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6)

외전 3. Marry me

셰어는 무표정한 얼굴로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영화 감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호화로운 방은 하이 엔드 음향 장비와 고화질 영상 송출력기 따위로 꾸며져 있었으나, 정작 셰어가 취미를 즐길 시간이 많지 않은 탓에 생활의 흔적은 일절 없었다.

그러나 지금, 셰어는 스크린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스크린에 조사되는 영상 속 남자는 여자의 집 앞에 서서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그 유명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 고백의 한 장면이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간지럽게 사랑을 역설하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셰어의 미간에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펜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펜이 부러질 듯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셰어는 한숨을 쉬며 펜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그는 소파 옆 테이블에 놓인 하얀 노트에 휘갈겨 썼다.

스케치북?

셰어는 자신이 끄적여 놓은 메모를 처음부터 다시 훑어보았다.

프러포즈

로맨틱 코미디 영화

다이아몬드 반지

여행

플래시 몹

러브레터

세레나데

스케치북?

글씨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거칠고 험악해진다. 그리고 메모의 마지막에는 스케치북, 물음표가 찍혔다. 펜을 쥔 셰어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손등에 돋아난 푸릇한 핏줄이 두드러지고, 반듯하게 깎인 손톱이 희게 질린다. 그는 힘주어 메모 끝에 물음표를 하나 더 찍었다.

스케치북??

“하아…….”

셰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미친 짓이다.

청혼이라니.

격변의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퇴적된 시간만큼 자연스럽게 쌓여 온 것에 더 가까웠다. 내일 할 일을 일상적으로 떠올리는 것처럼 셰어는 요한이 있는 미래를 생각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일로 다투고, 화해하고, 게으르게 시간을 낭비할 것이다.

행복할 것이다. 처음 나눈 입맞춤을 추억하는 청년처럼 셰어는 가만히 제 입술을 매만졌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이 범람한다. 혼란, 기대, 두려움. 불확실한 감정에 휩싸인 채 셰어는 한 가지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요한에게서 반드시 긍정적인 대답을 들어야 한다. 셰어는 중대한 프로젝트를 처리할 때처럼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

처음부터 영화처럼 간지러운 짓을 할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일단 청혼의 기본은 반지였으니, 셰어는 까다로운 심미안을 만족시키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예약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프러포즈.

요한이 종종 하는 말처럼 셰어는 그다지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눈치가 없다, 무드가 없다 타박을 받으며 요한과 함께한 지도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셰어도 요한의 취향이 어떤지는 잘 알았다. 요한은 비싸고 귀한 것보다 특별한 것을 더 좋아한다. 유명 셰프의 심혈을 기울인 요리보다 셰어가 반쯤 태워 먹은 와플을 더 좋아하는 식이었다.

낭만, 그 빌어먹을 로맨틱함이라는 게 뭔지 셰어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로맨틱 코미디 영화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셰어는 인터넷에서 찾은 인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목록을 주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작 몇 편도 채 보지 못하고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아무리 봐도 낭만인지 뭔지를 이해할 수도 없었고, 머리만 아팠다.

어떻게 청혼해야 요한이 기뻐할까?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데 웅장한 음향 장비를 타고 감정을 고조시키는 장렬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셰어는 욕설을 뱉으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영화를 꺼 버렸다. 모든 것이 안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모호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셰어는 일단 현재까지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상의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1안. 100여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요한에게 꽃을 한 송이씩 선물한다. 100송이의 장미를 받은 요한이 약속된 장소에 도착하면 등장해 스케치북을 한 장씩 넘기며 청혼한다.

기각.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지가 배배 꼬이는 것 같다. 셰어는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낙서처럼 끄적인 계획을 펜으로 벅벅 그어 버렸다.

아무래도 규모가 좀 더 작고 단순하면서 특별한 게 좋겠다.

2안. 일단 요한을 무인도로 납치한 다음…….

셰어가 영 수상쩍은 계획을 구상하던 중, 요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셰어는 마른침을 삼키며 액정 화면을 노려보았다.

- 자기야.

전화를 받자마자 요한이 애살스럽게 첫마디를 던졌다. 셰어는 바로 대꾸하지 못했다. 줄곧 요한에게 시도할 온갖 간지러운 계획을 떠올리던 참이었기에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러자 단번에 서늘해진 말투로 요한이 쏘아붙였다.

-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듣고 있어? 지금 뭐 해?

“네 생각.”

셰어는 요한이 종종 써먹곤 하는 수법을 훔쳐 썼다. 그는 대답이 곤궁할 때면 매번 이런 식으로 말을 돌렸다. 당할 때는 약이 오르더니, 그 수법에 그대로 당한 요한이 할 말을 잃고 버벅거리자 기분이 좋아진다. 요한은 어물거리며 항의했다.

- 그거 내 거잖아. 치사하게 왜 베껴?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새삼스럽게.”

- 어어?

결혼하면 어차피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 될 텐데. 셰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가 거절할 가능성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요한은 하, 참, 나, 진짜 같은 소리를 번갈아 중얼거리더니 간신히 한마디 했다.

- 넌 갈수록 뻔뻔해진다.

“그래서 질려?”

- 아, 아니. 왜 말을 그렇게 해?

조금 긁었을 뿐인데 요한은 금세 파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단 말이야! 귀가 쨍하니 아리게 큰 소리로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그는 조금 바보 같고 귀여웠다. 셰어는 몰래 웃고 말았다.

요한을 사랑하고 있다. 이토록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때로는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셰어는 요한이 아니라면 누구와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셰어가 아주 조금 다정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도 사랑해.”

셰어는 그 유치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속의 멍청이들을 조금쯤은 이해했다.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짓을 하고, 통제를 잃고, 유치한 짓을 저지른다. 여태까지 자신이 요한에게 끌린 것처럼 저들도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 아, 진짜 오늘따라 왜 이래. 미치겠네.

요한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가 잘 들리지도 않게 작아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 자기야, 내가, 그러니까…… 오늘은 못 만날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말해 봐.”

셰어의 음성이 언제 부드러웠냐는 듯이 까칠해졌다.

* * *

“내가 일부러 이러는 게 아니라…… 어? 미안해…….”

요한은 진땀을 빼며 변명했다. 일이 많은 걸 어쩌냐, 이건 서로 이해해 줘야 하는 부분이 아니냐, 아니, 날 사랑한다며! 마지막은 거의 땡깡을 부리는 것에 가까웠다. 결국 셰어는 고요히 분노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요한은 손바닥에 고인 땀을 닦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일부러 셰어를 피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일부러 피하는 건 맞지만, 그가 싫어서 피하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셰어가 자신에게 청혼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꽤 오래전부터 셰어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다른 일에는 철저한 남자가 유독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서툴러 곳곳에 단서를 흘리고 다니니, 모르는 척을 하기가 더 곤혹스러웠다. 셰어는 요한이 오른손 약지에 주로 끼곤 하던 반지를 훔쳐 갔으며, 선호하는 보석의 종류를(그중에서도 특히 다이아몬드를) 캐물었고, 유독 미래 얘기를 자주 꺼냈다.

셰어와의 결혼이 싫은 건 아니었다. 셰어를 사랑한다. 같이 살면 어떨지를 말하는 셰어의 진중한 눈을 볼 때면 괜히 가슴이 떨렸다.

그러니까 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보다 훨씬 전부터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미치겠네…….”

요한은 책상에 엎드리며 끙끙거렸다.

가장 큰 문제는 반지였다. 몇 달이나 고심해서 고른 디자인에 딱 맞는 다이아몬드를 경매에서 낙찰받았는데, 세공에 문제가 생겨 일정이 늦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빨라도 반지가 완성되려면 한 주는 더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셰어는 그 시간을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슬아슬하게 수위를 넘나드는 그의 태도를 보면, 분위기만 잡힌다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안 되지. 그래도 준비한 게 있는데.

머리를 쥐어뜯는 요한을 조롱하듯 셰어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요즘 자꾸 왜 이러는 건데?]

[늦게라도 좋으니까 시간 내. 얼굴 보고 얘기해.]

“나도 정말 보고 싶거든.”

보고 싶은데, 아직 반지가 안 됐단 말이야. 요한은 시무룩한 얼굴로 셰어의 메시지가 떠오른 액정 화면을 쓰다듬었다. 한동안 셰어를 피해 다녔더니 애꿎은 상사병이라도 날 것 같았다. 요한은 아쉬운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래도 이건 무조건 내가 먼저라고.”

따지면 프러포즈를 준비한 것도 요한이 더 빨랐다.

함께한 시간 동안 셰어는 많은 부분을 요한에게 맞춰 주었다. 그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요한이 더 잘 알았다. 그렇기에 요한은 프러포즈만큼은 셰어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해 주고 싶었다.

요한의 계획은 대략 이러했다. 반지가 완성되면 셰어를 집으로 초대한다. 둘만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후,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그에게 반지를 끼워 주며 청혼한다.

수수하고 별것 없는 계획이지만 요한은 진심으로 그 계획이 멋지다고 생각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둘만의 공간에서 충분히 마음을 나눈 뒤 그에게 고백하고 싶었다.

고백의 말은 처음부터 생각해 둔 그대로였다. 평생 누군가에게 이렇게 깊이 빠져 본 적은 없었다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만을 사랑할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셰어가 허락한다면 그의 반쪽이 되고 싶다고 청혼하려 한다.

근사한 풍경이 보이는 레스토랑이나 깜짝 놀랄 만한 이벤트도 좋지만, 요한은 인생에서 분기점이 될 만한 일은 진지하고 조용하게 치르고 싶었다.

아마 셰어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요한은 멋대로 그렇게 단정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표님, 혹시 그 얘기 들으셨어요?”

요한이 출근하자마자 벳시가 물었다. 그녀는 왠지 웃음을 참는 듯한 얼굴로 입술에 힘을 주고 있었다. 틀림없이 사적이고도 곤란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벳시를 보자마자 불운을 직감했으나, 일찍이 저항할 마음을 접고 순교자처럼 초연하게 물었다.

“왜? 나 또 뭐, 무슨 일인데?”

“우리랑 영화 찍기로 한 플래시 몹 팀 기억하시죠? 안티크루.”

개인적인 얘기가 아닌가?

요한은 자세를 고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V Pictures의 다음 영화가 뮤지컬 영화로 정해진 다음, 가장 먼저 정한 것이 안무를 만들 디렉터와 핵심이 될 안무 팀이었다. 최종적으로 계약을 한 안티크루는 근래 SNS에서 가장 핫한 플래시 몹 영상을 올린 팀이었다.

“전무님이 안티크루에 견적을 요청했대요.”

V Pictures에는 전무가 없으므로 벳시가 전무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셰어, 그가 안티크루에 견적을 요청할 일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요한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을 본 벳시가 겨우 웃음을 참는다. 왠지 골 때리는 사연이 있을 것 같다.

“무슨 견적?”

“그, 무슨 꽃을 들고…….”

“아…… 아니야, 됐어. 안 들어도 돼.”

‘꽃’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요한은 상황을 짐작했다. 셰어가 뭔가 큰일을 꾸미고 있다. 그것도 평소의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셰어는 소박하고도 조용한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게 아니었다. 무자비하게 자본을 들이부은 블록버스터 같은 프러포즈를 기획하고 있었다.

갑자기 요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셰어가 거창한 프러포즈를 준비한다면 자신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셰어보다 더 빨리, 더 성대한 프러포즈를 준비해야 한다. 오직 반지 한 가지뿐이던 프러포즈 준비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차라리 물 위를 걷는 법을 터득하는 게 더 빠르겠다. 요한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과부하가 걸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를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보던 벳시가 물었다.

“이거 그거 맞죠? 프…….”

“그만. 나도 알고 있으니까 안 가르쳐 줘도 돼.”

“와…… 근데 전무님 생각보다 되게…… 로맨틱하시네요.”

로맨틱은 무슨, 셰어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이렇게 충격을 받지도 않았을 텐데.

요한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이제는 셰어가 로맨틱하지 않다고 감히 단언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던 남자가 뒤에서는 이런 걸 준비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요한은 여태까지 전혀 감도 잡지 못했던 셰어의 낯선 면모에 크게 당황했다.

혹시 외계인한테 납치당한 거 아니야? 진짜 셰어는 우주선에 있고, 가짜 셰어가 그의 탈을 쓴 채 자신의 애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으니 터무니없는 상상만 떠올랐다. 요한은 한참 망상을 하다 문득 중요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래서 안티크루는 한다고 했대?”

플래시 몹은 딱 질색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셰어와 자신의 사랑을 축복하며 춤을 추는 상상을 하자마자 소름이 돋고 절로 치가 떨렸다. 파랗게 질린 요한의 낯빛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던 벳시가 대답했다.

“아뇨. 자기들은 돈으로 움직이는 예술가가 아니라면서 거절했대요.”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간절하던 낭보였다. 요한은 평소에는 찾지도 않던 신을 속으로 부르짖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계획대로 진행하는 건 무리였다. 반드시 셰어가 청혼하기 전에 먼저 일을 저질러야 했다. 요한은 결의를 다졌다.

일단 프러포즈를 하려면 그를 만나야 한다. 요한은 데이트 신청을 하기 위해 셰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곧 회의 들어가셔야 하는데요.”

벳시가 요한의 책상 위에 회의 안건을 내려놓았다. 요한은 소리 없이 입술만 움직여 대답했다. 알았어, 알았어. 얼른 나가라는 듯이 손짓을 하자 벳시가 한숨을 쉬며 문을 쾅 닫는다.

남들 다 하는 연애로 유난을 떠는 게 좀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주간 회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생일대의 이벤트가 달려 있는데 그깟 회의가 대수일까.

- 어쩐 일이야? 바쁠 시간에.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셰어가 인사도 없이 물었다. 안티크루에게 까였다더니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듯했다. 요한은 그의 수심 어린 얼굴이 떠올라 괜히 마음이 찡해졌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 예쁜 손가락에 고이 반지를 끼워 줄 텐데.

요한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하긴 했지만, 그 셰어가 뒤에서는 그런 깜찍한 일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게 내심 사랑스러웠다. 참으려 해도 입술이 멋대로 치켜 올라간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가 꼭 무슨 용건이 있어야 전화할 사이인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

그러나 들쩍지근하게 구는 요한은 조금 느끼했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셰어가 뾰족해진 말투로 닦달했다.

- 똑바로 얘기해. 너 뭐 잘못했지.

물음이 아니라 확정이었다. 요한은 순간 당황해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요한이 말이 없자 셰어는 그에 확신을 얻었는지 취조라도 하는 것처럼 무섭게 을러대기 시작했다.

- 솔직하게 말해. 지금 얘기하면 봐줄 테니까. 뭐야?

“야, 넌 내가 맨날 사고만 치는 줄 알아?”

요한이 미약한 반항을 시도했으나, 셰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 요한, 나중에 걸리면 곱게 안 끝나. 당장 얘기해.

셰어가 요한에게 벌을 줄 때처럼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목소리를 듣자 반사적으로 몸이 뜨거워지고 입 안이 말랐다. 요한은 딱히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혹시 자신이 뭘 잘못했나 하고 돌이켜 보기 시작했다.

그가 프러포즈할 생각이라는 걸 알고도 선수 치려 한 게 잘못인가? 그럼 셰어 몰래 반지를 산 것도 사과해야 하나? 그렇지만 먼저 청혼하고 싶은데.

- 너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셰어가 이죽거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요한은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문질렀다. 어찌나 살벌하게 구는지, 등골이 다 오싹했다.

여기서 잘못 걸리면 진짜 죽기 직전까지 혼날 것이다. 요한은 얼결에 머릿속에 떠돌던 말을 내뱉었다.

“그, 결혼!”

차가운 침묵이 가라앉는다. 요한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제 혀를 깨물었다. 복잡해진 머리가 바쁘게 돌아간다.

“결혼을, 많이 하는 것 같다고. 요즘 사람들이……. 내가, 요즘 남의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바빠 죽겠어.”

맥락 없는 말을 구구절절 늘어놓고 있자니 이 쓸모없는 혀를 뽑아 버리고 싶어진다. 그러나 한번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한 입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요한은 최근 참석한 독특한 결혼식부터 요즘 사람들에게 적합한 결혼 적령기까지, 온갖 잡설을 떠들기 시작했다.

의식의 흐름대로 지껄이는 내내 요한은 제발 셰어가 닥치라고 한 마디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셰어는 정말 이상했다. 평소에는 조금만 허튼소리를 해도 바쁘다고 전화를 끊어 버리기 일쑤였으나, 그는 요한이 어느 무인도에서 결혼식을 올린 히피 커플에 대한 얘기를 꾸역꾸역 마칠 때까지 대꾸도 없이 얌전히 듣고만 있었다.

진짜 외계인의 소행인가?

요한은 근본 없는 의심을 품으며 입을 다물었다. 셰어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 너도 그런 게 좋아?

요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도 많은 말을 쏟아 냈더니 셰어가 말하는 ‘그런 게’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 섬이 좋으냐고.

좋아, 싫어. 그 어린애 같은 질문은 단순한 만큼 오히려 해독하기 어려웠다. 불길하다. 요한은 셰어가 이렇게 물을 때마다 벌어진 일들을 떠올렸다.

셰어는 아파트를 좋아하냐고 묻더니 요한에게 아파트를 사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왜 하필 집 앞에 레몬 나무를 심었냐고 묻기에 요한이 생각 없이 그냥 레몬을 좋아한다고 대답했더니, 레몬 농장을 선물해 주었다.

이번에도 좋다고 대답하면 섬을 사 줄지도 모른다.

“아니, 싫어. 섬은 딱 질색이야.”

요한은 정색하며 거부했다. 아무리 셰어가 섬을 수십 개쯤 사도 거뜬할 만한 재력을 지녔다고는 해도, 차를 타고 조금만 달리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 사는 요한으로서는 쓸모도 없는 섬을 받고 싶지 않았다.

셰어는 이상한 곳에서 돈을 헤프게 써 댔다. 옆에서 누가 말려 주지 않으면 가산을 다 탕진할지도 모른다.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일이란 혹시 모르는 게 아닌가. 요한은 혼자 심각하게 셰어를 걱정했다.

그래, 여차하면 내가 먹여 살리면 되지. 요한은 속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루라도 빨리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래, 알겠어.

또 마음이 바뀌면 얘기하라고 할 줄 알았더니 셰어는 뜻밖에 담백하게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제 전화를 끊으려는지 그가 그럼, 하고 말을 꺼낸다. 요한은 그제야 전화를 건 목적을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잠깐만. 우리 주말에…….”

갑작스럽게 전화가 끊어졌다. 요한은 허망하게 전화가 끊어진 액정 화면을 바라보았다. 엿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벳시가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회의 시간입니다.”

요한은 낭패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이 청혼,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 *

셰어는 화면에 떠오른 요한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우리 주말에 여행 갈까?]

[너무 멀리는 말고 가까운 곳으로.]

수상하기 짝이 없다. 셰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행간에 숨은 요한의 함의를 읽을 수 있을 듯이.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자신을 피할 때는 언제고, 요한은 아침부터 전화를 걸고 메시지를 보내며 번잡스럽게 굴었다. 게다가 갑자기 여행이라니. 수없이 구상하고 폐기한 프러포즈 방법 중 여행이 있었던 탓에 요한의 제안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구구절절 결혼 얘기를 지껄이던 것도 이상했다. 물론 요한이 별나게 구는 것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이를테면 프러포즈를 하려 한다거나.

셰어는 입가를 덮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딱 잘라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었으나, 묘하게 간지러우면서도 불편한 감각이 번져 피부 밑을 긁어내고 싶어진다.

이 기묘한 감각이란, 요한이 종종 셰어의 의자를 빼 줄 때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에스코트를 할 때 드는 기분과 비슷했다.

요한에게 보호받는 연약한 존재가 된 느낌. 단단한 껍질이 홀랑 벗겨져 물렁한 속이 드러나듯 불안하고 어색한데, 그게 싫지 않아서 이상하다. 셰어는 희미하게 달아오른 뺨을 쓸어내리곤 답장으로 담담한 대답을 찍어 보냈다.

[그래.]

답장을 하고 나자 속이 더 거북해졌다. 내장이 다 꼬이는 듯한 낯선 긴장감이 셰어를 괴롭혔다. 아무리 큰일을 앞두고도 이토록 긴장한 적은 드물었으나, 요한은 셰어를 간단히 망쳐 놓았다.

셰어는 금고 안에 얌전히 잠들어 있을 반지를 떠올렸다. 누가 청혼을 하든 그런 건 상관없다. 그러나 그를 생각하며 고른 반지는 직접 끼워 주고 싶었다.

* * *

헬기 아래를 내려다보자 누렇게 마른 땅이 보인다. 자연이 그려 놓은 등고선은 우습게도 불야성의 도시를 볼 때와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거대한 존재 앞에 선 것처럼 자신의 가치가 닳아 가는 듯했다.

요한은 숨이 가빠 와 셰어의 손을 세게 쥐었다. 아찔한 높이에 올라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셰어는 식은땀이 고여 미끈거리는 피부가 불쾌하지도 않은지 망설임 없이 손을 꽉 잡아 주었다. 요한의 것과 달리 버석하게 메마른 서늘한 손이 뺨에 닿았다. 셰어는 헬기 바깥을 바라보던 요한의 얼굴을 끌어당겨 제 쪽으로 기대게 했다.

“아…… 이게 무슨 꼴이냐.”

요한은 앓는 소리를 했다.

여행지로 정한 곳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지긋지긋하게 싸워 댔던 출장지였다. 쇼와 카지노가 유명한, 사막 위에 지어진 찬란한 도시. 특별히 좋은 기억도 없는 곳에 셰어와 다시 오고 싶어진 것은 요한의 기질적인 변덕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한 곳에 다시 찾아와, 이번에는 새로운 관계의 첫 코를 제대로 끼우고 싶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셰어는 어떤 불만도 없이 요한이 짜 온 계획을 순순히 따랐고, 나름대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공항에서 재미 삼아 돌려 본 룰렛이 자신의 차례에서 터졌을 때는 놀라며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셰어가 기분이 좋아 보이니 요한도 덩달아 들떴다. 이건 손만 대도 금이 쏟아질 운명을 타고난 거라며 호들갑을 떨던 것도 잠시, 연신 헤실거리던 요한의 얼굴은 셰어가 헬기 투어에 관심을 보였을 때부터 조금씩 굳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목적지였던 사막으로, 예정에 없던 헬기를 타고 떠나게 되었다.

맞닿은 곳이 진동했다. 요한은 셰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으나, 요란한 헬기의 소음 탓에 그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다. 속은 메슥거리고 힘든데 이상하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요한은 자꾸 바보같이 웃었다. 셰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조심스럽게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에서 그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기회만 있으면 위악을 떠는 셰어의 입보다 그의 손이 더 솔직했다.

요한은 어차피 셰어가 듣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아무렇게나 중얼거렸다.

“무서워 죽겠다. 번지 점프도 해 봤으니 이까짓 건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뭐야. 전혀 다르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남들처럼 열대 섬이나 갈 걸 그랬나 봐.”

그의 손가락이 요한의 입술을 더듬는다. 맹인이 점자를 읽듯 더듬거리며 입술을 만지작대는 손길이 간지럽다. 요한은 창백한 낯빛과는 어울리지 않게 크게 웃어 버렸다.

“네가 키스해 주면 괜찮아질 것 같기도 하고.”

셰어가 요한의 입을 가렸다. 그만 입을 다물라는 뜻인가 보다. 그러나 요한은 멀미가 나고 어지러운 와중에도 지금 느끼는 감정을 마음대로 떠들고 싶었다.

“나랑 살자. 정말 행복하게 해 줄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을 더듬던 손가락이 크게 움찔했다. 요한은 혹시 정말 알아들은 건가 의심스러워져 고개를 들어 셰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셰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하게 요한을 마주 볼 뿐이었다.

하긴, 저 속을 누가 알까.

요한은 장난스레 셰어의 오뚝한 코끝을 살짝 눌렀다.

“이따 내가 이 말 하면 꼭 그러겠다고 대답해 주기다.”

고요한 셰어의 눈 속에 금빛이 일렁거린다. 눈을 맞추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눈에 어둠 속에서 안광을 발하는 짐승처럼 위협적인 예기가 서렸다. 요한은 그 눈이 위협하는 게 아니라 유혹하는 것 같았다.

“난 네가 날 이렇게 볼 때가 좋더라.”

요한은 실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따가운 햇볕이 쏟아져 헬기 안은 조금 더웠다. 그래도 편도 30분의 비행이면 목적지에 도착하니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가도 누런 땅만 나타나던 밋밋한 풍경에 불쑥 하얀 건물이 나타났다.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건물은 자로 잰 듯 네모반듯했기에, 자연 그대로인 주변의 풍경에서 이질적으로 겉돌았다. 건물이 점차 가까워지자 헬기가 하강하며 흔들림이 더 심해진다. 요한은 셰어의 손을 부러뜨릴 듯 세게 쥐었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듯 셰어가 요한의 어깨를 감쌌다. 몸이 헬기 밖으로 나가떨어질 것 같고 내장이 다 쏠리는 듯했으나, 셰어와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한결 버틸 만해졌다.

이륙보다 더 고통스러운 착륙을 간신히 버텨 낸 요한은 내려도 좋다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뛰어내리듯 헬기에서 내렸다. 셰어는 그 뒤를 따라 느릿하게 내렸다. 얄팍한 오트밀색 니트와 청바지를 입은 그는 편안한 차림이었으나 패션 잡지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근사했다.

똑같이 헬기를 탔는데 왜 이렇게 다른 건지 모르겠다. 요한은 비척비척 셰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기대며 투덜거렸다.

“너는 어떻게 맨날 예쁘기만 해. 난 지금 죽을 것 같은데.”

셰어는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들고 있던 생수병의 뚜껑을 열어 요한에게 건넸다.

“헛소리 말고 물이나 마셔.”

“속이 울렁거려서 못 마시겠어.”

셰어는 요한이 기운 없이 축 늘어지자, 뾰족하던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요한을 부축해 끌어안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마셔 보지. 달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요한은 앓는 소리를 흘리며 그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코를 묻은 어깻죽지에서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이러고 있을래. 너 좋은 냄새 나.”

요한이 신음하듯 중얼거리자 셰어의 손길이 한결 은근해진다. 허리를 붙든 커다란 손이 요한의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똑바로 걸어. 숙소가 코앞인데.”

갈비뼈가 욱신거리도록 억세게 주물럭거리는 게, 주변에 사람만 없었더라면 흙바닥에 요한을 깔아 눕히기라도 할 것 같았다. 요한은 텁텁한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몸을 바로 세웠다. 셰어의 말대로 숙소는 코앞이었다.

아담하고도 깔끔하게 단장해 놓은 건물은 인적도 없이 고요했다. 으레 남의 시선을 꺼리는 유명 인사들이 휴양을 즐기러 오는 곳이기에, 숙소는 소박한 별장처럼 꾸며져 있었다.

요한은 사전에 관리인으로부터 인계받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상아처럼 하얀 외벽만큼이나 희고 깔끔한 집 안은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햇빛이 들어차 있었다.

한 면의 벽을 모두 특수 유리로 시공해, 2층까지 탁 트인 집 안에서는 바깥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바깥은 보는 이를 압도하는 광활한 험지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건물 아래 건너편 협곡의 갈라진 틈새가 보이고, 선명하게 나뉜 지층의 형태가 벽을 채운 작품처럼 펼쳐져 있다.

“멋지다.”

요한은 감탄하며 창을 향해 다가갔다.

실내의 공기는 바깥과 달리 서늘했다. 천장에서 느리게 돌아가는 커다란 타프팬이 서늘한 온도로 맞추어진 실내 공기를 순환시킨다.

어느새 요한의 등 뒤로 다가온 셰어가 소름이 돋은 요한의 팔뚝을 쓸어내린다. 부드러운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아, 희미한 신음이 샌다. 그가 미처 대비할 새도 없이 창 쪽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요한은 창과 셰어의 사이에 갇힌 채 몸을 비틀었다.

안주머니에 든 반지 케이스가 눌려 아팠다.

“아, 아파. 갑자기 왜…….”

“아무 짓도 안 할 테니 잠깐만 이대로 있어.”

“무슨 짓 해도 되는데, 우리 조금만 떨어지면 안 될까?”

반지 케이스가 갈비뼈를 부술 것 같단 말이다.

요한은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삼키며 애원했다.

“창에서 조금만 떨어질까? 누르면 아파. 나 아프다니까, 자기야?”

요한은 낑낑거리며 몸을 비틀었으나 셰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안아 터트리려고 작정한 것처럼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으니, 당해 낼 도리가 없다.

갈비뼈가 부서지면 어쩔 수 없지, 뭐.

요한은 금세 포기하고 셰어에게 등을 기댔다. 목덜미에 닿았던 입술이 벌어지며 옷깃 위로 드러난 피부가 쪽쪽 빨린다. 요한은 당혹스러워 눈만 깜빡였다. 지난한 다툼을 거친 합의 끝에 두 사람은 옷으로 가려지지 않을 만한 곳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로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셰어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아니, 그는 반쯤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하아…….”

요한의 목덜미에 거친 숨이 닿았다. 불그레한 흔적이 남은 목덜미에 솜털이 오소소 일어난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배 위를 기어오른다. 요한은 얼른 그의 손을 붙들었다.

이러다 꼼짝없이 일을 치르게 생겼다. 내심 혹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요한은 아직 그와 할 일이 있었다.

프러포즈. 아직 가장 중요한 대목을 치르지 않았다. 요한은 짐짓 침착한 척 목을 가다듬었다.

“뭐 좀 마실까? 나 목마른데.”

“마시게 해 줄게.”

물 따위를 마시게 해 준다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요한의 머릿속에 바깥의 풍경이 훤히 보이는 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셰어의 성기를 빠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낯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창에 비친다.

창에 비친 셰어와 눈이 마주쳤다. 유독 선명한 두 눈이 삭막한 풍경에 겹쳐진다. 그가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안다는 듯이.

“하늘을 봐.”

귓가를 축축하게 적시는 음성이 지나치게 관능적이었던 탓에 그 말이 꼭 은밀한 속어처럼 들렸다. 요한은 창에 비친 셰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요한의 손에서 벗어난 뱀 같은 손아귀가 아래턱을 붙들어 고개를 들게 했다.

흡, 요한은 저도 모르게 까끌까끌한 들숨을 삼켰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긴장한 턱을 어르듯 쓰다듬고 있었다.

“말 참 안 듣지.”

묵직하게 가라앉은 음성에서 한기가 느껴지자 학습된 것처럼 요한의 시선이 자동으로 셰어의 명령을 따랐다.

창 너머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 하얀 비행기가 흰 줄을 그린다. 총총히 하늘을 지나는 비행기의 꽁무니를 따라 하얀 글자가 하늘에 떠올랐다.

M A R R Y M E

E의 뒤로 한 뼘가량의 공백이 이어진다. 하얀 연기를 툴툴 내뿜던 비행기가 문장을 끝맺었다.

M A R R Y M E .

요한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말도 웃음도 되지 못한 들끓는 감정이 목을 울렸다. 다정해진 손길이 젖은 뺨을 쓰다듬는다. 셰어가 요한의 목덜미에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물음표도 아니고 마침표, 청유형도 아니고 명령형. 누가 계획한 일인지는 분명했다. 먼저 프러포즈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 수포로 돌아갔지만, 지금 그런 것쯤은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이게 내 대답이야.”

셰어가 요한을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헬기에서 네가 한 말 다 들었거든.”

“뭐? 야, 그걸 왜 이제 말해!”

설레서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던 것도 잊고, 요한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요한은 억울해졌다. 멋진 건 혼자 다 하고, 남이 헬기에서 멀미하면서 한 말을 훔쳐 듣기나 하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이가 없다.

“이건 무효야. 아무튼 넌 못 들은 거라고. 다시 해!”

그러나 요한을 감싼 팔은 풀어지지 않았다.

“지금 내가 대답했잖아.”

셰어는 뻔뻔하게 요한의 손을 꽉 붙들었다. 왼손 약지를 타고 기어오르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오싹하다. 요한은 찬란한 반지의 광채에 놀라 손가락을 움츠렸다. 무섭도록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족쇄처럼 손가락을 감싼다. 영영 빠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결혼하자.”

마침표 같은 선언에 요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식으로 프러포즈를 당할 생각은 없었는데,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요한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세찬 맥박을 느꼈다. 아무렇지 않은 양 담담해 보이지만 셰어 역시 자신과 똑같이 긴장하고 있었다. 요한은 그의 불안과 긴장이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요한이 고백했다. 그러자 허리가 부러질 듯 꽉 끌어안기는 것과 동시에 발이 살짝 떠올랐다. 발이 떠오른 순간은 찰나였으나, 순간 공중에서 아래를 보며 느꼈던 아찔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요한은 반지를 낀 손으로 포박하듯 셰어의 손에 깍지를 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빈틈없이 입술이 맞물린다.

두 사람이 한 몸처럼 뒹구는 내내 낙조에 물든 하늘은 붉게 저물었다. 어느덧 짙푸르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에는 맑은 별이 떠오르고,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양 별 가루 같은 불꽃이 펑펑 터졌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 하양. 하늘에서는 가지각색의 불꽃이 찬란한 빛을 뿌렸으나 그것들은 모두 한 가지를 의미했다.

동그란 반지, 타원형의 반지, 불꽃이 흩어지는 가운데 떠오르는 반지, 수많은 반지가 검은 하늘에서 반짝인다.

엔딩 크레딧처럼 기울인 필기체로 휘갈긴 문장이 타닥타닥 빛났다.

Happily Ever Af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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