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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회의실에 누군가의 휴대폰 진동음이 울린다. 셰어는 굳이 진동의 근원을 찾기 위해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멀지 않은 곳에 앉은 BNB 케미컬 임원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폰을 살그머니 움켜쥐는 것이 보였다.
일순 요한이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인지, 신경을 거스르는 진동음이 예전과 다르게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던 일상에 뜬금없이 누군가가 끼어드는 경험은 낯설었다. 자아가 수 갈래로 찢어져 제각기 따로 노는 듯했다. 몸은 회의실에 앉아 있는데 머릿속에서는 이성과 감정이 대치했다.
셰어는 항상 그렇듯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그러나 글자와 숫자를 곰곰이 되새기다 보면 잘못 섞여 든 사진처럼 불쑥 요한이 떠오르는 것이다. 셰어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그 집에, 요한의 곁에 자신의 일부를 놓고 온 것 같다.
새로운 알림이 뜨지 않는 폰 화면에는 요한과 나눈 몇 개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사진]
[부엌에서발견했어]
[사람들은이걸포크라고해]
[포크라고]
[알겠어?]
[몰랐네.]
[부엌에서 뭐 해?]
[냉장고에있는바닐라아이스크림먹어도돼?]
[바빠?]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이 있다고? 유통 기한 잘 보고 먹어.]
[안 바빠. 이제 회의실이야.]
요한에게서는 그 뒤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마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퍼먹고 있는 모양이다. 셰어는 찌푸린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일하느라 바쁜 사람보다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이 답장이 느리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온종일 귀찮게 메시지를 보낼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아이스크림에 정신이 팔려 다른 건 안중에도 없는가 보다. 그러고 보니 요한은 잠꼬대로도 아이스크림을 찾곤 했다.
아이스크림을 질리도록 먹으면 꼴도 보기 싫어지지 않을까. 셰어는 요한에게 아이스크림을 질리도록 퍼먹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 음산한 표정을 곁눈질하던 발표자가 프레젠테이션을 종료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발표자는 질문을 하면 당장 목을 매러 갈 것 같은 얼굴로 눈만 굴렸다. 셰어는 자신에게 시선이 쏠려 있다는 것을 간신히 자각했다.
넋을 빼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순방의 목적은 단순히 그룹의 주인이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 주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룹의 주인이 되면 할 일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중시하는지를 전달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첫 시작이 BNB 케미컬이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BNB 케미컬은 그룹의 4대 근간 사업인 화학, 전자, 건설, 자동차 중 하나이기에 셰어가 평소 눈여겨보던 계열사였다.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었기에 더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셰어는 오는 동안 몇 번이나 훑어보았던 자료를 다시 한번 읽었다. 글자를 보자 미리 생각해 두었던 말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셰어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이 온화한 눈으로 좌중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이들의 눈에 불이 켜진 것처럼 빛이 반짝인다. 좋은 원석인지 아닌지를 감정하는 눈이다.
“발표 잘 들었습니다.”
셰어가 입을 열었다. 긴 연설을 하기 전처럼 희미한 긴장감이 뭉쳤다가 흩어졌다. 그 짧은 긴장을 감지한 사람은 없었다. 셰어 자신조차 느끼지 못한 긴장을 알 리 없는 BNB 케미컬의 임원들은 저 새파란 애송이가 무슨 말을 하나 보자 하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동부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학부 시절, 여름 방학 때는 여기서 인턴을 했습니다. 매일 저 창 너머로 보이는 수많은 기업의 이름을 보면서 다녔죠. A사, N사, M사…….”
예리하던 이들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회의실의 큰 창을 힐끔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창 너머 다닥다닥 붙은 기업의 간판이 보인다. 셰어가 말한 기업 중에는 한때 그 창을 통해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보이지 않는 기업의 이름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는지 셰어의 말을 경청하는 이들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본다.
“그게 대략 10년 전 얘기입니다. 다시 와서 보니, 그때 본 기업 중 절반이 사라졌더군요. 이제 우리가 이 구역의 대부가 됐습니다.”
셰어가 흐릿하게 웃자 그를 따라 잔잔한 웃음이 번진다. 셰어는 웃음이 꺼지기 전에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불이 꺼지는 기업이 BNB 케미컬이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요?”
웃음은 번진 것만큼이나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셰어는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은 회의실의 공기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BNB 그룹은 덩치가 커졌습니다. 예전처럼 민첩하게 움직이지 못하고 정체되고 있습니다.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경쟁사들은 달리고 있는데 우리는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죠. BNB 그룹을 움직이는 네 개의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셰어는 앞에 놓인 보고서를 팔락팔락 넘겼다.
“매출 정체, 수익성 악화, 품질과 기술력에서도 점차 밀리는데 투자는 매출액의 2%도 되지 않네요. 이래서야, 하는 일 없이 뒷짐만 지고 선 대부가 따로 없습니다.”
몇몇은 동조하는 눈빛을 보내고 몇몇은 그러면 어떡하라는 말이냐 묻는 듯한 눈으로 셰어를 바라본다. 셰어는 부정적인 반응에 주눅 들지 않았다. 겨우 말 몇 마디로 모든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단지 젊은 나이에 그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셰어를 싫어하는 사람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셰어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의사는 증상을 통해 병의 원인을 찾고 적절한 처방을 하죠. 우리가 할 일도 같습니다. 수술해서 달리게 해야죠.”
“수술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셰어의 옆에 앉아 있던 BNB 케미컬 대표 캐머런 베일리가 물었다. 그는 셰어의 먼 친척으로, 중년의 나이에도 운동선수 같은 체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캐머런은 상어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저희도 전문의의 집도를 애타게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만…….”
그 전문의가 과연 셰어가 될지는 모르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셰어는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뇌 수술이요. 항상 머리가 먼저죠.”
임원들의 낯빛이 파리해진다. 애써 웃는 캐머런의 표정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대되는군요.”
“그럼 이만 회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했어요.”
셰어는 캐머런이 다른 말을 더 하기도 전에 폐회를 선언했다. 할 말 많은 눈으로 눈치를 보던 다른 이들이 미적거리며 인사를 했다. 가장 먼저 셰어가 회의실을 나서자 그 뒤를 캐머런이 따른다. 회의실에서는 그나마 웃는 낯을 유지하던 캐머런은 정색을 한 채 말이 없었다.
셰어는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자고로 아쉬운 쪽이 먼저 숙이는 법이었다. 캐머런은 1층 로비에 발을 디딘 후에야 입을 열었다.
“회장님 안목이 대단하시군요. 작년 인사 발표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시 보니 과연 BNB의 얼굴로 손색이 없습니다. 사진이 아주 잘 나오겠어요.”
에둘러 말했지만 겉보기에만 번드르르하다는 욕이었다. 셰어는 시간을 확인하는 척 아직 답장이 오지 않은 폰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회장님은 이런 면에서는 실수가 없으시죠.”
“아, 그 유려한 말솜씨도 빼놓을 수는 없겠지요. 핏줄로 이어지는 재주이니.”
“오랜 노력의 결실입니다.”
“이왕 결실을 거두실 거, 이런 돈놀이보다 정치를 하지 그러셨습니까? 네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걸 더 바라셨을 텐데.”
셰어는 조용히 캐머런을 바라보았다. 캐머런은 별말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씩 웃어 보였다.
“같은 베일리라도 거기랑 우리는 노선이 다르지. 정치는 알아도 상도는 모르나? 왜 엄한 데 끼려 들까.”
결국 캐머런의 입에서는 노기를 감추지 못한 윽박이 낮게 터져 나왔다.
또 그놈의 출신 얘기였다. 베일리라는 성을 공유하지만 그 안에서도 파는 두 개로 나뉘었다. 공존을 위한 조치였다. 정치에서는 의석수가 한정되어 있고, 기업을 운영할 때도 혈연으로 이어진 특수 이해관계자가 점유할 수 있는 자릿수에 제한이 있다. 그렇기에 정계와 재계에 종사하는 베일리는 서로의 자리를 탐하지 않았다.
셰어는 보기 드문 예외였다. 예외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으나, 셰어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고작 몇 표 차이로 정권이 바뀌었다. 노선이 다른 정권이 득세한 후로 베일리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지 않았더라면, 집안에서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지 않았더라면 셰어 역시 정해진 길을 벗어나 홀로 설 일이 없었을 터였다.
이래서 정치가 싫다. 남의 손에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걸 더는 견딜 수가 없다. 셰어는 싱긋 웃으며 아무것도 묻지 않은 캐머런의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모르셨나 본데, 저는 정치 싫어합니다.”
캐머런은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셰어를 노려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얼굴이 화를 참지 못해 경련한다. 아마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가 질 나쁜 게임을 건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셰어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어차피 뇌 수술 받을 대표님이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 알아 두세요. 그래야 실수를 안 하지.”
“어찌나 친절하신지. 보지 않아도 앞날이 훤하군. 네가 코를 흘리고 다닐 때 나는 이 회사를 위해 며칠 밤을 새우며 일을 했단다, 아가야.”
“그렇게 일한 성과가 이거라면 그 세월이 다 헛수고네요. 내가 여기 오면서 끄적거린 낙서만도 못해서야.”
“그리 자신이 있다면 어디 해 보아라.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나 두고 보자.”
캐머런이 히죽거리며 빈정거렸다. 셰어는 그를 일별하고는 밖으로 통하는 문을 나섰다. 일정에 맞추어 미리 대기 중이던 리무진이 사옥 앞에 서 있었다.
셰어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이글거리는 시선을 무시하며 차에 탔다. 리무진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후에야 꼿꼿하게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던 셰어의 어깨에서 긴장이 풀렸다.
하루가 길다. 이유 없이 어떤 보상을 기대할 때면 자연스럽게 요한이 떠오른다. 그에게 특별한 것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가 보고 싶었다. 셰어는 여태 답장이 없는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집으로 출발해.]
최초의 계획대로라면 즉시 공항으로 이동해야 한다. 인수인계를 앞두고 급하게 준비된 순방 일정은 살인적으로 빽빽했다. 하지만 기자들 틈바구니에 서 있는 요한을 본 순간, 셰어는 그 계획을 바꾸었다.
그와 같이 있고 싶다. 요한과 함께 있는 시간은 반듯하게 줄을 맞추어 놓은 기준을 엉망으로 흩트리는 것처럼 어지럽고 혼란스럽지만, 셰어는 요한에게 휘둘리는 게 싫지 않았다. 셰어는 요한과 나눈 메시지를 훑어보며 입술을 심술궂게 일그러뜨렸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가면 어떨까. 트렁크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채워 요한에게 보여 준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아마 좋아할 것이다. 요한은 아이스크림을 정말 좋아하니까. 답장도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을 요한을 생각하자, 새삼 이 계획이 정말 훌륭한 책략처럼 느껴진다. 매일같이 아이스크림을 사다 나르면 요한은 아이스크림 얘기만 들어도 질색하게 될지 모른다.
그 생각을 질책하듯 진동이 울렸다. 전화가 걸려 오고 있었다. 셰어는 화면에 뜬 샬롯의 이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네, 회장님.”
- 파트너.
평소보다 낮고 까칠한 샬롯의 목소리가 들렸다. 곧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진다. 그녀가 물었다.
- 파트너라더니, 이렇게 뒤통수치는 법이 어디 있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셰어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복잡한 계산이 이어지고 있었다. 분명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문제가 있다면 사적인 영역일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기자들 앞에서 요한의 손을 잡은 것과 같은 일 말이다.
예상대로 냉엄한 질책이 쏟아졌다.
- 거기서 기자들 불러 놓고 커밍아웃 파티라도 하려고 했니?
셰어는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을 세게 말아 쥐었다. 아주 짧게 다듬어진 손톱은 손바닥에 상처 하나 입히지 않았지만 손마디가 지끈거렸다.
“농담이시겠죠.”
- 홍보팀에서 종일 네 기사 막으면서 진짜 애인인지 아닌지로 내기를 하던데, 나는 어디에 걸면 이길까?
“이런 데 관심이 많으신 줄은 몰랐네요. 제 사생활입니다.”
- 꼰대 취급 마라. 내가 지금 너 훈계하려고 전화한 줄 아니?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샬롯의 반응은 매우 건조했다.
- 공식적으로 커밍아웃만 안 한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내가 궁금한 건 네 잘난 섹슈얼리티도 아니고 사생활도 아니란다.
“그럼 뭐가 궁금하셔서 이렇게 친히 전화를 주셨습니까?”
그녀는 끔찍하게 싫어하는 말을 하듯 크게 한숨을 쉬며 물었다.
- 이렇게 자신 있게 일을 저질렀는데 안전장치는 있겠지.
안전장치라. 여기서 콘돔에 대한 농담을 지껄이면 샬롯은 뭐라고 할까. 셰어는 위험한 호기심을 참았다. 그는 익숙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샬롯의 논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셰어가 가장 먼저 떠올렸을 법한 생각이었다.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는가.
“비밀 유지 각서 말씀이시죠.”
- 그래. 이 바닥에서 커밍아웃의 정석은 헤어진 애인이 인터뷰를 하면서 시작된다는 거, 너도 잘 알잖니.
가진 게 많은 입장에서 불이익을 겪을지도 모르는 커밍아웃을 한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밍아웃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전략적인 계획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백하는 경우다.
샬롯의 말대로 이 바닥 커밍아웃의 정석은 헤어진 동성 연인이 잡지사와 인터뷰를 하거나, 연애 얘기를 책으로 쓰거나, 섹스 테이프를 SNS에 업로드하면서 시작된다. 그것이 시작인 이유는 누구도 쉽게 소문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섹스 테이프가 공개된 후에도 영상에 나온 것은 자신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끝까지 잡아떼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저 말뿐이라면 소문이 사그라들 때까지 없었던 일처럼 침묵하거나, 돈을 주고 입을 막거나, 소문을 퍼트리는 잡지사나 개인을 고소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있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미 주류에 편승하기는 글렀으니 소수에 관대한 여론을 잡기 위해 커밍아웃을 하고, 일련의 피해를 최대한 수습해야 했다.
샬롯은 참사를 정석대로 수습하고자 하고 있었다. 핵심은 결정적인 증거의 유무다. 비밀 유지 각서는 연약하지만 기본적인 안전장치였다. 실질적인 효력이 없더라도 제 손으로 서명을 했다는 심리적 부담감 때문인지, 비밀 유지 각서를 쓴 사람은 상대적으로 아웃팅을 시도할 확률이 낮았다.
셰어는 요한이 비밀 유지 각서에 서명하던 날을 떠올렸다. 불순한 목적으로 요한을 불러낸 그날 밤, 요한은 순진하게도 어떤 책략도 없이 고백했다.
‘널 좋아해.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좋았어.’
그때 셰어는 요한이 멍청할 정도로 순진하다고 생각했었다. 진지한 관계를 시작할 용기도 없으면서 비겁하게, 속는 사람이 어리석은 거라 믿으며 그를 탓했다.
요한이 서명한 비밀 유지 각서는 셰어의 금고 속에 잠들어 있다. 셰어는 그것이 요한을 속이고 착취한 증거 같아 답지 않게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각서가 있다. 샬롯을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추악한 잘못을 고백하는 것처럼 말이 목에 걸려 거북스러웠다. 셰어는 간신히 쥐어짜듯 말했다.
“……각서는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그나마 다행이구나. 다른 루트는 우리 쪽에서 차단하고 있으니 너는 그 애인만 잘 단속하렴. 폭탄 안 터트리게.
각서가 있다는 말에 안심했는지 내내 까칠하던 샬롯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진다. 그녀는 그러고도 안심하지 못하고 길게 당부했다.
-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문제가 나중에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리고 난 내 파트너가 멍청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해. 알아듣겠니?
그녀의 뾰족한 말투가 마음속 어딘가를 쿡쿡 찌른다. 이를테면 거기에 있는지도 몰랐던 양심 같은 것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셰어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통화는 길지 않았다. 용건을 마친 샬롯은 일이 바쁘다며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셰어는 뜨거워진 전화를 쥔 채 요한을 생각했다. 샬롯이 우려하는 문제는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 사실은 비밀 유지 각서가 있다거나 하는 냉정한 말을 하면서도, 요한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앞섰다. 요한은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는 이를 드러내지만 함부로 남을 해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우스울 만큼 근거도 없이 공고한 믿음이다. 그러나 셰어는 진심으로, V Pictures가 위태로울 때도 자신을 걱정하며 새파래지던 그 다정한 남자가 그럴 리가 없다고 믿었다.
무심코 내다본 창밖의 풍경이 낯설었다. 집으로 가는 길도, 공항으로 가는 길도 아니었다. 주위의 풍경은 점차 삭막한 길로 바뀌고 있었다. 말수 적은 운전기사는 평소 실수하는 법이 없는데, 아무래도 일정이 계속 변경되다 보니 뭔가 착오가 있는 듯했다.
셰어는 파티션을 조금 내리며 물었다.
“존, 이 길이 아닌 것 같은데요. 집으로 가는 게 맞습니까?”
존은 대답이 없었다.
“존?”
셰어는 싸늘한 말투로 다시 한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니폼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존과 같은 머리색에 비슷한 외양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분명 존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차갑게 식은 머리가 금세 상황을 이해했다. 납치다. 경호 인력을 아무리 충원해도 재수가 없으려니 이런 일이 생기려면 생기고 만다. 셰어는 일찍이 교육받은 대로 조용히 긴급 전화 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경호업체가 탄 리무진이 사방을 호위하듯 에워싼 채 함께 달리고 있었다. 전화 한 통이면 종결될 일이다.
그러나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상무님.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납치범치고는 제법 공손한 말투였다. 깡패 같은 말투였더라면 들은 체도 하지 않았겠지만,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말을 거는 게 마음에 걸렸다. 셰어는 통화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가만히 그를 살폈다.
백미러로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해쓱하게 웃는 남자가 눈에 익었다. 중년의 남성, 슈트 형태의 유니폼이 제 옷처럼 잘 어울린다. 각진 턱과 긴장으로 굳어진 눈매, 억지로 웃는 것처럼 경련하는 입술. 그가 기억 속의 인물과 겹쳐졌다.
회사 로비에서 잔뜩 긴장한 채 자신을 기다리던 남자.
‘유니콘 네트워크 연구팀 팀장 데일입니다.’
그, 유니콘 네트워크의 내부 고발자.
“데일…….”
셰어가 무심코 그의 이름을 뱉었다. 그러자 매끄럽게 주행하던 차가 갑자기 크게 휘청거리며 속력을 높인다. 데일은 경호를 위해 옆에 붙어서 주행하던 리무진을 범퍼카 처박듯 들이받으며 차선을 바꾸었다. 평온하게 주행하던 다른 차들이 황급히 물러서며 경적을 울린다. 운전 똑바로 해! 누군가가 욕설을 뱉는 소리도 들렸다.
차가 크게 흔들리는 바람에 셰어는 시트에 납작 달라붙은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가에 처박혀 있는 리무진이 보인다. 하필이면 그 차가 차선을 거의 막고 있어, 정체된 차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제멋대로 엉켜 있는 리무진에 차선을 바꾸는 차까지 마구잡이로 뒤섞인 탓에 도로는 난장판이었다.
데일은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며 술 취한 사람처럼 도로를 누볐다. 차체가 길쭉한 리무진을 모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속도를 높이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곳곳에서 사고가 발발했다. 뒤 범퍼가 부딪히고 차 문이 긁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사방에서 빵빵거리는 소리가 터진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도로를 무법자처럼 달리는 리무진을 따르기란 쉽지 않을 터였다. 추적에 실패한 경호 차량이 멀어지고 있었다.
늦었다. 이제 경호 인력으로는 수습할 수 없다. 셰어는 차 문을 꽉 붙잡은 채 시트에 등을 바짝 기댔다.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데일이 실성한 듯 웃으며 백미러를 통해 낭패감에 젖은 셰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하실 줄 몰랐어요. 상무님은 제가 해 드린 것도 다 잊으셨잖아요.”
입을 열기라도 하면 욕이든 욕지기든 튀어나올 것 같아 셰어는 입술만 깨물었다. 데일은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혼자 멋대로 떠들어 댔다.
“아, 기사 잘 봤습니다. 이제 위로 올라갈 일만 남으셨더군요. 축하드립니다.”
미친 사람처럼 험악하게 차를 몰면서 말로는 차분하게 축하를 하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셰어는 어지러운 머리로 생각하려 애쓰며 간신히 한마디 했다.
“네…… 감사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잘렸어요.”
쾅! 지나가는 차에 부딪친 건지 차체가 크게 흔들린다. 리무진은 연이어 험악한 충돌을 겪고도 잘만 달렸다. 긴 경적이 뒤를 쫓는다. 빠앙, 빵, 빵. 요란한 소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셰어는 땀이 고여 미끈거리는 손으로 차 문을 세게 붙들었다. 몸이 튕겨 나갈 것 같았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저 눈이 돌아간 자를 막기 위해서라면.
“유감이군요. 나는 그 뒤로 보고받은 게 없는데, 틀림없이 무슨 착오가 있었을 겁니다.”
그 말의 일부는 진심이었다. 유니콘 네트워크 인수 건이 마무리된 후, 셰어는 정말로 데일에 대한 내용을 따로 보고받지 않았다. 그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았기에 굳이 챙겨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셰어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러지 말고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합시다. 어서 차를 세워요.”
“하하……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하자고요.”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냉담했다.
“상무님, 제가 편지에 다 써 뒀잖아요.”
바깥의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고속 도로를 벗어난 리무진은 외진 도로를 사나운 엔진음을 울리며 달렸다. 길을 막는 차는 무조건 들이받으며 달린 탓에 차는 부상당한 짐승처럼 불길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데일은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제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제가 어떤 결심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다 말씀드렸는데 이해를 못 하셨나 봐요.”
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흔하디흔한 사연이라는 감상만 흐릿하게 남아 있을 뿐, 그때는 자신을 증명하기에 바빠 남의 사정 따위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셰어 자신조차 소모품처럼 취급되었기에 누군가를 소모품 취급하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다.
미안하다고, 그렇게 산 것을 후회한다고 이제라도 말해야 할까. 셰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제 인생은 끝났어요. 왜 그러셨어요? 저는 그래도 좋은 의도로 한 일이었는데, 왜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셨어요?”
그는 넋두리를 늘어놓으며 울고 웃었다.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흐르는 주름진 얼굴에 입이 찢어질 듯 귀에 걸려 있다. 더는 지켜보기 어려운 몰골이다. 셰어는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합니다.”
쇳소리가 섞인 음성이 새어 나왔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차 때문에 뒤집어진 속이 롤러코스터라도 탄 것처럼 간질거렸다. 차가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셰어는 다시 한번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요.”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고요.”
엔진이 사납게 울었다. 그 소리에 섞여 데일이 주절거리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이런, 가식, 당신은, 지옥, 나와, 다시는…….
띄엄띄엄 토막 난 말이 셰어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데일은 흐느끼듯 낄낄거리며 기원했다.
“지옥에나 떨어져.”
유일하게 선명한 그 한마디가 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긴 터널을 지나온 뒤 처음 빛을 볼 때처럼 앞이 까마득해지는 바람에 셰어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속에 빛 무리가 희끗거리는 게 보인다. 추락하듯 질주하는 리무진이 크게 흔들리며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리무진이 유서 깊은 건물의 옆구리를 긁었다. 특징이라곤 오래된 건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만한 낡아 빠진 외양뿐인 건물은 아주 튼튼했다. 최소한 아무렇게나 부딪쳐도 멈추지 않던 차를 망가뜨릴 만큼은 견고했던 것이 분명하다.
차창이 깨지고 유리가 비산하며 간신히 붙어 있던 차 문이 날아갔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기라도 한 듯 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고 급커브를 도는 바람에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흔들리던 차가 크게 기울었다. 바퀴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셰어의 몸이 차 안 이곳저곳에 사정없이 부딪쳤다. 어디를 잘못 부딪친 건지 앞이 아찔해진다.
공포를 자극하는 소음이 점점 더 커진다. 어지러운 시야에 끔찍하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벽이 보였다.
끝이다. 셰어는 눈앞이 희게 물드는 것을 느꼈다.
깨끗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착각했다. 동전을 뒤집듯 삶은 한순간에 바뀔 수도 있는 법이다. 그러나 과거는 그 후에도 예상치도 못한 때에 불쑥 튀어나와 발목을 잡는다.
셰어는 희게 지워진 머릿속에 남은 하나의 이름을 불렀다. 요한.
쾅!
굉음과 함께 엔진이 폭발했다.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문제가 나중에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샬롯의 목소리가 셰어를 조롱하듯 반복된다. 늘어난 테이프처럼 그녀의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먼 곳에서 사이렌이 울린다. 그것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울리는지를 가늠하기도 전에 셰어의 의식이 끊어졌다.
* * *
요한은 소스라치게 놀라 허우적거리다 잠에서 깨어났다. 끔찍한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뜨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시트에 감겨 있던 팔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다.
기분 나쁜 데자뷔다. 괜히 찜찜한 기분이 들어 더는 그 자리에 계속 누워 있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용수철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닥에 놓여 있던 아이스크림 통이 그에게 걸려 넘어지며 녹은 아이스크림이 바닥에 흘러내린다. 요한은 당황하며 아이스크림 통을 급히 집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바닥에 하얀 얼룩이 남은 뒤였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요한은 닦을 것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등 한참이나 갖은 수선을 떨었다. 간신히 정신이 바로 들었다.
어쩌다 잠이 들었더라. 요한은 흐릿한 기억을 더듬었다.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좋다는 셰어의 허락이 떨어진 후, 요한은 그의 침대 위를 뒹굴며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거의 다 비웠다. 호텔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침대를 망치는 기분은 썩 괜찮았다. 때때로 결벽증이 아닌가 싶을 만큼 깔끔을 떠는 셰어가 본다면 질색을 할 것이다.
셰어에게서 메시지가 오는 건 알았지만 일부러 답장은 하지 않았다. 가벼운 심술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셰어였으니, 한 번쯤은 그도 기다리는 기분을 느껴 봤으면 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사방이 어두워진 지금쯤이면 그에게도 충분한 반성의 시간이 주어졌으리라.
“망할. 전화가 어디 간 거야.”
요한은 제멋대로 뒤엉켜 있는 시트와 베개를 이리저리 들추며 폰을 찾았다. 잠들기 전까지는 분명 옆에 끼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폰은 침대 헤드와 매트리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요한은 툴툴거리며 알림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34통, 메시지 112통.
“이게 다 뭐야…….”
질린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요한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우선 가장 많은 부재중 전화 기록을 남긴 벳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벳시는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이사님!
전화를 받자마자 귀청이 터질 듯 큰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요한은 폰을 귀에서 멀찍이 떼어 놓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뭐야? 우리 망했어? 왜 소리를 질러?”
- 지금 어디세요? 괜찮으세요?
“어? 나 지금…….”
셰어의 집에 있다. 자연스럽게 그 말이 튀어 나가려 했으나 요한은 가까스로 입을 다물 수 있었다. 하마터면 둘이 아주 각별한 사이라고 광고할 뻔했다.
“나 괜찮아. 왜? 무슨 일인데?”
- 하아…… 이사님, 진짜 아무 일도 없으신 거죠?
“그렇다니까. 이제 내 말에 대답 좀 해 줄래?”
- 그게, 찰스 베일리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해서요.
순간 요한은 찰스 베일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몇 초가 지난 후에야 그는 그게 셰어의 이름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찰스 베일리, 교통사고. 두 개의 단어가 제 의미를 잃고 겉돌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라고?”
요한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물음이 새어 나갔다. 숨결 같은 그 목소리를 용케도 알아들은 벳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 네, 동승자는 사망하고 찰스 베일리는 크게 다쳤다잖아요. 그 동승자가 혹시 이사님일까 봐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게다가 하필이면 이사님은 전화도 안 받지…….
벳시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처럼 아득했다. 손발이 차게 식었다. 요한은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신발을 찾아 신었다.
“어느 병원? 그 사람, 얼마나 많이 다쳤대?”
- 네? 그것까지는 잘…….
“그걸 모르면 어떡해!”
- 네? 이사님?
벳시에게 뭐라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당장 그에게 가야 한다. 요한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남지 않았다. 요한은 전화를 끊고 급히 겉옷을 챙겨 침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요한은 숫자가 바뀌는 것을 초조하게 노려보다가, 문득 어디로 가야 셰어를 찾을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럴 때 찾을 만한 것은 역시 인터넷뿐이었다.
찰스 베일리 사고, 찰스 베일리, 찰스. 셋 중 어떤 것도 쓸 수가 없었다. 제 것이 아닌 것처럼 굼뜬 손 때문에 화면에는 자꾸 엉뚱한 글자만 떠올랐다. 요한은 몇 번인가 그의 이름을 쓰려다 포기했다. 손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왜 나는 검색조차 제대로 못하는 걸까.
요한은 엘리베이터 벽에 머리를 세게 들이박았다. 엘리베이터가 위협적으로 덜컹거리며 1층에 멈췄다. 둔한 통증 덕분에 자조적인 생각이 잠시 멀어졌다.
이럴 때가 아니야. 요한은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벳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벳시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좀 전의 일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 이사님, 대체 왜 이러세요?
“벳시, 나 좀 도와줘.”
- 네?
“셰어가, 찰스 베일리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찾아 줘.”
요한은 축축한 얼굴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냈다. 찝찔한 액체가 입술에 묻었다. 아무리 닦아도 얼굴은 계속 축축하기만 했다.
뭐가 이렇게 흐른담. 요한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더듬었다. 떨리는 손끝이 물기가 흐르는 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젖은 속눈썹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땀인가 했더니 눈물이었다.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이 로비에 서서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고 있는 커다란 남자를 수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빨리, 좀 찾아 줘. 부탁할게.”
당장 셰어를 만나, 그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빨리…….”
- 아, 알았어요. 지금 바로 찾아볼게요. 제발 아무 데서나 울지 좀 마세요.
벳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재빨리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아무 데서나 울지 말라고 했지만 우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울음을 그칠 수 있을 리가 없다. 요한은 전화가 끊어진 후에도 폰을 손에 쥔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얼마나 심하게 다쳤을까? 교통사고라도 요즘에는 치료만 받으면 나을 수 있잖아. 하지만 셰어와 같이 탄 사람이 죽을 만큼 큰 사고였다면 셰어는…….
나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본 셰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녀올 테니 착하게 기다리라고 말하던 그 웃는 얼굴이 왜 그렇게 예뻤던 건지.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17분이든 뭐든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를 붙잡을 걸 그랬다.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요한은 위태로운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주소를 봐도 어디에 붙어 있는 건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는 병원이 부디 가깝기를 바라며, 요한은 도로변에 서 있던 택시에 탔다.
어떻게 병원까지 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택시 기사에게 지갑에 든 지폐를 모두 꺼내 주었던 것 같은데, 기사가 뭐라고 따지던 것이 잔돈을 거슬러 주겠다고 하는 말인지 혹은 돈이 부족하다고 하는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지갑에 든 지폐를 죄다 던져 주고 차에서 내린 기억만이 남아 있다.
요한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병원 한가운데에서 멈추어 섰다. 병원까지는 어떻게든 찾아왔으나, 여기서 셰어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셰어…….”
거의 다 왔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그를 보지도 못한 채 잃을까 봐 두려워 속이 타들어 간다.
주위에는 요한의 불안을 부추길 만한 장면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피 흘리는 부상자가 들락거리는 응급실과 침울한 사람들의 얼굴, 병원 특유의 냄새, 하얀 가운. 요한은 그 틈바구니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을 끈 것은 눈에 익은 슈트를 입은 남자였다. 검은 슈트와 하얀 와이셔츠, 한쪽 귀에는 이어폰을 착용한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한은 홀린 듯 남자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남자는 요한을 한 번 힐끗 쳐다보긴 했으나, 요한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남자의 워키토키가 삑 소리를 냈다. 그는 혀를 차며 소매 안쪽에 달린 마이크에 대고 작게 말했다.
“네, 지금 올라갑니다.”
틀림없이 경호원이다. 이 병원에 경호원을 쓸 만한 사람이 몇이나 입원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이 남자는 셰어의 병실이 어딘지 알지도 모른다. 요한은 코를 훌쩍이며 젖은 눈가를 문질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요한은 남자보다 한발 늦게 엘리베이터에 탔다.
8층까지 있는 이 병원에서 셰어는 어디쯤에 있을까?
그러나 남자는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는 요한이 버튼을 누르기 전에는 먼저 버튼을 누를 생각이 없다는 듯이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요한은 어쩔 수 없이 가장 높은 층인 8층을 눌렀다. 남자는 끝까지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그 또한 8층으로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몰래 남자를 곁눈질하고 있는데, 그가 불쑥 말을 걸었다.
“저기.”
“네?”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뒤따라가는 걸 들켰나?
당황한 나머지 요한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졌다. 남자는 요한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쓰시겠습니까?”
“아…….”
오는 내내 운 얼굴이 남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그는 위로를 표하듯 눈짓하며 손수건을 요한에게 쥐여 주었다. 요한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상무님께서는 아직 의식이 없으셔서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요한은 손수건을 든 채 멍청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제야 요한이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덧붙여 말했다.
“아, 오전에 컨벤션 센터에서…… 기억 안 나시죠? 제가 차를 가져다드렸는데.”
당연하지만 요한은 남자가 차를 줬던 것을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때는 주변 사람을 기억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얘기를 들었다. 요한은 다급히 물었다.
“의식이 없다고요? 많이 다친 겁니까?”
“죄송하지만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규정이라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는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그의 사과가 요한의 귀에 곱게 들릴 리가 없었다. 요한은 분에 차서 씩씩거렸다.
“규정이고 뭐고, 난 지금 알아야겠다고! 어디를, 얼마나 다친 건지 당장 아는 대로 말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슈트를 입은 경호원들이 그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요한을 희귀한 생물 보듯 바라보았다.
망할, 다 들었겠지.
요한은 낯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변 사람들 보기 민망할 만큼 이렇게 막무가내로 군 적은 없었는데, 셰어의 문제가 엮이자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셰어에 대해 알 수만 있다면 앞을 가로막는 이들의 목을 짤짤 쥐어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요한은 짐짓 태연한 척 그들을 밀치고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남자가 일행과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클라이언트 애인.”
“아, 그분.”
이번에는 귓등까지 뜨거워졌다. 일이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요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뒤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어느 병실이에요?”
요한이 불퉁하게 묻자, 서로 눈치를 보던 경호원 중 가장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원래 이렇게 들어오시면 안 되는 거 아시죠.”
골치 아픈 아이를 훈계할 때처럼 남자는 거푸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이대로 병실 문 앞에서 쫓겨나기라도 할까 봐 벌써 서러워진 요한의 눈매가 축 처진다. 그 얼굴이 퍽 처연했기에, 남자는 자신 또한 이런 말을 하기 싫다는 티를 내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원래는 안 되는데, 상무님께서 따로 하신 말씀도 있으니 예외로 하겠습니다.”
남자는 벨트에 걸어 두었던 길쭉한 금속 탐지기를 들고 허락을 구하듯 요한을 바라보았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요한의 낯빛이 한결 밝아졌다.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는 기계가 형식적으로 몸을 훑었다. 그다지 복잡한 수색을 거치지는 않았다. 경호원들의 태도는 정중했고, 옷자락을 툭툭 쳐서 확인하는 손길도 무척 조심스러웠다.
문득 때에 맞지 않는 궁금증이 치밀었다. 요한은 금속 탐지기를 다시 갈무리하는 경호원에게 물었다.
“셰어가, 상무님이 따로 뭐라고 했는데요?”
그런 것을 물어볼 줄은 몰랐는지, 남자가 의미심장한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아까 오전에, 이후로 경호 포메이션을 짤 때는 요한 님 자리를 항상 고려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가드 라인 바깥이 아닌 안쪽. 어느새 요한의 위치는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셰어에게는 유일할, 항상 지켜야 할 사람.
남자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요한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셰어의 병실은 복도 끝 가장 안쪽에 있었다. 그의 병실이 가까워질수록 복도를 지키는 경호원의 수가 늘어났다. 따라서 요한을 흘낏거리는 시선 역시 늘어났다. 몇몇은 요한을 알아보는지 금방 시선을 돌렸으나, 어떤 이들은 요한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다 곧 옆에서 팔을 잡아끄는 이들에게 떠밀려 시선을 피하곤 했다.
그러나 요한은 주변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삼엄한 경비가 오히려 셰어의 상태가 그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병실 앞에 선 요한의 눈가에는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많이 다쳤으면 어떡하지. 셰어가 미라처럼 붕대를 둘둘 만 채 누워 있기라도 할 것 같아 두려워 문을 열 수가 없었다.
한참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요한은 떨리는 손으로 병실 문을 열 수 있었다. 간접 조명만 켜진 병실은 아늑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어두웠다. 넓고 호화롭게 꾸며진 병실에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침대가 외로워 보인다. 요한은 비틀거리며 침대로 다가갔다.
침대에 누운 것은 처음 보는 남자였다. 요한은 그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본 후에야 그 남자가 셰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남자는 익히 보던 모습이 연상되지 않을 만큼 병약해 보였다. 머리에 커다란 거즈가 붙어 있고,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에는 자잘한 생채기가 남아 있다. 하얀 시트에 덮인 몸이 금방이라도 풀썩 꺼질 것만 같아 요한은 숨을 크게 쉴 수도 없었다.
그의 심장이 아직 무사히 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듯 기계에서는 삑, 삑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으나, 그의 호흡은 끊어질 듯 희미했다. 요한은 침대 헤드를 꽉 붙잡았다. 그것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주저앉을 것 같았다.
“하아…….”
떨리는 숨과 함께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약속한 저녁은 이런 게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다정해진 그의 눈을 바라보고,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몇 분이나 남았는지 계산하지 않고 입을 맞추고 싶었다. 시시한 밀고 당기기를 하고 농담을 나눌 시간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생채기가 난 얼굴이며 시체 같은 낯빛이 속상해서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요한은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셰어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의사를 불러왔는지 경호원과 함께 의사가 병실로 들어섰다. 요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꽉 움켜쥐고 있던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의사는 붉게 달아오른 요한의 눈을 힐끗 쳐다보곤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원래는 면회 시간이 지나서 이렇게 무작정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애인분 외에는 보호자분이 따로 안 계시니 이번만 예외로 하겠습니다.”
“보호자가 없다고요?”
요한이 알기로는 베일리라는 성을 지닌 사람은 이 도시에만 해도 수십 명은 된다. 그중에 셰어의 보호자 노릇을 할 사람이 한 명도 없을 리가 없었다. 의사는 물정 모르는 사람 보듯 하며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다른 분들은 바쁘십니다. 간병인은 내일 오전부터 올 예정이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간병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이렇게 다쳤는데 어떻게 와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요한은 불규칙하게 요동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물었다.
“셰어는, 괜찮은 건가요?”
“글쎄요. 오른쪽 발에 심재성 2도 화상을 입었고, 일부 골타박상이 보이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양호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쇼퍼드리븐 차량이 뒷좌석이 튼튼하죠.”
“이게 양호한 편이라고요?”
“차가 폭발했는데 이만하길 다행 아닙니까?”
요한은 움찔했다. 차가 폭발했다니, 셰어가 겪은 사고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의사는 듣는 사람의 반응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아, 이마에 난 상처는 일단 봉합해 뒀습니다. 머리는 CT로 봤을 때 이상은 없었습니다만, 혹시 모르니 환자가 깨어나면 바로 너스 콜을 눌러 주세요.”
의사는 오늘 아침에 먹은 메뉴라도 얘기하는 것처럼 심심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요한을 겁주기에 충분했다. 요한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을 다 마친 의사는 게으르게 차트에 뭔가를 갈겨쓰고는 병실을 떠났다.
요한은 고요하게 잠든 것처럼 보이는 셰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크게 다친 게 아니라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셰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두려웠다. 요한은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창백한 셰어의 손등을 살며시 더듬었다. 푸릇한 혈관이 두드러진 손등은 차가웠다.
무서웠겠지. 화상이라니, 얼마나 아팠을까. 의사는 그다지 심각한 상처가 아니라고 했지만 요한은 유독 속이 상했다.
요한은 침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하얀 시트 아래 붕대를 감고 있을 셰어의 발이 상상된다. 그러자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처럼 아팠다. 요한은 축축한 한숨을 뱉었다. 더는 그의 발등에 손톱만 한 멍이 드는 것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아.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요한은 듣지도 못할 셰어에게 속삭였다.
셰어는 어째서 혼자일까? 사람들 속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마냥 빛나 보였기에 그의 옆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앞으로 알아 갈 시간이 많을 것이라 착각했다.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도 몰랐다.
“난, 정말 등신 새끼야.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너무 한심한 놈 같아.”
다친 셰어가 어디 있는지 찾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파서 누워 있는 그를 보는 지금까지 요한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은 셰어의 손가락을 살그머니 쥐어 보았다. 희미한 맥박이 차가운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듯했다.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무슨 일이든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간단히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 이런 상황이 닥쳐도 울지 않고 셰어를 지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요한은 그 손끝에 입을 맞추었다. 미지근한 숨이 셰어의 차가운 손에 희미한 온기를 남겼다. 할 수 있는 일은 이토록 미약한 온기를 전하는 것뿐이지만 요한은 그와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했다.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