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기억에서 깔끔하게 도려내고 싶은 부분이 있다. 혐오 어린 눈빛, 매번 각오한 것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는 말들, 떠오를 때마다 수치에 몸부림치게 될 것이 분명한 밤의 기억.
셰어는 눈을 감았다. 짓무른 눈가가 젖어 들며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환하게 불이 켜진 침실은 그의 표정을 낱낱이 드러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어진 정사에 시달려 너덜너덜하게 닳아 버린 이성은 더는 우는 얼굴을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그 얼굴을 보일 때마다 요한이 조금 더 상냥해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셰어, 움직여야지.”
셰어의 아래에 누운 요한이 다정한 말투로 재촉했다. 그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처럼 몸속이 조여드는 게 괴로웠다. 셰어는 그 통증을 잊으려 허리를 들었다. 토기가 치밀 만큼 깊게 삽입된 성기가 조금 물러나며 셰어의 입술이 절로 벌어졌다.
끙끙 앓는 듯한 신음이 흐르는 입술을 요한의 손가락이 범했다. 혀뿌리까지 깊게 쑤셔 대던 손가락은 그저 적시는 게 목적이었다는 듯이 금세 빠져나갔다. 젖은 손가락이 입술을 건드리며 타액을 문지르는 것이 더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제 것이든 남의 것이든 얼굴에 침질을 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셰어에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축축한 손가락이 고통으로 떨리는 셰어의 몸을 어루만졌다. 요한이 뾰족하게 곤두선 유두를 지분거리자 타액에 젖은 손가락 사이로 빳빳한 돌기가 미끄러진다. 꼬집힌 것처럼 얼얼한 통증에 셰어의 허리가 떨렸다.
그 때문에 힘이 빠진 다리가 미끄러지며 겨우 빠져나간 성기가 도로 깊은 곳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배 안이 마구 헤집어졌다. 셰어는 단단한 근육의 굴곡이 두드러진 요한의 배 위를 두 손으로 짚은 채 몸을 숙였다. 어떻게든 통증을 줄여 보려 해도, 아까와 다른 각도로 파고든 좆이 몸속에서 더욱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한참이나 시달렸는데, 아직도 지독한 밤이 끝나지 않았다.
“흐…… 아, 힘들어. 으읏, 더는 움직일, 수가…….”
“아니야. 너 할 수 있어.”
요한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셰어를 달랬다. 그가 거칠게 맥동하는 가슴 위를 쓸어내리자 그 안 어딘가에서 번지던 통증이 멀어지는 듯했다.
상처 입고 싶지 않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상처받을 것이 뻔한 관계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지금 떠오르는 유일한 후회는 그것이었다. 벨을 누르기 전에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불가하다면, 약에 대한 것은 끝까지 숨겼어야 했는데.
고통의 근원이 몸인지 마음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정사에서 달아나고 싶다. 요한은 약을 주지 않는 대신인 양 다정한 손길로 셰어를 어루만졌다. 그의 친절이 약보다 더 지독했다. 계속 다정하게 만져 주기를 바라게 된다. 셰어의 눈 속에 간절한 것이 어린다.
그 눈을 마주한 요한의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허리를 들기도 버거울 만큼 사람을 착취한 것은 요한이면서도 그는 종종 이렇게 피해자의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어찌나 진실한지, 협박을 당한 당사자인 셰어마저도 까무룩 속아 넘어갈 것 같았다.
“정말 힘들어…….”
셰어는 요한을 덮치듯 그의 위로 몸을 숙였다. 요한의 어깨를 침대에 못 박듯 내리누른 채 몸을 겹치자 빠듯하게 박혀 있던 좆이 밀려 나가며 안에 가득 차 있던 허연 정액이 툭툭 딸려 나온다. 셰어는 내장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에 떨며 요한에게 입을 맞추었다.
혀를 섞는 동안은 고통이 멀어진다. 그만큼 머릿속까지도 혼탁해져 셰어의 혀가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점차 둔해지는 혀 놀림이 거슬렸는지 요한이 누운 채로 느릿하게 허리를 쳐 올렸다. 반쯤 빠져나갔던 좆이 안을 푹푹 찔러 올리는 통에 셰어는 요한의 어깨를 긁으며 신음했다.
“아, 아! 흣, 조금만…… 흐으, 숨을, 못 쉬겠…….”
“먼저 입 맞추고, 안겼으면서 왜…… 또, 나 가지고 노는 거야?”
요한이 셰어의 허리를 부러뜨릴 듯 세게 안으며 타액에 젖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도 추삽질은 점점 더 거칠어져 셰어의 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요한은 그것이 못내 짜증스러웠는지 몸을 굴려 셰어를 아래로 깔아뭉개며 입을 맞추었다.
숨이 턱 막힌다. 갑작스럽게 바뀐 체위 탓에 몸속을 짓누르던 좆이 셰어의 배 안을 긁어내렸다. 긁힌 것은 몸속인데도 날카로운 것이 들쑤시는 것처럼 척추가 시렸다. 고통과 접붙은 쾌감에 몸속이 지끈거렸다. 참을 새도 없이 어딘가를 잘못 누른 것처럼 셰어의 성기가 울컥 묽은 정액을 흘렸다. 셰어의 입에서 새어 나온 뭉그러진 신음이 맞닿은 요한의 입 속으로 흘러들었다.
요한은 입술을 떼고는 질척하게 젖은 셰어의 배를 쓰다듬었다. 투명한 체액이 젤처럼 발린 배가 가쁘게 오르내린다. 셰어는 반쯤 넋이 빠진 얼굴로 멍하게 요한만 바라볼 뿐이었다. 제대로 한 사정이 아닌지 미처 수그러들지 않은 성기가 요한의 손등에 체액을 흘렸다.
“좋았나 봐. 이런 것까지 흘리고.”
요한이 투명한 점액에 흠뻑 젖은 제 손을 보란 듯이 감상했다. 셰어는 흥분에 달뜬 요한의 얼굴이 낯설어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달에 깃발이라도 꽂은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것이 조금 귀엽다고 생각한 것 같기도 했다.
문득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침실에 가득 찬 정사의 냄새였다. 셰어는 요한의 손을 투명하게 적신 체액을 바라보았다.
저런 것을 흘리다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플레이가 배제된 섹스, 그것도 삽입당하는 섹스에서 뭔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셰어는 내면에서 뭔가가 훼손되는 것을 느꼈다. 처음처럼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멍했다.
생각을 이어 갈 틈이 없었다. 요한은 거칠었다. 그가 멍이 들 만큼 세게 셰어를 움켜쥔 채 몸을 치댈 때마다 침대 스프링이 주저앉을 것처럼 삐걱거린다.
이지러진 시야가 깜빡였다. 간신히 요한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던 셰어의 손이 그의 어깨로 미끄러졌다. 젖은 살갗이 손톱에 긁히는 느낌이 났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셰어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함부로 쏟아져 내리는 신음을 방치했다.
좆이 비좁아진 내벽을 긁어 댈 때마다 셰어의 안에 쏟아졌던 정액이 흘러나와 등허리를 적셨다. 안에다 얼마나 싸지른 건지, 꾸물거리며 새어 나오는 정액은 끝도 없이 흘렀다.
몸속을 얻어맞는 듯한 격렬한 삽입에 뭔가가 터진 것처럼 셰어의 성기에서 묽은 체액이 줄줄 흘러나왔다. 셰어는 배뇨감을 닮은 기이한 사정감을 참으려 애쓰며 요한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때문에 좆이 깊게 박혀 든 내벽이 확 오므라들며, 미끈거리는 기둥이 조금 밀려 나왔다.
“흐, 잠깐, 이거, 으읏…… 윽, 으…….”
“아, 미친…… 무슨, 잠깐이야, 지금.”
요한이 셰어의 다리를 고쳐 안으며 몸을 숙이자, 밀려 나왔던 좆이 도로 깊게 박힌다. 그와 동시에 물처럼 투명한 것이 셰어의 배와 가슴 위로 울컥 쏟아졌다. 이번에는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요한이 퍽퍽 처박아 댈 때마다 묽은 체액이 흘러 셰어의 상체를 흠뻑 적셨다.
“아아, 으, 아니야. 안 돼, 잠깐…… 흐, 읍.”
둔한 혀로 빚어낸 말은 요한의 손이 입을 막는 순간 흐느끼는 듯한 신음으로 변했다. 산소가 부족한 머릿속이 멍청했다. 좋아, 셰어의 입술이 움직였다. 요한은 셰어의 입을 틀어막느라 그 말을 듣지 못했다. 단지 그는 간지러운 숨이 손바닥을 긁어 대는 것만을 느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셰어의 얼굴을 진득하게 노려보며 요한이 파정했다. 셰어는 이미 꽉 찬 것만 같은 배 안이 버거워 눈썹을 찌푸렸다.
죽을 것 같다. 죽을지도 모른다. 셰어는 열에 들떠 할딱거렸다. 뜨거워진 눈가로 미지근한 물기가 계속 흘렀다. 달구어진 호흡이 입을 틀어막은 요한의 손바닥에 뜨끈하게 눌어붙었다. 셰어는 숨이 막혀 요한의 손등을 긁었다. 눈물에 젖은 뺨에 요한의 손이 미끄러지며 겨우 숨통이 트인다.
“흐, 욱…….”
눈물에 젖어 짭조름한 손가락이 셰어의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혀를 잡아 뽑을 듯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거칠었다. 앙심을 담아 그의 손가락을 세게 깨물자 요한은 오히려 달콤한 한숨을 흘렸다.
“하아, 좋아…….”
방금 전에 사정했는데, 느릿한 허리 짓이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사정을 참게 하는 것보다 더 지독한 짓이었다.
악랄한 새끼. 셰어는 혀를 누르며 파고드는 손가락을 잘근거리며 목을 울렸다. 내벽을 밀어 올리며 몸속에서 부푸는 성기가 금세 딱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셰어의 눈에 고여 있던 물기가 금세 굵어져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요한은 그 얼굴을 핥아 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으응, 그렇게 계속 씹어 봐.”
밑을 쳐 올리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요한의 손가락을 물 때마다 삽입은 거칠어졌다. 셰어는 자꾸만 입 안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을 혀로 밀어내며 헐떡였다.
“치워. 흑, 하아…… 아, 흣, 언제까지, 할 생각이야?”
“몰라. 읏, 진짜…… 너 까칠하게 구니까 더 꼴려.”
“흐으…… 미친 새끼.”
눈물과 타액에 젖어 흐트러진 얼굴로 셰어가 요한을 노려보았다. 낮게 까라진 목소리는 위협한다기보다는 유혹하는 것 같았다. 요한은 셰어의 엉덩이를 달래듯 주무르며 욕설을 뱉는 입술을 삼켰다. 입이 막히고도 잠시간 이어지던 욕설이 곧 사그라들었다.
입을 맞추는 중에도 내벽을 느리게 긁어 대는 피스톤질은 멈추지 않았다. 요한이 양손으로 볼기를 그러쥐고 함부로 주무르자, 그 자극으로 오므라든 내벽이 조르는 것처럼 좆을 물어 댔다. 좁아진 몸속을 두꺼운 선단이 긁었다. 셰어의 눈앞에 하얀빛이 튀었다.
“아, 흐으, 악! 아, 아!”
쾌감이 지나쳐 온몸이 다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셰어는 요한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실금할 듯 저릿한 감각이 퍼진다. 아찔한 쾌감과 통증이 뒤엉켜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맞닿아 있는 요한의 가슴이 셰어의 것만큼이나 크게 들썩인다. 요한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씹…… 너무 좋아. 좋아. 예뻐…….”
요한은 침대에서는 누구에게나 그 말을 할까. 습관처럼. 셰어는 그 말이 기쁘면서도 싫었다.
요한은 열렬한 감정을 이기지 못한 사람처럼 셰어를 세게 끌어안았다. 셰어는 그 품에서 사지를 흐늘거리며 녹아내렸다. 뜨거운 불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화끈거리는 허리 아래와는 달리 요한의 손길은, 입술은 다정했다. 요한의 입술이 바짝 치켜든 셰어의 턱을 지분거리며 간지럽게 입 맞춘다.
사실 이건 협박이 아니라 보통의 섹스가 아닐까 착각하려는 찰나, 무자비하게 짓쳐들어온 좆이 흐물거리는 내벽을 뭉갰다. 착각하지 말라는 듯이. 멍청한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하게 몸속을 온통 휘저어 놓았다.
“좋아.”
무심코 던진 돌에 토사가 떠오르듯 얌전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던 말이 셰어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고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입술이 틀어막혔다. 키스하는 법을 까먹은 것처럼 뻣뻣한 혀가 입 안을 정신없이 찔러 댄 후에야 셰어는 그것이 키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토록 형편없는 입맞춤은 처음이었다. 요한이 셰어를 반으로 구기려는 사람처럼 거칠게 좆을 처박아 대는 바람에 키스는 두 사람 모두에게 비릿한 맛을 남겼다.
셰어는 누구의 이에 부딪혀 찢겼는지 모를 아랫입술을 빨았다. 핏방울이 다시 스며 나오기도 전에 요한이 그의 입술을 훔쳤다. 셰어와 마찬가지로 피가 맺힌 요한의 입술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정말 피곤하다.
의식이 불투명해지는 가운데 요한의 체온만이 선명했다. 그의 말이나 행위와 달리 체온은 누군가를 상처 입힐 수 없었기에 셰어는 안도했다. 요한의 체온은 온전히 따뜻하기만 했다. 그랬기에 셰어는 끔찍하게 피로하고, 아프고, 피부가 한 겹씩 벗겨져 나갈 것처럼 외롭지만, 이 모든 것을 다 기억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 *
셰어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알람은 이미 평소에 자주 듣지 못해 낯설기만 한 후반부를 지나고 있었다. 셰어는 손이 닿는 거리에 놓여 있는 폰을 집어 들어 알람을 껐다.
토요일 오전 7시, 수영을 갈 시간이었다. 정오에는 임원들과 클럽 하우스에서 간단히 식사를 한 후 라운딩을 돈다. 시답잖은 내기 골프를 치고 술을 마시게 될 것이다. 지루한 주말이다.
하루 일정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던 셰어는 문득 몸이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불이 유독 묵직했다. 셰어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있는 체온은 따뜻했고, 숨을 쉴 때마다 낯선 향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요한이 그의 등 뒤에 딱 달라붙어 있다. 이불로 꽁꽁 싸맨 셰어를 꽉 끌어안은 채로.
잠에 취해 무디던 정신이 번쩍 깨어났다. 그와 동시에 밤새 잠들었던 통증도 다시 깨어났다. 온몸이 몸살이라도 앓는 것처럼 아팠다.
그만큼 지독한 밤이었다. 요한은 끊임없이 셰어를 극한으로 몰아갔고, 의식이 끊어질 때가 되어서야 놓아주었다. 셰어는 엉망으로 들쑤셔졌던 감정이 도로 끓어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이불 아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살갗에 열이 기어간다. 사방에서 풍기는 향기 때문이었다. 요한의 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켜면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이불에서 묻어났다. 어쩐지 신 것을 떠올릴 때처럼 침이 고였다.
“으…….”
그때 낮은 신음과 함께 간지러운 숨결이 셰어의 뒤통수에 닿았다. 불온한 충동을 들키기라도 한 듯 셰어의 숨이 일순 멎었다가, 이어 가늘게 흘러나왔다. 요한은 결백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그저 서러운 꿈을 꾼 것 같다. 요한에게 꼭 끌어안긴 채 누워 있을 때면 그와 다투고, 서로 상처 입히고, 헤어진 것이 꿈속의 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몸의 통증이 생생하듯 그 모든 것이 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늦봄에 내린 때 놓친 눈처럼 녹다 말다 끝내 진탕이 되어 버린 마음속에는 아직 뭔가가 남아 있었다. 그다지 깨끗하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때때로 요한이 성마르게 굴 때면 셰어는 더럽고 비열한 방법으로 요한을 망가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셰어가 원한다면 바이올렛이라는 것이 밝혀질 리스크를 안고서라도 요한과 함께 침몰할 수 있다. V Pictures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요한의 소중한 사람을 해치고, 요한마저도 멀쩡히 살 수 없도록 망쳐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진창을 구르고 싶지는 않았다. 여태까지 쌓아 온 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은 마음만이 전부였다면 오히려 쉬운 문제였다. 처음에는 패닉에 빠져 놓쳤지만, 차가운 머리로 생각해 보면 비밀을 지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문제는 한 가지였다. 셰어는 요한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면 쉬울 텐데, 왜 포기가 안 될까. 셰어는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깊게 호흡했다. 숨을 쉬는 공기에 요한의 향기가 진동한다. 자신을 안은 팔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고문이다. 예전과 같다는 착각을 하게 될 것 같다.
셰어는 조심스럽게 요한을 마주 보고 누웠다. 남은 꼼짝도 못 하게 이불로 돌돌 말아 놓고, 정작 요한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셰어를 꼭 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뭐가 불편한지 눈을 감아도 근사한 얼굴에서 번듯한 눈썹이 살짝 구겨져 있다.
셰어는 소름이 돋아난 요한의 팔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한은 추워 보였다. 그러니까 왜 이불을 남의 몸에 죄다 돌돌 말아 놓은 건지. 미약한 온기마저 떨어질세라 제 옆에 바짝 붙어 자는 꼴을 보자 셰어는 괜히 마음이 물러지는 듯했다.
하여간 미워할 틈도 주지 않고, 귀엽고 불쌍하고 난리다. 셰어는 답답하게 휘감겨 있는 이불 끄트머리를 슬쩍 그의 배 위에 덮어 주었다. 요한은 그것만으로도 온기가 느껴지는지 끙끙거리며 셰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 탓에 밤새 시달린 허리가 지끈거려 셰어는 인상을 구겼다.
“요한.”
무섭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쯤 쉰 목소리는 심하게 앓은 사람 같았다. 셰어는 까칠한 목을 가다듬으며 재차 요한을 슬쩍 흔들어 보았다.
“나 이제 가야 하는데.”
요한은 오만상을 찌푸릴 뿐 도통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쉽게 깨울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이 아니었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피차 깨어 있을 때는 싸우기 바쁜 사이였으니.
그렇게 마음을 먹고도 왠지 아쉬워, 셰어는 괜히 피딱지가 앉은 요한의 입술을 쓰다듬었다.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또 다른 흔적이다. 사나운 입맞춤은 두 사람의 입술에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흉을 남겼다.
까칠한 딱지가 앉은 입술을 매만지자, 그것이 거슬렸는지 요한이 셰어의 손가락을 불쑥 깨물었다. 셰어는 흠칫 놀라 얼른 손을 떼고는 뭔가를 우물거리는 시늉을 하는 요한의 얼굴을 관찰했다. 진짜 자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래도 잠버릇이 영 이상했다.
“너 뭐야.”
“으응.”
심술궂게 한마디를 툭 던지자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긴 요한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셰어는 그의 입술 모양을 읽었다. 주세요. 아이스크림, 주세요.
“너 진짜 짜증 난다.”
셰어는 작게 중얼거리며 요한의 머리칼을 슬쩍 쓰다듬었다. 짜증 난다는 말과는 달리 셰어의 목소리는 어딘지 부드러웠다. 요한의 머리칼이 셰어의 손가락 사이로 간지럽게 흘러내린다. 요한에게서 달큼하게만 느껴지는 살냄새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에서 나는 냄새. 이런 꼴이 되고도 그의 냄새를 맡으면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욕정이 치밀었다.
“짜증 나.”
셰어는 요한의 팔을 단호하게 치우고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불편한 걸음으로 욕실로 향하던 셰어가 멈춰 섰다. 욕실 문에 어제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둔 옷이 잘 다려진 채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셰어는 무심코 셔츠 소매를 쓸어내리다 소맷단에 달린 낯선 커프스 링크를 발견했다. 어제 요한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커프스 링크 대신인 모양이었다.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동그란 금빛 커프스 링크를 만지작거리던 셰어는 침대 쪽을 한 번 흘겨보고는 욕실로 들어섰다.
몸은 정상이 아니었지만 할 일이 많았다. 셰어는 수영은 포기하는 대신 정오부터 예정된 일정은 소화하기로 했다.
* * *
페어웨이를 미끄러지듯 굴러간 공이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셰어는 쥐어짜이는 듯한 근육의 통증을 무시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18홀 중 절반도 채 돌지 않았는데 벌써 갈비뼈가 뻐근했다. 갤러리처럼 서 있던 임원들이 양산을 든 채 다가왔다.
“컨디션이 별로라고 하시더니 공은 오히려 더 잘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꼭 잘 맞는다 싶어서 한마디 하면 그다음부터는 짠 것처럼 안 맞던데요.”
셰어는 짐짓 엄살을 떨었다. 사실 절반은 진담이었다. 하루는 꼬박 쉬어야 마땅한 상태인 몸을 이곳까지 끌고 온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셰어는 축축하게 젖은 등에 달라붙은 옷자락을 펄럭였다. 미열이라도 오르는지 대단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피부 밑을 기어다니는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것도 다 일종의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셰어는 오늘 일정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한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잡혀 있는 것은 셰어의 약점뿐만이 아니었다. 볼모로 잡혀 있는 감정이 더 큰 난관이었다.
“더우신가 봐요.”
캐디가 셰어가 든 드라이버를 받아 들며 수건을 건넸다. 그에게까지 소모할 친절은 남아 있지 않았기에 셰어는 대충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더웠다. 한낮의 햇살 아래, 목 위까지 올라오는 골프 웨어가 답답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복수라도 하듯 요한이 집요하게 남긴 흔적이 목덜미에 빼곡했다.
다음 홀로 이동하는 동안 셰어는 수건으로 땀을 훔치며 요한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후 2시가 넘은 시각, 요한은 이제야 눈을 뜬 모양이었다.
[어디야?]
불쑥 행적을 묻는 메시지가 어쩐지 애틋해 셰어는 액정 화면 위에 떠오른 글자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요한을 대할 때면 늘 그랬다. 안전한 답을 고르려다 매번 엇나가고 만다.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요한에게서 연이어 메시지가 왔다.
[너새벽까지열난거모르지]
[어디냐고]
그의 메시지는 꼭 셰어를 걱정하는 것 같았다. 셰어는 잠시 고민하다 겨우 답장했다.
[골프장이야.]
커프스 링크 고마워. 그 말을 해야 할까?
막 메시지를 입력하고 전송을 누르려는 찰나, 카트가 멈추었다. 캐디가 필드를 살피며 말했다.
“아, 앞 팀이 있네요.”
셰어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최대한 빨리 일정을 마치고 싶은데, 일이 조금 꼬였다.
필드 위에 있는 두 사람을 보던 임원들이 몇 마디 말을 나누었다.
“저 사람 배우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요. 올리버 체이스. 옆에 있는 사람이 그 애인인가 보죠. 무슨 영화감독이라던가.”
“에런 포츠요?”
셰어는 심드렁한 표정을 감추려 노력하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버 체이스는 굵직한 영화에 다수 출연한 배우였기에 셰어 역시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연예인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CFO는 그렇지 않았는지, 눈까지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에 창투 펀드에서 투자하려는 게 V Pictures 신작인데, 그 영화 감독이 저 사람이 될 확률이 높아요.”
“감독 이름이 뭐라고요?”
셰어가 물었다. 여유 자금을 굴리기 위해 존재하는 창업 투자 펀드에서 V Pictures에 투자하려 한다는 것보다 요한의 일에 대한 호기심이 앞섰다. 여태 얌전히 듣고만 있던 셰어가 관심을 보인 것이 달가운지 CFO가 재빨리 대답했다.
“에런 포츠요. 저 사람이 한다면 흥행만큼은 확실할 겁니다.”
“그렇게 대단한 감독인가요?”
“대단하기는 하죠. 근데 흥행에는 그보다 화제성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V Pictures와 에런 포츠가 붙으면…….”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을 끄는 CFO의 말을 끊으며 그와 늘 앙숙처럼 다투던 CTO가 뒷말을 받았다.
“화제는 끌겠네요. 바람난 전 애인과의 재결합. 잘은 몰라도 손익 분기점은 확실히 넘겠습니다.”
돌풍이 불었다. 벙커의 모래가 호를 그리며 일어난다. 바람의 방향을 따라 잔무늬를 그리는 벙커를 노려보던 셰어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 무슨 가십거리가 있나 보죠. 제가 그런 건 잘 몰라서.”
셰어의 손안에서 폰이 진동했다. 반짝이는 화면에 요한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오늘 저녁은 바빠?]
가십을 꿰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민망한지 CFO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당시에는 워낙 유명했으니까요. 에런 포츠나 요한 바네스나 말이 많았죠.”
“둘 다 바람둥이 이미지였잖아요. 얼마나 오래 사귈지로 베팅하는 사이트까지 있었다던데요.”
“아.”
셰어는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 제 목소리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 뒷말까지 뱉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험악한 말을 지껄일 뻔했다.
그렇게나 요란하게 사귀던 전 애인이랑 같이 일을 한다고. 뜨거운 것이 셰어의 갈비뼈 아래에 고이는 듯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요한이 한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애인을 갈아 치워 대며 가십난을 오르내리던 인물이었다는 것쯤은 셰어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그를 가벼운 인물이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요한은 가볍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고, 은근히 무르면서도 단호한 면이 있다. 그렇기에 헤어진 사람에게 가차 없으면서도, 인간적인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셰어를 걱정한 것처럼, 에런 포츠에게도 기회를 준 것처럼.
요한의 호의는 특별하지 않다.
“그렇군요.”
셰어는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임원들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여느 때처럼 웃어 보였다.
필드를 살피던 캐디가 반갑게 외쳤다.
“앞 팀이 이동하나 봅니다. 이제 가시죠!”
캐디의 뒤를 따라 임원들이 하나둘씩 카트에서 내렸다. 가장 마지막으로 카트에서 내리며 셰어는 요한에게 답장을 보냈다.
[미안. 오늘은 안 되겠어.]
그럴 권리가 없다는 건 알지만, 오늘은 자신이 요한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치졸한 질투였다.
하얀 옷에 튄 얼룩처럼 에런 포츠의 존재는 내내 셰어의 신경을 긁었다. 하필이면 바로 앞 팀이었다. 그 때문에 이동할 때마다 필드 위에 선 에런 포츠와 그의 연인을 목격하게 되는 일이 잦았다. 의식하려 하지 않아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얀색으로 도배를 한 에런 포츠는 너무 눈에 띄었다. 하얀 모자, 하얀 골프 웨어에 하얀 신발, 심지어 그의 골프 백까지도 하얀색이었다.
전형적인 예술 변태의 편집증 같다. 셰어는 한껏 비틀어지려는 입가를 손으로 가리듯 덮으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미친 사람처럼 하얀색으로 도배를 한 것도 영 마뜩잖은데, 에런 포츠는 세기의 연인 행세를 하며 온갖 유난을 떨고 있었다. 퍼팅 자세를 봐 준답시고 연인과 한 몸처럼 딱 붙어 있는 모양새가 가관이다. 그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에런은 요한과 함께 있을 때도 그랬을 터였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요란하게 요한의 옆자리를 차지했던 상대. 셰어는 영원히 할 수 없는 역할이었다. 그는 에런과는 정반대로 요한에게 비밀 유지 각서를 내밀었다.
요한은 에런 포츠의 저런 점을 좋아했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이 더욱 비틀리는 듯했다. 결국 셰어는 날이 선 말투로 한마디를 뱉고 말았다.
“그런데 그 영화,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예?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줄곧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셰어의 눈치를 살피던 CFO가 물었다. 그 순간 셰어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셰어는 V Pictures의 신작에 투자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저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절대로 감정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V Pictures라면 가족 영화가 중심일 텐데요. 그런…… 사적인 스캔들이 얽힌 영화가 가족 관객들에게 먹힐까요?”
이것은 지극히 이성적인 사고 끝에 떠올린 결론이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서부라지만 게이 스캔들이 얽힌 영화를 스테레오 타입의 가족들이 신나서 보러 갈 리는 없다. 그러니 투자를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감독도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에만 휘둘려 한 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셰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CFO는 잠시 고민하더니 금세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그 부분은 다시 고려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꼭 신중하게 검토해 보세요.”
셰어는 서늘한 눈으로 에런 포츠를 노려보았다. 둔하기 짝이 없는 에런은 그 열렬한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애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요한의 모습이 겹쳐 보여 셰어는 속이 갑갑해졌다.
에런은 요한보다 작고 마른 데다가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녀린 체형이었다. 하얀 모자 아래로 살랑거리는 금발이 멀리서도 화사하게 반짝였다. 그는 저와 비슷한 키를 가진 남자의 등에 딱 달라붙어 무슨 말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요한의 취향이 저런 쪽이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 호텔에서 요한이 꼬드기려던 그 가이드도 저렇게 여리여리한 타입이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것처럼 어려 보이던 가이드의 넥타이를 퍽 친밀하게 고쳐 주던 요한이 떠올랐다. 다정하고 애살맞은 성격에 소년처럼 섬세한 외모, 요한의 취향이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진다.
하여간 그는 취향만 맞으면 주인 없는 개 새끼처럼 여기저기 꼬리를 흔들고 다닌다. 셰어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왠지 저 감독, 앞으로 일이 잘 안 풀릴 것 같거든요.”
셰어의 손아귀에서 거의 쥐어짜이고 있던 폰이 연달아 진동했다. 요한에게서는 계속 메시지가 오고 있었다.
[열은 안 나?]
[이런 날 무슨 골프장이야]
[넌이제존나살만한가보다사람밤새잠도못자게해놓고너새벽에는진짜식겁하게ㅔ]
[열이]
[많이 났다고]
[너 환자야]
이런 몸으로 만든 게 대체 누군데. 골고루 유난이었다. 셰어는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꺼 버렸다. 물론 열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몸도 여전히 뻐근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전날 격렬한 섹스를 했다고 일을 쉬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어쩌면, 요한과 잤던 전 애인들은 그만큼 연약했을지도 모른다. 눈앞에서 비교 대상이 얼쩡거리니 그에 대한 생각을 쉽게 접을 수가 없었다.
셰어는 요한의 의미 없는 다정함이 거슬렸다. 그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종종 속을 뜨끔하게 하던 다정함이 이제 그때보다 더 매서운 칼날이 되어 셰어를 해치고 있었다. 요한은 연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심지어 협박으로 얽힌 사람에게도 습관처럼 다정하다.
모질게 뱉는 말이나 강압적인 행동으로도 요한의 습관적인 친절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는 밤새 지독하게 굴어 놓고는 아픈 게 아닐까 걱정한다. 커프스 링크를 멋대로 쥐어뜯고는 제 것을 달아 주었다. 요한은 협박이라고 했지만, 약을 먹지 않은 셰어의 눈으로 본 그는 때때로 평범한 연인 같았다.
[언제 끝나?]
[지나가는 길에 태워 줄게]
요한의 메시지가 반짝인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지나가는 길에 태워 준다는 건지 모를 노릇이다. 기대를 부추기는 친절은 달콤하지만 괴로웠다. 셰어는 이것이 요한의 복수 방식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망 없는 일에 기대를 거는 것은 고통스럽다. 셰어는 그저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때마침 필드에서 영영 내려올 것 같지 않았던 에런 포츠와 그의 연인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골프를 치는 내내 애무나 다름없는 상호 교습을 한 탓인지 다음 홀이 아닌 하우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번번이 앞을 막으며 훼방을 놓을 사람은 없었다.
“드디어 끝을 보겠군요.”
기다림에 지친 일행 중 누군가가 말했다. 셰어는 그 일상적인 말이 어떤 깊은 의미를 담은 신호처럼 느껴졌다. 셰어는 요한에게 답했다.
[지금 출발해.]
골프장 주소를 찍어 주자마자 말풍선의 색깔이 바뀐다. 셰어는 그의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필드로 나갔다.
골프장은 시내에서 1시간도 넘게 걸리는 외곽 지역에 있다. 요한이 지금 바로 출발하더라도 라운딩이 끝날 때쯤에나 도착할 터였다. 그러면 주차장에서 그를 만나 눈에 띄지 않게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셰어의 예상은 빗나갔다. 요한은 예상보다 아주 일찍 도착했고, 일찍 도착한 김에 적극적인 사교 활동을 즐기기로 한 것 같았다.
“이거 참, 별일이네요.”
처음 V Pictures 투자 얘기를 꺼냈던 CFO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셰어는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로비를 차지한 한 무리의 화상을 보았다. 요한은 로비에서 에런 포츠와 그의 애인과 함께 둘러앉아 사이좋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지만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떠들썩하게 사귄 지 3개월 만에 한쪽이 바람이 나서 헤어진 커플이었다. 요한이 에런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사가 될 만한 일인데, 더구나 그의 바람 상대인 올리버까지 한 테이블에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과연 언제 파국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조합이었다.
“아까 한 그 투자 얘기 잘 생각하세요.”
셰어는 차갑게 내뱉었다. 요한과 에런이 함께 있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 요한이 에런과 사이좋게 마주 앉아 있는 꼴을 보자 죄다 쏴 죽여 버리고 싶었다. 표정을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셰어는 자신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요한 바네스 때문이다. 그는 너무 멍청하고, 헤프고, 다정하다. 세상에는 요한의 호의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잔디 위에서 당장 뒹굴기라도 할 것처럼 애인 옆에 딱 붙어 있던 에런이나, 실실거리며 끼를 떠는 에런의 애인이나 전부 다 쏴 죽여 마땅한 종자들이었다.
셰어는 그 요한의 호의를 이용하는 총살의 대상에 자신 또한 포함된다는 점은 쉽게 간과했다.
그때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해사하게 웃고 있던 요한이 뒤늦게 셰어를 발견했다. 웃느라 휘어져 있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새파란 눈에 햇살이 부스러지는 바다처럼 이채가 서렸다.
셰어는 그의 반짝이는 눈을 쏘아보았다. 무표정을 가장한 셰어의 얼굴에서 용케 뚱한 기색을 읽었는지 요한의 눈이 슬쩍 가늘어진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으레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눈인사를 하듯.
놀랍게도 그 얼굴을 보자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요한은 전처럼 바보같이 떠들며 웃는 대신 은근슬쩍 셰어가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정말 바보같다. 주어를 잃은 감상이 셰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럼 내일 얘기합시다.”
셰어는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일행에게 작별을 고했다. 싸운 적도 없는데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셰어는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해는 기울었으나 바깥은 아직 눈부시고 뜨거웠다. 내내 볕에 달아오른 머리가 뜨끈한 듯했다. 셰어는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딱히 그의 뒤를 따라붙는 발걸음 소리를 의식해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셰어는 이따금 걸음을 늦추고 뒤따라오는 이가 어디쯤 있을지를 가늠했다.
요한의 노란 자동차는 넓은 주차장에서도 눈에 띄었다. 셰어는 일부러 요한의 차 앞을 모르는 척 지나쳤다. 뒤를 따라오던 기척이 점차 분주해진다. 타박타박 이어지던 발소리는 탁, 탁, 탁으로 그리고 곧 쉼표도 없이 달려오는 소리로 바뀌었다. 조금 가쁜 숨소리가 다가온다.
굳게 다물려 있던 셰어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바로 뒤까지 쫓아온 발소리가 멎고, 요한이 셰어의 손을 잡았다. 셰어는 조금 비틀거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볕은 뜨겁고 머리는 어질어질했다. 당장 그늘로 달려가고 싶을 만큼 날이 뜨거운데도 열을 품은 손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너 왜 나 무시해?”
조금 심통이 난 듯한 말투로 요한이 쏘아붙였다. 뾰족한 말과 달리 그는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 뜨거운 손이 셰어의 이마와 뺨을 아무렇게나 더듬는다. 순수하게 열을 재려는 의도뿐인 손길이었다.
“이거 봐. 너 뜨겁잖아. 골프를 오늘 안 치면 죽나. 내가 진짜 어이가 없어서.”
“죽든 말든.”
사심 없는 손길에 그렇고 그런 생각이 든 것이 불쾌해 셰어는 괜히 퉁명스럽게 굴었다. 요한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속도 없는 사람처럼 웃는 얼굴이 그저 화창하기만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또 까칠하네. 아파서 힘들어?”
“에런 포츠랑 영화 준비한다며.”
“뭐야. 너도 에런이랑 친해?”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지 말지. 셰어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 숨어 있던 열이 단번에 치솟는지 머리가 뜨거웠다. 요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 있는 셰어를 몇 번인가 당겨 보다가, 셰어가 통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손을 놓아 버렸다. 그가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래? 하여간 이 바닥 좁다니까. 건너 건너면 다 아는 사이야.”
“내가 저런 거랑 친할 리가 있겠어.”
차갑게 끊어 내는 말에 조금 당황했는지 요한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아니면 말지 말을 왜 그렇게 해.”
“사이좋아 보이더라. 지나가는 길에 들른다는 게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에런 포츠 얘기였나 보지.”
“뭐래. 아닌 거 뻔히 알면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걔랑 잘해 보고 싶은지, 그 애인까지 끼워서 셋이 떡을 치고 싶은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아, 미친. 너 자꾸 더러운 소리 할래?”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요한의 목소리가 커졌다. 셰어는 누가 그 소리를 듣기라도 했을까 봐 급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요한이 셰어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번에는 셰어도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시동이 걸려 있는 차 안은 냉방이 돌아가고 있었는지 서늘했다. 셰어는 낯선 조수석에 앉아 어색한 손길로 안전벨트를 맸다. 운전은 주로 기사에게 맡기는 편이었기에 셰어는 앞좌석에 앉아 본 적이 드물었다. 특히 요한의 클래식 카는 다른 차와 달리 내부가 독특했기에 꼭 놀이공원의 놀이 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셰어는 갑자기 내려간 온도 탓에 소름이 돋아난 팔뚝을 쓸어내렸다. 요한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뒷좌석에 내팽개쳐 둔 재킷을 집어 셰어에게 던졌다. 얄팍한 재킷에서 요한의 향수 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그 냄새를 맡자 현기증이 이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셰어는 뻣뻣하게 굳어진 손을 움직여 머리 위에 덮인 재킷을 집어 내렸다. 고작 한 겹의 천이나마 몸에 걸치니 한기가 가셨다.
요한은 에어컨 바람을 줄이며 투덜거렸다.
“너는 진짜 성격도 이상하고, 취향도 이상하고, 맨날 못되게 굴고…….”
“끝이야? 다 씹었으면 출발해.”
“덜 씹었어. 넌 종일 씹어도 모자라.”
“네가 나 아프다며. 여기에 그냥 묘비 세워?”
요한이 셰어의 머리칼을 마구 헝클였다. 불시의 습격에 미처 대비할 틈도 없이 머리를 내어 준 셰어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요한은 엉망으로 흐트러진 셰어의 머리를 감상하듯 빤히 쳐다보더니, 대놓고 즐거워하는 티를 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손가락 반만큼 내려간 차창으로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넌 진짜 안 아팠으면 나한테 큰일 났어.”
“누가 할 소리를.”
셰어는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요한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툭 내뱉었다.
“어제 일 다 기억해?”
은근히 속을 떠보려는 의도가 너무 티가 났다. 셰어는 조금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흘렸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라고 죽일 듯이 몰아세울 때는 언제고 지금은 왜 살살 눈치를 본단 말인가.
그 은근한 눈빛을 의문스럽게 되받아치다 보니, 문득 지난밤의 기억 한 토막이 셰어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좋아.’
그 빌어먹을 사고. 그걸 대체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셰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슬며시 벌어져 있던 입술을 잘근거렸다. 성질대로 사납게 물어뜯는 바람에 딱지가 앉은 입술이 다시 찢어지며 비릿한 맛이 난다. 요한이 말하고 싶은 것이 그 일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래도 혹시 요한이 그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 한다면. 그 이후를 상상하자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팍삭 일그러진 셰어의 얼굴을 훔쳐보던 요한이 다시 물었다.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
태연한 거짓말이 셰어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다는 기억 안 나.”
요한의 입술이 비죽이는 것을 본 셰어가 고쳐 말했다. 무조건 반사 같은 거짓말이었다. 셰어는 긴장으로 욱신거리는 몸을 의식적으로 느긋하게 시트에 기대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아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흉내 낼 수 있었다.
“너 때문이니까 내 탓 하지 마.”
“그게 대체 왜 나 때문이야?”
요한이 억울하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여간 순진한 척은 잘해서 누가 보면 진짜 결백한 줄 알겠다.
“기억할 틈이나 좀 주든가.”
셰어가 목 위로 올라오는 옷깃을 내려 보이며 이죽거렸다. 울긋불긋한 자국이 전염병처럼 번진 목덜미가 드러난다. 옷깃으로 겨우 가려지는 곳부터 빨갛고, 파랗고, 진한 보라색으로 물든 순흔과 치열이 빼곡하게 남아 있었다.
앞으로 잘만 달리던 차가 갑자기 휘청했다. 요한은 벌게진 얼굴을 문지르며 핸들을 고쳐 잡았다. 그가 작게 욕설을 중얼거린다. 남의 목에 이렇게 난장을 쳐 놓은 사람답지 않게 순진해 보이는 반응이었다. 셰어는 옷깃을 바로잡으며 말했다.
“운전 똑바로 해. 나랑 같이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야, 너 일부러 그랬지. 너 진짜…….”
“일부러 그러는 건 너지.”
“내가 또 뭘?”
“가증스럽게 순진한 척하는 게 일부러가 아니면 뭐야.”
솔직히 요한의 빨간 얼굴은 좀 귀여웠다. 하지만 셰어는 죽어도 그 말은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정면을 바라보는 요한의 옆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단순한 요한은 셰어의 도발에 휘말려 그새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는 연신 헛웃음을 흘리며 허, 참, 나 같은 소리를 뱉었다.
“존나 어이없다. 뭐, 순진한 척? 가증스러워?”
뻥 뚫린 도로를 쌩쌩 달리던 요한의 차가 불쑥 튀어나온 다른 차를 피해 머리를 틀었다. 빠앙! 요한이 클랙슨을 울렸다. 몇 마디 말에 쉽게 여유를 잃은 요한이 험악하게 차를 몰았다.
셰어는 말없이 뜨끈뜨끈한 이마를 차창에 기댔다. 창밖의 풍경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어질어질하다. 멀미를 닮은 열과 메슥거림이 속에서 진탕으로 뒤섞였다. 아무래도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열을 품은 체온보다 더 뜨거운 요한의 손이 셰어의 뺨을 더듬었다. 그가 작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아프면서 성질머리는 진짜…….”
“치워. 어딜, 하라는 운전은 안 하고.”
셰어는 고개를 틀어 뺨을 덮은 손을 피했으나, 그것이 오히려 뭔가를 자극한 것인지 요한은 끈질기게 손을 뻗었다. 운전을 하느라 시선을 돌린 요한의 눈먼 손은 거침이 없었다. 굼실거리는 손가락이 뺨과 귀, 목덜미에 닿는다. 그 손이 너무 뜨거워 셰어는 요한도 열이 나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하지만 요한은 지나치게 쌩쌩했다. 그는 셰어를 집적거리는 동안 기분이 풀렸는지 아주 신이 나 있었다. 요한이 묘하게 귀에 익은 노래를 작게 흥얼거렸다. 잘 들어 보니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이 더운 날에 참 잘도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괜히 마음만 심란해졌다. 셰어는 떨떠름한 얼굴로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가 멋대로 만져 대게 내버려 두자 성가시게 굴던 손길이 되레 조심스러워진다. 요한은 무른 것을 만지듯 부드럽게 셰어의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의 이런 점이 문제다.
“넌 아무한테나 다 이래?”
셰어가 묻자 간질거리게 만져 대던 손길이 찔끔한 것처럼 떨어졌다. 셰어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요한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셰어는 눈을 뜨지 않아도 요한의 시선이 낯을 따갑게 콕콕 찔러 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는 게 뭔데?”
요한이 되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라면 질이 더 나쁘다.
왜 이렇게 다정한지 묻고 싶은데, 대답을 듣기가 두렵다. 요한이 당황한 얼굴로 ‘내가 다정해?’, ‘아무 의미 없는데.’ 따위의 말을 지껄이면 꾹꾹 눌러 온 것이 폭발하고 말 것이다.
“내킬 때마다 대 달라며.”
“야, 그건…….”
“모르나 본데, 그런 건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야.”
무슨 말을 하려던 요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목적이 몸뿐이라면 그것에만 충실한 것이 낫다. 괜히 연인이라도 되는 양 친절하게 굴 필요 없었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 수법이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요한에게 한 짓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몸만 취하는 것. 셰어는 새삼 자신이 저지른 짓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자각했다.
요한의 마음을 이용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좋아하는 티를 줄줄 내며 따를 때 처음 든 생각은 그를 쉽게 취할 방법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여태 배운 것이라고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것뿐이었기에,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소중한 것은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차의 진동이 점차 줄어들더니 이내 느리게 멈추어 섰다. 갓길에 차를 댄 요한이 셰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뭐가 문제야? 줄곧 시비 거는 것도 아프니까 그러려니 했어. 왜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서 사람 기분을 잡쳐.”
“말 못 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그러려고 만나는 사이에.”
요한은 성난 눈으로 셰어를 노려보았다. 씩씩거리는 숨이 점차 거칠어진다. 당장 차에서 내리라고 소리라도 칠 것 같았다. 요한이 손을 뻗었다. 셰어는 그 손이 자신을 후려치려는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한은 셰어의 뺨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차라리 한 대 치는 게 더 나을 뻔했다. 셰어는 요한의 시선을 피해 침울하게 가라앉은 눈을 밖으로 돌렸다.
띄엄띄엄 잡초가 돋아난 낮은 구릉 사이로 막힌 곳 없이 트인 도로가 뻗어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프리우스나 화물 트럭 따위가 휑한 도로를 달렸다. 바깥의 메마른 풍경은 우울했다.
요한이 셰어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렇게 얘기하면 좋냐?”
무시하려 해도 끈질기게 귀를 당기는 것이 꽤 아팠다. 셰어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틀었다. 요한이 어딘지 위험하게 들리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어, 내가 너한테 꼴릴 때마다 대 달라고 했지. 나도 안 까먹었어.”
셰어의 귀를 움켜쥔 손가락이 야릇하게 귓바퀴를 짓이겼다. 단단한 손끝이 살점을 뭉개자 셰어의 입술이 벌어지며 미지근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아도 열에 들뜬 몸은 민감했다. 셰어는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요한이 셰어의 목덜미를 감아쥐고는 입이라도 맞출 듯 가까이 다가왔다. 셰어가 덮고 있던 재킷에서 풍기던 향수 냄새가 난다. 재킷에 묻어 있던 향기와 달리 체열에 변질된 미들 노트가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차 세운 김에 하자면 여기서 대 줄래? 우리가 그런 사이라며.”
아무렇지 않게 받아쳐야 하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셰어는 요한의 손을 밀쳐 냈다.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따가웠다. 그 소리만큼 매서운 흔적이 요한의 손등에 남았다. 그는 빨갛게 맞은 자국이 남은 손등을 호 불며 투덜거렸다.
“이런 얼굴 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해?”
용서받지 못할 것 같다. 셰어는 요한에게 마음이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요한이 상냥하더라도 자신에게 그런 고통을 안긴 사람을 용서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 안의 공기가 유독 답답하게 느껴졌다. 숨이 막혀서 견딜 수가 없다.
셰어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다짜고짜 차 문을 열고 내리려는 그를 요한이 붙잡아 끌어당겼다. 셰어는 우악스럽게 팔뚝을 감아쥐는 손길에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몸살을 앓는 것처럼 피부 밑이 얼얼하게 아팠다.
요한은 셰어가 달아나기라도 할세라 조수석에 그를 거의 파묻을 듯 깔아뭉갰다. 무게를 실어 누르는 통에 차가 크게 덜컹거렸다. 셰어는 몸싸움을 하느라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말했다.
“놔. 내리고 싶어.”
“위험하게 여기서 가긴 어딜 가. 내가 진짜 널 어떻게 할까 봐 무서워?”
독이 오른 셰어가 요한의 머리칼을 쥐어 당겼다. 셰어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고 버티던 요한이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이를 갈았다.
그 화난 얼굴이 셰어를 안심시켰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상냥함보다는 화를 내는 게 더 나았다. 셰어는 턱을 치켜들어 요한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별 기교도 없이 정직하게 입술을 꾹 누르자, 요한은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잠잠해졌다.
단지 입술을 눌렀다 떼는 것뿐인데 정제되지 않은 호흡이 마구 뒤섞였다. 셰어는 뻣뻣하게 굳어 있는 요한을 밀어냈다. 그는 얼이 빠져 셰어가 미는 대로 떠밀렸다. 그 벙벙한 낯짝이 조금 귀여워 보여 셰어는 엉망으로 뻗친 요한의 머리칼을 슬쩍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손가락에 감긴다. 손을 떼기 아쉬웠다.
그러나 정작 요한은 셰어가 제 머리를 만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셰어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까짓 게 뭐 별거라고 네가 무섭겠어.”
무서운 건 요한이 다정하게 구는 것뿐이다. 셰어는 어정쩡하게 제 팔을 붙든 요한의 손을 떼어 냈다.
“답답하니까 좀 비켜. 집에는 알아서 갈 테니까…….”
“셰어.”
요한이 셰어를 다시 붙잡았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고요한 차 안에 그 긴장된 소리가 크게 울렸다. 셰어는 그를 뿌리치는 것도 잊은 채 입술만 달싹였다. 요한은 롤러코스터에 탄 아이처럼 반쯤은 들뜬 것 같기도 하고, 반쯤은 겁먹은 것 같기도 했다.
조각처럼 또렷한 요한의 입술이 열리며 살짝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나 좋아해?”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지금 당장 지구에 운석을 처박아 세상을 멸망시켰으면 좋겠다. 미처 감추지 못한 낭패감이 셰어의 눈 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요한이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뗐다.
들켰다.
전부 다 들킨 거다.
이제 끝이다.
요한이 곤란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린다. 셰어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표정만 봐도 지금 요한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가 뻔히 보였다.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구애를 거절해야만 하는 난감한 상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요한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어, 음, 미안…….”
“닥쳐.”
미안으로 시작하는 말 중에 좋은 말은 한 가지도 없다.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됐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죽여 버리기 전에.”
셰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이번에는 요한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한창 햇볕에 달아오른 도로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차 안과 바깥의 온도 차에 적응하지 못한 혈관이 수축하며 머리가 조여드는 것처럼 아팠다. 셰어는 신경질적인 손길로 골프장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을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로 좀 와 줘야겠어요. 내가 지금, 도로 위에 있는데…….”
예? 말수가 적은 기사가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가 듣기에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골프장에 있던 사람이 대뜸 고속 도로 한가운데에서 전화하다니.
말하다 보니 정말 어이없는 짓을 저지른 것 같아 셰어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요한을 불러서, 그의 차를 타서, 이 쓸모없는 감정을 들켜서. 아무 작정도 없이 하찮은 꼴로 서 있자니 깊은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요한의 차가 갓길에 바짝 붙은 채로 서행하고 있었다. 셰어는 옆까지 다가오는 차를 피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저 빌어먹을 노란색을 다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그냥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있었는데.
하필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서행 중이었기에 셰어는 요한의 얼굴을 꽤 오랫동안, 아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요한은 미안해하고 있었다.
셰어는 그를 피해 차도를 등지고 선 채 기계적으로 표지판에 쓰인 글자들을 읽어 주었다.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한 기사가 출발을 알렸다. 전화가 끊어지고도 셰어는 폰을 든 손을 내릴 수 없었다. 요한의 차가 아예 갓길에 서 있었다. 적어도 셰어가 먼저 떠나기 전까지는 그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아…… 좆같다, 진짜.”
셰어는 뜨거운 얼굴을 푹 숙였다. 지금 당장은 그저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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