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26)

외전 2. Top to toe

셰어는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자각의 순간은 어떤 계기도 없이 불현듯 찾아왔다. 그때는 이른 아침, 요한의 욕실에서 사이좋게 걸려 있는 칫솔을 꺼내는 찰나였다.

요한과 함께한 지 6개월, 요한의 일상에 완전히 물들어 버렸다. 셰어는 바디용품들이 산만하게 들어차 있는 선반을 바라보았다. 올 때마다 손이 가는 대로 정리를 해 두어도 하룻밤이면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오는 마법의 공간이었다.

그런데 무슨 버그가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한결같이 너저분한 공간이 불편하지 않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첫 번째 단서는 익숙함이다.

“잘 잤어?”

욕실을 나오자 요한이 나른하게 웃으며 셰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막 잠에서 깬 덕분에 평소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입술이 닿았다. 그에게서 체향과 섞인 바디 워시 냄새가 난다. 시트러스 계열의 산뜻한 향기. 셰어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요한이 즐겨 쓰는 바디 워시 냄새였다.

큼직한 손이 셰어의 등허리를 쓸며 내려가 무심코 엉덩이를 움켜쥔다. 순간 셰어의 미간이 구겨졌다. 멋대로 주물러 대는 게 거슬리는데, 딱히 무슨 의도가 있어서 이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요한은 셰어의 허리를 부둥켜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괴롭게 끙끙거리며 목덜미에 간지럽게 코를 비볐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하는 요한은 오늘도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너무 졸려. 더 자고 싶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앓는 게 좀 가여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았던 셰어의 표정이 한결 유순해졌다.

“눈 뜨고 씻고 와.”

“씻겨 줘. 눈이 안 떠져.”

응석을 부리는 게 아주 습관이다. 뺨을 쳐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줄까 하다가도 이렇게 귀찮게 칭얼거리는 걸 받아 주고 싶어지니 이상한 일이다. 셰어는 부스스한 요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고는 부엌으로 향했다. 문이 닫힌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뭐라도 먹여야 할 텐데. 생전 누군가를 챙겨 먹일 생각은 그다지 해 본 적 없었건만 최근에는 종종 하게 됐다.

요한은 그 체격에 걸맞게 뭐든 잘 먹고, 많이 먹고, 자주 먹었다. 셰어와는 반대였다. 셰어는 입맛이 까다롭고, 항상 정해진 시간에 적당히 먹었다. 일주일의 절반 이상을 서로의 집에서 함께 보냈기에 두 사람의 식습관은 조금씩 닮아 갈 수밖에 없었다. 셰어는 요한과 마주 앉아 간식을 먹는 시간이 늘었고, 평소보다 운동 시간을 늘렸다.

가장 큰 변화는 아침 식사였다. 평소 셰어의 생활 습관대로라면 아침은 항상 커피 한 잔 정도였으나, 요한은 늘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처음에는 매일 요한이 차려 주는 걸 먹기만 했지만 최근에는 가끔 셰어가 간단한 일을 거들기도 했다.

셰어는 커피를 내리고 식빵을 토스터에 넣었다. 이 두 가지만은 셰어가 요한보다 잘하는 것으로 증명된 일이었다. 요한은 버튼만 누르면 되는 일을 종종 틀렸다. 엉뚱한 버튼을 누른다거나 버튼을 누르는 것을 잊어버리는 식이었다. 그런 주제에 핸드 드립이나 요리에는 능숙한 게 요한의 모순이다.

이런 잡일에 특별한 감상을 느낀 적은 없었으나 셰어는 정체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기묘한 충족감은 요한이 자신이 준 것을 모두 맛있게 먹고 마실 때 가장 커졌다. 그럴 때면 셰어는 요한이 자신의 정액을 삼킬 때처럼 기꺼운 기분이 들었다. 제 손을 거친 것들이 요한의 일부가 된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커피 냄새 좋다.”

그새 말끔하게 차려입은 요한이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는 커피 잔을 든 셰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아무 데나 입술을 비벼 댔다. 셰어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잔 속의 커피를 노려보며 요한을 밀어냈다.

“또 다치려고 이러지.”

“응, 다치면 호 해 줘.”

셰어가 커피 잔을 내려놓자마자 요한이 입술을 겹쳐 왔다. 쪼옥.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입술을 뗀 요한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의 파란 눈이 장난 많은 소년의 것처럼 반짝이는 게 보기 좋았다. 세상의 때를 탈 만큼 탄 어른이 되고도 저런 눈을 할 수 있다는 게 사랑스러웠다.

셰어는 요한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물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사락사락 흘러내린다. 요한은 눈을 감은 채 잠시 그 손길을 즐겼다. 지독히도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셰어가 먼저 손을 뗐다.

“오늘은 몇 시에 끝나?”

“음…… 모르겠어. 요즘 일이 영 끝날 기미가 안 보이네.”

요한은 냉장고에서 자몽을 꺼내 시원시원하게 껍질을 벗겨 내며 시무룩하게 투덜거렸다.

“아, 데이트하고 싶다. 출근하기 싫다. 우리 전무님이 좀 덜 바쁘니까 이번에는 내가 너무 바쁘네.”

“그러게. 너랑은 맞는 게 하나도 없다.”

“말을 또 왜 그렇게 하냐?”

요한이 자몽 껍질을 까다 말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셰어는 부루퉁하게 튀어나온 요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쪽. 입술이 심심하게 부딪쳤다가 떨어진다. 담백한 접촉일 뿐인데도 자몽을 거의 떨어뜨릴 뻔할 만큼 놀란 요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셰어는 그의 손에 아슬아슬하게 잡혀 있는 자몽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바쁜 척해. 나쁜 생각 안 하게.”

“야…… 넌, 진짜…… 아니다.”

자몽처럼 빨갛게 익은 귀를 한 요한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기가 풀풀 풍기는 냉장고 속을 하릴없이 들여다보는 그의 뒤통수가 해변에 놓인 동글동글한 조약돌처럼 예뻤다.

예쁘게 껍질이 벗겨진 자몽이 하얀 그릇 위에 줄지어 놓인다. 그것을 끝으로 손을 털고 식탁에 앉은 셰어는 요한이 쉴 새 없이 떠들며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을 구경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치우면서도 착오 하나 없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요한은 혼자 대부분을 해치울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성대한 아침 식사를 금방 차려 냈다. 셰어는 그가 그 모든 음식을 해치우는 것을 구경했다. 요한이 가장 먼저 끝장낸 것은 토스트였다. 셰어는 무척 흡족해졌다.

“잘 다녀와, 자기야.”

요한이 셰어의 두 뺨에 번갈아 입을 맞추고는 손을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셰어는 먼저 차에 탔다. 어제 급하게 주차를 하느라 차를 이상하게 댄 탓에 셰어의 SUV가 먼저 나가지 않으면 요한은 차를 탈 수 없었다.

요한은 셰어가 차에 탄 후에도 뒤에 선 채 작별 인사를 하듯 손을 흔들었다. 그 바보 같은 꼴을 보고 있자니 셰어는 왠지 속이 울렁거렸다.

떨어지기 싫다.

어차피 저녁이면 볼 수 있다는 건 아는데 지금 그와 떨어지는 게 싫었다.

바닷물을 들이켠 것처럼 요한과 함께 있어도 그에 대한 갈증은 가라앉지 않는다. 한 번 요한에게 거절당했던 충격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요한을 가지고도 결핍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이 관계가 영원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셰어는 요한과 함께 있을 때면 바닥이 까마득하게 멀어지며 들뜨는 것을 느꼈고, 그만큼 추락이 두려웠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면 이번에는 멀쩡하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셰어는 요한을 외면하며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평소처럼 지내면 정말 괜찮아질 것이라 믿는 것처럼.

그러나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백미러를 바라보고 만다. 백미러에 비친 요한은 아직도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실소가 새어 나온다.

“저 멍청이.”

저 멍청이와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자신 또한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행복하다. 여태까지 가져 본 게 행복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이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나쁜 짓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조수석에 올려놓은 폰이 진동했다. 셰어의 눈에 위험한 이채가 스쳤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 표적은 일터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셰어는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삭제했다.

두 번째 단서는 낯섦이다.

매일 아침 셰어가 회사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확인하는 보고서는 세 가지였다. BNB 그룹사 전체의 현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일간 보고서, 핵심 성과 지표 그리고 V Pictures 관련 보고서였다.

V Pictures 보고서에 올라오는 내용은 다양하다. 크게는 연간 단위로 추진 중인 영화에 대한 내용이나 재무 현황을 다루기도 하고, 작게는 V Pictures 유관 인사의 변동 사항을 다루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셰어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후자였다. 셰어는 요한과 얽힌 모든 인물을 조사했다.

“클레어는 누구입니까? 전국방송 기자가 V Pictures에 갈 일이 뭐가 있죠? 연예부도 아닌데.”

셰어는 보고서에 빨간 펜으로 표시를 했다. 요한은 어제 오후 회사를 방문한 클레어와 1시간가량 시간을 보냈다. 회사 안에서 그들이 정확히 뭘 했는지를 알 방법은 없었다. V Pictures 보고서를 담당하는 비서가 재빨리 태블릿을 조작해 화면을 보여 주었다.

“방문 목적은 아직 모릅니다. 다만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화면 속에는 몇 장의 사진이 떠 있었다.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어느 오래된 극장 앞, 앳된 티가 나는 요한과 클레어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요한은 지금처럼 소년같이 웃고, 그 옆의 클레어는 요한의 어깨를 때리며 웃는다.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풋풋한 장면이었다.

“아, 그러니까 그런 사이였다.”

셰어가 무감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요한은 한 번에 한 사람만 만나는 원칙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그의 지고지순한 원칙대로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을 꿈꿀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한 번에 한 명이라는 원칙이 꼭 관계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나던 사람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갈아타는 것도 한 번에 한 명을 만나는 건 맞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지금 셰어를 사랑한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셰어는 불안을 녹이는 만트라를 기억했다.

“더 알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셰어가 내준 숙제를 한 아름 받아 든 비서진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셰어는 홀로 남았다.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 위에 그어진 빨간 줄이 선명하다.

클레어, 요한의 전 여자 친구.

에런 포츠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갈 확률이 높았다. 요한은 지나간 관계에 크게 미련을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반례가 바로 셰어 자신이기에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는 문제였다.

무슨 일을 하든 확실하게 알아보고 행동해야 한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요한의 미움을 살 것이다. 먼저 그의 속을 떠볼 필요가 있다.

셰어는 오후 일정을 확인한 후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점심에 시간 어때?]

V Pictures의 점심시간은 주변 산업 단지 평균보다 제법 긴 편이었다. 점심시간이 고작 30분인 BNB 그룹보다 2배나 긴 1시간이었다. 특별한 약속이 없다면 요한은 점심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다.

요한에게서 답장이 왔다.

[미안.]

[오늘은 일이 많아서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로 대충 때울까 해.]

셰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뭔가 수상했다. 요한은 아무리 일이 많아도 점심을 대충 때우는 법이 없었다. 제대로 먹지 않으면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요한이 문장 부호까지 제대로 찍은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문장 부호를 찍기는커녕 오타도 자주 내기 일쑤인 그가 이렇게 완벽한 문장을 썼다는 게 마치 불길한 징조 같았다.

셰어는 반드시 V Pictures를 방문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요한이 이토록 이상하게 구는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 아니, 요한의 모든 것에 대해 알아야겠다. 엇나간 집착이라는 건 알지만, 불안이 빠르게 내면을 잠식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요한 바네스의 모든 것을 조사해 주세요.]

셰어의 전체 메시지가 깜빡인 순간, 비서실에는 비상이 걸렸다. 새로운 숙제가 하달되었다.

1차 보고는 그로부터 2시간 후였다. 셰어는 요한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과 기호, 그가 만났던 50여 명의 목록을 받았다. 그 명단은 요한이 열일곱 살 때부터 지금까지 염문설을 뿌린 이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매우 길고도 자세했다.

아마 공개되지 않은 관계를 포함한다면 요한이 거쳐 온 이들은 50명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셰어는 내심 50명보다 낮은 숫자를 생각했기에 예상을 훨씬 상회하는 긴 명단을 보고 기분이 아주 더러워졌다. 과연 그 잘 다듬어진 매너는 거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셰어는 그 길고도 자세하게 자신을 엿 먹이는 보고서를 손수 파쇄기에 처넣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을 뻔했다. 불안은 마른풀에 불이 번지듯 거세게 타오른다.

귀밑이 시큰거리도록 이를 악문 탓에 반듯한 턱이 단단히 경직된다. 사람들이 볼 수도 있는 곳에서 이리도 쉽게 흐트러지는 것은 요한의 문제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만이 셰어를 최상의 기분을 느끼게 하고, 또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셰어는 요한을 사랑한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기에 셰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은 요한의 것처럼 마냥 순수하지 않았다.

셰어는 요한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은밀하게 통제했다. 그의 앞에 나타날 고난을 슬쩍 치워 주고, 감내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남겨 둔다. 요한이 이상을 감지할 수 없도록 모든 일은 치밀하게 은닉된다.

겉보기에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셰어가 가장 큰 권한을 쥔 것처럼 보이지만, 셰어는 감히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요한의 사소한 변화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잠시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셰어를 휘두르는 것은 요한이었다.

바닥이군. 셰어는 빠르게 돌아가는 계기판을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V Pictures 주차장, 가장 으슥한 자리에 검은 SUV가 정차했다. 건너편 끄트머리에 요한의 차가 보인다. 눈에 띄는 노란 클래식 카는 주변의 알록달록한 차들 사이에 서 있으니 그리 튀지 않아 보였다.

셰어는 선팅이 짙게 된 차 안에 숨죽이고 앉아 자신도 모르는 뭔가를 기다렸다.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 요한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은 그 묘한 예감 때문이었다.

점심시간이라 일찍부터 사무실을 빠져나온 사람들이 각자 차를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점심시간이 한 시간쯤 되니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가까운 식당으로 향하는 듯했다.

요한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어떤 여자와 웃고 떠들며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웃으며 요한의 등을 마구 때리자 요한이 엄살을 떨며 몸을 비틀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해사하게 피었다. 그들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처럼 사이좋게 요한의 차에 탔다.

셰어는 여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클레어. 조잡한 화질의 사진으로만 보았으나 요한과 관련이 있는 인물을 잊을 리가 없다.

요한이 거짓말을 했다.

저 여자와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 사실을 달리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셰어는 차갑게 웃었다.

“아…… 요한.”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셰어가 계산한 대로라면 요한의 평균적인 연애 기간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요한은 이미 한 번 셰어를 찬 적도 있으니 두 번 못 찰 리가 없다.

머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었다.

셰어는 자신이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났다는 것을 자각했다.

마지막 단서는 소리 없는 기폭이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요한의 차를 검은 SUV가 뒤따른다. 도로에 진입하려 요한의 차가 정차한 틈을 타 옆 차선으로 옮겨 간 SUV가 옆에 바짝 붙었다.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빠르게, 그 옆을 지나치며 사이드 미러가 부딪친다.

쾅!

두 차량의 사이드 미러가 충돌하며 기계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견고한 SUV의 것과 달리 쉽게 부서진 클래식 카의 장식적인 사이드 미러가 날아갔다.

요한이 애지중지하던 차였는데 아깝게 됐다. 역시 요한의 다음 차는 더 튼튼한 것으로 뽑아 주는 게 좋겠다.

셰어는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요한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황당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보니 바닥을 기던 더러운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셰어는 느긋하게 차창을 내렸다.

셰어를 본 요한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얼어붙었다. 그를 당장 쓰러뜨려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악의적인 충동이 기어오른다. 셰어는 서늘하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바쁘게 가다 보니.”

‘바쁘게’에 강세를 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는지 요한이 인상을 찌푸린다.

“너 지금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그거 아니니까 거기 서.”

아니긴 뭐가. 거짓말하다 들킨 놈이 뻔뻔하기도 했다.

“바빠서. 수리비는 알아서 청구하시죠.”

셰어는 입술만 올려 웃어 주고는 도로 차창을 올렸다.

“야! 아니, 오해라니까? 기다려!”

다급하게 소리치는 요한을 뒤로하고 SUV가 쌩하니 가 버렸다.

“아오…… 미치겠네.”

요한은 빠르게 멀어지는 차를 노려보다 셰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일이 꼬이려니까 이렇게까지 꼬인다. 다시 생각해 보니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일 법한 정황이었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매일같이 야근하고, 애인의 데이트 신청은 거절하고, 대신 웬 낯선 여자와 나란히 차를 탄 게 목격되었다. 정황을 하나하나 되짚어 본 요한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어졌다.

아, 존나 망했다. 어떡하지.

하필이면 그때 조수석에 타고 있던 클레어가 차창을 내렸다. 그녀는 흥분해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방금 찰스 베일리 맞지? 요한! 별로 안 친하다며.”

뭐 때문에 쌓여 있는 일을 뿌리치고 이 재앙의 원흉을 얼른 보내 버리려고 한 건데. 갑자기 셰어가 나타나는 바람에 일이 다 꼬여 버렸다. 요한은 낭패감이 짙게 깔린 얼굴로 변명했다.

“안 친해. 내 사이드 미러 날려 버린 거 봤지? 완전 원수야.”

클레어가 불쑥 찾아온 것은 어제 오후였다. 동부에서 신세를 진 일을 기억한 요한은 말도 없이 찾아온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그간 있었던 일을 떠들었다. 그러나 그 좋은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요한, 찰스 베일리 알지? 그때 둘이 손잡고 다니는 거 보니까 친해 보이던데.’

‘어어? 알지. 우리 회사 투자자잖아. 그때는, 뭐, 워낙 사람이 많았잖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지.’

‘무슨, 그렇다고 손을 잡을까! 그 사람 결벽증 같은 거 있는 걸로 유명해. 둘이 무슨 사이야?’

그렇게 취조가 시작된 것이다. 요한은 클레어를 적당히 상대하다가 일을 핑계로 쫓아냈지만, 그녀는 끝까지 포기를 모르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나 출장 내일까지거든. 내일 또 올게. 그때는 꼭, 자세히 얘기해 줘.’

그때 무조건 안 된다고 해야 했는데.

요한은 한숨을 쉬며 도로 위를 굴러다니는 사이드 미러를 주워 트렁크에 대충 던져 넣었다. 그러는 내내 클레어는 신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찰스 베일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줄은 몰랐어. 나 이번 출장도 BNB 취재 온 거잖아. 이렇게 닳도록 들락거려도 얼굴 보기 힘드신 분이 딱 두 분 있어요. 샬롯 베일리, 찰스 베일리. 누가 몸값 비싸신 분들 아니랄까 봐 장난이 아냐. 요한, 내가 진짜 인터뷰 한 번만 성사시켜 주면…….”

짧은 시간 안에 그 많은 단어를 정확하게 뱉을 수 있는 것도 정말 놀라운 재주였다. 요한은 조금 기가 질려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클레어.”

“요한, 진짜 어떻게 안 될까?”

요한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한참을 떠들던 클레어가 놀란 눈으로 요한을 바라본다.

“먼저 가. 나는 차 수리부터 맡겨야겠다.”

“어? 아, 그래. 알았어.”

요한은 집에 우환이라도 있는 것처럼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클레어는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이 든 가방을 들고 내렸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제 명함을 요한에게 찔러주며 당부했다.

“서로 돕고 살아야지. 연락해.”

진짜 도움이 필요한 것은 지금인데, 클레어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찰스 베일리, 인터뷰. 그 말을 몇 번이나 언급했는지 뇌리에 두 단어가 새겨질 듯했다.

요한은 사이드 미러가 하나 날아간 차를 타고 무작정 BNB 사옥으로 향했다. 이런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지금 당장 셰어를 만나 그와 얘기를 나누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 가는 내내 전화를 걸었으나 셰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한은 초조하게 속력을 높였다.

빨리 셰어를 만나 해명해야 한다. 거짓말을 한 건 잘못했지만 이건 다 너를 보호하기 위한 거였다고, 전 여자 친구 얘기를 들으면 불쾌해할 것 같아서 숨긴 거라고 얘기해야 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지긋지긋한 수신 거절 메시지가 반복된다. 요한은 핸들을 두드리며 욕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전화는 꼭 받기. 규칙은 간단히 무시당했다. 설명을 하든 잘못을 빌든 상대가 있어야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정작 그 상대는 전화도 받지 않으니 속이 답답했다.

BNB 사옥에 도착한 요한은 입구에서 더 나쁜 소식을 들었다.

“전무님이 안 계시다고요?”

“네, 외근 중이십니다. 혹시 미리 약속을 잡으셨습니까?”

저번에 엘리베이터를 잡아 주며 환대하던 직원이 웃으며 예의 바르게 물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진짜 외근 중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결국 요한은 갈 곳 없이 로비에 앉아 셰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메시지 알림이 떴다. 혹시 셰어인가 싶어 급히 메시지를 확인한 요한이 침음성을 흘렸다.

[대표님 회의 30분 전인데 어디세요?]

“아, 맞다. 회의…….”

지금 출발해도 회의에는 늦을 것이다. 게다가 머리가 복잡해서 지금은 무슨 일을 해도 집중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일이든 뭐든, 일단은 셰어가 우선이었다. 요한은 생각나는 대로 답장을 작성해서 보냈다.

[나못가교통사고당했어]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니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속이 따끔거린다. 요한은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헛기침을 했다. 기껏해야 사이드 미러만 날아가긴 했지만 교통사고는 교통사고다.

* * *

[표적이 BNB 사옥 1층 로비에서 대기 중입니다.]

3시간째 같은 메시지가 온다. 셰어는 메시지를 읽자마자 삭제했다. 처음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셰어는 당장 로비로 뛰어 내려갈 뻔했다. 화풀이로 사이드 미러를 날려 버렸는데, 요한은 그길로 자신의 뒤를 쫓아온 모양이다.

그 차를 그대로 타고 왔을까? 다친 곳은 없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절로 몸이 움직였다. 그러나 셰어는 사무실을 벗어나기 전에 멈춰 섰다.

뭘 잘했다고.

요한은 벌을 받아 마땅한 짓을 했다. 셰어는 자리에 앉아 남은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누가 벌을 받는 것인지 모호해졌다. 예민해진 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새까만 그을음을 피우는 불꽃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요한이 이곳까지 쫓아와서 하려는 말이 이별일까 봐 두렵다. 혹시 요한이 이별을 고하는 게 아니라 서툰 변명을 한다면, 아무리 형편없는 변명이라도 쉽게 믿어 주고 말 자신이 두려웠다. 사랑에 눈먼 자들을 비웃었던 게 무색하게도 자신은 그들과 똑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씁쓸한 웃음이 번진다.

혹시 모르지. 만약 요한이 헤어지자고 말한다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추하게 그를 붙잡고 늘어질지도.

화면 속의 글자들이 제각기 흩어져 보인다. 어지럼증이 일었으나 할 일이 많았다.

데일의 테러 사건 이후, BNB 그룹 내에서도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선 데일의 유가족에게는 비공식적으로 막대한 금액의 위로금이 지급되었으며, 연구소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외부 자문 인력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가 실시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안정적인 고용을 위해 인사 제도가 전면적으로 개편될 예정이라는 것이다. 단순히 제도만 바꾸는 문제가 아니었다. 보완책이며 고정비 상승에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도 마련해야 했다. 까마득하게 쌓인 일을 처리하려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나 셰어는 담담하게 그 일을 감내하기로 했다.

지옥에나 떨어져.

아직도 동반 자살을 시도했던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울면서 웃었던 그의 얼굴도.

데일은 그날 사고에서 즉사했다. 셰어는 그의 죽음에 깊은 책임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밖에 살지 못해서 몰랐다는 핑계로는 가책을 이길 수 없었다.

오래된 악우처럼 찾아온 두통이 가뜩이나 예민한 신경 줄을 결딴낸다. 셰어는 핏대가 선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아플 시간도 없는데, 제 일도 내팽개치고 남의 회사에서 죽치고 있는 화상 때문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셰어는 1층 안내 데스크에 전화를 걸었다.

“로비에 요한 바네스 대표가 있습니까?”

평소 같으면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했겠지만 마음이 급해 용건이 먼저 튀어나왔다.

“내 차에서 기다리라고 전하세요.”

-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셰어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두개골을 조각내는 듯한 통증이 울린다. 셰어는 신경질적으로 서랍을 뒤져 그 안에 굴러다니던 진통제를 찾았다. 차가운 물과 함께 알약을 두 알 삼키자 머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식도를 타고 몸속까지 번지는 듯했다.

이렇게 머리가 아플 때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안으며 아프지 말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남자가 그리워진다. 요한은 지금쯤 주차장에 있는 차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충실하게 자신을 기다릴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오늘 아침 셰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요한이 상상에 겹쳐졌다.

요한의 마음이 변한다면, 그 없이 살 수 있을까.

견디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든다. 셰어는 부러뜨릴 듯 세게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묻은 만년필이 까만 얼룩을 남기며 종이 위를 구른다.

이래서 이토록 무거운 감정은 알고 싶지 않았다.

셰어는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퇴근 시간이 30분도 더 남았다. 한 번도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간 적은 없었기에, 문을 열고 나서자 비서진들이 놀라 셰어를 바라보았다.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수고해요.”

당혹 어린 인사가 쏟아진다. 낯빛이 영 좋지 않아 보였는지 걱정하는 말들이 따라붙었다.

괜찮습니다. 예의상으로라도 해 줘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조금도 괜찮지 않다. 셰어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질렀다. 주차장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었다. 시간을 길게 늘여 놓은 것처럼 아무리 걸어도 주차장은 까마득한데, 스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가는 배경처럼 모두 흐릿하기만 했다.

이토록 압도적인 인력에 짓눌리는 것은 참기 어려울 만큼 불쾌하다.

요한.

검은 SUV 앞에 서 있던 요한이 셰어를 바라본다. 잘만 움직이던 다리가 저절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셰어는 의식적으로 숨을 골랐다.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미안한 듯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보자 따끔한 통증이 불규칙하게 몸속을 난도질한다.

진통제가 잘 듣지 않는 것 같다. 셰어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남의 직장에서 이런 식으로 시위하는 거, 불쾌할 거라고는 생각 안 합니까?”

선을 긋는 말투에 요한이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는 입술만 달싹이다 쥐어짜듯 말했다.

“난, 곤란하게 할 생각은…… 미안. 생각이 짧았어.”

“말도 짧고.”

셰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구두가 바닥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요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요한은 완전히 기가 죽어 대답했다.

“음…… 미안, 합니다.”

정중하게 사과하는 게 어색한지 요한이 더듬더듬 말했다. 셰어는 요한을 훑어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아침에 출근할 때 입은 옅은 하늘색 셔츠와 정장 바지가 살짝 구겨져 있었다. 뒷머리도 조금 뻗쳐 있었다.

기다리는 내내 몸을 배배 꼬고, 머리칼을 마구 쥐어뜯다가 급히 단장한 게 분명하다. 미처 손이 닿지 않은 머리칼이 우스꽝스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셰어는 자꾸만 그에게로 뻗어 나가려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을 짓누르는 차 키가 발을 붙이고 있는 이곳이 회사 주차장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회사는 긴 얘기를 나눌 만한 곳이 아니었다.

삑, 소리와 함께 차 문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셰어는 말없이 차에 탔다. 그러자 요한이 급히 차 문을 열었다. 그는 셰어가 혹시라도 자신을 이대로 버리고 가기라도 할세라 얼른 시트에 궁둥이부터 붙였다.

셰어는 그가 앉은 쪽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다.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한 요한이 두 무릎을 얌전히 붙이고 앉아 손까지 공손하게 모았다. 가히 사과의 정석이라 할 만한 자세였다.

“미안해. 거짓말해서.”

예상한 그대로의 서두였다. 말이 짧다고 지적한 것이 바로 직전의 일인데, 요한의 말투는 평소와 같았다. 둘만 있을 때면 평소처럼 말해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셰어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심드렁한 반응에 초조해졌는지 요한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린다.

셰어는 그 길쭉하고 모양 좋은 손을 마구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쩔쩔매는 요한을 끝까지 몰아세워 울며 빌게 하고 싶다.

셰어의 머릿속에서 요한은 맨몸으로 바닥을 뒹군다. 이지를 잃고 울며 애원하는 얼굴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럴 때의 요한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생각을 그대로 뱉어 내곤 했다. 잘못했어. 살려 줘. 좋아.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이 기억 속에서 뒤섞인다.

“잘못했어.”

요한이 상상과 같은 말을 했다.

“같이 있던 사람은 저번에 그, 컨벤션 센터에서 날 도와준 사람이야. 덕분에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거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 사람이 널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어. 당연히 거절했지만, 포기할 것 같지 않았어. 빨리 보내 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난 널 보호하려고 한 것뿐이야.”

듣기에는 참 아름다운 사연이지만, 과연 그게 전부일까? 요한은 그녀가 전 여자 친구라는 건 쏙 빼놓고 말했다.

셰어는 불쾌한 웃음이 치미는 것을 참으며 시동을 걸었다. 조수석에 앉아 눈치를 살피는 요한의 시선이 따갑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 사람은 왜 그때 요한을 도운 건지, 왜 전 여자 친구라는 말은 안 하는지, 지금은 아무 감정도 없는 건지. 이토록 초라한 질문을 거듭하면 너는 나를 어떻게 볼지.

네가 나를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 너는 아는지.

구구절절 말하기도 뭐한 이야기였다. 셰어는 긴 숨을 내뱉었다.

“안전벨트 매.”

지친 목소리로 말하자, 바짝 긴장한 요한이 냉큼 안전벨트를 맸다. 또 무슨 지시를 내릴까 봐 귀를 쫑긋 세운 그를 보자 뾰족한 마음이 든다.

이건 불공평하다. 요한은 셰어 없이도 잘만 지내겠지만 셰어는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용서할 수밖에 없는 거라면 못되게 굴기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다.

SUV가 주차장을 빠져나와 햇살 속을 달린다. 선팅이 짙은 차 안에도 환한 빛이 들어차 눈이 시렸다. 셰어는 묵묵히 집으로 차를 몰았다.

“저, 사실은.”

침묵을 견디다 못한 요한이 실토했다.

“사실은 클레어, 그 사람이랑 잠깐 만난 적 있어. 지금은 정말 아무 사이 아니야. 정말이야.”

셰어는 말없이 시계를 보았다. 생각보다는 오래 참았다. 얼굴을 보자마자 무릎이라도 꿇을 줄 알았더니, 그보다는 못했지만 차에 탄 지 5분도 안 되어 요한은 제 잘못을 모두 자백했다.

만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더라면 요한은 오늘 일을 영영 숨겼을 것이다. 셰어는 그 여자와 즐겁게 웃던 요한을 떠올렸다. 한 프레임 속에서 웃는 그들은 서로 닮았다. 아마 요한의 성정이 그러하듯 풋풋하고 사랑스러운 커플이었을 것이다.

핸들을 쥔 셰어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유난히 파르스름하다. 그 아래 흐르는 게 피가 아니라 어떤 소름 끼치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셰어는 의식적으로 손에서 힘을 조금 뺐다. 불룩하게 솟은 핏줄이 한결 희미해진다. 치졸한 불안, 더러운 욕망, 질투 따위가 혈관 속에 흐른다. 이런 불순한 마음은 평생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셰어가 무엇을 감추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숨긴 것을 사과했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네가 나랑 만났던 사람 얘기 듣는 거 싫어하니까, 나는…….”

“잘 아네.”

셰어가 조용히 말하자, 벼락이라도 친 것처럼 요한이 크게 움찔했다. 셰어는 글러브 박스를 열어 그 안에 굴러다니는 젤을 꺼냈다.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다. 범인은 요한이었다.

“내가 더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셰어는 젤이 든 길쭉하고 투명한 통을 요한의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 두었다.

“사람 등신 만드는 거야.”

차가 부드럽게 코너를 지나 인적이 드문 도로로 진입한다. 셰어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BNB 사옥이 위치한 곳보다는 다소 한적했다. 셰어는 느릿느릿 해가 기우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다치기 싫으면 지금부터 네가 할 일을 해.”

뭘 해야 하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그렇게 묻듯 요한을 쏘아보자 발갛게 달아오른 요한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셰어는 조금 웃고 말았다. 그의 여린 얼굴을 볼 때면 관대하게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이대로 차를 어딘가에 처박고 싶은 마음이 든다.

“대답 안 해?”

“어어, 해.”

어물거리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한다는 말과 달리 요한은 젤이 든 통을 만지작거릴 뿐 몸에 손도 대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10여 분이었다. 요한은 초조한 듯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셰어는 그의 동요를 못 본 체하며 묵묵히 운전만 했다. 침묵 속에서 요한이 굼뜬 손으로 바지를 벗었다. 바지와 브리프를 겨우 무릎까지 벗어 내린 요한이 반쯤 눕듯 시트에 등을 깊게 묻었다.

진짜 해? 그렇게 묻는 눈으로 요한이 셰어를 바라보았다. 셰어는 시계를 곁눈질했다.

“10분도 안 남았는데. 자신 있나 봐.”

“해, 한다니까.”

요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꿀쩍거리며 젤을 짜내는 소리가 들린다. 투명한 젤을 손에 조금 짜낸 요한이 제 다리 사이로 깊게 손을 밀어 넣었다. 스스로 그곳을 더듬는 것이 불쾌한지 그의 이마가 잔뜩 찌푸려져 있다.

“으…… 윽, 흐…….”

자꾸만 새어 나오는 소리를 참기가 어려운지 요한이 차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술을 잘근거리는 얼굴이 온통 붉었다.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은 채 다른 손으로 젖은 소리가 나는 뒤를 쑤셨다.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셰어는 요한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요한은 목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린 채 할딱거렸다. 여러 차례 짓씹은 탓에 붉게 젖은 입술이 반들거린다. 으응, 흑, 숨죽여 앓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구겨진 물색 셔츠 아래 울긋불긋한 맨살이 보였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정사에서 요한이 얻은 흔적이었다. 짐승이 물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살벌한 잇자국과 누가 봐도 지흔이 분명한 멍이 여럿이었다. 잘 보니 노르스름한 멍처럼 변한 순흔도 보였다.

빵! 뒤에서 들린 경적에 셰어는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심장이 떨어지게 놀란 요한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리를 오므렸다. 그는 혹시 누가 볼까 두려운지 창밖을 흘깃거리며 무릎에 어설프게 걸려 있는 바지를 끌어당겼다.

“뭐 해? 마저 하지 않고.”

셰어가 엄하게 지적하자 당황한 요한이 입술만 달싹였다. 그는 울 것처럼 찌푸린 얼굴로 빠르게 속삭였다.

“저 사람, 나보고 그런 거지? 나한테 경고한 거잖아. 이상한 짓 한다고. 방금, 빵 한 것도…….”

“선팅이 짙어서 아무도 못 봐.”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누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마음대로 해. 정 못 하겠으면 여기서 내리든가.”

날카로운 말에 찔린 것처럼 요한이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요한의 눈 속에 물결치는 동요가 보인다. 그는 물기가 고인 눈으로 셰어를 노려보았다. 그 눈을 보자 셰어 역시 칼로 심장을 저미는 것처럼 저릿한 통증을 느꼈다.

너무 심했나.

그러나 무슨 말을 꺼낼 만한 타이밍은 이미 지나가 버렸다. 요한은 항의하는 대신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한은 약이라도 올리는 것처럼 감질나게 깔짝거리기만 했다. 입을 꾹 다문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는 게 제대로 밑을 풀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설렁설렁 시늉만 하는 것이 묵언의 시위나 다름없었다.

뭘 하는 것 같지도 않게 꼼지락거리는 걸 보다 못해 셰어가 손을 뻗었다. 설 기미도 보이지 않는 요한의 성기를 대뜸 움켜쥐자 그가 놀라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운전! 아, 아흐, 아파.”

풀 죽어 있던 성기는 손만 닿았는데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발기했다. 셰어는 손장난이라도 치듯 요한의 성기를 아무렇게나 주물럭거렸다.

“너 하는 짓이 좀 장난 같아야지. 같잖아서 못 봐 주겠어.”

“아읏, 흐, 잘, 잘하면 되잖아. 잘, 할게. 으응?”

그것만으로도 어쩔 줄 모르겠는지 요한이 셰어의 손등을 더듬으며 신음했다. 셰어는 요한의 손을 매정하게 떨치며 그의 성기를 놓아주었다. 그 잠깐의 자극이 몹시도 강렬했는지 요한은 셰어의 손이 떨어지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

“다 와 가네.”

셰어가 여상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린 것처럼 요한이 다급하게 손을 놀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고든 팔뚝에 힘이 들어간다. 살짝 걷어 올린 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에 두드러진 핏줄이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불룩하게 솟았다. 반쯤 누운 자세로 몸속을 헤집기가 힘든지 요한의 허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아, 젠장…….”

찰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난다. 요한이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요한은 소리를 죽이려 애썼지만 밑에서 나는 소리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조용한 차 안에 뒤를 쑤시는 소리만 울렸다. 그 소리가 창피했는지 찔꺽거리는 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이번만큼은 셰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거의 다 왔으니 벌은 집에 들어가서 줘도 충분했다.

“바지 올려. 이제 곧 집인데 조신하게 굴어야지.”

“으응…….”

요한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적거리며 바지를 끌어 올리고 발기한 성기를 끙끙거리며 브리프 속에 욱여넣는 것이 힘겨워 보인다. 발기하기 전에도 커다란 성기를 발기한 후에 옷 속에 구겨 넣는 것은 제법 까다로운 일이었다. 굼떠진 손으로는 옷 아래를 감추는 것만이 고작으로, 오른쪽 허벅지를 향해 길게 늘어진 성기의 형태가 옷 위로 그대로 드러났다.

요한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셰어의 눈치만 보았다. 아무리 봐도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몰골이었으나, 이미 그들은 셰어의 맨션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셰어의 맨션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그의 성향에 맞게 주위의 넓은 부지를 모두 매입하여 키가 큰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두었다. 그랬기에 맨션은 숲속의 저택처럼 우뚝하게 서 있었다. 잘 정비된 도로를 지나 차고까지 가는 길은 고요했다.

“요한.”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요한의 숨이 흐트러졌다.

“이제부터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한은 실수를 했다. 요한은 말하고도 아차 싶었는지 냉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 식으로 죄가 계속 늘어난다면 요한이 제 죗값을 다 갚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셰어는 차고에 차를 댄 뒤 집으로 이어진 통로로 이동하는 내내 요한을 투명 인간 취급했다. 허락 없이는 입을 열 수 없었던 요한 역시 침묵했다. 온몸을 짓누르는 침묵의 무게가 버거워 요한은 발을 질질 끌며 느리게 걸었다.

집 안으로 통하는 문을 연 셰어가 요한의 등을 떠밀었다. 곧 일어날 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요한이 비척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자마자 셰어가 벽면의 컨트롤러를 조작해 집 안의 블라인드를 모두 내렸다. 아늑한 조명이 내려앉은 어둑한 집 안은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집처럼 춥고 생활감이 없었다.

서로의 집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주로 지내는 곳은 요한의 집이었다. 요한은 익숙하지 않은 넓고 휑한 공간에 질려 셰어의 뒤만 졸졸 따라갔다.

긴 복도를 지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다. 그리고 다시 복도를 지나 안쪽 방으로 향한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자 요한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요한은 그 방에서 멀쩡하게 나온 적이 거의 없었다.

셰어는 잠겨 있는 방문을 지문 패드를 조작해 열었다. 방음 처리가 되어 있는 묵직한 문을 열자 온전히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꾸며져 있는 방이 나타났다.

방음 처리가 되어 있는 벽은 부딪쳐도 크게 다치지 않게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소재로 만들어져 있다. 에어컨디셔너가 돌아가고 있는 실내는 조금 서늘했고, 기이할 정도로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들어와야지.”

문을 붙잡고 선 셰어가 요한의 등을 쓰다듬었다. 요한은 몸을 움츠리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커다란 서랍장에는 편집증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정리된 플레이 도구가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데, 방의 중앙에는 얼핏 보면 조형 작품 같아 보이는 형틀이 놓여 있었다.

요한이 겁먹은 눈으로 셰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것이 조형 작품이 아니라 형틀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다. 셰어는 옷 위로 두드러진 요한의 성기를 더듬었다. 아까보다 더 커진 성기가 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벗어.”

셰어는 희미하게 젖은 손을 요한의 셔츠 가슴팍에 문질러 닦으며 퍽 다정하게 속삭였다. 험악하게 굴 필요도 없이 이렇게 겁을 먹고 좆을 세워 대니, 조금은 친절하게 대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성의가 무색하게도 요한은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몸을 휘청거리며 더디게 옷을 벗었다. 단추를 푸는 손이 자꾸만 헛돌고, 지퍼를 내리는 손이 와들와들 떨려 지, 지지, 직 하는 소리가 난다.

그렇게 무서워하면서도 브리프가 흥건하게 젖도록 발기한 게 우스웠다. 요한은 제 꼴이 창피한지 허둥지둥 브리프를 벗고는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맞잡아 제 성기를 감추려 들었다. 그런다고 가려질 크기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셰어는 요한의 어깨를 짚었다. 손이 닿자마자 흠칫 튀어 오르는 어깨를 벽에 밀어붙이자, 요한은 셰어가 이끄는 대로 벽에 등을 붙이고 선 채 눈만 깜빡였다. 왜 이러는지 묻는 듯했다.

“손 내리고 가만히 있어.”

요한은 순순히 앞을 가리던 손을 양옆으로 늘어뜨렸다. 끝이 젖은 성기가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셰어는 보기만 해도 미끈거리는 액을 뱉어 내는 선단 끝의 오목한 요도구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항상 물을 많이 흘렸다.

시작부터 헤프게 질질 싸기 시작한 그 구멍을 보자 불온한 마음이 치민다. 항상 헤프게 구는 요한의 습성을 손볼 때가 온 것이다. 셰어는 요한에게서 등을 돌려 서랍장으로 향했다.

셰어가 서랍장에서 필요한 것을 꺼내는 짧은 시간이 요한에게는 무척 길게 느껴졌다. 미세한 소음에도 예민해진 신경이 곤두선다. 가뜩이나 없는 요한의 인내심은 금세 닳아 없어져 버렸다. 그랬기에 셰어가 길쭉하고 가느다란 막대를 들고 돌아왔을 때, 요한은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뭐야? 그거…… 그거 뭐야!”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지.”

셰어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 기세에 찔끔한 요한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오면서도 깨물어 댄 입술은 빨갛게 부르텄다. 그것을 빤히 보던 셰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요한의 브리프를 집어 들었다. 체액으로 젖어 미끈거리는 속옷을 대충 뭉쳐 그의 입가에 가져가자 요한이 식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비릿한 냄새가 나는 브리프가 요한의 입술에 문질러졌다.

“벌려. 내가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말 안 들은 건 너야.”

“으…….”

물기 어린 눈으로 셰어를 노려보던 요한이 결국 입을 열었다. 제 체액으로 젖은 속옷을 문 채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내리깔았다. 꼴도 보기 싫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셰어는 필요한 준비를 했다. 라텍스 장갑을 끼고 알코올 스왑으로 장갑을 낀 손과 도구를 소독했다. 예민한 곳을 쑤셔야 하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조치였다. 싸한 알코올 냄새가 풍기자 요한이 몰래 셰어를 흘끔거렸다. 무슨 짓을 하기에 이런 냄새가 나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셰어는 장갑을 낀 손으로 요한의 성기를 신중하게 감싸 쥐었다. 원래대로라면 성기도 소독해야 하지만 이렇게 물을 질질 흘려 대고 있어서야, 소독이 의미가 없다. 요한은 셰어가 의사처럼 제 성기를 들여다보는 것을 불안하게 살폈다.

이런 상황에서도 꼿꼿함을 유지하고 있는 성기 끝에 말간 물기가 맺힌다. 셰어는 요도구를 벌리듯 그 주위를 엄지로 슬쩍 문지르며 경고했다.

“움직이지 말고, 소리도 내지 마.”

가장 얇은 두께의 카테터를 성기에 겨눈 순간, 요한이 겁먹은 신음을 흘리며 셰어의 어깨를 붙들었다.

“으, 으으응, 흐…… 우으.”

크게 뜨인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가 못 하겠다고 세차게 고개를 젓자 눈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진다. 셰어의 손이 아프게 성기를 그러쥐었다.

“으음! 윽!”

요한이 허리를 휘며 바들바들 떨었다. 가느다란 카테터가 체액을 뱉어 내는 구멍을 거슬러 오르며 꿰뚫었다. 움직이면 어디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는지, 요한은 잔뜩 경직된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신음을 참느라 새빨갛게 달아오른 몸에 벌써 열꽃이 피었다.

울컥거리며 선액을 흘리던 성기도 빨갛게 변했다. 카테터를 반쯤 밀어 넣자, 성기는 배출 기능을 상실했다. 셰어의 어깨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차가운 금속이 느리게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우, 으윽, 흐, 으으…….”

요한이 숫제 히끅히끅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그가 입에 문 브리프가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이 보인다. 울먹이며 벌어진 입술이 가련하게 떨렸다. 셰어는 그를 달래듯 손에 쥔 성기를 수음하듯 쥐고 느리게 흔들었다. 안에 든 단단한 막대가 이리저리 짓눌리는지 요한이 고개를 마구 저으며 울었다.

“흐윽! 히, 흐으…… 읏! 으으…….”

“하지 마?”

“우으으…….”

그래도 아직 말을 알아들을 정신은 있었는지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배가 들썩인다. 처음으로 앞을 뚫리는 게 괴로운지 요한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시작부터 이러면 어떡해, 요한.”

시작이라는 말에 요한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요한은 성기가 큰 만큼 카테터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도 더 길었다. 그 덕분에 카테터의 매끄러운 부분은 어렵지 않게 들어갔지만, 문제는 카테터의 3분의 2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돌토돌하게 돌기가 돋은 부분이다.

셰어는 뭉툭한 손잡이를 쥔 채 자그마한 구슬이 줄줄이 꿰인 형태의 카테터를 꾸욱 밀어 넣었다. 잘게 경련하는 허리가 튀었다. 어깨를 파고드는 요한의 손끝이 날카롭게 손톱을 세웠으나 셰어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카테터를 밀어 넣었다.

“흐, 윽! 으, 끄흐으…….”

구슬 형태의 금속이 요도를 비집고 들어갔다. 볼록하고 오목한 요철이 요도를 벌리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앞으로 배출되지 못한 욕망이 맺힌 성기가 보기 흉악할 만큼 핏줄을 세우며 발기했다. 끝이 빨갛게 물든 성기는 이제 셰어의 허락 없이는 한 방울도 흘리지 못한다. 퍽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

셰어는 요한의 입에 물렸던 브리프를 빼 주었다. 타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천 뭉치가 빠져나오며 요한의 입가와 턱을 투명하게 적셨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이미 흠뻑 젖어서 사실 그다지 티가 나지도 않았다. 서러운 울음이 흐르는 요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망가진 얼굴을 보자 비틀린 만족감이 뻐근하게 차오른다. 셰어는 침으로 범벅이 된 그의 입술을 장갑을 낀 손으로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체리코크, 기억하지?”

요한이 멈추고 싶다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그 사실을 주지시켜 주자 초점이 없던 요한의 눈 속에 다시 빛이 돌아온다. 요한은 그래도 되냐는 듯이 셰어를 조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셰어는 웃으며 단서를 하나 달았다.

“미안한 만큼만 참아.”

그 말에 숨은 함정을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 요한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셰어는 귀여운 장식을 매단 요한의 성기를 뿌리 쪽부터 끝까지 느릿하게 쥐고 흔들었다.

“별로 안 미안하면, 지금이라도 말하든가.”

“아아, 앗, 아, 아! 흐, 으읏…… 아파. 셰어, 아파아…….”

“너한테 달렸어, 요한.”

끝까지 밀어 넣었던 카테터가 구슬 두 알만큼 도로 밀려 나왔다. 찔끔거리며 새어 나온 선액이 묻어난 카테터가 반들거린다. 요한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한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로 셰어의 어깨를 매달리듯 붙잡았다.

셰어는 뭉툭한 카테터 손잡이를 꾸욱 눌렀다. 요한의 등이 파득거리며 벽을 밀었다. 그는 요도구가 벌어지며 느리게 구슬을 집어삼키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끅끅거리는 숨을 삼키는 입술이 주문처럼 셰어를 불렀다. 그러면 통증이 가시기라도 할 줄 아는지, 셰어, 셰어, 하고 자꾸만 불러 댔다.

셰어는 의식적으로 숨을 골랐다. 넣고 빼는 것도 버거워하는 곳을 마구 들쑤셔 대고 싶은 충동이 치민다.

땀에 젖어 축축한 손이 셰어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셰어가 반사적으로 몸을 굳힌 탓에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셰어를 향해 기울어졌던 요한의 얼굴은 셰어의 어깻죽지에 파묻혔다. 그는 셰어의 슈트를 더럽히며 뺨을 비볐다.

“잘못했, 어어……. 흑, 마음, 풀릴 때까지…… 끅, 흐읏.”

마음 풀릴 때까지 내가 뭐든지 다 할게.

한 치 앞도 모르고 요한이 공수표를 날렸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