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26)

* * *

팔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파일에 끼워진 종이가 넘어간다. 셰어는 긴장을 숨기며 파일을 들여다보는 아버지를 관찰했다. 얼핏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지만 저 온화한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베일리들은 포커페이스가 일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선해 보이는 얼굴로 또 무슨 계책을 짜고 있을지 모른다.

팔락, 종이가 넘어간다. 이제 남은 장수는 많지 않았다.

셰어의 미래가 그 파일 속에 있었다. 매월 그의 아버지는 셰어를 담당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작성한 활동 보고서를 확인했다. 주요 항목은 성적, 교내 활동, 봉사, 예체능, 어학, 잡기 등으로 다채로웠다.

셰어는 각각의 항목으로 해체되고, 정성적이거나 정량적인 지표를 통해 평가된다. 인쇄된 활자 속에 셰어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앞으로 펼쳐질 셰어의 미래까지도 모두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셰어의 일생은 베일리 가문이 추진하는 일종의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것에 대해 한 번도 불만을 품은 적은 없었으나, 셰어에게도 내키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지금처럼 자신을 감정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견디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곧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과 같다. 셰어는 걷고 달리는 법과 동시에 학습한 것을 했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파일을 끝까지 읽은 아버지가 셰어와 닮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찰스, 어떨 것 같으냐?”

셰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것은 이처럼 의뭉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말을 쏟아 내는 10대들과 어울리다가도 집에서는 정치판에서 10년은 굴러먹은 능구렁이같이 굴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어디에서든 자연스럽게 어울려야 한다. 어디에서도 편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가진 자의 숙명이라 가르쳤으니, 셰어는 그 말에 대강 수긍했다. 그러지 않아도 바뀌는 건 없을 테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아마 완벽하겠죠.”

아버지는 흡족하게 웃으며 셰어에게 파일을 보여 주었다.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당연하지 않다. 혹자는 셰어를 두고 타고난 천재나 괴물처럼 얘기하곤 했으나 셰어는 보통 사람이었다. 완벽해지려면 뼈와 살을 깎는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지독한 노력파보다 푸른 피가 흐르는 천재의 이야기에 열광했다. 셰어는 제 피를 모두 뽑아서라도 다른 것이 되어야만 했다.

용, 유니콘, 신, 혹은 그 무엇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신성한 것.

“너만이 나의 완벽한 자식이니,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아라.”

합당한 자격을 갖춘 베일리의 사람이 되는 법은 그것뿐이다. 자신을 버리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 것이다.

셰어는 파일을 펼쳐 자신을 신랄하게 비평해 놓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성적 A+, 운동 A+, 교내 활동 A+, 봉사 활동 A+, 예술 A.

A 옆에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모두 +가 붙어 있는데 딱 그것 하나만 옥에 티처럼 비어 있다. 심장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완벽하지 않았군요.”

기계처럼 감정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무감각한 목소리와 달리 셰어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주로 다른 이들이 셰어를 보며 하는 말이었으나, 셰어 역시 그 말에 공감했다. 세상에는 노력으로 채울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셰어가 며칠 내내 고심해서 그려 낸 작품보다 늘 놀기 바쁘던 천재가 밤새 그려 낸 작품이 더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런 불공평함은 고려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결과일 뿐이다.

아버지는 셰어의 어깨를 묵직하게 토닥였다. 어깨 위에 툭, 툭, 얹어지는 무게에 숨이 막힌다.

“이제 알았으니 더 노력하면 된단다, 찰스.”

이미 온몸이 부서지도록 애쓰고 있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셰어는 차갑게 고이는 우울을 삼켰다. 우울함이나 분노는 조금도 쓸모없는 감정이었다.

찰스, 찰스, 찰스.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셰어는 그 이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찰스’라는 이름은 개인을 위한 것이지만 찰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베일리’다. 처음부터 베일리를 위해 찰스를 만든 거라면 찰스는 없는 게 더 나았다.

이 장기 프로젝트는 언제 끝이 날까? 어쩌면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직장을 가진 후에도, 결혼한 후에도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렇게 살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좋은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불평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선생을 돈으로 매수하고, 자신보다 잘난 이를 깎아내리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조작하는 것쯤이야 해도 되는 일이다. 어차피 불공평하게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공정하게만 이길 수 있겠는가?

셰어는 발치의 어둠을 노려보았다. 짙은 그림자가 굼실거리며 영역을 넓힌다. 환각인가 싶어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떠 봐도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림자가 흔들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웃는 얼굴로 얼어붙은 아버지가 보인다. 검은 잉크를 뿌린 것처럼 그의 얼굴 위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혹시 악몽이라도 꾸는 건가?

그래, 꿈이다. 사고를 당했고, 엔진이 폭발했고, 지금은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이다. 자각과 동시에 세상이 어둠에 잠겨 들었다.

요한. 이번에도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남자의 이름을 되새기며, 셰어는 조금 후회했다. 그래도 그러지 말 걸 그랬다.

* * *

하늘이 뿌옇게 밝아질 때까지 요한은 셰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어떤 두려운 것이 셰어를 데려가기라도 할 것 같았다. 불성실한 의사든, 셰어를 돌보지 않는 가족이든, 혹은 셰어를 데려가려는 죽음이든, 무엇이라도 셰어를 해칠 수 없을 것이다. 요한은 파수견처럼 셰어의 옆에 앉아 밤을 새웠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고른 숨을 쉬는 셰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셰어가 깨어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요한은 셰어의 눈썹이 움찔한 게 아닌가 싶어 놀라고, 손가락이 움직인 것 같아 유심히 관찰하기를 반복했다. 잠이 올 새가 없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은 고층 건물 틈 사이로 태양이 떠오른다. 병실로 창백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망자 같은 셰어의 얼굴에도 선명한 음영이 어린다. 그 잘생긴 얼굴이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말을 걸 것 같았다. 요한은 날이 밝으면 잠에서 깨는 것처럼 그가 심상하게 눈을 뜨기를 바랐다.

“잠꾸러기, 아침이야. 일어나.”

요한이 장난처럼 소곤거렸다. 문득 셰어의 속눈썹이 흔들린다.

착각인가? 요한은 제 눈을 의심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에게 뛰어들 것처럼 몸을 기울인 채 유심히 살폈지만, 셰어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셰어. 셰어?”

요한은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분명히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긴장한 요한의 심장 박동이 삑, 삑, 이어지는 규칙적인 기계의 소음을 앞지른다.

밀랍처럼 하얀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며 해와 달 같은 두 눈이 떠올랐다. 정면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이 부신지 가늘게 뜨인 눈매가 사나웠다. 셰어는 아직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지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요한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눈이 점차 또렷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금빛이 산란하는 녹색 눈동자 속의 짙은 동공이 크기를 바꾼다. 겨우 눈만 맞추었을 뿐인데 대단한 기적이라도 본 것처럼 격렬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요한은 억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쉽지 않았다.

“착하게 기다리라며. 왜 바람맞혀?”

셰어의 입술이 움찔거리는 게 꼭 웃는 것 같았다. 요한은 자꾸만 일그러지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넌 예쁜 게 제일 큰 장점인데 큰일이다. 이마에 흉이라도 지면 어떡하냐. 발은…… 다리는, 이제 수영복은 내 앞에서만 입어야겠네.”

이런 말이나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밤새 사람 속을 까맣게 태운 게 야속해서 이상한 얘기만 주절거리고 말았다. 셰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대체 뭐가 또 미안하다는 거야.

죽다 살아난 주제에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사과였다. 요한은 이제 그에게서 사과 같은 건 받고 싶지 않았다. 사과나 용서는 필요 없다. 불쑥 어떤 변수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삶에서 셰어와 나누고 싶은 것은 그런 소모적인 논쟁이 아니었다.

생채기 난 얼굴은 엉망이고, 까끌까끌한 목소리는 지옥에서 살아온 듯 끔찍했다. 요한은 뜨거운 눈시울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셰어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마른침을 삼킨 셰어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 보고 싶은데.”

요한은 자꾸만 속을 달구는 뜨거운 것을 삼켰다. 가슴에 뭐가 얹힌 것처럼 묵직한 통증이 번졌다. 요한이 보란 듯이 고개를 치켜들며 투덜거렸다.

“미안하면, 나중에 한 100살쯤 돼서 죽을 때 넌 꼭 나보다 5초쯤 뒤에 죽어라.”

“100살?”

셰어는 뭐가 우스운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으니, 요한은 괜히 초조해졌다.

“빨리 약속해.”

“그때까지 나랑 있게?”

“야, 지금 그게 중요해?”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듣고 보니 왠지 프러포즈 같았다. 괜히 쑥스러워 낯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근데 이거 은근히 돌려서 거절하는 건가. 나랑은 재미만 보고 결혼은 따로 하겠다, 뭐 이런 거 아냐?

요한의 눈에 금세 흉흉한 기운이 어린다. 그러나 얼굴은 부끄럼을 타는 것처럼 붉은데 눈만 사납게 떠 봤자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셰어는 그 얼굴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눈에 진득한 감정이 스쳤다.

“그래, 평생. 대신 취소는 안 돼.”

분명 ‘100살’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평생’으로 말이 바뀌었다. 어쩐지 속은 기분이 들었지만 요한은 그 ‘평생’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셰어가 제 입으로 미래를 약속하는 말을 한 적은 처음이다. 그와 단단한 끈으로 묶이는 건 생각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요한은 셰어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게 간지러웠는지 셰어가 눈썹을 찌푸렸다.

“음…….”

그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처연하던지 요한의 눈이 금세 안타깝게 축 처졌다. 요한은 재빨리 너스 콜을 누르며 쫑알거렸다.

“아파? 아무튼 너 말짱해지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평소처럼 으름장을 놓고 싶었는데 말끝에 습기가 배어들었다. 요한은 찡한 콧등을 문질렀다. 눈이 빨개진 요한을 물끄러미 보던 셰어가 입술을 삐딱하게 비틀며 웃었다.

“눈치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인데.”

“눈 뜨자마자 왜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됐다.”

셰어는 눈을 도로 감아 버렸다. 그러자 요한은 셰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욕실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입맞춤.

요한은 문가를 힐끔거렸다. 사람들의 기척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조금 시간이 걸리는 건지도 모른다.

요한은 몸을 숙여 셰어에게 살짝 입을 맞추었다. 셰어는 동화 속 공주님도 아니면서 입을 맞추자 감고 있던 눈을 반짝 떴다. 하기야 그는 공주는 아니지만 왕자 비슷한 거긴 했다. 요한은 생글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세상에 눈치 없는 건 너 하나거든.”

사람들의 기척이 들리기 시작했다. 말을 나누는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셰어는 의미심장하게 요한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제 쪽을 보며 베개에 살며시 기댄 얼굴은 상처 난 꽃처럼 애처로웠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 나도 너 가만두기 싫어.”

셰어는 환자다. 환자인데, 환자가 이래도 되나. 요한은 밤새 속에서 끓어넘치던 감정이 욕망으로 빠르게 변질되는 것을 느꼈다. 셰어는 영락없는 환자의 모습인데도 그를 부서지도록 꼭 안고 싶었다.

요한은 스멀스멀 번지는 열을 감추려 빠른 걸음으로 침대를 등진 채 문가로 다가갔다. 요한이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바깥에서 문이 열리는 바람에 갈 곳 잃은 손만이 덩그러니 허공을 붙잡았다. 문 앞에는 의사와 간호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본 그 의사가 심드렁하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들에게 방금 한 짓을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요한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네, 좋은 아침…….”

입니다, 뒷말은 요한의 입 속에서 뭉개졌다. 요한은 이를 갈며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찬물로 세수라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았다.

* * *

요한이 밤새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셰어의 상태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의사의 태도가 내내 심드렁했던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의사는 며칠 입원한 뒤에 통원 치료를 할 것을 권유하며, 자동차 딜러라도 되는 양 쇼퍼드리븐 차량의 견고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요한은 끝까지 자신이 과민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요한은 셰어가 상처를 소독할 때마다 옆에 딱 붙어 손을 잡아 주는 등 갖은 유난을 떨었다. 얼핏 보면 중병을 앓는 사람의 수발이라도 드는 듯했다. 심지어 요한은 셰어가 물컵 하나 제 손으로 쥐는 꼴을 못 봐 주었기에, 셰어는 끼니때마다 요한이 떠먹여 주는 음식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어야 했다.

한두 번 하면 지쳐서 그만둘 줄 알았으나, 요한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짓은 며칠 내내 이어졌다. 이제는 간호사나 의사, 경호원들까지 어지간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요한은 매일 순조롭게 셰어의 수프를 호호 불어 떠먹여 주었고, 화장실 앞까지 졸졸 따라붙었으며, 잠들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셰어는 이게 혹시 젓가락의 복수는 아닌가 의심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황을 즐겼다. 사실 늘 속도 없는 사람처럼 실실 웃고 다니던 요한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만 보면 으르렁거리며 덤비는 게 좀 귀여웠다. 특히 조금이라도 아픈 티를 내며 눈을 감고 있으면 주인 잃은 개처럼 낑낑거리며 주변을 맴도는 게, 보는 사람 속을 참 간지럽게 했다.

셰어는 치미는 욕망을 삼키며 오렌지 껍질을 벗기는 요한을 바라보았다. 요한은 큼직하고 모양 좋은 손으로 귤이라도 까듯 쉽게 오렌지 껍질을 벗겼다. 갈증이 일었다. 셰어의 시선을 다른 것으로 오인한 요한이 재빨리 오렌지 한 조각을 셰어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성장기냐? 방금 밥 먹었으면서 뭘 그렇게 쳐다봐. 침 떨어지겠네.”

“그러게. 성장기인가.”

오렌지 까는 것만 봐도 설 것 같은데 차라리 성장기라는 핑계라도 있으면 좋겠다.

셰어는 새콤달콤한 오렌지를 오래도록 씹었다. 시큼한 과일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요한이 주는 것은 달았다.

죽다 살아났더니 천국에 와 있는 듯했다. 설마 이것도 꿈이 아닌가 의심이 들어 셰어는 자꾸 입 안에 난 상처를 깨물어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매번 비릿한 맛과 통증이 현실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 상처는 오렌지를 먹을 때마다 솜털이 삐죽 설 만큼 날카로운 고통을 안겨 주었다.

입 안의 상처를 비롯하여 온몸이 다 아프지만, 행복하다. 가져도 되는 행복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행복해서 뭔가가 자꾸 가슴에 얹히는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지금처럼 행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눈을 감으면 지옥에나 떨어지라고 부르짖던 목소리가 들리고, 과거의 잘못들이 비처럼 쏟아져 아무것도 할 수 없어진다.

죽음으로 인생을 리셋할 수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다음 기회라는 게 있다면 절대로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이성적인 머리는 잠깐의 낙관적인 상상도 허락하지 않는다. 셰어는 자신에게 조금 지쳤다.

요한은 남의 속도 모르고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싱글거리며 물었다.

“맛있어? 하나 더 까 줄까?”

“아니.”

“왜? 잘 먹는 것 같은데 하나 더 까 줄게.”

요한이 다른 오렌지를 집어 든 순간 진동이 울렸다. 그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셰어의 눈치를 살피며 안주머니에 든 폰을 확인했다. 그가 곤란해하는 것만 봐도 어디서 온 전화인지가 뻔했다. 요한은 폰을 든 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나 전화 좀 받고 올게.”

불온한 감정이 셰어를 뒤흔들었으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담담했다.

“그래. 그렇게 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요한은 재빨리 병실을 빠져나갔다. 셰어는 요한이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잘 알았다. 오전부터 요한에게 업무 전화가 잔뜩 걸려 왔기 때문이다. 요한은 처음에는 병실에서 짧게 통화했으나, 통화가 길어지자 나중에는 아예 병실을 나가 전화를 받곤 했다.

요한은 제법 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단순히 레일라 바네스의 일을 이어받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V Pictures를 전략적으로 홍보했다. Page 6의 전속 모델이나 마찬가지였던 요한은 자신의 유명세를 영화 홍보에 활용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과 함께 V Pictures의 영화는 날개 돋친 듯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 탓에 요한의 일거수일투족은 곧 V Pictures의 전략이 되었다.

그런 인사가 지금은 모든 일을 제쳐 놓고 병실에 틀어박혀 오렌지 껍질이나 까고 있으니, V Pictures에서 불이 나게 전화를 해 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늘 밤 비행기가 뜰 수 있을까요?]

셰어는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금방 돌아왔다.

[물론 가능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메시지 한 통이면 BNB 그룹 차원에서 운용 가능한 전세기를 준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요한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요한은 돌아가야 한다. 그에게는 소중한 가족과 동료가 있고, V Pictures가 있다. 한창 바쁘게 일을 할 시기에 요한을 계속 간병인 노릇만 시키며 잡아 둘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자꾸 욕심이 난다. 셰어는 어렵게 메시지를 완성했다.

[구체적인 사항이 정해지면 알려 주겠습니다.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운항 스케줄 비워 주세요.]

요한을 보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달콤해서 지금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은 행복해도 되지 않나? 쓰레기처럼 살아왔지만, 사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은 어쩌면 살아야 할 의미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속 편한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즉시 신랄한 반박의 말이 수십 가지는 떠오른다. 그럴 자격 같은 건 없다고, 감히 어떻게 그런 것을 바라느냐고 질책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셰어는 피로한 눈을 감았다.

그래도 나 역시 한 번쯤은, 좋을 대로 살아도 되지 않나?

깊은 생각을 이어 가기도 전에 업무에 대한 메시지가 쇄도했다. 실상 요한만 일이 바쁜 것은 아니었다. 셰어 역시 부상으로 순방 일정이 취소되었으나, 다른 업무를 위해 하루빨리 복귀해야 했다.

셰어는 메시지로 몇 가지 업무 지시를 내렸다. 순방 후에 공유할 예정이었던 BNB 비전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미리 공유하고 추후에 다시 순방 일정을 잡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진행하던 다른 업무도 적당한 사람에게 다시 배분해야 했다. 한번 생각을 시작하자 할 일의 목록이 끝없이 늘어났다.

퇴사할까?

셰어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한 번도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두면 요한과 함께 보낼 시간이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둘 다 바쁜 것보다는 한 명만 바쁜 쪽이 확실히 얼굴을 볼 기회는 더 많을 것이다.

때마침 잡념의 원흉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거 봐. 매튜가 쿠키를 줬어.”

요한은 나갈 때는 빈손이었는데 들어올 때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있었다. 셰어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게 누군데?”

“몰라? 너 경호하시는 분, 누나가 파티시에래. 가게가 이 근처라는데?”

하여간 조금만 풀어 주면 아무 데서나 꼬리를 치고 다닌다. 남의 누나가 파티시에인지 뭔지는 대체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너나 먹어.”

셰어는 까칠하게 쏘아붙이며 생각했다. 매튜를 병실에서 먼 곳으로 재배치하고 요한을 감시하는 경호 인력을 갈아 치워야겠다. 틈만 있으면 누구하고든 금세 친해지고 마는 요한을 단속하려면 보통 수단으로는 어림도 없다. 역시나 퇴사는 요원한 일이었다.

* * *

요한은 셰어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되새겼다. 셰어는 오렌지를 좋아하고, 아몬드가 든 쿠키는 싫어한다. 혹은 질투가 아주 심해서 자신이 다른 누구와 얘기하는 꼴도 보기 싫어하는 거라든가.

다시 생각해 보니 후자가 좀 더 그럴듯했다. 셰어는 사실 질투가 심한 편이다. 어린애랑 얘기하는 것만 봐도 질투를 하지 않았던가. 어떨 때는 좀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요한은 혼자 비운 쿠키 봉지를 구기며 웃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셰어가 비꼬듯 물었다. 요한은 뾰족하게 날이 선 셰어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생채기가 나지 않은 곳만 골라서 조심스럽게 어루만지자 매섭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진다.

“그냥. 넌 나랑 떨어지면 불안해서 어떡할래? 나 없으면 못 살겠다, 그치.”

“또 이상한 소리 하지. 세뇌하는 것도 아니고.”

“세뇌 맞는데. 그러니까 얼른 넘어와.”

만지다 보니 손을 떼기 싫어졌다. 요한은 손에 착 달라붙는 듯한 뺨을 비비적거렸다. 사자의 수염을 건드리는 듯한 기분이다. 손끝이 찌릿하고 이상한 뿌듯함이 차올랐다. 분명 아무도 셰어에게 이런 짓은 못 할 것이다.

“넌 나 없으면 못 살지? 그렇다고 대답해.”

이런 뻔한 개수작을 부리면 코웃음을 칠 줄 알았는데, 셰어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요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조금 우울해 보였기에 장난을 걸던 요한마저도 기분이 조금 처지고 말았다.

뭐가 문제일까? 요한은 셰어와 오랫동안 눈을 맞추었다. 매번 눈을 맞출 때면 그 속을 읽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지지만, 막상 눈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눈 속에 갇혀 버린다. 요한은 셰어의 눈 속에 비치는 바보 같은 남자를 발견했다. 그 남자는 정신없이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을까. 잠겨 죽어도 모를 만큼 깊게 빠져 버렸다. 한심하고도 가여운 얼굴이 셰어의 눈 속에서 깜빡인다. 그 안에 갇히는 기분은 항상 초현실적이다.

“오늘 저녁에 전세기가 떠.”

요한은 짧은 말조차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뭐?”

“그걸 타고 돌아가.”

애달픈 고백이라도 하는 듯한 말투로 그토록 잔인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돌아가라는 말은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 해도 결코 좋은 의미가 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뜻이야?”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니야, 요한.”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알아듣게 설명해.”

셰어는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그가 오래 고민할수록 요한은 더 화가 났다. 셰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좋지 않은 말이라는 확신만 공고해졌다.

“네가 여기서 받은 전화가 오늘 오전에만 수십 통이야.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는 거 다 알아.”

타이밍도 나쁘게 요한의 재킷 안주머니에 든 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요한은 신경질적으로 전원을 껐다.

V Pictures는 투자가 정상화되며 대부분의 업무가 궤도를 찾아 가고 있었다. 따라서 요한의 일도 급격히 늘어났다. 전화로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회사 일이라는 게 흔히 그렇듯, 사람들과 직접 상의할 일도 있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렇기에 아침부터 쏟아지는 전화의 말미에는 언제 업무에 복귀할 예정인지를 묻는 말이 꼭 따라붙었다. 요한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전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셰어는 웃음으로 넘어가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네 자리로 돌아가.”

요한은 조금 억울해졌다. 생사를 오가는 사고를 겪은 사람들은 으레 주변 사람들에게 관대해지지 않던가. 셰어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전보다 더 빡빡하게 굴었다.

“너 지금 내가 계속 전화 받았다고 이러는 거야?”

“속 좁은 사람 취급하지 마.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니까.”

“아니,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비행기는 취소해. 넌 내가 필요하고, 난 네 옆에 있어야겠어.”

행복한 날은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함께 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요한은 시간이 허락하는 한 계속 셰어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의 얼굴에 남은 생채기가 떨어지고, 붕대 아래의 화상이 아무는 것을 봐야지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

셰어는 난감함을 곱씹으며 요한의 손을 붙잡았다.

명령이 안 통하니 이번에는 회유인가 보다. 요한은 셰어가 일부러 살갑게 구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어딜 봐도 크고 반듯한 남자의 손인데, 손등에 꽂혀 있는 링거 바늘 때문인지 그 손이 유독 가련해 보였다.

“내 말 들어, 요한. 나도 널 보내고 싶지 않아.”

떼쓰는 아이라도 달래듯 부드럽기만 한 음성이 야속했다. 요한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투덜거렸다.

“그런 사람이 말도 없이 비행기부터 준비하냐?”

“진심인데.”

셰어의 손은 차갑지만 부드러웠다. 원래도 손이 이렇게 찼던가. 요한은 평소보다 낮은 그의 체온이 사고의 후유증 같아 속이 상했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요한을 달래듯, 셰어는 냉랭하게 들리는 말을 밀어처럼 속삭였다.

“생각 같아서는, 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서 나만 볼 수 있는 곳에 가두고 싶어.”

“야, 갑자기 뭐 그런 무서운 얘기를 해.”

요한은 당황했다. 평소 셰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보면서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할 줄은 몰랐다. 전부터 느꼈지만 셰어는 항상 범죄의 경계를 아무렇게나 넘나드는 상상을 하곤 했다. 요한은 자신이 없으면 그가 정말 악랄한 범죄자가 될 것 같다는 망상에 빠져 버렸다.

셰어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이 정말 곱게 미친 놈 같아, 요한은 그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결 굳혔다.

“그러니까 마음 바뀌기 전에 떠나. 나도 곧 뒤따라갈 테니까.”

이대로 요한을 보낼 작정이라면 그는 이렇게 웃으면 안 됐다.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의 담담함이 요한의 속을 긁었다. 셰어는 지독하게 욕심을 부릴 때는 언제고, 체념이 습관이 된 사람처럼 굴었다. 비실비실 말라 가는 식물 같은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다. 차라리 내키는 대로 자신을 탐내며 욕심을 부릴 때가 더 나았다.

요한은 차갑게 이죽거렸다.

“웃기고 있네. 넌 나 없으면 안 되거든. 나 말고 대체 누가 너한테 밥도 먹여 주고 오렌지도 까 주겠…… 아니, 젠장. 난 그런 꼴 못 봐. 안 가!”

셰어를 도발하기 위해 시작한 말인데 생각하다 보니 열이 뻗쳤다. 혹시 모르지 않나. 흔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클리셰처럼 아파서 마음이 약해진 셰어가 헌신적으로 자신을 돌보는 간병인과 사랑에 빠질지도. 그런 꼴은 절대 못 본다. 요한은 당장이라도 가상의 바람 상대를 잡으러 갈 듯 흉흉하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셰어는 태연하게 찬물을 끼얹었다.

“어차피 넌 오늘 가야 하니까 그 꼴은 못 볼 텐데.”

“난 안 간다고 분명히 말했어. 넌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요한은 끈질기게 자신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더 강경하게 굴면 바닥에 드러눕기라도 할 기세로 우겨 대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셰어는 슬슬 진짜 세뇌하는 게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셰어는 어이가 없어 툭 쏘아붙였다.

“까불지 마. 내가 진짜 너 없이 안 되면, 널 어쩔 줄 알고 이래.”

“왜, 아무것도 못 하게 어디 가두게? 해 봐. 나 보내겠다고 전세기까지 마련해 두신 분이 참 잘도 하겠다.”

“하아…….”

셰어는 슬슬 골치가 아픈지 이마를 짚었다. 그의 이마에 가느다란 골이 깊어지자 요한은 조금 초조해졌다. 아직 회복 중인 사람한테 괜히 떼를 썼나 싶었다.

하지만 요한은 끝까지 옆에 있어 달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셰어가 못내 섭섭했다. 셰어가 자신을 배려해 내린 결정이라는 건 자명했지만, 요한은 그런 상냥함은 바라지 않았다. 셰어가 자신처럼 솔직하게 욕망하고, 매달리고, 애걸하기를 바랐다.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라더니. 요한은 속으로 탄식했다. 셰어를 이겨 볼 일은 한 번도 없을 것 같아 빈정거리는 말이 절로 나왔다.

“난 지금도 너 없으면 안 되겠는데 넌 여유 있어서 좋겠다. 어어, 다 네 마음대로 해. 비행기를 태우든, 헬리콥터를 태우든 알아서 하라고.”

찌푸린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있던 셰어가 고개를 들었다. 차분한 눈은 선명하게 가라앉은 채 요한을 겨냥하고 있었다.

화났나?

요한은 지레 찔끔했다. 말이 심했나 싶어 한 말을 되새겨 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는 셰어가 더 잘못했다. 좋아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걱정하는 사람을 몰래 보낼 준비를 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남의 속도 모르고.

“널 사랑해.”

툴툴거리며 이어지던 생각이 툭 끊겼다.

처음 듣는 말처럼 낯설었다. 셰어가 고백한다면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빛이 든다거나 아름다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고, 심장이 뻥 터진다거나 온몸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지지도 않았다.

단지 세상이 멈추었을 뿐이다. 정지된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은 셰어뿐이었다. 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셰어는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긴장 어린 낯이 창백했다.

“내가 너보다 더 너를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어. 이게 내 방식대로 널 사랑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네가 이해해.”

셰어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방금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은 모양이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나는, 네가 날 조금만 덜 미워하면 좋겠어.”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그의 입술을 똑똑히 읽었다. 이번에는 셰어의 눈 속에 숨은 진심을 파헤치려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요한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석고처럼 굳은 입술은 사뭇 다정하게 물고 빨아도 쉽게 열리지 않았다. 입술에 과즙이 묻었던가. 퍽 조신하게 다물린 입술에서 오렌지 특유의 달고 쌉싸름한 맛이 났다. 입술만 빨아도 좋은데 그의 입 안은 어떨까. 숱하게 입을 맞춰 보고도 애가 탄다.

요한은 셰어의 턱을 감싸 쥐고는 우묵한 입술 아래를 지그시 눌렀다. 다물려 있던 입술이 손톱만큼 열린다. 늘 먼저 덤벼들기 바빴던 셰어가 이번에는 얌전했다. 한층 어두워진 눈이 요한을 응시한다. 예고 없이 시작된 입맞춤의 의미를 묻는 듯했다.

안 어울리게 뭘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거야.

요한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입을 맞춰 댔다. 새털처럼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셰어는 대답도 없이 입술만 비벼 대는 것이 영 성가셨는지 요한을 슬쩍 밀어냈다.

“그만해.”

“사랑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셰어의 숨이 가늘게 떨린다. 요한은 방금 들은 말을 되새기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그만해?”

“사랑해.”

그리고 목소리가 한 번 더 겹쳐졌다. 그다음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잠깐의 틈도 용납하지 못할 것처럼 갈급하게 서로의 입술을 탐하기 바빴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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