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MacGuffin (26/26)

MacGuffin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은 장면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요한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장면은 엔딩 신이다.

마지막은 아름다워야 한다. 단순히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모두가 완결된 하나의 세계를 아름답게 떠나보낼 수 있는 결말이어야 한다. 그것이 다년간의 경험으로 축적된 요한의 철학이었다.

섬세하게 쌓아 온 서사의 흐름이 끊어지거나 엉뚱한 장치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게 괴짜의 예술이라면 예술가의 괴벽을 존중하는 어느 평론가는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만일 상업 예술이라면? 평론가와 관객들은 별점을 테러할 것이다.

“그 장황한 영화론, 제가 계속 들어야 할까요?”

메가폰을 잡은 짐 크레이슨 감독이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노인 특유의 걸걸하고 쉰 목소리가 스튜디오에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프랜차이즈 카페 브랜드 로고가 큼직하게 박힌 커다란 텀블러를 앙상한 손가락으로 들어 올렸다. 꿀꺽꿀꺽, 달게도 넘기는 목 넘김이 예사롭지 않았다.

요한은 저 텀블러에 든 게 커피가 아니라는 것에 제 차를 걸 수도 있었다. 과연 길게 뱉는 숨에서 위스키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은 요한의 눈썹이 꿈틀했다.

크레이슨 감독은 작고 깡마른 몸에 고집이 그득그득 들어찬 노인이었다. 영화에 대해서는 전혀 타협하지 않고, 술을 끼고 살았으며, 틈만 나면 독설을 쏘아 댔다. 유명한 배우 중 크레이슨 감독의 독설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게 업계의 정설이었다. 실력만큼이나 원만한 성격이 중시되는 이 바닥에서, 그가 형편없는 인성으로 영화계의 살아 있는 역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 가지뿐이었다.

‘그 인간, 영화만 아니었으면 진짜 수백 번은 더 죽였을 거예요.’

요한이 크레이슨 감독을 영입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 그 사람이 영화를 참 잘 만들기는 하는데…….’

그 말을 흘려듣지 말았어야 했다. ‘예술가들이 다 그렇죠, 뭐.’ 그렇게 말하며 충고를 웃어넘겼던 요한은 후회했다.

“아니, 내가 우리 감독님 영화에 참견하려는 건 아니지만…….”

“참견하고 있잖아요, 지금. 결말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거 아닙니까?”

그거야 당연하지. 상큼하고 발랄한 분위기의 로맨스 영화가 남녀 주인공 동반 자살로 끝나면 안 되니까.

요한은 하고 싶은 말을 꾹꾹 참았다. 운명의 장난 같은 일이었다. 요한은 그제야 자신의 친구이자 옛 애인인 에런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들떠 있을 아이들에게 냉혹한 세상을 일깨워 주겠다던 포부는 얼마나 맹랑했던가. 에런이 아니었다면 사랑이 넘치는 크리스마스를 싸늘하게 만들 뻔했다.

빨강, 노랑, 초록. 원색의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눈치를 살폈다. 요한은 생동감 넘치는 색채로 가득한 세트장을 곁눈질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참자. 이 컬러풀한 세계를 배드 엔딩에서 구해야 해.

“감독님, 다 좋은데 우리 영화가 밸런타인데이에 개봉하는 영화잖아요.”

밸런타인데이에 이 영화를 볼지도 모르는 어느 커플을 위해서라도 이 영화는 이렇게 끝나면 안 된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지금은 한껏 예민해진 감독을 달래야 했다. 요한은 빙긋 웃었다.

“첫 미팅 때 말씀드렸죠. 저는 보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감독님도 제 생각에 동의하셨고요.”

“말씀 잘하셨군요. 첫 미팅 때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죠. 저는 제 세계가 아주 뚜렷한 감독이니, 이런 저를 존중할 자신이 없으면 계약을 재고하시라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화는 제 영역입니다.”

그거야 감독이 촬영 중에 결말을 갑자기 바꾸자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크레이슨 감독이 빈 텀블러를 허공에 흔들어 대며 버럭 소리쳤다.

“퍼시! 망할, 퍼시! 어디 있어? 대표님 가신단다. 거기 구석에서 어정거리지 말고 나가는 문이라도 찾아 드려.”

몹시 어려 보이는 청년이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변을 바쁘게 두리번거렸다. 제 이름이 불릴 줄은 꿈에도 몰랐던지 퍼시는 몹시 당황한 상태였다. 딱 봐도 잡일 담당인 막내 스태프였다. 요한은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이 웃어 보이고는 딴청을 부리는 크레이슨 감독의 옆으로 다가갔다.

“감독님,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났잖아요.”

“무슨 얘기를 더 해야 하죠? 영화는 내가, 나머지는 대표님이. 난 협상 같은 건 안 합니다. 얘기 끝났어요.”

요한은 촬영이 중단된 세트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당황한 스태프들이 웅성거리며 촬영 장비를 급히 물렸다. 감독은 삐딱하게 서서 요한이 어쩌나 유심히 지켜보았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입매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도 기억한다니까요. 예술은 우리 감독님이, 나머지는 내가. 그래서 지금 내 몫을 하려는 거예요.”

“빌어먹을, 내 세트장에서 나와요. 이건 내 영화예요.”

“아니지. 이건 우리 영화죠. 우리 배우, 의상, 이 세트장 잔디 하나까지 내 손이 안 간 게 없는데 내가 한마디 할 자격도 없다고요? 진심으로?”

요한은 허리를 숙여 파릇파릇한 인조 잔디를 매만졌다. 인조 잔디가 요한이 잡아 뜯는 대로 죽죽 일어났다. 어어, 사람들이 놀라 소리 질렀다.

“당신이 말한 이 잔디! ‘새파랗고 너무 완벽하게 생생해서 진짜 같지 않은’ 이 빌어먹을 잔디도 내가 깔았어, 내가! 아, 답답해. 나도 한마디만 하자. 우리 애들 좀 행복하게 살게 두라고!”

크레이슨 감독은 디테일에 목숨을 걸었다. 하물며 세트장에 깔 인조 잔디 하나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이 완벽한 잔디를 깔기 위해 요한이 얼마나 뛰었던가. 다시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모두가 미친놈처럼 날뛰는 요한을 망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요한은 손바닥에 달라붙은 잔디를 허공에 뿌렸다.

“어어…… 대표님!”

“대표님!”

“대표님, 나오세요!”

갑자기 사방에서 아우성이 터졌다. 이깟 잔디가 뭐라고. 요한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든 순간, 입가에 희미하게 맺혀 있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잔디에 고정된 전기선에 걸려 기울어진 조명이 요한을 향해 넘어지고 있었다.

셰어, 셰어, 셰어.

마지막으로 떠오른 생각은 온통 연인에 대한 것뿐이었다. 화가 난 얼굴, 심술 어린 입술,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리는 얼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평온한 그의 얼굴. 요한이 사랑하는 얼굴들이 방울방울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 * *

“기억 상실증, 이라고요.”

가라앉은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갈라졌다. 셰어의 눈썹이 서서히 구겨졌다. 요한의 사고 소식을 접한 후, 이보다 더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요한은 그 예상을 보기 좋게 깨트렸다.

기억 상실증이라니. 누가 영화 만드는 회사 대표 아니랄까 봐. 그의 인생은 영화처럼 파란만장했다. 셰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의사는 CT 사진을 보여 주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설명을 늘어놓았다.

쓰러지는 조명을 피하려다 넘어져 구르는 바람에 요한은 이마를 세 바늘이나 꿰맸고, 후두부에는 타박상을 입었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을 잃었다.

CT로 보이는 외상은 없으므로 아마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건 아닐 것이다. 다만 운이 나쁠 경우, 기억 상실증은 장기화될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서 셰어는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정답은 1이거나 1이 아니다.’ 같은 말이 아닌가.)

대개 뇌 손상이 없는 기억 상실 환자들은 1년 이내에 대부분의 기억을 찾곤 하지만 기억 상실 환자 중 일부는 영영 기억을 찾지 못한다. 기억을 잃은 환자는 일시적인 우울감과 불안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심한 경우 대인 공포증, 우울증, 불면증 등을 앓을 수 있다.

셰어는 차분하게 의사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으나 사실 ‘일부는 영영 기억을 찾을 수 없다.’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는 기억에 남는 말이 거의 없었다.

일부, 불명확한 가능성이 불길한 상상을 부추겼다. 설마 요한이 기억을 찾지 못한다면, 그래서 요한을 영영 잃게 된다면…….

“하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셰어는 일그러진 미간을 꾹꾹 눌렀다. 왼손 약지의 반지가 외로이 빛났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그를 타일렀다.

“가족분들의 도움이 가장 중요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 부디 마음을 굳게 다잡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그건 제가 알아서 챙길 일인 것 같군요. 다른 얘기를 해 보죠.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요.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끝났습니까?”

그러나 셰어는 금세 감정을 추슬렀다.

그는 명성대로 빈틈이 없었다. 어쩌면 조금 지나칠 정도로. 의사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예, 물론입니다. 대표님의 회복을 위해 최고의 의료진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필요한 치료는 뭐든 하겠습니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회복할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물론입니다. 일단은 며칠 입원하신 후에 퇴원하시는 게 좋겠군요. 익숙한 장소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회복에 도움이 될 겁니다.”

몹시 건조하고 사무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셰어는 의사와 필요한 치료를 의논하고 일정을 조율했다.

“그럼 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의사가 친히 셰어를 안내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의사가 직접 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는 깍듯이 셰어를 모셨다. 아마 셰어가 바로 맞은편의 병동을 기부했기 때문이리라.

셰어는 복도 창밖으로 보이는 깔끔한 신축 병동을 보며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소아암 환자를 위한 자선 행사였다. 워낙 바빠 그런 자잘한 행사에는 참석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날만은 예외였다. 요한을 만나야만 했다. 잃어버리면 수많은 대체품 중 하나, 많은 옵션 중 하나를 잃는 것뿐이라고 흘려 넘길 수가 없었다.

유일한 것은 위험하다. 셰어는 자신만을 바라보는 요한의 눈을 볼 때마다 생각했다. 위험한 짓을 하면서도 위험한 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맹목적인 눈이었다. 그 눈을 볼 때면 덩달아 멍청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세상은 둘만의 방처럼 좁아지고, 주변의 소음은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래서 깜빡 잊었다. 요한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다시는 끝이라는 말 같은 건 할 수 없게, 무엇에든 쉽게 홀리고 마는 그의 시선을 잡아 놓아야 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병동 하나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라도 내놓을 수 있었다.

그가 흔들리기를 바랐다. 딱 한 번만 흔들리면,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여유 없는 애송이처럼 그런 설익은 생각을 했었다. 요한에게 결혼반지를 끼워 준 지금도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걸 보면 평생 이렇게 휘둘릴 운명인가 보다. 셰어는 흐트러짐 하나 없이 완벽한 제 옷차림을 점검했다.

요한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요한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것은 자신이었고, 셰어는 한 번 잡은 이상 그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다정하게 대해 줘야 한다. 예민한 짐승을 길들이듯 신중하게 그를 잡아 놓아야 했다.

요한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혹은 헤어진 데까지만 기억한다면, 만일 결혼하기 전까지만 기억한다면……. 셰어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요한의 병실이 가까워졌다.

요한이 있는 곳은 VIP 병동에서 가장 좋은 병실이었다.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붙여 놓은 가드들이 셰어에게 소리 없이 인사했다. 문을 열기 전, 가드가 재빨리 속삭였다.

“방금 상처를 살피러 간호사가 들어갔습니다.”

그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치료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상처 치료는 이미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 그게…….”

우물쭈물하던 가드가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대표님이 상처가 터진 것 같다고 다시 한번 봐 달라고 하셔서요.”

“상처가 터졌다고요?”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셰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문 너머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두 사람, 여자와 남자의 웃음소리였다.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셰어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번졌다. 가드가 슬며시 셰어의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요한 바네스의 화려한 과거를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 만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이게 또 제 버릇 남 못 주고 상처가 터졌다는 핑계로 간호사를 꼬드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셰어는 병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놀라 셰어를 돌아보았다. 예상한 대로의 그림이었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거리는 가까웠다. 얼핏 보면 친밀한 사이 같기도 했다.

“하…….”

셰어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요한은 머리가 터진 환자 주제에 한가롭게 커피 따위를 타 주고 있었다. 열이 뻗쳤다. 아픈 주제에 여자에게 잘 보이겠다고 커피를 타고 있는 저 멍청한 얼굴도 어이가 없고, 아늑하게 꾸며진 병실은 그냥 다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테이블에 꽃은 왜 갖다 놨고, 저 아기자기한 과자는 또 뭐란 말인가.

딸그락. 자그마한 설탕 집게에서 미끄러진 각설탕이 다과가 소담하게 쌓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요한이 홀린 것처럼 얼빠진 얼굴로 주절거렸다.

“어, 안녀엉……?”

불쑥 병실로 들이닥친 남자의 정체를 전혀 짐작도 못 하는 말투였다. 셰어는 확신했다. 요한은 정말 기억을 잃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셰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그 일을 목격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셰어가 혀를 찼다. 싸늘해진 낯빛과 달리 가슴 안쪽이 끓어오르듯 뜨거워졌다.

“아니, 뭐. 오해하시는 거 아니죠? 내가 머리도 아프고 혼자 있으니 불안하기도 해서.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요, 사만다.”

요한이 눈치 없이 간호사에게 커피를 건네며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냈다. 뭘요, 하고 어설피 웃은 간호사가 커피를 받아 홀짝이는 시늉을 했다. 셰어가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요한은 환자다, 환자다…….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자 입술이 제법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불안해서 그랬다?”

그린 듯 고상해 보이는 미소였으나 병실에는 어쩐지 한기가 돌았다. 차갑게 식어 가는 분위기를 읽은 의사과 간호사가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가드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제 병실에는 단둘뿐이었다. 둘만 남겨지자 꾹꾹 눌러 온 심화가 폭발했다.

“그래서 지금은 살 만한가 봐. 웃고 떠들기까지 하고.”

셰어가 까칠하게 쏘아붙였다. 대칭을 이루던 입술이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갔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낯선 사람을 보듯 어색해하는 요한의 모습이 가슴속에 콕 박혀 불쾌하게 따끔거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선선히 보여 주던 미소조차 자신에게는 내어 주지 않았다. 셰어는 잔뜩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위로가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손이라도 잡아 줄 테니.”

요한이 휘둥그렇게 뜬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목 아래부터 시작된 홍조가 불붙은 듯 빠르게 번졌다. 긴 속눈썹이 고장 난 것처럼 바쁘게 파닥거렸다. 머리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요한이 제 가슴 위를 꾹 누른 채 숨을 골랐다.

누가 봐도 어디가 단단히 안 좋아 보이는 몰골이었다. 셰어는 자신도 모르게 요한의 곁으로 스르르 다가갔다. 화가 나서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이상하게 구는 요한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거기는 왜.”

요한의 이마에는 커다란 거즈가 붙어 있고 잘생긴 얼굴 곳곳에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불그레한 딱지가 앉은 얼굴을 보니 속이 상했다. 이 잘난 얼굴이 아까워서 얼굴만은 함부로 때린 적도 거의 없었다. 기껏 아껴 줬더니, 보란 듯이 상처를 내어 왔다. 셰어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단단한 손끝이 상처를 피해 이마를 살금살금 어루만졌다.

요한은 누가 제 이마를 만지든 말든 입술까지 살짝 벌린 채 셰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상당히 멍청해 보였다. 보다 못한 셰어가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의사를 부를 테니 기다려.”

머리에 이상이라도 있는 건지, 가뜩이나 바보 같은 게 아주 머저리가 된 것 같았다. 그때 요한이 셰어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어어, 아니. 아니야. 난 괜찮아.”

빨갛게 익은 요한이 재빨리 부정했다. 셰어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너 안 괜찮아.”

“하아…… 아니야. 나 괜찮아. 나 진짜 건강해.”

요한이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고치려다 테이블에 무릎을 부딪쳤다. 테이블 위에 쌓여 있던 과자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귓등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요한은 그 와중에도 뭐 마려운 개처럼 셰어를 흘낏거렸다.

제 무릎을 부여잡고 끙끙 앓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셰어는 확신했다. 의사가 돌팔이였다. 요한의 상태가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다.

“병원부터 옮겨야겠다.”

셰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꺼냈다. 아는 의사 중에 입 무겁고 머리 잘 고치는 의사가 누구였는지를 고민하며 연락처를 뒤졌다.

“잠깐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슬그머니 팔뚝을 타고 기어 올라온 손이 셰어의 팔꿈치를 감싸 쥐었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팔뚝 안쪽을 지분거리며 셰어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사람의 거리는 셰어가 물러나기 전보다 더 가까워졌다.

“사만다가 알려 줬어. 이 반지, 커플링이 아니라 결혼반지라며.”

셰어는 말없이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셰어에게서 희미하게 묻어나는 익숙한 향기를 맡았는지 그가 장난을 거는 아이처럼 눈을 휘었다.

“네가 내 남편이지?”

셰어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미약하게 떨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기억이, 곧 돌아올까? 기대감이 풍선처럼 무섭도록 빠르게 부풀었다. 셰어는 애써 부푸는 기대를 꺼뜨렸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혼한 걸 알았다면, 누구보다 먼저 병실에 나타나 보호자 노릇을 하는 남자가 배우자라는 것쯤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터였다.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괜히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그 간호사가 알려 줬나 보지.”

“아니. 그건 안 들어도 알겠더라.”

요한이 셰어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반듯한 콧날이 딱딱하게 굳어진 복근을 쿡 찔렀다. 그가 응석을 부리듯 치대며 중얼거렸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심장이 엄청 빠르게 뛰었거든.”

웃느라 가늘어진 요한의 눈이 셰어를 향했다. 너무도 익숙한, 사랑에 빠진 눈이었다. 그의 눈에 넘실거리는 욕망이 푸른 눈동자 너머로 범람할 것 같았다.

“이상하지.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은 아닌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긴. 그 말을 들은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코웃음이라도 치려고 했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셰어는 웃지도 울지도 못 하는 얼굴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어두운 눈동자 속에 고인 그림자가 흔들렸다.

셰어는 손대면 부스러질 모래성이라도 어루만지듯 요한의 어깨를 더듬었다. 품 안에 요한이 있다. 기억은 온전하지 않아도 그는 여전히 같은 눈으로 셰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굳어진 어깨에서 서서히 힘이 빠졌다.

기억은 절대적이지 않다. 요한이 변치 않았으니, 앞으로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요한의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차곡차곡 쌓였던 불안감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빈틈없이 강건해 보이던 셰어의 얼굴이 서서히 흐트러졌다.

“기억도 못 하면서 말은 잘하네.”

툭 내뱉은 말에는 가시가 없었다. 힘없이 내리깐 눈은 어둡게 젖어 있었다.

“이제부터 기억하면 되지. 네가 다시 가르쳐 주면 돼.”

“됐어.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음…… 그럼 어쩌지. 난 궁금한데.”

요한이 간지럽게 속살거렸다. 쪽, 쪽.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배에 입술을 비비며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은데. 우리 다른 것도 해 볼래?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순진한 척 지껄이는 말의 이면은 시커멓기만 했다. 문득 셰어는 요한이 어정쩡한 자세로 다리 사이를 슬쩍 가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람 소리 같은 웃음이 터졌다. 건강하다는 말이 그런 의미였던가.

“부추기지 마.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왜? 난 뽀뽀만 해 보자는 뜻이었는데. 뭘 생각했길래 안정을 취해야 한대?”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간지러운 진동이 아랫배를 울렸다. 엉덩이로 내려가려던 손이 방향을 틀어 허리를 감싸 쥐었다. 은근슬쩍 허리를 더듬는 손짓이 점차 농밀해졌다.

누가 봐도 뽀뽀만 하려던 사람이 할 짓은 아니었다. 셰어는 경고하듯 그의 눈을 뚫어지게 보며 그 염치없는 손을 천천히 붙잡아 떼어 냈다.

“안 가르쳐 줘. 뭐든 네가 생각한 것보다 더러울 테니까.”

요한은 환자고, 이곳은 병원이다. 셰어는 속으로 자신을 타일렀다. 요한이 옅게 상기된 얼굴로 난감한 듯 웃었다.

“장난도 함부로 못 치겠네.”

더러워? 더럽다고? 아니, 대체 뭐가 얼마나 더럽길래. 궁금해 죽겠네. 요한이 실실 웃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마 넌 상상도 못 할걸.”

셰어는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요한은 마냥 재미있어하기만 했다.

요한이 제 배에 입술을 비비며 수작을 걸 때부터 그 순진한 얼굴에 좆을 비비는 상상을 했다. 입술이 터지도록 좆을 빨게 하고, 다른 곳에서 다쳐 온 상처 위에 정액을 뿌리고, 희게 정액이 달라붙어 눈도 못 뜨는 그의 눈알을 핥고 싶었다.

아마 요한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자신의 배우자가 이토록 파렴치한 줄 알았더라면 부리나케 달아나지 않을까.

그러니 셰어는 음습한 욕망을 보기 좋은 포장으로 잘 가려 볼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리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눈을 맞추기만 해도 녹아내릴 듯 달콤하게 웃는 요한을 보니 일이 참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퇴원하면 섬에 가자.”

“섬?”

“휴가 때마다 같이 가던 섬이 있어. 치료가 끝나도 당분간 요양을 하는 게 좋다고 하니 가서 푹 쉬고 오는 게 좋겠지.”

의사는 익숙한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기억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단둘뿐인 섬에서의 생활은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인터넷은커녕 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그 섬이라면 요한에게 불필요한 정보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간단히 막을 수 있을 터였다.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이 필요했다. 셰어는 요한이 괜한 혼란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V Pictures의 일도, 요한의 다른 가족, 친구, 동료, 지인도 나중의 일이다. 요한을 온전히 되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다.

어쩌면 기억을 되찾는 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요한이 이미 한 번 이별을 고한 적이 있으니, 혹시 모를 일이었다. 셰어는 그가 달아날 여지조차 없게 완벽한 환경을 만들 생각이었다.

요한이 짐짓 고민하는 척하며 물었다.

“너랑 나랑 둘만?”

“왜 아니겠어.”

“그럼 좋아.”

요한은 언제 고민하는 척했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얼굴이 무척 사랑스러웠기에 셰어는 무심코 보조개가 팬 뺨을 톡 건드렸다. 요한이 그 손에 뺨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허니문이네, 자기야.”

그는 불순한 목적으로 제안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실상은 감금이나 다름없는 허니문을 생각했던 셰어는 떨떠름한 마음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러게.”

* * *

요한은 병실 침대에 낭창하게 드러누워 한참 들여다보던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휴대폰 화면에는 여러 개의 인터넷 창이 아코디언처럼 겹쳐져 있었다. 인터넷은 과연 정보의 바다였다. 요한은 그 안에서 코 빠진 기억에 대한 정보를 하나씩 건져 올렸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휴대폰을 어제 셰어가 찾아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 진짜 모르겠네.”

기껏 휴대폰을 찾아 준 셰어에게는 미안하지만, 활자들이 전부 외계어 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억 상실증이라고 했다.

기억 상실증이요? 제가요?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거요? 근데 제가 뭘 잊어버렸는데요?

의사는 요한의 질문 세례에 몹시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당신은 기억을 잃었어요.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우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괜찮아요. 당신은 다 괜찮을 겁니다.

자꾸만 자신을 위로하려는 의사의 말에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요한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괜찮다. 원래도 사소한 걸 잘 잊어버리는 머리였다. 좀 까먹었으면 어때. 새로운 정보로 공백을 채우면 그만이다.

그때는 몇 년 사이 이렇게까지 많은 일이 일어날 줄 몰랐다. 그동안 요한은 V Pictures의 대표가 되어 있었고, 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믿기지 않는 일을 두 가지나 저지른 과거의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당황한 요한이 찾은 사람은 셰어였다. 나름의 장고 끝에 내린 선택이었다.

가까운 사람 중에서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 조건에 맞는 사람은 셰어뿐이었다. 일단 그는 요한의 법적 배우자였고, 왠지 슈퍼맨을 연상시키는 그 남자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해결해 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며칠 전, 요한은 어김없이 병실로 퇴근한 셰어에게 의식의 흐름대로 말을 쏟아 냈다.

‘셰어, 망했어. 잊어버려서 몰랐는데 내가 V Pictures의 대표래. 근데 난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떡하지?’

눈살을 찌푸린 셰어가 조용히 물었다.

‘누가 그걸 알려 줬지? 휴대폰도 없었을 텐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해? 사만다한테 잠깐 빌렸어. 나도 기억을 찾으려면 여러모로 노력하는 게 중요하대.’

‘사만다…….’

그새 요한과 절친한 친구가 된 간호사의 이름을 그가 어쩐지 스산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네 휴대폰은 곧 찾아 줄 테니 다른 사람 휴대폰을 빌리는 짓은 그만둬. 불편하실 텐데.’

‘어, 고마워. 근데 사만다가 얼마든지 써도 괜찮다고 했는데…….’

‘요한, 내 말 들어.’

셰어가 요한의 말을 끊었다.

‘다른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넌 일단 회복에만 집중하도록 해.’

다정한 얘기를 참 건조하게 말하는 남자였다. 복잡한 현실에 잠겨 허우적거리던 요한에게는 그가 구원자처럼 보였다.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니 얼마나 편리한가.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바로 의사를 부르고 나한테 전화해.’

‘왜? 전화하면 언제 어디에 있든 와 주게?’

농담 삼아 던진 말에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할 거 없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셰어는 심장 박동 수가 정상 수준을 초과하면 지정된 전화번호로 즉시 전화가 걸리도록 설정된 손목시계까지 요한의 손목에 채워 주었다. 그는 손목시계 옆에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는 수동 호출 버튼까지 꼼꼼하게 알려 준 후에야 병실을 떠났다.

침대에 앉아 출근하는 그를 배웅한 뒤, 요한은 뜨끈뜨끈해진 뺨을 슥슥 문지르며 생각했다.

잘은 몰라도 왜 그와 결혼했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셰어는 좋은 사람이었다. 최소한 자신이 결혼할 마음을 먹을 만큼은 좋은 사람일 것이다.

요한은 자신을 잘 알았다. 자신이라면 분명 평생 그만을 사랑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에 결혼했을 것이다. 그 남자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는지 지금은 100% 확신할 수 없어도 언젠가 그런 믿음이 생길 터였다.

그러니 그때까지 실수해서는 안 된다. 기껏 평생의 사랑이라 생각한 사람을 놓치면 안 되니까.

요한은 휴대폰 화면 속 셰어의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파파라치가 최대한의 줌을 당겨 찍은 사진이었다. 인적 없는 해변에서 셰어는 요한이 즐겨 마시는 브랜드의 과일 주스를 한 손에 든 채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바람에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마를 살짝 덮었고, 한쪽만 삐딱하게 올라가던 입술은 살짝 벌어져 어두운 입안이 얼핏 보였다. 부드럽게 풀어진 눈가에는 속눈썹 그림자가 늘어져 있었다. 셰어는 편안해 보였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너른 어깨에는 동그란 모양으로 반사된 햇살이 묻었다. 컴퍼스로 그린 듯 동그란 햇빛이 새하얗다. 그 옆에 선 요한이 셰어의 어깨에 묻은 햇살을 만지고 있었다. 요한의 표정은 뒤돌아 서 있었기에 보이지 않았으나 볼록하게 부푼 뺨이 얼핏 보였다.

분명 웃고 있었을 것이다. 요한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바보같이 실실 웃고 있는 것처럼 그때도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 말았을 터였다.

요한의 손에 잡힌 침대 시트가 버석거리며 구겨졌다. 기적처럼 그때 셰어의 어깨를 만졌던 감촉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요한은 기억을 되살릴 수 없었다.

초조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기억을 잃은 게 그리 유감스럽지 않았는데, 문득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이 잃어버린 것이 네모난 화면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셰어는 이런 얼굴을 몇 번이나 보여 주었을까? 요한이 병실에서 눈을 뜬 이후로 셰어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웃지 않았다.

아까웠다. 요한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웃는 얼굴이 인터넷에 널리 퍼져 있었다. 짜증이 치밀었다.

“너 뭐야.”

얄궂게 웃는 얼굴을 꾹 눌렀다.

“왜 이렇게 사람 심란하게 웃어.”

손이 미끄러져 셰어의 사진이 저장되어 버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남편의 사진 한 장쯤 저장한다고 지구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떤가. 요한의 손은 몇 번 더 미끄러졌다.

그러고 보니 명색이 남편인데, 같이 찍은 사진이 더 많지 않을까? 번개같이 깨달음을 얻은 요한이 갤러리를 열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갤러리가 셰어의 사진으로 미어터지고 있었다.

“아니, 이걸 언제 다 저장했냐.”

스크롤을 한참 내려도 사진은 끝이 없었다. 기사 사진, 파파라치 사진, 몰래 찍은 사진…… 출처가 불분명한 셰어의 사진이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또라이도 아니고, 남편 사진을 왜 이렇게 변태같이 모았지?”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자신이 조금 무서워지는 순간이었다. 더 무서운 점은 과하게 많은 사진을 보고도 이걸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법한 것이 사진 속 셰어는 정말 예뻤다. 어느 각도에서 찍어도 못나게 나온 적이 없었다.

심각한 얼굴로 까맣게 탄 프라이팬을 들여다보는 셰어, 커피 잔을 든 셰어,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매는 셰어, 소파에 길게 기대앉아 노트북을 만지는 셰어, 수영복을 입은 셰어.

요한의 손이 멈추었다. 중간에 이상한 사진이 섞여 있었다. 화면에는 아무런 형태 없이 독특한 질감의 상아색이 가득했다. 정체 모를 희뿌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요한의 귀가 서서히 붉어졌다.

젖은 피부를 아주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귀퉁이에 살짝 찍힌 불그레한 색이 눈에 익었다. 셰어의 입술과 같은 색의 유륜이었다. 요한은 붉은 유륜 주위에 집요하게 찍힌 잇자국을 발견한 순간 저도 모르게 화면을 꺼 버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벌렁거렸다.

“후우…….”

더 봐? 말아?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사진은 모두 함께 나눈 추억의 기록이었으나, 정작 당사자인 요한에게는 그 기억이 없었다. 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엿보는 기분이 들어 적잖이 민망했다.

목 아래 맨살이라고는 손밖에 보여 주지 않았던 셰어가 떠올랐다. 며칠을 보았으나 그는 셔츠 단추 하나 풀지 않았다.

요한은 검게 물든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흔적이 남은 몸을 보고 싶었다. 어차피 숱하게 봤을 남편의 몸이었다. 사진을 보면 뭔가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이건 절대 그 남자의 몸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다.

요한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다짐했다.

보자.

그냥 한 번 보고 말자.

“하아아……. 후우, 후…….”

요한은 후끈거리는 얼굴을 부채질하며 화면을 다시 켰다. 살색 사진을 넘기자 또 다른 색으로 가득 찬 사진이 나왔다.

희고 붉은 살에 몇 줄의 선이 보였다. 요한은 그 선이 손금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보았다. 카메라를 가린 셰어의 손바닥이었다. 얼룩덜룩하게 붉어진 손바닥이 야했다. 손바닥이 붉어질 만큼 열이 오를 때까지 뭘 했길래.

상상을 부추기는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는 건 좋지 않았다. 사진을 넘기는 손짓이 점점 더 빨라졌다.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섹스를 주제로 한 예술 사진처럼 보였다. 직접적인 장면은 하나도 없었다. 은유와 재해석으로 가득한 사진 속 피사체는 모두 한 사람이었다.

하얀 시트를 꽉 움켜쥔 반지를 낀 남자의 손, 어느 부위인지 알 수 없는 피부에 또렷하게 남은 고른 치열, 흐리멍덩하게 열린 짙은 초록색 눈동자만 찍힌 사진, 온통 흔들린 남자의 등,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몹시 기진한 얼굴로 잠든 셰어.

“아, 미친…… 대체 뭘 찍은 거야.”

배꼽 아래가 훅 달아올랐다. 요한은 욕설을 주절거리며 휴대폰을 던졌다. 푹신한 이불 위에 떨어진 휴대폰 화면은 여전히 잠든 셰어의 사진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는 참 예뻤다.

요한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는 다시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젖은 머리칼에 덮인 이마, 살짝 찌푸린 미간, 짙은 눈썹 아래 내리감은 눈두덩은 부어 있었고, 젖은 속눈썹이 가지런한 그림자를 드리운 눈가는 붉었다. 단정하던 입술은 살짝 붓고 찢어져 있었다.

그냥 예뻐서 그랬나 보지. 너무 예뻐서 예술품을 보존하는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모았나 보다. 요한은 자신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때마침 셰어의 메시지가 사진 상단에 떠올랐다.

[곧 퇴근해. 30분 후 도착 예정. 먹고 싶은 건?]

요한은 무뚝뚝한 메시지를 곱씹었다. 이렇게 딱딱한 메시지를 보낸 남자가 사진 속 피사체와 동일 인물이라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문득 장난기가 동했다.

[글쎄우리자기?(가지)(물)]

잔망스러운 이모지가 유난히 음탕해 보였다. 셰어는 뭐라고 할까? 답장은 빨랐다. 요한은 냉큼 메시지를 열어 보고는 금세 실망해서 늘어졌다.

“아, 뭐야. 진짜 재미없어.”

[먹고 싶은 거 없으면 주는 대로 먹어.]

천년의 욕정도 꺼뜨리는 냉랭한 반응이었다.

“주는 대로 먹어?”

요한은 삐딱한 자세로 그의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먹고 싶은 거 없으면 주는 대로 먹어.

물론 먹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요한은 완전히 발기한 제 성기를 옷 위로 꾹 눌렀다. 당연하지만 그런다고 완전히 딱딱해진 물건이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꼴사납게 왜 이러냐…….”

한창때도 아닌데 겨우 주는 대로 먹으라는 메시지에 이렇게까지 바짝 선 게 어이없었다. 요한은 욕실을 힐끔거렸다. 30분이면 샤워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요한이 욕실에서 나왔을 때, 셰어는 이미 병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기에 요한은 조금 당황했다.

“왔어? 생각보다 일찍 왔네.”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을까? 욕실에서 연달아 두 번이나 자위했다. 그러고도 피부 아래를 기어 다니는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마음이 영 착잡했다. 마치 본능을 주체 못 하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상의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요한과 달리 셰어는 오늘도 말쑥한 슈트 차림이었다.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는 얼굴은 깔끔하게 면도되어 수염 자국도 없이 매끈했다. 아무리 봐도 병실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사람 같지 않았다.

“네가 샤워를 오래 한 거겠지.”

셰어가 의미심장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뜨끔했다. 선명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 위로 물기에 젖어 풀어진 눈빛이 겹쳐 보였다.

요한은 그의 뺨으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사진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고작 사진 몇 장 때문에 눈도 마주 보지 못할 만큼 동요할 줄은 몰랐었다. 어느새 요한의 앞까지 다가온 셰어가 습기에 눅눅해진 요한의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걷어 거즈가 붙은 이마를 살폈다.

“상처에 물 닿으면 안 돼.”

호흡이 절로 느려졌다. 셰어는 머리카락만을 살짝 건드렸을 뿐 맨살은 조금도 닿지 않았다. 그가 쓸어 올린 머리칼이 반대 방향으로 스르륵 누웠다. 두피가 찌릿하게 곤두서는 듯했다. 요한은 쪼그라든 폐를 쥐어짜며 웃었다.

“어어, 이러면 나 설레는데.”

머리칼을 쓸어 주던 손길이 느려졌다. 셰어가 속 모를 얼굴로 웃고 있었다.

“요한, 전에도 몇 번 말했지만.”

“으응?”

“너처럼 거짓말 못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숨이 요한의 윗입술을 핥았다. 그가 중얼거렸다.

“정액 냄새 나.”

“어?”

우스꽝스럽게 뒤집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당혹한 표정의 요한을 물끄러미 보던 셰어가 멀찍이 떨어졌다.

“알겠어?”

“아, 어어, 음?”

“거짓말은 이렇게 하는 거야.”

친절하게 거짓말하는 법을 알려 준 셰어가 창가로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무엇을 그리 바라보는 걸까. 요한은 괜히 셰어의 어깨 너머를 흘깃거렸다. 섬세하게 직조된 검은 슈트에 덮인 그의 등 뒤로 오렌지색으로 물든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요한은 묘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의 등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러다 마법처럼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그러나 상상과 달리 기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주홍색에서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기억 없이 또 다른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초조했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건 기억이 없기 때문일까, 셰어가 특별하기 때문일까.

“셰어, 말해 봐.”

“무슨 말을.”

“몰라. 아무거나. 기억이 빨리 돌아올 만한 말.”

셰어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요한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이 태양처럼 반짝였다.

“혼나고 싶어?”

등골이 오싹했다. 요한은 그의 등 뒤로 다가갔다. 좋은 냄새가 난다. 흠결 없는 피부에 덮인 단단한 목덜미에서는 포근한 체취와 섞인 향수 냄새가 다른 곳보다 짙게 풍겼다. 응어리진 마음이 풀어지는 듯했다. 그곳에 코를 박고 깊게 숨을 쉬자 셰어의 어깨가 굳어졌다. 요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흠…… 내가 생각한 건 그거보다 좀 더 로맨틱한 말이었는데. 사랑한다거나.”

길고 늘씬한 손가락이 요한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부드럽게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손길은 흡사 발밑에 엎드린 개를 만지는 듯 무심했으나 다정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손이 생각보다 크네. 방금 알아차린 사실을 기억하려 되새겼다. 자신이 모르는 셰어가 또 얼마나 더 있을까. 곱씹을수록 씁쓸한 맛이 나는 생각이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 기억이 돌아왔을 때?”

셰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이었다.

“매정하다, 자기야. 기억이 없는 나도 네 남편인데.”

요한이 그의 목을 입술로 꾹꾹 누르며 타박했다. 간지러운지 셰어가 고개를 비틀며 요한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손길이 스친 두피가 찌릿찌릿했다. 요한이 그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칭얼거렸다.

“나도 사랑해 줘.”

힘찬 맥박이 뛰는 목덜미는 따뜻하고, 보기보다 부드러웠다. 이를 세워 물었다. 쓰읍, 셰어가 다그치는 소리를 냈다. 우습지만 그가 얌전히 있으라는 듯이 머리를 꾹 누르자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기억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요한은 소망을 담아 중얼거리며 입술을 찍어 눌렀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한가롭게 셰어의 사진을 수집하다, 퇴근한 셰어와 저녁을 먹으며 시시한 잡담을 나누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그 단조로운 일상이 이상할 정도로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요한은 퇴원하는 날이 되고도 병실을 떠난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 이대로 퇴원해도 되나?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는데. 요한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납치당하다시피 떠밀려 요트에 올랐다.

그길로 바다 한가운데로 흘러들어 왔다. 요한은 칵테일 셰이커를 들고 갑판에 선 채 새파란 하늘과 맞닿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감이 없었다. 아침에는 익숙한 병실에서 눈을 떴는데, 지금은 바다 한가운데였다.

새하얀 요트가 잔잔한 물결이 이는 바다를 가로질렀다. 뱃머리가 향하는 수평선에는 수림이 울창한 섬이 동그마니 솟아 있었다. 열대 리조트처럼 완벽하게 꾸며진 인공 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섬의 테두리를 따라 열대 바다 특유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찰랑거렸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자라난 야자수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백사장에는 아담한 선착장이 있었다. 요트 조종석에 앉은 셰어가 갑판으로 통하는 창을 열고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요한을 불렀다.

“요한! 이제 안으로 들어와. 섬 주위는 조류가 제법 세서 위험하다.”

요한은 큼직한 칵테일 셰이커에 담긴 마르가리타를 홀짝이며 손을 흔들었다.

“어어, 알겠어. 조금만 더 보고!”

“저러다 물에 쫄딱 젖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자기야, 다 들리거든.”

요한이 쿵쿵거리며 조종실 안까지 쳐들어왔다. 셰어는 그쪽을 본 체도 하지 않고 앞만 바라보았다. 하얀 티셔츠를 입은 셰어의 어깨 위에 유리창에 묻은 포말의 무늬대로 햇빛이 얼룩져 있었다. 요한은 무심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햇빛에 달구어진 어깨는 생각보다 더 뜨거웠다.

“암초에 처박기 전에 손 떼.”

셰어가 경고했다. 물론 요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우리 같이 죽기엔 좀 이르지 않나? 아직 한 60년은 남은 것 같은데.”

요한이 유들유들하게 지껄이며 칵테일 셰이커를 텀블러 고정대에 내려놓더니, 셰어의 어깨를 꽉꽉 주물렀다. 단단하게 뭉친 어깨가 돌덩이 같았다. 운동을 제대로 한 몸이었다.

요한은 셰어의 어깨를 힘주어 쥐며 상상했다. 그는 무슨 운동을 했을까? 못하는 게 없을 듯한 이미지인데, 왠지 좀 특이한 걸 좋아할 것 같기도 했다. 이를테면 격투기라거나.

셰어가 요한의 손을 떼어 냈다.

“사고 치지 말고 착하게 있어야지.”

“네에. 파킹까지 잘 부탁해요, 선장님.”

Aye, Aye, Captain. 요한이 해적처럼 건들거리며 조종실을 둘러보았다. 잘 관리된 요트의 곳곳에서 주인의 까다로운 취향이 엿보였다. 하얀 선체와 달리 조종실 내부는 고풍스러운 목재로 꾸며져 있어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실제 19세기에 건조한 호화 유람선에 붙어 있던 수동 핸들과 크롬 장식을 그대로 옮겨 온 요트 조종석은 최신 장비로 무장되어 있었다. 요한은 복잡한 버튼과 패널이 붙어 있는 조종석을 흥미롭게 살폈다.

“이 많은 버튼을 어떻게 다 기억해? 난 손도 못 대겠다.”

“해 보고 싶어?”

레버를 조작하던 셰어가 손을 멈추었다. 요트가 속도를 늦추자 출렁거리는 파도가 선체를 느긋하게 흔들었다. 요한은 셰어가 앉은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며 눈을 굴렸다.

요트를 조종해 보고 싶으냐고 하면, 사실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요한은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그것도 차에 국한된 경우였다. 요트에서 보는 풍경은 근사하고 바닷바람은 제법 상쾌했지만, 배에 대한 흥미는 없었다.

“해 보고 싶으면 가르쳐 줄게.”

슬며시 가늘어진 눈으로 웃는 셰어는 보기 좋았다. 에이, 모르겠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데. 요한은 그를 따라 히죽 웃고 말았다.

“좋아. 나도 가르쳐 줘.”

“이리 와.”

셰어가 요한을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그의 무릎에 반쯤 엉덩이를 걸친 요한이 불편하게 허리를 들썩였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보통 덩치도 아니니 꽤나 무거울 텐데, 셰어는 태연하게 요한의 손을 잡아 수동 핸들에 올려놓았다. 요한이 불안정한 자세로 앉아 핸들을 거듭 고쳐 쥐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니, 이건 좀…… 자세가 그렇지 않냐?”

반질반질한 원형 수동 핸들이 땀에 젖은 요한의 손바닥에서 미끄러졌다. 홱 돌아가는 핸들을 셰어가 붙잡았다. 뱃전이 크게 기울었다. 기이익 하고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빠른 유속에 저항하며 선체가 뒤흔들려 유리창이 깨질 듯이 덜컹거렸다.

거친 파도가 일었다. 요트가 꿀렁거리며 가까스로 높은 파도를 뛰어넘었다. 놀이 기구를 타는 듯한 추락감과 함께 요트의 표면이 수면을 때렸다. 흐름을 잘못 탔던 뱃머리가 가까스로 다시 바로 서며 아까 요한이 자리를 잡고 있던 갑판 위까지 바닷물이 세차게 튀었다. 조종실 유리까지 하얀 물거품이 흐트러졌다.

눈이 마주쳤다. 셰어는 뭔가를 참는 얼굴로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굳게 다문 그 예쁜 입술 안에 갇힌 건 차마 뱉지 못할 험악한 말임이 틀림없다. 요한은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질 만큼 세게 핸들을 붙들었다.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방금 우리 한날한시에 갈 뻔한 거 알지. 나 안 할래. 나 못 해.”

“핸들 똑바로 잡아, 요한. 너 때문에 운전을 못 하겠다.”

“네가 운전해! 나 놓는다? 알았지. 나 지금 놓는다?”

손이 겹쳐졌다. 크기가 비슷한 커다란 손들이 함께 핸들을 붙잡았다.

“위험하니까 손 떼지 마.”

땀에 젖어 미끌미끌한 손바닥 안쪽이 간질거렸다. 그 느낌이 두려움을 좀먹었다. 성긴 구멍이 뚫린 이성을 비집고 본능적인 욕구가 솟구쳤다. 맞닿은 피부가 벗겨 내고 싶을 만큼 따가워졌다.

요트가 위아래로 술렁거릴 때마다 요한의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허벅지 안쪽에 부대끼는 셰어의 다리가 단단해져 있었다. 바닷바람에 눅눅해졌던 머리칼이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세일링을 위해 걸친 얇은 옷 너머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에게서는 인공적인 향기가 아닌,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섞인 체향이 묻어났다. 무엇에 대한 그리움인지 모를 향수가 피어올랐다.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그의 몸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맞닿은 허벅지와 팔, 꽉 붙잡은 손까지 야릇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놀라울 만큼 거친 욕구가 끓어올랐다. 얇은 옷을 찢고 그를 조종실 바닥에 깔아 눕히고 싶었다. 손만 자유로웠어도 허튼수작을 걸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그를 가지고 싶었다. 이 배가 어디로 흘러가든, 이후의 계획이 무엇이든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저 본능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요한은 이 화학적인 반응이 뭔지 잘 알았다. 강렬한 끌림이었다. 늘 그랬다. 요한은 첫눈에 반한 상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다.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사랑하고, 시간이 서로의 민낯을 드러내기 전에 이별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특별할 것이다. 셰어는 요한의 법적 배우자였다. 특별하지 않았다면 그와 결혼했을 리가 없다. 요한은 그 특별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잡고 있어야 해?”

“정박할 때까지.”

“들어 봐. 우리는 손이 네 개나 있잖아. 이렇게 하자. 너는 운전을 하고, 난 다른 일을 하는 거야.”

요한의 손가락 사이에 파고든 셰어의 손가락이 꽉 조여들었다. 길쭉하고 잘생긴 손가락이 요한을 꼼짝도 못 하게 옭아맸다.

피식,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요한은 곁눈질로 셰어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사진으로만 보았던 찬란한 얼굴이 고개만 돌리면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거리에 있었다.

“넌 매번 비슷한 수작을 거네.”

셰어는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로 요한의 기억에 없는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닿을 수 없는 과거를 향해 부유했다.

요한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높은 파도에서 추락하는 것처럼 내장이 아래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다. 조류에 휘저어진 배 속이 울렁거렸다. 손을 겹치고 있지 않았더라면 또 한 번 핸들을 놓칠 뻔했다.

기분이 나빴다. 자기 자신을 질투하는 기분은 그저 좆같기만 했다. 이런 기분이 결혼할 만큼 특별한 사랑의 실체인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과거의 자신이 어떤 수작을 걸었든 지금 이 남자와 몸을 맞댈 수 있는 건 지금의 자신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실체가 뭐든 맛을 보면 알게 되겠지. 요한은 몸을 틀어 느슨하게 벌어져 있는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입술은 싱겁게 부딪쳤다. 피하지도, 응하지도 않는 입술은 그저 무감하게 닿아 있기만 했다. 동요하는 기색도 없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얌전히 입술을 내어 준 셰어는 어쩐지 고단해 보였다. 그가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만해. 이러다…….”

요한은 그의 심상한 거절을 삼켰다. 입술이, 생각보다 너무 부드러웠다. 이를 세워 폭신한 아랫입술을 깨물자 이번에는 셰어가 몸을 기울여 입술을 다시 겹쳤다.

쪽, 쪼옥, 입술이 젖은 소리를 내며 마찰했다. 질척거리는 잡념만큼이나 집요한 마찰음은 점점 더 길어졌다. 닿은 것은 입술인데 다른 곳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음…….”

달콤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외모만 취향인 게 아니었다. 날 때부터 맞춰진 것처럼 몸이 너무 잘 맞았다. 입만 맞춰도 머리칼이 곤두설 만큼 성감이 차올랐다. 배꼽 아래에 찰랑거리던 욕망이 서서히 수위를 높였다. 요한의 손에서 핸들이 천천히 미끄러졌다.

“위험하다니까.”

입술을 뗀 셰어가 핸들을 고쳐 잡았다. 어렴풋이 젖어 있던 눈은 몇 번의 깜빡임만으로도 흐려진 총기를 되찾았다. 그러곤 이번에도 틀리는 법 없이 버튼을 눌렀다. 마치 계산이라도 한 것처럼 요트가 선착장에 부드럽게 멈춰 섰다.

요한은 멍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나무로 된 간이 선착장이 놓인 백사장은 입자 고운 모래가 깔려 있었다. 너른 백사장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것은 붉고 커다란 꽃과 야자수였다. 사람 키를 훌쩍 넘는 생동감 넘치는 식물들 너머로 거대한 성이 보였다.

성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건물이었다. 지중해의 신전처럼 열주가 늘어선 긴 복도가 건물을 둘러싸고, 그 뒤로는 화사한 빛깔의 꽃으로 장식된 테라스를 매단 육중한 건물이 커다란 창을 활짝 연 채 흰 천을 나부꼈다.

우뚝 솟은 건물의 중앙 입구는 커다란 유리 돔형의 지붕을 얹었다. 색색의 유리로 꾸며진 돔 지붕이 눈부신 햇살에 반사되어 만화경처럼 찬란한 빛을 뿌렸다.

“마음에 들어?”

“농담해? 마음에 드냐고? 이게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어!”

아름다웠다. 상상만 했던 환상 속 낙원을 현실로 꺼내 온 것처럼 아름다운 섬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셰어는 어느덧 제 무릎에 편하게 엉덩이를 대고 앉은 요한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가볍게 휘두른 손이 뜻밖에 매서웠기에 요한의 엉덩이가 살짝 들썩였다.

“장난은 이쯤 하고 내려야지.”

“변했다, 자기야. 내 키스가 장난이야?”

요한이 말꼬리를 질질 끌며 그의 말을 곱씹었다. 시커먼 심술이 말끝에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여기서 자꾸 귀엽게 굴어 봐. 어떻게 되나.”

셰어가 나긋하게 속삭이며 요한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린아이에게 인사치레하듯 아무런 의미도 없는 입맞춤이었다.

“나 귀여워?”

요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남의 머릿속은 X등급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만 G등급 영화처럼 살포시 뽀뽀하면 다인가. 입을 맞춘 뒤부터 요한은 오로지 그를 확 자빠뜨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셰어는 남의 속도 모르고 요한을 번쩍 들어 제대로 일으켜 세웠다. 그가 패널을 확인한 뒤 요트 엔진을 껐다. 시동이 꺼진 요트는 섬 주변의 거센 조류에 떠밀려 요람처럼 흔들렸다.

요한이 셰어보다 먼저 요트 열쇠를 뽑았다. 언제까지나 평정을 유지할 것 같던 셰어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찌푸린 얼굴을 보니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요한은 샐쭉 웃으며 요트 열쇠를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나 내리기 전에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물결에 흔들리는 배 때문일까. 셰어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렸다.

“애들 장난 말고.”

요한이 간지럽게 그와 손가락을 얽었다. 힘없이 끌려오는 손을 쥐고 흔들며 엄지로 따스하고 건조한 손바닥을 긁었다. 이런 수작이라면 질색할 줄 알았는데, 셰어는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요한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가 물었다.

“나랑 하고 싶어?”

“그런 말 말고, 좀 예쁜 말로 하면 안 돼?”

“나랑 섹스하고 싶어?”

“아니, 그것도 좀…….”

뭐가 이렇게 직설적이지. 새삼 불만을 토로할 자격은 없었다. 그의 직설적인 화법이 더 꼴리는 건 사실이었다. 마음에 들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없었다. 매일 성실하게 병실에 출근 도장을 찍는 것도, 매사 건조한 주제에 뜻 모르게 다정한 것도, 그와 티격태격 다투는 것도 전부 좋았다.

“난 너랑 사랑을 나누고 싶어. 네가 좋아. 매일매일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어.”

파도에 떠밀려 요트의 갑판이 서서히 기울었다. 세상이 기울어지는 것 같았다. 두 다리로 힘껏 버티고 서도, 발 디딘 곳이 기울자 불안하게 몸이 휘청거렸다. 요한은 아슬아슬하게 품 안에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셰어를 잡아당겼다. 두 사람이 한 덩어리처럼 엉켜 달라붙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부족해.”

셰어가 요한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갈퀴 같은 손가락들이 억세게 달라붙었다. 맞닿은 가슴이 크게 울렸다. 요한은 조금 웃었다. 심장이 들지 않은 오른쪽 가슴마저 요란해 사실은 심장이 두 개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셰어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넌 아무것도 몰라. 내가 너를…….”

그는 뒷말을 들려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셰어의 손목에 심장 박동 수를 알리는 시계를 채우고 싶었다. 그러면 이토록 담담한 표정으로 소란스러운 심장을 숨기지는 못할 텐데.

셰어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놓친 기억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낱낱이 그를 파헤치고 싶었다.

“아까워. 내가 모르는 네가 너무 많아서.”

“만일 네가 나를 알아가다가.”

셰어는 버거운 말을 내뱉듯 얕게 숨을 끊어 쉬었다.

“그러다 지금의 네가 나를 원치 않게 되면?”

혼자서 제법 귀여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확신을 못 줬어? 결혼도 했는데 왜 그런 걱정을 해.”

“글쎄,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지. 넌 기억을 잃었으니까.”

사실이지만 불쾌했다. 그 말을 지껄이는 셰어가 유난히 담담해 보였기에 요한은 기분이 더더욱 좋지 않았다. 혼자 고민하면서 무슨 각오를 그렇게 다졌는지, 그는 이별까지도 생각한 듯했다.

요한은 자신의 법적 배우자를 불안에 떨게 하고 싶지 않았다. 부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거니까.

“내기라도 걸까? 난 알아. 난 널 사랑하게 될 거야.”

셰어가 소리 없이 웃었다. 종이꽃처럼 향기 없는 미소였다.

“내기할 필요는 없겠다.”

* * *

내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말은 곧 지금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바뀌는 건 없다. 요한은 셰어를 사랑해야 한다. 셰어는 그 명제가 참이 될 때까지 요한을 이 섬에서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요한은 사람이면 다 좋다고 따르는 개처럼 누구든 좋아했다. 셰어는 언젠가 질투에 눈이 먼 자신이 요한을 가두고 말 거라 예상했다.

사람 한 명쯤은 너끈히 감금할 수 있는 섬을 미리 준비해 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셰어는 함께 이 섬을 방문할 때마다 요한의 취향에 맞게 섬을 뜯어고쳤다. 그를 위해 너무 행복해서 영원히 떠나고 싶지 않은 낙원 같은 섬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꿈에서라도 탈출 생각 같은 건 떠올릴 수도 없게.

그때는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놈을 잡아 두겠다고 이 섬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셰어는 자조했다. 그리고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무엇 때문에 웃었는지를 잊었다. 범람하는 생각들이 붙잡을 새도 없이 흘러갔다. 성긴 그물 같은 의식에 걸리는 것은 말초적인 감각뿐이었다.

창문 덮개를 반쯤 내린 선실은 여전히 환했다. 덮개가 완전히 내려오지 않은 커다란 선실 창문을 통해 햇빛이 쏟아졌다. 요한은 빛에 물들어 금을 뿌린 듯 반짝이는 등에 입술을 댔다. 섬세한 굴곡을 그리는 등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혀를 내밀어 솜털이 올올이 곤두선 등줄기를 핥았다.

입술이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다. 엎드린 셰어의 등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입술이 꼬리뼈 아래로 파고든 순간, 셰어가 끌어안은 베개가 험악하게 쥐어짜졌다. 실밥이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베갯잇 귀퉁이가 뜯어졌다.

요한은 잔뜩 힘이 들어가 좁아진 엉덩이 사이를 쥐어 벌렸다. 한참 핥아 댄 끝에 꿀이라도 바른 것처럼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입구가 붉게 쓸려 있었다. 긴 시간 손가락과 혀를 번갈아 받아들인 구멍은 처음처럼 빠듯하지 않았다.

요한은 혀로 찌르면 찌르는 대로 말랑하게 벌어지는 구멍을 달게 핥았다. 혀가 얕은 곳을 쿡쿡 쑤실 때마다 숨죽인 신음이 베개에 먹혀들었다.

요한은 잠시 입술을 뗀 채 셰어를 달래듯 힘이 들어간 볼기를 주물렀다. 안쪽으로 스며든 타액을 도로 뱉어 내고 있는 밀지가 연방 잘게 떨렸다. 붉게 짓무른 그곳을 물끄러미 보던 요한이 훅 숨을 불었다.

“흐읏…….”

손자국이 얼룩덜룩하게 난 엉덩이가 간지러운 숨을 피해 들썩였다. 그게 꼭 스스로 허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인 탓에 가뜩이나 끊어질 듯 가늘어진 인내심이 바짝 당겨졌다. 요한은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이러면 빨기 힘든데. 자꾸 이렇게 나 힘들게 할 거야?”

가볍게 타박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요한은 몇 초 대답을 기다리다 그저 씩 웃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대답을 들으려고 물은 건 아니었다. 요한은 흠뻑 젖은 구멍에 손가락 두 개를 천천히 밀어 넣으며 물었다.

“가르쳐 줘. 내가 전에도 여기 자주 빨아 줬어?”

“……으, 읏.”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래. 하아……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서, 자주 빨아 줬을 것 같은데. 내가 또 어떻게 해 줬어?”

“윽, 흐읏…….”

“말해 봐.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줄게.”

쿨쩍거리며 들락거리던 손가락이 간격을 벌리며 구멍을 늘리자 낮은 신음이 샜다. 위아래로 가쁘게 들썩이는 등이 위태롭게 떨렸다. 가로로 길게 벌어진 구멍 안쪽은 어둡고 붉었다. 타액이 흘러들어 미약한 윤기마저 머금은 곳이 시선을 끌었다.

요한은 벌린 손가락 사이로 혀를 쑤셨다. 강제로 벌어진 구멍에 물렁한 살점이 파고들자 셰어가 베개에 파묻은 고개를 저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가 울긋불긋했다. 개가 물을 핥아 먹듯 요한의 혀가 위로 둥글게 말리며 경련하는 내벽을 핥았다. 셰어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후윽, 흑, 불안정하게 깔딱거리는 숨이 새어 나왔다.

“음, 흐읍…… 흐, 그, 만, 빨고, 하, 빨리…….”

셰어가 억눌린 목소리로 애원했다. 혀가 간지럽게 안을 핥아 대는 것을 더는 참기 어려웠다. 헐떡이며 몇 마디 말을 쥐어짜는 내내 혀가 닿은 안쪽이 미지근하게 젖었다. 요한이 스스로 젖지 않는 곳을 적시고 있었다.

셰어는 베개에 도로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눈가가 뜨거웠다. 이렇게 온몸이 짓무르도록 물고 빨아 대는 섹스는 셰어가 선호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통제되지 않는 쾌락이 날뛰며 몸을 안쪽부터 망가뜨렸다.

반면 요한은 늘 이런 걸 원했다. 뼛조각도 남지 않을 만큼 눅진하게 녹여 한입에 집어삼키는 정사, 그가 그런 걸 바란다면 거절할 도리가 없다.

셰어는 뜨거운 눈을 깜빡이며 실밥이 뜯겨 나간 베갯잇을 바라보았다. 너덜너덜하게 일어난 베갯잇이 벌어져 허연 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함부로 뜯겨 속을 내보인 베개처럼 온몸의 살갗이 죄 벗겨져 나갈 것 같았다.

요한이 줄곧 핥아 댄 몸은 피부가 한 겹 벗겨진 것처럼 따가웠다. 혀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온몸을 낱낱이 빨리고 나니 미약한 숨만 끼쳐도 진저리가 쳐졌다. 차라리 아주 모질게, 뒤를 제대로 풀지도 않고 박아 대는 게 더 나았다.

셰어가 멍하니 넋을 빼놓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뒤를 벌리던 손가락이 무섭도록 간격을 벌렸다. 살짝 부어오른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잇새로 새려는 신음을 삼키자 요한이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혀의 돌기마저 예민하게 느끼는 속살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흐…….”

희미하게 들린 소리는 분명 웃음소리였다. 민감한 곳으로 입바람이 닿는 바람에 놀란 셰어가 저도 모르게 사지를 바르작거리며 몸을 앞으로 끌었다. 집요하게 뒤따라온 손가락이 깊이 처박혔다.

“흐읏!”

허리에 힘이 빠져 상체가 축 늘어졌다. 그 위로 요한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가 셰어의 둔부를 단단히 움켜쥐고는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짓을 반복했으면서도, 요한은 생전 처음 단것을 맛본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아, 아…… 흣, 으읏…….”

셰어는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가랑이 사이에 달라붙은 남자가 낯설었다. 그가 만지는 방식, 혀를 놀리고 날숨을 뱉는 법까지도 셰어가 알던 요한과는 달랐다. 기억을 잃은 요한은 더 집요했고, 징그러울 만큼 탐욕스럽게 달라붙었다.

기억 상실이 사람을 바꾸어 놓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만일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요한을 영영 잃게 되는 게 아닐까.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낯선 요한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것 같았다.

한참이나 뒤를 핥아 대던 요한이 느릿느릿 손가락을 움직였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말랑말랑하게 녹은 안쪽을 비비며 쑤셔 올렸다. 제대로 삼키지 못한 신음이 새며 뜨거운 호흡이 베개를 눅눅하게 적셨다. 셰어는 섬뜩하게 안을 훑는 감각을 회피하려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흐, 으읍…….”

연약한 곳을 자극 당하자 안쪽이 확 오므라들었다. 요한은 좁아지는 기관을 꾹꾹 밀어 올리며 쑤셔 댔다. 찌걱, 찌걱, 손가락이 심술궂게 큰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셰어의 귀가 터질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꼭 감은 눈꺼풀이 경련했다. 읏, 으읏…… 숨 먹은 신음이 목을 울렸다.

구부러진 손가락의 굴곡이 자극을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몸 안을 샅샅이 긁어 놓았다. 부싯돌이 부딪치는 것처럼 배 속에서 불티가 자글자글 튀었다. 서서히 지펴졌던 사정감이 점차 극렬하게 치밀었다. 셰어는 허리 아래가 허물어지는 듯한 자극을 주입하는 손가락을 피해 허리를 비틀었다.

“흣, 으, 으읏!”

“좋아? 자기야, 여기가, 너무 말랑말랑해.”

“하아, 으, 아니…….”

“아, 안 좋아? 어떡하지. 후우, 난 좋은데.”

요한이 셰어의 등 뒤로 덮치듯 달라붙으며 붉게 멍이 올라오기 시작한 목덜미를 빨았다.

“하아, 아, 파. 아읏…….”

습관적으로 아프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프다고 하면 요한은 얼마나 흥분한 상태든 한결 부드러워지곤 했다. 이제는 잘 속아 주지 않을 때가 더 많았으나, 기억을 잃은 요한에게는 아직 예전의 습성이 남아 있었다. 거칠던 손길이 제법 나긋해졌다.

“아파?”

목덜미를 물던 입질마저 스치듯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변모했다. 셰어는 조금 멍해진 눈을 깜빡였다.

기억을 잃어도 변치 않는 게 있었다. 아프다고 하면 다정해지는 손길은 여전했다. 끝내 물러나지 않는 고약한 구석까지도 똑같았다.

흠뻑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가더니 구렁이처럼 굵은 성기가 엉덩이 사이에 문질러졌다. 묵직한 질량감에 지레 질린 셰어가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요한은 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진작부터 젖어 있던 귀두가 셰어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셰어는 불안하게 눈을 깜빡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언제 삽입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단단해진 성기가 느껴졌다.

그때 쌕쌕 숨을 몰아쉬는 입술이 셰어의 귓바퀴에 달라붙었다. 그는 아프지 않게 귓바퀴를 깨물었다. 어린 짐승이 입질하듯 간지러운 동작이었다. 탁한 숨이 섞인 목소리가 귀를 뜨끈하게 달구었다.

“무서워? 싫으면 안 넣을게.”

쪽. 젖은 입술이 사랑스러운 소리를 냈다. 귀가 축축하게 젖었다.

무서워하기는, 대체 누가 무서워한다고. 셰어는 자꾸만 쪽쪽거리는 입술을 피해 고개를 돌려 요한을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요한은 겁먹은 아이라도 달래듯 다정한 말투로 속삭였다.

“진짜야. 무서워하지 마.”

기억을 잃어도 요한은 변하지 않았다.

“문지르기만 할게. 아, 지금도, 너무 좋아.”

그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셰어의 미간에 균열이 일었다. 절제를 잃은 감정이 날뛰었다. 그를 꽉 틀어쥐고 싶다가도 멍들세라 소중하게 아껴 주고 싶어졌다. 그 간격을 좁히지 못해 찌푸려진 눈에 온기가 고였다.

셰어가 고개를 가까이하자 요한이 살포시 눈을 감았다. 뜨거운 입술이 닿고 단 숨이 스며들었다. 파르르 떨리는 요한의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입 맞추는 내내, 셰어는 그의 붉어진 눈가와 젖은 속눈썹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어떤 순간은 눈을 깜빡이는 찰나도 아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은 사이 덧없이 흘러가 버릴까 봐 두려워 그의 존재를 확인하듯 거듭 이를 세웠다. 얄궂은 심술에 흥분한 요한이 셰어의 입술을 삼켜 버릴 듯 덤벼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요한이 셰어의 눈을 가렸다.

“부끄러우니까 눈은 감아 주라.”

능청스럽게 타이르는 말투가 익숙했다. 요한이었다.

사랑해. 얼결에 흘린 말을 들었는지 요한이 웃었다. 셰어는 그의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해사한 웃음 속에서 티끌만 한 앙금을 발견했다. 발견하기도 어려울 만큼 미세한 감정의 찌꺼기였지만 셰어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직도 종종 꿈에 나오곤 하는 미안해하는 요한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셰어의 악몽에서 장난감 같은 노란 차를 탄 요한은 꼭 지금처럼 미안해하는 얼굴로 셰어를 길가에 남겨 둔 채 멀어져 갔다.

“사랑해.”

요한이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는데.

셰어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럴 것 같아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마음으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을 알기에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으려 했다. 셰어는 생각지도 못한 실수를 저지른 제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런 건 별것도 아니다. 질색하고 달아나려 한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곁에 두려 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쯤이야 최악도 아니었다.

셰어는 손을 뒤로 뻗어 요한의 배 아래를 더듬었다. 한 손으로 쥐기도 버거울 만큼 굵고 뜨거운 성기가 손에 잡혔다. 갑작스레 자지를 붙잡힌 요한이 나직하게 신음했다. 그의 입술을 물어 당기자 아랫입술이 우습게 늘어난 요한이 찌푸린 눈으로 셰어를 바라보았다. 젖은 눈에 드글거리는 욕망이 넘쳐흐를 것처럼 반짝였다. 셰어가 입술을 놓아주며 속삭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 지껄이지 말고 박아.”

손에 쥔 성기가 점점 더 커졌다. 입으로는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느니 지껄였지만 오래 참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셰어는 미끈거리는 액체가 배어 나오는 끝을 후벼 파듯 문질렀다. 요한의 숨이 금세 거칠어졌다.

“으읏…….”

“아무 데나 흘리지 말고 제대로 안에다 싸란 말이야. 알아들어?”

“하, 씨…… 아니, 자기야.”

“내 말이 어려워?”

답을 재촉하듯 성기 뿌리를 꽉 쥐어짜자 요한이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셰어의 등에 달라붙었다. 그러곤 실실 웃으며 셰어의 목덜미에 아양을 부리듯 콧등을 문질렀다.

“네에, 제대로 할게요. 놔주세요. 이러다 진짜 좆 터지겠어.”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가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셰어는 우악스레 쥐었던 성기를 살살 달래듯 어루만지며 젖은 끝을 막무가내로 제 몸에 욱여넣었다. 물러진 살점을 으깨며 안으로 파고드는 단단한 성기가 버거웠다. 한계까지 몸이 벌어지는 고통에 등에 땀이 배어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아, 잠깐만.”

요한이 셰어의 손목을 붙들었다. 가까스로 삽입한 선단이 쑥 빠져나가는 바람에 성기를 꽉 물고 있던 구멍이 엉망으로 헤집어졌다. 셰어는 숨을 죽이며 베개에 도로 고개를 처박았다. 헐떡이는 숨이 울음처럼 튀어나왔다.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말을 듣지 않는 요한을 묶어 놓고 내키는 대로 하고 싶어지려 했다.

“왜, 또…….”

“이러면 다친다니까.”

생각해 주는 말조차 고깝게 들렸다. 이 정도로 다치지 않는다는 것쯤은, 더 거칠게 박아 본 적도 있는 셰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안 다쳐. 해 봐서 알아.”

그때 요한은 찢어질 거라고 울면서도 끝까지 잘만 받아먹었다. 매트리스가 흠뻑 젖도록 질질 싸기까지 했으니 제법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셰어는 그만큼이나 좋아할 자신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끝까지 견딜 생각이었다.

요한의 마음을 잡아 두려면 몸을 섞는 게 가장 빠르다. 셰어는 아직도 요한이 왜 자신을 사랑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한 가지는 알았다. 요한은 매일 죽고 못 살 것처럼 섹스했다. 그렇게 좋아하니까 일단 몸부터 얽히면 그다음은 간단하겠지. 단순한 결론이었다.

“아, 나랑 다 해 봤어?”

요한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물었다.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대뜸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는 통에 셰어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비틀거리며 세웠다. 파들거리는 허벅지 안쪽을 더듬어 올라간 요한의 손이 둔부를 움켜쥐었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요한.”

다급하게 그를 부른 찰나, 한차례 헤집어졌던 곳이 아프게 쓸렸다. 성기 끝에서 배어 나오는 체액을 펴 바르듯 구멍을 문지른 요한이 긴장한 볼기를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우리 자기가 장난이 아니네. 내가 미처 모르고, 어?”

“으읏!”

“재미없게 했다. 그치.”

조금 전 손수 삽입을 시도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칠게 좆이 처박혔다. 침대에 꽉 짓눌린 셰어가 바들바들 떨었다. 흑, 흐윽. 소리가 되지 않은 숨이 흘렀다. 손길이 닿지 않은 곳까지 꿰뚫려 배 안이 욱신거렸다.

끔찍하게 아팠다. 지끈거리는 배는 만지지도 못하고 아래로 손을 뻗어 요한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간지러운 손길에 반응하듯 질긴 근육이 굳어지며 허벅지가 단단하게 뭉쳐졌다. 셰어가 그의 허벅지를 밀어내며 간신히 말을 빚어냈다.

“흑, 아…… 좀 천천, 히.”

“안에 제대로 싸 달라며, 자기야.”

양손으로 볼기를 움켜쥔 요한이 맞물린 곳을 벌리며 성기를 쿡쿡 쑤셔 넣었다. 타액으로만 적신 터라 내장이 안으로 쏠리는 느낌이 생생했다.

“읏! 흑, 흐으…….”

“하아, 좁아. 아직, 반밖에, 안 들어갔는데.”

“아파, 천천히…… 아!”

“해 봤다며, 나랑. 왜, 그때보다 내가, 못해?”

“윽, 아! 아, 으읏! 흑, 읏…….”

욕지기가 치밀 만큼 거칠게 박힌 성기가 안을 얕게 찔러 올리며 벌렸다. 굵은 선단이 비좁은 곳을 빠듯하게 긁어 대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등줄기가 파들거렸다.

요한은 땀에 젖어 매끄러워진 셰어의 다리를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은 여태 벗겨지지 않은 양말에서 멈추었다.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에 손을 대자 셰어가 발을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요한은 그의 발목을 붙잡아 침대에 내리누르며 허리를 맞부딪쳤다. 단번에 깊게 삽입된 성기가 버거운지 셰어의 발끝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으읏…… 안, 돼. 벗기지, 마.”

“아, 왜애. 내가, 후, 여기 박겠다는 것도, 아니고…… 벗기지도 말래, 왜.”

“흐, 하지 말라고, 했…….”

“내가 너무 못해서, 벗기도 싫어?”

심술을 부리듯 안을 퍽퍽 때려 박는 좆이 성급하게 움직였다. 하윽, 흣, 으흑. 제대로 풀리지 않은 곳까지 사정없이 밀어닥치는 통에 폐마저 쥐어짜진 양 우는 소리가 샜다. 셰어는 허물어진 상체를 바로 세울 생각도 못 하고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단단한 몸에 거듭 부딪친 골반이 찌르르하게 울렸다.

아팠다. 막무가내로 처박아 대는 구멍도, 체감상 가슴 아래까지 헤집어진 듯한 몸 안도 정상이 아니었다.

그때 요한이 셰어의 발목을 붙잡아 몸을 반쯤 옆으로 돌려 눕혔다. 빠듯한 곳이 꽉 맞물리며 미처 빠지지 않은 날것의 성기가 안을 긁었다. 눈앞이 까맣게 죽었다가 돌아왔다.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떠는 셰어의 한쪽 다리를 팔뚝에 걸쳐 안으며 요한이 느릿하게 허리를 추켜올렸다. 조금이나마 빠져나갔던 성기가 도로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에 고개가 절로 젖혀졌다. 젖은 머리칼이 등 뒤에 달라붙은 요한의 어깨에 눌려 버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 하으윽…….”

“후, 읏…… 나랑, 자주 안 했어? 왜 이렇게, 처음 하는 것처럼 좁아.”

“하, 아아…… 적당히, 흐, 하고…….”

가물가물하게 흐려진 셰어의 눈가가 붉었다. 요한은 관자놀이까지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그의 얼굴에 입술을 비비며 칭얼거렸다.

“싫은데.”

달군 쇠처럼 뜨거운 손이 허리 아래로 파고들더니 배 위로 기어올랐다. 요한은 얄팍한 살가죽 너머로 뭔가를 움켜쥐듯 짓누르며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귀에다 요한이 속삭였다.

“여기, 안 다물릴 때까지 존나 할 거야.”

오금을 받친 팔뚝이 위로 들리며 삽입이 깊어졌다. 한쪽 다리가 들린 몸 안에 좁고 길게 길이 났다. 그곳을 양심 없이 커다란 성기가 후벼 팔 때마다 허벅지 안쪽이 떨렸다. 긴장으로 조여든 복근을 찢고 성기가 파고드는 것 같았다. 셰어가 할퀴듯 요한의 손등을 쥐어뜯었다. 불뚝거리는 뱃가죽이 징그러웠다.

“놔, 하아, 윽! 흣, 놔. 이렇게, 박지 말고…….”

“으응, 이렇게는 싫어?”

“아아! 읏!”

딱딱한 성기가 물결치는 내벽을 헤치고 끝까지 파고들었다. 가칠한 거웃이 붉게 짓무른 구멍에 문질러졌다. 끝의 끝까지 꿰뚫린 것이다. 한쪽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린 자세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깊게 박힌 성기가 몸 안에서 꿈틀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부풀고 꺼지는 배 안에 든 질량감이 버겁게 느껴졌다. 셰어는 제가 할퀴어 놓은 요한의 손을 붙든 채 고개를 저었다. 악물린 신음이 가느다랗게 새어 나왔다.

“흐읏…….”

가여울 만큼 떨리는 신음이 가냘픈 울음소리 같았다. 요한이 셰어의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꼭 배앓이하는 아이라도 달래는 듯한 동작이었다.

“아프지.”

요한이 나긋하게 속삭였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셰어는 숨을 고르는 것조차 힘들었기에 요한의 손을 놓친 채 축 늘어져 버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흐릿한 시야가 맑아졌다. 요한이 셰어의 눈가에 입술을 붙였다.

“울지 마. 이제 기분 좋게 해 줄게.”

운 적 없다. 이건 그저, 생리적인 눈물이 흐르는 것이다. 항의하고 싶었지만 셰어는 눈썹만 찌푸리고 말았다.

“하아…….”

긴 한숨을 뱉은 찰나, 배를 문질러 주던 손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미끄러졌다. 요한은 제대로 서지 않은 셰어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뒤를 빨리며 그럭저럭 꼿꼿해졌던 성기는 과격한 삽입 탓에 거의 풀이 죽어 있었다. 말랑해진 성기를 가볍게 어루만지자 셰어가 낮게 신음했다.

“후, 읏…….”

“근데 너, 생각보다 되게 크다.”

요한이 속삭였다. 이렇게 들으니 어쩐지 그 말도 쓸 일 없는 물건이 크기만 크다는 조롱처럼 들렸다. 셰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묘해졌다. 요한의 입으로 크다는 얘기가 나올 때는 보통 다른 말이 붙었다. 커서 죽겠다거나, 커서 아프다거나.

“알아.”

“아…… 내가 이 말도 했어?”

무언가 못마땅한 듯한 말투로 중얼거리던 요한이 한 손으로 거머쥐기 빠듯한 자지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던 구멍이 꽉 조여들었다. 그게 제법 아팠는지 요한이 끙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아, 아파. 자기야, 좋은 건 알겠는데…….”

“닥쳐, 흐으읏, 윽…….”

“으응, 많이 힘들었어. 후…… 나도, 좁아서 힘들어.”

부드럽게 애무를 당한 성기는 의지와 관계없이 발기했다. 손에 쥔 살덩이의 경도가 전과 다른 것을 알아차렸는지, 요한이 슬금슬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깊이 박힌 성기가 그새 더 좁아진 안쪽을 얕게 찔러 올렸다. 안에서 꿈틀거리는 성기가 움직일 때마다 젖은 살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아, 아아, 흣…….”

셰어는 멀겋게 뜬 눈을 깜빡이며 신음했다. 괴로웠다. 앞뒤로 자극당한 몸이 안쪽부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요한이 공들여 맞춰 놓은 몸이 그의 손길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완전히 발기한 셰어의 성기에서도 체액이 흘렀다. 촛농처럼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체액이 요한의 손을 적셨다.

좆을 쥐어짤 때마다 몸 안이 덩달아 움찔거리며 삽입된 성기를 빨아들였다. 안에 제 체액을 펴 바르듯 얕게 움직이던 요한의 성기가 갑자기 퍽퍽 치받아 대기 시작했다.

“아, 미치겠네. 그냥 막, 하고 싶어. 하아, 씨, 좋아…….”

“아니, 아, 으읏!”

안쪽이 눅진하게 젖었다. 선액이 내벽을 적시며 거친 삽입을 돕고 있었다. 요한은 윤활유라도 바른 것처럼 부드러워진 내벽을 함부로 헤집었다. 예민한 곳이 마구잡이로 긁혔다. 망막을 희게 태우는 자극에 몸이 떨렸다.

버거웠다. 이토록 눈이 돌아 있는 요한과 한 적은 오랜만이었기에 쉽게 감당이 되지 않았다. 아래는 허물어질 것처럼 욱신거리고, 힘 조절하는 법도 잊은 요한에게 꽉 붙잡힌 성기도 아팠다. 셰어는 그의 손을 겹쳐 쥔 채 느리게 허리를 움직여 돌진밖에 모르는 성기를 피했다. 한결 얕아진 삽입 덕분에 가까스로 숨이 트였다.

“숨 막, 흣, 숨 막혀. 하아…… 아! 좀, 살살…….”

“아…… 왜 이렇게, 예쁘게 굴어.”

요한이 씩씩거리는 숨을 몰아쉬며 셰어를 침대에 엎어뜨렸다. 대뜸 성기가 반 넘게 빠져나가는 바람에 엎드린 등이 바짝 곤두섰다. 붉게 쓸리고 부은 구멍이 성기를 물며 불룩하게 딸려 왔다. 그러나 끝내 버티지 못하고 젖은 살 기둥을 뱉어 낸 곳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오므라들었다.

흐윽, 셰어가 바르르 떨며 진저리를 쳤다. 요한은 땀에 젖은 셰어의 목덜미를 걸신들린 것처럼 물고 빨아 댔다. 벌겋게 피멍이 올라온 살결이 금세 울긋불긋해졌다. 그가 무슨 짓을 하든 셰어는 침대에 뺨을 댄 채 정신을 못 차렸다. 아예 남의 혼을 빼놓기로 작정한 것처럼 요한이 셰어를 찍어 눌렀다.

물리고, 빨리고, 박혔다. 한 가지로 구분하기 어려운 행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이어졌다. 요한이 움직일 때마다 침대가 거칠게 흔들렸다. 진동하는 매트리스에 짓눌린 성기가 묽은 선액을 질질 흘렸다. 벌어진 입술에서 의미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좋아? 후, 읏…… 진짜, 내가 좋아?”

요한이 이를 세워 살가죽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밑으로는 마구 처박아 대며 이를 세워 깨무는 통에 짐승에게 사냥이라도 당하는 듯했다. 셰어는 요한에게 목덜미가 눌려 엎드린 채 끅끅거리며 신음했다.

“으, 흐읏…… 조, 흐으…… 윽! 좋, 아, 아아!”

더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요한은 셰어의 온몸을 잡히는 대로 주무르고, 입이 닿는 대로 빨았다. 그는 바르작거리는 몸을 품에 가두며 끝도 없이 취했다.

셰어는 자신이 박히면서 사정하는 줄도 몰랐다. 울컥 터져 나온 정액이 시트를 흠뻑 적셨다. 섬세한 굴곡이 진 등이 덜덜 떨렸다. 그 아래 동그랗게 올라붙은 엉덩이가 반복된 마찰에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투명한 체액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 둥근 둔덕 사이는 그보다 더 붉었다.

요한의 시선은 그곳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퍽, 퍽, 질척한 마찰음과 함께 두꺼운 좆이 안타까울 만큼 벌어진 구멍을 헤집었다. 주름 하나 없이 늘어난 곳이 한참 빨린 입술처럼 붉게 젖어 있었다. 요한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혀로 입안을 쓸었다. 감각이 둔했다. 신경이 죄다 허리 아래로 쏠린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생겨 먹어서…….”

“하, 흐으…… 읏, 으응…….”

“이제 어쩌지, 자기야. 우리, 배에서 못 내리겠다. 하, 여기서 살까?”

끼익, 끽, 끼익. 매트리스 스프링이 꺼질 것처럼 비명을 질러 댔다. 셰어는 그 소리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한은 도무지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가 어디가 고장 난 것처럼 달려드는 동안 셰어는 싸고, 발기하고, 사정하지 못한 채 절정을 닮은 감각을 견뎠다. 전신의 근육이 태엽 풀린 장난감처럼 게게 풀어져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요한은 흐느적거리는 셰어를 침대에 찍어 눌렀다. 그러나 격렬한 삽입에 떠밀린 몸은 계속 위로 밀리기만 했다.

결국 축 늘어진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셰어는 힘없이 요한의 품으로 끌려갔다. 그에게 기댄 채 바로 앉은 몸이 아래로 가라앉으며 벌겋게 성이 난 자지를 집어삼켰다. 양옆으로 벌어진 다리가 오므려지지 않았다. 홧홧하게 열이 번진 배 속까지 묵직해지는 감각에 압도당해 셰어는 헐떡이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아…… 흣, 빨리, 안에 싸.”

“하아, 우리 자기가,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요한이 셰어의 한쪽 오금을 팔뚝으로 받쳐 들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를 사정하게만 할 수 있다면 셰어는 더한 말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뱉기도 전에 요한의 손가락이 입안을 채웠다. 찝찔하고 비린 맛이 나는 손가락이 셰어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눌렀다. 구음을 흉내 내듯 목구멍까지 들쑤실 기세로 파고든 손가락이 뻐근하게 입을 벌리게 했다.

“혀 깨물까 봐.”

요한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이어진 행위는 조금도 친절하지 않았다.

“욱, 으읏, 흑…… 흐, 읏!”

요한의 위에 올라앉은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한쪽이 높게 쳐들린 다리 때문에 삽입은 깊고 과격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과 함께 타액이 흘렀다. 거칠게 흔들리는 중에 거듭 목구멍을 찔려 구역이 치밀었다. 얄팍한 복부가 토기를 억누르려 들썩였다. 위와 아래가 동시에 좁아지자 요한이 셰어의 매끄러운 혀를 비비며 웃었다.

“아, 어딜, 박아도, 조이는데. 흣, 너무, 좋아서 이래?”

허튼소리가 과했다. 셰어가 요한의 손가락을 확 잘라 먹을 요량으로 냅다 물어뜯었다. 그러자 장기를 밀어 올리며 깊숙하게 들어온 성기가 내장을 제 모양대로 벌리듯 안을 뭉근하게 휘저으며 들쑤셨다. 눈이 풀리고 턱에서 절로 힘이 빠졌다. 그대로 퍼억, 퍽, 쳐올릴 때마다 셰어의 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요한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셰어의 귀를 물고 빨며 신음했다.

“아아, 좋아. 나는, 너무 좋아. 으읏…….”

박힐 때마다 몽둥이처럼 크게 흔들리던 셰어의 성기가 또다시 왈칵 정액을 터트렸다. 박히며 사정하는 바람에 날씬한 배가 희뿌연 막을 씌운 것처럼 흠뻑 젖었다.

“흐으읏…… 아, 아아…….”

안쪽을 눌릴 때마다 방광을 쥐어짜는 듯한 자극이 가혹하게 증폭되었다. 사정이 끝난 것 같은데도 아직 더 흘릴 게 남은 것처럼 요도가 따끔거렸다. 온몸이 날 선 것처럼 예민해졌다. 그러나 아래에서부터 치받아 대는 성기는 여전히 단단하기만 했다. 멈출 새도 없이 깊이 후벼 파일 때마다 셰어가 발버둥을 치며 흐느꼈다.

그러나 요한이 수그러드는 기색은 없었다. 그는 희뿌연 체액을 여태 질질 흘리는 셰어의 성기를 무섭도록 집중한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목표물을 향해 달려가기 직전의 사냥개처럼 선명해진 동공이 셰어를 노렸다.

삽입은 한계도 없이 거칠어지기만 했다. 잡스러운 음담패설이나마 늘어놓던 요한은 말이 없어졌다. 엉망으로 갈라지는 셰어의 신음과 삐걱거리는 침대 스프링 소리만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셰어는 제 입에서 튀어나오는 소리를 듣기가 힘들어 요한의 손가락을 힘없이 물었다. 이제 신음이라 하기도 뭣한 짐승 울음 같은 앓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묽은 체액을 흘리던 성기마저 더는 무리라는 듯이 불긋하게 달아오른 채 아무것도 싸지 못했다. 사지가 떨린다. 괴팍한 자극이 몸을 망치고 있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달아날 수 없었다.

정사가 끝나지 않았다. 배 안이 뜨거웠다. 두꺼운 성기가 열이 기어가는 내장을 긁어 댈 때마다 쾌감의 바닥까지 파헤쳐지는 듯했다. 머리가 둔해지는 듯한, 인간성을 상실하는 순간이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우, 흑, 흐으…….”

뻣뻣하게 굳은 채 떨던 셰어가 미간을 왈칵 구기며 요한에게 몸을 기댔다. 흑, 울음 같은 숨소리를 뱉자 몹시 당황한 요한이 얼결에 그의 입안을 쑤시던 손가락을 뺐다. 손가락이 빠져나가자 타액에 젖은 입술이 떨렸다.

“흐…… 으읏…….”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요한은 황망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 어어…… 아, 씨, 하아…….”

그때 요한이 셰어를 꽉 끌어안았다. 갈비뼈가 아리도록 억세게 끌어안긴 순간, 무작스럽게 좁아진 뒤가 안쪽부터 젖었다. 마찰로 달아오른 곳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배꼽 위까지 파고들던 딱딱한 성기마저 물렁물렁하게 변해 눅눅하게 녹아내린 내장이 흐늘거리는 듯했다. 셰어는 혼곤한 눈을 깜빡이며 요한이 제 안에 사정한 것을 느꼈다.

요한이 나른한 숨을 흘리며 셰어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 안에 흩뿌려진 제 씨물을 더듬어 보는 듯했다. 그에 반응한 셰어의 복부가 움찔거렸다.

“아, 좋아서 싸기 싫었는데.”

“개소리.”

셰어는 형편없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친 나머지 나붓이 기울어진 속눈썹이 젖어 있었다. 요한은 땀과 눈물에 젖어 촉촉해 보이는 그의 뺨과 눈가를 쪽쪽 빨았다.

“힘들었어? 미안해. 맛있어서 그랬어.”

눈을 가늘게 뜬 셰어가 그를 노려보았다.

“더러워. 짠맛 나는 입에는, 절대 키스 안 할…… 읏.”

경고가 오히려 요한을 도발한 격이 되었다. 짠맛이 나는 혀가 입안으로 쑥 밀려들어 왔다. 셰어는 그의 혀를 깨물며 요한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러나 매끄러운 머리카락은 힘 빠진 손가락 사이로 셰어를 약 올리듯 빠져나갔다.

셰어는 빨판처럼 달라붙는 입술에 온 신경을 쓰느라 요한의 손이 발목을 더듬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순식간에 양말이 벗겨지고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진 화상 흉터가 남은 발이 드러났다.

입술이 떨어졌다. 양말을 벗지 않겠다고 고집한 이유가 이런 것일 줄은 몰랐는지, 요한의 낯빛이 오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셰어는 그의 눈동자가 크게 떨리는 것을 낭패감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요한의 파랗게 퍼진 홍채가 물에 비친 달처럼 울렁거렸다.

또 그 얼굴이다. 미안해하는 얼굴. 역린을 건드린 죄책감에 젖어 요한이 어쩔 줄을 몰라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무척이나 미안해했다. 셰어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갈라진 목소리가 깔끄럽게 흩어졌다. 셰어는 목을 가다듬고 뒷말을 덧붙였다.

“예전에…… 별것도 아닌 사고였으니까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지우고 싶은 과오였다. 셰어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렸던 과거를 제 입으로 낱낱이 읊어 주고 싶지 않았다. 과거 요한은 그런 취급을 한 셰어를 한 번 용서했지만, 기억을 잃은 요한이 이번에도 관대하게 셰어를 용서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영원히 숨길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가 좀 더 깊은 마음을 품게 될 때까지는 숨겨야 했다. 진실을 알게 되더라도 달아날 마음은 들지 않도록.

“깊게 생각하지 마.”

“아냐. 그래도 미안해. 벗기 싫다고 한 게 이런 이유 때문인 줄은…….”

셰어가 어물거리는 요한의 입술을 가볍게 제 입술로 찍어 눌렀다.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뒤에 박혀 있던 무른 성기가 바로 딱딱해졌다. 셰어는 눈썹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줄곧 거칠게 박힌 탓에 배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요한은 늘 발정 난 것처럼 구는 것마저 여전했다.

“미안하면 잘 좀 해.”

“어? 어어, 당연하지. 앞으로는 내가 잘할…….”

“아니, 말고.”

요한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짐작한 의미가 맞는지 묻는 듯한 시선이 셰어를 향했다. 그가 순진한 척 눈을 깜빡였다. 안에다 흥건하게 싼 정액이 도로 흘러나올 만큼 발기한 주제에 순진한 척을 하고 있었다.

엉큼한 게.

“뭐 해? 눕혀.”

한마디 던지기가 무섭게 요한이 셰어를 침대에 찍어 눌렀다. 그 다급한 몸짓에 셰어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때마다 배가 울렸다. 그것이 다른 곳을 자극했는지 요한의 숨이 거칠어졌다. 셰어는 요한을 사지로 옭아매며 그의 정제되지 않은 숨을 삼켰다.

어서, 더 많이 가져야 한다. 생각할 틈을 주면 허튼짓할 게 뻔하니 잠깐이라도 틈을 주면 안 된다. 헤어지자는 말 따위는 두 번 다시 못 하게.

* * *

요한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겁에 질린 듯 긴장한 뺨은 뻣뻣하게 굳어져 있고 떨리는 눈동자 속에는 날카롭게 벼려진 불안이 뾰족하게 곤두서 있다. 낯설었다. 자신 같지 않은 자신이 어두운 곳에서 홀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차가운 공간에서 빛을 내는 광원은 네모난 휴대폰 화면이다. 요한은 울렁거리는 글자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았다. 몇 글자 되지 않는 메시지는 물에 번진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지?

무슨 의미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심장이 크게 울렁거렸다. 잘은 몰라도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분노, 배신감, 슬픔, 좌절. 의미 모를 감정이 피어올랐다. 요한은 어둠 속에 울리는 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지?

왜 이렇게…….

방황하던 손이 문고리를 붙잡았다. 요한은 불현듯 모든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욕실이다. 그리고 이 문을 열면 배신자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곳에 있을 리 없는 남자가 화난 얼굴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요한.”

차가운 손가락이 목덜미를 기어 다녔다. 요한은 소스라치게 놀라 펄떡거리며 눈을 떴다.

“그만 자고 일어나.”

배신자가 꿈에서와 달리 심술궂게 웃었다. 얇은 남색 셔츠를 입은 셰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차이나 칼라 셔츠가 미처 가리지 못한 목 위까지 붉은 울혈이 찍혀 있었다. 주인이 있는 물건이라고 도장이라도 찍어 둔 것 같았다.

“욕실 앞에 걸어 둔 옷 입어. 네 목이 더 심하니까.”

셰어가 셔츠 깃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무심코 그곳을 빤히 쳐다보던 요한이 그제야 잠기운이 가신 눈을 깜빡였다.

전부 꿈이었다. 그 기분 나쁜 절망감과 분노도 없던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저 꿈일 뿐이지만 배신감은 생생했다. 그런 감정을 안겨 준 사람과 자신이 결혼할 리가 없지 않은가.

허우적거리며 얇은 이불을 젖히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를 가득 채운 정사의 흔적이 훤히 드러났다. 손자국, 잇자국, 시퍼렇게 멍이 든 울혈과 손톱자국마저 찍힌 몸은 거의 한차례 폭행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제 몸을 쓸어내렸다.

“목만? 우리 자기가 보기보다 참 거칠어. 남편 몸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말이야. 이거 다 가리려면 뭘 입어야 하나.”

“진짜 다 가리고 다니게 해 줘?”

“좀 봐주라.”

짐짓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처량하게 큰 눈을 뜨자 셰어가 불만스럽게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렇게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슬쩍 다가와 침대 한쪽에 걸터앉는 게 귀여워 보였다. 요한은 셰어의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얄팍한 배에 얼굴을 마구 비볐다. 얇고 까칠한 섬유의 질감이 피부를 기분 좋게 스쳤다.

셰어는 마구 흐트러진 요한의 머리칼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는 어느새 심술 한 점 보이지 않는 얼굴로 흐릿하게 웃고 있었다.

가만 보면 사람 마음 참 간질간질하게 웃는단 말이야. 원래 이런 식인가? 요한은 그의 웃는 얼굴을 몰래 훔쳐보며 생각했다. 그가 다른 곳에서는 조금 덜 웃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욕심을 내보자면, 자신에게만 많이 웃어 줬으면 했다. 요한은 코앞에 보이는 그의 자그마한 셔츠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나 좋은 생각이 있어.”

“아침부터 헛소리할 생각 말고 욕실로 가.”

“아니, 들어 보라니까.”

“뭔데.”

셰어가 반쯤 포기한 투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할지 뻔하지만 어디 들어나 보자는 식이었다.

“침실에서 안 나가면 되잖아. 그럼 아무도 네가 이런 몸인 걸 모를 텐데.”

그새 셔츠 단추를 절반가량 풀어 헤친 요한이 맨살에 코를 비비며 웃었다. 슬쩍 셔츠를 들추자 날씬한 허리에 얼룩덜룩한 손자국이 남은 게 보였다.

요한은 뿌듯하게 웃으며 셰어의 배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날씬한 배에 두드러진 복근이 움찔거렸다. 이쯤이었던가. 같이 샤워할 때 셰어가 그랬었다. 여기까지 헤집어져서 하고 난 뒤에도 누르면 아프다고. 그걸 또 확인해 보겠다고 욕실에서 붙어먹은 게 어제의 일이었다.

이 섬에 온 후로 요한은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한 생활 중이었다. 최소한의 고용인들을 제외하고는 단둘뿐인 섬이었다. 인터넷과 위성 전화는 셰어가 일하는 서재에서만 터지니 요한이 남는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은 별것 없었다. 명목은 요양이었으나 실제로 하는 일이라곤 먹으면서 섹스하고, 자고 일어나 섹스하고, 눈 마주칠 때마다 섹스하는 것뿐이었다.

도통 지치지 않는 요한의 페이스에 맞춰 주는 게 힘들었는지, 셰어는 요한의 서재 출입을 금했다. 그는 하루에 몇 시간씩은 서재에 틀어박혀 일만 했으니 사실상 금욕 조치나 다름없었다.

“일하러 가지 마, 응?”

요한이 달콤하게 꼬드겼다. 매일 아침 서재로 출근하는 셰어를 꾀어 부추기는 게 요한의 주된 아침 일과였다. 승률은 낮은 편이었지만 몇 차례의 승리는 달콤했다.

엊그제만 해도 기어코 가야 한다는 셰어를 달래 도로 침대에 눕혔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한 하얀 셔츠와 얇은 슬랙스, 금욕적인 옷차림이 마음에 들어 옷도 다 벗기지 않고 그를 안았다. 빳빳한 셔츠가 주름지고 흐트러지는 게 꼴렸다. 그날 요한은 해가 기울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기에, 셰어는 어제 종일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요한은 셰어의 차이나 칼라 셔츠를 훑어보았다. 가끔은 그가, 단정하게 입은 게 더 야릇해 보이는 줄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별다른 생각 없이 담담하기만 한 얼굴을 보면 음란한 상상에 빠져 있는 이는 요한 자신뿐인 듯했다.

“혼자 있으면 너무 쓸쓸해. 나 혼자 두지 마.”

잠깐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짐승처럼 아래가 빠듯하게 당겨 왔다. 하고 싶었다. 원래 이렇게까지 밝히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셰어와 있으면 그런 생각만 들었다.

이 몸이 문제였다. 셰어는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배꼽마저도 정성껏 빚어 놓은 양 보기 좋았다. 그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저 몸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들고 싶어 폭력적인 성욕이 치밀었다.

요한은 실팍한 근육이 촘촘하게 붙은 배를 물고 빨았다. 간지러운 장난 같은 입질에 그가 방심한 틈을 노려 우묵한 배꼽까지 혀로 쑤셨다. 그러자 각오한 대로 단번에 머리채를 붙들렸다.

“으응? 왜?”

요한이 순진한 척 눈을 깜빡였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셰어의 눈썹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착하게 굴어. 자꾸 버릇없게 덤비면 안 되지.”

셰어가 요한의 머리칼을 쥐고 흔들며 상냥하게 타일렀다. 부드러운 말투와 달리 손마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머리칼이 완급을 조절하며 당겨지는 느낌이 오싹했다. 요한은 그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끙끙 앓았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가끔 셰어가 거칠게 굴 때마다 조금 무섭고 많이 꼴렸다.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취향이 생긴 것 같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착하게 있을게요.”

“그래,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셰어는 세게 움켜쥔 탓에 우습게 뻗친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짧게 다듬어진 손톱이 가볍게 두피를 스쳤다. 그가 요한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 놓아주었다.

아, 이번에는 진짜 위험하다.

요한은 허리 아래까지 미끄러진 이불을 끌어 올려 두둑해진 앞섶을 슬쩍 가렸다. 한 것도 없는데 성이 난 물건이 민망했다. 열심히 꼬물거리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던 셰어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착하게 있으면 다녀와서 실컷 예뻐해 줄게.”

“진짜? 어디를, 얼마나, 어떻게 예뻐해 줄 건데…….”

셰어는 대답도 해 주지 않고 옷차림을 가다듬은 뒤 유유히 침실을 떠났다.

“자기야, 그냥 지금 예뻐해 주면 안 돼?”

요한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침실 문이 닫혔다. 요한의 입매가 축 내려갔다.

“와, 매정하다, 매정해. 세상 이렇게 매정할 수가 없다. 일이란 일은 혼자 다 하나.”

요한은 인기척 없는 문을 한 번 힐끔거리고는 몸을 굴려 돌아누웠다. 그러곤 이불을 고치처럼 돌돌 말고 등을 둥글게 구부렸다.

풀썩거린 탓에 이불에 묻어 있던 셰어의 향기가 먼지와 함께 공중을 떠돌았다. 요한의 취향과 동떨어진 묵직한 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잠깐 뾰족해졌던 마음이 줏대 없이 녹아내렸다.

“뭐어…… 그럴 수도 있지. 사람이, 일이 많은 걸 어떡해…….”

심술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생각하다 보니 몸도 좋지 않을 텐데 꾸역꾸역 일해야 하는 셰어가 가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적당히 할 걸 그랬다. 요한은 어울리지 않게 조금 후회했다.

안타깝게도 바쁜 셰어와 달리 요한은 할 일이 없었다. 요한은 햇빛이 쏟아지는 침대에 누워 나른하게 졸다가 느지막이 일어났다. 오전에는 상주 중인 의사가 방문해 상처를 돌보았으나, 그 뒤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졸다 깨다 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고용인인 마리아가 방문을 두드렸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

마리아가 이국적인 억양이 강한 말투로 말하며 바퀴가 달린 테이블을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영어가 서툴렀기에 짧은 단어로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낯도 많이 가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심심했던 요한은 끈질기게 마리아에게 말을 걸곤 했다.

덕분에 요한은 마리아가 과테말라에서 온 이민자이며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방언이 심한 마리아의 스페인어는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요한은 심심했고, 시간도 많았다.

요한은 식탁을 소담하게 장식한 거대한 붉은 꽃송이를 집어 들었다. 노란 꽃술에서부터 청량한 향기가 퍼졌다.

<예쁘다, 마리아. 너 또한.>

<너처럼 예쁘다, 마리아.>

요한이 어설프게 스페인어로 말을 걸자 마리아가 틀린 부분을 고쳐 주었다. 그녀는 간지러운 말에도 얼굴 하나 붉히지 않고 태연하게 뜨거운 커피를 잔에 따라 주었다. 요한은 박수까지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선생님.>

<내 동생을 가르치는 게 더 쉬운 것 같아. 전에도 말했지. 그 애는 5살인데 말하는 건 어른이 따로 없다니까. 5살짜리가 보는 책이라도 가져다줄까?>

말이 무척 빨랐기에 요한은 반도 채 알아듣지 못했다.

<동생은 5살?>

<맞아.>

<나는 스물…… 아니, 서른…….>

몇 살이더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아직도 나이 앞자리가 3으로 시작한다는 게 이상했다.

<관둬. 숫자는 천천히 가르쳐 줄 테니 식사부터 하도록 해. 아팠다더니 그새 가르쳐 준 걸 다 까먹었네. 어느 세월에 다시 전부 가르치나 몰라. 요한, 오늘은 카를로가 게 요리를 했어. 살은 다 발라 두었으니 이 소스를 함께 곁들여 먹는 거야. 알았지?>

아무래도 마리아는 요한이 숫자를 잘 모른다고 생각한 게 틀림없다. 그녀는 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한 어투로 말하며 소스와 스푼을 손짓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몰라도 요한은 대충 그 의미를 이해했다. 게 요리에 소스를 뿌려 먹으면 맛있다는 뜻 같았다.

<내 친구 최고.>

<에이, 친구 얘기는 그만둬. 고용주한테 들키면 혼나.>

가장 자신 있는 말을 하자 마리아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몰라도 기분은 좋아 보였다.

덕분에 요한도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리 지상 낙원 같은 섬이라도 혼자 노는 건 심심하고 외로웠다. 그렇다고 셰어에게 마냥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 남자가 요한의 건강을 위해 여기까지 와서 모든 걸 맞춰 주고 있으니, 그에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남자처럼 보이고 싶었다. 물론 거기에는 출근하지 말고 종일 침대에서 뒹굴자고 조르는 건 포함되지 않았다.

밤낮으로 쏟은 기력을 보충하기 위함인지 식탁 위에 오른 음식들은 유난히 풍성했다. 신선한 해물과 과일을 위주로 구성된 메뉴가 아침치고는 과했다.

요한은 마리아와 음식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한 사람은 침대에 걸터앉았고, 한 사람은 테이블 옆에 멀거니 서 있었지만, 로봇처럼 뻣뻣하던 처음에 비하면 이것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렇게 침대에만 있으면 건강에 해롭다는 거야. 바다에 나가서 놀기도 하고 그래야지. 햇빛을 받아야 뼈가 튼튼해져. 미국인답게 태닝도 좀 하고.>

<네, 네.>

<고용주 말로는 네가 다쳐서 침실에만 있어야 한다는데, 내가 보기에 넌 멀쩡해 보여. 나 참. 절대 말도 걸지 말고, 침실에서도 못 나오게 하라는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그건 꼭 감금 같잖아.>

<네에.>

<뭐? 감금이라고? 하하, 내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었어?>

<네, 네.>

초반의 낯가림이 사라진 마리아는 아주 수다스럽고 말이 빨랐다. 요한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껄껄 웃으며 떠들어 댔다.

<어쨌든 계속 방에만 있으면 몸이 더 안 좋아질 거야. 네가 쓰던 서핑 보드가 아직 그대로 있어. 몸이 괜찮으면 그거라도 가져다줄까?>

요한은 그녀가 한 말 중 ‘해’와 ‘미국인’, ‘서핑 보드’만을 알아들었다.

“서핑 보드? 여기 서핑 보드도 있어? 나 서핑 진짜 좋아하는데.”

<서핑 보드 얘기가 나오니 이렇게 좋아하네. 알아. 너 서핑 좋아하는 거.>

“진짜 있어? 내가 서핑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지?”

<하하, 이 섬에서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어? 요한은 올 때마다 아보카도 껍질처럼 까맣게 그을릴 때까지 바다에서 안 나오는데. 그럴 줄 알고 미리 다 준비해 뒀다고.>

신이 난 요한보다 더 들뜬 마리아가 아주 빠르게 떠들어 댔다. 요한은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뭐? 모르겠다. 너무나도 빠른, 천천히 말해 주십시오.>

<아니, 아니.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해.>

마리아는 손을 내저으며 요한의 커피 잔에 커피를 더 따라 주었다.

그러나 모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서핑하고 싶다는 말을 전달받은 의사가 득달같이 달려와 요한을 말렸다. 아직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는데 바닷물이 닿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모처럼 바깥 활동을 한다는 생각에 잠시 들떴던 요한은 이내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미안해. 내가 괜한 얘기를 꺼내서…….>

먼저 서핑 얘기를 꺼낸 마리아는 몹시 미안해했다.

<요한, 대신에 다른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얘기해. 넌 내 친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들어줄게.>

<내 친구?>

요한은 우울해하던 것도 잊었다. 친구가 되는 데는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더니, 며칠 사이에 좋은 친구를 새로 사귄 것 같았다. 요한의 친구 마리아는 까만 눈을 빛내며 충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그제야 씩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 친구 마리아.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 * *

서재는 임시 사무실이 되었다. 급하게 공수해 온 화상 회의 장비가 완벽한 휴식을 위해 꾸며진 공간을 침범했다. 요한과 함께 카펫에 드러누워 영화를 보던 공간은 이제 완연한 일터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다지 달가운 변화는 아니었다.

셰어는 밀려드는 피로감을 감추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화상으로 연결된 화면 속, 벳시가 물었다.

- 저희 대표님은 언제쯤 돌아오실까요?

그 답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셰어는 잠시 침묵했다.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은 것을 벳시가 물으니 순간 대답할 말이 없었다.

요한이 언제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의사가 말하길, 기억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10년 후든, 20년 후든……. 하지만 기약도 없는 일을 기다리고 있자니 이제는 자신이 바라는 게 기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요한을 기다리는 V Pictures 사람들에게는 그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 셰어는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나도 신이 아니니 정확히 언제쯤이면 다 나을 거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의사 말로는 영화 촬영이 끝나기 전에는 복귀할 수 있을 거라더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마의 상처는 그때까지 다 나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요한의 기억 상실증은 그때까지 회복이 될지 모르겠지만.

- 아, 정말 다행이네요.

벳시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조금 웃어 보였다. 일 얘기를 할 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표정이었다. 과연 요한의 주위에는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항상 많았다. 그러니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셰어 자신이 아니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셰어는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V Pictures의 현황을 보고받기 위해 할당해 놓은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남았다. 그나마 요한의 부재를 다른 경영진들이 채우고 있기에 간단한 보고만으로도 V Pictures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재택근무도 쉽지 않았다. BNB 그룹의 일만 해도 만만치 않은데 V Pictures의 일까지 맞물리자 식사하는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려웠다. 그 때문에 커피 몇 잔으로 오전부터 저녁까지 버틴 적도 부지기수였다. 새벽에 잠이 깨면 서재로 넘어와 일을 처리하고 다시 잠들기도 했다.

피곤했다. 하지만 요한과 시간을 보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정리하도록 하죠.”

-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오후 6시, 벳시와의 화상 회의를 끝으로 하루의 업무가 일단락되었다. 물론 이 순간에도 업무는 계속 메일함에 쌓이고 있겠지만, 이제 침실로 돌아가야 했다. 오늘도 출근하지 말고 같이 놀자고 칭얼거리던 요한이 눈에 선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섬에서의 생활은 아홉 가지가 나쁘고 딱 한 가지만 좋았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가 힘들고, 몸은 고되고, 마음은 불안했다. 습하고 짭조름한 공기도, 새벽이면 잠을 깨우는 파도 소리도 거슬렸다. 하지만 요한이 항상 가까이 있기에, 그것 하나만으로 모든 단점을 감수할 수 있었다.

셰어는 열주가 늘어선 복도를 느릿느릿 걸었다. 오늘따라 노을이 예뻤다.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을 걷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해가 지는 바다는 무척 아름다웠다.

요한과 함께 해변을 산책하면 좋을 것이다. 그는 해변을 걸을 때면 늘 반짝이는 눈으로 웃곤 했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웃던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온 셰어를 반긴 것은 텅 빈 침실이었다.

“요한?”

완벽하게 청소된 침실은 사람이 지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셰어는 문가에 꼿꼿하게 버티고 선 채 고요한 방을 노려보았다. 탁 트인 공간은 사각지대 없이 한눈에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였다.

요한은 없었다. 그는 매번 셰어의 퇴근만을 기다렸다가 반갑게 달려 나오곤 했다. 침실에서만 생활하는 것에도 전혀 불만 없이,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출근하지 말라고 졸라 댔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자기 사라질 리가 없었다.

기억의 일부가 돌아왔나? 그래서, 달아난 건가?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것이었다. 셰어는 조용히 호출 벨을 눌렀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뇌가 각성제라도 맞은 양 빠르게 팽창하고 있었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언제 달아난 거지?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섬에 드나들 수 있는 배는 자신의 요트와 고용인들이 이용하는 작은 배뿐이다. 고용인들은 새벽에 드나드니, 요한은 분명 아직 섬에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렵지 않다. 셰어는 일부러 작은 인공 섬을 샀다. 섬 전체를 수색한다 해도 채 2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요한을 잡으면, 그다음은…….

죽여 버려야지. 죽여 버릴 거다.

주어 없는 살의가 들끓었다. 걷잡을 수 없이 뻗어 나가던 생각이 맥없이 끊겼다. 근처에 상주하던 고용인이 재빨리 달려오고 있었다. 셰어가 물었다.

<요한은 어디 있습니까?>

<아…… 그게, 지금 서쪽 해변에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해변에서 저녁 식사를, 말입니까?>

<네, 그렇지 않아도 저녁 준비가 끝나면 그쪽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달아난 게 아니었다.

오렌지색으로 물든 침실이 다시 보였다. 오늘은 노을이 무척 아름다웠다. 그래서 요한도 셰어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연인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 주고 싶다는 기특한 생각을.

천국과 지옥에 번갈아 처박히는 듯했다. 셰어는 차갑게 식은 빈손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제 살을 할퀴며 파고들었다. 이윽고 주먹을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가능하면 평생 요한을 가두어 두려 했다. 그를 속이고,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텅 빈 침실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더라도 평생을 이렇게 살려 했다. 하지만 셰어가 진실로 바라던 것은 단지 그를 자신이 만든 가짜 낙원에 가두어 두는 게 아니었다.

셰어는 아주 느리게 서쪽 해변으로 향했다.

솨아아, 바람이 분다. 하얀 포말을 관처럼 쓴 노을빛 파도가 밀려온다. 주홍색으로 변한 백사장에는 새하얀 식탁보를 씌운 식탁이 놓여 있었다. 식탁 위에는 섬에서 자생하는 야생초와 소담한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얀 식탁보가 해풍에 휘날렸다. 하얀 그릇과 은 식기가 바람에 떨리듯 반짝거렸다. 커다란 디캔터에는 여름 와인과 허브, 오렌지가 가득하고, 식탁 옆에는 커다란 야외용 그릴이 설치되어 있었다.

셰어는 그릴 앞에 선 요한을 발견했다. 그는 불에 예민한 장인처럼 심각한 얼굴로 토치를 들고 서 있었다.

솨아아, 솨아아. 파도 소리가 모래사장을 지르밟는 발소리를 죽였다. 셰어가 지척에 다가온 후에야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줄곧 바라왔던 것이 거기 있었다.

“뭐야, 왜 벌써 와?”

셰어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웃기지도 않은데 그를 따라 웃으려는 입술이 비굴했다. 하지만 그가 웃는 게 좋았다.

“일은 잘 하고 왔어? 근데 나 아직 불도 제대로 안 붙었는데 어쩌냐. 배고프겠다.”

“아니, 별로.”

“아, 서프라이즈였는데 망했네.”

망했다더니 정작 요한은 그다지 유감스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보고 싶었어.”

장난 많은 아이처럼 웃는 얼굴로 그가 식탁 위에 놓인 꽃을 한 송이 집어 건넸다.

공교롭게도 요한이 전에도 꺾어 준 적이 있는 꽃이었다. 붉고 소담한 꽃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이 꽃을 한 아름 따다 늦잠 자는 셰어의 베갯머리에 뿌려 두었다. 그때와 똑같은 향기가 바람결에 묻어났다. 기억을 거슬러 곱게 말려 둔 꽃 갈피 같은 감정이 부스러졌다.

그가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서, 설령 요한이 자신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치고 달아난다 해도 자신은 정작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멍청이가 되어 버렸다. 손해만 보고, 지기만 하는. 돌려받지 못할 걸 알아도 끝없이 주고, 또 주고 말 것이다. 그게 그리 싫지 않았다.

“나도.”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는지 요한이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웃었다.

“오늘 내 생일이야? 왜 이렇게 예쁘게 굴어. 설레게.”

“이제 솔직하기로 했어. 후회하기 싫으니까.”

여유롭게 싱글거리던 요한이 서서히 웃음을 거두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조금 당황한 듯했다. 셰어는 그의 뺨에 달라붙은 재 가루를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다른 건 다 맥거핀이야. 아무런 의미 없어.”

“무슨 뜻이야? 우리 자기 오늘따라 되게 비장…….”

“네가 한 말이었어.”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따뜻한 빛에 물든 파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금은 중요해 보이는 것들도 지나고 보면 중요하지 않다고, 진짜 중요한 건 마음뿐이라고 네가 말했지.”

누가 누구에게 안기든, 무엇을 얼마나 기억하든,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너를 그렇게 사랑할 거야.”

끝나도 끝나지 않을 것처럼.

선전 포고 같은 고백을 들은 요한의 얼굴이 노을로 가려지지 않을 만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답지 않게 입술까지 떨며 중얼거렸다.

“나,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 정말 눈치 없다.”

셰어가 픽 웃고 말았다.

“됐으니까 눈이나 감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서로를 안고, 만지고, 숨을 나누었다. 더 가까이 붙으려 끌어당기는 통에 백사장에 이리저리 겹쳐진 발자국들이 찍혔다. 입자 고운 모래가 발을 간질였다.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잠기고, 물결이 끝없이 밀려왔다. 하나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던 입술이 나뉘었다.

“아…….”

낮은 신음을 흘린 요한이 휘청거리며 셰어를 끌어안았다. 거의 폐부를 찌그러뜨리려 드는 팔심이 우악스러웠다. 맞닿은 몸이 무척 뜨거웠다. 정상 체온이 아니었다.

삑, 어디서 희미한 기계음이 울렸다.

“요한?”

“나, 기분이 이상해. 셰어, 나 뭔가 좀 이상해.”

삑, 삑, 삑. 요한의 손목에 걸린 시계가 깜빡거리며 심장 박동 수가 정상 수준을 초과했음을 알렸다. 불안을 증폭시키는 기계음은 야속하게도 점점 더 빨라지기만 했다.

“이거 놔. 의사를 부를 테니, 좀. 요한. 잠깐만, 놓으라고.”

“아파. 셰어, 싫어. 가지 마. 싫어…….”

“가는 게 아니라, 이러다 정말 큰일 난다니까!”

셰어가 정색하며 제 몸을 휘감은 요한의 팔을 떼어 냈다. 그러나 요한은 끈질겼다. 몇 번을 떼어 내도 그는 거머리처럼 온몸을 던져 달라붙었다. 반복된 실랑이에 두 사람의 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아파, 너무 아파……. 가지 마. 아픈데, 나 두고 가지 마.”

“하아…… 요한.”

셰어는 땀과 모래에 젖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먼지 냄새가 나는 뜨거운 몸이 셰어의 품에서 녹아내렸다. 셰어는 용암처럼 절절 끓는 육신을 찬 손으로 조심스레 문질렀다. 서늘한 손이 온몸을 쓸어내리자 찌푸려진 요한의 미간이 조금 펴졌다.

“아, 좋아…….”

“좋아? 난 너 때문에 단명하겠다. 사람 환장하게 의사는 왜 못 부르게 하는 건데.”

“자기야, 나 진짜 아픈데…… 뭐라고 하면 서러워.”

“후…….”

셰어는 한숨을 쉬며 요한을 부드럽게 다독였다. 빡친 티가 물씬 나는 표정과 달리 그의 손길은 사뭇 다정했다. 힘없이 눈을 끔벅거리던 요한이 셰어의 가슴팍에 이마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사랑해.”

따뜻한 음성이 가슴께를 간질였다. 셰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요한의 정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탁, 그릴 속의 불티가 튀었다.

* * *

아, 근데 기억이 돌아왔다고 언제 얘기하지?

요한은 애꿎은 포크만 잘근거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더니 갑자기 기억이 돌아왔다. 사라질 때도 뜬금없더니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간 벌여 놓은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라 머릿속이 복작거렸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눈앞에 있는 셰어였다. 요한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좋아, 용기를 내자.

“셰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먹고 얘기해.”

그릴 앞에 선 셰어가 심드렁한 얼굴로 두꺼운 소고기를 뒤집었다. 치이익,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육즙이 흐르는 고기 표면을 핥았다. 허연 연기와 함께 허기를 자극하는 냄새가 퍼졌다.

셰어는 팬케이크 한 장 제대로 구울 줄 몰랐으나 바비큐는 그럭저럭 능숙했다. 요리는 몰라도 바비큐는 남자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만큼 그나마 손을 대 본 경험이 있었다. 덕분에 적당하게 구워진 스테이크와 옥수수, 꼬치에 꿰인 채소와 버섯 따위가 커다란 접시에 수북했다.

요한은 한입 크기로 자른 스테이크를 우물거리며 눈을 굴렸다.

언제 말하지? 빨리 알려 줘야 하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한 셰어를 보니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소 안 하던 요리까지 해 주는 걸 보니 아파서 잘해 주는 게 분명했다. 이런 적은 정말 드물었다. 솔직히 요한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지금을 100% 즐기고 싶었다.

“왜?”

자꾸 눈이 마주치자 셰어가 물었다. 기분 탓인지 말투도 다정해진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너도 먹으라고.”

모르겠다. 조금만 더 즐기자.

요한은 생글생글 웃으며 먹기 좋게 자른 스테이크를 포크에 찍어 내밀었다. 집게를 든 셰어가 다가와서는 아기 새처럼 고기를 받아먹었다. 순순하게 구는 게 너무 귀여워 가슴이 다 찌르르했다. 셰어만 허락한다면 매일매일 이렇게 밥을 먹여 주고 싶었다.

진짜 싫어하겠지. 안 물어봐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맛있지?”

“응.”

“자기야, 내가 만약 기억이 안 돌아와도 계속 사랑해 줘야 해. 맥거핀, 알지? 나 오늘 일 똑똑히 기억해 둘 거야.”

“별 이상한 소리를…….”

평소 같으면 욕이 나왔을 법도 한데 이번에는 욕 한마디 없었다. 역시 아파서 잘해 주는 게 틀림없었다. 최소한 일주일은 더 우려먹어야겠다. 요한은 굳게 다짐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것도 해 달라고 해야겠다. 마음이 한껏 들떴다.

“아, 빨리 약속해.”

셰어는 잠시 말없이 불판 위의 고기와 채소 따위를 뒤적거리더니 곧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한은 속으로 환호했다. 치익, 피어오르는 연기를 손으로 휘저으며 셰어가 물었다.

“요한, 그거 알아?”

“응?”

“너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그가 삐뚜름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분명 고운 얼굴인데 모골이 송연해졌다. 요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망했다. 알고 있었구나…….

“어, 으응…… 우리 자기는 참, 눈치가 빠르네. 안 그래도 내가 바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근데, 언제부터 알았어?”

“네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셰어가 잘 익은 고기를 접시에 쌓아 주며 독촉했다.

“빨리 먹어. 우리 볼일이 좀 많이 남았잖아.”

접시에 그득그득 쌓인 음식들이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단둘밖에 없는 섬에서, 밤에, 밥 먹고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정말 뒈지게 혼날 것 같았다. 셰어는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하는 건 봐주지 않았다. 상상만 해도 벌써 허리가 저릿저릿하고 입안에 침이 고였다. 두려움과 기대, 묘한 긴장감이 뒤섞여 며칠 내내 꺼지지 않던 짐승 같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요한은 가까스로 입에 든 음식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네…….”

까만 밤하늘에 총총 떠오른 별이 야속하게 밝았다. 해 질 녘에 보이는 저녁샛별조차 뜨지 않은 초저녁이었다.

V Pictures, 영화, 인공 섬, 기억 상실, 체벌, 섹스…… 수많은 생각이 요한의 머릿속을 스쳐 갔으나 그중 중요한 건 하나뿐이었다.

하늘이 희게 밝아올 때까지 요한은 울고 빌며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유일한, 소중한,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나.

<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