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 3
요한이 기억하기로는, 고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설레고 행복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적극적인 구애에 결국 마음을 열어 주며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로 달콤하게 속삭였다. 나도 네가 좋아. 그리고 해피 엔딩?
그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지.
요한은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스토리보드에 붙여 놓은 콘티를 다시 처음부터 훑어보았다. 요한의 시선은 초반부, 친구들이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여자 주인공을 설득하기 위해 노래하는 장면에서 멎었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들어.”
요한이 투덜거렸다. 과연 사랑이 꼭 필요할까?
V Pictures의 신작은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기존의 러브 스토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동화를 그린다. 최고의 공학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 주인공이 친구들과 함께 꿈을 이루어 왕국을 다스리는 이야기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기존의 작품과 완전히 다른 것을 만들겠다는 포부는 좋았지만, 투자자들의 의견은 같지 않았다. 사랑이 없으면 동화가 아니라던가.
결국 중재안은 러브 라인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에런 포츠는 요한과 달리 중재안을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는 뼛속까지 지독한 로맨티시스트였다. 그런 면에서는 빠지지 않는 요한마저도 에런의 극단적인 사랑 지상주의에는 손을 들었다.
“요한, 네가 뭘 몰라서 그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좋아한다고.”
에런이 스토리보드를 탁탁 두들기며 눈썹을 찡긋거렸다.
사랑, 그놈의 사랑 타령. 요한은 스토리보드에 붙여 놓은 문제의 장면을 떼어 냈다.
“나도 사랑 좋아해. 그냥 여기에 꼭 사랑 얘기를 넣어야 하냐는 거지. 그럼 다른 영화랑 똑같잖아. 사랑, 뭐 없어도 괜찮지 않아?”
“허어, 이러니까 네가 애라는 거야.”
에런은 요한이 떼어 놓은 스케치를 집어 들더니 마귀라도 쫓듯 요한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거친 선으로 그려진 두 팔을 벌린 친구의 열렬한 자세가 에런의 모습과 겹쳐진다. 사랑은 위대해! 온몸으로 외치는 듯한 그와 똑 닮았다.
“사랑은 꽃처럼 아름다운 거야. 인생을 풍요롭고 향기롭게 한다고.”
“누가 아니래? 근데 앤디는 그런 애가 아니라니까. 앤디는 꿈을 이루고 싶어 해. 왕자님과 결혼식을 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새로 쓰고 싶어 한다고.”
에런은 요한을 질린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앤디, 앤디, 요한은 꼭 제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주인공의 이름을 불러 댔다. 그는 크랭크 인도 하기 전부터 아주 진하게 몰입해 있었다. 몇 차례나 미팅을 거듭하는 동안 에런은 요한이 자신에게는 일말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얘기만 하면 눈이 반쯤 돌아 있는 게, 자신이 전 애인이라는 것도 잊은 듯했다.
에런은 요한을 타이르듯 말했다.
“자아실현 좋다니까.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기능하지 않아. 매슬로 모르겠어? 사랑, 존중, 자아실현! 사랑이 꿈보다 먼저라고.”
“뭐라는 거야……. 너 그거 또 구닥다리 이론 얘기지.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군내 나는 얘기를 하냐?”
“만고불변의 진리라는 말이 왜 있게. 사랑은 진리야, 요한. 그리고 예술은 진리를 밝히는 등불이지.”
에런은 고운 얼굴을 고뇌로 물들이며 이마를 짚었다. 그 얼굴은 조형적으로는 근사했으나 요한에게는 부정적인 인상만을 남겼다.
저런 애를 대체 왜 그렇게 좋아했을까. 요한은 전 애인과 부대끼다 보면 으레 느끼게 되는 깊은 자아 성찰의 시간을 맞았다. 그때는 저 앞뒤 없는 말도 다 예술가의 뚝심 있는 철학처럼 근사하게만 들렸다. 눈에 뭐가 단단히 덮였던 거다.
에런은 자신만의 예술 예찬론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요한은 그의 말을 반쯤 듣다 말고 말허리를 잘랐다.
“에런, 나 지금 예술 얘기 하는 거 아냐. 우리가 만들 상업 영화 얘기 하는 거지.”
“그러니까 영화는…… 요한, 너 변했다. 원래 이렇게 메마른 사람 아니었잖아.”
에런은 어쩐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요한은 그저 흠, 하고 목을 울릴 뿐이었다. 일을 시작한 후로 변했다는 말을 듣는 일이 잦았다. 그의 변화를 어떤 이들은 탕아의 개심으로, 또 어떤 이들은 낭만의 상실로 받아들였다. 에런의 생각은 후자에 가까웠는지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낯빛이 어두워진다.
사실 요한이 자평하기로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외피가 깎이고 부스러져 본질이 드러날지언정 완전히 바뀌는 일은 없다.
‘처음부터 우리가 독점적인 관계라는 말은 한 적 없잖아.’
그러므로 지금 셰어가 어떤 모습이든 그의 본질은 변함없을 것이다. 열에 들떠 좋다고 말하더라도, 잠든 이의 머리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더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달아나더라도, 요한은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Happily Ever After. 요한은 스토리보드의 마지막에 붙어 있는 한 장의 스케치를 뗐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왕관을 쓴 남녀가 사람들 앞에서 입을 맞춘다. 전형적인 해피 엔딩의 한 장면이 요한의 머릿속에 그려진다. 상상 속에서 그 장면에 셰어와 요한이 덧입혀진다. 하얀 턱시도를 입은 두 남자, 반지를 나눠 끼고 입을 맞추는 신랑과 신랑.
그러나 셰어는 그다음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우리가 독점적인 관계라는 말은 한 적 없잖아.’
요한은 손에 쥔 스케치를 와그작 구겼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안 되겠어. 이게 말이 돼?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런 무책임한 결말이 어디 있어?”
요한은 예고도 없이 폭발했다. 한참 스토리보드를 노려보다 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그 행태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런이 덩달아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너 돌았니? 그럼 해피 엔딩이어야지. 크리스마스이브에 개봉하는 영화인데 주인공들 다 죽고 끝낼까!”
“애들도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알아야 해. 사랑이 장난이야?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요한, 그새 애인이라도 만들었다 차였어? 안 그러던 사람이 왜 이렇게 배배 꼬였어!”
사실은 찼다.
찼는데 왜 차인 것처럼 기분이 더럽지. 요한은 갑자기 기운이 쭉 빠져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풀썩 늘어져 버렸다. 비실비실 의자에 기대는 몸짓에는 맥이 하나도 없었다. 얼결에 아픈 곳을 찌른 에런이 당황해 물었다.
“어우, 야…… 진짜야?”
“아니야……. 나 안 차였어.”
내가 찼어. 요한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에런은 그 말을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응, 그래. 네가 찼겠지……. 힘들겠다. 내가 항상 네 옆에 있는 거 알지?”
“아니, 나 진짜 안 차였다니까.”
“알아. 믿어. 요한,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건 많지만 친구로서, 동료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줄게.”
진짜 아닌데. 요한은 진위를 가리기를 포기했다. 그러고 보니 에런은 남의 말을 그다지 잘 들어 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본래 예술가는 외골수 기질이 있다던가. 그의 말에 따르면 천성이 그렇다고 했다.
“있지. 우리 이거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아무래도 지금은 네 상태가 좀…… 그런 것 같아.”
에런이 요한의 어깨를 걱정스레 토닥이며 말했다. 요한은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고작 1시간짜리 미팅이었는데 밤 10시까지 야근한 것만 같은 피로감이 느껴졌다. 에런은 그 뒤로도 몇 마디 위로의 말을 남기고는 가져온 스토리보드를 재빨리 챙겨서 나갔다.
“하…….”
요한은 두 손에 얼굴을 묻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날 이후 셰어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도 답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협박처럼 ‘바이올렛’이라는 메시지까지 보냈는데도 셰어는 연락이 없었다. 그는 바이올렛이라는 게 공개되는 것보다 요한을 보기가 더 싫은 듯했다.
자존심이 지독히도 강한 남자였다. 그렇게 대차게 차였으니 연락하고 싶지 않을 만도 했다. 사실 여태까지 요한의 허술한 협박에 끌려다닌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셰어답지 않게 이렇게 더러운 꼴을 보면서도 요한에게 끌려다닌 것은, 어쩌면 그에게도 진심이라는 게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게 말이 되냐.”
요한은 허황한 생각을 없애려 제 머리를 세게 두들겼다. 그러나 셰어에 대한 생각은 지워지지 않고, 머리만 아팠다. 기분이 한층 더 우중충해졌다.
정중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비실비실 죽어 가던 요한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그래도 명색이 이사인데, 함부로 늘어져 있는 모습을 아무에게나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요한은 축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차분한 목소리를 쥐어짰다.
“들어오세요.”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도 문을 두드린 것은 벳시와 로마노프였다. 보기 드문 두 사람의 동행에 요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두 사람은 뻣뻣하게 긴장한 채 주위를 신중하게 확인한 후 문을 닫았다.
보안을 중시해야 하는 일 중에 좋은 일은 드물다. 요한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 일부러 실없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왜 그런 얼굴이야? 나 곧 죽는대?”
“이사님, 투자자들이 대거로 이탈 중입니다.”
벳시가 희게 얼어붙은 얼굴로 담담하게 보고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로마노프가 급하게 출력한 보고서를 요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영화 투자 금액의 60%를 차지하는 투자 펀드에 대한 개요였다.
요한은 표정 없이 건조하게 작성된 문서들을 읽어 내려갔다. 복잡한 숫자와 글자들 사이에서 붉은 볼드체로 적힌 글자가 눈에 띄었다.
위험.
“지난 월요일, 전체 펀드의 40%를 차지하는 BNB 쪽 자금이 빠져나간 뒤로 다른 투자자들의 이탈이 늘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에서 영화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퍼트린 것 같아요.”
요한은 당장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도 평소처럼 영화 얘기를 나누었다. 캐스팅 진행에 대한 사항을 보고받고, 스토리를 조정하고, 구체적인 일정을 조율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시그널도 없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수 있단 말인가.
불현듯 벳시가 쏟아 놓은 정보 속에서 익숙한 단어가 요한의 입 속에 맴돈다.
“BNB?”
설마, 아닐 거야. 셰어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성격이었지만 자신을 찼다는 이유로 남의 생업을 망치려 들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요한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모종의 다른 이유가 있을 터였다. 셰어가 무슨 수를 쓴 게 아니라, BNB 내부에 사정이 있어서 투자를 접었는데 소문이 와전되었을 수도 있다. 혹은 하필 투자자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자금을 뺀 시점이 맞물린 것일지도 모른다. 항간에는 엔터테인먼트 투자는 위험하고, 경제 위기에서 제일 먼저 빼는 게 엔터주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하지만 그 생각을 비웃듯 벳시가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BNB 산업 상무랑 아는 사이시죠. 그쪽이랑 한번 얘기해 보면 어떨까요? 창업 투자 펀드 자금 원천이 BNB 산업입니다.”
BNB 산업에서 손을 쓴 것이 틀림없다는 확인 사살이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남을 속이고 함부로 농락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일은 없다. 그 셰어가, 설마 진심이었을 리가 없다.
셰어가 며칠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았던 것이 왜인지 알 것 같았다.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것도 시들해졌으니 협박의 대가를 되돌려 줄 셈인 것이다. 요한은 손에 든 보고서를 꽉 움켜쥐었다. 종이가 파삭 구겨지며 ‘위험’이 일그러진다.
“내가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럼 저희는…….”
“이따가 얘기할까? 나 전화 좀 하게 잠깐 자리 좀 비켜 줘.”
불안으로 일렁거리는 두 쌍의 눈동자가 요한을 바라본다. 요한은 억지로 빙긋 웃어 보였다. 불을 삼킨 것처럼 속이 뜨거웠다.
개자식, 그래도 이런 치졸한 짓까지는 안 할 거라 생각했는데. 셰어에게만 몇 번이나 뒤통수를 맞았는지 정신이 다 벙벙했다.
요한은 두 사람이 쭈뼛거리며 사무실을 나설 때까지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부들부들 떨리는 안면 근육이 파업을 선언했다. 요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통화 기록에 가장 많이 찍혀 있는 이름을 눌렀다.
패턴은 항상 같았다. 몇 번 신호가 가더니 곧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온다. 요한은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몇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셰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오! 이 개새끼!”
연락을 씹는다고 셰어의 행적을 추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셰어는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도 어디에서 뭘 하는지, 심지어 무슨 치약을 쓰는지까지 나오는 유명 인사였다. 요한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인터넷 검색창에 찰스 베일리를 입력했다.
검색 버튼을 누르자마자 가장 위에 3시간 전 작성된 인터넷 기사가 뜬다. 벌써 두 개의 꼬리 기사가 붙은 기사 링크를 클릭하자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셰어의 기사 사진이 보였다.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와 완벽한 슈트. 실연의 흔적은 없었다.
[종합] BNB 산업 상무 찰스 베일리 동부로 복귀하나…… 14일부터 동부 순방 일정
5개 도시 12개 사업체 방문 예정
전형적인 차기 후계자 굳히기,
경영권 승계 압력에 발동 거나?
“와, 진짜 어이없네.”
요한은 헛웃음을 흘렸다. 남의 사업은 이렇게 조져 놓고 본인은 아주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가려 하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다. 과연 셰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투자를 끊는 것으로도 그는 손쉽게 V Pictures를 흔들어 놓았다.
일종의 경고일 것이다. 순조롭게 BNB 제국의 왕자님이 될 차례이니 이제 V Pictures는 바이올렛에 얽힌 추문과 함께 얌전히 엎드려 있으라는 뜻일 터였다.
“내가 절대 혼자 좆 되지는 않아.”
요한은 길고 긴 아부성 기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찾았다.
바로 오늘, 셰어가 어느 도시에 있을지를 알아냈다. 정확하게 어디에서 누구와 뭘 하는지는 몰라도 일단 그 도시로 간다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찾지 못하더라도 받지 않는 전화를 계속 걸며 속을 태우는 것보다는 나았다.
요한은 벳시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비행기 좌석 하나만 예약해 줘 제일 빠른 거로]
* * *
낯선 도시의 공기는 서늘하고 축축하다. 요한은 비가 쏟아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차창에는 빗물에 번진 불빛들이 일렁거리고, 우산을 든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쭉 뻗은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젓가락처럼 가늘고 높다란 건물들이 솟아 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각, 종일 운전을 했을 중년의 택시 기사에게서 풍기는 묘한 체취가 투명한 쉴드 너머까지 느껴지고, 라디오에서는 느릿한 재즈가 흘러나온다. 눅눅한 공기와 뒤섞인 조금은 불쾌하고, 조금은 나른한 순간이었다.
셰어는 이런 도시에서 자랐구나. 어쩐지 그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낯선 이와 신경질적으로 거리를 벌리는 차가움이나 반짝거리고, 무심하면서도 어딘지 묘하게 감상적인 면이. 요한은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기사에 의하면, 셰어는 그가 나고 자란 도시를 시작으로 동부 지역의 BNB 지사들을 순방할 계획이라고 했다. 내일 오전 BNB 컨벤션 센터에서 간단한 회견을 한 후 그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무엇이든 셰어에 대한 것이라면 쉬운 일이 없다. 요한은 뻐근한 몸을 시트에 기댔다. 급하게 셰어를 쫓느라 직항 항공편을 구하지 못해 장장 7시간을 경유했다. 그나마도 셰어가 다음 순방 코스로 예정된 도시로 이동하기 전에 도착한 것이 다행이었다. 셰어가 다음 도시로 이동한다면 요한은 직항 편도 없는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두 번이나 더 경유해야 했다.
요한은 셰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익숙한 안내 음성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알아, 안다니까.”
전화를 받으실 수 없겠지, 잘 안다고. 요한은 투덜거리며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화면을 껐다.
사실 무작정 셰어를 쫓아오기는 했지만 셰어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셰어가 연예인처럼 SNS에 실시간으로 목격담이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좀 더 찾기 편했을 것이다. 요한은 셰어에 대한 것을 배터리가 거의 바닥날 때까지 검색하며 새삼 스토커가 된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셰어가 스토커라고 비난해도 부정할 수 없다.
요한은 찔리는 마음을 달래며 속으로 변명했다. 그러니까 왜 남의 밥줄을 끊어 놓고 연락도 없이 달아난단 말인가.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엿 먹이고 달아나는 쪽이 나쁘다.
끝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 그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자 요한은 울화가 치밀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잡히면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다.
요한은 컨벤션 센터에서 그럭저럭 가까운 곳에 위치한 5성급 호텔 앞에서 내렸다. 호텔은 오래된 건물을 주기적으로 리모델링한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였다. 유명 호텔 체인답게 잘 다듬어진 호텔은 눈에 익은 브랜드 간판이 늘어선 거리에서도 유독 반짝였다.
사실 컨벤션 센터에서 가까운 호텔 중 가장 좋은 호텔을 고르면서 요한은 내심 그런 기대를 했다. 어쩌면 또다시 우연처럼 셰어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출장지에서 셰어와 한 침대에 누워 잠든 것처럼 때로는 못된 장난 같은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너무 기대했기 때문일까.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올 때까지도 요한은 아는 얼굴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셰어는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랐으니 당연히 호텔이 아닌 그의 집으로 향했을 터였다.
“되는 일이 없네.”
호텔방은 근사하고, 짐을 풀어 준 버틀러도 친절하고, 방 안의 온도나 습도도 더할 나위 없이 쾌적했으나, 요한은 볼품없이 풀이 죽어 소파에 축 늘어지고 말았다.
아는 사람도 없는 도시에서 홀로 넓은 호텔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지고 나니 막막하고도 외로웠다. 하필이면 날씨도 우중충한 것이, 비가 마구 쏟아졌다. 게다가 바쁘게 걷는 사람들의 그 무심한 얼굴들이란. 잠깐이라도 걸음을 지체했다가는 즉시 신경질적인 ‘실례합니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이런 곳에서 쭉 살았다니, 그래서 셰어가 성격이 그렇게 까칠한가 보다.
요한은 화면 속에서 근사하게 웃고 있는 셰어를 노려보았다. 몇 시간 전에 올라온 기사에는 전용기 앞에서 손을 흔들며 미소 짓는 셰어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속 타는 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사 사진 속의 그는 BNB 그룹의 후계자답게 강하고 근사해 보였다.
“넌 진짜 개새끼야.”
요한은 셰어의 사진에 악당처럼 삐죽삐죽한 콧수염을 그렸다. 그런데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인지 너무 오랜만에 낙서를 해 봐서인지, 무시무시한 수염을 그려도 셰어는 근사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까만 안대와 칼자국까지 그려 준 후에야 영락없는 악당 같아 보였다. 그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니 갑갑하던 속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요한은 기운을 내서 일찍 씻고 잠들기로 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컨벤션 센터 앞에서 죽치고 앉아 셰어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패기 있게 여기까지 날아오기는 했으나 요한은 본래 누군가를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법을 잘 몰랐다. 요한에게 주어지는 것이 충분했기에 뭔가를 얻기 위해 크게 노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런 태평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요한의 생각은 단순했다.
1. 일단 셰어를 만난다.
2. 그에게 BNB 펀드의 투자 취소에 대해 물어본다.
3. 만약 셰어가 손을 쓴 거라면 정신을 차릴 만큼만 혼내 준다.
그런데 셰어가 한 짓이 아니라면 어떡하지…….
요한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셰어의 결백을 믿고 싶어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치사하게 구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했다.
바이올렛의 정체를 공개하는 것은 마지막 보루였다. 줄곧 그 일을 담보로 셰어를 협박하기는 했으나 요한은 진심으로 그 일을 공개할 생각은 없었다.
대단한 정의가 있어서는 아니다. 단지 요한은 그렇게까지 악랄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독한 짓을 하려면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로 수반될 적의와 결과는 상상만 해도 질식할 것 같다. 요한은 모든 것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지만 셰어가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다.
단죄.
이 일은 요한뿐만 아니라 레일라와 오랫동안 V Pictures에 몸담았던 직원들까지 걸린 문제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간단히 물러날 수는 없다.
결국 늦게까지 뒤척이다 간신히 잠든 요한은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셰어는 기사 사진처럼 근사하게 웃는 얼굴로 요한을 쌩하니 지나쳐 갔다. 요한은 바보처럼 한마디도 못 한 채 그의 뒷모습을 보기만 했다.
* * *
BNB 컨벤션 센터 앞은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깔고 기다리는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BNB 지부 순방은 BNB 그룹 차기 후계자의 전통적인 코스였다. 같은 세대에 비해 승진이 늦었다는 평이 있는 셰어가 그 기념비적인 코스에 첫발을 들인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셰어는 미혼의, 그것도 젊고 잘생긴 상속자였다. 과연 언론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그 때문에 몰리는 인파를 통제하기 위한 보안도 철저했다. 컨벤션 센터를 빙 둘러 가드 라인을 치고, 출입을 통제하는 보안 요원이 곳곳에 서 있다. 출입증이 없는 사람은 가드 라인 근처에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기에 요한은 일찍이 가드 라인을 넘는 것을 포기했다.
요한은 셰어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티 나지 않게 곁눈질하며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위세가 대단한 줄은 알았는데, 막상 그의 홈그라운드인 동부에 와서 보니 아주 왕족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보통 왕족이 아니라, 미디어가 사랑하고 극성팬이 따르는 그레이스 켈리 계열.
Long live the king. 예의 그 셰어 티셔츠의 등짝에 박힌 문구까지 완벽했다.
킹은 무슨, 이 나라에 무슨 킹이 있냐. 설령 있더라도 그게 셰어는 아닐 것이다. 요한은 속으로 빈정거리며 레드 카펫이 깔린 통로를 노려보았다. 이래서야 말을 걸기는커녕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았다.
“요한? 세상에, 진짜 요한이잖아. 네가 여기 어쩐 일이야?”
그때 누군가가 등짝을 세게 후려치는 바람에 방심하고 있던 요한은 휘청거리며 몸을 수그렸다. 머리칼이 쭈뼛 설 만큼 매운 매맛이 익숙했다. 요한은 따끔거리는 등을 비틀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어…… 클레어?”
전국방송 로고가 박힌 마이크를 든 클레어가 화통하게 웃으며 요한의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어, 어, 나는 잘 지냈지.”
그녀의 손은 예전보다 더 매워진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맞을 짓을 했던가? 요한은 새삼 클레어와 헤어질 때 무엇을 잘못했던가 하고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클레어와는 드물게 웃으며 헤어진 사이인지라,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한 가지뿐이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때 그녀의 손이 나날이 매워지는 바람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클레어는 기분이 좋으면 사람을 때리면서 웃는 버릇이 있었다.
클레어는 일행에게 안으로 먼저 들어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그녀의 목에는 기자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요한은 그 출입증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손바닥만 한 출입증이 마치 윌리웡카의 골든 티켓 같았다.
이건 운명이다. 셰어를 만나라고 어느 전지전능한 분이 떠밀어 주는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는 아주 온 거야? 아니면 놀러?”
“아니, 잠깐 놀러…… 음, 클레어. 오랜만에 만나서 갑자기 이런 부탁 하기 좀 그렇지만…… 나 좀 데리고 가 주면 안 될까?”
“뭐?”
요한은 마이크를 든 클레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으며 비장하게 말했다.
“내가 꼭 저 앞에 서 있어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 절대 방해는 안 할게. 서 있기만 하면 돼.”
“아…… 근데 우리도 방송국마다 배정된 티오가 있어서 그게 될지는 잘…….”
클레어가 큰 눈을 깜빡이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요한은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미안. 내가 좀 갑작스러웠지? 사실은 내가…….”
뭐라고 해야 그녀가 들여보내 줄까. 사실대로 얘기하면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니 절대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이다. 뭐든 핑곗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문득 요한의 머릿속에 방금 본, 셰어의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셰어 팬이거든. 여행 온 김에 딱 한 번만 실물을 보고 싶어서…….”
망할, 핑계를 대도 어떻게 이런 핑계를 대냐. 이게 퍽이나 먹히겠다. 요한은 낙담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클레어는 납득한 듯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지. 너도 전에 나 크리스 터너 만나게 해 줬잖아.”
그랬던가? 그러고 보니 요한 역시 클레어가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게 해 준 적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더빙에 참여한 배우가 마침 크리스 터너여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크리스 터너가 더빙하는 내내 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보던 클레어의 얼굴이 눈앞의 얼굴에 겹쳐진다.
예전 일을 떠올리는지 클레어의 표정이 잠시 아련해져 있었다. 그녀는 곧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원래는 안 되는데, 그래도 플러스 원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아.”
“진짜? 나 들어가도 돼?”
“그럼. 명색이 전국방송인데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자신만만하게 웃는 클레어는 정말 멋있었다. 요한은 그녀의 뒤를 따라 얌전히 가드 라인을 지났다. 요한에게는 까마득하게 높은 요새의 벽처럼 보였던 가드 라인이 클레어의 출입증 앞에서는 손쉽게 열렸다.
요한은 클레어를 감탄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클레어, 진짜 성공했구나.”
클레어는 뿌듯한 얼굴로 씩 웃으며 요한을 프레스 라인에서도 가장 앞자리에 데려가 주었다. 프레스 라인 앞줄은 특히나 분주했다. 카메라를 준비하고 질문 내용을 점검하는 이들 옆에는 방송에 나갈 인트로 영상을 촬영하는 이들이 있었고, 거기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도 카메라를 보며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는 이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클레어 역시 방송을 준비하기에 앞서 요한에게 짧게 경고했다.
“요한, 이번에 내가 은혜 갚은 거야. 절대, 절대로 튀는 행동 하지 말고 얌전히 보기만 하는 거다. 알았지?”
“약속할게. 절대 튀는 행동 하지 않기.”
요한은 안심하라는 듯이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클레어가 요한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달콤한 한숨을 흘렸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너 되게 괜찮아 보인다.”
“난 항상 괜찮은 남자였는데 너무 늦게 알아보네.”
“말이나 못하면!”
클레어는 요한의 어깨를 찰싹 때리고는 깔깔거리며 준비를 하러 가 버렸다.
요한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홀로 남았다. 그는 셰어가 지나갈 길을 훑어보며 머릿속에 재회의 순간을 그려 보았다. 가드 라인이 시작되는 차도에서 하차한 후 레드 카펫이 깔린 길을 따라 올라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컨벤션 센터 입구에 서서 기자들과 짧은 회견을 가진다.
그 높은 곳에서 아래에 있는 요한이 보이기나 할까.
지난밤의 악몽이 다시 떠올라 요한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막상 이 자리에 서자 자신이 없어졌다. 요한은 셰어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을 둘러보았다. 정당한 자격을 갖추고 이 자리에 선 저 사람들과 달리 요한은 누군가의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이곳에 설 수조차 없었을 터였다.
싸움도 비슷한 사람끼리나 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발악한다 한들 셰어에게 주먹이나 한번 스치게 할 수 있을까? 셰어에게 자신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다면, 그저 별생각 없이 밟아 버릴 수 있는 존재일 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리무진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도착한 것이다.
그 순간 잡념은 날아가고 요한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요한은 광택이 흐르는 리무진들이 레드 카펫 앞에 정차하는 것을 보았다. 차 문이 열리기도 전에 플래시가 연신 요란하게 터진다. 그 집요한 번쩍임에서 1초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념이 엿보였다.
리무진 세 대의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쏟아진다. 무선 이어폰을 착용한 경호 인력들은 가운데 정차된 리무진을 엄호하듯 둘러싼 채 차 문을 열었다. 희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홀로 짙은 회색 슈트를 입은 셰어가 차에서 내렸다.
눈이 시리도록 번쩍거리는 플래시와 수많은 인파를 마주하고도 그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셰어가 지나는 길마다 빛이 터지며 또렷한 이목구비를 희게 지웠다.
요한은 그가 높은 단상 위에 서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얼핏 냉혹해 보이는 눈매는 예의 바르게 웃을 때면 한결 유순해 보인다. 그러나 그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빛은 미처 가려지지 않아, 요한은 몇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셰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셰어는 요한을 보고 있었다. 요한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멀어지고 세상에 둘만 남은 듯한 감각을 느꼈다. 이상했다. 요한은 여기까지 오는 내내 그에 대한 분노만을 불태웠으나, 정작 셰어가 앞에 나타나자 오히려 마음이 초연해졌다.
무슨 생각이야, 셰어. 요한은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으나, 셰어의 포커페이스를 읽을 수는 없었다. 셰어가 입을 열었다. 찰칵거리던 카메라도, 취재를 위해 마이크를 든 리포터도 침묵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우선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셰어의 시선은 그 부분에서 유독 요한에게 길게 머물렀다. 요한은 괜히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함부로 문질렀다. 이런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지겹다. 더는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그 뒤로도 셰어는 준비한 것이 분명한 연설을 능숙하게 해냈으나 요한은 그가 한 말을 한 가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기자들이 일제히 손을 들었다. 셰어는 제법 오랫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질문을 던진 기자를 향하다가도 매번 구두점을 찍듯 요한에게 돌아왔다.
“이게 무슨 일이니. 이렇게 질의 길게 받아 주는 건 처음인데.”
클레어가 횡재라도 한 것처럼 히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설마, 아닐 거야. 요한은 자꾸 고개를 드는 기대를 꺾었다. 자꾸 마주치는 시선이 꼭 뭔가를 암시하는 듯했다.
어쩌면 셰어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는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고, 지금이라도 다시 얘기해 본다면……. 요한은 끝없이 이어지려는 생각을 끊어 냈다. ‘어쩌면’으로 시작되는 기대의 끝이 무엇인지 잘 알았다.
‘처음부터 우리가 독점적인 관계라는 말은 한 적 없잖아.’
요한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제일 앞줄에서 한번 뒤로 밀려나자 다시는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 자리를 탐욕스럽게 차지한 사람들의 등이 우쭐거리며 저들끼리 붙었다. 요한은 우물쭈물하다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이제 어쩌지. V Pictures는, 레일라는.
사람들의 술렁거림이 커지더니 요한의 앞줄에 선 사람들의 열이 완전히 무너졌다. 물러나세요! 사납게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회견을 진행하는 동안 간헐적으로 터지던 플래시가 벼르던 것처럼 무섭게 터졌다.
찰칵. 요한은 눈앞이 아찔하게 바래는 것에 놀라 뒤로 물러서려 했다. 단단한 손이 요한의 팔뚝을 붙잡았다. 요한은 플래시 때문에 검고 희게 깜빡이는 시야에 비친 익숙하고도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셰어는 프레스 라인을 넘어 요한을 붙잡은 채, 기사 사진처럼 근사하게 웃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죠.”
요한은 셰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정중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그의 눈이 살벌하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조금 미친 사람 같았다.
사진에는 이 광기가 드러나지 않나? 요한은 오늘만 해도 수천 장은 찍힌 듯한 사진을 떠올리며 태평하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말았다.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셰어는 요한을 친근하게 제 옆으로 끌어당기며 기자들을 향해 웃었다.
“그럼 가실까요.”
요한은 그의 완고한 손에 붙잡혀 레드 카펫 위로 끌려 올라갔다. 기자들 틈 속에 서 있던 클레어가 멍하게 입을 벌린 채 손에 든 마이크를 떨어뜨렸다. 그녀의 입이 벙긋거리며 무슨 말을 하는 듯했다. 뭐야? 너 이거 뭐야?
요한은 그녀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젠장, 나도 몰라.
“질문 안 받습니다!”
“프레스 라인 지키세요! 뒤로 물러서세요!”
컨벤션 센터의 문이 활짝 열린다. 등 뒤의 아수라장과 다른 세상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컨벤션 센터는 고요했다. 열린 문으로 실내의 냉기가 쏟아져 나왔으나 요한은 온도의 변화를 체감할 수 없었다. 감각이 꿈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렸다. 추위가 아닌 긴장 때문이었다.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셰어가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짙은 초록, 금테를 두른 것처럼 반짝이는 눈이 부담스럽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플래시 세례에 희게 바랜 머리로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요한은 몇 번인가 무슨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셰어가 요한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안 그래도 딱 돌아 버릴 것 같으니까.”
요한의 입술이 굳어졌다. 갈증을 참는 듯한 셰어의 눈이 요한을 외면하며 정면을 향했다. 근원 모를 분노가 서린 옆얼굴과는 달리 셰어는 요한의 어깨를 감싸 쥔 손을 떼지 않았다.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요한은 걸음을 떼다가도 자꾸만 셰어를 훔쳐보았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기자들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BNB 그룹의 후계자로서 입지를 다지는 첫발이었다. 성공했더라면 더 이상의 살을 깎는 증명이 필요 없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자리였다. 셰어는 그 자리에서 군중들 속으로 뛰어들었고, 요한의 손을 잡았다.
요한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스캔들을 향유하는지 잘 알았다. 공식적으로 요한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애인을 수시로 갈아 치우는 바람둥이로 알려져 있고, 셰어는 사생활이라고 할 만한 게 전무한 남자였다.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손을 잡은 것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분명 수백 수천 가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과장과 위조를 거쳐 재생산될 것이다.
오늘의 사건은 셰어의 오점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그 계산 빠른 셰어가 몰랐을 리가 없다.
“왜 그랬어?”
셰어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요한은 그에게 묻지 않고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 입을 떼자 속에 쌓였던 말이 요한의 입 밖으로 마구 쏟아졌다.
“거기서 왜……. 나를 아는 척하지 말았어야지. 너 똑똑하잖아. 왜 한 치 앞을 못 보고 이런 짓을 해? 너 미쳤어?”
“그만해.”
“이제 어떻게 하려고 이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 한두 번도 아니니까 난 상관없어. 근데 너는? 넌 어쩌려고 이래?”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마. 괜찮지 않다는 거 다 알아.”
요한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요한은 그제야 발작처럼 늘어놓던 말을 멈추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셰어의 손을 잡고 이 안으로 들어온 것이 믿기지 않았다. 찰칵거리는 셔터음이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셰어는 겨우 잡은 것을 놓치기라도 할세라 손마디가 희게 질릴 만큼 세게 요한을 붙잡은 채 묵묵히 앞만 보고 걸었다. 그는 이런 짓을 벌인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것 같았다. 셰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 나도 이제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
요한은 셰어와 불편하게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사적인 얘기를 하기에는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홀이 가까워질수록 숨이 턱턱 막혔다. 요한은 셰어가 저 안까지 자신을 끌고 들어갈까 봐 긴장했다. 그런 미친 짓을 벌인다면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뜰 생각이었다.
다행히 셰어는 홀에 들어서기 전, 요한을 옆에 있던 보안 요원에게 물건 맡기듯 떠밀었다.
“내 차에 두세요.”
“내가 무슨 물건이냐? 두세요가 뭐야.”
요한이 뾰족하게 굴었지만 셰어는 짧게 신경질적인 웃음만 터트릴 뿐이었다.
“제발, 요한. 기삿거리가 될 만한 일은 더는 하지 말자고.”
셰어의 입에서 ‘제발’처럼 정중한 말이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정중하게 들린 것은 아니었다. 까칠한 말투 탓에 그 말은 꼭 얌전히 있지 않으면 기삿거리가 될 만한 짓을 저지르겠다는 협박으로 들렸다.
요한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셰어는 평소보다 더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았고, 요한 역시 이 이상 물의를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순순히 보안 요원의 뒤를 따르는 요한을 바라보던 셰어가 불쑥 뜬금없는 말을 덧붙였다.
“저 사람 따뜻한 차라도 좀 가져다줘요. 추워하던데.”
요한은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셰어가 그 별것 아닌 순간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못 견디게 간지러웠다.
네가 어떤 놈인지 다 아니까 개수작 부리지 마. 그의 면전에다 대고 이렇게 쏘아붙여 주면 셰어는 뭐라고 할까. 아마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웃을 것이다. 그런 말로는 생채기 하나조차 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요한은 후문에 준비된 리무진에 탔다. 셰어의 지시가 제대로 전해졌는지 오래 지나지 않아 따뜻한 차와 간단한 음식이 준비되었다. 그 성의는 고마웠지만 요한은 그다지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실 아침 일찍부터 셰어와 한판 붙을 생각으로 거한 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빵 한 조각 더 들어갈 자리도 없었다.
게다가 인터넷에 자신과 셰어가 손을 잡고 있는 사진이 언제 올라올지 모른다. 한가롭게 뭔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요한은 자신과 셰어의 이름을 몇 번이나 인터넷에 검색했다. 무슨 조화인지 아무리 검색해도 특별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절대 쉽게 묻힐 만한 일이 아니었는데 이상했다. 어쩌면 셰어가 무슨 조치를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요한은 긴장을 쉽게 늦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조금 전의 그 아수라장이 떠올라 심장이 자꾸만 벌렁거렸다.
셰어는 차가 식을 때쯤 돌아왔다. 그는 차에 타자마자 손도 대지 않은 음식을 훑어보더니, 대놓고 못마땅한 티를 내며 요한을 타박했다.
“그대로네. 내가 주는 건 손도 대기 싫다, 뭐 이런 건가?”
하여간 속이 오지게 꼬인 놈이었다. 요한은 조금 억울해졌다.
“뭐래. 물어나 보고 준비하지. 아침 먹고 와서 배불러.”
“그래?”
굳어져 있던 셰어의 입매가 조금 풀어진다. 그는 낯선 물건이라도 관찰하듯 세심하게 요한을 살폈다. 평소보다 더 신경 쓴 슈트와 전보다 조금 짧아진 단정한 머리가 낯설었는지, 그의 시선은 꽤 오랫동안 요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뭘 봐. 요한이 입술만 움직여 물었다. 셰어는 얄밉게도 그를 못 본 체하며 태연하게 파티션을 두드렸다. 리무진이 기다렸다는 듯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요한은 불안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실 본다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땅히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어디 가?”
“내 집. 싫어?”
요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셰어의 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요한이 애인이라 착각하고 있던 때에도 셰어는 늘 요한을 호텔로 불러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은 그의 집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다.
“뭐어…….”
애매하게 대답하고 만 것은 사소하지만 자존심 문제였다. 셰어에게 긍정적인 말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셰어는 요한의 떨떠름한 반응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의외로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듯했다. 그 증거로, 셰어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다.
“여기는 언제 왔어?”
“어제.”
“무슨 일로? 숙소는 잡았고?”
지나치게 일상적인 물음이 신경을 긁었다. 요한은 울컥 치미는 화를 삼키며 삐딱하게 대답했다.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내가 알아서 해.”
“글쎄, 웬만한 호텔보다는 내 집이 더 나을걸.”
뭔가 이상하다. 요한은 셰어가 묘하게 들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상하게 치근덕거리는 말투 하며, 평소보다 유순한 태도가 낯설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눈이 요한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할 때처럼 눈가를 바라보다가도 입술이나 귀, 목덜미, 어깨 따위를 빤히 훔쳐보고 마는 것이다.
“굳이 사양하지 마, 요한.”
눈이 마주치자 셰어가 슬며시 웃었다. 남은 심란해 죽겠는데 정작 폭탄을 안겨 준 이가 저렇게 산뜻하게 웃고 있으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도 셰어가 걱정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웃고 있는 셰어가 위태로워 보인다. 그 속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대체 왜, 너를.
그를 걱정하다니. 정말 멍청한 짓이다. 요한은 한심한 자신을 속으로 비난했다.
“너는 속도 편하다.”
“내가 지금 편해 보여?”
셰어의 말투는 조금 전처럼 부드러웠으나 묘하게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그 기묘한 차분함이 꼭지가 제대로 돌아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요한은 그가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면 당장 차에서 내릴 요량으로 차 문 쪽으로 바짝 몸을 기울였다. 셰어는 요한이 경계하는 것을 뻔히 보고도 느긋하게 시트에 등을 기댄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셰어가 요한을 달래듯 속삭였다.
“겁먹었네. 왜?”
“넌 네가 되게 무섭다고 생각하나 본데, 너 안 그래. 너 되게 귀여워.”
“귀엽다고.”
셰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자 배 속이 솜털을 가득 채워 넣은 것처럼 간지러웠다. 요한은 먼지 하나 앉지 않은 셰어의 구두를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아니, 뭐가 그렇게 웃겨?”
“미안. 네가 처음으로 귀엽다고 얘기한 날이 생각나서.”
셰어는 별로 미안해하는 것 같지도 않은 말투로 사과를 덧붙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요한은 셰어가 말한 그날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감상적인 걸 기억하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의외였다. 요한은 왠지 모를 떨떠름한 예감에 입매를 구기며 물었다.
“너는 안 어울리게 별걸 다 기억하네.”
“기억 못 하나 봐. 네가 제일 좋아하는 넥타이가 망가진 날인데.”
하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야릇한 암시를 던지니 말문이 막혔다. 자극적인 장면들이 앞다투어 떠올랐다. 습기 찬 욕실, 파이프에 묶인 넥타이, 샤워 젤 특유의 향기, 모욕적인 말을 지껄이며 등 뒤에 달라붙던 남자. 요한은 목 끝까지 치미는 열기를 참기 위해 얕은 한숨을 흘렸다.
“하아…….”
셰어의 생각을 읽기가 어렵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요한은 이 순간만큼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요한은 허기를 닮은 셰어의 시선을 불만스럽게 마주했다. 셰어의 눈 속에 깃든 것이 보인다. 질 낮은 욕망과 저열한 충동 그리고 그와 어울리지 않게 반짝거리는 희열.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자신이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저 배부른 듯한 얼굴이 거슬렸다.
셰어가 나직이 물었다.
“오늘은 왜 거기 있었어? 말도 없이 나타나서 나 보란 듯이 앞줄에 서 있는 거, 좀 잔인하다고 생각 안 해?”
겨우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그게 남의 회사를 뒤집어 놓은 것보다 더 잔인할까. 요한은 코웃음을 쳤다.
“네가 한 짓을 생각해 봐. 너한테 맞추려면 아직 멀었지.”
“난 우리가 공평하게 주고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넌 마지막에 빅 엿을 먹이고 튄 걸 공평하게 주고받았다고 치나 봐.”
“그게 그렇게 좆같은 일이었다고.”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셰어의 손이 요한의 어깨 위로 기어올랐다. 달아나지 못하게 어깻죽지를 단단히 붙잡는 악력이 상당했다. 그는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나을 법한 눈으로 웃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그렇게 좆같아?”
같은 얘기를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여태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요한은 묘하게 겉돌던 대화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했다. 셰어는 자신이 말한 ‘빅 엿’이 V Pictures에 대한 투자를 끊어 놓은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마치 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가 한 짓이 아니었나?
요한은 마음속에서 기대가 당혹스러울 만큼 빠르게 부푸는 것을 느꼈다. 더는 멍청한 기대를 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열렬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마저도 거짓이라면, 그는 타고난 사기꾼이 아닐까.
셰어가 요한을 좋아한다. 그의 입을 빌려 발음된 문장을 듣고도 요한은 그 말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 요한은 그 믿기지 않는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혀뿌리에 쓴맛이 진득하게 남는 말이었다.
“잘 모르겠어.”
쥐어짜듯 새어 나온 요한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그렇구나.”
셰어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위태롭게 남아 있던 웃음기마저 사라진 그의 얼굴은 섬뜩했다. 지나치게 고요한 눈이 요한과의 거리를 재듯 느리게 깜빡였다.
본능적인 위기감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든 터지고 말 것 같다.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차 문손잡이를 더듬었다. 달리는 차에서 내리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불가항력으로 이 차에 오른 것과 달리, 이 차를 떠나는 건 자유임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부드럽게 달리던 차의 속력이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손끝에 손잡이가 닿는 순간, 요한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당겼다.
철컥. 잠금장치가 헛도는 소리가 났다. 셰어는 차 문손잡이를 붙잡은 요한의 손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리 좆같아도 주행 중에 차 문을 열면 안 되지. 그런 것도 잊을 만큼 내가 싫어?”
갇혔다. 지금 이 대화를 끝낼 방법이 없다.
서행하던 차가 코너를 돌며 간신히 버티던 몸이 셰어에게 기울었다. 충돌은 거칠었다. 셰어가 요한의 입술을 아프게 빨았다. 뻣뻣하게 고개를 쳐드는 요한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쥐어 당기며 셰어가 사납게 웃었다.
“어떻게 해도 좆같을 거라면 그냥 하던 대로 할까 봐.”
“아, 미친, 놈이, 이 미친…….”
그 이상의 수위 높은 욕설은 모두 셰어의 입술에 뭉개져 흐려졌다. 요한이 이를 세워 셰어의 혀를 깨물면 셰어는 더 사납게 요한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치킨 게임이었다. 폭력적인 입맞춤의 수위는 계속 높아지기만 했다. 어느 한 사람이 멈출 때까지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입 안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의 비릿한 맛이 맴돌았다. 맞닿은 곳이 온통 화끈거리고 따가웠다. 서로를 할퀴듯 움켜쥔 손이 제각기 이를 세우려는 턱을 붙들고, 입을 다물려는 이의 머리칼을 그러쥔다. 드러난 피부에는 손톱에 긁힌 자국이 붉게 일어났다. 그것도 모자라 비틀어진 옷깃 아래에도 얼룩덜룩한 손자국이 남았다.
산소가 부족하다. 너른 차 안을 구르듯 서로를 찍어 누르는 바람에 한바탕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그러나 숨 쉬는 것을 잊은 양 할딱거리는 입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우리, 왜 이러고 있지?
이성적인 생각이 떠오르려는 찰나, 셰어의 무릎이 요한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고통과 쾌감의 중간쯤 되는 강렬한 자극에 몸이 절로 구부러졌다. 요한은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셰어의 엉덩이를 옷 위로 긁어내리듯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입술을 위협적으로 물어 대던 이가 더욱 사납게 달려든다. 신음하려 입을 벌리면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물러서려는 혀를 뽑아 갈 듯 빨아 대는 입술은 갈취해 간 것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이를 드러냈다.
결국 먼저 손을 든 것은 요한이었다. 요한은 시트에 반쯤 눕듯이 기대앉은 채 천천히 셰어에게서 손을 뗐다. 항복을 알리듯 들어 올린 두 손을 셰어가 붙잡았다. 요한의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셰어의 손가락이 단단히 얽혔다. 나란히 깍지를 낀 손이 부드러운 시트에 짓눌리는 느낌이 숨 막히도록 간지러웠다. 수십 개의 이가 달린 괴물과 나누는 것 같았던 사납던 입맞춤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흣…….”
누구의 것인지 모를 흐릿한 신음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흘렀다. 상처 입은 혀가 쓸리고 까진 입술을 스쳤다. 젖은 살점이 저들끼리 비비적거리는 노골적이고 음탕한 소리가 났다.
입맞춤의 주도권을 앗아 간 셰어가 관용을 베풀듯 상처를 핥았다. 예민해진 점막은 미끈거리는 혀가 스치는 것마저도 바늘에 찔리는 것과 같은 통증으로 인식했다. 그것이 절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흥분을 채찍질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임계점을 넘은 흥분 탓에 머릿속이 온통 흐릿했다.
우리, 왜 이러고 있지?
요한이 움찔거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가지런히 눈을 내리감은 셰어의 속눈썹이 보였다.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저항할 수가 없었다. 요한은 눈을 감았다.
입맞춤처럼 부드러운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행위 끝에 겨우 풀려난 입술은 잔뜩 부어 있었다.
“너, 이거…… 폭행으로 고소해도 돼. 알아?”
요한이 탁하게 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마찬가지로 폭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너절해진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셰어가 말했다.
“나랑 이보다 더 더럽게 얽히고 싶으면 고소해.”
“하아…… 내가 진짜, 더러워서 피한다.”
요한은 흐트러진 옷차림을 대충 바로잡았다. 잘 다려져 있던 셔츠는 함부로 구겨져 있고, 제일 위의 단추는 헐거워져 자칫하다가는 뚝 떨어질 것 같았다. 요한은 침착하게 단추를 잠그려 했으나 힘이 들어간 둔한 손 탓에 단추를 똑 떼어 내 버렸다. 되는 일이 없다. 요한은 떨어진 단추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모르는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달뜬 숨이 가라앉지 않은 두 사람 간의 거리는 당장 붙어먹지 않는 게 이상할 만큼 가까웠다. 별로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색하게 떨어져 있는 두 몸이 즉시 자석처럼 착 들러붙을 것이다.
아니, 그건 안 되지.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요한은 애써 숨을 골랐다. 마구 쥐어뜯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내내 집요한 셰어의 시선이 따라붙는다. 진짜 여기서 일을 치를 듯 열렬한 눈빛이었다. 괜히 등줄기가 찌르르하게 저렸다.
도저히 안 되겠다. 요한은 이를 갈았다.
“나 여기서 내릴 거야. 차 세워.”
당연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 정도는 예상했기에 요한은 당황하지 않고 파티션을 두드렸다.
“기사님, 차 좀 세워 주세요.”
“이대로 쭉 가세요.”
“저 내립니다!”
리무진은 자연스럽게 속도를 높였다. 요한은 황당한 얼굴로 빠르게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월급 주는 사람 말을 듣기 마련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사람을 납치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기사님은 네가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걸 아셔?”
“글쎄, 존은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도 아무것도 못 들었다고 진술할걸. 확인해 보고 싶어?”
“지랄하지 마라, 진짜.”
뭐라고 해 봐야 입만 아프다. 요한은 그를 반쯤 등진 채 창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완전히 대화를 거부하는 몸짓이었다. 그 신호를 못 읽을 리 없는 셰어가 뻔뻔하게 말을 붙였다.
“그렇게 싫어하지 마, 요한. 그러니까 얌전히 굴지 왜 그랬어. 달아나면 쫓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와, 그런 개소리는 처음 듣는다.”
어이가 없어 막을 새도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때 뻣뻣하게 굳은 요한의 등에 셰어의 손이 닿았다. 손바닥 전체가 착 달라붙듯 옷 위로 문지르는 것이 소름 끼치게 오싹했다. 요한은 열기가 피어오르는 목덜미를 가리듯 손바닥으로 덮었다. 우습게도 이미 손바닥까지 다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왜 날 찾아왔어? 넌 내가 무슨 마음인지 다 알면서 여기까지 왔지.”
셰어가 상체를 요한에게 바짝 붙여 왔다. 묵직한 온기가 요한의 등에 실린다.
여기에 온 것은 V Pictures 때문이다. 셰어가 투자금을 끊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온 것이다. 요한은 속으로 반박했으나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흥분한 셰어와 대화를 나누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이다. 속에 감추어 둔 말을 모두 쏟아 내고 말 것 같다.
네가 스스로, 여기까지 온 거야. 열에 들떠 중얼거리는 셰어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도망치지 마. 아껴 줄게.”
목덜미를 감싼 요한의 손등을 셰어가 잘근잘근 씹어 댔다. 요한은 참다못해 축축한 한숨을 흘렸다. 셰어는 아껴 준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게 틀림없다. 내키는 대로 그를 깔아뭉개고 싶은 욕망이 일었다. 그 욕망은 이중적이라, 요한은 한편으로는 셰어를 ‘아껴 준다’는 말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다정하게 안고 싶은 충동을 동시에 느꼈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모든 일이 다 꼬여 버렸다. V Pictures에 대한 일은 아직 시작도 못 했는데 셰어의 커리어에 흠집을 냈고, 그와 입을 맞추었으며, 지금은 그의 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고 있다. 그다음은 또 뭐란 말인가. 그와 배를 맞추고 필로우 토크라도 하면 되나.
악의로 설계된 미로 속에 갇힌 것 같다.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영원히 그 안을 맴돌고 마는 미로.
요한은 길 잃은 아이처럼 혼란에 잠긴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왔어.”
셰어의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요한은 셰어를 마주 보았다. 고개를 기울이면 입을 맞출 수도 있을 듯한 거리에서 바라본 셰어는 낯설었다.
그는 심상치 않은 요한의 표정에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저 감정은 진심일까. 셰어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주석을 달게 된다. 그가 눈썹을 손톱만큼 치켜세우는 것에, 굳게 다문 입술의 모양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수십 가지의 해석을 덧칠한다.
셰어와 함께 있을 때면 요한은 어느 위치에 서더라도 갑의 기분을 살피는 을처럼 구는 그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지극히 주관적인 요한의 해석은 때로는 맞고 때로는 틀렸다. 그럴 때마다 요한은 동전을 뒤집듯 손쉽게 휘둘렸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요한을 빠르게 지치게 했다.
요한은 홀로 써 내려간 주석을 지웠다. 그와의 대화에 항상 주석이 필요하다면, 그건 가망이 없는 관계다. 어떤 편견도 해석도 없이 셰어와 날 것 그대로의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래도 답이 없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겠지만.
요한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신작 영화 투자금이 위험 수위까지 빠졌어. BNB 창업 투자 펀드에서 돈이 빠져나간 뒤로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다른 투자자들이 일제히 투자를 취소했거든.”
잠시 말이 없던 셰어가 여상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네가 한 짓이야?”
버석하게 메마른 웃음이 요한의 어깨 위에서 부스러졌다. 요한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웃던 셰어가 고개를 바로 들었다. 그 얼굴에서 웃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섭게 날이 선 눈이 깜빡일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왜 나라고 생각했을까. 네가 보기에는 내가 그럴 만한 놈이라?”
“비꼬지 말고 들어. 그 펀드가 BNB 산업 자금으로 굴러가는 거 뻔히 아는데 어떻게 의심을 안 해?”
“아, 그래서 여기까지 왔구나.”
셰어는 그린 것처럼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그래서 여기까지 왔어.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입술에 걸린 웃음은 속이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요한은 긴장으로 까칠하게 갈라진 목을 가다듬었다. 동부까지 셰어를 쫓아온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V Pictures를 위해. 절대 부적절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왠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요한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확실히 대답해 줘. 정말 네가 한 짓이 아니야?”
숨 막히는 정적이 깔린다. 셰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늘게 호흡하며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요한은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차 안으로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에 반짝거리는 먼지는 고작 한낱 먼지가 아니라 다른 어떤 소중한 존재처럼 보였다. 흔한 착시였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아니라고 말해, 제발. 아니라고.
눈이 마주쳤다. 요한의 눈 속에 담긴 간절한 말을 읽었는지, 셰어가 그 시선을 피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뚜렷한 낭패감이었다.
“글쎄…… 내가 한 짓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뾰족하게 응결된 적의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날카로운 적의가 따갑게 찔렀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디가 두드러지게 힘이 들어간 손을 힐끗 쳐다본 셰어가 턱을 치켜들었다. 돌진하고 싶을 만큼 얄밉게도 매끈한 턱이 투우사의 카포테처럼 팽팽하게 드러난다.
“치고 싶으면 쳐도 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물을게. 정말 네가 한 짓이 맞다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아 요한은 다시 한번 물었다. 셰어는 할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요한은 당장 무슨 말이든 지껄여 보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았다. 가능하다면 꾹 다문 셰어의 입을 벌려 그 시커먼 뱃속에 감춘 말을 죄다 긁어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다. 차인 게 화가 나서, 자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혹은 그냥 심심해서, 그 무엇이라도.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이든 상관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좋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
“미안해.”
셰어의 입에서 성급하게 튀어나온 사과는 요한 자신도 놀랄 만큼 폭발적인 분노를 끌어냈다. 눈길이 닿는 것을 죄다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낯선 감정이었다.
셰어는 처음 거짓말을 시도하는 아이처럼 어색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건, 실수였어.”
정제되지 않은 말이 요한의 머릿속을 떠돌았다.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는 셰어를 한 대 치고 이 차에서 내리고 싶다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얘기를 끝낼 수는 없었다. 요한은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실수, 고작 그게 네 변명이야? 그러니까 나는 그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네.”
미쳤던 거야. 또 기대를 하다니,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나.
“나는 분명히 투자를 재검토하라고만 했다.”
셰어가 쫓기는 것처럼 말을 쏟아 냈다.
“리스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투자를 재검토해 보라고, 지나가듯 한마디 한 게 전부야. 네 회사를 망치려 한 적 없어.”
“그 말을 믿으라고.”
요한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있는 그대로 셰어를 바라보려 노력했다. 셰어가 했던 수많은 거짓말을 배제하고 오로지 지금 그가 하는 말만을 믿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셰어의 변명은 아무리 좋게 들어 주려 해도 지나치게 성의 없는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냥 한마디 한 게 다라고. 변명을 할 거면 좀 더 생각해서 하지 그랬어.”
요한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 셰어의 눈은 꼭 뭔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런 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셰어는 기자들 앞에서 요한의 손을 잡아끌 때도 세상에 두려운 것이라곤 없는 것처럼 태연했었다. 그렇기에 요한은 셰어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뚝을 움켜쥐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꼼짝도 못 하게 팔을 구속하는 손길은 연인을 애무하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네게 소중한 것을 망칠 생각은 없었어.”
탄식 같은 말과 함께 셰어가 요한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부드럽게 팔뚝을 쥐던 손이 요한을 쥐어짜듯 붙잡았다. 그는 뺨이 따갑게 쓸리도록 거칠게 얼굴을 비볐다. 심해에 머물던 사람이 뭍에서 첫 숨을 쉬듯 다급한 호흡이 요한의 목덜미에 닿았다. 갈급하던 숨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짧게 다듬어진 머리카락이 까슬하게 자라난 목덜미에 입술이 오랫동안 지그시 닿았다가 떨어진다. 다시는 입 맞추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셰어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내가 해결할게. 전부 다 원래대로 돌려놓을 테니까…….”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가던 셰어가 버거운 것을 삼키듯 입을 다물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침묵은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대체 무슨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요한은 조심스럽게 셰어를 밀어 보았으나, 그는 잠깐 떨어지는 것조차 견딜 수 없는지 유독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잠깐만.”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요한이 겨우 한마디 했을 뿐인데, 셰어는 여태 버틴 것이 무색하게 순순히 요한을 놓아주었다. 요한은 하도 쥐어짜인 탓에 얼얼하게 아픈 팔뚝을 문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서 바람에 일렁이는 불처럼 흔들리는 눈빛만이 솔직했다. 나를 미워하지 말라고 애걸하는 듯한 그 눈만이.
왜 이러는 거야. 안 어울리게, 왜 이렇게 겁을 먹어서 사람 기분 이상하게.
뻔뻔하지 않은 셰어는 너무 이상해서 더는 보고 있을 수가 없다.
“한 가지만 얘기해 줘. 왜 그랬어?”
요한이 물었다. 셰어는 누가 혀를 훔쳐 가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잘못을 한 건 셰어인데 제발 변명이라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스운 꼴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요한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거만큼은 내게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잖아.”
“내가 말하기 싫다고 하면?”
창백하게 굳어진 셰어의 얼굴은 가면처럼 뻣뻣해 보였다. 요한은 차갑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딜을 시도하는 게 참 한결같았다.
이런 사람이었다. 서슴없이 믿음을 배신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을 하고, 남의 마음이 어떻든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 분명 그는 평생 개심 같은 건 모르고 살 것이다.
“말하기 싫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그냥 끝이지. 영원히.”
셰어의 미간이 울듯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물기 하나 없는 눈가에 눈물이 번지는 일은 없었다.
요한은 붉게 달아오른 셰어의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화가 나서 미칠 것 같은데, 그 울 것 같은 얼굴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셰어를 상처 입히며 저 또한 상처 입은 것처럼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다.
아, 나는 아직 그를 사랑하는구나.
절망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왔다. 완전히 고사한 줄 알았던 마음이 끈질기게도 남아 있었다. 셰어가 영원히 변하지 않더라도 그를 사랑한다. 요한은 모자란 자신을 비웃었다. 이토록 멍청하니 셰어에게 번번이 속아 넘어가는 것도 당연하다.
셰어가 절절한 거짓을 욕처럼 거칠게 뱉었다.
“네가 나 없이 다른 새끼랑 잘 지내는 꼴 같은 거 보고 싶지 않아.”
불그레한 눈이 원망하듯 요한을 노려본다. 거짓이라도 속고 싶어지는 눈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 감독이라는 새끼랑 네가 붙어먹던 시절 얘기 같은 거, 듣고 싶지도 않았고.”
셰어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거칠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다 날 것처럼 조악했다. 요한은 숨소리를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네가 날 미워하는 건 지긋지긋해.”
“그래서 다 나 때문이란 거야?”
“그래.”
“어이가 없네.”
그 뒤로 셰어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거짓말처럼 식어 버린 분노가 소사(燒死)한 재처럼 허무하게 날아갔다. 요한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단했다. 아침부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것처럼 녹초가 된 몸에는 더는 얘기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만하면 문제를 해결했다고 볼 수 있을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셰어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를 믿을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셰어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 또한 불분명했다. 요한은 이런 소모적인 관계를 다시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때마침 리무진이 부드럽게 멈춰 섰다. 셰어는 심판이라도 기다리듯 가라앉은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까운지 유난히 길게 와 닿는 시선은 담담한 표정과 달리 열렬했다. 그 동공이 너무 까맣고 깊어,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등을 보이면 즉시 달려드는 짐승의 것처럼 표적을 노리는 눈이었다.
그런다고 누가 쫄 줄 알고. 요한은 태연하게 그를 독촉했다.
“뭐 해? 빨리 앞장서. 나 피곤해.”
“들어갈 거야?”
셰어가 이상한 것을 물었다. 그의 눈이 묘하게 반짝이는 듯했다. 그것이 흡사 자신이 품었던 기대 같아 보여, 요한은 인상을 구기며 쏘아붙였다.
“그럼 내가 여기까지 드라이브하러 왔겠냐? 웬만한 호텔보다 낫다며. 재워 줘.”
특별한 의도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요한은 어제 숙박한 호텔에서 이미 한참이나 차를 타고 왔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도시에서 지금 같은 기분으로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셰어가 안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다시는 날 안 보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눈에 띄게 안심하는 얼굴을 보니 속이 울렁거린다. 요한은 차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어 시선을 피했다.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는 말 꼭 지켜.”
“그건 걱정하지 마. 약속할게.”
셰어가 희미하게 웃는 듯했다. 요한이 그의 표정을 확인하려 했을 때, 셰어는 이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유난히 화창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모든 게 현실 같지가 않다.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이게 만든 문제를 이리 간단히 해결했다는 게 그저 꿈같기만 했다.
활짝 열린 차 문을 잡으며 셰어가 한낮의 햇빛 아래로 내려선다. 전날까지도 비가 내렸던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날씨는 화창하고, 봄날처럼 따사롭다. 노란 햇빛 아래 선 셰어는 유난히 생기 넘쳐 보인다.
그가 차에서 내리는 요한에게 퍽 신사답게 손을 내밀었다. 전에는 한 적 없던 짓이었다. 요한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그의 손목을 무례하게 붙들었다.
“매너를 이상하게 배웠네. 보시다시피 난 숙녀가 아니라 신사라서.”
“글쎄, 네 손은 별로 신사답지 않은데.”
그 손을 요령 좋게 떨쳐 낸 셰어가 요한의 등을 감싸 안으며 정면의 아파트 입구를 향해 이끌었다. 요한은 등에 달라붙는 체온이 몹시 거슬렸으나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투명한 창을 통해 보이는 아파트 로비는 호텔처럼 모던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늑한 조명과 푹신해 보이는 독특한 형태의 소파, 따뜻한 색감의 바닥은 ‘집’이라는 콘셉트에 제법 잘 어울린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것처럼 보이는 공간의 실상은 보이는 것과 달랐다. 곳곳에는 수십 개의 CCTV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정복을 입은 덩치 큰 도어맨이 파수꾼처럼 투명한 유리문 앞을 지킨다. 허락된 사람이 아니면 건물 안으로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할 것이다.
셰어를 알아본 도어맨이 지문 하나 없는 문을 활짝 열었다. 요한은 칼같이 각을 세운 도어맨의 옷차림을 힐끗 쳐다보고는 셰어에게 작게 속삭였다.
“여긴 자동문이라는 신문물이 아직 없대?”
“고급 아파트와 도어맨은 세트 상품이거든.”
“진짜 이상한 동네야.”
저 값비싸 보이는 세트 상품이 사실은 지폐 몇 다발로 매수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요한은 바이올렛의 단서를 찾아 준 익명의 조력자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매사 철저해 보이던 셰어는 의외로 조심성이 부족한 것 같다. 혹시나 냄새를 맡은 다른 쓰레기들이 달려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면 셰어는 가엽게도 당황해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말 것이다. 셰어가 남들에게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상상을 하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요한은 그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사람 함부로 믿지 말고 조심 좀 하고 다녀. 그러나 그 말을 하면 셰어가 비웃고 말 것 같았다. 정작 셰어를 협박한 쓰레기는 자신이었다. 요한은 그런 말을 해 줄 자격도 이유도 없었다.
“뭐 해, 타지 않고.”
그새 엘리베이터 문이 열려 있었다. 요한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셰어가 요한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더는 달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듯이 느리게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 안에 단둘이 갇히자 사방의 벽들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셰어의 눈이 차 안에서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눈에 깃든 것은 기대처럼 귀여운 것이 아니었다. 오래 묵은 허기였다. 셰어는 오랫동안 참아 온 것을 눈앞에 둔 것처럼 게걸스럽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얼굴을 보자 아까부터 참아 왔던 갈증이 다시 일었다.
여기까지 온 건 셰어와 자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전에는 셰어가 아무리 꼬셔 댄다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짐짓 까칠하게 을러댔다.
“나 아직 너 용서한 거 아니다. 착각하지 마.”
셰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그는 숫자가 바뀌어 가는 패널로 시선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알아. 누가 뭐라고 했나?”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셰어는 요한을 내버려 둔 채 쌩하니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피차 게스트와 호스트 노릇을 하며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안내하기는커녕 혼자 집에 들어가 버리는 것은 좀 너무했다. 손님을 배려하는 마음 같은 건 조금도 없는 작자였다.
“야, 같이 가.”
요한이 투덜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셰어의 집은 넓고, 아름답고, 고요했다. 완벽한 가구가 완벽한 위치에 놓여 있었고,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화가의 그림이 집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곳에 걸려 있었다. 그 완벽한 조화가 낯선 공간에 초대된 이를 긴장하게 만든다. 이 공간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주입하는 집이었다.
주인과 꼭 닮은 공간이다. 요한은 처음 셰어를 본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완벽하고, 아름답고, 보는 이를 긴장시킨다. 하지만 그 완벽해 보이는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근사한 외양과 달리 속이 이렇게 시커먼 줄 알았더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은 속으로 그를 욕했다.
그것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앞장서서 가던 셰어가 걸음을 멈추고 요한을 돌아보았다. 셰어는 요한이 잘 따라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도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요한은 지레 찔끔해 불퉁하게 물었다.
“왜? 뭐?”
“옆으로 오라고.”
셰어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요한은 더는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순순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셰어와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그의 눈 속에 깃든 감정이 요동치는 것이 생생하게 보인다. 그렇게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좋아하는 티가 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요한은 괜히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됐냐?”
그것이 퍽 간지러웠는지 셰어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불티가 확 튀어 오르듯 세상이 다른 빛깔로 물들었다가 되돌아온다.
“잘 따라와.”
셰어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음을 옮겼다. 요한은 한 박자 늦게 그의 뒤를 따랐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것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넓은 공간을 두고도 셰어가 유독 옆에 가까이 붙어 걷는 바람에 손등이 닿을 것만 같았다. 무심하게 흔들리는 손이 옆을 스칠 때마다 요한은 간질거림을 참기 위해 걸음을 늦추어야 했다. 첫 데이트 하는 10대도 아니고, 이런 짓 저런 짓까지 다 한 사이에 이런 간질거림을 느낀다는 게 미치도록 어색했다.
요한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여 댔다.
“집이 참…… 새것 같네. 예뻐.”
“고마워. 몇 년 전에 시공이 끝나자마자 이사했으니까 거의 새 집이지.”
“전에 살던 곳은 어딘데?”
“여기서 좀 더 가야 해. 맨션은 혼자 쓰기에는 별로라.”
“그치. 역시, 혼자 지내기에는 아파트가 좋지.”
아파트에 살아 본 적도 없으면서 요한은 아파트 예찬론을 한참 늘어놓았다. 셰어는 그 말을 끊지도 않고 계속 들어 주었다.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제발 적당히 끊고 다음 화제로 넘어갔으면 했는데, 그가 열심히 대꾸까지 해 주는 바람에 아파트 얘기는 끝이 없었다. 요한은 잘 알지도 못하는 아름다운 커뮤니티 의식에 대해 얘기했고, 셰어는 진지하게 공감했다.
앞뒤 안 맞는 얘기만 하고 있는데 대화가 이어진다는 게 신기할 뿐이었다. 요한은 얼빠진 얘기만 지껄여 대는 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에게 감화된 양 셰어도 덩달아 헛소리를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면 너도 하나 사 줄까?”
“어?”
“아파트 좋아하잖아.”
농담 같지는 않았다. 그 진지한 얼굴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얘 왕자님이었지.
그러고 보니 셰어는 살인적인 집값을 자랑하는 이 도시에서 혼자 지내기 별로라는 이유로 새 집을 사는 사람이었다. 요한 역시 특별한 고민 없이 차를 타고 가다 마음에 든 집을 샀지만, 부동산을 모노폴리 게임을 하듯 사 재끼는 셰어에게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내가 여기 올 일이 얼마나 있다고. 됐어. 관리하기가 더 귀찮겠다.”
“그럼 지금 사는 집 근처가 좋겠어?”
“아니, 난 내 집이 좋아.”
“부담 가질 필요 없는데. 내 실수로 손실을 끼쳤으니 위자료를 지불하는 거라고 생각해.”
위자료라는 핑계를 대도 실상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가 분명했다. 투자자의 개인적인 선물이라니, 자칫하다가는 정말 더럽게 엮일 소지가 다분해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셰어는 선물 받는 쪽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 편이었다. 요한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야…… 헛짓거리할 생각 하지 말고 집이나 마저 구경시켜 줘. 난 어디서 지내면 돼?”
“마음 바뀌면 얘기해.”
끝까지 아쉬운 기색을 떨치지 못한 셰어가 요한의 손을 잡아끌었다. 특별한 의도는 없는 양 담백하기만 한 접촉은 문고리를 쥐는 것처럼 건조했으나, 요한은 전류라도 흐르는 듯 연신 손끝을 움찔거렸다. 그에게 닿은 살갗이 따끔거린다. 셰어의 손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꼭 그 또한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 손을 구태여 뿌리치고 싶지 않았다. 셰어의 손은 단단하고 부드러웠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착각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부드러워, 요한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손바닥을 문질러 보았다.
매사 까칠한 셰어에게도 이렇게 부드러운 구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매번 외설적인 상상이 끼어든다. 이를테면, 요한은 그의 손바닥이 허벅지 안쪽만큼이나 부드럽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요한의 손길이 점차 농밀해졌다.
셰어는 요한이 손을 꼼질거릴 때마다 더욱 세게 손을 붙잡았다. 결국 요한은 꼼짝도 못 하게 손을 붙들린 채 쥐가 나지 않기를 기원해야 했다.
일반적인 스킨십의 단계를 거꾸로 밟고 있다. 가장 수위 높은 행위에서 소꿉장난 같은 손장난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은 뜻밖에 야릇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상대가 셰어라는 것 때문에 지나치게 곤두선 신경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와 있을 때면 종종 터져 나오던 격렬한 감정이 분노에서 다른 것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동정이던 시절로 회귀하기라도 한 듯 별것 아닌 접촉에도 성급하게 몸이 달았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나기 직전에 셰어가 먼저 손을 놓았다. 요한은 뭔가가 아쉬워 저릿한 빈손을 꽉 쥐었다. 셰어는 손님용 침실의 문을 열어 보였다.
“원하는 만큼 여기서 지내. 난 오늘 일정을 마치고 바로 다른 지역으로 떠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이미 기사로 읽어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으나 뭔가가 마음에 걸린 것처럼 불편했다.
셰어에게 할 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요한은 셰어가 모든 일을 다 내팽개치고 자신에게만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부드러웠던 분위기를 매몰차게 끊어 내려는 셰어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아쉽네. 시간 되면 같이 식사라도 했으면 했는데.”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셰어가 움찔했다.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던 셰어는 어울리지 않게 곤란해하며 말했다.
“한 시간 뒤에는 가야 해서, 그리 좋은 건 대접 못 해.”
요한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셰어가 들으면 비웃겠지만 그는 가끔 이상하게 귀여워 보일 때가 있다.
“난 아무거나 다 잘 먹어.”
“그건 알아.”
“뭐라고?”
“넌 그 이상한 녹조 라테도 맛있다고 먹으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캡슐 머신으로 내린 그린티라테가 셰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게 분명하다. 딱 한 번 그 얘기를 했을 뿐인데 셰어는 아직도 그 얘기를 했다. 요한은 셰어의 어깨에 팔을 감으며 그를 방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그러는 넌 얼마나 좋은 거 먹는지 두고 보자. 어?”
셰어가 불순한 의도가 명백한 웃음을 흘렸다.
“그래, 두고 봐.”
그리고 15분 뒤, 요한은 거대한 참치를 회 뜨는 장인의 손놀림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섬세하게 살이 발린 참치회는 보기 좋게 접시에 담겨 알록달록한 롤과 함께 식탁 위에 놓였다. 유니폼을 입은 서버들이 이동식 냉장고처럼 생긴 아이스박스에서 끊임없이 음식을 꺼냈다.
좋은 건 대접 못 한다더니,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요한이 어색하게 젓가락질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나란히 앉은 셰어가 어설프게 젓가락을 쥔 요한의 손을 고쳐 주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이 절로 부들부들 떨렸다.
“두고 보자며. 근데 너 젓가락질할 줄 몰라?”
“포크랑 나이프만 잘 다루면 됐지, 내가 왜 젓가락질까지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교양이잖아.”
“교양 같은 소리 하네…….”
요한의 젓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걸려 있던 회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셰어가 손수 회를 집어 요한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이건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음식을 떠먹여 주는 것과 같은 행위다. 절대로, 연인들 사이에 서로 음식을 떠먹여 주는 닭살 돋는 짓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다짐해도 차마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요한이 입을 꾹 다문 채 버티자 셰어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곱게 먹여 줄 때 입 벌려.”
그런 의미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음습하게 깔리는 셰어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야릇하게 들린다. 요한은 재빨리 셰어가 내민 것을 받아먹었다. 한껏 찌푸려져 있던 셰어의 미간이 살짝 펴졌다. 요한은 영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간신히 씹어 삼키며 물었다.
“나 그냥 포크로 먹으면 안 되냐?”
“포크 어디 있는지 몰라.”
“그야 당연히 부엌에 있겠지.”
“없던데.”
셰어는 태연하게 알록달록한 롤을 집어 들어 요한의 입에 쑤셔 넣었다. 닥치고 먹기나 하라는 듯한 손길에서 어쩐지 거짓의 냄새가 풀풀 났다. 요한은 입 안 가득 찬 커다란 롤을 우적우적 씹으며 불만을 삼켰다.
아무래도 당한 것 같다. 기다렸다는 듯이 레스토랑에나 있을 법한 셰프와 서버들이 줄줄이 등장한 것도, 하필이면 준비한 음식이 젓가락으로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는 것도 전부 다 수상했다. 요한은 가까스로 입에 든 것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차가운 손가락이 요한의 윗입술을 훔쳤다. 셰어는 제 손가락에 묻은 하얀 소스를 찡그린 눈으로 보더니 그 손을 요한의 입에 쑤셔 넣었다. 새콤달콤한 소스 맛이 났다.
“얌전히 먹기나 해.”
셰어는 소스 대신 침이 묻어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우아하게 냅킨에 닦았다. 하얀 냅킨이 반듯하게 접혀 식탁 위에 놓인다. 그와 반대로 요한의 냅킨은 대충 펼쳐져 있었다. 요한은 냅킨으로 입술을 벅벅 문질러 댔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당한 기분이 들지.
그 못마땅한 표정을 본 셰어가 뻣뻣하게 굳어 있던 입매를 누그러뜨리더니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날생선 싫어해?”
“너무 늦게 물어보는 거 아냐?”
요한은 날생선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젓가락질을 잘 못하는 게 창피할 뿐이다. 교양이라니, 언제부터 젓가락질까지 교양이 되었던가?
“아무거나 다 잘 먹는다고 하더니, 가리는 게 있는 줄은 몰랐네.”
셰어는 회 대신 아보카도가 들어간 롤을 집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롤을 요한의 입에 쑤셔 넣기 전에 물었다.
“아보카도도 싫어하나?”
언제부터 그렇게 상냥했다고 좋고 싫고를 하나하나 물어보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긋나긋하게 구는 셰어는 불편하고 이상했다. 요한은 그의 젓가락 끝에 매달려 있는 롤을 냉큼 훔쳐 먹었다. 더는 물어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입 안에서 부스러지는 음식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셰어의 시선 때문이다. 그는 여태까지 몰랐던 요한의 기호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끈질기게 요한을 살폈다.
단단히 체할 것 같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식사를 끝내는 게 이로울 터였다. 셰어는 철근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기세로 롤을 집어 먹는 요한이 재미있었는지, 요한의 앞에 아보카도 롤이 담긴 접시를 밀어 주었다. 그러자 대기하던 셰프가 아보카도 롤을 더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아, 망했다. 요한은 서글픈 눈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거대한 아보카도 롤을 바라보았다.
“나 용서 안 해도 돼.”
셰어는 요한에게만 들릴 만큼 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필이면 그 말을 한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탓에, 요한은 유난히 커 보이는 아보카도 롤이 앙심의 아보카도 롤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할 뻔했다. 셰어가 말을 이었다.
“용서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한테 잘해 주고 싶은 건데, 안 돼?”
긴장했는지 바른 자세로 젓가락을 쥔 셰어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다.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손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떨림을 감추듯 그는 두 손을 식탁 아래로 숨긴다.
식탁 아래의 손과는 달리 셰어의 얼굴은 그다지 긴장한 티가 나지 않았다. 빳빳하게 치켜든 턱과 태생부터 남들을 내려다보고 자란 것처럼 오만한 눈, 뱀처럼 교활한 혀. 하지만 그는 때때로 보통 사람처럼 웃고, 두려워하고, 울기도 한다. 요한은 그 간극을 아는 사람이 오로지 자신뿐이기를 바랐다.
“왜?”
요한이 물었다. 요한의 목소리에도 희미하게 열이 번져 있었다.
“알잖아.”
그와 눈이 마주쳤다. 또 그 느낌이다. 세상이 다른 색채로 물드는 느낌. 셰어의 홍채가 떨리는 것이, 살짝 마른 입술이 달싹이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입술이 소리 없이 말한다. 널 좋아하니까.
그의 주변이 아웃 포커스 된 것처럼 뿌옇게 흐려진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셰어의 긴 속눈썹이 손이 닿지 않는 어딘가를 삭삭 긁어 대는 듯했다. 간지러워 온몸을 버둥거리며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가 나를 좋아해.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다. 요한은 깜빡이는 것조차 잊은 눈을 뒤늦게 깜빡였다.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요한이 머리끝부터 빨갛게 물들어 가는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셰어가 입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셰어는 슬며시 다리를 반대로 꼬고 앉았다. 그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기에 요한은 셰어의 바지 위로 두드러진 형상을 또렷하게 보고 말았다.
이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다. 이성을 찾아야 한다. 요한은 슬픈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 슬픈 일은 꽤 많다. 지금은 다소 완화되었지만 레일라가 아픈 것도 슬프고, 세상에 기아와 가난이 존재한다는 것도 슬프다. 그리고 또 슬픈 것은 셰어에게 허락된 자유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 자유 시간은 절반도 남지 않았다.
“너 진짜 한 시간밖에 없어?”
생각과 동시에 필터를 거치지 않은 물음이 요한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셰어는 조금 당혹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한 번 그리고 요한을 한 번 바라본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이 빌어먹게도 야릇했다. 그 입에서는 전율이 일 만큼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17분 남았네.”
세상에서 제일 슬픈 말이었다.
지금 일어나기 곤란한 것은 셰어뿐만이 아니었다. 요한은 셰어와 반대 방향으로 다리를 꼬았다. 혹시나 민망한 꼴을 들키기라도 할까 봐 상체를 숙이자 셰어의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진다.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체열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맨몸으로 그를 끌어안을 때처럼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셰어가 요한의 곤란을 발견했다. 큰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요한은 셰어가 당황했다는 것을 알았다. 셰어는 소리 없이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말을 고르다, 곧 아무 말 없이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차라리 대놓고 비웃는 게 나았다. 진심으로 당혹스러워하는 셰어를 보자 요한은 대로변에 발가벗고 선 것처럼 민망해졌다.
그러나 수치심과는 별개로 흥분은 더해 가기만 했다. 요한의 머릿속에 몹쓸 상상이 빠르게 차오른다. 셰어가 보는 앞에서 수음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에다 대고 사정하면 그는 화를 낼까, 혹은 비웃을까. 어느 쪽이든 욕정을 참기에 좋지 않은 상상인 것만은 분명했다. 요한은 짧아진 인내심을 위태롭게 부여잡은 채 고민했다.
그냥 덮칠까?
“안 돼.”
요한이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셰어가 단호하게 말했다. 순간 요한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속마음을 뱉었나 싶어 제 입을 가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요한이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왜? 뭐?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너 눈이 이상해.”
“이상하겠지. 이상하게 맑고, 투명하고, 아름답고…….”
“음탕해.”
이 미친놈이. 요한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삼켰다. 아침부터 놀랄 일이 많아서인지 작은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게 된 심장이 벌렁거렸다. 요한은 흔들림 없이 회를 뜨고 있는 셰프와 물잔에 물을 채워 주는 서버들을 힐끔거렸다. 그들은 놀랍게도 아무 말도 듣지 못한 척하며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노골적인 단어에 당황한 것은 요한뿐이었다. 그 말을 뱉은 셰어마저도 아무렇지 않게 자세를 고쳐 앉는다. 보기도 민망할 만큼 발기한 주제에 멀쩡한 척을 하고 앉아 있는 게 아주 얄미웠다.
요한은 셰어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눌린 허벅지가 단단하게 굳어지며 셰어의 호흡이 흐트러진다. 가빠진 숨에 얼핏 섞인 욕설을 들은 듯했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것이 옷 위로 또렷한 윤곽을 드러낸다.
그 끝이 요한의 손에 닿아 있었다. 유독 뜨겁고 단단한 살덩이가 손가락을 밀어 올리며 부푸는 것이 느껴진다. 요한은 슬며시 손을 그의 무릎 위로 미끄러뜨렸다. 그저 쓸어내리는 동작일 뿐인데 진득한 애무라도 받은 것처럼 손톱 하나 박히지 않을 만큼 딱딱해진 허벅지가 긴장한다.
“너도 별로 정숙하지는 않은데.”
이런 꼴로 누가 누구더러 음탕하대.
긴장한 몸과 달리 셰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뻔뻔하게 요한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겹쳐진 손이 뜨거웠다.
“걸레 소리도 들었는데, 정숙한 척하긴 너무 늦었지.”
“꼭 그런 척할 생각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하네.”
셰어는 불합리한 비난이라도 들은 것처럼 반론했다.
“안 그래서 좋아했잖아.”
요한은 할 말을 잃었다. 셰어와 저지른 온갖 난잡한 일들이 떠올라 단칼에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내 취향이 걸레라니…….”
누구 탓에 취향이 한참이나 틀어지고 말았다. 요한이 한탄했다.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셰어가 요한의 손가락 사이를 슬쩍 문지르며 속삭였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넌 원래부터 취향이 더러웠어.”
“얘가 날 또 모함하네. 내 취향은 아주 멀쩡하거든.”
“바이올렛, 잊었나 봐.”
정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고 보니 바이올렛을 먼저 찾은 것도 자신이었다. 요한은 말없이 셰어의 무릎 안쪽을 지그시 문질렀다. 대충 넘어가자는 뜻이었다.
셰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빨갛게 달아오른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맞잡은 손에 땀이 고이고 있었다. 이러다 셰어의 바지에 손자국이라도 남기고 말 것 같다. 손을 떼야 하는데, 그의 무릎을 감싸 쥔 손을 영원히 거기 붙여 놓을 듯 단단히 달라붙은 셰어의 손 때문에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다.
요한은 호소하듯 그의 이름을 속삭였다. 셰어.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손끝이 움찔거린다.
셰어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으며 요한의 손을 떼어 냈다. 둘의 어깨가 부딪쳤다. 수상쩍게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손을 붙잡은 채, 묘한 정적이 흘렀다.
1분, 어쩌면 2분이 지났을까.
“샤워하러 가야겠어.”
셰어가 먼저 요한의 손을 내던지듯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한은 시선이 자꾸 특정한 곳으로 향하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셰어는 민망한 아래의 사정을 내보이며 집 안을 활보하는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지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요한은 뜨끈뜨끈한 얼굴을 식탁에 처박았다. 아직도 셰어의 감촉이 남은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듯했다. 요한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아, 미치겠네…….”
요한은 후회했다. 괜히 도발하지 말고 그냥 서로 손이라도 빌려주자고 할 걸 그랬다.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4분이다.
복잡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셰어와의 관계나 현실적인 고민은 뒤로 밀려나고 오직 본능적인 욕구만이 요한을 지배했다. 그와 자고 싶다. 욕망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셰어와 같이 있고 싶다. 그와 누구에게도 한 적 없는 얘기를 나누고 싶다. 아주 독점적인,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연인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제 13분이 남았다. 시계의 숫자가 바뀌는 것을 노려보던 요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칠게 밀려난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바닥을 긁는다. 물소리가 쏟아지는 욕실이 가까워질수록 요한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진다. 요한은 욕실로 뛰어들었다.
욕실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셰어는 옷도 다 벗지 않은 채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 부스에 서 있었다. 그는 욕실에 난입한 요한을 보고도 그다지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번듯하게 드러난 이마가 보인다. 요한은 그의 이마를 깨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셰어는 화난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물에 젖은 하얀 얼굴이 무섭기는커녕 온통 입에 넣고 빨고 싶을 만큼 예쁘기만 했다.
“너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겠어.”
냉랭하기만 한 말이 이상하게 고백처럼 들렸다. 요한은 샤워 부스의 문을 열었다. 매섭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요한의 슈트와 구두를 흠뻑 적신다. 찬물에 젖어 들면서도 요한은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몸이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뜨거웠다. 어떻게 해야 몸을 안쪽부터 태우는 열기를 잠재울 수 있을지 몰라, 요한은 성급하게 셰어에게 다가갔다.
“너만 그런 줄 알아? 너 때문에 내가 어떤 꼴인지 네가 알아야 하는데…….”
아니,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미 온갖 얼빠진 모습을 다 보여 줬는데 더한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요한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말을 얼버무리며 입을 다물었다.
셰어는 욕설을 뱉으며 샤워기를 껐다. 사실 요한이 욕실에 들어온 순간부터 셰어는 그가 하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는 줄곧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요한이 한 말이 아니라 요한의 입술이었다. 셰어는 요한의 입술이 핏기를 잃어 가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나가. 입술이 새파란데 여길 왜 들어와.”
“나한테 5분만 줘.”
“넌 5분만 주면 쌀 수 있나 봐.”
하여간 셰어는 낭만을 모른다. 요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리며 셰어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 되게 눈치 없다. 그냥 입 다물고, 눈 좀 감아 봐.”
셰어는 키스의 타이밍 같은 건 몰라도 손은 재빨랐다. 차가운 손이 요한을 아무렇게나 움켜쥔다. 셰어에게 닿은 곳이 온통 차갑게 젖어 들었다. 요한은 냉기에 몸을 떨면서도 셰어를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
축축한 입술이 부딪쳤다. 입맞춤은 조금도 부드럽지 않았다. 5분을 1초도 낭비하지 않으려 작정한 것처럼 갈급한 충돌이 이어진다. 서로를 움켜쥔 손이 제각기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를 잡아끌려 힘을 써 댔다. 그 때문에 이리저리 꺾인 고개를 쥐어 비트는 손길이 피부에 빨갛게 남고 말았다.
차가워진 입술과 달리 입 안은 녹을 듯 뜨거웠다. 달군 것처럼 뜨거운 혀가 요한의 입천장을 긁어 댄다. 그것이 꼭 무슨 말을 쓰는 것 같았다. 요한은 암호 같은 입맞춤을 멋대로 해독했다.
하고 싶다. 입맞춤보다 더 끈적한 짓을 하고 싶어서 몸이 달았다. 셰어 역시 같은 생각인 게 틀림없다. 셰어의 허벅지가 은근슬쩍 요한의 다리 사이를 짓누르고 있었다. 요한은 셰어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가뜩이나 타이트한 브리프를 입은 터라 불편했는데 그 위를 비비적거리기까지 하자 옷 속이 아프도록 답답했다.
더는 위험하다. 정말로 일이고 뭐고 셰어를 여기에 눕히고 싶은 생각이 들려 하고 있었다. 요한은 애써 셰어를 조금 밀어냈다.
“흐읏…… 5분, 지난 것 같은데.”
“아니.”
분명 5분은 족히 지났다. 단호하게 거짓말을 하는 셰어의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거친 숨이 섞여들었다. 요한은 입술을 떼려 할 때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셰어를 달래듯 쪽쪽거리며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괜히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일하러 안 가?”
“하아…….”
셰어는 유독 싫은 티를 내며 요한을 숨 막히게 꽉 끌어안았다. 요한은 갈비뼈가 뻐근해 기침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입술이 비죽비죽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매사에 칼 같던 셰어가 애처럼 일하기 싫어하는 게 좀 귀여워 보였다. 요한은 그의 등을 쓸어내리며 실없는 소리를 해 댔다.
“어디 가? 내가 미리 가서 숨어 있을까?”
“스토커.”
“따라갈까? 책상 밑에 착하게 있을게.”
“갈등되니까 꼬시지 마.”
막무가내로 졸라 대자 셰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요한은 그가 그렇게 웃는 게 좋았다. 웃는 법을 배우기 전, 난생처음 웃는 아이의 것 같은 웃음이 만들어진 표정 위로 떠오르는 순간, 솜털이 보송보송한 고양이나 배냇짓하는 아기를 볼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게 된다.
셰어는 자신을 따라 웃는 요한의 입술 끝을 쭉 늘이며 말했다.
“착하게 집에서 기다려. 다녀올게.”
셰어가 그토록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본 적은 드물었기에 요한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영화에서 흔히 그러지 않던가. 돌아온다고 말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셰어를 보내면 그가 인사도 없이 먼 곳으로 떠나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은 끈질기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트렁크에 넣어 가면?”
“그만.”
결국 입술을 꼬집혔다. 요한은 눈썹을 축 늘어뜨린 채 불쌍한 눈으로 셰어를 바라보았다. 보통은 이런 얼굴을 보면 못 이기는 척 데려가 줄 법도 한데, 셰어는 보통이 아니었다.
“한마디만 더 하면, 앞뒤로 질질 싸면서 내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게 될 거야.”
셰어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협박은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요한은 셰어가 앞뒤로 질질 싸며 애원하는 것을 상상했다. 끙 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알아들었으면 착하게 기다려.”
요한이 끙끙거리는 사이, 셰어는 요한을 개 쓰다듬듯 만져 주고는 욕실을 나가 버렸다. 요한은 한결 더 걷기 불편한 상태가 된 자신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냥 한마디 더 할걸.”
요한은 벌이든 뭐든 셰어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만져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