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혼자만의 왈츠 (16/30)

  2. 혼자만의 왈츠

학교를 마치고 멧 오페라로 가기 전, 사샤는 구내 카페테리아에서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러고는 물 한 병을 들고 바깥으로 나간 다음 복도 구석에서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쪽에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알약을 넣어 온 약통이 있었다. 의사는 이게 환청이나 망상을 줄여 줄 거라고 했다. 긴가민가하며 먹고 있었지만 실로 약의 힘은 대단했다. 의사가 약속한 것들은 물론 갑자기 폐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며 심장이 빨리 뛰는 증상도 사라졌다. 발레를 하다 보면 꼭 호흡을 조절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는데 그간에는 지나치게 예민해지면 제어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심박수가 오르곤 했다. 그러다 갑자기 기침을 하거나 과호흡에 시달려 곤란함을 겪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약 덕분에 그런 순간이 많이 사라졌다.

사샤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작게 칸이 나뉘어져 있는 약통을 흔들어 보았다. 여기에 넣어 다니면 잊지 않을 거라며 꼼꼼히 알약을 챙겨 준 게 카렐이었다.

가방에 약통을 다시 넣어 둔 사샤는 평소보다 느린 걸음으로 오페라하우스로 향했다. 약의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지나치게 느긋해졌다는 점이다. 솔로를 추기 전에는 과하게 긴장해서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얼어 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최근 사샤는 긴장하기는커녕 솔로 시간이 지루하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바딤이 알면 또 뭐라고 하겠지.’

벌써부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이 오만한 녀석, 주제를 알아라. 겁도 없이 슬렁슬렁하는구나. 네놈의 빠진 정신머리가 훤히 보인다.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사샤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언제부턴가 사샤는 꾸지람을 들어도 웃어넘길 수 있게 됐다. 과민한 신경을 벗겨내자 객관적인 제 실력이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솔로 리허설 초반에는 안무의 포인트를 익히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니 배울 게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만하다, 오만해!’

다시금 머릿속에서 바딤이 호통을 쳤다. 사샤는 혼자 실실 웃다가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숨겼다.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사샤의 착각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사샤는 이제 안무를 익히는 수준을 넘어 자기 캐릭터를 만들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솔로 외에 맡은 군무에서도 전부 리드 역을 맡게 됐다.

“사샤! 조금 늦게 왔네. 비어 있는 로커가 별로 없을걸.”

로커룸에 들어서자 단원 중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다. 사샤는 괜찮다고, 알려줘서 고맙다고 대답하며 가장 높은 칸의 로커에 손을 뻗었다. 까치발을 들어야 했지만 충분히 열 수 있었다.

“거긴 내 자리야.”

“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사샤는 뒤돌았다. 제 뒤에 바짝 붙어선 남자는 일전에 잠깐 마주친 적이 있던 게스트 프린시펄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샤가 방금 연 로커 안에는 누군가의 가방이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샤는 눈치를 보며 옆으로 한 걸음 멀어졌다. 그는 사샤의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가까이에 선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을 어리둥절하게 생각한 사샤는 그 옆 칸에 손을 뻗었다.

오늘은 처음으로 전체 공연의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각자 나눠 맡던 파트를 모두 조합해 처음부터 끝까지 끊지 않고 가 보는 것이다. 잘해 보자고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사샤는 레오타드로 전부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의사가 알려준 대로 스트레스 지수를 낮추는 심호흡을 몇 번 반복한 후에 물병과 수건을 챙겼다.

로커룸을 나가려고 뒤돌았을 때 사샤는 검은 레오타드를 입은 남자와 다시 한 번 눈을 마주쳤다. 그는 또 제 뒤에 서 있었다.

“……?”

할 말이 있나 싶어 머뭇거리던 사샤는 눈치를 보며 문가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왔다.

“너 몇 살이야?”

문을 열기 직전 남자가 물었다. 사샤는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열일곱 살이요.”

“본명이야?”

“네?”

남자가 사샤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순식간에 사샤의 이마까지 가리는 긴 그림자가 졌다.

“러시아 사람?”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 했다. 남자는 ‘흠……’ 하더니 그때까지 사샤가 열고 있던 문틈으로 슥 나가 버렸다.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질문, 게다가 저를 향한 배려는 당연하다는 듯한 당당한 행동에 사샤는 조금 놀랐다. 그래도 기분이 막 나쁘지는 않았다.

‘수석이니까 저런 태도도 멋있어 보이는 거야. 나도 빨리 수석이 되고 싶다.’

사샤는 그 남자의 뒤를 따라서 연습실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모두의 시선이 앞선 프린시펄과 뒤따라오는 사샤에게 차례로 닿았다. 사샤는 눈을 내리깔고 얼른 아는 얼굴이 많은 연습실의 벽 구석으로 가서 붙어 앉았다.

“사샤. 지금 알았는데.”

곁에 앉은 군무 단원 하나가 사샤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응?’ 하며 돌아보자 그가 신기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랑 너랑 꽤 닮았어.”

그 말을 듣고 나서 사샤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불현듯 얼마 전 약혼 소동으로 간접적으로 알게 된 미셸 오하라보다 저 장신의 발레 댄서가 카렐의 이상형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샤는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에 휩싸여 막 센터로 나오는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잠시 뒤 연습실 안을 꽉 채우는, 음울하고도 기괴한 라 발스의 음률.

그리고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 * *

라 발스의 곡조는 희열과 불안 사이를 빠르게 오간다. 희열마저도 순수한 기쁨이 아니라 공포와 불안에서 도망치는 신경질적인 감정의 고양이다.

음악을 처음 들을 때부터 사샤는 생각했다. 저를 이끄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채로 손목을 붙잡혀 정신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라고.

샹들리에와 천장화로 아름답게 치장된 황궁의 복도를 휘청이며 달려가다 보면 어느새 신발은 벗겨져 있고 다리는 잔가지에 긁힌 상처와 풀물들로 얼룩덜룩하다. 주변을 돌아보면 자신은 황궁이 아니라 숲속에 버려져 있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샤는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한 것이 정체불명의 남자이며, 그가 악인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 채로 불안하다는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미 영혼은 그가 주는 달콤한 환상에 중독된 채다.

그렇게 휘청이는 왈츠를 추면서…….

“하아, 하아…….”

사샤는 본인이 맡지 않은 부분의 안무까지 전부 재현하고는 연습실에 길게 쓰러졌다.

눈을 감아도 얼마 전에 본 전체 리허설의 장면과 장면이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재생되었다. 레전드가 만든 안무가 완성도 있는 군무로 눈앞에서 완성되는 순간의 희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레전드에게 알 수 없는 경쟁 심리를 가지고 있던 사샤지만 이것 하나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샤는 발란신도, 포킨도 아닌 레전드의 안무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공연으로 보면 정말 멋지겠지.’

호흡이 정돈되자 사샤는 몸을 움직여 연습실 구석에 있던 물병을 찾아 마셨다. 텅 빈 연습실 안에 제가 물을 꿀떡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리고 이 연습실만의 몫이 아닌 그보다 더 큰 적막이 오페라하우스 전체를 감돌고 있었다. 이미 모두가 퇴근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리허설의 여운을 잊지 못했던 사샤는 오늘 솔로 리허설이 끝난 뒤에 조금 더 남아서 연습을 해도 되냐고 물었었다. 발레 마스터는 시설팀과 경비팀에 알아봐 주겠다고 했고, 잠시 뒤에 긍정적인 대답을 들고 왔다. 나갈 때 체크만 하면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다고 일러 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사샤는 혼자 남아서 스스로가 기억하는 전체 안무를 재현해 볼 수 있었다. 왜 그런 충동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이 내킬 때 꼭 하고 싶었다.

‘완전히 지쳤어…….’

다시 딱딱한 바닥에 드러누운 사샤는 저도 모르게 스륵 잠에 빠질 뻔했다. 그러나 집에서 카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연습실의 불을 끄고 바깥으로 나오자 최소한의 등만 켜 놓은 복도가 으스스했다. 사샤는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오다가 게시판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거기에는 발레단 기획팀에서 매일 아침 변경 사항을 업데이트하는 공지사항이 붙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주역 롤 옆에 처음 보는 낯선 이름이 하나 추가된 채로.

‘샌더.’

그건 바로 새로 온 게스트 프린시펄의 이름이었다.

사샤는 얼마 전 직접 본 그의 춤을 떠올렸다. 수석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는 안무에 매우 숙련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샤는 자신의 첫 데뷔 공연을 카렐이 꼭 보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약속을 들어줄 거라는 사실 역시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샌더가 주역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저는 학생 신분으로 과분한 배역을 맡기는 했지만 그건 1막의 솔로 한 곡일 뿐이다. 반대로 샌더는 주역이었으며, 이 공연을 본 모두가 그를 인상 깊게 기억할 것이 분명했다.

카렐의 시선이 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은 싫었다. 심지어 그의 이상형에 꼭 들어맞는 듯한 사람에게 가는 것은 더더욱…….

사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만약 카렐의 이상형에 나보다 훨씬 더 들어맞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들렸다.

“사샤?”

“아아악!”

사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돌았다. 갑자기 헛숨을 들이켜 기침까지 나왔다.

“왜 그렇게 놀라지?”

어두운 복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쿨럭쿨럭 기침하던 것을 겨우 멈춘 사샤는 팔딱팔딱 뛰는 심장에 손을 올리고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사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샌더 씨?”

“음.”

짧게 대답한 그는 사샤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한 사샤는 한참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마이페이스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작은 진동 소리가 울렸다. 사샤는 곧 그게 제 가방 안에서 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급히 가방 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낸 사샤는 받기 전에 샌더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을 뿐이다. 받아도 좋다는 허락에 사샤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핸드폰의 발신인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카렐 클레멘츠’라는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사샤. 너무 늦어서 전화했어요.

“지금이 몇 시에요?”

사샤는 샌더와 눈을 마주쳤다. 샌더는 팔짱을 낀 채로 한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사샤는 그의 습관이 문득 누군가의 것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12시.

“12시.”

수화기 너머의 카렐과 눈앞의 샌더가 동시에 대답했다. 비현실적인 시간에 사샤는 잠시 말을 잊고 샌더를 올려다보았다.

“여, 열두 시라고요?”

샌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러 갈게요. 지금은 끝났습니까?

“네, 끝났어요. 죄, 죄송해요. 시간이 가는 줄 몰랐어요. 걱정시켜서 죄송…….”

―사과는 한 번만 해요. 지금 나가죠.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샌더는 여전히 사샤의 앞을 가리듯이 서 있었다. 허나 잠시 뒤면 카렐이 올 것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고 카렐은 이미 많이 걱정했을 테니 더는 늦어서는 안 되었다.

사샤는 눈앞의 남자에게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샌더 씨? 저는 이제 나가 봐야 해요.”

“그렇겠죠.”

“데리러 온다고 하셔서요…….”

“누가. 카렐이?”

이 사람이 어떻게 카렐을 알고 있을까?

사샤의 입술이 멍하니 벌어졌다.

카렐이 인간관계를 맺는 여러 가지 방식이 떠올랐다. 순간 사샤는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과 눈앞의 남자를 묶었다. 카렐의 과거 연인들은 모두 눈앞의 남자처럼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배우나 모델은 물론 무용수도 있다고 했다.

“그 변태적인 취향은 여전한가 봐.”

샌더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샤의 목울대가 꿀꺽 넘어가는 걸 본 그가 빙글빙글 웃었다.

“솔직히 성공할 줄은 몰랐어.”

“……뭐가요?”

“이름도, 머리색도, 인종도 같은 사람을 찾아낼 줄은…….”

“…….”

“아니지. 어린애를 찾아서 제 입맛대로 키웠으니 성공할 수밖에 없나.”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말의 연속이었다. 사샤는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살짝 떨치고는 핸드폰 시계를 바라보았다. 카렐이 여기까지 오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사샤는 이제 정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잘 이해를 못 하겠어요. 내일 얘기해 주시면 안 돼요? 저는 내일도 학교에 오니까…… 지금은 카렐이 기다려요.”

“…….”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말하고 사샤는 어설프게 눈을 피했다.

“사샤 세드린.”

막 샌더의 곁을 지나칠 때 사샤는 그의 손에 어깨를 붙들렸다. 사샤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춘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그가 냉정한 얼굴로 물었다.

“넌 실패작이 안 될 자신 있어?”

* * *

카렐은 운전석에 앉은 채로 핸들에 올린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 초조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뚝 멈추더니 단단한 팔뚝 아래로 숨었다. 팔을 교차시켜 팔짱을 낀 카렐은 백미러를 통해 보이는 뒤쪽 골목을 응시했다.

시동을 끄지 않은 차의 조용한 소음, 비상등이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우고 있었다. 가끔 밤안개로 젖은 도로를 멀리서 스치는 차들의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카렐은 인영이 어둠 속에서 보일 때마다 사샤가 이제야 나오나 싶어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 사샤가 아니었다.

카렐이 도착한 지 15분이 지나도록 사샤는 학교 건물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잠깐의 기다림 정도는 얼마든지 설렘으로 채울 수 있었다. 기다렸다고 살짝 말을 흘리는 것만으로 아이는 죄책감 서린 얼굴을 하며 ‘어떻게 하면 화를 푸시겠어요?’ 하고 어떤 보상이라도 하려 들 테니까.

주의가 다소 산만한 사샤는 극장을 빠져나오다가 백스테이지의 공연 의상에 홀려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포커판에 놓고 간 1달러 지폐를 주워 올까 말까 고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고. 돌아오면 그런 일화를 들어주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다린 지 15분째에 사샤에게 걸었던 전화는 연결음이 세 번밖에 울리지 않은 순간에 끊겨 버렸다. 그건 전화가 누군가의 의지로 끊겼다는 소리였다.

카렐은 다시 차창 바깥의 전면 도로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녹색 눈이 차가웠다. 사샤는 모르지만 보통의 카렐은 이런 표정일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과거 그의 연인들은 카렐이 이 감정을 절제한 가면을 깨고 저에게 욕망을 드러내 주기를 열렬히 바랄 정도였다. 오죽하면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침대 위에서만 볼 수 있었다고 말한 누군가의 인터뷰가 두고두고 유명세를 탈 정도일까.

그러나 그런 카렐의 표정은 누군가를 앞에 두었을 때는 의식도 못 한 사이 온기를 담고 화사하게 밝아진다. 그건 현재의 카렐 그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골목 어디서건 어린 사샤가 모습을 드러낼 때에 카렐의 눈썹은 부드럽게 풀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담겼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사샤?’

카렐은 차창을 내렸다. 저 멀리서 금빛 조명이 쏟아져 나오는 극장 로비를 막 나서고 있는 호리호리하고 가는 실루엣이 보였다. 남자였고,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카렐은 차의 시동을 끄고 차 밖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언제나처럼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자신을 발견한 사샤가 한달음에 달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사샤의 걸음이 지나치게 느린 것이 신경 쓰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카렐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카렐.”

카렐이 그가 사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보다 그가 카렐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카렐은 이런 순간에 만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인연을 앞에 두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샌더.”

샌더가 카렐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가 느긋하게 걸어올 때까지도 카렐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의 뒤에 있는 로비에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샌더가 시야를 가리며 섰을 때에 겨우 시선을 그에게 옮겼다.

그런 카렐을 보고 샌더가 말했다.

“놀라지도 않네.”

“놀라야 하나.”

카렐은 주머니에 있던 손을 빼서 샌더와 짧게 악수했다. 악수에 응한 샌더는 혼자 큭큭대며 웃었다.

“옛 애인에게 악수라니. 비즈니스 파트너 같잖아.”

카렐은 이상하게 즐거워 보이는 샌더를 별 대꾸 없이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그대로 인사를 고하고 헤어질 적절한 틈을 주었는데도 샌더는 제 앞에 붙어 있었다.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는데.’

카렐은 샌더에 대한 인상을 조금 수정했다. 부정적인 쪽으로.

샌더는 카렐이 한때 사샤 세드린에게 미쳐서 검은 머리 남자들만을 파트너로 갈아치울 때 만났던 남자 중 하나로, 둘의 관계는 고작 세 달 지속된 것이 다였다. 그래도 대부분 데이트에서 끝났던 다른 이들과는 달리 애인 단계까지 접어든 이였기에 조금은 각별했다. 이름 정도는 아직 외우고 있을 만큼.

그가 발레 무용수였기에 카렐은 한때 샌더가 자신이 만난 이들 중 가장 사샤 세드린과 근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진실을 아는 누구든 모두 비웃겠지만…… 그가 사샤 세드린의 환생이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던 때도 있었다.

“왜 뉴욕에 왔는지 안 물어봐?”

카렐은 대답 없이 그저 고개를 느리게 저으며 모르겠다는 제스처만을 취했다. 그러고는 샌더의 등 뒤, 로비에 시선을 주었다. 명백히 기다리는 이가 있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좀처럼 제게 시선을 주지 않는 카렐을 보는 샌더의 표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카렐은 그런 샌더를 흘끔 내려다보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일자리가 있었나 보지.”

“…….”

“축하해. 뉴욕에서 일하고 싶어 했잖아.”

“그건 당신이 있기 때문이었어.”

카렐은 잠깐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쉬었다. 고작 3개월 만난 남자가 왜 자신을 위해 미래를 저당 잡힌 척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손을 들어 눈썹을 문지르던 카렐은 샌더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떠올렸다. 평범한 이별이었다. 카렐은 연인으로서 감정이 다했다고 솔직하게 고했고, 직후 샌더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 듯 보였다. 카렐이 관계를 끝내 버릴 때에는 대부분이 일방적인 선언 앞에서 비참함과 무력함을 느끼곤 했다. 그 감정을 이해 못 하는 바 아니었기에 카렐은 그를 모국으로 돌려보내 그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후원자 명분으로 마지막 배려를 다했다.

하지만 샌더가 반대로 그것 때문에 미련을 키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때에도 지금도, 카렐은 스스로가 헤어진 연인에 대한 적당한 예의를 지켰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 맞대면을 이어 나갈 이유를 찾지 못한 카렐이 입을 뗐다.

“가 봐도 될까. 만날 사람이 있어서.”

그리고 카렐은 대답은 중요치 않다는 듯이 그를 지나쳤다. 큰 보폭으로 고작 세 걸음 만에 성큼 멀어졌을 때 샌더가 다시 자신을 붙잡았다.

“누구. 사샤 세드린?”

일부러 높여 부른 샌더의 목소리에 카렐의 표정이 굳었다. 미심쩍은 기분과 동시에 불길한 느낌이 본능적으로 그를 감쌌다.

뒤를 돌자 샌더가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기대했던 재회가 허물어져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축하해. 이번 대용품은 순진하더라고.”

샌더가 억지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당신에게 무척 맹목적이던데. 조금 백치 같을 정도로…… 그래서 어린애를 골랐나 봐?”

“…….”

“근데 당신 그 짓 없이는 못 살잖아. 미성년자 때문에 죽을 맛이겠어? 아니, 욕구는 닮은 사람을 데리고 풀면 되니…….”

“샌더?”

카렐은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잘랐다. 고작 그것만으로 샌더가 아주 긴장한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불쌍한 인간.

카렐은 냉정하게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더 이상 적의를 느끼게 하지 마.”

“…….”

“선을 넘는다면, 각오해야 할 거야.”

그리고 카렐은 사샤가 있을 것이 분명한 극장 안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 * *

깜깜한 연습실 안에 멍하니 앉은 채로 사샤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 내가 버림받은 이유는 카렐의 상상 속에 있는 사샤 세드린과 점점 달라지기 때문이었다는 걸.’

샌더의 말이 수십, 수백 번 반복해서 귓가에 메아리쳤다. 눈이 어둠에 밝아질수록 제 얼굴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처음에는 빛이 없는 안이 무서워 불을 전부 켰지만 그러자 거울 속에 뚜렷하게 드러난 제 얼굴이 싫어서 다시 불을 꺼버렸다.

‘나도 우습지. 그 남자가 검은 머리를 가진 엇비슷한 외모의 남자만 집착적으로 만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를 거라고 자만했어.’

그건 사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렐의 검은 머리 남자 취향은 그저 단순한 선호도라고, 그리고 저 역시 검은 머리인 것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수많은 검은 머리 중, 저는 조금 특별한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수많은 아이 중 왜 자신을 골랐는지 알고 싶었다. 아마도 자신이 발레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혹은 제 존재 자체로 특별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진짜 이유는 사샤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사랑받는 당시에는 몰라. 카렐은 꽤 교활하거든. 자기가 질려서 상대를 버리는 거면서도 아름다운 이별로 착각하게 만들지.’

축축한 눈물이 사샤의 눈두덩을 뜨겁게 덥히며 흘러내렸다. 한 마디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카렐 역시 한때 사샤에게 충고하지 않았던가. 어른의 사랑은 교활하다고.

사샤는 떨리는 한숨을 쉬며 울음을 참았다.

‘불쌍한 사샤 세드린. 이건 조언이야. 너와 같은 일을 이미 겪어 본 사람의 조언.’

샌더는 사샤가 그 말을 부정하고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다는 것을 다 안다는 듯이 모든 희망을 차단해 버렸다.

‘네가 해야 할 일은 둘 중 하나야. 악착같이 사샤 세드린의 환생을 연기하거나 아니면 헤어질 때를 대비해서 제대로 한몫 챙기거나.’

‘개인적으로는…… 앞날을 생각하면서 현명하게 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 그가 마지막으로 던져 주는 건 그의 전 재산에 비하면 아주 푼돈이거든.’

‘그러니 죄책감도 갖지 마. 넌 미성년자니까 제대로 뜯어낼 수 있을걸.’

사샤는 손등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어느새 뺨을 타고 입술까지 흘러내린 눈물이 손등에 닿았다.

사샤는 간헐적으로 떨리는 어깨를 억지로 짓누르며 샌더 앞에서 바보 같은 질문밖에 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저주했다.

‘새, 샌더 씨는, 카렐과 자 봤어요?’

샌더는 그 말에 무척 즐거워하면서 ‘너 정말 애구나.’ 하고는 사샤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려 했다. 그 손이 싫어서 피하는데도 샌더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반대로 사샤는 그가 제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너한테 아직도 손을 안 댔단 말이야?’

‘…….’

‘카렐은 그 짓 없이는 못 살아. 성욕도 많고 정력도 대단하거든. 아, 어린애 앞에서 이런 말은 좀 그런가.’

한때 카렐의 연인이라는, 사샤가 바라마지 않는 지위까지 획득했던 사람의 증언이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사샤의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흐윽, 으읏…… 윽.”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사샤는 손을 뻗어 거울 속의 얼굴을 떨리는 손으로 짚어 보았다.

그는 자아가 생긴 시점부터 춤을 추는 인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발레가 없는 인생은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레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전드 ‘사샤 세드린’과의 비교 역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까지 사샤는 백이면 백, 저에게 레전드를 겹쳐 보는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원망했다. 언젠가는 훌륭하게 성장해서 그와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제2의 사샤 세드린이 아닌, 그 자체로 유일한 사샤 세드린이 되기를 바라며.

하지만 카렐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으으…… 읏, 흐어……엉…….”

이 얼굴도 싫고 이름도 싫다. 사샤는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흩어졌던 과거 기억들이 모두 모였다.

레전드 사샤 세드린처럼 춰야 한다고 강요했던 바딤이 생각났다. 실제로 바딤은 카렐은 물론 게오르크와도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제 앞에서는 후원자를 모른다고 발뺌을 했다. 카렐이 처음 연습실을 방문했을 때 저를 집어 일부러 춤을 보여준 것도, 올드 세드린에게 한참 못 미친다며 나무라던 것도 모두 이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도달해야 하는 키와 몸무게, 그리고 프린시펄이 되는 트랙까지 모두 지정해 주었던 카렐의 지시도 떠올랐다. 그는 심지어 ‘라 발스’도 사샤 세드린의 안무로 숙지하게 했었고, ‘사샤 세드린의 은퇴 비디오’를 주며 교본으로 삼으라고까지 말했다.

이렇게 분명한 정황을 깨닫지 못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사샤? 사샤!”

그 순간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서 사샤는 고개를 번쩍 들고 숨을 참았다. 복도를 텅텅 울리는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사샤?”

조금 떨어진 곳의 로커룸과 화장실, 개인 연습실을 차례대로 열어 보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얼어붙은 채로 코를 닦았다. 거울 속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한심하고 멍청하고 나약해 보였다. 본능적으로 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앞섰다.

어깨 부분의 레오타드를 당겨 눈물로 반질거리는 얼굴을 닦으면서 사샤는 카렐이 불이 꺼진 연습실을 그대로 지나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카렐의 걸음은 사샤가 있는 연습실 문 앞에 정확히 다가와 멈췄다.

“사샤.”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문고리가 돌아갔다.

열린 문틈으로 카렐의 시계를 찬 손목이 먼저 드러났다. 빈 연습실을 크게 둘러보던 카렐의 시선이 한 박자 늦게 사샤에게 닿았다. 문과 가까운 곳에 웅크려 앉은 채로 카렐을 올려다보고 있던 사샤는 흠칫 놀랐다.

“사샤. 여기 있었군요.”

카렐은 다정히 말하면서 사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샤는 자연스레 그 손을 잡으려다가 어떻게 손을 뻗어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려 머뭇거렸다.

이럴 때 사샤 세드린은 어떻게 했을까? 도움은 필요 없다고 도도하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성숙한 성격이라고 했으니 애초에 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 손을 잡을 때도 있었을 텐데 그때에는 어떤 식으로 뻗었을까…….

사샤가 그저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자 카렐이 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왔다. 카렐은 사샤를 부축해 일으키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손이 지나치게 다정하고 따뜻해서 제어할 수 없는 눈물이 또 흘러나왔다.

“누군가를 만났군요.”

“흐으으…….”

“너무 울면 지치게 돼요. 등에 업혀요.”

카렐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샤의 앞에 앉아 등을 보였다. 사샤는 부르르 떨면서 갈등했다. 그의 다정함에 그냥 속아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가 냉정해졌을 때를 버티기가 더 힘들 것 같았다.

카렐은 사샤가 제게 업히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다가 한참 후에 일어났다. 그러고는 움직이지 않는 사샤의 손을 잡아 쥐고 천천히 이끌었다.

두 사람은 함께 어두운 복도를 말없이 걸어 극장을 빠져나왔다. 쌀쌀해진 바람이 사샤의 어깨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차 앞에 다다르자 카렐은 언제나처럼 사샤를 조수석에 먼저 태우고 보닛 앞을 빙 돌아 운전석으로 왔다. 그러고는 몸을 숙여 직접 사샤의 안전벨트를 채워 주었다.

사샤는 침묵이 너무 길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많은 질문을 한 것 같은데 저는 바보처럼 우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카렐의 표정은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사샤는 카렐의 눈치를 봤다. 여기까지 자신을 데리러 온 카렐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혼자 연습실에 틀어박혀 있느라 귀중한 시간을 많이 빼앗았으니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는 사과해야 했다. 얼마나 정신이 빠져 있었으면 로커룸에 가방도 놓고 온 채였다.

‘다시 챙기러 가자고 하면 성가셔하시겠지.’

“사샤.”

예상치 못한 순간 카렐의 목소리가 들려와 사샤는 흠칫 놀라며 그를 돌아보았다.

“우리 약속한 것 있죠.”

사샤는 성대를 쥐어짜 내 대답했다. ‘네.’ 불분명한 발음이 신음처럼 입에서 새어 나왔다.

“내가 하는 말만 믿기로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망상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사샤는 얼마 전 호보켄 강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왠지 그때가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사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카렐은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사샤의 취침 시간을 더는 늦출 수 없던 탓이다.

사샤가 겨우 입을 연 것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 위에 누웠을 때였다. 카렐은 그 옛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사샤의 침대가 보이는 소파에 앉아 그가 잠들 때까지 그 앞을 지켜주었다. 다정하게도.

어둠 속에서 카렐의 녹색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사샤는 용기 내어 물었다.

할아버지 세드린이, 저랑 많이 닮았어요?

사샤는 자신이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물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전혀 다르다고 말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카렐은 자신이 고른 상대가 사샤 세드린과 달라질수록 흥미를 잃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반대로 닮았다고 대답하면 카렐이 저를 고른 이유를 긍정하게 되는 거나 다름없으니 그것도 싫었다.

사샤는 카렐이 침묵하는 동안 괜한 질문을 했다며 두려움에 떨었다. 어떤 답도 원하지 않는다면 질문한 자체가 멍청한 것이었다.

결국 카렐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사샤는 질문한 것을 후회하면서 눈을 질끈 감았다. 괴롭게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사샤를 똑바로 바라보는 카렐의 눈빛은 지나치게 진실해 보여서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걸 계속 보고 있자니 ‘사랑받을 때는 알 수 없다’는 샌더의 증언이 떠올랐다.

사샤는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이 감길 때에 다시 카렐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카렐이 천천히 다가왔다. 사샤 자신은 아직 깨어 있다고 착각했으나 이미 입을 벌린 채 정신없이 졸고 있는 모양새였다.

카렐은 잠에 푹 빠진 사샤의 곁에 다가갔다. 그러고는 한참 입을 벙긋거리고 새된 신음만 내던 사샤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만지고 귀 뒤로 넘겨주었다.

사샤는 자신이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음성은 없었다.

그건 사샤의 착각일 뿐이었다. 이번에는 사샤의 내면이 아닌, 샌더의 저주가 사샤의 입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레전드 세드린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면 금세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샤의 마음을 깊이 잠식했던 것이다.

카렐은 시트 위에 힘없이 던져진 작은 손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두 번째로 찾아온 함묵증이 또다시 자기 자신을 잃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기만을 바라면서, 카렐은 다문 턱을 세게 물었다.

그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사샤의 손등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 * *

감정이 마비될 만큼 충격적인 일을 겪어도 일상은 흘러간다.

사샤는 다음 날 아침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잠에서 깨어나 씻고, 아침을 먹고, 옷을 갈아입었다. 일상적인 동작들을 수행하는 부분마저 마비된 것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제 행동과 표정에 평소보다 훨씬 더 기민하게 반응하는 카렐이 걱정스러워서라도 더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있다는 확신에 가득 차 있던 얼마 전의 자신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거나 말하는 것이 무척 어렵게 느껴졌다.

“빠뜨린 것은 없어요?”

가방을 챙기러 온 사샤 대신 카렐이 먼저 가방을 손에 들며 말했다. 오늘 새벽부터 일정이 있었지만 어젯밤부터 갑자기 상태가 바뀐 사샤를 직접 배웅하기 위해 원래의 스케줄을 빼 놓은 참이었다.

사샤는 그를 올려다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카렐이 사샤의 손에 가방끈을 걸어 주었다. 사샤는 카렐이 자신을 제 손으로 가방마저 챙기지 못하는 어린애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봐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잘 다녀와요.”

문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탈 때까지 카렐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사샤는 용기 내어 저를 바라보는 카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자 카렐이 겨우 안심한 듯 웃었다.

그의 미소를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금 괜찮아져서 사샤는 평소처럼 학교까지 달렸다. 달릴 때마다 총총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사샤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아주 약간의 생기를 더했다.

사샤가 자신이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했던 것은 오후에 학교로 찾아온 상담의를 만났을 때였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거나 끄덕이기만 하는 사샤를 의아하게 여기며 더 긴 문장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대답을 유도했다.

“연말에 하는 시즌 공연에서 솔로 역을 맡았다며? 그게 어떤 캐릭터인지 설명해 줄 수 있니?”

그녀의 질문에 사샤는 입을 벙긋거렸다.

‘아름다운 황궁에 홀린 사람이에요. 거기서 열리는 무도회를 기다리면서 정체불명의 남자의 손에 이끌려 미친 듯이 달려가요. 한참 후에야 거긴 황궁도 아니고 무도회도 없다는 걸 깨달아요. 정신을 차리면 다리에는 잔가지에 긁힌 상처만 가득하고 발에는 풀물이 들어 있어요.’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매끄럽게 연결되는 문장을 말하려니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사샤는 의자에서 일어나 앞부분의 안무를 조금 재현했다.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동작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적당히 느낌은 보여줄 수 있었다.

사샤가 동작을 마치자 상담의는 짧게 손뼉을 치고 미소 지었다. 사샤는 예민하게 그 미소가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멋쩍은 기분에 다시 의자를 끌어와 앉자 그녀가 다정히 물었다. 

“사샤, 지금은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거니?”

“…….”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까?”

그녀의 물음에 사샤는 고민했다. 그건 자신이 결정 내린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고자 의도한 적도 없었다. 왜일까? 그건 사샤 스스로가 더 궁금했다.

아무런 반응 없이 그녀를 멀뚱히 보고만 있자 상담의는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은 잘 먹고 있는지, 최근에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같은 것을 체크했다. 영향을 끼칠 만한 사건에서 사샤는 ‘샌더’를 떠올렸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저녁 리허설이 되면 그와 다시 마주치게 된다. 그걸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를 만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연습에 가고 싶지 않았다. 사샤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변화였다. 언제나 기대감에 가득 차 준비하던 공연 연습 시간을 먼저 피하고 싶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사샤는 펜을 가지고 와서 대충 갈겨썼다.

[샌더라는사라미말,, 헷어요. 제가 가짜라구요.]

상담의는 그 메모를 주의 깊게 보더니 자기가 가져도 되냐고 물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담을 다 마치고 사샤는 작은 방에서 나왔다. 문을 닫고 두어 걸음을 내디뎠을 때, 복도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사샤는 그게 관리사감 줄리아라는 것을 알아챘다.

살짝 눈인사만 하고 뒤돌아 가던 길을 가려고 했는데 저를 발견한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줄리아가 자신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샤는 멀뚱히 선 채로 그녀를 기다렸다.

“사샤!”

그녀는 이마에서 약간의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샤는 줄리아가 조금 힘들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여기 오기 위해 4층을 단숨에 올라와서 그럴지도 모른다. 언제나 엷은 미소를 보이던 그녀는 평소와는 다르게 퍽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샤, 여기 있었구나.”

허리에 손을 짚은 그녀가 숨을 몰아쉬었다. 마침 방금 사샤가 빠져나온 방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뒷정리를 마친 상담의가 문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너한테 아직 연락 오지 않았니?”

사샤는 의아한 눈으로 줄리아를 응시했다. 주머니를 더듬거려 보니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핸드폰이 사라졌는데, 언제부터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부터 안 가지고 왔을 수도 있었고, 가방에 넣은 채로 로커를 닫아 버려서 그럴 수도 있었다.

“이런, 아직 모르는구나.”

“……?”

“너희 어머니가.”

“무슨 일이죠?”

줄리아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막 문을 잠그고 가까이 다가온 상담의가 물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샤와 곤란한 얼굴의 줄리아를 번갈아 보더니 줄리아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사샤와 조금 멀리 떨어진 창가까지 가서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그들의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표정은 무척 심각해 보였다. 두 어른이 마침 긴박하게 나눌 대화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른들은 항상 애보다 어른이 중요한가 봐.’

사샤는 시무룩해졌다. 저를 놔두고 비밀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여기 계속 서 있어야 하나?’

뒷짐 진 채로 가만히 등을 벽에 기댄 사샤는 그 사이에 자기가 핸드폰을 어디에다가 버리고 왔는지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뾰족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곧 머리가 멍해졌다. 사샤는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양쪽으로 천천히 흔들면서 창밖이나 바라보았다.

“사샤…… 오늘은.”

고개를 들었을 때, 사샤의 눈앞에는 줄리아뿐이었다. 사샤는 얼른 등을 세우면서 바로 섰다.

줄리아의 눈에 떠오른 복잡한 감정.

사샤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연민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왜 나를 이런 눈으로 볼까.

“오늘도 연습이 있니?”

아무래도 줄리아가 부자연스럽게 말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샤는 그녀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담의가 착잡한 표정으로 사샤에게 ‘다음에 보자’고 인사를 건넸다. 사샤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줄리아는 그런 사샤의 얼굴을 살피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1학년 내내 적응을 어려워하던 작은 소년 사샤는 2년 만에 키가 훌쩍 자랐다. 하지만 그 내면은 무른 과일처럼 허약하고 짓물러지기 쉽다는 것을, 이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약 한 시간 전 줄리아는 러시아로부터 걸려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사샤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비보.

몇 번 안 되는 상담을 할 때에 사샤는 가족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언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나마 아이가 입에 올리던 어머니는 학교의 주요 행사나 공연 이벤트에 찾아온 적이 없었다. 게다가 일전 딱 한 번 학교에 방문했던, 사샤와 꼭 닮은 눈물점을 가진 아버지는 사실 친인척도 아니라는 사실을 방금 안 참이다.

지금까지 줄리아는 학생의 가정형편은 사적인 영역이라고 치부하며 간섭하지 않으려 했었다. 특히 장학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학생 중에는 그런 아이들이 적지 않았고, 대부분이 부모가 뉴욕에 와서 체류하는 사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환경의 격차를 체감하지 않는 게 좋다고 믿는 줄리아는 그런 것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었다.

대신 소년의 인형처럼 예쁜 얼굴에 근심이 서릴 때마다 줄리아는 매번 어머니에게는 고민을 털어놓았는지 으레 물었다. 대가 없이 사랑받고, 또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특효약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건 아마도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통하는 방법이었을 테지만…….

“사샤.”

줄리아는 사샤에게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방금 전 저에게 말을 붙였던 사샤의 개인 상담의는 지금 사샤가 심리적인 부담으로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나쁜 소식을 갑자기 전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도.

그러고는 사샤의 다른 보호자와 통화해 보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떠났다.

학생들과 생활하며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시련이 닥치는 것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그녀는 ‘한번 안아 봐도 되겠니’라고 말하면서 팔을 벌렸다. 사샤는 순순히 다가와 줄리아에게 뺨을 기대고 폭 안겼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

“우리 사샤.”

사샤는 영문을 모른 채로 그녀의 품이 포근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줄리아가 사샤를 안은 채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더니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녀는 항상 따뜻한 태도로 사샤를 대했지만 어디까지나 공적인 거리감을 유지하던 사람이었다. 마치 제 어린 조카를 다루듯이 이런 식으로 대해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 좋아질 거야.”

줄리아가 사샤의 양팔을 토닥이며 그렇게 말하고는 떠났다. 사실 그 말은 잘 와 닿지 않았기에 사샤는 거짓말로라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서 복도 끝으로 다시 멀어지는 그녀가 제 눈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혹시 우는 걸까……. 사샤는 그 등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역시 고개를 끄덕여 줘야 했나? 그런 걱정도 조금 들었다.

사샤는 반대편 복도로 길게 돌아 빠져나왔다.

* * *

사샤는 그날의 일과를 전부 끝낸 후 트레이닝 센터에 처박혔다. 그러고는 저녁도 먹지 않고 저녁 연습이 시작하기 전까지 기계적으로 근육 운동을 했다. 가냘파 보이기만 하던 허벅지에도 제대로 근육이 잡혀 힘을 주어 무게를 올릴 때마다 선명한 근육이 드러났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던 사샤는 평소처럼 약을 먹고 느린 걸음으로 연습실로 향했다.

그리고 사샤는 연습실에 도착해서야 샌더가 오늘 연습을 빠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갑자기 급한 스케줄이 생겼다던데. 이유는 모르지 뭐.”

“샌더는 좋겠다. 불명의 이유로 연습을 빠질 수도 있고. 그럼 오늘은 주역 없이 리허설인가?”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그거잖아. 지금까지 한두 번 했나?”

단원들의 말을 들으면서 사샤는 묵묵히 슈즈를 신었다. 샌더가 연습 불참 사유로 댄 ‘불명의 이유’가 궁금했다. 생각하기 싫은 장면이라 떨쳐 내고 싶었지만, 자꾸만 카렐이 그를 만나는 장면이 상상되었다.

사샤의 머릿속은 금세 의심으로 가득 찼다.

카렐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던 이유도 올드 세드린 때문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내가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 별로 내키지 않아 보였던 건 그게 올드 세드린하고는 큰 관련이 없어서 그런지도 몰라.

사샤는 제 역할을 끝낸 후 조용히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1막과 2막 사이 30분가량 사샤의 출연이 없는 부분이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연습실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사샤는 핸드폰을 열어 ‘사샤 세드린’을 검색해 봤다. 순식간에 화면은 다양한 정보로 가득 찼다.

가장 먼저 뜨는 것은 무용수가 아니라 영화배우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생긴, 젊은 시절 사샤 세드린의 흑백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가만히 눈여겨보던 사샤는 그의 콩쿠르 수상 실적을 찾아보기 위해 헤맸다. 그러나 사샤의 검색 실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콩쿠르 외의 쓸데없는 정보는 넘쳐 났다.

사샤는 웹페이지에서 지금까지 모르던 사실을 몇 가지 찾아냈다.

첫째, 사샤 세드린은 결혼도 하지 않고 춤에 매진해 살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동성애자였고 평생을 함께한 파트너가 있었다. 둘째, 그 상대는 사샤 세드린의 사업적 파트너이자 후원자이기도 했으며…… 그다음 대목에서 사샤의 숨이 멈추었다.

이름은 카렐 클레멘츠.

카렐 클레멘츠, 사샤는 아주 익숙한 그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아는 이름이지만 모르는 남자의 것이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던 사샤는 다시 검색창을 켰다.

그러나 ‘카렐 클레멘츠’를 입력한 사샤는 직후 탄식했다. 언제나 반복하던 일인데도 검색하기 직전에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웹에는 백 년 전의 인물보다 훨씬 유명한 현재의 카렐만이 결과에 떴다. 사샤 세드린을 입력했을 때 아무것도 아닌 현재의 학생 사샤는 드러나지 않듯이.

그래도 한참을 헤맨 끝에 사샤는 오래전 죽은 남자의 조각 정보를 몇 가지 찾을 수 있었다. 

백 년 전의 카렐 클레멘츠 역시 금발이었다. 그는 군인이었고,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그의 생일은…… 현대의 카렐과 같았다. 놀랍게도.

사샤는 아주 약간의 희망을 걸고 다시 한 번 사샤 세드린을 검색했다.

[사샤 세드린. 무용수, 안무가.

출생 연월 1887년 9월 2일생.]

기대와 달리 올드 세드린과 저는 생일이 겹치지 않았다.

사샤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물론 이런 걸로 공통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카렐이 이걸 몰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온통 무기력해졌다.

올드 세드린과 자신 사이의 다른 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는 사이 사샤의 심장에는 형체 없는 멍이 생겼다.

나는 왜 9월에 태어나지 못했을까?

이 사람에게는 당연한 레전드의 자리인데, 나는 무용수가 되는 것조차 왜 이렇게 힘든 걸까. 고작 솔로 배역을 하나 땄다고 좋아하고…….

죽은 사람과 겨룬다는 것. 그건 처음부터 자신의 패배로 정해진 일이었다.

사샤의 마음은 상실감으로 깊이 젖어들었다.

* * *

극장의 아름다움은 해 진 후에 진가를 발한다. 청람색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사방에서 황금빛을 쏟아내는 극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게오르크가 극장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 크고 기다란 인영이 차로 다가왔다. 극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있었지만 실루엣만으로 그게 카렐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탁, 무거운 차문이 닫히는 순간 운전석에 앉아 있던 게오르크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카렐에게 물었다.

“오셨습니까.”

카렐은 대답 없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방금 샌더와 헤어진 참이었다.

사샤가 입을 열지 않아 둘 사이에 있던 일은 샌더에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저를 찾아온 카렐을 보고 벌떡 일어나며 일순 기대감에 어린 표정을 짓던 샌더, 그러나 그는 카렐의 방문 목적을 알아챈 뒤에는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샌더는 우습게도 운명적인 재회를 꿈꾸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제는 나도 프린시펄이야, 카렐.’

호소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카렐은 아연한 기분을 느꼈다. 일방의 질척한 미련. 그는 그런 식으로 카렐이 요구했던 기준을 충족하면 오래전 끝난 인연을 어떻게든 봉합할 수 있다고 믿은 듯했다.

한때 샌더에게 프린시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은 사실이었다. 제 연인이 레전드의 환생이라는 확신을 그런 식으로라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의 말을 사샤에게도 했었지.’

카렐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비틀린 욕망은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스스로 저지른 지난날의 과오는 자신이 아닌 사샤를 상처 입히는 방식으로 되돌아왔다.

카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상심한 샌더는 저주에 가까운 말을 쏟아냈다.

‘그래. 내가 다 말했어.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러시아인 발레 댄서라니, 끔찍할 정도로 뻔하잖아. 그럼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게 죽은 사람이라는 걸 끝까지 숨길 수 있을 줄 알았어? 난 당신 미래를 알아. 모두에게 버림받고 혼자서 늙어 가는 모습. 죽은 망령이나 끌어안고 있는 쓸쓸하고 외로운 모습 말야.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고, 변태적으로 육체를 착취하고, 결국에는 버렸지. 그 어린애한테도 똑같이 굴 거잖아.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접근한 것부터 결국 기만이잖아!’

차라리 완전히 양심이 없다면 조금 나았을까.

어린 사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이상, 첫 시작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카렐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것을 샌더에게 지적당했다는 점이 어이없기는 했지만…….

‘샌더, 너도 날 사랑해서 돌아온 건 아니잖아.’

카렐은 체념하듯 말했다.

이미 떠나간 인연에게 비수를 꽂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피차 밑바닥을 아는 사이에 다시 제 눈앞에 돌아온 이유를 사랑으로 포장하는 그가 가증스러웠다.

‘돈이 부족했어? 날 이용하지 못한 게 아쉬웠나? 제대로 한몫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게?’

‘개자식…….’

샌더와 만날 당시 카렐은 파파라치에 극심하게 시달렸다. 연인이었던 시절에도 샌더는 사랑에 눈이 먼 듯한 카렐을 이용해 기자들에게 기사를 넘기고 푼돈을 챙기고는 했다. 물론 샌더만 쓰레기여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었다. 카렐을 스쳐 간 대부분의 이들이 카렐의 자아가 그 안의 영혼보다는 지위와 재력에 있는 것처럼 굴었다. 카렐 자신조차도 제 자아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헛갈릴 정도로.

‘내가 당신에게 지키던 예의를 거두기를 바란다면, 어디 한번 계속해 봐. 한때 지원해 줬던 돈을 이런저런 명목을 붙여 수십 배의 위약금으로 되돌려받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내게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 없다는 사실은 당신도 잘 알고 있겠지. 내 말은…… 나는 돈 때문이 아니라, 그저 복수하기 위해서 당신의 기반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소리야.’

‘…….’

‘알아들었으면 당신 나라로 돌아가.’

‘…….’

‘그리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카렐은 조금 지친 기색으로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분노를 드러내는 건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화를 쏟아낼 때마다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들고는 하니까.

“샌더를 그대로 놔둬도 될까요.”

극장 안을 바라보는 게오르크가 무엇을 우려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샌더가 사샤와 다시 마주쳐서 쓸데없는 자극을 줄까 봐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카렐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샌더는 극장을 떠났어.”

게오르크가 뒤를 돌아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물었다.

“아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렇군요.”

“돌아온다면 그때는 항상 하던 방식대로 처리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주역은 또 공석인가요. 이번 시즌은 발레단에도 부침이 많군요.”

게오르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카렐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극장에 남은 일은 딱 한 가지 있네요.”

“음…….”

대답이 아닌 불분명한 음성을 흘리는 카렐을 돌아본 게오르크가 말했다.

“오늘 오전부터 일정을 계속 취소하는 바람에…… 이번 주 중 스케줄에 부하가 걸릴지 모릅니다. 미루시다가는, 러시아행도 무산될지도…….”

게오르크가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카렐의 눈치를 살피는 얼굴이었다.

“그렇겠지.”

카렐은 짧은 한숨과 함께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켰다. 미뤄서는 안 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샤를 데리고 올게.”

“기다리겠습니다.”

카렐은 사샤를 만나기 위해 다시 차를 빠져나갔다.

너른 계단 층계를 올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분수대를 지났다. 그러고는 오페라 극장 안의 로비를 지나쳐 관계자 외 출입금지의 백스테이지 통로로 걸어갔다. 어제 한 번 와 봤던 곳이라 그런지 길이 눈에 익었다.

가끔 스태프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카렐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위화감이 들 정도로 완벽한 정장 차림인 그를 흘끔댔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카렐은 그런 시선을 유유히 흘리며 발레 대연습실이 있는 층계를 눌렀다.

대부분의 인원이 연습실에 들어가 있을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는 무척 한산했다. 어제 사샤를 발견했던 작은 연습실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칠 때 마침 멀리서 희미한 피아노 반주 소리가 들렸다. 사샤가 좋아하는 음악이었다.

복도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았을 때였다.

카렐은 대연습실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 인영을 발견했다.

“……사샤?”

의아한 목소리로 부르자 웅크리고 있던 소년이 꿈지럭대며 고개를 들었다. 이 시점에 카렐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사샤의 눈에 놀란 빛이 어려 있었다.

“왜 밖에 나와 있죠? 안이 불편해요?”

“…….”

대답하지 않는 사샤를 보자 카렐의 심장이 지끈거렸다. 복도에 혼자 나와 오도카니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혹시 발레단 환경에 잘 섞이지 못하고 매일 이렇게 외로움을 삭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게다가 사샤의 눈가에는 붉은 기가 남아 있었다. 홀로 눈물을 삼킨 흔적이었다.

자신이 안긴 충격의 흔적이 역력히 남은 사샤에게, 한 가지 남은 나쁜 소식을 전해 주려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왜 이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나쁜 일만 연달아 일어나는 걸까.

어떤 말이든지 주저해 본 역사가 없는 카렐에게 이만큼이나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다는 건 무척 생경한 감각이었다.

카렐은 사샤를 깊은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겨우 입을 뗐다.

“말해 줄 게 있어서 왔어요.”

그때 사샤의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사샤! 어서 들어…….”

단원은 사샤의 앞에 서 있는 카렐을 보고 저도 모르게 말을 먹었고, 사샤는 곤란한 표정을 드러냈다.

“사샤가 지금 들어가야 합니까.”

“네. 저희는 리허설 중인데 곧 사샤의 차례가 와서요. 저기…… 사샤, 급한 일이야? 아버지셔? 아무튼…… 조금 기다리셔도 되나?”

“아버지……라니.”

“아…… 삼촌이신가요? 죄송합니다.”

대번에 사샤의 보호자 취급을 받게 된 카렐은 할 말을 잃고 사샤를 놔주었다. 사샤는 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카렐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사샤의 눈이 카렐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 끝나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카렐은 쓰게 웃으며 사샤를 놓아 주었다.

* * *

연습실로 돌아와 문을 닫자 밖에서 듣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큰 음악 소리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샤는 자연스럽게 그다음 장면을 위해 대기하는 군무 줄의 맨 앞으로 가서 섰다.

연습실 벽에 난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창을 통해 바깥이 보였다. 연습실보다 복도 쪽이 어두워 카렐의 표정이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문득 올 초에 카렐이 발레 스쿨 연습실에 찾아왔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바딤이 저를 지정해 해적 솔로를 시키기까지 했지만 자신은 제대로 된 춤을 보여 드리지 못했었다. 이번에는 달라 보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가능한 한 레전드를 흉내 내며 추는 게 이로울 것이라는 강박이 사샤의 정신을 압박했다. 심지어 ‘라 발스’는 사샤 세드린의 안무였다. 그의 숭배자라는 카렐은 사샤 세드린의 움직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제 차례가 다가오자 사샤는 왼 다리를 단단히 지탱한 뒤 오른발을 뒤로 보내고, 양팔을 살짝 앞쪽으로 펼친 우아한 준비 자세를 만들었다. 등과 어깨를 쫙 펴서 목선이 드러나도록 만든 포즈는 수천, 수만 번을 반복한 것인데도 카렐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떨렸다.

“사샤, 너…….”

사샤의 가까이에 앉아 있던 단원이 사샤의 덜덜 떠는 손가락을 보다가 흠칫하며 말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음 페이즈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중앙에 앉아 있던 디렉터의 손짓에 따라 사샤는 가볍고도 빠르게 군무의 줄을 리드하며 중앙으로 달려 나갔다. 허공을 부유하는 깃털처럼 나긋하게 움직이면서. 얼핏 보면 무척 가녀려 보이지만 사샤의 등은 레오타드의 천 겉으로 근육의 선명도가 그대로 드러나도록 제대로 모양이 잡혀 있었다.

그런 사샤를 바라보던 디렉터가 스태프들과 귀엣말을 나누었다.

‘내가 너무 떨어서 그런가 봐.’

디렉터에게 흘끔 시선을 준 사샤는 심호흡하며 다음 동작을 위해 동선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무척 벅찼다. 발끝 포인을 할 때마다 쥐가 날 것처럼 찌릿거려 종아리가 아팠고, 고질적인 허벅지의 안쪽 근육의 통증도 크게 다가왔다. 한창 키와 체중이 늘어날 때라 몸의 균형점이 계속 변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그동안에는 적당히 타고난 감으로 커버하던 것이 지나친 긴장감 속에서는 그것도 영 발휘되지 않았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켰다. 뻗은 팔이 아직도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난도가 높지 않은 군무였고 지금까지는 쉽게 해내던 것인데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호흡을 컨트롤하지 못해 흉곽이 크게 부풀어 있었다.

이러면 몸의 선이 예쁘게 되지 않는다. 사샤는 억지로 숨을 참으며 흉곽을 조였다.

‘사샤 세드린은 어떻게 했더라.’

느린 선율에 맞춰 천천히 한 바퀴를 프로미나드로 돌던 사샤는 연습실 바깥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던 카렐과 다시 한 번 눈이 마주쳤다. 사샤는 호흡도 잊은 채로 몸을 숙였다. 그를 의식하자 팔 하나도 제대로 뻗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지막 그랑 점프에서 사샤는 허벅지 안쪽과 허리를 둔중하게 강타하는 깊은 통증을 느꼈다. 제대로 착지하지 못한 발목이 휘청거리며 꺾였다. 사샤의 뒷줄 단원들은 모두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데 사샤만 가장 중요한 마지막 포즈를 하지 못했다.

“하아, 하아…….”

사샤는 패닉 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연습실 구석으로 향했다. 방금 전 비틀린 발목이 욱신거렸으나 군무의 마지막을 형편없이 장식해 버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해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또 망쳐 버렸어.’

그것도 카렐이 보는 앞에서.

“사샤 세드린?”

벽에 붙어 가던 사샤를 향해 디렉터가 손짓했다. 사샤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숨을 멈추지 말고 춤을 춰야죠.”

“…….”

“마지막에 밸런스를 잃은 건 지나치게 몸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알고 있는 이유였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안무를 잊었나요.”

사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팔 동작을 완전히 빠뜨렸죠. 무대 위에서는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좀 더 물 흐르듯이…… 써야 하는 근육만 쓰면서 몸에 힘을 빼고 추세요. 레전드 사샤 세드린처럼.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잖아요.”

귀에 가시처럼 박히는 레전드의 이름에 사샤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렉터가 빈정거리는 것 같다는 피해의식도 들었다.

패닉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사샤는 연습실 바깥의 카렐을 떠올렸다. 그가 저의 망친 군무를 보고 어떻게 평가할지가 두려웠다. 사샤 세드린을 재현하기는커녕, 꾸지람을 듣는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인 사샤를 빤히 바라보던 디렉터가 말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

“이만 가 봐요.”

디렉터의 목소리가 무척 차갑게 들렸다. 사샤는 자신이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극장을 떠나라는 소립니다.”

그건 ‘어서 가서 쉬라’는 말을 디렉터의 방식대로 한 것이었지만 사샤의 가슴에는 비수처럼 다가왔다. 원래도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사샤는 풀이 죽어서 다시 연습실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조금 열자, 시원한 복도 공기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샤는 문 바깥으로 나가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복도에는 희미한 피아노 반주만이 남았다.

“사샤.”

카렐이 다가오더니 사샤의 땀에 젖은 이마를 살살 넘겨주며 말했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사샤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관객으로서…… 계속 보고 싶을 만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사샤는 카렐이 저를 놀린다고 생각했다. 평소보다 훨씬 못 미친데다 마지막에는 안무를 날리기까지 했는데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곧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발레란 레전드 세드린과 저의 공통점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이런 어설픈 재연이라도 괜찮은 것인지, 사샤는 묻고 싶었다.

‘내 춤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샤 세드린의 것과 얼마나 닮았나요.’

카렐은 사샤가 로커룸에서 가방을 챙기기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텅 빈 복도를 걸어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의 출연자 전용 출입구와 이어진 문으로 향했다.

로비로 나가기 직전, 어둑한 복도의 끄트머리에서 카렐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작은 창으로 난 로비 바깥을 바라보더니 저를 따라오던 사샤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샤. 할 말이 있다고 했죠.”

사샤는 그를 따라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카렐은 운을 띄우고서도 한참 뜸을 들였다.

사샤는 카렐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로비와 연결된 작은 창을 등진 카렐의 얼굴에는 유화물감으로 투박하게 덧칠한 듯한 먹색 그림자가 졌다. 이마와 콧대, 턱 선 일부만이 반사된 빛으로 빛났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카렐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붉은 ‘EXIT’의 비상등 불빛이 경고처럼 깜빡이고 있었다.

“오늘…… 연락을 받기를.”

사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카렐이 울적해하고 있는지, 지쳤는지, 성가셔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잡힌 사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당신 어머니가 위독하세요. 사샤.”

그 말에 사샤의 검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오늘 낮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학교 측으로 연락이 왔다고 하더군요. 상담의가 그걸 듣고…… 당신에게 말하지 않는 게 좋을지 모른다고 말했어요. 받아들이기에 지금 힘들어 보인다고요.”

“아…….”

“하지만 결국에는 알아야 할 일이라 내가 말해 주러 온 겁니다.”

“어…… 어…….”

사샤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 안에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호흡이 신음 소리처럼 흘러나왔다.

“러시아로 갑시다.”

단호하게 말한 카렐이 비교적 빠르게 말을 이었다.

“좋은 때는 아니지요. 연습 때문에 바쁜 것도 알아요. 하지만 모든 게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후회하는 일이 생기는 건 당신도 원치 않을 겁니다. 그러니 함께 러시아로 가서 어머니 얼굴도 보고, 좋은 병원에 모시고, 그리고 다시 돌아와요. 병원비는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공연 전까지 충분히 시간이 있으니…….”

준비한 말과 대안을 모두 제시한 카렐은 가만히 사샤의 표정을 살폈다.

사샤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들어 눈가를 쓸어 보았지만 어제부터 흘린 눈물로 잔뜩 부은 눈에서 물기는 묻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위해 남은 눈물은 없는 것인가 싶어 사샤는 스스로에게 당황했다.

사실 슬프다기보다는 지친 기분이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왜 저에게만 힘든 일이 일어나는지, 운명의 불공정한 법칙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채였다. 낮에 자신을 찾아왔던 줄리아가 왜 저를 연민의 표정으로 보았었는지, 그 인과만 가까스로 이해했을 뿐이다.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카렐이 사샤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샌더는…… 샌더와도 만났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도 알아요.”

사샤는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당신에게 숨기고 있던 것들, 당신이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들…… 그런 게 존재했어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 주고 있으니 보상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교활한 인간이죠.”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샌더의 말이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지친 사샤의 눈가가 다시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검고 긴 속눈썹이 눈물에 엉겨 붙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멋대로 치부했어요. 오히려 당신과 나를 만나게 해 준 운명의 매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

“아마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나서부터.”

아…… 카렐.

사샤는 소리 없이 탄식했다.

“그 남자가 아닌, 당신이…… 당신만이 유일하다고 여기기 시작한 순간부터.”

사샤는 카렐을 힘없이 올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렸다. 빨간 비상등 불빛이 눈앞에서 덩어리지며 눈물과 함께 뭉그러졌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고백.

곧 카렐과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의 따뜻한 품에 안겨 얼마나 기대했던가.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며칠 전의 자신이라면 의심 없이 기뻐하며 그에게 안겼을지도 모른다. 같이 러시아에 가서 어머니를 뵙자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나 사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무언가가 왈칵 무너진 채였다. 둑이 터진 듯 그동안 모른 척하던 감정이 무서운 속도로 쓸려나왔다.

카렐, 제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어떻게 확신하세요?

내가 자라면서 당신의 기대를 배반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사샤?”

카렐이 대답 없는 사샤에게 성큼 다가왔다. 그 순간 작은 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불빛이 사샤의 뺨을 비추었다. 눈물로 젖은 뺨이 반짝이는 것을 본 카렐은 놀라면서 사샤의 얼굴을 큰 손으로 감쌌다.

“사샤…….”

카렐, 저는 생각할수록 비참해요.

서럽고 쓸쓸한 기분이 먼저 들어요. 내가 고집부릴 주제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서 더더욱…….

“내가 서둘렀군요.”

“……흐윽…….”

“사실 이 시점에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더 행복한 순간에, 서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때에…… 난 그때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는 카렐의 말을 들으며 사샤는 지난날을 떠올렸다.

1년에 카드를 딱 두 장 보내주었을 뿐인 자신의 후원자.

카렐이 첫 연습실 방문 때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척하는 바람에 먹은 음식을 모조리 토한 적도 있었다.

“……흐읏, 윽…… 으읏…….”

그에게 미움 받을까 봐 노심초사하고 사랑 받고 싶어 안간힘을 쓰던 자신이 불쌍했다.

카렐, 당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던 지난날의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그동안 제가 우습지 않으셨어요?

‘저를 이 상태로 판단하지 말아 주세요. 저는 아직 미완성이에요……. 지금보다 키가 더 크면, 그리고, 그리고 카렐의 이상형대로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 그때 평가해 주셔야 해요. 발레단에 입단해서…… 그렇게 해서 돈, 돈을 벌고 라테를 제 돈으로 사드릴 수 있게 되면요. 제 집에 카렐을 초대하고…… 같이 술을 마실 수 있게 되면…….’

카렐에게 애원했던 제 고백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샤는 수치심을 느꼈다. 그것도 추억이라고 수줍게 품었으나 이제는 모두 상처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그 노력은 모두 소용없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는데. 카렐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그런 것 따위가 아니었는데…….

카렐, 저는 그 애가 우습게 보여요.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레전드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하나요?

아니면 카렐의 말을 믿고 살면서, 샌더처럼 버려질 때를 기다려야 하나요.

사샤는 뭉친 혀가 입 안에서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새된 호흡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아…… 으, 아…….”

사샤는 갑갑한 마음에 스스로의 가슴을 쿵쿵, 쳐대고 있었다. 꽉 쥔 주먹을 카렐이 아프게 붙잡아 왔다. 그 손길에서 사샤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카렐의 진심이 느껴졌다. 아니, 진심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저 자신의 마음이었다.

“사샤, 사랑합니다. 진심이에요.”

그가 사랑한다는 ‘사샤’가 누구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의심이 균처럼 다친 마음에 스며들어 맹목적인 순정마저 더럽혔다.

“으으으…… 흐으, 으읏…… 아…….”

사샤는 단어가 되어 나오지 않는 혀에서 아프게 울음을 쏟아냈다. 카렐이 괴롭게 사샤를 내려다보다가 작은 소년을 부서질 듯이 끌어안았다.

* * *

레빈은 예상치 못한 때에 사샤에게서 짧은 메시지를 받았다.

[레빈 나억떻게 해야되?]

강의 중 도착한 뜻 모를 문자였다. 문자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사샤 역시 한창 학교 수업을 들을 시간이었다.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레빈은 불길한 기분에 휩싸였다. 최근에는 사샤가 공연이며 콩쿠르 준비로 바빠서 연락도 뜸해진 상태였다.

[무슨 일이니?]

[다 그만하고 로시아에 갈레...]

그 즉시 그녀는 우려하던 일이 터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레빈은 조용히 전공책을 덮고 가방을 챙기면서 교수가 보지 않는 사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언제나 레빈에게 장소를 지정하게 해 주던 사샤는 드물게 콜럼버스 서클 근처로 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사샤가 머무르고 있는 호텔과 학교 양쪽에서 모두 가까운 곳이었다. 머뭇거릴 틈도 없이 지하철 출입구로 내려가면서 레빈은 홀로 생각했다.

‘그래. 이 세상에 대가 없는 친절이란 없어.’

자신조차도 입막음을 조건으로 카렐의 비서에게서 등록금을 받지 않았나. 지금도 그게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래도록 레빈의 마음에 찜찜함을 남겼다. 모든 일이 돈으로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부도덕을 눈감고 있을지 모른다는 양심의 가책은.

그리고 그 차가운 인상의 상류층 남자가 사샤에게 소화 불가능할 만큼의 사치스러운 환경을 제공하는 것 역시 모종의 거래를 위해서였다면? 그리고 사샤가 자신이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면?

레빈이 지하철 역 바깥으로 나왔을 때, 사샤는 미리 약속한 곳에 나와 있었다. 후드를 뒤집어쓴 얼굴이 무척 수척해 보였고 또 초조해 보였다. 손에는 들린 가방도 없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샤가 레빈을 발견하고 겨우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조금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사샤. 오랜만이네.”

레빈은 평정을 가장하며 사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사샤를 한 번 꼭 안아 주었다. 사샤가 품 안에서 안심한 듯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샤. 어디 다쳤어? 절뚝거리는데…….”

“레, 레빈…… 나아 오래 애출하먼 거, 걱정해.”

사샤는 레빈의 말을 의도적으로 끊으며 말했다. 그 순간 레빈은 사샤의 발음이 지나치게 어눌하다고 생각했다. 영어가 서툰 것 이상으로 혀가 둔감한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왠지 학교에도 간 것 같지가 않았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레빈은 굳이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구나. 일단 어디 좀 앉을까. 조금 있다가 율리안도 올 테니까…….”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레빈에게 이끌려 갔다. 붐비는 카페 안에 자리를 잡자마자 율리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에 앉아 있는지 알려주는 통화 중에 율리안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도록 뛰어온 티가 역력했다. 그 역시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 곧바로 뛰쳐나왔다고 했다.

“사샤. 이것 좀 볼래.”

율리안은 테이블에 앉자마자 본인이 캡쳐해 둔 사진들을 넘기면서 모조리 보여주었다. 그걸 본 레빈의 눈이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자신이 상상하던 최악의 경우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샤는 의외로 침착했다.

“네 후원자 카렐 클레멘츠의 스캔들이야. 죄다 검은 머리, 검은 머리…… 그것도 무용수나 댄서들만 집착적으로 만났지. 이게 무슨 소린지 알겠지?”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매일 카렐을 검색해 대던 저조차 모르는 스캔들도 있다는 사실에만 조금 놀랐다. 율리안의 검색 실력은 매우 뛰어난 모양이었다.

“솔직히 난 원래부터 의심하고 있었어. 레빈이 그 남자 이름을 말해 주기 전까지는 정말로…… 어떤 관대한 노신사가 네 재능을 눈여겨보고 아낌없는 후원을 해 줄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어. 나조차도 나한테 이런 나이브한 면이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

“네가 겪었던 일, 우리한테 솔직히 말해 줄 수 있어?”

그때 사샤는 레빈이 제 표정을 살피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런 사실에 자신이 충격 받을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사샤가 입을 잘 열지 않자 율리안은 그동안의 제 추론을 늘어놓았다.

“잘 생각해 봤어. 네가 왜 그 집에 살게 됐을까. 그만한 재력이면 평범한 숙소를 찾아 줄 수도 있었고, 재조사가 끝난 뒤 기숙사에 돌아가게 해 줘도 됐잖아. 애초에 네가 길거리에 나앉게 된 것도 음모였을 가능성이 있어.”

“아, 아냐. 그건…….”

“그래도 전부 의심해 봐야 돼.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건 장학재단을 통한 정당한 후원이 아니라 스폰이나 마찬가지라고. 그리고 그 호텔…… 카렐 클레멘츠는 그 호텔을 난잡한 용도로 사용했다고 오만 가십지에서 다 떠들어대던데. 너를 거기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의도가 너무 더럽지 않아?”

“아니야. 카렐은 그거 다 오해라고…… 고소했다고 했어. 평범한 지, 집인데 기자가 이상하게 써서.”

사샤가 열심히 변호했지만 율리안과 레빈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그들은 놀만큼 놀아 보고 입에 기름칠을 한 재력가가 순진한 미성년자를 속여 먹었다고 믿는 눈치였다.

율리안이 제 앞에 놓인 음료를 들이켜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사샤의 앞으로 몸을 훅, 가까이 기울이고는 물었다.

“사샤. 솔직히 말해 봐. 후원자와 아무 일도 없었어?”

그 말에 사샤는 눈을 들어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카렐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 다른 이에게 말할 만큼 진짜 의미 있는 일이 있었는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추행당한 적 없어? 성적인 접촉이 있었느냐고.”

사샤는 추행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며 어눌하게 말했다.

“호, 호텔 방 안에 큰 거실이 있어. 거기 약간을 비워 놓고 발레 바를 가져다놨어. 난 그냥 연습하고…… 더우면 옷을 벗기도 해. 하지만 카렐은 옷을 벗지 않아.”

“…….”

“직접 마사지 해주신 적도 있어. 근육통이 있어서…….”

“…….”

“그게 전부야.”

“사샤. 내가 정답을 얘기해 줄게.”

자세를 고쳐 앉은 율리안이 짧은 한숨을 쉬고 이어 말했다.

“보통 사람은 그 정도 규모의 후원을 하지 않아. 또 상식인이라면 미성년자인 피후원자와 단둘이 살지 않아. 너는 추행이라고 생각하지 못하지만, 그러니까 네가 미성년자인 거야. 본인이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판단했다고 믿는 거라고.”

“…….”

“차라리 고발해. 내 말은, 경찰에 신고하라는 뜻이야. 물론 전과를 만들어 주자는 말은 아냐. 기업가들은 자기들 흠결을 틀어막으려고 엄청난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려서 고소 고발을 남발하는 걸로 유명하거든. 클레멘츠도 이런 걸로 커리어를 망칠 인간이 아니니 대신 합의금을 뜯어.”

“…….”

“내 생각엔 그 돈으로 콩쿠르 준비를 하는 게 정답이야.”

“…….”

“네 콩쿠르를 지원해 주는 것도 학교가 아니라 그 남자 맞지?”

고개를 숙인 사샤가 대답하지 않자 레빈이 작게 물었다. ‘사샤?’

사샤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난 그렇게 못 해.”

“사샤.”

“안 할 거야…….”

율리안과 레빈은 테이블에 올려둔 사샤의 한쪽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보고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카렐을 이용할 수가 있어? 나에게 주기만 한 분인데.”

“그 반대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그 남자가 널 이용하고 기만한 거야.”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고개 숙인 사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광목천을 덮은 테이블 위가 점점이 눈물로 물들어 갔다.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

“…….”

“날 그만 이용하고 싶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돼?”

사샤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율리안과 레빈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방향으로 튀는 사샤의 말을 아연한 얼굴로 들었다. 아마도 사샤는 어른의 연애 놀이에 진심으로 마음을 줘 버린 모양이었다.

“사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용해 주기를 원하다니!”

두 사람이 캐물으니 사샤는 정작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침묵이 한참 이어진 사이, 레빈은 사샤의 문자를 떠올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러시아는 왜 가고 싶어?”

“엄마가 많이 아파.”

사샤가 눈가를 손등으로 슥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엄마는 원, 원래부터 아팠는데 병원을 안 갔어. 내가 그렇게 가라고 했는데……. 돈을 보내줘도 전부 빚 갚는 데만 써버리고. 그렇게 바보같이 병을 키웠어. 이번에 러시아에 가는 비행기 값도, 좋은 병원에 데려갈 돈도 카렐이 준다고 했어.”

“…….”

“난 그 돈이 필요해…….”

“……이런, 사샤.”

레빈은 한숨을 쉬면서 일어나 사샤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사샤를 꼭 안아 주었다. 

사샤는 그 품에 안겨 멍하니 생각했다.

“러시아에 갈래. 가서…… 엄마를 만나고.”

“응.”

사샤가 떨리는 숨과 함께 충동적으로 진심을 내뱉었다.

“돌아오고 싶지 않아.”

* * *

출국일을 하루 앞두고 게오르크가 호텔로 찾아왔다. 러시아에서 뉴욕으로 올 때 들고 온 낡은 캐리어에 옷가지와 짐을 넣고 있던 사샤는, 그들의 분위기로 게오르크가 카렐에게 곤란한 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일 저녁에 떠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출국을 미루는 건 안 되겠죠.”

“언제쯤?”

“2주 후…… 정도로.”

“……너무 늦어. 공연이 시작해 버리잖아. 사샤는 그 전에 돌아와야 해.”

두 사람은 거실에서 짐을 싸고 있는 사샤를 보면서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거실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사샤가 축음기로 음악을 튼 것 같았다.

먼저 서재로 들어온 게오르크가 물었다.

“사샤는 괜찮은 건가요.”

“괜찮아져야겠지.”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게 현재 사샤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말하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게오르크가 다시 물었다.

“그럼 일단 먼저 보내고 뒤따라가시는 건…….”

“같이 가기로 사샤와 약속했어.”

그러나 카렐은 게오르크가 내민 일정을 보면서 도저히 내일 출국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는 동의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일주일 후 출국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카렐은 탐탁지 않았으나 그것이 최선이었다.

게오르크는 그 사실을 사샤에게 전달하는 어려운 일은 카렐의 몫으로 맡긴 후 호텔을 떠났다.

“사샤?”

게오르크를 배웅하고 온 카렐이 거실 소파에 웅크려 누워 있던 사샤에게 다가갔다. 사샤는 제 몸보다 훨씬 큰 후드티를 입은 채로 옷에 파묻히듯 누워 있었다. 카렐은 사샤의 가는 발목에 감긴 붕대를 착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전 공연 리허설에서 발목을 다쳐 인대가 늘어난 흔적이었다.

카렐이 사샤의 퉁퉁 부은 발목을 직접 보기 전까지, 사샤는 다친 것을 티 내지도 않았고,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게 공연을 하고 싶다는 고집인지 아니면 정신의 문제인지 카렐은 분간할 수 없었다.

사샤가 누운 소파 곁에는 싸다 만 짐이 잔뜩 널려 있었다. 대부분이 옷가지였고 사이사이 충전기 선 같은 것도 눈에 띄었다.

카렐은 사샤의 머리맡에 조심스레 앉은 뒤 물었다.

“새 캐리어는 진짜 필요 없어요?”

“…….”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사샤가 러시아에서 올 때 들고 온 캐리어는 무척 낡은 데다가 한 귀퉁이가 깨져 금이 가 있는 부분도 있어 카렐의 눈에는 영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사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카렐은 그 깨진 부분에 여러 번 테이프를 감아 단단히 고정하는 식으로 제 배려를 전했다.

“조금 어려운 부탁인데.”

그렇게 말하고 카렐은 소파 아래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사샤의 얼굴을 보았다. 옆으로 누워 있던 사샤와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출국을 조금 미뤄도 괜찮을까요.”

사샤의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카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을 바닥에 대고 눕느라 바닥에 밀린 뺨마저 사랑스러웠다. 아직 조금 남아 있는 젖살이 귀엽고 안타까웠다.

“일주일만…….”

면목이 없어 카렐은 제 미간을 엄지로 한 번 슬쩍 매만졌다.

사샤의 눈이 옆으로 한 번 굴러가더니 다시 카렐을 향했다. 그러고는 움직였을까 싶을 정도로 아주 살짝, 위아래로 끄덕였다.

“바빠서 미안합니다. 항상 곁에 있어 주고 싶은데.”

“…….”

“떠날 땐 전용기를 타게 될 거예요. 처음 타 보는 거죠? 기대해도 좋아요.”

카렐을 바라보던 사샤가 한 박자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은 내일도 바쁜 하루라 늦게 돌아오게 될 것 같다며 먼저 사과했다.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 보이는 사샤의 이마에 미리 굿나잇 키스를 해 준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다음 날, 사샤는 평소와 같이 학교에 갔다. 카렐 대신 들른 게오르크의 배웅을 받으며 학교로 떠난 사샤는 모닝 클래스만 듣고는 종적을 감췄다.

“사샤가 계속 안 보이네. 어디가 아프다고 했니? 혹시 알고 있는 사람?”

오후 클래스의 발레 미스트리스인 올가의 질문에 학생들은 그저 침묵하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올가의 시선이 학생들을 찬찬히 훑었다. 한때 사샤에게 찰싹 붙어 다니던 마누엘마저 올가의 시선을 피했다.

“사샤와 친한 사람 누구 없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사샤를 만나면 함부로 결석하면 안 된다고 말해 주렴. 그리고 왜 빠진 건지 나중에라도 와서 내게 설명하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오늘의 클래스를 시작해 볼까요.”

그 시각, 사샤는 혼자서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샤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라 발스를 처음 들을 때부터 사샤는 생각했다. 저를 이끄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채로 손목을 붙잡혀 정신없이 끌려가는 기분이라고.

자신을 인도하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악인인지 아닌지 구분하지 못한 채로 불안하다는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이미 영혼은 그가 주는 달콤한 환상에 중독된 채다.

그렇게 휘청이는 왈츠를 추면서…….

사샤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그 음악이 제 인생 같다고 말했던 것은 예언이 되어 버린 셈이다. 자신은 카렐의 손에 이끌려 혼자만의 불안한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도 모르고, 그 끝에 준비된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사샤는 가방 속 주머니에 들어 있는 현금과 카렐이 준 카드를 떠올렸다. 돈이 있는 부분을 저도 모르게 꽉 쥐어 보게 된다. 율리안이 빌려 준 현금과, 학교에서 지원받는 슈즈 구입비를 틈틈이 모아 둔 돈은 러시아로 가는 편도 티켓을 사고 어머니의 입원비를 얼마 정도 치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돌아오는 티켓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니까.

그토록 고대하던 연말 공연을 2주 남겨 둔 시점, 사샤는 그렇게 모든 것으로부터 도피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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