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 발스 3권-1. 라 발스 (9/30)

  1. 라 발스

소년의 입술은 굴곡이 분명하고 색이 연한 편이다. 동그란 이마부터 높은 콧대를 따라 선을 그리듯 살짝 들린 윗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사샤가 말했다.

“악보 서문은 처음 읽어 봐요.”

영어를 읽는 것이 아직 서툰 사샤는 악보의 첫 장을 더듬더듬 낭독하기 시작했다.

“눈처럼 흩날리는 구름 사이로 왈츠를 추는 사람들이 시…….”

“실안개.”

“……실안개처럼 희미하게 보인다. 구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한다.”

―Drifting clouds part and allow hazy glimpses of waltzing couples. They gradually dissipate.

모르는 단어와 마주쳐 소리 나는 대로 알파벳을 읽으면 눈앞의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단어를 다시 반복해 주었다.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완벽한 발음, 그리고 이어지는 러시아어 해석.

사샤는 그와 눈을 마주쳐 가며 천천히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A] 부분에 돌입하면 우리는 곧 소용돌이치는 군중들로 가득 찬 거대한 홀을 알아챌 수 있다. 시야가 계속해서 밝아진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B] 부분의 포르티시모에서 찬란하게 반짝인다. 이곳은 바로 1855년경, 어떤 황실의 궁전이다.”

―And we can distinguish an immense ballroom filled with a whirling crowd at [A]. The scene continues to clear. The glow of chandeliers shines to a full splendor [B] in fortissimo. An imperial court ball, circa 1855.

사샤는 서문을 읽는 것만으로 작게 전율했다. 그는 소름이 돋은 등줄기를 움츠리며 다시 천천히 악보를 덮었다.

“사실 전 이 노래에 얽힌 역사는 나중에 알았어요. 저는 뭐가 됐든 설명은 싫어해서요. 그래서 처음에는 음악을…… 그냥 음악을 들었어요.”

대화 상대로는 한참 부족할 어린애의 말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남자가 저에게 깊이 귀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년은, 그를 응시하다가 다시 입술을 뗐다. 이번에는 본인에게 익숙한 러시아어였다.

「이건 프랑스의 작곡가가 빈 왈츠를 예찬하기 위해 만든 곡이래요.」

남자는 말없이 소년을 바라본다. 본인에게 익숙한 언어로 말을 할 때는 제법 날카롭고 또렷한 인상으로 바뀌는 얼굴을 인상 깊다고 생각하며.

「라벨이 이 곡을 완성하는 데는 14년이나 걸렸다고 해요. 그렇게 힘들게 완성한 곡을, 의뢰자였던 발레뤼스의 단장이 거절했대요. 걸작이지만, 발레는 아니라고 하면서.」

사샤는 작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돼요. 백 년이나 지나서 그런지는 몰라도요……. 이건 발레가 맞아요. 아니, 적어도 완벽한 춤곡이에요. 드라마가 있는 춤곡.」

……왜냐하면 저는 알 수 있었거든요.

처음 이 곡이 시작될 때 저는 옆방에서 소리를 조율하는 악기들을 엿듣고 있어요. 그러다 누군가에게 이끌려 저절로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가고, 저도 모르게 춤을 출 수밖에 없게 돼요. 여기저기 빛의 파편이 튀고 조명과 관객의 시선이 제 목을 숨 막히게 조르는 걸 아는데도요……. 무척 괴롭지만 저를 황궁으로 이끈 사람은 계속 춤을 추라고 말해요. 저는 그게 제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닌 걸 알아챘는데도 도무지 멈출 수가 없어요.

저는 그래서 이 음악이 제 인생 같다고 생각했어요…….

둘 사이에는 침묵만 남았다.

너무 떠들었다고 생각한 사샤는 소리 나지 않게 악보를 손톱으로 조금씩 긁었다. 고작 열일곱 해의 삶을 ‘인생’이라고 지칭한 것을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실은 그 뒤의 이야기가 더 있었다. 미친 듯이 독무를 추다가 문득 정신이 들면 거긴 황궁도 아니고 거미줄이 쳐진 초라한 방이거나 으스스한 숲 한가운데다. 춤이 자신을 외롭고 불안한 세계로 이끈 셈이다.

그러나 추는 동안에는 무척 행복했던, 그런 기묘한 기분.

희열과 절망이 뒤섞인 감각이다.

얼굴에서 홍조를 덜어내지 못한 사샤는 겨우 맞은편을 응시했다. 남자가 이상하게도 길게 침묵한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

“이 음악의 끝부분이 나타내는 게 절망인지, 아니면 기쁨인지.”

사샤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키웠다.

“카렐에게는 어떻게 들려요?”

그러자 내내 침묵을 지키던 말 없는 사내가 천천히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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