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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17/30)

  3.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뉴욕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약 아홉 시간.

지상과의 끈이 완전히 끊어지는 그 찰나가 미칠 듯이 초조하게 느껴졌다. 카렐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성층권으로 진입한 기체 내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늘 아래 구름이 깔린 비일상적인 풍경이 좁은 창을 통해 보이고 있었다.

“물이라도 드시겠어요?”

식전주와 기내식을 전부 물린 카렐을 위해서 승무원이 탄산수를 한 병 가지고 왔다. 카렐은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작은 잔에 기포가 생기며 탄산수가 가득 따라졌다. 전용기의 한 귀퉁이를 지키고 있는 게오르크는 벌써 안대까지 한 채 수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렐은 살짝 까슬까슬해지기 시작한 턱을 손마디로 쓸었다. 높은 고도 특유의 직광이 그의 녹색 눈의 동공을 한없이 좁아들게 만들었다.

잘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5일간 불면증에 시달려 충분한 잠을 자지 못한 카렐의 신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합쳐서 잠든 시간을 세어 봐도 열 시간을 채 넘지 못할 것 같았다. 사라진 사샤를 생각하면 심장이 뛰어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아이가 머릿속의 다른 목소리를 듣고 다시 자신을 잃어버릴까 봐, 영영 사라져 버릴까 봐 겁이 났다. 눈을 붙이면 뇌가 조작해 내는 꿈 따위도 전부 다 악몽뿐이었다.

카렐은 사샤를 영영 잃어버리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샤를 그리며 오랜만에 돌아간 농가의 오두막은 텅 비어 있었다. ‘사샤는 그저 잠시 외출한 거야, 곧 돌아올 거야……’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며 미치기 직전의 심정을 다스렸다. 그리고 카렐은 저를 떠나 버린 사샤를 그리고, 또 그리워하다가 증오하기 직전에 꿈을 떨치고 현실로 빠져나왔다.

가장 끔찍한 것은 사샤를 잃는 것보다 그를 미워하게 되는 일이었다. 그러기 전에 억지로 꿈에서 깨는 것만이 현실의 카렐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난밤에도 반복된 꿈을 떠올린 카렐은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사샤를 미워할 이유는 없는데 어째서 꿈속의 자신은 그토록 분노에 가득 차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사샤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도리어 현실에서 그런 외로움을 느낀 것은 사샤일 텐데 말이다.

혹, 그게 나의 본성인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카렐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꿈보다도 끔찍한 것은 현실이다. 그중 가장 끔찍했던 것은 사샤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당일이었다. 늦은 오후, 사샤가 학교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상담의와 관리사감의 연락을 차례로 받은 카렐은 게오르크를 통해 그 주변을 수소문하도록 지시했다. 한때 기숙사에서 퇴거 명령을 받고 쫓겨난 처지가 되었던 사샤는 이전에도 한 번 비슷한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카렐이 미리 지정한 바딤의 집으로 가지 않고 종적을 감춰 실종 사건이라며 맨해튼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때에도 전화는 먹통이었고,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지…….’

카렐은 사샤의 귀여웠던 지난 만행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이른 저녁, 막 황혼이 드는 깜깜한 호텔 방에 돌아와서 카렐은 사샤의 짐을 점검했다. 바닥에는 챙기다 만 캐리어가 덩그러니 있었고, 대신 충전기나 작은 소지품 같은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불길함에 작은 서랍을 열어 본 카렐은 항상 거기에 있던 사샤의 여권이 사라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밑바닥에 철렁, 떨어진 순간 레빈과 접촉한 게오르크가 소식을 알려왔다.

‘사샤는 이미 떠났을 거라고 하더군요.’

‘……어디로?’

카렐의 물음에 게오르크는 복잡다단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키며 말했다.

‘설득에 실패하셨군요. 러시아로, 혼자서 어머니를 만나러 갔답니다.’

사샤가 카렐과 아무런 상의 없이 혼자 떠나 버렸다는 것은 게오르크에게도 충격인 듯했다. 말문을 잇지 못하는 카렐의 앞에서 굳은 얼굴로 역시 침묵을 지키던 게오르크는 사샤가 이용한 항공편을 알아보겠다며 곧 호텔을 나섰다. 다시 그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게오르크가 떠난 뒤에 카렐은 사샤가 살던 거실을 빙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내게 말하고 싶지 않았구나.

카렐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사샤가 의사소통을 거부할 정도로 상처 입힌 것은 저 자신이었다. 사샤의 함묵증은 자신과 샌더 때문에 생긴 것으로, 사샤는 그가 신뢰하는 이들과는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모양이었다. 레빈과 율리안은 사샤가 어눌하게나마 말을 하더라고 증언했다.

카렐은 천천히 무릎을 굽힌 채로 다시금 사샤의 남은 짐들을 확인해 보았다.

사샤는 그렇게 아끼던 발레 슈즈나 레오타드 같은 것은 하나도 챙겨 가지 않았다. 카렐이 17세 생일선물로 주었던 애지중지하는 향수도 놓고 갔다. 그런 것 하나하나가 맨해튼에서 만든 추억에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신호처럼 보여…….

카렐은 뻐근하게 아픈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사샤를 생각할 때마다 물리적인 통증이 따라왔다.

“클레멘츠 씨. 수면제를 준비했습니다. 도착하실 때까지 푹 주무시는 게 나을 거라고 해서요.”

문득 들려온 승무원의 목소리에 카렐은 고개를 들었다. 먼저 잠을 청한 게오르크가 미리 준비한 약인 것 같았다.

카렐은 한숨을 쉬고는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잘 수 있을까.

사샤를 만나서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자둬야겠지.

악몽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기를 바라면서 카렐은 비행기의 창을 모조리 내렸다.

* * *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이른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카렐과 게오르크는 곧장 준비한 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렸다. 다섯 시간 정도 제법 잘 포장된 길을 따라 달리면 사샤의 고향 마을 옐냐에 닿을 수 있다. 모스크바보다 벨로루시나 우크라이나 국경과 더 가까운 땅이다.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향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사샤는 고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왜 입원하지 않았을까요. 율리안이라는 학생이 꽤 큰돈을 빌려 준 모양이던데.”

운전을 하던 게오르크가 말했다. 카렐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 만나 보면 알겠지…….”

“사샤에 대해서 참…… 아는 게 없으십니다.”

게오르크가 탄식하듯 말했으나 무어라 더 말을 붙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카렐은 손질하지 않아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이드미러를 통해 턱에 수염이 돋은 얼굴이 비쳐 보였다. 신경 쓰이는 부분을 문지르며 카렐은 저도 모르게 밤이 되면 제 수염을 만져 보려고 달라붙던 사샤를 떠올렸다.

“5일간 아무와도 연락하지 않고…… 집도 떠나지 않은 것 같고. 걱정스럽습니다.”

“음.”

카렐은 대강 대답했다. 사샤의 상태를 우스울 정도로 쉽게 알 수 있는 건 100% 카렐의 곁에서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게오르크, 아니 그가 보존하고 있던 복제폰 때문이었다.

‘이걸 찾으시는 거죠?’

그는 카렐이 양심의 가책을 못 이겨 파기하라고 했던 사샤의 복제폰을 멀쩡한 상태로 들고 왔다. 충전이 필요한 것 외에는 건네주었을 때 그대로의 상태였다.

‘너…….’

할 말을 잃은 카렐 앞에서 게오르크는 다소 뻔뻔하게 대답했다. 저 나름으로는 칭찬을 들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한 번도 쓰지 않고 버리실 분이 아니니…… 변덕이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것으로 사샤의 위치를 알 수 있었기에 더 나무라지도 못했다.

다섯 시간을 꼬박 달리는 사이 카렐은 짬짬이 눈을 붙이다 말다가 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옐냐의 지도를 살피며 어디서부터 사샤의 자취를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다. 카렐은 스트리트 뷰마저 뜨지 않는 지역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게오르크가 말했다.

“여기부터 옐냐입니다.”

카렐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앞에 보이는 마을의 정경을 살폈다. 잔디가 규칙적으로 깔린 도로변에 높지 않은 건물들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제법 멀끔한 건물들 사이 폐가처럼 전혀 손질되지 않은 건물이 있어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인구가 매우 적은 마을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막막한데.”

“저도 그렇습니다만, 일단 구획을 이렇게 나눠서…… 이쪽부터 시작할까요.”

차를 적당한 곳에 세워 놓은 뒤 카렐과 게오르크는 서로 반대편으로 헤어졌다.

카렐은 잠시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주변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사샤를 만나고 설득해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거짓말처럼 카렐의 심장박동은 차차 누그러졌다. 사샤가 나고 자란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카렐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직사각형의 벽돌이 깔린 보도블록은 군데군데 비를 먹어 운치가 있었고, 잔디 위로는 꽤 키가 큰 청록색 나무들이 울창하게 자라 3층 높이의 주거 건물을 넉넉히 감싸고 있었다. 카렐은 제 상상을 수정했다. 가난이 지긋지긋하게 싫다고 말한 사샤의 증언 때문에 전쟁터 같은 상황을 떠올렸던 것은 지나치게 빈약한 상상력이었다.

카렐은 주거 건물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여차하면 모든 집의 초인종을 눌러 봐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었기 때문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주류점 하나가 들어왔다. 동시에 사샤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동네에 주류점이 하나 있는데요. 미하일 아저씨도 어릴 때 발레가 하고 싶었대요. 그런데 그 말을 하니까 아버지가 마구 때리면서 게이병에 걸리기 전에 군대나 가라고 했대요. 그게 아직도 한이 맺힌다고 저한테는 발레를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주류점 문을 밀고 들어가자 남자 하나가 카운터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손님이 들어왔는데도 쳐다보지 않는 그에게 카렐은 러시아어로 말을 걸었다.

「혹시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 중에 사샤, 아니 알렉산드르 세드린이라는 아이를 알고 계십니까? 최근에 마을로 돌아왔다고 하는데요.」

카렐의 러시아어를 무표정한 얼굴로 듣던 주류점 주인 미하일은 ‘사샤’라는 이름을 듣고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사샤? 발레를 하는 그 사샤 말이오?」

* * *

사샤는 벤치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흰색으로 치장한 일린스카야 교회 건물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등을 잔뜩 수그린 채로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 카렐은 그게 사샤인 줄 짐작하지 못했다. 드물게 날씬한 몸과 아름다운 토르소만 보면 사샤가 분명해 보였지만 머리가 무척 짧았기 때문이다. 바짝 깎아 밤톨처럼 동그래진 머리가 무척 낯설었다. 카렐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저 변화가 사샤의 다른 인격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잔디를 헤치며 소리 없이 그 등 뒤로 다가간 카렐은 가만히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사샤.”

부른 직후 카렐은 헛기침을 했다. 목이 형편없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샤의 수그린 등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순간 카렐은 저도 모르게 눈을 떨구고 말았다. 입가에 주먹을 쥐어 가져다댔던 손을 다시 접어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카렐을 올려다본 사샤의 눈은 크게 뜨여진 채로 놀란 빛을 담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카렐은 사샤가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옆에 앉아도 될까요.”

사샤는 카렐을 빤히 바라보더니 도로 고개를 돌렸다. 허락을 해 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물러갈 수도 없기에 카렐은 벤치 뒤를 돌아서 사샤의 옆자리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앉았다.

카렐은 사샤의 곁에 앉아 오랜만에 보는 옆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사샤는 통 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좋다고, 카렐은 쭉 사샤를 관찰했다.

머리를 바짝 깎아도 잘생긴 이마와 동그란 두상이 드러나 여전히 귀엽고 예쁜 얼굴이었다. 옆모습은 조각처럼 그린 듯한 선으로 떨어졌고, 예술가가 계산해서 그려 넣은 것 같은 긴 속눈썹이 하늘을 향해 부드럽게 굽어 올라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예쁘다는 인상을 주었다.

반면에 로션이나 크림 같은 것은 전혀 쓰지 않는지 그새 하얗게 튼 뺨과 말라붙은 입술이 안쓰러웠다. 그냥 보기에도 사샤는 많이 수척해 보였다.

“끼니는…… 잘 챙기고 있어요?”

사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간 줄 알았는데.”

카렐이 그렇게 물었을 때 사샤는 고개를 들고 정면에 시선을 향한 채로 입술을 조금 벙긋거렸다. 혹시 사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던 카렐은, 잠시 후 사샤가 입을 닫아 버려 실망하고 말았다.

카렐은 게오르크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찾았으니 차에 가서 쉬어.’

그러고도 사샤는 한참이나 거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류점 주인 미하일의 말로는 해가 질 때까지, 혹은 해가 진 후에도 한참을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가 간다고 했다.

카렐은 말없이 사샤의 침묵에 동참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사샤가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지를 툭툭, 털었다.

카렐이 자리를 떠난 사샤의 등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열 걸음 정도 절뚝거리며 걸어간 사샤가 뒤를 돌아보았다. 까만 눈이 말없이 깜빡거렸다. 왜 안 따라오느냐는 듯한 눈이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샤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딱 사샤가 허락한 간격만큼을 유지하면서, 카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샤의 뒤를 따랐다.

* * *

사샤의 집은 걸어서 10분이 걸리지 않는 도로변에 있었다. 3층짜리 건물에 균일하게 뚫린 창 중 하나가 사샤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인 모양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3층으로 향하니 긴 복도에 문 여러 개가 줄지어 있는 다세대 구조의 집들이 보였다. 어떤 집 앞에는 녹슨 자전거가 놓여 있었고, 어떤 집 앞에는 말라 죽은 화분이 있었다. 카렐은 자신이 상상한 환경과 퍽 다른 사샤의 집을 구경하면서 사샤가 이곳에서 어떤 유년기를 보냈을지 상상했다.

사샤가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쪽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사샤의 어머니 갈리나일 것이다.

카렐은 사샤가 연 채로 붙들고 있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사샤의 어머니와 마주쳐 버려 카렐은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샤, 이분은 누구시니?」

사샤는 짧게 ‘후원자’라고 내뱉었다. 카렐의 눈이 제대로 된 단어를 말한 사샤에게 못 박혔다. 말을 했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고, 어머니에게 내뱉는 말투가 퉁명스럽고 딱딱해서 놀랐다. 그러고 보니 사샤가 어머니와 통화할 때 사근사근하게 말하던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카렐은 사샤가 아직 사춘기 소년이라는 점을 다시 상기했다.

「후원자시라고? 네게 장학금을 주던 분 말이야? 후원자님. 집안 꼴이 이런데 갑자기 오셔서…… 사샤, 너는 미리 연락이라도 해야지. 이 주변머리 없는 녀석아.」

악수를 건네면서 카렐은 사샤의 얼굴을 살폈다. 사샤는 무척 울적해 보였다. 그다음 카렐은 갈리나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러시아에서는 대를 올라가 조부모의 체형까지 본 다음에 아이들을 입학시킬 정도로 엄격하게 학생을 거른다고 알고 있었는데 카렐의 상상과 다르게 갈리나는 그다지 날씬하지도 않았고, 사샤와 닮은 곳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마주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놀랄 정도로 안색이 좋지 않았고 얼굴의 반 정도가 마비가 와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이곳까지 웬일로 오셨어요? 사샤가 갑자기 돌아와서 무척 놀랐답니다. 뭔가 사고를 친 거죠? 얘는 원래부터가 이랬어요. 고집이 아주 세죠.」

「사샤를 설득해 보려고 왔습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에요.」

카렐은 갈리나의 건강 상태를 지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표현에 사샤가 입술을 아플 정도로 꾹 깨물었다.

「얘가 내 걱정을 했다구요? 믿을 수가 없네요. 입을 꾹 다물고 골칫덩어리처럼 굴었겠죠?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여기까지 찾아오시게 만들어서 정말 죄송해요. 면목이 없어요. 이 애는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제가 잘못 가르친 탓이죠. 말하기 싫으면 입을 꾹 다물고 반년이고 1년이고 말을 안 해서…….」

「나, 나도 말할 줄 알아!」

갑자기 사샤가 울컥 소리쳤다. 애써 뱉은 말이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작은데다가 떨리고 있었다. 사샤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엄마가 내, 내, 내 말을 안 들으니까 하기 싫은 거야!」

사샤는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쿵쿵 걸어서 안쪽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는 쾅! 문이 흔들릴 정도로 거세게 닫혔다. 사샤가 격렬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처음 본 카렐은 사샤를, 아니 눈앞에서 쾅 닫혀 버린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 고집쟁이 녀석…….」

마찬가지로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는 갈리나는 지친 듯한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행주로 식탁 위를 닦더니 카렐에게 앉으라고 권했다. 그제야 카렐은 이 좁은 집에 손님이 앉을 만한 곳이라고는 식탁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 * *

사샤는 닫힌 문을 잠가 버렸다. 그러고는 베란다와 연결되어 있는 창도 닫고 걸쇠를 걸었다. 커튼을 쳐서 제 모습도 보이지 않게 가린 다음, 문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바깥과 완벽히 차단되자 겨우 안도감이 찾아왔다. 어릴 때는 이렇게 방으로 도망쳐도 아버지가 문을 열라며 망치질을 해댔기 때문에 형과 함께 등으로 밀어서 아버지가 못 들어오게 해야 했다. 그때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왈칵 흐르는 눈물이 싫어서 사샤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사샤는 어머니가 입원해 있다는 인근 도시의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착한 병원에서 사샤와 함께 단 하루를 보낸 후, 다음 날 어머니는 퇴원 수속을 해야겠다고 우겼다. 매일 쌓이는 입원비가 아깝다는 이유였다. 사샤가 친구에게서 돈을 빌려 왔다고 말했는데도 어머니는 병원은 지나치게 답답하고 누워서 딱히 치료받는 것도 없다며 집으로 가고 싶어 했다.

‘의사 말도 안 듣고. 진짜 고집쟁이가 누군데.’

의사는 어머니가 쓰러진 이유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큰 수술을 여러 번 해서 혈전을 제거하고 생활 습관을 완전히 바꿀 것을 권했다. 그렇게 하면 나을 수 있냐는 사샤의 물음에 의사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이다음에 쓰러졌을 때는 다시 걷는 것을 장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했을 뿐이다.

집으로 오면 쉬기로 약속을 하고 퇴원했으면서, 어머니는 딱 이틀만 쉰 다음 다시 일을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집안일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애틋한 시간을 보낸 것도 잠시, 사샤는 어머니와 사사건건 부딪쳤다.

엄마의 죽음, 그건 다른 가족도 달리 없는 열일곱 사샤에게 무엇보다도 두려운 일이었다.

잠시 후에야 진정이 된 사샤는 문 너머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말소리를 들었다. 방음이 잘 되지 않아 누가 어떤 말을 하는지마저 명확하게 들렸다. 저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도 바깥에 들리고 있을까 봐 사샤는 늘어진 셔츠 소매로 눈과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면서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카렐이 엄마를 설득해 줬으면 좋겠다…….’

지금 사샤가 걸고 있는 희망은 그것뿐이었다.

사샤는 작게 하품을 했다. 화를 냈더니 조금 지쳐서 눈이 반밖에 떠지지 않았다. 아까보다 진정이 되어서 그런지 점차 다른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집 꼴을 보고 카렐이 놀라지 않았을지, 엄마가 말실수를 해서 카렐이 화를 내고 나가 버리지는 않을지…… 그런 것들.

두 사람의 대화를 끝까지 듣지 못한 채로 사샤는 그대로 벽에 기대어 잠들어 버렸다.

* * *

사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방 안은 무척 깜깜했다.

잠에서 깬 사샤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허기였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옆으로 웅크려 누운 채로 고르륵, 울리는 배를 쓰다듬었다. 딱딱한 바닥에 언제 드러누웠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키자 딱딱한 바닥에 기대고 있던 온몸이 뻐근했다. 사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지금이 몇 시일지 짐작해 봤다. 창가로 추정되는 곳으로 다가가 커튼을 살살 열어 보아도 해가 진 후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지난 요거트가 있는 것이 기억났다. 그거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 사샤는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엄마도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어쩌면 자정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발을 더듬으며 냉장고로 다가간 사샤는 문을 열고 안에서 요거트를 꺼냈다. 그리고 뒤돌았을 때, 냉장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으로 식탁에 앉아 있던 누군가의 인영을 알아챘다.

“아…….”

사샤는 저도 모르게 놀라서 손에 들고 있던 요거트를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동시에 등 뒤에서 낡은 냉장고 문이 둔탁하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음…….”

신경을 거스르는 소음 때문인지, 식탁 앞에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남자가 잠에서 깼다.

카렐은 목을 느리게 한 바퀴 돌리고 뒷목을 주무르더니 사샤를 향해 말했다.

“기다렸어요.”

“…….”

“방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아서 조금 겁을 먹었죠. 안에서 무슨 일이 있나 하고…….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자주 그런다고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하시더군요.”

카렐은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벽을 더듬거렸다. 거실 불을 켜는 스위치를 찾는 것 같았다. 사샤가 대신 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켰다. 갑자기 쏟아진 빛에 카렐도, 사샤도 둘 다 눈을 가늘게 떴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카렐을 샅샅이 눈에 담았다. 머리카락은 매끄럽게 빗어 뒤로 넘긴 스타일이 아니라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게 흘러 내려와 있었다. 턱 밑에는 수염도 조금 보였다. 타이도 매지 않은 심플한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는데 사샤는 그의 그런 모습을 오랜만에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어서 마음 같아선 계속 보고 있을 수도 있지만…… 제 처지를 떠올린 사샤는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했다.

또, 카렐이 왜 아직도 이 집에 있는지 궁금했다.

어머니는 손님을 내버려 두고 방에서 자고 있는 건지도.

그러나 사샤가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카렐이 말을 이었다. 마치 사샤의 질문을 모두 읽은 것처럼.

“아주 푹 잤네요. 여기 앉아서 네 시간을 잤어요. 지금은 새벽 1시쯤 됐습니다.”

“…….”

“어머니는 게오르크가 모시고 병원으로 출발했어요. 인근 도시에서 검사를 받고, 급한 수술을 마친 다음 더 훌륭한 의사진이 있는 모스크바 쪽 병원으로 모실 겁니다. 간병인을 붙여 줄 테니 크게 걱정하지 말아요.”

“어…… 엄…….”

사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엄마가 진짜 그러기로 했냐고 묻고 싶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카렐은 긴말도 필요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시기로 했어요. 사샤.”

카렐이 천천히 사샤의 앞으로 다가왔다. 카렐을 올려다보는 사샤의 눈가가 더워졌다.

“아까 대화에는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어머니도 당신도 각자의 방식대로 서로를 걱정하는 거니까.”

그 말에 사샤는 씁쓸한 감동을 느꼈다.

카렐은 진짜 어른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타인을 설득할 수 있는 어른.

“고, 고맙…….”

사샤는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머리는 왜 깎았죠. 동글동글해서 아주 귀여운데…… 조금 놀랐어요.”

“…….”

“역시 긴 머리는 귀찮았나요?”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올드 세드린의 얼굴이 보여서, 그게 너무 싫어서라고는 말하지 못했다.

사샤가 아무 말이 없자 한참 뒤, 카렐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티는 나지 않았지만 사샤는 그가 왠지 조금 주저하고 있다고 느꼈다.

“……돌아갈 때는 같이 돌아가면 좋겠는데.”

“…….”

“일주일 뒤면 공연이 시작됩니다.”

카렐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러시아로 도망치면서 사샤는 자신이 무책임하게 도피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공연을 그만두고 싶다고 디렉터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결석계조차 제출하지 않았다. 선생님들, 관리사감, 개인 발레교사 등등 저를 아는 모두에게 단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저에게서 완전히 신뢰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나중에 발레단에서 활동하고 싶어도 성실성 문제로 두고두고 발목을 잡힐지도 모른다.

그런 모든 것이 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라서 저지를 수 있는 짓이었다. 사샤는 러시아에 온 이후로 단 하루도 스트레칭조차 하지 않았다. 허벅지 염증을 방치해 그대로 근육의 가동 범위가 줄어들어 버렸고, 발목 인대 역시 조금도 낫지 않았다. 이런 몸으로 일주일 남은 공연에 참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특히 카렐이 보는 앞에서 레전드가 안무한 춤을 출 수는…….

“가지 않을 건가요.”

꾹, 주먹을 쥔 사샤의 입술이 순간 비틀렸다. 갑자기 울음이 쏟아져 나오려 할 때 서러운 입술의 근육을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지금도 그랬다.

“아, 안 가요.”

“사샤?”

드디어 말을 더듬거리는 사샤를 보고 반가운 마음이 든 카렐이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저, 저를 내버려 두세요.”

카렐이 가까워진 거리만큼, 사샤는 꼭 그만큼을 물러났다.

“발레는, 아, 안 할 거예요.”

카렐은 사샤의 말을 듣고는 눈을 크게 떴다. 조금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 표정을 보면서 사샤는 더욱 울고 싶어졌다.

“나는…… 난 발레 댄서 따위 안 될 거예요.”

“사샤.”

갑갑함을 느낀 사샤는 러시아어로 빠르게 말을 더듬거리듯 뱉었다.

「그러면 클레멘츠 씨한테 저는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죠? 그, 그게 정상이죠. 왜냐면 클레멘츠 씨는 발레를 하는 내가 중요했던 거니까…….」

“…….”

「나도 다 알아요. 내가 미완성이라고 했던 건 내가 레전드의 반의반도 못 미치니까 그런 거잖아요!」

카렐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면서, 사샤는 헐떡이면서도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카렐의 앞에서 침묵하고 싶던 이유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아차렸다.

자신은 상대와 소통이 영영 불가능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 입을 다물어 버린다. 엄마는 그걸 고집이라고 하지만 그럴 때의 사샤는 고집부릴 여유도 없었다. 그저 무력했다.

카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제 억울함과 서러움을 쏟아낸다고 카렐이 그걸 알아줄까? 어린애의 투정을 카렐이 받아 줄 이유는 없었다. 심지어 그는 지금까지 사샤에게 물질적인 면으로 차고 넘치게 보답을 주기까지 했다.

「사샤, 미안합니다. 내가…… 내가 당신을 상처 준 거예요.」

「저리 가세요!」

사샤가 저에게 다가오는 카렐을 밀쳐 내려 했지만 카렐은 순간적으로 괴롭고 아픈 표정을 지으며 사샤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그 표정이 사샤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이제 떼는 그만 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카렐에게 안긴 사샤는 서러움에 아무 말이나 더 쏟아부었다. 저도 저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발레 따위 처음부터 안 하는 게 나았어요! 흐윽, 뉴욕에 간 것도 바보 같아요. 엄마가 아픈 걸 알았다면, 같이 살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면 뉴욕에 가지 않았을 거예요……. 어, 엄마 말이나 잘 듣고 집에서 효도했을 거라고요.」

「사샤, 울지 마세요. 사샤.」

「발레는 절대 안 할 거예요!」

「알겠어요. 진정하고,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카렐이 뺨을 연신 닦아 주는 손길에 사샤는 울분이 치밀었다. 다른 건 사과하면서 발레를 그만둔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화가 났다. 바락바락 화를 내고 울어댈수록 더욱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지만 사샤는 따져 묻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왜요? 왜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요? 역시 내가 발레를 안 하면 아무 가치가 없나요?」

「그런 말이 아닌…….」

「카렐이 가버리면 난 차도에 달려 나가서 차에 치어 버릴 거예요. 내가 죽든 말든…… 카렐은 다른 사샤 세드린을 찾으면 되잖아요. 만약에 운이 나빠서 살아난대도 상관없어요. 다리가 열다섯 조각나면 춤도 출 수 없게 되고 그러면 발레가 하고 싶어도 못 하게 되니까요!」

마지막으로 소리친 사샤는 카렐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기묘한 위화감에 사샤는 천천히 눈을 떴다. 자신은 여전히 카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아직도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몸이 덜덜 떨렸다.

잠시 후 카렐이 사샤의 정수리 위에서 ‘하……’ 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화를 낸 것은 자신이면서, 그 소리에 사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샤.”

카렐의 팔이 사샤의 양팔을 붙잡고 품에서 조금 떼어냈다.

자초한 일이면서도 사샤는 카렐이 저에게 질려 버렸을까 봐 무서워서 느리게 눈을 들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한 카렐의 표정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었다. 옅은 색의 속눈썹이 한숨과 함께 파르르 떨렸다.

“사샤. 당신에게 내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카렐의 손이 사샤의 심장을 더듬었다. 투박하게 명치를 어루만지는 그 손길을 사샤는 두려워하면서도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마음에 진 멍울이 안쓰럽다는 듯이, 여러 번 사샤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샤…….”

카렐은 다시금 사샤를 깊이 끌어안았다.

사샤는 제 목덜미와 등을 끌어안은 카렐의 손이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샤는 눈을 감고 있었던 카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눈꺼풀 아래의 그의 녹색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을까 궁금해했다.

* * *

모스크바 메디컬센터.

현대식으로 지은 연회색 건물의 로비는 바닥부터 천장까지의 일부가 유리로 지어져 채광이 좋았다. 로비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지만 깔끔한데다 천장이 높아 번잡하다는 느낌은 적었다.

한 줄로 된 긴 의자에 앉은 사샤는 제 옆에서 이것저것 알림 사항을 전달하는 게오르크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간병인은 두 분을 고용했습니다. 취침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을 2교대로 방문하시게 되고, 스케줄 표는 여기 있습니다. 사샤 당신이 당분간 머물 호텔도 구했어요. 병원 안에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리고…….”

술술 말을 내뱉던 게오르크가 가방을 뒤적이더니 다른 서류 하나를 꺼냈다.

“당신이 미성년자라 보호자로 인정이 되지 않아서 대리인이 사인했습니다. 가지고 있어요.”

사샤는 파일에 담긴 서류를 받아 들었다. 서명란에 그려진 사인은 카렐이 사샤에게 준 카드의 뒷면에 그려진 것과 동일했다.

사샤가 그걸 한참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게오르크가 물었다.

“진짜로 안 돌아옵니까?”

사샤는 고개를 들고 아무 대답 없이 게오르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게오르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른 이유 때문에 물어본 건 아니에요. 어머니가 수술을 하시면 당분간 이 가구에 수입이 없으니, 적절한 생활비를 전달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몇 주치를 줘야 하는지 나도 계산을 해 봐야 하니까요.”

사샤는 눈을 내리깔았다. 게오르크가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제가 러시아에 체류하는 기간을 고작 ‘몇 주’에 한정해 돌아올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이 이상했다.

“……알겠습니다. 한 달은 넘어가나요?”

“…….”

“만약 그렇게 되면 휴학계를 제출해야 해요.”

사샤는 무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연말 진급 시험을 놓치게 되면 유급해야 했다.

고의가 아니겠지만 게오르크는 사샤가 뉴욕으로 남기고 온 것들에 대한 미련을 충동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돌아가는 것을 카렐도 바라는지 궁금했다. 아니, 당장이 아니라 사샤가 알고 싶은 카렐의 마음은 5년 후, 10년 후의 것이었다. 자신이 없는 사이 다른 사샤 세드린을 찾게 되면 카렐은 자연스럽게 저를 떠날 것이다. 그건 아주 빠를 수도 있었고 아니면 생각보다는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타인의 수년 후 마음을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사샤는 묻고 싶은 질문을 삼켰다. ‘카렐이 5년 후, 적어도 3년 후에도 나를 기다린다면 갈게요.’ 그만큼 의미 없는 질문이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일단 일어나죠. 호텔로 가서 체크인 합시다. 장기 숙박이니까 챙길 게 좀 있을 거예요.”

게오르크는 사샤를 일으키고 병원 로비를 빠져나갔다.

호텔은 병원에서 멀지 않았다. 차로 15분 정도가 걸리는 데다 도심지에 있어 지내기 나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분에 넘쳤다. 호텔에 체크인 한 후에도 게오르크는 멀거니 선 사샤를 방에 세워 두고 바쁘게 몇 가지를 챙겼다. 출장에 인이 박인 사람답게 꼼꼼히 편의를 봐 준 그는 모든 일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물었다.

“더 필요한 것 없나요?”

사샤는 손을 모은 채로 말하기를 주저했다.

사실 아까부터 말할까 말까 갈등되던 것이 있었다. 러시아에 오자마자 사샤는 카렐이 주었던 패드를 팔았다. 거의 사용감이 없는 깨끗한 제품이라 현금을 제법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현금으로 옐냐에 있는 동안 빵도 사 먹고 초코우유도 사 마셨는데 그 돈이 조금 남았다.

“저…….”

지금이라도 돌려주고 이실직고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한때 카렐이 치를 떨며 싫어하던 ‘돈으로 한탕’하던 사람들과 똑같아진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결국 사샤는 입을 열어 자신의 행동을 고백했다.

“저, 게오르크…….”

의사 표현이 줄어든 사샤가 더듬더듬 입을 여는 것을 보고 게오르크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이어진 고백에는 더욱 놀란 것 같았다.

“……아, 그래요……. 패드를 팔았다고요? 그건 괜찮습니다. 없어진지도 몰랐을 테니까.”

“…….”

“그리고 한 번 당신에게 준 거니 어떻게 쓰든 당신 마음이에요. 다만, 그런 식으로 현금을 만드는 건 번거로우니까 그냥 카드를 쓰세요.”

“문제 삼지 않으신다는 말이에요?”

“그래요.”

사샤는 조금 안심하면서 가방에서 돈을 꺼내 왔다. 남은 돈이라도 돌려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게오르크는 이런 돈은 받을 수 없다고 옥신각신하다가 결국 그 꼬깃꼬깃한 지폐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이건 받을게요. 대신 이 돈 쓰세요.”

“이게 뭐예요?”

게오르크가 지갑에서 착, 꺼낸 빳빳한 지폐를 보고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주는 용돈입니다.”

“게오르크가요……?”

사샤에게 돈을 받아 왔다고 하면 카렐이 질색할 것을 알기에 미리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었다. 사샤는 또 그 돈은 고분고분 받았다.

“또,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요?”

그 질문에 사샤는 조금 주저했다.

아까부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카렐이 아직 러시아에 있는지, 아니면 벌써 돌아갔는지…….

안다고 바뀌는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알고 싶었다. 마지막 날 카렐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그에게 싫다고, 저리 가라고, 내가 필요 없지 않느냐고 소리를 질러 놓고는 아직도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다니.

‘발레도 안 한다고 하고, 아무것도 내세울 게 없으면서 나는…….’

사샤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것도 아닌 빈손으로라도 카렐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신이 한심하고 이기적이라고 느껴졌다.

“어, 없어요.”

사샤를 조금 길게 내려다보던 게오르크는 눈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사샤. 이곳에서 부디 편안히 지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게오르크는 호텔을 떠났다.

* * *

옐냐에서 나고 자란 열일곱 살 평범한 소년 사샤 세드린의 일과는 꽤나 규칙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호텔에서 나오는 조식으로 빵 하나, 오믈렛, 사과 주스를 챙겨 먹고 얼굴을 깨끗하게 씻는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 침구를 가볍게 정리하고 호텔을 나가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 번에 병원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병원 부지는 무척 넓어서 버스정류장에서 내린 후에도 10분 정도 걸어가야 심장 센터에 닿을 수 있다. 게오르크와 이야기를 나누던 본관 건물을 지나 주차장을 따라 크게 돌면 외따로 지어진 건물이 하나 더 보인다. 어머니는 그곳 VIP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저보다 일찍 출근한 간병인과 인사를 나누고 나면 그 시간쯤 의사의 회진이 있다. 사샤는 병실에 들어가서 어머니와 함께 의사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사샤는 제 머리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그 머리로도 의사가 희망을 확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잠을 아주 많이 자게 됐다. 사샤는 그 곁에서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 보지 않을 때 사샤는 대부분 울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샤는 어머니의 곁에 앉아 있는 것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쯤 조용히 병실을 나왔다.

텅 빈 복도에 서면 그다음부터는 할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발레를 그만두고 나서야 하루가 지나치게 길다는 것을 알았다. 사샤는 짧게 깎여 머리통이 동그래진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거기 그냥 그렇게 잠시 서 있었다.

“알렉세이?”

문득 들린 목소리에 사샤는 뒤를 돌았다. 낯이 익은 간호사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알렉세이 세드린!”

“저는 사샤예요…….”

“아! 그럼 알렉산드르겠구나. 맞지?”

사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 됐다. 네가 확인해야 될 서류가 있어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사샤는 걸음을 옮겼다. 간호사는 심장 센터를 나서 건물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고는 아까 사샤가 지나쳐 온 본관으로 향했다. 사샤는 제법 빠른 걸음의 간호사를 얼른 따라갔다.

“보호자가 바뀌었거든. 너도 가족이니까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보호자가 바뀌어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샤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보호자 대리인으로 있어 주었던 것은 카렐이었다. 그게 바뀌었다는 말은…….

“응. 서류를 막 처리한 참이거든.”

사샤는 창백하게 질렸다. 카렐이 결국 나를 먼저 포기한 걸까?

‘안 돼, 이건 아닌데…….’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고 폐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과호흡의 전조 증상이었다. 간호사는 그사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사샤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였다.

“사샤?”

그녀는 사샤의 어깨에 손을 얹고 로비 안쪽의 의자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기다리고 계셔.”

거기에는 남자 하나가 뒤돌아 앉아 있었다. 머리는 어두운 금발이었다. 카렐과 같은.

‘카렐?’

사샤는 마음속으로나마 그가 카렐이기를 바라며 간호사에게 이끌려 휘청휘청 다가갔다. 그러나 의자 위로 드러난 어깨 너비나 조금 굽실거리는 머리카락만 보아도 그게 카렐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뒤로 다가간 간호사가 그를 불렀다.

“세드린 씨.”

세드린 씨?

사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동생분이 왔어요.”

간호사의 부름에 고개를 조금 틀었던 남자가 뒤를 돌며 일어났다. 남자의 갈색 눈이 간호사를 스쳐 바로 사샤에게 닿았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 시간이 흘러 얼굴은 조금 변한 것 같지만 저 다정한 눈빛만큼은 무척 익숙했다.

“흐으…….”

남자의 정체를 알아챈 사샤는 신음을 내쉬며 그 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간호사가 손목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릎부터 바닥에 박았을 것이다.

“사샤!”

급히 의자 너머로 걸어온 남자, 레빈이 사샤를 부축했다. 사샤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휘청이면서 겨우 몸을 추슬러 일어났다.

“사샤, 진짜 사샤구나. 너 정말 많이 컸다.”

레빈이 사샤의 뺨을 붙잡고 어루만지며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사샤는 숨만 힘겹게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겨우 한쪽 손을 들었다. 지금 형이 하는 것처럼 사샤도 형의 얼굴을 만져 보고 싶었다.

그래서 손을 들고 형의 얼굴을 마구 더듬었다. 귀, 이마 그리고 눈꺼풀을 만져 댈 때 레빈은 울면서 웃었다. 기쁘다는 듯이 어깨를 떨고, 서럽다는 듯이 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내 동생.”

레빈이 사샤를 깊이 끌어안았다.

따스한 형의 품에 안겨 사샤는 좋으면서도 조금 어리둥절해했다. 사실 아직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같이 밥도 먹고, 호텔로 데려가서 몇 밤 같이 자 봐야 형이 돌아왔다는 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끔 어떤 망상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특히 아주 많이 외로워질 때면 사샤는 환상으로 레빈을 만들어 내곤 했다. 그를 만나는 줄 알고 잔뜩 들떠서 낯선 남자를 따라가려 했던 일이 갑자기 떠올라서 조금 무섭기도 했다.

“형, 형…….”

“그래. 사샤, 나야…….”

사샤는 형을 놓칠까 봐 꼭 끌어안고는 레빈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형의 가슴이 간헐적으로 삼킨 울음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나만 만나고 싶었던 건 아닌가 봐.’

사샤는 형도 저를 그리워했다는 사실에 깊은 위안을 받았다.

형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로 사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레빈의 어깨 너머에서 한 남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카렐이었다.

* * *

사샤의 형 레빈은 이전처럼 사샤가 만들어 낸 망상이 아니었다. 레빈은 진짜 실체가 있었고, 사샤와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었다. 그것도 카렐이 준비한 현실.

“클레멘츠 씨에게 연락을 받은 지는 얼마 안 됐어. 가족을 만나고 싶으면 자리를 주선해 주겠다고 해서 처음엔 거부했지.”

“…….”

“……아버지를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

“응…….”

사샤는 이해한다는 듯이 레빈의 손을 꼭 잡았다. 레빈의 설명을 들어보니 카렐은 지난번 자신과 헤어진 직후부터 레빈의 행적을 찾아 헤맨 듯했다.

사샤는 카페 유리창 바깥에 있는 카렐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는 카렐은 가끔 곤란한 듯이 미간을 찌푸려 댔다. 두 형제의 만남을 주선해 주는 사이에도 그는 무척 바빠 보였다.

모스크바와 맨해튼의 거리가 내킬 때마다 올 정도로 만만한 거리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사샤는 입술을 가만히 사리물었다.

“사정을 잘 설명해 주시고 여기 올 수 있게 도와주셨어. 정말 감사한 분이지.”

사샤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을 알아챈 레빈이 말했다.

“사실 난 네가 날 원망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았잖아. 너한테 모든 짐을 떠맡기고 왔다는 기분에…….”

“…….”

“저분이 사샤가 아직도 날 그리워한다고 전해 주지 않았다면 용기가 생기지 않았을 거야.”

“난 매일매일 형을 그리워했는데?”

사샤가 눈물을 글썽이자 레빈은 그런 사샤를 안쓰러워하면서 다시 한 번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그러고는 자꾸 얼굴을 들여다보고 눈가를 닦아 주거나 코를 만지거나 했다. 그게 너무나 좋으면서도 사샤는 형이 자기를 그만 아기 취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이 따뜻하게 대해 줄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서 곤란했던 것이다.

조용히 훌쩍거리던 사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형…… 그러면, 러시아에는 얼마나 있어?”

“아마도 당분간은? 어머니를 모셔야지.”

“정말?”

“응, 너무 오래 떠나 있기도 했고…….”

“회사는 안 가도 돼?”

사샤는 당장이라도 레빈이 떠나야 한다고 할까 봐 몇 번이나 물었다. 레빈은 러시아를 떠난 직후 독일에서 자리를 잡고 지금은 기능공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지금은 일을 쉬고 있어서. 안 가도 괜찮아.”

“그럼 오늘은 어디서 자?”

“저분 비서가 호텔 주소를 알려주셨는데? 너도 거기 있을 거라고.”

그건 오늘부터 레빈과 함께 살게 된다는 말이었다. 사샤는 좋아서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꾹 참고 형의 목에 매달렸다.

카렐이 돌아온 것은 수십 분 뒤였다.

그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온 것을 본 레빈이 사샤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다.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사샤가 겁을 먹자, 그는 단지 핸드폰 개통이나 은행 업무를 보고 오는 것뿐이라고 사샤를 안심시켰다.

결과적으로 사샤는 레빈이 계속 러시아에 머무르려면 꼭 해야 하는 일들을 하기 위해 나간다는 것을 수긍했다. 그러면서도 사샤는 형이 혹시 길을 잃을까 봐 지도를 그려 주고 호텔에 오는 법을 여러 번 설명해 주었다. 그 모습을 레빈이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제 동생에게는 하루아침에 형을 잃었던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따가 여기로 꼭 와?”

“그래, 알겠어.”

“다시 안 오면 안 돼?”

“당연하지.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형…….”

레빈은 무의식적으로 저에게 몸을 기울이며 달라붙으려 하는 사샤의 등을 토닥여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테이블과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카렐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문가 파티션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고 있던 카렐은 레빈이 나가는 길을 따라 쭉 시선을 주었다. 다시 카렐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을 때 사샤는 왠지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저벅, 저벅.

느리고 분명한 구두 걸음 소리가 들리고 맞은편에 놓여 있던 의자가 드륵, 소리를 내며 끌렸다. 이어 카렐이 거기에 앉았다.

“사샤?”

사샤는 아주 조금만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가까이서 보는 얼굴이 궁금했지만, 그 눈이 조금이라도 차가운 빛을 담고 있으면 무서울 것 같아서였다.

“머리가 조금 자랐네요.”

“…….”

“아주 조금이지만…….”

그의 말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머리카락이 가늘고 부드러워서 조금씩 자라나는 머리카락들은 조금도 거칠지 않고 보들보들했다. 사샤는 문득 카렐이 제 머리카락을 좋아했던 것을 떠올렸다.

“키도 조금 자란 것 같고요. 많이 마르지는 않았고…….”

“…….”

“굶지 않고 잘 먹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를 이모저모 신경 쓰고 있다는 증언에 사샤는 용기 내어 고개를 들었다. 마주 보기 무서웠던 카렐의 녹색 눈은 지금은 눈을 내리깔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사샤 역시 그에게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어서 말을 골랐다. 제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카렐의 턱 선이 이전보다 훨씬 날카로워 보였다. 여전히 마른 체격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드러난 목의 뼈대가 선명해진 것은 혹시 잘 챙겨 먹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카렐은 조금 마른 것 같아요. 혹시 굶고 있나요?’

그렇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카렐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울컥, 움직였다.

선명한 그림에 사샤가 조금 넋을 빼놓은 사이 카렐이 말했다.

“사샤, 고백할 게 있어요.”

카렐이 눈을 들었다. 그의 가라앉은 녹색 눈은 무척 침착했다.

“나에게도 정신병이 있습니다. 극심한 망상이죠.”

한 번 눈을 마주치자 피할 수 없었다. 사샤는 그의 눈동자 안에 어렴풋이 비치는 제 모습을 발견했다.

카렐이 나직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과거의 어떤 사람이 내 전생이라고 믿습니다. 그 사람은 사샤 세드린의 평생의 파트너로, 나와 이름이 같아요. 회사의 창립자인 카렐 클레멘츠. 나보다 딱 백 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죠.”

“…….”

“당신은 못 믿겠지만, 그 남자가 내 전생이라고 믿기 시작한 이후로 이상한 증상에 시달리곤 했어요. 아마 믿음이 지나쳤기 때문이겠죠. 나는 가끔 환통을 느끼기도 하고, 겪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전쟁에 참가한 꿈을 꿀 때는…… 정말 끔찍해요. 얼굴이나 손목을 스치는 수많은 칼날이 보이거든요.”

끔찍한 꿈이었다. 얼어붙는 눈밭을 허기진 채로 걷는 제 악몽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사샤는 작게 중얼거렸다. ‘무서워요’라고.

카렐이 피식 웃더니 이어 말했다.

“약도 먹고 상담도 받아 봤지만 나아지질 않았습니다. 그저 상담의를 속이면서 나는 계속 내가 사랑하는 이의 환생을 찾고 있었어요.”

“…….”

“네, 당신도 알다시피 그게 사샤 세드린입니다. 내가 사샤 세드린과 엇비슷하게 닮은 이들을 만나 온 건 사실이에요.”

사샤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

“첫눈에 보자마자 확신을 가져다준 건 당신뿐이었습니다. 나는 그 파티에서 당신을 보자마자 확신했었어요. 사샤 세드린의 환생이 분명하다고. 당신은 고작 열다섯 살이었는데 말이죠.”

“…….”

“누군가에게 말하면 정신 나갔다는 소리를 들을 걸 알면서도 당신과의 끈을 놓지 않았죠. 그러면서도 비난이 두려워 거리를 두었습니다.”

자신을 상처 입힌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그를 바라보면서, 사샤는 비록 흔들리는 눈동자일지라도 시선을 거두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나는 당신이 너무 어리다고, 가끔은 내가 그리던 사샤 세드린의 모습이 아니라고, 당신을 어딘가 끼워 맞추려고 했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나는 원체 의심이 많아요. 그게 나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환생을 확신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확신한 것이었는데.”

그리고 카렐은 길게 침묵했다.

“지금 이후로 내가 그리워할 것은.”

“…….”

“죽은 이가 아니라 지금 내 눈앞의 사샤 세드린이에요.”

그 말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손을 쥐며 손가락을 숨겼다. 주먹 쥔 손 안에서 손톱이 손바닥으로 아프게 파고들었다.

“혹시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내가 기회를 영영 잃었다 해도 나는 오늘 당신의 모습을 잊지 않을 겁니다.”

“…….”

“언젠가 당신이 그랬잖아요. 워싱턴 D.C.의 호텔에서. 나는 매일매일의 사샤 세드린을 기억해 달라고 했던 당신의 말을 잊지 않을 겁니다.”

“…….”

“또 축음기를 보면서 누구에게 그걸 줄 거냐고 질투하던 모습도, 애인으로 삼아 달라고 틈만 나면 조르던 것도…….”

“…….”

“의심스럽게 보던 초록색 주스를 나를 따라 한 번에 마시던 것도.”

“…….”

“공연에 참가하게 해 달라고 하고 싶다고 울던 모습도…….”

“…….”

“오랜만에 만난 형과 조금이라도 헤어지기 싫어서 달라붙던 방금 전의 손길 같은 것도, 이 짧게 깎은 머리와 지금 나를 보는 눈도, 전부…… 다…….”

사샤는 그의 말과 호흡을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숨을 아주 짧고 작게 쉬면서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전부 다 기억 속에 담을 거라고 말하면서도 카렐은 마지막 말을 할 때 사샤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한참 만에 겨우 눈을 든 카렐이 말했다.

“내가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사샤 세드린.”

* * *

카렐은 그날 바로 전용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그 말을 직접 해 주고 싶어서 단 여섯 시간 만의 체류를 위해 모스크바로 날아온 것이라고 했다.

카렐이 떠나 버렸는데도 사샤는 이상하게 그다지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어 있던 옆자리 침대에 레빈이 누워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제처럼 다음날이 무섭지도 않았다.

그건 한때 잃어버렸던 ‘사랑받는다는 확신’을 조금씩 되찾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그 사실을 아직은 다 짐작하지 못한 채로 그저 저에게 고백하던 진실한 녹색 눈을 떠올렸다.

* * *

겨울이 이른 모스크바의 거리와 건물들은 자주 흰 눈으로 덮이곤 했다.

두 형제는 지금까지 떨어져 있던 시간을 만회하듯 항시 붙어다녔다. 어머니를 함께 간호하고, 혼자서 먹기 어려운 메뉴를 파는 식당에 들어가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잠들기 전마다 밀린 이야기를 나누었다.

레빈은 가끔 외출할 때마다 사샤가 거리에 붙은 발레 공연의 현수막에 시선을 준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호두까기 인형’의 시즌이었다.

레빈과 함께 지내는 사이 사샤는 그에게 자신이 발레 할 때의 사진이나 영상을 몇 개 보여준 적이 있었다. 레빈은 특히 유튜브에 올라간 사샤 세드린의 영상 밑에 달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말을 꾸며내는 것이 허술해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샤와의 대화 속에서 제 동생이 뉴욕 발레단 이번 겨울 시즌의 한 공연으로 데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추론해 냈다.

그 공연은 이미 오픈되어 한창 관객이 드는 중이었다.

레빈은 한숨을 쉬며 몰래 시기를 계산해 보았다. 사샤는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공연 오픈 직전, 어쩔 수 없이 돌아온 것 같았다. 그걸 알고 난 레빈은 아쉬움을 삼켰다. 어린애에게 큰 짐을 준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했다.

얼마나 공연이 하고 싶었을까, 그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어머니와 함께 병원에서 시간을 보낸 후 호텔로 돌아왔을 때였다. 레빈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사샤에게 물었다.

“사샤, 발레는 다시 안 하는 거야?”

그 목소리에는 꽤 아쉬운 기색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사샤의 지난 모습들을 보면서 어느새 동생의 열렬한 팬이 된 모양이었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스트레칭을 해야 한다며? 연습도 걸러선 안 되고……. 하지만 네가 몸을 푸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

“너 엄마 때문에 여기서 무리하는 건 아니니?”

솔직히 어머니의 차도는 좋지 않았다. 한 번으로도 체력에 부담이 가는 수술을 벌써 두 번이나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후가 좋지 않다고 했다. 카렐의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미 그 사이 어머니를 잃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위험한 순간들이 잦았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떠나지 못하는 마음도 이해하지만, 레빈은 만약 사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면 죄책감 가지지 말고 돌아가도 좋다고 말해 줄 참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그건 아니야. 그냥…… 발레를 더 해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었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난 몸 관리도 잘 못했고,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어.”

“그래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었다며. 그것도 대단한 건데…….”

“학교 졸업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아쉽다. 사샤, 분명히 재능이 있던 거잖아.”

레빈의 말에 사샤가 걸음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형, 그런데, 재능만으로 다 되는 건 아닌 것 같아……. 적당히 탁월해서는 안 되고, 유일해야 성공할 수 있거든.”

“…….”

“그리고 알잖아. 나는 기회가 별로 없어. 실패하면 다시 도전할 여유도 없고.”

레빈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과거를 자극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샤의 눈동자에서 저보다 더 진하고 깊은 미련을 읽었기 때문이다.

제 동생은 어느새 열정보다 현실을 고려하는 나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철이 들었다고도 볼 수 있었다. 어린아이가 철드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무척 가슴 아픈 일이라고, 레빈은 생각했다.

* * *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쯤, 거리는 흰 눈으로 뒤덮였다. 그리고 사샤는 예상치 못한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사샤? 나 학교에 왔는데 네가 없어!]

첫 번째는 옥사나였다. 당황한 그녀 때문에 사샤 역시 당황했다. 사샤는 한 번 전화를 걸었다가 시차 때문에 옥사나는 자고 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얼른 끊었다. 그 다음 날에는 옥사나가 전화했지만 같은 이유로 사샤가 전화를 받지 못했다. 몇 번의 문자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겨우 시간을 정해서 통화를 하는 데 성공했다.

―사샤. 어머니가 아프시다며!

오랜만에 듣는 옥사나의 목소리에 사샤는 들뜨는 것을 느꼈다. 말은 짧은데 자꾸 헤헤 웃기만 하는 사샤를 본 레빈은, 제 동생이 여자 친구와 통화하는 줄 알고 조용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응, 그래서 고향에 왔어.」

―고향이면 어디?

「나 옐냐 출신이야.」

―옐냐가 어디지?

「모스크바 쪽에 스몰렌스크에…….」

오랜만의 통화였지만 바로 어제 헤어진 것처럼 옥사나와의 대화는 자연스러웠다. 옥사나는 쉬는 동안 체중이 얼마나 늘었는지, 학교로 돌아온 뒤 얼마나 열심히 살을 빼고 있는지에 대해서 늘어놨다. 체중이 늘어나니 토슈즈를 15분만 신어도 발끝이 아프다고 엄살도 부렸다.

―그러니까 사샤, 너도 학교 안 오는 동안 체중 조절 열심히 해. 마음 놓고 먹다가는 무조건 후회한다구. 마누엘 봤지? 반년 쉬었을 때 찐 살을 아직도 못 빼고 있잖아.

사샤는 대답 없이 입술을 축였다. 옥사나는 당연히 자신이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통의 전화가 바딤으로부터 걸려왔다.

―사샤, 이 녀석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어머니가 얼마나 편찮으시기에 한 달째 오질 않는 거야! 설마 한 학기를 그대로 쉴 작정이냐? 반년이나 쉬면 몸이 돌덩이가 되어서 절대로 예전같이 돌아오지 못해!

올가에게서도.

―사샤, 어머니 일은 들었어.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학교를 나갔구나. 내년 로잔 콩쿠르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니? 일정상 무리이고 신경 쓸 여력이 없다면 취소하는 게 맞겠지만 네가 못 나간다고 생각하면 무척 아쉬워서……. 넌 분명 우승할 테니까.

또 관리사감 줄리아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사샤? 우리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는데, 네가 만약에 연말 진급 시험을 놓치게 되면 특별히 별도로 기회를 주기로 했어. 넌 작년에 최우수 학생이었잖니. 배려받을 이유가 충분할 정도로 우수하지. 그러니 걱정 말고 어머니와 좋은 시간 보내고 돌아오렴.

그리고 학교 안에 소식이 퍼졌는지 마누엘과 조제는 물론, 함께 공부하던 동기들과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여학생들, 특히 후배들이 많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가끔 들어가 열어 본 유튜브 화면의 댓글도 어느 날부터 뚝 멈춰 버린 사샤의 코멘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샤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조금 놀랐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들은 오히려 사샤가 먼저 고민을 털어놓지 않고 삭였다는 사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서 사샤는 그날 레빈(제 형이 아닌 뉴욕대에 다니는 상냥하고 따뜻한 여학생)과 율리안, 정신과 상담 선생님, 호텔의 프라이빗 도어를 지키는 마이클과 발레 개인 교습 선생님 브라운 씨에게 모두 연락을 돌렸다. 할 말이 없을 때는 ‘곧 크리스마스라서 연락했어요’라고 말하면 다들 좋아했다.

의외로 연락을 귀찮아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틈이 날 때면 사람들과 전화를 하는 사샤를 보고 레빈이 문득 말했다.

“너 정말 친구가 많구나?”

“내가?”

레빈의 말에 사샤는 조금 놀랐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샤와 레빈, 두 형제는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어머니와 특별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었다. 다가온 이브 당일 아침, 둘은 미리 의사에게 외출 허락을 받은 뒤 옐냐의 집으로 가서 어머니의 겨울옷과 화장품을 잔뜩 꺼내 왔다. 케이스의 로고가 닳아 버린 낡은 화장품을 보고 나서 레빈은 몇 개를 선물 삼아 더 사기도 했다.

정오에는 휠체어에 탄 어머니와 성탄절 미사에 참석했다. 장성한 두 아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갈리나를 보고 성당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을 걸었다.

사샤는 미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 중에 혼자 온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매년 단란한 가족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홀로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걸 떠올리니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울적한 것은 사샤뿐인지, 처음으로 아들들을 데리고 온 어머니는 뿌듯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다음에는 레빈이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에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바라마지 않던 가족의 단란한 모습 속에서 사샤는 아주 오래전 자신이 누리던 행복을 되찾았다. 아주 어렸을 때처럼 사샤가 맥락 없이 아무 말이나 해도 레빈과 어머니는 후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음식은 맛있었고 식탁 위에서 어른거리는 초의 불빛은 따스했다. 술을 그리워하는 어머니 때문에 레빈은 무알코올 샴페인을 주문했다.

“형, 나도 한 잔만…….”

그걸 한 잔 얻어 마시면서 사샤는 자신이 처음 맛보았던 제대로 된 샴페인을 떠올렸다. 카렐 몰래 겁 없이 한 병을 위장에 다 쏟아부었던 그 무모한 짓을…….

고작 두어 달 전의 일인데 무척 먼 과거 같았다.

병원으로 되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 내게 병이 있다는 것도 잊을 만큼. 한번 바깥에 나갔다 오니 활기가 넘치고 좋구나……. 싹 나은 것 같아. 이대로 퇴원을 해도 될 정도로.”

“그럼 내일은 시내 구경 가실래요? 쇼핑도 조금 하고요.”

레빈의 말에 어머니는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좋지, 뭐든 좋아. 돈 쓰는 것만 빼고 공짜 구경이면 더 좋겠는데.”

병원에 돌아와 환자복을 입은 어머니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곧 지쳐 잠들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형과 어머니를 바라보던 사샤도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레빈은 소파에 누워서 스르륵, 쓰러지려는 사샤를 깨워서 조용히 병실을 나섰다. 어머니의 병실 앞에는 그새 누군가 귀여운 초록색 리스를 달아 놓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싸구려 반짝이 로고가 빛나는 글귀를, 사샤는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형제는 호텔로 향했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사샤가 졸린 목소리로 형에게 물었다.

“형, 있잖아……. 엄마가 진짜 퇴원하게 될까?”

“그러시면 좋겠지.”

“엄마가 퇴원하면 형은 다시 독일로 돌아가?”

“아마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럼?”

레빈은 피식 웃으며 사샤의 뺨을 가볍게 꼬집어 흔들었다. 어렸을 때처럼 한 번 말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좀처럼 대화를 끝내지 않는 사샤가 여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랑 계속 같이 있을게. 우리는 가족이니까.”

“형, 그럼…….”

나도 형과 함께 독일에 갈래.

사샤는 목 끝에 걸렸던 그 말을 꾹 삼켰다.

왠지 엄마가 있는 러시아나, 형이 사는 독일이나 모두 자신이 있을 곳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맨해튼.

그곳 풍경이 눈을 감으면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정확히는 황혼이 지는 펜트하우스의 창밖, 푸르고 노랗고 붉은 경계선을 그으며 센트럴 파크를 덮쳐 오는 어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올드팝을 들으며 뒤돌아선 한 남자의 모습이.

그곳을 박차고 나온 것은 저 자신이었다. 사샤는 고개를 수그리고는 제 인생에서 아주 짧고 달콤했던 나날을 되새겼다. 레빈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 사샤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결국 사샤는 택시 안에서 졸고 말았다. 침까지 흘려 입술이 촉촉해진 사샤를 억지로 일으키는 대신 레빈은 마른 등에 사샤를 엎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택시에서 내렸다.

“세드린 씨!”

두 형제가 로비에 들어설 때 프런트에서 그들을 불렀다. 돌아본 레빈을 향해 직원이 뛰어와 작은 봉투 하나를 전해 주었다. ‘국제우편으로 오늘 도착했어요.’ 등 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샤 대신 편지를 받아 든 레빈은 봉투를 앞뒤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 램프를 껐을 때, 레빈은 옆에 누운 사샤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병원에서부터 졸면서 애매하게 잠을 충족해서 도리어 잠이 안 오는 눈치였다.

레빈은 아까 들어오며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편지를 사샤에게 건넸다.

“사샤. 이건 너에게 온 편지야.”

“편지?”

사샤는 몸을 일으켜 편지를 건네받았다. 흰 봉투의 한 면에는 흘린 글씨로 ‘카렐 클레멘츠’라고 쓰여 있었다.

“이걸 어디서 받았어?”

“아까. 로비를 지날 때 프런트 직원이 줬어.”

사샤는 혹시 카렐이 직접 왔다 갔나 싶어 깜짝 놀랐다. 그가 왔는데도 저를 만나지 않고 갔다는 점이 서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아니면 게오르크에게 대신 시켜 그가 왔다 갔을 수도 있었다.

사샤가 그런 얘기를 했더니 레빈이 ‘국제우편 배달부가 주고 갔대.’ 하고 산통을 깨는 소리를 했다. 카렐이 러시아에는 온 적도 없다는 것을 알고 나니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아무튼 카렐이 준 편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애틋해졌다.

카렐에게 편지를 받은 건 이것으로 세 번째다. 어퍼 스쿨 1학년 때 짧은 메시지 카드 두 개, 그리고 이번의 것. 사샤는 그 엽서들을 모두 맨해튼 호텔에 두고 온 것을 조금 후회했다. 

사샤는 편지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열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 멈칫하며 레빈을 돌아보았지만 형은 이미 잠들었는지 등을 돌린 채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린 듯이 깔끔하고 아름다운 필체. 사샤는 제 이름이 적힌 편지의 첫머리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사샤.

이 편지를 받을 때쯤이면 크리스마스겠네요.

조금 이른 때에 미리 편지를 씁니다. 당신에게 딱 맞추어 도착하도록.]

사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왜인지 안온한 기분에 사샤는 이불로 조금씩 더 파고들며 편지를 읽었다.

[아직도 당신의 침대는 거실 그 자리에 있어요.

당신의 슈즈, 레오타드, 타이즈 같은 것들도 그대로 있고요.

그러니 당신이 내킬 때는 언제든 뉴욕으로 돌아오세요.

나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무시해도 좋고, 전생과 환생에 집착하는 미치광이 정신병자라고 거부해도 됩니다.

그리고 한때 내게 주었던 애정을 잊었다면, 나를 얼마든지 끔찍하게 여겨도 돼요.

나는 계산속을 버릴 수 없고, 어떻게 해도 이기는 법을 먼저 생각하고, 질러가는 길의 지도를 찾아요. 아마 이렇게 애원하는 것도 당신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계산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며 상처 받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발레는 그만두지 말아요.

레전드를 모방할 필요 없이 당신의 춤 그 자체로 당신은 그냥 사샤 세드린이니까요.

메리 크리스마스.

카렐 클레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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