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의 예감
사샤가 가까이서 지켜본 발레단의 일상이란 생각보다도 더 혹독한 것이었다.
사샤는 지금까지 자신이 발레단 내부의 경쟁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발레단을 빼닮은 작은 사회인 학교 안에서도 누군가는 질투에 눈이 멀어, 또 누군가는 자신의 앞날이 막힐까 봐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도 했으니까. 그 피해자인 옥사나는 현재 고향에서 재활 치료 중으로, 아직도 학교로 돌아오지 못했다. 마누엘 역시 자신이 피해를 입을까 봐 제 잘못을 축소하고 사샤에게 떠넘긴 적이 있다.
그래도 사샤는 결국에는 모두가 진실을 알게 되고, 진짜 피해자와 가해자가 가려질 거라고 믿었다. 마누엘의 양심이 그에게 뒤늦게 사실의 전말을 고백하게 만들고, 학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샤의 공연 데뷔를 푸시해 주게 되었듯이.
그러나 발레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사샤의 그런 믿음이 어린아이의 순진함일 뿐이라고 비웃는 듯했다.
어느 날부터 이 공연의 주역으로 내정되어 있던 수석 무용수이자 간판스타 딜런이 하루아침에 캐스팅 라인업에서 밀려났다.
“수석은 어디가 아픈가 봐요.”
연습실에 나오지 않는 주역을 두고 사샤는 그렇게 추측하며 말했다. 반대편에서 바를 잡고 몸을 풀고 있는 군무 단원은 사샤의 말을 분명히 들었으면서도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샤는 조금 멋쩍어하면서도 저 역시 바 스트레칭을 하며 근육을 푸는 데 집중했다. 갑작스러운 통증이나 부상은 사샤 역시 조심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연습이 시작되고 나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다쳤고, 또 피로 골절에 시달렸다. 토슈즈를 신어야 하는 여성 댄서들은 진통제를 먹어 가며 연습에 매진했다.
그것을 생각하던 사샤의 얼굴에는 우울함이 깃들었다. 일주일 전 연습을 그만둔 알리샤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물두 살인 그녀는 입단한 지 3년 차의 군무 단원이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사샤에게도 친절해서 사샤는 짧은 시간 안에 그녀에게 정을 붙였었다.
그러나 알리샤는 계획에 없던 임신 때문에 이 공연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사샤는 지금으로부터 딱 일주일 전, 알리샤를 우연히 목격했다. 그때 알리샤는 자신을 공연에서 뺀 것을 취소해 달라며 디렉터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임신 초기이며, 공연 때까지는 배도 부르지 않을 테니 재고를 부탁한다며 마지막에 눈물까지 보였다. 그러나 디렉터는 무심한 얼굴로 ‘네 몸매가 달라진 걸 누구나 알아’라고 툭 던지고는 더는 상대하지 않고 떠나갔다.
사샤는 마치 자신이 당한 일처럼 놀라서 숨죽인 채로 디렉터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알리샤를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혼자 울고 있는 그녀에게 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뒤로 알리샤는 연습실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사샤는 왜 댄서들이 연습할 때마저 진통제를 먹어 가며 아픔을 참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디렉터가 습관적으로 다치거나 통증을 호소하는 댄서들에게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나 그게 언제든지 누군가로 채우고 뺄 수 있는 군무 단원들이라면 더더욱.
연습실을 꽉 채운 이들 중에서 고작 3분의 1이 정단원이었고, 나머지는 매년 계약을 갱신하는 준단원들이었다. 이 발레단에서 준단원으로 5년을 채웠다는 네이슨은 올해까지만 오디션을 볼 예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정단원이 되지 못하면 여길 떠나 다른 발레단의 오디션을 치르러 간다고 말했다. 주변에서는 그의 피부색이 검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라고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했다. 그 순간 사샤는 어설픈 영어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저에게 대꾸도 하지 않던 다른 아이들을 떠올렸다. 네이슨이 겪는 일이 마치 자기 일 같아서 그를 바라보는 디렉터의 차가운 눈을 볼 때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손끝을 떨곤 했다.
디렉터는 댄서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눈을 숨기지 않았다. 향후 10년 내 프린시펄이 될 수 있는 이들은 고작해야 서너 명 정도라고 했다. 그마저도 현재 프린시펄의 은퇴가 늦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사샤는 카렐이 지정했던 기한, 스물두 살이 왜 중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됐다. 그 말은 디렉터나 예술 감독, 발레단 내의 영향력이 큰 이들의 눈에 들어 승진 라인을 탈 수 있는지 아닌지, 그때쯤이면 판단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은퇴는 빠르고, 성공 가능성이 점쳐지는 건 그보다 더 빠르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현재 사샤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그 평가가 ‘발레 실력’만으로 줄 세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실력으로 평가한다면 알리샤는 남아 있어야 맞고, 네이슨은 벌써 정단원이 되어도 모자랐다.
“부상 따위가 아니야.”
맥락 없는 말에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수석 말이야. 그 사람 추종자가 많았거든.”
“추종자요?”
생경한 단어에 귀를 기울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부에서 파벌이 생기니까 예술 감독이 크게 견제했대. 임원들보다 그 사람 영향력이 커졌으니까……. 발언권이 자꾸 커지니 본보기로 주의를 한번 준 거지. 인기만으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또 캐스팅 권한은 어디까지나 발레단이 가지고 있다고.”
사샤는 금세 혼란에 빠졌다.
“그럼 누가 잘못한 거예요?”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냥 힘의 논리야.”
자신에게 은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 예술 감독을 떠올린 사샤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여기에 선악은 없고, 그저 힘의 줄다리기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기에 아직 사샤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지나치게 많았다.
“아무튼 우리한테는 잘된 거지. 프로모션(승급) 기회가 하나 생겼잖아? 솔로이스트들 중에 뽑을 가능성도 있지만, 누가 알겠어. 우리 중에 신데렐라가 탄생할지.”
군무 단원은 그 기회가 자기 몫이 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흥분을 내비쳤다. 그러나 애초에 그 자리가 자신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샤는 그저 아쉬워했다. 다시 딜런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이 오페라 안의 연습실에서 가끔씩 동경하던 수석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사샤의 작은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는 사람의 쓸모를 평가하는 데 발레 외의 다른 기준들이 복잡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사샤는 그것을 자신이 가진 이해의 폭으로 다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두렵다고 생각했다.
“사샤 세드린.”
바 워크를 마치고 센터를 준비하기 위해 잠시 어수선해진 연습실 안에서 디렉터가 사샤를 불렀다. 까딱, 손을 한 번 접는 오만한 손짓에 사샤는 긴장한 등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조금 떨리는 손끝을 숨기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 당신이 맡은 군무들, 그리고 숙지한 것들이 뭐가 있죠?”
사샤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대답했다.
“1막 삼인방의 춤, 그리고…… 광장에서의 군무, 축제신, 아, 축제신은 2막이에요. 그리고 스페인 춤도 이…… 있습니다.”
“맡은 것 외의 춤은?”
사샤는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는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
“……전부 다 외우고 있습니다.”
디렉터는 가볍게 턱을 만지작거렸다.
“숙지가 빠르군요.”
“감사합니다.”
“그럼 혹시 솔로 베리에이션도 출 수 있을까요?”
“네?”
사샤는 크게 놀라며 되물었다.
솔로 베리에이션은 적어도 정단원의 솔로이스트들부터 소화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마저도 솔로이스트 전부가 출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보통은 퍼스트 솔로이스트들이나 특정 캐릭터에 특화되어 숙련도가 높은 이들이 주로 맡는 것이었다.
“갑작스럽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인원 구성이 많이 바뀌고 있어서 여러모로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어요. 누군가는 비어 있는 프린시펄 자리를 채워야 하고, 그러면 그 빈자리를 또 채워야 하고……. 간단한 얘기죠. 이해되죠?”
사샤는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것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대답을 하려니 입술마저 떨려 와서 사샤는 입술에 새빨갛게 피가 돌도록 세게 깨물었다.
“할 수 있어요. 시켜만 주시면요. 저는 할 수 있을 거예요.”
* * *
사샤는 넋을 빼놓은 채로 터덜터덜 걸어 로비를 빠져나왔다. 밤늦게까지 리허설을 하게 되면서 최근 매일 맞닥뜨리게 되는 밤의 분수대가 검푸른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상쾌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사샤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사샤의 머릿속에는 첫 연습일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눈에 띄었는지, 얼마나 차이 나게 잘했는지 타인의 눈으로 목격하고 싶었다. 디렉터가 자신을 눈여겨보던 순간을 확신하고 싶었다.
‘난 처음부터 잘했어. 처음부터 그 사람이 나를 손으로 가리켰잖아.’
사샤는 분수대 앞에 가까이 섰다. 만족스러운 기분에 도취되어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했던 도전에서 상상만 하던 성취를 이뤄낸 기분이 무척 좋았다. 분수대의 물이 바람줄기에 따라 흔들렸다. 물줄기를 올려다보는 사샤의 뺨에 미세한 물방울들이 달라와 붙었다.
‘빨리 카렐에게도 말해 주고 싶어.’
카렐은 3일 전부터 유럽으로 출장을 간 상태였다. 전화나 메시지를 보내도 됐지만 사샤는 그에게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저를 자랑스러워하는 카렐의 눈, 미소 지으며 휘어지는 눈초리를 보고 싶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기분이 더 좋겠지.
지이이잉, 지이이잉.
“아…….”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퍼뜩 놀란 사샤는 얼른 손을 가져갔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전화를 걸어온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율리안?”
* * *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율리안은 콜럼버스 서클 근처의 로즈홀에서 사샤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로즈홀은 링컨 센터의 부속 건물 중 하나로 사샤가 알기로는 재즈 클럽이 있는 곳이었다. 분수대 광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 금세 뛰어갈 수 있었다.
“율리안?”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사샤는 길쭉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율리안은 가볍게 인사하면서 표면에 차가운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컵 하나를 내밀었다. 로즈홀 바로 옆에 있는 커피숍에서 사온 것 같았다.
“와…… 고마워.”
사소한 배려에 감동 받은 사샤가 차가운 음료를 쭉 빨아들였다. 그러나 시럽도 넣지 않고 우유의 고소한 맛도 없는 음료에 ‘엑’ 하고 저절로 혀가 나왔다. 저도 모르게 굳은 눈초리로 율리안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는 ‘왜?’ 하며 사샤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 모습마저 조금 얄미웠다.
한숨을 폭 쉰 사샤가 말을 돌렸다.
“갑자기 왜 전화했어? 여기서 재즈 공연 봐?”
“혼자서 그런 거 봐서 뭐해?”
“음악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어.”
사샤의 대답에 율리안은 입꼬리를 한쪽만 비죽 올리며 말했다.
“공연 리허설이 있었어. 그리고 레빈이 이 시간이면 네 연습이 끝난다고 하더라고.”
“응…… 맞아. 날 보러 온 거야?”
사샤는 조금 수줍어하면서 그렇게 물었다. 율리안이 굳이 자신을 만나러 왔다는 사실이 의아하면서도 좋아서, 커피에 대한 악감정이 금세 풀어졌다.
사실 율리안과 이렇게 둘만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전무하다고 볼 수 있었다. 레빈과는 종종 연락하지만 율리안은 아니었고, 어떻게 보면 레빈의 친절한 룸메이트들보다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샤의 입장에서 율리안은 레빈에게 붙은 원 플러스 원의 덤이었던 것이다. 특히 율리안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은 체계 없이 사는 사샤와는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때로 사샤는 자신이 율리안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것에 대해서 그가 고마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동갑내기였다면 사샤는 율리안에게 매번 대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남몰래 마음속으로 율리안과 기싸움을 하고 있는 자신과 달리 율리안은 그런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런 부분까지도 사샤와 안 맞는 부분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을 찾아와 준 건 기뻤다. 사샤는 무심코 손에 들린 플라스틱 컵을 흔들었다. 얼음 조각이 컵의 표면에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집까지 천천히 걸어갈까?”
율리안의 제안에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로즈홀을 나섰다. 콜럼버스 서클을 지나서 센트럴 파크를 따라 걷다 보면 금세 호텔 건물이 나온다.
횡단보도를 기다리는 사이에 율리안이 물었다.
“홈페이지에서 찾아봤는데, 겨울 시즌에도 공연이 이것저것 있더라고. 호두까기 인형은 당연히 있고, 현대무용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는데…… 너는 어떤 공연에 들어가는 거야?”
“응, 나는…… 라 발스.”
“아, 그게 발레곡으로도 있어?”
당연히 발레곡으로만 알았던 사샤는 율리안을 올려다보면서 ‘그럼?’ 하고 물었다.
“그건 클래식이잖아.”
“그래, 라 발스도 클래식 발레야.”
“그 음악에 춤을 출 수 있나.”
율리안이 혼잣말을 하는 순간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다. 사샤는 한쪽 다리를 뻗어 디디면서 가볍게 점프했다. 흰색 선만 밟으며 샤세를 뛰었다.
솔로 역이 하나 주어진다고 생각하니 다시 심장이 요동쳤다. 솔로 안무의 본격적인 리허설은 다음 주부터 한다고 했지만 사샤는 여러 번 보고 눈으로 카피한 그 안무를 이미 외우고 있었다.
주머니에 한쪽 손을 찔러 넣은 사샤는 바닥을 보면서 스텝을 떠올렸다. 발끝으로 바닥을 쓸고 뒤꿈치를 밀면서 부드러운 글리사드 동작을 했다. 매끄럽게 바닥을 스치는 발레 슈즈와 달리 운동화 밑창이 보도블록에 갈리며 즈즈즛, 하는 소리가 났다.
율리안은 정상적으로 걷지 않고 제 곁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는 사샤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이런 산만한 어린애를 도대체 누가, 왜…….’
지난번 만남 이후로 율리안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바로 사샤에게 붙은 후원자의 존재.
단순히 ‘부의 재분배’라기에 사샤는 후원자와 사적으로 깊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게 확실한 레빈에게 몇 번 추궁했으나 그녀는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물기만 했다.
그 때문에 이렇게 혼자 사샤를 찾아온 것이다.
‘왜 진즉 눈치채지 못했을까.’
사샤가 뉴욕에 막 왔던 작년, 통 대화할 사람이 없던 사샤의 영어는 서툴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올 한해 사샤는 영어 말하기가 크게 능숙해졌다.
실은 오래전에 율리안도 사샤의 튜터 역을 자청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샤는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말도 늘지 않는다. 사샤의 영어가 내내 서툴렀던 이유는 그 문제가 9할이었다고, 율리안은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제는 사샤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고, 상대는 꾸준히 대화에 응해 주었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빨리 말이 느는 방법이 원어민 애인을 사귀는 것 외에 또 있나.’
그리고 율리안의 시선은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지 않은 사샤의 티셔츠와 운동화에 향했다.
‘10대한테 이런 옷은 사치라고…….’
사샤가 걸치고 있는 것은 티셔츠 한 벌에 1,000달러가 넘는 명품 브랜드의 옷이었다. 율리안은 사샤가 그 옷의 가격을 모르리라는 것을 장담했다. 가격을 알았다면 사샤는 그 옷을 일찌감치 중고 매물로 팔아 버렸을 것이다. 그러고는 고향의 어머니에게 송금했겠지.
“사샤.”
“응?”
사샤가 전혀 양이 줄어들지 않은 얼음컵을 손에 든 채로 고개를 들었다.
“언제 한번 이사 간 집에 초대해 주겠다고 했잖아. 언제 구경시켜 줄 거야?”
“앗…….”
“저번에 레빈만 불렀다며? 아무리 내가 껄끄러워도 그러기 있어?”
“미, 미안해.”
율리안의 질문에 사샤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친밀감만큼 반응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였다.
“집이 여기서 멀지 않지?”
율리안이 팔짱을 낀 채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사샤는 어리둥절해하면서 율리안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해했다.
“잠깐 들렀다 가도 돼?”
“그건…….”
사샤는 일전에 레빈이 방문했던 때를 떠올렸다.
카렐은 친구라면 누구든 데려와도 좋다고 했지만 진짜로 데려왔을 때는 차갑게 굳어 화를 냈다. 물론 저에게 화를 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레빈은 당황스럽고 놀랐을 것이다.
사샤는 율리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때는 카렐이 얄미운 율리안을 엄격히 혼내 주는 모습을 상상한 적도 있지만, 누군가가 진짜로 마음 불편해지는 상황은 원치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 사샤가 어설픈 거짓말을 내뱉었다.
“보, 보안 요원이 있어서 허락해 줄지 모르겠어.”
“그래?”
슬슬 걸어오던 두 사람은 어느새 호텔 근처까지 와 있었다. 사샤는 호텔 건물을 슥 바라보았다. 이 주변을 빙빙 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런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사샤는 자신 없는 기분으로 율리안과 함께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보 정도 앞선 사샤의 뒤를 따르던 율리안은 떡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샤가 홱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야 겨우 표정 관리를 했다.
율리안을 돌아본 사샤가 프라이빗 도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사샤를 보자마자 흰 치아를 드러내고 반갑게 웃는 마이클이 서 있었다.
“저기 봐. 지키는 사람이 있잖아…….”
“야, 너 여기서 지내는 거야?”
“응…….”
“형편없는 방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순간 사샤는 깜짝 놀라 대꾸할 말을 잊었다. 율리안이 제 과거의 거짓말을 이런 순간 정확히 짚어 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샤가 우물쭈물하자 율리안이 설명을 부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율리안을 더 속일 자신이 없었던 사샤는 그를 데리고 얼른 지하의 바로 내려갔다.
“사샤, 어디 가?”
말없이 율리안을 이끈 사샤가 걸음을 멈춘 곳은 넝쿨무늬 조각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바의 문 앞이었다. 안쪽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재즈 음악이 흐르는 고전적인 분위기의 바 내부가 드러났다.
“두 분이십니까?”
“네, 두 명이에요. 오늘은 친구랑 왔어요.”
격식 있게 차려입은 서버가 물 흐르듯 사샤를 안쪽 자리로 안내했다. 그 모양새를 보면서 율리안은 또다시 기함했다. 고급 레스토랑 입구에서 코트 체크를 할 때 후줄근한 점퍼를 맡기는 것만으로 부끄러워하던 사샤가 이런 환경에 익숙해졌다는 것이 놀라워서.
“저는 콜라 주세요. 온더록스로요.”
사샤는 매우 자연스럽게 주문을 하고 율리안에게 물었다.
“율리안은?”
“맥주나 마실래.”
율리안은 팔짱을 턱, 끼고 사샤를 샅샅이 살폈다. 그 사이 사샤는 제 몫의 온더록스 잔에 탄산이 보글보글 이는 콜라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고는 비밀 이야기를 속삭이듯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
“율리안, 비밀 지켜줘. 저기…… 카, 아니…… 후원자님도 분명히 알고 계셔. 피후원자하고 사적으로 얽히면 안 된다는 거 말이야. 그리고 나도 엄청나게 잘 알고 있거든. 내가 받는 지원이 특별하다는 거, 그리고 보답할 수 없을 정도의 돈이라는 거.”
율리안은 일단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나를 불쌍해하셔서 그랬대.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분은 엄격하고 원래 나 같은 어린애도 귀찮아하는 분이야. 다 내가 귀찮게 굴어서 그래. 그랬는데…….”
“…….”
“내 재능을 보고는 확신하게 됐대. 자기는 틀리지 않았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샤의 뺨이 발그레했다.
율리안은 사샤가 이전에도 이렇게 자신감에 찬 얼굴을 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 속의 사샤는 언제나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얼굴이었다. 사샤에게 이렇게 많은 표정이 있었는지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물론 그 방의 크기가 조금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라는 건 나도 알아. 그, 그렇지만 좋은 일이잖아. 그분은 비어 있는 방을 제공했을 뿐인데 나는 발레를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 여기서 사는 것도 졸업할 때까지만이야. 그때까지만…… 그러면…….”
율리안은 소리 없이 긴 숨을 뱉으며 고개를 수그렸다. 등받이에 등을 기대자 조명에서 멀어진 율리안의 얼굴이 빛그림자에 가려졌다.
레빈도 정확한 사실은 털어놓지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사샤는 행복할 거라고. 그리고 함부로 개입해서 사샤의 인생을 구제해 줄 수 없다면, 그냥 사샤가 지키고 싶어 하는 비밀을 보호해 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사샤, 너는 만족해?”
율리안의 질문에 사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율리안! 나는 내 주제를 알아. 당연히 만족하지, 엄청!”
“……내 말은, 조금이라도 내키지 않는 제안이나 거래가 있었는지…….”
“그런 건 없어.”
사샤가 투덜거렸다. 율리안은 더는 말하지 않고 사샤가 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가운데가 살짝 갈라진 통통한 입술은 싸구려 설탕물 따위에 젖어 반짝거리고, 물먹은 동공은 율리안의 모습이 비칠 정도로 맑았다. 탄산을 단번에 꿀꺽 마신 후 끅, 하고 미련하게 짧은 호흡을 뱉는 것조차도 처연하게 예뻤다면 말 다한 것이다. 원판이 기막히게 아름다우니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무언가 함의를 담은 얼굴처럼 보였다.
율리안은 사샤가 그저 평균보다 좀 더 준수한 정도로만 잘생겼다면 자신이 이런 의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희귀한 미모를 두고 그저 불쌍해서 주워 왔다고, 재능에 후원할 뿐이라고 변명하면 퍽이나 먹히겠다…….’
율리안은 마른 입술을 이로 자근자근 씹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샤의 또래 친구들 정도로 어리고 순수한 아이들이 그렇게 말하면 모를까, 나이 지긋한 어른, 심지어 부와 권력을 동시에 가진 이들이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콜라를 다 마신 사샤가 입을 열었다.
“아무튼 율리안, 나는 여기서 살면서 왜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하는지 알게 됐어.”
“그래…….”
“난 절대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야.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될 거야. 냉장고에 하루 종일 물을 넣어 놔도 차가워지지 않는 고물 냉장고도 싫고, 더운물이 안 나와서 물을 끓여서 샤워해야 되는 것도 싫어.”
“…….”
“실패해서 뉴욕을 떠나고, 한때 뉴욕에서 발레 스쿨을 다녔었다는 걸 추억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러시아에는 엄마가 있지만…… 어, 엄마도 여기로 모시고 올 거야. 다시 밑바닥으로 내려가지 않을 거야.”
“…….”
“나도 욕심이 생겼어.”
“…….”
“그러면 안 돼?”
사샤의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율리안을 응시했다.
흘끔 눈을 들어 사샤와 눈을 마주친 율리안은 한숨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사샤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쓰다듬었다.
“돼. 그 정도는 욕심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
“다들 그 정도 야망은 품고 살아……. 아니 그건 야망이 아니라 삶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게 맞겠지.”
“응…….”
율리안은 한때의 사샤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깡마르고 작은 몸으로 그저 경쟁 속에서 버티는 데 급급해 보였던 소년을. 그때 사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여유도 없어 보였다. 율리안은 자신이 보지 않은 사이 사샤가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마음도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분명히 성공할 거야.”
“응, 난 성공할 거야.”
사샤의 눈이 반짝거렸다. 율리안은 거기에 화답하듯 미소 지어 보였다.
“왜냐하면 사실 오늘 나한테 솔로 역 하나를 준다는 말을 들었거든…….”
들뜬 사샤는 아까부터 누구에게라도 자랑하고 싶었던 작은 소식을 율리안에게 전했다.
그리고 제 몫의 술잔을 조용히 기울이며 율리안은 생각했다.
모든 재능 있는 소년, 소녀 중에 왜 하필 사샤였을까, 사샤의 후원자가 정말로 사샤의 재능에만 관심 있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고.
동시에 사샤의 후원자가 중세 시대의 메디치 가문처럼, 그저 현대의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싶어 하는 예술의 숭배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부디 저 빛나는 외모가 인생에 굴곡을 가져다주지 않기를…….’
“그럼 율리안, 조심해서 가.”
율리안은 사샤의 배웅을 받으며 호텔을 떠났다. 그가 로비를 돌아보았을 때, 사샤는 프라이빗 도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 * *
디렉터가 말한 대로였다. 이틀 후, 벽에 붙은 공지사항에서 사샤는 1막의 솔로 부분 옆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디렉터와 조연출들, 발레 마스터들, 발레단의 기획팀 등 모든 스태프가 아무 경력 없는 학생을 주요 역 중 하나로 올리는 데 합의를 한 것이다.
프로모션 공지 앞에서 사샤는 흥분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마저도 억지로 기쁨을 억누르고 있어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다.
한참이나 게시판 앞에 붙어 있는 사샤를 보고 몇몇 군무 단원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몇 살이랬지? 열일곱 살? 저 나이 때는 저렇게 감격스러워할 만도 해. 나도 그랬지.”
“그나저나 지나치게 신이 난 티를 내면 좋지 않을 텐데.”
“아무렴, 눈꼴사나워하는 녀석들이 꼭 있으니까.”
주목받는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그 자리는 소수의 천재에게 돌아간다. 빠르게 주목받는 사람을 견제하는 시선은 발레 스쿨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프로 댄서들의 세계란 진짜로 생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경쟁을 제치고 바늘구멍만큼 좁은 문을 통과한 이들을 그저 너그럽게만 보지 않는다.
게다가 나이를 먹으면 질투를 드러내는 방법은 더욱 교활해지게 마련이다. 아무런 배역도 얻지 못한 이들의 여유로움을 가장한 허세 어린 시선들이 사샤의 등에 길게 달라붙었다.
그런 것들을 알아채지 못한 사샤는 마침 곁을 지나가던 스태프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이 종이 가져도 되나요? 기념으로 갖고 싶어요. 아, 지금 당장 말고 집에 갈 때요…….”
“그럼 물론이지. 어차피 매일 업데이트가 되니까 매일 출력하거든.”
사샤는 ‘와……’ 하고 작게 감탄하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스태프는 그런 사샤를 귀엽게 여기며 집에 가기 전에 사무실로 찾아오면 새것으로 출력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날 밤,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사샤의 손에는 빳빳한 흰 종이가 들려 있었다.
사샤는 얼른 집에 가서 이 종이를 카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틀 전 율리안에게 자랑한 것처럼 그냥 말로 떠들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사샤는 모든 게 확실해졌을 때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지금 손에 들려 있다.
‘카렐, 이거 보세요. 카렐은 틀리지 않았어요. 제 재능을 확신한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그 첫 번째 증명을 해낸 거예요.’
사샤는 마음속으로 카렐에게 말을 걸며 멀지 않은 거리를 빠른 속도로 걸었다. 호텔 로비를 지나쳐 프라이빗 도어 앞으로 다가가자 마이클이 웃으며 반겨 주었다.
“사샤! 기분 좋은 일 있니?”
“네? 어떻게 아셨어요?”
“넌 기분이 좋으면 뺨이 핑크색이 되던데.”
사샤는 손등을 뺨에 대어 보았다. 마이클의 말대로 손등으로 전해지는 뺨의 온도가 뜨거웠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올라 방문을 왈칵, 열었을 때…….
“카렐!”
카렐은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샤는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 카렐의 목을 끌어안았다. 카렐은 이유도 모른 채로 저에게 안기는 사샤를 가볍게 받아 들었고, 사샤는 그가 목을 울리며 웃는 소리가 좋아서 아기 코알라처럼 매달렸다.
“카렐, 카렐! 제가 뭘 들고 왔는지 보세요.”
사샤는 카렐의 품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며 손에 들고 있던 흰 종이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여전히 사샤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는 카렐의 팔 때문에 옷이 이상한 모양으로 말려 올라갔지만 별로 불편하지도 않았다.
카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종이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사샤는 카렐의 동공이 움직이는 것을 정신없이 올려다보았다. 카렐의 동공이 어느 한 줄에서 멈추더니, 소리 없이 입모양만으로 감탄사를 뱉었다. 그의 다정한 눈이 사샤와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축하해요. 데뷔 무대네요.”
‘데뷔’라는 단어에 울컥한 사샤는 카렐의 가슴팍에 박치기를 하듯이 머리부터 파고들었다. 카렐은 놀라면서도 가벼운 웃음을 섞으며 사샤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좋은 좌석을 미리 사야겠습니다.”
“어, 어디쯤에 앉을 건지 알려주세요?”
“알려주면, 뭐하게요.”
“마지막 레베랑스를 할 때 그쪽으로 인사를 드릴 거예요.”
사샤의 말에 카렐은 웃으면서 사샤의 코끝을 가볍게 쥐어흔들었다.
“무대에선 객석이 잘 보이지 않을 걸요.”
순식간에 빨개진 코를 감싼 사샤는 종이를 들고 거실을 벗어나는 카렐의 등을 그저 바라보았다.
이걸로 축하는 끝인가……. 더 칭찬을 받고 싶어서 사샤가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종이를 서재에 보관해 놓은 카렐이 문을 나서더니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허리를 굽혔다 일어난 카렐의 손에는 칠링한 샴페인 한 병이 들려 있었다.
“특별한 날이니까, 딱 한 잔만 허락할게요.”
* * *
카렐은 랙에서 손잡이가 길고 몸체가 둥그런 멋들어진 잔 두 개를 꺼내 왔다. 그러고는 사샤에게 하나를 들려주고 샴페인 병을 앞뒤로 돌려 바라보았다. 병의 주둥이를 감싼 금색 종이와 철사를 벗겨낸 카렐이 미간에 조금 인상을 쓰더니 뚜껑에 손가락을 걸었다. 사샤는 카렐의 손등에 힘줄이 돋는 모양에 집중했다.
적당한 힘을 가늠하던 카렐이 뚜껑을 당기자 퐁! 하는 소리가 나며 뚜껑이 열렸다.
천장으로 술이 분수처럼 솟구치는 모양을 상상했던 사샤는 조금 실망하며 물었다.
“아주 얌전히 열렸네요?”
“소리가 나지 않을수록 좋은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사샤의 잔에 샴페인을 따라주었다. 솨아아, 하는 소리가 나며 잔의 3분의 1정도가 찼다. 카렐은 그쯤에서 병을 다시 세웠다.
적어도 반 정도는 채워 주기를 바랐던 사샤는 카렐을 빤히 올려다보았으나 그는 흔들리지 않고 제 잔에도 딱 그 정도의 술만을 채웠다.
“발레 댄서 사샤 세드린의 정식 데뷔 무대를 축하하며.”
사샤는 그 문장을 이루는 모든 단어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사샤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카렐이 사샤가 들고 있던 잔에 제 몫의 잔을 가볍게 가져다 부딪쳤다.
챙, 하는 맑은 소리에 사샤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하시면 어떡해요? 다시 해요.”
카렐은 거추장스러운 기색 없이 다시 잔을 기울여 주었다.
“그래요.”
짧은 건배에 만족한 사샤는 그제야 입술에 잔을 가져다댔다. 조금 흥미로운 기색으로 제 반응을 관찰하고 있는 카렐과 눈을 마주치면서.
사샤가 첫 한 모금을 위해 잔을 기울였을 때 복숭아 향이 코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 입 안을 가득 채운 톡톡 터지는 기포와 상큼하고 청량한 맛.
“와…….”
사샤는 잔을 한 번 보고 다시 카렐을 바라보았다. 첫 모금에 당장 샴페인과 사랑에 빠져 버린 듯한 사샤의 얼굴을 보고 카렐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샤가 홀린 듯 허겁지겁 잔에 입술을 갖다 붙이자 카렐이 얼른 몸을 일으켜 딸기 하나를 잔 안에 퐁당 떨어뜨렸다.
“뭐예요?”
“천천히 마셔요. 딱 한 잔이니까 아껴 먹어야지요.”
그러나 사샤의 음주는 딱 한 잔으로 끝나지 않았다.
카렐은 마치 물을 마시듯 꿀꺽꿀꺽 술을 넘기는 사샤를 다소 복잡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다음 사샤가 입술을 뗐을 때 잔 안에는 카렐이 넣어 준 딸기 하나만 외롭게 남아 있었다.
사샤는 샴페인 한 잔을 아껴 먹겠다던 처음의 의지를 잊은 채 카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렐, 조금만 더…….”
“그럼 아주 조금만이에요.”
카렐은 처음 따라주었던 것보다 더 적은 양을 사샤의 잔에 따랐다. 그것도 단번에 해치우고 난 사샤는 룸서비스로 주문한 핑거 푸드가 남았다는 핑계로 딱 한 잔을 더 마셔야겠다고 우겼다.
“이제 정말 안 됩니다.”
“너무하세요.”
“대신 무알코올 샴페인을 줄게요.”
그렇게 말한 카렐이 새 샴페인 병을 가지고 왔다. 잔에 따르는 음료의 색은 진짜 술만큼이나 예뻤지만 그걸 마신 직후 사샤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저 단맛이 적은 탄산음료 같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술맛을 알아 버린 사샤에게는 영 아쉽기만 했다.
입맛을 다시던 사샤에게 얼마 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카렐이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테이블을 떠났던 것이다.
“잠깐 기다려요. 얼른 끝내고 오죠.”
사샤는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범죄는 신속해야 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사샤는 대담하게 병을 쥐고 기민한 동작으로 잔에 콸콸 술을 따랐다. 몸이 뚱뚱한 잔에 한가득 액체가 담겼다.
‘이 정도는 따라야 하는 것 아냐? 왜 술은 조금씩 마시지? 세상에 물잔을 3분의 1만 채우는 사람은 없잖아.’
그때 카렐의 나직한 목소리가 가까워져 사샤는 얼른 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았다. 카렐이 마침 사샤의 바로 등 뒤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사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카렐을 바라보았으나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사샤는 카렐에게 미소 지어 주면서 술이 가득 든 잔을 제 가슴 앞으로 살살 끌어와 절대 보이지 않게 했다.
그러고는 카렐이 다시 목소리를 낮추며 뒤돌자마자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크으으으…….”
쩨쩨하게 조금씩 따른 술을 모금으로 마실 때와 달리 짜릿함이 온몸을 감쌌다. 식도와 위장을 씻어 내리는 듯한 상쾌함에 사샤는 감탄했다.
사샤는 해롱해롱 취해서 생각했다. 술은 이렇게 먹는 거구나, 하고.
넘치도록 따른 잔은 순식간에 비워졌다. 사샤는 입맛을 다시며 병을 쥐기 위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휘청거렸지만 그때까지도 사샤는 취기에 오른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남은 샴페인을 잔에 모조리 따랐지만 잔이 가득 차기도 전에 병 속의 술이 먼저 동났다.
그제야 사샤는 돌아온 카렐이 빈병을 알아채면 황당해할 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사샤는 빈병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 이렇게 하며언…….’
사샤는 카렐이 저를 위해 새로 시켜 준 무알코올 샴페인을 들어 올려 조심조심 빈병으로 따랐다. 졸졸 소리를 내며 병 안으로 떨어지는 액체는 가끔 손가락을 타고 흐르기도 했지만 사샤는 술에 젖은 손가락을 핥아 가면서 그렇게 완전 범죄를 완성했다.
그리고 카렐이 돌아왔을 때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건 이미 만취해 있는 사샤였다.
“통화가 길어져 미안합니다.”
사샤는 눈을 반만 뜨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사샤?”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눈을 비비고 머리카락을 귀찮은 듯이 넘기더니 딸꾹질을 시작했다.
“취했어요?”
카렐이 사샤를 위아래로 둘러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사샤는 대답 없이 카렐을 한 박자 느리게 올려다보았다. 머리를 지탱하는 연약한 목덜미가 흐느적거렸다.
“이런…… 취했군요.”
카렐은 조금 어이없어 하면서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취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보니 지금 사샤가 짓고 있는 표정이 주정뱅이의 게슴츠레한 표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예쁘게 잘 조형된 얼굴이라 그저 처연하고 조금 지쳐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쉽게 발그레해지는 뺨에서 핏기가 싹 사라져 뺨이 창백했다.
‘술을 마시면 희게 질리는 타입이로군.’
혀를 차면서 카렐은 테이블 위의 병을 확인해 보았다. 무알코올 샴페인 병이 전부 비어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앞서 자신이 직접 따라준 두 잔으로 이만큼 취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는 15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샴페인 한 병을 혼자서 빠르게 마셔 버렸기 때문이지만 카렐이 그를 알 방도는 없었다.
“주량이 세지 않군요. 역시 한 잔만 주는 거였는데…….”
“으음…….”
“일어날 수 있겠어요?”
“카……렐…….”
“침대로 옮겨 줄게요.”
카렐은 술김에 저에게 엉겨 붙어오는 사샤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걸쳐 그 몸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평소에는 가볍고 날래게 움직이던 소년의 몸이 다소 둔하게 기대 왔다. 사샤가 카렐의 등을 자꾸만 그러안으며 그 가슴팍에 코를 비볐다.
“까렐…… 조은 냄세…….”
“이런…….”
바닥에 힘없이 닿은 발목이 꺾일 것 같아서 카렐은 차라리 사샤를 완전히 안아 들기를 택했다. 등 뒤와 무릎에 팔을 걸쳐 안아 올리자마자 사샤는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웃었다. 아마도 몸이 허공에 쉽게 들리자 그게 재밌다고 느낀 듯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힘이 완전히 빠진 사샤의 목이 휙 뒤로 꺾였을 때, 카렐은 기겁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카렐은 사샤를 아기 안듯이 다시 고쳐 안았다.
“으음…….”
사샤는 신음하면서 몸을 꿈지럭거렸다. 취해서 어지러운 와중에 카렐이 저를 휙휙 바꿔 들어 시야가 마구 바뀌고 정신이 없다고 느꼈다. 실제로 카렐은 매우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움직였으나, 가만히 있어도 흔들리는 시야 때문에 머리에 더욱 알코올이 돌았던 것이다.
형편없이 취한 사샤의 눈앞에 카렐의 매끈한 목덜미가 보였다. 탄탄한 피부와 근육질의 나체를 절대 보여주지 않는 카렐의 몸 중 그나마 드러난 곳은 목덜미와 발목, 손 같은 곳들뿐이었다.
사샤는 그중에서 카렐의 목덜미를 훔쳐보는 게 가장 좋았다. 피부가 매끈매끈해 보였고 그 사이에 잘 깎은 금발의 모근이 솟아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초옥.
사샤가 혀를 내어 카렐의 목덜미를 핥은 것은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소 곤란한 취객을 상대한다고 생각했던 카렐의 표정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가셨다.
할짝할짝.
“으음…… 응…….”
사샤는 자신이 핥고 있는 주제에 저가 더 많이 신음하면서 카렐의 품 안에서 자꾸만 꿈틀거렸다. 표정이 사라진 카렐은 거실에 놓인 사샤의 침대 위에 흐트러짐 없는 걸음으로 다가가 조용히 몸을 기울였다.
“까렐, 왜 그래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카렐이 자신을 내려놓으려고 하자 사샤는 팔에 더욱 힘을 주어 달라붙었다. 카렐이 그 몸을 거의 수평으로 기울였는데도 중력을 거부하면서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더 맛보고 싶어요. 카렐의 피부를…… 매끈매끈하고 좋은 냄새가 나요.”
“얼른 자는 게 좋겠어요.”
등이 침대 위에 닿았는데도 사샤는 여전히 억지스럽게 카렐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술에 취한 사람의 힘이란 대단했다.
카렐은 사샤가 잔뜩 힘을 주고 있는 등 근육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말했다.
“함부로 힘을 쓰면 춤출 때 방해를 받아요. 근육통이 남을 겁니다.”
“근육통은 어차피 매일…… 있어요!”
사샤는 고개를 조금 떨어뜨리더니 카렐의 뺨을 손으로 더듬었다.
“눈앞의 카렐은 오늘만 있고요…….”
마지막 말은 음성 없이 숨소리로 전달하는 듯한 속삭임이었다. 카렐을 똑바로 마주쳤던 시선은, 눈을 내리깔자 얇은 눈꺼풀과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사라졌다. 열로 달아오른 뜨거운 뺨이 카렐의 목덜미에 찰싹 달라붙었다. 직후 사샤의 날씬한 하체가 허리를 휘감아 올 때 카렐은 이 상황을 더는 장난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까렐…….”
사샤가 양팔을 카렐의 목덜미에 감싼 뒤 힘껏 달라붙고는 입술을 부딪쳐 왔다. 열리지 않는 카렐의 입술을 아쉬운 듯 비비고 뜨거운 숨이 흩어지는 사이 혀를 내어 할짝거렸다.
딱 한 번 나누었던 진한 키스를 기억하고 그대로 흉내 내는 움직임이었다.
“까아렐, 끅, 샤랑해요. 키스해 주세요.”
“…….”
“저는 카렐의 애인이 되고 싶어요…….”
어눌한 발음으로 애원하는 사샤의 무릎이 카렐의 단단한 중심에 스쳤다. 그 순간 카렐은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짧은 자극이 등줄기를 벼락처럼 스치고 가 식은땀이 났다.
‘젠장…….’
결국 카렐은 온몸으로 맹공하는 사샤의 앞에서 거친 호흡을 가라앉히며 그를 꼭 붙들어 안아 말렸다. 양팔까지 모두 품에 가두어 움직일 수 없게 했다.
그러자 사샤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소원이…… 이루어졋따…….”
방금까지 총 맞은 사슴처럼 날뛰던 것이 믿을 수 없게 얌전해졌다.
“소원은 무슨 소원.”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사샤를 눈으로 샅샅이 훑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을 눈으로 벗겨내듯, 욕망을 숨기지 않은 빛으로.
실제로 제정신으로 이런 눈빛을 본다면 겁먹어 물러날 게 분명했다. 그 아래에 진짜 제 물건을 들이댔을 때 울고 소리치며 겁먹는 모습이 그려졌다.
카렐은 사샤가 저를 겁 없이 유혹한 대가를 치를 자신이 있는지, 깊이 탐색했다. 만약 모르고 그랬다면 주의를 줄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나지.’
카렐은 깊은 한숨을 쉬며 사샤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까 무릎으로 허무하게 스친 곳이 슬슬 흥분하고 있었다. 지나치게 오래 관계를 갖지 않은 탓이다. 카렐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기울였던 몸을 일으켰다. 성욕이 들끓는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카렐은 주저 없이 사샤를 내치고 일어났다.
“……씻고 올게요.”
그렇게 말하는 목이 잔뜩 쉬어 있었다. 그건 이미 여유가 없다는 반증이었다. 카렐은 스스로가 우스워 혀를 찼다.
“어디 가요?”
카렐이 일어나자 그것을 귀신같이 깨달은 사샤가 눈을 감은 채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취기에 휩쓸린 사샤는 휘청거리며 카렐을 붙잡으려다가 뭉친 이불에 다리가 걸려 그대로 이불과 함께 침대 아래로 쏟아지고 말았다.
뭔가 덩어리가 쿵, 떨어지는 소리에 카렐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카렐…….”
사샤는 무릎을 울리는 통증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더니 이불과 한데 뭉쳐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 때문에 팔꿈치로 기어오기 시작했다. 카렐은 뭔가에 쫓기는 기분으로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후우…….”
단번에 옷을 벗어던지고 나체가 된 카렐은 주저 없이 전신에 찬물을 뿌렸다.
축축이 젖어 내려온 금발 사이로 거울을 보자 우스울 정도로 뻣뻣하게 굳은 얼굴이 드러났다. 여유를 가장할 틈도 없었다는 소리다. 제 정색한 얼굴이 한심스러워서 카렐은 찬물로 얼굴을 닦아냈다.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 후 거울을 바라보면,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샤의 연약한 육체와 대비되는 제 몸이었다. 방금까지 품 안에 있던 미숙하고 덜 여문 몸이 멋대로 덤빈다고 감당할 수 없는 크기였다.
몸의 근육은 추구하는 방식대로 조형된다. 몸의 선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해 제 몸을 다듬는 사샤와 다르게, 카렐의 몸은 지배하고 강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이 체격으로 내리누르는 것 자체가 폭력일 것이다.
게다가 껍데기가 자신이 꿈에 그리던 사샤 세드린일지라도 그 알맹이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진심이 아니라 술기운이겠지.’
카렐은 고작 1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사샤도 변했고, 자신도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어린애의 이런 어설픈 유혹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그래 왔듯이 아무렇지 않은 척 가벼운 웃음을 터뜨리며 성적인 함의가 담긴 묘한 분위기를 쉽게 지워 버렸을지도 모른다. 또 품 안에서 꿈지럭대는 몸과 살결에 스치는 맨 피부는 작은 아기 동물의 털이나 다름없다고 최면을 걸며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는 사샤를 달래려고 카렐이 택한 행동은 소년의 입에 쿠키를 넣어 주는 것이었다. 자신이 완전히 아기 취급하던 소년의 변화에 카렐은 아연함을 느꼈다.
이제 육아는 불가능하다.
눈앞의 소년이 자라서? 꿈에 그리던 성숙한 육체에 점차 가까워져서?
“후우…….”
카렐은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거울 속의 제 몸을 등졌다. 마치 흥분한 자신을 부정하듯이. 카렐은 타일에 팔을 기대고 손을 제 중심에 뻗었다. 한차례라도 흥분을 덜어내야 했다.
‘그래, 이건 아마 그저 지나치게, 오래 참아서…….’
작은 사샤 세드린을 발견한 이후 스테디한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룻밤 성욕을 위한 만남은 더더욱 끔찍하게 느껴졌기에 모조리 거절해 왔다.
“읏, 하아…….”
그저 배출하기 위한 손짓에 절정은 빠르고 쉽게 다가왔다. 거울에 드러나는 것은 젖어 꿈틀거리는 등 근육뿐이었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카렐은 그 덜 여문 몸을 열어젖히고 흥분을 분출하는 상상을 했다. 제어할 수 없는 무의식이 만들어 낸 상상이었다.
“허억, 허억…….”
허무함에 휩싸여 카렐은 등으로 찬물 세례를 받았다. 뒤이어 자괴감이 찾아왔다.
그간 카렐은 성욕은 다스리고 절제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지론을 갖고 살아왔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서 사고를 저지를까 봐 미리 배출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카렐은 다시금 막막하도록 아연한 감정을 느꼈다.
어린애에게 발정하다니, 정상이 아니었다. 제 욕구를 납득하기 위해서 카렐은 그간 고정적인 상대나 하룻밤 즐거움을 나눌 상대조차 찾지 않고 애 보기에 열중했던 것을 첫째 이유로 들었다. 그 후에는 카르마나 원죄 따위에 대해서 생각했다. 즉,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업보 혹은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이런 고충을 겪는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또한 카렐은 몽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들은 가장 순진무구한 모습으로 나타나 인간이 부정을 저지르고 육신을 더럽히기를 원한다.
그러나 잠시 후 카렐은 자신이 게이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혼란스러워하고 부정하던 아이를 몽마에 비교하고 성욕을 합리화하는 스스로에게 질려 버렸다.
그렇게 카렐이 몸의 물기를 닦고 돌아왔을 때였다. 흥분이 가라앉은 후 더욱 차가워진 이성으로 카렐은 사샤의 침대 곁에 앉았다. 그새 취해서 잠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샤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아직 안 자나요.”
목소리나마 다정하게 꾸며 말하자 사샤가 카렐을 느리게 올려다보았다.
“카렐, 부탁이 있어요.”
카렐은 사샤가 당장 어른의 사랑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어떡하나 고민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 혹은 가벼운 페팅에서 그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러나 사샤가 내민 것은 그런 카렐의 예상을 산산조각으로 뒤엎는 것이었다.
“이 판이…… 넘어가질 않아요. 여섯 번이나 실패했어요. 카렐은 뭐든지 할 수 있죠. 대신 해 줘요…….”
사샤가 내민 모바일 게임을 들여다보면서 카렐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 제발…… 이거 끝내기 전까지 답답해서 잠들 수 없을 거 같아요.”
“……이리 주세요.”
카렐은 묵묵히 사샤의 곁에 앉아 게임을 했다. 취해서 게임 플레이마저 갈지자를 걷던 사샤와 다르게 카렐은 정상인의 반응속도로 미션을 클리어해 나갔다. 졸린 눈으로 핸드폰을 바라보던 사샤는 염원하던 그 판의 게임 클리어가 눈앞에 다가왔을 때 흥분의 콧김을 식식 내쉬었다.
결국 카렐은 사샤 대신 그 판을 깨는 데 성공했다.
“자.”
카렐은 사샤에게 확인을 받듯이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사샤는 ‘와아……!’ 하며 힘없이 손뼉을 짝짝 치고 나서는 흐물거리며 카렐에게 달라붙었다.
“고마워요, 고마븝니다…….”
“……천만에.”
그러더니 그대로 카렐의 팔뚝에 이마를 기댄 채로 말이 없었다.
“사샤, 자는 겁니까?”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사샤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하…….”
사샤는 애초부터 쏟아지는 잠을 참으면서 게임 화면을 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생각해 보면 이미 잔뜩 취한 채였다. 취한 사람이 하는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진지했던 것은 자신뿐이었다.
카렐은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바닥에 분풀이하듯 내팽개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렇게 무력한 기분은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인내심이 지나치게 약해져 한심하게 여유를 잃어버린 자신에게 헛웃음을 지었다.
* * *
다음 날 사샤는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며 잠에서 깼다. 난생처음으로 술병이 나서 걷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어 다녔다. 오전 내내 수시로 토했고, 덕분에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물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주말이라서 학교를 빠질 필요는 없었던 게 유일하게 긍정적인 점이었다. 집에서 녹초가 되어 쉬고 있던 정오쯤에는 상담 선생님이 찾아왔다. 그녀는 고맙게도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상담이 잡히면 호텔 쪽으로 방문해 주고 있었다.
상담의는 저를 위해 현관문을 열어 준 사샤를 보며 조금 놀란 눈치였다.
“오늘 굉장히 피곤해 보여요.”
“음…… 요즘에 학교 끝나고 매일 공연 리허설을 해요. 그래서 그래요.”
상담의에게는 항상 솔직해지기로 했지만, 샴페인 한 병을 15분 만에 비워 버린 것을 실토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사샤는 어제 제 과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대강 둘러댔다.
“클레멘츠 씨도 많이 걱정했어요. 체력 관리를 잘 해야 해요. 알았죠?”
“네…….”
모두가 제 걱정을 해 준다는 사실에 사샤는 다시금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첫 모금의 사랑스러운 맛과 달리 지독한 숙취를 안겨 준 술이라는 요망한 물질을 저주했다.
그리고 상담이 끝난 후, 막 떠나가려던 상담의가 말했다.
“사샤, 무릎에 멍이 크게 있네요?”
“네?”
그녀는 사샤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혹 사샤가 자학을 하지는 않을지 매사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말을 들은 사샤는 입고 있던 반바지를 접어 올리고 그제야 푸른 멍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 몰랐어요.”
“아파 보여요. 어쩌다 다쳤죠?”
사샤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제 욕실로 도망가던 카렐을 붙잡으려고 허우적대다가 침대에서 쿵 떨어지며 생긴 멍이었으나,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상담의가 돌아간 후 사샤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게 언제 생겼지?’
카렐이 돌아온 것은 저녁 식사 때였다. 얼른 그를 마중 나간 사샤는 무릎의 멍부터 가리키며 말했다.
“카렐, 오셨어요? 저 여기에 멍이 들었어요.”
“음…….”
“멍은 자주 생기는데 이건 왜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요…….”
“아프겠군요.”
사샤는 제 멍을 들여다보기는커녕 짧은 시선만 주는 카렐의 태도에서 약간의 거리감을 느꼈다. 카렐은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사샤를 지나쳐 걸어갔다.
“연고를 줄게요.”
잠시 후 카렐은 멍든 곳에 발라 문지르는 연고를 가지고 와 사샤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마스터룸으로 향했다. 문을 완전히 닫아걸었음은 물론이다.
“…….”
문 닫힌 마스터룸 앞을 서성이던 사샤는 거실로 돌아와 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손에 연고를 짜서 멍든 곳에 문질렀다. 바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오래 문질러야지만 효과가 있는 약이었다.
‘오래오래 문질러야지.’
그리고 카렐이 막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을 때, 그의 눈에 사샤의 애처로운 뒷모습이 들어왔다. 사샤는 등을 웅크린 채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사샤가 잠시라도 외로운 모습을 보이면 카렐은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고 만다.
그는 약한 죄책감을 느끼며 사샤의 뒤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연고 문지르기에 열중하던 사샤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카렐?”
다행히도 돌아본 사샤는 울고 있지도 않았고, 울적해 보이지도 않았다. 카렐은 자신이 왜 그런 착각을 했는지 고민하며 다가간 목적을 바꾸었다.
“저녁…… 먹을까요.”
“네, 좋아요! 저 엄청 배가 고팠어요.”
사샤는 반색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렐은 쓰게 미소 지으면서 아마도 아이가 그동안 너무 오래 외로웠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저를 좋아하는 티를 숨기지 못하고 따르는 어린 동물을 앞에 두고 문을 닫아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다.
‘게오르크도 지적했지만, 이보다 더 물러지면 어쩌자는 거지.’
그러나 사샤를 향한 시시각각의 감정은 카렐이 추정해 낸 그럴듯한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단지 카렐이 사샤를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었다.
* * *
[Josepppp * 5일 전
이 영상 뷰 좀 봐. 얘 미친 것 같아. 기계 조작 같은 거 아님? 그렇게 존나 잘생긴 것도 아닌데.]
[sasya.C
저는 안 미쳤고 안 잘생기지도 아닌데요. 근데 욕하지 마세요. 화나니가요,,]
[pistolgirl * 5일 전
위에 댓글들은 신경 쓰지 마. 내가 쏴 버릴게.
사샤는 이대로 슈퍼스타가 되면 돼!]
[sasya.C
고맙습니다. 근데 총있어? 저 동네에 미하일씨도 총있어요. 총으로 불곰잡아야대서요.]
[em.mauel * 4일 전
혹시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이상형이 어떻게 돼?]
[sasya.C
사랑하는 사람 있는데 아직 애인 안해저서요. 어떻해야 사길수 있지?]
여전히 사샤는 틈날 때마다 유튜브 댓글을 달고 있었다. 가장 열중하는 시간은 학교를 마치고 밤의 공연 연습이 시작하기 직전까지이다. 원래는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빈 연습실에서 추가 연습이나 스트레칭을 하곤 했는데 해 진 후의 연습실을 혼자 지키는 건 왠지 쓸쓸했다.
그래서 사샤는 밤이면 광장 분수대 앞에서 밤 공연을 보기 위해 링컨 센터를 방문하는 이들을 구경하며 핸드폰을 가지고 놀았다.
그렇게 한창 밀린 유튜브 댓글을 달던 사샤는 피로한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최근 그 영상은 사샤가 직접 답을 해 준다는 것을 알아챈 사람들에 의해 댓글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매일 찾아와 출석 체크를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한때는 저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 모두에게 답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깐, 사샤는 최근 수천 개에 달하는 댓글에 답을 다 달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다 사샤는 잠시 후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다시 핸드폰을 들고 자신에게 미쳤다고 한 사람의 아이디를 옮겨 적었다. 기억해 놓고 있다가 또 나쁜 말을 하면 그땐 정말 화를 내주기 위해서.
‘뭐야? 자기는 대머리면서…….’
[Josepppp
이 영상 뷰 좀 봐. 얘 미친 것 같아. 기계 조작 같은 거 아님? 그렇게 존나 잘생긴 것도 아닌데.]
[sasya.C
저는 안 미쳤고 안 잘생기지도 아닌데요. 근데 욕하지 마세요. 화나니가요,,
대머리야,,,]
사샤는 코멘트에 막 생각난 것을 더해 적었다.
‘그리고 또 뭘 하려고 했더라?’
인터넷으로 하는 일이라고는 자기 영상의 반응을 보는 일, 또 카렐의 이름을 검색하는 일뿐이었다. 사샤는 습관적으로 카렐의 이름을 검색창에 썼다.
한때 디지털 백치였던 사샤도 이제는 능숙하게 최신순으로 기사를 줄 세우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 눈에 끌리는 기사들을 몇 개 눌러 본 사샤는 기사 안에 사진이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다. 요즘 기자들은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사이 사샤의 눈에 기사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카렐 클레멘츠, 테니스 여제 미셸 오하라와.]
그걸 눌러 보자 사샤가 찾아 헤맸던 카렐의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기사는 그걸로 끝이었다. 사진과 함께 두 사람의 이름이 짤막하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카렐의 머리 길이로 보아서는 최근 사진이 분명했다. 여자에게 가볍게 어깨동무를 한 카렐의 손이 신경 쓰였던 사샤는 제 귀를 매만지다가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이번에는 미셸 오하라를 적었다.
그러자 카렐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이미지가 쏟아졌다. 운동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접고 최근 배우로 전향한 독특한 이력의 미셸 오하라는 대중 인지도가 높아서 지금까지 누적된 자료가 많았다.
사샤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미모의 여성 사진을 관찰하면서 저도 모르게 카렐의 이상형을 떠올렸다. 육체가 단련된, 성숙한 사람…… 하나하나 들어맞는 이상형에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카렐은 검은 머리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화면 속 여자는 밝은 갈색 머리였다. 때에 따라 그보다는 짙어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검정색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게 사샤를 조금 안심하게 만들었다.
‘카렐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하고만 사귀었다고 했었어.’
이미지를 전부 훑어낸 사샤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글자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사샤의 눈에 반갑지 않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Engage?’
한 번도 들어보거나 직접 쓸 일이 없었던 낯선 단어가 기사마다 보이고 있었다. 최근 함께 있는 것이 자주 목격된다거나, 미셸 오하라의 반지 낀 손을 확대하며 반지의 정체에 대해 추론하는 글줄들도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두려운 느낌에 사샤는 자신이 모르는 영단어를 검색해 보려다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사람이 북적이던 분수대 주변은 거짓말같이 한산했다.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혀 꿈을 꾸는 중인가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사샤는 헛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극장 주변이 한적하다는 건, 공연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건 8시 정각이 지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사샤는 사색이 되어 생각을 멈추고 부리나케 달렸다. 밤 연습은 8시부터였다. 이미 저를 빼고 연습이 시작되었을 게 분명했다. 바보 같게도, 인터넷 기사 따위에 정신이 팔려 지각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것도 솔로 리허설 첫날에…….
사샤는 제발 혼나지 않기만을 바라며 극장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 *
숨을 무섭게 몰아쉬며 연습실에 도착한 사샤는 다행히도 아직 오늘 리허설의 발레 마스터가 도착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맨해튼으로 들어오는 중인데 트래픽 때문에 15분 정도 늦으실 거래요.”
“다행이에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으니까 물이라도 마셔요.”
소식을 전해 준 스태프가 상기된 사샤의 뺨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석의 식수대로 향했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그제야 간신히 폐가 터질 것 같은 갑갑함이 가셨다.
사샤는 터덜터덜 로커룸으로 향했다. 로커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나간 무용수들이 키를 걸어 놔서 대부분이 닫혀 있었다. 사샤는 남은 로커 중 가장 위의 것과 가장 아래의 것 중에 고민하다가 아래쪽을 택하고 몸을 굽혔다. 바닥 면에 닿아 있는 로커를 열자 살짝 곰팡이 냄새가 났다.
사샤는 주변을 잠시 둘러본 후, 더는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옷을 훌렁 벗었다. 달려오느라 피부 표면에 살짝 배어 있던 땀이 삭 식으며 한기가 들었다. 바지까지 벗자 한 겹 속옷 차림이 되었다. 가방 안에서 새 타이즈를 막 꺼냈을 때, 사샤는 찰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처음 보는 사람이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샤는 작게 중얼거렸다.
장신의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샤에게 흘깃 눈길을 주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사샤의 바로 근처에서 스포츠백을 툭 내려놓았다. 드러난 손등은 정맥이 비쳐 보일 정도로 희고 창백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남자를 관찰하면서 그의 키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가 남자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발견해 냈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제 인사를 못 들은 모양이다.
남자가 손을 뻗어 주변의 로커를 몇 개 열어 보려 했다. 하지만 열리는 게 하나도 없자 그의 입에서 작은 욕이 튀어나왔다. 조금 머뭇거리던 사샤는 남자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이어폰을 빼자마자 다시 말을 걸었다.
“빈 로커가 별로 없어요. 맨 위에는 조금 남아 있어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건넨 말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대로 가장 윗줄의 로커들을 손으로 스치듯 더듬거렸다. 그건 사샤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었다는 증거였다.
‘들었으면서 대답도 안 하고…….’
의기소침해진 사샤는 고개를 돌리고 타이즈 안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남색 롱타이즈에 흰 양말을 신은 뒤, 다시 가방에서 상의 레오타드를 꺼냈을 때였다.
“러시아인?”
사샤는 얼른 뒤돌았다. 아까까지 자신을 공기 취급하던 남자가 저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악센트.”
상의를 벗은 채인 남자의 드러난 가슴팍을 보면서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미국인이거나, 아니면 그에 준할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장신의 키에 어우러지게 잘 짜인 몸에는 숙련된 무용수답게 체지방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어깨도 많이 벌어져 있었다. 완연한 성인 남자의 몸이었다. 사샤가 원하는 무용수로서의 프로포션이기도 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조금 선망하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새로 오셨어요?”
“게스트 프린시펄로.”
“와…….”
사샤는 현재 비어 있는 주연의 자리를 떠올렸다. 프린시펄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을 게스트로 불렀다는 건…… 그렇다는 것은 눈앞의 남자가 새로 그 자리를 채울 것이라는 소리가 된다.
호감 가득한 사샤의 눈길을 알아챈 남자가 피식 웃었다.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어?”
“네?”
“학생같이 입었길래.”
그 말에 사샤는 남색 타이즈 아래 흰 양말과 흰 슈즈를 받쳐 신은 제 차림을 조금 부끄럽게 느꼈다. 남자는 전신이 검정색으로 된 레오타드를 입었고 슈즈도 검정색으로 된 가죽이었다. 그 옷차림이 무척 멋있어 보였다.
‘나도 검정색 레오타드 하나만 살까…….’
그때 남자가 눈을 치켜뜨며 다시 물었다.
“내 말 안 들려?”
사샤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네? 하, 학생 맞아요.”
“그런데 왜 여기에?”
“……우수해서 뽑혔어요.”
“그래.”
그러고는 쭉 침묵이었다. 사샤는 남자를 흘끔거리며 뭔가 더 대화가 이어지지 않으려나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내내 핸드폰만 바라보며 대화를 차단했다.
먼저 옷을 다 갈아입은 사샤는 로커에 가방을 넣어 놓고 문을 잠갔다.
그의 뒤를 지나치며 인사를 할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그 남자가 툭, 말을 걸었다.
“이름이 뭐야?”
“네?”
“이름.”
마주 서서 올려다보니 남자의 시야가 저보다 훨씬 높은 데 있었다. 사샤는 입을 떠듬거리다가 대답했다.
“알렉산드르 세드린…… 사샤 세드린. 그냥 사샤라고 부르세요.”
그 순간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
발레 마스터는 30분을 늦었다. 늦어서 미안하다며 더욱 열정적으로 안무를 가르쳐 주었고, 때문에 예상보다 연습이 한참 길어졌다.
모든 걸 마치고 나니 11시였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면서 사샤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게오르크, 저예요.”
잠시 후 게오르크는 데리러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이 역시 카렐의 배려 중 한 가지였다. 최근 밤늦게까지 연습이 이어지는 일이 많아지자 안전한 귀가와 체력의 보존을 위해 피곤함을 느끼면 지체 말고 게오르크에게 연락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건 사샤 역시 만류하고 싶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렇게 연습이 늦게 끝나는 날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게 된다. 차라리 기어가고 싶을 정도다.
완전히 지쳐 버리자 자연스레 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남는 건 체력밖에 없는 10대 소년들마저도 발레 스쿨의 혹독한 일과를 마치면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버린다. 지친 몸을 이끌고 좀비처럼 기숙사로 들어간 후에 시체처럼 쓰러져 잔다. 그러니 밤에 몰래 나가 사고를 치거나 하는 일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 그때 사샤는 저녁을 지어 먹을 힘도 없어 우유나 마셔댔다.
어느새 체력도 길러지고 몸도 자라 학교 수업 정도는 가뿐하게 소화하게 되었지만 거기에 연습이 더해지자 무척 힘에 부쳤다. 다시 입학 직후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사샤는 긴 한숨을 몰아쉬며 터덜터덜, 차가 닿을 수 있는 도로변까지 걸어 나갔다. 혼자 가로등 아래에 서서 낙엽을 바라보며 다시 핸드폰을 켰다.
로커룸에서 마주쳤던 장신의 남자가 떠올랐다.
게스트 프린시펄로 왔다는 남자는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유명한 댄서들은 구글에서 바로 프로필을 찾을 수 있다. 어떤 경력이 있는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기에 이름을 알지 못한 게 아쉬웠다.
조금 망설이던 사샤는 남자의 이름 대신 아까부터 머리에 떠돌던 ‘Engage’라는 단어를 쳤다.
그러자 러시아어 뜻이 바로 검색되어 나왔다.
‘약혼.’
사샤는 그저 물끄러미 화면을 바라보았다. 저 역시 바보가 아니었기에 기사에서 보인 맥락만으로도 그 단어가 영원한 약속을 의미한다는 것 정도는 추론할 수 있었다. 알지만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멍청한 사샤 세드린. 네가 하는 짓이 얼마나 우스웠겠어. 불쌍한 마음에 하는 행동에 기대나 가지고, 꼴좋다.’
귓가에 누군가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사샤.
아니지. 사샤는 쓰게 웃었다.
이제는 이것이 작은 사샤가 아니라는 걸 안다. 저를 질책하고 탓하던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신이었다.
사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카렐이 언제 결혼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라는 것, 저 같은 미성년자가 자라기를 기다릴 확률보다 이미 완성된 짝을 만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다. 새삼스레 충격을 받는 쪽이 멍청하다.
언제나 곱씹던 가능성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받아들일 만한 것 같기도 했다.
사샤는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똑바로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을이 끝나가는 시기의 거리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네모난 창마다 조금씩 조도가 다른 불빛이 흘러나왔고, 바람은 스산히 나무를 스치며 낙엽을 떨구고 갔다.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 귀에 선명히 속삭이던 누군가의 목소리는 실재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환청일 뿐이었다. 그리고 상담의는 그 환청들이 타인의 것이 아니라 사샤 본인의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해 주었다.
“멍청한 사샤 세드린…….”
사샤는 환청으로 들었던 말을 조그맣게 읊조려 보았다.
현재 사샤는 치료를 위해 환청이나 망상을 떨쳐 내는 과정을 순조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로 얻게 되는 현실의 우울은 본인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사샤가 표정 없는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굴러온 검은 차체가 가로등 앞에서 부드럽게 멈추어 섰다.
위잉, 소리를 내며 차창이 완전히 내려가고 안에서 드러난 것은 뜻밖의 얼굴이었다.
“사샤.”
익숙한 목소리에 사샤가 고개를 들었다.
“카렐……?”
“내가 대신 왔어요. 게오르크가 피곤하다기에.”
“…….”
“안 타요?”
울적해진 마음을 알아챈 듯이 마법처럼 눈앞에 나타난 카렐.
사샤는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사샤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역시 조금도 원망할 수 없었다. 나쁜 것이 있다면 항상 다정한데다 주기만 하는 눈앞의 남자에게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있는 자신일 것이다.
“사샤?”
그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사샤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순간에 눈물을 비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내게 더 관심을 달라고 주장하는 어린아이의 행동 같아서.
카렐은 차에 타지 않고 바닥만 보는 사샤를 의아한 얼굴로 살피더니 얼른 벨트를 풀고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보닛 앞을 빙 돌아서 사샤에게 가까이 간 다음, 그가 탈 수 있도록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왜 시무룩해 보이죠. 연습이 많이 힘들었나요.”
카렐은 사샤를 다정히 이끌어 차 안에 앉도록 했다. 차 안에서는 느린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채로 잠시 기다리자 카렐이 다시 앞을 빙 둘러 운전석으로 들어왔다. 카렐이 자리에 앉자마자 차체가 그쪽으로 훅 기울어지는 느낌이 났다. 기분 좋은 존재감이었다.
그 뒤에 차창을 완전히 올리자 바깥과 차단된 안에서는 아늑한 노랫소리, 그리고 카렐의 향기만이 가득했다.
“아니면 내 깜짝 방문이 그렇게 감격스러웠던가.”
카렐이 씩 웃으며 사샤 쪽으로 허리를 기울였다. 갑자기 가까워지는 얼굴에 뽀뽀를 기대하며 두근대고 있었으나…… 허무하게도 카렐은 손을 뻗어 안전벨트를 쭉 당겼을 뿐이다. 그러고는 참 다정히도 손수 채워 주었다.
“갈까요.”
사샤는 기대가 무너진 후에도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는 왼쪽 가슴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카렐은 그런 사샤의 옆모습에 흘끔 시선을 주었지만 더 자세히는 묻지 않았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카렐이 운전하는 차를 직접 타는 건 처음이었다. 사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차를 탔는데 더 오래 걸리네.’
얼마 후 사샤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벌써 네 번째 곡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제 달리는 속도로 12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인데 차로는 돌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사샤는 바깥에 강이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카렐, 우리 어디 가요?”
그 말에 카렐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묻는 걸 잊었네. 드라이브 괜찮죠?”
링컨 터널 램프를 지난 차가 허드슨 강을 건너고 있었다. ‘뉴저지 방면’이라는 글자를 본 사샤의 가슴은 기대감에 두근거렸다. 예정에 없던 밤 드라이브에 방금 전까지의 울적한 기분도 씻겨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렐은 호보켄의 강변 공원에 차를 세웠다.
“으앗!”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강바람에 사샤의 머리카락은 위아래로 뒤엉켰다. 스포츠백에서 헤어밴드를 찾는 사이 카렐이 ‘이쪽으로 와요’ 하고 사샤의 팔을 끌어당겼다. 카렐에게 이끌려 바라본 눈앞에는 맨해튼의 전경이 담겨 있었다.
“와…….”
“처음 와 보나요.”
“네, 처음이에요.”
“뉴욕에 와서 뭘 하며 지낸 거예요?”
사샤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가로로 긴 섬을 빼곡히 장식하는 빌딩의 지도를 바라보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전체가 수면 위에 떠 있는 듯했다.
“몰라요. 발레만 해서…….”
사샤의 불퉁한 목소리에 카렐은 쿡쿡 웃었다.
“기쁘네요. 이 광경을 처음 소개해 준 게 나여서.”
“고마워요, 카렐.”
카렐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짓기만 했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는, 그 자체로 행복하다는 듯한 느긋한 미소였다.
사샤는 갑자기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카렐?”
“네.”
“제 고맙다는 말을 대강 듣지 마세요.”
사샤의 맥락 없이 당돌한 말에 카렐이 웃음을 터뜨리며 변명했다.
“한 번도 대강 들은 적 없어요.”
“아니에요. 카렐은 짐작 못 해요. 제가 얼마나 강렬하고 심하게 고마워하는지…….”
조금 전에 사샤는 카렐의 이런 다정함 덕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깨달은 참이었다. 그건 정말로 목숨을 다해 고마워할 만한 일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약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데도 원망할 수 없을 만큼.
카렐에게 이런 자신의 기특하고 아련한 마음이 다 전해질는지가 궁금했고, 또 애가 탔다.
“카렐은…… 어떨 때 행복을 느껴요?”
사샤는 소프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느리게 말했다.
“음…….”
카렐이 턱을 매만지며 미소 지은 채로 강가를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에 사샤의 대화는 흐름이 중구난방이라 또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구나, 하고 황당하게 받아들이기 일쑤였다. 단순히 어려서 그렇다기에 지나치게 자기 세계가 강한 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렐이 가까이서 살펴본 바로는 사샤에게는 항상 저 나름의 논리가 있었다. 그것을 오랜 관찰로 깨달았던 그는 고심하지 않고 사샤의 질문에 충실히 응답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럴 때 행복을 느끼죠.”
카렐은 눈앞의 소년을 향해 말했다.
그건 그의 나이 33살을 통틀어 가장 간지럽고 쑥스러운 기분으로 한 고백이었다. 사샤의 어리숙함과 미숙함을 감정적으로 파고들면 안 된다는 핑계로 돌려 말한 간접적 고백.
우스운 것은 감정을 조금 드러내는 것만으로 사춘기 때에나 느껴 보았던 설렘 따위가 그의 가슴 밑바닥에서 피어났다는 것이다. 흑백 필름 속 사샤 세드린에게 집착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생동하는 감정이기도 했다.
물론 나이의 격차가 워낙 커서 가끔은 세대 차이도 느끼고, 여전히 반쯤은 육아를 하는 기분에, 연애의 진도와 방식 그 모든 게 저와는 다른 상대 때문에 곤란함을 느낄 때도 있지만…… 심장을 꽉 조이는 듯한 사랑스러움, 이런 감정을 찰나라도 느낄 수 있다는 것으로 사랑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카렐은 자신이 축복받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이런 카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샤는 그 대답에 작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러더니,
“네…….”
하고 힘없이 수긍했다.
잠시 후 사샤의 입에서 나온 말에 카렐은 미궁에 빠져 버렸다.
“저도 카렐이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행복하면 좋겠어요.”
“……?”
“그게 제가 아니더라도요. 저는 카렐이 행복한 걸로 족해요…….”
카렐을 올려다보는 사샤의 눈은 물기로 축축했다.
“사샤?”
“카렐은 이미 나이가 꽉 찼고…… 연애가 바로 결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나이잖아요. 이러다 노총각이 되면 어떡해요. 저는 방해할 생각 없어요. 그렇게 이기적인 애는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 하는 겁니까.”
“야경, 보…… 보여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카렐의 은혜 평생 잊지 않고, 흣…… 훌륭한 무용수가 되어서 공연 때마다 티켓을 보내 드릴게요.”
“……왜 벌써 헤어진다는 소리를.”
“그때 결혼하신 분이랑 같이 공연 보러 오세요?”
“사샤, 이리 와 봐요.”
꽤나 구체적인 망상이었다. 당황스러움을 느낀 카렐은 사샤를 근처의 벤치에 앉혔다.
그리고 사샤는 카렐이 건네주는 티슈에 코를 풀면서 얼마 전 멍든 무릎을 꼬집었다. 너무 아프면 슬픈 감정도 잊어버릴까 싶어서다. 그러나 눈물을 통증으로 치환하려던 방식은 허무하게 실패했다. 아픈 곳을 괴롭히자 서러운 눈물이 더더욱 차올라 버렸던 것이다.
잠시 후 카렐은 진정된 사샤를 앉혀 놓고 그 망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물었다. 처음에 카렐의 질문을 추궁으로 받아들인 사샤는 서러워하며 화를 내다가, 더는 말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러더니 곧 자신의 버릇없는 말투를 용서해 달라고 빌면서 핸드폰의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어 보여주었다.
짧은 순간 사샤의 분노와 슬픔, 억지, 간청을 다 구경한 카렐은 약간 지친 기분으로 핸드폰을 살폈다.
“……이걸 언제 봤죠?”
카렐이 다소 굳은 표정으로 묻자, 그가 저를 힐난한다고 생각한 사샤는 다시 울분을 터뜨렸다.
“아까요! 8시에 봤어요. 시간도 정확히 기억해요. 이걸 보다가 연습에 늦을 뻔했으니까요. 아니, 늦지는 않았지만…….”
“아침까지만 해도 없던 기사인데.”
후, 하고 한숨을 쉰 카렐이 물었다.
“당신은 하루 종일 틈날 때마다 내 이름을 검색해 보고 있나요?”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려니 왠지 민망해서 사샤는 우물쭈물했다.
입을 다문 사샤를 보면서 카렐이 깊게 한숨 쉬었다. 그는 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 넘기고는 핸드폰을 사샤의 눈앞에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이건 거짓 기사예요.”
“……진짜요?”
카렐을 계속 마음껏 좋아하고 싶었던 사샤의 마음이 순식간에 기울었다. 카렐의 쪽으로.
“그럼요. 내일 당장 허위사실에 대한 루머 유포로 고소장을 날리고 파산시켜야겠어요. 삼류 스캔들 기사를 소문으로 만들어 내는 회사 따위는 다시는 영업하지 못하게 만들 겁니다.”
굳은 표정으로 나직하게 으르렁대는 카렐이 무서워서 사샤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지나치게 화를 내는 모습에 몹쓸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사샤는 곧 풀리지 않은 의문 하나를 짚어냈다.
“그런데 왜 둘이 찍힌 사진이 있어요?”
“……사진만으로 나를 의심해요?”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샤. 사진은 믿을 게 못 돼요. 일례로 당신과 나는 이렇게 가까운데 사진 한 장 없잖아요.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그리고…… 오하라는 따로 약혼한 남자가 있어요. 이 반지도 그에게 받은 것이고. 단지 일반인이라 기사거리가 되지 않을 뿐.”
“……정말요……?”
“못 믿겠으면 삼자대면이라도 시켜 줄게요.”
원래부터 카렐의 편이었던 사샤는 그 말을 얼른 믿었다.
“아니에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오해한 것도 당연하죠.”
고작 몇 시간짜리 오해가 풀리자 사샤는 마음이 스르륵 녹아 그에게 안기고 싶어졌다.
조금 눈치를 보다가 사샤는 그 틈을 좁히며 카렐에게 들러붙었다. 하지만 그 순간 카렐이 멈칫 물러났다. 그러고는 사샤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왜 가까이 오죠?”
“……음…… 왜요?”
“뭐가 왜예요.”
카렐의 선 긋기에 사샤는 다시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아무래도 그의 허벅지에 올라타 앉으려던 계획은 실패했구나, 하면서.
그렇다면 이 순간 단단히 일러둘 것이 하나 있다.
“카렐? 제가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다소 단호한 사샤의 목소리에 카렐이 떨떠름한 시선을 내렸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건 퍽 방어적으로 보였다. 사샤가 도전적으로 바라보자 카렐이 계속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한 번 천천히 끄덕였다.
“저는 미성년자지만 미성년자한테도 섹스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거 아세요?”
“섹…… 뭐라고요?”
카렐은 말문이 막힌 얼굴로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섹스를 할지 말지 제가 결정하는 거예요. 주체적으로요.”
“성적자기결정권 말하는군요. 그게 왜…….”
“뉴욕 주는 열일곱부터예요. 이건 모르셨죠?”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는 열일곱 살인데, 그러면 저는 제가 원하는 아무나와 성관계를 해도 상대방은 처벌받지 않아요.”
“그런…… 건 어디서 봤습니까?”
카렐은 당혹스러운 듯 물었다.
“인터넷에서…….”
사샤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카렐은 탁,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내리며 하루 종일 인터넷 창에 제 이름과 섹스를 번갈아 적어 넣고 있는 사샤를 상상했다.
“……영문 읽기가 많이 늘었군요.”
“그, 그거밖에 하실 말씀이 없나요?”
“인터넷은 줄이는 게 좋겠다?”
“네…….”
김이 빠진 사샤는 제 마음을 몰라주는 카렐을 약간 원망스럽게 올려다보았다.
강바람이 불어와 카렐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다운 야경을 눈앞에 둔 채로, 이 낭만적인 풍경 앞에서 사샤는 오늘 밤 카렐과 키스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러고는 호텔에 들어가서 침대에서 엉망으로 뒹굴고…….
그때 카렐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는…….”
사샤는 여전히 강 너머에 시선을 주고 있는 카렐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카렐의 손이 뻗어와 저를 올려다보는 사샤의 뺨을 손등으로 슬쩍 문질러 주며 말했다.
“내가 하는 말만 믿으세요.”
“…….”
“의심이 생길 때는 내게 물어요.”
사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사샤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카렐이 제 품에 사샤를 먼저 끌어당겨 주었던 것이다.
강바람에 살짝 추위를 느끼던 사샤는 기분 좋게 퍼지는 온기에 파고들며 카렐의 냄새를 실컷 맡았다. 셔츠에 살짝 묻어 있는 바람 냄새 아래 온기를 담은 향이 코로 파고들었다.
카렐의 손이 사샤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드는 순간 그가 마른 입술을 사샤의 이마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한때의 굿나잇 키스와 같은 동작이었지만 오래도록 닿은 입술 때문일까, 그때보다 더 성숙하고 야한 느낌이 들었다. 카렐이 제 귓불을 만지작거리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카렐, 아무튼 잊어버리지 마세요.”
“뭐를 말이죠.”
“제가 열일곱 살이고 섹스결정권이 있다는…… 읍.”
“섹……스결정권이 아니라 성적자기결정권.”
카렐이 한숨 쉬듯 말했다. 사샤는 그의 손바닥에서도 좋은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며 그를 올려다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돌아오는 길 이미 육신이 지쳐 있던 사샤는 조수석에서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얕게 잠이 든 채로 누군가 저를 안아 드는 것을 느꼈다.
그건 카렐이 틀림없었다. 다정하고 신사적인 팔의 움직임, 반대로 힘이 제대로 들어간 선명한 근육이 안긴 어깨와 무릎 뒤에서 느껴졌다.
‘카렐과 나는 곧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몰라.’
눈을 감으며 사샤는 기분 좋게 짐작했다. 나이를 먹어 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렐의 내면에서도 무언가가 변하고 있었다. 그게 사랑까지는 아닐지라도, 아무튼 조금 더 확률이 올라간 것은 틀림없다.
사샤는 잠결에도 자신을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는 카렐이 좋아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나 잠에 취해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손가락은 아기 손가락처럼 허무하게 떨어졌다.
‘잘 자요. 나의 사샤 세드린.’
숨소리와 같은 속삭임이 이마 위에서 흩어졌다.
수천 번 반복된 것 같은 익숙한 감각이었다. 무언가 실마리가 잡힐 것 같은 기분에 사샤는 잠에서 깨려고 했다. 그러나 무거운 눈꺼풀이 들리는 일은 없었고, 사샤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