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나에게로 와주세요
다시 봄이 찾아왔다.
빌딩 사이로 칼바람이 몰아치던 맨해튼의 매서운 겨울도 차차 누그러들고, 볕이 드는 곳마다 연둣빛 새순이 자라나 풍경이 싱그러워졌다.
수업 중 창밖을 바라보던 사샤는 문득 지난해 이맘때를 떠올렸다.
고작 1년 사이에 정말 많은 것이 변했다. 키가 자라 학교 책상이 조금 낮게 느껴졌고, 기숙사 주방에서 상한 소스를 먹는 일도 없어졌다. 어머니를 가슴에 묻었지만 형과 다시 만나게 되었으며 외로운 밤들은 영원히 멀리 떠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매일 밤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 있다. 구걸하듯 얻어낸 굿나잇 키스가 아닌, 온몸이 녹을 듯한 어른의 키스를 몇 번이고 해 주는 연인이.
어쩌면 한 사람이 홀로 감당하기에는 벅찰 만큼의 변화였다. 그러나 사샤는 작년의 자신이라면 버틸 수 없었을 사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평온을 찾은 상태였다.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사샤, 창밖에 고양이라도 지나가는 거니?”
선생님이 대놓고 창문만 바라보는 사샤를 지적했다. 그 바람에 사샤는 얼른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시선이 모여들어 사샤의 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절로 눈길을 끄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은 여전히 수줍음을 탔다. 자신을 보는 이들의 눈을 피하려고 다른 데만 바라보던 사샤의 시야 안에 마침 저를 빤히 뒤돌아보고 있는 옥사나가 들어왔다.
왜 그러느냐고 눈으로만 묻자 옥사나가 선생님의 눈치를 보며 입에 손나팔을 가져다 대고 소리 없이 말했다.
‘뭐라구?’
입모양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사샤가 한껏 어리둥절한 표정이자 잠시 후 옥사나가 앞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의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갈겨쓴 옥사나 쪽에서 작게 뭉친 종이가 날아왔다.
“앗…….”
정확히 미간에 그것을 얻어맞은 사샤는 책상 위로 톡 떨어진 종이를 주워서 펴 보았다.
[너 생일이 며칠이더라? 봄인 건 아는데 잊어버렸어.]
쪽지에는 날아갈 듯한 러시아어 필기체로 그렇게 쓰여 있었다.
사샤는 그 아래에 답을 적으려 했다. 하지만 책에 밑줄을 치는 일도 없고, 필기도 하지 않는 사샤는 제게 펜이 단 한 자루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초에 가방에 그런 것을 넣고 다녀본 적이 없었다.
결국 앞자리 학생에서 볼펜을 빌린 사샤는 아래에다가 답을 적었다.
[4월 11일.]
그러고는 아주 정확히, 날렵한 손동작으로 옥사나의 팔을 향해 던졌다. 맨살에 부딪힌 종이가 딱 옥사나의 손등 근처로 떨어졌다. 뒤를 돌아본 그녀는 정확성에 감탄하면서 작게 엄지를 들어 보이더니 쪽지를 확인했다.
그로부터 수십 분 후, 따스한 봄 햇살에 사샤의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할 때쯤에 수업이 끝났다.
“사샤, 네 여자 친구 생일은 언제야?”
웅성거리는 소란으로 가득한 교실에서 옥사나가 물었다. 주변에서 몇몇 학생이 흠칫하며 ‘사샤의 여자 친구’의 존재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엄청난 뉴스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쪽으로 한껏 귀를 기울인 친구들을 알아채지 못한 사샤는 가방을 챙기고 옥사나와 함께 교실을 빠져나왔다.
“아까부터 생일은 자꾸 왜?”
“꽃말이 뭔지 알아?”
“꽃말?”
그러자 옥사나가 가방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거, 기숙사 룸메이트가 선물해 줬는데. 젠장. 나는 내 게 마음에 안 들어. 이거 좀 봐.”
책을 휘리릭 넘긴 옥사나의 손은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내 탄생화가 말오줌나무래. 이게 뭐야? 별로 예쁘지도 않고.”
처음 듣는 희한한 식물 이름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옥사나의 눈이 사나워졌다.
“뜻은 뭔지 알아? 타협하지 않는 완고함이래! 내가 고집쟁이라는 거야 뭐야?”
“조, 좋은 뜻 같은데?”
“흥, 먹히지도 않을 위로하지 마. 아까부터 아는 사람들 생일 한 번씩 다 물어봤는데 다들 꽃도 예쁘고 꽃말도 예쁘더라. 나만 이상하고.”
울상인 옥사나를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사샤는 책을 빼앗아 들고 촤락 펼쳐 보았다. 1월에서 멈춘 사샤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 12일을 찾아냈다…….
“와, 뛰어난 아름다움? 이건 누구 생일이야?”
“…….”
“네 여자 친구?”
옥사나가 감탄하면서 부러워했다.
“아, 아니…….”
사샤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이건 카렐의 생일이었다. 신장 197센티에 탄탄히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는 카렐에게 빗대기엔 무척 위화감이 들었다. 물론 카렐은 금발 미남이고 자신은 그의 외모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지만……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무튼 다 괜찮은데 나만 이상해. 마음에 안 들어! 당장 버려 버릴 거야.”
울분에 찬 옥사나가 사샤의 손에서 책을 잡아채 쓰레기통에 버리려 할 때였다.
사샤는 그녀의 손을 얼른 붙잡고는 말했다.
“그럼 내가 가지면 안 돼?”
* * *
그날 사샤의 학교 수업은 조금 빨리 끝났다. 가장 마지막 수업의 선생님이 아픈 바람에 학생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었기 때문이다.
일부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매트를 깐 채로 스트레칭을 했고 일부는 가방을 챙겨 빠르게 기숙사로 향했다. 그들을 바라보던 사샤는 곧바로 집에 가는 대신, 시간이 남은 김에 학교에서 할 만한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샤는 요즘 ‘의미 부여하기’에 잔뜩 빠져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종류의.
‘올드 세드린은 이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는 걸 유독 좋아했다고 하더구나.’
사샤는 바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뉴욕 발레단 전용 연습실 중 하나로 향했다.
빨간 카펫이 걸린 복도를 지나, 도착한 연습실의 문고리에 손을 걸었다. 힘을 아주 조금 주었을 뿐인데 달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문이 열렸다.
음악도, 사람도 없는 텅 빈 홀 안에는 조용히 가라앉은 햇살만이 가득했다. 아주 오래되어 매끄럽게 마모된 나무 바닥 위로 작은 먼지들이 나풀나풀 가라앉고 있었다.
사샤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벽을 따라 천천히 연습실을 돌고 원목으로 된 발레 바도 손으로 잡아 보았다.
그러고는 창가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새순이 돋는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자연의 차양을 쳤다. 싱그러운 풍경 너머로 멀리 광장의 분수대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와…….”
낡았지만 마음에 드는 연습실이었다. 들어온 지 5분도 안 되었지만 사샤는 여기가 마음에 드는 이유를 백 개도 넘게 댈 수 있었다.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사샤는 마음속으로 혼자 결정했다.
‘앞으로 나도 이 연습실을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해야지.’
아직은 학생이고, 혼자서 연습실을 대관하려면 매번 허가가 필요했지만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올드 세드린이 좋아하던 연습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샤는 낯선 곳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했다. 언젠가 같은 이름을 가진 누군가와 비교당하면 울적해지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한때는 같은 게 싫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환생이라는 최면을 걸자마자 사샤는 과거를 넘어 제 미래까지 믿을 수 있게 되었다. 전생에 그랬던 것처럼 저 역시 이번 세기의 레전드가 될 거라는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런 긍정적인 변화들은 환생을 믿기 때문에 생긴 것일까. 아니면 카렐이 사랑으로 제 마음을 치유하고 가슴 깊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기 때문일까…….
물론 둘 다라고 해도 좋았다.
그렇게 누군가가 남긴 유산을 따라가는 작업은 사샤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사샤가 한창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사샤 세드린?”
문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든 사샤는 저를 부른 것이 관리사감 줄리아라는 것을 알아챘다.
“여기 있었구나?”
“줄리아! 죄송해요. 지금 시간 아니면 비어 있지 않을 것 같아서…….”
“괜찮아. 대관할 때만 말해 주면 돼. 지금부터 쓸 거니?”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작게 말했다. ‘다음에요.’
그러자 그녀가 이제야 용건을 말할 수 있겠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널 찾은 건 다름이 아니라, 오늘 학교로 또 우편이 하나 왔는데.”
“아…….”
“이번에는 영국이야. 발신인은 왕립발레단이고.”
“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졸업 후 입단을 조건으로 오디션 콜이 들어왔는데…….”
줄리아가 말끝을 늘였다. 사샤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 했다. 그런 사샤의 반응에서 무언가를 예감한 줄리아가 살짝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이것도 홀드해 둘까?”
“……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러자 줄리아가 미소 지은 채로 조금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벌써 네 번째야. 물론 네가 지금 좋은 조건의 발레단을 고르고 있다는 건 알지만 놓치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곳들이잖니. 내 생각에는 오디션을 보는 것도 좋은 기회일 것 같은데…….”
“조금 고민해 볼게요. 졸업까지는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고…….”
사샤의 말에 줄리아는 더 설득하는 대신 납득하고 물러났다.
“알겠다. 그럼 서류는 보관해 둘게.”
“감사해요.”
“집에 조심해서 가렴.”
복도를 통해 떠나는 줄리아를 보면서 사샤는 가방을 고쳐 맸다.
로잔 파이널에서 위너가 된 직후,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훨씬 뜨거운 반응이었다.
개중에는 졸업하지 않아도 좋으니 당장 커리어를 시작하자는 제안도 있었고, 연봉 외에도 숙식을 보장하는 조건이 붙은 곳도 있었다. 1년 전만 해도 ‘그렇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꿈꾸던 것들이 모두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정작 사샤는 아직 결정을 보류하고 있었다.
학교를 빠져나온 사샤는 링컨 센터의 광장으로 걸어 나왔다. 한결 누그러든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샤의 시선이 어느 한 곳으로 향했다. 지금은 작동하지 않는 분수대 너머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건물 외벽에 한창 현수막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랑해야만 한다.]
진회색부터 검은색으로 깊어지는 색채 위에 새겨진 또렷한 흰 글씨.
그것은 레전드 사샤 세드린의 은퇴 기념 다큐멘터리 제목이었다. 편집이 완료된 뒤에도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던 필름이 드디어 전 세계 개봉을 앞두게 됐다. 카렐이 결정을 내리자 많은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봄바람에 현수막 끝자락이 조금 펄럭였다. 사샤는 왠지 조금 아득한 기분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신이 당신에게서 춤을 빼앗아 가면 무엇으로 살 생각입니까?’
‘사랑.’
몇 번을 곱씹어 봐도 여운 남는 메시지가 사샤의 마음을 다시금 건드렸다.
사랑. 자신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게 사샤 세드린의 삶이니까.
한참 현수막에 시선을 주던 사샤는 다시금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 * *
“사샤 세드린, 이 시간에 벌써 학교를 마친 겁니까?”
사샤가 카렐의 집무실이 위치한 건물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언제나 마주치는 가드가 문을 열어 주었다. 사샤는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추스르며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선생님이 아프셔서 마지막 클래스가 자유 시간이었어요.”
가드는 무전을 통해 무어라고 중얼거리더니 사샤에게 말했다.
“지금 클레멘츠 씨는 안 계십니다. 호텔로 가서 쉬는 게 좋을 거라고 게오르크가 말하는군요.”
“상관없어요. 감사해요.”
사샤는 공손하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가드는 다시 무전에 대고 말했다. ‘올라가신다고 합니다.’ 마치 VIP를 칭하는 듯한 깍듯한 말투였다. 그를 알아채지 못한 사샤는 벌써 안으로 총총 사라지고 있었다.
카렐의 집무실이 있는 타임스 스퀘어 43번가의 빌딩은 지어진 지 백 년이 넘은 고풍스러운 건물을 개축한 곳이다. 대를 이어 미디어 재벌이었던 선조의 유산을 대부분 물려받은 그는 맨해튼에 위치한 제 거대한 성을 아주 독특한 취향으로 채워 놓았다.
사샤는 처음 이 건물의 1층 복도를 걸어갔을 때 받았던 느낌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두운 색의 원목과 금테로 장식된 문을 가진 1층의 숍들은 무척 고전적이면서도 오래된 영화 속의 세트장처럼 보였다. 사샤는 밀레니엄 이후에 태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의 근대 건물이 주는 우아한 풍취가 마음에 쏙 들었다.
1층에는 차례대로 신사, 숙녀의 고급 모자를 만드는 중후한 분위기의 해트 숍, 전통적인 방식으로 슈트를 맞출 수 있는 테일러 숍, 양장으로 된 고서가 가득한 서점, 와인 숍, 그리고 하루 여덟 시간씩 아니스 씨앗을 직접 끓여 수제 캔디를 반죽해 내는 캔디 숍도 있었다.
그중 사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캔디 숍이었다. (절대로 사탕을 좋아하는 어린애라서만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사샤가 발을 들이자 머리가 희게 센 사탕 장인이 웃으며 사샤를 맞이했다. 사샤는 작은 의자를 끌어와 그 곁에 앉아 수제 사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20분이나 구경했다. 갓 식어서 나온 꾸덕꾸덕한 질감의 캔디가 장인의 손 안에서 주물러지고 형태를 찾는 과정을 보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가져가서 먹어요.”
그리고 사샤가 그곳을 떠날 때에 장인은 큰 호의를 베풀기까지 했다. 주머니에 카렐이 준 카드가 있으니 언제든지 돈을 주고 사먹을 수 있지만 공짜로 받는 것 역시 각별한 기쁨이다. 그래서 사샤는 그의 호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와…… 감사해요. 전 사탕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가 썩으니까요. 충치가 생기면 골치 아프잖아요. 하지만 형은 좋아할지도 몰라요. 옥사나도 좋아할지도 모르고.”
사샤는 문을 나갈 때까지 조잘거렸다. 처연하고 우수에 찬 얼굴을 가진 소년에게는 그 외모만으로는 쉽게 예상하기 어려운 귀염성이 있었다. 장인이 기억하는 생전의 누군가처럼.
장인이 손을 흔들어서, 사샤도 캔디 봉투가 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캔디 숍을 빠져나온 사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27층을 눌렀다.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가드가 문을 열어 주었고, 열린 문 안에 바로 게오르크가 보였다.
게오르크가 희미한 무표정 아래 성가신 느낌을 감추고는 물었다.
“아까 올라온다고 하더니.”
“……?”
“아닙니다. 길이라도 잃은 줄 알았죠.”
게오르크는 한숨을 쉬며 집무실을 가리켰다.
“클레멘츠 씨는 안 계십니다. 그래도 들어갈 건가요.”
“네…….”
그가 자신을 귀찮아하는 것 같아서 사샤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카렐은 얼마 전 이 건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작은 손님’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하기를, 또 극진한 대접을 해 주기를 권고했다. 그러니 게오르크는 그의 명령을 어기지 말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대해야 했다. 그게 바로 봉급을 받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니까.
그 말인즉슨 게오르크는 자신이 오면 대접을 해 줘야 한다. 라테 한 잔이라도 내와야 한다는 말이다.
“게오르크, 지금 저를 환영하고 계세요?”
“환영…… 네, 그렇습니다.”
“진심으로요?”
하지만 조금 따져 물은 것에 대한 소득은 전혀 없었다. 게오르크는 팔짱을 끼고 사샤를 삐딱한 눈길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거 드세요.”
그의 눈길에 조금 위축되어 버린 사샤는 게오르크에게 뇌물로 방금 받은 사탕 조금을 바쳤다. 단것을 좋아하는 그는 거부하지 않고 사샤의 뇌물을 덥석 받았다.
“게오르크?”
“네.”
“혹시 생일이 언제예요?”
“생일은 왜요?”
물으면서도 게오르크는 착실히 대답해 주었다.
“11월 8일입니다.”
“음…… 네, 알겠어요.”
사샤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만 취하고는 뒤돌았다. 이따가 라테 한 잔이라도 가져오면 그때 귀중한 꽃말 정보를 알려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생일은 왜 물었는지 궁금해하는 게오르크를 등진 채로 사샤는 카렐의 방으로 들어갔다.
묵직한 나무문이 등 뒤에서 닫히고, 눈앞에는 별세계가 펼쳐졌다. 가방을 내던진 사샤는 주인 없는 너른 방에서 겁도 없이 이것저것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그렇게 해도 아무도 사샤를 구박하지 않았다. 카렐이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사샤의 것’이라고 선언한 지 오래였으니까.
집무실 안의 소품 중에는 백 년 전 누군가의 소장품도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호텔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축음기처럼. (물론 축음기도 사샤의 것이 되었다.)
‘이 모든 게 사샤, 당신 것이었어요. 당신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내가 보관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세요.’
카렐은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캐리어 한 개에 모든 살림을 담을 만큼 가난했다가 갑자기 많은 재산이 생겨 버린 사샤는, 새로이 불어난 제 소유물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하나하나 관심을 기울이며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를 열심히 파악했던 것이다. 덕분에 카렐이 있거나 없거나 집무실 탐험은 벌써 여러 날 계속되고 있었다.
사샤는 박물관에 걸어놓아도 좋을 듯한 고가의 태피스트리를 만지며 이게 왜 필요했을까를 생각했고, 올록볼록 질감이 있는 유화 그림이 신기해 유심히 보다가 액자에 손자국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과거 유물과는 전혀 상관없는―카렐이 제 허리의 편의를 위해서 산 매우 현대적인 디자인의―의자에 앉아 백 년 전에도 좋은 물건이 참 많았구나, 하며 잘못된 추측을 이어 나갔다.
사샤는 제 체구보다 훨씬 큰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흔들었다. 카렐을 흉내 내어 그의 시야로 방 안을 바라보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물론 키 차이가 현격해 시야의 높이 차이는 조금 났지만.
그렇게 주인 없는 곳에서 혼자 놀던 사샤는 문득 가방에서 얇은 책 하나를 꺼냈다.
책 표지의 앞뒤로는 귀여운 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책을 펼친 사샤는 게오르크의 생일인 11월 8일부터 찾아보았다.
[동자꽃―당신은 결혼에 대해 신중하므로 아주 늦게 결혼하게 됩니다.]
“저런…….”
사샤는 게오르크를 안타까워하는 척하면서 고소해했다.
그다음에는 팔락팔락 책장을 넘기며 다른 꽃말들도 구경했다. 개중에는 ‘카렐 클레멘츠’와 ‘빼어난 미인’처럼 위화감이 드는 조합이 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던 사샤는 가장 마지막으로 제 탄생화를 찾아보았다.
“흠…….”
책장을 넘기는 순간은 왜인지 긴장이 됐다. 옥사나처럼 이름이 이상한 꽃이면 실망할 것 같기도 했고, 카렐처럼 조금 어울리지 않는 꽃말이 당첨되면 받아들이기 싫을 것 같았다.
“4월 11일…….”
그리고 해당된 책장을 넘겨본 사샤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달칵.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사샤는 얼른 그쪽을 바라봤다.
“카렐!”
“그 자리가 아주 편해 보이네요.”
작은 트레이에 라테를 받쳐 든 카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샤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카렐에게 다가가 팔을 뻗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얼굴을 가까이 내려 달라는 무언의 요청에 카렐은 고개를 깊이 숙이며 사샤의 허리를 한 팔로 감쌌다. 촉, 귀여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키스와 등허리를 팡팡 두드리는 손길에 사샤는 금세 행복해졌다.
“오늘 바쁘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내 집무실을 굴에 들어간 생쥐처럼 마구 헤집어 놓고 있다기에…… 소식을 듣고 얼른 달려왔죠.”
“그러지 않았어요. 엄청 얌전히 있었어요.”
“흠.”
카렐은 미심쩍어하며 유화 그림 액자 위에 난 의문의 손자국을 바라보았다.
“카렐?”
사샤는 소파 위에 앉은 카렐에게 다가가 그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았다. 균형을 잡기 어려운 위치에 반듯하게 앉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항상 자신을 든든히 받쳐 주기 때문이다.
“네, 사샤.”
언제나처럼 카렐이 성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백 번을 들어도 좋은 응답이었다. 이윽고 사샤는 방금 전 자신이 발견해 낸 중대한 사실을 알려줄 사실에 작게 들떴다.
“카렐 탄생화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잊었습니다.”
“음…….”
사샤는 카렐의 말을 믿어 주려 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점, 그리고 턱을 매만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렐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걸 말하기가 싫어서 모른 척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샤는 그의 뺨에 자기 뺨을 비비며 말했다.
“왜요? 제 눈에는 카렐이 최고의 미인이에요.”
“이런…….”
“진짜예요. 정말로 잘생겼어요.”
그러면서 그 입술에 쪽, 쪽 짧은 키스를 남겼다. 어린 애인의 애교 넘치는 키스에 카렐은 거의 항복하고 싶은 기분으로 한숨을 쉬었다. 환생한 사샤가 반대로 저보다 열여섯 살 많은 이였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유혹한다면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당신에게 어울리는 꽃말입니다.”
잠시 후 카렐의 입에서 나온 말에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 것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가요.”
“네…….”
“무슨 뜻이죠?”
그 말에 사샤는 눈에 기쁨을 담고 말했다.
“나에게로 와주세요.”
“…….”
“나에게로 와주세요, 예요.”
카렐이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카렐, 저는 항상 생각했어요. 왜 생일이 다른지. 그것 때문에 괴로웠던 적도 있고요. 그리고 고민했어요. 내가 올드 세드린과 그렇게 비슷하다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같은데도 왜 생일만이 다른지……. ”
“…….”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요.”
“…….”
“저는 카렐에게 저를 찾아 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거예요.”
사샤가 작게 되물었다. ‘제 말이 맞죠?’
카렐은 대답 대신 사샤의 뺨을 소중히 감싸고 깊이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은 저항 없이 열리며 카렐의 사랑을 받아들였다.
입술을 뗀 카렐이 나직한 울림으로 말했다.
“내가 당신을 너무 늦게 찾았죠.”
“…….”
“그 말대로라면 당신은 태어난 순간부터 내게 신호를 보냈다는 뜻이 되는데…….”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용서해 드릴게요. 저는 너그러우니까…… 대신에 이다음에는 더 빨리 오시기로 약속해요.”
카렐이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샤는 생각했다. 탄생화니, 꽃말이니 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유산을 따라가며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작업이 그저 끼워 맞추기 우연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모든 것을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설명되지 않는 것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게 바로 운명이 아닐까?
내 몫의 운명.
그것을 깨닫자마자 지금까지 고민하던 모든 것이 너무나도 손쉽게 결정이 났다.
사샤가 입을 열었다.
“카렐?”
“네, 사샤.”
“오늘 또 오디션 콜이 왔어요. 영국에서요.”
사샤의 말에 카렐이 말없이 사샤의 귀를 문질렀다.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짙은 눈…….
그 안에서 꾹 눌러 담은 집착을 읽는 순간 사샤의 등에 희열 같은 소름이 내달렸다. 함부로 감정을 표 내지 않는 연인의 성격도 좋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을 숨기지 못하는 눈초리도 짜릿했다.
사샤는 짧은 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 데도 가지 않으려고요.”
그 대답에 카렐이 침착하게 이유를 묻는 얼굴로 사샤를 응시했다.
“왜냐하면…….”
“…….”
“내가 내게 와달라고 해 놓고…….”
“…….”
“가버리면 안 되니까요…… 아!”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카렐이 사샤를 으스러질 듯 껴안았다.
사샤는 품 안에서 크게 박동하는 것이 제 심장인지, 아니면 카렐의 심장인지 알아채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 몸처럼 단단히 얽힌 상태에서 그걸 구분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샤는 분석을 포기하고 양순하게 카렐의 품에 몸을 맡겼다.
“난 당신의 판단을 존중하려고 했어요.”
“네……. 카렐.”
“지금부터는 내게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그 판단을, 존중할 겁니다.”
자신을 가두듯이 끌어안은 품 안에서 사샤는 행복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 발로 내 새장 안에 날아들어 온 거예요.”
“기뻐요.”
사샤는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단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 그런 게 바로 운명이라면…….
기꺼이 속박되고 싶었다.
그래서 순응하리라 마음먹었다.
카렐과 함께하는 운명의 무대 위라면, 인생의 고난마저 달콤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