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오늘의 사샤를 기억해 주세요
“모두 앞으로.”
발레 미스트리스 올가가 양손을 들어 학생들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사샤를 비롯한 학생들은 센터로 우르르 쏟아져 나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섰다. 60여 명이 함께 움직이는데도 연습실 바닥을 울리는 소리는 작은 고무공을 튀기는 정도의 소리뿐이었다. 모두 발끝으로 소리 없이 걷는 습관이 든 덕이다.
“1번 포지션, 알 라 스콩.”
올가가 팔을 양옆으로 부드럽게 펼치며 거울을 보고 섰다. 올가의 머리는 이미 잿빛으로 군데군데 희게 셌지만, 오랜 시간 무용수로 활동했던 그녀는 여전히 발레 댄서다운 시선을 유지한다. 먼 곳을 보듯 가볍게 턱을 든 채로 정렬한 학생들을 한 바퀴 느리게 둘러본 그녀를 따라 학생들 모두 수업을 마치는 마지막 인사, 레베랑스(révérence)의 준비를 했다.
사샤는 수천, 수만 번을 반복했을지 모르는 인사를 다시금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모든 동작을 소중히 연결했다.
다리는 1번 포지션을 유지한 후 팔은 알 라 스콩 자세로 양옆으로 뻗는다. 그다음 플리에를 하며 2번 포지션, 동시에 오른 다리로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며 왼발은 그대로 바닥을 쓸어 뒤로 보낸다. 그리고 더더욱 팔을 길게 뽑아내는 알롱제와 무릎을 살짝 굽히는 플리에.
끝까지 뒤로 뻗은 다리의 턴 아웃을 신경 쓰며 인사를 마쳤다. ‘정말 잘하는 아이들은 무대로 걸어 나오는 걸음걸이, 그리고 마칠 때의 인사만 봐도 확 티가 나거든’. 여전히 사샤의 발레 개인 교습을 해 주고 있는 브라운 씨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요즘 그녀는 사샤에게 지난 2월에 치러진 로잔 콩쿠르의 작품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콩쿠르에서 심사위원들과 관객을 사로잡는 약간의 팁 역시.
그리고 얼마 뒤면 사샤는 선생들의 조언을 얻어 로잔에 들고 나갈 작품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예정이었다.
올가 특유의 우아한 레베랑스를 마지막으로 오전 클래스가 모두 끝났다.
“점심 맛있게 먹어요.”
올가가 뒤돌아 학생들에게 말을 하자마자 마침 딱 맞게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감사하다는 말을 허공에 아무렇게나 소리치고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연습실 입구로 마구 달려 나갔다.
올가는 픽 웃으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벽에 붙은 바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거나 남아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몇몇 아이를 지나쳐 그녀가 다다른 곳은 연습실 구석의 창가였다. 비스듬히 열어 놓은 창문으로 선선한 가을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올가는 라디에이터 앞에서 허리를 웅크린 채로 마무리 스트레칭에 여념이 없는 검은 머리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사샤 세드린?”
동그랗게 뜬 까만 눈이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레오타드의 반팔 소매 부분으로 땀 맺힌 콧잔등을 닦아내며.
올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한다. 로잔 비디오 셀렉션 통과했지?”
“아……. 어떻게 아셨어요?”
사샤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그 뺨과 귀는 금세 홍조로 물들었다. 발표는 로잔 콩쿠르가 열리는 스위스 시간으로 나서 아직 모르는 이들도 많을 텐데, 올가가 그걸 알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개인적으로 매년 확인하거든. 내가 학생이었을 때부터 그랬지. 이 학교에서 출전하는 학생이 나온 것도 4년 만이고……. 자랑스럽구나.”
올 초부터 로잔에 가겠다고 벼르던 조제가 떨어진 것은 알았지만, 그렇게 경쟁률이 높은 줄은 몰랐다. 사샤는 내심 크게 놀라며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몰랐어요.”
“앞으로 준비할 게 많을 거야.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렴.”
사샤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디오 예선은 프리 드 로잔에 가기 위한 최초의 관문이다. 전 세계에서 수백 명이 비디오를 접수하지만 통과하는 학생들은 매년 70여 명 정도. 그리고 그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것은 비로소 스위스에 가서 진짜 콩쿠르의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여전히 합격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사샤의 심장은 다시 크게 뛰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아시니? 많이 좋아하시겠구나.”
“아……. 아직 모르세요. 이제 전화 드리려고요. 시차가 있어서요.”
사샤가 둘러대자 올가는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말하고 멀어졌다.
물론 어머니에게는 전화를 드릴 예정이다. 하지만 올가의 말대로 기뻐해 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대신에 어제 새벽, 잠도 자지 못하고 발표를 기다리던 사샤를 알아채고 함께 밤을 새워 준 것은 카렐이었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일단 자요. 푹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 내가 결과를 알려줄 테니까.’
사샤는 그의 말을 듣고 억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 보았지만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 심장이 일정한 맥박으로 뛰다가도 ‘비디오 심사’를 떠올리는 순간 불규칙한 맥으로 마구 뛰어댔다.
‘카렐, 심장이 너무 심하게 뛰어서 잠이 안 와요.’
카렐은 그게 스트레스로 인한 ‘이소성 심박’이라고 판단했다. 사샤는 자신의 손목을 큰 손으로 감싸고 의학용어를 읊조리는 카렐의 목소리가 좋아서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카렐은 안겨 드는 사샤의 팔을 그대로 붙잡아 부드럽게 밀어내긴 했지만, 그 뒤에 함께 나란히 소파에 앉아 공지가 뜰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사샤, 나갈 때 창문 닫고 나가렴.”
연습실을 간단히 정리한 올가가 그렇게 말하며 앞문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연습실 안에 남은 사람도 없어서 사샤 역시 바닥에 흩어진 슈즈를 챙겨 곱게 접어서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창문을 탁탁 잠그고 점검을 끝낸 사샤는 복도로 걸어 나왔다.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 구내식당으로 향하면서 사샤는 다시 귀를 붉혔다.
‘나는 조금 밝히는 편인가 봐.’
어젯밤 카렐은 사샤가 좋아하는 발레 영상을 이것저것 유튜브로 틀어 주면서 발표가 뜨는 시간까지의 지루한 공백을 버텼다. 물론 카렐과 함께 좋아하는 댄서들의 춤을 보는 그 시간도 무척 행복했지만, 사샤는 이내 몸이 달아 저도 모르게 허리를 꿈틀댔다.
사샤는 카렐의 팔에 뺨을 기대어 그의 체온을 느끼다가, 느슨하게 누워 패드 화면을 바라보다가, 점점 더 늘어져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버렸다. 그러자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가 살짝 벌어지며 사샤가 편하게 누울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카렐의 배려도 좋았지만…….
사샤는 그보다 더욱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그건 정말…… 엄청……. 엄청나게 크고 뜨거웠는데.’
그렇게 머리를 기댄 카렐의 허벅지에서 다리가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졌다. 처음에 카렐이 바지 안에 딱딱한 막대기를 넣어 뒀다고 생각한 사샤는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그걸 뒤통수로 더듬다가 잠시 후에야 자신이 큰 실례를 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샤?’
그렇게 말하던 카렐의 눈은 짙게 가라앉아 있었고 조용히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걸 떠올리자 등에 소름이 돋았다. 무서운 눈.
아무튼 사샤는 카렐의 것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제발 한 번만 실제로 봤으면…….’
복도를 걷던 사샤의 발이 덜컥 멈추었다.
“아…….”
사샤는 학교 복도에서 노골적인 야한 생각을 하고 만 자신에게 흠칫 놀랐다. 그러고는 엄청나게 부끄러워짐과 동시에 구제불능의 쓰레기가 된 것 같아서 빠르게 복도를 달려 나갔다. 휭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사샤를 몇몇 학생이 흘끔댔다.
카렐과 ‘진짜 키스’를 했던 날, 사샤는 자신은 물론이고 그 역시 발기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사샤는 지나치게 늦된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 탄식했다.
옷감 너머로 느껴지던 것의 온도와 크기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된 건 그 뒤 찾아온 몽정 덕이었다. 예전에는 큰 손과 나직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일 뿐이던 꿈속의 상대는 키스를 한 이후로는 완전히 카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엉덩이 아래에서 느껴지던 그 뜨거운 감촉을 정확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면 그날 키스로만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카렐 역시 흥분했다는 것을 그때에 알아챘다면 한 번만 보여 달라고 졸라 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사샤가 추정하기로 그건 바지춤에 숨기기 힘들 만큼 엄청난 질량을 가지고 있었다. 사샤는 그제야 카렐의 바지의 양쪽 통 사이즈가 왜 다른지 깨달았다. 그만한 물건을 넣고 다니려면 당연히 사이즈가 달라야 할 것이다. 아무튼 바지춤의 좁은 공간에 숨 막히게 갇혀 있는 그것을 자신이 깔고 앉기까지 했으니 카렐에게 큰 실례를 한 게 틀림없었다.
‘진짜 엄청 컸어, 엄청…….’
문을 통과해 학교 부지를 빠져나와 광장까지 뛰쳐나온 사샤는 학학 숨을 몰아쉬며 분수대 앞에서 터덜터덜 걸음을 멈추었다.
사샤는 큰 나무 앞에 서서 그 주변을 멍한 눈으로 천천히 돌았다. 괜히 나무둥치를 쓰다듬으며 몇 바퀴를 돌자 주변에 있던 청설모들도 몽땅 도망가 버렸다.
사샤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상상한 카렐의 것과 비슷해 보이는 굵기의 가지들이 하늘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사샤는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굵기를 찍어 놓고 위를 올려다보며 한참을 감상했다.
‘음……. 너무 굵은가? 흠…….’
어쩌면 생각을 조금 수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왜곡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제가 무조건 ‘큰 게 유리하다’고 거의 세뇌를 해댔기 때문에 사샤는 뭐가 어디에 유리한지도 모르면서 그 그릇된 성지식을 받아들여 카렐의 것을 엄청난 크기로 상상하고 있었다. 바지에 감출 수 없을 만큼으로 말이다…….
잠시 후 사샤는 나무둥치에 이마를 박으면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제 자꾸만 허벅지에 머리카락을 비비적대었던 자신에게 화가 났으면서도 카렐은 꾹 참고 사샤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줄 뿐이었다. 사샤는 혼자 몸을 뒤틀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카렐을 안타깝게 올려다보았다.
‘이것 보세요. 잠을 자지 않으니까 눈이 충혈되잖아요.’
‘아니에요, 이건 흥분돼서…….’
‘또 그런 헛소리를 할 거라면 그만두세요.’
카렐은 사샤의 수작을 엄격히 차단하면서 유튜브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누가 들어도 로봇 같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이 사람이 추는 방식이 마음에 듭니다. 팔 동작이 우아하고 허리가 유연해 보이거든요. 내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런지 몰라도, 남자 댄서들은 보통 파워를 중시하는지 이렇게 부드러운 느낌으로 춤을 추는 사람이 별로 없던데……. 그래도 난 우아한 쪽이 좋아요. 댄서들 선호는 어떻죠?’
카렐이 일방적으로 시작한 ‘발레 상식 토론’에 사샤는 한숨을 쉬며 흥분 속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냥 스타일이에요. 남자들도 유연성이 좋고 표현력이 좋으면 얼마든지 그런 스타일이 될 수 있어요. 파워가 있는 댄서들은 자기 장점을 살리는 거고요…….’
그제야 카렐은 관대한 얼굴로 돌아와 ‘당신은 어느 쪽이죠?’ 하고 물었다.
그를 올라타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는 것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사샤는 카렐과 제대로 키스를 하고 난 이후에 다시 한 번 그렇게 키스할 기회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뒤로 사샤가 호시탐탐 틈을 노려도 카렐은 철벽같이 선을 그었다.
카렐은 대체로 사샤에게 관대했다. 진짜 부모님처럼. 그러나 그 말에는 어폐가 있다. 사샤는 제 부모에게도 그런 이해와 지지를 받아 본 적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카렐의 존재란 사샤에게 유일하고 소중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샤는 가끔 충동적으로 저도 모르게 카렐을 건드릴 때가 있었다. 그의 욕실에서 물소리가 그칠 때쯤 문을 몰래 열어 본다든가―물론 들킨 즉시 카렐은 문을 걸어 잠갔다―카렐의 마스터룸으로 들어가 그의 이불 속에 조용히 파고들기도 했다.
카렐은 사샤가 이불 속에 숨어들 때까지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5초에 한 번씩 카렐이 깼는지 확인하던 사샤는 그가 푹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안심해 버렸다. 그러고는 딱 한 번만 눈으로 확인해 보자며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는데…….
그 순간 카렐이 사샤의 손을 턱 붙잡았다.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에 사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선을 넘지 말아요.’
다그치는 눈이 무서웠다. 그는 진심으로 화난 것 같았다.
그때 사샤는 덜컥 겁을 먹고 죄송하다고 빌었다. 이다음부터는 카렐이 원하지 않는 이상한 손장난은 절대로 치지 않겠다고 용서를 구했다. 사샤가 겁이 나서 눈물을 줄줄 흘렸을 때에야 카렐은 미심쩍은 눈으로 겨우 손목을 놓아 주었다.
닿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미움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것이 사샤의 현재 딜레마였다.
‘그래도…… 딱 한 번만 실제로 보고 싶어.’
그 색깔을 알고, 휘어진 방향이나 핏줄 따위를 성이 찰 때까지 관찰하면 이 갑갑한 마음이 좀 가실 것 같았다. 그걸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한번 보기라도 하면…….
그러면 카렐이 등장하는 꿈이 더욱 다채로워질 테니까 말이다.
“하아…….”
그리고 사샤는 공공장소에서 더 이상 야한 생각을 하다간 본인이 곤란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러다간 아래가 불편해져 미묘하게 어기적거리며 걷게 된다. 이쯤에서 상상을 멈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샤는 핸드폰을 꺼냈다. 나무 근처의 벤치에 앉자마자 사샤가 검색한 것은 ‘카렐 클레멘츠 스캔들’ 세 단어였다.
손톱을 자근자근 씹으며 화면을 바라보자 이미 여러 번 살펴본 관련 기사가 주르륵 떴다. 그중에는 셀럽과 배우, 귀족, 유명한 기업인들의 가십거리를 치열하게 분석하는 블로그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 데 열을 올리는 일부가 쓸데없는 잡다한 정보까지 전부 긁어모으는 것이었지만 사샤에게는 무척 흥미로웠다.
흥분을 빨리 가라앉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질투였다. 이 방식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에 사샤는 카렐을 뉴스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을 그저 신기해했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그의 모습을 파파라치 사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다 사샤는 카렐의 옛 스캔들 기사들을 집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글자 읽기를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화면 안에 빼곡히 들어찬 작은 글자들을 눈자위에 실핏줄까지 세워 가며 읽었다. 그리고 사샤는 진심으로 카렐의 지난 상대들을 부러워했다. 제가 모르는 스캔들이 보이면 심각하게 울적해졌다가 그 기사가 뜬 날짜가 몇 년 전인 것을 보고 진정하기 일쑤였다.
이제 사샤는 아주 진지하게 그 상대들을 질투하고 있었다. 어렴풋하던 몽정이 자세한 포르노로 발전하게 된 이후에 그 질투는 더더욱 극심해졌다.
‘섹스했을까?’
입술을 깨물면서 사샤는 화면 속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했겠지?’
이미 다 끝난 관계라 해도 몸을 섞은 사이라고 생각하면 부러워 미칠 것 같았다. 어느새 사샤의 흥분은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드러난 팔뚝을 스치고 지나가는 선선한 가을바람도 한몫했다. 사샤는 점심시간이 다 지나도록 홀로 벤치에 앉아 밥 먹는 것도 잊고 카렐의 스캔들 기사를 탐독했다.
사샤는 오후의 일반 과목이 시작되고 한 시간이 더 흐른 뒤에야 점심을 먹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위장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아 납작해진 뱃가죽 안에서 자꾸 소리가 나서 저도 모르게 허리가 굽어졌다.
“사샤 세드린? 배가 아프면 화장실에 다녀와도 좋아.”
교단에 선 선생님은 이해력은 떨어져도 항상 허리만은 꼿꼿하게 펴고 있던 사샤가 책상 위로 엉거주춤 엎드린 것이 배가 아프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사샤는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동시에 아이들의 시선이 저에게 꽂히는 바람에 말과 호흡을 함께 삼켰다.
사샤가 조금 달아오른 귀로 말없이 고개만 가로젓자 선생님은 다시 수업을 이어 갔다.
야한 생각을 하며 한심할 정도로 혼자 흥분하고, 그걸 가라앉히기 위해 스캔들 기사를 본 걸 자책하면서 사샤는 먹고 싶은 것들을 떠올렸다. 구내식당에서 팔고 있는 필리치즈스테이크를 생각하고 있으니 시간이 잘 갔다. 배에서 나는 소리는 한층 더 심해졌지만 말이다.
쉬는 시간이 다가오자 사샤는 빵이라도 사 먹으려고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그러나 교실을 빠져나가는 데는 실패했다.
“얘들아, 다들 잠시 모여 보렴. 좋은 뉴스가 있단다.”
하필 그때 교실로 들어온 줄리아가 아이들 모두를 불러 모았기 때문이다.
문가에 서 있다가 발목을 잡힌 사샤를 향해 그녀가 손짓했다. 사샤는 영문을 모른 채 교단 앞으로 어정쩡 걸어 나갔고, 줄리아는 사샤가 앞을 보도록 바로 세운 뒤에 사샤가 프리 드 로잔의 비디오 예선에 합격했다고 모두에게 알렸다.
“다음 로잔에 나가는 건 우리 학교에서는 사샤 한 명뿐이야. 내년 2월이니까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모두 축하해 주면 좋겠구나.”
그리고 사샤는 예기치 못하게 아이들에게 휘파람 섞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런 식의 주목은 기분 좋았다. 덕분에 사샤는 잠시 허기를 잊고 멋쩍은 느낌으로 귀를 매만졌다. 그 와중에 조제의 시큰둥한 표정이 눈에 띄었다.
조제는 지난 그랑프리에서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왔다. 게다가 로잔 비디오 테스트에서도 떨어지고 말았다. 사샤는 조제의 외면이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를 바랐다.
조제의 옆에서 마누엘이 슬픈 얼굴로 사샤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 지난 학기 사샤를 정학에 이르게 했던 폭력 사태의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마누엘은 다행히도 제 잘못을 시인하고, 그 뒤로 죽은 듯이 조용히 지냈다.
사샤는 그사이에 또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그건 차라리 이런 것 따위는 짐작도 하지 못한 채로 ‘완벽한 친구 관계’라는 환상에 빠져 있는 게 나았을까 싶을 정도로 씁쓸한 진실이었다.
사샤가 깨달은 진실이란 이런 것이었다.
마누엘이 처음 자신에게 다가왔던 이유는 저와 친구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는 것.
게이인 마누엘은 ‘성적인 관심’ 때문에 사샤의 주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그 모든 깨달음은 사샤가 카렐을 상대로 명백한 성적인 욕구를 가지게 되면서 순차적으로 찾아왔다. 왜 마누엘이 저의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왔는지, 그렇게 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고 제 바지 속에 왜 손을 넣었는지……. 카렐에게 똑같은 행위를 하고 나서야 사샤는 벼락같이 깨달았던 것이다.
자신이 카렐에게 품은 마음을 마누엘이 저에게 똑같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오래전 마누엘이 한 일을 원망만 할 수도 없었다. 마누엘도 지금의 저처럼 성욕에 휩쓸린 것이다.
어쨌든 사샤에게는 이런 것을 깨닫는 것도 성숙해져 가는 한 과정처럼 느껴졌다.
“사샤,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할 거지?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을 거지?”
줄리아가 등을 두드리며 다정하게 물어 사샤는 작게 대답했다. 잠시 사샤를 주목했던 교실 안은 다시 소란스러워지며 주의가 흩어져 있었다.
“네…….”
학업에 대한 부분은 자신이 없었지만 사샤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학이나 역사, 문학 같은 분야에 대해 사샤는 ‘알 게 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렐이 영어 능력을 강조했으니 영어는 계속 공부해야겠지만 말이다.
사샤가 그런 내심을 숨기며 얌전히 대답하자 줄리아는 만족한 듯 미소 짓고 앞문으로 떠났다. 사샤 역시 필리치즈스테이크를 떠올리면서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사샤가 교실을 나서자마자 누군가가 그를 쫓아 나와 어깨를 짚었다.
사샤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 서 있던 것은 마누엘이었다. 마누엘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달싹였다.
“무슨 일이야?”
사샤의 물음에 마누엘은 굼뜨게 입을 벌렸다.
“넌 이제 먼 곳으로 가는구나……. 점점 멋있어질 때부터 예상했었어. 이제 넌 나 같은 건 잊겠지. 나와 있었던 일들도 잊고…….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날 거야. 하지만 나는 너와 한 클래스에서 같이 발레를 했던 걸 평생 기억할 거야.”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마누엘의 말을 들으며 사샤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마누엘이 중얼거리는 건 꼭 소프 드라마 속 대사 같아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 훨훨 날아가. 그렇게 내 손에 닿지 않는 곳까지 멀어져 별이 돼…….”
“응……. 고마워.”
사샤는 할 말이 없어 그렇게만 답했다. 동시에 ‘이게 프랑스인인가.’ 하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갈게. 왜냐하면 배가 고파서…….”
그리고 사샤는 주춤주춤 발을 옮겼다. 사샤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의 등 뒤로 혼자만의 실연을 겪은 마누엘의 슬픈 시선이 다시금 따라왔다.
앞으로 마누엘은 사샤에게 이전처럼 쉽게 말을 걸지 못할 것이다. 웃지 않을 때의 그늘진 사샤의 얼굴은 무척 사연 있어 보였고, 또 말을 길게 하지 않는 버릇 때문에 그 말투가 무뚝뚝하고 차갑게 들리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필리치즈스테이크, 혹은 카렐의 그것 생각만 가득할지언정.
그리고 마누엘뿐만 아니라 사샤의 외모를 추종하는 많은 여학생들은 사샤를 우유얼음으로 조각한 흑발의 왕자님 정도로 생각했다. 한때 물밑으로만 돌았던 게이라는 소문과 폭력 사태로 인한 정학 처분조차도 10대 아이들에게는 ‘사샤는 뭔가 다르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사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속을 알 수 없이 미스터리한 인물로 포장되어 갔다.
* * *
구내식당으로 달려 내려온 사샤는 12분 정도 남은 쉬는 시간에 초조해하면서 얼른 랩에 말아 놓은 필리치즈스테이크 샌드위치 하나를 샀다. 연습으로 항상 허기진 성장기 소년이 간절한 눈으로 먹을거리를 사 가는 것이 안쓰럽고 귀여웠는지, 마침 포스를 지키고 있던 계산원이 차가운 캔콜라 하나를 함께 던져 주었다.
사샤는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빠르게 음식을 해치웠다. 항상 사샤에게 영양성분을 갖춰 식단을 챙겨 주는 카렐이 보면 기함할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사샤는 입을 채우는 자극적인 맛에 행복하기만 했다.
‘조금 데워 달라고 할걸. 기숙사 주방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은데…….’
맛은 괜찮았지만 빵과 고기 사이에 있는 치즈가 굳어 있었다. 만든 지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런 것 같았다.
얼마 전, 학교에서는 사샤에게 다시 기숙사를 제공하겠다고 전해 왔다.
사샤에게 내내 죄책감을 품었던 마누엘이 재조사 당시에 사샤의 폭력이 고의적인 것이 아닌 사고에 의한 것임을 추가로 증언해 주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사샤는 부당한 정학 처분에 대한 보상안을 받을 수 있었다. 첫 번째로 학교가 제안한 것은 이번 학년을 시험 없이 패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년 진급은 사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직접 시험을 봐서 최우수 학생 타이틀을 따내는 것 역시 사샤의 기쁨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건 ‘보상’처럼 여겨지지가 않았다.
대신에 사샤는 올 연말에 극장 소속 발레단의 인턴으로 겨울 시즌 공연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작은 군무 역 정도가 주어지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발레단에 춤으로 자기 어필을 할 기회를 얻고 싶었던 사샤에게는 무척 기대되는 일이었다.
‘겨울엔 정말 바쁠 거야. 콩쿠르 준비도 하고 공연 준비도 해야 하니까……. 하지만 프로 댄서들은 이것보다 더 바쁘겠지? 몸 관리를 잘 해서 진짜 재밌는 겨울을 보내야지.’
그렇게 봄의 소동은 반년이 지나 잘 마무리되었지만…….
정학이 없는 일이 되었으니 학교에서는 당연히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라고 말했던 것이다.
차게 굳은 치즈를 소리 없이 씹는 사샤의 턱이 조금씩 느려졌다.
사샤는 그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갈등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카렐과 함께 사는 이 상황은 모로 봐도 분에 넘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갈등할 가치조차 없이 카렐과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나았다. 게다가 평생 발도 들일 수 없는 사치스러운 호텔 방에,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방 한구석에는 가벽을 터 저만을 위한 개인 연습실이 시공되어 있었다. 식비 걱정 없이 무한으로 룸서비스를 시켜 먹을 수도 있는 건 덤이었다.
카렐과 떨어져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바쁜 카렐은 종종 출장을 가기 때문에 혼자 자는 날도 적지 않았고, 하루에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제대로 된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삭막한 기숙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환경.
그러나 자신은 왜 이토록 차이 나는 조건을 두고도 갈등했을까. 사샤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 본능적으로 자립할 힘을 길러야만 한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고, 올바른 방향으로 성숙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누군가에게서 벗어나 그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
그러나 사샤는 그렇게 깊이까지는 통찰해 내지 못하고 그저 약간의 두려움을 느낄 뿐이었다. 카렐에 대한 제 사랑이 조금이라도 나약해진 것일까 봐.
* * *
난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어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에게서만요. 난 당신에게 키스 받고 싶어요. 다른 사람 말고 당신에게 말이에요…….
올드팝이 흘렀다. 마릴린 먼로의 목소리였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가볍고 애교스러운 음악이 눈앞의 소년과 썩 잘 어울렸다. 발레 댄서로서 처음으로 눈도장을 찍을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에게 보내는 프러포즈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게오르크는 카렐이 틀어 놓고 간 이 음악이 계산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I Wanna be Loved by You’, 이 노래는 지금부터 촬영할 영상의 배경음악으로 은은히 깔리게 될 것이었다.
“사샤, 내가 아닌 렌즈를 봐야죠?”
게오르크의 말에 사샤는 핸드폰 뒷면의 검은 렌즈 부분에 어색하게 시선을 주었다.
핸드폰을 세로로 세워 찍은 화면 안에는 검정색 티셔츠를 입은 사샤가 굳은 얼굴로 담겨 있었다. 가슴 가운데 인쇄된 발레 스쿨 로고를 제외하면 약간의 꾸밈도 없는 평범한 티셔츠였지만, 입은 사람의 몸매 때문에 그마저도 맵시 있게 보였다. 게다가 소매통이 넓고 길어 그 아래로 드러나는 흰 팔은 더더욱 늘씬해 보였다.
사샤는 두 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자기 팔을 문지르다가, 뒷짐을 졌다가, 다시 양손을 잡고 만지작대기를 반복했다.
“사샤. 손은 이렇게 하지요. 앞으로 놓고 손을 살짝 겹쳐요. 아랫배 위에 올리고. 그래요. 흠……. 지나치게 경직되어 보이나. 차라리 뒷짐을 지죠.”
게오르크의 지시에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뒷짐을 졌다. 그러자 자연스레 탄탄한 대흉근이 드러나고 쇄골이 살짝 솟아올라 보기 좋았다. 등 뒤의 벽에는 세로로 긴 창이 살짝 걸쳐져 그 너머로 반대편의 탁 트인 센트럴 파크를 비추었다.
흔한 맨해튼의 풍경이었다.
화면 안의 모습에 만족한 게오르크는 녹화 버튼을 눌렀다. 게오르크가 살짝 눈짓하자 사샤는 준비된 멘트를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프리 드 로잔에 참가하게 된 사샤 세드린입니다. 열일곱 살이고요. 지금은 뉴욕에…… 미국에? 살고…… 아니,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요. 발레는 일꼽, 일곱 살……. 저기, 게오르크……. 다시 할게요.”
게오르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버벅대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말해요.”
“진짜요?”
“그래요. 다들 그러던데요. 내 이름만 부르지 말아요. 그럼 보는 사람들이 이게 뭔가 할 테니까.”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로잔에서는 비디오 심사를 통과한 참가자들에게 로잔 공식 유튜브 계정에 올릴 만한 자기소개 영상을 보내달라고 했다. 최근 ‘유튜브’에서 뉴스 형식으로 편집된 할리우드 가십을 찾아보면서 카렐을 발견하는 재미에 푹 빠진 사샤는 거기에 자기 영상이 올라간다는 사실에 무척 긴장했고, 동시에 흥분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만족할 만큼 깔끔하게 녹화를 끝낸 사샤는 게오르크와 함께 촬영된 비디오를 보았다. 화면 속의 사샤 세드린은 약간 긴장한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사샤는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들어요. 얼굴이 너무 창백해 보여요.”
“그건 어쩔 수 없어요. 원래 그렇게 생겼잖아요.”
“옷 때문인 것 같아요. 흰색 옷 입고 다시 찍고 싶어요.”
“그럼 더 유령 같을걸요?”
사샤는 아쉬워하면서도 게오르크에게 설득 당했다.
“표정이 조금 바보 같아요. 말도 더듬거리고요……. 왜 자꾸 옆을 쳐다보는지…….”
“원래도 더듬거리잖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표정은 조금 웃는 얼굴이면 좋겠지만…… 나쁘지 않아요.”
“…….”
사샤는 화면으로 보는 자기 얼굴이 영 불만족스러운 듯했다. 게오르크가 보기에도 뺨과 입술이 붉고 눈은 항상 물 먹은 듯 빛나는 사샤의 진짜 생기를 화면에 모두 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본래 외모가 좋아서 화면 안에는 예쁜 얼굴이 잘 남았다.
“아무튼 제가 보기에 썩 괜찮은데요. 클레멘츠 씨에게도 보여 드릴까요?”
“안 돼요!”
“왜죠?”
사샤가 벌떡 일어나며 강경하게 말려서 게오르크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말도 더듬고 바보 같아요. 보여주지 마세요.”
“흠……. 어차피 나중에는 다 공개될 텐데요.”
“그럼 그때 가서 보라고 하세요. 지금 말고…….”
사샤가 이상할 정도로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게오르크는 그러마 하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오늘 녹화한 비디오는 로잔 측에 바로 보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사샤는 여전히 부끄러워하면서 녹화를 게오르크가 해 준 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카렐이 앞에 있으면 자신은 불법에 가까운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화면을 녹화하게 되면 누군가 제 음험한 머릿속을 알아챌지도 모른다…….
사샤는 세상 어딘가에 사람의 생각을 읽는 능력을 가진 초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흘끔대면 혹시나 야한 생각을 하던 것을 초인에게 들킨 게 아닐까 걱정되어 하루 종일 심장이 뛰었다.
이제 유튜브에 자기소개 영상이 올라가면 사람들이 제 모습을 많이 보게 될 텐데, 그중에 ‘사람의 생각을 읽는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없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심지어 앞으로 자신을 평가하게 될 심사위원 중에 있을 수도 있었다! 보통 그런 초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힘을 철저히 숨기니까 웬만해서는 알아챌 수 없다. 항상 조심해야 했다.
그래서 사샤는 만반의 준비를 다한 것이다. 자신에게 삿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카렐은 눈앞에서 치워 버리고, 머릿속엔 발레에 대한 열정과 콩쿠르를 통해 겪게 될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감만 남겨 놓았다.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제 머릿속을 바닥까지 휘저어 봐도 ‘참 성실하고 올바른 학생이군’ 하며 감탄할 수밖에 없도록.
그렇게 자기가 해낸 일에 대해 만족하면서 사샤는 폼롤러 위에 다리를 올리고 체중을 실었다. 최근 연습량이 늘어나면서 근막 통증이 늘었다. 원래도 근육통은 달고 사는 것이었지만, 최근엔 그 정도가 심했다.
트레이닝복 바지의 밑단을 무릎까지 걷어붙이자 쓸데없는 지방은 한 점도 붙지 않은 매끈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발끝을 손으로 잡고 발목을 천천히 돌리자 뼈를 따라 조밀하게 붙어 있는 작은 근육들이 섬세하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느긋하게 다리를 풀던 사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말했다.
“게오르크?”
“네.”
“영상…… 보냈어요? 다시 찍…….”
“방금 메일로 접수했습니다. 다시 찍자는 말 빼고 전부 들어줄게요.”
폼롤러 위에 기대어 앉은 사샤는 제 말을 원천 차단하는 게오르크를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침묵 밑에 가라앉은 불만을 읽은 게오르크가 어쩔 수 없이 물어나 본다는 듯 말을 던졌다.
“왜요.”
“제가 러시아에서 왔다는 말을 깜빡하고 안 했어요.”
“그게 중요해요?”
“제가 너무 바보같이 말해서 영어도 못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해요? 러시아 사람이라고 설명해 줘야 되는데…….”
“사샤, 국적은 그쪽에서 표시해 줄 거예요. 그리고 영어 잘했습니다. 앵커같이 말할 필요는 없어요. 발레 대회니까 발레만 잘하면 되지요.”
사샤는 또다시 게오르크에게 설득 당했다.
잠시 후 말없이 폼롤러 위를 굴러다니는 사샤를 보며 게오르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저나 연말부터 정신없이 바쁘죠? 그전에 피지컬 체크를 다시 한 번 하라고 하시던데요.”
“카렐이요?”
“네, 괜찮은 시간이 언제죠?”
패드를 펼친 게오르크가 캘린더를 확인하며 물었다.
사샤는 학교 수업과 개인 교습 시간으로 빠듯한 자신의 일주일 일정을 떠올리면서 게오르크에게 가능한 날짜를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세를 바꾸고 팔꿈치로 바닥을 지탱한 채 허벅지 근막을 꾹 눌렀다. 쿡쿡 쑤시는 듯한 깊은 통증이 느껴졌지만, 사샤는 도리어 이런 종류의 통증은 매우 기껍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마사지를 받았을 때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면 외려 서운하기도 했다.
이 정도의 통증을 버틸 수 있는 건 자신뿐일 것이다. 식은땀으로 등이 촉촉이 젖어 드는 와중에도 사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뿌듯해했다.
‘이런 것도 직업병일까?’
사샤는 게오르크나 바딤, 조제, 율리안처럼 가끔씩 저를 타박하는 얄미운 이들을 폼롤러 위에 올려두고 굴리는 상상을 했다.
그 위에서 특히 엄살이 심한 건 운동과는 거리가 먼 샌님 같은 율리안과 눈앞의 게오르크였다. 그냥 보기에도 몸이 뻣뻣한 게오르크가 차라리 죽여 달라며 괴롭게 신음했다.
헤실헤실 풀어진 사샤의 얼굴을 보고 게오르크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렇게 웃습니까?”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게오르크, 저기…… 스트레칭 평소에 자주 해요? 어른들은 안 움직이면 금세 근육이 딱딱해져요. 바딤이 그랬어요. 바딤처럼 전문 무용수였던 사람도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데, 게오르크는 더할 거예요……. 폼롤러를 빌려 줄 테니까 가끔씩 해 보세요. 시원하고 아주 좋아요.”
“흠…….”
게오르크는 사샤의 선의를 의심스러워하면서도, 그 탐스러운 검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리듯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리고 2주 뒤, 사샤는 피지컬 체크를 위해 카렐과 함께 워싱턴 D.C.로 떠났다. 학교 수업이 없는 주말을 이용한 짧은 나들이였다.
“짐 챙길 것 다 챙겼나요?”
출발하기로 한 토요일 아침 이른 시각이었다. 카렐은 마스터룸에서 나오자마자 피곤이 다 가시지 않은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항상 칼처럼 단정한 스리피스 슈트 차림이던 그가 이번에는 비교적 단출한 셔츠와 면바지 차림이었다. 오늘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에 동이 틀 때부터 눈을 뜨고 이불 속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던 사샤는 약간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은 지난밤 깊은 새벽에 돌아왔다. 어찌나 늦게 왔는지 사샤는 푹 잠들어 그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덕분에 어젯밤 사샤는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혼자 짐을 싸야 했다.
“가지고 와 보세요.”
사샤는 고개를 두 번 끄덕이고는 자신이 싸 놓은 짐을 들고 왔다. 한 번도 직접 들어보지는 않고 바닥에 펼친 채로 세상 모든 것을 쑤셔 박은 가방이 천근만근이었다. 몸이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휘청일 정도였다.
가방을 소리 없이 낑낑대며 들고 온 사샤는 스포츠백을 카렐의 앞에 탁 내려놓았다.
“음…….”
카렐이 곤혹스럽게 턱을 매만졌다. 사샤는 멋쩍게 뒷덜미를 매만졌다. 왜냐하면 그 가방은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비대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러시아에서 뉴욕에 올 때에도 이 가방에 모든 짐을 다 넣어 왔었다.
카렐은 스포츠백 앞에 가볍게 한쪽 무릎만 굽히고 앉아서 사샤를 올려다보며 허락을 구하듯 눈짓했다. 열어 봐도 좋으냐는 의사 표현이었다. 마치 공항 짐 검사를 미리 하는 기분에 사샤는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퍼가 지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카렐은 벌어진 가방 틈으로부터 가장 먼저 보이는 폼롤러와 돌돌 말아 놓은 요가매트를 꺼냈다. 요가매트는 제대로 말지 않아 꺼내자마자 활짝 펼쳐져 카렐이 수습하는 데 약간 애를 먹었다. 이어서 사샤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제일 좋은 레오타드 세 벌, 도톰한 조거팬츠 네 벌, 티셔츠가 다섯 벌……. 그리고 바닥에 깔려 있던 야구공 세 개를 연달아 꺼낼 때 카렐의 얼굴에 의심스러운 표정이 그려졌다.
“이건?”
“근막 마사지용이에요.”
“크기도 다 같은데 왜 세 개나……?”
“그…… 가서 잃어버릴지도 몰라서요.”
카렐은 말없이 사샤의 가방 안에 다시 손을 넣었다. 평생 읽어 보지도 않을 것 같은 장편 소설책 세 권을 차례대로 꺼내면서 카렐은 설명을 요구하듯이 사샤에게 책 표지를 차례대로 보여주었다. 『안나 카레니나』, 『어톤먼트』, 『오만과 편견』. 모두 카렐의 서재에서 꺼낸 책들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읽고 싶어질지도 몰라서요.”
그다음 카렐이 꺼낸 것은 호텔 로고가 붙은 물병 두 개였다.
“이것도 비행기 안에서 마시고 싶어질까 봐? 액체는 들고 탈 수 없어요.”
“아니요. 그건…… 공항까지 가는 길에요. 물을 사려면 차를 멈추고 내려야 하잖아요. 귀찮을까 봐 미리 챙긴 거예요.”
“그래요. 옷은 왜 이렇게 많이 챙겼죠?”
“음…….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울까 봐요. 가서도 스트레칭이랑 바 워크를 연습할 거예요. 땀에 젖으면 갈아입어야 하니까…….”
“가방은 왜 두 개죠?”
“하나는 병원 갈 때 가지고 갈 거예요. 하나는 그냥 밥 먹을 때 들고 다니고요.”
“……음, 그래요……. 그리고 이건…… 내가 쓰는 욕실에 있던 거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카렐이 꺼낸 것은 지퍼백 안에 담긴 샤워용품들이었다. 사샤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사실 사샤는 카렐이 이렇게 꼼꼼하게 짐 검사를 할 줄은 몰랐다. 워싱턴 D.C.에 가면 호텔에서 묵게 될 것이고, 그러면 어차피 같이 자고 같은 욕실에서 씻어야 하니 대놓고 카렐과 같은 용품을 써도 되겠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사샤는 항상 어른스럽고 좋은 냄새가 나는 카렐의 샤워용품과 꼼꼼한 그루밍 과정에 관심이 지대했으니까.
그러니 카렐이 빠뜨리기 전에 자기가 먼저 챙기자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호텔에 도착해서 카렐이 보는 앞에서 꺼내 놓으면 칭찬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아주 조금이지만―했다.
하지만 마치 질책당하는 듯한 분위기가 되자 사샤는 부끄러워졌다.
“아, 안 가지고 가실 거예요?”
“놓고 가도 크게 상관없어요.”
카렐은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사샤는 시무룩해져서 카렐의 앞에 조용히 마주 앉았다.
“1박 2일이니까 짐은 조금 간소한 게 좋겠습니다. 옷가지는 호텔에 바로 세탁을 맡길 수 있으니 갈아입을 것만 가지고 가세요. 야구공 같은 건 잃어버리면 새로 사 줄 테니까 하나만 가져가고요. 폼롤러와 매트는 호텔 측에 미리 준비해 달라고 요청하죠. 피트니스 센터에 구비되어 있을 겁니다.”
“…….”
카렐의 말이 다 맞았다.
사샤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비행기를 탄다는 사실에 지나치게 들떠 버린 것도, 여행 중 일어날 수 있는 백 가지 상황에 대비해 모든 짐을 싸려던 것도…….
게다가 자신은 호텔에서 폼롤러 같은 것을 대신 준비해 줄 수 있는지도 몰랐고, 세탁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그리고 필요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산다는 것은 가난한 사샤에게는 불가능한 행위였다. 가난이 제한해 놓은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카렐 덕에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자신은 이렇듯 뼛속까지 가난뱅이이고, 그 버릇은 시도 때도 없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사샤가 말이 없자 카렐이 피식 웃으며 사샤의 어깨를 가볍게 주물렀다.
“공항까지 가다가 무리해서 팔이 빠지면 어쩌려고요.”
“그, 그렇게 무겁지는 않은데요?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들 수 있는데요.”
사샤의 말을 들으면서도 카렐은 말없이 짐을 추려냈다.
사샤의 마음속에서 또다시 작은 사샤가 일어나 고집부리지 말라고 삿대질을 했다. 이번에는 작은 사샤가 옳았다. 그의 지적대로 ‘아무렇지 않게 들 수 있다’고 말한 건 고집이었다. 카렐도 그걸 알고 있는 듯했다. 다만 사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지적하지 않은 것뿐.
곧 카렐의 손에 의해 사샤의 가방 속 대부분의 짐이 빠졌다. 날아갈 듯 가벼워진 가방을 내밀며 카렐이 말했다.
“자, 됐습니다.”
조금 시무룩해진 사샤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카렐이 말했다.
“우린 러시아와 뉴욕을 왕복하는 게 아니니까요. 아주 가까운 데다 다른 나라도 아니니까 가볍게 갑시다.”
사샤는 고개를 떨구고 빨개진 눈가로 가방을 들었다. 홀쭉해진 가방은 별로 든 것도 없어 보기 싫게 축 처졌다.
가을 날씨는 선선하고 좋았다. 짧은 주말 나들이를 하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호텔을 나서 공항으로 가는 길에 카렐은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의 사샤를 내내 신경 썼다. 사샤의 짐을 마음대로 덜어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호텔을 나서기 직전 본인 가방에다가 사샤가 챙겨 가고 싶어 했던 호텔 로고가 붙은 물병을 넣었을 정도였다. 멋들어지게 손때가 탄 카렐의 여행용 가죽가방에 보기 싫게 물병이 튀어나왔는데, 그는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렐은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손수 생수병을 따서 사샤가 그 물을 마시게 했다. 공항에 가는 길에 물이 마시고 싶어질까 봐 챙겼었다는 사샤의 말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카렐이 자신을 얼마나 배려하는지 깨달은 사샤의 마음은 점차 누그러졌다. 카렐이 물병을 입가에 대어 줄 때는 힘없는 미소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큰 그림자가 사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사춘기인 사샤는 아주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한 누구나 선망하는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누군가 이런 자신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허세로만 가득 찼다며 손가락질하고 흉을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에게 추앙 받고, 박수 받고, 사람들이 주목해 주고, 선망 받는 인생을 살고 싶은 노골적인 욕망은 갈수록 커졌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카렐이 자신을 가치 있다고 생각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샤는 가끔, 지금은 카렐과 헤어진 블레이크 부테라를 떠올렸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완벽한 애티튜드의 검은 머리 영화배우. 배우 지망생이지만 적절한 커리어도 없이 만년 오디션이나 보러 다니던 그는 카렐과 헤어진 이후 여러 영화에 이런저런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다고 했다. 카렐이 아니면 파파라치에 찍힐 일도 없는 인지도일지라도, 그래도 한때 카렐의 연인이었다는 후광만으로 그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샤는 그 외에 카렐이 만났던 이들, 배우, 무용수, 상속녀…… 하나같이 화려한 타이틀을 가진 이들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사샤는 자신이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았다.
딱 한 가지 가능성은 로잔 콩쿠르에서 일등상을 차지하고, 빠르게 프로 발레 댄서가 되어 최연소 프린시펄 자리를 꿰차는 것이었다. 그러면 좁은 무용계를 벗어난 기삿거리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동시에 그런 자신이 추잡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발레에 대한 신실한 열정만이 아니라 ‘돋보이는 삶’을 살고 싶어 발레를 도구로 삼는 스스로가 무척 싫어서.
“사샤. 피곤하면 조금 자 둬요. 기내식을 먹지 않겠다고 미리 말하면 됩니다.”
사샤를 향한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던 카렐이 말없이 울적해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사샤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실제로 피곤한 것은 카렐이었던 모양으로, 그는 기내식도 물리고 비행 내내 잤다.
그제야 사샤는 깨달았다. 지난 새벽 카렐이 늦게 돌아온 이유는 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카렐은 귀중한 주말 시간을 빼서 저를 직접 데리고 워싱턴 D.C.로 가느라 바쁘게 잔업을 처리했을 것이다.
사샤의 자책감은 더욱 커졌다.
‘사샤……. 성가시고 허세만 가득 찬 바보 멍청이.’
‘이래서야 누가 널 사랑해 주겠어?’
‘카렐이 널 저렇게 신경 써주는데, 너는 네 생각으로만 가득 차서 카렐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할 줄 모르지.’
‘제발! 어른스럽게 굴어. 카렐은 성숙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 잊었어?’
‘그를 질리게 만들지 마.’
작은 사샤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충고했다. 그 말은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비수처럼 가슴에 와 박혔다. 카렐을 깨우고 싶었지만 당장의 외로움을 지우자고 그를 괴롭힐 수는 없었다. 사샤는 무릎을 의자 위로 올려 감싸 안고 몸을 최대한 작게 웅크렸다.
* * *
“근육의 과성장을 주의해야 합니다. 몸이 다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에……. 아까 반년 동안 몇 인치 자랐다고 했죠? 급성장하는 시기에 이렇게 과도하게 몸을 쓰면 좋지 않아요. 체력을 믿고 너무 많은 수업을 소화하고 있어요. 미래에 오래오래 활동할 수 있는 자산을 끌어와서 지금 소모시키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눈앞의 남자는 운동선수와 무용수처럼 몸이 자산인 이들의 전문 담당의로 명성을 날리는 의사였다. 카렐이 아니면 사샤는 만나 볼 수도 없을 만큼 바쁜 사람이라고 했다.
사샤는 그래서 자신에게 고칠 만한 큰 병이 있는지 아닌지 궁금했다. 또, 카렐이 기대를 걸만큼 완벽한지도……. 하지만 의사는 아까부터 애매한 대답만을 하고 있었다. 사샤는 그가 자신을 의식해서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체 왜? 충격 받을 만한 이야기라도 있는 걸까.
몸에 큰 흠이 있다거나…….
사샤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뜯으려 입가에 손끝을 가져가자 카렐이 가볍게 팔꿈치를 건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사샤는 고개를 수그리면서 방금 뜯으려던 손을 다른 손 주먹 속에 숨겼다.
“곧 무대에도 설 예정이고 콩쿠르 준비도 하고 있습니다. 무리가 될까요?”
카렐의 물음에 의사가 답했다.
“성장기 발레 댄서들의 가장 안타까운 점이 이겁니다. 가장 몸을 보살펴야 할 시기에 몸을 가혹하게 몰아붙이죠. 그때 인정을 받아야만 하니까요.”
계속 빙빙 도는 화제에 결국 카렐이 입을 열었다.
“사샤.”
사샤는 자신을 조용히 부른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카렐이 말했다.
“바깥에 나가 있어요.”
바로 고개를 저으려다가, 그러면 카렐이 싫어할 것 같다는 생각에 사샤는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바깥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의사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희미한 소리로 치환되었다. 사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의 의자에 가서 오도카니 앉았다.
‘카렐이 이렇게 신경을 써 주는데…….’
‘그의 기대에 부응해야지.’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사샤의 머릿속에서 작은 사샤가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사샤의 자아를 공격하고 멘털을 너덜거리게 만들었다.
“사샤…… 사샤?”
한참 후, 사샤는 제 앞에서 흔들리는 희뿌연 것이 카렐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채고 정신을 차렸다.
“뭐예요. 눈뜨고 잠이라도 잤나요?”
사샤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 멀리라도 갔다 온 것처럼 의식이 명료하질 않았다. 카렐의 말마따나 눈을 뜨고 꿈이라도 꾼 것 같았다.
“이제 저녁이나 먹으러 가죠.”
카렐은 무릎을 펴 몸을 일으키며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를 따라 일어나다가 발이 꼬여 휘청이자 카렐이 얼른 단단하게 부축을 해 주었다.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도 여전히 친절한 카렐을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사샤가 입을 열었다.
“카렐?”
“네, 사샤.”
“저…… 제 몸은 새건가요?”
“새것?”
희한한 표현을 듣는다는 듯이 카렐이 눈썹을 치켜떴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표현을 쓰는 건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
“발레는 몸을 망치는 운동인가 보죠.”
“네…….”
카렐의 말에서 무언가를 짐작한 사샤는 힘없이 대답했다. 그의 말이 맞다. 발레는 몸을 마모시키고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발달시킨다. 거기 익숙해졌다고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 고의적으로 반장슬을 만들기 위해 훈련한 흔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슬개골에 무리가 가고 있었고, 자주 근육이 찢어지던 허벅지 내전근과 아킬레스건에 염증이 보였습니다. 특히 허벅지 근육에는 근육 결이 파열되었다 붙은 모양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였어요.”
“…….”
“그리고 허리 이쯤에.”
카렐이 사샤의 등허리와 엉덩이 사이 어딘가를 쿡 찔렀다. 깜짝 놀라 걷던 중에 바닥에서 튀어 오르자 카렐이 피식 웃었다. 저는 심각해 죽겠는데 카렐이 웃는 것을 본 사샤는 말문이 막혔다.
“디스크 팽윤이 있어요.”
등과 허리는 제법 튼튼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지적을 듣고 놀란 사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아직 제대로 무대에 서 본 적도 없는데 단 하나 주어진 도구인 제 몸은 이미 ‘새것’이 아니었다. 카렐의 앞에서 건강하지 못한 속살을 낱낱이 들켜 버리고 말았다.
카렐은 저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런 카렐이 장학생을 영 잘못 골랐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사샤는 초조해졌다. 이번 검진으로 저에게 실망한 카렐은 자신이 아닌 다른 아이를 고르러 떠날지도 모른다. 그에게서 장학금을 받는 아이가 저 혼자만은 아니었으니까.
설령 그가 그런다 해도 자신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말릴 자격도 없었다.
“배고프죠? 저녁때가 많이 지났네요. 미안합니다. 건강해지자고 하는 일인데 위장을 혹사시켜서.”
카렐은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하며 사샤의 등에 손을 얹었다.
사샤는 작게 도닥이는 손길로 걸음걸이를 재촉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몸 상태가 완벽하지 않은데도 카렐이 싫은 티를 내거나 질책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사샤는 바보가 아니었다. 앞서 들은 의사의 간접적인 말로도 그의 권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훈련을 줄일 것.
몸을 덜 움직이고 충분히 휴식을 취할 것.
언젠가 진짜 댄서가 되어 오래 활동하고 싶다면 성장기의 몸을 아낄 것.
사샤는 누구보다 재밌게 지내겠다며 기대감에 가득 차서 기다리던 연말 스케줄에 대해 생각했다. 얼마 후면 호두까기 인형을 포함한 겨울 시즌 공연들의 캐스팅 라인업과 승급자들이 발표될 것이다. 사샤는 그 캐스팅 라인업 맨 아래에 군무 단원으로 자기 이름이 적히기를 학수고대해 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게시판의 공지를 모두 확인하고 나면, 줄리아가 그걸 치우기 전에 몰래 뜯어 집에 가지고 와서 일기장 사이에 붙여 놓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다 기념이 될 테니까…….
예정대로라면 올 겨울에 사샤는 발레 스쿨의 연습실이 아니라 멧 오페라의 극장 무대 위에서 리허설을 해 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 진짜로 훌륭하게 해낸다면 디렉터는 이름이 있는 작은 캐릭터 배역을 하나 줄지도 몰랐다.
또한 사샤는 내년 로잔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로잔은 5일간의 오디션 전 과정을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생중계한다. 그때 해설자들은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지난겨울 시즌, 뉴욕 발레단에서 학생 신분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고 멋지게 소개해 줄지도 몰랐다.
그 모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샤, 사샤?”
사샤는 제 눈앞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맑은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탁 닫히는 것은 카렐의 라이터였다. 작게 피어올랐던 불꽃은 순식간에 은빛 금속 사이로 몸을 숨겼다.
또다. 생각에 골몰하느라고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샤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무것도…….”
“…….”
사샤가 먹히지 않을 거짓말을 하자 카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키고 이어 말했다.
“겨울 날씨를 생각했어요.”
“……겨울 날씨?”
“네. 뉴스에서 봤는데 올해 겨울은 추울 거래요. 추우면 관객이 많이 들어요……. 다들 따뜻한 데 앉아 있고 싶은가 봐요. 하지만 무용수들은 추우면 힘들어요. 웜업을 하고 체온을 올리는 데 시간이 훨씬 더 많이 드니까요. 그래서 저는 반신욕을 자주 하려고요.”
“백스테이지에도 욕조가 있나요?”
“욕조는 없지만 샤워실은 있대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면…….”
사샤는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카렐의 옆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는 원래 다정하기 때문에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겉보기로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오늘 검진으로 밑천이 드러나 버린 자신에게 당장 차갑게 굴지 않는 것이 사샤는 고마웠다.
무용수로서의 인생은 짧다. 오래전 예술 감독에게도 들었듯이 발레단의 정년은 42세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나마도 채우지 못하고 부상이나 결혼 등으로 중간에 떠나가는 이가 부지기수다. 통상적으로 30대 중반 이후면 무용수로서의 수명이 다한다고 봐야 했다.
긴 인생에서 지나치게 짧은 전성기지만 서른 이후의 삶이란 아직 열일곱 살인 사샤에게는 지나치게 멀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한창 젊을 때에는 자기 미래의 건강 따위는 타인의 것처럼 여겨질 뿐이다.
카렐은 매력적이었고 누구나 탐낼 만한 결혼적령기의 남자였다. 할리우드 가십을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말하기를, 최근 스캔들이 뜸한 걸 보면 카렐이 이번에는 결혼까지 골인할 상대를 찾기 위해 잠잠히 인물을 물색 중인 게 틀림없다고 했다.
사샤는 자신이 전 세계를 열광시킬 만한 유명한 댄서가 되는 게 빠를지, 아니면 그가 결혼 상대를 찾는 게 더 빠를지를 초조히 생각했다.
카렐이 사랑을 갈구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당장 행동의 처분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그 목적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 * *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 뒤 사샤는 손만 씻고 나서 곧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사샤가 편한 조거팬츠 아래 발레 슈즈를 신는 것을 본 카렐이 말했다.
“하루 정도는 쉬어요.”
사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바 대용으로 쓸 의자 하나를 가져와 창가 빈 공간에 세웠다.
“단 하루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근육통이 더 심해져요. 쉴 틈이 없는 게 나아요.”
“그래요…….”
의자를 세워 놓고 적당한 간격을 찾은 사샤는 음악도 없는 고요 속에서 가만히 풀업 자세를 취했다. 목선을 길게 뽑고 관절을 바르게 세운 뒤 흉통을 최대한 조여 납작하게 만든다.
카렐은 고작 바로 선 자세만으로 어엿한 무용수의 태가 나는 사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사샤가 무릎을 꾹 누르며 바 워크의 가장 첫 번째 동작인 플리에를 시작할 때에 욕실로 들어갔다.
수십 분 후 샤워를 마친 카렐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사샤는 퐁뒤 동작을 소화하고 있었다. 주홍빛이 도는 플로어 램프 하나만이 어둠이 드리운 창가에 서 있는 사샤의 몸을 역광으로 비추었다. 뻗은 팔의 피부 위로 빛이 날카로운 명암을 남기며 근육을 조각해 냈다.
언뜻 보기에는 의자에 한 손을 지탱한 후 반신을 움직일 뿐인 가벼운 체조 같았는데, 보기와는 달리 체력 소모가 꽤 있는 모양이었다. 사샤의 등허리에는 벌써 땀이 맺혀 있었다. 카렐은 젖은 머리를 타월로 가볍게 털면서 의자에 앉았다.
사샤는 플리에로 깊이 눌렀던 왼쪽 다리를 오른쪽 뻗는 다리와 함께 천천히 스트레칭하면서 바로 섰다. 마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다리를 높이 뻗었다가 내리기 직전 한 번 더 끈질기게 버틴다. 얼마나 근육을 길게 뽑아내는지, 가까이서 보지 못했다면 눈치채지 못할 만한 근육의 작은 경련이 카렐의 눈에 들어왔다. 힘든 내색도 하지 않던 사샤의 턱 끝에서는 땀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단 1초도 힘을 놓는 순간 없이 사샤는 한 다리로 바닥을 지탱한 채로 플리에와 스트레칭을 반복했다. 가벼운 체조 같다고 생각한 최초의 감상과는 달리 엄청나게 고강도의 운동이었다.
카렐이 내심 감탄하고 있을 때, 사샤가 선 자리에서 턴을 하며 두 사람이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사샤가 귀를 붉혔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사샤는 멈추는 일 없이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동작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퐁뒤를 마치며 양팔을 앙 바로 가볍게 앞으로 가져온 사샤의 가슴팍은 보일 듯 말 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최대한 흉곽을 조인 가슴 안으로 심장이 크게 뛰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하는 건가요?”
카렐의 물음에 사샤가 그제야 크게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네, 저는 힘들 때 입술을 깨무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걸 고치느라고 바딤에게 많이 맞았어요.”
“티도 내서는 안 되나요?”
“네……. 보는 사람은 고통을 짐작할 수 없게 해야 해요.”
괴로운 표정도, 심장 박동조차도 모조리 감추는 인공적인 아름다움.
지나치게 정적인 운동이다.
카렐은 그렇게 생각했다.
직후에 앞뒤로 가볍게 그랑 바트망을 휙휙 두어 번 차던 사샤는 이내 타월을 챙겨 욕실로 들어가려 했다. 이제야 제대로 감상하려던 바 워크가 금세 끝나 버려 아쉬운 마음에 카렐은 사샤의 등에 대고 혼잣말처럼 물었다.
“이다음에도 동작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명칭이 뭐더라…….”
“프라페요?”
“아, 맞습니다. 그건 왜 뺐죠?”
“음……. 카렐이 너무 쳐다보니까요. 부끄러워서요.”
그렇게 말하고 사샤는 욕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탁, 소리가 나며 문이 닫히고 잠시 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
카렐은 사샤가 도망쳐 버릴 정도로 자신이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았는지 되짚어 보았다.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마치 관객처럼 의자까지 가져와 사샤가 잘 보이는 곳에 앉아 있지 않았나.
동시에 카렐은 방금 전의 사샤를 떠올렸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는데도 거기서 더 근육을 늘이고 뽑아내는 끈질긴 몸의 움직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카렐이 알고 있는 발레란 3분에서 길게는 10분가량의 완성된 안무들로, 대체로 레전드 사샤 세드린의 솔로 베리에이션 영상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발레 바 워크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그런 완성된 춤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토록 발레 댄서를 신봉하고 숭배하면서도 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바 워크를 유심히 본 게 처음이라는 사실에, 카렐은 스스로에게 가벼운 충격을 받기까지 했다.
발레 댄서의 삶을 더 제대로 나타내는 것은 무대 위의 짜인 안무보다는 저런 바 워크일지도 모른다. 발레에 처음 입문하는 어린아이부터 이미 정상에 오른 지 오래된 프린시펄까지 빼놓지 않고 반복하는 과정.
매일 같은 동작을 수련하는 발레 댄서들의 삶이란 어떤 면에서는 수도사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반은 복서, 반은 수녀라는 말이 생겼을지도.’
군인도 힘겨워할 만한 강도를 매번 자처해서 훈련한다고 생각하니 어린 사샤가 무척 기특하게 느껴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랐을 때 카렐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인지 사샤는 아까 전의 저녁을 스스로의 돈으로 지불했다. 자신이 준 카드를 쓰면서 한턱 쏘는 기분만 낼 줄 알았더니, 사샤가 꺼낸 건 지갑 속에 꼬깃꼬깃 챙겨 온 현찰이었다. 지난 봄 시즌 학교에서 프로모션 이벤트에 참여하며 받았던 품위 유지비와 장학생들에게 지급되는 생활비를 쪼개서 모아 놓은 현금일 터였다.
사샤가 돈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 카렐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사샤는 학교로부터 지급받는 생활비조차 전부 러시아에 있는 어머니에게 보내고 있었으니까.
“하…….”
물론 코 묻은 돈으로 대접을 받고 입을 닦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카렐은 사샤가 원하는 게 무엇일지 가만히 생각했다. 그 현찰을 고스란히 돌려주면 사샤는 자기 성의를 거부당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이어서 카렐은 오늘의 진료 결과를 떠올렸다.
카렐이 이마를 가리고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사샤가 욕실에서 나왔다. 반신욕을 마쳐 후끈하게 달아오른 몸으로 사샤는 바닥의 공간에 호텔에서 받아 온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폼롤러로 근육을 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루 일과가 빼곡히 발레만으로 가득 찬 일상이었다.
발레를 빼면 사샤의 일상에는 뭐가 남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렐은 끙끙대며 폼롤러 위를 굴러다니고 있는 사샤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요.”
“네…….”
표정에 의문을 띄우면서도 사샤는 홍조 어린 얼굴로 다가왔다.
“더 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마사지해 줄게요. 사람 손이 낫지 않습니까.”
“아…….”
자신의 마사지를 특히 좋아하는 사샤가 반색할 줄 알고 한 말이었으나, 사샤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랐다. 사샤는 난감한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사샤?”
“카렐이 마사지해 주는 건 좋아요. 엄청 따뜻하고, 시원하고요……. 하지만 절 만지시면 안 돼요.”
“왜죠? 어디가 심하게 아픈가요?”
“그게 아니라 흥분이 돼요…….”
“풋…….”
또 순수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한 카렐이 웃어 버리자 사샤가 미간을 굳혔다.
“진짜예요. 요즘엔 엄청 위험해요. 카렐은 제가 얼마나 음흉한 생각을 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제가 카렐한테 올라타서 우리가 침대를 마구 뒹굴게 될 수도 있어요. 카렐은 10대 청소년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시죠? 다들 10대 청소년보고 시한폭탄이라고 불러요. 저도 몇 달 전까지는 그 위험성을 몰랐는데, 이제 알아요.”
“그래요, 알겠어요.”
사샤의 은은한 위협에 카렐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사샤는 자신의 경고가 먹혔다고 생각하고 안도했다. 현재 자신은 말 그대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다. 카렐이 말한 ‘선’을 넘지 않으려면 애초에 자기를 검열하며 미리 조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사샤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카렐?”
“네.”
“오늘 의사가 한 말 있잖아요.”
“네……. 저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지하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샤는 저도 모르게 안달하는 얼굴로 물었다.
카렐은 ‘글쎄요’ 하고 운을 띄우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지요. 당신에게 좋은 선생들을 붙여 주고 그걸 전부 소화해 내는 모습을 보는 게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의사의 지적인 근육의 과성장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개인 교습들은…… 꼭 필요한 게 아니라면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그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사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었다.
“맞아요. 발레는 모순이에요. 우린 다들 그렇게 말해요. 몸이 망가질 걸 제일 두려워하면서도 스스로 몸을 망치고 있다고요…….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예요. 그럼…… 연말 공연이랑 콩쿠르는요?”
“그건 당신이 결정할 일이에요. 당신 인생이잖아요. 내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리가 없습니다.”
“…….”
“하고 싶으면 해요.”
그의 흔쾌한 허락에 사샤는 조금 놀라면서도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하고 싶어 하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카렐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겨울 날씨 이야기를 하면서 무대 이야기만 잔뜩 했잖아요? 벌써 공연에 올라갈 생각 만만이던데요.”
“아…….”
사샤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멍한 깨달음에 카렐은 어깨를 으쓱했다.
“……계획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게 더 놀랍군요. 나는 당신이 일부러 그런 이야기를 흘리면서 영리하게 미련을 내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아닌데요? 하지만…….”
“하지만?”
사샤는 잠시 어물거리다가 자신 없이 말했다.
“저는 거기까지 생각 못 했는데……. 그래도 똑똑한 애로 생각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샤의 말에 카렐은 불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샤는 카렐의 휘어지는 눈가를 관찰하며 마음이 점점 따스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샤. 더 가까이 오세요.”
카렐이 제 곁에 와 앉으라는 듯 톡톡 옆자리를 건드렸다.
“시한폭탄을 곁에 두는 건 위험하지만, 이 정도 가까이 앉는 건 괜찮겠죠.”
“살살 다뤄 주시면 문제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샤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비록 자신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성욕의 시한폭탄일지라도 그의 온기와 손길을 모두 거부하고 살 수는 없었다.
사샤가 곁에 달라붙어 앉자마자 카렐이 팔을 뻗어 사샤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사샤는 심장이 노곤노곤 녹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렐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사샤. 나는 당신이 오래오래 춤을 췄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래요.”
“당신과 이름이 같은 레전드는 60대까지 활동했으니까, 당신도 틀림없이 건강하게 그 나이까지 활동할 수 있을 겁니다.”
사샤는 카렐의 말속에서 드물게 강한 확신을 느꼈다. 올려다본 카렐의 눈 안에는 지금껏 본 적 없던 기이한 믿음이 엿보였다.
저를 이토록 믿어 주니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사샤는 덜컥 겁부터 먹었다. ‘레전드’에 대해 떠올릴수록 사샤는 씁쓸하게도 이미 성공한 사람의 인생과 불안하고 희미한 미래밖에 없는 제 인생 사이의 격차를 느낄 뿐이었다.
사샤는 불현듯 카렐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쯤의 일 하나를 떠올렸다. 그때의 카렐은 사샤에게 교본으로 삼으라며 직접 한 무용수의 비디오를 주고 갔었다.
‘그것도 사샤 세드린의 비디오였지.’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저는 저예요. 검사 결과를 보셨잖아요. 제 몸은 완벽하지가 않아요…….”
“아닙니다. 난 알고 있어요.”
카렐의 말에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틀림없이 훌륭한 무용수가 될 겁니다. 그러니 일어날지 아닐지 모르는 부상은 두려워하지 말아요. 혹 다친다 하더라도…… 충분히 치료받고 재활을 거치면 됩니다.”
“그럴까요?”
“그럼요. 당신은 정년을 꽉 채워서 발레단에서 활동을 할 거예요.”
“진짜요?”
“당연하죠.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져서…… 여기 뉴욕 발레단 말고도 여기저기 유명한 발레단에서 당신을 객원 프린시펄로 모셔 가려고 안달이 나겠죠. 은퇴 시기를 훨씬 넘기고도 당신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 아마도 매년 투어를 다녀야 할 거예요. 고급스러운 극장에서 갈라쇼 같은 것도 하고 말이죠……. 더 이상 무대에 오를 수 없게 되면 안무가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안무가가 되려면 더 많은 재능이 있어야 되는데요?”
“원한다면 안무가 코스로 진학하세요. 대학원에 가는 학비는 걱정하지 말고요.”
카렐은 그렇게 말하며 사샤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올려다보는 사샤의 맑은 홍채가 작게 떨렸다. 카렐의 어조는 단호하고 힘이 있었다. 그는 이토록 저를 격려하는데 어째서 의기소침해지는지 사샤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이 나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샤의 머릿속에서는 ‘투자 가치’라는 말만이 떠올랐다. 사샤는 카렐의 기대에 부응하는 무용수가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사샤 세드린은 대단해요.”
“그래요. 대단해요.”
카렐은 사샤가 자화자찬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맞장구쳤다. 사샤는 카렐의 어깨에 기댄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저 말고요……. 할아버지 세드린.”
“음…….”
한때 사샤는 그저 잘생긴 외모의 덕을 보고 적당히 인기를 끌어서 운 좋게 대스타가 되었다고 생각해 그를 내심 깎아내리기도 했다. 이미 유명해진 사람은 뭘 해도 박수 받기 마련이라며. 그러면서 그에 대해 잘 모를 때에는, 레전드는 제가 겪은 가난 따위는 모를 거라고 지레짐작했다. 모두가 추앙하는 그를 질투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봉하지 않은 다큐멘터리 필름 속에서 언뜻 엿본 그의 생애는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사샤 세드린은 전쟁의 틈바구니, 격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고, 가장 경쟁이 치열하던 파리 사교계에서 오직 재능만으로 눈부시게 성공했다.
반대로 물러터지고 나약한 자신의 영혼이 그 시기를 살았다면 버티지 못하고 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부러운 것은…….
‘신이 당신에게서 춤을 빼앗아 가면 무엇으로 살 생각입니까?’
‘사랑.’
그 확신에 찬 목소리.
갈수록 사샤는 질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가 부러워졌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얼마나 가지기 어려운 것인지, 어린 사샤는 사랑에 빠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친 발레에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정도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라니.
그렇게 누군가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다니…….
그건 정말 어렵고 대단한 일이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카렐의 옷소매에 뜨거워지는 눈가를 비볐다. 저 역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열망만은 진짜였다. 그러나 아직 일개 발레 스쿨 학생일 뿐인 자신이 그 레전드처럼 되려면 얼마나 까마득한 산을 올라야 하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재능뿐만 아니라 운도 따라 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는 건 실력을 증명하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사샤는 자신이 카렐의 높은 기준을 모두 충족하는 훌륭한 댄서가 되어도 그가 자신을 사랑해 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그건 어떤 데이터나 심사위원들의 평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저는 세드린 할아버지처럼 못 될지도 몰라요.”
사샤의 울적한 중얼거림에 카렐은 깜짝 놀라며 ‘저런’ 하고 중얼거렸다.
“예전의 패기는 어디 갔지요?”
“그런 거 없어요…….”
우울증의 그림자 아래 웅크려 앉은 사샤는 제 미래를 비관했다.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베팅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카렐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사샤의 두피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부담으로 가득 차서 여기가 과열 직전이군요. 내가 부담을 줬나요?”
“네?”
“조금이나마 기분 전환이 될까 싶어 멀리 데이트를 나왔는데…….”
“데이트? 우리 데이트했어요?”
사샤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는 듯이 크게 목소리를 높였다. 벌떡 일어나 방향을 바꾸어 앉는 사샤의 양팔을 진정시키듯 잡아서 도로 앉힌 카렐이 눈가를 휘며 웃었다.
“그럼 학부모 대동 병원 투어라고 할까요?”
“싫어요! 데이트라고 해요. 저희 데이트한 걸로 해요.”
“생각해 보니까 데이트가 되면 내가 파렴치한이 되어서요……. 학부모 역에 머무르는 게.”
“안 돼요. 카렐은 안 파렴치해요. 제가 유혹한 걸로 할 테니까 제발 데이트라고 해요. 데이트……. 제가 저녁도 사드렸잖아요!”
사샤가 간절하게 고집부렸다. 카렐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어쨌든 사샤는 오늘 일을 일기장에 카렐과의 첫 번째 데이트라고 적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흥분해서 금세 울적함에서 벗어났다. 심지어 첫 데이트에서 자신이 저녁을 샀다. 자랑할 만한 일이다. 사샤는 자신이 기특해졌다. 사샤는 이 일을 당장 옥사나에게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그만큼 이건 정말 사샤 세드린의 인생에 있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샤는 흥분해서 입술을 바르르 떨며 카렐에게 물었다.
“카렐, 혹시 우리도 파파라치에 찍혔을까요?”
“음……. 내가 여기 오는 일정은 완전히 비공개라서 아마 찍히지 않았을 겁니다.”
“아…….”
자신이 카렐의 스캔들 대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들떴던 사샤는 금세 풀죽었다. 그 모습을 보며 카렐은 쿡쿡 웃었다.
잠시 후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기댄 사샤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놓인 옆 베드에 반듯하게 누운 카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항상 마스터룸의 문을 닫고 들어가서 혼자 자던 카렐이 눈에 보이는 곳에서 자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사샤는 행복감에 이불 속에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너무나 당연해 깨닫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의 보편적 진리가 사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카렐,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잖아요.”
“……명언 같은 말을 하는군요.”
“제가 60살이 될 때까지 춤을 출 수 있다고 해도…… 그때에도 카렐이 제 공연에 올지는 모르는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몰라요. 50살쯤에 싸웠을지도 모르고…….”
사샤가 어물거리자 카렐은 웃었다.
“그러니까 저는 지금이 제일 소중해요.”
사샤는 웃고 있는 카렐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낮부터 생각했던 것이 점차 명확해졌다.
무용수로서의 인생은 짧다. 그러니 불분명한 먼 미래를 위해 지금을 아끼지는 않기로 했다.
사샤는 자신이 그의 손길에 아침잠을 깨고, 함께 센트럴 파크의 야경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가끔은 이렇게 그와 함께 둘만의 여행을 할 수 있는 때를 영원히 기억하게 될 거란 걸 알았다. 나중에 카렐과 헤어지게 되어도 이 순간만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었다.
그러니 이처럼 카렐이 자기 곁에 있어 줄 때에 제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고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훗날 그가 자신에게 흥미를 잃더라도, 열일곱 살 사샤 세드린이 얼마나 반짝거렸는지 기억할 수 있도록.
“카렐, 부탁이 있는데요…….”
“네.”
“앞으로도 오늘의 저를 기억해 주세요.”
“…….”
“카렐의 옆에 있는 저의 매일매일을 기억해 주세요.”
사샤의 말에 카렐의 입가가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그러고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사샤는 왜인지 그 미소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카렐조차 의식하지 못한, 마음에서 우러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물들어 버리듯…….
한참 후 카렐이 나직하게 말했다. 애정이 담긴 깊은 목소리로.
“잘 자요.”
“네. 카렐도요.”
“악몽은 꾸지 말고요.”
“카렐도요.”
달칵, 전등 빛이 꺼졌다.
어둠에 눈이 익지 않아 깜깜한 시야로 사샤는 카렐을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그도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