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6)

* * *

요한은 모서리가 둥근 비행기 창을 바라보았다. 빗물이 줄줄 흐르는 창에 술 취한 예술가가 손으로 비벼 놓은 행위 예술 같은 무늬가 남아 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셰어를 찾아 낯선 도시를 떠돌 때도 이렇게 비가 쏟아졌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짠 것처럼 비가 내린다. 오고 갈 때의 기분은 전혀 다르지만 그럭저럭 수미가 상응하는 여행이라 할 수 있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유독 사무적인 스튜어디스가 요한에게 물었다. 흔한 항공사의 스튜어디스와는 다르게 그녀는 조금도 웃지 않았지만, 요한을 제법 세심하게 챙겼다. 요한은 몰래 웃음을 참았다. 신기하게도 셰어는 꼭 저 같은 이들을 고용했구나 싶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대답과 동시에 메시지 알림이 떴다. 비행기 모드 아이콘 옆에 자랑스럽게 떠 있는 와이파이 덕분이었다. 요한은 수상쩍은 물건이라도 건드리듯 손끝으로 화면 잠금을 해제했다.

[허튼짓하면 비행기를 추락시킬 거야.]

[부디 안전한 비행 되길.]

말도 안 되는 협잡질을 시도하는 사람이야 누군지 뻔했다. 요한은 셰어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얘는 꼭 하지도 못할 걸로 협박을 하더라. 비행기를 추락시키겠다니, 이것도 테러로 신고해도 되나. 이런 헛소리도 귀여워 보이니 정말 큰일이었다.

[허튼짓이뭔데?]

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요한은 샴페인 글라스를 느릿느릿하게 비웠다. 빈 잔을 내려놓을 때쯤 답장이 왔다.

[하면 안 되는 일

1. 웃기

2. 모르는 사람이랑 얘기하기

3. 모르는 사람 도와주기

4. 낯선 사람과 5분 이상 대화하기

5. 낯선 사람에게 호의 베풀기…….]

이하 30개가량의 항목이 나열된 메시지였다. 요한은 딱 5번까지 읽은 뒤 제대로 보지도 않고 스크롤을 아래로 쭉 내렸다.

“와, 사회생활 때려치우란 거야 뭐야.”

본인이나 잘할 것이지.

요한은 셰어를 따라 길고 긴 ‘하면 안 되는 일’의 목록을 썼다. 바람피우지 않기, 재수 없게 말하지 않기, 뒤에서 헛수작 부리지 않기…… 항목은 금세 30개를 훌쩍 넘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요한은 한 장의 계약서 같은 메시지를 쭉 훑어보았다.

“으음.”

요한은 심각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마음에 안 든다. 엄지가 백스페이스를 길게 눌렀다. 커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요한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조각하듯 진중하게 입력했다.

이번에 완성된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요한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네가 할 일 : 얼른 나아서 나랑 데이트하기]

전송.

피부 밑이 다 간지러운 것 같다. 요한은 폰을 집어 던지고는 추위라도 타는 사람처럼 제 팔뚝을 마구 문질렀다. 그 부산스러운 짓에 놀란 스튜어디스가 이쪽을 흘깃 쳐다본다. 요한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웃어 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구름 위를 비행하고 있는지 빗물이 쓸려 나간 창밖의 하늘은 믿기지 않을 만큼 새파랗다. 아래에 무겁게 깔린 잿빛 구름이 빠르게 멀어진다. 이어 탁 트인 하늘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진동이 울렸다. 요한은 파란 메시지가 깜빡이는 화면을 확인했다. 답장은 간결했다. 3단어, 8글자. 셰어답게 첫 단어는 캐피털, 끝에는 마침표까지 확실하게 찍은 문장.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늘빛이 전과 달라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이 금방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은 날이다.

Epilogue

어둠 속에 금빛 로고가 떠오른다. V Pictures. s 옆에 붙은 마침표는 심지를 태우는 불꽃처럼 치이익 타들어 갔다.

암전.

어두운 화면이 동트는 하늘처럼 밝아지는 것과 동시에 졸음에 겨운 노인의 게으른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왕국에…….

불꽃이 터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 성이 와이드 샷으로 잡힌다. 페이드아웃.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가 울리고, 페이드인, 백마를 탄 공주가 꽁무니에 불이 붙은 로켓을 쏘아 올린다.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이어 한결 명징해진 낮고 풍부한 음성이 해설했다.

용감한 공주가 있었답니다.

조악한 고철 덩어리 같은 로켓은 한계를 모르는 것처럼 하늘로 끝없이 솟아오른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하늘의 빛깔이 다채롭게 변해 간다. 별자리도 바뀌고 남은 별마저 총총히 멀어진 남색 하늘에 도달했을 무렵, 로켓이 폭발한다. 펑! 그리고 화면은 다시 처음의 하얀 성으로 돌아간다.

안녕, 난 앤디야. 여긴 내 집이지.

드레스를 입은 앤디가 지루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 있다. 그녀는 긴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발밑에 부복한 남자의 길고 긴 외모 찬양을 한 귀로 흘려듣는다. 남자는 버터를 파인트로 퍼먹은 것처럼 느끼하게 생겼다. 눈썹을 능글맞게 찡긋 치켜드는 남자를 떨떠름하게 노려보던 앤디가 슬쩍 고개를 돌리며 웩 하는 시늉을 했다.

내 꿈이 뭔지 얘기해 줄까? 일단 이 남자랑 결혼하는 건 절대, 절대 아니야.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미끈한 철제 표면 위로 불똥이 화려하게 튀었다. 용접용 헬멧을 쓴 앤디가 토치를 든 손을 내리고, 헬멧을 벗는다. 그녀는 땀에 범벅이 된 얼굴로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난 세상을 바꿀 거야.

페이드아웃. 영화의 제목이 떠오른다. Queen. 고풍스럽게 조각된 타이틀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쭉 찢겨 나갔다. 그리고 키치한 타이포그래피가 화면에 볼드체로 휘갈겨진다.

Ruler.

V Pictures 창사 이래 최대 매출을 기록한 영화는 연말 개봉 이후 봄이 무르익을 때까지 스크린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백마 탄 공주, 왕자 없는 해피 엔딩. 메르헨풍 영화치고는 전례 없이 독자적인 전개를 택하는 바람에 초기 투자자들은 곤혹스러워했으나, Ruler는 캐시 아웃을 택한 투자자들이 아쉬워할 만큼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평론가들은 기존의 클리셰를 뒤집은 작품을 극찬했고, 해시태그 Ruler는 영화 개봉과 동시에 핫한 키워드로 부상했다. 초반 관객들의 평점은 별점 4점을 훌쩍 뛰어넘었고, 이는 곧 관객 수가 꾸준히 늘어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다만 패션 관계자들은 난색을 보였는데, 그해 여자아이들이 하나같이 앤디가 입은 주머니가 수십 개 달린 바지를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카고 팬츠 열풍은 곧 바지에 얼마나 많은 주머니를 다느냐에 대한 경쟁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이걸 입으라고?”

요한은 인상을 팍 구겼다. 벳시가 처음 보는 옷을 사무실에 들고 올 때부터 느낌이 영 좋지 않더니, 안 좋은 예감은 꼭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주머니가 17개나 달렸다는 카고 팬츠를 내밀었다.

“네, 영화 홍보차 입어 주세요. 아, 포토 라인에서 사진 찍는 거 잊지 마시고요.”

“안 돼. 이건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이 아니야.”

“대표님 취향 따라 협찬받은 거 아니거든요.”

벳시는 요한을 놀리듯 바지를 탈탈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입술이 웃음을 참듯 바들거리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아니, 주머니가 17개인 건 좀 심한 거 아냐? 이건 바지를 학대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앤디한테 왜 그런 바지를 입히셨어요? 저 팔 아파요. 빨리 받으세요.”

그야 당연히, 영화를 홍보한답시고 대표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할 줄은 몰랐으니까. 요한은 침울하게 바지를 받아 들었다.

요한이 V Pictures의 대표로 취임한 지 겨우 1달이 지났다. 그는 아직도 누가 자신을 대표라고 부를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곤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명예 대표로 물러난 레일라가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종종 출근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진짜 싫다…….”

요한은 우울하게 바지에 붙어 있는 주머니의 수를 셌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 봐도 주머니는 15개였다. 대체 나머지 두 개는 어디 붙어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망해라, 패션 괴짜들. 요한은 속으로 이 카고 팬츠를 만든 작자들을 욕했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요한은 서류가 무시무시하게 쌓여 있는 책상을 뒤져 전화가 끊기기 전에 가까스로 구석에 처박혀 있던 폰을 발굴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요한이 벳시를 손짓으로 내쫓았다.

벳시는 문을 닫는 순간까지 끈질기게 외쳤다. 바지! 잊지 마요! 그녀는 검지와 중지를 V 자로 세운 채 제 눈을 파 버릴 기세로 한 번, 요한을 향해 한 번 손짓했다. 지켜보겠다는 뜻이었다. 요한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자기야, 나 우울해.”

- 나야. 미안하지만 점심은…….

두 사람이 동시에 할 말을 쏟아 냈다. 짧은 정적이 이어지고, 곧 작은 소란이 일었다.

“뭐야. 지금 점심 약속을 취소한다고? 약속 시간 30분 전에?”

- 갑자기 회의가 생겼어. 시간을 내려 해도 이건…….

“가뜩이나 점심시간도 짧은데, 겨우 30분도 마음대로 못 쓴다고?”

- 미안해.

“네가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싫어.”

그러자 셰어는 아예 대답이 없었다. 미안하기는 한 모양이다. 요한은 그냥 웃고 말았다. 일 때문에 바쁘다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도 입맛이 씁쓸했다. 셰어와 같이 점심을 먹을 계획이라 평소보다 신경을 좀 썼는데 하필이면 오늘 일이 생길 게 뭐란 말인가.

가만히 요한의 숨소리를 듣고 있던 셰어가 불쑥 물었다.

- 우울한 이유가 뭔데?

그냥 한 말을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요한은 그 혐오스러운 카고 팬츠를 손끝으로 집어 들며 비죽거리며 올라가려는 입술을 애써 내렸다. 이 괴이쩍은 물건을 걸쳐야 하는 건 싫지만 셰어가 걱정해 주는 건 좋았다.

“자기야.”

- 왜.

“넌 내가 주머니가 17개 달린 바지를 입어도 날 사랑할 거지?”

긴 침묵이 지나갔다. 요한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셰어가 그런 바지를 입고 나타난다면 자신은 증거 사진을 수십 장 찍으며 놀리겠지만, 사랑은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감히 대답이 없으시겠다. 요한은 까칠하게 물었다.

“너 대답이 없다?”

- 데이트에?

“지금 그게 중요하다고?”

- 미안한데 나는 TPO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거든.

“야!”

요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던 셰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짜증 나게 왜 예쁘게 웃고 난리야. 요한은 바지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사무실 안을 불안하게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벳시가 이걸 입고 포토 라인에서 사진까지 찍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다 차이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 보고 싶다.

담담한 말에 심장이 크게 술렁거린다. 셰어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 네가 주머니 17개 달린 바지 입은 거.

아, 보고 싶다는 게 그거라고. 요한은 뜨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욕설을 뱉었다.

“네 마음대로 갖고 놀아라. 어?”

셰어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요한은 정말로 셰어가 보고 싶어졌다. 그는 남의 마음을 제대로 가지고 놀기로 작정한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 시간 있어?

요한은 시계를 흘끔거렸다.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기에 딱히 바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대답하면 너무 좋아하는 티가 나지 않나. 요한의 무응답을 다른 답으로 해석한 셰어가 덧붙였다.

- 책상 밑에 한 자리 있는데.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거기까지 들렸는지 그가 피식 웃는다.

- 숨겨 줄게. 놀러 와.

이런 초대를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요한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셰어가 더 비웃기 전에 요한은 냉큼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혹시나 셰어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얼른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출발]

* * *

BNB 그룹 사옥 앞에 선 요한은 웅장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평균보다 키가 훌쩍 큰 요한이 목이 뻐근하도록 올려다보아도 드높은 마천루는 까마득하게 멀어 끝머리가 잘 보이지 않았다. 건물에 반사된 태양 빛이 따갑게 눈을 찌른다. 요한은 가늘게 뜬 눈을 깜빡였다.

저 꼭대기에 셰어가 있다. 요한은 셰어가 남긴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셰어는 믿기지 않도록 성의 없는 방문 지침을 알려 주었다.

그는 단지 정문으로 들어오면 된다고만 했다. 외부인이 출입하는 절차가 그토록 간단할 리가 없는데, 요한이 몇 번이나 확인해도 대답은 같았다.

사실은 셰어도 잘 모르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칼같이 각이 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입구를 보자 요한은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저 문을 들어서자마자 가드가 손을 들어 길을 막을 것 같다.

거울처럼 깨끗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면에 데스크가 보인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요한을 보자마자 연습한 것처럼 활짝 웃으며 안내했다.

“안녕하십니까, 요한 바네스 대표님. 전무님께 전달받았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당혹스럽도록 당당한 환대였다. 요한의 입매가 자꾸만 움찔거렸다. 단지 책상 밑에 한 자리가 비었다는 유혹에 흔들려 찾아온 것뿐인데, 무슨 버젓한 비즈니스라도 하러 온 것 같다.

직원은 직접 엘리베이터까지 잡아 주었다. 엘리베이터는 여러 대였으나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다른 엘리베이터와 달리 요한이 탄 엘리베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미리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멈추지 않고 최상층으로 쭉 올라갔다. 그는 요한을 최상층에 덜렁 내려놓고는 깍듯하게 인사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요한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를 등지고 바로 서자 정면에 투명한 유리문으로 가로막힌 사무실의 풍경이 보인다. 여섯 명의 비서진들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걸기 민망할 만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전화가 수시로 울리고, 복합기에서는 쉴 새 없이 출력물이 쏟아지며, 사람들은 모니터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한 채 신들린 듯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요한이 망설이고 있을 때, 가장 직급이 높아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요한을 발견했다. 그녀가 손짓하자 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문 옆에 붙어 있는 터치 패드를 조작해 유리문을 열었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비서진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요한을 바라본다.

와, 진짜 부담스럽다.

요한은 조금 긴장했다. 셰어의 사무실은 처음이었다. 자유분방한 V Pictures와 달리 수직적인 BNB의 분위기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저는 수석 비서 로렌입니다.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반가워요, 로렌. 다들 반가워요.”

요한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비서진들은 얌전히 웃기만 할 뿐이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잔잔한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지극히 정적인 반응이었다. 요한은 괜히 민망해져 슬그머니 손을 제자리로 내렸다.

반대의 경우가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만일 셰어가 V Pictures를 방문한다면 벳시는 수선을 떨고 로마노프는 헛소리를 지껄여 댈 것이다. 누군가는 잘생겼다는 속삭임을 다 들리게 해 대며 ‘대표님 어디가 그렇게 좋으세요?’ 따위의 질문을 늘어놓다가, 엄청 티 나게 둘만 남겨 놓고 사라지겠지.

셰어가 정말 싫어할 것 같다. 요한은 꼭 한번 그를 회사로 초대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역시 혼자만 당할 수는 없다.

“이쪽으로 오시죠.”

로렌이 생각에 잠긴 요한을 안내했다. 전무실은 가장 안쪽이다. 요한은 커다란 문 너머에 있을 사무실과 셰어를 상상했다. 셰어는 이 사무실이 BNB 사옥에서 두 번째로 큰 사무실이라고 했다. 그 탓에 상무에서 전무로 진급하며 사무실을 옮길 때, 짐이 생각보다 적은 바람에 사무실이 아주 휑했다던가.

빈손으로 올 게 아니라 뭐라도 사 올 걸 그랬나 보다. 요한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주머니를 뒤져 봐도 지금 있는 거라곤 왜 여기 든 건지 모를 커다란 알사탕뿐이다. 사무실에서 종종 입가심으로 집어 먹곤 하던 거였는데, 지난번에 외근 나가면서 먹으려고 넣어 둔 게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셰어는 사탕을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으니 꼭 한번 먹여 봐야겠다. 요한은 속으로 다짐했다. 스스로 뒤끝이 없는 편이라 자부해 왔는데, 셰어에 관한 일에서는 항상 예외가 생겨난다. 요한은 아직 카고 팬츠의 원한을 잊지 않았다.

똑똑.

“전무님, 요한 바네스 대표님 오셨습니다.”

로렌이 고하자마자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요한은 괜히 움찔했다. 일하는 셰어의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낯설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워 듣기에는 좋지만, 계량한 것처럼 꼭 필요한 만큼만 친절하다. 타인과 거리를 두는 것에 익숙한 남자였다. 익히 알고 있지만 이럴 때마다 몸이 절로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로렌이 문을 열자 하얀 블라인드를 투과한 햇빛이 쏟아지는 사무실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광택 없는 짙은 회색 카펫이 깔려 있고, 모던 인테리어 잡지에서 튀어나온 듯한 검은 가죽 소파가 각진 모서리를 자랑하며 중앙에 놓여 있다. 하나같이 크고, 웅장하고, 세련된 공간이다. 돈을 바른 냄새가 물씬 났다.

그 너머 커다란 책상 앞에 셰어가 앉아 있었다. 바쁘다는 말이 확실히 엄살은 아니었는지, 그는 요한이 있는 쪽을 흘깃 보고도 키보드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요한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이제 이 공간에는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요한은 셰어를 등진 채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멎었다.

“사람 불러 놓고 쳐다도 안 보는 건 무슨 매너야.”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카펫에 미처 흡수되지 못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진다. 요한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기하학적인 무늬의 센터피스를 집어 들었다. 원자 구조인지 뭔지 모를 희한한 장식품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자, 요한의 어깨에 묵직한 두 손이 내려앉았다.

“거기 네 자리 아닌데.”

위험하게 들리는 나직한 속삭임과 함께 귓바퀴가 깨물렸다. 물렁한 뼈가 이 사이에서 짓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요한은 신음하며 셰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억센 손아귀에 붙들린 셔츠 깃이 구겨지고, 머리칼이 바스락거린다. 막무가내로 끌어당기는 손에 이끌려 고개를 숙인 셰어가 눈을 감았다.

그러나 셰어에게 와 닿은 것은 인사처럼 짧은 입맞춤이었다. 요한은 설마 이게 다냐고 묻는 듯한 셰어의 뾰족한 눈빛을 마주하며 실실 웃었다. 살짝 흐트러진 뒷머리를 보니 이제야 평소 살을 맞대던 그 남자가 맞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솔직히 엉큼한 생각 있었는데 여기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식어 버렸어.”

“심각하다고?”

셰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물었다. 그는 이런 환경이 제집처럼 편안한 모양이다. 요한은 셰어의 머리칼을 흩트리며 투덜거렸다. 단정하던 머리칼이 부스스하게 흐트러지자 셰어가 인상을 구겼다.

“나한테 자꾸 대표님, 대표님 하면서 인사하는데 도망가고 싶더라. 너 나 몰래 사람 때려? 왜들 저렇게 각을 세워.”

“글쎄, 내가 때리는 건 너밖에 없는데. 자주 와. 익숙해지게.”

셰어는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요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꿈지럭거리자 이번에는 손가락을 깨물렸다. 이러다 잘리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세게 깨무는 통에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지만 요한은 애써 참았다. 다행히 손가락을 입에 문 셰어가 통증보다 다른 것을 더 자극하는 바람에 견딜 수 있었다. 요한은 매끄러운 입 안을 더듬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셰어의 볼이 불룩하게 솟아오르는 것이 야했다.

“여기 방음 잘 안 될 것 같은데.”

까칠하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셰어가 요한을 소파에 밀어 눕혔다. 차가운 소파가 등에 닿자 소름이 절로 돋는다. 셰어의 한쪽 무릎이 요한의 허리 옆을 디뎠다. 요한은 제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셰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닿기 전, 셰어의 손이 먼저 요한의 가슴을 덮었다.

“그건 너 하기에 달렸지.”

셔츠 위로 가슴을 더듬는 손바닥이 서늘했다. 셰어는 한기에 꼿꼿해진 유두를 꼬집었다. 따끔한 통증이 등줄기를 저리게 했다.

으음, 낮은 신음이 요한의 입술 사이로 흘렀다. 요한이 씨근덕거리는 숨을 뱉으며 셰어의 등허리를 감싸 쥐었다. 힘 조절을 잊은 탓에 셰어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 미안. 요한이 그를 달래듯 속삭였다.

“그건 아닐걸. 내가 아니라, 너야.”

소리를 참아야 하는 건 너야.

커다란 요한의 손이 셰어의 셔츠 위로 간지럽게 척추를 더듬었다. 질 좋은 원단이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피부와 마찰하는 느낌이 묘했다. 요한이 닿은 곳마다 열이 번지는 것처럼 체온이 달아올랐다. 차갑고 뜨거운 몸이 겹쳐지며 열이 뒤섞였다.

셰어가 몸을 숙이자 팽팽하게 당겨진 등 근육이 셔츠 위로 두드러진다. 요한은 그의 등에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며 코앞까지 다가온 입술을 아프지 않게 입술로 물었다. 말랑한 살점을 사정없이 물어뜯고 싶은 충동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요한이 숨을 할딱거리며 물었다.

“하아……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닌데, 진짜 여기 방음 안 돼?”

사옥을 본 순간부터 사무실에서 이런 짓을 벌일 계획은 깔끔하게 접었으나, 막상 셰어와 몸을 겹치자 생각이 바뀌었다. 밖에 일하는 사람이 있고, 여긴 대낮의 사무실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없었다.

셰어를 안고 싶다.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을 마구 풀어 헤치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이 남자는 내 것이라는 낙인을 찍고 싶었다. 요한은 셰어 역시 자신과 같을 거라 확신했다.

요한과 꼭 같은 온도의 욕망에 젖은 눈으로 셰어가 대답했다.

“방음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새 상상만으로 완전히 흥분한 요한이 셰어의 허리를 감아 당기며 제 앞섶을 그에게 비벼 댔다. 흥분한 것은 요한뿐만이 아니었다. 서늘하기까지 한 단정한 표정과 달리 셰어의 것도 만만치 않게 부풀어 있었다. 요한은 거침없이 셰어의 바지 버클을 붙잡았다.

그때 눈치도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요한은 퍽 간절한 눈으로 셰어를 바라보았다. 받지 마라. 제발, 제발, 받지 마라.

그러나 셰어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미안.”

“난 네가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진짜 죽여 버리고 싶더라.”

요한은 소파에 늘어진 채 투덜거렸다.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더라니, 역시나 셰어는 짧은 통화를 마친 후 선고했다.

“지금 가 봐야겠어.”

요한은 끙 소리를 내며 소파 등받이를 향해 돌아누웠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셰어가 모로 누운 요한의 등을 쓰다듬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래서 뭐?”

“기다려 주면 좋겠다고.”

초대할 때는 언제고 사정 좋을 대로 기다리게 하는 건 참 얄미운데, 셰어가 옆에서 조금 살랑거리니 금세 기분이 풀어지고 만다. 요한은 결국 셰어를 향해 돌아누우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래도 입술이 부루퉁하게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다녀와야 해.”

“약속할게.”

다정하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다. 셰어가 흔치 않게 상냥하게 굴 때면 요한은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온종일 비비적거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더 만져 주면 좋겠다. 갈망 어린 눈을 들어 셰어를 바라보자, 그가 심술궂게 웃었다. 줄곧 부드럽던 손이 멀어진다. 요한은 자석에 끌리듯 그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과격하게 부딪쳤다. 입맞춤이라기보다는 한 대 후려치는 것에 가까웠으나, 셰어는 왠지 만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은 소파에 도로 뒤통수를 처박은 채 얼얼한 입술을 매만졌다. 입술 안쪽이 터졌는지 약간 비릿한 맛이 났다.

얘는 진짜 이상한 걸 좋아해.

요한은 셰어가 급히 사무실을 나가고도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조금 전까지 닿아 있던 온기가 남아 있는 듯했다.

셰어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에 있다. 그 사실이 요한을 자극했다. 요한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공기 중에 셰어의 잔향이 떠도는 듯해 괜히 킁킁거리다가, 푹신하고 넓은 소파에 푹 기대 누운 채 몸을 이리저리 뒤챘다. 어떻게 해도 뜨거워진 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혼자 할 수도 없고, 딱 미칠 지경이었다. 요한은 애써 숨을 고르며 셰어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뭔가 주의를 환기할 만한 일을 해야 했다.

요한은 셰어의 책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책상 위에는 화면 보호기가 켜져 있는 노트북과 듀얼 모니터, 마우스, 키보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사진이나 장식품 하나 없는 책상은 전자 제품 매장이나 모델 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요한은 그의 책상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금세 흥미를 잃었다.

“내 애인 너무 재미없게 산다.”

요한은 그를 위해 집에 굴러다니는 소방관 달력이라도 하나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책상 밑에 있는 서랍장이 요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 칸의 서랍에는 모두 열쇠 구멍이 있었다.

이런 거 열어 봐도 되나? 망설임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요한의 손은 그보다 빠르게 서랍을 열고 있었다. 호기심은 생각보다 더 빨랐다. 버젓이 열쇠 구멍이 있어 잠겨 있을 줄 알았던 서랍들은 쉽게 열렸다. 서랍 안에는 필기구나 파일철 따위가 들어 있었다. 특별히 재미있어 보이는 건 없었다.

“와, 내 애인 진짜 재미없…….”

요한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서랍 첫째 칸이 뭔가에 걸린 것처럼 닫히지 않았다.

망했다. 고장 낸 건가? 셰어가 화내겠지?

요한은 쉴 새 없이 서랍을 닫으려 시도하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서랍은 덜컹거리기만 할 뿐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꼭 뭔가가 걸린 것처럼.

뭔가가 걸렸을지도 모른다. 요한은 서랍을 끝까지 뽑아냈다. 무거운 서랍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 칸이 빈 서랍장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저 끝에 까만 뭔가가 끼어 있는 게 보인다. 요한은 신중하게 그 물건을 꺼냈다.

까만 가죽으로 만들어진 개의 목줄 같은 것이었다. 목줄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도리스.

“이 개새끼가…… 감히 사무실에서 바람을 피워?”

요한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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