을 의식하며 움직임을 조절하게 되니까.
심지어 바딤은 사샤가 모든 아이 앞에서 저 대신 시범을 보이도록 했다. 글리사드, 아상블레, 소테. 사샤는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느끼며 공중에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톰베 파드브레, 글리사드, 그랑 주테, 주테, 주테……. 탄성 있는 고무공처럼 바닥에서 팔짝팔짝 날아올랐다.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카락이 함께 찰랑거렸다.
“옳지! 그래! 바로 그거야!”
칭찬을 받으니 적당히 할 수가 없어서 사샤는 이를 악물고 팽이처럼 팽글팽글 돌았다. 사람들 눈이 이렇게 많은데 아픈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셰네를 돌며 무섭게 빠른 스포팅을 유지하는 집중력에 바딤이 ‘브라보!’ 하고 손뼉을 쳤다. 마지막 아라베스크를 하면서 다리를 뻗어내자 내전근과 허리가 징, 하고 울렸다. 열을 지어 선 학생들이 사샤에게 짝짝짝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모닝 클래스가 끝난 직후 사샤는 얼얼한 허벅지를 주무르며 스트레칭을 했다. 삽입 섹스 후 어김없이 찾아오는 근육통은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후유증이 느껴졌다.
사샤는 어정어정 걸어서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누군가가 빠르게 사샤를 따라 나오며 손등으로 등을 가볍게 때렸다. 땀에 젖어 있어 찰싹,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아픈 것보다도 소리에 깜짝 놀라며 사샤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때린 것은 다름 아닌 옥사나였다.
「아침부터 너무 달리던데?」
「바딤이 자꾸 나한테만 시켜서…….」
사샤는 맞은 등을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옥사나가 ‘아무렴’ 하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체력 다 떨어진 거 아니야? 그렇게 손을 떨어서 파 드 되 클래스는 어떻게 해?」
옥사나가 사샤의 손을 흘끔 쳐다보았다. 정말로 사샤의 손은 갑작스러운 체력 소진으로 인한 당 부족으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제대로 리프팅을 할 수 있을지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다리부터 허리, 그리고 팔까지 고루 힘을 줘서 잘 들지 않으면 손의 악력만 세져서 파트너의 몸에 멍이 드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파 드 되 클래스에 들어가기 전에 사샤는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 프로 무용수들은 각성제와 진통제를 먹고 무대에 선다는데, 벌써부터 그 간접 체험을 하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나 몸 키울 거야.」
사샤는 캔을 꼭 쥐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래?」
「응. 살도 더 찌우고 근력 운동도 더 열심히 할 거야.」
「진짜로?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나도 체중 조절에 신경 쓸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아무튼 힘을 더 길러야 하는 건 사실이다.
나란히 들어선 연습실 안에서 사샤와 옥사나는 미리 몸을 풀었다. 옥사나는 보수 위에 올라가 한 발로 서서 데벨로페를 하며 균형을 잡았고, 사샤는 그 한쪽 손을 조심스럽게 잡고 주변을 천천히 돌며 밸런스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러다 문득 사샤는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혼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렸다. 한때는 혼자 있는 것에 질릴 정도로 익숙했었는데 카렐과 함께하며 그 감각을 거의 잊어버렸다.
사샤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고여 있던 생각이 말이 되어 나온 거라 그런지 이번에는 영어였다.
“옥사나, 저기……. 오늘 저녁에 나랑 놀래?”
클래스 전, 각자 몸을 푸느라 작게 소란스러웠던 주변이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사샤가 옥사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줄로 의심한 아이들의 주의가 순식간에 몰린 것이었다. 몇몇 아이들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귀엣말을 해댔다.
“세상에, 아직도 안 사귀나?”
“옥사나가 부상이 있었잖아. 돌아온 다음에는 사샤가 휴학했고. 때를 놓친 거 아닐까?”
“그냥 베스트 프렌드일지도 모르지.”
“아무도 옥사나한테 물어본 사람 없어?”
“말로는 제 취향은 사샤가 아니라던데.”
아이들은 그간 사샤와 옥사나가 서로 러시아어로만 조잘대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는데, 아직은 사귀는 사이가 아니고 의외로 천천히 단계를 밟아 가고 있는 모양이라고 오해했다. 몰래 사샤를 흠모하던 아이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두 사람을 흘끔거렸다.
흔들리는 보수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고 그런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옥사나는 무심코 털털하게 답했다.
“오늘? 오늘 나 약속 있는데!”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약속?”
“응, 농구 보기로 했어.”
“농구장에 갈 거야?”
“아니. 기숙사에서 모여서 보는 거야.”
사샤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옥사나는 굉장히 미안해했다. 사샤가 먼저 만남을 청하는 일은 무척 드물었던 것이다.
“미안. 내일은 안 돼?”
“내일도 돼…….”
당장 오늘 혼자라고 생각하니 사샤는 울적함을 느꼈다. 하지만 울적해진 이유는 거절당해서만은 아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의 기숙사를 떠올리니 왠지 외로워졌다. 자신도 한때 거기 속했던 적이 있었다.
그걸 생각하니 카렐이 없는 곳으로 홀로 터덜터덜 돌아가는 게 더더욱 싫어졌다.
문득 옥사나가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럼 너도 올래? 네가 오면 난리 날 텐데.”
사샤는 깜짝 놀랐다.
“여자 기숙사에?”
“응. 사감 선생님 몰래. 혹시 걸리면 옷장 안에 숨겨 줄게.”
“정말?”
“응! 완전 신나겠다.”
옥사나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동시에 그 대화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던 여자아이들도 같이 들떠 버렸다. 사샤 세드린이 여자 기숙사에 온다! 갑작스레 벌어진 엄청난 이벤트였다.
사샤 역시 조금은 혹했다. 하지만 옥사나의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는 아닐 것 같다. 잘못해서 소문이 퍼지고 여자 기숙사에 무단 침입했다는 걸 들키면 징계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작년, 무단으로 학교를 빠지고 내정된 공연도 걷어차 버린 후, 자신은 만회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도 카렐과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마치기로 약속했다.
“아, 안 되겠어.”
“왜?”
“난 무서워. 걸리면 어떻게 해?”
“괜찮아! 남자 친구 데려오는 애들 엄청 많은데? 다들 옷장에 숨어. 아니면 창밖 비상계단에 숨기도 하고.”
그때,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사샤! 오늘 저녁에 우리도 농구 볼 건데. 정 그러면 남자 기숙사로 와.”
조제였다.
“정말?”
사샤는 조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물론 조제가 말을 건 이유는 외로운 사샤를 배려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저 사샤 혼자 여자 기숙사에 가서 여자아이들과 어울리는 건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제는 옥사나를 괜히 흘끔대면서 말했다.
“그게 낫지 않겠냐? 너도 마음 편하고.”
“그럴까…….”
조제가 대화에 끼자마자 옥사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팩 돌리고 다시 운동에 열중했다. 별거 아닌 남자애들하고는 말도 섞을 필요 없다는 옥사나의 고집이 느껴졌다.
그 도도한 반응에 혹시나 예쁜 여자애와 말 한두 마디 나눠 볼 수 있을까 얼쩡대던 조제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도리어 연습실 한가운데를 크게 차지한 후 허세를 부려댔다. 여학생들은 사샤 세드린의 여자 기숙사 방문이라는 이벤트를 단숨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조제를 흘겨보았다.
약간 갈등하던 사샤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제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농구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지만 기숙사의 떠들썩한 분위기도 그리웠고, 무엇보다도 호텔에 아무도 없다는 게 싫었다.
“그럼 우리는 내일 놀까?”
옥사나가 보수에서 내려오며 작게 휘청였다. 옥사나의 허리와 팔을 단단히 받치며 사샤가 대답했다.
“그래, 좋아.”
* * *
남은 일반 과목 수업들과 무용 클래스들을 모두 마친 사샤는 교내의 피트니스 센터로 향했다. 집에 가 봤자 카렐도 없으니 근력 운동이나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아침부터 몸을 혹사한 바람에 걷는 걸음걸음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졌다. 그래도 마음먹은 즉시 행동에 옮기고 싶었다. 사샤는 나란히 놓인 기구 중, 하체 단련을 위한 기구로 다가가 평소보다 중량을 20㎏이나 늘렸다. 카렐이라면 이 정도는 한 다리로 하겠지, 생각하면서.
“끄으으으으…….”
그러나 과한 목표치에 사샤의 몸은 금방 부하에 걸렸다. 잠시 잊었던 허벅지의 통증도 되살아났다. 일과를 소화하는 중에 아침부터 욱신거리던 허벅지의 묘한 통증은 줄어들었지만, 실상 그것은 나아진 것이 아니라 몸의 다른 부분이 고루 혹사당하느라고 잊힌 것에 불과했다.
더는 못 하겠다.
겨우 한 세트를 끝낸 후 사샤는 쓰러지듯이 기구에서 굴러 내려왔다. 그러고는 흐느적거리며 센터를 빠져나와 바로 옆에 있는 피지컬 룸으로 향했다.
“사샤구나!”
사샤를 반겨 준 것은 마사지사 헨드릭이었다. 그는 약 한 달 전에 이 학교에 온 신규 직원으로, 프로 댄서로 진로를 정한 졸업 학기 학생들의 전담 마사지사로 고용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6개월간 일하기로 했다고 들었다.
사샤는 팔에 문신이 많고 머리도 빡빡 깎은 그를 처음에는 조금 무서워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무척 활기차고 친근한 청년이었다. 심지어 사샤의 친형과 나이도 비슷했다.
“몸이 아파서 왔어요.”
사샤는 짐백을 치료용 침대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디가 아픈데?”
“온몸에 근육통이 있고요. 특히 허벅지에 자꾸 욱신거리는 통증이 와요. 아침 클래스 때부터 그랬어요.”
“또 찢어졌어? 넌 거기 염증이 자주 생기잖아.”
“그거랑은 조금 달랐어요.”
“어디 보자.”
사샤는 침대 위에 길게 엎드렸다. 막 운동을 한 직후여서 펌핑된 근육 때문에 엉덩이가 평소보다 솟아올라 있었다. 헨드릭이 둔부 근육을 손바닥으로 넓게 눌러 흔들면서 부드럽게 긴장을 풀어 주었다. 사샤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긴장도가 너무 높은데……. 사샤. 최근에 운동량을 늘렸어?”
“방금 운동을 하고 왔어요…….”
“부상 위험이 있으니까 트레이너가 권해 주는 것 위주로 해야지. 무리하면 안 돼.”
처방 없이 마음대로 20㎏이나 중량을 늘렸던 사샤는 뜨끔했다. 하지만 카렐처럼 되려면 아직 멀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제약이 걸리다니.
“그나저나 허벅지가 아프다고? 언제나 연습 루틴은 정해져 있잖아. 의심 가는 거 있어?”
“…….”
사샤는 입을 다물었다. 의심되는 운동이란 어젯밤의 유사 섹스뿐이었다.
사샤가 사실을 고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였다. 헨드릭의 단단한 손가락이 허벅지 뒤쪽의 통증 부위를 꾹 눌러왔다.
“흐……. 아파요.”
한숨을 내쉬며 사샤는 베개 위에 고개를 툭 떨어트렸다.
“타이즈가 검은색이라 근육이 잘 안 보여.”
헨드릭의 말에 사샤는 타이즈를 일단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가 종아리 아래쪽 가자미근의 갈라진 지점을 꾹 눌렀다. 사샤는 속절없이 끙끙 신음만 흘렸다.
“무용수에게 근력은 중요하지. 운동하는 것도 좋지만 무리는 하지 마. 풀어 줄 시간도 없이 피로만 쌓이잖아. 넌 아직 자라는 중이라 역효과가 나.”
“으으……. 저 몸 키울 거예요.”
“그래.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얼마나 어떻게 키우려고? 볼레처럼 되고 싶니?”
로베르트 볼레는 키가 190㎝가 넘는 우람한 체격의 스타 무용수였다. 옥사나가 껌뻑 죽는 체형이기도 했다. 사샤는 그렇게 몸을 키운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그 정도가 되면 카렐과 단둘이 레슬링으로 붙어도 버틸 만할 것이다.
“그러면 좋고요.”
헨드릭이 픽 웃으며 사샤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다시 근육에 손이 닿아 사샤는 엎드린 채로 몸을 꿈틀거렸다. 통증 때문에 전신에서 땀이 났다.
헨드릭의 손은 종아리를 타고 올라와 뒤 허벅지의 햄스트링 근육을 꾹꾹 눌러댔다.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는데 그대로 엉덩이와 허벅지의 연결부 쪽을 꽉 누를 때에는 저도 모르게 혀를 깨물 뻔했다. 사샤는 끅, 하고 숨을 삼켰다.
“여기가 아파? 이 뒤가?”
“아, 아파요…….”
사샤는 코를 훌쩍이며 답했다.
“희한하네. 잘 다치지 않는 곳인데.”
헨드릭이 손을 떼고 물러났다. 사샤는 일인용 침대 위에 힘이 쭉 풀린 채로 엎어졌다. 그간 카렐에게 받은 마사지는 퍽 다정한 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치료 목적을 가진 헨드릭은 좀 더 무자비했다. 벌써 카렐의 커다랗고 건조한 손이 그리워졌다.
사샤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사샤, 이쪽으로 와. 전기 치료랑 자기장 치료부터 하자.”
“네.”
“타이즈 벗고, 바지 거기 있는 거로 갈아입고.”
“알겠어요.”
몸을 일으키며 사샤는 방금 통증을 느꼈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보았다. 헨드릭이 지적한 대로 과연 엉덩이 바로 아래가 욱신거렸다.
‘자기 체력도 모르고 신나게 뛰어놀다 픽 쓰러지는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아요. 그러니 당신은 몰라도 나만큼은 당신의 한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카렐의 말이 떠올랐다. 한계……. 한계라. 카렐이 제 한계를 지나치게 빨리 찾아낸 것과 달리 사샤는 아직 그의 한계를 보지 못했다. 그게 무척 궁금하지만 결국 언제나 체격 조건이 발목을 잡았다.
사샤는 전기 치료를 위해 몸에 들러붙는 타이즈를 벗겨내고 주섬주섬 치료용 바지로 갈아입었다. 통이 넓은 바지는 다리통마다 지퍼가 달려 있어 필요할 때마다 치료 부위를 드러낼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젖히자 헨드릭이 손짓했다. 사샤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가서 도로 누웠다.
“자극이 갈 거야. 어때? 지금 괜찮아?”
헨드릭이 기계를 작동시키자 근육이 찌릿거리며 제멋대로 들썩였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끝날 때까지 조금 쉬어.”
“감사해요.”
사샤는 한숨을 쉬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왠지 눈이 가물가물 감겼다. 어제 잠이 부족했던 탓이다.
잠시 후 사샤는 고릉고릉 소리까지 내며 곯아떨어졌다.
작게 코 고는 소리를 들은 헨드릭이 다가와 침대 커튼을 살짝 걷어 안을 바라보았다. 목까지 젖히고 정신없이 잠든 모양새가 여지없이 아이 같아 웃음이 났다.
픽, 미소 지은 헨드릭의 시선이 순간 사샤의 허벅지 안쪽에 꽂혔다. 아까는 발목까지 오는 타이즈를 신고 있어 보이지 않았던 흔적이 이제야 보였다. 얼룩덜룩한 붉은 자국에 그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커튼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건…….’
헨드릭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웬만해서는 부상을 입기 힘든 자리에 심한 멍이 남아 있었다. 멍을 바라보는 헨드릭의 눈가가 점차 심각해졌다. 근육 파열이나 염증으로 다리에 피멍이 드는 건 무용수들에게 잦은 일이었지만 이 멍의 형태는 이상했다.
‘대체 이게 뭐지? 심상찮은데…….’
헨드릭은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사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비스듬히 옆으로 눕힌 후, 옷을 살짝 젖혀 아까 통증을 토로했던 허벅지를 살폈다.
“아, 이런……!”
헨드릭은 탄식했다.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멍이 가득했다. 멍의 부위는 무엇으로 얻어맞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넓고 균일했다. 그 밖에도 허벅지에 얼룩덜룩 남은 자국은 꼭 학대당한 흔적 같았다.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건가? 그렇다기에는 주먹이나 둔기로 맞아서 생긴 멍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사타구니 안쪽 멍이라니, 멍이 든 부위가 매우 의심스러웠다. 허벅지에 남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강한 악력에 의해 피부가 쥐어짜인 듯한 흔적들. 마치 억지로 희롱당한 것처럼…….
헨드릭은 어두운 얼굴로 침대에서 물러났다. 학대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학대가 아닌 도를 넘은 장난이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말려야 했다. 특히 사샤의 아름다운 외모는 지나치게 이목을 끌었다. 주변에서 성적인 유혹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본인마저 유혹에 약하다면 딴 길로 새기 쉬웠다.
헨드릭은 보호자에게 연락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피지컬 룸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향한 그는 곧 사샤의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과연, 사샤의 직계 보호자 이름이 거기 적혀 있었다. 헨드릭은 메모지에 빠르게 보호자의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 * *
한편, 헨드릭의 걱정을 꿈에도 알 리 없는 사샤는 잠시 후 아무도 없는 피지컬 센터에서 혼자 눈을 떴다. 한잠 자고 일어나니 무척 개운했다.
‘헨드릭은 어디 갔지.’
부스스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본 사샤는 스스로 다리에 연결된 기계를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백에 있던 트레이닝복으로 주섬주섬 갈아입고 피지컬 센터를 나섰다. 누워서 한숨 잔 덕분인지 아까보다는 몸 상태가 한결 나았다.
사샤는 가방을 챙겨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르는 것인데도 가는 길이 무척 익숙했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조제가 오라고 한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이미 농구 경기는 시작해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도 저를 찾지 않았다. 약간 울적해졌다.
‘흥……. 상관없어.’
혼자 있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았다. 가서 슬쩍 아이들 틈에 끼어 앉아 있자. 그리고 막 졸리기 시작할 때에 다시 호텔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면 외로운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오늘 하루가 끝난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제 왔냐?”
기숙사 방에 도착해 문을 열자 곧바로 조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안이 기묘하게 조용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충 앉아.”
조제는 건성으로 빈 침대 어딘가를 가리키고 다시 정신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기숙사 침대에 작은 노트북을 올려놓은 채로 그 주변에 일곱 명 정도의 남학생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농구 따위를 보는 놈은 아무도 없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짙은 갈색과 창백한 흰 피부, 순간 흘러나온 자지러지는 교성에 사샤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짐백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쉿.”
사샤가 좋은 부분을 방해했다는 듯이 예민한 놈 하나가 구박을 주었다. 사샤는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뭐, 뭐야……?”
아무도 사샤에게 대꾸해 주지 않았다. 다들 붉게 충혈된 눈으로 화면을 뚫어져라 볼 뿐. 그 무서운 집중력에 사샤는 조금 오싹함까지 느꼈다.
학생들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포르노였다.
사샤는 멈칫거리며 방 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머리통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다들 어찌나 집중했는지 오랜만에 기숙사에 방문한 사샤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그저 화면에 코를 처박을 듯 몰입할 뿐이었다.
사샤는 가장 뒤에 쭈그려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운 묘한 열기, 격한 숨소리만 들리는 침묵, 공기 중을 떠도는 십대 소년들의 땀 냄새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사샤는 얼른 집중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으, 이 퀴퀴한 공기. 그새 다들 나이를 먹어 텁텁한 수컷 냄새를 풍겨댔다.
사샤가 막 이곳에 입학해 남자 기숙사에서 살던 때만 해도 발육이 느려 남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보송보송하고 체구가 작은 소년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죄다 매주 왁싱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다리털과 가슴 털이 부숭부숭 난 짐승들이 되고 말았다.
짐승, 진짜로 이 자식들은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아!”
어떤 놈이 갑자기 방의 불을 꺼버려 사샤는 흠칫 놀랐다. 갑자기 어두워진 사위에 사샤는 어쩔 수 없이 불빛을 찾아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바로 곁에 앉아 있던 놈이 불길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사샤는 미간을 확 구겼다. 왜 불을 꺼버렸는지 깨달은 것이다. 어둠 속에서 자위를 하려는 것이었다.
“와, 씨발……. 이거 대박인데!”
조제의 목소리가 저쯤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다들 이런 게 좋은가 보다.’
사샤는 조금씩 엉덩이를 밀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벽에 등이 딱 붙었다. 향수와 섞인 카렐의 황홀한 체향, 자꾸만 손을 대고 싶은 매끄러운 피부, 몸을 꾹 짓누르는 따스한 무게감 같은 것이 사샤가 아는 섹스였다. 이런 환경에서는 조금도 흥분도 되지 않았다.
사샤가 마치 다큐멘터리라도 보듯이 화면을 노려보자 누군가가 뒤를 돌아 사샤의 어깨를 툭 건드려 왔다.
“아, 맞다. 너 게이지. 이런 거로는 안 꼴리지?”
예전 마누엘과 얽혔던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놈인 듯하다. 녀석이 추한 목소리로 웃어 사샤는 미간을 구겼다. 시간이 지나고 오해가 풀렸는데도 이렇게 짓궂게 구는 놈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카렐과 연인 사이니까 게이인 것은 맞았지만 땀 냄새나 풍겨대는 더러운 놈들에게 손가락질받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사샤가 음산하게 뇌까렸다. 놀리던 놈이 흠칫하는 순간, 조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사샤는 우리가 농구 보는 줄 알고 온 거야. 세우는 데 시간이 좀 필요한가 보지.”
조제가 낄낄거렸다.
“왜 시간이 필요해? 나는 신음 소리만 들어도 벌떡 서는데.”
“너는 완전히 발정 난 놈이니까 그런 거고.”
“그럼 우리 꼿꼿하신 사샤 세드린 님의 취향으로 틀어 볼까?”
“야, 너는 뭐가 좋아?”
그러면서 누군가 노트북을 조작했다. 화면에서 빠져나오자 작은 글씨들이 카테고리로 쫙 나열된 것이 보였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했다. 포르노의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았다.
“저, 저게 다 이런 동영상이야?”
“그럼. 여기 완전 보물창고야.”
“몇 개나 있는데?”
“셀 수 없지.”
“공짜로 볼 수 있어?”
“인터넷만 연결되면 완전히 공짜야.”
“……나도 주소 알려줘.”
사샤는 수줍게 요청했다.
“너 아직도 여길 몰라? 진짜 말도 안 돼! 알았어. 메시지로 보내줄게.”
누군가 흔쾌히 대답했다. 아이들은 사샤의 취향을 물었던 것도 잊고 그새 화면에 몰려들어 이걸 보자, 저걸 보자, 싸워대고 있었다. 서로의 취향이 너무 달라 합의를 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양이었다.
그때 사샤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새 메시지였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마침 눈앞의 화면에서는 우람한 성기를 가진―하지만 카렐의 것보다는 작았다―남자가 여자의 질 입구에 귀두를 문지르며 사정하고 있었다. 여자의 교성보다도 남자가 사정하며 내는 나직한 신음이 사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 광경 위로 어제 카렐이 제게 하던 행위가 겹쳐 보였다.
잠시 후 친구들이 다시 화면에 코를 처박을 듯 정신없이 몰입하고 있을 때 사샤는 가방을 챙겨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이 사이트 주소만 있다면 카렐이 출장을 떠난 밤들도 전혀 외롭지 않을 것 같았다.
* * *
그날, 오랜만에 남자 기숙사에 들렀다가 얻은 뜻밖의 수확 덕분에 사샤는 밤을 꼬박 새웠다. 구글에다가 ‘카렐 클레멘츠’와 ‘섹스’만 번갈아 검색하는 수준이었던 사샤에게 갑자기 주어진 야동 사이트의 결과물들은 지나치게 자극이 강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남자 커플들의 영상도 아주 많았다는 점이다.
사샤는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에 푹 빠져들어 허우적거렸다. 눈이 퀭할 정도로 밤새 탐색하고 또 몰입했다.
이제 더 이상 구글을 돌아다니며 눈을 가늘게 뜨고 어려운 영문자를 탐색하지 않아도 됐다. 모든 영상이 섬네일 그림과 함께 있어서 단어도 이해하기 무척 쉬웠다. 그건 뜻 모를 단어가 나열된 섹스 칼럼들을 뒤지며 어렵게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사샤는 이전에는 모르던 몇 가지 단어도 학습했다. ‘대디 앤드 트윙크’라고 검색하면 카렐처럼 큰 몸집의 남자가 작은 소년을 희롱하는,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긴 커플들이 아주 많이 나왔다.
문제는 그중에 어떤 ‘대디’들도 카렐만큼 멋진 몸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었지만……. 그게 바로 사샤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포르노에 나오는 남자들, 카렐의 입장인 이들 중에는 배 나오고 못생긴 이들이 너무 많았다. 특히 털이 많고 등에 여드름이 있는 남자들이 최악이었다. 카렐처럼 매끈한 피부를 가지고 신경 써서 털을 왁싱한 남자는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렇게 생긴 주제에 가녀린 소년들의 뺨을 마구 때리고, 목을 조르고, 형편없이 작은 물건을 억지로 처넣어 빨게 했다. 그런 걸 볼 때 사샤는 흥분하기는커녕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차갑게 식어 버렸다.
옳지 않은 외모를 가진 이들의 영상을 보면 볼수록 카렐이 그리워졌다. 그래도 어떤 사람은 몸매가 형편없었지만 중얼거리는 악센트가 카렐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런 건 틀어놓고 눈을 감으면 제법 흥분이 되었다.
영상들을 보면서 사샤는 세상에 정말 다양하게 생긴 성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끔은 놀랍도록 카렐과 핏줄 위치가 비슷한 성기를 발견하기도 했다. 진짜 카렐 것이 아닌지, 사샤는 순간적으로 조금 의심했다. 카렐의 ‘순결성’에 대해 큰 의구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섬세히 살펴보니 귀두 색이 조금 달라 카렐은 아닌 듯했지만…….
아무튼 사샤는 핸드폰으로 그런 영상을 보면서 제 것을 조몰락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이 되자 옥사나가 어제 약속했던 대로 하교 후에 같이 놀러 나가자고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사샤는 눈 밑이 퀭한 채로 힘없이 옥사나를 바라보았다.
사샤의 얼굴을 본 옥사나가 깜짝 놀라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어디 아파?」
「잠을 많이 못 잤어.」
「세상에. 너 엄청 피곤해 보여. 영혼이 쪽 빨린 것 같다. 빨리 집에 가서 쉬어!」
「미안해. 내일…… 아니, 내일모레 놀자.」
「난 아무 때나 괜찮아.」
수심 가득한 사샤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옥사나가 배려해 준 덕분에 사샤는 그날 하교 후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었다. 아이들은 전말도 모른 채 사샤와 옥사나의 데이트가 미루어졌다며 속닥거렸다.
사샤는 호텔 방에 틀어박힌 채로 또다시 영상에 몰입했다. 그날 사샤는 ‘베어백’이라는 단어를 배웠고, 완전히 탐닉했다. 그건 콘돔 없이 한다는 뜻이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카렐의 출장 3일째, 사샤는 큰 곤경에 처했다. 이불에 파묻힌 채로 한창 포르노를 보며 끙끙 신음하던 중에 카렐에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카렐?!”
갑자기 현실로 확 끌려 나온 기분에 사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의 준비를 차마 다 끝내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카렐……!”
사샤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촉촉이 젖어서는 카렐…… 하고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소를 짓고 있던 카렐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 들었다. 사샤는 땀 흘려 가닥진 머리카락으로―하교한 후, 씻지도 않고 침대에 누워 뒹굴던 참이었다―흰 베개에 뺨을 파묻은 채였다. 안색도 좋지 않았고 눈에는 붉은 기운이 돌았다. 그건 꼭 열병에 시달리는 모습 같았다.
카렐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아픈가요?
“아니요. 아픈 곳은 없어요. 저는 그냥……. 흐음…….”
포르노의 여운 때문에 성적인 자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사샤는 몸을 비틀며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카렐이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듯 턱을 괸 채로 심각한 얼굴로 화면 너머를 쏘아보았다. 그 진지한 눈빛에 몸이 찌릿찌릿해서 사샤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동시에 사샤는 카렐의 얼굴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포르노의 수많은 노골적인 자극보다 그저 카렐이 저를 쏘아보는 얼굴이 훨씬, 훨씬 더 각별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카렐과 키스하고 싶어요…….”
사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카렐의 얼굴이 있는 핸드폰 화면에다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입술에서는 전자기기의 따끈한 온도만 느껴졌다. 실망스럽게 화면을 바라보자 카렐이 눈을 휘며 미소 짓고 있었다.
―고양이 같고 귀여워요.
“……네?”
―고양이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가져다 대면 만져 달라면서 핸드폰을 든 손을 코로 들이받더군요. 사샤, 고양이 좋아합니까? 어제 초대받은 사무실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는데…….
카렐은 작은 동물 이야기를 하며 무척 즐거운 얼굴을 했다. 원래도 카렐은 말 못 하는 동물이라면 뭐든 애정을 주는 편이었다.
카렐과의 영상 통화는 그렇게 시답잖은 고양이 이야기를 하다가 끝이 났다.
“하아…….”
야한 농담 한두 마디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화면 속의 카렐은 완벽한 슈트를 차려입고 있었고, 그의 뒤에는 게오르크가 거슬리게 왔다 갔다 돌아다니며 자꾸 눈에 띄었다. 일하는 중에 시차를 맞추어 겨우 건 전화가 틀림없었다.
하다못해 그가 호텔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면. 잠들기 전에 건 전화였다면…… 분명 여기서 끝나지 않았을 텐데.
하. 사샤는 꾸물꾸물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갔다.
‘욕구 불만이고 외로워. 나는 불행해…….’
사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방금 직접 귀로 들은 카렐의 음성을 떠올려 보았다. 문득 사샤는 카렐이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제 손가락을 빨았다. 날씬한 흰 손가락이 부드럽게 혀를 건드리며 파고들었다. 하지만 카렐의 손가락은 이보다 훨씬 길고 두껍다. 그것을 의식하며 혀뿌리와 목구멍을 건드리자 오심이 치밀었다. 평소 같으면 약간 불편한 기분이 드는 순간 웩, 하고 뱉어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게 무척 달콤하게 여겨졌다.
사샤는 조금 버티면서 더 깊이 손가락을 빨아 보았다.
“우욱…….”
손가락이 깊은 곳을 찌르자 눈물이 핑 돌았다. 시큼한 맛이 입 안에 감돌기도 했다. 그래도 사샤는 이것이 카렐의 손가락이라고 생각하며 빠는 데 열중했다.
저를 고양이에 비유하면서 속 편한 소리나 내뱉던 카렐이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 저를 안아 줄 때는 깜짝 놀래 주고 말 것이다. 그만큼 익숙해지고 싶었다. 그가 언제나 저를 놀라게 만드는 것처럼 사샤 역시 그를 놀라게 하고 흥분시키고 싶었다.
카렐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저를 짙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눈앞에 그려졌다. 사샤는 촉,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빼냈다. 타액으로 젖은 손가락이 번들거렸다.
사샤는 베개에 얼굴을 폭 묻은 후 손가락을 제 뒤로 가져가 보았다. 꼭 닫혀 있는 입구를 젖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흐으…….”
이상한 기분에 입술에서 절로 신음이 흘렀다. 이런 방식의 자위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포르노에 중독되어서 이상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샤를 덮쳤다. 동시에 어딘가 변하고 성숙해진 모습을 카렐이 알아채 주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사샤는 카렐의 손가락을 상상하면서 좁은 입구에 억지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보았다.
“으응…….”
검은 머리카락이 베개 위에 흐트러졌다. 또한 이물감과 함께 묘한 통증이 전해졌다. 손가락을 끊어먹을 듯한 내벽의 압력을 스스로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샤는 다시 한번 포르노에서 실컷 보았던 ‘대디’들의 행동을 떠올렸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감싸고 다정하게 다독여 주다가도, 성기를 빠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뒷덜미를 단단히 내리누르는 손을. 또 레슬링이라도 하듯이 가냘픈 소년의 목을 팔로 꽉 조이고 미친 듯이 허릿짓을 하던 것을.
“읏, 으응……. 흣……. 하아…….”
카렐도 그렇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가 짐승처럼 흥분하는 것을 본다면 그 순간만큼은 몸이 망가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지도 몰랐다.
사샤는 끙끙거리며 손가락으로 좁은 입구를 열심히 헤집었다. 느끼는 부분에 닿기는 턱없이 모자랐지만, 사샤는 실제 물리적인 자극보다도 카렐이 제게 해 줄지도 모르는 행동들을 상상하는 것으로 쉽게 흥분했다.
“카렐, 카렐…….”
커다란 베개를 카렐 대신 껴안고 맥없는 목소리로 흑흑 울던 사샤는 쉽게 절정에 다다랐다. 날개뼈가 파들파들 떨리며 등줄기가 꽉 조여들었다. 흰 정액이 베개 위에 흩뿌려졌다. 사정하는 순간 사샤의 전신이 긴장으로 움츠러들었다. 다리를 꽉 모은 채로 사샤는 한동안 작게 숨을 몰아쉬었다.
털썩, 천장을 보고 돌아누우며 사샤는 작은 허무함에 시달렸다.
‘카렐 보고 싶다.’
앞으로 남은 날은 2주 빼기 3일.
겨우 카렐이 없는 3일째가 지나갔다.
* * *
카렐의 출장 7일째.
「형, 나야. 사샤.」
사샤는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서며 친형 레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곳은 맨해튼에서 레빈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으로, 러시아 가정식을 파는 곳이었다. 그리고 형이 이곳을 좋아하는 이유를 사샤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요리사도, 종업원들도 전부 러시아인이라 고향 말이 영어만큼이나 자유롭게 통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사실 레빈이 함께 가 보자고 제안하기 전에 사샤는 맨해튼에 이런 곳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레빈은 십대 때 혼자 집을 나가 유럽에서 한 번 정착하려고 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이처럼 낯선 도시에서 적응하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막 도착했어.」
사샤는 안내받은 4인용 테이블로 향했다. 통화 중인 단골 소년을 내려다보며 서버가 메뉴판을 건네주고는 미소 짓고 떠났다.
사샤는 무용복 빨랫감이 가득 들어 무거운 짐백을 옆자리에 내려놓으며 털썩 앉았다. 아무 생각 없이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았더니 갑자기 엉덩이 아랫부분, 허벅지 아래쪽이 징 울렸다. 사샤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비스듬히 앉으며 제 허벅지를 더듬어 보았다. 사샤가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마사지사 헨드릭이 걱정했던 그 멍은 이제 노랗고 푸른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미리 주문할까? 메뉴 뭐 시킬까?」
―사샤, 나도 가는 중이야. 10분 후면 도착할 것 같아. 메뉴는 같이 고르자.
「음……. 그러면 형, 잘 들어봐. 내가 메뉴 불러 줄게? 먹고 싶은 메뉴가 들릴 때 손을 들어.」
―내가 손을 든다고 네 눈에 보일까?
「맞다……. 그럼 그냥 스탑, 하고 말해 줘.」
그러면서 사샤는 메뉴를 첫 줄부터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화 건너편의 레빈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리는 대신 그냥 픽 웃어 버렸다. 전화를 끊기 싫었던 사샤가 핑계를 대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메뉴가 워낙 방대해서 사샤가 다 읽기도 전에 레빈이 도착할지도 몰랐다.
사샤는 며칠 전부터 레빈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졸라댔다. 호텔 방에 혼자 남아 있는 것도 싫었고 혼자 저녁을 먹는 것도 싫어서였지만, 정확하게 이유를 알지 못한 레빈은 난감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사샤. 오늘 늦게 끝날 것 같은데……. 내일은 괜찮아. 내일 만날까?’
그러자 사샤가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내일은 여자애랑 약속이 있어. 형, 옥사나 알아? 옥사나랑 미리 약속해 놨단 말이야. 형이 날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나랑 만날 수 있는 줄 알아?’
사샤는 괜히 신경질을 냈다. 사실 옥사나와의 약속도 포르노에 푹 빠져 버린 바람에 한두 번 미뤘지만, 그런 걸 알 리 없던 레빈은 그냥 쩔쩔맸다.
사실 아무 때나 개인 시간을 내기 어려운 쪽은 사샤보다도 레빈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사샤가 투정 부리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투덜거리는 건 사샤가 외로움을 토로하는 방식이었다. 사샤는 자신이 잊힐 것 같을 때마다 더 중요하게 여겨 달라며 짜증을 냈다.
‘그럼 어쩌지? 오늘은 밤 10시에나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라도 만날까?’
‘10시면 너무 늦어!’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을까?’
방법이 없어 난처해하자 잠시 후 사샤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라고.
‘정말 괜찮니?’
사샤는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그 시무룩한 목소리가 레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사샤는 어리광을 부릴 줄 모르고 대신 화를 낸다. 의젓하게 굴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척일 뿐이었고, 불안정할 때가 더 많았다. 막내로 자랐으면서도 뭔가를 우기고 조르는 것으로 원하는 것을 얻어 본 적이 별로 없던 사샤는 어리광을 피우는 대신 화를 냈고, 나중에는 결국 속마음을 삼켜 버리곤 했다.
결국 레빈은 무리해서 사샤와의 저녁 식사를 위해 시간을 냈다.
그리고 그의 귀에는 여전히 사샤가 낭랑한 목소리로 메뉴를 읊고 있었다. 초조해진 레빈은 걸음을 빨리하다가 급기야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미안해, 사샤. 내가 늦었지.」
레빈이 레스토랑 문을 밀고 들어갈 때 사샤는 드링크 메뉴를 읽던 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샤의 흰 얼굴이 반가움에 물들었다.
「형, 달려왔어?」
「응, 조금.」
실제로 레빈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목덜미에도 살짝 땀이 맺혀 있었다. 레빈은 10분 정도 늦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늦었고, 덕분에 사샤는 혼자 앉아서 25분이나 기다렸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사장 아저씨가 말도 걸어 주고 먼저 먹고 있으라고 이거 줬어. 형도 먹어.」
사샤가 작은 그릇에 담긴 나초를 아작아작 씹어 먹으며 그릇을 레빈을 향해 내밀었다.
「오랜만에 얼굴 보네. 내가 시간을 빼 놨어야 하는데.」
「괜찮아. 형은 능력 있잖아. 바쁜 게 당연하지.」
사샤는 의젓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맨해튼에서 일하는 게 다 그렇지, 뭐.」
「하하.」
사샤가 메뉴판을 읽어 준 보람도 없이 레빈은 보지도 않고 메뉴를 척척 주문했다. 러시아식 만두 펠메니와 보르시, 바비큐까지 두 사람이 먹기에는 차고 넘칠 만한 음식들이 곧 식탁 위에 가득 찼다.
사샤는 정신없이 허기를 채웠다. 어떤 것들은 생전에 어머니가 해 주던 것보다 맛있다고 솔직하게 말하기도 했다. 사샤가 그런 얘기를 하면 레빈은 쿡쿡 웃으며 네 말이 맞다고 동의했다. 두 형제는 이제 과거를 추억처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창 식사 중일 때였다.
지이이잉.
식탁에 올려두었던 사샤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그걸 먼저 알아챈 쪽은 레빈이었다.
「사샤, 전화가 오는데.」
「응?」
「카렐…… 클레멘츠. 카렐 씨야. 어서 받아 봐.」
사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영상 통화였다. 사샤는 전화를 받아 들고 반갑게 외쳤다.
“카렐!”
화면 속의 카렐은 차 안이었다. 일정 중 어딘가로 이동하는 중인 것 같았다. 모래색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뒤로 넘겼고, 셔츠는 맨 위까지 단추를 꽉 채운 채로 고급스러운 광택이 나는 넥타이를 했다. 셔츠 소매 아래 손목에는 시계가 걸려 있었다. 사샤가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안녕.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다정한 목소리로 카렐이 말했다.
―바깥이군요.
카렐은 금세 사샤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네. 형이랑 저녁 먹어요. 러시아 식당에서요. 여긴 러시아 음식만 팔아요!”
사샤는 목소리를 높여 말하고는 식탁을 쭉 한 번 보여주고 제 형도 비춰 주었다. 사샤가 찍는 화면이 멀미가 날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리고 사샤가 아무렇게나 대충 비춘 화면을 향해 레빈은 가까스로 미소를 지었다.
‘카렐 클레멘츠의 사적인 안부 전화라니.’
레빈은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하고 말았다.
맨해튼에 정착해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빈은 곧 카렐이 얼마나 높은 직급을 가진 사람인지, 직원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는지 완전히 깨달았다. 그 대단한 인물이 하필 제 동생의 후원자라는 것, 그리고 상상 이상의 공감 능력을 가졌고 피후원자의 불우한 가정사를 돌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두 형제에게 엄청난 행운이고, 또 곱씹을수록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제 동생과 그 카렐 클레멘츠가 아직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레빈에게 무척 놀라운 일이었다. 레빈은 사샤가 현대판 블루블러드에게 뭔가 실수를 하지 않을까 심장을 졸였다. 그 속도 모르고 사샤는 자기 얼굴에 핸드폰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카렐!”
화면 안에 사샤의 얼굴이 가득 찼다. 사샤는 언제나 이처럼 화면 안에 제 모습이 꽉 차도록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그건 영상 통화를 할 때의 버릇으로, 자신이 보는 화면 상단 오른쪽에 보이는 제 얼굴이 지나치게 작으니 무의식중에 그러는 것이다. 가끔은 커다란 눈만 가득 차기도 했고, 어떤 때는 이마와 정갈한 가르마만 보일 때도 있었다. 이번에는 턱을 들고 있는 바람에 뾰족한 콧대 아래 콧구멍이 선명하게 보였다.
“펠메니에 새우가 들어가 있어요. 이건 엄마가 만들던 거보다 맛있어요. 더 쫄깃하고요……. 카렐도 드셔 보셨으면 좋겠어요. 호텔 룸서비스에는 이런 건 없잖아요.”
사샤는 들뜬 목소리로 떠들었다. 카렐이 전화를 걸어 주어 신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카렐은 생각했다. 평소 같으면 마음껏 귀여워해 주며 저 콧구멍을 캡처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카렐은 슬쩍 미소만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음……. 별일 없이 잘 지내니 다행입니다. 레빈을 바꿔 주겠어요?”
“왜요?”
사샤가 되묻는 순간 레빈이 잽싸게 핸드폰을 가지고 갔다. ‘앗!’ 사샤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클레멘츠 씨.”
―안녕하세요.
“여전히 사샤를 잘 돌봐 주고 계셨군요. 뭐라고 감사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형제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샤는 긴장한 제 형과,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카렐의 목소리를 번갈아 듣다가 겨우 알아차렸다.
카렐은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연인과의 통화에서 의도치 않은 친밀감이 묻어나오고, 또 형 레빈이 그것을 알아챌까 봐 미리 차단한 것이었다.
“…….”
아무튼 칼 같은 남자였다. 동시에 사샤는 조금 안타까움을 느꼈다. 카렐이 겨우 짬을 내어 걸어 준 전화가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간다는 것에.
사샤는 턱을 괴고 말없이 포크로 그릇을 긁으며 카렐과 레빈의 재미없는 대화를 엿들었다.
―다시 사샤를 바꿔 주시겠어요?
한참 후에야 카렐의 정중한 요청에 레빈이 핸드폰을 사샤에게 돌려주었다. 사샤는 이제 얌전해져서 화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카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전화한 용건은…….
“……네.”
―발레 스쿨의 서머 인텐시브 코스 접수가 곧 시작됩니다.
“네?”
―비용이 필요할 테니까 거기 참여하고 싶으면 얘기하세요. 얼마든지 지원해 주죠.
“…….”
―내게 직접 전화해도 좋고, 비서를 통해도 좋아요. 그럼.
그리고 전화가 뚝 끊겼다.
사샤는 입을 벌린 채로 완전히 끊겨 버린 화면을 바라보았다. 분명 서머 코스 운운하는 것은 레빈을 의식하며 일부러 가져다 붙인 핑계였을 것이다. 엄청난 순발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시침을 뚝 뗀 카렐의 연기가 너무나 그럴듯한 나머지 사샤는 잠시 혼란을 느꼈다. 정말로 서머 코스 때문에 전화한 건가? 하고. 레빈을 속여 넘기려고 한 말이 사샤마저 속여 넘길 뻔한 것이다.
아무튼 이번 전화는 애인이 아닌, 후원자로서의 전화에 가까웠다. 사샤는 시무룩해져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레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사샤, 후원자님과 허물없이 지내는 건 좋지만…… 조금 더 예의를 지켜.」
사샤는 뾰족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레빈의 얼굴에는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그분이 널 건방지다고 생각하면 어떡해.」
「카렐은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말하는 게 바로 건방진 거야. 미스터 클레멘츠라고 해야지.」
「뭐 어때. 학교만 졸업하면…….」
그러면 자신도 제 힘으로 발레단에 다니며 봉급을 받는 어엿한 성인이 된다. 그때가 되어 둘의 사이를 밝히면 아무도 카렐과 저를 손가락질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완벽히 떳떳한 커플’이 되는 것이다. 카렐이 밝혔던 다른 연인들처럼 그의 옆자리에는 제가 서 있고, 파파라치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들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 미래를 그리던 사샤의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 카렐은…….」
쾅!
사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갑자기 레빈이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사샤는 깜짝 놀라 형을 바라보았다.
「뭐? 사샤!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응?」
「카렐 따위라니!」
사샤는 어안이 벙벙해서 자신이 진짜로 그렇게 말했는지 다시 떠올려 보았다. 아닌 것 같은데! 레빈이 착각한 것 같았다. 사샤는 억울함을 느꼈다. 하지만 항의를 하기도 전에 흥분한 레빈이 따발총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지금 학교를 졸업하게 되면 클레멘츠 씨에게는 다시 도움을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머니의 치료비, 장례비까지 다 도와주시고 너와 나를 만나게 해 주셨어.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지, 지원이 끊긴다고 남 취급을 하면 안 돼.」
또 시작이다. 사샤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레빈은 어수룩한 인상과는 다르게 이상하게 원칙적이고 정의로운 면이 있었다. 구부리면 휘는 것이 아니라 부러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폭력에 순응하지 않고 집도 나간 것일 테다.
심지어 율리안은 사샤의 형 레빈을 한 번 만난 뒤로는, 옛날 같았으면 러시아 혁명에 동참해 깃발을 휘둘러 댔을 만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사샤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레빈은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상은 네 생각보다 훨씬 좁아. 특히 클레멘츠 씨가 속한 상류층의 세계는 더 그래. 그러니까 졸업하면 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평생의 후원자라고 생각하고 깍듯하게 대해 드려. 특히 네가 계속 발레를 할 거라면 말이야.」
흥. 형이 몰라서 그래.
그 평생의 후원자가 내 애인이라고.
사샤는 형의 조언을 한 귀로 흘렸다. 가식적인 대답을 하는 대신 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흔들 움직였다. 그러면서 레빈을 흘끔 보았다.
「알겠니?」
사샤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감이 넘치는 형은 자신과 카렐의 사이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궁금했다.
* * *
두 사람은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름난 레스토랑이 많은 미트 패킹 디스트릭트의 길거리에는 술 취한 행인들이 여럿이었다. 사샤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형, 여기서 가려면 얼마나 걸려?」
「흠, 한 시간?」
「너무 멀어.」
레빈이 투덜거리는 사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빈은 퀸즈에 살고 있었다. 카렐이 거주지를 지원해 주겠다고 했지만 형이 거절했다. 레빈은 현재 자신이 버는 돈으로 월세를 다 감당하고 있었고, 그게 그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예전부터 레빈은 어수룩한 외견과는 다르게 무척 독립적이고, 주관이 뚜렷했다. 사샤는 그런 형의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했지만, 가끔은 그 고집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보면 두 형제는 서로의 가장 닮은 부분을 서로 걱정해 주고 있는 셈이다.
사샤가 지내는 호텔과 가까운 지하철역 입구에서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했다.
「얼른 들어가. 내일 학교 가야 하잖아.」
레빈을 물끄러미 보던 사샤는 형에게 조그맣게 진심을 토로했다.
「형.」
「응?」
「나 혼자 자기 싫어.」
오늘도 호텔 룸 안에 들어가면 혼자가 된다. 물론 외로움을 달래 줄 좋은 친구가 있기는 했다. 포르노 사이트에는 아직 못 본 영상이 무척 많았으니까……. 하지만 카렐을 생각하며 자위하다 보면 자신이 한심해졌다. 그리고 현실의 누군가를 끌어안고 잠들고 싶어진다. 평소보다 더.
레빈은 픽 웃으며 사샤의 머리카락을 크게 헝클어뜨렸다.
「항상 잘해 왔으면서.」
그 말에 사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레빈은 자신이 카렐과 반 동거를 해 왔다는 것을 몰랐다. 알 리가 없었다. 그는 사샤가 혼자만의 호화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레빈의 머릿속에서 자신은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한 의젓한 동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샤는 더 조르지 못하고 괜히 발로 바닥을 찼다.
「혼자 자기 싫으면 여자 친구한테 전화해.」
레빈이 짓궂게 말했다. 사샤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고 사실을 말하기란 어려웠다.
「사샤, 그런데 말이야…….」
그 순간 레빈이 작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의 톤이 달라졌다고 느낀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레빈은 사샤를 애정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전화를 하나 받았거든.」
「무슨 전화?」
레빈은 말을 이어 갈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헛기침을 한 그가 빙 돌려 말했다.
「그냥, 네가 가정에서 어떤지 물어보는 전화였는데. 형식적인 거야. 가족들과 대화는 잘 하는지, 그런 거 있잖아.」
「가정?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같이 살지 않아서 모른다고 솔직하게 얘기했어. 그랬더니…….」
「그랬더니?」
레빈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탈선하진 않았는지, 뭐 그런 걸 걱정하시더라고.」
사샤의 입이 벌어졌다. 기가 막혀 눈도 휘둥그레 떴다.
「난 탈선 안 해!」
「나도 알아.」
「왜? 내가 탈선 청소년 같대? 마음대로 학교를 빠졌다가 돌아와서? 그런데 왜 내게 안 물어보고 형한테 전화를 해? 가정은 왜 들먹거리는 거야! 그래, 난 가정 없어. 그래도 아빠랑 엄마는 없지만 형이 있잖아. 그리고 혼자 잘 지내고 있고……. 내가 왜 탈선을 해?」
사샤가 왁왁 화를 내며 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사샤는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과민해진다. 안에 묵히는 것보다는 저렇게 바깥으로 표출하는 게 정신적으로 훨씬 긍정적인 방식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레빈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전 학교 피지컬 센터에서 걸려온 전화는 레빈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학대 의심, 성폭행, 혹은 과열된 취미……. 그 어느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몸의 상처가 우려된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후, 고민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년 만에 재회한 동생은 이미 독립적인 한 인격체로 자라나 있었다. 그러니 취향이 어떤지, 어떤 여자 친구를 사귀는지, 자신이 간섭할 명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갑자기 부모 대신 나서며 자유에 제약을 두기에는, 실제로 사샤는 정말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성과도 좋았다.
레빈은 사샤를 통해 낯설었던 영역을 심도 있게 배워 가면서 제 동생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사샤가 따낸 로잔 타이틀이 얼마나 큰 명성을 가진 것인지를 알았다. 사샤는 더 이상 발레 타이즈를 신었다고 동네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서 울먹거리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린 사샤가 말했다.
「형, 나는 성실하게 학교 다녀서…….」
「…….」
「사고 치지 않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발레단에 들어가기로 약속했어. 카…… 클레멘츠 후원자님하고.」
「그래, 그렇지.」
레빈도 사샤가 그러리라고 믿고 있었다. 레빈은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잠시 고민하던 레빈이 말을 이었다.
「사샤, 혹시…… 우리가 같이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응?」
뜻밖의 말에 사샤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사샤가 무어라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레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현실적으로 어렵지.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야.」
「형…….」
그리고 머지않아 두 사람은 정말로 헤어졌다.
타박타박 호텔로 걸어가면서 사샤는 지금까지 해 본 적 없는 고민을 했다.
레빈이 왜 주저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형이 사는 집은 사샤가 학교로 등하교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현재 사는 곳에서는 가볍게 뛰면 10분 안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레빈과 함께 살면 아침저녁으로 지하철을 타고 통학해야 했다.
게다가 레빈이 사는 곳은 세 명이 아파트 하나를 셰어하는 형태였다. 거기에 사샤가 끼어들어 가는 것이 가능한지도 알 수 없거니와, 가능하다 해도 레빈이 두 사람 몫의 월세를 다 충당해야 했다.
레빈은 본인이 받는 지원은 거절했지만 동생마저 저와 같이 빈궁한 환경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졸업하면, 아니 카렐이 출장에서 돌아오면 즉시 카렐과 진짜 집에서 동거할 건데……. 로드아일랜드 저택에서 말이야. 그 집은 얼마나 클까? 그래도 방이 아주 많겠지? 카렐이 허락하면, 또 형이 괜찮다고 하면 난 형이랑 같이 사는 것도 좋아. 셋이 살면 좋겠다.’
사샤는 곧 망상에 빠졌다. 그렇게 하나하나 사샤의 머릿속에 점차 자신이 챙겨야 할 사람들이 늘어났다.
‘옥사나도 같이 살면 좋겠다. 우린 고정적인 파트너니까.’
또 제 친형 레빈처럼 한 아파트를 세 명의 룸메이트와 함께 셰어하며 살고 있는, 친절하고 상냥한 모래색 머리의 프랑스인 대학생 레빈도 같이 들어와 살면 좋을 것 같았다. 그 집에 사는 레빈의 룸메이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친절하니까 모두 저택에 들어와도 된다. 반면 율리안에게 방을 내어 줄지 말지에 대해서는 조금 고민해 봐야겠지만 그가 간절히 원하면 방 하나쯤은 내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카렐이 바빠도 심심하지 않고 좋을 텐데…….
대가족을 꿈꾸면서 사샤는 프라이빗 도어를 통해 적막한 호텔 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필이면 언제나 흰 이를 드러내며 제게 웃어 주던 마이클도 자리를 비운 채였다.
사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카펫이 깔린 복도에 내렸다.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주황색 등이 현관부터 복도를 따라 차례로 켜졌다.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 사샤는 짐백을 내던지고 소파에 털썩 누웠다.
잠시 뒤 완전히 불이 꺼진 방 안은 무척 깜깜했고 지나치게 조용했다. 적막에 질려 버린 사샤는 열 수 있게 되어 있는 작은 창을 찾아서 힘겹게 밀어 열었다. 그러나 펜트하우스는 너무 높아서 도시의 소음조차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