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19/30)

  5.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레빈? 나 조금 있다가 비행기 출발해……. 응. 스위스로 가. 레빈은 스위스 가 봤어? 프랑스 옆에 있는데 왜 못 가 봤어? 아, 집에서 멀구나? 괜찮아. 우리 형 레빈도 독일에 살 때 한 번도 못 가 봤대.”

프리 드 로잔이 열리는 스위스로 향하기 두 시간 전.

비행기가 출발하는 게이트 앞에 앉아 사샤는 오랜만에 레빈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샤, 괜히 내가 다 떨려.

“응, 나도 떨려……. 레빈이 많이 떨어 주면 안 돼? 나 대신…….”

―어…… 그래. 그런데 효과가 있을지…….

사샤는 의자에 앉은 채로 다리를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다가 다리를 멈추고는 괜히 손톱을 깨물고 싶어 입에 가져다댔다. 하지만 어린애 같은 버릇을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제 손을 허벅지로 깔고 앉았다.

문득 가방 속에 있는 신경안정제가 생각났다. 하지만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는데 초조한 기분이 든다고 약을 마구 털어 먹다간 도착해서 진짜 중요한 순간에 먹을 게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았다. 사샤는 대신 심호흡을 했다.

―그거 유튜브로 볼 수 있는 거 맞아?

“응. 실시간으로 틀어 준대. 근데 바쁘면 꼭 안 봐도 돼. 나중에 편집본도 올라오니까…….”

―시간 날 때마다 꼭 볼 거야.

“레빈, 진짜 고마워.”

―당연한 걸 가지고……. 아, 스위스에는 형이랑 가니?

레빈의 질문에 사샤는 ‘아니’ 하고 작게 말하며 지금은 텅 비어있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샤와 함께 출발하기로 되어 있는 것은 대회 기간 중 개인적으로 티칭과 스트레칭을 도와줄 바딤과 브라운 씨, 그리고 게오르크였다. 바딤은 클레멘츠와의 인연과 사샤에 대한 특별한 애정으로 사적으로 휴가를 내서 동행하는 것이었고, 브라운 씨는 사샤가 잠시 러시아에 체류하며 쉬기 전까지 개인 발레 교습을 맡아 준 인연으로 선생님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게오르크는…….

“형은 회사에 가야 하고 발레도 잘 모르니까 대신에 선생님이랑 같이 가.”

보통 학생들은 부모와 함께 출국하는 경우가 많다. 발레 콩쿠르라면 어디든지 나가는 조제 역시 어머니가 항시 붙어 다니며 챙겨 주곤 했다. 하지만 사샤에게 그런 존재는 없었다.

―그분은 같이 안 가?

레빈이 물었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샤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너무 바빠서…….”

카렐이 로잔에 체류하는 기간 내내 보호자처럼 제 옆에 달라붙어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역시 무척 바쁜 사람이니까.

지난 몇 주 동안 사샤는 체력을 회복하고 굳은 근육을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학교 수업을 마치면 체력단련실에 가서 근력 운동을 했고, 돌아오면 브라운 씨와 함께 ‘라 발스’의 솔로 베리에이션을 연습했다. 비록 작년 연말 공연에 참여하는 것은 저의 도피로 인해 허무하게 무산되었지만……. 그래도 한때 실제 공연을 준비하며 연습을 했던 것은 콩쿠르 준비에 무척 도움이 됐다.

그렇게 사샤는 로잔을 앞둔 짧은 기간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다. 하지만 예정대로 로잔에 나가고 싶다는 희망을 비쳤을 때 카렐의 반응이 아직까지도 마음에 걸렸다.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데요……. 안 유명해요.’

‘유튜브 클립 가지고도 이만큼 화제가 되었잖습니까. 지금보다 더 알려지면…….’

카렐은 말의 끝마무리를 짓지 않은 채로 픽 웃었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두운데요.’

‘왜요?’

‘그야 당신은 앞으로도 더 많은 곳을 여행할 거고…….’

명확하지 않은 채로 말을 흐리는 카렐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물론 카렐은 사샤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지원을 다 해 주었다. 물질적으로는 아쉬움이 조금도 생기지 않을 만큼. 로잔까지 타고 갈 일등석의 좌석과 도착해서 머물 숙소, 차량, 그리고 제 오른팔인 게오르크까지. 게오르크는 사샤가 로잔에 도착하면 아마도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급의 장비를 이용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 주었다.

‘왠지 내가 상을 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어.’

사샤는 예민한 감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는 앞으로 더 알려지고 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될 미래의 스타, 그 새싹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그 유튜브 클립만 보고도 사샤에게 접촉하려는 배우, 모델 에이전시의 컨택이 쏟아지고 있었다. 카렐이 곤두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로잔의 수상은 즉, 해외 발레단의 접촉을 말한다. 지금까지는 그 존재가 꽁꽁 숨겨져 있던 사샤지만, 한 번 콩쿠르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 여러 발레단에서 오디션 콜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막 어린 소년을 연인으로 갖게 되어 제 품에 싸고돌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카렐은 아직 사샤를 맨해튼 바깥으로 내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빈, 아무튼 나 잘 갔다 올게.”

―응, 꼭 상 받아 와!

“알았어. 트로피 받아 오면 레빈도 구경시켜 줄게.”

트로피를 주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사샤는 그렇게 말했다. 레빈은 그런 사샤의 대답을 재밌어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녀를 따라 웃으며 통화를 마친 사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잔뜩 기대감에 차 떠나는데 가장 지지를 받고 싶은 단 한 명이 보인 반응 때문에 사샤는 조금 시무룩한 상태였다.

“사샤, 이 녀석아. 다리를 꼬고 앉으면 안 된다고 했지!”

갑자기 등 뒤에서 떨어진 바딤의 벼락같은 목소리에 사샤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항상 좋은 자세를 유지하고 등을 꼿꼿이 하고 풀업 자세를 만들어야 한다고!”

“비, 비행기 안에서도요?”

사샤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 물음에 바딤 역시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떠나갔다.

“사샤?”

곁으로 다가온 것은 정장이 아닌 편한 차림의 게오르크였다. 그는 선글라스까지 쓰고 있었는데, 사샤는 그가 공항 내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게 조금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양손에 들고 있던 바닐라 아이스크림 중 하나를 사샤에게 건네주었을 때는 그 생각을 수정했다. 게오르크가 금방 좋아졌다.

“게오르크? 선글라스가 멋있어요.”

“그렇죠? 스위스까지 가니까 하나 준비해 봤습니다. 작년에 러시아만 줄곧 오가느라고 휴가를 한 번도 못 갔거든요.”

“…….”

“아, 클레멘츠 씨에게는 말하지 말아요. 놀러 갔냐고 뭐라고 하실 게 뻔하니까.”

게오르크가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며 사샤를 렌즈 바깥으로 건너다보았다.

할짝.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면서 사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하나만 더 사 주시면요…….”

* * *

“참가번호 419번. 사샤 세드린.”

“사샤 세드린! 레전드 무용수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요. 발레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요.”

“자기소개 영상을 공개했을 때 반응이 좋아서 저 소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지난 3일간 너무 훌륭한 모습을 보여줘서 무대도 기대가 되네요. 이제 시작하는군요.”

무대로 달려 나가기 직전.

사샤는 소대에 서서 약간 경사진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자신의 심장 소리뿐.

지난 며칠간 수많은 낯선 얼굴과 함께 저 위에서 바 워크와 리허설을 반복했다. 익숙해진 무대인데도 그 위에서 진짜 춤을 보여주는 이 순간은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어찌 보면 데뷔 무대인 셈이니까.

사샤는 입을 벌리고 겨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감은 속눈썹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바딤은 연습 때만 잘하는 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가장 어려운 턴과 점프가 몰린 후반부를 백 번 시도 했을 때 백 번 다 최고의 퀄리티로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본 실력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샤는, 자신이 그걸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대돼.’

사샤의 살짝 떨리는 턱이 굳은 의지를 담고 다물렸다.

‘난 제대로 해낼 수 있어. 그래서 기대가 돼.’

떨리는 이유는 긴장만이 아닌 희열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시간, 사샤는 큰 고양감에 젖었다. 건너편에서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사샤는 우아하게 달려 나가 시작 위치에 섰다. 조명이 떨어져 한없이 눈이 부셨다.

언젠가 카렐이 말했듯이 조명 때문에 무대에서는 객석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샤는 믿고 있었다. 카렐이 자신을 보고 있을 거라고.

그는 축음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파묻힌 채, 황혼 녘 긴 소파에 앉아 제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맨해튼 집무실에서 온갖 고풍스러운 골동품들에 둘러싸여 있을지도.

‘내가 당신의 수많은 팬 중 첫 번째가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해 주던 사랑하고 사랑하는 키다리 아저씨의 모습을 상상하니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폐를 긁어내리듯 아픈 호흡으로 가슴이 벅찼다. 사샤는 그것이 순수한 열정과 설렘이 만들어 낸 사랑의 통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샤 세드린, 사인이 떨어지면 나가세요.”

사샤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에게 말을 건 스태프는 무대 뒤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조명을 반사한 사샤의 검은 눈동자만이 빛을 머금고 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들려오는 장엄한 멜로디에 몸을 맡기며 사샤는 무대 가운데로 뛰어올랐다.

* * *

어젯밤 사샤는 꿈을 꾸었다.

그것은 자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세계의 꿈이다. 꿈속에서 사샤는 눈발이 날리는 얼어붙은 농지를 걸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음결정이 사샤의 뺨에 생채기를 내고 스쳐 갔다. 사샤는 손으로 제 뺨을 더듬어 보았다.

쉽게 녹지 않는 눈.

이 꿈을 꿀 때에 사샤는 자신이 어디서부터 출발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되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 하나만 알았다. 불타 버린 집, 저 때문에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형 레빈의 죽음…….

형의 죽음?

아니야. 형은 살아 있어.

문득 고개를 든 사샤의 눈앞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사샤는 놀라 말을 잃고 말았다.

눈앞에는 물결치는 라벤더 밭이 펼쳐져 있었다.

작은 보라색 꽃이 곧 수확이라도 앞둔 것처럼 빼곡히 피어 언덕을 굽이굽이 물결치고 있었다. 길가에는 연두색 꽃송이를 떨어뜨리는 회화나무가 가득했고 손끝에는 길게 자란 작은 들풀들이 만져졌다. 차가운 얼음 결정 대신 눈처럼 흩날리는 회화나무 꽃잎들을 맞으며 사샤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저 멀리 회색 벽돌로 지은 저택 하나가 보였다. 마치 성처럼 생긴 아름다운 저택 너머는 바닷가였다.

그림 같은 풍경에 사샤는 입을 벌린 채로 천천히 거기로 다가갔다. 잔디 위로 마치 가야 할 길을 안내하듯 돌길이 가지런히 깔려 있었다. 멀리서는 잔잔한 낮은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익숙한 풍경.

문득 어떤 예감에 사로잡힌 사샤는 뒤돌아섰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이제 눈 덮인 황야는 돌아보지 말아요.’

‘당신 인생의 괴로움은 모두 끝났습니다.’

‘그대로 천천히 앞으로만 걸어가요.’

그 목소리는 마치 형체가 있는 것처럼 어깨를 어루만지며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사샤는 순종하면서 다시 천천히 앞을 바라보았다.

사샤는 가지런히 놓인 돌조각을 밟으며 저택 안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와아…….’

삐거덕, 문을 열자 고풍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집 안에 따뜻한 햇볕이 가득 내리쬐고 있었다. 누구의 집인지는 몰라도 환대받는 느낌이었다. 사샤는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저택 전부를 살펴본 것이 아닌데도 집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걸 피부로 알 수 있었다. 누구의 집일까. 군데군데 놓인 집 안의 액자는 모두 사진이 빠져 있는 채였다.

사샤는 목재 계단을 밟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 다다른 사샤는 역시 빛이 넘치는 복도를 발견했다. 햇빛 사이에서 작은 먼지들이 춤추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거덕거리는 바닥 소리가 정겨웠다.

‘아…….’

복도 끝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고는 방문을 열었다. 작게 벌린 틈 사이로 사샤는 안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열린 방 안에는 잿빛 머리를 가진 남자 한 명이 누워있었고 그 옆에는…….

‘이쪽으로 와주세요.’

가까이, 더 가까이. 나에게로 와주세요.

누군가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샤는 혹시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잿빛 머리를 한 남자의 옆에 앉은 누군가,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있던 그 남자가 저 대신 대답했기 때문이다.

“기꺼이.”

“…….”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수백, 수천 번을 태어나도…….”

“…….”

“내가 당신에게 갈 겁니다.”

그 말이 왜인지 꿈이 아니라 현실처럼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기묘한 감각이 사샤를 덮쳤다. 악몽이 끝나자마자 미래라고 생각하고 도달한 곳은 과거의 한 장면이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틀어막은 채 얼굴이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공기 중에 감도는 정적과 꿈이 건 마법으로, 사샤는 한 사람의 호흡이 천천히 멎고 마는 그 순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하나의 생과 작별하는 그 순간 사샤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뺨을 눈물로 적셨다.

그 때 앉아 있던 남자가 천천히 뒤돌았다.

사샤는 입을 가린 채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다음 생의 사랑을 찾아간다는 기대로 물들어 있었다.

“어서 꿈에서 깨어나요.”

“…….”

“눈을 뜨면 내가 찾아갈 테니까.”

그 말과 함께 현실로 끌려나온 사샤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눈을 잔뜩 부시게 만드는 조명이 머리 위에 있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쏟아졌다. 그중 가장 크게 들리는 것은 가쁘게 내뱉는 스스로의 숨소리와 심장 박동이었다.

사샤는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아직도 끊이지 않는 박수 소리와 휘파람 소리, ‘브라보!’를 외치는 관객들의 환호성이 여전했다. 극장 안을 진동시키는 환희로 사샤의 몸이 잘게 떨렸다.

눈앞의 광경을 만들어 낸 건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 그를 깨달은 사샤는 천천히 무대 가운데로 가서 수천 번을 반복한 인사를 했다. 오른쪽의 객석을 향해, 그리고 왼쪽의 객석을 향해. 또 2층에 기립해 있는 이들을 향해.

저들은 다 누구이기에 얼굴도 모르는 나를 향해 환호해 줄까.

순간 전신을 소름으로 감싸는 듯한 기쁨이 사샤를 에워쌌다.

자신이 앞으로 오래도록 누리게 될 무대의 환희를 처음 맛본 소년은 행복감에 휩싸였다.

“사샤! 사샤 세드린!”

소대의 스태프가 손짓해 사샤는 그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제야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뒤에서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내가 15년 동안 이 콩쿠르를 봐 왔는데 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은 처음인데! 잘했다, 꼬마야.”

조명 스태프가 사샤의 어깨를 툭 쳤다. 사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어느샌가 나타난 검은 옷을 입고 마이크를 찬 스태프가 사샤를 더 안쪽으로 이끌었다.

“이리 와요. 무대가 끝나자마자 당신을 만나겠다고 한 분이 계세요.”

사샤는 두근거리는 왼쪽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누가 찾아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눈을 뜨면 내가 찾아갈 테니까.’

꿈과 현실과 환각이 뒤섞이는 가운데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 모든 게 진실일 수도 있고, 망상일 수도 있었다.

현실은 이제 제 눈으로 확인하면 될 것이다.

사샤는 스태프를 지나쳐 소대를 빠져나갔다. 스태프는 제 곁을 빠져나간 사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무대 장치가 가득해 미로 같은 어두운 소대 뒤를 지나, 밝은 조명이 켜진 극장 뒤의 복도로 걸어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대기실로 향하는 사이 사샤의 걸음은 점차 빨라져, 어느새 뛰고 있었다.

대기실 앞에 도착한 사샤는 그 문을 벌컥, 열었다.

“카렐!”

그 안에는 꽃다발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꿈속에서 만났던 그 남자가.

모든 악몽 속에서 자신을 따뜻한 키스로 끌어내 주었던 남자가.

사샤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꿈의 마법에 젖어 그를 바라보았다. 지극히 사랑하는 눈길로. 무대 뒤의 후유증으로만 떨리는 것이 아닌 심장이 그를 향해 강하게 맥박하고 있었다.

사샤는 주문을 걸어 보았다.

“이쪽으로 와요.”

꽃다발을 든 카렐이 한 걸음 내디뎠다.

“나에게로 와주세요.”

“기꺼이.”

“…….”

“언제나 당신이 부른다면, 수천, 수만 번이라도…….”

“…….”

“나는 당신에게 갈 겁니다.”

그 고백을 들은 사샤는 그가 자신에게 와 닿기도 전에 힘껏 달려 그의 품으로 뛰어들어 안겼다. 꽃의 잔해가 맞닿은 가슴 안에서 뭉그러지며 지독할 정도로 달콤한 향을 풍겼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문 안에는 사랑하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자연스레 사샤는 까치발을 들어 그의 목에 매달렸다. 카렐은 고개를 숙이고 사샤에게 정중하게 입을 맞췄다.

“와주실 줄 알았어요.”

입술이 닿은 채로 말을 하자, 카렐이 피식 웃었다.

“내가 남들보다 조금 유리한 위치의 팬이라는 걸 자각했지요.”

“…….”

“무대 뒤의 당신을 독점할 수 있는…….”

그리고 다시 카렐이 혀를 얽어 왔다. 이번에는 더욱 깊은 키스였다. 관자놀이와 목덜미가 땀으로 젖어 있는데도 카렐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건조한 손으로 사샤의 목을 감쌌다.

풀 향기 가득한 싱그러운 키스를 나누다가 문득, 사샤는 그 기묘한 꿈의 이야기를 해 주고 싶어졌다.

“카렐?”

“네, 세드린?”

카렐은 이번에 사샤의 손등에 숫제 키스까지 하면서 대답했다.

“저 우승하면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꼭 우승했으면 좋겠군요.”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그는 어떤 표정을 보일까? 전생을 믿고 헤매던 자신을 정신병자라고 치부하던 마음이 조금 씻길까?

사샤는 궁금해했다.

얼른 그를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 * *

그날 저녁.

사샤는 태어난 이후 최고의 저녁을 맞았다. 이름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서 축하 전화를 받았고, 형은 통화를 하다가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수상대에 오른 사샤는 꽃다발을 한 번에 일곱 개나 들어야 했다. 화려한 꽃과 초록 잎에 얼굴이 묻혔지만 그마저도 화사하고 예뻤다. 인터뷰 같은 게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샤는 ‘저는 제 이름이 가장 마지막에 불릴 줄 알았어요. 왜냐면 끝내 줬으니까요’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도 저 수줍어 보이는 소년이 속으로는 저가 위너가 될 거라는 귀엽고 오만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콩쿠르 내내 약간 긴장한 무표정이던, 설탕을 구워 만든 인형 같은 얼굴의 왕자님이 활짝 웃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바딤과 게오르크가 가장 열렬히 사진을 찍어댔음은 물론이다.

그날 밤 갈라 공연과 단체 안무를 포함한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극장을 떠난 사샤는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낯선 길을 카렐과 함께 걸었다. 처음 와 본 곳도 익숙하고 안락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카렐이 제 옆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돌바닥을 천천히 걷던 카렐이 말했다.

“이제 시작이네요.”

“뭐가요?”

“당신 인생의 전성기.”

사샤는 카렐이 과장된 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그저 수줍어했다.

“사샤 세드린의 20대를 내가 있는 힘껏 수호해야겠군요.”

“만약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해요. 그리고 제 성적만족감도 항상 책임져 주세요.”

사샤의 말에 카렐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카렐?”

“네, 사샤.”

사샤의 부름에 카렐이 다정하게 대답하며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저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뭐죠?”

“왜 항상 저에게 정중하게 말씀하세요?”

“음…….”

“제 말은, 카렐은 저보다 어른이니까 편하게 말해도 되잖아요. 저는 카렐이라면 아이 취급 받아도 괜찮아요.”

그 말에 카렐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연하니까, 말까지 놓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건 원치 않습니다.”

그 말에 사샤는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매력적이고 정중하고 어른스러운 저만의 키다리아저씨.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매분 매초 분수처럼 솟아나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 멀리 하늘에는 사샤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색의 노을이 졌다. 두 사람은 긴 벤치에 붙어 앉았다.

그걸 바라보면서 사샤는 카렐에게 쭉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카렐?”

“네, 사샤.”

“아마도 우린 다시 태어난 게 맞아요.”

“음…….”

“카렐은 정신병자가 아니에요. 카렐도 악몽을 꾼다고 했죠? 그건 아마 전생의 조각일 거예요.”

사샤는 저택에서 자신을 부르던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왜 갑자기 환생 신봉자가 됐죠?”

사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야 더 좋으니까요.”

“…….”

“이렇게 좋은 당신을 이번 생에만 만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

“그래서 그냥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카렐이 사샤의 노을 담은 눈을 차분히 응시했다. 선선한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와 옷자락을 스쳤다.

사샤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어다. ‘그러니까…….’

“카렐, 우리는…… 이전에도, 이번에도, 앞으로도 다시 이렇게 만나서 사랑하기로 해요.”

“당신만 허락한다면.”

“네, 허락할게요. 그러니 언제나 나를 사랑해 주세요.”

“…….”

“나를 찾아와 주세요.”

“…….”

“‘사샤 세드린’이 그걸 원해요.”

현재의 사샤 세드린이 그렇게 말했다.

카렐은 호흡을 멈추고 제 몫의 사샤 세드린의 이마에 경건한 키스를 내렸다.

“언제나, 기꺼이.”

그렇게 이번 세기의 그들은 우연 아닌 운명의 궤적을 따라 함께 발을 내디뎠다. 두 사람의 무대 위로.

라 발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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