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 발스 1권-1. 미운 오리 새끼, 사샤 세드린 (1/30)

  1. 미운 오리 새끼, 사샤 세드린

마지막 편지를 보내고 이듬해 1월.

뉴욕 발레단 부속 발레 스쿨, B 스튜디오.

“사샤, 손가락 끝까지 팔을 뻗어!”

찰싹! 매서운 손길이 소음을 내며 알 라 스콩(à la seconde)으로 쭉 뻗은 사샤의 여린 팔 안쪽을 때렸다. 매운 손길에 사샤는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꽉 깨물며 팔이 저리도록 중지를 끝까지 뽑았다.

“더 길게! 알롱제(allonger)!”

방금 사샤가 맞은 것을 본 소년들은 얼음처럼 굳어 더욱 긴장하며 맞지 않으려 용을 썼다. 창백해진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숨을 참았다.

“숨을 쉬라고 했지!”

사샤는 호흡이 보이지 않는다며 바딤에게 가슴팍을 한 대 더 얻어맞았다.

공식적으로는 체벌도, 폭언도 용납되지 않는 클래스지만 러시아인 특유의 악센트를 쓰는 발레 마스터 바딤은 유독 사샤에게 혹독하게 굴었다. 그는 ‘러시아식 교육’의 우월함을 맹신하는 사람으로, 이곳 뉴욕에서도 자신의 교수법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문제는 그 교수법을 쓰는 학생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샤가 알기로는 자신뿐이었다.

물론 사샤 본인도 아주 어릴 때부터 ‘러시아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바딤의 방식이 전혀 낯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가끔 욕설과 함께 뺨을 맞는 날에는 절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처음에는 창피해서 울고 싶었는데, 이제는 진짜로 자신이 구제불능이고 선생을 화나게 할 정도로 발레를 못하는 것일까 봐 막막해서 눈물이 났다.

하지만 클래스 안에서 울면 바딤에게 내쫓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참았다가 자기 전에만 울었다.

“모두 앞으로 나와, 마스터에게 인사.”

90분간의 클래스가 끝났을 때에는 전원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반주자에게 인사.”

바딤을 따라 두 번의 인사를 한 학생들은 저마다 옷가지와 가방을 챙기거나 스트레칭을 더 하려고 자유롭게 흩어졌다. 완전히 지친 사샤 역시 잠시 스트레칭을 하려고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을 때였다.

“사샤! 클래스가 끝나자마자 앉으면 엉덩이가 보기 싫게 퍼진다! 당장 일어나지 못해?”

앉아 쉬려던 것이 아니고 스트레칭을 하려고 했던 것이었지만 사샤는 변명하는 대신 그가 시키는 대로 무기력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사샤에게 가까이 다가온 바딤은 홀의 문을 가리켰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는 건가, 주눅 든 사샤가 자기 가방을 챙겼을 때였다.

“관리사감이 널 호출했다. 클래스가 끝나자마자 오라더군. 무슨 사고를 친 거냐?”

* * *

토슈즈 클래스를 마친 한 무리의 어린 소녀들이 홀의 문을 열고 복도로 걸어 나왔다. 밝은 연보라색 레오타드는 어퍼 스쿨 1년 차의 표식이다. 그보다 한 살 위의 사샤 세드린은 2년 차임을 나타내는 짙은 남색의 레오타드 위로 색이 바랜 낡은 운동복을 걸친 채 소녀들과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딘가 넋이 빠져 보이는 검은 머리 소년을 향해 아주 잠깐씩, 눈치채지 못할 찰나만큼 소녀들의 시선이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음영이 져 길고 깊어 보이는 눈,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혈관이 비치는 뺨, 이마 위에서 가닥가닥 갈라진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는데도 도리어 청량해 보였다. 깔끔하게 올려 묶은 번헤어의 동그란 두상들은 새처럼 재잘대며 방금 지나간 남학생의 길고 날씬한 뒷모습을 가끔씩 돌아보았다.

그때 사샤의 머릿속은 갑작스러운 호출에 대한 이유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만 오라고 했다. 이유가 뭘까. 춤에 대한 지적이라면 바딤이 해 줬을 것이다. 관리사감을 만나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돈을 대줘도 실력이 늘지 않는 학생은 장학생 탈락이라고 말하려는 걸까? 아니면 일반 과목 성적이 형편없어서 장학금을 끊을 수밖에 없다고? 돈은 열여섯 살 사샤에게 가장 무서운 문제였다.

사샤는 머지않아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 촘촘한 격자무늬의 조그만 창이 붙어 있었지만 불투명한 유리라 안이 보이지 않았다. 사샤의 기억으로 사무실에 들른 것은 작년 입학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눈앞의 문을 열면 저를 부른 이유를 곧바로 알 수 있을 텐데도 예민한 성격의 사샤는 복도를 건너오는 그 짧은 사이 수많은 망상으로 최악의 상황을 부풀렸다.

“사샤?”

안쪽에서 먼저 문이 열려 깜짝 놀란 사샤는 숨 쉬는 것마저 잊었다.

“왔구나. 이리 들어와 여기 앉아 보렴.”

관리사감 줄리아가 웃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호흡이 모자라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사샤는 깊이 심호흡하며 줄리아가 가리킨 의자로 다가갔다.

“네, 무슨 일로…….”

사샤는 조금 긴장하면서 그녀가 가리킨 등받이 없는 의자에 엉거주춤 앉았다. 편하게 앉으면 몸이 망가진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은 탓에 금세 허리가 꼿꼿이 섰다.

“땀을 많이 흘렸구나. 바딤이 널 몰아붙였니?”

“시간이……. 씨, 씻고 올 시간이 없었어요.”

당황했을 때는 말을 조금 더듬게 된다. 학교에서는 해외에서 온 장학생들을 위해 개인 영어 튜터까지 붙여 주었다. 줄리아가 제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러워 사샤는 머릿속으로 이미 내뱉은 문장의 어법이 맞는지를 계속 생각했다.

반면, 줄리아의 시선은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 사샤에게 길게 머물렀다.

무용을 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외골수에 눈 가린 경주마처럼 한 가지 목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샤는 거기에 더해 섬세하고 예민한 기질까지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걸면 잔뜩 움츠러들어 방어적인 화법을 쓰곤 했다. 탓을 하는 게 아닌데도 변명부터 하는 말버릇.

그러나 줄리아는 그 부분을 꼬집는 대신 별말 없이 시선을 돌리며 책상 위의 서류를 한 장 집어 들었다.

“땀범벅인 채로 온 걸 나무라려는 의도는 아니었단다. 오늘 널 부른 이유는…….”

“…….”

“저번 신체검사 결과 때문이야.”

그제야 사샤의 시선도 줄리아가 들고 있는 종이에 닿았다.

“몇 달 전에 쟀을 때보다 살이 7파운드(약 3㎏)나 빠졌어. 키는 2인치나 컸는데……. 우리 기준으로는 네 몸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거든.”

“아…….”

“식사는 잘 하고 있니? 돈이 모자라거나 귀찮아서 굶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저는.”

거기까지 말하던 사샤는 입을 다물었다.

최근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면 완전히 녹초가 되어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이 지쳐 그냥 잠들 때가 많았다. 점심은 구내 카페테리아에서 제공하지만, 아침과 저녁 식사, 그리고 주말의 식사는 기숙사에서 스스로 만들어 먹어야만 한다.

입학한 직후 눈앞에 있는 줄리아가 신입생들을 불러 모아 직접 간단한 요리법을 몇 개 가르쳐 주기도 했다. 사샤 역시 서툰 솜씨로나마 스스로 음식을 해 먹곤 했으나, 마지막으로 장을 본 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굶었니?”

재차 묻는 목소리에 사샤는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이어 들려온 줄리아의 한숨에 사샤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네가 열심히 하는 학생인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무용수는 절대 굶으면 안 돼. 특히 성장기에는 말야……. 골다공증이 오면 부상 확률도 높아지고, 부상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네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는 거란다.”

“…….”

“춤을 잘 추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무용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기관리야.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 소홀한 무용수는 절대 성공할 수 없어. 언제나 말했듯이 우리가 관심 있는 건…….”

나의 몸.

사샤는 속으로 대답했다. 입학식 때 줄리아가 인자한 목소리로 했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네 몸이란다. 사샤 세드린의 몸이 얼마나 훌륭한 무용수로 탈바꿈하는지. 냉정하게 말해서 그 외에는 관심 없어. 아니, 관심을 두지 않을 거야. 전문 무용수가 되고 싶은 거지? 춤에 집중이 안 되면 대체 무슨 고민 때문인지 스스로 잘 생각해 봐야 하고, 기력이 없으면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잘 먹고 있는지 네가 직접 챙겨야 해. 그것까지 전부 훈련이란다. 프로가 되면 스스로를 챙길 사람은 너 자신밖에 없어.”

입학식 때도 줄리아는 이렇게 말했다. 인자한 얼굴로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그게 홀로서기를 도와주는 방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외로운 느낌이 들었던 것을, 사샤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알고 있어요.”

“그래.”

줄리아는 입가만 끌어 올려 웃고는 마지막 체크리스트를 물었다.

“엄마랑 통화한 지는 얼마나 됐지?”

“매일 해요.”

사샤는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 통화하는 건 일주일에 두 번 정도다. 그것도 항상 같은 내용이라 하나 안 하나 소용이 없는.

학교에서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으면 부모님에게 전화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부모 자식 관계에나 통하는 것이다. 사샤는 더 이상 어머니에게 마음의 짐을 얹어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사샤가 사려 깊은 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학금 외에도 들어가는 자잘한 생활비 때문에 한숨짓는 목소리를 들으면 더더욱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문제없겠구나.”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 신체검사를 할 때에는 필히 체중을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자신의 자질을 더 면밀히 검토할지도 몰랐다.

달칵.

“그 후원자들은 일 년에 오만 달러씩 내고 있다고요.”

등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사샤는 절로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우아한 은회색 정장을 입은 나이 든 여성과 그를 보좌하는 정장 입은 남자 여럿이 예술 감독의 방을 나서고 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경험을 원할 겁니다. 환대의 의미를 담은 오찬으로는 부족하다는 소리예요.”

“하지만 공연 리허설은 안 돼요.”

난감해하는 예술 감독의 목소리를 가로막으며 누군가 말을 덧붙였다.

“거기에 후원자들은 이번에 뉴욕에 방문하는 여행 상품을 사는 데에만 만 달러씩을 더 냈어요. 일반적인 여행보다 턱없이 비싼 금액이잖아요. 뭔가 기대할 겁니다.”

“알겠어요. 서른 명이라고 했죠……. 발레 스쿨 참관 쪽은 어때요.”

“흠……. 발레 스쿨이라.”

마침 걸어 나오던 무리의 시선이 사샤에게 닿았다. 곱상하게 생긴 소년의 흰 얼굴이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는 바람에 절로 시선이 갔던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뚫어져라 관찰하는 사샤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재단 이사장도 오나요?”

제 옆을 지나쳐 가는 남자의 목소리에 사샤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분은 이런 데는 관심 없어요. 발레 스타를 보려고 혈안이 된 일반인은 아니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장을 입은 이들은 사무실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문이 탁 닫히자 바깥의 소음은 웅성거리는 희미한 소리로 치환되었다.

“사샤.”

“…….”

“사샤?”

“네?”

줄리아는 여전히 방금 나간 이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사샤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가도 좋아.”

“네…….”

“참, 부모님께 말씀드려 봤니?”

어깨를 늘어뜨리며 막 자리에서 일어나던 사샤에게 줄리아가 물었다.

“어떤 거요?”

“콩쿠르 말이야. 너도 수상 경력을 한두 가지 만들어 놓으면 좋을 텐데.”

사샤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어디까지나 욕심이 난다면 말이야.”

“얘기해 볼게요.”

사샤는 눈을 내리깐 채로 사무실을 나섰다.

다시 복도를 따라 기숙사로 돌아가는 사샤의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어느새 등을 적셨던 땀이 식어 조금 오한이 들기까지 했다.

‘콩쿠르…….’

사샤는 저와 같이 입학한 동기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 콩쿠르에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사람은 저뿐이었다. 어퍼 스쿨을 통틀어서도 저 혼자뿐일지도 모른다. 물론 콩쿠르 따위 나가지 않아도 여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면 곧바로 이곳 뉴욕 발레단의 군무 단원으로 뽑힐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떨어진다면?

학생들은 그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국제 대회 여기저기에 얼굴을 비치고 있었다. 기량만 뛰어나다면 수상하지 못해도 세계 각지 발레단에서 오디션 콜을 받을 수 있으니까. 사샤 역시 그 기회가 간절했다.

이대로 졸업 직후 발레단에 뽑히지 못하면…….

‘그 정도 재능이 아닌 거지. 그러니 그땐 고향으로 돌아오렴.’

사샤는 입술이 하얗게 되도록 깨물었다.

최초에 입학을 위해 뉴욕까지 오는 비행기 표마저 허덕이며 지불한 그의 어머니, 갈리나는 전액 장학금의 조건이 아니었다면 유학을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사샤가 오디션을 제안 받은 것은 더 어린 시절이었던 열 살 무렵부터였지만, 그녀는 제 아들의 재능은 별 볼 일 없다며 손을 내저었다.

네 살 때부터 쭉 발레를 가르쳐 주던 동네의 무용 선생님이 오디션 비디오를 대신 접수해 주지 않았다면 이 학교에 입학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아마도 무용수의 꿈은 그대로 접은 채 낮에는 평범한 학생으로, 밤에는 동네의 작은 가게에 취직한 잡부로 푼돈이나 벌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갈리나는 아직도 사샤에게 그렇게 살 ‘기회’가 남아 있으니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돌아오라 말한다. 가족의 곁에서 살며, 가정을 위해 돈을 보태는 삶.

누군가에게는 그게 옳은 인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샤는 알고 있었다. 콩쿠르 참가비와 의상비, 대회가 열리는 나라까지 가는 교통비 따위는 장학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걸.

더 많은 기회를 잡으려면 돈이 필요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손바닥 안쪽에 손톱이 박히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보들보들한 손바닥 위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냥 돌아가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전문 무용수가 되어서…… 발레로 돈을 벌고, 돈을 벌어서 내 힘으로 여기 머무를 거야. 절대로 평범하게는 살지 않을 거야.’

사샤의 눈이 마침 보드에 붙어 있는 시간표에 닿았다. 약간의 휴식 뒤, 그다음은 파 드 되(pas de deux) 수업이었다. 여자아이들을 힘차게 들어 올리려면 지금 당장 뭐라도 먹어야 했다.

갑자기 전신에 피로감이 덮쳐 사샤는 비틀비틀 기숙사 쪽으로 향했다. 깡마른 소년의 몸을 채찍질하고 기력을 불어넣는 건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는 의지뿐이었다.

* * *

“주방에 누구냐? 누구야? 어둡잖아. 불 좀 환하게 켜!”

어둑한 기숙사 주방에서 선 채로 무언가를 먹던 사샤는 흠칫 놀라며 문가를 돌아보았다. 순간 눈앞이 환해지며 천장 형광등에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

“사샤! 웬일로 주방에 있어?”

소란스럽게 외치며 주방에 들어온 사람은 사샤와 동기생인 조제였다. 그 뒤로 체구가 조그마한 마누엘도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간식 먹는 거야? 혼자 먹냐? 들키기 싫어서 주방 불도 끄고?”

조제는 한 걸음에 한마디씩 하며 사샤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몸도 크고 성량도 크고 움직임도 큰 조제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고 활기차다. 턴도 힘으로 돌아 조제가 셰네(chaînés)를 여러 바퀴 돌 때면 그 옆에 서 있는 사샤의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을 맞은 듯 흩날릴 정도였다.

“맛있는 건 나눠 먹자. 어디 좀 봐.”

조제의 손이 머뭇거림 없이 뻗어 와 사샤가 들고 있던 나무 그릇 안을 푹 찔렀다. 희끄무레한 덩어리의 소스를 검지에 찍어 맛을 본 조제가 이내 과장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올리 소스? 상한 것 같은데.”

“……먹을 만해.”

사샤의 목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 조제는 휙 뒤돌아 스피커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고는 ‘식사 시간은 즐거워야지’ 라면서 스피커의 음량을 크게 올렸다. 라디오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할머니 주방 같다.”

“다른 노래 틀어.”

형광등의 인공적인 불빛과 공간을 꽉 채우는 소음. 그마저도 블루투스로 음악을 바꿔대는 조제 때문에 스피커에서는 3초마다 멜로디가 바뀌어 나왔다. 원래부터 소음에 약한 사샤는 혼이 쏙 빠지는 기분에 정신이 없어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사샤, 너도 체중 감량해?”

이어 다가온 마누엘의 물음에 사샤는 들고 있던 나무 그릇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는 괜찮았는데, 조제가 상한 것 같다는 말을 하자마자 역겨워졌다.

“양파, 토마토, 계란……. 이건 내가 감량할 때 먹는 건데.”

마누엘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사샤보다 5센티 정도 작은 마누엘은 또래 여자애들만 한 키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항상 체중에 신경을 쓰고 음식을 조심하기도 했다. 감량 식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마누엘이 하는 말에 화들짝 놀란 사샤는 다급히 말했다.

“난 살쪄야 돼.”

“살찌는 데는 이게 최고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제가 찬장으로 다가가 부스럭거리는 봉지를 꺼냈다. 괜찮은 음악을 고르는 데 실패한 듯 스피커에서는 다시 루이 암스트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제는 마시멜로가 가득 담긴 봉지를 펼쳐 버터나이프에 여러 개를 꽂고는 가스 불에 올려 하얀 마시멜로를 망설임 없이 화르륵 태웠다.

겉면이 갈색으로 변하자마자 조제가 사샤에게 나이프를 불쑥 내밀었다.

“하루에 한 봉지씩만 먹으면 돼.”

사샤는 나이프의 손잡이 부분을 조심해서 받아 들고는 마시멜로를 입으로 가져갔다. 조금 바삭한 겉면에서는 설탕을 태운 것 같은 고소한 맛이 났고, 안은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았다. 사샤는 정신없이 나이프에 꽂혀 있던 마시멜로 다섯 개를 연달아 먹어치우고는 조제에게 말했다.

“맛있어.”

서른 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황홀하게 중얼거리는 사샤의 목소리를 듣고 조제가 피식 웃었다.

“마트에서 2달러밖에 안 해. 경제적으로 살찔 수 있는 방법이지.”

조제는 남은 마시멜로의 봉지를 성의 없이 퍽퍽 구긴 다음 다시 찬장에 넣었다. 사샤는 미련이 남은 눈으로 찬장 속에 숨어 버리는 마시멜로를 바라보았다.

“이다음이 파 드 되 수업인가? 젠장, 난 샤워하러 가야겠다. 저번 시간에 클로이가 그랬는데, 내 땀 냄새가 지독해서 밸런스를 못 잡겠대.”

그리고 조제는 주방에서 나가 버렸다. 단 한 사람이 떠났을 뿐인데 주방은 다시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폭풍이 들이닥쳤다 떠난 것만 같았다.

사샤는 문가로 다가가 주방 불을 껐다. 아직은 해가 지기 전이고, 주방의 채광은 좋지 않았지만 창가에 있으면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빛이 들어왔다. 사샤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조금 망설이던 사샤는 찬장을 열어 조제가 넣어 놓은 마시멜로를 도로 꺼냈다. 부스럭거리며 봉지를 펼쳐 마시멜로를 한 움큼 쥐어 올리고 아까 조제가 했던 것처럼 나이프에 차례로 꽂았다. 그리고 가스 불을 올리기 위해 몸을 돌린 사샤는 마누엘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

“왜?”

얼어붙은 사샤가 저를 빤히 바라보자 도리어 마누엘이 물어왔다. 사샤는 마시멜로를 잔뜩 꽂은 나이프를 꼭 쥔 채로 잠시 가만히 서서 마누엘을 바라보았다.

“하던 거 계속해.”

“전에 조제도 내 빵을 허락 없이…….”

사샤는 변명했지만 마누엘은 그저 식탁 의자에 앉아서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샤는 마누엘 쪽을 흘끔거리며 마시멜로를 구웠다. 아까 조제가 했던 것만큼 잘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했다.

역시 맛있다.

아까는 너무 빨리 먹어서 금세 아쉬워졌었다. 사샤는 이번에는 최대한 천천히 먹자고 생각하면서 아껴 먹었다.

“나도 하나만 줘.”

그때 마누엘이 마시멜로 도둑질의 공범을 자처하며 사샤의 옆으로 다가왔다. 친근하게 팔이 닿을 정도로 밀착하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

“……하나만?”

“응.”

사샤는 정말 하나만 주려고 마시멜로를 나이프에서 손수 빼냈다. 건네주면 손으로 받아 갈 줄 알았는데 마누엘은 ‘아’ 하며 다가와 사샤의 손에 들린 마시멜로를 입으로 받아먹었다.

“맛있다.”

마누엘이 눈웃음을 쳤다. 조금 당황했지만 사샤는 마누엘이 프랑스인이라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발레 스쿨에서 만난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은 가끔 사샤가 이해 못 하는 낯선 행동을 하곤 했는데, 선생님은 그게 문화 차이라고 항상 강조했다. 그래서 사샤는 그런 행동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사샤, 넌 진짜 다정해.”

“내가?”

“내가 다칠까 봐 손으로 빼 줬잖아.”

그건 나이프째로 내밀면 두 개씩 먹을까 봐 그랬던 것이다. 마누엘이 이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게 조금 신경 쓰였지만, 사샤는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단것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사샤, 조제가 클로이 좋아하는 거 같지?”

“그래? 난 잘 모르겠어.”

갑작스럽게 조제에 관한 비밀 얘기를 들어서 사샤는 깜짝 놀랐다.

“걔는 여자애들하고 수업 받을 때 엄청 신경 쓰잖아. 요즘엔 향수도 뿌리더라고. 넌 안 그래?”

“나는…….”

그러고 보니 사샤에게도 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지금처럼 전문적인 발레 교육을 받기 전에 자신은 항상 또래 친구들에게 놀림의 대상이었다. 열 살 무렵에는 발레는 게이들이나 하는 거라고, 너도 여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놀림 받았고, 열세 살쯤에는 반대로 여자를 껴안고 싶어 환장해서 발레를 한다고 욕을 먹었다. 촌 동네에서 눈에 띄는 특기를 갖는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여자애들 때문에 발레를 하는 건 아니야.”

“그렇지?”

“여자애들이랑 가까워지고 싶다고 할 만한 게 아니잖아, 발레는. 얼마나 힘든데.”

“맞아.”

사샤는 과거 자신을 놀려 먹던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꽤 단호하게 말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사람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때 제대로 쏘아붙여 주었으면 좋았을걸.

그때 마누엘이 조금 더 팔을 붙여 오며 말했다.

“사샤. 넌 다른 애들이랑 좀 다른 것 같아. 여자에 관심도 없고.”

“내가?”

“너도 느끼지?”

“……?”

마누엘은 은근한 함의를 가지고 사샤의 허벅지를 야릇하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사샤는 영문을 몰라 제 친구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나도 사샤만큼 근육이 잡혀 있었으면 좋겠다. 난 근육이 잘 안 붙어서…….”

“근육이 있어야 점프질이 좋아져. 나도 작년에 바딤이 허벅지 뒤쪽 근육이 약하니까 매일 운동하라고 했었어. 많이 키운 거야.”

“……나는 허벅지가 가늘어서 점프가 약한가 봐.”

마누엘은 사샤의 손을 가져와 제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다. 사샤는 저보다 살짝 더 물컹한 느낌이 드는 마누엘의 다리를 열심히 더듬어 보았다. 체지방의 차이는 있지만 그렇게 가늘지는 않은 것 같았다.

“튼튼한데? 충분히 할 수 있어. 너도 운동해.”

“……아, 그래.”

마누엘은 어딘가 김이 샌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서로의 다리를 만지느라 얽혀 있던 팔이 떨어지기 전에 마누엘이 기습하듯 물었다.

“사샤. 넌 몽정할 때 무슨 꿈 꿔?”

“몽정?”

마누엘이 지나치게 귀 가까이에서 말하는 바람에 귓불이 간지러웠다. 사샤는 한 손으로 마누엘이 숨을 불어넣은 귀를 가리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말하면 나도 말해 줄게.”

몽정.

키스의 스릴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어요, 절대 없죠……. 하지만 갈구하는 두 입술이 맞붙을 때는 알게 될 거예요.

지금까지 흘려듣기만 하던 노래 가사가 왜인지 사샤의 뇌리에 속삭이듯 강렬하게 와 박혔다.

“설마 안 해 봤어?”

“……나, 나는…….”

사샤는 갑자기 펄떡이는 심장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두려울 정도로 가슴이 빨리 뛰는 건 마누엘이 만들어 낸 야릇한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샤도 타인의 입술 감촉을 딱 한 번 느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열기는 왜인지 오래도록 떨쳐지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늦되네.”

마누엘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고는 식탁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끄는 소리, 문가로 걸어 나가는 소리, 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혼자 남겨진 사샤는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오후의 일광을 등진 채로 그때의 열기를 떠올렸다. 주방에는 여전히 1950년대의 노래가 떠돌고 있었다.

* * *

점호를 마친 기숙사 방은 왁자지껄했다. 사샤는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늘은 유독 몸의 열기가 떨쳐지지 않는 날이었다.

‘마시멜로를 너무 돼지같이 먹었어.’

사샤는 더부룩한 위를 문지르며 후회했다.

오늘 사샤는 모든 클래스를 마친 후에도 혼자 연습실에 남아 연습했고, 9시가 되어 학교 문이 닫히자 멧 오페라의 백스테이지로 자리를 옮겨 비어 있는 공간에서 연습을 했다. 가끔 사샤가 혼자 연습할 공간을 찾으러 온다는 걸 알고 있는 조명 스태프가 문을 열어 주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혹독하게 몰아붙인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이제 손가락을 까딱할 힘도 없었다.

“조제, 너도 콩쿠르 나가?”

“나갈 건데, 자신 없다.”

“이번 콩쿠르엔 얼마 들어? 우리 엄마가 알아보래.”

“비행기 표, 의상비……. 의상은 중고로 사서 수선한다고 해도 다 합치면 5,000불 이상은 들걸.”

같은 방의 다른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사샤의 머리에는 5,000불이라는 금액만 똑똑히 와 박혔다.

사샤는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이불 밖으로 손만 꺼내 머리맡을 더듬던 사샤는 침대 매트리스와 헤드 사이에 숨겨 놓은 빳빳한 편지봉투 하나를 찾아냈다.

[Happy Birthday. – Karel Clements]

사샤는 편지에 눌린 만년필의 필압을 천천히 더듬어 보았다.

카렐 클레멘츠라는 이름의 후원자는 지금까지 사샤에게 두 번 친필 카드를 보냈다. 어퍼 스쿨 입학 후 1년을 마칠 때의 테스트 시험에서 최우수 학생으로 뽑혔을 때, 그리고 생일 때. 사샤는 생일날 받은 카드가 훨씬 더 좋았다. 전자는 모든 장학생이 받은 것이고 후자는 저만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후원자는 자신에게 단 두 번 카드를 보냈을 뿐이지만 사샤는 그보다 훨씬 많이 보냈다. 그가 자신의 편지를 보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오래전에 받은 명함에 메일 주소가 적혀 있어서 뭔가 말하고 싶을 때마다 그쪽으로 꼬박꼬박 메일을 써서 보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장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재단 이사장도 오나요?’

‘그분은 이런 데는 관심 없어요. 발레 스타를 보려고 혈안이 된 일반인은 아니니까.’

낮에 엿들은 대화를 떠올린 사샤는 괴롭게 베개에 이마를 파묻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이불 밖으로 마구 흐트러졌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자기가 잘한 것,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작 원하는 걸 졸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콩쿠르에 나가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다시금 마누엘의 목소리, 귓가에 불어넣던 숨결이 느껴졌다.

‘사샤. 넌 몽정할 때 무슨 꿈 꿔?’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친한 친구끼리는 다들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 것이 많았지만, 아무튼 사샤는 아무에게도 몽정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샤의 첫 몽정에는 큰 손을 가진 ‘남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꿈은 항상 불분명하고 흐릿해서 지금은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남자는 큰 손으로 사샤의 뺨을 감싸고 조심스레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 입술의 열기가 떠오를 때면 사샤는 쉽게 흥분했다.

다만 사샤는 이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여자가 되고 싶어서 발레를 한다고, 혹은 게이가 되고 싶은 거냐고 놀림 받았던 걸 생각하면…….

절대로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 * *

“주말 동안 이상한 곳 몰려다니지 말고. 다쳐 오지 말고! 특히 사내놈들! 미끄러운 바위, 해변의 산호, 폭죽, 오토바이, 자전거 전부 다 흉기라고 생각해라. 다쳐 오면 그날로 당장 학교에서 쫓겨날 줄 알아!”

토요일 오전 클래스는 바딤의 으름장으로 끝이 났다. 항상 반복되는 잔소리지만 정말로 부상을 입고 클래식 발레를 완전히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사샤는 두려워하며 그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함께 입학한 육십여 명의 동기생 중에 벌써 여덟 명이 어퍼 클래스 1년 차를 버티지 못하고 발레 스쿨을 떠났다. 고질적인 부상이 있어서, 운 나쁘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주말에 놀러 간 해변 바위에서 미끄러져서, 혹은 슬럼프에 빠지거나 다른 진로를 찾게 돼서…….

바딤도 그런 학생들을 수없이 많이 봐 온 게 분명했다.

이제부터 주말이 끝날 때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바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귀로 흘린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며 복도로 쏟아져 나갔다. 이제 부모님 집이 가까운 아이들은 외출증을 얻어 집으로 가고, 더러는 레오타드를 벗어 던지고 멋을 낸 옷차림에 머리까지 만진 다음 삼삼오오 몰려 거리로 나갈 터였다.

바딤은 연습실 안에 홀로 남은 단 한 명의 학생, 사샤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사샤, 넌 여기 더 있을 거냐?”

“오, 오늘은 한 시간만요.”

사샤는 주눅 들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친구도 없어?”

“…….”

“하긴, 좋은 무용수가 되는 데 꼭 친구가 필요한 건 아니지.”

바딤은 그렇게 말하며 사샤 대신 발레 음악을 CD에 틀어 주었다.

“다음 주에 후원자들이 발레 스쿨을 견학하러 온다는군.”

얼마 전 관리사감 줄리아를 만나러 갔을 때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였다. 평소 같았다면 사샤는 바딤과 말을 섞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에는 호기심이 치밀어 그만 묻고 말았다.

“혹시 재단 이사장님도 오세요?”

사샤의 말에 바딤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놈은 또 누구야?”

“미스터 클레멘츠…….”

“누가 오는지 나는 얼굴도 몰라.”

사샤는 실망하면서 역시 바딤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 같은 망아지에게 돈을 쏟아붓는 보람을 느끼게 해 드려야 한다는 건 알지.”

“…….”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보였다간 손님들 앞에서 뺨을 맞을 줄 알아.”

그리고 바딤은 센터에서 턴의 준비 자세를 잡는 사샤에게 고관절을 세워라, 턴 아웃을 챙겨라, 등이 뻐근할 정도로 펼쳐라 등등 여러모로 지적질을 해댔다. 그러더니 음악이 시작되어도 제 눈치만 살피는 사샤를 보곤 흥, 코웃음을 치며 연습실을 떠났다.

“후…….”

사샤는 깊이 심호흡을 했다.

겨우 혼자가 됐다.

주말을 맞아 학생들이 빠져나가 텅 빈 연습실은 사샤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채광이 좋은 연습실 안에서 음악을 틀면 공간을 가득 채운 선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함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호흡, 웃음소리, 바닥을 미끄러지는 소음 따위가 귀를 괴롭혀 집중을 어렵게 했다. 하지만 혼자 있으면 턴을 돌 때 나풀거리는 작은 먼지에 스폿을 고정시킬 수도 있었다. 그랑 주테(grand jeté)를 뛰면 오롯이 혼자서만 공기의 저항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한 시간여를 땀을 흘리며 홀로 연습하던 사샤는 벽에 세워 놓았던 핸드폰을 챙겼다. 다행히도 동영상은 잘 녹화된 것 같았다. 가끔 연습이 끝난 뒤 확인해 보면 중간에 핸드폰이 쓰러져 천장만을 찍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무튼 이렇게 녹화를 해 두면 거울로는 보이지 않던 자신의 안 좋은 습관을 잘 알 수 있다.

그렇게 비어 있는 연습실을 홀로 누리는 호사를 누린 사샤는 기숙사로 돌아왔다. 토요일 이 시간이면 사샤가 항상 연습실에 머무른다는 걸 아는 조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일로 돌아왔어? 너도 약속 있냐?”

“…….”

“샤워하는 거야? 진짜 밖에 나갈 거야? 네가 웬일로?”

한 걸음에 한마디씩 물으면서 조제가 욕실로 가까이 다가왔다. 귀가 아파서 사샤는 문을 닫아 버리고 물을 틀었다. 쏴아, 소리를 내며 물이 쏟아지자 조제가 구시렁대며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데이트해? 너 여자 만나? 누구랑 만나는데?”

여자…….

여자를 만나는 건 사실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라서 사샤는 대답을 하는 대신 무시하기를 택하고, 레오타드와 타이즈를 차례로 벗어 욕실밖에 털썩털썩 던져 버렸다.

무심코 정수리 위로 샤워 헤드를 가져다 대니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졌다. 뜨거운 물을 트는 것을 깜빡해 찬물 세례를 받은 사샤는 피부가 얼얼해지는 추위에 몸을 떨며 밸브를 미리 돌려 두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자주 있는 일이지만 당할 때마다 어처구니없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잠시 후 사샤는 푹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면서 욕실에서 나왔다. 조제는 호기심이 치밀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욕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말 안 하는 거 보니까 진짠가 봐?”

“…….”

집요하게 여자에 대해 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클로이에게 차인 모양이다.

찬물 샤워에 입술이 파래진 사샤는 대꾸하지 않고 옷을 걸쳤다. 딱 하나 있는 청바지의 허리가 조금 헐렁헐렁했다. 쏙 들어간 납작한 배를 문지르면서 사샤는 집에 오는 길에 마시멜로를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침대 헤드와 매트리스 사이에 손을 넣어 1달러짜리 지폐를 좀 더 챙겼다.

“사샤, 무슨 약속인데? 나도 데려가라. 그 여자애한테 친구들이랑 같이 나오라고 하면 되잖아.”

“싫어.”

옷을 다 갈아입은 사샤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춰 보았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조제에게 물었다.

“나 몇 살같이 보여?”

뜬금없는 사샤의 물음에 조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나이는 왜……?”

“…….”

“알았다! 너 술 마실 거구나?”

손가락을 딱 튕긴 조제가 헛짚어대자 사샤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방을 나섰다. 조제가 얼른 슬리퍼를 질질 끌며 사샤를 따라왔다.

“수상한데? 진짜 수상해. 네가 학교 밖에 친구가 있어?”

“…….”

“나이는 왜 물어보는데? 참고로 넌 절대 성인으로 안 보여. 나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술 마시려면 나를 데려가.”

조제는 사샤가 기숙사 건물을 나서 센터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쫓아갔다. 그러나 끈질긴 조제 때문에 무척 난감해진 사샤가 아예 입을 꾹 다물어 버렸기 때문에 막판에 그는 울컥 화를 내면서 허공에 주먹질을 해댔다.

“혼자 술 마시면 용서 안 해! 사감한테 말할 거야.”

사감에게 이른다는 말에 걸음이 잠깐 삐거덕 멈추었지만 사샤는 이내 조제의 허언을 떨쳐 내고 지하철로 향했다.

‘늦었다.’

지하철에 오르자마자 사샤는 타기 전에 레빈에게 늦는다는 연락을 했어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뉴욕 지하철은 통신 상태가 좋지 않아 일단 타고 나면 전화가 불통이 된다. 조제 때문에 정신이 쏙 빠져서 괜히 시간을 지체했다. 사샤는 조제를 조금 원망했다.

다행히도 링컨 센터부터 유니언 스퀘어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토요일의 지하철은 평소보다 북적였다. 사샤는 문가에 기댄 채 가끔 창백한 불빛이 스치는 캄캄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최근 사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의 힘으로 돈을 벌자고.

하지만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일을 구해야 할지 몰랐다. 게다가 영어도 그다지 유창하지 않아 겁도 났다.

인터넷에서 조금 찾아봤는데 일자리에 따라 벌 수 있는 돈은 천차만별이나, 현재 사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바로 나이였다. 일자리 소개의 말미에는 항상 20세 이상이라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어제 한참 웹을 뒤지던 사샤는 곧 기가 막힌 증언을 하나 발견했다. 10대들도 잘만 하면 한 번에 500불씩 받을 수 있다는 경험담을 찾은 것이다. 500불이면, 딱 열 번만 하면 콩쿠르에 드는 비용을 만들 수 있었다.

금세 혹한 사샤는 그 글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영어로 된 문장에 갑갑함을 느끼면서 사샤는 그림 위주로만 읽었다. 핑크색과 노란색의 귀여운 로고가 적힌 이미지와 함께 ‘Teen’이라는 글씨가 여기저기 있는 걸 보니 10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했다. 일은 별로 어렵지 않고, 처음에는 가볍게 인터뷰를 하며 몸만 보여줘도 된다는 구절을 본 사샤는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항상 어려웠던 사샤는 결국 전화를 걸지 못했다.

그때 사샤가 떠올린 것이 바로 레빈이었다.

‘레빈에게 대신 전화해 달라고 하자.’

레빈은 뉴욕에 와서 알게 된, 저보다 네 살 위의 뉴욕대 문리대 학생으로, 사샤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똑똑하고 모르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가끔 레빈에게 전화를 걸면 그녀는 파트타임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며 미안해하곤 했다. 방학이 되면 레빈은 동시에 세 개, 네 개의 잡을 소화할 때도 있었다.

굳이 이 일이 아니더라도 레빈은 이런저런 일자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밤, 사샤는 곧바로 레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레빈, 일자리는 어떻게 구해? 나도 일하고 싶어.’

‘……일자리?’

‘응. 나 돈이 필요한데…….’

레빈은 처음에는 당황한 듯 조금 난감해하다가 알겠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잘 상의해 보고 맞는 일을 찾아 줄 테니 수업이 끝나면 자기를 찾아오라고 했다.

“사샤!”

사샤가 유니언 스퀘어 역 출구로 나서자마자 보수 중인 건물 앞에서 레빈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점심은 먹었어? 점심 먹었으면 레모네이드 마실래?”

“레빈…….”

레빈은 창가 안으로 좌석이 비쳐 보이는 한가한 카페를 가리켰다. 하지만 사샤는 그 뒤에 선 남자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일자리 찾아봐 주기로 했잖아.”

속았다는 생각에 억울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사샤는 웅얼거렸다. 사샤의 시선이 닿은 곳을 알아챈 레빈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아……. 이 앞에서 우연히 만났어. 율리안도 너를 도와준대.”

그때까지 철골 구조물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백금발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안녕, 사샤.”

율리안은 팔짱을 낀 채로 엄격한 목소리로 사샤에게 인사했다. 사샤는 도움을 구하듯이 레빈을 바라보았지만, 율리안이 시선을 차단하며 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사샤. 어린애가 돈이 왜 필요한데?”

율리안이 제 앞으로 성큼 다가오기에 사샤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갈래.”

사샤는 그냥 등을 돌려 기숙사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두 발자국도 가지 못해서 율리안에게 팔을 붙잡혔다.

“가기는 어딜 가. 너 무슨 꿍꿍이야? 어린 게 어디다 돈을 쓰려고.”

“어린애 아니거든? 열여섯 살인데.”

“흥.”

사샤는 대놓고 저를 비웃는 율리안의 코를 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에 한 번 시도했다가 레빈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꾹 참았다.

가끔 사샤가 충동적으로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처럼 버릇없는 짓을 하면 레빈은 혼내는 대신 망연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사샤는 자기가 답 없는 구제불능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용돈으로는 모자라? 부모님한테 말 못 할 사고라도 쳤니? 그래서 레빈한테 전화했어?”

“왜 내가 율리안한테 말해야 하는데?”

“너 하는 짓이 딱 비행청소년이니까 그렇지. 이 녀석아.”

사샤는 울컥한 마음이 치밀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콩쿠르에 나가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따위 율리안에게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동정 받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사샤도 한때는 율리안의 벌꿀같이 매끄럽게 빛나는 백금색의 머리카락과 큰 키에 홀려 호감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율리안은 아무것도 모른다. 사샤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받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매달 장학생에게 슈즈나 비품 교체 비용으로 지급되는 400달러를 쪼개 반은 어머니에게 보내고 나머지로 식료품을 샀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율리안이 타박할수록 입을 닫아 버리는 사샤를 보다 못한 레빈이 끼어들었다.

“율리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아무튼 이리 와, 사샤. 왜 돈이 필요한지 얘기를 들어 봐야겠다.”

율리안은 사샤의 겨드랑이 사이로 양팔을 끼워 단단히 붙잡고 그를 카페 쪽으로 떠밀었다. 사샤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아이고, 이 자식. 깡말랐는데 힘이 왜 이렇게 세?”

“율리안! 심하게 굴지 마. 애들은 험하게 다루면 입을 다물어 버려.”

“으으…….”

기를 쓰고 버티던 사샤가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은 건 찰나였다. 그 순간 율리안은 사샤를 손쉽게 달랑 들어 올렸다.

“놔!”

허공에서 다리를 버둥대던 사샤는 자기 신발의 뒤꿈치가 율리안의 딱딱한 정강이에 닿는 걸 느끼고 놀라 다리를 움츠렸다. 파 드 되를 출 때 파트너의 토슈즈 신은 발에 수십 번 정강이를 차여 본지라 거기를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잘 알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눈치를 보니 과연 통증이 있었는지 율리안은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조금 미안함을 느낀 사샤의 기세가 수그러들었을 때였다.

“사샤, 너 두고 보자. 레빈만 없으면 엎어 놓고 엉덩이를 때려 줄 테니까.”

율리안이 사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협박했다. 사샤는 겉과 속이 다른 율리안의 교활함에 치를 떨었다. 흥분한 그는 러시아어로 소리치며 다시 발광했다.

「놔! 놓으라고! 폭력배! 교활한 거짓말쟁이!」

* * *

“그러니까 심하게 굴지 말라고 했잖아. 사샤도 사정이 있을 거라고.”

다정한 큰누나처럼 저를 내려다보는 레빈과, 팔짱을 낀 채로 저를 차갑게 추궁하는 율리안의 앞에서 사샤는 돈이 왜 필요한지 털어놓아야 했다. 콩쿠르에 나가고 싶었다는 부분을 말하는 도중에는 눈가에 가득 고였던 눈물을 뚝뚝 떨구고 말았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흐를 때 사샤는 턱이 아프도록 입안을 꽉 깨물었다.

동정심을 사고 싶어서 운 건 결단코 아니었다. 율리안의 앞에서 궁상맞은 말을 하는 스스로가 너무 어리고 쓸모없이 느껴져서 수치스럽기만 했다.

사샤의 말을 다 듣고 겸연쩍은 표정이 된 율리안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콩쿠르…… 부모님은 반대하시는 건가?”

사샤는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채로 율리안을 노려봤다. 원망이 비치는 눈초리가 새파랬다.

역시 율리안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율리안은 수억짜리 바이올린을 등에 메고 거리를 활보하고, 레슨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외국으로 날아가서 시간당 수천 불짜리 개인 교습을 받는다. 사샤는 음악에 대해 잘 몰랐지만 율리안을 통해 발레나 음악이나 풍족한 사람들이 더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게 아니라, 사샤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거지. 부모님한테 짐 지우고 싶지 않아서. 그렇지?”

레빈의 말에 사샤는 훌쩍이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빈은 율리안과는 다르다. 그녀는 제 처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레빈 역시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왔고, 집세와 생활비를 지원받을 형편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파트타임 잡을 하며 생계를 이어 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레빈한테만 말하고 싶었던 건데.

아직도 젖어 있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내는 사샤 앞에서 율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튼 사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는 알겠고, 왜 돈이 필요한지도 알겠어. 그래도 일하는 건 추천하지 않아. 너 학생 비자로 온 거 아냐? 일하다가 걸리면 추방이라고. 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위치니까 착취당하기도 쉽지.”

“…….”

“그리고 네가 알아봤다는 일……. 이건……. 하, 말하기도 부끄럽다. 이런 건 네가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알겠어?”

“……그 일이 뭔데?”

“너 몸 팔고 싶어?”

율리안이 상체를 기울이며 협박하듯 뱉은 말에 사샤는 흠칫 굳었다. 곁에서는 레빈이 손으로 눈가를 가린 채로 한숨짓고 있었다.

“어? 포르노 비디오 찍고 싶으냐고.”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사샤는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골적인 단어에 눈물이 쏙 들어가고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레빈이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끼어들며 화제를 전환했다.

“아, 방금 비디오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사샤도 유튜브 해 볼래?”

“유튜브?”

“전에 영상을 몇 개 봤는데, 발레 스쿨에 다니는 학생들이 그런 걸 많이 하더라고. 발레 동작을 가르쳐 주는 것도 있고, 학교생활 브이로그 같은 것도 있었고…….”

“음…….”

레빈의 말에 율리안은 빠르게 핸드폰을 움직여 영상을 몇 개 찾아보았다.

“이런 거 괜찮네. 쉬워 보이고.”

사샤는 율리안이 내민 영상에 고개를 기울였다. 화면에는 사샤 또래로 보이는 소녀가 등장해 자기가 가진 색색의 레오타드를 늘어놓고 착용감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있었다. 그걸 유심히 보던 사샤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안 될 것 같아. 레오타드도 별로 없고.”

지원받는 슈즈 교체비로 식비를 충당하는 바람에 필수품인 발레 슈즈도 제때 구비하지 못하고 있는데 레오타드를 자랑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안 그래도 가지고 있는 슈즈는 과한 연습량 때문에 빨리 닳아 전부 구멍이 났다. 최근에 조제가 잘 안 신게 된다며 새 슈즈를 하나 던져 줬는데, 그건 사샤에게는 너무 커서 타이즈 안에 양말을 두 개나 신어야 했다.

시무룩해진 사샤를 보며 율리안은 답답하다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레오타드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넌 아무 얘기나 떠들면 돼. 발레가 전공이니까 발레를 콘텐츠로 하라는 것뿐이지.”

“그걸 하면 사람들이 나한테 돈을 줘?”

“그래. 이건 확실히 돈이 돼. 넌 얼굴도 예쁘장하니까 구독자가 금방 늘 거야.”

“……어떻게? 계좌를 써 놓으면 나한테 입금해 줘?”

율리안은 나름 성실하게 그 메커니즘에 관해 설명해 주었지만, 끝끝내 사샤는 유튜브로 돈을 만들어 내는 방식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율리안은 한숨지었다. 광고 수익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는 디지털 백치인 사샤가 스스로 영상을 만들어 올릴 수 있을 리 없었다.

“내가 너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랐다.”

“……사샤. 그래도 천천히 고민해 봐. 친구들이 도와줄 수도 있을 거야.”

“응…….”

소득 없는 하루에 사샤는 침울해졌다.

사샤가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에 레빈과 율리안은 시무룩해진 소년에게 저녁을 사 주고 싶어 했다. 먹고 싶은 게 있냐는 물음에 사샤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시멜로’라고 답했다.

* * *

사샤는 더부룩한 윗배를 조심조심 쓰다듬으며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 손에는 마시멜로가 잔뜩 들어간, 백화점의 고급스러운 종이가방을 든 채로.

한 번의 식사로는 위장으로 다 집어넣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를 먹고 나서 율리안이 디저트로 사 준 것은 스모어쿠키였다. 마시멜로와 초콜릿을 쿠키 사이에 끼워 녹인 디저트를 먹는 사이에 사샤의 머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사로운 고민은 사라져 버렸다. 레빈이 줄곧 기운을 북돋아 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콩쿠르가 필수는 아니잖아. 돈 벌려고 일하다가 반대로 실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 너무 걱정하지 마. 학교에서 계속 지금처럼 열심히만 하면 발레단에 바로 입단할 수 있을 거야. 난 발레는 잘 모르지만 사샤 너는 충분히 가능성 있어.’

맞는 말이었다. 실은 얼마 전까지는 사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매 학기 테스트 성적을 지금처럼만 최우수로 유지하고 큰 사고를 치지 않는다면 무난히 발레단의 입단 오디션을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사샤는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500불에 정신이 팔려 무슨 짓을 할 뻔했는지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포르노 같은 걸로 얼굴이 팔리면 발레단은커녕 어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레빈의 말대로 콩쿠르가 전부가 아닌데, 암울한 생각에 몰려 사고를 칠 뻔했다.

‘난 왜 이 모양일까.’

한 번 고민에 휩싸여 불길한 망상을 시작하면 거기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가장 최악의 상황만 상상하게 된다. 도가 지나친 불안증, 이건 사샤 자신도 인지하고 있는 점이었다. 귀가 아프게 지적받은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샤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쾅쾅 울렸다. 저 녀석은 뇌에 곰팡이가 폈다고 윽박지르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했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는 사샤가 열 살 때 어머니와 이혼했고, 이제는 더 이상 같이 살지도 않고, 만날 일도 없지만 여전히 사샤의 불안이었다.

링컨 센터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방 문고리를 돌려 열자마자 안에서 왁자지껄 소음이 쏟아졌다. 말을 붙인 건 마누엘이었다.

“조제가 그러던데, 너 여자애들이랑 술 마시러 갔다고.”

“…….”

“밤새 안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사샤는 자신의 침대로 향해 한 칸짜리 옷장을 열고 안에 마시멜로를 잘 넣어 놓았다. 제 뒤를 따라온 마누엘의 목소리가 왠지 퉁명스럽게 들렸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어 놓은 다음 안에 입고 있던 트랙톱의 지퍼를 쭉 내리며 사샤는 뒤돌았다.

“아니야.”

“……그래?”

지퍼를 내리며 드러난 맨가슴에 마누엘의 시선이 닿았다. 사샤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마누엘을 마주 보며 옷을 마저 벗었다. 왜 저렇게 보는지 알 수가 없어 뭐가 묻었나 고개를 숙였지만, 눈에 띄는 건 없었다.

혹시 털이 났나, 조금 기대했던 사샤는 실망했다. 2차 성징이 빠른 아이들은 가슴이나 허벅지는 물론이고 온몸에 돋아나는 털들을 제모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왁싱숍에 가곤 했다. 그러나 사샤의 피부는 아직 여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매끈했다.

“레빈이랑 율리안이랑 저녁 먹었어.”

말을 뱉은 후에야 사샤는 마누엘이 그 두 사람을 모른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곧 알 게 뭐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샤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주로 남자들에게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걸 안 마누엘은 다시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바로 씻을 거야?”

“왜? 너도 욕실 쓰게?”

반나체인 채로 이번에는 바지를 벗으려던 사샤는 잠깐 배에 손을 대고 동작을 멈추었다. 홀쭉하던 낮과 달리 윗배가 조금 나와 있었다. 발레 선생님들은 항상 그날 먹은 것은 그날 다 소화하고 자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지 않으면 보기 싫은 곳에 지방이 붙기 일쑤라고.

“저녁을 너무 많이 먹어서 스트레칭하고 자야 할 것 같아. 도와줄래?”

“당연하지.”

이왕 씻을 거면 땀을 흘린 후에 씻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샤는 그대로 방을 나가 복도 벽을 바라보고 제자리 뛰기를 했다. 몸이 조금 더워졌다고 생각했을 때쯤에 벽에 허리를 바짝 붙이고 앉자 기다리고 있던 마누엘이 다가왔다.

사샤는 양다리를 넓게 가로로 벌려 180도에 가깝게 벽에 붙이려고 노력했다. 앞에 다가와 앉은 마누엘이 양발을 사샤의 허벅지 위로 올렸다.

“민다?”

“응.”

“토할 것 같을 때 말해.”

하지만 마누엘이 체중을 실어 허벅지를 밀어대기 시작했을 때 사샤는 이미 창백하게 질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근육이 뻐근하게 늘어나는 감각을 느끼면서 사샤는 고관절과 다리의 힘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참다못해 앞으로 상체가 쏟아지려 하면 마누엘이 손가락으로 어깨를 밀어 벽에 붙이게 했다.

“하아, 하아…….”

“아파?”

“…….”

“힘이 진짜 좋구나, 너.”

마누엘이 사샤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루만지는 손길이 성가셨지만 힘들어서 떨칠 수도 없었다. 사샤는 반대쪽으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어릴 때는 마음먹은 대로 다리를 늘일 수 있었는데, 한두 해 나이를 먹어 갈수록 근육량이 늘면서 유연성이 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바딤이 가르쳐 준 이 스트레칭 방식은 막상 할 때는 고문을 당하듯이 괴롭지만 한 번 늘여 놓으면 당장 다음 날 동작의 질이 달라지곤 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샤를 보면서 마누엘은 혀를 내둘렀다. 바딤에게 걸려 억지로 이 스트레칭을 당하게 된 놈들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리를 절면서 연습실을 빠져나간다. 이런 걸 자처해서 하는 사람은 사샤밖에 없었다.

“이제, 됐어. 그만…….”

마누엘이 미는 것을 멈추고도 사샤는 한동안 다리를 오므리지 못하고 앞으로 쓰러진 채로 숨만 몰아쉬었다. 얼얼한 허벅지를 문지르면서 일어났을 때는 등줄기로 땀이 또르륵 흐를 정도로 몸 전체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끙끙대며 일어나는 사샤를 보는 마누엘의 눈초리가 묘했다.

“나 먼저 씻어도 돼?”

마누엘이 방에 들어가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것이 욕실 사용 순번 때문이라고 생각한 사샤가 물었다. 마누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그날 밤, 사샤의 침대 안으로 누군가가 기어들어 왔다.

“누구……. 좁아.”

사샤는 웅얼거리며 이불 속에서 돌아누웠다. 침입자는 발끝에서부터 숨어든 것 같았다. 이불 안을 꿈지럭대며 기어 올라온 누군가의 뜨거운 숨이 골반께에 흩어졌다. 사샤는 맨살에 느껴지는 더운 숨을 소극적으로 피하며 엎드렸다.

“하지 마…….”

“…….”

“으응…….”

잠결에 사샤는 얼얼한 허벅지 안쪽을 더듬는 손길을 느꼈다. 상대는 땀이 많은 편인지 더듬어 오는 손바닥이 조금 축축했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 속에서 멍하니 눈만 깜빡이고 있자 손이 곧 속옷 안으로 들어왔다. 시야가 깜깜하고 잠이 덜 깨서 아직 꿈인지 아닌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것도 몽정일지도 모른다.

기분 좋은 꿈.

사샤는 긴장한 채로 그다음을 기다렸다. 예전에는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이마 위에 키스를 해 주는 것만으로 흥분했었다. 그보다 더한 자극이 있을까? 기대도 되고 무섭기도 했다.

그 순간, 축축한 손바닥이 거침없이 속옷을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주저하지 않고 앞을 쥐었다.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에 사샤의 입에서는 호흡과 함께 신음이 흘러나왔다.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에 깜짝 놀란 사샤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였다.

“어떤 놈이 잠꼬대야! 잠 좀 자자.”

잠에 푹 취해 신경질을 부리는 조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몸에 닿는 모든 감각이 생생해졌다. 입을 틀어막은 자신의 손도, 가쁜 숨도, 조금 건조하게 느껴지는 이불자락도……. 그리고 제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낯선 사람도.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니.

사샤는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보다 더 빨리 사샤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억센 악력에 눌려 깔린 채로 사샤는 저를 덮친 남자를 바라보았다.

‘마누엘.’

이불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사샤는 무섭고 당혹스러운 기분에 짓눌려 제 친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조제의 뒤척임이 잦아들 때까지 그렇게.

잠시 후 방 안이 정적에 빠지자 마누엘은 알아서 조용히 사샤의 침대를 빠져나갔다.

* * *

마누엘이 그대로 물러난 뒤로도 사샤는 마음이 번잡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커다란 손을 가진 남자가 꿈에 나올 때와는 전혀 달리 마누엘의 축축한 손바닥은 징그럽고 소름 끼쳤다. 그리고 마누엘이 왜 제 것을 만지려고 했는지 궁금했다.

기회가 있으면 물어보고 싶었는데, 마누엘은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시치미를 뗐다. 주말 내내 다른 친구들과 섞여 웃고 떠들며 평소와 다름없이 굴었다.

율리안과 레빈을 만난 뒤 꽤 나아졌던 사샤의 기분은 주말 사이 다시 곤두박질쳤다. 마누엘이 저를 따돌리는 탓도 있었지만, 일요일 저녁 잠들기 전에 허벅지에 생긴 피멍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샤는 허벅지 안쪽 내전근에 크게 자리 잡은 멍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얼얼한 느낌이 오래간다 했더니 결국 근육이 파열되었다. 이대로 염증이 생기면 수개월은 성가시다. 옷장 문에 한 손을 짚은 채로 높이 사이드 데벨로페(développé)를 펼쳐 본 사샤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데리에르(derriére)로 다리를 넘겼다. 허리를 조금 숙이자마자 찌릿한 느낌이 왔다.

‘찢어졌다.’

우울한 얼굴로 자책하면서 사샤는 멍이 잡힌 부위에 찜질팩을 잔뜩 올렸다.

“여기 있던 찜질팩 누가 다 가져갔어?”

누군가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방 안에다 대고 외쳤지만 사샤는 못 들은 척 이불로 덮어 다리를 가렸다. 그러고는 염증이 심하지 않기만을 빌면서 잠들었다.

그러나 통증은 다음 날 아침에 더 심해졌다.

‘바보 같아.’

사샤는 울적하게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전날 밤 욕심껏 가져와 다리 위에 올려 두었던 찜질팩은 자는 사이 뒤척이느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근육이 찢어진 걸 바딤에게 들키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또 모두가 보는 앞에서 뺨을 맞을지도 몰랐다.

시무룩해져 남들보다 늦게 로커룸에 도착한 사샤는 구석에서 몰래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피멍을 숨기기 위해 즐겨 입는 숏 타이즈 대신 발목까지 오는 짙은 타이즈를 신었다. 조제가 적선해 준 큰 슈즈 안에 양말을 두 개 신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옷을 둘둘 말아 넣고 로커 문을 잠그려 했을 때였다.

[아침 거르지 말 것!]

사샤의 시선이 로커 안쪽에 붙은 작은 메모에 머물렀다. 안에는 자기가 보관한 기억이 없는 낯선 물건이 하나 들어 있었다.

사샤는 메모가 붙은 작은 꾸러미를 꺼냈다. 투명한 비닐로 포장된 꾸러미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안에는 초콜릿바와 우유 한 팩, 그리고 랩으로 둘둘 싸 놓은 베이글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다. 반으로 가른 베이글의 안으로부터 꾸덕꾸덕한 크림치즈와 선홍빛 연어가 삐져나온 것이 보였다.

‘마누엘인가.’

어쩌면 사과의 제스처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줄리아가 살을 찌우라고 말한 게 바로 저번 주였다. 습관적으로 또 아침을 거를 뻔했다는 사실에 사샤는 머쓱해졌다. 게다가 연어라니. 연어는 사샤가 무척 좋아하지만 보관이 어려워 자주 먹지 않게 되는 음식 중 하나였다. 갑작스러운 허기를 느낀 사샤는 음식 꾸러미를 들고 나와 창가에 섰다.

비닐을 뜯자마자 베이글을 입 안에 가득 넣고 다 씹기도 전에 삼키며 목이 막히면 우유를 마셨다. 베이글은 정말 맛있었다. 연어는 신선했고 크림치즈에서는 풍부한 우유 맛이 났다.

마침 오전 클래스를 위해서 이동하던 여자아이들이 선 채로 급하게 아침을 먹는 사샤를 돌아보며 수군거렸다. ‘엄청 빨리 먹네’ 가벼운 웃음소리가 허공에 흩어질 때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사샤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5분도 안 되어서 모든 음식물을 싹 비운 사샤는 쓰레기를 운동 가방에 욱여넣고 연습실로 향했다. 너무 급하게 먹은 탓인지 조금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한 학생들이 흩어져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사람이 없는 곳으로 향한 사샤는 다시 한 번 근육이 찢어진 왼쪽 다리를 손으로 당기며 뒤로 길게 스트레칭해 보았다. 그러나 마음이 급한 나머지 제대로 몸을 풀지도 않고 너무 욕심을 낸 모양이다. 평소 같은 각도로 다리를 들자마자 눈물이 찔끔 날 정도의 통증이 쏟아졌다.

염증은 나아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심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후에는 피지컬 센터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여러분, 좋은 아침이에요.”

연습실 문을 가볍게 두드린 것은 줄리아였다. 사샤를 비롯해 학생들의 시선이 문가로 모였다.

주의를 집중시킨 줄리아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오늘 수업에는 관람객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우리 학교는 수많은 후원사의 도움으로 운영이 되고 있죠. 여러분의 성장을 즐겁게 지켜보는 분들이 오늘 찾아오실 거예요.”

학생들은 작은 소리로 웅성거렸다. 매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연습이지만 관람객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습실에는 금세 기분 좋은 활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연습을 방해하지는 않을 거예요. 이 바깥에서 창을 통해 보시거나, 학교 시설을 체크하실 거예요. 여러분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착한 학생으로, 열심히 연습해 주세요.”

사샤는 굳은 얼굴로 줄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늘이었나? 저번 주 주말 바딤이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 그제야 기억났다.

이어 줄리아의 뒤에서 기다리던 바딤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 사샤가 당황을 갈무리할 새도 없이 첫 순서인 플리에(plié)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1번 포지션! 플리에부터.”

사샤는 욱신거리는 허벅지를 털며 1번 포지션을 잡았다.

‘그분은 이런 데는 관심 없어요. 발레 스타를 보려고 혈안이 된 일반인은 아니니까.’

‘미스터 클레멘츠? 그놈은 또 누구야.’

사샤는 심호흡을 하며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클레멘츠 씨가 자신을 찾아올 가능성은 확연히 낮았다. 게다가 오전 클래스를 같이 듣는 학생은 60명, 엇비슷한 레오타드를 걸친 아이들 중에서 저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 터였다.

사샤는 잡념을 털고 금세 동작에 집중했다. 그러자 어느새 관람객의 존재도 머릿속에서 잊혀 갔다.

그러나 바 워크의 중반까지는 잊고 있던 통증이 그랑 바트망(grand battement)을 가볍게 차는 도중 다시 찾아왔다. 허공을 향해 힘 있게 다리를 찰 때에 무시하기 힘들 만큼 찌릿한 느낌이 왔다. 입술을 깨문 사샤는 바딤의 시선이 자신을 비켜 가기만을 바라며 동작을 이어 갔다.

“자, 반대쪽. 다시 한 번 설명해 주마. 5번 포지션에서 앞으로 세 번, 옆으로 한 번. 옆으로 세 번째 차면서 다리를 쓸고, 데리에르…….”

바딤의 설명 중 몇몇 학생이 창밖을 흘끔댔다. 턱에서 흐르는 땀을 닦던 사샤의 시선 역시 그들을 따랐다. 긴 직사각형 창밖으로 남색, 회색, 검정색 양복을 입은 성인 남자들의 무리가 보였다. 아까 줄리아가 말했던 후원자들인 것 같았다.

“프레파라시옹(préparation)!”

바딤의 외침에 사샤는 앙 바(en bas)로 준비 동작을 취했다. 손을 따라 시선을 조금 숙였을 때, 사샤의 시야 끝으로 금빛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금발?

“앞으로 힘차게! 더 높이!”

사샤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복도에 희미하게 빛을 뿌리는 금발이 단번에 눈에 꽂혔다.

다른 이들보다 시야가 훌쩍 높은 장신의 남성, 짙은 색의 슈트로 너른 어깨를 감싼 금발의 남자.

카렐 클레멘츠.

그가 연습실을 등진 채로 뒤돌아 서 있었다.

사샤는 멍하니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양복을 걸쳐도 어딘가 후줄근해 보이는 다른 중년 남성들과 달리 자신의 후원자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줄리아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는 남자의 목덜미가 금욕적으로 깨끗했다.

1년 만에 다시 만나는 후원자였다.

그가 돌아서 창 안을 바라보는 순간, 사샤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착각일 테지만,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연습실 안쪽을 스치듯이 훑은 후원자의 시선은 찰나였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착각한 것은 사샤 본인이 그를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리게 한 바퀴를 돌아본 후 그는 다시 등을 보였다. 저보다 훨씬 키가 작은 줄리아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느라 고개를 조금 숙인 자신의 후원자는 첫 만남에서 느꼈던 것처럼 친절해 보였다.

“사샤! 포인(point)은 어디 간 거냐.”

가까이 다가온 바딤의 목소리에 사샤는 흠칫 놀라며 앙 오(en haut)로 뻗은 팔을 더 길게 뻗었다.

“등에 힘주고, 아랫배 끌어 올리고!”

바딤은 등에 힘주라고 말하며 등에, 아랫배를 끌어 올리라고 말하며 배에 한 대씩 찰싹찰싹 사샤를 때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때리는 손이 매워 눈물이 찔끔 났다. 순간적으로 넋을 빼놓고 있던 것을 흐트러진 몸으로 다 들켜 버린 사샤는 다시 흉통을 조이고 숨을 들이마시며 몸을 긴장시켰다.

시선을 정면에 고정하자 귀가 붉어진 자신이 보였다. 몸에 힘이 풀리고 엉덩이가 빠진 한심한 포즈를 후원자에게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몹시 실망스러워졌다.

그렇게 바트망을 마지막으로 바 워크가 마무리되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학생들은 바에 기대 스트레칭을 하거나 보틀에 담아 온 물을 마셨다. 사샤 역시 비틀비틀 벽에 기대어 놓은 가방으로 다가가 물을 찾았다. 하지만 손끝에 걸리는 것은 아까 해치운 베이글 샌드위치의 잔해뿐이었다.

누군가에게 얻어 마실 수 없을까, 목이 마른 사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바딤이 허공에 대고 두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학생들은 둘씩 짝을 이뤄 일사불란하게 바를 번쩍 들고는 연습실 한구석으로 치웠다.

“아다지오부터. 5번 포지션.”

그렇게 물 한 모금 마실 틈도 없이 센터 워크가 시작되었다.

사샤는 한숨을 쉬며 센터로 나섰다. 바 워크는 그 전부가 센터 워크를 위한 몸풀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자 사샤는 아다지오의 순서를 알려주는 바딤의 뒤에 서서 그 동작을 눈짓으로 외웠다. 가끔 급히 먹은 아침이 윗배를 꽉 채운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그때 연습실의 앞쪽 문이 찰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매우 조용히 열렸지만 학생들은 자연히 문 쪽을 흘끔댔다.

“연습실에는 안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어?”

“모르지. 가까이서 보고 싶나 봐.”

“땀 냄새나 날 텐데.”

사샤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조제와 마누엘이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말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모은 손을 꼭 쥔 채로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깥에 서 있던 후원자들이 하나둘 연습실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번 그룹부터. 프레파라시옹, 알롱제…….”

바딤의 목소리는 이미 사샤의 귀에 거의 들리지 않았다. 열을 지어 들어오는 후원자들 틈에 카렐 클레멘츠가 있는지만이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발레를 하는 모습은 처음 보여 드리는 것이다. 후원자가 저를 본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무서울 정도로 두근거렸다.

“파세(passé), 데벨로페. 물 흐르듯이 부드럽게 앞으로 짚으며 플리에.”

그러나 제 후원자가 들어오기도 전에 연습실의 문은 닫혀 버렸다.

‘왜 안 들어오시지?’

눈을 씻고 봐도 카렐은 없고, 후줄근한 양복을 걸친 중년 남자들이 팔짱을 끼고 벽에 일렬로 서 있을 뿐이다.

사샤는 속으로 무척 실망하면서 앙 드당(en dedans) 턴을 돌기 위해 짚는 발로 지면을 콱 밟았다. 힘을 세게 받은 몸이 팽이처럼 빠르게 돌며 세 바퀴를 꽉 채웠다. 바딤이 시범을 보일 때는 한 바퀴, 많이 도는 아이들도 더블 턴을 할 뿐이었다. 그러나 턴을 마치고도 꼿꼿하게 밸런스를 유지한 사샤는 길게 다리를 뻗으며 포즈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학생을 발견한 후원자들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군계일학에 시선이 닿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반면, 바딤은 순서가 끝나고 고개를 숙인 채로 다시 홀의 뒤쪽으로 돌아가는 사샤에게 오래 눈길을 주었다.

‘저 녀석 화풀이하고 있구만.’

바딤은 혀를 차며 그런 사샤를 모른 척했다.

탕뒤(tendu), 스몰 점프(small jump), 발랑세(balancé)로 이어지는 센터 워크의 순서가 점차 복잡해져 갔다. 수트뉘(soutenu)와 피케 턴(pique turn)까지 마친 후 마지막으로 바딤은 그랑 점프(grand jump)를 뛰라고 지시했다.

“첫 번째 그룹 앞으로! 마누엘, 사샤에게서 조금 떨어져서 서라.”

바딤의 지적에 사샤를 포함한 다섯 명의 학생이 다시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섰다.

그랑 점프는 사샤가 가장 좋아하는 순서였다. 그랑을 뛴다는 것은 클래스가 끝나간다는 뜻도 되지만, 무엇보다도 허공에 몸이 뜨는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사샤는 마음속으로 자주 지적받는 내용을 되새기며 포즈를 준비했다. 음악을 타며 톰베 파 드 부레(tombé pas de bourrée)에서 우아하게 팔을 젖히고 글리사드(glissade)로 도움닫기, 그리고 끝까지 포인했던 다리로 지면을 밟으며 힘차게 날아오른다. 그 순간 상체는 최대한 힘을 빼고 캉브레(cambré)로 젖힌다.

허공에서 다리가 완전히 벌어질 때 다시 통증을 느꼈지만, 사샤는 말없이 모든 동작을 놓치지 않고 짚어 나갔다.

“하아, 하아…….”

마지막 아라베스크(arabesque)로 포즈를 취한 사샤는 이어 달려 나오는 두 번째 그룹을 위해 앞으로 비켜섰다. 연습실을 크게 빙 돌아 구석으로 향할 작정이었다.

그때였다.

달칵.

“앗……!”

갑자기 바로 눈앞에서 문이 열려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 사샤는 얼른 한 걸음 물러났다.

“이런, 미안해요.”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였다.

사샤는 저에게 사과를 건넨 상대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미스터 클레멘츠.’

사샤는 말문이 막힌 채로 남자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막상 마주치니 멀리서 보던 것보다 훨씬 시야가 높았고, 체격도 태산처럼 거대했다. 게다가 그 향기,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부딪힐 뻔했을 때 코끝으로 훅 풍겨 들어오던 쌉쌀한 향수 냄새. 연습실에서 땀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뿌려대던 조제의 냄새는 싫기만 했는데, 절제된 슈트로 한 겹 억누른 듯한 제 후원자의 향기는 무척 좋았다. 마치 진짜 어른 같았다.

순간 사샤는 깨달았다. 이건 상대와 아주 가까워졌을 때만 맡을 수 있는 냄새라는 것을. 후원자가 저에게서 연한 땀 냄새를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샤는 얼른 한 걸음 물러났다.

사샤는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후원자를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깔끔히 사과한 이후 조용히 연습실의 문을 닫고 바로 그 앞에 기대어 섰다. 그러고는 사샤의 존재는 벌써 잊은 것처럼 팔짱을 낀 채로 그랑 점프를 뛰고 있는 다른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내 얼굴을 잊어버리신 걸까.’

사샤는 후원자를 흘끔대며 다시 연습실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목에서 가끔 금속이 은은한 빛을 반사했다. 척 보기에도 무게가 느껴지는 묵직한 시계는 언뜻 부담스러운 디자인이었지만, 손등에 핏줄이 선 남자의 커다란 손아래에서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 사샤는 시계의 무게를 어림짐작해 보고는 깡마른 자신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저런 걸 찬다면 흉측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할 테다.

아무튼 제 후원자는 꽤 집중해서 학생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사샤는 초조한 마음으로 바딤이 한 번 더 그랑을 뛰라고 지시해 주기를 기대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자, 연습은 여기서 끝이다.”

사샤는 내심 한탄했다. 그리고 짧지 않은 센터 워크의 시간 동안 클레멘츠 씨는 대체 어디를 갔었던 건지 원망했다. 또한 자신의 춤을 조금도 보여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금세 울분에 찼다.

그런데 그때였다.

“사샤, 앞으로 나와라.”

바딤이 말했다.

갑작스러운 지시에 사샤는 바딤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사샤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고 있었다.

“해적 솔로 베리에이션, 잊지 않았지?”

사샤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홀 가운데로 걸어 나가는 사샤를 뒤에서 바라보던 조제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해적 베리에이션은 조제가 참가하기로 한 콩쿠르의 지정작으로, 그가 현재 개인 레슨까지 받고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바딤이 굳이 사샤를 후원자들 앞에서 부른다는 건 레슨을 듣지 않은 사샤의 춤이 훨씬 더 보여줄 만한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조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누엘이 말없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조제는 어깨를 으쓱하며 벌써 준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샤에게 집중했다. 몸으로 드러나는 재능의 차이는 명확하다. 그건 발레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일로 일일이 우울해하기엔 모두가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반면, 카렐을 흘끔대면서 센터로 걸어 나간 사샤는 점차 난감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춤을 보여 드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난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해적 베리에이션의 뒷부분에서는 공중에서 다리를 완전히 찢는 높은 점프가 여러 번 반복된다.

통증을 의식한다면 제대로 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사샤는 마른침을 삼키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딤이 오디오로 다가가 음악을 틀어 주었다. 익숙한 곡의 도입부가 흘러나오는 순간, 사샤는 카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설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홀 안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 조제나 마누엘이 서 있어도 제 후원자는 저렇게 시선을 주었을 것이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사샤의 안에서 뒤엉켰다.

‘제대로 해야 해.’

음악이 시작된 순간, 사샤는 짧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큰 걸음으로 달렸다.

점프는 중력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또 정확하게. 애티튜드 밸런스는 음악을 끝까지 쓰면서 팔을 늘이며……. 그러나 우려하던 점프의 순간, 아니나 다를까 큰 통증이 다리를 강타하고 지나갔다. 고관절 깊은 곳부터 발끝까지 저릿하게 만드는 아픔이었다.

이어지는 착지의 질이 좋지 않아 다음 몇 개의 스텝이 흔들렸다. 두 번째로 점프할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야 안에 언뜻 들어온 바딤은 벌써 사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칭찬을 듣기에는 글러먹은 춤이었다.

포즈한 상태로 헉헉 숨을 몰아쉬던 사샤는 후원자들 쪽은 보지도 못하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원자들 사이에서 작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그만하십시오.”

바딤이 고개를 저으며 사샤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건 박수를 받을 만한 춤이 아닙니다. 너도 알고 있지, 사샤?”

주눅이 든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딤의 예리한 눈빛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형편없어. 다 틀렸어! 애티튜드 턴에서 다리가 너무 높고 턴은 지나치게 빠르니까 휘청이잖아. 그리고 항상 여기! 배와 허리에 힘을 주고 무릎을 굽히면서 떨어져야지. 배에 힘이 풀려 있으니까 점프 다음 스텝이 깔끔하지 못하다고. 네놈에겐 매번 같은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구나.”

다행히 허벅지 부상을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반대로 그 부분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받게 된 지적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공개적으로 혼났다. 심지어 그것을 후원자에게 보이게 되자 사샤는 금방 죽고 싶어졌다. 욕심을 내서 스트레칭을 하다 부상을 입고, 그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모든 걸 망쳐 버린 자기 자신이 죽도록 싫었다.

“으읏…….”

“뭘 잘했다고 우는 거냐.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도 정도가 있지.”

어느새 사샤의 뺨과 턱을 타고 또르륵,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훌쩍이는 어깨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국 눈물을 보여 버리는 사샤를 보며 여자아이들이 수군댔다.

“어떻게 해. 진짜 창피하겠다…….”

“그렇게 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치. 엄청났어.”

“난 저렇게도 못해.”

모두의 앞에서 망신을 준 바딤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금세 그치지 않았다. 바딤은 혀를 차며 나가 버렸고, 사샤는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훔치면서 연습실 구석으로 갔다.

그리고 사샤는 가방을 챙기고 나서야 이미 후원자들이 연습실을 빠져나간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사샤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장학금이 아깝다고 생각하시면 어쩌지.’

사샤는 정신없이 연습실 문을 뛰쳐나갔다. 복도 오른쪽, 왼쪽을 좌우로 살펴봐도 후원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계단으로 우당탕 달려간 사샤는 1층까지 숨도 쉬지 않고 뛰어 내려갔다.

그를 만나고 붙잡은 다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이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으로.

그리고 1층에 도달했을 때 사샤는 로비에 서 있던 후원자를 발견했다.

“하아, 하아……. 클레멘츠 씨!”

새된 소리가 사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샤는 바닥도 보지 않고 달려가다가 카펫에 다리가 걸려 쿵,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불시에 무릎부터 바닥에 닿아 버려 제대로 깨진 게 분명한 무릎이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사샤는 아픈 것보다도 부끄러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다리를 절면서 후원자에게 달려갔다.

그는 요란하게 저에게 달려오는 사샤를 보고 조금 놀란 듯했다.

“……괜찮습니까? 아프지 않아요?”

“클레멘츠 씨, 오랜만에 봬요. 저는, 저기……. 저어.”

남자의 눈은 사샤의 무릎에 못 박혀 있었다. 그를 따라 같이 고개를 내린 사샤는 자기 무릎 위에 지푸라기와 먼지 뭉텅이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걸 급한 손길로 마구 떼어낼 때 타이즈 겉면에서 조금 축축한 것이 만져졌다. 아무래도 넘어졌을 때 깨진 무릎 부분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른 의무실로 가세요. 다친 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건 아픈 축에도 못 껴요. 저기…….”

자기를 보내 버리려는 후원자가 야속해서 사샤는 곧 죽어도 괜찮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후원자의 곁에 서서 방금까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낯선 남자가 사샤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하라는 듯한 무언의 재촉에, 사샤는 후원자를 만나게 되면 하려고 생각했던 많은 말 중 아무거나 먼저 떠오르는 것을 꺼냈다.

“생일 카드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

사샤의 말을 듣고 난 후원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샤는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기가 무언가를 잘못 말했는지 되새겨 봤다.

“아, 저는 사샤예요. 사샤 세드린. 알렉산드르 세드린.”

“…….”

“저기…… 제 메일 보셨어요?”

“…….”

“가끔 메일을 썼어요. 몇 번…… 아니, 열 번 넘게.”

하지만 그 말 다음에 제 후원자가 보인 표정 때문에 사샤는 아까 전의 무표정한 반응이 차라리 괜찮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샤의 말을 들은 후원자가 팔짱을 끼고 ‘음……’ 하는 소리만 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에 사샤의 간은 콩알만큼 작아졌다.

후원자는 사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곁에 서 있던 남자에게 살짝 몸을 틀었다.

“메일은…….”

사샤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왠지 방금 다친 무릎에서도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비서를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곁에 서 있던 남자에게 시선을 주며 짧게 지시했다.

“게오르크, 확인해 봐.”

‘아…….’

사샤는 허무함에 속으로 신음했다. 후원자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낸 메일을 한 번도 읽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자신이 직접 명함을 건넸던 사샤라는 소년을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했다.

그리고 첫 만남에서 보여주었던 친절한 미소를 표정 위로 덧그린 후원자가 말했다.

“그럼 이만 자리를 떠도 괜찮을까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아…….”

“얼른 의무실에 가 보세요.”

후원자는 사샤의 어깨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 주듯 탁탁 가볍게 두드리고는 등을 돌렸다.

보폭이 큰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 로비를 완전히 벗어나기까지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후원자가 허무하게 떠나고 나서 사샤는 곧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습 전부터 저를 괴롭히던 윗배의 더부룩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침에 먹은 것을 몽땅 토했다.

* * *

후원자들이 떠나가고 난 뒤, 사샤는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가 방에 틀어박혔다. 점심도 먹지 않은 것은 물론 오후의 일반 과목 시간과 파 드 되 클래스, 캐릭터 댄스 클래스에도 모두 결석했다.

“사샤가 계속 안 보이네. 어디가 아프다고 했니? 혹시 알고 있는 사람?”

오후 클래스의 발레 미스트리스인 올가의 질문에 학생들은 그저 침묵하면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후원자들이 참관한 오전 클래스에서 사샤가 크게 혼나고 우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추측일 뿐, 정확한 이유도 아니라 나서서 말하기가 어려웠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학생들을 한 바퀴 쭉 둘러본 올가는 무언가를 짐작한 눈치로 입을 열었다.

“마누엘?”

올가가 불러낸 것은 평소 사샤 옆에 찰싹 붙어 다니곤 하던 마누엘이었다. 나란히 선 학생들 사이에서 마누엘이 한 발 걸어 나왔다.

“……사샤에게 의무실 확인증을 받지 않고 함부로 결석하면 안 된다고 말해 주렴. 그리고 오늘은 넘어가 줄 테니 어디가 아픈지 나중에라도 와서 내게 설명하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오늘의 클래스를 시작해 볼까요.”

그리고 그 시간, 사샤는 둥그렇게 뭉친 이불 더미 안에 머리를 묻고 있었다.

좋아하는 연어를 먹은 보람도 없이 모두 토해 낸 후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아직도 위산에 긁힌 성대가 쓰렸고 입 안에서는 텁텁한 맛이 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후원자인 카렐 클레멘츠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자기가 쓴 메일도 읽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흐으으…….”

그 사실을 떠올리니 멈췄다고 생각한 눈물이 다시 흘러나왔다. 사샤는 뭉친 이불에 마구 머리를 비비며 멈추지 않는 생각을 떨쳐 내려고 노력했다.

후원자는 그의 곁에 서 있던 비서라는 사람에게 메일을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건 분명히 비서가 일을 제대로 안 했다는 뜻이다. 자신이 보낸 메일을 비서 혼자서만 보고 후원자에게 전달하지 않은 거다. 어린애가 쓴 이딴 장난 같은 메일은 전해 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죽여 버릴 거야……. 으윽…….”

사샤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복받치는 울분에 가끔씩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 쉽사리 노여운 감정에 휩싸이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군가라도 비난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렇게 울다 멈추기를 반복한 사샤는 어느새 눈물을 짜낼 기운도 남지 않아 지쳐서 훌쩍거렸다.

분노할 기력조차 잃은 후 차가워진 머리로 현실을 받아들이니 남는 것은 자기비하의 감정뿐이었다. 후원자가 자기 인생에 아주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자신이 속물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더 비참했다. 이 학교에는 자신처럼 클레멘츠 씨의 도움을 받는 학생이 스무 명 정도 있었지만, 그들이 다가 아닐 수도 있었다. 다른 발레 스쿨에 있는 학생들, 혹은 다른 분야에서 후원을 받는 학생들까지 생각해 보면 300명이 더 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기대도 하면 안 되는 건가? 사샤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생각했다. 자기라고 이런 환경을 원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 학교에 오디션을 볼 때부터 아버지의 손을 잡고 왔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오는 날도 사샤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급히 떠난 어머니를 배웅한 후 혼자서 짐 정리를 해야 했지만, 같은 방을 쓰는 조제와 마누엘, 다른 아이들의 부모님은 점호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이 방에 머물렀다. 제 아들들이 직접 쓸 침대 매트리스를 만져 보고, 집에서 쓰던 시트로 바꿔 주고, 개인 생필품을 더 챙겨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중에서 사샤의 마음을 가장 울적하게 만들었던 것은 아이들이 헤어질 때 자신의 아버지와 포옹을 나누고 뺨을 비비는 장면이었다. 그날 부자지간의 자연스러운 애정 표현을 처음으로 목격한 사샤는 내심 놀랐다. 사샤가 기억하기를, 자신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와도 저렇게 깊이 포옹해 본 적이 없었다.

진짜 가족인 어머니도 확신해 주지 않는 자신의 재능을 후원자는 알아봤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는데.

사샤는 다시 이불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 후원자 앞에서 처음으로 춤을 보여주는 순간조차 스스로 망쳐 버린 것이 불현듯 기억나 버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그랑 점프를 뛸 때 허벅지가 아픈 것을 조금이라도 의식했다면……. 그러면 높이를 무리하지 않고 스텝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는데. 바딤 말이 맞아. 애티튜드 턴에서 다리를 너무 높이 들어서 축이 흔들렸어. 그때부터 집중이 흐트러졌어.’

그때 삐거덕,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안으로 들어온 것은 마누엘이었다.

마누엘은 비어 있는 방을 둘러보다가 뭉쳐 놓은 이불 안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사샤를 발견했다. 이불 바깥으로 마른 발목과 맨발이 비죽이 삐져나와 있었다.

“사샤. 저녁 안 먹어?”

갑자기 들린 낯익은 목소리에 사샤는 이불 안에서 꿈지럭거렸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흠칫 놀라면서 이불 안에서 빠져나왔다.

사샤가 이불을 젖히고 나오자 마누엘이 힉, 하고 작게 놀란 소리를 냈다. 머리는 미친 사람처럼 헝클어지고 눈가가 퉁퉁 부은 채로 붉게 물든 사샤의 얼굴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계속 울었어?”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마누엘은 전혀 믿지 않았지만 본인이 그렇다니 더 추궁할 수도 없었다.

“뭐라도 먹어.”

“입맛이 없어.”

“너 살찌워야 한다며.”

“…….”

사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생각에 빠지면 다른 모든 건 잊어버리는 자기 자신이 싫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 뭐라도 먹어야지. 그렇게 생각한 사샤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 곁에 있는 옷장 문을 열었다. 동시에 마누엘의 시선은 몸을 일으킨 사샤의 쭉 뻗은 몸을 따라갔다. 품이 넉넉하고 얇은 흰 반팔 티셔츠 아래로는 딱 달라붙는 숏 팬츠만 입고 있어 희고 탄탄한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시선에 둔감한 사샤는 옷장 안에 잘 넣어 놓은 종이가방 안에서 새 마시멜로를 꺼내 부스럭대며 봉지를 뜯었다.

“사샤. 우울해?”

사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랑 기분 좋아지는 거 할래?”

“기분 좋아지는 거?”

마누엘은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사샤에게 다가왔다. 다리가 얽히고 반바지 아래 드러난 서로의 맨 살갗이 스쳤다. 제 위로 올라오는 마누엘에게 밀려 뒤로 기대 누우면서 사샤는 마시멜로 봉지의 입구를 꽉 쥐었다. 단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들었다. 자기도 마시멜로를 나눠 달라는 뜻인가…….

하지만 이건 율리안이 사 주면서 친구들은 하나도 나눠 주지 말고 너만 먹으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사샤는 가슴팍에 올려놓은 봉지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마누엘을 조금 경계했다.

“넌 이런 거 해 본 적 없어?”

“이런 거?”

“처음엔 내가 만져 줄게. 좋으면 너도 해 주는 거야.”

마누엘은 그렇게 말하고는 사샤가 그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차릴 틈도 없이 이불을 덮어쓰고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마누엘!”

깜짝 놀란 사샤는 크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거침없이 다가온 손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숏 팬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마누엘은 사샤의 고간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크게 들이쉬기까지 했다. 사샤는 척추를 찌릿하게 만드는 소름 돋는 감각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동시에 기숙사 방의 문이 활짝 열렸다.

“뭐야. 안에 누구냐? ……야! 너네 뭐 하는 거야?”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조제였다.

그리고 조제는 예상치 못한 광경에 깜짝 놀라며 사샤와 마누엘, 두 사람에게 급히 다가섰다.

“너희 싸워? 사샤! 그만둬!”

조제는 사샤의 티셔츠 목 부분을 붙잡고 힘차게 떼어냈다. 컥, 소리를 내며 뒤로 나동그라진 사샤가 당황한 얼굴로 조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조제는 사샤를 마누엘에게서 떨어뜨려 놓자마자 얼른 마누엘에게 향했다.

“세상에, 이 피 좀 봐……. 너희 뭐 한 거야? 사샤. 왜 마누엘 얼굴을 피떡을 만들어 놨어?”

“아, 아니……. 나는.”

마누엘은 빨개진 얼굴로 피를 뱉으며 콜록거리고, 조제는 해명을 바라는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크게 당황해 말을 더듬기만 했다. 잠깐 사이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 채였다.

자신은 마누엘이 이상한 곳에 고개를 처박아서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발길질을 했을 뿐이다. 뒤꿈치에 딱딱한 것이 닿았는데, 그게 마누엘의 턱인 줄은 몰랐다. 순식간에 자기 혀를 깨문 마누엘은 티셔츠 앞판이 푹 젖을 정도로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누엘, 너 일단 빨리 의무실에 가야겠다. 그리고 사샤, 넌 해명을 해야 할 거야.”

조제는 마누엘을 부축해 방을 바람같이 빠져나갔다.

잠시 동안 사샤는 넋이 나간 채로 믿을 수 없이 조용한 기숙사 방 안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태풍이 쑥대밭을 만들고 지나간 것 같았다. 아직도 사타구니에 닿던 소름끼치는 숨결과 새빨간 피에 푹 젖은 마누엘의 옷자락, 조제의 경멸하는 눈빛이 생생했다.

그리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복도에서부터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몇 무리의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사샤! 너 마누엘이랑 한판 붙었다며?”

“너 주먹 좀 쓰는구나. 그 자식 피로 복도에 홍수가 났던데!”

“그 자식이 뭐라고 한 거야? 그 재수 없는 자식이 뭐라고 했길래 손을 봐 준 거냐고.”

주먹다짐에 흥분한 철없는 아이들이 와와 떠들었다. 무료한 학교생활 중에 제대로 된 한판 승부가 벌어졌다고 생각한 듯했다.

어떤 놈은 사샤의 옆구리로 파고들어 피 묻은 주먹을 승리자처럼 치켜들었고―그건 마누엘이 흘린 피를 닦아 주다가 묻은 것이었다―어떤 놈은 피가 묻어 검붉게 변색된 사샤의 이불을 투우사처럼 어깨에 걸치고 방 안을 정신없이 쏘다니기도 했다.

그리고 이 소란이 겨우 가신 것은…….

“사샤. 관리사감이 널 부르는데?”

한 전령이 가져온 불행한 소식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소심해 보이는 전령은 이 신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며 구박을 받고 더욱 의기소침해졌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넋이 빠져 있던 사샤는 겨우 바지를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관리사감 줄리아에게 향하는 사샤의 발걸음은 터덜터덜 힘이 없었다.

* * *

“때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사샤는 웃지 않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줄리아를 향해 변명했다.

“그래. 사샤, 네 의도는 알겠어. 네 진심은 마누엘을 때리고 싶었던 게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너와 함께 있던 마누엘이 크게 다쳤다는 거야. 그럼 이 결과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건지, 그전의 상황을 말해 줄 수 있을까?”

“그건…….”

이해심이 깊은 줄리아는, 그러나 분명하게 선을 긋는 눈으로 사샤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태도였다.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결백할 때의 이야기일 것이다.

“제가 혼자 방에 있었는데…… 마누엘이 들어왔어요.”

“그래, 그리고?”

“마누엘이 저녁은 먹었냐고 물어봤고…….”

그다음에, 그다음에는…….

사샤는 입을 열기 위해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끝내 마누엘이 자기 속옷을 벗기고 그 안의 것을 입으로 물려고 했다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발로 찼다는 뒷이야기를 이어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이제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누엘은 아마도 자신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 묘하게 친절하게 굴던 태도, 무언가를 기대하던 눈초리 같은 것들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이제 진짜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사샤는 발레 스쿨의 몇몇 친구들이 가끔 마누엘에게 이질감을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마누엘은 이상하게 여성스러운 제스처와 말투 같은 것으로 놀림 받는 일이 잦았다. 그래도 본인은 당당한 것 같았지만.

사샤의 귀에 웅웅거리는 목소리가 떠돌았다. 너도 여자가 되고 싶은 거냐고 놀리던 말들, 발레는 게이들이나 하는 거라고 비난하던 목소리들……. 아마 마누엘도 어린 시절에는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버텼을 것이다. 자신은 아니었지만 마누엘은 진짜라서 더욱 괴로울 수도 있었을 터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가 없었다. 말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사샤를 사로잡았다.

줄리아를 흘끔대며 눈치를 보던 사샤는 더 설명을 하는 대신 조심스레 물었다.

“……마누엘은 뭐라고 말했어요?”

“마누엘은…….”

줄리아는 한숨을 쉬며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피로하고 성가신 듯한 태도가 사샤의 마음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아직 치료 중이야. 다친 곳을 꿰매야 한다고 해서 지금 병원에 있지. 치료가 끝나면 내가 직접 물어볼 거야.”

사샤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역시 진실은 마누엘이 말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신이 마누엘의 비밀을 함부로 들춰 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럼 마누엘에게 들으세요. 저는 말할 수 없어요.”

“그래.”

줄리아는 의아해하면서도 의외로 깔끔하게 수긍했다.

“이제 가도 좋아.”

“감사합니다.”

사샤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별로 올 일이 없는 사무실에 최근 일주일 사이 두 번이나 들렀다. 그걸 깨닫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차, 사샤. 오늘 오후 클래스에 모두 결석했다며?”

막 문을 밀어 열던 순간 줄리아가 물었다. 사샤는 다시 뒤돌아섰다.

“네, 맞아요.”

“올가가 사유서를 제출하라고 하더구나.”

“알겠어요.”

그리고 사샤는 다시 눈치를 보며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가로질러 가는 사이에 사샤는 자기 꼴이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울어서 부은 눈과 헝클어진 머리, 손과 옷가지에는 마누엘의 피가 묻어 있고, 아침에 카렐을 따라가다 깨진 무릎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걸을 때마다 왼쪽 허벅지가 욱신거렸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는 위도 잔뜩 쓰렸다.

방에 돌아온 사샤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만신창이인 몸을 깨끗이 씻고 나왔을 때는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사샤는 특히 조제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오해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어진 사샤는 침묵 속에서 피범벅이 된 침대 시트를 벗겨내 세탁실에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매트리스 위에 지친 몸을 눕혔다.

그리고 이틀 후, 사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과 마주했다.

[어퍼 스쿨 2학년, 알렉산드르 세드린.

폭력 사태에 대한 처분으로 열흘간의 정학과 기숙사 퇴거 명령을 내립니다.]

클래스로 향하는 길, 복도에 붙은 보드에서 발견한 공지문.

사샤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다시 한 번 천천히 내용을 읽어 보았다.

‘기숙사 퇴거 명령’.

당장 이곳을 나가 살 곳을 찾으라는 말이었다.

복도를 지나치던 학생들은 폭력 사태의 주인공인 사샤를 흘끔대었다. 당일에는 사샤를 승리자라고 추켜세웠던 아이들도 그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떠나갈 뿐이었다. ‘퇴거 명령’ 그 단어를 반복해 읽던 사샤의 눈동자는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샤는 보드 앞에 멈춰 서 있던 발걸음을 돌려 관리사감의 사무실로 향했다. 클래스로 향하는 모두와 반대 방향으로 걷다가, 이내 뛰기 시작했다. 어깨에 걸친 스포츠백은 미끄러져 팔에 걸렸고 염증이 심해진 허벅지가 뻐근했다. 그렇게 달려가는 사샤를 보고 몇몇 아이들이 쑥덕였다.

‘정학 부럽다. 나도 열흘만 발레 안 하고 쉬고 싶어’

‘그나저나 퇴거는 심한데. 맨해튼에서 기숙사 아니면 어떻게 집을 구해?’

저를 두고 수군거리는 말에 사샤의 속은 울컥 뒤집혔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내몰린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정신없이 달려가던 사샤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숨을 헉헉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의아하게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아……. 하아…….”

사샤는 비어 있는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저를 조롱해 대던 목소리의 주인공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클래스가 시작된 시간이라 학생들은 전부 연습실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사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진짜로 떠든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게 다 환청일 수도 있었다. 순간 사샤는 뇌에 곰팡이가 피었다고 아프게 머리를 쥐어박고, 허리띠를 풀어 웅크린 등을 내려치던 아버지를 떠올렸다.

사샤를 비참하게 만드는 말들은 이상하게도 때를 정확하게 맞춰 고막으로 파고들곤 했다. 아버지의 훈육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가끔 환청을 듣는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사샤는 관리사감의 사무실 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 줄리아에게 정학과 퇴거가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볼 것이다. 이 모든 게 머리가 이상한 자신의 망상이라면, 줄리아는 사샤의 질문에 ‘무슨 소리냐’고 되묻고 ‘클래스에 늦지 말고 얼른 들어가라’고 말해 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잠시 후.

“네 성적인 기호 때문은 아니야. 우린 개개인의 성 취향에는 관심 없어. 정확히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하지. 다만 네 사적인 문제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면 곤란해.”

줄리아는 통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발레단의 환경은…… 너도 알다시피 한 번 입단하면 같은 팀으로 수십 년을 일하기도 하지. 은퇴 후에 이곳의 선생이 되거나 스태프로 일하게 되면 평생이 될 수도 있어. 무용계는 아주 좁은 곳이고, 댄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춤보다 동료야.”

“…….”

“피해자인 마누엘의 부모님은 강경하게 퇴학을 주장했지만 너를 1년 동안 지켜본 우리는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어. 왜냐하면 사샤 세드린이라는 학생이 가진 재능은 정말 훌륭하거든. 그리고 청소년기란 얼마든지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나이니까.”

“…….”

“대신 졸업까지 남은 시간 안에 친구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네 성적인 기호가 아무런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야 해. 그러면 모든 게 문제없이 흘러갈 거야.”

“…….”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사샤.”

줄리아의 말을 듣던 사샤는 고개를 수그렸다. 딱지가 두껍게 앉은 깨진 무릎을 손으로 꽉 쥐었다. 잘못한 게 없으니까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니에요. 전…… 잘못한 거 없어요.”

“사샤.”

좀 더 빨리 말했어야 했다. 마누엘이 거짓말을 하기 전에 자신을 보호했어야 했다. 하지만 친구를 믿은 게 잘못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사샤는 자기 잘못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 게이가 아니에요. 마누엘에게 함부로 뭘 하려고 한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때린 건 잘못했지만, 흣, 아프게 만든 것도 미안하고, 끕, 하지만…….”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축축이 젖은 사샤는 딸꾹질까지 하며 진실을 호소했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줄리아와 눈이 마주친 사샤는 그녀가 생각보다 무감정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우는 이유는 정학과 기숙사 퇴거에 겁을 먹었기 때문이고, 또 뒤늦게 변명하는 이유는 거짓말을 이제 막 지어내서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사샤. 바딤이 일주일 정도는 제 집에서 지내도 된다고 하더구나. 우리도 네가 세 들어 살 만한 매물을 함께 찾아볼 거야. 부모님께는 직접 말씀드릴래?”

줄리아의 말에 사샤는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흐어엉’ 하고 애써 억누르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불미스러운 일로 더 이상 기숙사를 지원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새로운 방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면 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할 것이다. 사샤는 절대로 월 2,000불이 넘는 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마누엘하고 만나게 해 주세요. 마누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 그래도 저랑 같이 있으면 마누엘도 거짓말 못 할 거예요. 그러니까…….”

사샤가 애원하자 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마누엘은 아직 병원에 있어. 그리고 퇴원하면 바로 부모님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갈 거야. 너도 알지? 마누엘의 부모님도 둘 다 발레 댄서인데, 후……. 아버님이 어찌나 다혈질인지. 아무튼 당분간 프랑스에서 쉬면서 치료를 받고 다음 학기에 돌아온다고 하는구나. 어쩌면 프랑스에 계속 남을지도 모르겠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사샤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줄리아는 도무지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사샤가 안쓰러웠는지 학교 스태프들 중에 하숙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수소문해 보겠다고 말했다.

결국 사샤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울면서 사무실에서 나왔다.

기숙사로 간 사샤는 힘없이 스포츠백에 몇 개 안 되는 옷가지를 쓸어 넣었다.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는 방 안에서 짐을 싸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기숙사를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짐을 싸는 도중에도 눈물이 쏟아져 나와 사샤는 수시로 침대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 내서 울었다. 피가 다 빠지지 않아 변색된 자국이 남은 시트는 배급받았을 때처럼 잘 접어 침대 위에 올려 두고, 충전기와 알람시계 같은 잡동사니는 마시멜로를 담아 왔던 백화점의 고급스러운 종이가방 안에 전부 다 채워 넣었다. 양손으로 모두 들고 갈 수 있을 만큼 간소한 짐이었다.

떠나기 전 침대에 앉아 사샤는 생각했다.

너무나도 두렵다고.

이번 일로 모든 걸 완전히 망쳤을까 봐 무서웠다. 춤보다 중요한 건 동료라는 말, 그리고 댄서에게 있어서 인성의 중요성은 사샤 역시 귀가 아프게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지금까지는 최우수 학생 신분을 유지하면 발레단에 입단할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떨어지게 된다면? 모든 곳에서 거부당하게 된다면……. 사샤는 다시 소리 없이 훌쩍였다.

마누엘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은 진짜 있었던 일조차 말하지 못했는데 마누엘은 너무나도 쉽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도 마누엘에게는 편들어 주는 부모님이 있다는 게 부럽고, 또 서러웠다.

입학 초 아이들이 수군대던 말들도 떠올랐다. 마누엘의 부모님은 둘 다 유명한 발레 댄서라서 그도 선생님들에게 특별 취급을 받는다고. 그걸로 마누엘을 질투하는 친구들도 많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친구들과 묘하게 거리가 있는 마누엘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진실이 밝혀져도 선생님들은 부모님의 뒷배가 든든한 마누엘의 편을 들어 줄지도 몰랐다. 마누엘은 아기 때부터 부부 댄서인 부모님의 연습실을 드나들었고, 그들이 리허설을 할 때는 마누엘의 부모님과 비슷한 연배의 댄서들이 그를 맡아 주곤 했다고 들었다. 자신은 범접할 수도 없는 발레 스타들이 마누엘에게는 삼촌이고 이모였던 것이다. 당장 장학금이 끊기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처지와는 전혀 달랐다. 학교가 누구 편을 들지는 너무나 확실했다.

어느새 창밖으로는 일몰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떠나기 위해 사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링컨 센터를 완전히 벗어나기 전 사샤의 뇌리에 스친 것은 카렐 클레멘츠의 존재였다.

사샤는 한참 고민하다가 중앙의 분수대 근처에 앉아 핸드폰의 메일 앱을 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번 메일을 보냈던 후원자에게 새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미스터 클레멘치.

저는 사샤 세드린인니다.

오늘 날씨가 별로 안 저아요. 그래서 저는 뼈가 아픈데 후원자님은 아픈지 궁금해요.

후원자님은 제게 만은 돈을 주고 있어요.

저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열심히 춤추러고 해요.

하지만 댄서에게 춤보다 중요한 것은 동료라고 모두가 말핫니다.

사실은 얼마 전에 마누엘이라는 친구가 조금 싸웠어요.

저는 마누엘을 때린 잘못밖에 업는데…….]

메일을 쓰던 사샤는 한숨을 쉬면서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외국어인 영어로 문장을 쓰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그걸로 자신의 의도를 세련되게 전달하려니 표현상 더 막막한 한계가 느껴졌다. 아니, 단지 표현의 문제일까? 사샤는 일반 과목 중 에세이나 토론 수업을 가장 어려워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메일로 글을 쓰다 보니 자기가 후원자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그 목적조차 상실하고 말았다. 한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글의 방향이 이상해진다. 특히 마누엘을 때린 부분을 쓰고 있다 보니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이 가해자 같아 혼란이 왔다.

그리고 보내도…… 비서가 전달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사샤는 잠시 머리를 붙들고 두통이 올 정도로 고민했다. 훌륭한 학생이 되어서 콩쿠르에 나가는 돈을 빌려 달라는 말도 할까 말까인데, 폭력 사태를 일으켜 놓고 월세가 없다고 부탁하는 건 지나치게 몰염치한 짓이었다.

‘바딤의 집에 가라고? 거긴 싫어.’

사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발로 바딤의 집에 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괴롭힘 당하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집에서까지 바딤과 마주쳐야 하다니……. 더 마른 체형을 위해 밥도 굶기고, 제일 괴로운 개구리 자세로 스트레칭을 한 채로 자라고 할지도 몰랐다.

이도 저도 못 한 채로 사샤는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광장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지자 저녁 공연을 보기 위해 치장한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악기를 등에 멘 줄리어드 학생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광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도 보였다. 어쩌면 율리안과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사샤는 몸을 숨길 수 있는 큰 나무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보세요. 레빈?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어?”

한참을 갈등하던 사샤가 연락한 것은 레빈이었다.

* * *

지하철의 막차 시간까지 링컨 센터 분수대 앞에 앉아 있던 사샤는 지하철을 타고 윌리엄스버그로 향했다. 몇 번 들렀던 적이 있는 집의 문 앞에서 조용히 노크하니 안에서 금방 레빈이 나왔다.

“사샤, 미안해. 이 시간까지 바깥에 있었어?”

“난 괜찮아.”

사샤가 전화를 걸었을 때 레빈은 12시에야 일이 끝난다고 말했다. 주인 없는 집에 먼저 들어가 있을 수가 없어 별다른 도리 없이 지금까지 기다린 것이다. 쌀쌀한 날씨에 뺨이 빨갛게 튼 사샤를 안쓰러워하면서 레빈은 소년을 금남의 구역으로 이끌었다.

나무문 안에 철문, 그리고 걸쇠를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근 이 집은 각자의 이유로 맨해튼 주변에 살아야 하는 여자 넷이 셰어하는 집이었다. 사샤가 레빈에게 전화 걸기를 주저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레빈 혼자만 사는 집이 아니기 때문에 함부로 재워 달라고 하기가 어려웠다.

“귀염둥이가 또 왔네.”

“사샤, 너도 피자 먹을래?”

위장을 자극하는 피자 냄새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에 모여 있는 누나들에게 다가갔다.

“이 볼 통통한 것 좀 봐. 열여섯 살인 내 조카는 시커멓고 냄새나는데, 사샤는 왜 아기 같지?”

“사샤, 저녁 못 먹었어? 콜라도 마셔.”

사샤는 제 손바닥보다 커다란 피자를 거의 두 입 만에 욱여넣고 또 다른 피자로 손을 뻗었다. 그런 사샤를 위해서 누군가는 소시지를 구워 핫도그를 만들고, 누군가는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브라우니를 녹였다.

레빈은 어린 발레 댄서인 사샤의 존재에 열광하는 제 룸메이트들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아직 열여섯 살인, 무해하고 온순한 남자를 환대했다. 하지만 레빈 입장에서는 먹을 것만 주면 머리도 쓰다듬게 해 주고 무릎 위에 올라오래도 의심 없이 올라가 앉는 사샤가 걱정스럽기만 했다. 장난기 넘치는 자기 룸메이트들을 잘 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사샤, 적당히 다 먹었으면 욕실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부터 해. 그리고 얼른 자. 벌써 1시가 다 되어 가잖아.”

거의 유모나 다름없는 레빈의 말에 룸메이트들은 눈을 흘기고 야유하면서도 음식물의 잔해를 치웠다. 그사이 사샤는 아껴 먹고 싶어 남겨 놓았던 브라우니마저 버려 버릴까 봐 허겁지겁 손을 뻗었다.

세 여자가 굿나잇 인사를 하며 사샤에게 ‘내일 보자’고 손을 흔들었다. 레빈은 사샤가 들고 온 스포츠백과 종이가방을 거실로 가져갔다.

방 두 개짜리의 아파트에서 둘은 큰 방을 쓰고, 다른 하나가 작은 방을, 레빈은 거실을 쓰고 있었다. 주방과 거실 사이에 어두운 태피스트리를 걸쳐 사생활을 보호하는 이 공간에서 사샤는 묘한 안락함을 느끼곤 했다.

“씻고 올게.”

“응, 소파에서 자도 괜찮지?”

“상관없어.”

그리고 욕실에 들어간 사샤는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으며 금세 노곤함을 느꼈다. 낮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고, 지나치게 많이 울었고, 야외에서 여덟 시간이나 떠돌았다. 피로감이 전신을 덮쳤다.

소독약 냄새에 흔한 비누 냄새가 뒤섞인 기숙사 욕실과 달리 레빈의 아파트 욕조에서는 복숭아향, 레몬향, 히비스커스향 같은 달콤한 냄새가 났다. 사샤는 주인을 모르는 샴푸를 아무거나 집어 들고 머리와 몸에 한 번에 거품을 냈다. 그러고는 욕조에 걸터앉은 채로 다시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미칠 듯이 졸음이 몰려왔다.

결국 눈을 감은 채로 잠깐 세면대에 머리를 기댄 사샤는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가방 깊숙한 곳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핸드폰으로 불이 나도록 전화가 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 * *

사샤는 눈꺼풀 위로 내리쬐는 햇살에 자연스레 눈을 떴다.

벌어진 커튼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사샤의 눈가를 간질이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누워 있다가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누운 사샤는 제 몸과 이불에서 낯설고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샤. 이제 일어났어?”

오전 클래스에 늦었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난 사샤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기자기한 화초와 마크라메, 태피스트리 따위로 장식된 실내가 낯설었다. 잠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던 사샤는 오늘부터 열흘간 정학이어서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너 어제 샤워하다 말고 욕조에서 잠들었어.”

“내가?”

“그래. 기억 안 나? 에밀리가 중간에 깨워 주지 않았다면 욕조에서 동사했을걸.”

사샤는 흐릿한 간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방문―이라고 사샤는 기억하지만 실은 욕실문―을 열고 들어온 누군가가 야단법석을 떨어서 억지로 눈을 뜨고 젖은 몸에 옷을 아무렇게나 걸친 후 욕실에서 나왔다. 무척 졸리고 정신이 없어서 꿈인 줄만 알았는데…….

그러나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로 잠든 것을 증명하듯 평소에는 차르르 떨어지는 결 좋은 검은 머리가 허공으로 뻗치거나 보기 싫게 눌려 있었다. 사샤가 양손으로 두 눈을 비비는 사이 레빈이 다시 아침을 먹으라고 채근했다.

“난 바로 수업이라서 지금 나가 봐야 하거든. 주방에 네 몫을 챙겨 놨대. 아침 먹고, 꼭 누나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알겠어. 레빈은 언제 와?”

“오늘도 아주 늦게 끝날 텐데.”

조금 미안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레빈은 민첩한 손놀림으로 커다란 백팩 안에 서적과 노트를 척척 챙겨 넣었다. 동시에 눈으로는 빠르게 머리끈을 찾으면서 가방을 어깨에 메고 끈으로 부스스한 금발을 질끈 묶었다.

바빠 보이는 레빈을 눈으로 좇던 사샤가 다시 물었다.

“이따 학교 앞에 가도 돼?”

“우리 학교?”

“응. 레빈도 혼자 점심 먹으면 심심하잖아.”

“그렇게 빨리 왔다가 다시 갈 수 있어? 너 수업은…….”

“오늘 학교 안 가도 돼.”

마지막으로 열쇠를 챙겨 주머니에 넣던 레빈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잠시 행동을 멈춘 채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소파에 앉은 채로 가는 다리를 가끔씩 달랑거리고 있었다. 덤덤한 목소리와는 달리 왠지 자신 없이 고개를 수그리고 시선을 떨군 채였다.

“학교 쉬는 날이야?”

레빈이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아닌데, 안 가도 돼.”

사샤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왜 학교를 가지 않아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절대 설명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레빈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외로워서 놀러 오고 싶은가 보다고 단순하게 생각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린 나이에 가족과 동떨어져 언어도 자유롭지 않은 곳에서 홀로 유학 중인 사샤는 마음이 힘들어지면 아무 말도 없이 이렇게 재워 달라고 조르곤 했다. 사춘기 아이답게 자세한 고민거리를 털어놓기를 싫어해서 부러 캐묻지 않았건만. 어쩌면 그 누적된 방치의 결과가 지금일지도 모른다.

“너 어젯밤에 전화가 엄청나게 오던데……. 확인은 해 봤어?”

“……지금 볼 거야.”

레빈의 말에 사샤는 흠칫 놀라며 아주 부자연스럽게, 원래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양 굴었다. 빤히 티가 나는 행동이었지만 레빈은 더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 휴대폰 꺼진 것 같은데. 충전부터 해야 할걸.”

“할 거야.”

소파에 엎드려서 충전기를 연결하고 핸드폰을 켜는 사샤를 보면서, 레빈은 아무래도 자신이 가출 청소년을 떠맡게 된 건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율리안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그는 아마 인정사정도 없이 여기 실종 청소년이 있다며 당장 NYPD에 넘겨 버릴지도 몰랐다.

레빈은 일단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알았어. 그럼 이따 우리 학교 앞으로 와. 점심 사 줄게.”

“응……. 뭐 먹을 건데?”

“쉑쉑 먹을까?”

레빈에 말에 사샤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든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레빈은 룸메이트들에게 뒤를 맡기고 집을 나섰다.

레빈과 룸메이트들이 짧게 인사를 나누는 소리, 그리고 멀리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샤는 무거운 한숨을 쉬며 아직도 꺼진 채인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레빈이 사 준다는 햄버거 때문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도 잠시, 사샤는 다시 완전히 풀이 죽었다.

어머니가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 학교로부터 정학 처분, 기숙사 퇴거 명령을 받았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해 듣고서. 화를 내는 게 무서운 건 아니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항상 아버지가 저를 때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자신에게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실망할 뿐. 그리고 어머니의 실망한 한숨 소리를 듣는 건 사샤가 정말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아니면 줄리아일 수도 있었다. 학교와 가까운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월세 4,000불짜리 컨디션 좋은 방을 구했다면서 제게 아파트 리스트를 들이밀지도 몰랐다. 학교에서 지원받는 400불도 쪼개 쓰는데 4,000불을 감당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돈하고 살 곳을 구할 수 있지?’

사샤는 무거운 마음으로 핸드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잠시 후 확인한 부재중 전화의 숫자는…….

‘120통?’

사샤는 너무 놀라 핸드폰을 그 자리에서 던져 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태피스트리를 슬쩍 걷어내고는 안을 향해 말했다.

“사샤. 아침 안 먹어? 주방에 나오기 싫으면 여기로 가져다줄까?”

레빈의 룸메이트, 에밀리가 한 손에 접시를 든 채로 서 있었다. 부재중 통화의 발신인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샤는 빠르게 고개를 젓고는 그대로 일어나 주방으로 나가 버렸다.

* * *

그래놀라, 저지방 요거트, 병아리콩과 토마토가 들어간 샐러드 등등 평소 먹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식단의 아침을 먹으면서 사샤는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냐고 레빈의 룸메이트들에게 물었다. 별로 큰 기대를 가지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는데, 에밀리가 뜻밖의 제안을 건넸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수시로 일손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오늘도 자리 있는데, 올래?”

“얼마 주는데?”

“시간당 20불은 줄걸.”

“나 할래.”

그리고 사샤는 머리에 물을 듬뿍 묻혀 뻗쳤던 머리를 잘 빗고 나서 에밀리를 따라나섰다. 약간의 설명을 들어본 결과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큰 의류 브랜드에서 일하는 에밀리는 샘플 세일 현장을 많이 알고 있었고, 그런 곳은 특히 매일 일당을 쳐 주기 때문에 비정기로 일감이 필요한 이들, 특히 자기 같은 학생들도 많이 찾아온다고 말해 주었다.

‘왜 나한테 아무도 이런 곳이 있다고 알려주지 않았지? 일자리도 찾으면 있잖아. 율리안은 무능력해.’

한 시간에 20불이나 벌 수 있다는 사실에 혹한 사샤는 흥분되면서도 긴장된 마음으로 현장을 방문했다. 그렇게 에밀리에게 소개받은 현장 매니저는 율리안보다도 깐깐해 보이는 중년 남자로, 표정에서부터 사샤를 못 미덥게 생각하는 것이 드러났고, 심지어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단어 단위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바딤의 혹독한 가르침에 익숙한 사샤는 그런 말투에는 별로 상처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제 성숙해졌어.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땀까지 뻘뻘 흘리며 한 번에 스무 벌이 넘는 옷가지를 들고 달리거나 산처럼 쌓인 옷더미들 사이에서 먼지를 잔뜩 먹어야 했지만, 평소에도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발레 클래스를 소화해 체력에는 자신 있었던 사샤는 지치는 것도 모르고 일했다.

그리고 일이 끝나갈 때쯤에는 현장 매니저조차 사샤의 진가를 알아본 듯했다. 그는 특히 클레임을 걸러 왔던 손님들이 사샤가 약간 난처한 얼굴을 하는 것만으로 쉽게 누그러져 그냥 물러난다는 사실에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현장 매니저가 일당을 건네주며 깐깐한 얼굴로 물었다.

“네가 몇 살이라고 했지?”

“열……여덟 살이요.”

“그래? 너무 어려 보이는데. 아무튼 또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써 줄 테니까.”

현장 매니저가 사샤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어른의 명함을 또 한 장 건네받은 사샤의 심장이 쿵덕쿵덕 크게 뛰었다.

자기도 잘하는 게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던 사람에게 하루 만에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부풀었다. 게다가 바지 주머니에는 오늘 일한 결과인 200불이 들어 있었다. 노동으로는 처음 벌어 보는 돈이었다. 실제로는 그저 몸을 쓰는 일용직일 뿐이었지만, 아무튼 사샤는 자신이 큰일을 해냈다고 생각했다.

사샤는 돈을 작게 접어 바지 주머니 안에 잘 넣어 놓고 돈이 들어 있는 곳을 계속 만지작거리며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샘플 세일이 있던 소호의 길거리를 나서자 바깥은 이미 황혼녘이었다. 조금 당황한 사샤는 오늘 레빈과 함께 점심을 먹기로 했던 것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핸드폰도 갖고 오지 않았는데……. 큰일이다.’

사샤는 레빈이 자기를 한 십여 분 기다리다가 지쳐서 그냥 혼자서 햄버거를 먹었기를 바랐다. 그러고는 최대한 빨리 지하철을 타기 위해 달려갔다. 하필이면 막 붐비는 시간이 되어 지하철은 발 디딜 틈 없이 복잡했다. 돈이 든 주머니를 꽉 쥔 채로 사샤는 사람 틈바구니에 끼어 낑낑대며 레빈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철에서 내려 익숙한 골목으로 걸어가는 순간, 사샤는 길목을 가득 채운 경찰차들을 발견했다.

‘우와, 뭐지?’

한 번에 이렇게 많은 경찰차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사샤는 경찰차 가까이로 다가갔다.

NYPD라고 쓰여 있는 멋진 경찰차가 다섯 대, 천장이 높은 밴 형태의 경찰차가 세 대나 있었다. 무전기를 차고 무리 지어 모여 있는 경찰들은 하나같이 몸이 컸고, 허리에는 총을 찬 채였다. 진짜 총을 본 사샤는 쉽게 흥분했다.

‘멋지다……. 그런데 왜 저렇게 경찰이 많이 왔을까. 권총 강도라도 있나?’

하필 레빈의 동네에 권총 강도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스러워진 사샤는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경찰 옆에서 얼쩡거렸다. 그러나 경찰들이 영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자 결국 한 경찰의 두툼한 팔을 툭툭 건드렸다. 주변을 휘휘 돌아보던 덩치 큰 경찰이 제 가슴께쯤에 시선이 오는 소년을 얼른 발견해 냈다.

“음? 넌 누구냐.”

“저기…… 아저씨. 여기 근처에 권총 강도가 있나요?”

“아니? 우리는 사람을 찾고 있지.”

“그러니까 아저씨가 찾는 게 권총 강도예요?”

“권총 강도는 아니고, 이건 단순히 실종 사건이야.”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웃던 경찰은 사샤의 시선이 제 허리춤에 있는 총에 박혀 있는 것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이맘때쯤 아이들은 다 똑같다는 눈치였다.

“이봐, 꼬마야. 너도 경찰이 되고 싶냐?”

“아뇨? 전 발레 댄서가 되고 싶은데요? 그치만 총은 멋있어요. 저도 소품으로 된 총은 만져 본 적 있거든요. 그것도 진짜 같았는데…….”

그때였다. 저 멀리서 또 다른 경찰이 사샤와 이야기를 나누던 경찰을 향해 외쳤다.

“어이! 데이비드! 네 옆에 그 녀석 누구야?”

제 동료에게 ‘그냥 꼬마애!’라고 대답한 경찰은 잠시 무언가를 깨달은 듯 제 동료와 사샤를 번갈아 보았다. 사샤는 영문을 모르고 저를 샅샅이 살펴보는 경찰을 올려다보았다.

발레 스쿨에 다니는 열여섯 살, 러시아어 악센트가 섞인 영어를 쓰는 검은 머리 남자아이.

“네 녀석이구나!”

“네?”

“잡았다!”

사샤가 되묻는 순간 경찰 두 명이 사샤의 어깨에 커다란 손을 턱, 턱 올렸다. 사샤는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윌리엄스버그까지 돌아온 보람도 없이 경찰차의 뒷좌석에 앉혀져 그대로 다시 맨해튼으로 실려 갔다.

저녁 시간에 맞추어 맨해튼으로 들어가는 길은 정체가 극심했다.

사샤는 처음 타 보는 경찰차 안을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다가 그것도 익숙해진 다음에는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냐고 여러 번 물었다. 경찰서에 가는 건지, 아니면 감옥에 가는 건지. 자기는 감옥에 갈 만한 잘못은 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려고 했지만, 경찰들은 누군가와 무전을 하는 데 정신이 팔려 사샤의 질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네. 지금 태웠습니다.”

“계시는 곳에 도착하려면 한 시간은 걸리겠군요.”

“아, 어디다 데려다주라고요? 다시 한 번 주소를…….”

경찰들은 누군가에게 바삐 보고를 하느라 사샤의 존재는 뒷전인 것 같았다. 유심히 들어보려 했지만 악센트가 섞인 경찰들의 영어 발음은 사샤에게 영 익숙지가 않았다. 망상은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 마지막에는 혹시 제가 납치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엉뚱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혹시나 이런 상황에 처하면 무조건 학교에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정학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다시 말해 학교도 포기한 상태라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사샤의 마음에 불길함이 엄습했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 특유의 조바심이었다.

미국 경찰들은 게으르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줄은 몰랐다.

‘마누엘 아버지가 미국 경찰에 신고를 한 걸까? 학교에 항의한 걸로는 화가 풀리지 않아서, 화가 나서……. 아니면……. 아! 그거구나. 그거였어. 미성년자인 걸 속이고 몰래 일을 한 걸 걸린 거야. 걸리고 말았어……. 이제는 내 돈 200달러도 뺏기고 미국에서 영구 추방당하겠지?’

최악의 상상을 하며 점점 말이 없어진 사샤는, 경찰차가 멈췄을 때에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이봐, 꼬마야. 얼른 내려라.”

“우는 거냐? 놀랐구나.”

“우으…….”

경찰들은 내리지 않으려고 하는 사샤의 팔다리를 잡아당겨 뒷좌석에서 억지로 끌어냈다. 끌려 나가지 않으려 속절없이 버둥거리다 바닥에 넘어진 사샤는 한 번 깨졌던 무릎으로 또다시 바닥을 쾅 딛고 말았다. 그렇게 아픈 무릎을 껴안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으려니 맞은편에서 낯익은 얼굴이 달려왔다.

“사샤! 이 최악의 말썽쟁이 녀석아!”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 같은 얼굴을 하고 제게 달려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바딤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놀란 사샤는 그 자리에서 기어 도망치려다가 경찰에게 목덜미를 달랑 잡혀 그대로 바딤의 집에 처넣어졌다.

* * *

“이 망할 녀석.”

바딤은 이를 갈면서 사샤를 강제로 식탁 앞에 앉혔다. 방금 전 그는 사샤가 남의 집에 흘리고 갔던 스포츠백을 경찰을 통해 전달받은 참이었다. 모로 봐도 ‘가출 청소년의 짐’인 그것을 사샤의 곁에 탁 내려놓으면서 바딤은 한숨을 쉬었다.

임시로 머물기로 했던 자신의 집에도 오지 않고, 말도 없이 짐을 싸서 학교를 떠난 맹랑한 사춘기 소년이 하는 짓이 그를 기막히게 했다. 경찰을 부르는 소란까지 일으켰으면서 대체 무얼 잘했다고 저렇게 볼이 부루퉁한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춰 버린 사샤 때문에 지난밤 학교의 모든 스태프가 발칵 뒤집힌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혈압이 솟구쳤다.

「따뜻한 음식은 먹을 생각도 하지 마라! 너 같은 놈은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알아야 해. 이런 게 그립지 않으니 사고를 치고 학교를 뛰쳐나간 거겠지?」

둘만 남자 바딤은 격양된 러시아어로 떠들었다. 그리고 말을 멈추지 않으면서 식기 위에 덮어 놓았던 천을 치웠다.

“…….”

사샤는 갖가지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바라보았다. 바딤의 말대로 음식은 몽땅 식어 있었다. 다만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했는지 2인분의 음식이 차려진 모양새가 정갈했다.

식탁 위를 흘끔대던 사샤가 말했다.

「아…… 안 먹어요.」

「버릇없는 자식!」

바딤은 욕하면서도 라자냐를 오븐에 넣었다. 탁! 분풀이하듯 닫아 버린 오븐의 손잡이가 충격으로 징 떨렸다.

그리고 사샤는 식탁 위의 음식 중에서 연어가 들어간 크림치즈 베이글을 발견했다. 저건 식은 채로 먹어도 맛있을 것이다. 한입을 크게 베어 무니 지금까지 잊고 있던 허기가 미친 듯이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자신은 연어가 들어간 크림치즈 베이글을 먹은 적이 있었다. 몽땅 토해 버렸지만 먹을 때는 참 맛있었는데.

혹시 그때 로커에 아침을 넣어 준 것도 바딤인지 궁금해졌다.

「넌 살을 찌워야 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을 꼬박꼬박 먹어야 댄서의 몸을 만들 수 있는 거야. 끼니를 거르고 먹고 싶은 걸 아무 때나 먹다간 배, 팔, 턱, 이런 보기 싫은 곳에 군살이 생긴다.」

바딤은 그렇게 말하면서 사샤의 팔뚝과 납작한 배, 통통한 볼을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사샤는 얼굴만 찌푸렸다.

「어젯밤에는 대체 어디서 잔 거냐?」

사샤는 대답하는 대신 입 안 가득 밀어 넣은 음식을 씹기만 했다. 그건 자신의 사생활이었다. 바딤에게 일일이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스러운 점이 있어 사샤는 음식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혹시 저희 어머니한테도 알리셨어요?」

바딤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사샤는 속으로 그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추리하기에, 120통 중에 엄마에게 걸려 온 전화는 없다는 말이었다. 당장 고향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사샤는 한시름 놓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바딤이 설탕을 탄 따뜻한 우유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휴대폰의 부재중 전화 목록을 살피면서 사샤는 모르는 번호가 여러 개 찍혀 있는 것을 확인했다.

[바딤 (3)

줄리아 (2)

기숙사 사무실 (1)

조제 (2)]

저장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온 전화는 이게 다였다. 나머지 백여 통의 전화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모르는 번호였다. 어제 저 때문에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하니 링컨 센터에 있는 모든 스태프들이 한 번씩 전화를 했을지도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걱정을 끼쳤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몰려왔다.

“레빈? 나 선생님 집에 왔어……. 응. 걱정 안 해도 돼. 짐은 내일 챙기러 갈게. 레빈, 점심에 쉑쉑 먹었어? 나 근데 경찰차 타 봤다? 경찰들이 선생님 집에 데려다줬어…….”

마침 레빈에게 전화가 걸려 와 사샤는 오늘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사이 바딤은 거실에다 사샤가 잘 곳을 만드느라 분주히 담요나 베개를 옮겼고, 그 작업이 끝나자 거실에 있는 TV에 무언가를 재생시켰다. 비율이 4:3인 화면은 옛 비디오의 느낌이 났고, 음질도 노이즈가 잔뜩 끼어 원음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화면의 컬러만은 매우 생생한 것이 특이했다.

“응……. 레빈도 잘 자.”

전화를 끊고 사샤는 담요 안에 둥그렇게 파고들었다. 바딤은 TV를 틀어 놓고 설거지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주방에서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물이 흐르는 소리 따위가 들렸다.

사샤는 화면에 시선을 주었다. 누가 발레 마스터 아니랄까 봐 바딤이 틀어 놓고 간 것은 발레 무대 영상이었다.

「사샤 세드린. 네놈과 이름이 같은 전설적인 무용수지.」

설거지를 끝낸 후 제 몫의 커피를 들고 온 바딤이 곁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사샤는 담요 바깥으로 빠져나와 소파에 등을 대고 두 다리를 모아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무릎에 턱을 걸친 채로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거실 안을 밝히는 건 TV 화면이 내뿜는 빛뿐이었다. 사샤의 얼굴 위로 어른어른 희미한 빛이 쏟아졌다.

구식인 화면은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화면에 얼굴이 담기자마자 사샤는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조명을 받아 창백한 피부 위로 화려한 화장을 얹은 잘 조형된 아름답고 처연한 얼굴.

「알아요.」

학교에는 발레단과 역사를 같이한 존경받는 무용수들의 초상화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그건 사샤 세드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발레 스튜디오 중 천장이 뚫려 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가장 넓은 홀의 이름이 ‘세드린 스튜디오’였다. 스튜디오의 이름은 전통적으로 거액의 기부자나 발레단에 기여도가 높은 예술가들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그중 크기로는 손꼽는 홀의 이름이 그의 것이니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건 얼마 전에 리마스터링 한 거야. 원래 흑백이었던 화면에 색을 입힌 거지. 의상이 아름다워서 그 부분에 특히 공을 들였다는군. 영광인 줄 알아라. 아직 공개되지 않은 거니까.」

「…….」

「제대로 본 적 있어?」

「아뇨. 한 번도.」

사샤는 화면 속의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발레 공연인데도 특이하게 얼굴을 비추는 클로즈업이 많았다.

버림받은 비천한 이를 연기하는 그의 눈에는 깊은 슬픔과 두려움 따위가 넘실거렸다. 눈가가 촉촉한 것이 정말로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발레의 테크닉을 강조하는 교육을 한창 받고 있는 어린 사샤에게는 아주 낯선 표정 연기였다. 영화에 나오는 연기자만큼이나 표정이 드라마틱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저게 바로 진짜 예술가지.」

「…….」

사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사샤는 저 남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 하나같이 저에게 ‘제2의 사샤 세드린’처럼 되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발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바딤도, 줄리아도, 학교의 스태프들도, 처음 발레를 가르쳐 주었던 고향의 발레 선생님도, 함께 입학한 동기들도…….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졌다. 사샤는 어렸지만 사람들이 제가 아닌 과거의 인간을 자신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아무튼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의 이름을 듣는 바람에 사샤는 그에게 묘한 경쟁심을 가진 상태였다. 그래서 일부러 비디오도 보지 않았다.

「별로 잘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인기가 많은 건 잘생겨서 그런 거 아니에요?」

「뭐라고?」

「……사람들이 찬양하고 좋아해 주니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이놈이 발레만 못하는 줄 알았더니 보는 눈도 없구나.」

바딤이 타박했다. 삿대질하는 크고 두꺼운 손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도 넘은 건방에 뺨을 맞을지도 몰랐지만, 사샤는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세상에 저 정도의 재능을 가진 무용수는 많았다. 단지 춤으로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살면 자신감이 또 자신감을 불러 오고, 그게 어느 순간 진짜 자기 실력이 되는 것뿐이다. 사람들이 감히 레전드라 칭해지는 인물의 결점을 지적하지 못하기에 칭송만 남는 것이다. 자기도 바딤이 뺨을 때리고 못한다고 구박하는 대신…… 칭찬과 사랑을 쏟아부어 주면 저 사람보다 더 잘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방금 시선이 왼손을 따라간 건 의도한 게 아니었을걸요.」

「뭐?」

「원래는 오른쪽 멀리 넘겨다봐야 해요. 그게 더 보기에 좋아요.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저렇게 한 거예요.」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보세요?」

사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 속 남자의 포즈를 따라 했다. 앞으로 기울어지듯 무게 중심을 옮긴 애티튜드 플리에 자세를 취하며 캉브레로 허리를 넘겨 느리고 부드러운 반 바퀴의 턴을 만들었다. 턴이라기보다는 느린 프로미나드(promenade)같이 보이는 움직임이었다.

바딤은 어두운 거실 안에서 처음 보는 안무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이하는 사샤의 모습을 조금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카펫과 이불 위에 섰는데도 밸런스가 완벽했고, 등을 잔뜩 아래로 당겨 한계까지 늘인 팔의 표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다.

사샤는 동작을 마친 후에 바딤에게 동의를 구하듯 말했다.

「이렇게 무게 중심이 올 때는 시선을 저쪽에 남기는 게 더 여운 있어요.」

「주제넘은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그러니까 네가 애송이인 거야.」

그러고 나서 바딤의 웅변이 이어졌다.

춤은 그렇게 일부의 스킬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연기를 조망하는 것이며, 저 예술가가 몸을 도구로 사용해서 어떤 느낌을 전달하는 것인지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또 한두 군데 의도하지 않은 부분이나 실수가 있을지언정 저 사람은 보는 사람에게 뭔가를 전달하는 진짜 예술가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건 사샤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처음 영상을 보면서 사샤는 왜 춤을 추는 무용수의 동작이 아니라 얼굴을 클로즈업하는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곧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최초에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깊은 슬픔이 전이되는 듯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저런 걸 항상 보니까 내가 마음에 안 들지.’

사샤는 울적해졌다. 발레 선생들에게 레전드 영상을 보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알겠지? 너도 저 모습을 교본으로 삼아야 해.」

「…….」

「누구나 발레는 할 수 있지. 하지만 발레란 잔인하게도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그 한계가 명확히 정해져 있는 분야야. 그리고 사샤. 너는 다행스럽게도 타고나야 하는 부분은 이미 갖추고 있다. 그게 얼마나 축복인지 아느냔 말이야. 무릎이 남보다 조금 크다고, 발등이 평평하다고, 아킬레스건이 짧다고 이 길을 접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바딤은 사샤의 맨발을 강한 악력으로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았다. 유연한 발등이 훅 구부러지며 고를 만들었다가 힘을 풀자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너도 저렇게 춰야 한다, 사샤 세드린.」

「…….」

「어허? 대답을 않는구나.」

「……네.」

기어들어 가는 듯한 대답에 바딤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딤은 TV를 끄지 않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사샤는 밤새 그 비디오를 돌려보다 새벽에야 잠들었다. ‘사샤 세드린’처럼 추라는 말이 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사샤 세드린인데…….’

이내 사샤의 손에서 리모컨이 툭 떨어졌다. TV에서 쏟아지는 빛이 꿈을 훼방 놓는데도, 사샤는 쿨쿨 잠들었다.

* * *

바딤의 집에서 지내는 3일 동안 사샤는 갖은 방법으로 바딤의 속을 썩였다. 하루는 샘플 세일의 일거리가 생겼다며 집을 훌쩍 나가 열두 시간 후 땀에 전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했고, 또 하루는 발레 개인 교습 파트타임 잡을 얻었다며 어퍼이스트사이드로 말없이 떠나기도 했다. 얼마나 가르치는 데 재능이 없었는지 다시는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게다가 사샤는 바딤이 만들어 준, 댄서를 위한 균형 잡힌 영양식은 거부한 채 본인이 번 돈으로 버거나 초콜릿, 마시멜로처럼 쓰레기 같은 음식을 잔뜩 사 먹었다. 그리고 항상 옷을 모두 챙겨 입고 샤워실에 들어가는 것을 수상히 여긴 바딤에게 허벅지에 생긴 큰 염증을 걸리기도 했다.

그제야 바딤은 비로소 사샤가 스트레칭을 게을리하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정학이라도 몸을 놀게 하면 안 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말했건만, 그 말도 무시하고 농땡이만 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런 큰 부상을 달고 있으면서도, 어차피 정학이 끝날 때까지는 발레를 할 일이 없을 것이고, 또 그때쯤이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속 편히 말하는 사샤를 두고 바딤은 시름에 빠졌다.

“도대체가 너는 절대로 컨트롤이 안 되는구나. 너 같은 놈이 커서 어떻게 사샤 세드린처럼 훌륭한 무용수가 될 수 있지? 그 이름 당장 반납해!”

“저도 그 사람같이 될 생각은 없는데요? 저도 조금 알아봤어요. 사샤 세드린은 알코올중독자잖아요.”

“이놈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떠는 바딤 앞에서 사샤는 제가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다시 샘플 세일의 파트타임 잡 제안을 받은 나흘째 아침.

일을 하러 나가기 위해 씻고 양치하던 사샤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사샤 세드린? 장학 재단의 안톤 게오르크입니다. 후원 건으로 한 가지 제안이 준비되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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