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의 키다리 아저씨
소파 밑 아지트에 웅크려 있던 사샤는 멀리서 희미한 기계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에 눈을 반짝 떴다.
그러고는 예민한 청각으로 문 바깥의 이질적인 소리에 주의를 집중했다.
위이잉…… 하고, 민첩하고 조용하게 허공을 가르는 소리.
잠시 후 사샤는 약한 소음의 정체를 알아냈다. 그건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올라올 때의 소리였다.
사샤는 핸드폰을 꾹 눌러 현재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대로면 저 역시 한창 잠들어 있는 시간이지만 오늘은 아까 초저녁쯤 카렐에게 답장할 내용을 궁리하다 졸아 버린 탓에 잠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한잠 자고 나니 도리어 개운하게 시야가 밝아져서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명료하게 구분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는 사샤가 있는 층에서 멈추었다.
이 층에는 펜트하우스뿐이다.
거기에 생각이 다다르자 그때까지 아무렇게나 누워 있던 사샤는 얼른 엎드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긴장시킨 채로 현관을 노려봤다.
이어 몇 번 들어서 익숙해진 도착 알림음이 먼 복도에서 울렸다.
‘문이 열렸어.’
곧 밀실이 열리며 엘리베이터 안의 기척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성인 남자의 걸음걸이였다. 주저하기도 하고, 간혹 멈춰 서기도 하면서 발걸음은 현관 가까이로 다가왔다.
사샤는 더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호텔의 직원들은 저렇게 걷지 않는다. 이미 모든 길을 외운 것처럼 매끄러운 동선으로 소리 없이 움직인다.
그렇다면 혹시 이 방의 원래 주인이 방문한 것인가?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곳을 불시에 방문하게 된 카렐의 구둣발 소리를 이미 여러 번 상상해 보았다. 묵직하게 바닥을 딛는 구두 밑바닥 가죽창의 소리, 천천히 다가오는 여유 있는 발걸음, 그리고 매너 있게 다가와 노크하는 몸짓…….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의 행동이 마치 눈앞에서 본 듯 그려졌다. 그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저렇게 휘청이다 결국 문 앞에서 부주의하게 몸을 부딪치고, 키를 찾기 위해 몸을 수선스레 뒤지는 소리를 낼 이유가 없었다.
지금 방문한 것이 직원도, 후원자도 아니라는 판단이 들자마자 사샤는 이불 바깥으로 민첩하게 빠져나와 소파 뒤에 몸을 숨겼다.
‘키 어디 있어요. 이봐……. 지갑만 잠깐 꺼낼게. 허리 좀 세워 봐.’
가로막은 문 하나를 두고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삑, 하고 가볍게 문에 키가 터치되는 소리.
어둠 속에서 문 안쪽의 도어록이 녹색으로 짧게 빛났다 점멸하며 사라졌다. 문고리가 부드럽게 돌아가고 문이 열렸다. 사샤는 마지막으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내 들어선 것은 두 사람이었다. 사샤는 호흡마저 멈추고 그들을 주시했다.
“후…….”
먼저 들어선 한 명은 어두운 색의 머리를 가진, 키가 늘씬하게 큰 남자였다. 그는 피로한 듯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창에서부터 길게 떨어진 도시의 야경 빛이 남자의 흰 목을 비추었다. 남자의 얼굴은 흡혈귀처럼 하얬다. 사샤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부축한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어둠 속에서도 금발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큰 체구에 사샤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클레멘츠 씨?’
사샤가 제 후원자의 발걸음을 눈치채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카렐은 거의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두 발로 바닥을 딛는 것이 고작이었고, 자신을 부축한 남자에게 전신의 체중을 의지하고 있었다.
“진짜 무거워. 하…….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취한 거야.”
검은 머리 남자가 불만을 쏟아냈다.
“으음…….”
“이러면 마신 보람도 없잖아.”
투덜거리던 그는 그래도 카렐을 바닥에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는지 조금 더 기력을 써서 사샤가 있는 거실까지 들어왔다. 두 남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사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소파 뒤에서 몸을 낮출 뿐이었다.
“자, 여기 누워.”
거의 머리 바로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란 사샤는 얼른 소파의 그림자 아래 주저앉았다. 그 직후 남자가 카렐을 소파 위로 던졌다. 마치 묵직한 밀포대를 떨구는 것 같은 충격이 사샤의 어깨로 전해졌다. 소파 너머로도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다.
소처럼 무거운 남자가 저렇게 취하려면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셔야 하는 걸까? 제 후원자는 엄청난 술고래일지도 모른다.
“…….”
“…….”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후원자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고, 듣는 사람 없이 혼잣말로 떠들며 이곳까지 들이닥쳤던 남자도 조용했다.
잠시 이어진 침묵에 사샤는 혹시 제 존재를 들켜 버린 것인지 걱정하면서 천장으로 시선을 올렸다. 제 머리카락이 가죽소파에 사르르 쓸리는 소리가 났다.
툭, 툭.
옷자락이 뜯기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단추를 뜯어내는 소리.
그다음에는 셔츠의 목깃을 펴 주어 손가락과 옷감이 작게 마찰하는 소리. 이어 소파 저 끝에 위치한 다리에서 구두를 벗겨 내는 소리도 들렸다.
처음 사샤는 검은 머리 남자도 게오르크같은 카렐의 비서 중 한 명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일어나.”
자기? 이상한 호칭이었다.
남자끼리인데 자기라고 부르다니…….
마치 연인을 부르는 것 같은 호칭에 사샤의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샤는 괜히 제 양팔을 끌어안았다.
“음…….”
이어 귀를 간지럽히는 나지막한 신음과 젖은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초조해졌다. 소름이 돋을뿐더러 참을 수 없이 몸이 뒤틀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앗! 뭐야! 깜짝이야!”
소파 뒤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사샤 때문에 남자는 허둥지둥 외치면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사샤는 넘어진 남자를 보면서 이불을 저기에다 깔아 놓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두 개나 깔아 놓았기 때문에 충격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샤의 시선은 곧바로 눈 아래 소파에 길게 누운 남자에게로 향했다.
‘클레멘츠 씨.’
가까이서 보니 잔뜩 취한 채로 정신을 잃고 누워 있는 것은 역시 제 후원자가 맞았다. 사샤는 신기하고 드문 것을 보는 기분으로 그를 관찰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후원자가 막 헐벗는 과정 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달빛을 받은 카렐의 조금 짙은 색 피부가 꿀처럼 빛나고 있었다. 베스트의 단추는 물론 셔츠 단추가 위부터 네 개나 풀려 굴곡진 앞가슴의 파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게 영 신경 쓰였다. 물론 여기 들어오기 전부터 이 꼴은 아니었을 것이다.
왠지 도색 잡지를 훔쳐본 기분이 된 사샤는 굳은 얼굴로 검은 머리 남자를 노려보았다.
저 남자는 게이일까? 그래서 후원자님이 자고 있을 때 몰래 저 입술에 키스하고…… 만지작대고……. 하필이면 클레멘츠 씨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할 때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제 마음대로 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정의감을 느낀 사샤는 턱을 당기며 남자를 더욱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야, 유령인 줄 알았잖아. 어린애?”
“…….”
“넌 누구니?”
“전 사샤예요…….”
다리를 툭툭 털며 일어나던 남자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사샤?”
“네. 사샤 세드린. 알렉산드르 세드린. 러시아에서 왔어요.”
“……네가 사샤라고?”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까이서 보니 남자의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창백했다.
“너 대체 몇 살이니.”
“열……여섯 살.”
“그래? 더 어려 보이는데. 너 여기서 지내는 거야?”
“3일 살았어요.”
“3일이나……?”
남자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한동안 사샤를 빤히 바라보더니 아까 넘어지며 바닥에 떨어뜨린 제 지갑과 핸드폰을 주웠다. 사샤는 그런 그의 행동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어떻게 내쫓을지 고민했는데, 알아서 나갈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애를 옆에 두고 할 순 없지. 간다.”
“…….”
“에이, 공쳤네.”
남자는 투덜거리면서 카렐의 품을 뒤졌다. 사샤는 남자의 대담한 행동에 크게 놀랐다.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대놓고 하는 도둑질을 보니 도리어 숨이 턱 막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남자는 카렐의 재킷 안쪽으로 손을 넣어 지갑을 꺼낸 뒤 안에서 카드를 한 장 한 장 확인했다. 남자가 집었다가 던져 버린 카드들은 툭, 툭, 이불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카드를 걸러내면서 내내 못마땅한 표정이던 그는 결국 지갑 모양으로 둥글게 휜 빳빳한 지폐와 카드 하나를 챙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잠…… 잠시만요.”
사샤는 자기 목소리가 절대로 도둑을 응징하는 시민의 것처럼 들리지는 않고 도리어 비굴하게 들린다는 사실에 입술을 깨물면서 그 남자를 쫓아갔다.
“왜 가져가시는 거예요? 남의 돈을 함부로 가져가면 안 돼요. 클레멘츠 씨가 자고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데 왜 가져가시는 거예요. 그건 클레멘츠 씨 돈이잖아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뭐?”
남자는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사샤를 떨쳐 내고 현관으로 척척 걸어 나갔다.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사샤는 한 번 더 용기 내서 말했다. 하지만…….
“하든 말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문밖으로 쌩하니 나가 버렸다.
바깥에서 엘리베이터의 희미한 소음이 났다. 하긴, 보안 요원 마이클은 이곳에 드나드는 것이 허락된 모든 이의 얼굴을 외운다고 했었다. 남자가 낯선 사람이라면 마이클이 먼저 가로막았을 것이다.
멀어지는 기계 소음을 들으며 멍하니 있던 사샤는 다시 카렐에게 돌아왔다.
사샤는 엎드려 이불 위를 기어 다니며 남자가 아무렇게나 던진 카드를 주웠다. 검정색, 은색, 금색, 다양한 색의 카드들을 다시 카렐의 지갑에 넣었지만 지폐를 넣는 곳은 텅 비어 있었다.
다시 일어나면 후원자는 제 지갑의 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챌 것이다. 남자가 가져갔다는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러면 이제 그가 의심할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한참 갈등하던 사샤는 가방 속 깊이 숨겨 놓았던 525불을 가져와 카렐의 지갑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넣어 두었다. 남자가 가져간 것과 달리 한참 세상을 돌아다니며 손을 탄 티가 나는 낡은 돈이었지만, 아무튼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사샤는 전 재산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크게 울적해하며 지갑을 들고 무릎걸음으로 카렐에게 다가갔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한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윽…….”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니 술 냄새가 진동했다. 사샤는 숨을 멈추고 지갑을 다시 그의 재킷 안에 넣어 놓았다.
“클레멘츠 씨. 일어나서 씻고 자세요.”
사샤는 팔로 그를 살그머니 흔들어 보았지만 투우 경기장의 소처럼 거대한 남자는 꿈쩍도 안 했다. 깨우는 것을 포기한 대신 사샤는 그의 셔츠 단추를 채워 주고, 이어 베스트의 단추도 채웠다. 남자가 멋대로 한 짓을 제가 한 일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풀 때와 달리 단추를 다시 잠그는 것은 좀 더 힘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후원자의 흉통이 어찌나 큰지 베스트 양쪽을 당겨서 꽉 조이듯이 잠가야만 했던 것이다. 낑낑대며 옷을 불편하게 조여 남자가 건드리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은 사샤는 한결 뿌듯함을 느꼈다.
그리고 사샤는 한동안 후원자를 가만히 관찰했다. 그는 얌전히 자는 편인지 숨소리마저 조용했다.
‘나도 잘까.’
그의 곁에 있으니 졸음이 오는 것 같았다. 사샤는 아지트 속 뭉쳐 놓은 이불로 기어들어 갔다.
그때 산처럼 거대한 남자가 옆으로 무겁게 돌아누웠다. 사샤는 그대로 몸을 멈췄다.
“후…….”
한숨과 함께 술 냄새가 진동했다. 공기 중에 퍼지는 알코올 향에 사샤는 다시 제 코를 쥐었다.
“……물.”
물?
사샤는 벌떡 일어나 얼른 냉장고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안에 들어 있던, 호텔 로고가 붙은 물을 가지고 왔다. 후원자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기도 하고 그의 손에 쥐여 주기도 했지만, 그는 통 일어나 물 마실 생각을 안 했다.
컵에다 따라서 드릴까? 하지만 자신에겐 그를 일으켜 세울 힘이 없었다.
누워서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는 후원자가 저를 알아볼까 싶어서 사샤는 그의 눈앞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후원자님?”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지만 흘러나오는 발음은 의외로 또박또박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 마시면 괜찮아질 거예요.”
“…….”
“물 드세요. 후원자님.”
잠시 후 카렐이 무거운 상체를 일으켰다. 일어나 앉아 고개를 숙인 그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사샤는 다시 한 번 그의 손에 물병을 쥐여 주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술은 금방 깨는 편이에요.”
그러고는 그는 사샤가 건네준 물병을 가볍게 땄다. 힘을 별로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커다란 손 안에서 물병 뚜껑이 톡, 소리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꿀꺽꿀꺽 들이켠 물 한 통이 단번에 그의 입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샤는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는 그의 목울대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더 드릴까요?”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실례했군요. 여기로 올 생각은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든 카렐의 눈은 이제 완전히 이지를 찾은 듯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면서 사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로 실례가 아니라고, 여기는 원래 후원자님의 집이니까 언제든지 오실 수 있다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자 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로에 지쳐 경계심이 가득한, 웃지 않는 후원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 사샤 본인은 말문이 막힌 이유를 몰랐다. 원래도 사람을 압도하는 기백이 있는 카렐이 그간에는 어린 소년에게 일부러 상냥하게 굴어 주었다는 것을 사샤가 알 턱이 없었다.
웅크린 수사자처럼 자신을 탐색하는 듯한 카렐의 예리한 황금색 눈이 낯설었다. 사샤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왜 나를 저렇게 볼까?
무서운데도 그에게서 왠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 눈에 시선을 붙들렸다. 뻐근하고도 힘겹게, 쿵덕쿵덕 뛰는 심장이 의식되어 겨우 손을 올려 가슴을 문질러 보는 것이 다였다.
한참 후 사샤가 겨우 꺼낸 말은 이 한마디였다.
“머, 머리가 아프세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기에 내뱉은 말이었다. 바보같이 더듬거리자 후원자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크게 감싸고 쓸어내렸다.
“뭘 탄 것 같아요.”
“네?”
“그냥 술이 아니었어.”
설명이 부족한 그의 말을 조금 굼뜨게 이해한 사샤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까 그 검은 머리 남자는 역시 계획적인 도둑이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그의 행동을 이해해 보려 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가 후원자의 가슴을 더듬어 지갑을 빼내고, 현금을 몽땅 털어내는 꼴을 눈앞에서 빤히 보았으면서도 말리지 못한 자신은 멍청이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실토했다간 후원자도 자신을 한심하게 볼 것 같아 사샤는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튼 저기압인 게 분명한 얼굴인데도 카렐은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해 크게 화를 내진 않았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군요.”
“……다행이에요.”
카렐은 한결 누그러진 얼굴로 느리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신이 들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사샤를 보는 눈은 이제 기억 속 친절한 후원자와 비슷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사샤는 문득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술을 자주 드세요?”
오늘은 토요일 밤이었다. 조제는 이런 날이면 기숙사 담을 몰래 타고 밖으로 나가 쏘다니고 싶어 했다. 어쩌면 미스터 클레멘츠도 조제와 비슷한 계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샤의 질문에 카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
“이런 기분이 싫어서 잘 안 마십니다.”
“그래요?”
사샤는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술을 좋아하던 사람인 제 아버지를 떠올렸다. 술에 취해서 옆집에 다 들리도록 악마같이 소리를 지르고 혁대를 풀어 아들을 때리던 아버지는 술에서 깨면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수치스러워하기도 했다. 옆집의 이웃들이 흘끔대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면 멋쩍은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그렇게 현실을 한탄하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던 아버지가 선택한 것은, 제정신으로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사샤를 꼭 끌어안아 주는 것이 아니라 수치를 잊기 위해 또다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하지만 카렐은 취한 기분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사샤는 카렐과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럼 오늘은 왜 술을 드셨어요?”
“내 의지가 아닙니다. 술을 마셔야 하는 일은 매일 있어요.”
“싫은데도 마셔요?”
“필요할 때가 있죠. 여기 지하 바의 단골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자신이 여기서 지내기 전에 카렐은 호텔 지하의 바에서 술을 마실 때면 이렇게 방에 올라오곤 했을 것이다. 원래도 아마 그러지 않았을까 추측했던 일이지만, 확실시되니 기분이 들떴다.
사샤는 제 후원자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여기서 편하게 쉬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렇게 말하며 사샤가 다시 이불 둥지 안으로 뒷걸음질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동시에 카렐은 사샤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카렐은 몸을 일으켜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가 앉아 멀리 떨어져 있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사샤가 목 끝까지 채워 준 셔츠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카렐은 스스로 단추를 풀면서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더 꺼냈다.
마침 눈이 마주친 카렐이 사샤를 보며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내가 혼자 여기 올라왔나요?”
“기억이 안 나세요?”
카렐은 희미한 기억의 단초를 좇기 위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사샤는 카렐의 지갑에서 돈을 털어 간 남자를 떠올리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친구하고 같이 오셨어요.”
“친구?”
“네……. 이름은 모르겠어요. 머리색이 검고, 얼굴이 하얗고…….”
“됐어요. 누군지 알 것 같으니까.”
자기가 먼저 물어보았으면서, 카렐은 사샤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다시금 그가 보이는 차가운 반응에 사샤는 숨죽였다.
그는 물 한 병을 한 번에 비우고는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가벼운 손짓이었지만 뭔가를 버리는 손길이 주저 없이 냉정했다. 철제 휴지통에 굴러들어 간 빈 병이 가볍게 통통 부딪히는 소리에 사샤는 왜인지 풀이 죽었다.
카렐은 두통을 느끼는 것처럼 관자놀이를 짚어대더니 큰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또다시 한숨.
그다음 카렐은 사샤에게 성큼 다가왔다. 정확히는 소파로 온 것이었다. 그는 얼른 몸을 돌려 웅크려 앉는 사샤를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소파 위에 널브러진 넥타이를 주워 들었다. 그러곤 소파를 빙 돌아와서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기 구두 뒤축을 가볍게 손가락 끝에 걸었다.
더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었던 사샤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는 바로 떠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카렐이 주저 없이 걸어 나가는 것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사샤는 벌떡 일어나 그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갔다.
카렐이 약간 허리를 굽혀 바닥에 제 구두를 나란히 떨어뜨렸을 때였다.
“클레멘츠 씨.”
“네.”
“어디 가세요?”
사샤의 말에 구두에 발을 막 넣은 카렐이 뒤축을 바닥에 가볍게 두드리며 반쯤 돌아섰다. 후원자의 미간이 또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자꾸만 인상을 쓰는 이유는 자기가 성가시기 때문인가 싶어 사샤는 시름에 빠졌다. 실제로는 그게 아니고 덮쳐 오는 숙취 때문이라 하더라도, 어딘가 불친절한 그의 반응을 볼 때마다 사샤의 심장은 작아졌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요?”
카렐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더 말해 보라는 듯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지하철도 끊겼을 거예요.”
“전 차가 있어요. 게오르크를 부르면 됩니다.”
“게오르크는 자고 있을 건데…….”
“…….”
“자는 사람을 갑자기 깨워서 일을 시키면 화나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거든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화가 나요.”
“게오르크는 누구와 달리 성실해서 잠을 깨운다고 화를 내지 않아요.”
“그래요? 그것 참 잘됐네요…….”
사샤는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채 제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꾹꾹 꼬집어 괴롭히면서 다른 핑계가 없을지 궁리했다. 그리고 카렐은 돌아 나가려고 현관 쪽을 바라보고 있을 때와 달리 이제는 완전히 사샤 쪽으로 돌아서서 팔짱을 낀 채로 시야가 한참 아래에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집에는 침대도 많아요…….”
“알고 있어요.”
“클레멘츠 씨가 자고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요. 원래 후원자님 방이잖아요.”
“여긴 이제 당신 집이에요.”
사샤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저를 붙잡고 싶어 하는 사샤를 보는 카렐의 눈은 이미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사샤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제가 허락해 드릴게요.”
혼자 있기 싫다고, 다른 방에서 각자 문을 닫고 자도 되니까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좀 더 어린애답게 조르는 편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부모에게도 아이다운 어리광을 허락받지 못했던 사샤에게는 그런 평범한 요구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그가 자기 요구를 뿌리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사샤는 겨우 제 목적에 가장 가까운 말을 내뱉었다.
“자고 가세요.”
“…….”
“여기서 자고 가세요. 클레멘츠 씨.”
카렐이 손을 들더니 스스로의 이마를 감싸 문질렀다. 사샤는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얼굴을 세심하게 살폈다. 큰 손 아래 가려진 눈에 그림자가 져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린 손 아래의 입술은 웃고 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는 본인도 모른다. 사샤는 충동적으로 이마를 짚지 않은, 그가 아무렇게나 떨어뜨린 손을 붙잡았다. 술에 취해 컨디션이 나빠진 것만은 사실인지 후끈하게 열이 오른 제 후원자의 살갗이 뜨거웠다. 한 손으로 붙잡아도 쉽게 끌려오지 않는 그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거실로 끌고 들어가자 카렐이 천천히 끌려와 주었다.
사샤는 다시 아까처럼 거실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게 된 카렐의 손에서 넥타이를 빼앗아 소파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제 행동을 빤히 바라보는 카렐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자나요?”
먼저 물어본 것은 카렐이었다.
그는 소파 밑에 흐트러진 이불을 보고 있었다. 아침마다 드는 햇빛을 가리려고 했는지 호텔 로고가 붙은 커다란 검은 장우산이 창가 쪽에 두 개 펼쳐진 상태였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이 되면 햇빛이 강해지는데, 그때 머리만 우산 아래 집어넣으면 한결 자기 편하다고 설명했다.
“집이 너무 커서 침대에서 자면 너무 조용해요. 저는 여기가 편한 것 같아요.”
사샤는 제법 의젓하게 한 번도 혼자 자는 것이 무서운 적은 없었던 척, 그렇게 말했다.
“그래……. 그랬군요.”
카렐이 턱을 쓸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기가 이 좋은 방에 대해 불만을 말해서 카렐의 기분이 나빠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샤는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타이밍이 조금 이상한지도 모르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이…… 이렇게 좋은 장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은혜를 갚아도 모자라요. 전 진짜 행운아예요.”
“…….”
“훌륭한 발레 댄서가 될 거예요. 절대로 후원자님을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떨리는 목소리는 필사적이었다.
잠시 후 큼직한 손이 부드럽게 어깨를 툭 두드리고 떨어져 나갔다.
“알겠으니 이만 자요.”
“클레멘츠 씨는요?”
“나도 오늘 여기서 잘게요.”
그러고는 카렐은 사샤를 안심시키듯 눈을 마주친 채로 재킷을 벗었다. 그가 겉옷을 벗는 것을 본 사샤는 내심 크게 안도했다. 묵직한 옷감이 소파 위로 툭 걸쳐지고, 이내 카렐은 가까운 욕실로 들어갔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닫히고 3초 뒤.
사샤는 이불 위를 구르며 속으로만 소리를 질렀다. 후원자님이 오늘 여기서 자고 간다고 생각하니 미칠 듯이 기쁘고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 멋진 곳에 들어오게 된 첫날보다 훨씬 흥분됐다. 이불 위를 주먹으로 퍽퍽 치면서 소리 없이 속으로만 소리를 질렀다.
이어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후원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사샤는 얼른 연습실 위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창가 바에 달라붙어 바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밤낮없이 연습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다. 오른 다리를 바 위에 올린 채로 플리에를 하고 그대로 올린 다리를 유지한 채로 디딘 발의 뒤꿈치만 움직여 뒤로 돌아 캉브레 스트레칭도 했다. 이마 가까이의 가는 머리카락들은 금세 땀에 젖어 촉촉하게 물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사샤의 고개는 무의식적으로 욕실 쪽을 향해 돌아갔다. 가운 차림의 카렐이 막 나오고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달밤에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 사샤를 바라본 채로 말했다.
“왜 자지 않고.”
짧은 물음에 사샤는 ‘저는 수시로 연습해요’ 하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자 카렐이 다가왔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강인한 맨발이 소리도 없이 바닥을 디뎠다. 손이 닿을 만큼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은은한 풀향이 났다.
카렐이 제게 손을 뻗어 와서 사샤는 땀에 젖은 이마를 얼른 손등으로 찍어냈다.
“밤에 운동하는 건 교감신경을 교란시켜요. 자정 전에는 자는 게 좋아요.”
카렐이 손을 뻗은 건 제가 들고 있던 마른 수건을 사샤에게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수건을 받아 든 사샤가 방금 들은 어려운 단어를 반복하며 되물었다.
“고감신경이요?”
“키가 안 클 거라는 말입니다.”
“…….”
“여기서 더 안 자라고 싶어요?”
갑자기 신장에 대한 지적을 받을 줄 몰랐던 사샤는 당황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바딤도 항상 하는 얘기였다. 물론 훌륭한 무용수들 중에는 키가 작은 사람도 있지만, 그러면 맡을 수 있는 배역이 한정되니 배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완벽한 프로포션을 가진 자가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키가 몇이죠?”
“167센티…….”
사샤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년에 비해서 훨씬 컸지만 아직 한참 부족한 키였다.
“5피트 5인치라……. 6피트까지는 커야 하지 않을까요?”
“맞아요…….”
후원자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지금도 여자아이들이 토슈즈를 신고 토박스 위에 깡충 올라서면 대부분 사샤보다 시야가 높아진다.
사샤는 연말 테스트를 최우수로 패스하기, 최우수 졸업생으로 졸업하고 졸업 공연에서 주역을 맡기, 발레단의 정단원으로 입단하기에 이어 졸업 전까지 6피트―182센티―까지 키 크기를 목표에 넣었다.
“얼른 씻고 와요. 오늘도 여기서 잘 건가요?”
카렐이 아지트를 가리켰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예전부터 책상 아래나 식탁 밑 같은 곳에 들어가는 걸 좋아했다. 어린애들이 가진 흔한 습성이라기엔 한 번 들어가면 반나절씩 나오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자기가 그러는 걸 어머니가 질색할 정도로 싫어하던 것과 달리 카렐은 별말 없이 관대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 그의 제안대로 욕실에서 땀을 씻고 나온 사샤는 방 안에 조용한 선율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음질에 노이즈가 낀, 고전적인 올드팝이었다. 음악이 빈 공간을 가득 채운 것만으로도 외로운 분위기가 가셨다. 사샤는 왜 자신은 이렇게 좋은 방법을 미처 떠올리지 못했을까 생각하면서 거실 가운데로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소파 아래 아지트에 들어가 웅크린 사샤는 이제 카렐이 어느 방, 어느 침대를 쓸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러나 카렐은 물잔에 물을 따라 오더니 소파에 가서 앉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말했다.
“얼른 자요.”
“클레멘츠 씨는요?”
“당신이 잠들 때까지 여기 있을게요.”
너무 좋아서 사샤는 꿈틀거리며 몸을 이불 속에 깊숙이 파묻었다.
은은하게 달빛만 내려앉은 방 안, 카렐은 소파에 앉아 흥미 없는 눈길로 어둠 속에서 보이지도 않는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가 자신 때문에 귀중한 시간 일부를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샤는 이불을 코끝까지 올려 덮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배우의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누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걸 볼 수 있어요. 누구나 내가 당신을 신경 쓰는 걸 볼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의 손을 잡는 방법, 그리고 당신이 있는 방향으로 웃는 것, 전부 다 내 마음이 애정으로 충만하다고 세상에 말해 주네요.
“잘 자요.”
그리고 잠시 후, 눈을 감고 숨죽인 사샤의 이마 위로 따뜻하고 건조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순간, 전신이 불길에 휩싸이는 듯한 감각에 사샤의 입 안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미리 이불로 입과 코를 막은 것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사샤는 제 어깨를 가볍게 흔드는 부드러운 손길에 눈을 떴다.
처음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검정 장우산의 안쪽이었다. 조직이 촘촘한 우산의 면 사이로 아침 햇살이 투과되어 들어왔다. 체에 한 번 걸러도 고집스럽게 직진하려는 햇빛의 길이 선명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사샤의 귀에 조심스레 바닥을 쓰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슬리퍼를 신은 걸음걸이였다.
저에게서 막 멀어지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깨워 주었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사샤는 벌떡 일어났다. 어제 자기 직전 몸을 덥히지 않고 시도한 스트레칭의 여파로 둔근에 뻐근한 근육통이 남아 있었다.
“일어났으면 아침 먹어요.”
사샤는 약간 축축한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테이블로 다가가는 카렐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베개를 바라보니 작게 침 흘린 자국이 물들어 있었다. 제 바보 같은 모습을 후원자가 보았을 거란 사실이 부끄러워 사샤는 베개를 반대로 뒤집어 놓았다.
자는 사이에 누군가 다녀갔는지 식탁 옆에 어젯밤까지는 없던 흰 테이블보가 깔린 왜건이 놓여 있었다. 그 위에 실린 것은 심플한 디자인의 티세트와 식기들이었다. 왜건에 올려져 있던 음식을 보기 좋게 세팅하는 카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사샤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다가 이불 위에 무릎을 찍으며 한 번 넘어졌다.
둔탁하게 울리는 쿵, 하는 소음에 카렐이 슬쩍 뒤로 시선을 주었다. 징 울리는 무릎을 붙잡은 사샤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아침을 가져다준 직원이 하는 말이…… 이 방에 아침 식사를 가지고 올라온 게 오늘이 처음이라고 하던데요.”
“아무것도 안 먹지는 않았어요. 학교에 가면서 라테를 사 마셨어요…….”
사샤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하면서 카렐의 맞은편에 앉았다.
“빈속에 커피와 우유는 최악의 조합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카렐은 사샤의 앞으로 작은 오믈렛과 베이크드빈, 생토마토, 모닝스테이크 따위가 담긴 그릇과 푸릇푸릇한 이파리가 담긴 그릇을 놓아 주었다. 더해서 깜짝 놀랄 정도로 선명한 초록색의 주스도 함께.
사샤는 후원자의 눈치를 보면서 초록색 주스를 한입 꿀꺽 마셨다. 의외로 맛이 나쁘지 않았다. 사과와 케일을 함께 갈아낸 것 같았다.
배는 전혀 고프지 않았지만 사샤는 후원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포크를 주먹으로 쥐어 잡고 오믈렛부터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카렐이 아침을 먹는 모습을 흘끔댔다. 아침을 먹을 때조차 바르게 허리를 세우고 있는 카렐에게서는 아주 약간의 흐트러짐도 찾을 수 없었다. 어제 술에 취해 흐트러졌던 모습과 샤워를 해서 젖은 머리에 가운 차림이었던 모습은 모두 제 망상이었던 것처럼.
게다가 저보다 잠도 조금 잤을 텐데 카렐은 벌써 빳빳하게 다림질한 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 옷이 드레스룸에 걸려 있던 새 옷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혹시 후원자님도 발레를 하셨어요?”
카렐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시선은 너저분한 사샤의 접시에 닿았다.
음식을 보지 않고 먹는 데다 식기를 쥐는 방법이 잘못되어 접시 바깥에 흘리는 음식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순간 포크에 매달려 있던 한 덩어리의 부들부들한 오믈렛이 테이블 위에 철퍽 떨어졌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얼른 그것을 손으로 주워 먹었다.
“허리가 꼿꼿해서요…….”
“발레는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한 적 없는데. 칭찬인가요? 기분 좋군요.”
그러나 어머니와 다르게 카렐은 사샤의 테이블 매너를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굳이 입에 올리지 않는 후원자 덕분에 사샤는 점점 들뜨기 시작했다.
사샤가 아침을 먹어치우는 속도가 빨라졌다. 동시에 그는 아주 수다스러워지기도 했다.
“남자애들은 리프팅을 해야 하거든요? 아, 파트너를 허공에 들어 올리는 걸 리프팅이라고 해요. 저보다 키가 큰 여자애가 파트너로 걸릴 때도 있어요. 잘못하면 허리랑 무릎에 무리가 많이 가서 아파요……. 여자애가 밸런스가 안 좋으면 훨씬 더 무거워지고요. 그래서 저는 파 드 되 클래스가 되면 밸런스가 좋은 클로이나 맥켄지가 파트너가 되길 기도해요.”
“…….”
“그런데 후원자님은 키가 크고 힘이 세니까 리프팅을 잘하실 것 같아요. 파트너 밸런스가 안 좋아도 힘으로 버티면 되잖아요. 엄청난 장점이에요.”
카렐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 허벅지 근육이 좋아야 점프를 잘할 수 있어요. 저도 일주일에 세 번씩 짐에 가서 허벅지 운동을 하는데요. 체공 시간이 길어야 허공에서 많이 돌 수 있거든요……. 트레이너가 말하는데, 저는 허벅지 뒤쪽 근육이 많이 약하대요. 그거 아세요? 유연성이 좋으면 근력을 기르기가 힘들고, 근력이 세면 유연성이 부족하거든요. 둘 다 갖추기는 정말 힘들어요. 저는 유연성이 좋은 편이라서 근육을 많이 길러야 해요.”
“…….”
“아무튼 제 말은…… 후원자님은 다리 근육이 튼튼해서 분명히 점프도 엄청 잘하실 거라는 거예요.”
“고마워요.”
그가 자신의 칭찬을 받아들여 줘서 사샤는 수줍어졌다. 말없이 포크로 그릇을 긁자 삐익, 하고 듣기 싫은 마찰음이 났다.
“여자 친구는 있나요?”
그런데 카렐이 갑자기 비밀 얘기를 하려 해서 사샤는 깜짝 놀랐다.
물론 가끔 아주 친한 동기들끼리는 서로 비밀스럽게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하는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자기가 경험이 없고 마누엘 말대로 ‘늦되어서’인지 자신에게 저런 것을 털어놓는 친구는 별로 없었다.
후원자와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되는지……. 사샤는 아리송한 기분에 그를 바라보았다.
“여자 친구요? ……아니요? 한 번도 사귀어 본 적 없어요.”
“관심 있는 친구는 있어요?”
“……잘 모르겠어요.”
“예쁘다고 생각한 친구도 없어요?”
사샤는 포크만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깊이 고민했다…….
사실 외모로만 따진다면 그리스 신화를 그려낸 명화에서 갓 튀어나온 듯 창백한 미소년인 사샤의 얼굴이 가장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샤는 본인의 외모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평생 그 뛰어난 미모를 거울로 보고 살아 온 탓에 심미안이 마비되어 다른 이들의 외모에는 큰 감흥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남의 외모에 관심이 없는 이유를 고찰해 본 적이 없어 아직 깨닫지는 못했지만.
사샤가 침묵을 고수하자 카렐이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우며 말했다.
“드문 일이네요. 보통 그 나이에는 연애를 해 보고 싶어서 안달일 텐데.”
정말로 없어서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도 사샤는 초조해졌다. 기껏 카렐이 자신과 친해지고 싶어서 비밀 이야기를 물어 왔는데 자기가 사실을 숨기려고 일부러 침묵을 고수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샤는 자신 없이 웅얼거렸다.
“졸업할 때까지는 발레만 열심히 하려고요…….”
“…….”
“발레단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연애하고 데이트할 시간은 없어요. 발레만 할 거예요.”
“그래요.”
카렐은 왜인지 웃음을 참기 힘들다는 얼굴로 제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그는 장난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진짜예요.”
“거짓말이라고 한 적은 없어요. 아무튼…….”
“…….”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만약 여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지나치게 발레 얘기만 하지는 말아요. 호감을 가졌다가도 다들 도망갈 테니까.”
사샤는 왠지 울컥한 마음에 ‘도망가도 상관없는데요?’ 하고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종종 지적받곤 하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제게 접근해 와서 친해질 기회가 있던 여자아이들이 적지 않았다.―그리고 그때마다 조제는 열등감을 숨기지 못했다―그러나 조금 친해질라 치면 대부분 ‘넌 너무 발레 얘기만 한다’고 화난 표정으로 말하고는 그 뒤로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후원자도 비슷한 점에서 제게 질린 건 아닐까, 사샤는 조금 걱정했다.
“식사 다 했으면 디저트 먹을까요.”
카렐이 사샤 앞의 빈 그릇을 치우며 말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렐이 그릇을 들고 나니 사샤의 앞쪽 테이블은 음식물의 잔해로 잔뜩 더럽혀져 마치 작은 폭탄이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카렐은 아무 말 없이 왜건에 놓여 있던 흰 냅킨으로 테이블을 싹 훔쳐서 순식간에 깨끗하게 만들어 주었다.
디저트도 함께 먹을 줄 알았는데, 카렐은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늙은 호박 케이크를 사샤의 앞에 놔 주고는 테이블 앞을 떠났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하면서 마스터룸으로 들어갔다.
카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달칵, 하고 닫히는 문소리 뒤에 가로막혔다.
굳이 마스터룸으로 들어가서 통화하는 이유는 아마 자신이 들으면 안 되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해를 해 보려 노력하면서도 사샤는 금세 또 외로운 기분이 되었다.
“혼자 있는 게 싫으면 친구를 초대해도 됩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거실로 걸어 나온 카렐이 말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방으로 들어간 뒤 조금도 줄지 않은 디저트에 닿아 있었다.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말이 별로 기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아니고 후원자가 매일 와 줬으면 좋겠다.
아니, 그는 일로 매우 바쁘고 약속도 많을 테니까 저만을 위해 따로 시간을 내주지 않아도 된다. 자신은 그를 배려 없이 독차지하고 싶어 할 만큼 이기적인 성격은 아니니까.
대신 사샤는 그의 시간을 빼앗지 않는 아주 좋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바로 후원자가 이 방의 마스터룸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잘 때만 옆에 있어 주어도 좋을 텐데…….
사샤는 문득 상상했다. 그가 제 아버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아니면 삼촌이거나, 큰형이거나……. 가족이라면 이런 부탁을 할 필요도 없이 항상 같이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샤는 문득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의 형제들이 부럽다고 생각했다.
사실 사샤에게도 친형이 한 명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헤어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친형. 레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샤의 친형은 술 취한 아버지에게 크게 반항했다가 칼에 찔릴 뻔한 이후로 아예 가출해 버렸다. 그때 혼자 남겨진 게 무서워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 뒤에 아버지의 폭력이 전부 자신에게 쏟아졌기 때문에 형을 원망하다가도,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가 싫어서 또 울었다.
만약 카렐이 저의 형이었다면 아버지가 때리려고 하거나 고함을 칠 때에도 막아 주었을지 모른다. 아버지보다 덩치가 훨씬 크니까.
그리고 또 카렐 같은 형이 있었다면 일하러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느라 매일 식탁 밑에 들어가서 망상을 하며 시간을 죽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함께 있으면 같이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았을 테니까.
“저는 친구가 없어요…….”
사샤는 냅킨을 만지작거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렐은 대답 없이 사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래요……. 사교성이 있으면 좋지만 뭐…… 없어도 사는 데 문제 될 건 없죠.”
“…….”
그러니까 후원자님이 매일 와 주셔야 한다는 소극적인 부탁이었는데, 아무래도 너무 돌려 말해서인지 그는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카렐은 그렇게 이후 만남에 대한 약속 없이 집을 떠났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일을 하세요?’라고 사샤가 현관까지 따라 나가 물었지만 후원자는 그저 웃으면서 ‘나도 이제 집에 가야죠’ 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 말에 은은한 충격을 받은 사샤는 더 붙잡지 못하고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의 희미한 기계 소음이 멀어진 후에는 얼른 거실을 가로질러 가 창가에 붙어 아래 내려다보이는 길을 주시하면서 카렐이 언제 나오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개미보다 작게 보이는 사람들 중에 대체 누가 카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 또 오실 거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사샤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이불 둥지로 들어가 얼굴을 묻었다. 별로 울 생각은 없었는데, 눈꼬리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차라리 카렐이 한 번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외롭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밤 같이 있다가 혼자 남겨진 기분이 더 싫어서 사샤는 한동안 탈력감에 누워 있기만 했다.
* * *
“이 돈으로 하룻밤 보모를 고용한 건가요?”
이틀 후 호텔 방에 찾아온 것은 게오르크였다. 그는 빳빳한 지폐 몇 장을 사샤에게 내밀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사샤는 돈을 세어 보고 나서야 그 의미를 알아챘다. 525불이었다.
“아니에요!”
사샤는 단호하게 외쳤다.
“클레멘츠 씨가 말하길,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전해 달라 하시더군요.”
“아니라고요!”
사샤는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털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둑이 클레멘츠 씨 지갑에서 돈을 훔쳐 갔어요! 클레멘츠 씨가 잠에서 깨면 돈을 잃어버려서 슬퍼하실까 봐……. 그래서.”
“알겠어요. 가서 앉아요. 오늘은 생활비 지원에 대해 말해 주려고 왔습니다.”
그리고 게오르크는 출력해 온 계약서 양식을 꺼내 사샤에게 빠르게 설명해 주고 사인을 하게 만들었다. 생활비 지급 방식은 사샤가 생활하며 필요한 것을 사서 영수증을 모아 두면 한 달에 한 번씩 그 목록을 검토해서 확인해 주는 형태였다.
게오르크는 그때 도둑이 훔쳐 간 것과 비슷하게 생긴 검정색 카드를 사샤에게 건네주었다.
“항상 영수증을 챙기는 걸 잊지 마세요.”
“네…….”
생전 처음 카드를 받아 든 사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게오르크는 제가 보는 앞에서 잘 되는지 한번 테스트를 해 보라고 말했다. 당장 레오타드나 슈즈를 파는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간 사샤는 카드 번호를 입력하고 예전에 갖고 싶었던 연습복을 카트에 담았다.
“저기…… 100불 넘는 것도 사도 돼요?”
게오르크는 고작 몇 불 차이가 무슨 문제겠느냐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날은 게오르크가 사샤의 호텔 방에서 자고 갔다. 전혀 기대하지 않던 종류의 친절이라 떨떠름하긴 했지만 후원자의 배려라고 생각하니 당신은 필요 없다고 쫓아낼 수도 없었다.
게오르크는 저녁을 먹을 때 잠깐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것 빼고는 혼자서 노트북을 펼친 채 이런저런 업무를 봤다. 사샤도 그 곁에서 바빠 보이는 게오르크를 흘끔대며 매일의 연습 루틴을 소화했다.
그리고 자기 직전, 게오르크가 짧은 한숨을 훅 내쉬더니 이불 덮은 사샤에게 다가왔다.
천장을 바라본 채로 가만히 누워 있었던 사샤는 시야 안에 거꾸로 담긴 게오르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점점 다가오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잠시 후 사샤는 그가 자신의 이마에 굿나잇 키스를 해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 자요.”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을 확 젖히는 거친 손과 성의 없는 키스.
전신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다음 날 바로 사샤는 후원자에게 메일을 썼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클레멘치.
사샤 세드린입니다.
어제 게오르크가 와서 자고 갓어요. 게오르크 밥븐 것 같은데 왜 왔을까요.
게오르크 아직 안 결혼했어요?
만약 그러면 저는 아주 유감이에요. 게오르크가 빨리 결론했으면 좋겠습니ㅏ.
생활비 지원에도 큰 감사를 드러요. 슈즈를 세 가지 샀어요.
클레멘츠 씨는 가끔 술 마실 때 자고 가새요.
안 마셔도 자고 가도 되요. 자주 오세요.]
* * *
카렐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대신 그다음 날도 방문한 게오르크가 사샤를 긴 눈초리로 흘기며 탐색하듯 바라보았을 뿐이다.
“…….”
사샤는 저도 모르게 게오르크의 눈을 피하며 딴 곳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그가 제 메일을 읽었을 가능성을 떠올리고 조금 위축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어설프게 흘리며 크게 상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 저렇게 쳐다볼까.
훌륭한 비서란 공사 구분을 잘할 줄 안다. 하지만 그가 비서의 본분을 잊고 자신에게 사적으로 위해를 가한다면? 저도 가만있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사샤는 게오르크가 저에게 보복을 하면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그런 게오르크에게 맞설 것인지, 별의별 망상을 다 하면서 그를 다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사샤의 병적인 망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의 앞을 떠났다. 그러고는 전날처럼 노트북을 펼쳐 업무를 보고, 기계적으로 함께 저녁을 먹어 줄 뿐이었다.
그날 사샤가 겪은 가장 끔찍한 일 중 하나는 게오르크가 또다시 제게 굿나잇 키스를 해 주었다는 점이다.
게오르크가 무언가 다짐을 하듯 훅, 짧은 한숨을 쉬고,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허공에 휘날릴 때 사샤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입술이 닿을 때는 꼭 덮은 이불 안에서 몸부림쳤다.
게오르크가 떨어져 나간 후 사샤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알고 있습니다.”
게오르크는 소매로 입술을 닦고 있었다. 그게 일부러 보여주려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샤는 울분에 찼다.
태연히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오르크가 얄미워 사샤가 무어라 반박하려 할 때였다.
“하지만 클레멘츠 씨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요.”
“네?”
게오르크는 비겁하게도 후원자의 이름을 말했다. 그의 이름 앞에서는 항상 겁먹은 어린양이 되는 사샤의 몸이 흠칫 굳었다.
“그 말은 클레멘츠 씨가 절 아이라고 생각하신다는 말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달리.”
이런 명령을 하셨겠느냐는 뒷말을 삼킨 게오르크는 유유히 뒤돌았다.
사샤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끝까지 말하지 않는 점이 더 열 받았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차분히 거실의 조도를 내리고 다시 높이가 있는 책상으로 걸어갔다.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는 그를 보면서 사샤는 괜히 이불을 퍽퍽 때렸다. 자신은 게오르크에게 키스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게오르크는 아무것도 손해 보지 않은 것 같다는 피해망상에 휩싸였다. 하지만 정확히 반대의 일을 해 주는 것이 좋은 복수는 아닐 것 같았다.
후원자에게 메일을 쓰고 싶었지만 또다시 게오르크가 들춰 볼까 두려웠던 사샤는 메일도 쓰다 말았다. 자신과 후원자 사이에 방해자가 하나 껴 있는 기분에 우울해져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새 메일을 쓴다고 해도 별로 할 말도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이전 메일에 모두 적었기 때문이다.
‘하아…….’
사샤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남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가 뜨끈거리고 수치스러웠다.
주말이 오면 제 후원자가 단골이라는 이 호텔의 지하 바에 들를지도 모른다. 카렐이 술에 취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가능성을 내포하는지도 모르는 사샤는, 그저 후원자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가 바에 들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 * *
[클레멘츠 씨. 제가 저번 메일에 클레멘 츠 씨 이름을 조금 틀러서 화가 날 수도 있어요. 저도 이해합니다. 근데 이번 주말에도 술 마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샤는 너무 보채는 티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문장을 썼다. 그리고 문법을 신경 쓰며 내용을 여러 번 고쳤다. 그래도 자신이 없어서 학교에 가서 네이티브인 누군가에게 문법을 봐 달라고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편지 내용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아무튼 꽤 잘 쓴 것 같은 메일을 보냈는데도 후원자는 답장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다음 날, 사샤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그다음 날부터 학교를 마치고 난 이후 저녁 시간마다 90분의 발레 개인 교습이 추가된 것이다.
“사샤 세드린? 당신이 사샤 세드린 맞죠?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오늘부터 당신의 개인 교습을 맡은 케이티 브라운이에요. 뉴욕 발레단의 전 솔로이스트였죠.”
“와……. 어……. 개인 교습이요?”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사샤는 안쪽 연습실에서 걸어 나오는 선생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들고 있던 스포츠백이 발치에 툭 떨어졌다. 성공한 경력을 가진 프로 무용수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자 얼떨떨할 만큼 좋기도 했지만 당황스럽기도 했다.
발레 개인 교습이 싫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도 학교를 마치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 안에 그저 가만히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었다. 사샤는 이 결정을 누가 했는지 믿을 수 없어 패닉에 빠졌다. 자신의 동의도 없이!
게오르크의 복수일까?
“당신의 후원자이신 클레멘츠 씨께서 발전을 기원한다며 수업료를 전액 지불해 주기로 하셨어요.”
“아…….”
그러나 이어진 말에는 싫다는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아주 재능 넘치는 학생이라면서요? 기대가 커요. 심지어 이름도 사샤 세드린이라니! 과연 세기의 프린시펄이 될 만한 이름이에요.”
학교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꽤 지쳤던 사샤는 다시금 케이티와 함께 90분간 열성적으로 수업을 소화했다. 현업에서 뛰었던 프로 댄서가 자신을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긴장되는데, 혹시나 후원자가 제 수업 태도를 케이티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대충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케이티가 돌아간 이후에는 F&B팀이 올라와서 사샤가 보는 앞에서 직접 저녁 간식을 만들어 주었다. 팬케이크를 쌓고 바나나를 잘라 올리고 허공에서 슈거파우더를 뿌리는 쇼에 사샤는 박수를 보냈다. 완성된 음식을 가지고 올라오는 것과는 달라 보는 재미가 있기는 했지만, 혼자 있고 싶은데 방 안에 자꾸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말을 시키니 영 성가시고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게오르크가 영수증을 수집하고 확인을 하기 위해 한차례 들렀고, 자기 직전에는 마이클이 와서 마침 순찰을 돌고 있었다며 굳이 현관문을 열고 사샤에게 안부 인사를 전하고 갔다.
그렇게 밤이 되어 겨우 혼자 남게 되자 사샤는 온통 진이 빠진 상태가 되었다. 애초에 사샤는 그다지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사람들과 부대끼면 피로감만 짙어진다.
드디어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에 외로움이 아닌 안정감을 느낀 사샤는 카렐에게 다시 한 통의 메일을 보냈다.
[클레맨 츠 씨. 오늘는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나다. 케이티 브라운 씨와 함게 멋진 90분의 발레 수업을 들었어요. 근육통이 좀 생겻는데 괜찮아요. 요즘 뼈가 아픈데 언제나 지원에 감사드러요.
클레멘츠 바쁘지ㅇ? 그래도 주말에 노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어나 학교에 가자마자 사샤는 저를 불러 세운 줄리아에게 붙잡혔다.
“사샤? 기숙사 밖에서 통학하는데도 지각도 하지 않고 부지런하구나.”
“네. 새로 이사한 집이 가까워서 괜찮아요.”
“그래? 다름이 아니고, 요즘 몸 상태는 어떠니?”
“몸이요? 괜찮은데요…….”
“아픈 데는 없고?”
“멀쩡해요.”
멀쩡하다고 대답했는데도 줄리아는 사샤를 대뜸 피지컬 센터로 보냈다.
그리고 사샤는 피지컬 센터에서 다시 온몸을 검사해야 했다. 거의 입학 때 받은 것과 같은 수준의 정밀검사였다. 항상 지적받듯이 허벅지 뒤쪽 근육이 약한 것, 그리고 지나치게 힘을 주곤 하는 날갯죽지 아랫부분의 근육 뭉침 외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괜히 시간을 뺏기긴 했지만, 그래도 신체검사 결과지에 체중이 2파운드(약 1㎏) 늘었다고 적혀 있는 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사샤는 좀 더 생산적인 계획을 하나 세웠다. 바로 후원자가 단골이라는 호텔 지하 바에 가 보기로 한 것이었다. 수업 중에도 계속 마음이 딴 데 가 있어 바딤에게 등허리를 얻어맞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샤는 그날 수업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지하 바로 내려갔다.
직원들은 이미 사샤가 로비에 들어설 때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목깃 끝까지 지퍼를 채운 저지 차림에 스포츠백을 크로스로 멘 사샤는 그런 시선을 알아채지 못한 채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지하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사샤가 항상 들어가던 프라이빗 입구로 향하지 않고 지하로 향하자 즉시 직원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와 사샤를 제지했다.
“사샤 세드린? 어딜 가는 중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젊은 여성이었다.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제 이름을 알고 있는 직원이 신기해서 입이 벌어진 사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호텔에 바가 있다고 들었어요……. 거기에 가끔 친구가 와요.”
“아, 친구분께서요…….”
“네. 궁금한 게 있는데, 거기 혹시 콜라도 파나요?”
직원은 어딘가 떨떠름한 미소로 그렇다고 말하고는 사샤를 지하로 안내해 주었다.
고풍스러운 1900년대 초 인테리어가 그대로 남아 있는 바였다. 문에는 어두운 색감의 목재 위로 양각과 음각으로 넝쿨무늬를 새겼고, 시간의 흐름을 탄 황동색의 금속 손잡이도 달려 있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거의 정수리에 닿을 정도로 낮게 늘어뜨린 샹들리에들이 보였다. 유리 표면은 안개가 낀 듯 불투명한 무늬로 덮여 과하지 않고 은은한 빛을 뿌렸다.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던 사샤는 이곳의 광경이 한 번 방문했던 카렐의 집무실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꽤 일관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샤는 바 구석에서 콜라를 주문했다. 온더록스로 달라는 사샤의 주문에 스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바텐더는 즐거워하면서 얼음 담은 컵을 서빙했다. 그 유리컵에 귀여운 빨대를 꽂아 주는 것도 잊지 않고.
쪼로록.
빨대를 꽂은 콜라는 단 세 번 만에 바닥을 보였다. 마실 것이 없어지자 조금 멋쩍어진 사샤는 자신이 혼자 왔기 때문에 심심한 거라고 생각했다. 후원자와 함께 왔다면 이보다는 재미가 있었을 것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지나자 점점 자리를 채워 가는 손님들의 옷차림이 하나같이 멋져서 사샤는 약간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카렐이 준 카드로 결제를 마치고는 얼른 제 방으로 올라갔다.
사샤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열여섯 살 사춘기 소년의 기행은 게오르크, 호텔 보안 요원 마이클, 그리고 컨시어지팀과 F&B팀을 통해 카렐에게 낱낱이 보고되고 있었다. 그 보고서를 받아 든 후원자가 자신에게 몰려든 수많은 업무 중 피후원자의 밤마실에 어느 정도의 경중을 두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클레멘 츠씨.
술을 마시는건,, 별로 재밋는 일이 아니더군요,,,
술을 마시면 알쿌중독자가 되요.
알콜중독자가 되면 인생이 망합니다.
그래서 저는 술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클레멘 츠 씨도 술을 안 마셨으면 좋갯어요.
제 방에서 야경을 보면서 물을 드세여.
사람이 개미같이 보이고 아주 좋아요.]
그리고 금요일 저녁까지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사샤는 쓸쓸한 기분에 젖어 컨시어지에 얼음 바스켓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 다음 생수를 온더록스로 마셨다.
“하아.”
사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른 같은 멋진 습관을 하나 배웠고 이 넓은 호텔 방을 누리고 있었지만, 자신은 외로웠다.
해가 지고 밤이 점차 깊어질수록 맨해튼의 밤거리는 평소보다 훨씬 붐볐다. 금요일 저녁이기 때문이다. 별로 할 일도 없었던 사샤는 창가에 설치한 바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다리를 사이드 스플릿으로 벌린 다음 가능한 한 바짝 벽에 붙었다.
180도로 다리가 벌어지자 창에 앞가슴이 맞닿았다. 티셔츠 바깥으로 느껴지는 창의 차가운 온도에 살짝 몸을 움츠린 사샤는 앞뒤로 허리를 흔들면서 다리를 완전히 늘이고 창가에 더 바짝 붙었다. 유리에 뺨을 대자 시야 바로 아래로 까마득한 지면이 내려다 보였다.
그렇게 창에 붙어 개미만 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던 사샤의 뒤로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 세드린?”
“……?”
멀리 현관문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사샤는 뒤를 돌았다.
하지만 현관이 어둡고 거리가 멀어 누구인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술을 마실 줄 압니까?”
거실을 가로질러 무게 있게 걸어오는 발걸음, 하지만 무례하지 않게 아주 조용하고 느린 걸음걸이였다.
사샤는 이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금발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후원자……님.”
“미성년자가 벌써 그런 버릇이 들면 안 되는데.”
가볍게 타박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제 후원자, 카렐 클레멘츠였다.
눈앞의 풍경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사샤는 크게 놀라 자리에서 펄쩍 튕겨 오르는 느낌으로 벌떡 일어섰다. 한껏 늘어나 있다가 갑자기 수축한 허벅지 안쪽 근육이 얼얼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니에요. 전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인생의 쓴맛을 다 본 사람처럼 메일에 아주 회한이 가득하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바로 여기서 사는 사람처럼 편하게 자리 잡는 모습에 사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답장은 해 주지 않았지만 제 메일을 빠짐없이 읽어 본 것이 틀림없었다. 놀라 움츠러들었던 사샤는 금세 들떴다.
“오늘은 술 약속이 없으세요?”
“글쎄요. 좀 피로해서. 사람을 만나는 대신 여기서 생수를 마실까 하고.”
“…….”
“농담입니다.”
카렐의 손에는 작은 바스켓이 들려 있었다. 손수 들고 온 그 바스켓 안에는 흰 냅킨과 술잔, 그리고 꿀 같은 색깔의 액체가 찰랑이는 병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건 술인가요……?”
“네. 제가 아주 좋아하는 술이죠.”
“…….”
사샤는 음주할 생각은 절대로 없었지만 카렐이 돌려 따고 있는 병에는 왠지 흥미가 생겼다. 그가 ‘아주 좋아한다’고 말할 정도인 술의 맛은 어떨까?
사샤는 조심스레 다가와 카렐의 맞은편에 앉았다.
“근육통이 느껴질 땐 스파에서 마사지를 받아요. 호텔 내에 시설도 있고, 방으로 와 주기도 하니까.”
“…….”
카렐의 손에 들린 양주병은 술병이라기보다는 마치 잘 세공한 크리스털 조각품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샤의 눈으로 척 보기에도 고가가 틀림없었다.
사샤의 시선이 병에 꽂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카렐이 물었다.
“맛보고 싶어요?”
“아니요? 전 술은 싫어해서 입에도 안 대요…….”
실제로는 제대로 먹어 본 적도 없으면서 사샤는 그렇게 말했다. 호기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자신은 알코올중독자였던 또 다른 사샤 세드린처럼 될 생각은 없었다.
“의외네요. 당신과 이름이 같은…… 위대한 무용수는 술을 좋아했다던데.”
후원자에게서 동명의 레전드 이름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사샤의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자신을 만나는 사람들 중 발레에 약간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모두 저를 두고 사샤 세드린 타령을 해댔다. 그러나 후원자조차 그럴 줄은 몰랐다. 약간의 반항심이 고개를 비집고 나와 사샤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사샤 세드린은 알코올중독자였잖아요. 전 그렇게 되기 싫어요…….”
“……그래요?”
카렐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니, 아마 그러려고 했던 것 같다.
“네. 그건 자기관리를 못하는 거잖아요. 무용수가 할 일은 첫째도 자기관리, 둘째도 자기관리예요. 자기관리를 못하고 알코올중독에 빠졌던 사샤 세드린이 어떻게 그렇게 존경받는지 이해가 안 돼요. 만약……. 만약 제가 프린시펄이라는 자리에 오를 수 있다면 술은 입에도 안 댈 거예요. 그게 맞아요…….”
카렐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지며 그의 눈이 아주 약간 가늘어졌다. 무언가를 떠보는 듯도 하고, 관찰하는 것 같기도 한 시선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좋은 자세네요.”
칭찬인데도 이상하게 뼈가 있는 말처럼 들려 사샤는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네……. 전 술로 인생을 망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좋아요.”
뭐가 좋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샤는 긍정적인 대답이려니 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카렐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작은 잔에 얼음을 담고 꿀빛 액체를 따랐다. 사샤는 바위 같은 맑고 투명한 얼음 사이로 흘러내리는 액체를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잔이 두 개인 걸 보면 자기도 줘야 하는 것 같은데, 후원자는 딱 한 잔만 준비해 제 앞에 가져다 놓았다.
방금 전 자신이 지나치게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인가 싶어서 사샤는 조금 후회했다.
“그래서 친구도 멀리하는 건가요?”
“네?”
“친구들과 놀러 다니면서 조금 한심한 짓도 해 보고, 귀여운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보고. 그 나이에는 그게 전부일 텐데.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수도사들도 그 정도는 아닐 겁니다.”
“…….”
“의도적으로 사교적인 활동은 하지 않는 건가 싶어서 그래요. 즐거운 시절을 최대한 행복하게 보내야죠.”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요……. 전 그냥 어릴 때부터 친구가 없었어요.”
사샤는 솔직하게 말했다. 후원자는 꽤 심각한 얼굴로 제 얘기를 듣고 있었다.
“엄마는 제가 문제라고 했어요. 제가 사람을 질리게 한다고요. 다들 저랑 조금만 친해지면 저보고 피곤하고 성가시다고 해요.”
“…….”
“그리고 남자애들은 제가 발레를 하는 게 이상하다고…… 어릴 때부터 자기들 무리에 절 한 번도 끼워 주지 않았어요.”
“못된 친구들이네요. 수준 낮아요.”
“맞아요. 수준 낮아요. 멍청이들이에요.”
“죽을 때까지 발레 공연은 제 돈 주고 볼 일이 없는 친구들이겠네요. 신경 꺼요.”
깔끔하게 그들을 무시하는 카렐의 말에 사샤는 속으로 크게 동의했다.
사샤의 고향 마을에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가장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가서 허드렛일을 하며 돈을 벌어 부쳤고, 제 또래의 친구들은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시골이라 그런지 발레나 오페라, 클래식 공연을 스스로 즐기려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두컴컴한 펍에서 질 나쁜 생맥주를 마시며 축구 도박에 돈을 걸거나 하루 종일 TV를 보며 아무 생각 없이 카우치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가장 흔한 취미였다.
그런 한심한 이들을 내심 흉보던 사샤는 이내 무기력한 기분에 휩싸였다. 잘 설명할 수 없는 이유지만,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어 우울해졌다. 제 어머니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갈리나의 삶 역시 저가 한심하다고 치부하는 이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제 어머니는 노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지친 얼굴로 누워 TV만 보았다. 사샤가 하루 종일 저에게 일어났던 일을 이야기하면 듣는지 마는지 모를 얼굴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기에 어머니의 인생이 너무나 고달프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사샤는 외로움에 시달렸다.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고, 그렇기 때문에 저를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와 이혼을 했고, 혼자 몸으로 제 인생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나치게 호화로운 방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이 그다지 기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신경을 끄라고 하셨지…….’
칼 같은 카렐의 말처럼 저 역시 신경을 끄고 싶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건지 사샤는 알지 못했다. 사샤의 머릿속에서는 뇌신경 가닥들을 커터 칼로 자르는 상상이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한 번 우울한 생각이 드니 이불로 파고들고 싶어졌다.
카렐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 사샤를 보면서 술로 입술을 축였다. 그러고는 사샤의 표정 없는 얼굴 한 겹 아래 진짜 심중을 바라보려는 듯한 시선으로 말을 꺼냈다.
“모리스 베자르의 말에 따르면…….”
“…….”
“발레 댄서는 반은 수녀, 반은 복서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죠.”
사샤 역시 익숙하게 들어온 말이었다. 발레단의 예술 감독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기도 했다. 고개를 든 사샤와 눈을 마주치며 카렐이 술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발레 댄서들이란 몸은 복서만큼 혹독하게 단련시키면서 생활은 수도원에 들어간 수도사나 진배없지요. 한 가지 노동에만 매진하는 삶을 택하기로 한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것도 이렇게 어릴 때부터.”
“…….”
“당신도 진지하게 발레를 하고 있는 거죠?”
“네.”
“일단은 그거면 됩니다.”
저를 깊이 이해해 주는 것 같은 후원자의 말에 사샤는 아주 살짝 후련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원통해졌다.
자신이 다섯 살만 많았다면 카렐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조금 더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논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다 보면 카렐 역시 제게 고민을 털어놓았을지도 모른다. 저 역시 후원자에게 먼지만큼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후원자님……?”
“네.”
“술은 어떤 맛이에요?”
오래 고민하던 사샤는 자기가 물어봐도 될 것 같은 부분에 대해 질문했다. 술에는 관심이 없지만 맛 정도는 물어봐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음…….”
막 술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 마신 카렐이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카렐이 워낙 술을 깔끔하게 마셨기 때문에 액체를 마시는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목울대가 크게 움직여 그가 그 황금색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사샤는 또다시 아리송한 기분에 빠졌다. 술을 마신 어른들의 표정은 정도의 차는 있어도 다 하나 같았다. 마신 후 표정이 좋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리 와 봐요. 사샤.”
사샤는 제게 손짓하는 카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눈을 들었다. 카렐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제 이름을 불러 주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후원자가 제 이름을 불러 주었다. 마치 친구처럼.
사샤가 상체를 숙여 오자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제 옆자리를 톡톡 건드렸다. 사샤는 커진 눈으로 되물었다.
“거기에 앉아요?”
“그래요. 이리 와요.”
카렐이 앉아 가죽이 묵직하게 파인 소파 옆자리에 사샤의 길고 호리호리한 몸이 올라와 앉았다. 수평이 맞지 않아 자꾸만 카렐 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추스르면서 사샤는 후원자가 과연 100㎏이 넘을지 궁금해했다.
카렐은 그렇게 제 옆자리에 사샤를 앉히고서는 아직까지 비어 있던 잔 하나에 얼음을 담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잔뜩 찬 사샤의 가슴이 마치 겨울철 흰 털로 살찌운 작은 새의 앞가슴처럼 부풀어 올랐다.
“비밀 지키겠다고 약속해요.”
“비밀…….”
“정말로 맛만 보는 겁니다.”
사샤는 카렐이 내민 잔을 보고 ‘애걔’ 하고 중얼거렸다. 황금색 액체는 잔에 따랐다고도 할 수 없이 바닥에 낮게 고여 있었다. 그러나 사샤의 실망 섞인 시선을 차단하듯 카렐이 쉿, 하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댔다.
“내가 미성년자에게 술을 먹였다는 사실을 들키면 잡혀 가요.”
“…….”
“그리고 사샤, 당신도 잡혀 갈 겁니다.”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카렐의 목소리가 너무나 달콤했다. 심지어 그 내용은 사샤의 작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공범이 되겠어요?”
사샤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잔을 받아 들고는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에 먼저 닿은 것은 차가운 얼음이었다. 카렐과 눈을 마주친 채로 사샤는 아주 약간의 술을 꿀꺽 넘겼다. 혀끝에 닿는 찡한 온도, 알코올의 자극, 그리고 혀를 한 번 크게 감싸 안고 목으로 넘어가는 액체의 맛…….
“크으으으…….”
사샤는 자신이 아까 카렐이 눈가를 찌푸렸던 것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샤는 어른의 감각을 하나 깨우쳤다. 미간을 찡그리는 건 아무튼 맛이 형편없어서는 아니었다.
“맛있어요.”
의외라는 듯이 카렐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건 맛으로 먹는 술이 아닙니다.”
“……그래요?”
“주당이 분명하군요.”
주당이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 사샤는 그가 잔을 냉큼 빼앗아 가는 걸 보고 조금 기대했다. 그러나 카렐이 거기에다 술을 더 담아 주는 일은 없었다.
비록 카렐이 아주 약간의 술도 더 허락하지 않았더라도 사샤는 행복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후원자와 친구처럼 가까워진 기분이 들어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바라는 게 있다면 그가 주말도 이 호텔에서 보내는 것이었지만, 오늘 후원자와 많이 친해졌기 때문에 며칠은 혼자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후원자님…….”
사샤는 이불을 덮고 누운 채로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필요한 거 있습니까? 불 꺼 줄까요?”
“그게 아니고요.”
카렐은 저번처럼 사샤가 내려다보이는 소파에 앉은 채였다. 사샤는 머뭇거리면서 이걸 자기가 물어도 되는 부분인지 궁금해했다.
카렐은 인내심 있게 사샤의 대답을 기다렸다.
“후원자님 친구분들은 후원자님을 뭐라고 부르나요?”
“…….”
사샤는 누워서 뒤집힌 시야로 제 머리맡의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샤워를 마친 카렐의 머리카락은 조금 젖어서 색이 탁하게 짙어진 채로 이마 위에 흐트러져 있었다. 사샤는 카렐의 머리카락이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다. 또 자기도 때에 따라 색이 여러 가지로 보이는 금발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카렐.”
짧게 대답한 카렐이 사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도 그렇게 불러요.”
사샤는 이불 속에서 몸을 꿈지럭거렸다. 그의 말이 왜인지 아주 간지럽게 들렸다.
후원자와 친해진 만큼 그 증명을 얻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아까 후원자가 자신을 불시에 ‘사샤’라고 불러 준 것처럼 저도 자신의 후원자를 친근하게 부르고 싶다고, 그런 바람이 내심 있었지만 자신은 아무런 티도 내지 않았는데…….
그런데 그는 대체 어떻게 알고 대답해 주었을까.
카렐, 카렐……. 여러 번 입속에서 되뇌었으나 실제로 부르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듯했다. 아무튼 오늘 밤은 용기가 잘 나지 않았다.
* * *
카렐이 일어나는 시간에 맞추어 좀 일찍 눈을 뜬 사샤는 방에 게오르크가 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놀랐다.
“게오르크는…… 토요일인데 아무런 약속도 없어요?”
“그건 당신 얘기겠지요.”
게오르크가 작게 속삭이자 사샤는 이것 보라며 황급히 카렐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고자질하는 마음을 담아. 그러나 카렐은 분명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게오르크를 타박하지 않았다. 사샤는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에 게오르크를 빤히 노려보았다.
“빨리 가서 아침 먹어요. 클레멘츠 씨는 바쁘십니다.”
게오르크의 말에 사샤는 시무룩해져서 식탁 앞에 앉았다. 아무래도 카렐은 토요일 아침부터 비서가 운전해 주는 멋진 차를 타고 어딘가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아침을 다 먹고 나면 카렐이 떠나 버릴 거라는 생각에 사샤의 손은 자꾸만 느려졌다.
그리고 카렐은 떠나기 전, 게오르크에게 건네받은 아이패드를 사샤에게 건넸다. 그 안에 사샤를 위한 최고의 교본이 있다는 말을 남기며.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선물이에요.”
스리피스 정장을 차려입고는 반듯한 걸음걸이로 호텔 방을 떠나는 카렐의 뒷모습을 보면서 사샤는 저도 모르게 약간의 거리감을 느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름으로 불러 보려 했는데, 그 다짐에 시동을 걸기에는 카렐이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사샤는 잠옷 대용의 늘어난 흰 티셔츠 차림으로 벽에 달라붙어서 떠나는 카렐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문이 닫히기 전 카렐이 뒤를 돌아 사샤에게 짧게 눈인사를 해 주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사샤가 잘 가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이 닫혔다.
카렐이 떠나고 나서야 사샤는 자신이 아침 내내 카렐에게 단 한마디도 말을 걸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나 버릇없다고 생각하셨을까? 그런데도 후원자는 마지막까지 매너를 지켰다.
다시 조용한 방으로 돌아온 사샤는 식탁 앞에 앉아 식은 음식을 성의 없이 깨작거렸다. 배는 불렀지만 당장 할 일도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무기력하게 이불로 파고들었다. 낮잠을 청해 봤지만 어제 너무 편하게 자서인지 잠도 오지 않았다.
사샤는 어쩔 수 없이 카렐이 주고 간 아이패드에 손을 댔다. 기계에는 젬병이지만 카렐이 준 거니까 익숙해져 보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아이패드를 가지고 놀던 사샤는 세 시간 후에 조작에 조금 익숙해졌다.
그리고 사샤는 카렐이 따로 넣어 놓은 영상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가 말한 ‘교본’일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재생을 누를 때는 그게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영화인지 몰랐다. 처음부터 제대로 볼 생각은 없었지만, 사샤는 이내 영상에 푹 빠져 버렸다. 엎드려서 보다가 등과 어깨가 아파서 소파에 털썩 드러누운 채로 화면을 높이 들었다. 검은 머리가 소파 위에 가닥가닥 흐트러졌다.
―간혹 빛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장악해야 합니다. 프린시펄이란 건 그런 거죠. 그리고 사샤 세드린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걸 할 줄 알아요.
머리가 희끗한 할아버지 한 명이 사샤 세드린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고 있었다. ‘매 순간 장악해야 한다’는 그 말이 귀에 와서 박혔다.
그 말대로 화면 속의 남자는 자기 몸의 힘과 균형을 완벽히 통제하는 눈부신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라이벌 아닌 라이벌로 느끼기는 했지만, 그거야 저에게서 사샤 세드린의 그림자를 찾으려 하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레전드의 기술과 표현력 같은 것은 사샤 역시 당연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일정 이상 경지에 오른 실력은 의심할 수 없게 된다. 보는 눈이 조금만 생겨도 너무나 명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샤는 패드를 든 채로 연습실로 걸어가 바에 오른쪽 다리를 높이 올려놓고 기대었다. 남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왠지 자신도 몸을 움직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는 사샤 세드린의 리허설과 연습 영상, 의상을 갖춘 무대 영상, 그리고 인터뷰 등으로 촘촘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영상에 빠져 있던 사샤의 눈이 한 장면에서 오래 멈추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남자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대에 올라가는 대신 평범한 작은 의자에 앉았다.
―무용수의 인생은 짧아요.
사샤 세드린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고 허스키했다. 살짝 헝클어진 검은 머리에는 군데군데 잿빛이 섞여 있었고, 나이가 든 게 분명한 얼굴에는 웃거나 말할 때마다 자연스러운 표정 주름이 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소년 같은 인상이었고, 피부에는 오래 몸을 단련한 사람의 특징처럼 매끄러운 탄력이 드러났다.
―끝은 누가 정해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때를 알게 되죠.
‘그때란?’ 카메라에 담기지 않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먹은 사샤 세드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나는 평생 이 한 동작을 잘하기 위해 수천수만 번의 훈련을 했는데, 언젠가 그냥 나이를 먹어서…… 이 신체에 갇혀서 그게 불가능한 날이 오는 겁니다.
말을 이어 가며 사샤 세드린의 입에 걸려 있던 은은한 미소는 서서히 걷혔다.
―그리고 끝이란, 아, 나는 이 동작을 다시는 할 수 없겠구나……. 그걸 아는 순간.
그리고 사샤 세드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그저 침묵할 뿐이었다.
턱가를 쓰는 손가락은 습관처럼 우아하게 뻗어 있었지만 그는 분명 상실감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화면을 보던 어린 사샤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후에 알았는데, 그 필름은 사샤 세드린의 은퇴를 겸하여 제작된 것이었다.
* * *
“우리 발레단의 정년은 만 42세란다. 그전에 부상이나 기량 저하로 은퇴해도 발레단에 어떤 형식으로든 기여를 한다면 42세까지는 급여를 받을 수 있어. 발레 스쿨 시간제 강사인 올리비아 알고 있지? 올리비아가 바로 그 케이스야. 그 애가 댄서로서 한창 활발하게 활동할 나이인 스물여덟에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재활을 마치고도 안타깝게도 다시는 발레단으로 복귀하지 못하게 됐단다. 그래서 지금 학교에서 너희를 가르치고 있는 거야.”
“…….”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쓸모가 없다고 단박에 내쫓거나 그러는 일은 없으니까……. 물론 군무 단원을 기계 부품 취급하는 발레단도 많지만, 여기는 꽤 인간적인 분위기가 있거든. 내가 그렇게 만들고 있고. 게다가 발레단에 있던 총 기간을 산정해서 퇴직금과 연금도 지급되지.”
예술 감독은 꽤 긴 문장을 쉼 없이 빠른 템포로 말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씩 웃는 모양으로 끌어당기며 약간 알쏭달쏭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설명이 충분했을까?”
턱을 약간 당긴 채로 예술 감독을 빤한 눈길로 올려다보는 소년, 사샤 세드린의 눈초리에는 아직 이해했다는 기색이 없었다. 표정 없이 빤히 바라보기만 하는 얼굴에는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만한 실마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응?”
말똥말똥 저를 올려다보는 사샤에게 마치 인내심을 요구받은 기분이 되었는지 예술 감독은 다시 재촉하듯 물었다.
그러자 사샤가 시선을 떨구며 조금 긴장한 말투로 말했다.
“전부 다 42세인가요?”
“무슨 말이니?”
“다치거나 못해도 42세까지는 발레단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이해했어요. 그런데 엄청나게 잘하게 되면…… 아주아주 뛰어나도 그때까지만 춤춰야 해요?”
사샤의 목소리에는 조금 자신이 없었다. 사샤는 등받이가 없는 작은 바퀴 의자에 앉아 괜히 바퀴를 굴려댔다.
“예를 들면…… 사샤 세드린처럼요. 아, 제 말은 저 말고…… 세드린 스튜디오의 이름을 따온 그 할아버지요.”
예술 감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분은 그냥 일개 발레 댄서가 아니잖니. 정확히는 음…….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시대의 아이콘이지.”
“……아이콘? 유명해지라는 뜻이에요?”
과거의 사샤 세드린은 42세보다 훨씬 더 오래 무용수로 활동했고, 늙어 죽을 때까지 안무가로 일했다고 한다. 결혼도 하지 않은, 오로지 일밖에 없는 인생이었다.
사샤는 자기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을지 궁금했다.
“저도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예술 감독은 사샤가 어린 나이에 헛바람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약간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글쎄.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잘 모르겠구나. 발레단에 소속되지 않아도 네가 유명해져서 팬을 많이 거느린 스타 무용수가 되면 어디든 객원으로 널 데려가려 할 거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갈라쇼에 참여할 수도 있고……. 그때가 되면 나이는 흠이 아니지.”
“…….”
“그런데 넌 춤을 추고 싶은 거니, 아니면 유명해지고 싶은 거니? 만약 후자라면 잘 생각해 보렴. 유명해지는 데 성공한다 해도 관객들이 네 춤을 보러 오는 건지, 그저 유명인을 구경하러 오는 건지 알 수 없게 될걸.”
마지막 문장에는 뼈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걱정하기 전에 일단은 훌륭한 댄서가 되어야겠지? 은퇴 이후를 걱정하기에 너는 아직 너무 어리고 건강해.”
그렇게 말하며 예술 감독은 사샤의 마르고 탄탄한 등허리를 도닥이며 일으켜 세웠다. 이제 갈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조언 감사해요.”
“그래. 언제든 고민거리가 있으면 찾아오렴.”
그 말에 사샤는 조금 의아함을 느꼈다. 예술 감독은 일개 학생인 자신이 만나고 싶어 한다고 항상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술 감독의 방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관리사감 줄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애초에 사샤가 사무실에 찾아왔던 목적은 예술 감독이 아닌 줄리아였다. 그런데 줄리아에게 통상적인 발레 댄서의 은퇴 시기 따위를 묻는 와중에 예술 감독이 저를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마치 자신을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굴며…….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오늘은 운이 좋았겠거니, 사샤는 생각했다. 예술 감독은 발레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다 직접 오디션을 보는 사람이다. 눈도장을 찍어서 나쁠 게 없었다.
줄리아에게 짧은 인사를 건넨 후 사샤는 도로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내딛는 긴 다리와 올라붙은 엉덩이는 약간의 처짐도 없이 좋은 근질로 가꾸어져 탄력 있었고, 야위어 보일 정도로 마른 몸과 달리 얼굴에는 젖살이 꽉 차 뺨이 통통했다. 확실히 은퇴 시기를 고민하기에는 너무나 젊고, 건강하고, 활기로 가득 찬 몸이었다.
하지만 카렐이 주고 간 영상을 보고 난 뒤로 사샤는 먼 미래에 대한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춤을 출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뭘 목적으로 살지?’
그건 아마도 자신뿐만 아니라 춤을 업으로 삼은 대부분의 이들이 가진 고민일 것이다.
예술 감독의 말 중 사샤의 가슴을 깊이 찌르는 말 한마디가 있었다. 크게 유명해져서 억지로 무용수로서의 수명을 연장하고 나면 관객들이 ‘춤을 보기 위해 오는 건지, 아니면 그저 유명인을 구경하러 오는 건지’ 모르게 될 거라는.
만약 그 말대로라면 긍지 있는 댄서일수록 그 상황을 참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과거보다 기량이 떨어진 저를 그저 ‘구경’하기 위해 찾아오는 관객들이라니…….
앞서 그 시기를 겪었을 모든 무용수가 존경스러워졌다.
동시에 사샤는 이른 허무함에 시달렸다.
사실 어제 영상을 보면서도 이런 기분 때문에 묘하게 울적해져서 끝까지 보지 않고 중간에 꺼버리고 말았다.
* * *
그날 학교 수업을 전부 마치기 전에 레빈에게 메시지가 왔다. 괜찮으면 저녁을 사 줄 테니 율리안과 함께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율리안은 조금 재수 없지만 만나면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 그가 사 준 고급 백화점의 마시멜로를 아직도 아껴 먹고 있는 사샤는 호텔로 돌아가는 대신에 뉴욕대가 있는 유니언 스퀘어 역으로 향했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쿡 쑤셔 넣은 채로 좁은 지하철 입구를 민첩하게 달려 내려가 문이 닫히기 직전의 칸에 쏙 올랐다. 나무를 타는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지하철에 올라타니 안은 적당히 붐비고 있었다. 유니언 스퀘어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다. 사샤는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 문 앞에 밀착해 있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으로 튀어나갔다. 사람들과 부딪힐 뻔할 때는 디딘 발목에 힘을 주고 방향을 틀었다. 이리저리 요령 좋게 빠져나가니 같은 칸에서 빠져나온 사람 중에 제일 빨리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역 바깥에 나오자 약속한 사인 아래 율리안과 레빈이 서 있었다. 신나게 달려온 것치고는 조금 쭈뼛거리며 사샤는 그들 앞에 다가갔다.
“사샤. 오랜만이네. 살 좀 쪘어?”
“2킬로…….”
사샤는 레빈에게 수줍게 자랑했다.
“너 전에 경찰차 타고 실려 갔다며. 대체 무슨 짓 하고 다니냐?”
“…….”
그러나 제 머리에 닿으려 하는 율리안의 손은 고개를 젖히는 것으로 피했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침묵을 고수했다. 율리안은 ‘까칠하고 버릇없는 어린애’ 운운하면서도 크게 타박하지는 않았다.
세 사람이 함께 이동한 곳은 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호텔 내 레스토랑이었다. 사샤는 그동안 맨해튼 안에서 지내면서도 호텔에는 통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호텔로 이사해서인지 이제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많았다. 율리안이 데리고 온 곳도 충분히 좋은 곳 같았지만 제 후원자인 카렐이 지원해 준 곳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사샤는 몰래 우쭐해졌다.
레빈이 최근의 근황을 물어 와서 사샤는 앞뒤 다 잘라먹고 어제 본 영상 이야기를 했다.
“무용수 은퇴 기념 영상을 봤어.”
“주인공이 누군데?”
“사샤 세드린……. 나 말고.”
“아, 나도 누군지 알아.”
“레빈도 알아? 와아……. 그 사람 진짜 유명하구나.”
반가운 마음에 사샤가 들고 있던 포크를 그릇 위에 흘리듯 내려놓자 달그락, 하고 심한 소리가 났다. 율리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매너 있게 식사하라고 한 소리를 했다.
“내가 그 사람은 알코올중독자라고 흉봤거든. 그랬더니 영상을 보라고 주고 갔어.”
“누가?”
“장학 재단의 후원자님이…….”
말하면서 사샤는 그릇을 포크 끝으로 직직 긁었다.
“아마 그 할아버지 팬인가 봐.”
“설마. 자기 우상을 욕했다고 영상을 보라고 주고 갔다고? 내가 한 번 에밀리가 좋아하는 밴드 별로라고 한마디 했다가 밤새 억지로 앨범 전곡을 들어야 했는데. 그거랑 똑같은 행동이잖아. 설마 후원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그렇게 속이 좁지는 않을걸.”
레빈이 좋게 해석하려 하자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율리안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런데 후원자랑 직접 만난단 말야?”
전혀 포인트가 다른 지적이었다. 흠칫 굳은 사샤는 저도 모르게 카렐을 변명해 주었다.
“내가 기숙사에서 쫓겨나서, 그래서 재단에서 방법을 찾아봐 준다고 했어. 인터뷰할 때 처음 봤고, 집을 지원해 주셨어. 아직 세 번밖에 못 봤어.”
세 번이면 아주 조금 만난 것인데, 율리안은 그래도 뭔가 개운치 못하다는 얼굴이었다. 사샤는 왠지 조급해져서 더 재잘거렸다.
“엄청나게 친절해. 어른스럽고, 그리고 입맛도 어른스러워. 아침마다 케일을 마셔……. 더 자주 오셨으면 좋겠는데, 내가 매일 메일 쓰는데 답장도 안 해 줘. 원래는 후원자님 집이니까 거기서 살아도 되는데…… 아주 가끔만 와.”
“자기 집을 빌려 줬다고? 아침 식사를 같이해?”
율리안의 인상이 더더욱 심각해졌다. 사샤는 얼른 ‘형편없이 좁은 집이야’ 하고 거짓말을 했다.
갑자기 율리안이 심각해진 이유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남들에게 책잡히고 싶지 않았다. 게오르크가 원래는 후원자와 피후원자는 만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자기는 ‘특수 상황’이지 않은가. 카렐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은 현재 노숙자 신세였을 것이다. 혹은 러시아로 돌아갔거나.
후원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고 지나치게 친절한 분이라 제게 베풀어 줄 뿐인데, 자기 때문에 욕을 듣게 하기는 싫었다.
“아침은 내가 잘 챙겨 먹지 않으니까…… 걱정해 주셔서 그런 거야.”
“…….”
“그래서 2킬로그램이나 쪘잖아.”
“…….”
“율리안은 왜 세상을 나쁘게만 봐?”
사샤는 포크로 아무것도 없는 접시 바닥을 콕 찍으며 율리안을 노려보듯 올려다보았다. 도전적인 표정이었지만 율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흘렸다.
“내가 널 걱정한다고 해도 넌 믿지 않겠지만 말이다. 이 꼬마 녀석아.”
그러면서 율리안은 손가락 끝으로 사샤의 이마를 쭉 밀었다. 밀려나기 싫은데 절로 목이 꺾여 분했다. 사샤는 고개를 털며 율리안의 손을 떨쳐 냈다.
“너같이 눈에 띄는 외모에, 신체에, 경계심도 부족하고. 진짜로 영악하기라도 하면 몰라, 자기가 머리를 굴릴 줄 안다고 믿는 백치를……. 후. 더 말해서 뭐 하겠어. 관두자.”
율리안의 말이 욕인지 칭찬인지 알 수가 없어 사샤는 말을 꿀꺽 삼켰다.
“……아무튼 그 후원자가 부의 재분배를 하기로 마음먹고 선행을 하고 있는 거라면 다행이지. 그건 좋은 일이야. 아무렴…….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사샤는 말없이 율리안의 접시를 바라보았다. 이런 고급스러운 음식을 맛보는 것이 아주 가끔이라서 남긴 것 하나 없이 싹 먹어치운 자신과 달리 율리안의 접시에는 아직도 속이 촉촉한 농어 스테이크가 남아 있었다. 율리안이야말로 자신에게 스테이크의 재분배를 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 영상은 무슨 내용인데? 제목은 뭐야? 나도 보고 싶다.”
다행스럽게도 레빈이 화제를 돌려주었다. 사샤는 제목을 기억하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당황하면서, 영상도 아직 끝까지 본 게 아니라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저었다. 꽤 진한 감상을 느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레빈에게 설명해 주려니 자신은 아는 게 없었다.
이래서 율리안이 저보고 백치라고 하는 건가 싶어 사샤는 자존심이 상해 버렸다.
“그럼 일단 한 번 다 보고, 감상문 같은 걸 써 보면 어때? 어차피 매일 편지 쓴다며.”
“……다 보고 쓸게.”
역시 레빈은 도움 되는 말을 많이 해 준다. 사샤 역시 레빈의 제안이 좋은 생각이라는 데에 동의했다.
그때 율리안이 옆에서 툭 내뱉듯 중얼거렸다.
“그럼 키다리 아저씨 같은 건가.”
“키다리 아저씨? 그거 책이지? 나도 알아.”
사샤는 얼른 대답했다. 율리안은 평소 자기가 가진 지식을 자랑할 때가 많았고, 사샤는 그에 대해 약간의 열패감을 느끼곤 했다. 그래서인지 사샤에게는 자기도 아는 화제를 율리안이 말하면 지고 싶지 않아 아는 척이 심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 무슨 내용인데.”
율리안이 빙글빙글 웃으며 되물어 왔다.
“여자애가…… 편지 쓰는 내용이잖아.”
“설마 앞부분만 읽었어?”
“…….”
율리안의 지적이 사실이라서 사샤는 눈을 피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율리안은 이번에 『키다리 아저씨』 책을 사서 사샤의 손에 들려주었다. 자존심이 상하게도 7세 어린이용으로 개정해 글자 반, 삽화 반인 동화책이었다.
화를 내고 싶었지만 사샤를 너무나도 잘 아는 율리안은 끝까지 그 책을 고집했다. 빽빽한 글자를 보면 숨이 턱 막혀 버리는 사샤가 영어 원서로 책을 접한다면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지쳐 버리고 말 것이 분명하다며.
“사샤. 그럼 조심해서 가. 나중에 우리도 집 구경시켜 줘.”
“그래. 형편없이 좁은 집이라고 했지? 식사는 서서 해도 상관없어. 먹을 건 우리가 사 갈게.”
그 말에 사샤는 자연스레 상상해 봤다. 나름 유복하게 자란 율리안이 카렐이 지원해 준 호텔 룸을 보고 깜짝 놀라는 광경을.
그렇다면 통쾌할 것 같았다. 그리고 마침 우연히 후원자가 호텔 룸 안에 와 있다면 진짜 어른인 그를 보고 기에 눌린 율리안은 공손해질지도 모른다. 그 상황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샜다.
호텔로 돌아가는 사샤의 걸음이 빨라졌다. 갑자기 카렐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이제 오는 건가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자기를 기다리고 있으면 너무나 행복할 것 같았다.
호텔 로비로 들어서 마이클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까지 한달음에 내달려간 사샤는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문을 열고 제 걸음에 따라 불이 켜지는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여기 이쯤에 카렐이 서 있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혼자 인사를 했다.
후원자님. 오늘 제가 저녁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보세요. 배가 이렇게 빵빵해졌어요……. 과식은 좋지 않지만 저는 살이 쪄야 되니까 하루 정도는 괜찮아요.
후원자님, 아니 카렐.
오늘은 뭐 하셨어요?
하루 종일 기분 좋으셨어요?
성가시거나 화날 만한 일은 없으셨고요?
괜찮으시다면 전화라도 걸고 싶어요.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잘 자라고 한마디만 해 주시면 좋겠어요.
하루에 10초만 시간을 내주시면 정말 행복할 텐데.
어깨에 멘 스포츠백도 벗어 내려두지 않은 채로 그대로 소파에 털썩 누운 사샤는 천장을 보면서 카렐이 제 이마에 키스해 주던 순간을 상상했다. 물기로 반짝이는 까만 눈이 행복하게 휘어졌다.
“카렐…….”
이마에 닿는 입술을 상상하면서 사샤는 제 손끝으로 이마 가운데를 살짝 문질렀다. 실제로 입술이 닿은 것도 아닌데, 그때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감촉에 몸이 떨렸다.
웅크리면서 옆으로 돌아누운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소파에 하체를 맞붙이며 몸을 꿈틀거렸다. 이상한 열기가 몸에서 피어올랐다. 이대로 잠들면 밤에 실례를 하게 된다……. 기숙사에 살 때에도 이런 일이 있어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는 원숭이처럼 시끄럽게 떠드는 동기들도 없고, 제 침대로 몰래 들어와 아래를 더듬어대는 마누엘도 없었다. 안심한 사샤는 카렐을 생각하면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라 발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