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후원자, 미스터 클레멘츠 (2/30)

  2. 후원자, 미스터 클레멘츠

[228 W 43rd St.]

신발을 신기 위해 현관에 주저앉은 채로 사샤는 카렐의 비서가 찍어 준 주소를 구글 맵으로 찾아보았다. 지도를 유심히 살펴보니 근처에 타임스 스퀘어가 보였다. 일단 역 근처에 가면 게오르크가 말한 재단 사무실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접 태우러 가지요.’

제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위해 정식으로 만나길 원한다는 게오르크는 통화 말미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사샤는 거절했다. 이 정도 길은 스스로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게오르크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사샤는 미스터 클레멘츠의 비서라는 안톤 게오르크에게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1년간 충실히 보낸 메일을 단 한 번도 카렐 클레멘츠에게 전해 주지 않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아직까지도 태연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았던 날처럼 눈물로 몸부림치는 일은 더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그날은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 버렸는지 스스로의 심경이 낯설게 느껴졌고, 심지어 과거의 자신에게 약간 거리감을 느낄 정도였다. 아무튼 그때의 강렬한 상실감과 허망함 같은 것은 아직도 사샤의 마음에 여파를 미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게오르크를 향한 미움과 불신으로 자라났다.

쭈그려 앉아 신발 끈을 묶고 있을 때 바딤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신발이라도 조금 깨끗한 걸 신고 가야지.”

“이거 하나밖에 없어요.”

그 말대로 사샤는 한겨울에도 얇은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진 스니커즈를 신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데다 외출용 신발보다는 발레 슈즈를 신는 시간이 더 긴 사샤의 신발은 별로 낡은 법이 없었지만, 정학을 받은 뒤로 외출이 잦아진 탓인지 며칠 사이에 크게 더러워져 있었다. 바딤의 말을 듣고 나니 얼룩덜룩한 운동화가 눈에 거슬렸다. 특히 앞코와 옆 솔기 부분에 구정물이 한 번 튄 것처럼 얼룩이 심하게 져 있었다.

바딤은 말없이 사샤의 앞에 주저앉아 물티슈로 얼룩진 운동화 앞코를 빡빡 닦아 주었다. 그걸 내려다보는 사샤의 귀가 붉게 물들었다. 기가 죽고 싶지 않아 스포츠백 가장 아래에 고이 접어 두었던 깨끗이 세탁한 옷을 꺼내 입었지만 신발은 단 하나뿐이라 더 좋은 것을 고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혹시 후원자를 만나게 되면 나한테 한 것처럼 따박따박 말대답하지 말고 순종적인 아이처럼 굴어라.”

“전 말대답한 적 없어요.”

사샤가 대답하자마자 바딤이 그게 바로 말대답이라는 듯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사샤는 흠칫 주눅 들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했다.

“그리고 클레멘츠 씨는 아마 못 만날걸요…….”

“…….”

“비서가 그랬어요. 원래 후원자와 피후원자는 만나는 게 금지되어 있대요.”

그렇게 말하면서 사샤는 실망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시무룩한 눈빛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바딤은 짧게 한숨을 쉬고 사샤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사샤가 재단의 호출을 받았다는 말을 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노골적으로 심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크게 내켜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마치 내내 숨기고 있던 미완성의 조각품을 어쩔 수 없이 공개하는 태도 같기도 했다.

“꾸물거리지 말고 늦기 전에 빨리 달려가!”

바딤의 투박한 손에 엉덩이를 얻어맞은 사샤는 시간을 보고 헛숨을 삼키면서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나무와 철재로 만들어진 계단이 쿵쾅거리며 그 진동이 현관까지 울렸다.

다행히 사샤는 역에 들어서자마자 막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지하철에 올라탈 수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깜깜한 어둠만 보이는 창가에 딱 달라붙어 있다가 타임스 스퀘어 역을 알리는 안내가 나오자마자 열린 문틈으로 쏙 빠져 달려 나갔다. 

타임스 스퀘어는 오랜만에 들르는 곳이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여전히 붐비고 있었다. 도로 공사, 보수 중인 건물들, 경찰차, 택시가 관광객과 함께 어지러이 얽힌 복잡한 역 입구를 지나 41번가 길을 따라 들어가자 금세 정돈된 사무실 건물들이 줄을 이었다. 이 근처는 전통적으로 오래된 언론사의 사무실이 많은 곳으로, 뉴욕 타임스 본사도 바로 근처였다.

지도와 주변을 반복해서 봐 가며 두리번거리던 사샤는 이내 건물 입구를 찾아냈다. 거의 100년 전쯤 지어진 것 같은 고풍스러운 근대 양식의 건물이었다. 입구는 2층 높이까지 다다를 정도로 거대했는데, 고개를 쳐들자 가느다랗고 세련된 고딕체로 ‘228’이라는 번지수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긴가 봐.’

유리문 안으로는 검은 대리석 바닥과 검붉은 색으로 지어진 묵직한 데스크가 비쳐 보였다. 낯선 환경에 쉽사리 발을 들이지 못한 사샤가 구경꾼처럼 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였다. 검은 슈트를 갑옷처럼 감싼, 몸이 커다란 남자가 데스크 안에서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사샤는 자기도 모르게 그냥 지나가는 사람인 척을 했다.

“방문객이십니까?”

그러나 사샤의 뒷덜미를 잡아챈 것은 가드의 목소리였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던 사샤는 황급히 다시 끄덕였다.

가드가 귓가에 손을 올리더니 ‘도착한 것 같습니다’라고 사샤를 보며 중얼거렸다. 저에게 말을 건 줄 알았던 사샤가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 사이, 가드가 복도 안쪽 깊은 곳을 가리켰다. 그제야 사샤는 가드의 귀에 작은 무전기가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마터면 크게 부끄러울 뻔했다.

“복도 끝으로 가시면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이루어진 입장에 사샤는 세 번이나 고맙다고 말하고서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눈썹을 치켜세운 가드는 가볍게 고개만 까닥이더니 다시 철갑 갑옷을 입은 병사처럼 뒷짐을 지고 아무것도 없는 로비를 바라보고 섰다.

와아…….

그 모습이 굉장히 절도 있어 보여서 사샤는 감탄하면서 건물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양복을 입지도 않았고 출입증 확인도 하지 않고 짐 검사도 안 했는데 이런 곳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복도 안은 그냥 심심한 석벽이 아니었다. 복도 양옆으로는 모자 가게, 캔디 가게, 안경 가게 같은 전통 있는 소품 숍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중 특히 캔디 숍에 끌린 사샤는 아름다운 필기체 레터링으로 장식된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가게 이름 아래 Since 1910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100년이 넘은 사탕 가게라니!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 없던 사샤는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마침 사탕 장인이 꾸덕꾸덕한 질감의 푸른색 캔디를 돌판에 붓고 있었다. 뜨거운 곳에서 끓다가 이제 막 굳기 시작한 캔디의 표면은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유리창 밖의 사샤를 발견한 장인이 미소를 지었다. 사샤는 정신이 팔려 그가 캔디 반죽을 능수능란한 손길로 늘리고 뭉치는 것을 한참이나 구경했다.

우우웅, 우우웅.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희미한 진동음 때문이었다. 주머니로 손을 가져간 사샤는 저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는 사실을 굼뜨게 알아챘다.

“여보세요?”

―게오르크입니다. 오고 있습니까?

게오르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샤의 뇌로 잊고 있던 정보가 마구 흘러들어 왔다.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섰다.

타임스 스퀘어에 막 도착했을 때에도 이미 시간이 빠듯한 상태였다. 당황해서 변명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던 사샤의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열린 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남자였다.

“하.”

짧게 한숨을 내쉰 게오르크가 전화를 끊고는 그 안에서 내렸다.

딱 한 번 보았지만 그는 카렐의 비서가 틀림없었다. 게오르크는 엘리베이터 문에 손을 댄 채로 캔디 숍 앞에 멍청히 서 있는 사샤에게 손짓했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왜인지 바딤보다도 기세가 엄했다.

“올라갑시다.”

* * *

“사샤 세드린. 먼저 확실히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후원자는 당신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든지, 어떤 성품이든지.”

“…….”

“인성 문제 때문에 지원을 더하거나 끊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건 올바른 후원이 아니니까요. 돈으로 상실감을 겪는 사람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걸 굉장히 혐오하시기도 하고.”

사샤는 길게 누워도 자리가 한참 남을 법한 커다란 물소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광활하게 넓은 응접실 바깥으로 탁 트인 창이 보였고, 게오르크는 하필 해를 등지고 역광으로 앉았다. 때문에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고 눈치도 살필 수 없어 사샤는 속으로 오들오들 떨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실수하는 건 정말 버티기 어려운 일이다. 자책감이 솟구쳐 숨도 쉴 수 없다. 주먹을 쥐어 가린 손 안에서 스스로의 손바닥을 손톱 끝으로 마구 찌르면서, 사샤는 어떻게든 진정하려고 했다. 시선은 그림처럼 예쁜 쿠키 두 개와 레모네이드잔에 박혀 있었지만 거기에 손을 댈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신은 언젠가부터 저렇게 생긴 쿠키를 먹으면 꼭 체하곤 했다.

그리고 멍청하게도 캔디 숍 따위에 정신이 팔려 지각을 해 버렸다는 패닉이 가시기도 전에 게오르크는 ‘정학 상태’를 들먹였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좀 다릅니다. 학생들과 마찰을 일으켰다죠?”

그러면서 게오르크는 서류 몇 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영어를 속독하지 못하는 사샤는 그게 무슨 내용의 서류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종이 윗면에 인쇄된 로고로 학교 측이 전달해 준 서류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후원자도 저걸 보셨을까?

게오르크가 말을 멈추고 사샤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샤는 가까스로 그의 마지막 말이 의문형으로 끝났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 네……. 마누엘이 크게 다쳐서 프랑스로 돌아갔어요.”

“폭력 사태의 결과로?”

“네. 제가 다치게 만들어서.”

“그래요. 갈등의 원인이 본인에게 있었습니까?”

게오르크의 물음에 사샤의 심장은 짜릿짜릿 아프기 시작했다.

갈등의 원인.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마누엘이 게이가 아니었다면, 저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하필 제 마음이 괴로운 상태에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덮쳐 오지 않았다면…… 그런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전히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는 생각하지만, 자신만 없었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보고서에는 성적인 충돌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일부러 자세하게 명시하지 않은 건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겠지만…… 워낙 모호하군요. 이 부분을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이다음에 어른들이 그 일에 대해서 물어보면 사샤는 진실을 말하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잘못을 해도 무조건 감싸 주는 마누엘의 부모님 같은 보호자가 없으니까 자기가 스스로를 변호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진실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억지로 도닥이며 묻어 두었다. 하늘과 거기에 있는 신이 증인이다. 나중에 언젠가 마누엘이 프랑스에서 돌아와 사과를 해 준다면, 그래서 줄리아와 선생님들의 오해가 풀린다면, 잠깐이나마 저를 차갑게 대했던 조제의 마음이 풀린다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그렇게 시간만 지나면 모든 게 다 나아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묻어 두었던 마음이 어느새 곪아 버렸는지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서러워 자꾸만 말문이 막혔다.

마음은 또박또박 명료하게 설명하고 싶은데, 무언가가 자신을 가로막았다. 저를 타인처럼 바라보는 게오르크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 그리고 정학 중의 가출 소동, 불법적인 노동 행위에 대해서도 타당한 사유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보고받던 사샤 세드린이라는 학생은 1년 동안 성실하게 학업을 마치고 작년에는 최우수 장학생으로 뽑히기까지 했는데요……. 이 한 주간 일어난 모든 일이 믿기지가 않는군요.”

“저는, 저는…….”

어렵게나마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사샤는 어딘가에서 새된 이명을 들었다. 그건 압력으로 꽉 찬 냄비 구멍에서 증기가 빠져나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잠시 후에야 사샤는 그게 자신의 이상한 숨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겁을 주면 안 되지.”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손이 시야를 가렸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 놀란 듯한 게오르크의 얼굴. 눈을 가린 손의 손목쯤에서 은빛 금속이 반짝인 것 같기도 했다.

“인터뷰를 하라고 했지, 수사를 하라고 하지는 않았잖아. 너는 그게 문제야, 게오르크.”

시야를 잠깐 가렸다가, 이어 코와 입을 한 번에 가로막은 큰 손 안에서 사샤는 여러 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건 분명 어디선가 맡아 본 적이 있는 향수 냄새였다.

지나친 긴장으로 갑작스레 과호흡 상태에 빠졌던 소년은 큰 손 안에서 천천히 안정을 찾았다. 습기 찬 숨을 몰아쉬다가 척척히 젖은 목덜미를 젖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던 다른 한 손이 천천히 고개를 내리고 눈을 감게 만들었다.

그가 눈을 감기기 전 사샤는 분명 저를 달래던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미스터 클레멘츠.’

큰 손 안에서 반복해서 심호흡을 하며 사샤는 그가 이끄는 대로 가죽 소파에 천천히 등을 기대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향긋하고 깔끔한 편백향이 코로 밀려 들어왔다.

사샤는 가물가물한 시야로 카렐을 거꾸로 올려다보았다. 어깨를 침착하게 도닥여 주던 왼손은 사샤가 조금 진정되는 듯하자 다시 그의 주머니 안으로 숨어들었다. 사샤의 긴 시선이 그 손을 아쉽게 따라갔다.

사샤는 그가 한 번쯤 저를 내려다보며 괜찮으냐고 묻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후원자는 끝까지 정면의 제 비서, 게오르크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린애를 다루는 법을 잘 몰라서.”

게오르크의 말에 카렐은 그를 질책하는 법도 없이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사샤가 이제는 숨을 쉴 만하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의 손은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

사샤는 카렐이 사라진 곳의 천장 무늬를 관찰하면서 제 뒤에서 멀어져 가는 구둣발 소리를 들었다.

‘가시는 걸까.’

잠시 후 묵직한 문이 한 번 열렸다가 가볍게 맞물려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편백향이 여전히 코끝에 머무르는 듯했다.

“이제 일어나요. 괜찮습니까?”

게오르크의 말에 사샤는 흐느적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손수건을 하나 주어서 사샤는 얼른 땀이 배어난 이마와 목덜미를 닦으며 물었다.

“저기가 후원자님의 방이에요?”

게오르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샤의 시선은 어두운 색 목재로 만들어진 문에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까 구둣발이 저쪽으로 향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후원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다.

게다가 자신이 불안 증세를 보이자마자 바로 나타나 주었다. 마치 쭉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사샤는 고개를 홱 돌려 게오르크에게 물었다.

“미스터 클레멘츠는 바쁘시죠? 매일 일도 많이 하시고, 손님도 많고…….”

“…….”

“지금도 바쁘시죠? 방해하면 안 되는 거죠?”

어린애가 무엇을 캐묻고 싶어 하는지 티가 역력히 났지만 게오르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서류를 챙겨 검은색 가죽 파일에 넣을 뿐이었다.

사샤는 아까 전 게오르크와 말할 때와 달리 말이 많아졌고, 또 말의 속도도 빨라졌다. 무어라 대답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게오르크가 스스로 방금 전 실토했듯이 그는 어린애를 다루는 데는 익숙지 않았다.

게다가 잠잠히 질책하던 카렐의 그 눈빛.

그래서 게오르크는 어린애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상관의 명령을 묵묵히 수행하는 쪽을 택했다.

“지금은 일정이 없으십니다. 이쪽으로 와요.”

게오르크의 말에 사샤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현기증이 나서 크게 한 번 휘청이기는 했지만 아주 씩씩한 동작이었다.

미스터 클레멘츠가 깔끔히 사라져 버린 후 허망해진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것처럼 게오르크는 사샤를 이끌고 묵직한 문에 다가가더니 두 번 짧게 노크를 했다.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샤의 심장은 쿵쿵, 하는 소리를 넘어 쾅쾅, 하고 뛰기 시작했다.

노크를 하자마자 게오르크는 문을 밀어 열었다.

“들어가도 됩니다.”

안쪽에서 방문을 허락하는 그 어떤 목소리도 듣지 못한 사샤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문을 받치고 있는 게오르크의 팔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열린 문 안으로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방의 크기였다. 바깥의 응접실보다도 더 넓은 것 같았다. 바닥 전체에 깔려 있는, 검은 광택이 도는 카펫을 따라 쭉 시선을 옮기자 가운데 소파 테이블 앞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바로 자신의 후원자였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얼굴로 게오르크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그의 등 뒤에서 말없이 문을 탁 닫았을 뿐이다.

마른침을 삼킨 사샤는 카렐이 앉아 있는 방 가운데의 소파로 천천히 다가갔다. 방 안은 지금까지 사샤가 접해 보지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바깥의 응접실이 심플한 가구와 유리 테이블, 추상적인 조각과 여백을 준 공간 등으로 현대적인 분위기를 냈다면, 카렐의 집무실 안에는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앤티크한 가구가 가득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태닝이 된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갈색 소파나 그 옆의 안락의자, 화려한 다리 장식이 인상적인 테이블, 그 위에는 불이 붙지 않은 금빛 촛대도 있었다.

사샤는 발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카렐의 앞으로 다가갔다.

카렐은 소파에 꽤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조금 눈을 들어 사샤를 확인한 카렐은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눈짓하고는 앞으로 허리를 숙여 테이블 위의 접시에 손을 뻗었다. 생긴 걸로 보아 바깥에서 보았던 쿠키와 같은 종류인 것 같았다.

쿠키 하나를 집어 든 카렐이 그걸 반으로 조각내 사샤에게 건넸다. 카렐의 손톱만 하다고 생각했던 쿠키 조각은 사샤가 막상 받아 들고 나니 꽤 큼직했다.

사샤는 조금 갈등했다. 쿠키는 먹고 나면 꼭 체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주셨으니까…….

아작.

쿠키를 조금 씹어 먹은 사샤는 혀끝에서부터 퍼지는 단맛에 저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카렐은 사샤가 쿠키 반쪽을 다 먹을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비서의 행동은 사과할게요.”

“사과요?”

화들짝 놀란 사샤가 되물었다.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말투가 좀 딱딱하죠.”

“괘, 괜찮아요. 저도 영어를 잘 못해요. 이해할 수 있어요.”

사샤의 말에 카렐이 조금 웃었다. 그의 소리 없는 미소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사샤는 나머지 반쪽의 쿠키에 스스로 손을 뻗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추궁하려는 건 아니고, 질책하거나 혼내려는 건 더더욱 아니에요. 단지 우리가 계속 보고받기로는 ‘사샤 세드린’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학업에 열중하던 학생이었는데…… 큰 변화가 포착되니 걱정스러웠기 때문에.”

“저를 걱정하셨어요?”

사샤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눈을 마주치며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후원자에게 정말 잘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칭찬받는 자리에서 인사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나서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이 무척 부끄러웠다. 귀가 화끈거렸다.

차라리 그날 연습이 끝나고 나서 쫓아가지 말 것을 그랬다. 이제 후원자는 자신이 누군지 분명히 얼굴을 인지해 버렸을 것이다.

“이유. 그렇게 된 이유도 물론 중요하지만…… 문제를 겪고 있는 부분을 찾아서 지원해 주면 다시 착한 학생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거죠.”

“…….”

“학교에서 파악하는 부분은 언제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물었다.

“정학 처분에 대한 이유는 보고서에 적혀 있던 게 진실입니까?”

그 물음에 정신이 든 사샤는 아까 카렐이 했던 말을 상기해 냈다. ‘이건 추궁이 아닌 인터뷰’라는 말을.

사샤는 카렐이 저렇게 관대해 보여도 그 역시 나름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마누엘의 비밀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발목을 붙잡기는 했지만, 현재의 사샤에게는 카렐의 앞에서 사고나 치고 다니는 한심한 학생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더 컸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자기 입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인지도 몰랐다.

“제가 마누엘을 먼저 때린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진짜로 때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러면서 사샤는 양손을 모으고 조금 떨면서 사실을 이야기했다. 가끔씩 눈을 들어 카렐을 흘끔거릴 때에는 꼭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꾸 눈을 굴리는 사샤와는 달리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고 사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저는 게이가 아니에요.”

“…….”

“남자는 싫어요. 역겨워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발레를 한다고 하면 친구들이 놀렸어요. 너도 여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마누엘은 좋은 친구였는데, 저한테 그런…… 그런 짓을 하려고 해서. 저는 너무 싫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가 저를 뼛속까지 관찰하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자꾸만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래도 사샤는 용기를 내서 끝까지 말했다.

“그냥 발로 찼을 뿐인데…… 마누엘이 하필이면 혀를 깨물어서…….”

거기까지 말한 다음 사샤는 카렐의 눈치를 보면서 소리 없이 심호흡을 했다. 모아 쥐고 있던 손이 덜덜 떨려 꼭 붙잡으면서.

결국 말해 버렸다, 마누엘이 숨기고 있던 진실을.

죄책감과 함께 후련한 기분이 사샤를 덮쳤다.

사샤는 항상 궁금했었다. 자기가 결백하다는 진실을 말하면 어른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줄지를.

그리고 카렐은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다른 어른들과 달리 질책하거나 의심하는 눈빛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처음처럼 가라앉은 눈빛으로 테이블 앞에 놓인 물 한 잔을 마셨을 뿐이다.

사샤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게오르크가 말하길, 후원자는 학생의 가치관이나 성품으로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게이거나 아니거나, 그게 후원자에게 중요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에게만은 오명을 벗고 싶다는 일념으로 사샤는 용기를 냈던 것이다.

“난 당신의 말을 믿어요.”

물잔을 내려놓은 카렐이 그렇게 말했다.

“사건에 대한 일은 상대 학생이 돌아오면 재조사하라고 지시하지요. 무고가 밝혀지면 정학 처분에 대한 보상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것이었나?

사샤는 조금 감격해서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역시 이런 순간만을 기다렸다. 누군가 한 명 정도는 자신의 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사샤는 아주 옛날부터 자신의 후원자가 그렇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처음부터 자신에게 아주 친절했고, 생일도 잊지 않고 카드를 보내 주었으니까.

동시에 사샤는 마누엘에게 상처받았다. 제 부모에게 이런 무조건적인 이해를 받을 수 있었으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아서.

“그럼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뭔가요?”

그의 물음에 사샤의 눈이 크게 뜨였다. 먹다 남은 쿠키가 손가락 안에서 으스러졌다.

“제가 필요한 거요?”

카렐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에 몸을 묻고 편하게 등을 기댄 그는 게오르크의 말대로 자신을 판단하거나 평가 내리는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저 원하는 것을 묻고 있었다. 정말로 들어줄 것처럼.

사샤는 입가에 쿠키 가루를 묻힌 채로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저는 학교에서 항상 많이 혼나요. 마누엘하고 싸웠고요. 그건 제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가 자, 자, 잘한 게 없는데 왜 주시려는지 궁금해요. 저는 자꾸 문제만 일으키는데…….”

“그건 시간을 두고 보면 알겠지요.”

“…….”

“내 지원을 받은 학생이 미래에 훌륭한 발레 댄서가 된다면, 다들 내가 옳았다고 말할 겁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샤는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게 바로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허벅지의 염증이 사라지고, 마누엘이 돌아와 사실을 고백하고, 파트타임 잡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콩쿠르에 나가고…… 학교를 마칠 때에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해서 발레단에 입단하게 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고.

사샤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그사이에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자신이 마누엘을 이유 없이 때렸다고 생각하는 조제, 제게 실망한 줄리아와 다른 사감들, 아직 고작 학생인 저에게 당장 전설적인 발레 댄서처럼 추라며 한참 부족하다고 말하는 바딤까지.

지금까지 참고 있던 눈물이 눈가에 가득 고였다. 사샤는 고개를 수그리고 말없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눈물은 닦아도 닦아도 흘러넘치기만 했다.

카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트타임 잡을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생활비를 지원해 줄게요. 기숙사에서 쫓겨났다면 살 곳을 지원해 줄 수도 있습니다. 혹시 어머니가 보고 싶은 거라면 비행기 표를 보내 드릴 수도 있고.”

“…….”

“전부 다 원하면 그렇게 해 줄게요. 그 대신…….”

“그 대신?”

목이 멘 사샤가 되물었다.

“훌륭한 발레 댄서가 되겠다고 약속해요.”

그건 자신 역시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다.

“최우수 장학생으로 졸업해서 발레단에 입단하고…… 그리고 스물두 살쯤에는 최연소 프린시펄이 되는 거죠. 어때요.”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자고요.”

“흐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샤는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얼굴로 엉엉 울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무릎까지 기어가서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울고 싶었지만, 그러면 후원자가 깜짝 놀랄까 봐 그러지는 못했다.

감격에 몸을 떨면서 울던 사샤는 곧 심한 딸꾹질을 시작했다. 그러자 난감한 얼굴을 한 카렐이 곁으로 다가와 등을 두드리며 찬물을 마시게 했다. 후원자가 제 입에 컵을 대주어서 목을 젖히고 물을 꿀꺽꿀꺽 삼키던 사샤는 집중한 후원자의 옆얼굴을 흘끔대다가 갑자기 사레가 들려 켁, 하고 그의 옷에 물을 뱉고 말았다.

“이런…….”

그런데도 후원자는 싫은 얼굴도 하지 않고 캑캑대는 사샤의 등을 두드려 주기만 했다. 그의 젖은 셔츠와 넥타이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사샤뿐이었다. 결국 사샤는 참지 못하고 그의 단단한 허리에 매달려 울어 버렸다.

* * *

“레빈. 나 장학 재단에서 연락 왔다고 했잖아. 조금 전에 비서랑 후원자님이 오셔서 나를 직접 인터뷰했는데…….”

사샤는 휴대폰을 든 채로 방금 전 자신을 내려놓고 떠난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목 끄트머리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잠깐 멈춰 있는, 매끄러운 검은 광택이 도는 묵직한 차. 그 차에는 자신의 후원자가 타고 있을 터였다.

아쉽게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 차는 우회전으로 골목을 빠져나가며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와, 떨렸겠다.

“응. 엄청 긴장됐어.”

―또박또박 잘 대답했어?

“잘 모르겠어. 그러려고 했는데, 사실 좀 떨렸거든…….”

사샤는 비서와 이야기할 때 과호흡이 왔던 것, 그리고 후원자와 말할 때 마지막에 울어 버렸던 것은 일부러 숨겼다.

―결과는?

“그것도 잘 모르겠어. 비서가 조만간 연락을 줄 거라고 했어. 그런데 생활비를 줄 수도 있고, 집세 지원을 해 줄 수도 있대. 내가 필요하면 엄마에게 비행기 표도 보내 준다고 했어.”

―그건 정말 좋네! 잘 되면 좋겠다. 그치?

“응. 근데 가능하면 집세 지원이 좋아. 그게 제일 급하니까.”

사샤는 아직도 울음기가 남아 빨간 코를 훔치면서 바딤의 아파트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정원을 공유하는 3층짜리 건물의 2층 첫 번째 집이 바딤의 집이었다. 쿵쿵, 작은 철제 계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레빈이 벌써 선생님 집에 도착했느냐고 물어보았다.

“저기, 그런데…….”

―응?

“인터뷰할 때 울면 감점이야?”

―음……. 글쎄, 점수를 매기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보통은 울지 않는 쪽이 좋겠지?

“하아…….”

사샤의 깊은 한숨 소리로 말미암아 레빈은 인터뷰 광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의젓하게 굴었으면 좋으련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감정에 북받쳐 울어 버린 모양이다. ‘하아’ 사샤가 또 한 번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그 일로 가장 자책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사샤일 것이다. 그래서 레빈은 무어라 가타부타 더 말하는 대신, 그냥 긍정적인 말만 남겼다.

―다 잘 될 거야. 사샤.

“응. 또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나서 사샤는 계단에 주저앉았다. 근육과 뼈만 남은 호리호리한 다리가 계단 두 개에 길게 걸쳐졌다. 1층에 혼자 사는 여자가 키우는 구관조 다섯 마리가 사샤를 향해 울어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샤는 저도 모르게 엄지와 검지의 손끝을 붙여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후원자가 입었던 옷의 질감이 손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빳빳한 모직의 감촉, 그리고 피부 아래에 바로 뼈가 만져지는 것 같았던 단단한 몸통과 허벅지.

마치 딱딱한 고목나무를 끌어안은 느낌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그의 복부에 머리를 푹 기댈 때 이마에 혹이 나는 줄 알았다. 이마를 매만지면서 사샤는 어릴 때 딱 한번 할머니에게 안겼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할머니는 체형이 통통해서 그런지 안겼을 때 말랑하고 푹신푹신한 느낌이 들었었다.

반대로 미스터 클레멘츠의 품은 전혀 달랐다.

그래도 그 품이 편안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자신을 혼내고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가 자신을 성품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거라는 게오르크의 말을 들었을 때는 내심 실망스럽기도 했었다. 착한 학생이 되어도 더 칭찬해 주지는 않겠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에.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지금은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게다가 후원자는 자신이 완전히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다. 나중에는 달래 주려 할수록 제 서러움이 커진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하아.”

사샤는 다시 깊이 한숨을 쉬었다. 어른스럽게 굴지 못한 점이 계속 후회스러웠다.

게오르크가 들어와 후원자의 다음 일정이 있다는 걸 알리지 않았다면 아마 계속 그렇게 질질 짜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후원자는 관대하게 자신을 여기까지 태워다 주었다. 어린애에게 시간 낭비를 했다거나 성가시다는 티도 내지 않고……. 자신이 쓴 메일을 전부 쓸모없는 장난 메일 취급해서 버려 버린 게오르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였다.

‘훌륭한 발레 댄서가 되겠다고 약속해요.’

난 진짜 그렇게 되고 말 거야.

난 그저 그런 댄서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카렐의 목소리를 떠올리자마자 사샤는 철제 계단 아래로 쿵쾅거리며 내려갔다. 계단 손잡이를 바 삼아 잡고 오른팔은 길게 알 라 스콩으로 뻗고 앞뒤로 바트망을 가볍게 찼다. 청바지를 입은 채로도 다리가 얼마나 곧게 뻗었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가볍게 다리를 푼 사샤는 오른쪽 다리를 뒤로 뻗으며 아라베스크 자세를 만들었다. 그러곤 다리를 높이 들며 등허리를 버틴 채로 우아하게 팡셰(penché). 다시 일어나 왼다리를 플리에로 깊게 눌렀다가 단번에 애티튜드 포즈를 취했다. 오르골 위의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포즈에 구관조들이 ‘브라보!’를 외쳤다.

등골을 타고 촉촉한 땀이 맺혔다. 아랑곳하지 않고 사샤는 캔버스 운동화를 신은 채로 제자리에서 앙 디올(en dehor) 턴을 돌았다. 네 바퀴째에 축이 흔들렸지만 발목 힘으로 끝까지 버텼다. 비디오로 보았던 사샤 세드린도 이렇게 했었다. 어쩌다 조금 축이 흔들릴지라도 끈질기게 버텼다. 그러면 보는 사람의 여운이 길어진다. 배울 만한 점이었다.

시멘트와 잔디의 마찰 위에서도 사샤는 팽이처럼 팽글팽글 돌며 턴을 반복했다. 이어 멈추지 않고 열여섯 번의 삐에 아 떼르턴을 도는 사이 1층에 사는 구관조들의 주인이 무슨 일인가 하며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정말 잘하는구나!」

사샤는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였다. 예기치 않게 만난 관객이 저를 보고 미소 짓자 사샤는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하아, 하아…….’

춤을 멈추자 이제 들리는 것은 짹짹거리는 새소리와 자신의 숨소리, 그리고 평온한 일상과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뛰는 제 심장 박동뿐이었다. 정적을 의식하자 방금 전까지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비어 있는 정원에서 춤을 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계속해 보렴.”

이민자의 악센트가 남은 영어 발음이었다. 그러나 수줍어 얼굴이 빨개진 사샤는 계단 위로 도망쳤다. 청바지에 감춰진 날씬한 다리가 스프링처럼 튀어 계단을 세 개씩 딛고 올라 허겁지겁 2층 문 안으로 쏙 사라졌다.

* * *

인터뷰를 마치고 4일간은 게오르크에게서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사이 사샤는 집이 없는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고 있었다.

오전에는 바딤의 출근 시간보다 일찍 일어나 그의 감시 아래서 스트레칭을 했다. 잔소리를 하던 바딤이 사라지면 졸린 눈을 감고 이불로 기어들어 갔다가 11시쯤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바딤이 차려 둔 식은 음식들을 몰래 버린 후 레빈의 학교로 가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레빈의 룸메이트들도 사샤에게 한 번씩 식사를 사 주었다. 그것이 2달러짜리 피자라도, 줄을 서서 먹는 트럭 음식이어도 사샤는 뭐든 고마워하며 잘 먹었다.

그리고 그들과 헤어지고 오후가 되면 사샤는 멧 오페라의 백스테이지에 들렀다. 항상 혼자 연습할 곳을 찾는 사샤를 위해 백스테이지의 문을 열어 주곤 하는 조명 스태프가 웃으며 사샤를 반겨 주었다. 사실 정학을 당한 상태에서는 출입을 거절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조마조마해하며 찾아갔는데, 다행히도 오페라하우스의 스태프들은 사샤가 정학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덧붙여 말하자면 그들은 사샤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사샤는 공연 전의 붐비는 백스테이지에서 혼자 스트레칭을 하고 의상으로 갈아입은 발레 댄서들을 몰래 구경했다. 프린시펄 중 하나는 저를 동경하듯 바라보는 사샤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놓고 가기도 했다.

“네 얼굴 알아. 발레 스쿨 학생이지?”

무대 의상을 입은 댄서가 물어왔다. 사샤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구경하러 오니?”

사샤는 또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무어라 더 말을 걸었지만 쉽게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사샤에게 금세 흥미를 잃고 사라졌다.

사샤는 그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오페라하우스 객석이 보이는 소대의 틈 사이로 다가갔다. 이곳 오페라하우스는 샹들리에를 천장에 올리는 것으로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빛무리가 폭죽처럼 터지는 듯한 모습을 조형한 아름다운 샹들리에 여러 개가 동시에 올라가는 모습은 사샤를 매료시켰다. 그걸 올려다보는 사샤의 흰 뺨은 쉽게 분홍색으로 물들곤 했다.

그리고 바딤이 퇴근할 때쯤에 집으로 돌아와 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잠들기 전에는 허벅지 염증에 뜨거운 찜질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정학 처분을 받은 바람에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바딤이 말하길 이런 종류의 허벅지 염증은 그저 무리하지 않고 쉬는 것만이 답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한 지 5일째 되는 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게오르크입니다. 클레멘츠 씨가 약속했던 것 중 한 가지가 생각보다 꽤 빨리 준비되었습니다. 만날까요?

* * *

사샤는 이번에는 데리러 오겠다는 게오르크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그저 카렐과 함께 탔던 그 멋진 차를 한 번 더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게오르크는 이전과는 달리 혼자 택시를 타고 왔다. 흔한 옐로캡에 오르면서 사샤는 실망스러워 창밖만 바라보았다.

“지금 집을 보러 갈 겁니다.”

“집이요?”

사샤는 놀라서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게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는 그중 자기가 부담해야 하는 돈은 얼마인지 물어보려다 말았다. 초조하게 굴었다가는 너무 가난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절하게 제발 매물이 월 200불 이하이기를 바라며―이것도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맨해튼 안쪽에서는 집을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급하게 구할 때는 매물이 턱없이 비싸지지요.”

“저도 알아요. 꼭 맨해튼이 아니어도 돼요. 퀸스나 뉴저지……. 더 멀리 나가도 돼요. 지하철만 탈 수 있다면요.”

“…….”

“집세는 싸면 쌀수록 좋잖아요.”

사샤는 의젓하게 말했지만, 게오르크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택시 기사에게 손짓하며 근처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사샤는 조금 당황해서 게오르크가 내리겠다고 지시한 곳을 바라보았다. 센트럴 파크를 목전에 둔 6번가와 7번가 사이 어디쯤이었다.

“먼저 내려요.”

그리고 자신들은 정말로 거기에서 내렸다.

아마 여기서 다시 지하철을 타려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한 사샤는 게오르크를 따라 고분고분 걸었다. 카렐의 비서는 아무래도 돈을 절약하는 타입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봉급이 적은가?

하지만 게오르크는 카렐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재질의 슈트를 걸치고 있었다. ‘저런 옷을 사려면 아무래도 돈을 아껴야겠지……’ 그렇게 사샤가 현실과는 크게 상관없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쪽으로.”

게오르크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들이 묵직한 문을 열어 주었다. 놀랍게도 그가 걸어 들어간 곳은 지하철 입구가 아니라 5성급 호텔의 로비였다. 사샤는 내심 위축되어서 그의 뒤를 따라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로비를 지나 더 안쪽으로 향하니 투숙객만 오갈 수 있는 문 앞을 또 한 명의 직원이 지키고 있었다.

“여기 계신 분은 투숙하는 고객들의 얼굴을 모두 외우고 있습니다. 아주 전통적인 보안법이죠. 이제 당신 얼굴도 외웠을 겁니다.”

가드가 게오르크의 말에 맞장구치듯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사샤에게 악수를 청했다.

“마이클입니다.”

“저는 사샤예요.”

“사샤! 환영합니다.”

엉겁결에 그와 악수를 나눈 사샤는 끝까지 그를 흘끔거리며 게오르크를 따라갔다.

직원이 지키고 서 있던 안쪽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엘리베이터가 또 있었다.

“거쳐야 하는 문이 많아서 좀 번거롭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게오르크는 올라가는 버튼을 눌렀다. 사샤는 어느 곳에도 층수가 적혀 있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게오르크를 따라 타도 되는 걸까, 의심이 들었다.

“저기, 그런데…… 아저씨.”

“네.”

게오르크는 이상한 호칭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 듯 감정 없이 대답했다.

“제 메일은 왜 안 읽으셨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왜 후원자에게 보여주지 않으신 거죠? 저도 클레멘츠 씨가 바쁜 건 알아요. 그래도 읽는 건 1분도 안 걸리는 일인데 왜…….”

눈썹을 치켜세운 게오르크는 제 가슴께에 오는 사샤를 삐딱하게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전 메일을 상관에게 보여 드릴지 말지 자의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그럼……?”

“도착한 메일은 없었습니다.”

“네?”

“말한 김에 잘됐어요. 어디로 보낸 건가 확인이나 해 보죠.”

게오르크의 말을 다 이해하기도 전에 사샤는 그가 시킨 대로 홀린 듯이 핸드폰의 메일 앱을 열었다. 문법과 단어가 제멋대로인 메일 하나를 빠르게 훑어본 게오르크가 예상했다는 듯이 짧게 말했다.

“주소가 틀렸네요.”

“주소요?”

“스펠링이요.”

사샤는 게오르크의 말을 굼뜨게 이해했다. 그 말인즉슨, 지금까지 자신이 시간을 들여 쓴 모든 메일이 허공으로 흩어졌다는 뜻이었다. 혹은 영 이상한 사람에게 가 닿았거나.

사샤는 절망스러운 기분에 차마 말도 잇지 못했다. 그렇게 입만 벙긋대고 있을 때, 마침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내려요. 그리고 마음에 드는지 확인해 봐요.”

게오르크가 열림 버튼을 누른 채로 턱짓했다. 사샤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소리도 나지 않는 폭신한 카펫을 따라 도착한 곳은 한 층을 모두 독차지한 호텔의 펜트하우스 층이었다.

“여, 여, 여기를요?”

게오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적당한 매물을 새로 구하는 건 무리였습니다. 클레멘츠 씨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들이 있는데, 당장 주거 용도로 쓸 수 있는 곳도 별로 없었고요. 그래서 여기가 제일 무난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학생이 쓰려면 호텔이 가장 좋죠. 가사 일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이게 무난하다고?

눈앞에 보인 방은, 사샤 식으로 말하자면 사샤 세드린이 300명 정도 살아도 될 것 같은 크기였다. 아니, 방 앞의 카펫이 깔린 복도 공간만 조금 주어도 자신은 최고로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샤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한참을 내버려 둬도 좀처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의 집에서 빌려 온 고양이처럼 문간에서만 서성거리는 사샤를 지켜보던 게오르크가 먼저 앞서 안으로 들어갔다.

“마스터룸을 포함한 침실은 총 네 개가 있습니다. 원하는 방을 아무 곳이나 써도 좋아요. 아무래도 마스터룸이 드레스룸과 연결되어 쓰기가 좋을 겁니다.”

게오르크가 걸어가는 길을 따라 천장 센서등이 하나씩 켜졌다. 마법처럼 불을 밝혀 주는 등을 보면서 사샤는 밤에 혼자 화장실을 갈 때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스터룸에서는 센트럴 파크가 보이죠. 다른 뷰를 원하면 다른 침실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곳에서 자면 됩니다. 여기 이 버튼을 누르면 셰이드가 내려오고, 한 번 더 누르면 암막이 내려오니 편한 대로 광량을 조절해요. 그리고 드레스룸은…… 아직 정리가 다 안 됐군요. 조만간 말씀드려서 짐을 빼겠습니다.”

기숙사에서 여섯 명이 함께 쓰던 방보다 훨씬 넓은 드레스룸 안을 기웃거리던 사샤는 게오르크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이해했다. 짙은 색의 목재로 벽면을 꽉 채운 옷장과 가운데의 쇼케이스에는 드문드문 타인의 짐이 남아 있던 것이다.

쇼케이스 안으로 언뜻 보이는 것이 반짝이는 시곗줄이나 판매 상품처럼 잘 진열된 넥타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샤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그대로 두셔도 돼요. 저는 이만큼 옷도 없어요.”

“음……. 말씀드리고 정리하겠습니다.”

“진짜로 괜찮아요. 저는 이 한 칸만 있으면 돼요.”

사샤는 새 구두 몇 켤레가 진열되어 있는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이 발을 집어넣으면 너무 커서 질질 끌고 다닐 것만 같은 새 구두는 어림짐작으로 후원자의 것과 사이즈가 비슷해 보였다. 게다가 게오르크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짐들은 카렐의 것이 분명했다. 사샤의 심장이 속절없이 두근거렸다.

“그럼 문을 잠가 놓도록 하죠.”

그 말에 사샤는 게오르크가 이곳을 비우려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망연자실해했다.

“왜요? 제가 훔쳐 갈까 봐요? 전 이런 거 어울리지도 않는데……. 신발도 안 맞아요.”

게오르크는 대답 없이 뒤돌았다. 하기야, 그가 정말로 이 드레스룸의 문을 잠가 버린다 해도 이 방 안에 공간은 차고 넘쳤다. 다만 아쉬운 것은 후원자의 사생활에서 저를 차단하려는 태도였다. 조금이나마 훔쳐보고 싶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아쉬웠다.

“클레멘츠 씨도 여기 살아요?”

사샤는 아주 약간의 희망을 품고 물어보았다.

“아주 가끔씩 머물기는 하시죠. 주거지는 아닙니다.”

“…….”

“당신이 이곳을 쓴다고 결정하면 오지 않으실 겁니다. 그러니 불편해하거나 신경 쓸 것 없어요.”

“왜요?”

왜라니? 게오르크는 그런 얼굴로 사샤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사샤는 그가 통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방이 이렇게 많은데요. 저는 작은 방에 살아도 괜찮아요.”

“아, 클레멘츠 씨는 이보다 더 큰 대저택에 살고 계시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게오르크는 그 뒤로도 사샤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룸의 구조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네 개의 침실 말고도 큰 욕조가 있는 욕실이 두 개, 건식 화장실이 세 개, 거실과 응접실, 그리고 서재 용도의 방까지……. 다 둘러볼 때까지도 이곳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한때 후원자가 쓰던 공간이라고 생각하니 여기 머물고 싶어졌다.

아주 비싸지만 않으면.

“저, 그럼…… 여기서 살면 얼마나 지불해야 해요?”

게오르크가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냐는 듯한 얼굴로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돈 걱정은 하지 말아요.”

“…….”

“어차피 비어 있던 공간이고, 클레멘츠 씨의 사적 재산입니다. 당신이 여길 쓴다고 돈이 더 들거나 덜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아무도 손해 보는 사람 없으니 그냥 써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점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사샤는 흥분감을 감추며 물었다.

“어…… 언제까지요?”

“발레단의 정식 단원이 될 때까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샤는 비명이 나오려는 입을 양손으로 틀어막았다. 그건 졸업할 때까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훌륭한 댄서가 되겠다고 약속해요’ 카렐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그는 정말로 돈 대신 자신의 미래를 대가로 지불받을 생각인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승급 시험을 꼭 최우수로 패스할게요. 졸업하고, 오디션을 보고, 정식 단원이 될 때까지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사샤의 진심 어린 말을 게오르크는 감흥 없는 얼굴로 들으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클레멘츠 씨는 어디 계세요?”

“왜 찾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바쁜 분이라……. 그 말은 제가 꼭 전해 드리죠.”

그렇게 말하면서 게오르크는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날이죠? 학교를 다니면서 이사를 하려면 정신없을 텐데, 차라리 오늘 짐을 다 옮겨 버릴까요?”

“그래도 돼요?”

게오르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으로 향했다. 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그는 바빠 보였다. 게오르크를 따라 나서려던 사샤는 기다리면 짐을 가져다주겠다는 그의 말을 듣고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앞에서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혼자 남게 된 사샤는 다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가장 먼저 욕실로 걸어갔다.

‘와아…….’

거기에는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이는 창 넓은 욕조가 있었다. 이젠 땀에 젖은 연습복을 가방에 들고 다니며 코인 런드리를 찾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세면대가 크고 넓어서 레오타드나 타이즈의 손빨래를 바로바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실을 나선 다음 사샤는 아까 보았던 마스터룸의 커다란 침대로 다가갔다. 슬쩍 침대 위에 앉은 후 그 상태로 방방 뛰어 보았는데, 매트리스의 탄성이 끝내줬다. ‘죽인다’ 속으로 감탄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사샤는 곱게 펼쳐져 있던 이불 귀퉁이가 제 엉덩이 모양으로 푹 파인 것을 보고 당황하며 손바닥으로 이불을 팡팡 때렸다.

심지어 응접실 안에는 제법 큰 냉장고도 있었다. 주변 인테리어와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보니 후원자가 개인 용도로 따로 들여놓은 듯했다. 호텔 로고가 붙은 물병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사샤는 이제 자기 우유에 이름을 적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기숙사 주방 냉장고는 룸메이트들과 셰어하는 것이라 작은 탄산수에도 이름을 써놓지 않으면 금세 누가 털어가 버리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샤는 게오르크가 문을 닫아 놓은 드레스룸으로 다가갔다.

절대로 훔칠 생각은 없는데도 왜인지 살금살금 기척 없이 걷게 된다. 사샤는 구두와 넥타이를 만지작대다가 옷장에 걸린 셔츠와 재킷 따위로 시선을 돌렸다. 사샤를 조금 실망시킨 건 기성품인 재킷에 태그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 있는 것들은 그저 갑작스러운 필요에 의해서 채워 넣은 것뿐이고, 실제로는 카렐이 한 번도 입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자 흥미가 푸스스 식어 버렸다.

“이런 곳을 애한테 혼자 쓰게 한다고요? 미쳤군, 미쳤어. 자선 사업에도 정도가 있지!”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와 사샤는 후다닥 드레스룸에서 빠져나왔다. 마스터룸을 지나 탁 트인 거실로 나가니 거기에는 게오르크와 함께 바딤이 있었다.

“사샤, 네 짐이다.”

바딤의 손에는 사샤의 짐 전부인 스포츠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혹시 빠뜨린 게 있으면 학교에서 말해. 가져다줄 테니.”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엉겁결에 가방을 받아 들었다. 바닥에 내려놓아도 되는데, 왠지 들고 있어야 할 것만 같았다.

서로가 익숙해 보이는 바딤과 게오르크는 자기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거실로 나아갔다. 사샤는 짐을 든 채로 저도 모르게 그들을 뒤따라갔다.

“바 길이가 2미터는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네, 그보다 더 길어도 되지만 필수는 아닙니다. 하지만 최소 2미터는 되어야 편히 쓸 만하지요. 그리고 거울은 이쪽에 붙이고……. 또 바닥을 새로 짤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점프를 해야 하니 적당한 탄성이 있으면서 마찰이 생기는 바닥이어야 합니다.”

“발레 연습실 바닥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자도 있습니까?”

“학교 시설팀이 알고 있을 겁니다. 연락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안에 연습 공간을 만들어 줄 것 같았다. 게오르크는 바딤의 조언을 받아 이런저런 것들을 메모했다.

“난 이만 가볼 테니 내일 학교에서 보자꾸나.”

사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딤은 뭔가 후련하면서도 착잡한 표정으로 지나치게 넓은 호텔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이내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바딤을 배웅하고 온 게오르크가 말했다.

“곧 저녁 식사를 해야겠군요. 식사는 필요할 때 룸서비스로 시키면 됩니다. 메뉴에 없는 것도 주문 가능하니 참고해요.”

“네…….”

“그리고 아침은 전날 자기 전에 메뉴를 체크해 놓고 문밖에 걸어 두면 정해진 시간에 직접 가져다줄 겁니다.”

“…….”

“그럼 쉬어요.”

거기까지 말하고 게오르크는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이제는 진짜 갈 모양인 것 같았다.

하지만 호텔에 들어온 지 수 시간 만에 이곳으로 제 모든 짐이 완전히 옮겨지고, 심지어 오늘 밤부터는 여기에서 자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던 사샤는 저도 모르게 게오르크를 따라갔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탔고, 저를 흘끔 내려다보는 게오르크를 못 본 체하면서도 그를 따라 내렸다. 그리고 마이클이 지키고 있는 문을 나가서 호텔 로비까지 졸졸 따라갔다. 프런트에 택시를 요청하는 게오르크 뒤에서 그를 빤히 지켜보며 기다렸다.

그리고 호텔 정문으로 나와 택시를 기다리던 게오르크는 더 이상 모른 척하지 못하겠는지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부터 주변 산책이라도 할 생각인가요?”

“그건 아니고요…….”

“그럼 왜 나왔습니까?”

“으음…….”

“저녁 같이 먹어 줘요?”

“흠…….”

“심심하면 친구들을 불러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해요. 택시가 왔네요. 그럼 이만.”

게오르크는 택시를 타고 쌩 사라졌다. 쳇,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뭇잎을 발로 찬 사샤는 주변을 괜히 서성거렸다.

언제나 붐비는 화려한 거리에 일몰이 덮쳐 오기 시작했다.

사샤는 정처 없이 5번가 쪽으로 향했다가 트럼프 타워 앞에서 뉴스를 촬영 중이던 큰 카메라 여러 대를 구경했다. 그러고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링컨 센터 쪽으로 향했다. 호텔에서 학교까지는 도보로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후원자는 아마 이런 것까지 고려해서 이곳을 쓰라고 해 주었을 것이다.

갑자기 뒤바뀐 환경이 실감 나지도 않는데, 벌써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적당한 행운이라면 들떠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거나 레빈에게 바로 전화해 떠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왜인지 겁이 났다.

사샤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밤이 되어 더욱 반짝이는 로비를 거쳐 제게 눈인사를 하는 마이클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렇게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의 풍경은 바뀌어 있었다.

아까 게오르크가 내렸던 셰이드가 다시 올라가 야경이 보이도록 세팅되어 있었고, 방 안은 전체적으로 은은한 할로겐의 주홍색 빛이 돌도록 턴다운이 된 상태였다. 사샤는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갔다. 커다란 유리 탁자 위에는 과일과 쿠키 같은 작은 간식거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샤는 물끄러미 선 채로 쿠키의 모양을 관찰했다. 카렐이 주었던 쿠키와 같은 종류였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운 사샤는 한눈에 담기는 야경을 한참 보다가 쿠키만 조금 먹었다. 저녁 생각이 별로 없었다.

“엄마. 후원자께서 저한테 진짜진짜 좋은 집을 지원해 줬어요. 엄마도 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기숙사는……. 기숙사에는 이제 안 살아도 괜찮아요. 정단원이 될 때까지 살아도 된대요.”

사샤는 엄마에게 전화해 자랑하는 상상을 했다.

‘그래, 좋겠구나’ 어머니는 지친 음색으로 한숨짓듯 그렇게 말할 것이다. 사샤는 조금 더워지는 눈가를 깜빡거렸다. 카렐이 비행기 표를 지원해 준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올 수 없다. 한 달에 4일을 쉬는 어머니가 뉴욕까지 올 휴가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방이 너무 커서 외롭다고 생각하면서 사샤는 졸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닌데도 나른하게 잠이 왔다.

사샤는 꿈에서 커다란 손이 자신을 바로 눕혀 주는 걸 느꼈다. 그 손은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주고는 얇은 이불을 가져와 제 가슴 위에 잘 덮어 주기도 했다.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의 시선이.

사샤의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남자가 허리를 천천히 숙였다. 타인의 호흡이 사샤의 드러난 이마 아주 가까이에 닿았다.

사샤의 주먹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이다음에는…….

따뜻한 온도를 가진 마른 입술이 이마에 닿는다.

남자는 그렇게 제게 경건히 키스해 주었다.

짜릿한 기분이 등줄기를 스쳤다.

‘잘 자요’ 숨소리와 같은 속삭임이 이마 위에서 흩어졌다. 자신이 깨면 그 숨소리가 도망갈 것 같아서 사샤는 잠에서 깬 티를 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나가기 전에 몰래 눈을 떠 뒷모습을 보아야 한다. 가끔씩 자신이 아주 외로울 때면 꿈에 나타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사샤는 다시 깨지 못하고 푹 잠들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사샤는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부터가 꿈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일례로 가슴 위에 덮어진 얇은 이불 같은 것은 상상이었다. 자신은 맨몸으로 웅크려 자고 있었고, 이불 같은 것은 없었다.

사샤는 아직 잠기운이 남은 눈가를 비비면서 생각했다. 지난밤 자신이 남자의 뒷모습을 보려고 다시 일어나는 데 실패한 이유는 혹시 처음부터 다 꿈이고 망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먹다 남은 쿠키 조각과 겉이 마른 과일이 놓여 있었다. 그것들을 보면서 사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은 열흘 만에 다시 학교를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 * *

사샤는 학교가 굉장히 낯설다고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24시간을 지냈는데 고작 열흘 만에. 이제 더는 기숙사를 통한 입구로는 드나들지 못하고 링컨 센터 쪽을 통해 외부인들과 섞여서 학교로 가니 이방인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낯선 기분에 괜히 걸음이 느려진 사샤가 계단을 올라 긴 복도에 발을 내디딘 순간, 저 멀리서 운동복 차림의 번헤어를 한 여자아이 하나가 마구 달려왔다. 역광을 받은 여자아이는 실루엣만 보일 뿐, 누구인지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비켜!”

사샤가 길을 터 주려는 순간, 달려오던 아이는 근처에 서 있던 다른 학생을 밀치며 사샤의 코앞으로 다가와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목덜미가 억센 팔에 붙잡혀 헉, 하고 뱉는 숨소리를 낸 사샤는 손쓸 새도 없이 그 여자아이에게 이끌려 갔다.

그리고 번개같이 여자아이의 입술이 사샤의 뺨에 닿았다 떨어졌다.

“……!”

불시에 당한 일에 휘청이면서 뺨을 손으로 가리고 뒤를 돌아보니 여자아이는 마치 체조선수처럼 한 팔로 텀블링을 하고는 햇살이 쏟아지는 입구로 달려 나갔다. 그녀의 주변에 몰려든 친구들이 높은 소리로 까르륵 웃어댔다.

“쟤들끼리 내기한 거야.”

옆으로 다가온 조제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방금 여자아이가 밀쳐 낸 것이 조제였던 것 같다. 사샤는 복도 안쪽으로 척척 걸어 들어가는 조제를 따라가면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드는 뒤를 흘끔거렸다.

“내기?”

“사샤 세드린이 학교에 오면 제일 먼저 키스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지. 엿들었어. 아니, 엿들은 건 아니고, 쟤들이 워낙 시끄럽게 떠들었어야지. 자기들끼리 계획도 세우던데? 쟤네 말고 또 있어. 근데 걔넨 끝났지. 왜냐면 네가 학교에 오자마자 쟤가 성공했으니까! 씨발! 넌 운 좋은 줄 알아.”

말하다가 분이 치밀었는지 조제가 욕을 하며 슈즈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슈즈 바닥이 깨끗한 걸 보니 완전히 새것이었다.

사샤는 내심 슈즈가 다 닳기 전에 또 새것을 구비한 조제가 부러워졌다.

“하여튼 여자애들은 기준이 이상해. 정학이 대수야? 사람 패고 정학 받는 게 대체 뭐가 멋있냐고.”

사샤는 아직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은 없지만 정학과 인기가 크게 상관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는 땀 냄새가 레오타드에 배지 않도록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는 게 더 나을 것이다.

하지만 조제가 너무 화나 보여서 조언을 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조제, 혹시 마누엘은…….”

“네가 직접 연락해 보지 그래?”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조제가 씩씩대며 대답했다.

“진짜 프랑스로 갔어?”

“나도 몰라. 간 다음에는 연락 안 했어.”

조제와 함께 로커룸으로 들어간 사샤는 개인 로커의 문을 열었다. 안은 열흘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양새로, 적당히 너저분하게 짐들이 흩어져 있었다.

드러그 스토어에서 행사 상품으로 산 세타필 로션, 근육통에 바르는 싸구려 연고, 아직 쓰지 않은 스포츠 타월 몇 개와 슈즈의 밑창을 긁어 마찰을 만들어 내는 빗. 머리가 길어 거추장스러워질 때 쓰는 흰색의 헤어밴드도 있었다.

로커 안에 손을 넣어 뒤적이던 사샤는 깊숙한 곳에서 테이프를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이내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과 종아리에 길게 테이핑을 했다. 테이핑을 하는 방법은 바딤이 알려준 것이다. 허벅지 염증이 생겼을 때 무리가 갈 발목과 무릎을 보호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조금 엉성한 테이핑을 마친 다리 위로 검은 타이즈를 신은 사샤는 이번에는 가방을 뒤적거려 조제가 준 슈즈를 꺼냈다. 자기 것보다 사이즈가 훨씬 큰 조제의 슈즈에 맞추기 위해서는 양말을 두 개 정도 덧신어야 한다.

‘벌써 닳았네.’

사샤는 슈즈 앞쪽 마찰이 잦은 곳에 벌써 하얗게 천이 들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늘 한 클래스를 듣고 나면 이것도 구멍이 날 것 같았다.

‘괜찮아. 나도 돈이 조금 있으니까.’

오늘 들고 오지 않은 가방 주머니 깊은 곳에 파트타임으로 번 돈을 숨겨 놓았다. 이것저것 사 먹고 했는데도 돈은 아직도 525불이나 남아 있었다. 슈즈를 몇 켤레 더 사기에는 충분했다.

오늘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사무실에 들러서 주문을 하면 될 것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브랜드를 사 모으며 슈즈 착화감을 비교하기도 하지만, 사샤는 학교에서 지급하는 게 제일 좋았다. 왜냐면 그게 제일 싸기 때문이다. 제게 제일 잘 맞는 슈즈를 찾기 위해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어 편하기도 했다.

조제와 함께 오전 클래스에 들어가자마자 스튜디오에 미리 와 있던 바딤과 눈길이 스쳤다. 지난 열흘간의 사적인 교류는 모른 척 구는 선생님의 태도에 사샤도 티를 내지 않으며 구석에 가서 바를 잡았다.

이어 흘러나오는 익숙한 플리에의 음악.

오랜만이었지만 플리에부터 이어지는 순서에 절로 몸이 긴장했다. 흉통을 꽉 조이며 전신에 힘을 준 사샤의 목덜미는 금세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한참 후, 오른쪽 프라페(frappé)가 끝나고 수트뉘를 돌며 반대쪽으로 몸을 틀 때였다.

바 반대편을 잡은 여자아이와 의도치 않게 눈이 마주쳤다.

“아…….”

당황한 사샤와 달리 여자아이는 씩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까 복도를 뜀틀의 도움닫기 뛰듯 황소처럼 달려와 자신의 뺨에 기습 키스를 하고 도망친 아이였다.

사샤는 다시 반대쪽으로 수트뉘를 돌았다. 60명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이곳저곳의 바닥에서 삐익, 하는 마찰음이 났다.

「너 게이라며?」

마찰음 사이에 섞여 들어온 속삭이는 목소리에 사샤는 당황해 옆을 쳐다봤다.

“사샤!”

정신없이 빠른 프라페와 바튀(battu) 사이 순서를 놓친 사샤를 향해 바딤의 꾸지람이 날아들었다. 사샤는 얼른 다시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바딤이 이어지는 아다지오의 순서를 설명하면서 반대쪽으로 멀어졌을 때였다. 바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자마자 사샤는 앞을 노려본 채로 살짝 몸만 그 여자아이 쪽으로 기울여 말했다.

「아니야.」

「그래? 게이래서 키스한 건데.」

「…….」

옥사나. 여자애의 이름이 이제야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옥사나는 아까부터 러시아어로 말을 걸고 있었다. 너무 익숙한 언어라 인지하지 못했다.

유연성이 좋은 옥사나의 사이드 데벨로페가 거의 귀에 붙을 정도여서 사샤도 있는 힘껏 경쟁하듯 다리를 들어 올렸다. 연습실을 가득 채운 60여 명 중 눈에 띄게 다리 각도가 높은 두 사람 곁을 지나치며 바딤이 ‘훌륭해’라고 중얼거렸다.

사샤가 허공으로 높이 뻗은 다리의 각도를 유지한 채로 뒤로 뻗어내자 귀밑머리를 타고 땀이 뚝 떨어졌다.

센터까지 마친 후 오전 클래스가 끝났을 때 옥사나는 항상 몰려다니던 제 친구들과 이미 나가 버린 뒤였다. 자신이 게이라는 얘기를 누구에게 들었는지, 그 헛소문을 또 누가 아는지 궁금해서 직접 물어보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스트레칭을 마친 사샤는 혼자 복도로 걸어 나왔다. 일반 과목이 시작되기 전에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 텐데, 생각해 보니 자신은 기숙사를 쓸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쓰는 샤워실을 써도 되나 싶어 사샤가 잠시 헤매고 있었을 때였다.

“사샤?”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려 사샤는 뒤를 돌았다. 자신을 부른 것은 줄리아였다.

사샤는 창가에 팔을 기댄 채로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줄리아가 물었다.

“집에서 푹 쉬었니? 오랜만에 학교에 돌아왔으니까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수업 끝나면 체력 단련실에 가서 운동도 하고 가면 좋겠구나.”

“네. 그러려고요.”

“다른 게 아니라 네가 쉬는 동안 매물을 좀 찾아봤어.”

“매물…….”

사샤는 아직 턱 끝에 남아 있는 땀방울을 급히 훔치며 그녀를 따라 중얼거렸다. 줄리아의 손에는 막 프린트해 온 것 같은 빳빳한 종이가 몇 장 들려 있었다.

“살 곳은 정했니? 언제까지 바딤의 집에 얹혀살 수는 없으니까 말야. 혹시 월세로 어느 정도 선까지 괜찮은지 부모님이 말씀하신 건 없었고?”

“아……. 그건 괜찮아요.”

“그래? 따로 집을 계약했니?”

“그건 아니고, 장학 재단에서 집을 지원해 주기로 하셨어요.”

사샤의 말에 줄리아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여전히 미소 띤 얼굴이었지만 의아한 기색이 묻어났다.

“재단에서?”

“네. 인터뷰도 했고요. 제가 대답을 잘했어요……. 그래서 지원해 주시려고 한 것 같아요.”

“음……. 집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던가.”

줄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잘됐구나’라고 축하해 주며 사샤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아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복도 멀리 떠나가는 줄리아를 보면서 사샤는 다시금 카렐이 제게 얼마나 큰 행운인가를 생각했다. 또 재능 있는 수많은 아이 중에 그가 자기를 발견해 준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도.

사샤는 샤워실을 찾아가는 대신 네트워크룸으로 향했다. 컴퓨터를 켜고, 스포츠백 가장 안쪽에 잘 넣어 놓았던 카렐의 명함을 찾았다. 받았을 때 빳빳했던 명함은 가방 안에서 돌아다니느라 나달나달해져 하느작거렸고 사방도 하얗게 닳아 있었다.

‘주소가 틀렸네요. 스펠링 말입니다.’

게오르크의 말을 떠올리며 사샤는 기존에 자신이 썼던 메일 주소를 살펴보았다. 아마도 자신은 소문자 엘(l)과 대문자 아이(I)를 헷갈렸던 것 같다.

바보 같아.

자판 앞에서 사샤의 고개가 절로 수그러들었다. 사샤는 숱 많은 검은 머리 안에 손가락을 파묻은 채로 제 머리카락을 꽉 그러쥐었다. 그러다 한숨 끝에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그간 보냈던 메일들을 보지 못하신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메일들은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작문 수업에서는 항상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사샤는 마음껏 자랑하고 싶을 때는 잘난 척처럼 보일까 봐 그 마음을 애써 숨겼고, 가끔 외로운 날에도 어리광을 부리면 너무 어린애처럼 보일까 봐 그 마음을 숨겼다. 답장을 왜 주지 않으시는지 원망하다가, 바쁘면 안 주셔도 된다고 의젓한 척했다. 하고 싶은 말은 숨기고 쓴 목적조차 불분명한, 그런 내용 없는 메일은 안 그래도 부족한 영문법이 더해져 횡설수설 엉망진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해야 할 말이 명확했다.

사샤는 양손의 집게손가락을 펴고 모니터와 자판을 번갈아 보며 메일 주소를 틀리지 않게 집중해서 정확하게 입력했다.

그러고는 이내 천천히 하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녕하세요. 미스터 클 레 멘 츠.

저는 사샤 세드린입니다.

오늘 저는 학교에 왔습니다. 클레멘치 씨가 살으셨던 집에서부터 왔어요.

걸어서 총 12분이 걸러요. 아주 가깝고 좋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침대도 많고 아주 좋아요.

클레멘치 씨가 여길 못 써서 불편하면 와도 괘낯ㄴ하요.

언래는 클레멘치 씨 집이니까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클레멘츠 씨가 저 때문에 안 불편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홀 수 있으면 답장을 주세요.

감사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요.

사샤 세드린.]

* * *

이튿날에는 학교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보니 게오르크와 함께 인부들이 와서 바딤이 말했던 실내 연습실을 설치하고 있었다. 거실의 한구석, 가로 10미터 정도의 길이를 전용 바닥으로 깔고 벽면에는 천장부터 바닥까지 통으로 된 유리가 붙었다. 사샤의 키에 맞춘 연습용 바는 창가에 설치되어 한낮의 햇살을 받으면서 연습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아저씨…….”

그러나 뭐라고 말을 붙이기도 전에 게오르크는 또 바쁜 척을 하며 사라져 버렸고, 인부들도 연습실 자리에 원래 있던 가구를 싹 들고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사샤는 주홍빛에서 푸른빛으로 물들어 가는 도시 야경을 보며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첫날 소파에서 잠들어 버렸던 사샤는 그날 밤에는 혼자서 마스터룸의 커다란 침대에서 잤다. 그러나 하필 그날 사샤는 잠에서 깨기 직전 악몽을 꿨다. 지나치게 푹신한 침대 바닥으로 늪처럼 한없이 빠져들어 일어나지 못하는 꿈이었다.

거기 도로 들어가 누우면 이번에야말로 침대가 저를 삼켜 버릴 것 같다는 망상에 사샤는 절대로 다시 침대 위에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마스터룸의 이불을 끌고 와 연습실 앞쪽 소파 바닥에 깔았다. 누워 보니 바닥이 조금 딱딱한 것 같아 게스트룸의 이불도 가지고 와서 한 겹을 더 두껍게 깔았다.

그렇게 사샤는 좋은 호텔 룸을 쓰는 보람도 없이 거실 한편에서 난민을 자처해 살았다. 이 두려우리만치 커다란 방에 적응하기 위한 저만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된 지 셋째 날, 사샤는 새로운 메일을 받았다.

[안락한 곳에서 편안히 쉬며,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카렐 클레멘츠.]

“와아…….”

카렐의 답장을 받은 사샤는 큰 흥분에 휩싸였다. 짧은 메일이었지만 문장의 길이는 상관없었다. 답장이 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뭐라고 답장하지?

뭐라고 답장할까.

사샤는 거실을 초조히 맨발로 왔다 갔다 하며 손톱을 이로 깨물었다.

이제는 그가 자신의 메일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 진중한 내용을 보낼 차례였다. 마침 주말이었기 때문에 사샤는 소파에 길게 엎드린 채로 인터넷에 메일 양식, 뜻 깊은 편지 따위를 검색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후에 한 번 누군가 서비스 디저트를 가져다주기 위해 들른 것 빼고는 아무도 자신을 방해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클레멘치.

사샤 세드린입니다.

답장을 주서서 정말 기뻐요. 셀 수 업이 기뻤습니다.

후원자님은 바빠요.

일을 만이 하고 있는데 답장을 주서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놀고 있어요. 주말이니가요.

클레멘치도 노는 시간 있는지, 머 하고 노는지 궁금합니다.]

거기까지 쓰던 사샤는 후원을 받는 입장에서 자유롭게 쉬고 있다는 말을 써도 되는지 갈등했다. 그는 자신이 24시간 발레 생각만 하면서 보내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지막 줄에 한마디를 더 보탰다.

[저는 주말에도 연습헤요. 스트레칭도요.

연슴실 만들어 주서서 감사합니다.]

메일을 보낸 직후에는 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 거실 구석으로 가 웜업(warm up)을 시작했다.

플리에와 탕뒤, 데가제(dégagé), 롱 드 장브(rond de jambe)를 거쳐 퐁뒤(fondu)에서는 자신 있는 푸에테(fouetté) 동작을 섞었다. 가끔 창 너머를 내려다보면, 너른 녹지와 함께 차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적당히 땀을 내고 난 뒤 앞뒤로, 또 옆으로 180도 이상의 사이드 스트레칭을 하면서 사샤는 아팠던 허벅지를 손으로 주물렀다. 조금 찌릿한 감각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많이 나아졌다.

지잉.

그때 진동 소리가 들려 사샤는 제 핸드폰을 주우러 갔다.

[클레멘 ‘츠’.]

메일 답장은 단 한 단어였다.

사샤는 우뚝 서서 커다래진 눈으로 그 메일을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거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바로 도착한 메일 답장은 분명 후원자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기뻤지만 왠지 겁이 나기도 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더는 연습도 하지 못하고, 사샤는 그대로 이불을 뭉쳐 놓은 제 아지트에 다시 들어가 누웠다. 그러고는 뭐라고 답장을 보낼지 핸드폰 화면을 보며 궁리했다.

그리고 그날 밤, 호텔에는 예기치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카렐이 ‘뭐 하고 노는지’를 궁금해했던 사샤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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