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26)

* * *

구멍이 허전해. 어서 네 좆물로 채워 줘.

귓속에 녹은 캐러멜처럼 끈적하게 달라붙은 말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요한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 곧 화들짝 놀라 제 귀를 벅벅 문질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귀가 간지러웠다. 지난밤 셰어가 핥았던 자리가 독이라도 오른 것처럼 따갑고 간지러워 자꾸만 손이 간다.

이 미친 새끼. 셰어는 자신이라면 감히 그가 시켜도 절대 못 할 것 같은 말을 참 잘도 했다. 그 금욕적인 입술로 지저분한 말을 뱉을 때면 요한은 다시는 그런 말을 지껄이지 못하게 셰어를 온통 뭉개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물론 입술로, 온몸으로 상냥하게 뭉개 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

이따가 만나기만 해 봐라. 이렇게, 저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테다. 요한은 혼자 진지하게 다짐하다가, 상상만으로 발기한 제 앞섶을 발견하고는 살포시 다리를 꼬았다.

회사에서는 일을 해야 하는데 지난밤의 여파가 너무 컸다. 눈을 뜬 순간부터 계속 셰어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요한은 창고처럼 시놉시스가 쌓인 책상을 정리했다. 신작은 제로 베이스로, 다시 처음부터 구상을 시작한 터라 쓸 수 있는 시놉시스란 시놉시스는 모두 긁어 온 참이었다. 이번에는 받아 놓은 모든 시놉시스를 긁어 왔기에, 그 양이 제법 상당했다.

정리라고 해도 켜켜이 쌓아 올린 종이의 탑이 무너지지 않게 손을 본 것이 전부였다.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손을 탈탈 턴 요한은 무작위로 뒤섞인 시놉시스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읽었다. 누가 보면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는 할지 의문을 품을 만한 환경이었으나, 요한은 자신의 너저분한 업무 환경을 개선할 생각이 없었다.

위대한 발견은 때로는 우연의 산물이라지 않던가.

사실 그것도 다 남들이 타박할 때나 하는 변명일 뿐, 요한은 원래부터 정리를 못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모든 것을 늘어놓는 그 습관을 그다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정돈을 잘하는 사람은 많으니 내심 나 하나쯤이야 싶었던 것이다.

머리가 복잡해서일까. 이상하게 손에 잡히는 시놉시스마다 비슷비슷한 것 같았다. 요한은 종이 위를 빙빙 도는 듯한 글자들을 억지로 따라가려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하얀 종이 위로 자꾸만 셰어의 잔상이 떠올랐다. 몽롱하게 젖은 눈과 벌어진 입술 너머로 보이던 음습한 혀, 자신을 억세게 움켜쥐던 단정한 손 따위가 눈앞을 스친다.

“망할…….”

갓 섹스를 배운 10대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한 가지 생각에만 골몰하고 있자니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다. 게다가 정작 그런 치태를 보인 장본인은 오늘 아침 요한의 집에서 흐트러짐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출근했다.

요한,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요한의 등이 굳어졌다.

막으려 해도 한번 떠오른 생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침의 기억이 끼어든다. 셰어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속삭이며 요한의 뺨에 입술을 꾹 눌러 찍었다. 까끌한 음성과 달리 그의 입술은 조금 차갑고 보기보다 폭신하다. 요한은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입술과 입술을 겹쳤다. 그러나 제대로 입을 맞추기도 전에 셰어는 요한의 품을 쏙 빠져나가 버렸다.

완벽한 넥타이 매듭, 구김 없이 빳빳한 셔츠에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스리피스 슈트가 반듯하게 선 셰어의 몸을 보기 좋게 감쌌다.

그 옷 아래 어떤 흔적이 있는지 요한은 안다. 셰어가 타고 다니는 차 뒷좌석에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일 잘하고 와.’

셰어는 그 모든 게 없었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뻔뻔하게 인사하고는 먼저 가 버렸다.

일 잘하라고?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애처럼 뺨에다 뽀뽀해 주고 출근하면서 어떻게 일을 잘하라고 할 수가 있지.

요한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함부로 문지르며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되지 않는 시놉시스를 구기듯 내려놓았다. 같은 문장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있자니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긴 예쁜 게 죄도 아니고, 셰어는 잘못이 없다. 거기서 입이라도 맞추었더라면 오늘 출근도 못 하고 여태 차 안에서 뒹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데, 도저히 참을 자신이 없었다.

요한은 멍청한 자신을 탓하며 아무렇게나 책상을 헤집어 손에 닿는 종이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요한은 튀어 오를 듯 놀라 눈을 크게 깜빡였다.

벽에 달린 수갑에 알몸으로 묶여 있는 남자, 그는 안대로 눈이 가려지고 재갈이 물린 채 과거를 회상한다.

분명 본 적이 있는 도입부였다.

드높은 스카이라인이 하늘을 가린 도시,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인 Keith사에는 악명 높은 전략기획팀장 크리스 베너가 있다. 크리스의 비서 아만다는 매일 크리스에게 시달리는 가련한 여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화 Master다. 수십 번이나 본 영화라 잊을 리가 없었다. 요한은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놉시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Master의 시놉시스였다.

Master는 소설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곧이어 영화화에 착수했다. 뒤에서 입찰 경쟁이 치열했다는 얘기는 요한 역시 들은 바 있었으나, V Pictures 역시 그 경쟁에 참여한 줄은 몰랐다.

당시 레일라가 추구하던 방향이 어린이와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따뜻한 영화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이는 매우 파격적인 진로 변경이었다.

대체 왜? 언제부터 레일라는 V Pictures를 바꿀 생각이었을까?

그리고 왜 Master를 포기했을까?

요한은 안절부절못하며 시놉시스를 든 채 책상 주위를 서성이다가, 결국 사무실을 박차고 나섰다.

어디서 다른 시놉시스를 발굴했는지 서류를 한 아름 안아 든 벳시가 요한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쳤다.

“대표님! 어디 가세요?”

“레일라 만나러!”

“네에?”

“아주 급한 일이야!”

아주 급한 일이고말고. V Pictures의 미래가 어디를 향하느냐가 달린 일이다. 요한은 속으로 주억거리며 차에 탔다. 장난감처럼 생긴 노란 클래식 카가 그 깜찍한 외형과 달리 무시무시한 속도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이 시간에 레일라가 있을 곳이야 뻔했다. 아마 그녀는 화실에서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본래 영화 미술과 연출로 영화를 시작했기에 레일라는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은퇴하자마자 레일라는 여태까지 못 그렸던 한을 푸는 것처럼 화실에 처박혔다.

요한은 화실의 냄새가 좋았다. 유화 물감의 독한 냄새도,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특유의 냄새도 좋아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더 좋은 것은 화실에 있는 레일라가 전보다 더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레일라는 V Pictures의 대표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보다 더 크게 웃었고, 더 자유롭게 떠들었다. 레일라의 병은 오래된 흉터처럼 흐릿해졌다. 알츠하이머는 불치의 병이라지만, 레일라에게는 그 말이 틀린 것 같았다.

요한은 레일라가 직접 칠을 한 화실 문 앞에 섰다. 알록달록한 만다라가 그려진 문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작품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요한은 신중하게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레일라가 노래하듯 소리쳤다. 문 너머의 레일라는 요한의 기억보다 더 생기가 넘쳤다. 머리를 질끈 묶고 물감이 묻은 청바지와 티셔츠를 대충 걸친 그녀는 전보다 더 젊어 보였다. 그녀는 요한을 돌아보지도 않고 투덜거렸다.

“요한, 뭐든 다 네 마음대로 하라니까 왜 자꾸 찾아와서 날 귀찮게 구니?”

요한은 잠시 말없이 레일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녀는 요한이 대꾸가 없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었다. 따뜻한 빛을 품은 푸른 눈이 요한을 마주 본다. 어쩐지 속이 울렁거리는 듯해 요한은 괜히 여태 움켜쥐고 있던 시놉시스를 흔들어 보이며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이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레일라, 이런 영화도 만들려 했어?”

시놉시스를 물감 묻은 손으로 받아 든 레일라가 몇 줄 읽더니, 음흉하게 웃으며 요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전보다 마른 팔꿈치가 뾰족하게 갈비뼈를 찌른다. 그 자리가 유독 시큰했다.

“얘는 무슨 이런 걸 가져오고 그래. 혼자서 보지. 맞아. 나도 새로운 것 좀 만들어 보고 싶어서 그랬다, 왜.”

“근데 왜 안 했어?”

요한이 묻자 레일라는 별걸 다 묻는다는 듯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 하고 싶어서 안 했겠니? 못 한 거지. 덩치 큰 놈들이랑 붙으니 나도 별도리가 없었단다.”

레일라가 못 하는 것도 있다는 게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요한은 레일라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 당연히 이해하고도 남을 나이였지만, 때때로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레일라가 용이라도 잡을 듯 웃는 것을 보면 뭐든지 가능할 것만 같았다. 알츠하이머를 앓는 레일라의 이면을 본 지금도, 요한은 그런 착각에 빠지곤 했다. 한때는 레일라가 신처럼 위대해 보였다.

“레일라가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이상하네.”

“어우, 나도 할 만큼 했어. 그럼 된 거지, 뭘.”

전지전능해 보이던 레일라의 이면을 발견했을 때, 요한은 V Pictures를 맡았다. 한때는 그걸 레일라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한량에게 평생을 일군 회사를 안기다니, 그보다 더 멍청한 실수가 있을까. 말아먹지 않는다면 하늘이 도운 것이다.

하지만 요한은 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도, 할 줄 아는 일도 없지만 요한은 영화를 좋아했다. 요한의 평생에 공기처럼 영화가 있었다. V Pictures의 세트장을 돌아다니며 자랐고,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영화 없이 보낸 적이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발아한 열의는 이제 눈에 띄게 자랐다.

잘하고 싶다. 실수하고 싶지 않다.

그런 마음이 생겨날수록 겁이 많아진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고집을 부릴 수 있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사소한 것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창고를 가득 채운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를 읽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

“레일라, 진짜 내가 마음대로 해도 돼?”

아무렇지 않게 물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목소리 끝이 떨렸다.

레일라는 항상 새로운 시도를 했다. 비주얼 이펙트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2D에서 3D로 진화를 시도했다. 그녀는 실수하지 않았다. 그 모든 시도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크고 작은 진폭이었다.

한 번도 실수였던 적이 없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존재마저도.

레일라는 요한과 똑 닮은 눈썹을 찌푸리며 깔깔 웃었다.

“나 소름 돋은 것 좀 봐. 요한, 네가 언제는 내 말을 잘 들었니? 글쎄, 마음대로 하래도.”

“그러다 내가 다 망치면 어쩌려고?”

그러자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어이없는 질문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망하면 뭐…… 망했는데 뭘 어쩌겠니. 할 수 없지.”

가슴이 조금 찌르르하려던 것이 무색해졌다. 요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레일라의 옆에 놓여 있던 빈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항상 비워 두곤 하던 요한의 자리였다.

“와, 차암 힘이 난다. 무슨 그런 충고가 다 있어?”

요한이 따져 묻자, 레일라가 팔레트에 짜 놓은 물감을 뭉개듯 붓으로 치덕치덕 비비며 중얼거렸다.

“넌 젊은 애가 뭘 자꾸 충고 같은 걸 찾아.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지. 내 말 같은 게 무슨 힘이 있다고.”

빨갛게 물든 붓 끝이 화폭에 그려진 선명한 색채의 꽃을 칠한다. 타오르는 듯한 꽃이 하늘로 치솟듯 피어난 덤불이다. 정해진 규칙 없이 캔버스 위를 칠하는 붓을 따라 의미 모를 점과 선이 그려진다. 그것은 멀리서 봤을 때 완벽한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레일라는 보란 듯이 완성에 가까운 그림에 허술한 붓질을 더 했다. 거칠게 갈라진 붓질이 꽃의 형태를 뭉그러뜨린다. 요한이 당황해 어어 소리를 내든 말든 레일라는 그 위를 대충 물감으로 덮으며 웃었다.

“놀라긴. 조금 망쳐도 티도 안 나니까 그냥 하기나 해.”

그녀의 말대로 지저분하게 남은 붓질은 금세 감쪽같이 가려졌다. 정말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

요한은 레일라의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줄곧 찾아 헤매던 문제의 해답을 찾은 듯했다.

* * *

셰어가 퇴근 후 요한의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9시가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셰어는 일과를 마치면 습관처럼 요한의 집에 들렀다. 운이 좋으면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요한을 기다리다 먼저 잠이 들곤 했다.

이게 다 최근 요한의 야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셰어는 불이 모두 켜져 눈에 띄게 번쩍거리는 저택을 노려보았다. 불을 환하게 밝힌 집을 멀리서 보고도 셰어는 그저 요한이 불 끄는 것을 잊었으려니 생각했다. 실제로 요한은 종종 불 끄는 것을 잊었다.

이상을 발견한 것은 집 안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셰어는 문을 열자마자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발길을 멈추었다. 거실에서 볼륨을 낮추어 둔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셰어는 소리가 들려오는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거실의 흰 벽에 조사된 오래된 영화가 생생하게 움직인다. 셰어는 조악한 티가 나는 세트장과 유행이 지나간 옷을 감흥 없이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영화를 감상하고 있었어야 할 남자를 바라보았다.

요한은 커다란 몸을 웅크린 채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바닥에 반쯤 흘러내린 담요가 겨우 요한의 상체를 덮고 있다. 불편한 자세로 쿨쿨 잘도 자면서 춥기는 한지, 요한이 너른 어깨를 말아 몸을 웅크리며 끙 소리를 냈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것 같았다.

셰어의 입술이 벌어지며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람 성가시게 해.”

그는 손톱 끝에 일어난 거스러미처럼 거슬리고 신경 쓰인다. 잊고 지나치려 해도 자꾸 손이 간다.

셰어는 바닥에 흘러내린 담요를 주워 제대로 덮어 주었다. 그러자 요한이 등을 펴고 새근새근 잔다. 셰어는 무심코 그의 이마에 흐트러져 있는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깨지는 것이라도 어루만지듯 섬세한 손길이 닿자 요한이 히죽히죽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을까.

셰어는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조금 웃고 말았다. 자꾸 혼자 웃는 입술에 몰래 입을 맞추며 셰어가 속삭였다.

“요한, 일어나.”

셰어는 눈을 뜬 요한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정말 그가 눈을 뜰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요한은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았다. 아침에는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질러도 끙끙거리며 돌아누울 뿐이었으니, 한마디 속삭인 것만으로 깰 리가 없었다.

그런데 요한이 거짓말처럼 눈을 떴다. 셰어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요한이 졸음에 취한 눈을 깜빡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요한이 이마에 닿아 있는 셰어의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요한은 몹시 따뜻했다.

“다녀왔어?”

요한이 졸린 눈을 감으며 웅얼거렸다. 셰어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긴말을 할 수 없었다. 손바닥에 닿는 체온이 포근하고, 요한의 인사가 간지러워 돌아와야 할 곳에 온 것처럼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진다.

셰어는 요한의 뺨을 살짝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어…… 영화 보려고 했는데 잠들었나 봐. 졸려.”

“들어가서 자.”

“싫어. 안 잘래. 근데 졸려…….”

어쩌라는 거지.

셰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요한을 빤히 쳐다보았으나 가만히 그의 뺨을 매만지기만 했다. 사실은 말도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리며 담요 속으로 파고드는 게 좀 귀여웠다. 이런 앞뒤 안 맞는 이상한 투정이 왜 귀여워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셰어.”

겨우 잠기운을 떨쳐 낸 새파란 눈이 반짝인다.

“왜 책을 썼어?”

예상치 못한 물음에 셰어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인터뷰에서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아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흔한 질문이었으나, 그랬기에 아무도 물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셰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요한이 이어 말했다.

“그렇게 신분을 숨기면서까지 그 책을 쓰고 싶었던 이유가 뭐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묻지?”

셰어가 웃어넘기려 들자, 요한은 되레 정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Master의 시놉시스를 봤어. 몰랐는데 V Pictures도 입찰에 참여했더라.”

처음 듣는 얘기였다. 2차 창작에 대한 부분은 재계약을 하며 출판사에 일임하기로 얘기가 끝났기에, 셰어는 영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다. 요한은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단히 거창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하는 게 분명하다.

셰어는 왠지 김이 빠져 픽 웃으며 농담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니 마음이 동했다?”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그냥 궁금해져서. 이걸 쓸 때 넌 어땠을까, 뭐 그런 게.”

“그런 게 왜 궁금한데?”

별로 대단한 이유는 아니라서 들으면 실망할 게 뻔했다. 그러나 요한은 무척 진지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난 이 글을 쓴 사람 참 멋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셰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더 얘기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면전에서 자신이 쓴 잡스러운 산문에 대한 평가를 듣는 게 좀 민망하면서도 대체 요한이 왜 이러는지 궁금했다. 그 호응에 용기를 얻은 듯, 요한이 말을 이었다.

“이런 건 아무도 쓴 적 없었으니까. 너는 들킬 위험을 안고 이런 글을 쓸 필요는 없었을 텐데 왜 그랬을까, 궁금했다고.”

“별로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요한은 그 대답에 만족하는 것 같지 않았다. 대답을 독촉하는 눈빛에 밀려 셰어는 글쎄, 하고 말을 끌었다. 뭐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봐도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셰어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였다.

“사람들은 나한테 관심이 없어.”

요한은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눈썹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선명한 부정이 떠올라 있었다. 하루에도 너에 대한 기사가 얼마나 많이 쏟아지는데, 어딜 봐서 사람들이 관심이 없냐고 묻고 싶은 게 틀림없다.

그 말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축복이다. 도통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증거였다. 셰어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BNB 그룹의 전무, 찰스 베일리에 관심이 있는 거지 나한테는 관심이 없다고.”

“그게 뭐야. 둘 다 너잖아. 그래서 관심을 끌고 싶었던 거야?”

“아니, 반대야. 아무도 나한테 관심이 없으니까 할 수 있었지.”

대화를 이어 갈수록 요한은 더 알쏭달쏭해하는 듯했다. 그러니까 왜 하필 이렇게 설명하기 까다로운 걸 묻는단 말인가. 셰어는 요한의 뺨을 내키는 대로 꼬집으며 심술을 부렸다.

아야! 아파! 요한이 엄살을 떨며 담요를 걷어차고 일어나 앉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사과 같다. 셰어는 원망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는 요한을 달래려 손을 뻗었다. 깨물면 달콤한 것을 흘릴 것만 같다. 속으로 입맛을 다시는 것을 눈치챘는지 요한이 셰어의 손을 냉정하게 쳐 냈다.

정말, 귀엽게 놀고 있다.

셰어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본 요한이 슬금슬금 소파 구석으로 물러나며 경계를 세웠다. 아직 제대로 손도 안 댔는데 무기 같지도 않은 쿠션을 집어 드는 게 같잖았다. 셰어는 삐딱하게 서서 관심 없는 척 쏘아붙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어나. 올라가서 자든지 해.”

물론 셰어는 요한을 곱게 재워 줄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끝까지 쿠션을 꼭 붙들고 물었다.

“아직 제대로 대답 안 했잖아. 그래서 왜 그랬다는 거야?”

“말했지. 그냥 못된 장난 같은 거였어.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테니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러니까 왜?”

“나도 지루한 게 뭔지는 알았거든.”

하루하루가 숙제 같았다. 잠깐 일탈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사는 게 끔찍하게 지루해서 진작에 총으로 머리를 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요한은 쿠션을 내려놓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평소보다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위로해 줘야 할까? 언젠가 한 적 있던 고민을 셰어가 하고 있을 때, 언제 쿠션을 들고 설쳤냐는 듯이 요한이 셰어의 손을 붙잡았다. 요한을 위로하려던 셰어를 위로하듯 온기를 전하는 커다란 손이 단단히 깍지를 낀다.

셰어는 권총 자살 따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머리를 쏴 버렸더라면 요한은 지금쯤 다른 놈과 이렇게 시시덕거리고 있을 터였다. 쏘려면 그런 놈들을 쏴야지 제 머리를 쏠 필요는 없다.

요한이 셰어의 손등을 엄지로 간질이며 장난처럼 물었다.

“나랑 사는 건 재미있지?”

셰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침묵이 이어지자 요한이 불안한 듯 아무 말이나 지껄이기 시작했다.

“왜, 나 재미있잖아. 아냐? 내가 맨날 재워 주지, 먹여 주지, 놀아 주지, 웃겨 주지…… 재미없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재미있을 텐데?”

그래, 그런 것 같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으며 셰어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미처 감추지 못한 즐거움을 감지한 듯 요한이 활짝 웃으며 셰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소파 위에 두 몸이 한데 엉켜 뒹굴었다. 서로를 함부로 껴안고, 간질이고, 입술을 맞댔다. 장난처럼 시작된 접촉이 농밀해지기 시작한 것에는 늘 그렇듯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 소파가 두 사람의 무게에 짓눌려 괴로운 소리를 낸다.

부딪친 입술은 터진 것처럼 따갑고, 거칠게 옷을 벗느라 실밥이 뜯어지고, 피부에는 손자국이 멍처럼 남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게 엉망진창일지언정 서로를 원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시간이 흐르면 생채기나 멍울 따위는 옅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거침없이 상처를 입히며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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