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 발스 : 그랑파 1권-1. 코니아일랜드 (21/30)

  1. 코니아일랜드

수요일 오후 4시, 맨해튼 발레 스쿨의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쳤다.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고전적인 종소리와 함께 맨해튼 발레 스쿨의 학생들이 연습실에서 쏟아져 나왔다. 학생들은 추가 연습을 위해 자유 연습실로, 로커룸으로, 또 기숙사로 흩어졌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이동하는 학생들 사이에는 유독 머리가 새까맣고 늘씬한 체형의 남학생이 한 명 섞여 있었다. 뒷모습만 보아도 미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희고 청결한 뒷덜미와 걷어 올린 소매 아래 드러나는 아름다운 손목의 선, 그리고 쭉 뻗은 긴 두 다리 덕분이다.

검은 머리 남학생은 곁에서 걷던 금갈색 머리의 인형처럼 예쁜 여학생과 가벼운 키스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는 곧바로 남자 샤워실로 향했다.

소년은 몸에 착 달라붙어 몸선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레오타드와 타이즈를 벗어 던지고는 곧바로 머리부터 물을 끼얹었다. 섬세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비누 하나로 머리부터 몸까지 한 번에 거품을 내어 박박 씻었다. 그렇게 몸에 남은 물기만 건성으로 훔친 뒤에는 머리도 다 말리지 않고 옷을 걸쳤다. 그러고는 대부분 기숙사로 향하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건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어깨 한쪽에 비스듬히 멘 짐백 끄트머리에는 발레 슈즈를 넣은 검은 망사주머니가 질끈 묶여 있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탁탁 내려온 남학생은 자연스럽게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러고는 약속한 도로가에 섰다.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맨해튼 발레 스쿨의 졸업 학년, 사샤 세드린. 아직도 한창 성장 중인 러시아 출신의 열일곱 살 소년은 올해 발레 스타들의 등용문인 프리 드 로잔에서 일등상을 거머쥐었다. 그 직후 전 세계 명문 발레단의 오디션 콜과 유학 제안이 쏟아졌지만, 사샤는 모든 제안을 물리고 여전히 맨해튼에 남아 있다.

전도가 유망한 이 소년의 최근 가장 큰 고민은 근육이 잘 붙지 않는 것. 그리고 불쑥 자란 키만큼 체중이 붇지 않는 것도 문제였다. 학교 선생님들과 트레이너들은 모두 사샤에게 더 좋은 댄서가 되려면 체중을 늘리고 근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여자 파트너를 리프트해야 하는 남자 댄서들의 숙명이다.

사샤는 트레이닝복의 소매를 걷어 수수깡처럼 마른 제 팔뚝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후우…….”

겨우내 기른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눈썹을 살살 간지럽혔다. 사샤는 가끔 귀찮은 머리카락을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면서 카렐의 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낯선 차 한 대가 사샤의 눈앞에 나타났다. 차는 속도를 줄이더니 그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우와.”

가까이서 차를 본 사샤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발레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간혹 어떤 이들은 사샤에게 너도 핑크색 튀튀를 입고 싶냐면서 고루하고 무지한 질문을 해댔다. 편견에 시달리지만 사샤도 여느 십대 소년들처럼 멋진 차를 좋아했다. 각지고 단단한 프레임을 가진 검은색 차는 바퀴가 무척 커서 사샤의 허리께까지 왔다. 꼭 지프와 탱크를 섞은 것처럼 생겼고, 배트카처럼 전체가 무광으로 튜닝되어 있었다.

저런 차만 있다면 사막이나 깊은 산속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제 소유의 차를 몰고 미 대륙 여기저기를 발 닿는 대로 여행하는 것이 사샤의 꿈이었다. 사샤는 한동안 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튼 굉장히 멋진 차였지만 제가 기다리던 차는 아니었다. 사샤는 곧 도착할 ‘애인’이 저를 발견할 수 있도록 앞에 선 차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차는 느릿하게 굴러 사샤를 따라와 섰다. 또 조금 옆으로 피하니 다시 사샤를 따라왔다. 그걸 두어 번 반복한 후에 사샤는 멈춰 서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차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차체가 높아 창문은 거의 사샤의 얼굴 정면에 있었다. 안에서 얼굴을 내민 것은 뜻밖에도 게오르크였다.

“사샤, 타요.”

“와! 게오르크!”

사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카렐은요?”

“뒤에 계십니다.”

사샤는 짐백을 휙 허리 뒤로 던지듯 둘러메고 차 문을 열었다. 게오르크의 말대로 뒷좌석에는 카렐이 있었다. 따뜻한 빛을 머금은 올리브색 눈동자와 빛을 반사하는 모래색 머리카락. 언제나 뛰어들어 안길 수 있는 든든하고 너른 어깨를 가진 어른스러운 연인이.

사샤는 들떠서 차체가 높은 차에 신나게 영차, 올랐다. 발 받침대가 하도 높아 다리를 가슴께까지 들어 올려야 했다. 은색의 묵직한 시계를 찬 카렐의 손이 다가와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카렐!”

사샤는 카렐에게 뛰어들어 와락 안겼다. 몸무게를 온통 실어 내던지는 듯한 포옹에 카렐의 얼굴 위로 미소가 덧그려졌다. 바로 다음, 뼈가 도드라진 사샤의 무릎이 그의 허벅지를 꾹 찔러 눌렀을 때는 미소에 균열이 생겼지만.

그것도 모르고 사샤는 카렐의 품을 기어오르며 신이 나 말했다.

“처음 보는 차라서 몰랐어요. 카렐은 차가 진짜 여러 개 있네요? 이 차 진짜 엄청 멋있어요. 제가 예전에 경찰차를 타봤는데요……. 이 차가 훨씬 멋있어요.”

차를 좋아하는 사샤는 흥분해서 카렐의 목덜미에 대고 콧김을 뿜었다. 웃으며 사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던 카렐은 덜 말라 축축한 머리카락에 흠칫 놀랐다. 그사이 게오르크는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사샤, 운전 중에는 위험하니까 얌전히 자리에 앉아요.”

“네.”

“안전벨트도 하고요.”

“네…….”

사샤는 카렐이 시키는 대로 착하게 안전벨트를 맸다.

오늘 카렐은 슈트가 아닌 노타이셔츠 차림이었다. 단추를 두 개 푼 것이 멋있어서 사샤는 그를 흘끔거렸다. 카렐이 차 내부를 가리키며 사샤에게 설명해 주었다.

“낯설죠? 그래도 당신이 좋아할 줄 알았어요.”

“너무 멋있고 완벽한 차예요.”

“언젠가 면허를 따면 이 차를 선물로 주겠습니다.”

“카렐!”

흥분한 사샤는 다시 카렐에게 돌진해 안기려다가 안전벨트에 걸렸다. 가슴이 당겨 컥, 하는 소리가 났다. 흉곽이 갑갑해 기침을 하고 있으니 카렐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정말이에요? 저한테 이 차를 주겠다고요?”

“당장은 아니에요. 면허를 따야 하고, 한적한 교외에서 나와 연수를 하고…….”

“완전 자신 있어요. 저 드라이빙 게임 많이 했어요. 카렐도 아시죠? 매드 스피드라는 게임 있잖아요.”

폭주하듯 달리는 차를 신의 경지로 드리프트하는 것이 사샤의 특기였다. 그건 엄청난 집중력과 균형 감각을 필요로 했다. 원래부터 사샤는 몸을 쓰는 거라면 뭐든지 자신 있었고, 운전도 그중 하나였다. 사샤는 의젓하게 제 실력의 근거를 댔지만 도리어 카렐에게 꾸중을 듣기만 했다.

“게임과는 다릅니다. 이건 현실이에요.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카렐의 얼굴이 짐짓 심각해졌다. 사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집에 가서 보여 드릴게요. 얼마나 잘하는지 카렐도 보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걸요. 속도가 아무리 높아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어요. 으그읍.”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렐이 사샤의 코를 검지와 중지로 꽉 잡고 흔들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코가 저리도록 아팠다. 손가락이 무식하게 커서 그렇다.

사샤는 눈물을 매달고 카렐을 흘겨보았다.

“꼰대…….”

카렐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건 카렐이 제일 싫어하는 ‘애칭’ 중 하나였다. 그가 다시 코를 쥘까 봐 사샤는 손으로 제 코를 가렸다.

사실 카렐에게는 비밀이지만 사샤는 가끔 옥사나에게 연애 상담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 연애 중인 자신이 단 한 번도 남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 없는 옥사나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가, 의문점이 있었지만 아무튼 그건 사샤와 옥사나 사이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 애인은 ‘꼰대’야, 옥사나. 넌 ‘꼰대’가 뭔지 알지?’

사샤가 그렇게 투덜거리면 옥사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래. 애인이 몇 살이랬더라. 마흔 살? 나이가 너무 많긴 해.’

‘아냐! 그렇게 많지는 않아.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니니까. 아직 멀쩡해. 잘 걸어 다니고.’

‘지팡이도 안 짚는데 꼰대란 말이야? 웩.’

옥사나가 얼굴을 찌푸리며 내뱉은 말에 사샤는 별안간 불안해져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 카렐은 정말 멀쩡한가? 그의 나이는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나이 벌써 서른셋이다. 삼십대 중반이면 어엿한 가정을 이룰 나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매일 차만 타고 다닌다며. 관절이 아파서 그런 거 아냐?’

옥사나는 그렇게 말하며 푸하하, 하고 웃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었지만 사샤는 심각해졌다. 정신과 육체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니까.

사샤는 카렐이 진짜로 두 다리가 멀쩡하고 몸이 곯은 데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잠자리에서 카렐이 항상 사샤의 뼈를 발라먹을 것처럼 면밀히 관찰하는 것과 달리 사샤는 그렇지 않았다. (사샤는 타인의 벗은 몸에 집착하지 않는 점잖은 성격이라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있었다.)

눈앞의 카렐이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도 꼰대라면?

사샤는 코를 가린 채로 시무룩하게 말했다.

“카렐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도 꼰대 같았을 거야.”

“…….”

“열일곱 살 때도…….”

“…….”

“일곱 살 때도…….”

“제가 헛바람을 넣은 것 같네요.”

카렐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사샤의 심장이 철렁했다. 사샤는 카렐이 제게 차를 주기로 한 말을 취소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이 세상은 부당하게도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현재 차 키는 카렐에게 있었다. 그래도 사샤는 이 환상적인 차를 가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샤는 싹싹 빌었다.

“카렐……. 잘못했어요. 운전 살살 할게요.”

“…….”

“속도도 절대 높이지 않을 거고 신호도 잘 지킬게요. 제발…….”

“졸업 후에 다시 얘기하죠.”

“카렐, 카렐!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아직 운전대는 잡지도 않았잖아요. 너무해요! 너무하세요.”

“…….”

“줬다 뺏는 게 어딨어요. 정말이지 잔인해요. 카레엘…….”

사샤가 절망적으로 말하던 그때, 운전석에서 게오르크가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존재를 잊고 있던 구경꾼에게 치부를 들킨 느낌에 기분이 안 좋아져 사샤는 빌던 것을 멈추었다.

시무룩해진 사샤는 양팔을 툭 떨어뜨리고 차에 등을 푹 기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조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카렐의 큰 손이 다가와 다시 머리카락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사샤는 고개를 팩 돌렸다.

“시간은 금방 갈 거예요.”

“졸업은 멀었잖아요.”

“그래요? 내겐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조금 쓸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의 표정이 궁금해서 사샤는 풀죽은 척도 그만두고 카렐을 흘끔거렸다. 언제 단호하게 굴었냐는 듯 카렐의 표정은 온화해져 있었다.

“당신은 하루가 다르게 빨리 자라고 있어요.”

“…….”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죠. 나는 그 시간이 가능한 한 천천히 갔으면 좋겠는데요.”

“카렐…….”

사샤는 꿈지럭대며 카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카렐은 사샤가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흰 손을 붙잡아 들고는 그 손등에 조심스레 입술을 내렸다. 가볍게 스치는 키스에 마음이 살살 녹았다.

문득 사샤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에는 낯선 풍경이 보이고 있었다. 허드슨 강변을 따라 이동하는가 싶더니 그래피티가 가득한 낙후된 주택가를 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탁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시야 안에는 느리게 흐르는 물이 가득했고, 맞은편으로 보이는 육지가 아까보다 훨씬 멀었다.

그러고 보니 차에 오른 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달리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사샤가 물었다.

“우리 오늘 어디서 저녁 먹어요?”

“맞혀 봐요.”

카렐의 대답에 괜히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카렐이 이렇게 말할 때는 보통 대단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얼마나 훌륭한 곳에 데려다주려나? 카렐이 소개해 주는 곳들은 어디나 하나같이 분위기도 좋고 고급스러워 사샤의 마음에 쏙 들었다. 학생들이 쉽게 갈 수 없는 곳을 누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사샤는 다시 쉽게 들떠서는 창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바깥의 풍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차는 이미 맨해튼 남쪽을 벗어난 듯했다. 오른쪽으로는 큰 대교가 보였다.

“우리는 남쪽으로 가고 있어요.”

“맞아요. 어떻게 알았죠?”

“제 몸속에는 나침반이 있어요.”

사샤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정글이나 사막 한가운데에 홀로 떨어져도 사샤는 동서남북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 그건 사샤의 특기 중 하나였다.

“그리고 저쪽이 뉴저지고요.”

“맞습니다.”

“음……. 카렐, 혹시 우리가 바닷가로 가나요?”

“맞아요. 해변이 있죠.”

“바다라고요?”

“네. 힌트를 주자면…… ‘아일랜드’라고 불리는 곳이죠.”

“아일랜드?”

약 5초 후 사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일랜드의 뜻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섬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은 아무래도 답에 거의 접근한 듯했다. 예전에 듣기로, 카렐의 본가가 ‘로드아일랜드’에 있다고 했다.

설마 지금 함께 카렐의 본가로 가는 건가?

그동안 상상만 하던 곳에 갈 수 있다니!

사샤는 너무 설레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카렐의 진짜 집.

둘이 연인 사이가 되고 나서도 아직 한 번도 갈 기회가 없었다. 맨해튼 중심과는 꽤 거리가 있어 카렐마저 그 본가에 한 번도 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데려가 줄 거라고 믿었다.

사샤는 상상으로 그의 집을 그려 보면서 몽롱한 눈을 했다. 그의 집은 동화 속 성처럼 지붕이 뾰족하고 깃발이 펄럭이는, 회색 벽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멋진 대저택일 것이다.

예쁜 잔디가 깔린 정원에는 수영장이 있어서 하루 종일 수영을 할 수도 있고, 일광욕을 할 수 있는 선베드도 여러 개 있다. 저와 카렐은 거기에 누워 시원한 콜라와 아이스크림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저택의 뒤편 으리으리한 마구간에는 말도 있는데, 자신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고 말들과 친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말의 검고 맑은 눈이 바로 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기대되고 긴장되는 바람에 사샤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초점이 나갔다. 심상치 않은 반응을 보이는 사샤를 보면서 카렐이 나직하게 말했다.

“바다에 가는 게 그렇게 좋아요?”

“네, 너무 좋아요.”

“뿌듯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씩 웃었다. 앞에서 게오르크가 말을 보탰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사샤는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언제쯤 카렐의 대저택이 나올지 궁금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잘 정비된 해안도로에는 푸른 잔디가 쭉 깔려 있었다. 그러더니 점차 너른 녹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변에 공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어느새 차의 속도가 줄고 신호에 걸렸다.

“당신 심장이 왜 이렇게 빨리 뛰죠?”

카렐은 궁금해하면서 사샤의 부풀어 오른 흉곽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사샤는 정신없이 눈을 굴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관람차였다.

“우와! 관람차가 있어요.”

“롤러코스터도 있죠.”

“진짜 장난 아니에요! 어? 회전목마도 있어요!”

“네. 뭘 가장 먼저 타고 싶죠? 그래도 도착하면 뭘 좀 먹죠. 허기질 테니까.”

카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사샤는 멈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이상했다.

“카렐, 집이 대체 얼마나 넓은 거예요?”

“예?”

“부자들은 보통 집에 관람차와 롤러코스터가 있어요? 전 마구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사샤의 질문에 카렐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차가 완전히 멈췄다. 그들은 이제 회색 아스팔트가 깔린 주차장에 서 있었다.

이어서 사샤의 말뜻을 알아챈 카렐의 어깨가 잔잔히 흔들렸다. 그는 소리를 죽이고 웃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황급히 풀어낸 사샤는 카렐의 허벅지를 타고 넘어가 창에 달라붙었다. 바깥에 보이는 것은 전형적인 놀이공원의 모습이었다.

원더힐?

관람차 한가운데 붙은 화려한 네온사인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샤는 고개를 휙 돌렸다. 카렐이 어렵게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왜 원더힐이에요? 언덕이 아니고 섬이라고 했잖아요.”

“예?”

“여기 로드아일랜드가 아닌 건가요?”

“아……. 이런. 내 본가에 가는 줄 알았군요.”

“카렐……?”

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자 카렐이 그런 사샤의 눈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놀이공원이에요. 코니아일랜드라고 부릅니다. 유명한 곳인데……. 처음 듣나요?”

코니아일랜드라니. 들어본 적도 없다. 그리고 자신은 로드아일랜드 말고 다른 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샤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당신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 줄까 해서.”

“…….”

“오늘 밤 특별히 이곳 전체를 빌렸는데…….”

“…….”

“마음에 안 들어요?”

카렐의 얼굴이 난처해졌다.

* * *

카렐이 다른 이들의 출입을 막아 버린 놀이공원은 텅 비어 쓸쓸해 보였다. 지은 지 백 년이 넘은 낡은 놀이기구들만이 과거의 향수를 지닌 채로 외로이 돌아가고 있었다.

원색의 알록달록한 장식들과 멀리 탁 트인 수평선 너머로 해가 기울었다. 아직 파란 하늘 위로 흐린 주홍색 얼룩을 남기며.

카렐은 사샤를 벤치에 앉힌 다음 방금 사 온 핫도그를 손에 들려주었다. 사샤는 기운 없이 핫도그를 받아 들었다. 두툼한 소시지에 사워크라우트와 함께 작게 썬 양파, 토마토, 올리브가 가득 올라가 있는 훌륭한 핫도그였다. 방금 만들었는지 얇은 종이박스 너머로 전달되는 빵의 온도가 뜨거웠다.

“여기 핫도그가 유명합니다. 먹어 봐요.”

“네…….”

“먹기 싫어요?”

“네…….”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하는 사샤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카렐은 풀죽은 어린 연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러다가 사샤가 혹할 만한 화제를 다시 꺼냈다.

“나중에 당신이 직접 운전을 하면 말이에요…….”

“…….”

“같이 트레일러를 타고 캠핑을 가도 좋겠죠? 멋진 국립공원들이 많아요.”

“캠핑…….”

“호수에서 당신이 좋아하는 수영도 하고,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바비큐도 하고.”

“바비큐는 맛있어요…….”

“흠…….”

사샤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사실 대화의 맥을 찾을 기력도 없었다. 멍하니 들고 있는 핫도그에서 머스터드와 케첩이 흘러내렸다. 고운 손가락을 더럽히며 흐르는 머스터드를 물끄러미 보던 카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당신을 실망시켰나 봅니다. 미안해요.”

긴 한숨을 흘리는 카렐의 표정도 무거워 보였다. 앞으로 몸을 기울여 두 손을 맞잡은 카렐이 정면을 응시했다. 아무도 태우지 않은 회전목마가 느린 음악과 함께 굴러가고 있었다.

“사실 이건 내 전략이었는데.”

“무슨 전략이요?”

“당신의 아량에 기대어야 할 일이 있어서, 미리 안기는 뇌물로.”

“…….”

“그런데 분위기가 이래서야 사실을 말하기 어렵게 됐군요.”

카렐이 두 손바닥을 짝, 부딪치며 멋쩍게 말했다. 그리고 카렐의 말을 듣고 있던 사샤의 입이 저도 모르게 헤벌어졌다. 그의 소탈한 행동에도 사샤는 쉽사리 반응을 보일 수가 없었다.

오늘 둘이 향하던 목적지가 그의 본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이제 문제도 아니었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놀이공원을 빌렸단 말인가? 카렐은 사과와 보상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하룻밤 놀이공원이 어떤 실수에 대한 뇌물이라니, 그가 저지른 실수란 엄청난 스케일인 게 분명했다.

“저한테 무슨 잘못 하셨어요?”

“큰 잘못이 있죠.”

“아, 아, 앞으로 할 잘못인가요, 아니면 이미 저질러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인가요?”

“……둘 다에 해당합니다.”

설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사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샤는 갑자기 주먹을 쥐고 카렐의 단단한 어깨를 퍽퍽 내려치기 시작했다.

“나쁜 자식! 바람둥이!”

“예?”

갑자기 어깨를 얻어맞은 카렐은 당황하면서 제 상완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사샤의 주먹은 멈추지 않았고 이제는 손등을 얻어맞고 있었다.

“어, 어, 어떻게 나를 두고!”

“사샤!”

“상대가 누구예요? 누구냐고요!”

“무슨 소리입니까?”

“이 난봉꾼 카렐 클레멘츠!”

카렐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튄 사샤의 망상에 화들짝 놀랐다. 사샤가 잔뜩 흥분해 무기처럼 휘두른 핫도그에서 양파와 올리브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몸을 얻어맞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마에 양파 조각을 얻어맞은 카렐은 당황하며 사샤를 진정시켰다.

“무슨 상상을 하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그래요. 진정해요, 사샤.”

카렐이 어깨를 가벼운 악력으로 붙잡았을 때, 그제야 사샤는 제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식식거리는 호흡도 이상했다. 갑작스러운 망상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것이다.

카렐은 사샤의 엉뚱한 추측을 막기 위해 황급히 사실을 말했다.

“출장을 갑니다. 2주 동안.”

“……출장.”

“오늘 갑자기 잡혔어요. 내일 6시 비행기로 떠나요.”

출장이라니. 사샤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혼자 두는 게 미안해서…… 오늘 밤 특별한 데이트를 하고 싶었어요.”

“…….”

“아마 이런 데 와 본 적 없을 테니까 좋아할 줄 알고…….”

사샤는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출장 같은 건 문제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건 카렐이 사과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카렐은 원래부터 바쁜 사람이고 출장이 무척 잦았으니까. 물론 오늘처럼 갑자기 이렇게 긴 일정이 잡히는 일은 드물지만.

사샤는 맥없이 중얼거렸다.

“뭐예요. 사과할 일도 아니잖아요.”

“그런가요?”

“나도 그 정도는 이해해요. 열일곱 살이지만…… 저도 충분히 이해한다고요.”

“그랬어요?”

“그런데 카렐이 엄청 큰 실수를 했다고 말했으니까요……. 저도 모르게 오해했어요.”

“그랬군요.”

얼굴을 들여다보며 꼬박꼬박 답해 주는 카렐의 목소리는 무척 다정했다. 눈빛은 따스했고 말투는 어린아이를 어르는 것 같았다.

“당신이 그렇게 내 본가에 가보고 싶어 하는 줄 알았으면 여길 빌리기 전에 직접 한번 물어보기나 할 걸 그랬네요.”

“……네. 그러셨어야 해요.”

사샤는 고개를 숙이며 이어서 중얼거렸다.

“왜 저는 안 데려가 주세요? 카렐은 옐냐에 있는 제 고향 집에 와 보셨잖아요……. 물론 그때 제가 손님 접대를 잘하지 못했던 거는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도 카렐 집에 가보고 싶어요.”

그 말에 카렐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카렐이 사샤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 손길에 그만 사샤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말았다.

“우리 서로 ‘집’에 대한 정의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내가 어릴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은 따로 있습니다. 난 여러 나라에서 지냈고 학창 시절에는 기숙사 생활도 오래도록 했죠. 로드아일랜드 저택은 물려받은 유산 중에 하나고 내게는 돌아가신 조부의 집이라는 의미가 더 큽니다. 물론 거기서의 좋은 추억도 많지만…….”

“…….”

“큰 의미 부여는 하고 있지 않아요.”

“…….”

“피에드아테르라는 단어 알고 있나요? 대도시마다 나는 내 몫의 거주지가 있어요. 로드아일랜드 저택도 마찬가지. 그리고 애초에 저택 일부는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기도 하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본관 건물은 레전드 사샤 세드린의 유산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리모델링되어 운영 중이었다. 하지만…….

믿어 줄까, 말까? 사샤는 빤한 눈초리로 카렐을 탐색했다. 그 저택에서 그의 전 애인, 혹은 파트너들과 찍혔던 적지 않은 파파라치 사진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샌더도 거기에 가 봤어요?”

사샤의 말에 카렐이 멈칫 굳었다. 동시에 사샤의 눈이 세모나게 뾰족해졌다. 곧 카렐은 한숨을 쉬며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원죄를 참회하는 듯한 얼굴로.

“부테라도 거기에 가 봤잖아요. 제가 사진 다 봤어요.”

“그건 정말로 큰…… 의미는 없는…….”

“흥…….”

사샤는 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팩 돌렸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너무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흘끔 곁눈질로 본 카렐은 진심으로 난처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당신은 특별해요.”

“……항상 그렇게 이야기했을 거면서.”

“아니에요. 맹세하죠. 연인 사이에 진부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맹세코 다른 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

“내가 지금까지 진심이었던 것은 ‘사샤 세드린’뿐이었다는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카렐의 말대로였다. 사샤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당신만 원한다면 내 영역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접하지 못한 곳 모두……. 말이 나온 김에 시간 나는 대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본가 투어’를 해야겠네요. 한 군데도 빼놓지 말고 들러 보죠.”

“꼭 그렇게 해 주세요?”

사샤는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카렐은 안도하면서 사샤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이마와 귀, 눈가 옆 등 입술이 닿는 곳 어디에든 소리 나게 키스했다.

“어쨌든 나는 좋아요. 당신이 이렇게 속마음을 드러내 주니까……. 또 말 안 한 것 있나요? 섭섭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해 봐요.”

그 말에 사샤는 카렐에 대한 사적인 원한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이참에 말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집중해 보려 할수록 반대로 머리가 텅 비었다. 사샤는 아쉬워하며 말했다.

“지금은 생각이 안 나요…….”

“그래요. 아무튼 내가 허튼짓을 했군요. 당신은 이렇게 소박한데.”

카렐이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에 사샤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누군가 깃털 끝으로 심장을 간질이는 것처럼.

“이번 출장에서 돌아오면 꼭 데려가 주겠습니다.”

카렐이 사샤의 뺨을 큰 손으로 감쌌다. 따스하고 건조한 손바닥에 뺨을 자연스레 비비면서 사샤는 얼굴을 붉혔다. 바람을 피웠다고 비난하고 옛 연인에 대해서 추궁했는데도 버릇없다고 혼나기는커녕 사과를 받을 수 있다. 그건 두 사람이 연인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진짜로 카렐이 자신의 감정을 존중해 주기 때문이다. 사샤는 또 한 가지 사랑의 진리를 깨우쳤다.

사샤는 얼른 괜찮은 척하면서 흠흠, 헛기침했다.

“……핫도그가 식은도그가 됐어요.”

사샤의 말을 들은 카렐이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 사 줄까요?”

사샤는 고개를 젓고는 핫도그의 끄트머리를 와앙, 하고 입에 물었다. 핫도그는 처음 받았을 때처럼 뜨겁지도 않았고, 손에 든 채로 휘둘러대서 속 재료가 많이 떨어졌지만 이대로도 맛있었다.

사샤가 핫도그를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렐이 말했다.

“그럼 오늘 일은 용서해 주는 건가요.”

“생각해 볼게요.”

꼬장꼬장한 사샤의 대답에 카렐이 제 가슴을 문지르며 짐짓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후우……. 오늘 하루가 끝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신에 진짜로 출장 다녀오면 꼭 데려가 주셔야 해요?”

“약속할게요.”

사샤는 쪼르륵 소리가 나도록 요란하게 콜라를 빨아 마셨다. 다소 매너에 어긋나는 방식에도 카렐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카렐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회전목마 안 타 볼래요?”

“에이. 시시해요. 저런 거는 재미도 없어요. 전 벌써 다 커서…….”

“그렇습니까. 내가 철이 덜 들었군요. 서른셋이 되어도 난 놀이기구가 좋아요.”

의외의 말에 사샤는 카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여긴 내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손을 잡고 자주 들르던 곳이에요.”

“…….”

“무척 낡았죠. 생긴 지 백 년도 더 되었다고 하더군요. 지금 보면 골동품들 같지만 옛날 사람들 눈에는 제법 화려해 보였겠죠.”

“…….”

“……그들도 여기에 자주 왔다고 하던데.”

그러면서 카렐이 사샤를 응시했다. 미풍이 그의 금색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러뜨렸다.

‘그들’이란 아마도 백 년 전의 이들을 말하는 것일 테다.

“사진이 몇 장 있습니다.”

“…….”

“그 시절에 동성연애는 죄악이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연인처럼 사진을 찍을 수 없던 거죠. 찍힌 건 올드 세드린뿐입니다. 하지만 누가 찍어 줬는지는 명백하죠…….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 때문인지 그는 혼자지만 행복해 보였어요. 어린 소년처럼.”

“…….”

“……그리고 내 옆에는 아직 어린 소년인 당신이 있으니까.”

카렐이 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같이 찍을까요.”

그의 손을 맞잡을 때였다.

“……아!”

어둑해진 놀이공원의 가로등에 일순 불이 켜졌다. 마법 같은 순간에 카렐과 사샤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눈을 마주치고 활짝 웃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프레임에 담기는 것은 언젠가, 아주 먼 옛날 누군가의 소원이었다. 그의 오래된 바람을 대신하며 두 사람은 함께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뺨을 맞대고, 서로 껴안은 채로, 또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리고 카렐이 다시 손을 내밀어 회전목마 쪽으로 사샤를 이끌었다. 이제 놀이기구는 졸업할 때가 되었다면서 어른스러운 척하고 싶은 생각은 더는 들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사샤는 한 번도 회전목마를 타 본 적이 없었다.

사샤는 카렐의 손을 맞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손에 노란 소스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도로 거두었다. 머스터드가 묻은 곳을 쪽 빨고는 뻔뻔히 손을 내밀자 카렐이 웃음을 터뜨리며 사샤의 끈적이는 손가락을 물티슈로 꼼꼼히 닦아 주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회전목마로 향했다.

카렐의 대저택에 있는 말을 만져 보지는 못했지만 오늘은 이 말로도 괜찮았다. 어떤 말이 마음에 드느냐는 카렐의 질문에 사샤는 카렐처럼 황금색 갈기를 가진 말을 골랐다.

사샤가 황금색 말 위에 올라타 날씬한 두 다리를 말의 허리에 감자 잠시 멈췄던 회전목마에서 다시 음악이 흘러나왔다.

카렐은 말 위에 앉아 손을 흔드는 사샤의 사진을 한 장 찍어 주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막 운행하기 시작한 회전목마를 따라 걸었다. 천천히 걷다가, 이내 빨라지는 속도를 따라잡으려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카렐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따라오는 카렐의 얼굴이 개구쟁이 십대 소년 같았다.

사샤는 자기를 쫓아오다가 결국 뒤처지는 카렐을 향해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기분이 좋았다. 한 바퀴를 돌아 다시 마주친 카렐은 무릎을 짚고 헉헉대며 과장된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가 저를 따라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한 바퀴를 돌면 다시 그를 볼 수 있으니까.

타기 전에는 점잖게 거절했던 것도 잊고 사샤는 회전목마로 완전히 들떴다. 소년답게 웃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사샤는 그다음으로 롤러코스터가 타고 싶어졌다. 두 사람은 아무도 타지 않은 열차의 가장 앞줄에 나란히 앉아 허공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사샤는 카렐이 그렇게 크게 소리 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내린 즉시 사샤는 카렐에게 제일 앞줄에 한 번 타 보았으니 이제 제일 뒤에도 타 보자고 제안했다. 카렐은 몇 초간 머뭇거렸지만 이내 흔쾌히 응해 주었다.

두 번째 탑승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사샤는 카렐이 안전바를 잡지 못하도록 제 손을 깍지 껴 맞잡은 다음 허공에 번쩍 들어 올렸다. 카렐이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사샤의 입에서는 비명 대신 웃음이 터졌다.

그다음으로 사샤는 유령의 집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렐이 유령의 집 문 앞에 있는 항아리의 용도를 알려준 뒤에는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유령의 집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의 토사물을 받아내는 항아리였다.

두 사람은 한 손은 맞잡고 다른 손에는 나란히 솜사탕을 들고서 지은 지 백 년이 넘은 브루클린의 위락지구를 떠돌았다. 모래사장 너머로 찰싹이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운행을 멈춘 놀이기구 사이를 걸어 다녔다. 해 진 후 청람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빨갛고 파랗고 노란빛으로 반짝이는 네온사인이 가득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원더힐’ 관람차였다. 두 사람만을 위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유니폼 차림의 안전요원이 막 도착한 관람차의 한쪽 문을 열어 주었다.

사이좋게 올라타 서로 마주 본 채로 앉아 있던 것도 잠시, 사샤는 자기가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는 관람차가 재밌어서 몸을 마구 흔들어댔다. 그리고 삐걱이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카렐의 얼굴은 조금씩 창백해졌다. 그의 미소는 흐트러짐 없었지만, 사샤는 손잡이를 잡은 카렐의 손아귀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렐이 곤란해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사샤는 벌떡 일어나 더더욱 격렬하게 바닥을 차며 뛰었다. 말썽쟁이의 최후는 정해져 있다. 다음 순간 사샤는 카렐에게 꽉 붙들려 안겼다. 옴짝달싹 못 하도록.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사샤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해는 지평선 너머로 붉은 꼬리를 넘기며 바다에 몸을 담갔다. 관람차의 꼭대기에서 사샤는 카렐에게 꽉 안긴 채로 긴 키스를 받았다. 그건 쉽게 흥분하며 망아지처럼 뛰어대는 철부지 연인을 얌전하게 만드는 최고의 마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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