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몇 번째인지 모를 알람이 울렸다. 요한은 간신히 알람을 껐다. 아무렇게나 폰을 내던지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요한은 졸린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12분, 방 안은 빈틈없이 커튼이 쳐져 있어 어두웠고 요한은 혼자였다. 요한은 1인분의 체온으로 데워진 침대를 더듬거렸다. 조금만 주위를 벗어나도 서늘한 이불이 지난밤 이곳에 있었던 사람이 더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렸다.
혼자 눈뜨는 아침은 참 별로다. 요한은 메시지함을 확인했다. 보고 싶은 메시지는 없었다. 어디에도 셰어의 흔적은 없었다. 요한은 다소 까칠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이 정 털리는 새끼…….”
일찍부터 잘도 일어날 힘이 있었던 모양이다. 진짜 약발이 떨어질 때까지 울고불고 매달리게 만들어 줬어야 했는데, 그 얼굴에 혹한 게 문제였다.
입으로 할 테니까 좀 봐 달라고. 지친 듯 축 처진 눈으로 그런 말을 하니 이상하게 정말 봐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 약한 소리는 절대 하지 않을 것처럼 굴던 남자가 틈을 보였기 때문일까. 바보같이 휘둘리고 말았다.
결국 요한은 약에 취해 혀도 무뎌진 셰어를 퍽 다정하게 어르고 달래 가며 그의 입에 파정했다. 셰어가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이제 쉬게 해 달라고 한 것이 고작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요한은 꼭 혼자 음란한 꿈이라도 진탕 꾸고 일어난 것 같았다. 셰어가 이렇게까지 멀쩡할 줄 알았더라면 그런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한은 평소보다 더 뚜렷한 윤곽을 드러낸 다리 사이를 이불로 풀썩 덮으며 욕설을 뱉었다.
“아침부터 사람 기분 참 좆같게 만드네.”
셰어는 정말 어제 일을 모두 잊었을까? 요한은 부루퉁한 얼굴로 폰을 붙들고 앉아 셰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는 대신 ‘회의 중이니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같은 메시지가 올 것 같았다. 하지만 상상과는 달리 셰어는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저편에서 작게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껄끄러운 목을 가다듬는 듯했다.
-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살짝 쉰 듯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괜히 등골이 다 저릿한 것 같아 요한은 갑갑한 바지 앞섶을 노려보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묻는 건 열받는데 목소리는 쓸데없이 듣기 좋았다.
“너 살 만한가 보다. 어디야?”
- 안 그럴 이유도 없지. 출근하는 중인데, 왜?
“이 시간에 출근을 한다고?”
-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아.”
그러고 보니 셰어의 옷은 반쯤 찢어지는 바람에 요한이 진작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의 옷을 벗겨 내던 것이 떠올라 요한은 모로 누운 채 뜨끈하게 달아오른 뺨을 베개에 비볐다.
그럼 지금은 뭘 입고 있는 거지? 설마 아무것도 안 입고 집을 나서지는 않았을 텐데.
요한의 시선이 침실과 이어진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자신의 옷을 빌려 입은 셰어가 상상된다. 드레스 룸의 옷 중 정석적인 셰어의 취향에 맞는 옷은 몇 가지 되지 않았으니, 그가 어떤 차림을 하고 있을지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분명 기본적인 형태의 하얀 셔츠에 가장 밋밋한 바지를 입었을 것이다.
속옷은 입지 않았겠지. 그 결벽적인 성격에 요한의 속옷까지 빌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별것도 하지 않았는데 바지 속이 아프도록 부풀었다. 요한은 조금 당황해 욱신거리는 다리 사이를 꾹 눌렀다. 당연하지만 그런다고 발기한 물건이 수그러들 리는 없었다. 맨살만 떠올려도 흥분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왜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멋대로 반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 셰어였다. 이미 그가 한 짓 때문에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무슨 짓이라도 한 건지 몸이 이상했다. 자꾸 셰어가 쾌감에 취해 흐릿해진 눈으로 애원하듯 자신을 바라보던 것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그때 셰어가 확인 사살을 했다.
- 네 옷 좀 빌렸어. 다음에 세탁해서 줄게.
“뭐? 왜, 그런 거, 돌려줄 필요 없어.”
당황한 나머지 쓸데없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요한이 입을 꾹 다물자 셰어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셰어는 곧 경직된 말투로 대답했다.
- 그래,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겠지. 멋대로 빌려 가서 미안하다.
셰어는 하지 않아도 될 사과를 했다. 요한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괜히 애먼 사람을 괴롭히는 듯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셰어가 세탁한 옷을 돌려준다면 그 옷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몸에 끌려 어영부영하다 보면 다시 예전처럼 질척거리는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요한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함부로 문지르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 바빠?”
- 그다지. 너는?
“나도 별로 바쁘지는 않을 것 같아. 급한 일은 거의 다 지나가서 다음 주까지는 느긋할걸.”
흐릿한 한숨 소리가 들린다.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 대던 요한은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셰어는 유독 어렵게 말을 꺼냈다.
-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서.
아무래도 셰어는 전화를 건 목적이 오로지 섹스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순간 누굴 쓰레기 취급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생각할 만한 얘기를 한 것은 자신이었다.
요한은 짜증스럽게 이불을 걷어차며 돌아누웠다. 그를 상처 입히고 싶었다. 얄밉게 구는 얼굴을 볼 때마다 그 뻔뻔한 낯짝이 구겨지는 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작 셰어가 싸움에 진 개처럼 꼬리를 내리고 순순하게 굴자 기분이 더러워졌다.
다른 놈이 이런 걸 요구했어도 그는 아마 순순히 응했을 것이다. 어차피 잊어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테니 아무렇지도 않게 그 야한 얼굴을 보여 줬겠지.
약에 취한 셰어를 발견했을 때의 끔찍한 기분이 다시 떠올랐다. 귀찮은 일을 처리하듯 얼른 해치우고 전부 잊어버리려 하다니. 요한은 그가 바라는 대로 고이 잊게 할 생각이 없었다.
“어제 일 기억나?”
- ……내가 그런 것까지 기억할 필요가 있나?
셰어는 여상하게 되물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감도 못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는 어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약을 했다고 털어놓은 것까지 싹 다 잊어버린 듯했다.
“그래서 약을 했어? 나랑 섹스하는 게 끔찍해서?”
- 그 피해 의식 좀 버려. 내가 약 하고 섹스하는 걸 좋아할 거라고는 왜 생각을 못 해.
“뭐래.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 너 그런 거 좋아해?”
- 글쎄, 너랑은 그런 적 없지.
개새끼, 하는 말마다 사람 열받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요한은 서늘하게 웃었다.
셰어는 거짓말쟁이다. 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약을 했다고 했으면서 오늘은 약에 취해 섹스하는 게 좋다고 뻔뻔하게 지껄여 댔다. 요한은 어느 쪽이 진실일지 가늠해 보다 말았다.
혼자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있었다. 여유 있는 척 거짓말을 할 여유도 주지 않고 몰아세우면 된다. 요한은 이번에는 그가 약한 척을 하더라도 속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늘 늦지 않게 집으로 와.”
- 넌 어제 좋았나 봐.
“말 돌리지 말고. 8시?”
- ……하아.
이번에는 선명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괜히 귀가 간질거리는 듯해 요한은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미리 말하는데, 나랑 섹스할 때 두 번 다시는 약 같은 거 하지 마.”
- 좋았다며.
“안 좋았어. 정신없는 놈 강간하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러웠어.”
사실 전부 안 좋지만은 않았지만 요한은 그렇게 얘기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셰어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는 한참 만에야 마지못해 대답했다.
- 그래, 알았어.
요한은 그 대답을 기다린 것처럼 전화를 끊었다. 통화하는 내내 어찌나 열을 올렸는지 온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피어오른다. 끝나지 않는 열병을 앓는 것 같았다.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정체 모를 감정의 찌꺼기가 남았다. 생각만 해도 화가 나고 답답한데 몸은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자꾸만 달아오른다. 요한은 몸속을 기어 다니는 기분 나쁜 열기를 잊으려 애쓰며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이게 뭘까? 그와 어쩌고 싶은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요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
“이사님, 괜찮으세요?”
벳시가 요한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잠시 멍해져 있던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보고를 받는 중이었던 것 같은데 자료의 페이지는 어느새 끝까지 넘어가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고작 섹스 한 번에 넋을 놓고 있다니. 요한은 자조하며 책상 위에 펼쳐 놓았던 자료를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채운다. 평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요한을 살피던 벳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20분 뒤에 미팅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프로젝트 미팅인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안 괜찮을 일이 뭐가 있어?”
“감독이 에런 포츠잖아요.”
요한은 삐딱하게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왜 아무 생각이 없을까. 감독이 그 에런 포츠인데.
V Pictures를 키운 것은 동화와 애니메이션이었다. 그중에서도 섬세한 작화를 바탕으로 한 고전적인 2D 애니메이션이 메인이었지만, 3D 애니메이션과 실사화 영화가 대세가 되면서 V Pictures 내부에서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가장 큰 대목 중 하나인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할 영화로 실사화 영화가 내정된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자연히 내부에서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10년 이상 2D 애니메이션에 집중해 온 직원들은 새로운 전략에 난색을 표했다. 그랬기에 부족한 경험을 포용할 만한 역량 있는 감독을 섭외하는 게 가장 우선순위에 놓였다.
“뭐…… 그래도 에런이 일은 잘하지.”
요한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예술병에 걸려서 그렇지 에런 포츠는 굵직한 상을 여럿 수상한 능력 있는 감독이었다. 변태적일 만큼 미장센에 집착하는 탐미주의자에 일할 때는 까다롭기로 유명했지만,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이든 번뜩이는 재기가 엿보였다.
“네, 근데 이사님 전 애인이잖아요.”
벳시는 요한의 속을 낱낱이 읽어 내려 작정한 것처럼 눈을 부라렸다. 그것이 그녀 나름의 걱정이라는 것을 알기에 요한은 그저 웃고 말았다.
3개월, 에런 포츠와의 연애는 딱 그만큼의 관계였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깊이 얽히지 않는 어른스러운 연애. 헤어진 다음 날 에런과 영화배우의 열애설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그와의 연애는 그럭저럭 괜찮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을 터였다.
그 새끼 분명 사귀는 동안에도 바람을 피운 게 틀림없다고 불을 토해 내는 요한을 달래기 위해 벳시가 함께 마셔 줘야 했던 술이 몇 병이던가. 벳시는 그때의 요한을 기억하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요한이라면 이렇게 쿨한 척을 하다가도 갑자기 돌변해서 에런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요한은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응, 내가 걔랑 잠깐 만나긴 했지.”
“같이 일하기 불편하시면 다른 감독을 섭외할 수도 있어요.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니니까요.”
“아냐, 걔가 일은 잘하잖아. 이대로 진행하는 게 낫겠어.”
“이사님, 진짜 괜찮으신 거 맞죠? 저 이제 깽값 협상하러 다니기 싫어요.”
사람을 대체 뭐로 보고. 요한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 진짜 괜찮다니까? 전 애인이랑 같이 일하는 게 뭐가 어때서.”
“워낙 안 좋게 헤어졌잖아요. 저 그때 이사님 진짜 잘못되는 줄 알았어요.”
“에이, 다 옛날 일인데, 뭐.”
요한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기억도 가물가물할 만큼 오래전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색과 향이 바랜 기억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분명 그때의 일은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의 감정은 남의 일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것도 한 일주일 뒤에는 멀쩡해졌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아무튼,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전 미리 미팅 준비 좀 해 둘게요.”
벳시는 겨우 안심한 듯 풀어진 얼굴로 요한의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를 웃는 얼굴로 배웅한 뒤 요한은 미팅 자료를 확인했다. 크리스마스, 가족 영화, 투자 지분, 프로젝트 일정 등등 복잡한 용어들이 요한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중에 에런 포츠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둔 요한의 폰이 진동했다. 셰어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저녁에 일이 생겨서 30분 정도 늦을 것 같다. 미안해.]
대체 왜 말끝마다 사과를 하는 건데. 요한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애정이든 원망이든 감정의 유효 기간은 오래전에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셰어를 생각할 때마다 정체 모를 불쾌감이 요한의 신경을 건드렸다.
예전과 다른 셰어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요한의 마음속에 커다란 파도가 일었다. 셰어가 변한 것 같다는 착각, 우리에게 또 다른 결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척박한 마음에서 잘도 자라났다. 더는 우리라는 말로 엮일 수 없는 사이인데도 몇 번을 잘라 내도 끈질기게 자라는 잡초처럼 셰어에 대한 생각은 끝없이 자라나기만 했다. 요한은 그것이 못내 불쾌했다.
[올 필요 없]
요한은 쓰다 만 메시지를 지웠다. 올 필요 없어. 그 간단한 메시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 * *
30분 정도 늦을 거라는 말과는 달리 셰어는 8시 17분에 벨을 눌렀다.
“일찍 왔네.”
“어쩌다 보니.”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한 것이 거짓인 양 그는 완벽한 모습이었다. 요한은 삐딱하게 문을 막고 선 채 셰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았다. 어제와 똑같이 꽉 조인 넥타이와 목 끝까지 잠근 단추가 눈에 들어왔다. 배타적이라는 말을 의인화한다면 정확히 문 앞에 서 있는 셰어의 모습이 될 것만 같았다.
혼자 일어난 아침처럼,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 꿈같기만 하다. 요한은 괜히 그의 넥타이를 툭 건드렸다. 손이 닿기도 전에 셰어의 어깨가 움찔했다.
“뭐야. 긴장했어?”
요한이 실실 웃으며 놀리자 셰어의 입술이 뻣뻣하게 치켜 올라간다. 그는 조금만 더 건드리면 당장 폭발할 것 같은 눈으로 요한을 쏘아보며 빈정거렸다.
“들어가서 얘기해. 난 보여 주는 취미는 없거든.”
“누구는 그런 취미 있대?”
“네 집 꼴을 봐. 이게 보여 주고 싶어서 작정한 게 아니면 뭔데.”
셰어는 요한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집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친근한 척 팔을 둘렀지만 손마디마다 힘이 들어가 있는 게 영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집이 대체 뭐가 어떻다는 말인가. 요한은 셰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담장도 높고 보안 시스템도 잘 깔려 있다. 이만하면 충분한데도 이상하게 보안에 집착하는 걸 보니, 셰어는 이런 데 유독 민감한 편인 듯했다.
문득 심술이 치솟는다. 혼자만 멀쩡한 얼굴로 남의 속을 벅벅 긁어 놓는 셰어를 쩔쩔매게 만들고 싶었다. 요한은 멋대로 안으로 향하는 셰어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의도가 분명한 팔에 안긴 셰어가 올 게 왔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미간을 구겼다.
뭘 했다고 벌써 한숨이야. 셰어의 골치 아프다는 듯한 표정을 볼 때면 요한의 안에서는 때늦은 심술이 자라났다. 진짜 골 때리는 짓을 하고 싶어진다. 요한은 셰어의 옆구리를 끈적하게 쓸어내리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어디 가? 벗어야지.”
손안에 붙잡힌 몸이 점차 굳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셰어는 서릿발 같은 얼굴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드디어 눈을 제대로 맞추었다. 복잡한 감상이 요동치는 그의 눈을 보자 요한의 뱃속에 미미한 희열이 번진다. 여유 있는 척 얄미운 말을 지껄이는 것보다 이렇게 화를 내는 게 더 보기 좋았다. 요한은 그의 옆구리를 조르듯 살살 긁어 댔다. 섬세하게 직조된 매끈한 섬유가 짧은 손톱에 긁혀 간지러운 소리를 냈다.
셰어는 간지럼도 타지 않는지 조금도 웃지 않는 눈으로 요한만 바라볼 뿐이었다. 요한은 그의 힐난하는 듯한 눈을 무시하며 독촉했다.
“빨리 벗어. 네가 어디에 약이라도 숨겨 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약 없어. 아침에 내가 알았다고 했을 텐데.”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느냐고.”
약은 그저 핑계였지만 셰어는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끈질기게 졸라 대자 셰어의 눈이 흔들린다.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요한의 손을 뿌리쳤다. 요한은 실망하지 않았다. 얼핏 냉랭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의 눈은 줄곧 요한의 기분을 살피고 있었다.
“알아서 벗을 테니까 침실로 가.”
요한은 대답 없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셰어가 입술을 꾹 다문 채 요한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턱없는 요구를 철회하기를 바라는 듯했으나, 요한은 팔짱을 낀 채 복도 벽에 등을 기댔다.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였다.
셰어의 미간에 새겨진 골이 한층 더 깊어진다. 그는 한숨을 쉬며 커프스 링크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서는 싫어.”
커프스 링크가 셰어의 손안에서 느리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요한은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대로 해갈되지 않은 욕구 때문인지 의미 없는 동작 하나하나까지 다 철저하게 계산된 유혹 같았다.
이번에는 그의 약아 빠진 위장에 속지 않을 것이다. 거칠어진 목소리가 요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네가 싫다고 하면, 그게 뭐?”
셰어는 날카로운 것에 찔리기라도 한 듯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요한은 손을 뻗어 셰어의 커프스 링크를 잡아 뜯었다. 금속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셰어.”
요한이 슈트 재킷 단추를 풀어내려 움켜쥐자 셰어가 그 손을 뿌리쳤다. 요한이 재차 손을 뻗기도 전에 셰어가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여태 머뭇거리던 게 내숭이었던 것처럼 셰어는 빠르게 옷을 풀어 헤쳤다. 그의 손에 벗겨져 나간 재킷과 넥타이, 셔츠가 바닥에 툭툭 떨어진다.
벨트를 푸는 손길이 거칠었다. 화가 난 사람처럼 벨트 버클이 부서져라 절그럭거리는 와중에 어디에 긁혔는지 그가 손가락을 움츠렸다. 가늘게 베인 상처가 난 손가락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놀란 요한이 셰어의 손을 붙잡았다.
“야, 벗으라고 했더니 왜 벨트랑 싸우고 있어.”
“놔 봐. 지금 벗고 있잖아.”
“가만히 좀 있어. 상처 좀 보게.”
“됐어.”
셰어가 요한의 손을 아무렇게나 떨쳐 내고는 다시 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애를 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이번에는 벨트가 잘만 풀어졌다.
걱정하게 만들어 놓고 되레 성질은. 요한은 어이가 없어 웃기만 했다. 그새 셰어가 피가 번진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안쪽이 희미하게 젖은 입술이 움직인다. 목이 탔다. 피를 훔쳐 내는 입술은 꼭 다른 것을 연상시켰다.
그린 듯 섬세하게 다듬어진 몸에 붉은 멍울이 점점이 박혀 있다. 요한이 남긴 흔적이었다. 목덜미와 등에 집중된 크고 작은 순흔이 지난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는 듯했다.
셰어가 벗어 놓은 옷가지들이 주위에 허물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는 발에 걸리는 옷을 아무렇게나 걷어차 밀어내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벗었는데, 또 뭐.”
셰어는 슬쩍 가늘어진 눈으로 요한의 티셔츠와 트레이닝팬츠를 훑어보았다.
“벗겨 줘?”
이미 셰어의 머릿속에서는 그 일이 일어나고 있는 듯했다. 복잡한 감정이 얽혀 혼탁해진 그의 눈을 보자 갈증이 일었다.
요한은 셰어의 가슴을 감싸 쥐었다. 요한의 손보다 체온이 낮은 셰어의 흉곽이 움찔거렸다. 반듯한 쇄골 아래 도톰하게 융기한 근육을 손바닥 전체로 감싼 채 지분거리듯 쓸어내리자, 빳빳해진 돌기가 손바닥에 쓸렸다. 셰어의 입술 안쪽과 같은 옅은 색이었다.
셰어는 요한의 손이 닿자 불에 덴 것처럼 벽 쪽으로 물러났다. 요한은 그와의 거리를 단번에 좁히며 셰어의 어깨를 쥐고 그를 벽을 마주 보도록 돌려세웠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떠밀린 셰어가 벽에 이마를 찧었다.
“진짜 짜증 난다, 너.”
그가 짜증스러운 한숨을 흘리며 벽을 제대로 짚고 섰다. 많이 시켜 봐서 잘 아는 건지, 그는 요한이 원하는 자세를 제대로 취하고 있었다. 그게 은근히 속을 뒤집어 놓았다.
“벌써 짜증 나면 어떡해. 너만 힘들게.”
요한은 셰어의 뒤에 붙어 선 채 그의 입을 손으로 막듯 덮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열리며 그의 입술을 가로지르는 요한의 손가락을 물었다. 이가 중지의 손마디를 잘근거렸다.
그의 도발에 휩쓸려 요한이 셰어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쑤셔 박았다. 뜨겁고 축축한 입 속을 함부로 헤집으며 손가락을 쑤셔 박자, 어디를 잘못 건드렸는지 셰어가 얕게 기침했다. 요한의 손가락이 혀를 누르며 입 안 깊숙이 파고들었다. 구역을 참듯 셰어의 목구멍이 간헐적으로 조여들었다. 덩달아 좁아지는 입 안이 요한의 손끝에 닿았다.
“약은 어떻게 했어? 저번에 보니까 주사한 것 같지는 않던데. 먹었어?”
셰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잘한 것을 칭찬하려 뭉클한 혀를 희롱하듯 굴리자 그의 혀가 곧 요한의 손가락을 밀어내며 뻣뻣해진다. 요한은 순순히 손가락을 빼 주었다. 타액에 흠뻑 젖은 손가락이 빠져나오며 셰어의 입술을 적신다. 그는 침을 흘리는 게 싫은지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제 입술을 훔쳤다.
새침하게 굴기는. 요한은 셰어의 목덜미를 깨물며 그를 벽에 가두듯 바짝 밀어붙였다. 축축한 손가락이 셰어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셰어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세게 발버둥 쳤다.
뾰족한 팔꿈치가 요한의 갈비뼈를 찔렀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그가 정신을 차리고 힘을 빼지 않았더라면 뼈가 부러졌을 듯했다. 요한은 욱신거리는 몸을 셰어에게 기대며 엄살을 떨었다.
“아, 뼈 맞았어. 너무해. 나 진짜 아파.”
“솔직히 네가 맞을 짓을 했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때린 게 미안했는지 셰어는 주먹을 쥔 손을 벽에 지그시 눌러 붙였다. 요한은 그의 귀 아래에 입술을 묻으며 꽉 다물린 곳을 젖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또 때리면 안 돼.”
불쑥 치미는 거부감을 억누르기 버거워하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셰어의 손등에 불룩한 핏줄이 파랗게 드러난다. 어찌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셰어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빨아 줄까? 입에다 해 줘.”
진짜 빨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빨고 싶다고 하면 손가락을 빼 줄 줄 알고 그러는 것이 뻔했다. 셰어는 상대를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것에 능숙했다.
누가 또 속을 줄 알고. 요한은 그 속내를 익히 짐작하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지껄였다.
“네가 좆 빠는 데 환장한 건 알겠는데 좀 기다려 봐. 확인할 게 있으니까.”
일부러 천박한 단어를 뱉자 셰어가 무서운 눈으로 요한을 노려보았다. 눈빛으로 사람을 찢어 죽일 수 있다면 요한을 수십 갈래로 찢어 놓았을 법한 눈이었다.
아무래도 셰어는 제 입으로 음담패설을 할 때는 아무렇지 않아도, 반대로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불쾌한 모양이다. 별것도 아닌 말에 파르르 떠는 것이 볼만했다. 요한은 그와의 유치한 신경전에서 우위를 점했다는 것이 그저 유쾌했다.
요한의 손가락이 비좁은 입구를 밀고 들어갔다. 손끝만 넣어도 꽉꽉 물어 대는 통에 뭘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안쪽을 둥글게 휘젓듯 벌리자 셰어의 허리가 떨렸다. 그는 날카롭게 신경을 저미는 감각을 잊으려는 듯 애써 입을 열었다.
“뭘, 확인한다고.”
“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약을 했다며.”
셰어의 숨이 긴장으로 잦아들었다.
“근데 오늘은 약 하고 섹스하는 게 좋다고. 입만 열면 거짓말인데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불긋한 순흔이 남은 목덜미에 요한이 치열을 남겼다. 제법 아프게 물어 대는데도 셰어는 얌전히 목을 늘어뜨린 채 고통을 참을 뿐이었다. 그것이 꼭 제 죄를 알고 그러는 것 같아 요한은 기분이 더 나빠졌다.
나쁜 말을 하고 싶다. 셰어를 상처 입히고 싶다. 요한은 이렇게 변해 버린 자신처럼 셰어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생각했다.
“혹시 여기다 약을 숨기고 날 속이는 건지도 모르지. 너 보기보다 꽤 헤프잖아.”
그 순간 셰어의 주먹이 벽을 쳤다. 벽이 울리며 속이 빈 둔탁한 소리가 넓은 집 안에 울렸다. 셰어는 자신이 한 짓에 당황한 듯 잠시 얼어 있더니 이내 허물어지듯 벽에 이마를 기댔다. 꽉 움켜쥔 주먹의 마디가 쓸려 붉게 까져 있었다. 요한은 어쩐지 그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재미있어?”
쥐어짜듯 흘러나온 목소리는 짧았다. 붉게 까진 상처처럼 갈라진 목소리였다.
상처받았을까? 요한은 잇자국이 남은 셰어의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셰어가 상처받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요한은 이 기이한 충동을 멈출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미 점화된 충동을 위해 준비된 것은 오직 불길을 키울 촉매뿐이었다.
“확인을 하든 뭘 하든 네 마음대로 해.”
셰어가 거칠게 쏘아붙였다. 그의 목덜미가 불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요한의 손가락이 그의 안으로 느릿하게 진입하는 내내 셰어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어제의 정사로 부어오른 비부는 충분히 젖어 있는 요한의 손가락을 하나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했다. 중지의 중간까지도 겨우 삼킨 채 손가락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조여 대는 바람에 요한은 한숨을 쉬며 셰어의 귀에 입을 맞추었다. 예민한 귀에 숨이 닿자 셰어는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요한이 셰어의 귀를 덧그리듯 핥았다.
“힘 좀 빼 봐. 이러면 나 아무것도 못 하잖아.”
“흣…… 답답하면, 네가 대 주든가. 아, 으읏…… 침실로, 가.”
“진짜 약 없어? 너무 조이는데. 정 힘들 것 같으면 먹게 해 줄게.”
요한은 셰어의 속을 떠보려 다정한 척 속삭였지만 셰어는 연신 고개만 저어 댔다. 없어, 발작적으로 속삭이는 목소리는 이미 넋이 반쯤 나간 듯 혼곤했다.
“없어? 진짜 없어?”
손가락이 깊게 파고들자 셰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떨기 시작했다. 손끝이 마침 부풀어 오른 몸 안쪽의 예민한 곳을 비벼 대고 있었다. 좁은 몸속이 손가락을 우물거리며 조여 댄다. 당장이라도 그곳에 다른 걸 쑤셔 박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요한은 느리게 셰어의 몸속을 더듬었다.
예민해져 있는 내벽은 요한의 입맛에 딱 맞을 만큼 다루기 쉬웠다. 처음에는 아프도록 물어 대지만 조심스럽게 잘 만져 주면 연약한 곳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지점 주위를 애태우듯 자극하다 보면 셰어가 다른 것을 바라듯 갈망 어린 숨을 흘렸다.
“없어. 약, 정말 없어. 여기서 이러지 말고…….”
“왜? 난 여기서 하고 싶은데. 여기서 한 번만 싸고 가서 마저 하자.”
“미친 새끼, 안에 싸면 침실까지 어떻게…… 흐, 아, 안 돼.”
거듭되는 거절에 요한은 빈정이 상했다. 요한은 거칠게 손을 움직였다. 가뜩이나 민감한 곳을 함부로 짓이기듯 빠르게 박아 대자 젖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밑에서 젖은 소리가 크게 울린다. 셰어의 허리가 보이지 않는 것에 짓눌린 것처럼 기울었다. 그 때문에 엉덩이가 자꾸 아래로 미끄러져 삽입이 깊어지자 셰어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바로 세우려 애쓰며 벽을 긁었다.
“아읏, 아파. 조금만, 천천…… 히, 아!”
“아, 너무 좁아. 어제처럼 네가 좀 벌려 볼래?”
“할 틈이나 주고, 흣…… 내가, 할…… 아, 잠깐, 빼 줘.”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할딱이고 있으면서, 셰어는 요한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진짜 제 손으로 직접 벌리기라도 하려는지 한 손을 등 뒤로 뻗었다. 길고 곧은 손가락이 붉게 달아오른 채 요한의 손가락을 삼키고 있는 입구를 더듬었다.
요한은 그 꼴을 보고 딱 눈이 돌아갈 만큼 열이 올랐다. 이렇게 순순하게 구는 척해서 또 뭘 어떻게 하려고. 요한은 그를 응징하듯 셰어의 팔뚝을 그대로 꺾어 누른 채 안을 쑤시던 손가락을 콱콱 쑤셔 박았다.
“야, 네가 하긴 뭘 해. 어? 평소에는 더럽게 말도 안 들으면서, 왜 이런 건 존나 잘 듣는 척해?”
“흐윽, 으, 흣, 그만…… 그으, 만.”
“하아……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너.”
“악, 아, 왜, 갑자기, 흐으…….”
요한은 숨을 고르며 손가락을 빼냈다. 열이 뻗쳐 눈앞이 아찔했다. 헐렁한 트레이닝팬츠 앞섶을 거칠게 끌어 내리자 이미 완전히 발기해 있던 성기가 퉁 하고 튕겨 나왔다. 요한은 묵직하게 끄덕거리는 것을 한 손에 쥐고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붙잡고 있던 셰어의 팔뚝을 그의 등에 결박하듯 단단히 짓눌렀다. 한쪽 팔이 뒤로 꺾인 채 붙들려 선 셰어의 숨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들어가서 해.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대로 좆을 쑤셔 박을 듯 엉덩이 사이에 선단을 문지르자, 셰어가 몸을 비틀어 피하며 급하게 말을 이었다.
“침실로 가는 길에, 거실 창이…….”
“뭐?”
“밖에서 다 보인다고. 그런 거, 싫어. 여기서는 싫어.”
집은 벗고 다녀도 될 만큼 따뜻한데도 셰어는 추위에 떠는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요한은 소름이 돋아난 셰어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피식피식 웃고 있는 입술을 눈치챘는지 셰어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진다.
미끈거리는 선단이 삽입을 위해 입구를 몇 번이나 문질렀지만 단단히 다물린 곳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연방 좆이 미끄러지기만 하는 곳에 질척한 선액이 덧발린다.
“왜? 내 걸 질질 흘리고 다니는 꼴을 들킬까 봐 무서워?”
“닥쳐.”
“그런 게 무서우면 약은 어떻게 했어. 내가 취한 널 어떻게 할 줄 알고, 겁도 없이.”
셰어가 크게 몸을 비틀었다. 그의 들숨과 날숨까지 떨리고 있었지만 셰어는 겁을 잊은 사람처럼 날뛰었다. 요한이 꺾은 팔이 비틀리며 어깨가 빠질 듯 둔탁한 소리를 냈다.
요한은 체중을 실어 셰어를 벽으로 세게 밀쳤다. 불시에 벽에 부딪힌 셰어가 혀를 깨무는 바람에 비릿한 침을 삼켰다. 벽에 부딪힌 곳이 죄다 욱신거린다. 설움에 뜨거워진 눈을 감으며 셰어가 차갑게 이죽거렸다.
“하아…… 바이올렛을 어찌나 애타게 찾던지. 난 또 대단히 특별한 걸 원하는 줄 알았는데, 너라고 딱히 특별할 건 없네.”
“함부로 지껄이지 마. 지금 분위기 파악이 안 돼?”
“어쩔 건데. 그래 봤자 박고 싸면 그만이지.”
그의 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이성의 끈 하나마저도 툭 끊어지는 듯했다.
칼처럼 위협적인 성기가 셰어의 몸을 가르고 파고들었다. 셰어는 박제된 나비처럼 벽에 짓눌린 채 떨었다. 어떻게든 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서 달아나고 싶어 발뒤꿈치가 절로 들렸다.
요한은 그 미약한 저항을 손쉽게 봉쇄하며 허리를 쳐 올렸다. 반쯤 박힌 좆을 끊어 먹을 듯 사정없이 조여 대는 곳이 억지로 벌어진다. 이런 가혹한 짓은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강간하듯 안으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는데, 지금은 이 짓을 그만둘 마음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 끔찍했다. 셰어를 상처 입힐 때면 동시에 자신에게도 상처가 새겨지는 듯했다. 요한은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셰어의 온몸이 고통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요한은 그를 꽉 끌어안은 채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주 느린 움직임을 이어 갈수록 꾹 깨문 셰어의 입술 사이에서 작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고작 몇 번도 채 움직이지 않았을 때 셰어가 말했다.
“약, 먹게 해 줘.”
요한이 그를 끌어안은 채 움직임을 멈추었다. 셰어는 갈라진 목소리로 작게 덧붙였다. 재킷 안주머니에, 약이.
요한은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조금 웃었다. 그 진동이 이어진 몸을 통해 셰어에게도 느껴지는지 그가 몸을 움츠렸다.
“아, 그러니까 약을 가지고 왔다는 거네. 나한테는 없다고 했으면서.”
셰어는 대답 없이 가쁜 숨만 흘렸다.
거짓말쟁이,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요한은 셰어의 팔을 놓아주고는 경련하는 그의 한쪽 다리를 팔뚝에 걸쳐 들었다. 셰어가 저릿한 팔을 주무를 새도 없이 다리가 활짝 벌어지며 삽입이 더욱 깊어졌다. 날카로운 비명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 아, 아파, 요한. 흐으…… 너무 아파.”
“너 진짜, 사람 돌게 만든다.”
“악! 아으읏, 약…… 먹게 해 준다고…….”
“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약 못 먹어.”
요한은 셰어의 상태를 조금도 봐주지 않고 욕심껏 움직였다. 자꾸만 아래로 흘러내리는 셰어의 다리를 고쳐 안자, 피가 섞여 불그레한 색으로 물든 체액에 젖은 성기가 좁은 곳을 뭉개듯 박아 대는 것이 훤히 드러났다. 붉게 충혈된 입구는 주름 하나 없이 늘어난 채 겨우 험악하게 생긴 성기를 삼키고 있었다.
요한이 어디를 보는지 알았는지 셰어의 엉덩이가 긴장했다. 요한은 그의 볼기를 장난처럼 찰싹 때리며 언젠가 셰어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속삭였다.
“힘 빼야지. 더 찢어 놓기 전에.”
셰어의 신음에 희미하게 울음기가 섞이는 것이 달콤하게 들렸다. 그는 우는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푹 숙인 채였으나, 요한은 셰어의 턱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볼 수 있었다.
가엽게도, 엉망으로 흐트러진 얼굴로 울고 있겠지. 약에 취해 흐트러진 셰어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한은 빠르게 치솟는 사정감에 낮게 신음하며 셰어를 끌어안았다. 요한은 셰어가 자신의 손에 의해 망가지기를 바랐다. 그 공고한 가드를 내리고 여린 내면을 드러냈으면 했다.
열감이 번져 화끈거리는 내벽에 사정액이 뿌려졌다. 그 감각을 느끼기라도 하는지 셰어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가 흐릿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요한은 눈물로 흠뻑 젖은 셰어의 얼굴을 억지로 비틀어 축축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셰어는 괴롭게 눈썹을 찌푸린 채 눈을 뜨지 않았다.
요한은 억세게 이를 악문 셰어의 입을 벌려 뜨겁게 열이 오른 입 안을 핥았다. 용케도 아직 성깔이 죽지 않았는지 셰어가 요한의 혀를 깨물려 했으나, 그의 시도는 요한에 의해 쉽게 저지되었다. 요한은 반쯤 발기하다 만 셰어의 성기를 세게 움켜쥐었다. 셰어의 입술이 덧없이 벌어졌다.
속상하게 이건 왜 서다 말았을까. 고민하는 요한을 셰어가 노려보았다. 눈물이 번진 눈매는 매서웠으나, 요한에게는 그저 요염하게만 보였다.
“악…… 아, 흐으…… 아파. 놔.”
“셰어, 오늘은 약도 안 했으니까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야 해.”
요한은 상냥하게 셰어의 아랫입술을 빨았다. 아무래도 혼자만 못 느끼면 서운하니까, 그를 뒤만 쑤셔 줘도 질질 쌀 수 있는 몸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