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의 댜댜
새순이 돋던 길거리의 수목이 짙은 초록색으로 모두 물들 때쯤에 사샤는 키가 6센티나 자랐다. 고관절과 무릎, 발목 통증을 호소하던 것은 갑자기 키가 큰 탓이었다.
동시에 사샤는 이가 욱신거리며 아파 와서 치과에 가기도 했다. 제 치아 끄트머리에서 사랑니가 느리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샤는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통증 때문에 가끔 진통제를 먹었다.
초봄까지만 해도 옥사나와 키가 비슷했었는데, 이제는 사샤의 시야가 더 높아져 버렸다. 그래서 두 사람은 드디어 파 드 되의 파트너를 할 수 있었다. 여학생 중 비교적 큰 키인 옥사나의 파트너를 할 수 있는 남학생은 한정적이었는데, 사샤의 키가 자란 이후로 두 사람은 고정적으로 서로의 파트너가 되었다.
그 뒤로 둔감한 사샤만 모르는 소문이 돌았다.
바로 두 사람이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물론 옥사나는 일찌감치 알아챈 듯했지만 심약한 제 파트너가 듣고 난 후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며 부정적인 영향을 줄까 봐 그 사실을 비밀로 했다.
아무튼 설탕인형 같은 흰 얼굴에 발그레한 뺨을 가진 러시아 출신 두 소년 소녀의 조합은 어린 댄서들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발레 팬들의 주목을 금세 끌었다. 발레단의 프로모션 덕분에 인스타그램에 한번 사진이 올라가기도 했는데, 그게 얼마나 많은 ‘좋아요’를 받았는지 사샤만 알지 못했다.―발레단의 홍보 마케팅 팀장 제레미가 사샤의 성을 체드린이라고 또다시 잘못 쓴 것 역시 알 수 없었다―
자란 키만큼 체중이 따라오지 못해 앙상할 정도로 말라 보였던 몸은 그사이 카렐의 도움으로 적당히 살을 찌울 수 있었다. 여전히 가냘프게 보일 정도로 마른 몸이었지만 지방 하나 없이 조밀한 근육으로 짜인 팔은 길게 뻗을 때엔 아름답게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허벅지의 염증 재발 방지를 위해 꾸준히 개인 트레이너를 붙여 훈련한 결과 고질적인 다리 통증도 많이 나아졌다.
단 하나 아쉬운 점은 갑자기 자란 키 때문에 밸런스가 흐트러졌다는 점이었다. 사샤는 한동안 파세 밸런스와 아라베스크 밸런스를 지겹게 연습하며 제 몸의 중심점을 다시 찾아야 했다.
‘카렐은 182센티까지 크라고 했었는데…….’
카렐의 기준에 가깝게 수월하게 자라고 있는 것은 다행이지만, 키가 10센티나 더 크면 밸런스를 다시 찾는 게 고역일 것이다. 성인이 되어도 키가 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어쩌면 한동안 이런 훈련을 계속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샤 말고 또 다른 이들이 아쉬워한 점은, 한 번 저체중을 기록했던 시기에 홀쭉해졌던 볼 살이 그대로 쏙 빠져 버렸다는 점이다.
아기 같은 젖살이 사라지자 사샤에게는 침착한 분위기가 더해졌다. 차분하고 멍한 시선을 가진 얼굴은 아무 생각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우수에 찬 것 같았다. 초점을 쉽게 흘리는 눈에, 화술이 부족한 것을 의식해 입을 잘 열지 않는 사샤는 어딜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맨해튼 길거리에서 각종 캐스팅 디렉터에게 픽업을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사샤는 사랑의 감정을 품은 채로 아주 조금 성장했다.
물론 사랑하는 과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저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은 후원자에게 숨겨야만 하는 비밀이 하나 생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렐은 그날 이후로 사샤가 먼저 키스했던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실수’를 없던 일로 해 주겠다는 듯이.
사샤는 그 멍청한 키스를 없던 일로 하고 싶다는 수치심과, 둘 사이의 작은 사고를 무심하게 모른 척하는 카렐이 원망스러운 마음 사이를 자주 오락가락했다.
수개월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지만 어떤 것은 변하지 않기도 했다.
여전히 발레 스쿨 어퍼 클래스 2학년인 사샤 세드린의 일과는 매우 반복적이다.
아침에는 흰 이불 뭉치에 몸을 파묻은 채로 알람이 5분 간격으로 총 세 번이 울릴 때까지 귀를 막고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린다. 그리고 알람이 세 번 울릴 때까지도 사샤가 제 발로 침대를 벗어나지 않으면 카렐이 다가와 이불째로 사샤를 번쩍 들어 올리곤 했다.
키가 6센티나 자랐는데 카렐은 여전히 가벼운 솜이불을 들듯 사샤를 안아 올렸다.
그의 적절한 안배로 준비된 다양한 메뉴의 아침 식사를 마치고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면, 저녁에는 카렐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나 사샤는 누군가를 기다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뻤다. 카렐이 읽다가 만 잡지나 주방 테이블에 그대로 두고 간 노트북이나 수첩 같은 것들이 보이면 더더욱 그랬다.
사샤는 제가 사는 집에 타인의 흔적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게 카렐의 흔적이라는 게 가끔 아주 행복했다.
그리고 밤늦게 돌아온 카렐은 항상 사샤에게 같은 것을 물었다.
“오늘은 별일 없었나요.”
그러면 사샤는 괜히 허리가 아프다거나 날갯죽지가 아프다고 말했다.
“등이 조금 뻐근한 거 말고는 괜찮아요. 무용수들은 고질적으로 이쪽 근육이 많이 아파요……. 신경 쓰실 필요는 없어요. 파스를 붙이고 자면 돼요.”
“…….”
“사랑니도 조금 아픈데, 진통제를 먹어서 괜찮아요.”
“…….”
“카렐도 피곤하죠? 얼른 주무세요."
그러면 카렐은 사샤를 말없이 뒤돌아 눕게 하고 아픈 근육을 꾹 눌러 주곤 했다. 목적이 불분명한 사샤의 엄살의 말이 길어지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이.
거실에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온 클래식 음악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카렐이 선곡한 음악이었다.
문득 축음기에 얽힌 카렐의 말을 기억해 낸 사샤는 맥락 없이 물었다.
“축음기는 나중에…… 아내에게 선물하실 거예요?”
마침 그가 누른 겨드랑이와 등 사이의 근육이 눈물 날 정도로 아파 사샤는 숨죽이고 헐떡였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죠?”
“예전에 그러셨잖아요. 언젠가 이 축음기의 주인이 나타나면 그에게 돌려줄 거라고…….”
카렐은 피식 웃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사샤는 그가 대답하지 않은 이유는 자신이 정답을 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카렐은 저 축음기를 미래의 아내에게 주고 싶어서 저토록 애지중지하는 것이다.
지금 그의 시간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저인데도, 그럴 때마다 사샤는 서글퍼졌다.
“이쪽이 특히 심하네요. 많이 아프겠어요.”
그러나 서글퍼할 틈도 없이 카렐의 손끝이 사샤의 등허리 한가운데를 꾹 눌렀다. 완전히 뭉쳐서 돌처럼 딱딱해진 근육을 자비 없이 문지르는 손길에 사샤의 입술에서는 신음이 샜다.
“흐으……. 아, 아파요…….”
“…….”
“카렐……. 너무 아파요. 제 생각엔 카렐이 잘못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샤가 카렐의 마사지를 지적하자 말이 없던 카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저는 잘못 하지 않았어요. 심각하게 뭉쳤군요. 이건 제대로 풀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에요, 아……. 카렐, 뭔가 잘못됐어요. 그건 뼈예요. 카렐이 제 뼈를 부숴 버리고 있어요.”
사샤는 엎드린 채로 허약하게 중얼거렸다. 마치 손가락으로 급소를 찔린 듯해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항상 느끼던 기분 좋은 압박감 정도가 아니었다.
카렐은 손을 멈추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뼈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근육이 딱딱해진 겁니다. 사샤, 당신이 말했던 것처럼 무용수들에게 잦은 고질적인 근육 뭉침이 당신에게도 있네요. 당신은 몸이 다 자란 것도 아닌데 내가 본 중에 가장 심각하군요. 이걸 방치하면 어깨와 척추에도 영향을 주게 될 거예요.”
“네? 그건 안 돼요.”
제 생각보다도 큰 질환일 가능성이 있자 사샤는 겁을 먹고 뒤를 돌아보았다. 카렐의 표정은 정말로 진지해져 있었다.
“아프겠지만 조금 참아 보세요.”
“아아!”
사샤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 풀썩 엎드렸다. 울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등 근육을 찢어내는 듯한 통증에 사샤의 긴 눈꼬리 끝에 물기가 어렸다.
“춤을 출 때 어깨를 꾹 눌러쓰는 건 좋지만, 목과 등을 제대로 사용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고생스러울 겁니다. 그래도 이 광배근을 잘 발달시키기만 하면 팔 동작이 훨씬 아름다워질 거예요.”
“카렐은 정말 똑똑, 해요…….”
사샤는 통증에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그에 대한 선망을 숨기지 않았다. 카렐은 매우 박학다식했는데, 그가 가진 많은 지식 중 사샤에게 가장 생소했던 분야는 해부학이었다.
카렐은 사람의 몸을 부위별로 연구하고 뼈와 근육의 이름을 외우는 걸 좋아했다. 그의 본가에는 실제 인체 크기의 뼈와 근육 모형도 있다고 했다. 사샤는 카렐이 제발 그걸 호텔로 가지고 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언젠가는…… 이 돌처럼 굳은 근육도, 하아…… 말랑말랑해지나요?”
“자주 만져서 근육을 깨뜨려 주면 많이 나아질 거예요.”
그의 말처럼 사샤의 돌처럼 뭉친 근육은 정을 맞듯이 카렐의 손아귀 힘에 인정사정없이 깨뜨려지고 있었다. 사샤는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그래도 몸을 뒤틀거나 하지 않고 숨죽여 얌전히 누워 있었다. 카렐의 손이 섬세하고 느리게, 그러나 가차 없이 강한 악력으로 꾸욱 누를 때마다 숨이 막혔다. 그건 흉곽이 강하게 눌려 마치 가슴팍 전체가 목 졸리듯 조여 오는 느낌과도 비슷했다.
결국 사샤가 압박감에 캑, 하고 기침을 내뱉자 카렐이 달래듯이 등을 넓은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통증이 심하면 표를 내세요.”
“저는 참을 만했어요.”
“말을 해 줘야 알 수 있어요. 고통스러운데도 억지로 참으면 내가 더 심하게 하게 돼요.”
“괜찮아요.”
사샤는 아직 괜찮다는 표시로 엎드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몸을 한계까지 늘이며 근육의 힘을 빼거나 심호흡을 하면서 통증을 참아 내는 건 사샤의 특기였다. 그런 고통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발레를 할 수 없다.
게다가 카렐은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으니 괜찮았다. 물론 그 신뢰는 카렐을 좋아하게 된 사샤가 스스로 창조한 감정이었다. 사샤는 사랑이라는 자기 세뇌에 걸려 카렐을 향한 맹목적인 마음을 갖가지로 키워 냈다.
“이제 그만하죠. 더 했다간 근육통 때문에 내일 클래스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겁니다.”
사샤는 신음하면서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의식하지 못한 상태로 긴장하고 있던 근육이 쭉 늘어나면서 잔뜩 나른한 기분이 몰려왔다.
“벌써 아픈 것 같아요. 파스를 바르고 잘래요.”
“……그렇게 하도록 해요.”
“저…… 등에는 손이 안 닿는데요……? 카렐이 해 주세요.”
“…….”
카렐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군말 없이 스프레이 파스를 가지고 와 사샤의 티셔츠를 훌렁 넘기고 드러난 맨 등에 파스를 꼼꼼하게 발라 주었다. 말라서 척추뼈가 도드라진 등은 굽은 상태로도 근육의 모양이 드러났다. 벌써부터 어엿한 댄서의 등이었다. 다만 카렐이 꾹꾹 누른 군데군데가 빨갛게 부어 있는 모양새가 묘했다.
“다 됐습니다.”
이제 정말로 완전히 카렐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사샤는 조금 아쉬워하면서 누워 있던 몸을 천천히 일으키고 손등으로 아직 젖어 있던 눈가를 훔쳤다.
“옷은 마른 후에 내리세요.”
“네.”
사샤는 티셔츠를 가슴 위까지 들어 올린 후 떨어지지 말라고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카렐이 그런 자신을 비스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사샤는 조금 냉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카렐에게 물었다. 카렐이 저런 눈으로 내려다보면 저도 모르게 제 잘못을 돌이켜 보게 된다.
“왜요, 라니요.”
“아니에요. 제가 귀찮게 해서 죄송해요.”
“귀찮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카렐은 ‘그런 걸로 사과하지 말아요’라고 부드럽게 말하고는 느리게 뒤돌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사샤에게 붙들려 아직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인 그는 여전히 셔츠 베스트 차림이었다. 사샤가 마음속으로 미안해하고 있는 사이 그는 손수 거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샤가 서재에서 꺼내다 놓고 한 장도 펼쳐 보지 않은 책들을 다시 책장에 꽂고―사샤는 카렐의 흥미가 궁금해 종종 그의 취향을 탐색하곤 했으나 실제로 읽는 것은 제목뿐이었다―창밖 풍경을 보며 저녁을 먹느라 거실 테이블로 들고 나온 듯한 접시와 포크도 치웠다.
카렐이 제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리게 알아챈 사샤는 그제야 방을 어질러서 잘못했다고 카렐에게 먼저 말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선수를 놓쳐 자신감이 사라졌다.
사샤가 눈치를 보면서 카렐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카렐은 나름대로 사샤가 돌아다닌 궤적이 그대로 남은 거실을 훑으면서 사샤가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추론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카렐에게 그저 귀찮기만 한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키퍼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깔끔해진 방 안에서 카렐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축음기 앞이었다. LP판이 가득한 유리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니 음악을 바꾸어 틀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선곡을 끝냈는지, 카렐은 양손에 흰 면장갑을 차례로 끼더니 유리장을 열고 하드커버를 하나 골라서 꺼냈다.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사샤의 눈에는 그저 커다란 쟁반 혹은 과녁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
‘부자들은 인생이 너무 쉬운 나머지 일부러 귀찮은 일을 즐기는 거야.’
사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호텔 룸 안에는 블루투스 스피커도 있고, 노트북과 패드도 있는데 카렐은 번거롭게도 축음기와 LP판을 이용해 음악을 듣는 것을 고집했다. 카렐이 좋아하는 것을 저도 함께 좋아하고 이해해 보고 싶은 사샤였지만, 여전히 카렐의 취미 대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번거로운 축음기와 마사지 기술, 인체 모형과 해부학 서적 같은 것들도…….
그렇지만 지금처럼 카렐이 장갑을 낀 채로 검정색 원반을 앞뒤로 돌려보고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사뿐히 판 위에 올려두고 약간만 허리를 굽힌 채 작은 바늘을 조심스레 올려놓는 그 모든 동작을 보는 것만은 아주 좋았다.
잠시 후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음은 아주 작았고 불분명했으며, 불협화음 같은 것이 들렸다. 사샤는 축음기가 고장 났다고 생각해 마침 제 쪽으로 뒤도는 카렐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카렐, 축음기가 고장 났어요.”
카렐은 무슨 소리냐는 듯 손가락으로 장갑의 중지 끝을 잡고 곱게 벗겨냈다.
“이상한 소리가 나요.”
“아.”
카렐은 가볍게 수긍하면서 사샤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마스터룸으로 들어가면서 베스트의 단추를 푸는 것을 보니 이제 옷을 갈아입으려는 것 같았다. 나체를 보여주지 않으려고 또 그가 문을 닫아거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샤는 소파에 주르륵 기대 미끄러졌다.
“아…….”
악기를 조율하는 듯한 불협화음이 어느새 멜로디가 되고, 옆방에서 엿듣는 듯하던 소리도 점차 명료해졌을 때였다. 사샤는 조그마한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는 음악이었다. 라벨의 라 발스(la valse).
“카렐.”
사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마스터룸 앞으로 다가갔다. 주먹을 말아 쥐고 문을 쿵쿵 두드리며 노크했다.
“카렐도 이 노래 좋아하세요?”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샤워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손을 모으고 잠시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다시 축음기 앞으로 다가갔다. 심장 고동이 절로 빨라졌다. 이 음악은 강약의 차이가 커서 서글프고도 우아한 왈츠 선율이 흘러나오다가도 갑자기 사람을 몰아치듯 데시벨이 마구 올라가는 지점이 있었다. 그러면 제 심장도 마구 충동질당하는 것 같았다.
약 백 년 전 활동했던 전설적인 발레단, 발레뤼스의 단장은 이 곡을 의뢰해 놓고는 정작 완성이 된 후에는 걸작이지만 발레가 아니라고 말하며 공연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사샤가 느끼기에는 이건 춤곡이었다.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한 춤곡. 자신이라면 분명 안무를 붙였을 것이다.
“이 노래를 알아요?”
등 뒤에서 카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샤워를 마친 그가 마침 마스터룸에서 가운을 걸치며 나오고 있었다.
사샤는 얼른 뒤돌아서며 끄덕였다. 취미를 통 이해할 수 없던 카렐과 같은 곡을 좋아한다는 감격이 사샤의 안에서 다시 넘실거렸다. 그 사실을 빨리 그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아주 좋아하는 노래예요. 카렐도…….”
“그래요?”
카렐은 의외라는 듯이 사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순간 사샤는 그가 자신의 예술성을 의심한다고 생각해 방어적이 되었다. 그의 앞에서는 빌보드차트에 있는 팝이나 록 따위를 즐겨 듣는 또래 애들처럼 여겨지고 싶지 않았다. 사샤는 자신의 ‘성숙’하고 별다른 취향을 카렐에게 어필했다.
“네……. 저는 원래 클래식을 좋아하거든요? 팝 같은 건 안 들어요. 저는 기타랑 드럼 소리가 싫어서요. 특히 기타 소리는 머리가 아파요.”
“그렇군요.”
“특히 이 부분이 제일 좋아요!”
사샤는 심벌즈 소리가 천둥처럼 꽝꽝 내리치는 부분을 가리켜 말했다. 공기의 밀도를 끝까지 올려 터뜨리는 듯한 클라이맥스의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샤가 이 노래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다. 혼란스럽고 우울하면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희열에 가득 차 있는 마지막 절정부였다.
그러나 카렐은 그 지점에서 제 귀를 슬그머니 틀어막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전 이것도 머리가 아프네요.”
“네? 거짓말……. 이 노래가 싫으세요?”
“싫다기보다, 클래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사샤는 자신과 카렐의 취향이 또 한 번 불일치했다는 사실에 약한 충격을 받았다. 입을 멍하니 벌린 채로 마음속으로 그의 대답을 부정하고 있을 때 카렐이 소파에 앉아 제 곁을 탁탁 두드렸다.
“이리 와요.”
사샤는 원인 모를 배신감에 젖어서 그가 가리킨 곳에 다가가 앉았다. 카렐은 어른답게 클래식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이 노래를 좋아해서 LP판까지 들여놓고 저에게 들려주는 줄 알았는데……. 속은 기분이었다.
아무튼 둘은 가끔씩 자기 전에 나란히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사샤는 그 순간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얼른 그의 곁에 앉았다. 빠르게 걸어가자 공기 중에 파스 냄새가 풀풀 흩어졌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이에요.”
“비밀이요?”
“그래요. 사실 뒷사정을 다 밝히지 않고 몰래 알려주려고 했는데, 그러려니 상당히 마음에 걸리더군요.”
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일까? 카렐의 목소리가 더없이 진지해서 사샤의 심장이 작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나의 엄청난 지위와…… 탄탄한 인맥을 이용해서 올해 발레단 입단 오디션 곡을 알아냈지요.”
“와…….”
“바로 이 곡이에요. 라 발스.”
사샤는 일단 한 번 크게 놀랐다.
“미리 알려줄 테니까 연습을 해 놓으세요. 그럼 다른 이들보다 준비 기간이 아주 길어지겠죠? 그럼 연습할 시간도 늘어날 거고……. 많이 유리하지 않겠어요?”
“저, 저는 올해 입단하지 않는데요……. 열여덟 살이 돼야 입단할 수 있어요.”
“간혹 아주 뛰어난 댄서들은 규칙을 깨버리기도 하잖아요?”
카렐의 말이 맞았다. 러시아 출신 무용수인 자하로바 같은 경우도 전례 없이 월반을 해서 발레 스쿨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성공한 천재의 케이스였다. 사샤는 카렐이 자신에게 그만큼의 능력치를 넌지시 요구한다고 느끼며 위축되었다. 저에게는 아직 그만큼을 증명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발레단 오디션 곡에도 흐름이 있습니다. 아마 수년간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카렐의 말은 고저 없이 나직했고, 또 진지했다. 그가 조곤조곤 하는 말을 들으면서 사샤는 무언가 불안을 느꼈다.
“카렐? 이건 음……. 불법이에요.”
“불법?”
“네……. 불법? 아니, 범죄……? 하여튼…… 그거예요.”
“비리?”
“네. 맞아요.”
벌써 간이 쪼그라든 사샤는 부정적인 상상을 시작했다. 자신이 지나치게 잘하면 오디션 심사위원들이 의심스럽다며 진실을 파헤치려 들 것이다. 적당히 못하는 척하면 어설픈 연기를 들키게 될 것이고, 오디션을 통과하더라도 이후 인터뷰에서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간 모든 걸 다 들켜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성공을 위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어야죠?”
카렐의 말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되고 싶은 게 도덕 교사인가요, 아니면 발레 댄서인가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대담하게 비리를 입에 올리는 카렐이 무척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이게 진짜 어른인 것이다. 클래식 취향 따위가 아니라! 사샤의 가슴에 작은 흥분이 피어올랐다. 물론 카렐이 제 상상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의 올바르지 못한 면에 끌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저는……. 저는 성공할 거예요. 무조건……. 어떤 일이 있어도요.”
사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비열한 의지를 담은 눈을 보고 카렐이 쿡쿡 웃었다.
“비장하네요.”
“네…….”
“좋은 태도예요.”
카렐이 흡족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러자 그의 눈이 마법처럼 삭 가늘어졌다.
동시에 입술이 팽팽히 당겨지면서 뺨에 흐릿한 보조개가 패는 것을 사샤는 홀린 듯이 구경했다. 아마도 술에 취했거나 하여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친 상태였다면 손을 뻗어 그의 보조개를 더듬더듬 만져 보았을 것이다.
나의 대답이 그의 이런 표정을 만들어 낸 건가?
사샤는 항상 그를 이렇게 웃게 할 수만 있다면 아마 더한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건 자신이 그를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좋아요.”
쿡쿡 웃던 카렐은 그렇게 말하며 사샤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듯 쿡 찔렀다. 아주 귀엽다는 듯이……. 그건 분명 가벼운 애정 표현이었으나, 그와 반대로 진지한 사랑의 감정에 약간 도취되어 있던 사샤는 그 순간 환상에서 벗어났다.
짝사랑의 괴로운 점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샤 역시 언제나 카렐의 마음 안에 자신이 살고 있는지를 궁금해했다. 만약 있다면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러나 사샤는 방금 전의 그 손짓이 어린아이를 귀여워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동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이제는 떠나고 없는 형 레빈이 제 뺨을 버릇처럼 툭 건드리던 것과 닮아 있기도 했다.
아마도 카렐의 안에 살고 있는 자신은 어린 동생의 모습일 것이다…….
카렐의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닿았을 때 뭉클 짓눌려진 뺨에서 아릿한 느낌이 났다. 물론 물리적인 통증이 아니라 착각이 주는 저민 느낌이었다. 제 뺨을 손등으로 더듬거리면서 사샤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자신의 미성숙이 한탄스러웠다.
사샤의 울적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렐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투명한 잔에 약간의 술을 따르고 있었다.
“아무튼 열심히 준비해 보도록 해요.”
“네…….”
사샤는 군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최우수 장학생이었고, 그건 다시 말해 카렐이 돈을 대주는 수많은 학생 중 가장 많은 돈이 드는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주거지와 연습복, 식비에 대한 것까지.
그만큼 투자를 해 주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도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랄 테니까.
“……그럼 안무는 누구 걸로 연습해요? 미하일 포킨? 조지 발란신? 역시 발란신 건가요?”
사샤의 질문에 술을 한 모금 넘긴 카렐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다른 안무가 하나 더 있습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하나가 또 있어요?”
“네. 사샤 세드린의 안무로 연습하세요.”
“사샤 세드린?”
사샤는 카렐의 돌아선 등을 가만 바라보았다. 뒤돌아선 그의 얼굴이 보이지가 않았다.
“기록 공연 비디오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혼자서 따라 하기 어려울 테니 개인 교사에게 안무 지도를 부탁하는 게 낫겠군요.”
“…….”
“그 밖에도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해요. 뭐든 준비해 줄 테니.”
분명 감사해야 하는 일인데도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 묵직한 돌이 얹힌 것 같았다. 왜인지는 사샤 자신도 정확히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당신이 그 춤을 추는 걸 보고 싶군요.”
그러나 그 말 한마디에 사샤는 누그러졌다.
사샤는 아직까지 카렐에게 제대로 된 춤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바딤이 시켜서 후원자들 앞에서 췄던 해적의 솔로 베리에이션은 허벅지 근육의 통증 때문에 망쳐 버렸고, 그 외에 카렐이 본 사샤의 발레 동작이란 자기 전에 반복하는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바 워크 정도였다.
“기대하세요. 전 누구보다 잘 해낼 거예요.”
“…….”
“어디서도 보신 적 없을 거예요. 그 정도로 잘할 수 있어요.”
사샤는 그가 다시 한 번 흡족한 미소를 지어 주기를 바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카렐은 웃는 대신 가라앉은 눈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가 황금색 액체를 다 비우고 한 잔을 더 따를 때까지 사샤는 소파에 앉아 그의 또 다른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카렐은 빠르게 두 번째 잔을 단번에 비운 후 컵을 치워 버렸다.
“잘 자요. 좋은 꿈 꾸고요.”
그리고 허무할 정도로 짧은 굿나잇 인사.
“카렐도요.”
사샤는 앉은 채로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마스터룸으로 향했다.
문이 닫혔다.
남은 것은 음악이 끊긴 축음기에서 LP판이 헛도는 소리뿐이었다.
사샤는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멀뚱멀뚱 보면서 자신이 너무 오만하게 말한 건 아닌지 조금 반성했다. 카렐은 그런 식의 말투를 싫어할지도 모른다. 인터넷으로 그의 파파라치 기사를 찾아볼 때마다 카렐의 앞에는 ‘왕자’라든가 ‘황제’라는 수식어가 종종 붙었다. 모로 봐도 다른 사람을 위축되게 만드는 지위였다. 주제넘은 발언을 그가 좋아할 리 없었다.
‘좀 더 겸손하고 성숙한 태도를 보였어야 했는데…….’
별 의미도 없는 그의 짧은 침묵 때문에 사샤의 감정은 다시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소년이 사랑을 배워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미숙할 수밖에 없는 나이인데도 실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하는 점이 가장 괴로웠을 것이다. 소년의 눈에는 완전한 어른인 카렐이 저와 닮은 ‘완벽’한 상대를 선호할 것이라는 상상이 사샤를 더욱 주춤하게 만들었다.
사샤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축음기로 다가갔다. LP판 위에서 틱, 틱, 작게 튀고 있는 바늘을 판의 가운데에 옮겼다. 다시 한 번 익숙한 선율이 귀로 흘러들어 왔다.
카렐이 들어간 마스터룸을 조용히 응시하던 사샤는 ‘라 발스’의 크레셴도가 커지기 전에 볼륨을 아주 작게 줄였다.
카렐은 이 축음기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미래에 ‘누군가’에게 줄 거라는 말을 저 들으란 듯이 했다.
사샤는 황금색의 거대한 나팔을 손으로 조심스레 어루만져 보았다. 소리의 진동이 느껴지는 작은 떨림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갖고 싶어.’
카렐이 누군가에게 이것을 주는 상상을 하자 긴 눈매가 절로 촉촉해졌다. 사샤는 울지 않았다. 다만 가만히 서서 가슴을 물리적으로 쥐어짜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괴롭기는 해도 사샤는 이 감각을 좋아했다. 아버지의 학대나, 떠난 뒤 돌아오지 않는 형의 존재 같은 것은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괴로웠지만 짝사랑의 통증은 그보다는 훨씬 부드럽고 달콤한 면이 있어서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사샤의 울적한 얼굴을 통창에서 새어드는 흰 달빛이 비추었다. 라 발스의 서정적이면서도 비틀린 음계가 너른 거실을 잔잔하게 채웠다.
사샤는 아직은 본 적 없는 레전드의 안무를 상상하면서 팔을 펼쳐 저 나름의 포르 드 브라를 그려 보았다. 조금 전 카렐의 손이 무자비하게 짓눌렀던 등 근육에서 조이는 듯한 통증이 일었으나 무시하면서 어깨를 한계까지 누르고 흉곽을 조였다.
앙 오에서 알 라 스콩으로, 허공에 쭉 뻗은 손목이 아름다운 궤적을 그렸다.
표정 없는 소년의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사샤는 단지 손과 팔로만 감정을 드러냈다. 그게 바로 발레가 말을 하는 방법이니까.
밤의 센트럴 파크를 관객으로 사샤는 가볍게 제자리에서 앙 디올 피루에트(Pirouette)를 돌았다. 슈즈도 신지 않은 맨발이 바닥에 아픈 마찰을 일으키며, 안정적이고 마무리가 아주 느린 두 번의 턴을 만들어 냈다. 이어 파세로 들었던 오른 다리를 가볍게 바닥에 내리누르며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깃털 같은 착지. 동시에 말을 걸듯이 앞으로 건네준 양팔에는 처연한 기색이 있었다.
마스터룸에서 잠든 카렐이 깨지 않도록, 바닥을 쿵 찧는 점프나 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사샤는 쭉 뻗은 발끝으로 바닥에 원을 그렸다. 살금살금 소리 없이 걸으며 중력이 없는 듯한 동작들을 연습했다.
그것은 ‘달빛을 걷는 이’라 불리던 사샤 세드린의 특징적인 안무 스텝과 무척 닮아 있었다.
먼저 곤히 잠든 사랑하는 이를 깨우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같기 때문이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 밤중에 일어난, 우연 아닌 운명의 궤적이었다.
* * *
사샤는 ‘라 발스’의 안무를 어렵지 않게 습득했다. 비디오를 보고 섬세한 디테일을 분석해 내는 눈썰미가 워낙 좋기도 했고, 개인 과외 선생인 브라운 씨가 추가적으로 안무를 코칭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하는 바 워크와 센터 워크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춤을 추는 게 가장 좋았던 사샤는 최근 발레가 무척 재밌다고 느꼈다.
덕분에 사샤는 학교와 과외 수업을 마치고도 비는 시간마다 혼자만의 연습을 계속했다. 깊은 밤에는 축음기를 틀어 놓고 연습을 했고, 연습이 끝나면 스트레칭까지 한 시간을 꽉 채워 몸을 풀었다.
그런 사샤가 최근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된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프로모션 이벤트가 있는 날 아침에도 역시 사샤는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다.
평소 카렐은 알람이 한계까지 울리도록 방치하면서 자신이 깨워 주기를 기다리는 사샤의 어리광을 모른 척 받아들여 주었으나, 그가 생각하기에도 오늘 번쩍 들자마자 몸이 긴장하는 기색 없이 축 늘어지는 사샤는 조금 이상해 보였던 모양이다
카렐은 아침을 준비하면서 눈이 퀭한 사샤를 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최근 얼굴이 수척해졌다.
“잠을 설쳤나요? 어젯밤에도 늦게까지 음악 소리가 들리던데.”
“음……. 네, 저는…….”
몰래 연습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워 사샤는 침묵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이토록 열심히 연습했다는 사실을 알아달라고 티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났을 텐데.
“밤새 친구와 텍스팅이라도 했어요?”
“네?”
“요즘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조금 있다면서요.”
사샤는 카렐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신기해하면서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더듬더듬 설명했다.
“네, 맞아요. 하지만 친구들은 아니고 한 명인데……. 옥사나라고…… 저와 같은 러시아에서 온 친구예요. 말이 잘 통해요. 왜냐면 러시아어를 쓰니까요……. 요즘에는 같이 파 드 되 파트너를 주로 해요. 제가 조금 커서 이제 키가 맞거든요.”
“한창 좋을 때군요.”
“하지만 얘기하다 밤샌 건 아닌데요?”
사샤는 카렐을 빤히 보면서 사실만을 말했다. 그러나 왠지 카렐은 안 믿는 눈치였다.
“그래도 일찍 자는 게 좋아요. 사람 인생에서 키가 클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니까.”
사샤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부모님이 해 줄 법한 잔소리를 싫지 않게 늘어놓는 것이 카렐의 특기였다. 그 말을 해 주는 게 카렐이라는 건 물론 사샤에게 더없는 행복이었지만…… 동시에 왜인지 몰라도 무척 갑갑하기도 했다.
그때였다, 카렐의 손이 한숨짓는 사샤의 뺨 가까이로 불쑥 다가온 것은.
“먹고 나서 꼭 세수를 꼼꼼히 해요.”
사샤가 무심코 어깨를 움츠리기도 전에 카렐의 손이 사샤의 입가를 훔치고 떨어졌다.
사샤는 그의 손가락에 묻은 흰 요거트를 한 번 보고, 그다음으로 그가 아무 저항 없이 닦아낸 요거트를 가볍게 핥아내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또 심장이 미친 듯이 질주했다. 작은 사샤가 말릴 틈도 없이 심장에 불을 질렀다. 위가 타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은 벌컥벌컥 들이켠 레몬 넣은 탄산수 때문이었지만, 사샤는 작은 사샤가 방화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그때 사샤는 처음으로, 카렐의 마음속에 자신이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있는 것도 영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태연히 아침 식사 중인 카렐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으니까.
아예 아이로 여긴다면 그나마 가끔 이렇게 만져 줄지도 모른다.
사샤는 어서 성숙해져서 그를 정식으로 유혹할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조금 사리사욕을 채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 * *
그날 아침 두 사람은 함께 집을 나섰다. 카렐의 일정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극히 드물었다. 사샤는 하루의 시작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음, 내려가고 있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카렐은 짧은 통화를 마쳤다. 아마도 1층에 게오르크가 먼저 와서 차를 세워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샤는 내심 카렐이 저를 태워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차를 가질 수 없는 입장이지만, 사샤는 차에 관심이 무척 많았고 타 보는 것도 좋아했다. 그래서 카렐의 멋진 차의 내부 역시 아주 궁금했다.
“먼저 갑니다.”
그러나 카렐은 프라이빗 도어가 열리기 직전, 그 말만을 남기고 마이클이 서 있던 입구 앞을 빠르게 벗어났다. 마치 타인처럼 사샤를 등지고. 카렐이 주저 없이 호텔의 뒷문으로 향하자 그의 앞에서 기다리던 보이들이 차례로 문을 열어 주었다.
‘파파라치.’
사샤는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멀리 열린 문 너머에는 경호원 몇이 팔을 펼쳐서 길을 트고 있었고, 게오르크도 벌써부터 차의 문을 연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카렐은 문을 열자마자 몰려드는 사진기자들을 자연스럽게 피해 날렵하게 차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기자들은 그 짧은 틈에 항의하듯이 묵직한 카메라를 보이지도 않는 검은 창가에 들이밀었다. 게오르크가 운전하는 차가 몰려든 기자들을 힘겹게 밀어내며 조금씩 전진하더니 곧 도로에서 모습을 감췄다.
“학교 가는구나.”
마이클이 부드럽게 사샤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말을 걸었다.
사샤는 그때까지 카렐의 차가 사라진 곳에 박혀 있던 눈을 가까스로 떼고 마이클을 올려다보았다.
“학교는 정문 방향으로 나가야 빠르지.”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을 따라나설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 목이 빠지도록 바라보니 마이클이 오해한 듯했다.
카렐이 떠난 뒤에도 사진기자들이 어슬렁거리던 뒷문과는 다르게 정문 로비는 매우 한산했다. 사샤는 짧게 한숨을 뱉고 어깨에 크로스로 걸친 스포츠백의 끈을 손으로 꼭 쥐어 허리 뒤로 훌쩍 넘겼다.
그러고는 문을 열고 호텔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7번가쯤을 지날 때 사샤는 카렐의 차가 신호 앞에 멈춰 있는 것을 보았다. 창이 까만 차의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샤는 그 차를 향해 속으로 ‘안녕’ 하고 인사를 하고 나서 학교까지 멈추지 않고 뛰었다.
* * *
“정말 잘 뛰네요.”
게오르크가 무심코 던진 말에 카렐은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도심에서 조깅을 하는 게 드문 일은 아니지만, 저건 꽤 눈에 띄는데요.”
다시 출발한 차는 곧 달리고 있는 사샤를 따라잡았고, 이내 스쳐 지나갔다. 시야에서 사샤가 사라지자마자 카렐은 다시 보고 있던 패드로 시선을 내렸지만 운전을 하는 게오르크에게는 백미러를 통해 여전히 사샤가 보이는 듯했다.
“…….”
카렐은 게오르크가 백미러를 살피느라 신호에 늦게 반응하는 것을 다소 못마땅한 느낌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자꾸 백미러로 눈길을 주었다. 작은 거울 안에서 콩만 한 사샤가 달려오고 있었다. 몸이 지면을 박찰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흩날렸다.
“이 거리에서 슈트 차림의 사람들 사이로 전력질주를 한다라……. 아무튼 남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는다는 건 대단하네요. 저는 어릴 때 저러지 못했는데.”
“글쎄……. 그렇게 마이페이스인 성격은 못 되는 것 같던데.”
“그렇습니까.”
“아마도 워밍업을 위해서일 거야.”
“워밍업이요?”
“몸이 따뜻해진 상태에서 스트레칭을 해야 잘 늘어난다고 하더군.”
“발레 지식이 점점 더 늘어나고 계시네요.”
그 말에 카렐은 짧은 한숨을 쉬며 창턱에 팔을 걸쳤다. 손에 든 패드는 이미 볼 생각이 없어졌다.
“지나치게 발레 얘기만 해.”
“누가요. 아, 사샤 세드린 말입니까.”
“날 보면 할 얘기가 그것밖에 없는지.”
“후원자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실적을 아주 중요시하는 성향의……. 학생이 현명하게 처신하고 있는 거죠.”
카렐은 게오르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왼쪽 눈썹만 치켜세웠다.
“언제부터 그렇게 편을 들게 된 거지?”
게오르크는 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카렐은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차는 링컨 센터의 지척인 콜럼버스 서클에서 다시 한 번 신호에 걸렸다. 어린 사샤 세드린이 항상 지나치는 등굣길이었다.
“그 나이 대의 아이들이 어른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경우는 거의 없죠. 지적받고, 혼나고, 평가받기보다는 숨기는 게 나으니까요. 뭘 바라시는 겁니까?”
“음…….”
카렐은 답 없이 대답을 끌었다.
그의 눈이 조금 가늘어지며 녹색 눈의 홍채 주변이 황금빛으로 빛났다.
* * *
오전 클래스를 하는 내내 사샤는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언제나와 같이 집중해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바딤, 그리고 일사불란하게 바딤의 티칭을 따르는 학생들.
모두가 같은 동작을 하지만 조금씩 완성도가 달랐다. 그건 타고난 체형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었고, 손끝에 시선을 주는 버릇에 따라서도 달라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완성도를 결정짓는 한계는 대부분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샤는 어렸을 때 무릎을 완전히 펴기 위해 다리를 묶어 놓고 울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운이 나쁘면 그대로 무릎이 망가질 수도 있었고, 어떻게 그 시기를 버틴다 해도 무용수로서 한계가 빨리 찾아올 가능성이 컸다. 지금 생각하면 도박이나 다름없는 고문이었다.
그래도 타고난 무릎이 튼튼하고 좋아서 아직은 무리 없이 잘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과신전(過伸展)된 무릎을 볼 때마다 사샤는 몰래 뿌듯해했다.
반면, 제 곁에서 바를 잡고 다리를 허공에 뻥뻥 차고 있는 옥사나는 날 때부터 반장슬(反張膝)인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샤가 그걸 부러워하면 옥사나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넌 발등고가 높잖아. 너만큼은 안 바라니까 나도 좀 고가 나왔으면 좋겠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심지어 옥사나는 토슈즈를 신기 전에 타이즈 안에 도톰한 패드를 숨겨 발등이 높아 보이게 만들기도 했다. 패드를 넣으면 자신감이 생기는지 평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센터에 나섰다.
과신전된 무릎이나 높은 발등고 같은 것들은, 어찌 보면 발레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발레만의 미의 기준이었다. 그게 건강하지 않은 인위적인 기준이라 하더라도 원래 발레라는 것은 극도로 정형화되고 인공적인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칼같이 엄격한 세계에서 자신이 어떤 편법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 계속 사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당신은 도덕 교사가 되고 싶은 건가요, 발레 댄서가 되고 싶은 건가요.’
타고난 재능으로 엄격하게 한계가 구분되는 이 세계에서 사샤가 알고 있는 발레를 잘할 수 있는 방법이란 단 한 가지였다.
‘오래 하는 것.’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먼저 오디션 곡을 알고 따로 연습하는 것은 엄청난 혜택일 것이다.
사샤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카렐의 의지에 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의 요구를 그대로 따르려니 마음 한편이 무겁고 좋지 않았다. 잘못된 방법이 지름길이더라도 그 길로 질러가고 싶지도 않았다.
남들하고 동등한 선에서 출발해야 진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사샤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전 내내 마음이 떠 있던 사샤의 기분을 유일하게 알아챈 사람이 존재했다. 바로 옥사나였다.
“같이 점심 먹어.”
스튜디오 창가에 조르륵 늘어놓았던 가방에서 자기 것을 챙겨 들자마자 옥사나가 사샤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구내식당으로 가는 길은 북적였다.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사무직원들, 가발이나 소품 숍에서 일하는 나이 지긋한 장인들도 보였다. 그 사이에서 사샤는 마침 점심을 먹으러 왔던 발레단의 마케팅 팀장 제레미 로시를 만났다. 배식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던 그는 두 소년 소녀를 보자마자 반가워하면서 자기 줄에 끼워 주었다.
“오늘 오후에 프로모션 있는 거 알고 있지?”
사샤와 옥사나는 나란히 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따라 제레미의 머리가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머리카락 한 올 없는 그의 머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사무실을 벗어난다니 정말 즐거워. 누가 이런 기획을 했는지 정말 천재적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대머리를 관찰하느라 넋이 나간 사샤 대신 옥사나가 대꾸했다. 매일 반복되는 클래스를 빠지고 화창한 오후에 학교 바깥으로 나가 진짜 춤을 출 수 있다는 건 엄청나게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팀장인 제레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둘 다 밥 든든하게 먹고, 이따 3시에 광장으로 나오면 돼. 첼시 마켓까지는 4인 1조로 택시를 타고 갈 테니까.”
“네!”
옥사나가 기운차게 대답하며 손으로 팔을 툭 건드려서 사샤 역시 조그맣게 ‘네’ 하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사샤는 오늘 메뉴인 미트볼 스파게티와 필리치즈스테이크 샌드위치, 잠발라야 소스로 양념한 닭다리, 맥앤치즈 등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식판에 덜었다. 그런데 자리에 마주 앉고 보니 옥사나가 담은 양은 사샤보다 훨씬 많았다. 사샤는 심장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더 퍼올걸.’
대신 옥사나에게 지지 않게 사샤도 입 안으로 빠르게 음식을 밀어 넣었다.
“오늘 프로모션 공연 때문에 긴장한 거야?”
옥사나의 질문에 사샤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프로모션용의 안무 열 가지를 모두 익히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사샤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특히 사샤는 발레가 아닌 춤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재능 있는 아이들만을 모아 놓았지만 그중에서도 안무를 숙지하는 속도, 몸을 쓰는 방식, 시선 처리 같은 데서 타고난 센스가 드러났던 것이다.
발레단원들이 보고 판단했던 발레 바 워크 같은 것은 매일 똑같이 반복하다 보면 누구든지 잘하게 된다. 그러나 프로모션용의 안무는 진짜 춤이었으므로 재능의 차이가 훨씬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발레를 정말 잘하지만 목부터 허리, 골반을 통으로만 움직이던 클로이는 결국 연습 중에 프로모션 팀에서 빠졌다. 슬프게도.
반면, 사샤는 자신의 재능을 확신하게 되는 과정을 즐기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정식으로 춤을 보여주는 건 그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때문에 사샤는 공연을 앞두고 긴장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짧은 사색에 잠겨 있던 사샤를 바라보면서 옥사나는 입을 크게 벌려 필리치즈 스테이크를 베어 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시무룩한 건데.”
“티 났어?”
“응. 넌 엄청나게 티 나.”
사샤는 당황하면서 카렐과 자신이 한 모종의 거래마저 티가 난 건 아닐까, 내심 걱정했다.
안절부절못하던 사샤는 결국 먼저 입을 열고 말았다.
“옥사나. 저기, 있잖아……. 발레 오디션 곡을…….”
“응?”
“아니, 오디션 말고 만약에 콩쿠르 곡을…… 먼저 알 수 있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무슨 소리야. 콩쿠르용 베리에이션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잖아. 여자 솔로도 3년 내내 라 바야데르, 레이몬다, 키트리 같은 것만 계속 나왔지.”
“아, 맞다. 그렇지. 그럼 콩쿠르 말고 발레단 입단 오디션에서…….”
“입단 오디션? 라 발스 말하는 거야?”
사샤는 옥사나의 입에서 나온 ‘라 발스’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사샤의 눈은 한층 더 커졌다.
“네가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사샤 세드린, 아차, 너 말고. 아무튼 그 사람의 라 발스가 올해 오디션 곡이라던데?”
“너도 후원자가 있어?”
자신이 알 수 있는 출처는 그것뿐이었으므로 사샤는 그렇게 물었다. 옥사나는 영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꺾으며 말했다.
“아니? 난 장학생이 아니잖아. 소문은 처음에 조제가 물고 왔지. 콩쿠르에 나갔더니 조제네 부모님이 심사위원들한테 식사 대접을 하다가 알아냈대. 조제네 부모님이 좀 극성이잖아. 그건 그냥 그렇구나, 했는데 얼마 전에 클로이도 예술 감독님 사무실에서 봤다던데? 발레단 정단원 오디션 지정곡도 ‘라 발스’였다고.”
“아……. 진짜?”
사샤는 카렐이 엄청난 지위와 탄탄한 인맥을 이용해서 몰래 알아낸 정보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조금 실망했다.
동시에 약간의 안도가 찾아왔다. 모두가 비리를 저지르고 있으면 그건 비리가 아니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카렐이 자신을 속인 게 아닌가 하는 의혹에는 그보다도 더 늦게, 밥을 다 먹고 식판을 치울 때쯤에야 도달할 수 있었다. 카렐이 보조개가 파일 정도로 매력적으로 웃은 이유는 제 말에 휘둘리는 자신이 우스워서 그런 것이었다. 사샤는 배신감에 말없이 몸을 떨었다.
* * *
‘뭘 바라시는 겁니까?’
게오르크가 지나치듯 던진 물음에 카렐은 나름 진지하게 골몰했다.
어린 사샤 세드린. 검은 머리카락에 가냘프고 탄력 있는 몸을 가진 소년.
그리고 누군가를 무척 닮은…….
카렐이 주로 가지고 있는 과거의 사샤, 올드 세드린의 비디오는 40대 이후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마저도 40대 초반의 것들은 초창기 필름이라 아무리 잘 복원해 내도 속도가 조금 빨랐고, 프레임이 종종 끊겼으며,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얼굴에 부드러운 표정 주름이 지기 시작한 50대에도 올드 세드린은 여전히 20대처럼 날씬하고 탄력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카렐이 기억하는 사샤 세드린의 모습은 대부분 그 원숙한 때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숭배자인 카렐에게 사샤 세드린의 어린 시절 얼굴을 추론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린 사샤 세드린을 보면서 가끔 내심 놀라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어린 사샤 세드린은 과거의 인물과 단지 이목구비와 얼굴 골격을 닮은 것만이 아니었다. 이름을 부르면 조금 느리게 뒤를 돌아보는 동작, 손짓이나 걸음걸이 같은 것이 마치 흉내 낸 것처럼 닮은 부분이 있었다.
카렐의 시선을 붙잡아 놓는 것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었다.
‘내가 억지로 닮은 부분을 찾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아무튼 가까이서 본 어린 사샤 세드린은 원숙미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는 지독한 애정 결핍에 시달리고 있었고, 정신은 유약했으며, 눈물도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발레 외골수였고, 지친 육체를 모른 척하고 본인을 채찍질해 대는 경쟁심과 향상심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사샤 세드린은 불우한 어린 시절과 가혹할 정도로 가난했던 가정의 재정 상태 때문인지 간혹 카렐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이사를 올 때 가져왔던 마시멜로를 도토리 저장하듯 옷장 속에 넣어 놓는다든지, 자신이 사 준 옷이나 가방 따위의 태그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서랍에 차곡차곡 모아 놓는 것도 그랬다. 생일 당일, 카렐이 선물해 준 맞춤 향수를 받았을 때는 대번에 눈물이 고일 정도로 기뻐하더니 정작 한 방울도 쓰지 않고 고이 모셔 두기만 했다.
카렐은 그 모든 게 가난이 빚어낸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떠올리니 조금 씁쓸해졌다.
쓰라고 준 카드의 결제 내역도 발레 장비를 제외하면 10달러를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간식으로 먹는 거라곤 1.99달러짜리 애플파이, 커피전문점의 것이 아닌 맥도날드 커피, 콜라, 초콜릿바, 그리고 아주 가끔 4달러가 넘는 따뜻한 라테.
용돈을 쓰는 구석이 매우 하찮아 사유를 적을 필요도 없는데, 사샤 세드린은 뭔가를 하나 살 때마다 영수증에 구매 사유를 두 줄씩 적었다.
[언래 가치고있던 남색이 있얻는데 허리 부분에 못이 걸러서 찢어짐. 학교에서 버럿습니다.]
[타이즈가 발바닥애서부터 구멍이 남. 이것도 신어보러 할 수는 있는데요. 새것도 있어야데요.]
[에너지가 모잘라서 낮에 어지러엇기 때문에 초코렛바]
[새로 산거 슈즈가 를르베 할 때 발이 짝아요. 를르베할 때 여유롭게 잇어야 헤서 사이즈 바꺼서 다시삽니다]
맞춤법이 엉망인 사유들을 떠올리며 카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사샤가 후원자에게 보낸 메일들은 그나마 문법과 스펠링이 매우 정확한 축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탓이다. 사샤가 날려 쓰는 영어는 맞춤법을 틀리는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리고 게오르크는 본인이 판단하고 넘겨도 되는 이런 사소한 증빙들을 매일의 일정 보고 메일에 함께 끼워서 카렐에게 전달해 주었다. 사샤가 손으로 쓴 사유들을 모두 사진으로 찍어 첨부했던 것이다.
두 남자는 한 번도 그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으나, 게오르크는 카렐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는 것을 알고 그 뒤로도 항상 사샤의 사유서를 첨부해 메일을 보냈다.
카렐은 그렇게 사샤의 사유서를 통해 아이의 습관과 취향과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학교 내에서 카렐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이들이 어린 사샤 세드린의 실력 성장을 보고해 주고 있기도 했다. 얼마나 ‘레전드’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같은 것들을.
예를 들면 바딤, 그는 카렐의 지시로 사샤를 철저히 교육하고 있었다. 특히 레전드의 특징적인 안무 습관 같은 것들을 심는 데에 주력했다. 그리고 발레 스쿨과 발레단의 예술 감독 역시 카렐의 측근 중 하나였다.
단, 현재 동갑내기 여학생과 아기자기한 연애를 나눈다는 소문 같은 것은 따로 보고해 주는 이가 없었다. 로마시나가 우연히 본 것을 말해 주지 않았다면 여전히 몰랐을 것이고.
아무튼 소년의 사적인 일들은 직접 들어야 할 것이다.
카렐은 사샤가 자신에게 인간관계나 연애 고민 같은 것들도 털어놔 주기를 바랐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하면…….
“항상 솔직하기를 바라지.”
“예?”
“사샤 세드린 말이야.”
맥락을 파악했는지 게오르크가 이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어렵겠네요.”
“왜지?”
“몰라서 물어보십니까? 다른 사람에게 다 솔직하게 군다 해도 ‘누구’ 앞에서는 어려움을 겪고 말 겁니다.”
“네가 그런 말을 하니 우스운데.”
게오르크는 ‘그야 그렇지만……’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들에게 내가 얼마나 관대한지, 네가 직접 봐야 해.”
“네, 네. 그러시겠죠.”
영혼 없이 대꾸하던 게오르크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화제를 돌렸다.
“아, 오늘은 첼시 마켓에서 프로모션을 한다는데요. 지금쯤이겠군요.”
주어가 없었지만 카렐은 게오르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이해했다. 발레 스쿨의 프로모션팀 이야기였다.
사샤를 비롯해 프로모션팀으로 발탁된 학생들은 안무 연습을 끝내고 이제 막 실전에 투입되기 시작했다. 뉴욕 곳곳의 일상적인 장소들, 마트의 계산대 앞이라든가 보행자가 많은 하이라인의 특정 구역, 미슐랭 레스토랑의 디너 시간에 출몰하며 플래시몹처럼 짧은 안무를 하고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순간적인 이벤트인 데다가 아직은 어린 발레 스쿨 학생들에게 누가 집중할까 싶었는데, 사샤 세드린은 그 안에서도 금세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일상을 깨는 이벤트의 순간을 포착한 영상과 사진들이 SNS 곳곳에 업로드되었다. 그러면 검은 머리에 창백한 흰 얼굴을 가진 어린 소년이 누군지 묻는 댓글이 즐비했다. 이름과 학교, 나이 같은 정보도 어느 정도 퍼진 것으로 보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군.”
“그러니까요. 사진을 꽤 찍히지 않을까요?”
“…….”
“홍보가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카렐이 말이 없자 게오르크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역시 팀에서 빼는 게 낫겠습니까?”
* * *
프로모션을 30분가량 앞둔 시간, 사샤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노란 택시의 뒷좌석에 실려 가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은 언제나 접하던 맨해튼의 거리였지만, 택시를 타고 보는 기분이란 더욱 특별했다. 사실 택시는 사치스러워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는데, 프로모션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타 보게 됐다. 사샤는 자신이 호강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샤를 포함해 뼈대가 가느다란 소년 소녀 셋이 뒷좌석에 함께 앉고, 앞자리에는 발레단 마케팅팀의 제레미 로시가 앉았다. 하도 날씬한 아이들이라 세 명이 앉아도 자리가 비좁기는커녕 서로 무릎이 닿지도 않았다.
오늘 공연을 하게 될 곳은 첼시 마켓으로, 사샤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몰랐지만 굴이나 랍스터를 잔뜩 먹을 수 있는 모양이다. 사샤의 옆자리에 앉은 레베카와 스탠이 첼시 마켓에 가면 꼭 먹어야 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사이에 사샤는 오늘 할 안무에 대해 떠올렸다.
프로모션용의 안무는 5분가량으로, 매우 짧은 공연이었다. 오늘은 한 시간 안에 미리 허가를 얻은 장소 세 군데에서 퍼포먼스를 하게 된다. 특히 마지막에는 옥사나와 함께하는 짧은 파 드 되가 있었다. 사람들이 자신들 둘만을 주목할 거라고 생각하니 무척 떨렸다.
“오늘은 어떠니? 다들 컨디션 좋아?”
앞좌석에 앉아 있던 제레미가 물었다. 사샤 대신 다른 아이들이 대답했다.
“네, 아주 좋아요.”
“거짓말. 레베카는 긴장돼서 점심 안 먹었대요.”
“무서워서 긴장한 거 아닌데요! 다 괜찮은데 댄스용 슈즈가 아니라 조금 불편해서 그래요. 운동화 안에서 포인을 어떻게 하냐구요.”
레베카의 말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운동화 안에서 발등에 힘을 줘 보았다. 발등 힘이 좋아서 꾸욱 밑창을 누르는 힘에 스니커즈 위로도 분명한 포인이 보였다.
“아, 그리고 맞아! 바닥 마찰도 좀 달라요. 턴이 마음대로 안 돼요.”
“너무 미끄러워서 밸런스를 못 잡을까 봐 발목이 후들거려요. 세 바퀴 돌아야 하는데 한 바퀴밖에 못 돌아졌어요.”
사샤는 저 대신 떠드는 아이들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만 동의했다.
영어가 네이티브인 10대들의 말은 훨씬 빠른 데다 지금 사샤 옆에 앉아 있는 레베카처럼 수다스러운 아이들은 특히 다른 아이들에게 말할 틈을 잘 주지 않았다. 사샤는 말을 할 때에 타인이 제 말을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빨리 뛰고는 했으므로 이럴 때는 말하기를 아예 포기해 버렸다. 특히 같이 있는 사람이 저 포함 세 명이 넘어갈 때는 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생각을 못 했어. 아무래도 우리 기획하는 사람들은 사무실에 앉아서 구상을 하다 보니 말이야. 안무를 바꾸는 게 나을까?”
제레미의 말에 다른 아이들은 허세를 부리며 ‘상관없다’고 큰소리쳤다. 사샤도 앞좌석 등받이 위로 툭 튀어나온 제레미의 빛나는 정수리를 보면서 속으로 동의했다.
확실히 춤을 추는 곳이 발레 연습용으로 시공된 바닥이 아니라 공공장소인 것은 문제가 되었다. 차라리 바닥이 거칠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원목이나 대리석 바닥은 지나치게 미끄러워 꽤 성가셨다. 바로 직전에 공연을 했던 플라자 호텔 지하 바닥이 아주 미끄러운 바람에 몇 명은 안무를 틀리기도 했다. 다행히도 큰 사고는 없었지만, 미끄러운 바닥에서는 까딱하다가는 발목을 다칠 수도 있었다.
사샤는 스포츠백 안에 미리 챙겨 온 송진가루를 떠올리며 가방끈을 괜히 꾹 쥐었다. 슈즈 바닥에 칠하면 쉽게 마찰력을 올려주는 것으로, 이벤트를 시작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신발 밑창에 바르라고 나눠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챙겨 왔다.
그러고 보니 노련한 무용수들이 투어를 다닐 때 다른 공연장에 가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바닥의 질과 탄성이라고 들었다. 어찌 보면 자신도 그 과정을 겪고 있는 셈이다. 실전에 가까운 경험을 하는 이 과정 자체가 사샤에게는 아주 흥분되고 즐거운 일이었다.
“사샤. 사샤 쉬드린. 너는 괜찮니? 말이 통 없구나. 컨디션이 어때?”
비록 타인은 이런 사샤의 들뜬 마음을 잘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사샤는 갑자기 이름이 불린 바람에 크게 당황하면서 ‘캐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전혀 긴장하지 않았어요’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방금 전 자신의 발음에 바보 같은 악센트가 심하게 섞이는 바람에 그냥 말을 삼켰다.
“아주 다행이구나.”
제레미를 비롯해 저들끼리 수다를 떨기 시작한 아이들까지, 아무도 사샤의 발음을 지적하지 않았지만 사샤의 머릿속에는 ‘캐찮아요’라는 이상한 발음이 몇 번이나 반복 재생되었다. 심지어 작은 사샤마저 쩌렁쩌렁 외쳐 댔다.
사샤는 한 번 한 생각에 틀어박히면 좀처럼 떨칠 수 없는 자신의 성가신 면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애써 무시하며 다른 생각을 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작은 사샤는 더더욱 소란을 피웠다. 정신없이 텀블링을 하며 비웃듯이 ‘캐찮아요, 캐찮아요’라고 시끄럽게 외쳤다.
「시끄러워……. 닥쳐.」
사샤는 무의식적으로 러시아어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사샤의 옆에 앉아 있던 레베카가 저에게 말을 건 줄 알고 사샤를 흘끔거렸다. 그러나 사샤의 시선이 창밖에 못 박혀 있는 데다가, 레베카는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 말 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다 왔구나. 사샤부터 천천히 내리렴.”
제레미의 말에 정신이 퍼뜩 들어 사샤는 택시 문을 열고 내렸다.
뒤이어 도착한 노란 택시에서도 아이들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공연의 반주를 해 줄 바이올리니스트도 함께였다.
그중에서 옥사나를 발견한 사샤는 조금 안심하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옥사나는 다른 아이와 수다를 떨고 있어서 사샤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았지만, 그 뒤에 그림자처럼 달라붙는 것만으로도 사샤는 조금 안정할 수 있었다.
뒤이어 아홉 명의 아이들은 제레미의 인도에 따라 실내로 향했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사슴처럼 날씬한 팔다리를 가진 데다 여자아이들은 머리카락을 쫙 올려 묶은 번헤어를 해서인지 자연스레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개중 외모로 자연 눈길을 끄는 것은 창백한 피부를 가진 사샤 세드린이었다. 평범한 티셔츠 위로 쭉 뻗은 우아한 목선이 우윳빛으로 빛나 눈에 띄었다. 사샤의 뺨과 팔꿈치는 약한 흥분과 긴장으로 인해 조금 분홍색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만약 그 정도의 혈색마저 없었다면 지나치게 창백해 밀랍인형처럼 보였을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사샤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어깨를 수그린 채 옥사나의 뒤에 붙어서 걸었다. 춤을 출 때 주목받는 것은 아무렇지 않지만 그냥 걸어 다닐 때 사람들이 보는 것은 지나치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특히 이럴 때에 사샤가 고개를 잘 들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이다. 문득 눈을 들면 누군가와는 분명히 시선이 마주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번 사샤의 얼굴을 목격한 이들은 무례도 잊고 관찰하듯 세세하게 뜯어보게 된다. 일생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미소년을 발견한 이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그런 이유를 알 리 없는 사샤는 그런 진득한 시선들을 그저 부담스럽게 느낄 뿐이었다.
사샤는 식은땀이 차기 시작하는 손바닥을 느끼면서도 잊지 않고 걸음걸이마다 바닥을 꼼꼼히 눌러 보며 마찰을 확인했다.
오늘 춤을 출 장소는 다행히 미끄럽거나 한 곳은 아니었다. 도리어 바닥면이 거칠고 딱딱해 훨씬 안정적일 것 같았다.
「옥사나? 바닥 마찰이 좋아.」
「네 말이 맞아. 안 미끄러워서 좋다.」
동의를 얻은 사샤의 기분은 조금 나아졌다.
이어 첫 번째 이벤트 장소에 다다른 아이들은 각자 조금씩 챙겨 온 짐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제레미에게 맡겼다.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자 사샤의 심장 고동은 점점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삼삼오오 모여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벤치에 앉아 무료하게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까지……. 잠시 후의 군중이 되어 줄 사람들의 면면을 바라보며 사샤의 가슴은 점점 기대감에 찼다. 작은 사샤마저 숨죽이고 잠시 뒤의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공연이 특별한 이유는 관객과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사샤는 그 점 때문에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이 공연이 무척 즐겁기도 했다. 춤을 추는 것만큼이나 저를 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아주 기뻤다.
그리고 그렇게 관객을 살피던 사샤의 눈에 들어온 익숙한 한 사람이 있었다.
체격이 좋고 키가 훌쩍 큰 남자는 다름 아닌 게오르크였다.
‘게오르크?’
반갑기도 하고, 하루 종일 바빴을 그가 하필 이곳에 있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해서 사샤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순간 게오르크와 사샤의 눈이 마주쳤다.
사샤는 게오르크도 오늘의 관객이 되어 줄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만약 그렇다면 자기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키우는 데 손이 많이 가고 돈만 드는 성가신 소년인 것만이 아니라, 나름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사샤? 얼른 이리 와.”
게오르크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사샤에게 옥사나가 손짓했다. 벌써 프로모션팀의 아이들은 잠시 뒤의 무대가 되어 줄 곳 언저리에 흩어져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샤가 게오르크에게 작게 눈인사를 하고 돌아설 때, 그가 제레미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사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제레미가 저를 부름과 동시에 연주가 시작되었다.
사샤는 그가 왜 저를 부르는지 몰라 의문을 품은 채로 다른 아이들과 함께 비어 있는 공간으로 달려 나갔다. 포즈하기 직전, 일부러 운동화 끝으로 바닥의 마찰을 느끼며 적당한 정도의 발목 힘을 확인했다.
그다음부터는 어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스포팅을 하는 사이 빙글 도는 시야 안으로 환희에 찬 군중의 얼굴이 보였고, 사샤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손에 든 사람이 늘어날수록 사샤의 얼굴에는 작은 생기가 돌았다.
딱 한 가지 사샤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돌로 된 바닥에 탄성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가볍게 뛰는 샤세(chassé) 직후 허공 높이 다리를 던져 뛰는 푸에테 점프에서 사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을 내뱉는 것을 들었다. 아라베스크로 착지한 다리가 흔들림 없이 곧게 뻗었고, 위로 탄탄히 들면서 버틴 가슴과 꽉 조인 등판이 우아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탄성에 마음이 뿌듯해진 것도 잠시, 사샤는 발목과 무릎에 울리는 감각이 기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돌바닥이 지나치게 딱딱해 점프 직후 발목에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무릎을 더 굽혀야 하나 봐.’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침 사샤는 저에게 달려오는 옥사나를 단단히 받아 들었다. 마지막 두 사람의 파 드 되 순서였다.
공중에서 그랑 주테를 하는 파트너의 몸을 받쳐 줄 때는 특히 허리와 발목 힘이 필요하다. 한 사람의 체중을 완전히 들면서도 마치 무중력 공간에서 받아 든 것처럼 사뿐하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읏…….’
가녀린 소녀의 허리를 꽉 붙잡은 사샤의 양팔에 푸른 정맥이 솟았다.
사샤는 다문 입 안으로 이를 악물면서도 항상 바딤이 강조했던 것처럼 절대로 힘든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딱딱한 바닥 때문에 평소보다 허리에 하중이 걸렸지만, 그래도 할 만했다.
짧은 파 드 되를 마지막으로 안무가 완전히 끝났다. 어느새 둥그렇게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동시에 주어진 역할이 끝나자 다시 급격히 수줍어진 사샤는 고개를 숙이고 그 자리를 달려서 떠나려 했다.
「어디 가?」
그런 사샤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아 당긴 후, 뻔뻔할 정도로 우아한 애티튜드로 끝까지 인사를 하게 만든 것은 옥사나였다. 작은 새처럼 귀여운 두 커플에게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곳곳에서 핸드폰을 들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사샤는 다시 수줍어하면서 옥사나의 뒤에 숨으려 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말을 걸었다.
“저기,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면 안 될까요?”
“사진이요?”
옥사나는 기분 좋겠다는 듯이 사샤의 등을 툭 치고는 제레미에게 향했다. 사샤는 혼자 남겨져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제 앞으로 들이밀어진 핸드폰의 화면 안을 바라보았다. 사진 촬영을 부탁한 여자 옆에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멍청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셀피를 찍힌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뒤로도 사샤는 몇 장의 사진을 더 찍었다. 어리둥절한 채로 머뭇대고 있는 사이 사샤의 뒤로는 길게 줄이 늘어설 정도였다. 심지어 사진을 찍어 주는 와중에도 다른 이들에게 사진을 찍혔다. 그중에서는 사샤는 알아들을 수 없는 다양한 외국어도 들렸다. 자연스럽게 이마 위로 흐트러진, 짙은 까만색의 머리를 가진 소년의 얼굴은 지나치던 관광객들이 뉴욕에서 본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희소한 외모였던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불러들였고, 사샤는 금세 인파에 휩싸였다. 사샤는 귀 앞쪽에 조금 맺힌 땀을 손등으로 찍어내면서 다시 도움을 요청하듯 제레미가 있던 쪽을 바라보았지만, 인파에 가로막혀 그의 모습을 금세 찾지 못했다.
그때였다.
“나도 사진을 한 장 찍고 싶은데요.”
사샤의 정수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줄을 무시하고 제 곁에까지 다가온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 사샤의 입은 놀라움에 헤벌어지고 말았다.
“카…….”
“공연 잘 봤어요.”
“제 춤을 보셨어요?”
사샤는 거의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럼요.”
그가 긍정하면서 미소를 지어 주자 사샤는 너무 좋아서 신음을 흘릴 뻔했다.
그리고 카렐은 말없이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며 사샤의 등에 손을 얹고 자연스럽게 인파 속에서 사샤를 빼내었다. 사진 촬영을 차단하듯 그의 가는 몸을 가렸지만, 사샤는 알아채지 못했다.
원래 아는 사이처럼 친숙해 보이는 이의 그러한 행동에 사람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제각각 흩어졌다. 갈 길을 가던 사람은 발을 옮기고, 일부는 한구석에 모여 있던 다른 학생들에게 향하기도 했다.
사샤는 카렐의 얼굴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그가 왜 이곳에 왔을지 생각했다.
우연일까? 아니면 일부러 와 주셨을까?
아무튼 게오르크가 여기에 와 있던 건 이유가 있던 셈이다. 사샤는 그가 언제부터 여기에 와 있을지를 생각하느라 넋이 빠졌다.
「사샤? 이분은 누구야?」
그때 사샤의 등 뒤에서 익숙한 러시아어가 들렸다. 말을 걸어온 것은 옥사나였다.
「응, 이분은…….」
그러나 사샤가 답하기도 전에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반가워요. 전 사샤의…… 삼촌입니다.」
「삼촌이요? 안녕하세요……?」
사샤는 카렐과 옥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옥사나의 뺨은 소녀처럼 수줍게 물들어 있었고, 그를 내려다보는 카렐의 표정은 매우 부드럽고 관대해 보였다. ‘옥사나가 왜 이러지?’ 항상 말괄량이 같던 옥사나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을 발견한 사샤의 머릿속은 금세 미궁에 빠졌다.
그리고 그중 사샤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카렐이 아주 매끄러운 발음의 러시아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름이 뭐죠?」
「옥사나…… 옥사나 스미노바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두 사람은 짧게 악수했다. 카렐의 커다란 손 안에 옥사나의 손이 쏙 숨어들어 갔다.
그걸 보면서 사샤는 카렐이 무언가를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레빈과 인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카렐은 매너를 엄격히 지키면서도 제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사샤는 의중을 알 수 없는 카렐의 턱을 넋이 빠져라 올려다보았다. 귀밑 아래로 강인한 선을 그리고 있는 턱은 군살이 하나도 없어 날카로웠고, 탄탄한 목덜미까지 그림 같은 선을 그렸다. 저기에다가 코를 박으면 어떤 향수 냄새가 나는지 사샤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사샤는 자신이 잘 따져 보아도 파악할 수 없는 그의 속내보다도 눈앞의 매끄러운 피부에 금세 홀려 버렸다.
「와……. 사샤, 너는 친척들도 잘생겼구나? 너희 삼촌 정말 멋있다.」
사샤가 카렐을 정신없이 바라보느라 현재 상황도 잊어버리려 할 때쯤에 옥사나가 사샤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슈트 광고에나 나올 법한 완벽한 어른 미남을 가까이서 목격한 옥사나도 흥분한 나머지 사샤와의 거리 조절을 하지 못해 그의 팔에 찰싹 붙었다. 사샤의 말랑한 귓가에 입술이 거의 붙을 듯했다.
그러자 카렐이 사샤의 팔을 안아 가볍게 제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칭찬 고마워요. 작은 댄서들의 공연을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잠시 사샤와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카렐이 나지막하게 말하며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허리를 조금 굽히자 옥사나는 양손으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가리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카렐이 말하는 러시아어는 약간 문어체의 느낌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법상으로 아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러시아어가 이렇게 아름다운 언어였나?’ 사샤는 카렐의 입에서 나오는 러시아어를 300시간 정도 들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바닥 조심해요.”
카렐만 바라보다가 바닥의 턱에 걸릴 뻔한 사샤는 그제야 그가 저를 복도 한쪽의 구석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카렐……?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사샤는 떨리는 심장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가 우연한 일정으로 여기를 지나가다가 자신을 발견한 것이라도 좋았다. 어쨌든 그에게 자신이 가장 잘할 때의 모습을 한 번 정도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에 오면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와 준 것이라면 더없이 기쁠 것 같았다.
카렐은 제 뒤쪽의 인파를 슬쩍 뒤돌아보더니 간단하게 답했다.
“후원회의 일과죠.”
“아…….”
아주 조금 실망했지만,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 후원회라는 것 덕분에 카렐과 자신이 만날 수 있었고, 또 오늘 같은 일도 있던 것이니까.
그리고 사샤는 굴하지 않고 또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면 왜 옥사나한테 제 삼촌이라고 하셨어요? 혹시 후원자랑 삼촌이라는 단어를 헷갈리셨나요? 후원자는 파트론이고 삼촌은 댜댜예요…….”
도무지 헷갈릴 수가 없는 단어이지만 사샤는 만약의 가능성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사실 진짜 속마음을 말하자면, 조금 전 카렐이 저의 유사 가족을 자칭해 주었을 때 사샤의 가슴은 미친 듯이 떨렸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카렐이 자신의 ‘댜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허리띠로 자신을 때릴 때, 그리고 일에 지친 어머니가 제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카렐이 자신을 달래 줄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러면 ‘사랑’은 할 수가 없다. 친척과 사랑을 나누게 되면 어머니가 아주 크게 실망하실 것이다.
카렐이 이내 사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음……. 후원자와 학생이 사적으로 만나는 건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알려지면 별로 좋을 것 같지 않았어요.”
“아…….”
논리적인 대답이었지만 무언가 모자랐다. 사샤는 다시 한 번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런데 러시아어는 어떻게 배우셨어요? 발음이 정말 아름다워요……. 제가 영어를 하는 것보다 카렐의 러시아어가 더 나은 것 같아요. 혹시 카렐은 제가 러시아어를 하면 알아들을 수 있으세요?”
“그럼요. 말하기보다는 듣기가 낫습니다.”
“러시아어 말고 다른 말도 할 줄 아세요?”
“네.”
“정말 대단해요…….”
말하면서도 사샤는 자신이 대화의 방향을 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사샤가 알고 싶은 것은 그가 ‘왜 러시아어를 배웠는지’였다. 물론 사샤는 짐작할 수 없는 대단한 거래를 할 때에 러시아어를 꼭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 상류층은 취미로 여러 언어를 배우는 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인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가 러시아어를 배운 이유 중에 자신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사샤의 감은 왜인지 그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 왜 한 번도 안 알려주셨어요?”
“무엇을 말이죠?”
“러시아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요.”
사샤는 이 점이 궁금했다. 설마 그가 자신이 러시아 아이인 것을 잊었나 싶을 정도였다.
”가끔 제가 바보같이 말할 때가 있는데, 저도 러시아어로 말하면 똑똑하게 말할 수 있어요.”
“……바로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예요. 당신의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사샤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카렐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신이 영어를 쓸 때 그나마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대화 상대는 무척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훌륭한 댄서가 되면 당연히 당신을 위한 통역들이 붙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영어를 할 수 있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예요. 북미나 유럽권에서 활동을 오래 하는데도 영어가 절대 늘지 않아 통역을 쓰는 댄서들에게는 ‘게으르다’는 구설이 붙기도 하니까요.”
“네…….”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영어 공부 열심히 해야 해요. 알겠습니까?”
“알겠어요…….”
사샤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이라는 것을 사샤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혀 달콤하지는 않았고, 부모 대신 해 주는 잔소리 같기만 했다. 동시에 사샤는 카렐의 조언을 잔소리처럼 받아들이고 마는 자신을 속으로 자책했다.
호텔이 아닌 외부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카렐, 다른 이들 앞에서 ‘댜댜’를 자청해 준 카렐,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카렐.
그 모든 사실이 잡힐 듯 말 듯 하나의 실마리를 가리키고 있었으나, 사샤의 앞에서 카렐은 적당한 변명으로 선을 그었다. 방벽을 철저히 세워 쓸데없는 여지가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한 어른에게서 감정의 틈을 찾아낼 수 없던 사샤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마침 카렐의 건너편에서 제레미 로시와 이야기를 마친 게오르크가 다가왔다.
“사샤? 반가워요. 여기서 이렇게 볼 줄은 몰랐습니다.”
“네? 거짓말…….”
여기서 만난 것이 우연이라는 듯 뻔뻔한 연기를 하는 게오르크의 말이 믿기지 않아 사샤는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신뢰감이 부족하네, 게오르크.”
카렐은 태연하게 게오르크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툭 쳤다. 게오르크는 일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그렇군요’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제레미는 괜찮다고 하는데요.”
게오르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카렐이 사샤를 향해 말했다. 카렐이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샤의 심장은 철렁,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쉽지만 이만 가 봐야겠어요.”
“네? 벌써요……? 약속이 있으세요?”
아직 공연이 두 차례나 더 남았는데 벌써 간다는 말이 아쉬워서 사샤는 여러 번 물었다.
“그래요. 저녁 식사를 할 때가…….”
“저녁을 벌써 드세요? 아직 4시도 안 됐는데요. 물론 아무 때나 배가 고파질 순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같이 갈까요?”
자신의 횡설수설을 뚝 끊으며 내려다보는 카렐의 제안에 사샤의 숨이 멈췄다.
사샤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카렐에게 물었다.
“제, 제가 가도 되나요?”
“원한다면요. 마침 여기서 질 좋은 굴을 파니 해산물과 랍스터를 조금 사가도 되고요.”
아까 노란 택시를 타고 올 때 레베카와 스탠이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대화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사샤는 다른 아이들이 말하는 것을 모두 유심히 들었다. 신선한 굴을 품종별로 팔고, 녹인 버터에 찍어 먹는 랍스터를 살 수도 있고, 클램 차우더도 종류별로 있다고 들었다.
“갈래요.”
카렐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갈래요. 하지만, 하지만…….”
사샤의 눈이 아직 저 뒤에 무리를 이루고 있는 제레미와 다른 아이들에게 머물렀다.
“저는 일하는 중이에요.”
“알겠어요. 무리하지 말아요.
카렐은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이 관대하게 말해 주었다. 이제 안달이 나는 것은 사샤 쪽이었다. 사샤가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을 안 카렐이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가서 허락을 구해 보는 건 어떨까요.”
“네? 네……. 지금 당장 그렇게 할게요.”
사샤는 자신 없이 제레미에게 향했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아 몇 번 카렐을 뒤돌아보았지만, 그는 벌써 사샤에게서 눈을 떼고 게오르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샤! 왔구나. 네 가방 챙기렴.”
제레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맡아 두고 있던 사샤의 스포츠백을 건네주었다. 사샤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말씀드릴 게 있는데요…….”
옆에서 옥사나가 무슨 일인가 하며 시선을 주었다.
* * *
‘역시 팀에서 빼는 게 낫겠습니까?’
그렇게 게오르크가 물었을 때 카렐은 고개를 저었다. 강제는 안 될 말이며, 자신은 사샤의 학교생활에 그 어떤 영향도 끼치고 싶지 않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벤트 일정에 맞추어 이곳으로 굳이 찾아온 카렐이 원하던 그림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은 게오르크는 낮게 한숨을 쉬며 제 상관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비난했다.
“조금 교활한 방법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선택은 사샤가 하는 거야,”
카렐은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대답했다.
“앞으로 항상 이런 식으로 훼방 놓으실 건가요?”
“그럴 리가.”
카렐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사샤의 반듯한 등을 바라보면서 팔짱을 꼈다. 뒤가 막혀 있어 사람이 많이 오가지 않는 복도 끄트머리에 서 있는 카렐과 게오르크는 해가 들지 않는 실내 그림자에 가려져 인파 속에서는 잘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 이벤트 장소는…… 지나치게 북적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턱을 매만졌다. 쓸데없는 노출은 피하게 하겠다는 의지였지만, 반대로 게오르크는 그가 스스로의 결정에 회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말을 고르며 턱을 매만지는 습관이 거기에 확신을 얹어 주었다.
또다시 ‘그렇군요’ 하고 응답한 게오르크는 고민하던 것을 입에 올렸다. 자신은 카렐 클레멘츠를 믿고 있으나, 최근의 카렐은 자기 스스로도 제 행동의 인과를 확실히 알지 못한다는 듯이 충동적으로 굴 때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행동하실 분이 아니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곳이 북적여서 그렇다는 변명은…… 발레 공연 시에 3,000명까지 수용하는 극장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걸요. 학교를 졸업하고 발레단의 일원이 되면 언제나 대중에게 노출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아이입니다. 물론 발레 팬과 일반 대중의 간극도 있기는 합니다만…… 저는 이런 방식은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
“선택은 사샤 세드린이 하는 거지만, 그 길을 한 가지로 좁히고 있으시잖습니까.”
게오르크의 지적에 카렐은 짧은 한숨을 쉬며 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그게 나의 유일한 모순이지.”
모순?
게오르크가 되물어보려고 할 때 이쪽으로 다가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제레미와 이야기를 끝낸 사샤가 한층 밝은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 * *
“저는 몰랐어요. 다른 애들도 가끔씩 가족 행사로 조퇴를 하거나 학교를 쉰대요. 그저 놀기 위해서요. 교칙에 있는 거랬는데, 저는 몰랐어요. 진짜 죽을 만큼 아플 때만 쉴 수 있는 줄 알았어요! 레베카도 그렇게 빠진 적이 있대요.”
그렇게 종알거리며 게오르크를 바쁘게 따라오는 사샤는 무척 들떠 있었다. 학교로 누군가 찾아와 준 적도 없었고, 그런 자신을 빼내어 갑자기 뉴욕 구경을 시켜 주던 이도 없었기 때문에 이 모든 과정이 사샤에게는 꿈 같고 소풍 같기만 했다.
사샤는 하얗고 깨끗한 얼음 위에 가득 올라간 굴과 생선, 새우 등의 해산물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카렐이 먹고 싶은 것을 직접 골라 보라고 해도 경험이 없는 사샤는 쉽게 말을 내뱉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카렐이 골라 주어야 했다. 한 종류를 한두 개씩 담는 것이 아니라 열두 개씩 통 크게 포장하는 카렐을, 사샤는 존경스러운 눈초리로 올려다보았다.
게다가 게오르크가 사샤에게 여러 종류의 클램 차우더 중 먹고 싶은 것 하나를 직접 고르라고 했는데, 사샤는 끝까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세 가지 중에 고를 수가 없어요’라고 자신 없이 중얼거리는 사샤에게 게오르크는 결국 세 종류의 클램 차우더를 모두 다 안겨 주었다.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들고 싶다고 말하는 사샤의 양손에는 금세 묵직한 종이봉투가 들렸다.
그곳을 나와서도 사샤는 몇 걸음 걷지 못하고 작은 소품 가게에 금세 정신이 팔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카렐은 잠시 사샤의 눈이 닿았을 뿐인 귀여운 삽화가 그려진 달력을 선물해 주었고, 입구 가까이의 옷 가게에서 회색 스냅백과 하얀 운동화도 사 주었다.
사샤는 자기에게 이미 선물 받은 신발이 많다면서 조심스럽게 사양했으나 카렐이 사 주는 것은 전부 가지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새 신발을 얌전히 받아 들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태그를 제거하고 새 신발로 갈아 신고 나오는 사샤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두 든든한 어른을 따라 첼시 마켓의 외부로 나오자마자 오후의 햇살이 비추었다. 사샤는 잠시 눈을 깜빡이면서 카렐의 등을 바라보았다.
“라테 한 잔 마시러 갈래요?”
카렐이 뒤를 휙 돌아보더니 그렇게 물었다. 사샤는 왠지 목이 메어 ‘네’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라테 한 잔은 사샤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가끔 자신이 러시아의 시골 동네를 떠나 뉴욕에 있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사샤는 고소한 우유가 들어간 라테를 사 마시곤 했다. 그런 사샤의 습관을 카렐이 알 리는 없었지만, 가장 행복할 때 그가 권해 주는 라테 한 잔이 눈물겹게 좋았다.
“저기, 그런데 제가 사 드리고 싶어요.”
사샤의 진심 어린 말에 카렐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웃음을 힘겹게 참는 얼굴이었지만 사샤는 개의치 않고 카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카드로 결제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알겠어요. 기분 한번 내보세요.”
사샤는 카렐과 게오르크를 등 뒤에 두고 세 명분의 주문을 한 뒤 카렐이 준 검정색 카드로 결제했다. 손에 들린 것이 워낙 많아 그걸 내려두고 가방에서 카드를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린 데다가, 한 번에 세 명분의 주문을 해야 해서 말이 조금 꼬였지만 친절한 바리스타는 인내심 있게 사샤의 주문을 받았다. 사샤는 아마도 자기 등 뒤에 덩치 큰 어른들이 버티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세 사람은 해 질 녘에 호텔로 도착했다.
카렐이 먼저 내려 로비를 통해 호텔 안으로 들어갔고, 게오르크와 사샤는 지하 주차장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레스토랑의 룸에서 다시 만난 세 사람은 사 온 음식들을 세팅하고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카렐은 셀러에 있던 와인을 직원에게 한 병 가지고 오게 해 게오르크와 함께 나누어 마셨는데, 사샤에게는 단 한 모금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
그 점만 빼면 완벽한 저녁 식사였다.
짧은 소풍과 선물들, 그리고 하루의 마무리를 함께하는 ‘댜댜’들과의 저녁 식사. 정말이지 뉴욕에 온 이래 가장 완벽한 하루라고 할 수 있었다.
“카렐? 저 오늘 정말 행복했어요.”
“…….”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할 만큼이요…….”
게오르크는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돌아갔고, 사샤와 카렐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샤의 머릿속에서는 오늘 하기로 되어 있던 세 차례의 이벤트 공연 중에서 두 차례를 날려 버렸다는 사실은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다.
카렐은 충만한 애정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샤의 정수리를 말없이 꾹 누르듯 쓰다듬어 주었다.
라 발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