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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금, 사랑받는 순간 (18/30)

  4. 지금, 사랑받는 순간

 일린스카야 교회 위에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원래부터 흰색으로 칠해 사시사철 눈이 부시게 빛나는 교회였지만 오늘은 더욱 하얗고 아름다웠다.

야외에 모인 조촐한 인원은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왜인지 아득하게 들렸다.

사샤는 눈발의 자취를 추적하며 고개를 들었다. 낮게 깔린 구름을 시린 눈가로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눈이 출발하는 지점까지는 알 수 없었다. 허공에서 날리는 흰 눈발이 사샤의 긴 속눈썹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사샤.’

레빈이 하늘에 정신이 팔린 사샤의 한 손을 옷소매 아래로 보이지 않게 꼭 쥐었다. 사샤는 고개를 내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의 유골을 담은 함 위로 흙이 뿌려지고 있었다. 흙과 함께 섞인 눈은 순식간에 녹아 자취를 감추었다. 미리 준비한 회색 묘비가 단단히 세워지고 그 위로 또 흙이 덮였다.

형제의 어머니 갈리나는 새해가 되고 딱 일주일을 채운 뒤 돌아가셨다.

‘금방이라도 퇴원할 것처럼 몸이 가볍다’고 말하던 어머니의 말에 희망을 가졌던 건 사샤뿐이었다. 그게 돌아가시기 직전 딱 한 번 피어오른 생명의 불꽃이라는 것을 아마도 의사와 형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던 마지막이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전한 직후에 레빈과 사샤는 화원에서 꽃과 식물을 잔뜩 사와서 어머니의 침대 곁에 늘어놓았다. 그 좁은 맨션 복도에서도 꽃나무와 허브를 키우던 어머니의 취미를 기억하고서.

제 손으로 사치를 부려 본 적 없는 갈리나는 돈을 잔뜩 쓰고 온 형제에게 나무라는 대신 웃어 보였다. 타박하지 않는 어머니가 생소했지만 아무튼 웃고 있어서 사샤도 마음이 좋았다. 아마도 매일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 여유가 있었다면 그녀 역시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항상 이렇게 웃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레빈, 내 큰아들. 널 다시 만날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어머니는 비강에 관을 꽂은 채 기계 장치에 의지해 숨을 쉬고 있었다. 사샤는 어머니에게 안긴 형의 등이 소리 없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내 아기 사샤, 이리 오렴.’

어머니는 방금 전 형을 안아 준 것처럼 사샤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어머니에게 이렇게 안겨 본 기억은 아주 어릴 때 이후로는 기억에 없어서 최초에는 그 느낌이 무척 생경했다. 하지만 마지막 포옹은 무척 따뜻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이 사무칠 만큼. 사샤는 지난날 시간이 충분했을 적에 어머니를 먼저 안아 드리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며 울기 시작했다.

‘이제 엄마 때문에 너를 포기하면서 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엄마…….’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고 살아, 후회 없이.’

그리고 형제가 소파에 웅크려 자고 있을 때, 어머니 갈리나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동이 틀 무렵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창밖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사샤는 어머니가 누웠던 자리에 앉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어머니와의 마지막을 떠올린 사샤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지난 며칠간 장례 준비를 하며 수없이 젖었다 말라붙은 눈 안쪽이 아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샤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외가 쪽 친척 몇과 마을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문객 사이에 검은 옷을 입은 게오르크가 서 있었다. 그는 지난 며칠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 없는 형제의 곁에서 장례 절차를 매끄럽게 처리하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게오르크가 눈인사를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났을 때 그는 멀리 대어 놓은 검은 차로 이동했다.

사샤가 그 차에 눈을 주고 있을 때였다. 

“사샤, 들어가자.”

“응?”

“많이 춥지?”

“괜찮아.”

레빈이 사샤가 목에 두른 목도리가 잘 감기도록 고쳐 주었다. 머리카락이 짧아 뒷목이 훤히 드러난 바람에 올 겨울 유독 추위를 타서, 레빈은 바깥에 외출할 때 사샤가 꼭 모자와 목도리를 챙기도록 했다. 그러고는 키가 훌쩍 컸지만 아직도 보살펴 줘야 할 것 같은 동생의 손을 잡아 이끌며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 안에는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이 몇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저 앞에는 어머니의 시신이 있던 관이 놓여 있었는데 이제는 전부 다 치워진 상태였다. 형은 이후의 일에 대해 교회 관리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샤는 혼자서 조심스럽게 교회 회랑으로 나갔다. 오래된 목재 문이 삐거덕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아무도 사샤를 주목하지 않았다. 바깥에서 들이닥치는 눈발이 회랑 바닥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사샤는 그대로 회랑 끝까지 걸어갔다. 교회 너머 벤치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한때 카렐과 마주쳤던 곳이었다.

“카…….”

사샤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시 눈을 깜빡인 다음에는 거기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검은 새 두어 마리만이 바닥을 돌아다니며 먹이를 쪼고 있었다.

헛것을 보았나.

사샤는 눈발을 헤치며 벤치로 다가갔다. 작은 눈의 결정이 자꾸만 속눈썹에 달라붙었다.

겨우 벤치 앞에 가서 섰을 때에야 사샤는 거기에 원래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

코트 소매를 꺼내 의자를 덮은 눈을 슥슥 치웠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언젠가 그랬듯이 일린스카야 교회를 바라보았다. 그건 아주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오래전, 절망도 느끼지 못할 만큼 외로웠을 때에 다가와 주었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행동.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모자와 어깨에 그새 흰 눈이 쌓였다.

교회 문이 열리고 안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나왔다. 하나는 교회 관리인이고 하나는 레빈이었다. 눈을 가늘게 뜰 필요도 없이 금세 그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빈이 사샤를 부르며 손짓했다. 그는 일어나지 않는 사샤를 보더니 얼른 이쪽으로 뛰어왔다.

“기다렸지? 이제 집에 가자.”

집.

사샤는 오래도록 비어 있었던 집을 떠올렸다. 이제 남은 것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앞으로도 사람이 살지 않을 그 집을 깨끗이 비운 후 떠나는 일이었다. 당장은 호텔로. 그리고 앞으로는…….

벤치에서 일어나지 않는 사샤를 보고 레빈이 가까이 걸어왔다. 오도카니 앉아 있던 그 몸 위로 소복하게 눈이 쌓여 사샤는 눈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레빈은 풋, 웃으면서 사샤의 모자 위를 툭툭 털어 주었다. 푹 눌린 모자에 작은 머리통이 완전히 감싸여 시야가 가려진 사샤가 다시 모자를 고쳐 썼다.

“……형.”

“…….”

“나…….”

레빈은 사샤의 작은 목소리를 듣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사샤가 제 형의 귀에 속삭이는 사이,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검정색 차체가 소리 없이 굴러 교회를 떠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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