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 발스 2권-1. 굿나잇 키스를 해 주세요 (4/30)

  1. 굿나잇 키스를 해 주세요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사샤가 느낀 것은 불쾌감이었다. 고막을 찢으며 귀로 파고들 듯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는 핸드폰의 벨소리, 아래에서 느껴지는 원인 모를 끈적끈적함, 어젯밤의 과식과 더불어 스트레칭도 하지 않고 자는 바람에 무겁고 부은 듯한 몸…….

일단 사샤는 손을 뻗어 머리맡에서 굴러다니고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린 채로 화면을 보았다. 최초에 알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발신자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건 전화였다.

“여보세요?”

사샤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화를 건 것은 게오르크였는데, 덕분에 불쾌감이 한층 더해졌다. 사샤는 여전히 잠이 깨지 않은 머리로 게오르크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중 ‘클레멘츠 씨의 사무실’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와 박혔다. 사샤는 팔꿈치로 소파 바닥을 받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네……? 뭐라고요? 다시 한 번…….”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일전에 왔던 사무실로 와요. 클레멘츠 씨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와아…….”

―와……라고요?

“오늘은 클레멘츠 씨가 별로 안 바쁘신가 봐요? 시간이 딱 저녁 먹기 좋은 시간인데, 혹시 저희가 같이 저녁을 먹게 되나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그분은 항상 바쁘시죠.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주시는 걸 고맙게 생각해요. 마음의 준비 하고 와요.

게오르크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전화가 뚝 끊기고도 사샤는 한동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니? 사샤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도 후원자의 공간에 다시 한 번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점차 흥분하기 시작했다.

카렐을 떠올리니 잠이 걷히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자리에서 어기적거리며 일어난 사샤는 아니나 다를까, 바지가 불편한 것을 느끼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스포츠백에서 전날 입었던 옷들을 꺼내서 함께 들고 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샤는 온몸에 물을 끼얹어 깨끗하게 씻으면서 부끄러운 몽정의 흔적을 지웠다. 그런 다음에는 머리카락에 샴푸 거품을 낸 채로 바닥에 타이즈와 레오타드, 속옷을 펼쳐 놓고 손세탁을 했다. 깨끗이 빤 세탁물들을 넓고 새하얀 세면대에 나란히 걸어 놓고는 양치를 한 후 머리도 탈탈 말렸다.

세면대에 이렇게 세탁물을 널어놓으면 방 정리를 해 주는 누군가가 들어와서 자꾸만 마른 옷을 예쁘게 개어 놓고 간다. 신경 쓰였지만 자신이 없을 때에만 들어오기 때문에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샤는 일단 세면대에 작은 메모를 남겼다.

[빨레는 건덜지 하지 마세요.

아침은 케일사가쥬스랑 오믈렛이 좋습니다. 당근은 필요엇어요.]

그리고 아침부터 세탁을 하느라 바빴던 사샤는 거의 뛰다시피 하여 학교에 갔다. 호텔에서 링컨 센터 안의 발레 스쿨까지, 오늘은 최단 시간인 7분 42초의 신기록을 세웠다. 오후에 예정된 후원자와의 약속에다가 신기록 갱신까지, 하루의 시작이 좋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웜업이 된 상태로 땀을 흘리며 연습실에 들어간 사샤는 바딤으로부터 꽤 흥분되는 공지를 들었다. 바로 돌아오는 봄 시즌에 맞추어 발레단에서 여러 가지 프로모션을 준비 중인데, 그중 발레 스쿨 학생들에게도 임무가 주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여섯 명씩 짝을 지어서 총 다섯 팀이 테스트를 받을 거다. 발레, 탭댄스, 컨템, 여러 가지 안무가 준비되어 있고, 각자 잘 맞는 춤을 출 수 있도록 팀은 내가 짜 주지.”

바딤이 그렇게 말하며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 팀대로 줄을 세우기 시작했다.

사샤는 얼른 숫자를 세어 봤다. 여섯 명씩 총 다섯 팀이면 전체 서른 명뿐이었다. 보통 한 클래스를 같이 듣게 되는 학생만 해도 60여 명이다. 바딤의 말대로라면 전부가 프로모션에 참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사샤! 그리고…… 옥사나.”

자기 이름이 불려 퍼뜩 고개를 든 사샤는 마침 옥사나와 눈이 마주쳤다. 최근에 저 아이를 의식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사샤는 바딤이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너희가 연습한 안무를 발레단에서 직접 와서 평가하게 될 거다.”

평가라는 말에 연습실이 어수선해졌다. 생각보다 큰 이벤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들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종 열두 명 안에 뽑힌 녀석들은 무대는 아니지만 뉴욕 시내 곳곳의 준비된 장소…… 백화점이나 호텔의 로비, 아이스링크, 마켓, 그리고 이 링컨 센터 광장 같은 곳에서 춤을 출 거다. 기획 영상을 조금 봤는데, 꽤 괜찮더군. 멋있어. 나쁘지 않아. 약간의 급여도 지급된다고 하니까 용돈이 급한 놈들은 꼭 통과하도록 해라. 알겠지?”

사샤는 돈도 벌 수 있다는 말에 크게 들떴다. 이건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후 바딤이 사샤의 팀에 배정해 준 안무는 탭댄스였다. 자신은 당연히 발레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샤의 얼굴에 어린 실망을 읽었는지 바딤이 가볍게 타박했다.

“네놈이 설마 안무를 골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입단하게 되면 그런 배부른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어! 너와 맞지 않는 옷이라도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어야 프로 무용수가 되는 거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주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연습실에서 정론을 말할 때의 바딤은 엄격해서 도무지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사샤의 대답을 들은 바딤이 지나가듯 한 마디를 더 붙였다.

“레전드 사샤 세드린도 탭을 아주 능숙하게 췄다지. 너도 그 정도는 해야지.”

그의 말을 들은 사샤는 말없이 주먹만 꼭 쥐었다.

이전부터 느꼈지만 바딤은 확실히 저에게 레전드의 뒤를 따르라고 유도하고 있었다. 그만큼 기대치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 그나마 기뻐해야 하는 것일까. 사샤는 쓸쓸한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그날은 바 워크가 끝난 후 센터 수업 대신 각자 흩어져 새로 받은 작품 안무를 숙지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샤와 옥사나를 비롯한 같은 팀 아이들은 탭댄스 슈즈도 지급받았다. 학교 수업 중에 컨템포러리와 캐릭터 댄스, 탭댄스 따위를 배우는 과목도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어설프게나마 탭도 출 줄 아는 편이었다.

“나는 발레 하고 싶어.”

슈즈에 발을 끼워 넣은 사샤가 깡총 까치발로 서며 를르베(relevé) 자세를 취했다. 부드러운 발레 슈즈가 아니라서 신이 휘어지는 데는 한계가 있었지만 발등 힘이 워낙 세서 탭 슈즈를 신고도 제법 고가 나오는 편이었다.

그리고 사샤의 중얼거림을 들은 옥사나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슈즈를 신은 채로 바닥을 차며 탭에 익숙해지기 위해 다리를 털면서 말했다.

「그래도 자부심을 가져. 탭을 춤으로 출 만큼 숙지한 사람이 우리밖에 없다는 거야.」

옥사나가 사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러시아어로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바딤이 차출한 탭댄스 팀은 가장 발레를 잘하는 아이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잘하는 사람한테 잘하는 걸 시켜야 하는 거 아냐?」

「그런 건 통과하고 나서 생각해.」

옥사나의 말이 어찌나 쿨하게 들리는지 사샤는 조금 감탄하면서 그녀의 말을 따라 조그맣게 되뇌었다. ‘그런 건 통과하고 나서 생각해. 하고 나서 생각해…….’

사샤는 옥사나에게 이런 점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조금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지면 말문이 막히곤 했다. 옥사나처럼 말을 잘하는 친구의 화법을 기억해 놨다가 게오르크나 율리안처럼 얄밉게 구는 사람에게 받아쳐 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은연중에 나타났는지 오전 클래스가 끝난 후 사샤는 저도 모르게 옥사나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항상 친구들과 몰려다니던 옥사나가 뒤를 홱 돌아보더니 눈이 마주친 순간 덜컥 멈춰 선 사샤에게 손짓했다.

“왜?”

제가 따라가고 있었으면서도 사샤는 새침하게 물었다.

옥사나는 그대로 복도 바깥으로 나가더니 문 가까이의 나무 그늘 아래로 사샤를 이끌었다. 그러곤 주변을 성의 없이 둘러보고는 사샤에게 대뜸 물었다.

「넌…… 네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어? 남자하고 키스하고 싶었어?」

갑작스러운 화제에 사샤는 창백해졌다.

「그건 소문이야. 뜬소문. 거짓말이야. 난 게이 아니야.」

사샤는 빠르게 말하며 다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나마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어 혹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사실만이 다행이었다.

「그래? 그럼 여자 친구는 사귀어 봤어?」

「어. 있어…… 있었어.」

사샤는 어쭙잖은 거짓말을 주워섬겼다. 왜인지 경험 없는 어린애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미국에 오기 전에?」

「응…….」

「키스도 해 봤어?」

대담한 말에 사샤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옥사나가 턱에 주먹을 괴고 ‘흠……’ 하며 고민스러운 소리를 냈다.

「사실 난 지금 첫 키스 상대를 고르고 있거든.」

「뭐?」

「만약에 한다면 영화배우처럼 잘생기고 멋진 남자랑 하겠다고 결심했어. 하지만 사랑은 눈을 멀게 한대. 내가 어쩌다 정말 못생긴 남자한테 반해 버리고 첫 키스도 그 사람한테 줘 버리면 어떻게 해. 헤어지면 분명히 후회할 거야. 먼 훗날을 생각해 봤을 때 내가 손해잖아? 그래서 사랑에 빠지지 않은 지극히 객관적인 상태로 제일 잘생긴 남자를 골라서 첫 키스를 해치워 버리기로 했어.」

「…….」

「그러면 할머니가 될 때까지 후회가 없을 것 같아. 안 그래?」

사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이 정도로 첫 키스에 의미 부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다 이렇게 똑똑한가 생각하면서 사샤는 자신이 바라는 첫 키스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하지만 별로 떠오르는 그림이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제 이마에 뜨겁게 불같은 굿나잇 키스를 해 주던 카렐이 잠시 스치듯 떠올랐을 뿐이다.

「그래서 내 말은……. 내 첫 키스 상대로 너 정도면 후회가 없을 것 같아.」

「나?」

옥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이 다시금 사샤의 외모를 찬찬히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옥사나가 기습할까 봐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가를 가린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그래. 사실 나도 안 됐어. 여기서 갑자기 하자는 건 아냐.」

사샤는 그 말에 안도해 버렸다. 일단 오늘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옥사나라면 저번처럼 복도를 황소처럼 가로질러 와 자신에게 키스를 하고 텀블링을 해서 사라질 수도 있었다.

「너도 첫 키스라니, 조금 ‘우려’된다. 둘 다 잘 모르면 별로일 거 아니야.」

옥사나는 어휘력이 좋았다. 사샤는 저도 알고는 있지만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단어를 입 안에서 곱씹었다. 그러다가 여전히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옥사나에게 방금 떠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너 체조했지?」

「어릴 때 하긴 했는데……. 갑자기 그 얘긴 왜 해?」

또다시 자신이 맥락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나 보다. 모자란 대화 기술을 지적당했다는 생각에 사샤는 멋쩍어져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시점에 대해서는 내가 생각을 좀 해 볼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옥사나는 손을 흔들고 다시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사샤는 방금 전의 대화를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자신은 허락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저런 결론이 났는지 궁금했다.

오늘 수업이 끝나고 나면 어른스럽고 경험 많은 후원자에게 조언을 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사샤도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 * *

그날 하루는 무척 느리게 갔다. 아침부터 카렐의 회사로 뛰어가고 싶었던 사샤는 거의 20분에 한 번씩 시계를 보았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학교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링컨 센터에서 지하철을 타는 대신 그대로 뛰어서 길을 가로질렀다.

탄력 있는 다리가 가볍게 바닥을 딛고 튀어 올랐다. 걸어가면 조금 북적이기는 해도 타임스 스퀘어 인근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으니 지하철을 기다리는 것보다 이편이 나았다.

그러나 사샤가 짐작하지 못했던 한 가지 문제는, 빌딩 앞에 도착했을 때 전신이 촉촉이 땀에 젖어 있었다는 점이다.

“저……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카렐 클레멘츠 씨랑 약속을 했는데.”

“사샤 세드린?”

일전에 보았던 검정색 슈트 차림의 보안 요원이 사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런데 여기 1층에도 화장실이 있어요?”

“있습니다. 왜요?”

“땀이 나서 조금 씻고 가려고요…….”

보안 요원은 그 말에 약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일단 손가락으로 복도 끝을 가리켰다. 예전에도 한 번 탄 적이 있는 엘리베이터 옆쪽에 화장실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다.

주저 없이 그곳으로 향한 사샤는 세면대에 물을 가득 틀고 작은 머리통을 집어넣었다. 뒷머리부터 차갑게 내리꽂히는 물줄기가 단번에 목덜미와 정수리, 숙인 얼굴 앞으로 흘러내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세면대 주변을 더듬어 손비누를 찾은 사샤는 거품을 가득 내서 그대로 머리에 치덕치덕 묻혔다. 손을 목덜미 뒤로 넣어 등줄기에 고인 땀도 씻었다. 머리를 다 감고 나서는 전신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춥고 멍했지만, 그래도 땀투성이로 카렐의 앞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이어서 사샤는 약한 뇌진탕이 올 정도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화장실 안쪽 칸을 뒤져 휴지를 돌돌 풀어내어 머리의 물기를 짰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채로 머리를 가볍게 털었더니 머리가 가닥가닥 갈라지기는 했어도 아주 볼품없지는 않았다. 등줄기를 타고 물이 흘러내려 등이 조금 젖은 것이 신경 쓰였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다.

“저기…… 아저씨.”

“네.”

보안 요원의 얼굴은 마치 ‘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궁금하지만 묻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약한 희망에 기대어 물었다.

“혹시 빗 있으세요?”

보안 요원은 귓가에서 들리는 무전에 귀를 기울이며 일단 사샤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묻는 듯한 사샤의 빤한 눈길을 외면하면서 캔디 숍의 문을 열었다.

“혹시 빗 가지고 계십니까?”

“있을 텐데, 가만 있자…….”

결국 사샤는 사탕 장인에게서 빗을 하나 빌릴 수 있었다. 그러고는 캔디 숍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를 싹싹 빗어 넘겼다. 마치 두 개로 갈라진 밤껍질을 쓴 것처럼 머리카락이 가지런하게 오 대 오로 갈라졌다.

“감사해요. 그럼 전 바빠서 이만 클레멘츠 씨를 만나러 가볼게요.”

의젓하게 말하면서 사샤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보안 요원은 ‘지금 올라갑니다’ 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그리고 같은 시각, 카렐은 사샤가 1층에서 벌인 일을 듣고는 그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보안 요원의 무전을 통해 게오르크가 전해 들은 이야기를 카렐에게 보고한 것이었다.

잠깐의 침묵을 깨고 게오르크가 이어 말했다.

“학교에서 아주 빨리 나왔나 보군요. 약속 시간을 지켜서 온 건 칭찬할 만한데, 그래서 찬물로 머리를 감을 시간이 있었나 봅니다.”

“…….”

“너무 혼내지는 마세요. 제 후원자를 본다고 한달음에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타이밍 좋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게오르크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크레페와 우유 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나갔다. 오늘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날 사샤를 생각해서 손수 사 온 디저트였다.

그리고 비서가 완전히 나갈 때까지도 카렐은 말없이 그저 제 턱을 매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 * *

게오르크가 막 응접실로 나왔을 때 사샤 역시 때맞춰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흠…….”

게오르크는 저도 모르게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1층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을 머리에 끼얹어 가며 신경 쓴 것은 칭찬할 만했으나, 객관적으로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동그란 두상 위로 소가 핥은 것처럼 젖어서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 검정색 싸구려 점퍼 안으로 보이는 새파란 색의 저지, 그리고 무릎이 조금 튀어나온 조거 팬츠와 밑창이 얇은 낡은 캔버스운동화까지…….

만약 사샤가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외견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면 백이면 백, 땀에 젖은 머리카락보다도 다른 것을 지적했을 것이다.

다만 학교부터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열기가 식지 않아 분홍빛으로 상기된 사샤의 뺨을 보니 지적할 생각조차 사라졌다.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고, 게오르크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게오르크……. 저녁은 드셨고요?”

추레한 복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은 늘씬한 사슴 같은 몸이 쭈뼛거리며 게오르크에게 다가왔다.

“클레멘츠 씨도 저녁 드셨어요?”

저는 태연하게 안부 인사를 하고 있다고 믿을 테지만,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보이는 물음이었다. 게오르크는 일단 문고리를 닫아걸었다. 그러자 사샤의 흘끔대는 시선이 게오르크의 손에 가 닿았다. 카렐의 집무실로 통하는 문을 왜 닫아 버리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이리 와요.”

“저는 클레멘츠 씨에게만 볼일이 있는데…….”

“알고 있습니다. 팁을 하나 알려주는 거니까 그냥 들어요.”

팁이라는 소리에 사샤는 그가 제게 약간의 용돈을 준다는 것인가 오해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사샤의 마른 견갑골에 손을 얹은 채 그를 집무실의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려갔다.

그러고는 살짝 허리를 숙여 사샤의 귓가에 나지막하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변명하지도 말고요.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솔직하게 말하면 너그러워지는 분입니다. 그러니 거짓말로 매를 벌지 말고 사실대로 말해요.”

“네?”

말이 빨라지자 게오르크의 영어에는 악센트가 섞였다. 하지만 사샤가 어리둥절해진 건 그 악센트 섞인 영어를 알아듣기 어려워서만은 아니었다.

사샤가 어리숙한 표정으로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듯 바라보자 게오르크는 마치 좀처럼 궁둥이를 들지 않는 게으른 말을 때리듯 사샤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갑자기 지나치게 거리감이 가까워진 스킨십 때문에 사샤는 화들짝 놀라 그를 항의하듯 쳐다보았다. 그러나 사샤가 입을 여는 것보다 게오르크가 문을 여는 게 더 빨랐다.

“들어가요.”

태연한 표정으로 문을 여는 게오르크를 노려보면서 사샤는 입을 꾹 다물고 문 가까이로 향했다.

그리고 문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어두운 색의 카펫이 방 전체에 깔려 있는 카렐의 집무실은 여전히 고즈넉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손이 많이 가는 방식으로 까다롭게 직조한 것이 분명한 태피스트리나 넝쿨 장식이 섬세한 고가구들은 만들어진 지 100년도 넘었을 게 분명했다. 언제나 위압감과 동시에 낯선 기분을 가져다주는 장소였다.

그리고 그 방 가운데 카렐이 앉아 있었다. 예전과 같은 위치에.

눈이 마주치면 그가 허락한 대로 ‘카렐’이라고 한 번 불러 보려 했는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샤는 입을 다문 채로 그의 앞까지 다가갔다.

사샤에게 줄 쿠키를 조각내고 있던 이전과는 다르게 카렐은 다리를 꼰 채로 일인용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가 손 안에서 굴리고 있는 건 황금색으로 빛나는 작은 구체였다.

저게 뭘까. 먹는 걸까?

사샤는 순간적으로 호기심에 홀려 현재 상황을 잊고 말았다. 카렐은 그런 사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턱짓으로 맞은편을 가리켰다. 앉으라는 소리였다.

자리에 앉고 나서 사샤는 어깨에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벗어 조심스레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왠지 멋쩍은 기분에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항상 그를 만나던 호텔 룸이 아니라서 그런지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사샤는 한참 후에야 자신이 카렐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클레멘츠 씨…….”

“사샤 세드린.”

사샤가 입을 열자마자 동시에 카렐도 입을 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샤는 그 순간 하려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의도적으로 제 말을 끊은 것 같다면 착각일까? 인간관계에는 통 요령이 없지만 사람들의 분위기만큼은 예민하게 감지해 내곤 하는 사샤는 카렐을 보며 숨죽였다.

카렐은 곧바로 말을 잇는 대신 손에 쥐고 있던 황금색의 구체를 사이드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작은 결이 있는 묵직한 구체 두 개가 은색 접시에 담겨 도르르 굴러다녔다. 그리고 사샤의 시선이 그 구체들을 따라 이리저리 굴러갈 때였다. 주의를 집중시키듯 카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한 발레 댄서가 되고 싶습니까?”

“네…….”

다시 인터뷰를 받는 기분에 사샤는 긴장하면서 허리를 세웠다.

“성실성, 대인관계, 향상심, 인격, 기술……. 그리고 재능과 신체 조건은 기본.”

“…….”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기에 댄서로서 이 중에 얼마나 갖췄다고 생각하죠?”

사샤는 그 말에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10점 만점으로요?”

눈치 보듯 물은 말에 카렐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샤의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그가 관자놀이를 가볍게 짚은 것만으로도 사샤는 자신이 귀찮은 먼지가 되었다고 느꼈다.

일전에 이곳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곁에 앉아 우는 자신을 다정하게 달래 주기도 했는데……. 무슨 이유로 그가 엄격한 선생님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성실성은…… 오 점. 왜냐면 가끔은 하기 싫은 마음이 드니까요. 대인관계는…… 일, 일 점이에요. 향상심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인격은…… 오 점, 아니…… 사 점.”

사샤의 목소리가 갈수록 작아졌다. 5점 위로는 평균 이상의 점수인 것 같아서 그 이상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겸손하게 점수를 주었는데도 카렐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이 스스로 준 점수에 따르면 자기 실력이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군요?”

저번에는 사샤라고 불러 주었는데 왜 다시 ‘당신’으로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샤는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눈가가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고이려는 신호였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누구보다 기회가 간절한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왜 조건이 갖추어진 후에 오히려 게을러졌죠?”

“……죄송해요.”

사샤는 고개를 수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

“사과할 사람은 따로 있죠. 어제 말도 없이 개인 교사를 바람맞힌 이유를 설명해 보세요.”

생각지도 못한 이유에 사샤의 동공이 흔들렸다.

“개인 교사…….”

“그래요. 케이티 브라운 씨가 어제저녁 내내 호텔에서 기다리다가 당신이 돌아오질 않아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미 떨어졌던 사샤의 심장이 다시 저 먼 곳까지 쿵 떨어졌다. 짐작조차 하지 못한 실수를 깨닫게 되자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프로 발레 댄서의 개인 교습도 마다할 정도라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어디 한번 설명해 보세요.”

“저는……. 저는.”

사샤는 벌린 입을 뻐끔거리며 무어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레빈과 율리안이 저녁을 사 준다고 해서 따라갔다……. 바보 같은 이유였다. 그보다 더 바보 같은 것은 카렐이 배려해 준 기회들을 가볍게 여기고 까맣게 잊은 것이고.

그러나 그냥 잊어버렸다는 말을 그가 납득해 줄 리가 없었다. 사샤는 멍청한 자기 자신이 싫어졌고, 또 너무나 후회스러운 기분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어제저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저녁 따위는 마다하고 호텔로 돌아와 개인 교습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착실히 수업을 들었다고 후원자에게 메일도 보낼 수 있었겠지……. 만약 그랬다면 카렐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어, 어제는…… 친구를 만났어요.”

“그래요.”

“별로 좋아하는 친구도 아닌데, 저녁을 사 준다고 해서…….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잊어버렸어요.”

사샤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 나왔다. 거기에 물기가 섞여 있다는 걸 알면서도 카렐의 목소리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핸드폰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고?”

“평소에 연락하는 친구가 거의 없어서 잘 잊고 다녀요. 배터리가 빨리 떨어져서 충전을 안 할 때도 많고요. 몰랐어요. 일부러 무시한 게 아니에요. 저는…… 멍청하고 쓰레기 같아요. 브라운 씨한테 사과드리고 싶어요. 저한테 실망하셨을까 봐 무서워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어요. 정말 죄송해요.”

사샤는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자책했다. 브라운 씨는 진짜 프로 댄서였다. 발레단에다가 저에 대해 좋게 말해 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영향력 있는 어른과의 약속을 잊어버릴 만큼 멍청하고, 후원자의 기대를 저버린 주제에 울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성실성, 대인관계, 인격, 재능……. 그 어느 것에도 자신 있게 10점 만점을 주지 못하는 주제에.

그런 것 말고 평가 항목에 ‘발레를 잘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게 있다면 만점을 줄 수 있을 텐데.

사샤의 마음은 언제나 발레를 누구보다도 잘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괴로워지기도 했다. 클래스에서 월등한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어서 타인의 인정을 갈구했고, 그래서 바딤의 작은 지적에도 마음이 무너지곤 했다.

그런 사샤에게 스스로 점수를 매기라고 하는 행위는 아주 가혹한 짓이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카렐의 혼잣말 같은 소리에 사샤는 결국 흘러넘치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어어엉, 하고 크게 우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네……. 일부러, 그런 게 아닌, 읏, 으으……. 어엉.”

사샤는 이제 등을 새우처럼 수그리고 꺽꺽거리며 울고 있었다. 후원자가 준 기회는 절대로 가볍게 여긴 적 없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가 믿어 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났다.

“울지 말고, 우유라도 마셔요.”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는 우유를 마실 자격도 없었다.

“저는 굶어 마땅해요…….”

“마시고 진정하라는 뜻입니다.”

그 말에 사샤는 억지로 우유를 한 컵 다 흘려 넣었다. 갑자기 목구멍을 꽉 메운 액체에 식도가 뻐근해졌지만 명령이려니 생각하고 단숨에 비웠다.

카렐은 그런 사샤를 씁쓸한 눈으로 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알겠으니 브라운 씨에게는 직접 사과해요.”

“그럴게요. 그럴 거예요. 다시는 말도 없이 수업에 빠지지 않을게요. 학교 마치면 일찍 집에만 갈 거예요. 한심한 애들이랑 놀면서 시간 낭비는 하지 않을 거예요.”

사샤는 필사적으로 말하면서도 카렐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카렐의 표정이 여전히 굳어 있는 것을 직접 보게 된다면 또 울고 싶어질 것 같아서였다.

“크레페도 먹어요. 게오르크가 준비한 겁니다.”

사샤는 긴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로 크레페를 꾸역꾸역 먹었다. 숙인 얼굴 위로 통통한 뺨과 톡 튀어나온 입술이 크레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맛도 모르는데 억지로 먹는 티가 났다.

카렐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사샤의 손에서 크레페를 빼앗아 들었다.

“왜 그렇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우는지 모르겠군요.”

“…….”

사샤는 물티슈를 가지고 와 제 손가락을 닦아 주는 카렐의 얼굴을 젖은 눈길로 빤히 올려다보았다. 제 손을 크고 따뜻한 손으로 받친 뒤, 손가락에 엉겨 붙은 크림을 하나하나 문질러 닦아 주는 행동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저한테 실망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어요.”

사샤는 더욱 아리송한 기분에 빠졌다. 카렐의 화법은 교묘하고 틈이 많았다. 그러면 그런 것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조금 더 확실하게 말해 줬으면 싶었다. 자신이 싫어졌는지, 아닌지.

“……아주 조금……. 조금이라도.”

“한 번의 실수로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

“내가 당신에게 베풀기로 했던 것들을 당신 행실 때문에 무르는 일도 없을 겁니다.”

그 말은 당장 사샤가 안심하는 데에는 꽤 도움이 되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 씁쓸한 기분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도 ‘사샤 세드린’에 대한 그의 판단을 뒤흔들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소 본능적으로 통찰해 낸 진실이었다.

“핸드폰의 배터리는 자기 전에 꼭 충전해 놓는 버릇을 들여요.”

“그렇게 하는데, 집에 오기 전에 꺼져 버려요. 안 꺼지게 하려면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에 콘센트를 찾아서 붙어 있어야 하는데, 조금 귀찮아서……. 하지만 이제는 꼭 충전해서 다닐게요. 보, 보조 배터리 같은 걸 사야겠어요.”

“그래요…….”

카렐은 테이블 위의 유선전화를 든 채로 버튼을 하나 눌렀다. 다이얼이 원형으로 붙어 있는 희한한 디자인의 앤티크한 모델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게오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 애가 돌아가기 전에 핸드폰을 하나 준비해 줘. 최신 기종으로.”

“알겠습니다.”

게오르크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사샤는 훌쩍거리면서 ‘혹시?’ 하는 눈으로 카렐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샤의 손을 닦아 주었던 물티슈를 반듯하게 접어 휴지통에 던져 넣고 있었다. 금발인 카렐은 내리깐 속눈썹조차 빛을 눈부시게 반사하는 황금색이었다. 사샤는 그의 옆모습을 거의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핸드폰 이리 줘 봐요.”

티슈를 버리고 다시 사샤를 향해 돌아앉은 카렐이 말했다. 사샤는 액정에 얇은 실금이 거미줄처럼 가 있는 핸드폰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꽤 오래된 기종이네요.”

카렐의 손이 어찌나 큰지 그가 쥔 사샤의 핸드폰은 조그만 장난감 같았다. 액정을 꾹 눌러 배터리 잔량을 확인해 본 그는 사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한 듯했다.

“저는 쓴 지 2년 됐어요. 누군가한테 받은 거라 더 오래됐을 거예요.”

“새 핸드폰을 주면 이제 핸드폰이 꺼져서 연락을 못 받았다는 변명은 못 하겠죠.”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의 미소를 본 사샤는 급격히 밀려오는 안도감을 느꼈다.

전신의 긴장이 풀리는 느낌에 사샤는 방금 전까지 자신이 온몸에 불필요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꽉 다문 턱과 긴장한 날갯죽지가 쑤셨다. ‘흐음’ 작은 신음을 낸 사샤가 허리를 수그리자 카렐이 물었다.

“어디가 아픕니까?”

“근육통이에요. 항상 있는 거예요. 아……. 심각한 건 아니에요.”

아까 카렐이 저의 신체 능력에 점수를 매기라 했던 것이 생각나서 사샤는 황급히 덧붙였다. 댄서의 몸은 언젠가는 마모된다. 벌써부터 아픈 것을 티낼 필요는 없었다.

“어디가 아픈 거죠?”

“등…… 그리고 팔 아래가 조금……. 아!”

카렐이 짚은 곳의 통증이 정확해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자 카렐이 아예 제대로 뒤로 돌아보라며 손짓했다.

“마사지를 조금 해 줄까요?”

사샤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쓰는 직업이라 그런지, 내가 아는 무용수들은 항상 근육통에 시달리더군요.”

카렐이 자연스럽게 사샤를 뒤돌아 앉게 했다. 강제성이 없는 부드러운 손길로 가볍게 등을 밀려 사샤는 가죽 소파의 등받이에 엎드리듯 비스듬하게 기대었다.

“호텔 스파는 받아 봤나요?”

“아니요. 아직…….”

“무용수에게 필요한 마사지를 전문적으로 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근막 마사지 같은 건 꽤 쓸 만할 겁니다.”

사샤는 이제 카렐의 화가 완전히 풀린 건지 궁금해 그를 흘끔흘끔 보았다. 그러나 엄격할 때나 지금이나 말투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구분이 어려웠다. 만약 약간이나마 감정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고작 열여섯 살짜리가 가진 경험의 폭으로는 그 변화를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러 번 세탁해 색이 조금 바랜 푸른색 저지 위로 카렐의 손바닥이 닿았다. 그러고는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긴장을 풀어 주듯이 목 아래부터 등줄기를 따라 지그시 누르는 손바닥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사지라기보다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동작이었다.

“끅…….”

불현듯 사샤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아마도 울고 난 뒤 긴장이 풀렸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카렐이 손바닥을 눌러댈 때마다 ‘읏, 윽, 끕’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터져 나오며 등이 크게 흔들렸다. 부끄러워진 사샤는 잠깐 숨을 참으면서 딸꾹질을 멈추려고 노력해 봤지만 얼굴만 빠르게 붉어질 뿐, 딸꾹질은 진정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입을 막으려 하니 카렐이 등 뒤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눌러 흔들어 주었다.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겁니다. 자연스러운 거예요.”

“죄송해요.”

“왜 사과하죠?”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할 말을 잃었다. 굳이 그렇게 물어보니 대답이 곤궁했다.

“힘을 더 풀어 봐요.”

“하지만…….”

카렐의 손이 의식되어 힘을 풀기가 어려웠다. 옷으로 한 겹 막혀 있는데도 높은 체온이 등으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심장이 아주 빨리 뛰고 있어요.”

“학교에서부터 뛰어와서 그래요…….”

벌써 한 시간 전의 일인데도 사샤는 그렇게 변명했다. 그것 외에는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샤가 자꾸 카렐의 얼굴을 확인하려 고개를 뒤로 돌려대자 크고 뜨거운 손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한 손에 쥐고 등받이에 부드럽게 눌렀다. 두피와 관자놀이에 이어 목선이 뚜렷이 드러나는 긴 목까지 기분 좋은 압력으로 만져지는 사이 어느새 딸꾹질이 가라앉았다. 귓바퀴가 조금 빨개진, 작고 모양 좋은 귀를 엄지와 검지로 느리게 비비듯 눌러 줄 때는 눈이 감기기까지 했다. 배려 있는 손길이 목을 타고 내려와 가녀린 어깨와 날갯죽지에 닿았다.

“흐아…….”

비음 섞인 신음이 흘러 흠칫 놀란 사샤는 눈을 떴다. 시야 앞 가죽소파의 재질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여기가 아파요?”

“많이, 많이 아파요…….”

카렐의 손가락이 짚은 곳은 겨드랑이의 아래쪽이었다. 아까 카렐이 정확하게 짚어 낸 곳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기분 좋은 압박감만 느꼈는데, 지금 카렐이 누르고 있는 곳은 쿡 찔릴 때마다 숨이 막혔다. 급소를 찔린 듯 꼼짝할 수 없어졌다.

“아주 단단히 뭉쳤군요.”

“흐……. 아파요. 아파요.”

“제대로 풀어 주지 않으면 계속 뭉칠 거예요.”

절로 ‘살려 주세요’라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카렐의 손길은 가차 없었다. 등과 가까운 팔 아래 여린 구석의 깊은 근육이 아주 딱딱하게 뭉쳐 있는 것이 사샤에게도 느껴졌다. 제 몸에 그런 근육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사샤는 고통 속에서도 몸을 뒤틀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어떻게든 참으려고 애썼다. 통증에 집중하며 가만히 숨만 내쉬었다. 억지로 몸을 한계까지 늘이며 스트레칭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참을 만한 것 같기도 했다.

“으…….”

“한 번에 다 푸는 건 무리일 것 같군요.”

“이렇게, 읏, 하면…… 풀리긴 하나요?”

“그럼요.”

카렐의 말이 사실인지 처음에는 깊게 누르기만 해도 경련이 오듯 아팠던 것이 이제는 꾹 누르고 흔들듯 압박을 가해도 참을 만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통증이 있는 것은 사실이어서 사샤의 목덜미에 땀이 촉촉이 배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프다는 건 팔을 무리하게 쓰고 있다는 뜻입니다. 통증이 계속되면 등과 척추에도 부하가 걸리게 되죠. 팔 부상으로 은퇴했다는 무용수는 별로 본 적이 없지만…… 후유증은 한참 후에 나타날 겁니다.”

카렐의 말에 사샤는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아직 프로 무용수로 활동하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문제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무서워졌던 것이다.

“그래도 등 근육이 좋아요. 기립근 덕에 버티고 있는 것 같네요.”

“네…….”

카렐의 마사지는 등줄기를 따라 근육을 짚어 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짧은 마사지에 걸린 시간은 십여 분뿐으로, 손이 떨어지니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 사샤는 느리게 몸을 돌렸다. 방금 전까지 제 등 뒤에 가까이 밀착해 있었을 카렐은 벌써 멀어져 테이블 위에 놓인 냅킨을 집어 들고 있었다.

“……클레멘츠 씨는 지식이 많으신 것 같아요.”

카렐은 냅킨으로 자기 손을 닦았다. 크레페의 기름과 크림이 묻어 있던 사샤의 손을 닦아 줄 때처럼 꼼꼼한 손길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사지를 받으며 흘린 식은땀과 아까 머리를 감을 때 옷 안쪽으로 스며들어 축축해진 티셔츠의 감촉이 거슬렸다. 그가 저의 땀을 만졌다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그렇게 보입니까?”

카렐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네. 피지컬 센터에 계신 분들도 이렇게 자세하게 말해 주지는 않았어요.”

“……사람의 몸, 특히 무용수의 몸에 관심이 많아서.”

“…….”

“공부했지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사샤와 눈을 마주쳤다. 사샤는 대답 대신 마른침을 삼켰다.

여전히 느끼는 것이었지만 그의 말에는 아리송한 구석이 있었다. 그건 사샤 역시 무용수였기 때문에 그의 관심을 살 수 있었다는 뜻처럼 들렸다. 덧붙여 저 말고 관심을 가진 ‘다른 무용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려 기분이 묘해졌다.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실망해야 하는 것인지 감을 잡지 못한 채로 사샤는 카렐의 말을 곱씹으며 대충 대답했다.

“……대단하세요.”

“저녁은 먹었어요?”

갑자기 화제가 바뀌어 사샤가 그를 올려다보자 카렐이 대답했다.

“난 이제 식사하러 갈 건데, 괜찮으면 같이 먹을까요.”

방금 전 그의 말로 복잡해졌던 심경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사샤는 고개를 크게 여러 번 끄덕였다.

* * *

카렐과 게오르크, 그리고 사샤는 처음으로 보는 또 다른 비서까지. 총 네 명이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사샤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보다 더 따뜻한 기분을 느꼈다.

세 명의 어른은 사샤가 모르는 화제는 길게 이어 가지 않았고, 수시로 빈 잔을 채워 주거나 조금 멀리 있는 접시를 사샤의 앞에 끌어다 주며 ‘어린 소년’을 수시로 배려했다. 그중 가장 친절한 것은 카렐이었다.

그는 사샤가 먹을 줄 모르는 랍스터를 꼼꼼히 발라 녹인 버터를 찍어 접시 위에 놓아 주었다. 어른들이 마시는 샴페인잔을 흘끔대는 사샤를 알았는지 무알코올의 어린이용 샴페인을 한 병 주문해 주기도 했다. 완벽한 매너로 웨이터에게 주문을 하거나 포크, 나이프를 누구보다도 깔끔하게 쓰는 카렐의 손길을 볼 때 사샤는 마치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게다가 자기 가방에는 카렐이 선물해 준 최신형 핸드폰이 들어 있었다.

오래전에 친형이 아직 집을 나가지 않았을 때 4인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았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열 살 이전의 기억이었다. 그때의 사샤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자기가 그 말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았고, 어린아이답게 맥락 없는 소리를 잘 지껄이곤 했다. 자기 스스로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다른 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지면 함께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지금 사샤는 오랜만에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농담을 할 때면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짓곤 하는 게오르크는 자신보다도 단것에 환장하는 사람이라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뉴욕 시내의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전부 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사샤가 처음 만난 우즈는 게오르크와 사샤의 공통점을 하나 찾아냈다면서 둘 다 눈물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사샤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말을 하고 나서 카렐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첫 키스의 날짜를 언제로 정했다고요?”

우즈가 물었다. 그녀는 매끈하고 짙은 색의 피부에 완벽히 직모로 펴진,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건 아직 못 정했어요. 오, 옥사나가 생각해 보겠다고 했어요.”

“너무 머지않은 미래였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안 할지도 몰라요. 저도 처음이라고 했더니 옥사나가 고민했거든요. 제가 경험이 없는 게 불만인가 봐요.”

우즈가 중얼거렸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이렇게 풋풋한 이야기는 오랜만이야’라고. 그녀가 쿡쿡 웃으며 말하자 왠지 뿌듯해진 사샤는 카렐의 반응도 살폈다. 하지만 그는 별 표정 변화도 없이 말없이 식사 중이었다.

왠지 조금 시무룩해진 사샤는 제 몫의 샴페인을 단번에 비웠다. ‘크으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무알코올이 분명한데도 이상하게 취기가 느껴졌다. 눈을 깜빡이면서 사샤는 느리게 중얼거렸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첫 키스도 궁금해요…….”

“조언을 얻고 싶은 거죠? 하긴, 그 나이 때는 뒤처진 건지 빠른 건지를 의식하곤 하니까. 흠……. 나는 열여섯 살 때였죠. 사샤가 여자 친구와의 첫 키스에 성공하면 같은 나이에 한 게 되겠네요.”

우즈가 피부색과 비슷한 매니큐어가 발린 매끈한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말했다.

“게오르크는?”

“전 열한 살.”

“……세상에.”

우즈의 기가 막힌 표정을 바라보는 게오르크의 얼굴에는 ‘이겼다’는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사샤는 숨죽이고 카렐의 차례를 기다렸다. 하지만 식탁 위의 빈 그릇을 둘러본 카렐은 ‘이제 나갈까요?’ 하고 말할 뿐이었다.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오자 MOMA 로비에는 대기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멋 부린 차림새였다.

그러고 보니 붐비는 시간대였는데도 카렐은 대기 없이 당연하게 룸 자리를 차지했다. 사샤는 코트 체크를 받을 때 웨이터가 저의 숨죽은 검정색 점퍼를 공손히 받아 옷걸이에 걸던 것을 떠올렸다. 갑자기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뒤늦게 낡은 캔버스운동화가 신경 쓰였던 사샤는 자기도 모르게 크로스로 멘 스포츠백의 끈을 꼭 쥐었다.

현대미술관 건물을 완전히 나오자마자 우즈가 휙 뒤돌며 물었다.

“그런데 이 귀여운 남자애의 정체는 언제 알려주실 거예요. 설마 제 상사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었던 건 아니죠?”

우즈는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내고 있었다. 사샤는 자기가 대답할까 하다가 우즈가 물은 대상이 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카렐을 올려다봤다.

“만약 그렇다면?”

카렐은 또다시 틈이 많은 대답을 했다. 진짜도, 거짓도, 그 어떤 것도 확답하지 않는 말이었다. 우즈는 손가락을 빠르게 접으며 카렐이 사샤만 한 아이를 얻은 나이를 계산해 보고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이스쿨 시절에……? 하……. 정말로, 진심으로 만약 그렇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도 않아요.”

“다들 먼저 들어가요. 나는 택시를 타고 갈 테니까.”

카렐의 말에 두 비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흩어졌다. 우즈는 ‘첫 키스 성공하면 꼭 알려줘요’ 하고 사샤에게 손을 흔들었다. 게오르크는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이제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사샤의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호텔까지 데려다줄게요.”

카렐이 나지막하게 말해서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그가 먼저 발걸음을 뗐다. 사샤는 가방끈을 쥔 자신의 손바닥이 땀으로 조금 젖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상하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시야가 몽롱하기도 했다.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MOMA에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호텔까지의 거리는 500미터도 되지 않아 시야 안에 호텔 건물이 곧바로 들어왔다.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혼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런데 왜 데려다주겠다고 했는지 궁금했다.

자신이 열여섯 살밖에 안 되어서?

“카렐…….”

사샤는 용기 내어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처음으로 입에 담아 보는 것이었다. 사샤는 휘청이며 얼른 쫓아가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카렐, 카렐. 클레멘츠 씨.”

“예.”

정중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저는 얼마 후에 첫 키스를 할 거예요.”

그 말에 카렐이 쿡쿡 웃었다.

자신이 어떤 반응을 기대했는지는 사샤 본인조차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 반응이 아닌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가볍게 여기는 듯한 그 반응에 사샤는 허무감에 휩싸였다.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런 것도 내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어요.”

“허락해 달라고 말한 건 아니에요.”

“그럼?”

카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사샤를 내려다봤다. 키가 30센티가량 차이가 나니 가까운 곳에 설 때마다 하늘을 끝없이 올려다보아야 했다. 가로등 불빛이 카렐의 머리 위로 쏟아져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진짜 키스해도 괜찮아요?”

바로 직전에 허락해 달라는 건 아니었다고 한 것과 반대로 사샤는 곧바로 모순되는 물음을 던졌다.

“물론이죠.”

그리고 날아갈 듯 가벼운 카렐의 수긍에 사샤는 충격 받았다.

“왜요……?”

“왜라니……. 무슨 의도로 그런 걸 묻는지 잘 모르겠네요.”

카렐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턱을 매만졌다. 턱을 큰 손으로 감싸고 수염이 미세하게 돋아 살짝 거칠어진 표면을 매만지는 게 그의 버릇인 것 같았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까치발을 해 손을 뻗어 그의 턱을 같이 만졌다. 그의 손에 사샤의 가늘고 부드럽고 촉촉한 손이 얽혔다. 카렐의 표정에 드물게 다른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불시에 카렐의 턱을 만진 사샤는 만족스러워졌다. 겉보기에는 매끈했지만 밤이 깊어서 그런지 역시나 손끝에 미미하게 돋아난 수염이 만져졌던 것이다.

“왜요? 왜요? 왜 키스는 해도 돼요? 훌륭한 무용수는…… 하면 안 되는 게 많아요. 저는 인성도 빵점이고 인간관계도 좋지 않고 친구를 패서 프랑스로 보내 버렸는데……. 왜 여자랑 키스하는 건 허락해 주시는 거예요? 왜?”

사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고꾸라졌다. 카렐의 바위같이 단단한 가슴팍이 이마에 쿵 닿았다.

그리고 사샤는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카렐이 제 양팔을 턱, 하고 받아 드는 것을 느꼈다. 이상하게 시야가 뱅뱅 돌고 어지러웠다. ‘하아……’ 깊이 숨을 내뱉자 더운 한숨이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런……. 마신 게 진짜 술이었나?”

“왜요? 왜 말리지 않으세요? 만약 제가 카렐이고 카렐이 사샤라면 저는 반대했을 거예요. 왜냐면 발레만 해도 모자라니까……! 왜 된다고 하시는 거예요? 왜요?”

이미 취기가 올라 ‘왜요, 왜요’ 하고 따져대는 발음은 ‘애오, 애오’에 가까웠지만 사샤는 인지하지 못했다.

“왜냐니,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해치워 버렸으니까 그렇죠.”

“네……?”

사샤는 ‘에?’ 하고 물으며 카렐을 올려다봤다. 그는 조금 찌푸린 얼굴로 사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공평한 사람이에요.”

사샤는 입을 조그맣게 벌리곤 카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거센 충격이 뒤통수를 치고 지나갔다.

“……아…….”

후들거리는 무릎이 조금 휘청이자 다시 카렐이 단단한 팔로 사샤를 받아 들었다. 조금 시야가 흔들린 것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렸다. 사샤는 옆머리를 짚으며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가 아파요…….”

“술을 마셔서 그래요.”

“못 걷겠어요…….”

사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카렐이 친절하게도 등을 보이며 손을 뻗었다.

“업어 줄까요?”

“필요 없어요!”

사샤는 괜히 고개를 저으며 뻗대었다. 카렐의 엉덩이를 차 주고 싶었다.

물론 그 너른 등에 업히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모를 배신감에 마음이 아파 가능한 한 그를 거부하고 싶었다. 그렇게 카렐의 손을 밀어내며 발버둥 치던 사샤는 뒷걸음질을 치다 가로수에 등을 쿵, 하고 박아 버렸다.

“아…….”

등이 아파 신음을 흘리는 순간, 카렐이 단번에 가까워졌다.

“그럼 안겠습니다.”

“어?”

그리고 사샤의 시야가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방금 전까지 밀어내면 밀려나던 것은 자신의 장난 같은 주먹질에 맞춰 주었을 뿐이었나 보다. 그가 자신을 들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자 완력으로는 이길 수가 없었다.

카렐의 단단한 어깨에 윗배가 눌려 식도에 시큼한 무언가 역류했다. 갑자기 거꾸로 들려져 ‘우욱’ 하고 토할 뻔한 사샤는 그의 등을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술기운이 사샤를 괴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카렐은 약간의 타격도 받지 않은 것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까 전에는 그가 저에게 보폭을 맞추려 얼마나 느리게 걷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카렐의 빠른 걸음에 맞춰 바닥이 울렁울렁, 흔들흔들 흔들렸다.

“전 45킬로나 돼요……. 내려 주세요.”

사샤는 몸을 꿈틀대며 카렐의 뒷덜미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숨결이 섞인 사샤의 목소리가 카렐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술에 취해 뿌옇게 어른거리는 시야 안으로 목덜미를 갑옷처럼 감싼 하얀 셔츠 깃, 유일하게 매끈한 피부가 드러난 목덜미, 목을 덮은 금빛의 촘촘한 머리카락 따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샤가 속살거릴 때마다 그 목덜미에 작게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났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살갗 표면을 더듬어 보았다.

“내려 줘요…….”

사샤가 내려 달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카렐은 가볍게 무시해 버렸다.

“귀가 간지러워서 살 수가 없군요.”

자신이 중얼거리는 바람에 귀가 간지러워진 카렐이 크게 재채기를 하며 저를 길바닥에 내던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샤는 그의 목과 어깨를 꽉 붙들고 매달렸다.

거꾸로 뒤집어져 안겨 있던 몸은 어느새 앞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아기처럼 마주 안긴 자세가 됐다.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에 사샤는 그의 따뜻하고 건조한 목덜미에 눈가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안 무거우세요……?”

“깃털처럼 가벼운데요. 100파운드라니. 그만한 고깃덩어리가 있으면 일주일 만에 다 먹어치워 버릴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사샤는 멍한 정신으로 그의 농담은 알아듣기 어려운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불현듯 나이프를 들고 저를 해체하듯 먹어치워 버리는 카렐을 상상하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착각인지, 호텔 로비로 들어가는 길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샤의 착각이 아니었다. 카렐은 마이클이 지키는 프라이빗 도어 대신 바의 1층 입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갔던 것이다. 그러고는 지하부터 연결된 엘리베이터를 통해 23층까지 올라간 후 펜트하우스로 연결된 엘리베이터로 바꿔 탔다.

굳이 성가신 일을 하면서 제 둥지로 올라가는 이유를 감 잡지 못한 사샤는 그저 카렐에게 오래 안겨 있어서 좋다고만 생각했다.

“다 왔어요.”

현관의 안온한 주홍색 할로겐 빛이 눈꺼풀에 느껴지는 순간, 카렐이 속삭였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히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제 엉덩이를 받친 그가 저를 내려놓을까 무서워서 사샤는 그의 목덜미에 더 강하게 달라붙었다.

떨어지기 싫다는 몸짓을 읽었는지 그는 사샤를 안은 채 그대로 소년의 낡은 컨버스를 한 짝씩 벗겼다. 길거리를 하도 쏘다녀 때가 탄 컨버스를 작은 발에서 벗기고는 아주 조심스럽게 현관에 내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한 팔로 사샤를 안은 채로 힘든 기색도 없이 항상 사샤가 누워 자는 바닥에 깐 이불을 탁탁 두드리며 펼쳤다.

“이제 자야죠.”

“…….”

“울었고, 마사지도 받았고, 술도 마셨으니 오늘은 잠이 금세 올 겁니다.”

“…….”

“아, 마사지를 받고 나면 조금 몸살 기운이 올 수가 있어요. 이상한 건 아니니까 몸이 아파지면 따뜻한 물로 근육을 풀어 줘요.”

친절하신 후원자님.

사샤는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는 서른두 살이었다. 딱 제가 살아온 것만큼을 더 살았다. 그런 그에게 과거 연인이 하나도 없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인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사샤의 심박수가 급격히 올라갔다. 미칠 듯한 질투심 때문이었지만, 사샤는 왜 갑자기 숨이 가빠지는지 알지 못했다.

동시에 사샤의 등을 손으로 받치고 있던 카렐도 작은 몸을 쿵쿵 울리는 격한 심장 고동을 알아챘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죠?”

“화가 나요…….”

“심계항진이 있는 건 아니죠?”

카렐은 사샤의 팔딱이는 가슴을 손끝으로 짚어댔다. 심개향진이 무언지도 모르겠고, 그의 손길이 성가시게만 느껴졌던 사샤는 그의 팔을 홱 내려쳤다.

“저만 취한 건 불공평해요.”

사샤의 투덜거림에 카렐은 피식 웃기만 했다.

“어서 술을 더 드세요……. 더 마시고 취해 버려요.”

“나까지 취하게 해서 어쩔 셈입니까.”

“그러면 같이 부끄러워져요.”

“지금 하고 있는 술주정이 부끄럽다는 자각은 있나 보군요?”

타박을 하면서 카렐은 사샤의 코를 가볍게 꼬집고 흔들었다. 사샤는 그가 저를 귀찮게 여기고 품에서 떨쳐내 버릴까 봐 겁을 먹으며 다시 그에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카렐은 떨쳐 내기는커녕 사샤의 마른 등을 가볍게 토닥였을 뿐이다. 아마도 자신이 잠들 때까지 이렇게 해 줄 작정인 것 같았다.

조금 마음을 놓으면서 사샤는 그의 품 안에 편안히 기대었다.

“더 꽉 안아 주실래요?”

“…….”

“엄마도 이렇게 안아 주신 적 없어요. 아주 아기 때 이후로는요……. 그래도 형이 저를 가끔 안아 줬어요. 심장이 닿을 만큼 꼭 안으면 엄청나게 따뜻하고 가슴이 찌릿찌릿해서 좋아요.”

“아무래도 내가 지원하는 학생에게 지금 필요한 건 집이나 돈이 아니라…… 애정인 것 같군요.”

그 말에 사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으면 부끄러워서 부정했겠지만, 오늘은 왜인지 그냥 수긍하고 싶어졌다.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떼를 쓰면 쓸수록 다정해지고 성가시게 굴어도 제 등을 토닥여 주는 후원자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클레멘츠 씨가 자고 갔으면 좋겠어요.”

“…….”

“이렇게 안고서 자고 싶어요.”

카렐은 대답하는 대신 사샤의 머리를 느리게 쓰다듬었다. 대신 ‘왜 갑자기 카렐에서 클레멘츠 씨가 됐죠’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큼지막한 손이 뒷머리에 부드럽게 닿았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헤치고 작은 머리통을 쥔 채로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에 사샤는 조금 꿈지럭거렸다. 그에게 더, 더 달라붙고 싶었다.

“다음 달이 생일이죠?”

카렐은 대답을 하는 대신 오히려 질문을 해 왔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고 가달라는 말에 확답을 해 주지 않는 얄미운 카렐의 허리를 제 다리로 완전히 휘감았다. 무릎이 튀어나온 조거 팬츠에 숨겨진 날씬하고 긴 다리가 허리를 단단히 조였다. 머리를 쓰다듬던 카렐의 손이 멈칫거렸다. 사샤는 아랑곳 않고 그의 뱃가죽에 제 허리를 찰싹 붙이다시피 했다.

동시에 사샤는 좋은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했다. 이러면 카렐이 이 방에서 떠나려 한다 해도 저를 달고 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받고, 싶은…… 생일 선물을 얘기해 봐요.”

그에 물음에 사샤는 염원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어머니가 걱정 없이 뉴욕에 와서 머무를 수 있을 만큼의 휴가와 돈, 올해 로잔 콩쿠르의 비디오 테스트라도 접수해 보는 것, 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저를 눈독 들이는 발레단이 수없이 많아져 어느 곳이든 원하는 곳을 골라서 입단할 수 있게 되는 미래…….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카렐이 여기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

“돈이 들거나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

“네? 많은 건 바라지 않을게요. 저는 욕심 많은 애가 아니에요……. 그렇지만 생일 축하 카드 한 장은 싫어요. 아니, 카드도 괜찮아요. 하지만 그건 이미 받아 봤으니까…….”

사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제 쪽에서 카렐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규칙적으로 등을 두드리는 손길만이 느껴졌다. 대답 없이 저를 재워 버리려는 카렐이 사샤는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잠시 후 사샤는 무겁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려고 해 보다가 이내 스르르 잠에 빠졌다. 카렐의 목덜미를 힘주어 끌어안고 있던 사샤의 팔에서 힘이 빠져 털썩 떨어졌다. 카렐은 잠든 소년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안아 들어 이불 위에 눕혀 주었다.

“잘 자요.”

이마 위에 내리는 짧은 키스 뒤, 거실의 불이 꺼졌다.

* * *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카렐은 없었다.

자신을 재워 버리고, 그사이에 도망간 게 분명했다. 그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자기 집’으로. 사샤는 어딘지도 모르는 진짜 집으로 말이다. 왠지 억울해진 마음에 사샤는 이불 위를 괴롭게 뒹굴었다.

“어…….”

그러나 이불을 퍽퍽 때리던 주먹 끝에서 사샤는 바스락거리는 무언가의 질감을 느꼈다. 그게 카렐이 두고 간 메모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지난밤은 여기서 보냈어요.

아침 일찍 일정이 있어서 먼저 나갑니다.

잠버릇이 얌전치 못하네요.

카렐 클레멘츠.]

“와아…….”

사샤는 필압이 느껴지는 종이 위를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호텔의 로고가 인쇄된 메모지는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것이 맞았다. 행복감에 젖어서 잠시 이불 위를 뒹굴거리던 사샤는 벌떡 일어나 욕실로 갔다. 세면대에 물을 마구 튀기며 전투적으로 세수를 했다. 학교에 가기 전에 케일사과 주스 한 잔을 쭉 비우고 오믈렛도 마시듯 입 안에 넣어 버렸다.

카렐이 약속을 지켜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온몸에 기운이 솟구쳤다. 달리지 않고는 이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쿵덕쿵덕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심호흡을 하면서 사샤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옷을 몸에 걸쳤다. 낡은 캔버스운동화를 발에 꿰자마자 사샤는 바깥으로 튕기듯 달려 나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마저 초조하게 제자리 뛰기를 하다가 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마이클을 쌩 지나쳤다. 검은 머리카락이 활기 있게 찰랑찰랑 흔들렸다.

사샤는 링컨 센터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멋들어진 슈트를 걸친 남자들을 무수히 많이 지나쳤고, 파파라치들에게 둘러싸여 막 호텔에서 나오던 셀럽을 휙 스쳐 지나 달렸다. 링컨 센터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은 한적해지고, 더 깊숙한 곳 학교 건물로 향하자 드문드문 동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샤 세드린!”

어디선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사샤는 계단 코앞에서 가까스로 멈춰 섰다. 헐떡이며 계단 난간을 손으로 짚자 그제야 심장을 토할 것처럼 숨이 쏟아져 나왔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고 있으려니 옥사나가 가볍게 뛰어왔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폐병 걸렸어?」

「무슨 소리야. 그냥 달린 거야.」

사샤는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대답했다. 멀리 조제가 이쪽을 흘끔대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퍽 견제하는 표정이었다.

‘조제가 옥사나에게도 관심이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옥사나가 사샤를 건물 뒤편으로 이끌었다. 도착하고 보니 얼마 전에 ‘첫 키스 날짜’를 상의하던 곳이었다. 사샤는 문득 가방을 뒤져 아직도 박스 안에 곱게 담겨 있는 새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자 곧바로 날짜와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 클래스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새거네?」

여자아이를 눈앞에 세워 놓고 새 핸드폰에 정신이 팔렸다고 생각했는지 옥사나의 눈초리가 새침해졌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옥사나. 너는 공평한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공평한 관계?」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내가 키스를 해 보지 않아서 ‘우려’된다고. 만약 우리가 키스를 하게 되면 너는 첫 키스고 나도 첫 키스잖아……. 그런데 내가 다른 애랑 키스를 벌써 해 봤으면 어떨 것 같아? 너한텐 그게 더 좋은 거야? 아니면 불공평한 거야? 키스는 공평하게 하는 게 좋은 건가?」

사샤는 횡설수설하면서 물었다. 옥사나는 대놓고 눈썹을 찡그리면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널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응…….」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사샤는 멋쩍어하면서 뒷머리를 매만졌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가 너한테 그런 얘길 했어?」

「응. 어저께……. 자기는 키스를 이미 해 봤으니까 나도 다른 애랑 키스해도 상관없대. 그게 공평한 거라고…….」

「뭐야. 너 여자 친구 있어?」

사샤는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여자애가 있으면서 나를 ‘기만’해?」

「여자애 아니야. 여자 친구도 아니고!」

옥사나가 갑자기 사나워져서 사샤는 전전긍긍하며 다시 여러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샤가 쩔쩔매는 것을 본 옥사나는 금세 화를 풀었다. 사샤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옥사나의 눈치를 봤다.

「그럼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한단 말이야? 그건 ‘밀고 당기기’ 기술인데……. 그 애가 널 갖고 놀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그럴 리가 없는데…….」

「너도 머리가 있으면 잘 생각해 봐.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몸값을 높이는 거라고. 널 안달 나게 만드는 게 목적이야.」

「왜 나를 안달 나게 해?」

「먼저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으니까 그렇지.」

「진짜……?」

옥사나의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사샤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카렐은 여자도 아니고 자기와 ‘밀고 당기기’를 할 이유도 없다……. 옥사나의 모든 말이 현실감이 없고 잘못된 비유처럼 느껴졌다.

「그 사람은 어른이야.」

사샤가 툭 내뱉은 말에 옥사나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어른’을 연애 대상으로 삼는 사샤가 그녀의 눈에는 조금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또래들과 잘 섞이지 않고 철없는 장난질에 무심한 것도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장난을 칠 이유가 없어…….」

「왜?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나이가 서른이 넘어.」

옥사나가 질리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할머니잖아!’

그 말에 사샤가 풀이 죽어 버려 두 사람 사이에는 자연히 정적이 찾아왔다. 정신이 든 것은 오전 클래스까지 7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였다. 바딤은 벌써 연습실 안을 어슬렁거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아이들을 매의 눈으로 점검하고 있을 터였다.

“늦었다!”

옥사나는 바로 연습실로 뛰어갔고, 아직 타이즈도 신지 못한 사샤는 허겁지겁 로커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다행히 딱 정시에 맞추어 연습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날카롭게 얼굴에 와서 꽂히는 바딤의 시선을 피하면서 사샤는 얌전히 남는 자리에 섰다.

“자, 플리에. 드미 플리에(demi plié), 드미 플리에, 두 번 반복. 그리고 그랑 플리에(grand plié) 깊이……. 업, 앞으로 스트레칭…….”

바딤이 플리에의 순서를 읊는 사이 사샤는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옥사나의 추측은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도 사샤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의 작은 변화가 피어올랐다.

어젯밤 술기운에 더듬었던 카렐의 단단한 몸과 건조하고도 따뜻한 목덜미의 감촉이 자꾸만 떠올랐다. 크고 묵직한 손으로 자신이 잠들 때까지 토닥여 주던 것도, 귀와 목덜미를 부드럽게 누르며 지압해 주던 것도…….

“반대쪽!”

바딤의 말에 기계적으로 수트뉘 턴을 하며 돌아선 사샤의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 * *

그날 하루 종일 사샤는 드물게도 한 가지 생각에 진지하게 골몰했다. 물론 열여섯 살의 사샤는 항상 고민투성이였다. 현재 실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라거나, 미래에 스스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버는 무용수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 사샤를 사로잡은 생각은 최근에 하던 고민들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바로 특정한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

카렐 클레멘츠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인지가 궁금했다.

사샤가 자각하기로 이런 경험은 가족 이외에는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사샤는 아버지에게 있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궁금해했다. 막내아들을 향해 ‘짐 덩어리’, ‘식충이’, ‘머리가 고장 난 실패작’이라고 폭언을 내뱉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자신을 증오하는지 알고 싶었다. 아주 나중에야 자신을 얻게 된 것이 계획에 없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그 증오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또 어머니는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어머니 갈리나는 사샤가 종알거리며 그날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무심하고 지친 기색으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자연히 사샤는 말수가 적어졌고, 저를 성가시다고 따돌리는 친구들처럼 그녀 역시 자신을 거추장스러워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샤가 아버지에게 폭행을 당하는 것을 더는 두고 보지 못하고 아버지와 이혼을 감행했다. 그러면 적어도 아버지보다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 주는 것이 아닐까, 사샤는 그런 결론을 냈다.

그리고 한동안 사샤는 아버지의 폭력을 참다못해 가출한 형, 레빈에게 자신은 어떤 의미였을지 아주 많이 생각해 봤다. 형은 자신을 사랑한다고 했다. 세상 무엇보다 아끼고 있으며 본인이 겪은 고통을 사샤가 물려받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해 주기도 했다.

집을 떠나기 전날, 형은 갓 열 살이 된 사샤에게 쿠키 한 봉지를 사다 주고는 사샤의 가녀린 흉통이 으스러질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그때 형은 소리도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어깨가 뜨겁고 축축하게 젖어들어 겨우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형은 떠나가 버렸다.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도록 뭉친 이불 속에 들어가 쿠키를 주워 먹다가 과자 부스러기를 흘린 채로 이불 속에서 잠들어 버린 사샤를 두고.

그러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사샤는 여전히 궁금했다. 형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느 정도였는지. 쿠키 한 봉지 정도의 애정쯤은 있었던 걸까? 그 지옥 같은 상황에서 영영 떠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무튼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져 고찰하게 된 대상 중 가족 이외의 사람은 카렐이 처음이었다.

극장의 스태프들이 점심을 먹는 구내식당에 들어가 키가 훌쩍 큰 어른들 사이에 혼자 끼어들어 배식을 받으면서도 사샤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중간에 맞은편에 앉았던 누군가가 함께 먹자고 했던 것 같은데, 사샤는 멍하니 스푼을 움직이느라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반 과목 시간이 되어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샤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칠판만은 유심히 보곤 했다. 발레로 다져진 곧은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아 항상 선생님을 관찰했다. 무엇보다도 흑판에 글씨를 쓸 때 나는 소리가 좋았고, 50여 분을 거의 쉼 없이 말할 수 있는 선생님들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은 대체 자신이 무엇을 보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도 보이는 것은 카렐의 얼굴뿐이었다.

오후 마지막 클래스인 캐릭터 댄스 수업을 마치고 나서 사샤는 소란스러운 복도를 걸어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기숙사로 향하거나, 바깥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아이들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늘어난 주머니에 손을 꽂고서는 학교를 빠져나와 광장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는 링컨 센터 광장에 물줄기가 아름답게 치솟고 있었다.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괜히 사색에 잠긴 사샤는 링컨 센터를 벗어나서 길을 건너 센트럴 파크 안쪽으로 향했다. 왜인지 오늘따라 호수를 보면서 앉아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몇 번을 와도 센트럴 파크 내부의 지리를 익히지 못한 사샤는 오늘도 발걸음이 닿는 대로만 걷다가 결국 커다란 호수에 가 닿지 못했던 것이다. 사샤는 지도상 파크의 가장 아래쪽 길목만 쏘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사샤가 발견한 건 오리 몇 마리가 헤엄치는 조그만 호수뿐이었다.

산책 나온 이들과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길 위에서 안정을 도저히 찾을 수 없던 사샤는 호수 찾기를 포기하고 큰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낮 동안 햇볕에 따끈히 데워진 바위에 등을 대고 누워 있으려니 잠이 솔솔 왔다.

마침 시야 안으로는 센트럴 파크를 울타리 치듯이 늘어선 키 높은 빌딩들이 주르륵 공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호텔의 창도 보였다.

사샤는 졸린 눈으로 호텔의 가장 위층을 쳐다보면서 익숙한 창을 찾아보았다. 과연, 유리창에 발레 바가 희미하게 비치는 창가가 보였다. 원래대로라면 바가 있는 것도 알아채기 어려웠을 테지만 무엇이 있는지를 아는 채로 찾으니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낯선 땅에 자신을 위한 공간이 하나쯤은 있다는 생각에 사샤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을 때였다.

“어…….”

사샤는 벌떡 등을 일으켜 세웠다. 착각이 아니라면 창가에 무언가 희미하게 어른거리고 있었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스포츠백의 끈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누구지?

오늘은 브라운 씨의 개인 교습이 있는 날도 아니었다.

혼자가 되는 게 싫어서 가능한 한 늦게 집에 가려고 했는데, 누군가가 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샤는 흘러내린 가방끈을 추스르며 바위를 날쌔게 뛰어내려 왔다. 다람쥐처럼 바위를 미끄러지던 사샤가 마지막으로 잔디밭에 털썩 뛰어내리자 징, 하고 발바닥에 충격이 왔다. 습관처럼 플리에로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면 척추까지 충격이 이어졌을 것이다.

성능 좋은 스프링처럼 다시 튀어 오른 사샤는 급히 5번가 쪽의 센트럴 파크 출입구로 빠져나갔다.

5번가에서 익숙한 길목으로 들어서자 호텔은 금방이었다. 저절로 문을 열어 주는 도어맨을 지나쳐 프라이빗 도어로 향하자 언제나처럼 마이클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와 있어 사샤는 바로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좀 번잡하겠지만 금방 치울 겁니다. 놀라지 말아요.”

“엘리베이터가요?”

마이클은 흰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며 사샤는 엘리베이터의 4면이 모두 마찰을 방지하기 위한 파란 쿠션으로 덮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확히 왜인지는 알 수 없는 예감으로 사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어 사샤의 방이 있는 층에 도착하자마자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사샤는 들어서는 복도에도 짙은 회색의 부직포가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부러 부직포를 자근자근 밟으면서 문 가까이로 다가간 사샤는 문 앞에서 카드키를 가져다 댔다.

작은 소음과 함께 도어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문을 열었다.

“클……레멘츠 씨.”

멍하니 말을 내뱉은 사샤의 뒤에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아침에 이 방을 나설 때와는 퍽 다른 거실 풍경 가운데 카렐이 서 있었다.

“카렐.”

사샤의 부름에 카렐이 뒤돌아섰다. 금발과 잘 어울리는 연회색의 스리피스 슈트를 걸친 카렐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곁에는 인부 몇과 게오르크도 함께 있었지만 사샤의 눈에는 카렐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서 와요. 오늘은 일찍 왔군요.”

평범한 인사에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사샤는 허겁지겁 신발을 벗어 던지고 나서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로 그에게 달려갔다.

사샤는 거실을 달려가면서 힘껏 뛰어올라 그의 목에 매달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는 지난밤에 그랬듯이 약간의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받아내 꽉 안아 줄 것이었다. 그렇게 그에게 실컷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도 카렐은 어린애처럼 구는 자신을 흉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작아진 사샤의 걸음은 거실 한가운데로 다가가며 조금씩 느려졌다. 술기운이 사라지자 약간의 이성이 작동한 탓이다.

게다가 카렐의 앞에 멈추어 섰을 때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

“계실 줄 몰랐어요.”

사샤는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궁색하게 가렸다. 카렐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사샤에게 한번 점검해 보라는 듯 거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배치에 익숙해졌을 텐데, 미안해요. 제가 손을 좀 댔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이불을 뭉쳐서 만들었던, 사샤의 둥지가 있던 곳에는 전경이 잘 보이는 방향으로 커다란 퀸 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다. 주변을 밝힐 수 있는 앤티크한 디자인의 등도 손에 닿는 곳에 있었으며, 밀어서 발치 밖으로 보내거나 당겨서 침대 안쪽까지 끌어와 앉은 채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움직이는 테이블까지 함께였다.

그리고 주변에는, 사샤로서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커다란 황금색 나팔과 90년대에나 쓸 법한 전자기기, 짙은 색의 원목함들도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설마, 설마!

사샤의 심장이 크게 쿵쾅거렸다. 사샤는 자신의 명치를 손으로 꾹 눌러 보았다. 심개향진인지 뭔지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어댔다.

“적당히 시간이 날 때 이사를 하려고 했는데, 날짜가 여의치 않더군요. 오늘 일단 짐을 조금 옮기고, 실제로 들어오는 건 1주 정도 후가 될 겁니다. ……이런, 표정이 왜 그러죠?”

“카렐.”

사샤는 헐떡이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울먹이지 않는 것이 사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 조절이었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걸어가 그의 허리를 꼭 안으며 달라붙었다.

“생일 선물 감사해요.”

사샤가 이마를 대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카렐의 셔츠 앞에서 아무렇게나 흐트러졌다. 카렐은 사샤를 마주 안아 주는 대신 한참 키가 낮은 소년의 정수리를 적당히 무심한 손길로 슥 넘겨주고는 대답했다.

“표정이 좋지 않아서 나만 기억하는 줄 알았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때 술에 취했었잖아요.”

“아니에요. 저는 다 기억해요. 그래도 술은 다시는 절대로 마시지 않을 거예요.”

사샤의 웅얼거림에 카렐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때 인부들과 함께 짐 정리를 돕던 게오르크가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축음기는 어디다 두는 게 좋겠습니까?”

“저기 테이블 옆이 좋겠는데.”

“테이블 옆에 완전히 붙일까요? 떨어뜨릴까요?”

게오르크의 물음에 카렐은 사샤를 부드럽게 떨쳐 내고 그쪽으로 향했다.

“모양이 아름다워서 장식적인 효과가 있으니까 아주 구석 말고 조금 잘 보이게 여기에 떨어뜨려 놓는 게 좋겠어.”

저를 안아 주는 것보다 축음기인지 뭔지가 더 중요한가 싶어 시무룩해진 사샤는 카렐이 걸어간 방향을 주시했다.

“실제로 쓰실 거죠? 소리가 나게 설치하실 거면 따로 사람을 불러야 합니다.”

“음. 그건 내일 하지.”

카렐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간 사샤는 아까 보았던 거대한 황금색 나팔을 ‘축음기’라고 부른다는 것을 깨우쳤다. 오래된 물건에 관심이 지대한 카렐은 신기한 물건을 많이 갖고 있었다. 사샤는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기계였지만, 카렐이 이사를 하면서까지 들고 올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저 역시 약간은 흥미가 생겼다. 카렐이 없을 때 조금 만져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부들과 게오르크는 해가 완전히 진 뒤에 돌아갔다. 사샤는 카렐 역시 그들과 함께 나설까 봐 조마조마한 가슴을 붙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카렐은 저녁을 먹고 갈 요량인 것 같았다.

“앉아요.”

카렐의 전화 한 통으로 30분 안에 호화스러운 정찬이 올려 보내졌다. 매번 룸서비스에 있는 메뉴만 돌아가면서 주문하는 사샤의 초이스와는 완전히 다른 음식들이었다.

올리브유에 펜넬을 넣고 함께 졸인 담백한 청어 요리, 관자와 브로콜리 볶음, 살이 촉촉하고 부드러운 양갈비까지. 눈이 휘둥그레진 사샤 앞에서 카렐은 애피타이저로 먼저 맛보라며 가볍게 앞뒤로 구운 호밀빵에 질 좋은 크림치즈를 가득 발라 주었다.

“아 참, 이걸 올려 먹으면 더 맛있어요.”

크림치즈가 발린 빵을 와아, 하고 입을 벌려 막 씹으려던 사샤의 입 안에 비네거로 살짝 절인 방울토마토가 불시에 굴러들어 왔다. 카렐이 사샤의 벌린 입 안에 타이밍 좋게 굴려 던진 것이었다.

말릴 새도 없이 그가 밀어 넣은 음식을 씹자 상큼한 방울토마토가 입에서 터졌다. 처음 맛보는 조화로운 맛이었다.

사샤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맛있어요. 진짜로요.”

입 안의 빵을 우물거리는 사샤를 바라보던 카렐은 자기도 똑같이 빵에 방울토마토를 올려 먹었다. 같은 방법으로 같은 음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니 사샤의 마음에 금세 온기가 차올랐다.

카렐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맛있는 음식을 먹는 법을 알려주고 싶은 정도일까?

생일 선물을 달라고 하면 흔쾌히 들어줄 정도?

혹시 만약에, 내가 엄청나게 어려운 부탁을 하면 어떻게 되지?

그러면 역시 성가시고 싫어져서 나를 먼지처럼 떨어내 버리게 되나?

사샤의 가슴속에는 그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시험해 보고 싶다는 마음과 모험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공존했다. 옥사나의 말을 듣고 나서부터 하루 종일 골몰하던 문제가 다시금 피어올랐다.

카렐을 앞에 두고 그에 대해 생각하려니 사샤는 먹으면서도 카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카렐에게 정신이 팔린 채로 시선을 고정하고 먹는 바람에 사샤의 접시 주변에는 또다시 흘려버린 음식의 잔해가 흥건했다.

반면에 카렐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깔끔히 음식을 먹고, 입술에 아주 조금이라도 소스가 묻으면 바로 냅킨으로 닦아냈다. 무심결에 그를 따라 냅킨으로 입술을 닦은 사샤는 카렐과 달리 제가 닦아낸 냅킨이 아주 지저분해진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냅킨을 무릎 위에 올려 숨겼다.

“저기, 클레멘츠 씨?”

사샤는 갑자기 정중해지고 싶은 기분에 그를 공손하게 불렀다. 저도 모르게 어른들의 격식 있는 데이트를 흉내 내고 싶어진 것이었다.

“네.”

“클레멘츠 씨의 첫 키스는 언제였어요?”

“흠…….”

사샤의 물음에 카렐은 식기를 내려 두고 턱을 매만졌다. 사샤의 가슴이 다시 크게 두근거렸다.

“정보 교환인가요?”

“네?”

“사샤, 당신이 내게 첫 키스 일정을 공유해 줬잖아요. 그러니 나도 알려 달라는…… 그런 뜻인가 해서요.”

듣고 보니 말이 되는 것 같아서 사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정말요? 믿을 수 없어요.”

“너무 오래전이라 그래요. 지금 사샤와 비슷한 나이였던 것 같네요.”

“어떻게 기억이 안 나요?”

“흠…….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 그런가.”

“와…….”

첫 키스를 아무렇지 않게 해치워 버렸다는 그가 무척 어른같아서 사샤는 깊은 존경심을 가졌다. 이어서 사샤는 또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왠지 오늘이라면 그가 많은 것을 대답해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렐은 어떤 사람이 좋아요?”

“무슨 뜻이죠?”

“끌리는 사람 있잖아요. 성욕을 느낀다든가…… 키스를 하고 싶은 사람이요.”

사샤는 카렐에게 견줄 만큼 어른스럽게 굴고 싶어 항상 조제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을 따라 했다. 조제는 뇌와 하체는 별개라면서 성욕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크게 떠들곤 했다. 그러면 여자애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카렐은 남자니까 이해해 줄 것이다.

“성욕?”

카렐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팔짱을 꼈다. 단단하게 앞으로 가둔 팔 안에서 그의 상박이 조금 크게 부풀었다. 약한 한숨 때문이었다.

“유명한 이야기니 숨길 것도 없으려나.”

카렐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어 말했다.

“검은 머리, 흰 피부. 그리고 육체적으로 단련된 사람이 좋죠.”

주의 깊게 듣다가 저도 모르게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사샤는 별안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저처럼요?”

물음이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카렐은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조금 민망해진 사샤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그냥 저도 조금 비슷한 것 같아서요…….”

“전 성숙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카렐이 칼같이 선을 그었다.

“성숙……. 성숙이요?”

사샤는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며 카렐을 바라보았다.

익히 알고 있는 단어인데도 그 정확한 뜻이 도무지 전해지지가 않았다. 원래부터 단어의 정확한 정의를 알아내는 일은 사샤에게 무척 어려운 것이었다. 사샤는 모국어로 말을 한다 해도 단어 500여 개로 거의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끝내 버리는 형편없는 어휘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렐은 이해에 조금 도움을 주겠다는 듯이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요. 성숙하고, 자기 매력을 잘 알고, 확고한 위치를 가진 데서 드러나는 자신감이 있으며…… 완성된 세공품 같은……. 뭐, 그런 사람을 좋아하죠.”

“세공품이요?”

바딤이 말하길, 무용수는 원석이었던 인간의 몸을 보석으로 세공하는 직업이라고 했다. 자신의 몸이 어떤 선을 만들어 내는지 끝까지 집착하는 것이 발레의 본질이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발레 댄서인 자신도 조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 귀를 만지작대던 사샤는 다시금 물었다.

“유, 육체적으로 단련된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신 거는요? 왜 빠졌어요?”

사샤의 물음에 카렐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선호도가 아니라 필수예요.”

“왜요?”

“그래야지 버틸 수 있으니까.”

“……?”

의문에 휩싸인 사샤는 다시 접시 위로 시선을 내렸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카렐이 정의한 ‘성숙’은 자신과는 동떨어진 단어라는 것이다. 눈을 둥그렇게 뜬 채 기계적으로 음식을 씹는 사샤의 턱이 차차 느려졌다.

“열여섯이라. 그래요. 한창 그런 것에 관심이 많을 때로군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사샤의 독특한, 조금은 무례할 수도 있는 화술을 에둘러 일반화시키며 포장해 주었다. 그리고 희미하게나마 그의 배려 아닌 배려를 느낀 사샤는 시무룩해졌다. 본능적으로 그가 내밀한 이야기를 차단하려 한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조제는 하루 종일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래요.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질문해요. ‘큰형’에게 물어본다고 생각하고.”

“네…….”

“호기심을 이상한 방식으로 푸는 것보다는 낫겠죠.”

또한 카렐이 ‘큰형’을 자처하는 순간, 사샤는 왜인지 대화가 재미없어졌다고 느꼈다.

이 화제에서 흥미를 잃어버린 사샤는 왜 이런 대화까지 흘러왔는지 방금 전의 맥락을 다시 짚어 보았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렐은 자신이 물어본 것에서 조금씩 요점을 비켜난 대답을 했다. 성욕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어느새 이상형으로 감쪽같이 탈바꿈한 대답이 가장 그랬다.

사샤가 미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카렐이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떠났다.

벌써 저녁을 다 먹은 것인가. 100파운드 정도의 고깃덩어리도 일주일 만에 먹어치울 수 있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입이 짧았다.

식탁 위에 잔뜩 남은, 아직도 따뜻한 음식들을 보면서 사샤는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식사 중에 말을 많이 해서 다른 사람을 질리게 만들거나, 맥락 없는 이야기로 상대방을 할 말 없게 만드는 것이 자신이 친구가 별로 없는 이유였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고 있었는데…… 카렐의 앞에서는 들뜨게 된다. 자꾸만 싫은 버릇이 튀어나온다. 스스로가 싫어지는 기분에 사샤는 숨소리마저 조그맣게 죽이면서 디너 스푼을 내려놓았다.

“왜 벌써 식사를 끝내죠. 배가 다 찼어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온 카렐의 손에는 목이 길쭉한 진녹색의 와인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수…… 술을 드실 건가요?”

“음식이 발포주와 잘 어울릴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은 카렐은 우아하게 생긴 잔에 와인을 따랐다. 진녹색의 병은 어두운 곳에서 보는 카렐의 눈동자 색 같았고, 잔에 따른 맑은 연노랑색의 액체는 햇볕이 내리쬘 때의 그의 홍채 가운데서 피어나는 빛과 같은 색이었다. 작은 기포가 병을 따라 끓다가 가라앉았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식사 더 하실 거예요?”

“그럼요. 시작도 안 했어요.”

“저도 안 끝났어요.”

사샤는 다시 전투적으로 스푼을 쥐었다.

카렐이 다시 제 앞에 앉아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기운이 넘치게 된 사샤는 청어를 크게 한입 떠먹었다. 고향에서 자주 먹던 생선인데도 잔가시가 하나도 씹히지 않는 고급스러운 식감이 놀라웠다. 그사이에 카렐은 양갈비를 큼직하게 썰더니 먹기 좋게 살만 발라낸 살코기를 사샤의 앞으로 내밀기도 했다.

“좋은 단백질을 많이 섭취해야 해요. 그래야 근질이 좋아지니까.”

“근질이요?”

“근육의 질을 말하는 겁니다. 무용수에게는 뻗는 힘이 중요하잖아요.”

“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이렇게나 신경 써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미래의 훌륭한 무용수에게 이 정도 투자쯤이야.”

카렐은 눈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넘겼다.

그리고 식사 도중, 카렐은 와인 한 병을 혼자 깨끗이 다 비워 버렸다. 사샤에게는 단 한 잔도 주지 않고.

* * *

그날 카렐은 자고 가겠다고 말해서 사샤를 뛸 듯이 기쁘게 했다. 그러다 곧바로 오늘은 물론이고 자신이 완전히 이사를 온 후에는 항상 쓰던 마스터룸을 쓰겠다고 해서 다시 사샤의 기분을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사샤는 조심스레 논리를 펼쳤다.

“거실에 있는 침대도 아주 커요.”

“그래요. 당신 편하게 자라고 큰 침대를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논리로 공격하기에 카렐은 도무지 틈이 없는 남자였다.

사샤는 오늘 당장 천둥 번개가 내리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빗소리와 하늘을 쪼개는 번개 때문에 도무지 무서워서 잠들 수가 없다며 그의 침대로 숨어들 텐데, 하며. 아무리 사샤일지라도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그 정도의 핑계는 필요했다.

그런 사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렐은 호텔 룸 안을 한 바퀴 둘러보다 욕실 한 곳을 가리켰다.

“내가 저쪽 욕실을 쓸게요. 방해 안 되겠어요?”

씻을 준비를 하려고 곱게 접힌 흰 타월을 손에 들고 있는 카렐의 선 자세가 조금 비스듬했다.

“……어디든 쓰세요.”

“항상 쓰던 곳과 겹치면 번거로울 테니까요.”

“그런 거 없어요. 저는 아무 데나 쓰니까 카렐도 아무 데나 쓰세요.”

왠지 모르게 부루퉁한 사샤를 달래듯 카렐은 그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슥 쓸어 넘겨주고는 욕실로 향했다. 사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털어냈다. 찰랑거리는 직모가 동그란 두상을 타고 부드럽게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카렐은 사샤의 시야 안에서 옷을 한 겹도 벗지 않고 단추까지 꽉 채운 상태로 욕실 안에 들어갔다. 베스트까지 갖춘 완고한 차림이었다.

내심 완성된 어른의 나체를 궁금해했던 사샤는 풀이 죽어 버렸다. 복서의 몸에 비견되는 무용수들보다 훨씬 두껍고 큰 근육을 가지고 있는 카렐의 벗은 몸이 조금 궁금했던 것이다. 옷 안에 숨겨진 피부도 겉으로 드러난 곳들처럼 매끈매끈할지, 체모도 금색일지 따위도 궁금했다.

‘그래도 앞으로 같이 사니까 언제든지 기회는 있어.’

맹랑한 생각을 하면서 사샤는 거실의 저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이쪽으로 걸어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사샤의 머리에 무언가 한 가지 구상이 떠올랐다.

방금 전, 욕실로 걸어가던 카렐의 걸음걸이는 느린 데다 약간 불안정했다. 게다가 다정한 눈동자를 감싼 눈꺼풀에는 약간의 붉은 기가 올라 있었고 눈도 충혈되어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아까 식사 중에 와인 한 병을 다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샤는 홀린 듯 셀러로 다가가서 와인병을 하나 더 꺼내왔다. 카렐이 술을 더 마시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했다.

동시에 사샤의 머릿속에는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본의 아니게 목격했던 광경이 펼쳐졌다. 흡혈귀만큼이나 창백한 흰 피부를 가진 검은 머리의 남자. ‘공쳤다’면서 카렐의 지갑을 털어 간 그 도둑은 술에 취해 잠든 카렐의 귀에 ‘자기’라고 속삭였었다.

만약 자신이 그때 말리지 않았다면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사샤는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남자는 분명 카렐이 말한 ‘성욕을 일으키는’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 단련되었었나? 그건 모르겠지만 확실히 키도 컸고 몸도 튼튼해 보였다.

성인 남자 두 명이 부둥켜안은 장면을 상상하자 이상하게 몸이 떨려서 사샤는 거실에 놓인 자신의 새 침대로 가서 웅크리고 누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아래가 빳빳해져 걸을 때마다 의식이 되어 움직이기 불편하기도 했다.

얼마 후 욕실에서 나온 카렐은 사샤가 벌써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벌써 자요?”

“음……. 그건 아닌데 조금 그래요.”

웅얼웅얼 대답한 사샤는 카렐이 축음기 가까이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역시 카렐의 걸음은 평소보다 느렸다. 게다가 귀와 목덜미가 조금 붉게 달아오른 것 같았다. 술기운이 남은 채로 따뜻한 물을 끼얹어서 그렇게 된 게 분명했다.

“이런 건 처음 보죠?”

사샤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불이 대신 바스락, 하는 소리를 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계예요. 꽤 고급품이죠. 얼마나 오락거리가 없었으면, 과거에는 이런 걸로 음악을 듣는 게 고작이었던 겁니다.”

“소리가 나와요?”

“설치를 해야 해요.”

“그건 비싼가요?”

“값어치를 매기기는 힘들죠.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비싼 값에 사 가려고 할 테지만, 필요 없는 이에게는 고물일 뿐이에요.”

“카렐은 비싸게 주고 사셨어요?”

“저는 물려받은 겁니다.”

거저 얻었다는 듯한 말투에 사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것치고는, 카렐은 꽤 애정 어린 손길로 축음기의 기계장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언젠가 이 물건의 진짜 주인이 나타나면 흔쾌히 넘길 거예요.”

알쏭달쏭한 말을 내뱉은 카렐은 사샤가 누워 있는 소파 가까이로 향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사샤가 잠들 때까지 가벼운 업무를 보거나 소일거리를 하다가 잘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운 차림으로 소파에 앉은 카렐은 이내 사이드테이블에 나란히 놓인 병을 발견했다.

“이건 당신이 가져다 둔 건가요?”

“네…….”

사샤는 볼을 붉혔다. 카렐이 씻으러 간 사이, 소파 옆 사이드테이블에 와인 한 병과 잔을 올려 두었던 것이다. 아까 카렐이 한 병을 모두 다 비웠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술이었다.

“난 당신에게 내 비서 일까지 시킨 적은 없는데……. 이건 어디서 났어요?”

“저기 작은 냉장고에 많이 있어요.”

사샤는 조금 몸을 일으켜 와인 셀러를 가리켰다. 카렐은 방금 꺼낸 병을 앞뒤로 살펴보더니 피식 웃었다.

“고양이에게 생선 가게를 맡겼군요.”

“……?”

“술을 좀 맛보고 싶다는 의도로 보입니다.”

“…….”

“틀렸나요?”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당당하게 반박했다.

“아뇨? 그런 의도 아니에요. 저는 그런 생각 절대 없었어요. 그냥…… 카렐이 먹었으면 해서 놔 둔 거예요.”

“…….”

“맛있는 건 많이 드세요. 그리고 푹 주무세요.”

카렐은 와인병을 관찰하더니 손으로 돌려 열 수 있는 병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가볍게 뚜껑을 돌려 열었다. 그러고는 사샤가 깜짝 놀랄 만한 행위를 했다. 잔 없이 그대로 입술에 병 입구를 가져다 대고 고개를 젖혀 맛을 본 것이다.

매끄러운 목선 위로 분명히 드러난, 남자답게 굵은 아담스 애플이 크게 움직였다. 사샤는 그 움직임에 쉽게 매료되고 말았다.

“……클레멘츠 씨, 주정뱅이.”

사샤의 말에 카렐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샤는 조금 움츠러들었지만 카렐이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술의 끝 맛 때문일 거라고 믿었다.

“내가 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침대 근처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고는 사샤의 통통한 볼을 한 손가락으로 튕기듯 훑고는 잔뜩 경직되어 버린 사샤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와 덮어 주었다.

“잘 자요.”

사샤는 두근두근한 심장을 포근한 이불 아래 숨기고 카렐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마침 등을 돌려 침대가를 떠나려던 카렐이 그 시선을 읽었는지 사샤를 부드럽게 돌아보았다.

사샤는 간절하게, 아주 간절하게 그가 자신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 주기를 빌었다.

그리고 마치 마음이 통한 것처럼 카렐이 다가와 허리를 굽혔다.

뜨거운 손바닥으로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기고는 건조한 입술을 내리눌렀다.

사샤는 이번만큼은 눈을 감지 않았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살피고 싶어서.

입술이 이마에 닿는 순간 새로 알아낸 것이 있다면, 카렐은 굿나잇 키스를 할 때 눈을 감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 진녹색의 눈동자. 밤의 어둠을 삼켜 가라앉은 홍채 사이로 옅은 호박색 실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이 자신을 꿰뚫는 듯해 사샤는 결국 질끈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다.

“……잘 자요.”

이어 들려온 카렐의 꽉 잠긴 목소리, 그리고 숨결이 사샤의 이마를 간지럽혔다.

“카렐.”

사샤는 저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카렐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카렐의 등 근육이 사샤의 체중을 버티느라 조금 더 날카롭게 선 채로 꿈틀거렸다.

저에게 매달린 사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크게 허리를 굽힌 카렐이 침대에 팔을 기대어 지탱할수록, 사샤는 아기 원숭이가 고목을 기어오르듯 카렐의 목을 더 꽉 조였다. 사샤의 팔 안쪽 여린 살이 카렐의 나무뿌리처럼 단단한 목덜미에 들러붙었다.

그리고 사샤는 카렐의 얼굴을 입술로 더듬어 그의 이마를 찾았다. 한 번 콧날을 스친 작은 입술은 어렵지 않게 이마에 안착했다.

사샤는 소리 없이 그의 이마에 키스한 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는 카렐에게 변명처럼 내뱉었다.

“……이건 굿나잇 키스예요.”

“…….”

“카렐도 안녕히 주무세요.”

카렐은 제 목에 매달려 저를 바라보는 사샤의 등을 조심스럽게 팔로 받아 들고 침대 위에 뉘였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사샤의 목까지 폭신한 이불을 올려 꾹 덮어 주었다.

‘난 성인입니다. 굿나잇 키스에서 졸업한 지 아주 오래되었죠.’

카렐이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물론 사샤의 망상일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사샤의 행동에 무어라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카렐은 아무 말 없이 소파로 돌아갔다.

사샤는 잠들기 직전까지 카렐의 앉아 있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사샤의 기대대로 와인 한 병을 완전히 다 비웠다. 사샤는 카렐이 잔뜩 취해서 침대로 가기도 전에 쿵 쓰러져 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잠들어 버린 카렐을 두고 무얼 하고 싶은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사샤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안타깝게도 졸음이 밀려와 오늘은 자신이 카렐보다 먼저 잠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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