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사랑하는 후원자님 (7/30)

  4. 사랑하는 후원자님

“생일 당일에 함께 식사라도 할까요.”

4월에 접어들고, 사샤의 생일을 일주일 정도 앞두었을 때였다. 카렐이 건넨 뜻밖의 제안에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 식사요……?”

제 생일을 누군가와 함께 기념한 지가 오래되었던 사샤는 떠듬거리며 그렇게 물었다.

“네.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면 내 차례는 조금 미뤄도 됩니다.”

“아니에요! 약속 없어요.”

황급히 부정하면서 사샤는 감격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일전에 카렐을 따라 고급 레스토랑에 갔을 때 제 옷차림이 조금 부끄러웠던 것을 떠올렸다.

“네, 물론이죠. 좋아요. 카렐? 저 그런데 저는 멋진 슈트가 없어요. 카렐하고 레스토랑에 가려면 멋진 옷차림을 해야 하는데…….”

그 말에 카렐은 너그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받고 싶은 게 아주 많네요. 좋아요. 한 벌 맞춥시다.”

“와…….”

사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러나 함께 쇼핑을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다르게 카렐은 사샤에게 슈트를 맞출 만한 돈을 쥐여 주고는 대신 그의 다른 비서인 우즈를 붙여 주었다.

“출장이 있어요. 게오르크도 나와 함께 떠납니다. 돈은 충분히 줄 테니 아끼지 말고 원하는 걸 골라요.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다면 우즈가 도와줄 겁니다.”

검고 찰랑이는 머리를 가진 우즈가 오랜만이라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생일 전날까지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카렐은 퍽 미안한 눈초리로 그렇게 말했다. 사샤 역시 그를 보내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그 미안한 눈빛을 보니 트집 잡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그냥 성숙하게 이해해 주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를 배웅하고 난 사샤는 얼마간 혼자 지낼 호텔방이 괜스레 더 넓어 보인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카렐이 떠난 것은 하필 토요일 오전으로, 마침 주말의 시작이라 이제부터는 사샤도 마땅한 할 일이 없었다.

사샤는 침대에 털썩 누워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봄이 되어 연두색 새순이 돋아나는 다채로운 수종이 센트럴 파크를 채색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바뀌는 계절에 특별한 선호는 없었지만 봄이 오면 연두색으로 물드는 풍경과, 체온을 올리기 쉬워 웜업이 짧아지는 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자면…… 생일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사실 생일에는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해 본 적 없었지만 카렐이 챙겨 주니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어졌다. 사샤는 누군가 좋아하는 계절을 물어보면 이제부터 ‘봄’이라고 대답하자고 마음먹었다.

서재 쪽에서 우즈가 자신의 업무용 노트북을 설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타인이 내는 작은 소리에 안정감을 느끼며 잠시 침대 위를 뒹굴거리던 사샤는 카렐이 주고 간 흰 봉투에 손을 뻗었다.

봉투가 매우 얇아서 안에 든 게 없을 줄 알았는데 빳빳한 새 지폐가 제법 여러 장 들어 있었다.

‘10불짜리인가?’

그리고 사샤는 생소한 감촉의 지폐를 꺼내 앞뒤로 관찰했다. 지폐에는 100불이라고 쓰여 있었으며 총 50장이었다.

‘100불 곱하기 50개…… 그럼 0이 하나 더 붙고…….’

생전 처음 만져 보는 엄청난 금액에 두뇌회전이 느려졌다. 사샤는 한참 후에야 제 손 안에 든 금액을 제대로 추산해 낼 수 있었다.

‘5,000불?’

* * *

카렐이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사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우즈와 함께 카렐이 주로 이용하는 테일러 숍에 가서 맞춤 슈트를 하나 제작한 것이었다.

“몸이 날씬하고 예쁘니 마음껏 드러내요. 허리를 조이고 바지통도 너무 넓지 않게 만들지요.”

테일러의 말에 사샤는 자기 의견을 보탰다.

“저…… 베스트도 만들고 싶은데요.”

“스리피스 슈트! 어린데 고전미를 추구하는 걸 보니 감각이 있군요. 알겠습니다.”

사샤는 카렐이 항상 챙겨 입는 슈트 안의 베스트를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예약금으로 1,000불을 치르고, 나머지는 슈트가 완성되는 날 드리기로 했다.

이후 사샤는 레빈과 율리안, 우즈, 옥사나에게 차례대로 생일 축하를 받았다. 레빈은 히비스커스 향이 나는 향초를, 율리안은 200불짜리 한정 나이키 운동화를 선물로 주었다. 두 사람의 선물이 모두 사샤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우즈는 출장을 떠난 게오르크와 함께 준비했다며 사샤가 태어나서 받아 본 것 중에 제일 큰 꽃다발과 머리맡에 켜 놓는 용도의 아름다운 램프를 주었고, 옥사나는 학교 근처 카페에서 여러 겹의 반죽으로 만든 크레이프 케이크를 사다 주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야. 맛있게 먹어. 조금 빨리 알려줬으면 더 좋은 선물 생각해 보는 건데…… 별거 아니라 미안.’

선물을 받아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사샤는 도리어 깜짝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옥사나가 제일 좋아한다는 크레이프 케이크는 정말 맛있었다.

그날 밤, 사샤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의 통화라 사샤는 어머니가 생일 축하를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했다.

―별일 없지? 아픈 데는 없고? 엄마는 허리가 너무 아프구나. 요즘엔 자꾸 왼쪽 가슴이 쿡쿡 쑤시네.

그러나 통화 내용은 생일이 아닌 여타의 평범한 날 나누었던 통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사샤는 왠지 시무룩해져서 대꾸했다.

“그럼 얼른 병원에 가요.”

―병원에 가면 항상 돈이 드는 일이 생겨서 골치가 아파. 모르고 살면 그만인데 의사들은 꼭 칼로 째고 상처를 쑤셔야 만족한다니까.

그리고 통화의 마지막까지 어머니는 사샤의 생일을 떠올리지 못한 것 같았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바깥일’과 ‘집안일’ 때문에 무척 바빠서 하루에도 기억하고 챙길 것이 수십 가지는 더 되었으니까.

때문에 이제 곧 생일이라고, 스스로 알려 드릴까 고민하던 사샤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언제나 그랬듯이 통화의 끝마무리에선 엄마와 언성을 높이며 싸워 버리고 말았다.

울적한 기분으로 전화를 끊은 사샤는 생각에 빠졌다.

‘엄마는 고집쟁이야. 병원 진료를 한 번 정도는 받으러 갈 수도 있잖아. 내가 준 돈은 다 어디에 쓰는 거야.’

물론 자신이 드리는 돈은 너무 적어 보잘것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세의 반도 충당하지 못하는 돈. 사샤는 그동안 학교에서 지원받는 물품 구입비 400불을 반으로 쪼개 어머니에게 보냈고, 나머지 반으로는 식비를 충당해 왔다. 그러나 카렐에게 생활비 카드를 받은 뒤로는 돈 쓸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는 학교로부터 지원받는 돈은 모두 어머니에게 송금하고 있었다.

그때 사샤의 시선이 문득 봉투 안의 지폐에 가닿았다. 5,000불에서 1,000불을 예약금으로 뺀 4,000불의 현금. 카렐은 저걸로 슈트를 맞추고 나머지로는 친구들과 파티를 하며 맛있는 것을 사먹으라고 했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단히 돈이 많이 드는 파티는 필요 없을 것 같았고 슈트는 조금만 더 저렴하게 맞추면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2,000불 정도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사샤는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다 필요한 일에 돈을 쓰는 일이니, 카렐은 이해를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 * *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요.”

사샤는 카렐과 함께 살게 되면서 온갖 신기한 경험을 많이 해 보았다. 그러나 사샤의 생일을 위해 카렐이 통째로 빌린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지금까지 사샤가 드나든 곳들과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졌다. 거의 3층 높이로 뚫린 천장부터 바닥까지 촘촘하게 반짝이는 유리 샹들리에가 길게 내려와 빛을 뿌렸고, 탁 트인 창에는 물결무늬 같기도 하고 거대한 구름 같기도 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오늘 호텔방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카렐과 단둘이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접에 사샤는 고맙기도 하고 좋기도 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동시에 옷을 잘 챙겨 입고 와서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이나 점퍼 따위를 입고 왔다면 큰 실례를 끼쳤을 것이다.

카렐이 사샤의 날씬한 몸에 잘 맞는 슈트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좋은 옷이 가져다주는 장점이 있죠.”

사샤는 그의 눈치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맞춤 슈트가 완성되기 전에 베스트 제작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었다. 테일러 숍 측에서는 조금 난감해하면서도 알겠다면서 그만큼의 가격을 빼 주었고.

덕분에 사샤는 3,000불 안에서 저만의 맞춤 슈트를 맞출 수 있었고, 어머니에게 남은 2,000불을 송금할 수 있었다. 게다가 카렐이 ‘좋은 옷’이라고 칭찬도 해 주었다.

모든 게 잘 마무리된 것이다. 사샤는 철석같이 그렇게 믿었다.

카렐이 이미 그 돈의 운용을 다 파악한 줄은 모르고.

“작년 파티에서는 맞지 않는 옷을 입었었죠?”

“네…….”

그가 첫 만남 때 제 행색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사샤의 몸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누가 입던 걸 싸게 산 거예요. 학교에서 파티가 있으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해서…… 고향에서 챙겨 왔어요. 별로 좋은 옷이 아닌 건 알고 있었어요.”

사샤가 조금 주눅이 들어 말했다.

“이제 어디든 남부럽지 않게 다닐 수 있겠군요.”

“다 카렐의 덕이에요.”

사샤가 걱정한 것과 달리 카렐은 사샤의 궁색함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관대한 미소를 띠고 사샤를 바라보던 카렐이 서버를 불렀다. 그러자 저 멀리서 사샤만 한 크기의 생일 케이크가 왜건을 타고 들들 흔들리며 들어왔다.

“와아…….”

벌떡 일어난 사샤는 손까지 떨면서 케이크 주변을 몇 바퀴 돌았다.

“사진 찍어도 돼요?”

“그럼요.”

사샤는 케이크가 잘 담기도록 정면에서 한 컷, 아주 가까이서 또 한 컷, 흰색으로 만들어진 17층짜리 케이크-그건 사샤의 나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의 꼭대기에서 애티튜드 포즈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작은 인형도 한 컷 찍었다.

“카렐? 이게 혹시 저인가요?”

“먹을 수도 있어요.”

그러더니 카렐이 대담하게 손을 뻗어 인형을 떼어내고는 보란 듯이 사샤의 머리 부분을 살짝 핥았다. 심지어 모가지를 그대로 깨물어 먹으려고 했다! 그전까지는 카렐이 고가의 케이크를 아무렇지 않게 망치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부자는 다르다’고만 생각하던 사샤가 헛숨을 삼키고는 그의 손에서 저로 추정되는 설탕 인형을 얼른 빼앗아 왔다.

“제, 제가 먹을 거예요. 제 케이크니까요.”

“그러도록 하세요.”

“음, 냉동실에 넣으면 안 썩겠죠?”

그다음에는 접시마다 한 점씩 아주 작고 다채로운 색깔의 작은 음식들이 날라져 왔다. 사샤는 나름 장인의 예술품인 그것들을 보고는 형편없이 작다며 전부 한입에 먹어치워 버렸다. 그리고 이 집은 배불리 밥을 주지 않는 걸 보니 30그릇 정도는 준비했나 보다고 떠들었다.

음식 양을 못 미더워하던 사샤가 그 작은 배가 잔뜩 불러서 숨도 겨우 쉬게 될 때쯤, 카렐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내밀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이제 열일곱 살이군요.”

“와아…….”

카렐이 준 상자는 은은한 진주빛으로 빛났고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열어 봐요.’ 카렐의 나지막한 채근에 사샤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맑은 액체가 찰랑이는 예쁜 유리병이었다.

“향수입니다. 조향사를 불러 새로 주문했어요.”

“…….”

“세상에 단 하나뿐인 향이에요. 제법 의미 있는 선물이죠?”

“카렐…….”

목 졸린 듯한 소리를 낸 사샤는 저도 모르게 스르르 일어났다. 의자가 드륵 밀리는 소리가 났고 무릎 위에서 냅킨이 툭 떨어졌다. 멍하니 일어난 사샤는 카렐이 앉아 있는 곁에 가서 그의 목에 가만히 매달렸다.

“감사해요.”

사샤는 목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실은…… 그 뺨에다가 제 뺨을 비비고 싶었다. 더 애정 어린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쥬를 하며 살짝, 아주 살짝 입술을 스쳐 보고 싶었다. 그러면 어떤 느낌이 들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사샤는 애써 충동을 꾹 눌러 참았다.

“아주 감동 받았나 보군요.”

카렐은 피식 웃으면서 제 목을 단단히 끌어안으며 파고든 사샤의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무척 관대하게도, 사샤가 조금 더 그 여운에 젖어 있도록 놔두는 배려를 베풀어 주었다.

아주 행복한 저녁식사였지만 호텔에 들어갈 때는 따로였다. 카렐은 요즘 아주 번거로운 일이 생겼다며 귀갓길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내려 주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요.”

“카렐은요?”

“나는 15분 정도 이 주변을 돌다가 들어갈 거예요.”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곳 길목에서 내린 사샤는 빙 돌아서 호텔로 돌아갔다. 과연, 카렐이 귀띔한 곳에는 까맣고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 호텔로 오는 것을 보고 시선을 주었다가, 저들이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는 고개를 돌렸다.

* * *

다음 날 사샤가 눈을 떴을 때 카렐은 없었다. 언제나처럼 카렐이 저를 깨워 주기를 기다리며 이불에서 꿈지럭거리던 사샤의 정수리로 날아온 것은 게오르크의 목소리였다.

“일어난 거 알고 있어요. 얼른 가서 세수하세요.”

사샤는 이불에 몸을 묻은 채로 멈칫 굳었다. 아까부터 거실을 돌아다니는 기척이 카렐인 줄 알고 언제 저에게 와서 깨워 줄까 기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게 다 게오르크였다니…….

카렐과 말하는 내용은 같을지라도 사람이 바뀌니 지나치게 다른 느낌으로 들려왔다. 사샤는 말없이 스르륵 일어나 이불을 내팽개치고 욕실로 갔다.

사샤는 부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양치는 아침을 먹고 나서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젖은 앞머리가 약간 가닥진 채로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사샤는 아침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게오르크를 발견했다.

“카렐은 어디 갔어요?”

의자를 끌어 와서 앉자 게오르크가 작은 볼에 시리얼을 담아 주었다.

“본가에 갔습니다.”

“본가? 진짜 집이요?”

“네.”

“본가는 어디 있어요?”

“여쭤 보고, 알려줘도 된다고 말씀하시면 그때 말해 주지요.”

“…….”

사샤의 말문을 막아 버린 게오르크는 마치 와인을 디캔딩하듯 시리얼 위로 우아하게 우유를 조르륵 따랐다. 무거운 밀크저그를 허공에서 높이 들었는데도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카렐만큼은 아니더라도 게오르크 역시 완력이 상당한 듯했다. 우유를 술처럼 따르는 건 아마도 과시가 아닌 몸에 밴 습관이겠지만, 한순간 사샤의 눈에는 그게 아주 멋져 보였다.

“게오르크는 군인 출신이라고 했죠?”

“네.”

“그럼 사람도 죽여 본 적 있어요? 총을 쏘나요? 아니면 전투기 조종…….”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요?”

게오르크는 사샤의 말을 끊어내면서 그렇게 대답했다. 저를 보며 눈썹을 치켜세우는 게오르크가 조금 얄미워져서, 사샤는 군인 출신이 카렐의 비서가 되어 저에게 우유나 따라 주고 있는 것을 속으로만 흉보았다.

“얼른 먹어요. 가방은 어디 있습니까?”

“가방은 왜요?”

“챙겨야 할 것들을 메모해 주셨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게오르크는 패드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사샤가 등교용 스포츠백이 놓여 있는 자리를 가리키자 게오르크는 중얼거리며 발레 슈즈, 타이즈 안에서 쉽게 건조해지는 다리에 바르는 보디로션, 슈즈 밑창을 긁어내는 브러시, 테이핑 밴드 따위를 꼼꼼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대충 해도 돼요. 없으면 학교에서 빌려 줘요.”

“그렇군요.”

적당히 대답하면서도 게오르크는 사샤의 충실한 조언을 무시한 채로 가방 챙기기에 여념 없었다. 사샤는 다시 등을 돌려 식사에 열중했다. 너른 식탁 맞은편에 카렐이 없다는 게 기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작은 양파나 감자, 치즈 따위가 꽉 찬 촉촉한 오믈렛을 스푼으로 긁어먹던 사샤는 문득 생각난 것을 게오르크에게 물었다.

“게오르크. 일상이 번거롭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아……. 그건 바로 저를 말하는 거죠. 아무리 비서 일의 전문성이라는 걸 증명하기 어렵다지만, 갈수록 잡무가 늘어 번거롭습니다.”

가방 챙기던 것을 툭 내던지고 푸념하는 말에 사샤는 스푼을 앞니로 다각다각 씹으며 부정했다.

“뭐라고요……? 아닌데요. 게오르크는 살 만해 보여요. 그런 거 말고, 제 말은…….”

삐딱하게 저를 들여다보는 게오르크에게 굴하지 않고 사샤가 중얼거렸다.

“카렐이 그랬어요. 자기는 일상이 번거로운 사람이라고요.”

“흠…….”

“사생활이 노출되어서 예민하대요.”

“그러실 만도 하죠.”

사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게오르크는 거실의 낮은 유리탁자에 부채 모양으로 예쁘게 펼쳐져 있는 여러 종류의 신문들을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영자신문뿐만 아니라 불어나 독어로 된 것도 있었으나 사샤가 자신 있게 읽을 수 있는 러시아어 신문은 없었다.

“요즘 세상에 종이신문만 보는 사람은 없지만, 꼭 봐야 하는 사람들도 있죠. 제 상사도 그렇고요. 당신은 이게 그냥 테이블 위를 꾸미는 인테리어인 줄 알았겠지만…….”

그 말에 사샤는 뜨끔했다.

“보세요. 오늘자 신문입니다.”

게오르크가 펼친 곳에는 익숙한 남자의 사진이 있었다. 카렐이었다.

그 외에도 사샤는 세 개의 신문에서 카렐의 모습을 더 찾을 수 있었다. 신기하고 놀라운 기분에 사진 속 카렐의 모습을 들여다보던 사샤의 머리 위로 게오르크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공식적인 장소에서 찍힌 게 아닙니다.”

“여기 호텔 앞이네요?”

“그래요. 그 정도는 알아보는군요?”

“카렐은 유명해요?”

“유명……하다고 해야 하나. 거주지를 바꾼 것만으로도 기사거리가 되는 인물은 맞죠.”

그렇게 말하고 게오르크는 신문을 접어 가져가려 했다. 사샤는 그의 팔목을 붙들면서 조금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다.

신문기사 속 사진은 과연 게오르크의 말대로 화질은 좀 떨어졌지만, 그래도 분명히 카렐인 것을 알아볼 수는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눈에 띄는 금발과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단단한 체구.

“인터넷에는 이보다 더 많습니다. 클레멘츠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다면 신문기사를 찾아보는 게 빠를걸요.”

“네?”

“항상 파파라치가 따라다니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게오르크는 시간이 지체되었다며 사샤를 일으켰다.

신문에 정신이 팔려 아침은 반도 먹지 못했지만, 사샤는 그에게 이끌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치를 마친 후 타이즈를 주섬주섬 입고 레오타드까지 걸친 사샤는 그 위로 다시 트레이닝 바지와 티셔츠를 걸쳤다. 완연한 봄이 다가오며 갈수록 옷의 두께가 얇아지고 있었다.

게오르크는 마지막으로 카렐이 항상 하던 것처럼 사샤의 가방을 검사한 후 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럼 카렐은 언제 돌아와요?”

사샤의 물음에 게오르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불분명한 대답을 했다.

“아마도 오늘 안에?”

“오늘 몇 시요?”

“그건 모르겠군요. 아, 자기 전에는 꼭 돌아올 테니 기다려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닫히는 엘리베이터의 문 사이로 게오르크가 손을 흔들었다.

‘기다려도 상관없다.’

예전에는 반대로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했다. 사실은 후자가 배려의 말이었지만 사샤는 그 앞의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조용한 엘리베이터 칸 안에서 혼자 실려 내려가면서 사샤는 생각에 빠졌다.

카렐은 무척 바쁜 사람이다. 아직 어른의 세계를 상상하지 못하는 사샤는 그의 일과, 피로도와, 그를 성가시게 만드는 주변의 많은 이들을 생각해 봤다. 자신은 경찰차에 실리는 소란을 일으켜도 레빈 말고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는데, 이사를 한 것만으로 신문에까지 난다니. 카렐이 경험하는 세계의 복잡성은 아마도 사샤가 상상하는 그 이상일 것이다.

그런 그는 비록 항상 제 곁에 있어 주지는 못할지라도 출장이나 개인적인 스케줄이 있을 때는 우즈나 게오르크를 붙여 주었고, 혹 늦게 되면 이렇게 미리 언질을 해 주었다. 오늘 역시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 순간에는 아무도 없는 빈집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래도 예전처럼 울적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그가 분명히 와 줄 테니까.

* * *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사샤는 게오르크에게 크게 속은 것을 깨달았다. 오전 클래스가 시작되는 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르게 도착한 것이다.

게오르크는 그 정도의 여유는 두고 등교해야 준비를 마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자신은 로커룸에도 들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10분 정도만 일찍 가면 된다. 괜히 서둘렀다고 생각해서 기분이 나빠진 사샤는 속으로 게오르크를 흉보면서 스튜디오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아무도 없을 텐데…….

“아.”

그러나 연습실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사샤는 그 안에 있던 낯선 이들과 대번에 눈이 마주쳤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중 한 명은 몇 년 전 은퇴한 수석 무용수 출신 로마시나였고, 그 외에도 현역 무용수들이 몇 보였다. 그들을 흘끔대면서 사샤가 창가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자 누군가가 말을 붙였다.

“너 그 애구나. 항상 멧 오페라 백스테이지에서 연습하던…….”

“아. 그 꼬마 유령이 얘였어?”

“꼬마 유령?”

“백스테이지를 떠도는 흰 레오타드를 입은 어린애가 있다고 그랬잖아. 그런데 말을 걸면 도망간다고.”

“나도 기억난다. 선물로 들어온 디저트를 나눠 주려고 했는데, 다시 가 보니까 없었어.”

사샤는 수줍어져서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작년부터 꾸준히 극장의 백스테이지를 들락거리곤 했는데, 그 덕에 현역 무용수들에게도 눈도장이 찍힌 모양이다.

사실 사샤가 극장을 찾는 때는, 본인조차 의식하지 못했지만 아주 외롭고 마음이 힘들 때로 정해져 있었다. 주눅 들거나 우울하거나 뉴욕에 있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에 사샤는 본능적으로 무대 뒤편의 활기를 찾아왔던 것이다. 백스테이지에는 무용수는 물론이고 오케스트라 단원부터 조명, 음악, 무대 크루, 의상, 가발, 메이크업 스태프까지 자그마치 400명이 넘는 인원이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 북적이는 틈 안에서 사샤는 스트레칭을 하거나 그날 배운 센터 앙쉔느망(enchaînement) 동작들을 따라 하곤 했다.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샹들리에가 올라가고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음악이 백스테이지의 모니터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순간에는 마치 자신이 무대에 선 것 같은 착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공연을 위한 인원이 빠져나간 조용한 복도에서 모니터 화면을 보고 동작을 따라 하다 보면 어느새 우울한 기분은 씻겨 나갔다.

“너 그새 키가 조금 컸구나.”

“조금밖에 안 컸어요…….”

중얼거리는 사샤에게 확연히 눈에 띄는 사람 한 명이 다가왔다. 로마시나였다.

“파티에서 한 번 본 친구 같아. 그땐 정말 애기였는데. 아주 약간 골격이 생겨서 조금 훤칠해졌네. 애들은 정말 빨리 커.”

사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선망하는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로마시나는 사샤와 같은 러시아 출신으로, 엄청나게 성공한 세계적인 발레 스타였다. 은퇴한 이후에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갈라 공연에 참여하고 있었고, 현재는 사샤가 장학금을 받고 있는 장학 재단의 운영을 도맡고 있기도 했다.

처음 카렐을 발견한 것도 그가 로마시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초에 뉴욕에 왔을 때 열렸던 파티. 그곳에서 사샤는 지금처럼 로마시나를 선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아이들이 로마시나와 셀피를 찍을 때 자신도 한 장 찍고 싶었으나 도무지 끼어들기가 어려웠고, 그렇게 서성이던 도중 사샤가 말을 걸었던 것이 카렐이었다.

‘저도 사진, 찍어 주세요…….’

주저하며 소극적으로 부탁했던 사샤에게 카렐은 흔쾌히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저에게도 로마시나와 함께 찍은 사진이 생겼다는 마음에 들뜬 사샤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내게 말을 걸었죠?’

‘친절해 보이셔서요…….’

1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는 로마시나에게 말을 걸고 싶어 어쩔 줄 몰랐는데, 지금은 카렐과 이렇게 가까워지다니.

게다가 카렐은 자신을 1년간 꾸준히 지켜봐 주었다고 했다. 심지어 지금은 그와 함께 살고 있기까지 했다. 1년 사이 정말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아 사샤는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그때 말했던 것 같은데.”

로마시나가 가볍게 미간을 찡그려 사샤는 얼른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저는 사샤예요.”

“아! 사샤 세드린. 이름이 멋져요.”

윙크하는 로마시나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알아챈 사샤는 그냥 웃었다.

“너 발레 잘하니?”

아까 사샤를 꼬마 유령이라고 칭했던 현역 무용수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피부색이 짙고 눈이 부리부리한 걸로 보아 조제처럼 남유럽 출신, 아니면 남미 출신일 수도 있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잘해요…….”

사샤가 한마디 했을 뿐인데 모여든 무용수들은 지나치게 과한 리액션을 보였다.

“와! 자기 입으로 잘한대. 자신감 넘치는데.”

“기대되네.”

“오늘 우리가 직접 뽑을 거야.”

모여든 무용수들의 말에 사샤는 ‘뭐를요?’ 하고 되물었다.

“시즌 프로모션. 발레 스쿨 학생들 중에 서른 명을 뽑아서 같이 춤을 추려고.”

사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번에 바딤이 조를 짜서 안무를 연습시킨 것의 결과가 오늘 나오는 모양이었다. 진짜 현역 무용수들이 심사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리고 마침 연습실 문으로 바딤이 들어오고 있었다. 바딤은 오늘의 일정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레 다가와 무용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로마시나와도 포옹했다. 일부는 바딤에게 가르침을 받은 듯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마스터. 이 꼬맹이가 자기가 발레를 아주 잘한다네요.”

“흥, 뚫린 입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구나.”

바딤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흘겼지만 사샤의 앞으로 직접 바를 옮겨 주었다. 바를 잡고 선 사샤가 다리를 바 위에 올려놓고 스트레칭을 시작하자 무용수들은 다시 벽면에 가 붙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며 소년의 타고난 체형을 꼼꼼히 따져 보는 것 같았다.

바로 섰을 때의 몸의 균형과 무게 중심, 최대한 배를 조여 날씬하게 만든 작은 흉통, 뒤로 완전히 뻗은 무릎과 아름답게 솟은 발등고까지.

발레를 하기에 거의 완벽한 체형을 타고난 사샤였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항상 지적받는 엉덩이 아래쪽과 햄스트링 근육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샤는 턴 아웃한 다리를 의식하며 엉덩이에 힘을 주었다. 힘을 꽉 주고 최대한 엉덩이 모양을 작게 만들어야 그나마 단점이 보완될 것이었다.

한계까지 긴 목을 빼고 팔을 뻗으며 스트레칭을 하는 사샤의 몸은 명화 속 한 장면과 다름없었다. 제대로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 사샤의 목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그리고 사샤의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바로 이 시간, 바딤은 드물게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뒤이어 오전 클래스를 위해 레오타드를 입은 학생들이 연습실로 조르륵 들어왔다. 개중 일부는 현역 무용수를 알아보고 뺨을 감싸거나 작게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사샤의 바로 곁으로 다가와 바를 잡은 옥사나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저 사람들 누구야?」

옥사나의 물음에 사샤는 그녀 쪽으로 몸을 돌리며 바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오른쪽 다리를 허공으로 쭉 뻗어 데리에르 자세로 높이 스트레칭 했다. 덩달아 절로 앞으로 기울어진 상체를 숙이면서 옥사나에게 소곤거렸다.

「오늘 심사한대. 시즌 프로모션.」

「뭐? 하필 오늘이야. 나 생리하는데.」

「아…….」

「이거 봐. 가슴도 커졌어.」

「어…….」

사샤는 옥사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시선을 돌렸다. 몸을 이용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사샤뿐 아니라 무용수들 대부분은 자기 몸을 육체가 아닌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딤은 물론이고 발레 마스터들은 발레 무용수의 몸은 성적인 함의를 완전히 거세한 도구적 몸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고는 했다.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듣는 건 조금 부끄러웠다. 사샤는 주변을 둘러보고 조제가 멀리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러시아어로 중얼거렸다.

「조제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마.」

「아, 그 쪼끄만 변태한테는 이런 말 안 하지.」

옥사나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씩 웃었다.

그러면 나는 괜찮다는 말인가? 사샤는 옥사나가 자기를 게이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이걸 신뢰 표시로 여기고 기뻐해야 할지, 반대로 여전히 오해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답답해야 할지 사샤는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

동시에 사샤는 욱신거리는 등을 느끼며 한 번 더 고집스럽게 다리를 뻗고 다시 왼쪽 무릎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무릎을 등 뒤로 보내 쭉 펼쳤다.

「난 떨어질 거야.」

옥사나는 분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스트레칭한 데리에르 높이가 엄청났다. 사샤는 남을 위로하는 법은 잘 몰랐지만, 그래도 옥사나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싶었다.

「왜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

사샤의 질문에 옥사나는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니까’ 하고 답했다. 그 말이 왠지 진짜 프로 무용수의 말처럼 들려서 사샤는 이것도 기억해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근 사샤는 말을 잘하는 옥사나의 인상적인 대답들을 꼭꼭 기억해 놓곤 했다. 언젠가 곤란할 때에 써 먹으려고.

예를 들면 오늘 것은 이런 식으로 활용한다. 바딤, 혹은 누군가가 춤에 대해 지적을 하면 ‘오늘은 베스트 컨디션이 아니라서 그래요’라고 말하면 딱 좋을 것이다.

사샤가 소곤거렸다.

「베스트 컨디션이 아닌데도 붙으면 엄청, 엄청난 거잖아.」

「그러니까 그건 붙었을 때 얘기잖아.」

「그래도 옥사나…… 너는 내 생각에 우리 클래스에서 춤을 두 번째로 잘 춰.」

「뭐? 두 번째라고?」

「응, 첫 번째는 바로 나인데…….」

그러니까 30명 안에는 거뜬히 들 수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옥사나는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위로해 주고 싶었던 사샤의 의도와 달리 옥사나는 또다시 사나워졌다. 사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년 최우수 학생이었던 누군가는 속 편하게 말할 수 있어서 좋겠다고 잘라 말하고는 단단히 삐져 버렸다.

그렇게 사샤가 쩔쩔매는 상태로 바 워크가 시작되었다. 한쪽 사이드를 끝내고 다른 쪽 방향을 하기 위해 수트뉘를 돌 때에 눈을 마주칠 법한데도 옥사나는 일부러 사샤를 한 번도 바라보지 않았다.

게다가 승부욕이 발동한 옥사나는 엄청났다. 바트망을 뻥뻥 차대고, 바닥을 브러싱하는 소리가 삭삭 들릴 정도로 고집스럽게 포인을 유지했다. 덕분에 사샤도 등에서 땀을 줄줄 흘려대며 목을 빼고 발끝까지 근육을 늘렸다.

바 워크가 끝난 후에는 평소처럼 바를 치우고 센터를 하는 대신 각자 숙지했던 안무를 준비했다. 벽에 기대어 바를 관람하던 무용수들의 눈빛도 흥미진진해졌다.

사샤를 비롯한 여섯 명의 조 아이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준비된 탭 슈즈를 신었다. 파 드 되를 추게 된 여자아이들은 토슈즈로 갈아 신고 토박스를 눌러대거나 드미 포인(demi point)을 거쳐 를르베를 반복하며 발을 풀었고, 간간이 제 파트너인 남자아이들의 손을 잡고 밸런스를 잡아 보기도 했다.

그런 단합을 바라보던 사샤는 옥사나를 내려다보았다. 호흡을 맞추기 전까지 옥사나가 화를 풀지 않으면 난감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슈즈를 다 신은 옥사나에게 손을 내밀어도 그녀는 흥, 코로 웃으면서 제 힘으로 일어나 버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앞의 두 조가 지나갔다. 두 명씩 세 쌍이 짝을 지어 파 드 되를 추는 팀은 한두 명 정도는 잘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춤이 아니라 ‘학생들이 애썼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다음으로 캐릭터 댄스를 추는 팀 역시 안무는 완벽하게 외웠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 연기와 마임이 부족했다. 사샤는 그 아이들의 춤을 눈에 담으면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떠올렸다.

‘턴 직전에 발끝을 뻗으면서 바닥을 더 깊이 눌러 줄 거야. 발레는 늘이는 힘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니까. 그리고 힘으로 도는 게 아니라 스포팅(spotting)으로 정확히 세 바퀴만 돌고 끈질기게 파세로 서 있어야지. 또 여자애들을 들어준다고 엉덩이를 빼고 있지는 않을 거야. 나는 여자애들이 쓰는 지지대가 아니라 댄서니까……. 뻗은 발을 완벽히 턴 아웃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야지.’

다른 사람이 춤을 추는 걸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몸을 움직이고 싶어진다. 사샤의 마음에는 어느새 긴장 대신 빨리 춤을 추고 싶다는 기분 좋은 열망이 자리 잡았다.

“다음, 탭댄스 조.”

센터로 사샤와 옥사나를 비롯한 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왔다. 모두 팔다리가 길고 가는 데다 목과 종아리가 늘씬했다. 우연인지 바딤의 안배인지는 몰라도 여섯 명의 소년 소녀들은 서로 키도 엇비슷했다.

아까 전까지 발등이 아프도록 뻗었던 다리를 플렉스(flex)로 스트레칭하면서 사샤는 슈즈를 신은 채로 가볍게 바닥을 찼다. 구두 뒤축부터 울리는 진동이 무릎과 척추, 등을 타고 올라왔다. 탭은 중력을 거스르며 정적으로 움직이는 발레와는 무게 중심이 전혀 다르고, 대신 민첩성이 필요한 춤이다. 그리고 사샤는 민첩함에는 자신이 있었다.

느린 바이올린 선율에 맞춰 팔을 뻗다가 이내 박자보다 조금 더 빠른 템포로 바닥을 찬다. 파세를 유지할 필요 없이 단단히 뻗은 다리 축을 낮은 를르베 업으로 유지한 후, 정확한 스포팅으로 정신없이 빠른 열두 바퀴의 턴. 턴을 돈 후 발효된 포도를 주워 먹고 취한 곰처럼 비틀거리지 않으려면 스포팅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사샤는 마지막 세 바퀴의 턴에서 옥사나의 몸과 머리가 함께 도는 것을 발견했다.―왜냐하면 허공에서 눈이 마주쳐 버렸다!―사샤는 재빨리 그녀에게 반 발짝 가까이 붙으며 조심스레 왼쪽 어깨를 앞으로 밀어 주었다. 덕분에 사샤의 동선이 미세하게 벗어났지만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샤의 도움으로 금세 대각선 방향을 되찾은 옥사나는 스포팅을 놓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우아하게 크루아제(croisé) 방향으로 팔과 다리를 뻗어내며 포즈했다. 같은 포즈를 취한 사샤와 옥사나의 눈이 정면의 거울을 통해 마주쳤다.

이어서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큰 발랑세, 탱고에서 따온 듯한 팔 동작. 그리고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스텝, 빠른 셰네 여덟 바퀴를 마지막으로 안무가 끝났다.

탭 특유의 뒤축을 부딪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여섯 명이 동일한 포즈로 마무리하자 갑자기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동시에 사샤는 거울 속의 동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도 음악이 끝나기 전까지는 몸을 흐트러뜨려서는 안 되기에 아이들은 마지막으로 길게 끄는 바이올린 선율이 멈출 때까지 포즈를 유지했다.

“다음!”

센터를 내어 주며 뒤로 물러난 사샤는 코를 훔치면서 벽에 서 있던 무용수들을 흘끔댔다. 분명 박수 소리가 저쪽에서 났었다. 그러나 로마시나를 비롯한 그들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자신들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소년 소녀들을 달리 칭찬해 주거나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왠지 시무룩해진 사샤는 이미 발표를 끝낸 아이들을 따라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런 사샤의 곁으로 작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스파시바.」

옥사나였다. 고맙다는 뜻의 모국어에 사샤는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돌리며 턱에 고인 땀을 훔쳤다.

* * *

[클래맨 츠 씨.

오늘 진짜 무용수들 앞에서 춤을 쳤어요.

제가 한거는 탭댄스라는 건데 아주 멋저요. 아주 어렵고 빨라요.

정신을 똑바료 차리지 못하면 바닥에 쓰러버러요. 발레보다 훨씬 엄청 아주 많이 정신업거든요.

저는 발레 댄서지만 또한 춤을 추는 사람이니가 모든 춤을 잘해야되요.

그리고 저는 탭댄스도 잘해요.

그래서 저는 계속 제가 잘한것 같았은데 그게 맞았어요.

왜냐면 그 사람들이 저를 대러갓거든요.

수업 끋나고점심머겄을 때 저를 대러가서, 친구들과 함게 내가 합격헸다고 했어요.

저는 이제 뉴욕 안에를 도라다니며 프로모션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저를 춤을 보게 대요. 아주 신나요.

그리고 거기에다 일당도 주고 품이유지돈도 줘요.

제가 클레 멘 츠씨 한태 맛잇는 새우를 사줄수도 있어요.

오늘 늦게 올까봐 메일 써젔어요.

중간에 집에 오다가 읽으면 기쁘겠조.

늦게 올수도 있지만 자기 전에는 오세요.

추신. 제가 그동안에 클레멘치씨를 자꾸 클레멘츠씨로 부른거 엄청 잘못된거 깨달았어요.

제레미라는 발레단 마켓딩 딩잠이 저를 자구

쉬드린

체드린

셰드린

이라고 부르는대요?

아주 거슬리고 귀찭습니다.

이름을 여러번 다시 알려져야 대니까요.

정말 성가신 남자에요.

죄송합니다.]

사샤는 40분 동안 걸려서 쓴 메일을 발송했다.

목욕을 마치고 카렐처럼 흰 가운을 걸친 사샤의 몸에서는 보디오일 냄새가 풍겼다. 다리에는 너무 많이 발랐는지 여전히 미끈거렸지만, 그래도 메일을 쓰는 사이 조금 건조된 듯했다.

메일에 쓴 대로, 사샤는 오늘 결국 프로모션 팀에 선정되었다. 옥사나도 함께였다. 먼저 서른 명을 뽑는다고 했던 기존 발표와 다르게 단번에 열두 명을 뽑았는데도 그 안에 들게 됐다.

심사한 현역 무용수들의 말로는 직접 학생들을 보고 나니 여러 번 심사 단계를 나눌 필요가 없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냥 보기에도 눈에 띄는 아이들이 있어 빠르게 최종 결정을 내려 버렸다고. 바딤은 바뀐 방식에 약간 불만을 표했지만 결국 받아들인 것 같았다.

‘춤이란 건 냉정해. 재능에 따라서 사람의 영혼에 숨어 있는 재능들도 있지만 춤은 그렇지 않다. 보여줘야 하는 재능이란 이렇게 단호하게 결정이 나버리는 거야. 그리고 이건 오늘의 심사위원들이 보는 눈이 높아서가 아니다. 발레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냥 보는 것만으로 누가 최고고 누가 형편없는지 금세 알아보지. 그리고 앞으로 너희는 이런 평가를 살면서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받게 될 거다.’

바딤이 드물게 위로를 해 주었는데도 몇몇 아이는 눈물을 보였다.

그리고 사샤는 조제의 반응을 신경 썼다. 조제는 최종 열두 명 안에 들지 못했다.

조제는 지난 1년 어퍼 스쿨 2학년 학생 중에서 콩쿠르에 가장 많이 나간 학생이었다. 그는 아마도 콩쿠르용으로 흔히 선정되는 작품 대부분의 의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 벌에 4,000불씩 하는 의상을 전부 준비해 줄 정도로 지원해 주는 부모 밑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는 건 무슨 기분일까?

사샤는 그런 고민을 하면서 호텔로 돌아왔다.

자신이 프로모션 팀에 들게 된 것을 카렐에게 어떤 방식으로 알려주면 좋을지, 벅찬 가슴을 안고 기쁘게 달려왔지만 도착한 호텔 룸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맞다…….”

카렐은 오늘 아주 늦게 돌아온다.

알고 있던 일이지만 기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대신 사샤는 기분 전환을 위해서 카렐이 주로 쓰는 욕실로 들어갔다.

이 드넓은 호텔 룸에는 욕조가 포함된 욕실이 두 개가 있고, 건식 화장실이 입구 쪽에 또 별도로 하나가 더 있다. 그리고 카렐은 자신이 사샤와 서로 다른 욕실을 쓰는 줄 알지만 그건 그의 오산이었다. 사샤는 확실히 카렐이 주로 쓰는 욕실만 고집하고 있었다.

사샤는 이렇게 하교 후 씻을 때마다 카렐 몰래 욕실에 들어가서 카렐이 이사를 오면서 가지고 온 샤워젤이나 샴푸, 셰이빙크림 따위를 꼼꼼히 구경하고는 했다. 그가 쓰는 것들로 몸을 씻기도 했음은 물론이다.

비누 하나로 온몸을 씻을 수 있는 사샤의 입장에서는,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의 용도를 알기 어려웠으나 이제는 점차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건 카렐의 손에서 나는 냄새, 그리고 이건 머리카락에서 나는 냄새…… 이건 목덜미에서 나는 냄새야. 그리고 이거랑 이게 섞인 것 같아.’

사샤는 각종 아름다운 유리 용기에 쓰여 있는 불어나 영어 따위를 읽으며 용도를 파악하는 대신 동물적인 감각으로 카렐의 몸 곳곳에서 나는 냄새를 맞혔다. 그리고 그의 개인용품을 야금야금 덜어내 훔쳐서 자기도 몸을 씻었다.

오늘 특히 사샤는 아직 손대 보지 못한 용기에도 손을 댔다. 느리게 출렁이는 액체를 바라보다가 거꾸로 들고 몸체를 누르니 울컥, 하고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윽.”

용기 안에는 미끌미끌한 기름 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불시에 손바닥에 주룩 흘러내린 짙은 노란색의 오일에 깜짝 놀란 사샤는 얼른 오른손에 들고 있던 병을 세면대의 제자리로 치워 버렸다.

‘이것도 카렐의 몸에서 나는 냄새인데…….’

손에 담긴 기름의 향기를 킁킁대면서 사샤는 양 조절에 실패한 보디오일을 다리에 치덕치덕 발랐다. 하지만 감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지나치게 미끄덩거렸고 자꾸 피부끼리 들러붙어서 이 위로 옷을 입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불편했다.

그래서 사샤는 카렐을 흉내 내어 옷을 입는 대신 가운을 걸쳤다.

그다음에 카렐처럼 테이블 앞에 바른 자세로 똑바로 앉아서 그에게 메일을 쓴 것이다. 오늘의 기쁜 소식을 알리기 위해.

그리고 메일을 쓰는 도중에 사샤의 마음속에서는 다시 한 번 뿌듯하고 벅찬 감정이 자라났다. 타인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 하나로 사샤의 내면은 크게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된 것 같다는 기분이 사샤를 움직이게 만들었고, 결국 사샤는 평소 하려고 마음을 먹는 데에만도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에 손을 뻗었다.

율리안이 선물한 책을 읽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처음에 사샤는 받은 직후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 존재를 잊었던 그 책이 어디 있는지 찾기 위해 조금 헤매야 했다.

한참 후 사샤는 책을 카렐의 서재 책장 가운데서 찾았다. 그건 의외로 아주 잘 보이는 곳에 꽂혀 있었다. 자신이 꽂아 놓은 기억은 없었지만 어쨌든 이것도 책이니까 맞는 자리에 들어와 있었던 셈이다.

사샤는 『키다리 아저씨』의 첫 장을 넘겼다.

알파벳이 빽빽하게 심어져 있는 지독한 글자 덩어리의 공격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소설은 간단한 편지로 시작했다. 그리고 메일을 발송하거나, 발송하지 않거나 언제나 미스터 클레멘츠에게 마음속으로 편지를 쓰고 있던 사샤는 어렵지 않게 소설에 빠져들 수 있었다.

물론 어떤 대목에서는 기계적으로 글자만 읽었고, 어떤 부분은 문법이 낯설어 애매하게만 해석할 수 있었으며, 일부는 행간을 추론하지 않은 채로 읽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사샤는 끝까지 책을 읽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소설의 스토리가 사샤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으로 흘러갔다.

[주디 양. 내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걸 정말 몰랐나요?]

정말로 몰랐던 사샤는 소설 속 주디와 함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더더욱 기가 막혔다. 사샤는 주디에게 일어난 행운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누가 설명해 줬으면 했다.

결국 뒷이야기가 궁금해진 사샤는 중간 내용을 전부 건너뛰고 뒤에서부터 읽었다.

소설은 그야말로 그린 듯한 해피엔딩이었다.

결말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흐름대로 책을 읽은 사샤는 한참 후에야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하지만 꼼꼼히 읽어 봐도 여전히 주디의 행운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사샤는 차차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무튼 이건 가짜 이야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주디의 행운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것들은 다 실제가 아니니까 가능한 것이라고. 슬프게도 사샤는 그런 논리로 책 속의 행복을 납득했다.

그리고 이런 유의 허구의 이야기를 별로 읽어 본 적 없던 사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행복한 이야기니까 분명 해피엔딩일 텐데, 사샤는 별로 행복하지가 못했다. 연유를 알 수 없이 허무하고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사샤는 영문을 모른 채로 감정의 근원을 좇았다.

문득 율리안의 말이 떠올랐다.

‘꼭 키다리 아저씨 같네.’

떠올려 보니 그가 자신에게 이 책을 사 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샤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카렐은 장님거미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는 훨씬 듬직하고 튼튼했으며 어른스러웠다. 팔다리가 길고 가느다란 장님거미와는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나 소설과 현실은 다른 점이 많았다.

그러니까 소설 속의 누군가가 행복을 찾았다고 그게 꼭 자신에게까지 적용되리라는 법은 없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

최초에 카렐이 집에 돌아왔다고 생각한 사샤는 자리에서 얼른 일어났다. 다리에 묻은 오일 덕분인지 가죽 의자에서 일어날 때 허벅지가 부드럽게 미끄러지던 감촉이 기묘했다.

그렇게 문과 턱이 없는 작은 서재―정확히는 가벽을 세워 공간을 나눈 곳―을 나선 사샤는 거실을 내달렸다.

그러나 거실을 나서 현관에 다다랐을 때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렸고, 사샤는 그 자리에서 발을 멈추었다. 카렐은 벨을 누르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게오르크나 우즈, 마이클도 마찬가지였다. 하우스키퍼들 역시 방 안에 머무는 사람이 있을 때면 굳이 부르지 않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 키퍼 콜을 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사샤는 현관문에 가까이 가서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사샤가 묻자마자 바깥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라면 안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돌아가려다 다시 문 앞으로 돌아오는 기척 같았다. 이어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계십니까? 누구시죠? 실례지만 이 문을 좀 열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아주 정확한 발음을 가진 남자였다. 말투도 정중하고 예의 반듯했다. 경계심 없이 문고리에 손을 가져가려던 사샤는 얼마 전 카렐이 했던 말을 기억해 냈다.

‘나는 일상이 번거로운 사람입니다. 사생활이 노출되었기 때문에 내 사적인 공간을 타인이 침범하는 데 아주 예민해요.’

그의 말대로 이제 이곳은 사샤가 혼자 쓰는 곳이 아니었다. 레빈이 돌아간 이후 카렐은 사샤에게 친구를 초대해도 좋지만 친구를 부를 때면 저나 게오르크에게 미리 일러 달라고 말했고, 자신과 여기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었다.

“계십니까? 계시지요? 분명히 목소리가 들렸는데…….”

“네, 있는데요?”

“실례지만 잠시 문을 좀 열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문을요? 왜요?”

“제가 꼭 확인할 게 있습니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게…….”

상대방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간절했다. 혹시 중요한 물건을 방에 흘리고 간 하우스키퍼인지도 모른다.

사샤는 갈등하다가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먼저 걸어 두고는 문을 아주 약간만 열었다. 그러나 열리는 문틈으로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하기도 전에, 바깥에 서 있던 사람이 급하게 구둣발을 먼저 밀어 넣었다.

“세상에!”

그렇게 소리치며 놀란 표정을 지은 남자 때문에 사샤도 덩달아 놀랐다.

“저, 절 아세요?”

“아뇨? 모르죠!”

사샤 역시 그 남자를 몰랐다. 문을 열자마자 사샤는 후회했다. 그는 하우스키퍼도 아니었고 정중한 손님도 아니었다. 사샤가 미리 문고리에 잠금장치를 걸어 놓지 않았다면 대놓고 들이닥치려 했을 것이다. 정중하게 허락을 구했던 것과 달리 억지로 구둣발을 밀어 넣고 문을 강제로 열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서 사샤는 겁을 먹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다가 겨우 물어본 게 다였다.

“클, 클레멘츠 씨를 아세요?”

“그럼요! 알죠. 아주 잘 알죠. 여기가 그의 쾌락의 본거지 아닙니까? 당신은 언제부터 여기 머물고 있었어요? 강제였습니까, 허락이었습니까? 미성년자처럼 보이는데, 맞아요? 그 성도착증 환자가 드디어 범죄를 저지르는군! 오늘 미스터 클레멘츠가 여기로 돌아오는 게 맞죠?”

흥분한 소처럼 몸을 들이미는 남자를 보며 사샤는 뒷걸음질 쳤다. 15센티밖에 안 되는 틈으로 그가 팔을 밀어 넣어 가운을 움켜쥐려 했을 때, 사샤는 날쌔게 문 뒤로 숨은 다음 등으로 있는 힘껏 문을 밀었다. 틈 사이에 팔과 발이 낀 남자가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그윽…….”

사샤는 더욱 힘을 주며 문을 밀어댔다. 남자는 역시 문이 닫히는 것보다는 제 발이 골절되는 것이 더욱 두려웠던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밀려났다.

문이 완전히 닫힌 다음 사샤는 초조하게 현관 주변을 서성였다. 카렐의 말대로 아무도 이곳에 들이지 않았건만, 왜인지 그에 필적한 사고가 벌어졌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문 아래 틈으로 작은 종이 하나가 불쑥 내밀어졌다.

“여기로 연락해요! 곤경에 빠졌다면 도와줄 수 있습니다. 증언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르겠습니다!” 

사샤는 무릎을 굽히고 틈으로 밀어 넣어진 작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건 명함이었다. 한때 카렐이 제게 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생겨서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명함에는 ‘데일리 이슈’라는 사명과 함께 낯선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저 남자의 이름일 것이다. 남자의 직업은 기자였다.

* * *

낯선 이의 기척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제 발로 걸어 나간 것은 아니고 다른 이들에게 끌려 나가는 소리였다. 아마도 CCTV를 통해 낯선 이가 서성인다는 것을 알고 호텔 보안팀이 조치를 취한 듯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사샤는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자신이 먼저 컨시어지에 전화할 수도 있었는데 왜 그 생각을 빨리 해내지 못했는지 후회하기도 했다.

현재 사샤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소파에 파묻혀 한 가지 자세를 고수한 채로 꼼짝없이 앉아서 손톱을 뜯으며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 기자는 이 방에 들어오지 못했고, 저에게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일상이 번거롭다는 카렐을 직접 마주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하려 했지만 불안감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때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멍청한 사샤 세드린.’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척 현실감이 있었다. 그게 환청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사샤는 무심코 소리 내어 말했다.

“너 누구야?”

‘네가 문만 열지 않았어도. 멍청한 녀석…….’

사샤는 소리가 제 머릿속에서 들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목소리뿐이었던 것이 점점 구체화되어 어느새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사샤는 그것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머릿속의 작은 사샤는 저를 한심해하는 눈빛이었다. 반발하고 싶어진 사샤는 작은 사샤를 무시하려 했다.

‘무시하지 마! 별것도 아닌 게.’

사샤는 환청을 애써 무시하며 앉은 자리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있던 바람에 몸이 조금 뻐근했다.

그런 다음 사샤는 아까 받자마자 구겨서 휴지통에 던져 버렸던 명함을 다시 꺼내왔다. 그리고 다시 그것을 잘 펴서 호텔 룸서비스 책자 사이에 끼워 두었다.

그는 증인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가 카렐에 대해 거짓 소문을 내는 등 허튼짓을 하면 자신이 ‘그런 건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이어서 사샤는 핸드폰으로 데일리 이슈를 검색해서 들어가 보았다. 그러고는 소파에 엎드려 영자가 가득한 기사 사이트를 훑었다. 사이트 메인에는 사샤도 이름을 알고 있는 유명 연예인, 왕족, 셀럽, 사업가들의 사진이 잔뜩 있었다.

혹시 카렐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지 찾아보려고 했지만 스크롤을 아래로 쭉 내려 봐도 당장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찾기가 어려웠다.

잠시 후 돋보기 모양의 검색창을 발견한 사샤는 거기에 ‘클레멘츠’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와……!”

검색 결과가 엄청나게 쏟아져 나왔다. 생각했던 것 이상의 수확이었다.

사샤는 벌떡 일어나 앉아 가장 첫 번째 기사를 누르고 사진 속 카렐의 사진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다시 뒤로 돌아가 두 번째, 세 번째의 기사 사진도 차례대로 보았다. 그중에는 슈트 차림뿐만 아니라 셔츠 위에 편안한 니트를 덧입은 면바지 차림인 것도 있었고, 다른 이들과 낚시를 즐기거나 상체를 벗고 요트에 누워 있는 카렐의 사진도 있었다.

“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약간 갈색으로 태닝된 카렐의 매끈매끈한 피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궁금했던 몸을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카렐은 벗은 몸을 보여주지 않고 강박적일 정도로 다듬어진 상태만을 유지했다. 그래서 벗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다. 어딘가에 큰 흉터가 있거나, 못생긴 점이 있다거나 하는……. 그래서 사샤는 카렐의 나체를 훔쳐보는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벗은 몸은 상상과 달리 완벽했다.

사샤는 한때 카렐이 발레를 하면 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을 철회했다. 발레를 하기에는 가슴팍이 너무 두껍고 어깨가 튼튼해 보였다. 발레는 몸의 선을 만들어 내는 데 집착한다. 입체적인 사람의 몸에서 최상의 선을 뽑아내려면 한계까지 지방을 빼 근육만 남긴 몸이 필수였다.

사샤는 잠깐 자신의 마른 팔목을 들어 보았다. 건장한 카렐의 몸을 보다 보니, 같은 남자인데 카렐과 정반대로 발달시킨 자신의 가느다랗고 하얀 팔이 조금 기형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아무렴, 사샤는 쓸데없는 상념을 떨치고 다시 사진 속 카렐에게 집중했다. 대부분의 사진 속에서 카렐은 렌즈를 바라보지 않았는데, 가끔 카메라 쪽을 응시할 때는 눈빛이 오싹했다. 카렐은 파파라치를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파파라치 덕분에 사샤는 카렐이 없어도 그를 이렇게 감상할 수 있었다. 사샤는 금세 길티 플레저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카렐이 없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심심한 시간을 죽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사진을 쭉 보던 사샤는 어떤 시기의 카렐이 같은 사람과 쭉 함께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흠…….”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검은 머리의 남자. 화려하고 정돈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는 데다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얼굴이 흠 없이 완벽한 걸 보니 배우, 혹은 모델일지도 모르겠다.

곧바로 사샤는 카렐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갔던 검은 머리의 도둑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남자는 확실히 아니었다…….

“음…….”

사샤는 한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소파에 길게 누웠다. 카렐과 검은 머리의 남자가 마주 보고 있는 평범한 사진이었다.

그러나 친한 친구라기에는 간격이 기묘하게 가까웠고, 남자를 보고 있는 카렐의 얼굴에 미소가 걸려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사 내용이 궁금해진 사샤는 그 아래 붙은 영어를 확대한 후 천천히 해독했다.

[로드아일랜드 저택, 카렐 클레멘츠 블레이크 부테라와 런치. 7/4]

날짜를 보니 지난여름인 것 같았다. 블레이크 부테라라는 이름을 기억한 사샤는 다시 돋보기 모양의 검색창으로 가서 스펠링을 입력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이름의 스펠링을 한 번에 생각해 내지 못해 다시 이전 페이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 갑갑한 짓을 몇 번 반복하고 있는데,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렐?”

사샤는 핸드폰을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오셨어요?”

대답 대신 어둠 속에서 구두를 벗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를 약간 굽힌 채로 센서등 아래에서 빛을 받고 있는 것은 카렐의 금발이 맞았다. 사샤는 얼른 일어나 거실을 가로질렀다.

“기다리고 있었나요?”

다녀왔다거나 잘 있었냐는 물음 대신에 던지는 말에 사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눈치는 빠르지 않아도 상대의 기색만큼은 예민하게 감지하곤 했다. 언제 폭발해 저를 때릴지 모르는 아버지의 기분을 계속해서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카렐에게서는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옷이…….”

고개를 든 카렐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그리고 사샤는 고개를 숙였다가 금세 가운 차림인 자신을 기억해 냈다. 호텔 안에서는 용인되는, 꽤 평범한 복장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카렐이 지적하니 왜인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사샤를 쌩 지나쳤다. 그러고는 거실로 향해 방금까지 사샤가 뒹굴던 소파 위에 차키와 핸드폰 따위를 던지고 풀썩 앉았다.

카렐이 지나가면서 남기고 간 희미한 알코올 향에 사샤는 그가 술을 마셨다는 것을 알아챘다. 저에게 조금 차갑게 말해서 마음이 안 좋아지려고 했는데, 술을 마셨다면 이해해 줄 수 있었다.

사샤는 고개를 푹 수그린 카렐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나 보디오일을 몰래 훔쳐 발랐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게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아서 조금 떨어져 섰다.

“술을 드셨어요?”

“……프로모션 합격 축하합니다.”

사샤는 소리 없이 웃었다. 제 추측이 맞았다. 카렐은 술에 취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말에는 맥락이 없었다. 물어보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많이 드셨어요?”

“어지럽네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소파에 완전히 기대어 누워 버렸다. 사샤가 뒹굴거려도 부담이 없는 너비의 크고 긴 소파는 카렐이 눕자 꽉 차버렸고, 팔걸이 밖으로는 발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사샤는 그의 머리 근처로 다가가 속살거렸다.

“옷을 입고 자면 불편해요.”

이 호텔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이름을 모르는 검은 머리 남자가 카렐에게 하던 행동을 사샤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검은 머리 남자와 부둥켜안고 있는 카렐의 모습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도둑 주제에 카렐에게 친근하게 굴던 그가 조금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그걸 조금 흉내 냈다. 카렐과 자신은 후원자와 피후원자 사이니까 ‘자기야’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옷을 벗겨 드릴까요?”

그러나 사샤의 말에 카렐이 번쩍 눈을 떴다. 마주친 녹색 눈은 또렷하게 사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이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아 사샤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네…….”

“얼른 자요.”

그렇게 말하고 카렐은 다시 지친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어른이라서 술에 취한 게 부끄러운 거야.’

잠시 후 사샤는 그의 코 가까이 손가락을 대어 보고 그가 완전히 잠들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코끝에서 나오는 숨이 뜨거웠다. 한참을 기다려도 카렐은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술이 싫다고 하셨잖아요. 왜 드셨어요?”

사샤가 말하자 카렐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아마도 사샤가 내뱉는 숨이 간지러워서 그런 것 같았다.

“자요?”

계속 말을 걸어 보아도 카렐이 다시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사샤는 조심스레 그의 결 좋은 눈썹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한 방향으로 누운, 짧고 가지런한 짙은 금빛의 털들을 조심스레 만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다음에는 높은 코를 만져 보았다. 아까 실컷 파파라치 사진을 보았기 때문에 촉감이 궁금했다. 그의 콧날은 뼈대가 확실해서 실물이 사진보다 더 날카로워 보였다. 

그다음으로는 입술.

손을 가져가 윗입술의 뚜렷한 산을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꾹 눌러 보았다. 그런데도 카렐은 미동 없이 눈을 감은 채였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무언가가 목울대로 넘어가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 혼자 놀랄 정도였다. 얼마 전 생일 때, 사샤는 그와 비쥬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살짝 입술이 스치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하기도 했다. 호기심을 이길 수 없던 사샤는 그의 머리가 놓인 팔걸이에 팔꿈치를 기대고 허리를 숙였다. 심장이 두근, 두근, 하며 납작한 가슴팍을 터뜨릴 듯 고동쳤다.

카렐의 얼굴을 위에서 거꾸로 마주 보자 그의 얼굴 위로 사샤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사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카렐의 입술 위에 조심스레 자기 입술을 맞부딪쳐 보았다.

‘아아아악!’

사샤의 상상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아까 전의 작은 사샤가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온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사방팔방에 비명을 지르면서. 그만큼 사샤의 내면은 난리법석이었다. 화재경보의 비상벨이 뇌가 아프도록 쩌렁쩌렁 울리는 듯했다.

그러나 미친 듯이 시끄러운 사샤의 뇌 속과는 다르게 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사샤는 조그맣게 숨을 쉬면서 아주 살짝 입술을 뗐다. 카렐이 내뱉는 숨을 자신이 마시는 각도였는데, 그 숨이 이상하게도 지독히 달콤해서 온몸이 간지러웠다. 몽롱한 게 약이라도 흡입한 것 같았다. 작게 헐떡이던 사샤는 조금 더 고개를 들었다.

선명한 녹색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렐이 어느새 선잠에서 깨어났다는 현실이 사샤에게 느리게,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사샤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카렐의 얼굴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카렐의 표정 없는 얼굴에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란 어려웠다.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카렐이었다.

그의 호흡이 뺨에 와 닿는 순간, 사샤는 최면에서 풀려난 듯 겨우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일으켰다.

“왜 얼굴을 만져대나 했더니.”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제 뺨과 목덜미에 닿아 있던 사샤의 희고 가는 손가락도 하나씩 떼어냈다. 조금 건조한 피부에 달라붙어 있던 사샤의 손가락은 긴장으로 인한 땀이 배는 바람에 약간 촉촉했다.

잘못 쥐면 톡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을 전부 떼어내고 카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샤는 저에게 등을 보인 채로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발이 가지런히 깎인 뒷덜미에 작은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 있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카렐…….”

사샤는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른 짓을 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카렐이 무슨 말이든 해 주기를 바랐다.

그가 저를 혼낸다면 이 키스가 잘못된 행위라는 게 분명해질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자는 사람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함부로 손을 댄 게 실례라는 것쯤은 저도 알았다. 혹은 아직 우리는 그렇게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고 그가 말한다면 사샤는 그에 대해서도 사과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카렐은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저 숨을 깊게 들이쉬더니 한숨을 쉬고, 여전히 사샤를 등진 채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사샤는 허무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끼며 따져 물었다.

“왜요?”

“…….”

“물어봐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른다고 대답할 거면서도, 사샤는 그저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하군요.”

“왜요? 술 때문이에요?”

“…….”

“왜 술을 드셨어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사샤는 그저 침묵이 싫어 종알거렸다.

카렐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누웠다 일어나는 바람에 조금 위로 밀린 채로 흐트러진 베스트의 앞 단추 부분에 잔뜩 주름이 가 있었다. 사샤는 불편해 보이는 그 베스트의 조임을 관찰하면서 카렐의 시선을 피했다.

반대로 카렐은 사샤를 샅샅이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호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사샤도 잘 알았다. 그걸 깨닫자마자 사샤는 겁을 집어먹고 제가 먼저 사과를 했어야 하는 것인지, 그때부터 뒤늦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몸에 뭘 바른 거죠?”

그 질문에 사샤는 흠칫 굳었다. 그의 사적인 물건을 자신이 몰래 훔쳐 썼다는 것을 들킨 듯했다. 사샤는 카렐이 이미 전부터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자신의 샤워젤이나 샴푸를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어쩌지, 하며 쩔쩔맸다.

“그 가운 차림은 또 뭐고.”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제 머리카락을 성가시다는 듯 손으로 쓸어 넘겼다. 질린다는 듯한 그 행동에 사샤는 서러워졌다. 자신이 잘못한 것은 맞지만 실제로 비난하는 듯한 행동을 눈앞에서 보니 숨이 막힐 듯 억울했다. 특히 그 행동을 하는 주체가 카렐이라는 사실이 사샤의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왜 화를 내세요? 가, 가운을 입는 게 불법인가요?”

“…….”

“카렐은 항상 가운을 입잖아요. 왜 저만 비난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사샤의 입술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사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자신이 울어 재끼면 카렐은 황당해하면서도 냉정한 태도를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사샤는 카렐이 ‘비난하려 한 게 아니다’라고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또 서럽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며 자신을 옆자리에 앉힌 후 팔로 어깨를 감싸 안고 달래 주기를 바랐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사샤의 눈물을 보았으면서도 카렐은 시선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마스터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호텔 룸 중에서 유일하게 문이 달린 마스터룸 안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 사샤는 카렐이 그 문을 완전히 닫아걸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읏, 흐으……. 흡.”

사샤는 치미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한동안 거실에 서서 울던 사샤는 비척비척 제 침대로 기어 올라가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혹시 그 소리를 듣고 술이 깬 카렐이 나와 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밤이 다 가도록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새 사샤 안의 작은 사샤는 엉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뛰어다녔던 것을 부끄러워하며 골방에 틀어박혔다. 그러고는 이 사태를 만든 사샤를 원망하며 저주를 멈추지 않았다. 작은 사샤는 그렇게 닫아건 문 안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카렐처럼…….

눈물은 잠시 멈추었다가도,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던 카렐을 떠올리면 새로이 흘러넘쳤다. 이불과 베개가 축축했고 짓무른 눈가와 짓씹은 입술이 빨갰다.

사샤는 카렐이 보여줬던 사샤 세드린의 영상을 떠올렸다. 춤을 출 수 없는 남은 인생은 사랑으로 살겠다던 그의 말.

그리고 자신과 이름이 같은 타인의 행복을 엿보자마자 저에게 찾아왔던 허무함의 정체를 생각했다.

또한 사샤는 『키다리 아저씨』를 생각했다. 주디에게 찾아온 믿을 수 없는 행운을 보면서 자신이 왜 그토록 허무한 감정을 느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없고, 그들에게는 있는 것.

바로 대가 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의 존재였다.

사랑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특히 그렇다. 사샤는 사랑받기를 원했고, 특히 그 상대가 카렐이기를 몰래 바랐다.

예상치 못했던 키스의 후유증에 사샤는 괴로워했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의 감촉이 궁금해 저지른 일의 대가는 지나치게 컸다. 카렐이 그런 얼굴을 할 줄 알았다면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샤는 예지력이 부족했던 자신을 탓하면서 울다 지쳐 잠들었다.

* * *

다음 날 사샤가 눈을 떴을 때에도 마스터룸은 닫힌 채였다.

잔뜩 부은 채로 눈물이 말라붙은 눈을 힘겹게 뜬 사샤는 주방 쪽에서 나는 인기척을 들었다. 밤새 잠결에 몸부림쳤는지 가운 앞이 벌어지고 끈은 흐트러져 있었다. 다시 끈을 꽉 조여 맨 사샤는 설마 주방에 있는 게 카렐일까 봐 두려워하면서 그쪽으로 살살 다가갔다. 가벽 뒤에 숨어 그 너머를 몰래 살펴보자, 거기에 서 있던 것은 게오르크였다.

평소에는 그의 모습을 보면 실망스럽기만 했는데, 오늘만큼은 거기 있는 것이 게오르크라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아직은 카렐을 볼 용기가 없었다.

“……아이스팩이 필요하겠어요.”

사샤의 얼굴을 보자마자 게오르크는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사샤는 준비된 아침을 다 먹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을 때에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모, 못생겨졌어…….”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이 괴물 같았다. 제 얼굴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한 사샤는 거울 가까이 다가가 눈가를 더듬어 보았다. 발긋한 색으로 퉁퉁 부어오른 눈두덩이 때문에 쌍꺼풀이 사라져 있었고, 눈동자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왼쪽은 눈 앞머리가 특히 부었고 오른쪽은 눈꼬리 쪽이 부어 균형이 맞지 않아 더욱 이상했다.

“다 씻었으면 이리 오세요.”

“……이대로는 학교 못 가요.”

“얼음찜질을 하면 금방 가라앉을 겁니다.”

사샤는 고개를 숙이고 게오르크에게 다가갔다. 그가 차갑게 얼린 안대 모양의 팩을 사샤의 눈 위로 가져다 댔다. 사샤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따끔한 눈가를 참았다.

“클레멘츠 씨는 오늘부터 2주간 출장입니다.”

“……또요? 제 생일 전에도 다녀오셨는데…….”

“유럽 방문을 미루고 미루셨는데,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어서요.”

사샤가 스스로의 손으로 아이스팩을 받쳐 고정하도록 만든 게오르크는 이어 사샤의 가방을 챙겼다.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앉아 있는 사샤의 뒤에서 그가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 출장에는 우즈가 동행했으니 저는 뉴욕에 남을 겁니다. 저 혼자 남았다고 당신에게 소홀하지는 않을 테니 안심해요.”

“그럼 카렐은 지금 호텔에는 없는 거예요?”

“네.”

카렐을 보기가 겁난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사샤는 그 말에 큰 아픔을 느꼈다. 게오르크의 말이 정말이라면 그는 간단한 인사조차 없이 이곳을 떠난 곳이다.

“카렐은 어제 술을 많이 드셨어요.”

“……들었습니다.”

“제가 뭔가를 실수한 것 같아요…….”

“그것도 들었습니다.”

게오르크의 말에 충격을 받은 사샤는 아이스팩을 놓치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카렐의 아주 사소한 일까지 전부 다 꿰고 있는 것이 게오르크의 일이라지만, 키스 같은 사적인 행위까지 그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사샤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자 게오르크가 다시 아이스팩을 주워 눈가에 눌러 주었다.

“왜 그런 짓을 했지요?”

게오르크의 가벼운 타박에 사샤는 할 말을 잃었다. 어제 카렐이 물어 주기를 바랐던 일을 게오르크가 물어왔지만 막상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궁금했어요.”

“뭐가요. 클레멘츠 씨가 무너지는 게?”

“……?”

사샤는 게오르크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아이스팩으로 눈을 가린 채로 의문에 휩싸였다.

“그런 짓을 해 놓고 피해자인 것처럼 울다니……. 아무튼 제가 당신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사샤 세드린, 저 역시 어제의 당신 행동은 이해가 되질 않아요. 클레멘츠 씨는 지금 당신을 경계하고 있어요……. 그럴 만도 하시죠.”

“저를 경계해요?”

자신이 한 일이 그렇게나 끔찍하고 위협적인 일이었나, 사샤는 후회하면서 되물었다.

“네. 그래도 후원자로서 한 약속은 지키실 겁니다. 그분과의 신뢰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면 한탕 할 생각은 버리고 학업에 집중하세요.”

“한탕……?”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은 키스 한 번으로 카렐의 신뢰를 잃었다는 소리였다. 사샤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에 다시 훌쩍이기 시작했다. 게오르크가 어설프게 등을 두드리며 달래 주려 했으나 그럴수록 더욱 눈물이 나왔다.

“이런, 또 우는군!”

어린애를 다루는 데 서툰 게오르크는 독일어로 욕을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또다시 너무 울어서 온몸이 뜨끈해진 사샤는 결국 학교에 가기는커녕 자리에 드러눕고 말았다.

게오르크는 사샤가 열이 오른 몸 상태로 수업을 소화할 수 없겠다고 판단하고는 곧바로 학교에 결석계를 제출했다.

그리고 그날이 사샤가 학교를 다니면서 처음으로 수업을 빠진 날이었다.

* * *

학교를 하루 쉰 후유증은 지독했다.

근육통이 찾아올 틈도 없이 매일 혹사시키던 육체는 딱 하루를 온종일 침대에 처박혀 쉰 것만으로 통증을 호소했다. 몸살기가 올라 전신의 근육이 욱신거렸고 눈가는 열로 안압이 올라 뜨거웠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렸다. 사샤는 『키다리 아저씨』를 읽은 것을 후회했다.

소설 속 행운이 자신에게 헛바람을 불어넣은 게 틀림없었다. 그 이야기와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어쩌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았다. 최초에는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거리던 후원자님께 맹랑한 짓을 해 버렸다. 그가 자신에게 항상 관대했던 탓이다…….

그리고 사샤는 레전드 사샤 세드린의 은퇴 영상을 본 것도 후회했다. 그걸 보라고 준 것은 카렐이었지만, 그는 아마도 레전드의 직업정신과 소명의식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보여준 것일 터였다. 남은 인생을 전부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사랑받았던 사샤 세드린의 말 따위에 휘둘렸던 게 바보 같았다. 자신에게는 그런 사랑을 쏟아 줄 사람도 없는데.

블레이크 부테라라는 남자의 얼굴도 떠올랐다. 사샤는 그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 뜨거운 눈가를 문질러 가며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았다. 그가 카렐의 특별한 사람이라면 아주 슬플 줄 알았는데,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그는 카렐을 지나쳐 간 수많은 파트너 중 하나였을 뿐이다. 검은 머리에 흰 피부를 가진, 아름답고 요염한 매력의 남녀가 카렐의 지난 연인들이라며 검색에 수도 없이 걸려 나왔다.

그가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에게 쉽게 흥미를 준다는 것을 알고 나니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마저 싫어져서 사샤는 또 울었다. 자신은 발레 재능 때문이 아니라 머리카락 때문에 그의 눈에 띈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표현에 인색한 어머니와 타인보다도 못한 아버지, 그리고 자기 인생을 찾기 위해 떠나간 형도 생각났다. 사샤는 누운 채로 끙끙 앓았다. 게오르크마저 떠난 빈방에서 식사도 챙기지 않고…….

아마도 그건 성장통이었다.

사샤는 내리 3일을 쉰 후에야 학교에 나갈 수 있었다.

* * *

3일을 쉰 후 사샤는 무기력한 기분으로 학교에 나갔다. 사샤가 아팠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몇몇 아이가 인사하면서 ‘이제는 괜찮아?’ 하고 물어왔다.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를 지나치다가 옥사나와 마주쳤다.

「안녕.」

옥사나가 먼저 말을 걸며 다가왔다. 사샤는 그녀를 보자마자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아직도 사샤는 자신이 잘못을 한 건지 아닌지 혼자 판단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 할 말 있어.」

사샤는 그렇게 말하고는 옥사나와 학교 건물을 빠져나왔다. 출입구에서 나와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자마자 사샤는 대뜸 고백했다.

「나 키스했어.」

그 말에 옥사나가 손으로 입을 턱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사샤는 그녀의 표정을 꼼꼼히 살폈다. 자신이 약간의 절망을 섞어 말한 것과 달리 옥사나의 눈동자에는 그저 흥미와 호기심만이 반짝일 뿐이었다.

「누구랑? 전에 말했던, 그 30살 넘는 아줌마랑? 기분 어땠어?」

옥사나의 물음에 사샤는 기억을 조금 더듬어 보았다.

그 뒤에 온 충격이 너무 커서 정작 소중한 첫 키스의 감촉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표면은 따뜻하고 건조했고, 꾹 누르니 부드럽게 입술이 맞물렸다. 손가락으로 감싼 단단한 턱의 골격과 따스한 체온, 코로 주고받던 호흡 같은 것도 기억이 났다.

그때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떨렸다. 하지만 사샤는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특별하게 막 좋지는 않았어……. 소리 지르고 싶었어. 조금 무서웠고…….」

「무서웠다고? 눈은 뜨고 했어, 감고 했어?」

사샤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감고 했어.」

「와.」

감탄하는 옥사나에게 사샤는 확언하듯 다시 말했다.

「그게 내 첫 키스야.」

사샤의 말을 듣고 난 옥사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사샤의 눈에 방울방울 매달린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한 사샤는 조금 굳어진 옥사나의 얼굴을 왜일까, 생각하면서 가만히 응시했다. 이제 알았는데 옥사나의 눈은 짙은 남빛이었다.

옥사나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사샤의 손목을 잡고 수목의 그림자가 진 건물 벽 뒤로 돌아갔다. 

드물게 사람들이 오가던 출입구 앞쪽과 달리 벽 뒤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곳으로 사샤를 이끈 옥사나는 완전히 둘만 남은 것을 확인하고 사샤에게 물었다.

「첫 키스인데…… 왜 기분이 안 좋아?」

「기분이 안 좋은 건 아니야. 나도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사샤는 손등으로 젖은 눈가를 꾹 눌렀다.

카렐에게 허락받지 않은 짓을 한 것은 자신이다……. 그것도 저는 게이가 아니라고 발뺌했었는데, 그와 모순되는 행동을 해서 실망을 한 걸지도 몰랐다. 3일 동안 학교를 쉬면서 사샤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그것밖에 없었다.

혹은 저의 관대한 후원자는 자신이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처럼 후원 이상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는 것을 질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건 주제넘었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차라리 화를 내든가.」

「…….」

「그 사람은 이미 첫 키스 해봤단 말이야. 어차피 해치워 버린 거, 두 번째 세 번째도 아니고 50번째일지도 모르는데, 그딴 거 나한테 줘버려도 되잖아!」

말하면서 점점 울분에 찬 사샤는 외침 끝에 슬프게 흐느꼈다.

옥사나가 사샤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 네가 어른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조금 예상했어. 원래 나이 차가 나는 연애는 힘든 거야.」

「흑……. 50번…… 100번째일지도 모르잖아.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면서……. 나한테만…….」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마.」

그리고 옥사나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두 소년 소녀의 높다란 콧대가 슬쩍 부딪혔다. 눈을 뜬 채로 마주친 어설픈 키스였다. 사샤의 입술에 옥사나의 입술이 와 닿았을 때 쏴아아, 하고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입술이 떨어진 직후 사샤는 끅, 하고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너도 이제 두 번 했어.」

「…….」

「네 인생에 키스가 첫 키스만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100퍼센트가 아니라 이제 반반이야. 첫 키스에 대해서는 50퍼센트만 고민해.」

「그래……?」

옥사나의 논리적인 말에 조금 설득당하려던 사샤는 다시 훌쩍였다.

「네 첫 키스가…… 내가 되어 버렸잖아…….」

‘되어 버렸잖아아아……’ 하고 말을 끌면서 사샤는 다시 울었다. 저를 위로하기 위해 소중한 첫 키스를 이런 식으로 낭비한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한심할 정도로 많이 우는 사샤를 보면서 옥사나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와 동시에 옥사나는 얼마 전만 해도 첫 키스에 그다지 큰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사샤가 그사이 조금 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다.

둔하고, 늦되고, 이런 데에는 관심이 없던 친구가 어른을 좋아하다가 심각한 방식의 애정에 전염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나도 누군가랑 또 하면 되지. 별로 손해 보는 일도 아니고……. 원래 나는 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애랑 첫 키스 하려고 했었어.」

사샤는 힘없이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클래스의 시작을 알리는 알람 벨이 들려왔다. 어서 뛰어가지 않으면 바딤에게 혼쭐이 날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사샤는 다시 부어오른 눈가가 부끄러워서, 옥사나는 사샤를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을 학교 안으로 인도한 것은 뜻밖에도 안쪽의 복도에 서 있던 로마시나였다. 장학 재단의 일로 학교에 방문한 그녀는 레오타드 차림의 두 소년 소녀가 창밖 담벼락에 있는 것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꽤나 심각한 표정인 데다 남자아이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린 커플의 사랑싸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로마시나는 소녀가 소년에게 짧게 키스하는 것까지 지켜본 다음에 창문을 두드렸다.

톡톡.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을 때 깜짝 놀란 검은 머리 소년이 창을 올려다보았다. 로마시나는 그 학생이 누구인지 금세 기억해 냈다. ‘사샤 세드린’ 장학 재단의 후원을 받고 있는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창문을 조금 밀어서 열어낸 로마시나가 아래를 향해 말했다.

“가끔은 수업보다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건 알지만, 수업에 너무 늦으면 안 되겠죠?”

두 소년 소녀는 그 말에 말채찍이라도 맞은 듯 후다닥 뛰어 저 멀리 출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웃으며 보던 로마시나는 다시 창을 단단히 잠그고는 복도를 걸었다. 자신도 한때 몸을 담았던 발레 스쿨의 내부는 매우 익숙했다.

그녀는 올해 발레 스쿨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이뤄질 졸업 시험과 발레단의 입단 시험, 두 가지 안건의 상의를 위해 학교에 방문한 참이었다. 재단의 이사장인 카렐 클레멘츠가 근 1년 사이에 전과 달리 발레단이나 발레 스쿨의 내부 운영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기에 그녀 역시도 최근에는 더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참 귀여운 커플이네.’

방금 전 풍경으로 잠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한 로마시나는 이내 바삐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아무튼 애들이란 귀여워요. 한 명이 바로 그 사샤 세드린이었고, 여자아이도 러시아 출신인데……. 이름이 뭐였더라? 나무 아래서 작은 새 두 마리가 키스하는 것 같았다니까요. 좋을 때죠. 풋풋하고, 순수하고…….

로마시나의 전화를 받은 카렐은 입가에 습관처럼 미소를 얹고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시차 때문에 카렐이 있는 곳은 현재 늦은 밤이었고, 출장으로 머무는 호텔 안에서 이미 하루를 마칠 준비를 모두 끝낸 뒤였다. 한창때의 첫 연애의 설렘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한 기분에 그는 나직하게 웃었다.

작은 새처럼 키스하는 귀여운 커플이라…….

카렐의 눈앞에도 그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아이들을 감시하러 간 건가요?”

―당연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죠! 올해도 발레 스쿨에서 우수한 졸업 예정자들을 미리 뽑아서 발레단 오디션을 치를 거예요. 다른 발레단들이 채가기 전에 말이죠. 오늘은 오디션 곡을 선정하러 다녀왔어요.

“그 곡이 뭐죠?”

―라 발스.

로마시나의 말에 카렐은 말없이 턱을 매만졌다.

“사샤 세드린이 안무한 곡 아닙니까.”

―맞아요. 역시 사샤 세드린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그 곡이 오디션용으로도 많이 쓰이는 곡이던가요?”

―근 수십 년간은 확실히 아니었어요.

“그럼…….”

―최근 누군가가 레전드 사샤 세드린의 복원 사업에 애쓰시는 걸 기민하게 눈치챈 예술 감독의 재빠른 상황 판단력 때문이죠. 큰손께서 가진 재력을 모조리 거기에 쏟아붓고 계시는데, 자연히 수년 후에는 대중의 반응도 따라오지 않겠어요?

로마시나와의 통화를 마친 후, 카렐은 바로 잠자리에 드는 대신 술 한 잔을 따랐다.

‘문 샤인 위스키’. 과거의 사샤 세드린이 생전에 아주 좋아해서 캔디처럼 아껴 마시곤 했다는 위스키였다. 술에 대해 별로 기호가 없는 카렐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습관처럼 이 술을 마시고는 했다.

아는 사람은 모두 다 아는 이야기지만 카렐 클레멘츠는 레전드 무용수 사샤 세드린의 숭배자였다. 사샤 세드린이 말년까지 살던 로드아일랜드 저택을 복원해 대중에게 공개하거나, 그의 생전 필름들을 리마스터링해 현대에 선보이는 작업을 하는 이유도 모두 그 연장선이었다.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여기는 행동이라고 해석하고 칭송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혹자는 검은 머리에 몸을 한계까지 단련한 이들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카렐의 성적 취향을 꼬집으면서 비틀린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카렐 클레멘츠는 망자의 영혼에게 사로잡혔다는…….

지금까지 카렐은 그 사실을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죽은 사샤 세드린을 지독히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그의 평생 파트너였던 카렐 클레멘츠의 환생이라고 믿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환생체라면, 사샤 세드린도 이 지구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기 때문에 정신과 상담의 외에는 아무에게도 이런 사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면서도 카렐은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사샤 세드린의 영혼이 어딘가에 떠돌고 있다는 가정이라도 하지 않으면, 그런 희망조차 없다면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정신병이지.’

그렇게 꾸준히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다른 사랑을 반복하면서 망자의 영혼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어느 날, 그는 장학 재단의 후원 파티에서 우연히 한 소년을 만나게 된다.

그게 바로 지금의 사샤 세드린이었다.

‘가, 가운을 입는 게 불법인가요? 왜 저만 비난하세요?’

문득 양손가락을 꽉 붙잡고 오들오들 떨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렐은 위스키를 넘기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샤 세드린의 환생으로 여겨지는 누군가를 만났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게 아직 열다섯 살짜리 소년인 것만으로도 기겁할 지경인데, 실제로 만난 사샤 세드린은 제 상상 속의 ‘그’와는 매우 달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럽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소년은 사샤 세드린의 그림자를 떼어 놓고 봐도 충분히 사랑할 만했기에 그 작은 사샤가 누군가의 그늘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카렐의 의식을 죄다 차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호텔로 찾아온 기자.

그리고 기자가 돌아간 직후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하던 아이.

카렐은 이미 제 사생활을 캐느라 몇 차례나 소란을 일으켰던 한 기자가 보안이 허술한 사이 호텔로 침입했다는 사실을 보고를 통해 알고 있었다. 뒤늦게 사샤의 메일을 읽으면서 카렐은 아이가 자신에게 먼저 이야기해 주기를 기다렸다. 서툰 문자로 얼마나 무서웠는지, 기자가 얼마나 무례했는지를 이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사샤는 침묵을 지켰다. 게다가 막상 호텔에 도착했을 때 자신이 목격한 광경이란…….

사샤 세드린은 가운을 입은 채로 향기가 진동하는 오일을 온몸에 바르고서 서툰 유혹을 했다. 자신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급기야 입술을 훔치기까지 했다.

카렐은 일전에 만났던 남자를 떠올렸다.

블레이크 부테라. 이탈리아 이민자였던 그 남자는 카렐의 취향을 정확히 계산해 접근해 왔던, 배우 출신의 전문 창부였다. 작은 사샤 세드린을 만난 후 외유가 뚝 끊겼던 카렐의 주변에 정적들은 치밀하게 덫을 놓았다. 카렐이 숨기던 가학적 성취향이 드러난 것도 그의 증언을 통해서였다.

가장 한심한 것은 그 남자의 실체를 알고, 그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나서도 사샤 세드린을 그대로 재현해 낸 듯한 그와 보냈던 시간만은 후회하지 않는 저 자신이었다. 그 모든 사실이 한심하고 끔찍했다. 애초에 사샤 세드린을 연기한 것이니 그의 모든 것이 가짜인데도…….

그만큼 카렐은 사샤라면 넋을 놓았던 것이다.

그 뒤로 카렐은 주변 인맥을 한바탕 갈아엎고 고용인들을 축출하는 등 철두철미하게 경계를 세웠다.

그런데 상상도 못 했던 작은 사샤 세드린이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기자가 방문한 당일 자정, 이미 카렐을 특정한 이니셜 기사가 뿌려진 상태였다. 소아성애를 암시하는 기사를 읽으면서 카렐은 헛웃음을 흘리곤 예정되어 있던 유럽 출장을 앞당겼다.

기자와 사샤 세드린 사이에 과연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까?

카렐은 사샤의 입술이 닿았던 곳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얼마 전 카렐은 사샤의 생일 선물로 슈트를 맞추라면서 넉넉한 현금을 주었다. 사샤는 그중 2,000불을 제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송금하고 그 사실을 카렐에게 말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을 지탱하는 아픈 어머니, 그녀의 병원비를 위해 목돈을 필요로 할 가능성…… 정황은 충분했다.

카렐은 천성과도 같은 의심 속에 휩싸여 있었다.

기자는 고소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사샤가 어울리지도 않는 흉내를 내며 저를 덫에 건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어설픈 아이의 수준일 뿐이었다. 자신이 진짜로 해를 입을 가능성은 적었다.

카렐은 사샤를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과, 그 귀여운 아이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사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 로마시나와의 전화 통화는 카렐의 의심을 한층 더 강화시켰다. 또래에 어울리는 연애 상대가 있는 사샤 세드린. 울면서 여자아이의 키스를 받았다는 사샤 세드린……. 그 나이에 맞는 사랑스러운 행동이었다. 그 광경은 로마시나의 말대로 작은 새들처럼 귀여웠을 것이다.

‘애초에 그 집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카렐은 눈을 감았다.

어른의 관심과 애정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아이를 보고 치미는 동정심에 응답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1년을 먼 곳에서 관찰자로 잘 머물렀건만, 거리감이 좁혀지는 순간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샤 세드린이 저와의 스캔들을 이용해 추문을 일으키려 한다고 해도 그 아이를 미워할 자신이 없었다. 왜 저를 외롭게 두었냐던 사샤 세드린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직도 카렐은 어린 사샤 세드린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채였다.

* * *

카렐이 출장을 떠난 뒤 약 열흘, 사샤는 그사이 마음의 통증에 약간 무감해진 상태였다. 속을 괴롭히는 당사자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나마 일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렐이 없어도 매일 반복적으로 흘러가는 일과 속에서 사샤는 오늘도 학교의 마지막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약간 북적이는 로커룸으로 들어가 옷을 훌렁훌렁 벗어낸 후, 여분의 새 타이즈를 꺼냈다.

그러고는 마트에서 10불이면 살 수 있는 무향의 보디로션을 죽 짜서 맨다리에 치덕치덕 발랐다. 하루 종일 몸에 밀착되는 발레복을 입고 있다 보면 살갗이 쉽게 건조해지는 데다, 발뒤꿈치 같은 경우에는 많은 연습으로 혹사당해 보기 싫게 갈라지는 일이 많다. 사샤의 날렵하고 작은 발은 아직 소년답게 그저 매끈매끈하기만 했지만, 그래도 그는 프로 댄서들이 알려준 팁대로 매번 열심히 로션을 발랐다.

그러고 나서는 남색 타이즈를 발끝부터 꿰었다. 낑낑대며 배와 허리를 감싸도록 올려 신었는데, 왜인지 모자란 감이 있었다. 억지로 타이즈를 당기자 발끝 부분이 늘어나 하얗게 살갗이 비칠 정도였다.

“좀 짧은 거 아냐?”

“…….”

누군가의 말에 사샤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수긍했다.

“사이즈를 잘못 골랐나 봐.”

“억지로 당겨 신지 마. 빨리 닳더라.”

그건 사실이다. 원래도 연습량이 많은 사샤의 타이즈는 유독 뒤꿈치가 빨리 닳곤 했다. 물론 사샤는 닳아 버린 타이즈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 아껴 신어야 하기 때문이다. 구멍이 난 부분을 잘라내면 발목까지 오는 레깅스처럼 신을 수 있었다.

카렐의 호텔 룸으로 이사를 갔을 때 짐 정리를 도와주던 게오르크가 그런 낡은 옷들은 다 버리라고 했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사샤는 형편없이 낡아서 적당히 늘어난 타이즈가 몸에 편안하게 맞는 느낌을 좋아했다. 특히 집에서 연습할 때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으니 그런 낡은 타이즈를 고수하고는 했다.

사샤는 조금 짧게 느껴지는 타이즈를 적당히 허리선까지만 오도록 조정하고는, 그다음으로 슈즈를 신었다. 마치 양말을 신은 것처럼 제 발에 딱 맞는 데다가, 발가락 부분과 뒤꿈치 부분은 부드러운 양가죽으로 되어 있고, 그사이 연결부는 신축성 있는 메시천으로 되어 있는 슈즈는 프랑스 수입품이라 굉장히 비쌌다.

이건 카렐이 사 준 것이었다.

카렐을 떠올리자마자 울적해진 사샤는 말없이 다른 쪽 슈즈에도 발을 넣었다. 그러고는 일어선 채로 열린 로커 문을 살그머니 잡고 발가락을 구부려 발등을 밀었다가 완전히 펴서 를르베를 하며 다리를 풀어 주기를 반복했다. 발등과 발가락의 유연성이 좋아서 발가락을 완전히 꺾은 채로 서는 것도 가능했다.

로커룸 한구석에서는 수업을 마치고 오늘쯤 왁싱을 하러 가야겠다고 몇몇이 떠들고 있었다. 각자 털이 난 부위를 꼬집거나 욕하며 소란스럽게 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사샤는 아직 솜털만 보송보송한 제 팔을 바라보았다. 가슴이나 배에는 물론이고 야수처럼 뒷덜미에까지 털이 나는 친구들도 있는데, 자신은 아직 왁싱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난 언제쯤 털이 많이 나게 될까.’

하아.

털이 북슬북슬한 사람들을 몰래 부러워하며 조그맣게 한숨 쉰 사샤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것은 카렐의 매끈한 뒷덜미와 요트에서 찍힌 사진에서 보았던 그의 가슴팍이었다. 사샤는 문득 카렐도 왁싱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만약 카렐에게도 털이 있는데 그걸 모두 다 뽑아 버린다면 조금 아쉬울 것 같았다.

사샤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실은 거의 하루 종일 카렐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3일 뒤에는 오실 텐데…….’

게오르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카렐은 조만간 뉴욕으로 돌아온다. 떠들고 달리며 복도를 요란하게 지나치는 아이들 사이에서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타박타박 걸었다.

마지막 수업에 들어온 발레 미스트리스는 올가였다. 남녀가 구분된 클래스라 스튜디오 안에는 통제 불능의 남학생들만 바글바글했는데, 올가는 자신이 들어와도 조용히 하지 않는 녀석들을 쭉 둘러보며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수업은 클래식 발레보다는 근육 단련과 스트레칭 수업의 비중이 높다. 오늘의 마지막 수업 역시 매트 위주였다. 올가를 따라 필라테스 동작을 몇 개 반복한 사샤는 벌써부터 근육이 심하게 뻐근한 것을 느끼며 허벅지 안쪽을 주물렀다.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스트레칭을 하렴. 바닥에 등을 대어 눕고 무릎은 양쪽으로 벌리고! 다른 사람이 무릎을 천천히 눌러 주는 거야.”

뒤이어 자리를 잡은 아이들에게서 걸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릇 남학생들은 근력은 뛰어나도 유연성이 부족하기 마련이다. 뻣뻣하면 근력이 좋고, 반대로 유연하면 근력이 부족했다. 사샤는 둘 다 나쁘지 않았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그래도 유연성이 더 좋은 쪽이었다.

“사샤. 다리 좀 눌러 줘.”

마침 사샤와 짝이 된 것은 조제였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벌써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조제의 무릎을 꾹 밟았다.

“더 세게 밟아도 돼.”

진땀을 흘리면서도 조제는 그렇게 말했다. 사샤는 아주 조금씩만 힘을 줬다.

“더 세게 밟으라니까?”

“아플 것 같아…….”

“상관없어. 콩쿠르가 얼마 안 남았다고.”

사샤는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뭐로 참가해?”

“돈키호테…… 바질.”

그건 나도 좋아하는 건데……. 사샤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팡팡 뛰어올라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고 정확하게 착지하는 부분이 특히 재밌었다. 밸런스를 정확히 잡으며 젠체하는 포즈를 하는 것도.

하지만 아직 사샤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바질 의상을 입고 돈키호테를 춰 본 적이 없었다. 검정색 재킷에 금실이 수놓아진 바질 의상을 입을 조제가 부러워졌다.

“근육이 찢어져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찢을래.”

“……그럼 큰일 나.”

“찢어지면 그만큼 늘어난다는데?”

조제가 잘못된 지식을 주워섬겼지만 사샤는 그런가 보다 하고 꾹 다리를 눌렀다. 하지만 힘이 무식하게 센 조제의 다리는 힘줄이 워낙 뻣뻣해서 잘 벌려지지도 않았다.

“자, 다음! 이번에는 바꿔서 상대를 눌러 주세요.”

올가의 말에 이번에는 사샤가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웠다. 조제가 양쪽에서 사샤의 무릎을 밟자마자 쑥, 하고 180도로 다리가 벌어졌다. 갑작스레 늘어난 근육에 사샤는 헛숨을 삼키며 입을 막았다.

“와. 넌 진짜 유연하다. 아직 힘은 조금도 안 줬는데. 괜찮냐?”

“으, 응……. 괜찮아. 참을 만해.”

아까 조제가 식은땀을 흘렸던 것처럼 사샤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야. 그런데 너, 옥사나랑 무슨 사이야?”

조제가 허리를 굽히며 눈을 부라렸다. 그 바람에 골반이 더 지그시 밀렸지만 사샤는 꾹 참았다.

“아,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래? 근데 왜 매일 붙어 다니는데.”

“그냥 친한 친구야…….”

“쳇.”

여자아이와의 친분을 덤덤하게 여기는 사샤 때문에 더 빈정이 상했는지 조제는 혀를 찼다.

한참 후 올가가 다시 아이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적당히 간격을 두고 앉은 아이들은 잔뜩 벌렸던 다리를 반대로 모아 주면서 자극받은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그때에 사샤는 다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도 한 번 찢어져 염증이 생겼던 부분이 다시 시큰거렸던 것이다. 아픈 쪽 다리를 쭉 펼친 다음 골반을 롤링해 보니 느낌은 더 확실했다. 찌릿거리는 느낌이 서혜부 안쪽까지 깊이 전해져 왔다.

사샤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한 번 근육이 다치고 염증이 반복해서 생기면 쉽게 재발하곤 한다. 심각한 부상은 아닐 테지만, 아무튼 성가신 일이었다. 원래 들 수 있는 높이만큼 데벨로페도 할 수 없고, 바트망처럼 갑자기 다리를 찰 때 조심하지 않으면 염증은 더욱 심해진다.

우울한 일이 하나 더 생겼다.

* * *

“여기가 아픈 거죠? 와……. 생각보다 훨씬 근육이 경직되어 있는데요?”

마침 그날 저녁 개인 교습으로 방문한 브라운 씨에게 사실대로 통증을 털어놓으니 그녀는 조금 몸을 짚어 본 후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고관절만의 문제가 아니니 방치하면 이후로 허리부터 엉덩이까지 다 아프게 될 거라고도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요?”

“나을 때까지 무조건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어요. 자극을 주지 말고 낮은 강도로 운동하세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듣고 더더욱 울적해진 사샤는 다음 날 학교에서 몸을 사렸다. 웜업이 부족한 아침인 데다가 통증을 의식하며 수업을 받다 보니 왼쪽 다리는 더더욱 부자연스럽기만 했다. 바 워크가 끝난 후 바 스트레칭을 할 때 왼쪽 다리를 바에 올려두는 것만으로도 통증을 느낀 사샤가 미간을 미미하게 찌푸리자 옥사나가 흘끔거릴 정도였다.

“왜 그래?”

“다리가 찢어졌나 봐.”

“나도 지금 오른쪽이 조금 그래.”

옥사나의 말대로 이건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저만 유별나게 굴었다고 생각해서 부끄러워진 사샤는 입술을 앙 물며 끈질기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그랑 주테를 뛰기 직전 바딤은 대놓고 사샤를 지적했다.

“사샤. 점프를 할 때 높이 뛰는 것만이 아니라 다리를 공중에서 차야지. 그걸 안 하니까 점프 높이가 낮아 보이는 거다.”

바딤의 말에 따라 사샤는 두 번째 그랑에서 왼쪽 다리를 뒤로 의식하며 차냈다. 그러나 지금까지 몸을 사리다 갑자기 높이 바트망을 차자마자 급습하듯 통증이 찾아왔다. 항상 해내던 높이인데도 너무나 아팠다.

작은 비명을 지르며 오른발로 가까스로 바닥을 디딘 사샤는 제대로 착지하지 못하고 쿵 넘어졌다.

“사샤!”

다시 한 번 벼락같은 바딤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평소 같으면 얼굴이 빨개져서라도 얼른 털고 일어났겠지만, 사샤는 저에게 고함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어깨를 떨며 고개를 푹 숙였다.

“또 우는 거냐? 귀찮은 놈.”

혀를 차며 다가온 바딤은 사샤를 억지로 일으켰다. 아이들은 창피를 당한 사샤를 가만히 바라보며 벽에 등을 붙이고 그저 침묵했다. 사샤는 소리 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기로 붉어진 눈가는 숨길 수가 없었다.

“별난 놈. 네놈은 하여간 이 멘털이 문제야.”

그렇게 말한 바딤은 사샤를 의무실로 쫓아냈다. 사샤의 등 뒤로 스튜디오의 문이 쾅 닫혔다. 안쪽에서는 다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샤는 한 명이 빠진 것은 곧 잊어버리고 연습에 열중하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보다가 의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의무실에서 멍든 허벅지에 처치를 받으면서 사샤는 멍하니 생각했다. 바딤의 말이 맞다. 근육 염증은 안 겪어 본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흔한 것이고, 무대 위도 아닌 연습실에서의 주테를 망쳤다고 눈물부터 흘리려고 하는 자신이 이상했다.

이런 멘털로 전문 댄서가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넌 비정상이야.’

또다시 환청이 들렸다.

“아프니?”

사샤의 허벅지 멍에 연고를 마사지해 주던 물리치료사가 그의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보고 다정하게 물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가로저었다.

“안 아파요.”

“씩씩하네. 그래. 물리치료 꾸준히 받고, 또 무리하지 말고.”

물리치료사는 가볍게 말하고는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침대 커튼을 치고 사라졌다. 사샤는 전기가 찌릿찌릿 통하는 다리를 모른 척하면서 천천히 베개에 뺨을 기댔다. 다친 곳은 허벅지 안쪽인데 발목, 무릎뼈, 허벅지와 골반……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갑자기 키가 자라는 바람에 자연히 따라오는 통증이었지만, 사샤는 그것이 나약한 자신이 망상으로 만든 환통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자 크게 겁이 났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벌써부터 고장 난 댄서의 몸을 누가 쓰려고 할까?

게다가 뇌에는 곰팡이가 폈고.

사샤는 절망적인 기분에 소리 없이 흐느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의무실 침대 안에서 몰래 눈물을 닦아내면서 사샤는 카렐을 떠올렸다. 이틀 후면 그가 돌아온다. 어떤 얼굴로 방에 들어설지는 몰라도, 사샤는 그저 카렐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사적인 시간을 허락해 준다면 사샤는 잘못부터 빌겠다고 다짐했다.

호기심에 함부로 입을 맞춰서 죄송하다고.

그리고 허락하지 않은 감정까지 품어 버려서 죄송하다고.

‘클레멘츠 씨. 나에게 과분한 행운이 온지도 모르고 너무 많은 것을 바랐어요.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다른 욕심은 내지 않을게요. 하나님, 제게 다시 클레멘츠 씨의 호의를 돌려주세요. 만약 이 기도를 듣고 계시면 다시 그분이 저를 순수한 학생이라고 생각하게 해 주세요.’

* * *

브라운 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샤의 고관절 통증은 곧 허리와 엉덩이까지 전염되었다. 옥사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사샤의 부상에 놀란 듯했다. 바딤도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확연히 낮아진 사샤의 왼쪽 다리 데벨로페를 보고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건 일종의 배려였지만 사샤는 더 큰 우울감을 느꼈다. 바딤은 조금만 더 교정을 하면 나아질 것이 확연히 보이는 학생에게 더 지적질을 해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는 발레단 입단은 꿈도 못 꿀 실력이거나 수십 번 지적해도 뇌에서 받아들인 것을 몸으로 고쳐서 재현하지 못하는 학생은 일절 지적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나니 그가 부상이 나을 때까지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 사샤에게는 실력의 정체로 느껴졌다.

게다가 매트 운동이나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에는 의무실에서 꼬박꼬박 물리치료를 받았는데도 상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심각해졌다.

깊은 우울감이 숨길 수 없이 표가 나는 사샤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카렐이 돌아오기 전, 사샤는 관리사감 줄리아에게 한 번 더 불려가 면담을 해야 했다.

항상 학생들의 몸 상태에 신경을 쓰던 그녀는 이번에는 사샤의 멘털을 걱정했다.

“사샤. 최근에 아파서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힘들지?”

“……아,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혹시 친구들 사이에서 말 못 하는 문제라도 있니?”

“……아니요…….”

“부모님은 건강히 잘 계실까?”

그러나 사샤는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긴장하면서 줄리아의 모든 질문에 ‘저는 괜찮아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동시에 줄리아는 최근에 부쩍 활발해졌던 소년이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 이상하다고만 여겼다. 큰 말썽을 일으키긴 했지만 기숙사에서 떠난 이후로 사샤는 도리어 그 나이 대의 소년다운 활기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다시 만성적인 우울을 두르고 있는 원래 상태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통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샤와의 대화에선 소득이 없었다. 결국 사샤를 그냥 돌려보내면서 줄리아는 아이에게 ‘심리 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은 그 모든 것이 카렐의 영향이었다. 경조증이 찾아와 매일 아침 달려서 등교할 만큼 들떴던 것도, 매일 눈물로 밤을 샐 만큼 다시 우울해진 것도. 그러니 사샤를 치료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카렐의 깊은 애정뿐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 리 없는 줄리아는 그저 어머니와 통화를 한 뒤에 푹 쉬라며 사샤를 조용히 돌려보냈다.

* * *

카렐이 출장에서 돌아오기로 한 당일은 마침 주말이었다. 자신이 학교에 간 사이 카렐이 돌아와 엇갈리는 일이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한 사샤는 아침 일찍부터 카렐이 언제 돌아올지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게다가 게오르크가 사샤에게 아침을 차려 주자마자 JFK 공항으로 그를 마중하기 위해 떠났으니 그는 분명 오늘 안에 뉴욕에 돌아오는 것이 맞았다.

사샤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걸리는 시간을 검색해 봤다. 그리고 호텔로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 한참 지난, 정오가 막 지나갈 때쯤에는 자신이 러시아에서 뉴욕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려 봤다.

사샤는 짐 찾는 곳을 헷갈려서 한참 동안 수하물을 찾지 못했고, 결국 ‘잃어버린 짐’을 찾는 곳에 가서 더듬거리며 번역기를 사용해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짐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전달했지만 비행기 표를 보여 달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그땐 짐을 모조리 잃는 줄 알고 정말로 겁을 먹었다.

카렐은 영어를 잘하지만 그런 일이 평생 한 번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카렐도 짐을 잃어버려서 늦는 게 아닐까 걱정하면서 사샤는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 있던 해가 하늘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며 길게 넘어갈 때, 사샤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가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제게 인사도 없이 떠난 카렐이 다시 여기로 온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질렸을 수도 있고, 아주 화가 났을 수도 있었다. 사샤 역시 누군가 싫어지면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전혀 아쉽지 않았고, 가능하면 죽을 때까지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카렐에게는 언제나 돌아가고 싶어 안달 난 ‘본가’도 있지 않은가. 그의 진짜 집 말이다.

카렐을 마주치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계속 기다렸던 사샤의 마음에 점점 허무함이 차올랐다.

“으윽……. 으으읏.”

입술을 아프게 깨물면서 사샤는 침대로 파고들었다. 카렐을 기다리기만 하는 일은 지나치게 끔찍했다. 돌아오는 날짜를 알고 있어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는 카렐을 자신의 잘못을 되새김질하는 고통 속에서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욱신거리며 아파 왔다.

사샤는 매트리스에 이마를 처박았다. 안 그래도 곰팡이가 핀 뇌에서 그것들이 꾸물꾸물 증식하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후, 사샤는 희미한 엘리베이터의 소음을 들었다.

훌쩍거리며 코를 삼키는 제 소리가 방해되어 사샤는 숨도 멈추고 그 소리에 집중했다. 분명 소음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어 알림음이 울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펫을 밟는 느린 걸음걸이.

카드키를 가져다 대는 소리.

그리고 달칵 소리와 함께 열리는 현관문…….

“카렐…….”

사샤는 힘없이 속삭였다.

현관문까지 길게 늘어진 석양빛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온 것은 카렐이었다. 사샤는 숨을 헐떡였다.

고개를 든 카렐이 정확히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그의 표정을 잘 살펴서 기분을 알아챈 다음, 그의 기대에 맞게 행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시야가 흐려져 도무지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너무 멀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이런…….”

카렐은 침대 위에 무릎을 세워 앉은 채로 있다가 천천히 뒤로 넘어가는 사샤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매트리스로 풀썩 넘어진 사샤의 몸이 작게 경련하고 있었다. 과호흡이었다.

사샤는 눈을 깜빡였다. 언젠가처럼 카렐의 큰 손이 사샤의 코와 입을 다정하게 덮었다. 사샤는 새된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눈을 다시 빠르게 깜빡였다. 괴롭게 몸을 뒤틀자 카렐이 제 품으로 사샤를 단단히 안아 들었다.

그의 단단한 팔에 갇혀 숨을 참고 있으니 어느새 호흡이 진정되어 갔다. 사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고개를 쳐들고 헤매는 눈동자로 카렐을 뚫어져라 살폈다.

“기념품을 사 왔어요.”

그의 목소리에 이제야 귀가 트인 듯했다. 먹먹한 귀로 카렐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선명한 소음이 쏟아졌다. 그의 무게 있는 목소리와 달리 학학거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지나치게 큰 듯했다. 제 숨소리를 의식한 사샤는 부끄러워졌다.

“초콜릿 쿠키인데, 지금 먹겠어요?”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카렐의 기분을 알아챌 수는 없었고, 쿠키는 먹고 나면 체하게 되지만 그래도 그의 선물이 꼭 받고 싶었다.

“읏…….”

얼른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지나친 긴장이 풀린 몸은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카렐은 축 늘어지는 사샤를 어렵지 않게 양팔로 안아 들고 거실로 나갔다.

사샤는 눈치를 보면서 그의 목에 매달렸다. ‘이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변명을 준비했지만 카렐이 무어라고 타박하는 일은 없었다.

현관에는 종이봉투 두어 개가 흩어져 있었다. 과호흡에 시달린 사샤를 보고 급히 다가오느라 내던진 흔적이었다. 카렐은 사샤를 안은 채로 봉투를 차례로 주워 들고는 소파로 다가갔다.

카렐이 저를 소파에 앉혀 줄 때 사샤는 조금 아쉬움을 느꼈다. 그러나 의젓하게 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는 도로 반듯하게 앉았다. 그사이 카렐은 사샤의 곁에 앉아 종이봉투 안에서 포장된 과자상자를 꺼내 손수 비닐포장을 벗겨 내밀었다. 과한 긴장에 휩싸인 사샤를 알아채고 일부러 당을 섭취하게 한 것이다.

“먹어 봐요. 어때요?”

“아주 맛있어요.”

그건 진짜로 행복의 맛이었다. 카렐이 먹여 준 쿠키를 먹으면서 사샤는 가끔씩 훌쩍였다.

“살이 빠졌나요?”

“아니요…….”

“오랜만에 보니 뭔가 변한 것 같군요.”

살이 쪘는지 빠졌는지는 모른다. 사샤는 식사는 잘 챙겼다고 거짓말했다.

“그간 별일은 없었고요?”

“네…….”

“내가 그렇게 두렵던가요? 인사 대신 졸도를 택할 정도로.”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카렐의 말투가 변함없이 다정해 너무 안도감이 드는 바람에 다시 기절해 버리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그가 와서 무서운 얼굴을 하면 바닥에 엎드려 발목을 붙잡고 빌려고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여전히 사샤의 심장은 평소보다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카렐은 사샤를 가만히 보더니 테이블 위의 룸서비스 책자를 펼쳤다. 파라락 넘어가던 책자 사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떨어졌다. 그게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아…….”

그게 누구의 명함인지 금세 알아본 사샤는 잠깐 동안 그것이 저기에 왜 있는지 궁금해했다. 제가 휴지통에서 도로 주워 끼워 넣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떠올랐다.

카렐은 기자의 명함을 앞뒤로 보며 턱을 매만졌다.

“연락을 해도 닿지 않았을 겁니다.”

“……네.”

카렐의 말을 잠자코 들으면서 사샤는 얌전히 대답했다.

“경찰 조사를 받고 있거든요. 명예훼손과 모욕죄로…….”

“……?”

“왜 이걸 가지고 있었죠?”

“누구 건지 아세요?”

“저를 끈질기게 괴롭힌……. 나한테 이미 고소를 당했던 사람이죠. 그런데 죗값을 치르고도 반성을 한 게 아니라 악의를 품었는지 또다시 선을 넘는군요. 측은한 사람입니다.”

사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 기자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범죄자인지는 몰랐다. 게다가 그 정도로 카렐을 싫어하다니. 사샤는 저도 그 기자를 증오하기로 했다.

“연락을 할 생각이 있었습니까?”

“네…….”

“하지만 하지 않았군요?”

“네? 네…….”

“그래요. 그걸로 됐어요.”

카렐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샤에게 작게 손짓했다. 사샤는 무릎으로 소파 위를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돈이 궁하면 내게 말해요. 그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으니까. 내게 부탁하는 걸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은 누군가에게 이야깃거리를 팔고 보상을 받는 것 이상을 내게서 받아 갈 수 있습니다. 나를 배신하지만 않는다면.”

사샤는 카렐의 말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했다. 그는 사샤가 무언가 보상을 위해서 이야깃거리를 판다고 표현했다. 사샤는 황급히 부정했다.

“저는 카렐을 배신하지 않아요. 절대, 절대로.”

“잠깐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맞죠?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건…… 아주 잠시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은 절대로, 추호도 하지 않는, 완벽한 내 편이 되는 것인데…….”

“잠깐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연락을 하려고 했던 건…….”

사샤는 가빠 오는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말했다. 카렐은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이어 말해 보라고 종용했다.

“그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하면 거짓말하지 말라고…… 혼쭐을 내주려고 그런 건데…….”

그 말에 카렐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사샤를 관찰했다. 사샤의 ‘허무맹랑하고 방향이 잘못된 용기’를 믿어 줄지 말지 생각하면서.

“……돈이 필요했던 건 아닌가요.”

“돈이요?”

눈을 조금 크게 뜬 사샤를 향해 카렐이 한숨 쉬며 말했다.

“내가 생일날 주었던 돈 중, 일부를 어머니에게 송금했죠?”

“…….”

“집에 쏟아부어야 하는 돈이 얼마인가요. 말해 봐요.”

숨기고 싶었던 사실을 쿡 찔러 오는 바람에 사샤는 아무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었다는 것이 무서웠고, 스스로도 양심의 가책을 느낀 일을 숨겼다는 것이 무척 부끄러웠다.

“잘못했어요…….”

사샤는 흐느끼면서 카렐의 앞에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카렐의 차갑게 얼어붙은 표정을 마주하느니 시간을 돌려서라도 그런 짓은 하지 말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주신 돈을 몰래 다른 곳에 써서 죄송해요. 하지만 엄마가 돈이 없다고 병원 가기를 미루니까…… 그래서…… 저는 카렐이 옷도, 밥도 다 사 주셔서 돈이 별로 필요가 없어요. 요즘에는 학교에서 매달 받는 400불을 다 드리고 있는데 그걸로는 모자랐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카렐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에 손끝을 가져다댔다.

“마사지 오일은 왜 발랐죠?”

“네?”

사샤가 눈을 끔뻑거렸다. 맥락에 어울리지 않는 화제가 튀어나와 당황한 얼굴이었다.

자신이 혹시 또 카렐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봐 걱정하면서도 사샤는 솔직하게 말했다.

“카렐이 좋은 냄새가 나서요. 따라 하고 싶었어요.”

카렐은 한숨을 쉬면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꺾고 잠시 천장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처음 보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리 와요.”

카렐이 그렇게 말하며 사샤에게 손을 뻗었다. 사샤는 영문을 모른 채 카렐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가 가볍게 사샤를 끌어당겨 옆에 앉히고는 작게 토닥거려 주었다.

“미안해요. 오해했습니다.”

“어떤 오해요?”

카렐의 추궁과 조각난 정보들의 연결점을 아직 찾지 못한 사샤가 되물었다. 카렐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나의 업보죠. 나는 과거가 그다지 깨끗하지 않은데, 작정하고 내게 달려든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한 행동이 그것과 수법이 비슷했어요. 어딘가 어설펐던 이유는 당신이 어리기 때문인 줄 알았죠.”

“아…….”

사샤는 그날 차가웠던 카렐의 모습과 자신의 키스에 그가 보였던 반응, 그리고 이 엄청난 오해를 안고도 자신에게 뭐든지 주겠다며 관대하게 말한 카렐의 말을 떠올렸다.

“괜찮아요. 오해한 거는 저도 용서해 드릴게요. 솔직하게 말해 주셨으니까요.”

사샤의 말에 카렐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좋아서 사샤는 카렐에게 기대어 부르르 떨었다. 저도 모르게 전신이 떨려왔다.

사샤가 왜 떠는지 몰랐던 카렐은 비교적 옷을 얇게 입은 사샤가 추위를 느꼈다고 생각하고는 아이를 좀 더 깊게 감싸 안아주었다. 안도감이 찾아오자 사샤는 온몸에서 진이 빠진 듯한 노곤함을 느꼈다.

“큰 부상이 있었다면서요.”

카렐이 물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보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사샤는 그저 신기해하면서 대답했다.

“아셨어요? 그런데 별거 아니에요. 다들 겪는 거예요……. 저도 금방 나을 거예요.”

“어디가 아픈 거죠?”

카렐은 사샤의 작은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열을 재는 것 같았다. 그 온기가 좋아서 사샤는 불쑥 어려운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키스를 한 건 죄송해요.”

말을 꺼내 놓고 사샤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이건 자기가 하려던 말이 아니었다. 마음속의 작은 사샤가 장난질을 친 게 분명했다. 오해를 벗고 자신감을 회복한 그 애가 어느새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사샤는 당황하면서 얼른 수습하려 했다.

“저는 그게, 궁금해서……. 느낌이 궁금해서 그랬어요. 그런데 마침 카렐이 자고 있어서 저도 모르게 해 버렸어요. 죄송해요. 허락을 구했어야 하는데…….”

사샤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숨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마저 들키면 지금 그가 보여주는 다정함도 사라질지 모른다.

이마 위에 얹어진 손의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아서 사샤는 억지로 태연한 척했다.

“허락을 구해야 했다고? 그러면 내가 응해 줄 거라고 생각했나요?”

카렐이 어려운 질문을 했다.

잠시 후 천천히 그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사샤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다시 ‘죄송하다’고 중얼거렸다. 그건 사샤가 정중히 허락을 구했어도 당연히 거절했을 거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것도 나름 충격적이었다.

“알겠어요. 사과는 받을게요.”

“…….”

“사샤, 잘 들으세요. 당신은 미성년자라 그런 일을 당신 의지로 벌였다고 해도 죄를 추궁당하는 건 내 쪽이 됩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도요? 제가 그렇게 증언할 거예요.”

“그러니까 당신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조종한 것이 내가 아닌가, 하고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되는 거죠.”

“제가 큰 실례를 했어요…….”

그건 정말 몰랐던 사실이었다. 동시에 사샤의 마음속에는 더 큰 절망이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미성숙’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었다. 성숙한 사람이 취향이라는 카렐의 기준에 완전히 미달인 셈이다.

“그래서 날 이용한 대가로 키스에 대해서는 조금 감을 잡았나요?”

사샤가 울적한 것을 눈치챘는지 카렐이 조금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에 그와 편히 말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샤는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도 이렇게 예전처럼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건 다 카렐이 관대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샤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카렐이 한숨지었다.

“이런. 내 입술이 희생당했는데 모르겠다고요?”

“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의 덤덤한 유머에 웃음이 터진 사샤는 작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코가 빨간 채로.

사샤는 고민했다.

이왕 잘 모르겠다고 말한 김에 한 번 더 알려 달라고 조를까? 그런 대담한 생각도 했다. 어차피 그는 50번, 100번을 해 봤을지도 모르니 자신에게 적선하듯 백한 번째 정도를 주어도 인생에 큰 오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샤는 카렐의 녹색 눈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점이 박힌 그 눈을.

그리고 손끝으로 만져 보았던 가지런한 눈썹과 탁한 색의 금발도 열렬하게 응시했다.

카렐은 어느새 사샤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고 있었다. 사샤는 관대하고, 여유롭고, 손은 따뜻하고, 자신의 실수를 농담으로 넘겨주려는 카렐이 너무너무 좋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또한 사샤는 이 방에 들어왔던 낯선 남자가 카렐에게 ‘자기’라고 불렀던 것을 떠올렸다. 비록 카렐은 술에 취해 있어 그때 일어난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만약 카렐이 게이를 지극히 혐오한다면 그런 남자를 친구로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사샤는 가끔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를 상대로 이상한 꿈을 꾸곤 한다. 기분이 무척 야릇한……. 참을 수 없을 만큼 온몸이 간지럽고 달아오르는 꿈.

한때는 그런 자기 자신이 싫어 미칠 것 같았지만, 만약 그 커다란 손을 가진 상대역이 카렐이라면 스스로를 싫은 모습인 채로 내버려 두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 사샤는 저도 모르게 준비되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카렐……. 게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카렐은 사샤의 질문이 난해하다고 생각했는지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사샤는 자기도 그 턱을 만져 보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이어서 말했다.

“제 고향에서는 친구들이 게이를 보면 죽여 버릴 거라고 했어요. 돌팔매질도 하고 나무막대로 때려죽일 거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건 너무한 것 같아요.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 뇌에 곰팡이가 펴서 이상해질 수도 있지만, 그건 나중에 약을 먹고 고치면 되고…….”

“…….”

“저기…… 카렐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어떨 것 같으세요?”

사샤는 그게 바로 자기라고는 이실직고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렐은 사샤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게이에게는 돌팔매질을 해야 한다거나 나무막대로 때려죽일 거라는 말이 튀어나온 이유를 알기 위해.

카렐은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음……. 내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죠.”

“남자도 있어요?”

“네.”

카렐이 사샤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사샤 역시 카렐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사샤는 카렐의 얼굴에서 자신이 예상했던 혐오감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사실 사샤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게이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렐은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대중적으로 허락된 취미라고는 중독자처럼 술을 마시거나 티브이로 축구 중계를 보며 도박을 하는 것밖에 없는 러시아의 작은 시골 마을, 그곳에서 사샤의 재능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특히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데다 마초적인 부분을 대물림 받은 또래의 소년들은 자기들과는 다른 종족처럼 곱상하게 생긴 가냘픈 몸매의 사샤를 깔보고, 게이라고 손가락질하기 일쑤였다. 몸에 달라붙는 레오타드를 입고 매일 10㎞가 넘는 근교 도시의 발레 학원에 다니는 사샤에게 침을 뱉고 맥주병을 던졌다.

‘그래도 요즘에는 분위기가 바뀌었지. 좋은 세상이야.’

사샤가 발레를 배운다는 것을 알게 된 동네 주류점 주인 미하일 씨는 그렇게 말했다. 미하일은 어릴 때 발레 학원에 다녀보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말한 것만으로 두드려 맞고 군에 입대한 사람이다. 번듯한 주류점을 가지게 됐지만 여전히 발레에 미련을 갖는 그를 보면서 사샤는 자신은 그나마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은 세상’이라는 말에는 끝내 납득할 수 없었다. 외톨이 사샤에게 쏟아지는 따돌림이 지독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시골 마을에, 어린 나이에 숙명처럼 재능을 만난다는 것,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만큼 발레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또래는 없었다.

처음에는 외로워 울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 사샤는 그들을 무시하려 했다. 남자아이는 토슈즈를 신지 않는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말이다. 발레는 그저 새침하고 도도한 척하는 춤이 아니라 복서만큼 혹독한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별로 이해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부정하는 사람 중에 어머니가 있다는 것이 사샤의 안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그녀는 사샤의 지지자이면서도 ‘사샤를 위해’ 발레를 그만두라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클래스의 친구들과 선생님이 사샤를 아무리 칭찬해도, 가장 인정을 갈구하는 한 사람이 재능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도 사샤는 자신감을 모조리 잃곤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변화한 것은 뉴욕에 와서부터였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땅에 온 사샤는 타이즈를 입은 소년이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에는 저 말고도 발레를 배우는 남자아이들이 가득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인 기분이었다.

그중에는 동네 친구들이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발레를 하면서 진짜 게이였던 마누엘 같은 아이도 있긴 했지만…….

마누엘이 자신에게 저질렀던 일 때문에 억울함이 남은 사샤는 여전히 게이들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저는 게이가 아닐 거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카렐을 좋아하는 마음이 마구 충돌했다.

“남자가 좋다고 하면 기분이 어떠세요?”

사샤는 카렐의 기준이 알고 싶었다. 두근두근하면서 답을 기다리자 그가 이번에는 뜸들이지 않고 대답했다.

“질문에 답을 하자면, 좋을 때도 있고 성가실 때도 있었지요.”

“싫을 때는…… 언제예요?”

사샤가 마른침까지 삼키며 물은 질문에 카렐은 그의 허리를 가볍게 들었다 놓으며 고쳐 앉게 했다. 사샤는 제가 팔꿈치로 카렐의 허벅지를 꾹 누르고 있었던 것을 깨닫고는 죄송하다고 말했다.

“싫지는 않아요. 애정에 보답해 줄 수 없으니 성가실 뿐이죠.”

“…….”

“그리고 그들이 날 좋아하건 말건, 그건 사람을 판단하는 조건이 되지 않아요. 내가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내가 좋아하는지, 그것뿐입니다.”

“아…….”

카렐의 말이 맞았다. 사샤는 절로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남자가 좋아하면 어떨 것 같으냐는 질문으로는 힌트를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에게는 ‘내가 카렐을 좋아해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샤는 간절하게 묻고 싶었다.

클레멘츠 씨, 저는 어떠세요.

내가 카렐의 타입에 맞게 성숙해지면 조금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리고…….”

카렐은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사샤의 시선을 피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게이는 뇌에 곰팡이가 펴서 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잘 몰라요. 실제로 본 적은 없거든요.”

“뭐를요. 곰팡이를요?”

“아니요. 게이를요…….”

사샤는 제 편견 속의 게이들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털이 난 다리 위로 치마를 두르고 립스틱을 바른 광대 같은 모습을 공포스럽게 설명하자 카렐은 그게 엉뚱하게 들렸는지 쿡쿡 웃기만 했다.

“어린 시절에는 그런 걸 구분하는 게 고민스러울 수 있어요. 나도 그 시기를 거쳤으니까요…….”

“…….”

“하지만 하나만 기억하세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남녀가 연애를 하듯이, 서로 끌린다면 남자와 남자도 연애 상대가 될 수 있어요.”

그 말에 사샤는 작은 희망을 가졌다.

그는 ‘사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그걸로 마치 사랑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사샤는 기꺼이 그의 이상형에 가까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 돈을 벌어 저 자신의 재정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 되면, 그러면 관대한 카렐이 자신을 대등하게 봐 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렐…….”

사샤는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삼켰다.

방문을 열고 뛰쳐나온 제 마음 속의 작은 사샤가 대신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하도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느라 심장이 들썩였다. 그 애는 카렐이 좋다고, 그를 당장 가지고 싶다고 사방에 외치고 있었다. 작은 사샤는 저보다도 욕망에 더욱 솔직한 것 같았다. 사샤는 제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이런 제어 안 되고 엉망진창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건 카렐이 좋아하는 성숙한 모습이 아니니까.

카렐은 사샤가 저를 부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잠시 기다리다가 사샤가 통 말이 없자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사샤는 그를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아이를 양육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군요……. 하지만 책임을 다해야겠죠.”

그렇게 말한 카렐은 사샤의 머리를 한 번 꾹 눌러 쓰다듬고는 방으로 향했다. 재킷을 벗으며 뒤돌아선 카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사샤는 느리게 깨달았다. 그가 ‘양육’한다고 말한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애 취급을 받으니 서러웠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동시에 구제불능의 사고뭉치에, 영어도 서툴고, 밥을 많이 먹고, 하필 발레를 하는 바람에 돈이 많이 드는 저에게 책임을 다하겠다고 말해 주는 자신의 후원자가 끔찍하게 좋았다. 좋아한다는 마음을 한 번 깨달으니 감정은 수시로 흘러넘쳤다.

사샤는 카렐을 향해 몰래 속삭였다.

카렐. 좋아해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확실해요. 저는 멍청하지만 이 정도는 알아요.

어른이 되면 고백할 테니까 그때까지 사라지지 마세요.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으로 지낼 테니 제발 여길 떠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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