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6)

* * *

우연이 겹치면 필연이라지만 요한은 자신과 셰어 사이에 연이 있다면 오로지 악연뿐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 많고 많은 소아암 병동 중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그 많은 기업 중에, 하필 토요일 그 시간에 BNB 산업과 V Pictures는 같은 자선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요한은 연단에 서서 매끄럽게 연설하는 셰어를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가장 후한 액수를 기부한 기업의 총수라는 것이 셰어를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나게 했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요한이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자 벳시가 요한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짓을 했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수상한 일이었다. 서부의 산업 지구에 위치한 많은 기업 중 겨우 30여 개 기업만이 참석한 자선 행사였다. 규모도 크지 않아 매년 고만고만한 기업들이 참석하는 행사에 하필 BNB 산업이 갑작스럽게 합류할 이유는 없었다. 누군가의 변덕이라면 모를까.

“아니, BNB가 여기를 왜 와. 진짜 이상하지 않아?”

“이사님, 들리겠어요. 그리고 BNB 산업이 참여 못 할 이유가 있나요? 같은 산업 지구에 있는 기업인데 올 수도 있죠. BNB는 그룹사 차원에서 기부도 얼마나 많이 하는데요.”

“너는 어떻게 그런 걸 그렇게 잘 아냐? 이직하려고 공부했어?”

“쉿, 제발, 이사님. 조용히 좀 하세요.”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는데도 벳시는 계속 쉿 소리를 내며 요한을 들들 볶았다. 요한은 속이 답답해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전 애인이라고 하기도 뭐한 개자식이 뭔가 수작을 거는 것 같은데 함부로 얘기할 수도 없으니 제 속만 답답했다.

“이래서 아무 데나 사인을 하는 게 아닌데.”

요한은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셰어가 그 비밀 유지 각서를 들이밀자마자 박박 찢어 버릴 작정이었다. 아니, 그 전에 처음부터 셰어에게 치근덕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애초에 바이올렛도 찾지 않을 것이다.

제법 비장한 요한의 혼잣말이 심상치 않게 들렸는지 벳시가 요한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사고 치셨어요? 어디에 사인하셨는데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사님, 똑바로 말씀해 보세요.”

손마디마다 힘이 들어간 그녀의 억센 손이 요한의 어깨를 감싸 쥔 순간이었다.

삐익, 마이크가 날카롭게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제각각 귀를 틀어막은 사람들이 단상 위에 선 셰어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셰어가 들고 있던 마이크가 단상에 세게 부딪친 것이다.

요한은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단상 위에 선 셰어가 요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한을 싸늘하게 노려보던 그는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 짓더니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아, 저 또라이 새끼 진짜…….”

무심코 중얼거리던 요한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는지 몇몇 사람들이 피식피식 웃는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낯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벳시가 괜히 손에 든 자료를 갈무리하며 이를 갈듯 속삭였다.

“저 이사님이랑 다시는 여기 같이 안 올래요.”

요한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귀를 아무렇게나 문지르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유감스럽게도 자신을 보며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웃는 셰어를 본 탓에 담담한 척하기가 쉽지 않았다. 요한은 속으로 셰어를 욕하며 소아암 병동 소개 브로슈어에 의미 없는 동그라미를 연이어 그려 댔다.

간단한 연설을 포함한 식순이 끝난 뒤, 자유로운 분위기로 담소를 나누는 이들이 제각각 무리를 지어 흩어졌다. 그들 중 단연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은 역시 셰어의 주위였다. 요한은 일찍이 잔을 챙겨 무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벳시가 그를 뒤따르며 훈계했다.

“이사님, 가서 얘기를 나누셔야죠. 저희 보도 자료 사진 한 방 찍으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거든요.”

“벳시, 중요한 건 실적이라며. 난 이런 잡스러운 일보다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할래.”

“그 중요한 일이 술 마시는 거예요?”

할 말이 없었다. 요한은 결국 입에도 대지 못한 술잔을 내려놓았다. 끼리끼리 모여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살피던 요한은 그중에 가장 사람이 적당히 있으면서도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은 무리를 찾았다.

소아암 병동 측의 무리였다. 병원장과 기조실장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셰어의 옆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환우 대표로 감사 인사를 한 어린아이와 아이의 보호자는 몇몇 병원 측 인사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안녕?”

요한은 하얀 뿔이 두 개 솟은 털모자를 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요한을 닮은 아이의 새파란 눈이 희미한 경계를 품은 채 그를 바라보았다. 경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는 금세 홀린 듯 몽롱하게 풀어진 얼굴로 요한을 보았다. 살굿빛으로 달아오른 아이의 뺨을 보며 요한이 웃었다. 처음에는 그저 마음이 편해지고자 선택한 쪽이긴 했으나, 사실 요한에게도 고작 열 살도 되지 않았을 어린 환우의 연설은 제법 인상 깊었다.

나는 저만할 때 뭘 했더라. 요한은 도통 기억나지 않는 과거를 회상하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모자가 근사하네. 이름이 트리니티라고 했었지? 나는 요한.”

“으응.”

트리니티는 쑥스러운 듯 입술을 달싹이다 급히 말을 이었다.

“안녕, 하세요.”

감사 인사를 할 때는 제법 씩씩하더니 뜻밖에 낯을 가리는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아이의 시선이 요한의 슈트 재킷에 붙어 있던 코르사주에 멎었다. 하얀 꽃으로 만든 코르사주는 행사를 위해 주최 측에서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다. 하지만 환우 대표로 참석한 아이는 받지 못했을 터였다.

요한은 달고 있던 코르사주를 떼어 내 트리니티에게 건넸다. 이름 모를 꽃이 달린 코르사주를 받아 든 트리니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연설 멋있었어. 나보다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트리니티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작고 말라서 어려 보였지만 아이는 보기보다 훨씬 성숙했다. 말투는 침착하고 공손했으며 또래 아이들처럼 까불거리지 않았다. 많은 시련이 아이를 단련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요한은 괜히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달래며 웃었다.

“너처럼 용기 있는 아이가 나오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영화를 만들어요?”

트리니티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높아졌다. 옆에 서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처럼 희미하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 애가 영화를 좋아하거든요. 하루에 꼭 한 편씩은 본답니다.”

“매일 같은 영화만 보는걸.”

칭찬 같은 말이 쑥스러웠는지 아이가 괜히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벳시마저도 슬며시 웃고 말았다. 요한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맨날 봐도 안 질린다니 대단한데. 나도 꼭 그런 영화를 만들게. 매일매일 봐 줘야 해.”

“……생각해 보고요.”

트리니티는 샐쭉하게 대꾸했다. 사심 없이 유쾌한 웃음이 퍼졌다. 요한은 그 평화로운 웃음의 파동 속에서 마음이 뿌듯하도록 치미는 만족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즐거운 얘기를 나누던 중이셨습니까?”

불청객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많은 사람을 어떻게 떨치고 왔는지 셰어가 홀로 요한의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뚝 선 그 모습에서 이전에 황급히 일행을 떠밀며 사라질 때와 달리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결기가 보였다.

대체 뭘 하자는 걸까.

요한이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리자, 애가 탄 벳시가 유려하게 웃는 얼굴로 나섰다.

“영화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답니다. 저희 이사님이 일에 항상 열정이 넘치셔서요.”

“요한이, 그렇군요.”

셰어는 이상한 부분에 강세를 두며 은근슬쩍 요한의 옆으로 다가갔다. 요한은 거의 몸이 부딪힐 만큼 가까워진 그를 노려보았다.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그 미소가 얄미웠다. 집요하게 상대를 바라보는 눈을 쿡 쑤셔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요한은 그와의 거리를 벌리려 했다.

그러나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셰어가 친근한 척 요한의 어깨에 팔을 두른 것이었다.

“네가 항상 열정이 넘치긴 하지.”

대뜸 각별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요한은 저만큼 당황한 사람들의 얼굴을 황급히 살폈다. 포커페이스를 잃은 벳시의 눈이 연신 물음표를 그리고 있었다.

미친놈이 왜 친한 척이야.

요한은 셰어의 손목을 억세게 쥐며 억지웃음을 흘렸다. 이가 바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어, 알아주니 감사하다.”

분명 이를 가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셰어는 흔들림 없이 곱게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미지근한 숨이 요한의 귓가를 간질였다.

“우리 얘기 좀 해야지.”

요한은 팔꿈치로 셰어의 옆구리를 제법 아프게 찍어 올렸다. 얼핏 보기에는 장난 같아 보이나 힘을 실어 쳤으니 멍이 들 것이 분명했다. 요한은 진심으로 셰어의 옆구리에 주먹만 한 멍이 남기를 바랐다. 앓는 소리를 겨우 삼킨 셰어가 좀 전보다 더 삐딱하게 치켜올린 입술을 미세하게 움직여 속삭인다.

“죽고 싶어?”

“그건 내가 할 말이고. 잠깐 얘기 좀 하자.”

요한은 그의 겁박을 못 들은 체하며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셰어의 눈 속에서 사금 같은 날카로운 빛이 위협적인 기세로 반짝였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친근하게 엉겨 있는 모습은 뭇 사람의 흥미를 끌었다.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요한은 어깨와 등을 무겁게 짓누르는 셰어의 팔을 쥐어뜯듯 떼어 내고는 입구를 눈짓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한 벳시가 설명을 독촉하는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지만 긴히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요한은 대신 트리니티에게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 트리니티.”

트리니티는 발간 얼굴로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를 따라 생글거리며 손을 흔드는 요한의 옆구리를 셰어가 쿡 찔렀다. 조금 전의 앙심을 담은 것인지 묵직한 통증이 옆구리에서부터 번진다. 셰어는 금세 뾰족해진 요한의 눈을 마주 보며 웃었다. 어딘지 심술궂어 보이는 미소였다.

“그만 흘리고 나가자고.”

“애잖아. 소아 성애자 변태 새끼도 아니고 흘리긴 뭘 흘려.”

요한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벳시에게 입술만 움직여 괜찮다는 뜻을 전하고는, 어깨로 셰어를 밀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세차게 떼밀린 셰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요한은 사람이 적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이 위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넌 사람 없는 데를 기가 막히게 잘 찾네.”

삐딱한 말에 습관처럼 비상구 문을 열어 준 요한이 셰어를 돌아보았다. 셰어는 평소처럼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유독 어둡게 가라앉은 두 눈이 섬뜩했다. 요한은 셰어의 등을 거칠게 밀쳤다.

“그게 뭐? 닳는다. 눈 돌려.”

셰어가 비웃는 소리가 울렸다. 비상계단은 사람이 없었지만 소리가 크게 울렸기에 요한은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너 여기 뭐 하러 왔어?”

“이상한 말을 하네. 자선 행사에 왜 왔냐니. 좋은 일 하러 왔지. 설마 내가 너 하나 보자고 그 돈을 기부했으려고.”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요한은 착각한 것이 민망해 괜히 이죽거렸다.

“네가 오죽 스토커처럼 굴어야지. 사람 뒤 따라다니면서 열받게 만든 게 어디 한두 번이야?”

언젠가 셰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었다. 이번에는 되받아치는 말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매번 독을 품고 덤벼 대던 것이 남 일인 양 셰어는 속 모를 얼굴로 요한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은 요한을 부위별로 낱낱이 해체하는 것처럼 집요한 면이 있었다. 속눈썹을 올올이 헤아릴 듯 관찰하던 시선이 매끈한 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간다. 턱 아래로 이어진 목덜미를 향하던 눈길이 살짝 열려 있는 입술 위로 기어올랐다.

눈길이 닿은 곳마다 피부가 따끔거리는 듯한 감각이 피어오른다. 요한은 마비된 것처럼 얼얼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속을 뒤집어 놓는 소리를 지껄이지 않는 셰어는 그림처럼 근사했다. 외양만은 그 매서운 혀끝을 잊을 만큼 그럴듯했다.

예쁜 게 다가 아니다. 이 개수작에 두 번은 속지 않을 것이다.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자 참을 새도 없이 마른침이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소리를 셰어도 들었는지 그의 눈이 금세 휘어진다. 셰어는 사심 없이 웃고 있었다.

요한은 그 웃음이 낯설었다. 셰어는 늘 사람을 꼬여 낼 작정을 한 사람처럼 요요하게 웃었다. 뇌리에 선명하게 인이 박일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이였으나 정작 생각 없이 웃는 얼굴은 기억과 달랐다. 그가 수수한 웃음기가 남은 입술로 말했다.

“고집부리지 말고 내 말 들어, 요한. 헤어지겠다느니 하는 개소리는 이제 집어치워. 너 아직 나 좋아하잖아.”

그러면 그렇지. 셰어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요한은 한숨을 쉬며 문에 등을 기댔다. 무엇 하나 바꾸려는 것도 없으면서 지지부진한 말다툼을 질질 끄는 것이 슬슬 진심으로 화가 나려 했다.

“너 나한테 잘못했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지? 여태 네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안 나온 건 아냐?”

제 실수를 기억해 낸 듯 셰어의 얼굴에 얼핏 짜증스러운 기색이 스쳐 간다. 그런 남자였다. 자신의 잘못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 남자. 요한은 한때 그가 그저 실수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는 줄 알고 그를 안쓰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안쓰러워할 게 아니라 그때 진작 헤어졌어야 했는데, 그것도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기대도 안 해. 난 그냥 너랑 빨리 정리하고 싶다. 서로 아는 체하지 말고 각자 남남처럼 살아. 자꾸 이렇게 얼굴 보고 얽히는 것도 난 불편해.”

“정리하면, 넌 너대로 다른 새끼랑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사는 거고?”

“당연한 소리를 뭐 이렇게 재수 없게 하지?”

셰어가 헛웃음을 흘렸다. 삐딱하게 입술을 비틀며 웃는 얼굴이 기억하던 것과 같았다.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것 같아?”

항상 사람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당당한 그가 추락하는 꼴을 보고 싶었다. 요한은 생전 가져 본 적 없었던 적의가 차갑게 응결되는 것을 느꼈다. 뾰족한 마음이 치솟았다.

“안 두고 보면 네가 어쩔 건데. 얌전히 두고 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잘 사는 거.”

요한은 셰어가 또 화를 내며 자신을 몰아세우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셰어는 이번에도 입을 다물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 굳어진 그 얼굴을 보자 요한은 왠지 못 할 말을 한 것 같아 마음이 영 불편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겠다는 말, 그 말이 대체 어디가 그렇게 충격적인지.

“난 포기 못 해.”

그 말은 꼭 셰어가 스스로 다짐하는 말 같았다. 요한은 수십 번은 들어 본 듯한 말이 끝내 셰어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별을 통보받은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사람 속을 신선하게 뒤집어 놓는다는 점에서는 셰어가 독특하기는 했지만 그가 한 말은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요한은 그런 말을 뱉은 이들과의 결말이 어땠는지를 잘 알았다.

“마음대로 해. 네가 포기하든 말든,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야.”

“확신할 수 있어? 내가 뭘 포기하든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이상한 물음이었다. 포기할지 말지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할지를 묻는 물음은 불편했다. 요한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간단할 터였으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왠지 그렇게 쉽게 대답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셰어는 위태로운 평정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눈 속에 요동치는 동요가 요한에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요한은 여러 색깔이 섞인 것처럼 구분하기 어려운 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 초조했다. 결국 내키지 않는 티가 역력한 얼굴로 요한이 한 말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말이었다.

“네가 나 없이도 잘 지내면 좋겠다. 너 자꾸 이러면 내 마음이 불편해.”

가끔 이별을 통보한 후에 자해하겠다고 협박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정말 자해할 용기는 없는 이들이었기에 요한은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셰어는 그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 눈에 엿보이는 감정 중 파괴적인 색채를 띤 것도 있었으나, 지나치게 차분한 셰어의 태도는 그 충동이 실재하는지를 의심하게 했다. 그 간극이 섬뜩했다. 그는 꼭 죽을 자리를 봐 둔 사람 같았다.

“그게 됐으면…….”

셰어는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뒷말은 웃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고, 웃음 끝에는 쌉싸름한 감정이 묻어났다.

“미안해.”

사과는 불시에 튀어나와 요한을 찔렀다. 웃음이 걷힌 셰어의 얼굴은 수도자처럼 고요했다. 그는 대답 없는 요한의 속을 파헤치려는 듯 진득하게 응시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미안하다. 속여서 미안해.”

“됐어.”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요한은 제가 뱉은 말에 괜히 뜨끔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셰어가 진지하게 사과를 하자 어색해서 뾰족한 말이 먼저 나오고 말았다.

곧 죽어도 사과 같은 것은 할 줄 모를 것 같은 남자가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한 것은 퍽 놀라운 일이었다. 요한이 기억하기로, 셰어는 미안하다 혹은 죄송하다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셰어의 입에서 나온 말 중 사과에 가장 가까운 말은 ‘실례했습니다.’였다.

요한은 자꾸 비죽거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셰어가 다시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를 용서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울리지 않는 얼굴로 사과하는 그를 보자 속이 울렁거리고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진짜 잘못한 것을 아는 것처럼, 진실한 사람처럼 사과하는 것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고. 사과받은 셈 칠게.”

“사과받은 셈 치는 게 아니라 사과받았다고 해야지. 내가 방금 한 말은 그럼 뭔데?”

겨우 익숙한 반응이 돌아왔다. 요한은 내심 안도하며 셰어를 쏘아보았다. 셰어는 뚱한 표정으로 요한을 마주 보았다.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미안하다는 새끼가 꼭 한 마디도 안 져.”

“내가 미안하면 됐지, 져 주기까지 해야 해?”

“아…… 그냥 말을 말자.”

요한은 진저리를 치며 질색을 했다. 셰어는 대놓고 치를 떠는 요한을 보고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을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나마 익숙한 분위기가 되기는 했는데 아무리 봐도 셰어가 이상했다. 원래 없던 싹수가 생긴 것도 아닌데 전보다 확실히 물러진 느낌이 들었다.

진짜 죽을 날짜라도 받아 뒀나.

요한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셰어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 몫이라면 남의 염통이라도 떼어다 챙길 만한 위인이었으니 괜히 걱정해 줄 필요가 없었다.

* * *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시각, 하늘은 시시각각 빛깔을 바꾼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비치는 빛살이 호텔방 안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든 방 안은 생활감이 없었다. 늘 완벽한 상태로 정돈된 방에서 바뀐 것이라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뿐이었다.

셰어는 전날 입은 옷을 그대로 걸친 채 물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반쯤 비워진 물병은 뚜껑이 얌전히 닫혀 있었다. 오래 쥐고 있었던 탓에 물병 표면에 맺혔던 물기는 진작에 날아갔고, 얼음처럼 차갑던 물은 체온만큼이나 미지근했다. 그의 손이 물병을 터트릴 듯 세게 움켜쥐었다가 이내 풀어졌다. 물이 담겨 있는 페트병이 우득, 불쾌한 소리를 내며 손가락의 모양을 따라 일그러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요한을 만날 때마다 평소답지 않게 흥분하기 때문인지 아침이 가까워지도록 카페인을 과다 섭취한 것과 닮은 각성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기존의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 혹은 새로운 방식을 찾을 것인가. 삶을 바꾸는 순간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다. 사실과 증명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감상과 기대가 끼어든 세계로 넘어가는 것은, 겨우 찰나였다. 셰어가 능수능란한 화술을 버리고 몇 번 써 보지 않아 무디고 어설픈 무기 같은 사과를 입 밖에 낸 순간 그리고 조악한 사과를 요한이 받아 준 그때.

세상은 간단히 바뀌어 버린다. 셰어는 호텔로 돌아오던 길을 떠올렸다. 너무 익숙해져서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풍경에서 계속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하늘에 우스운 모양의 구름이 떠 있다는 것도, 요한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겨우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다는 것도, 도시의 색채가 기억보다 찬란하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살 수 있을까? 셰어는 긴 밤을 이어 온 고민에 온점을 찍었다. 버튼을 한 번 누르면 선로가 바뀌는 것처럼, 한 번의 결심이면 된다.

창밖의 세상은 눈이 시리도록 밝았다. 완연한 아침이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은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아침은 또다시 오고 말았다.

“하아…….”

손에서 미끄러진 물병이 발치를 굴렀다. 셰어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깊은 숨을 내뱉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지르고 싶었다. 어떤 보호구도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희게 밝아진 방 안에 앉아 셰어는 노트북을 켰다. 새로운 아침,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지금은 이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 * *

샬롯은 독실한 신자였다. 모태부터 이어져 온 신앙은 샬롯에게는 삶의 일부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업무가 바쁘더라도 주일이면 가능한 시간을 내 교회를 찾았다. 물론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인맥이나 정보가 많은 것 또한 그녀가 독실한 신자가 될 수 있었던 배경 중 하나였다.

예배가 끝난 뒤, 샬롯을 맞이한 것은 뜻밖의 손님이었다. 교회라면 늘 질색을 하던 셰어가 샬롯의 차 앞에 서 있었다. 신자도 아니면서 점잔을 뺀 차림을 하고 서 있는 것이 수상쩍었다.

샬롯은 말없이 조수석에 탔다. 그리고 운전을 하라는 명령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셰어가 운전석에 앉았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각자 할 일을 했다. 셰어는 샬롯의 집을 향해 운전을 했고, 샬롯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쌓인 메일을 처리했다. 그녀는 한참 만에 쌓인 메일을 거의 다 읽었다. 그리고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네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니? 21세기의 신은 돈이라고 할 때는 언제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해 봐.”

샬롯이 자판을 터치할 때마다 톡톡거리는 소리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 셰어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저 결혼 안 합니다.”

샬롯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셰어는 옆얼굴에 내리꽂히는 날카로운 시선을 묵묵히 견디며 전방을 주시했다. 다행히도 탁 트인 도로 덕분에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샬롯이 살인을 결심하기 전에 그녀의 차에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셰어는 시답지 않은 농담을 떠올리며 긴장을 잊으려 했다.

“그럼 다음 계획은 뭔데?”

예상대로 그녀는 이유보다 전략을 물었다.

“너도 알겠지만 결혼만큼 쉽고 간단한 길이 없어. 생식 능력 외에는 다른 자격을 갖출 필요도 없고 어지간하면 틀어질 일도 없지.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니?”

“있습니다.”

“나는 시간 낭비하기 싫다.”

샬롯은 차창을 내리며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 손길이 거칠었다. 시큰둥하게 물었으나 내심 셰어의 거절이 불쾌했던 것이 틀림없다. 미처 창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연기가 고여 차 안의 공기는 금세 매캐해졌다.

셰어는 답답한 숨을 의식적으로 가다듬었다. 해답의 실마리를 찾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결혼을 막기 위해 마련한 대책은 완벽하지 않았다. 객관적인 증거는 모호하고, 그마저도 틀릴 수 있다. 걸어 볼 수 있는 점이라고는 오직 샬롯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뿐이다. 항상 물샐틈없이 완벽하던 셰어의 계획답지 않았다.

스스로를 믿을 수 없었다. 단지 결혼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람이나, 아무 근거 없이 잘 될 것이라 믿는 희망적인 망상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핵심 기술이 결혼보다 더 확실한 답입니다.”

셰어는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샬롯이 어이없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흐릿한 숨을 닮은 웃음을 흘렸다. 순진한 어린애가 늘어놓는 낙관적인 얘기로 치부하는 것이다. 셰어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인간관계만으로 성사된 사업이 구조상 얼마나 취약한지는 저보다 회장님이 더 잘 아시겠죠.”

“그래, 대신 얼마나 효과가 빠른지도 잘 알지.”

샬롯이 길게 연기를 내뱉으며 칼칼하게 쏘아붙였다.

“기술 개발이 어디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야? 시장 진입은 타이밍 문제다. 기술 개발을 하면 된다고. 대체 언제? 지금 당장 들어가도 모자랄 판국에!”

그녀가 언성을 높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운전대를 붙잡은 셰어의 손마디가 희게 질렸다. 긴장으로 손끝이 얼어붙고 있었다.

“늦지 않을 겁니다.”

“무슨 근거로?”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었다. 빨간 등이 켜진 정면을 응시하던 셰어가 고개를 돌려 샬롯을 바라보았다. 보는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시선이 셰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셰어는 평생 배워 온 대로 여유를 가장하며 웃었다.

“우리는 이미 시장에 들어와 있으니까요.”

모든 것은 시험의 연속이다. 입학 전부터 졸업까지, 졸업한 후에도 시험은 계속된다. 학교의 시험과 달리 졸업 후에 마주하는 시험에서는 공정한 기준이 없었다. 어떻게든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셰어의 일상이었다. 그의 전략에서 핵심은 효율성이다.

하지만 그 한 가지에만 집중하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하나의 문제를 푸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연구소 프로젝트에서 인수한 기업 중 항공 우주국과 협력 계약을 체결한 곳이 총 8곳, 그중 3곳은 상반기 중에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죠.”

“그래서? 그거야 인수할 때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니니.”

“중요한 건 무엇을 개발하느냐죠. 항공 우주국의 기술이 방위 산업을 선도합니다. 우리는 이미 방위 산업의 선두에 발을 들였습니다.”

기술의 시장화 시기는 민감한 문제였다. 오전 내내 복잡한 기술 용어로 이루어진 수많은 보고서 속에 묻혀 있는 동안, 셰어는 하나의 신호를 읽었다. 때가 머지않았다. 곧 시장이 BNB에 유리한 쪽으로 바뀔 것이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연구소 프로젝트로 유관 기술을 보유한 업체를 인수한 것이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낙마시켰다고 생각했던 연구소 프로젝트는 실패작이 아니었다.

“방위 기술 표준이 바뀔 겁니다. 8개 기업 모두 신규 기술 표준에 맞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더군요. 장비만 준비된다면 당장 양산을 시작해도 될 만한 수준입니다.”

샬롯은 담배를 껐다. 흐릿하던 해답이 점차 명료해지고 있었다.

전부 시험이었다.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험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다. 셰어는 헛웃음을 흘렸다.

“기존 업체들이 모두 신규 기술 표준을 따라오지는 못하겠죠. 자금 사정이 나쁜 A사는 말할 것도 없고, 양산까지 까마득한 C사도 안 돼요. 낙오자가 많이 생길 겁니다. 충분한 레퍼런스가 있는 우리에게는 확장의 기회가 되겠죠.”

흐릿하던 가설은 말을 이어 갈수록 확신이 되어 간다. 결혼 하나로 모든 일이 손쉽게 굴러갈 리가 없다. 아무리 끌어 주는 이가 있다 하더라도 기준 이상의 역량은 필요하다. 그런데 그 역량이 이미 일정 수준 갖추어진 상태였다. 누구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샬롯은 기술 중심적인 사람이다. 셰어가 파악한 추세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셰어는 그중 가장 헷갈렸던 것을 끝내 입에 올렸다.

“회장님,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셨던 거죠?”

셰어가 계획하고 샬롯이 승인한 연구소 프로젝트의 기술 로드 맵은 BNB의 주요 사업뿐만 아니라 신규 사업과 관련된 기술까지도 교묘하게 얽혀 있었다. 모든 것을 기획한 셰어에게도 맹점은 있었다.

셰어가 보는 관점의 연구소는 당장 돈이 되는 기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관점은 분명 효율적이었지만 향후 10년을 준비한다는 목적에는 맞지 않았다. 이미 캐시 카우 역할을 하는 우량 산업 기술이 주가 되었기에, 불명확한 가능성을 논하는 신규 기술에 대한 부분은 상대적으로 묻혀 버렸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각, 불확실한 기대를 실현할 힘이었다. 처음부터 샬롯이 시험한 것은 그것이었으리라.

샬롯이 소리 내어 웃었다. 장난에 성공한 악동 같은 웃음이었다.

“생각보다 쓸 만하구나, 파트너로서.”

베일리들은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다.

다른 것은 모두 위장일 뿐, 결혼이 진짜 시험이었다. 그저 친척으로서 베푸는 호의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샬롯의 의지에 따라 생각 없이 움직이는 장기짝이 될지, 혹은 그녀와 같은 관점에서 생각하는 파트너가 될지를 가름하는 기로였다.

셰어가 결혼을 승낙했더라도 샬롯은 잃을 것 하나 없었을 것이다. 파트너는 얻을 수 없었겠지만 방위 산업에서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을 터이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녀에게는 이득이었으리라. 교활한 술책이었다.

“포주 운운하면서 결혼하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누가 네게 힌트를 줬지?”

샬롯이 웃음기가 걷히지 않은 얼굴로 물었다. 때마침 교차로의 신호가 바뀌었다. 정지해 있던 차는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아갔다.

셰어는 잠시 멍해진 머리로 할 말을 골랐다. 한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하자 눈앞에 하얀 공백이 펼쳐진 것 같았다. 방향도 알 수 없고 끝도 모르는 공백.

그간 했던 치열한 고민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이렇게 쉽게, 이렇게 간단히 바뀔 수 있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평생 정해진 길로만 갈 줄 알았다. 예전 같았더라면 다른 방법을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해답은 길 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셰어는 일평생 자신을 짓누르던 무형의 무게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허상일지언정 그는 해방감을 느꼈다.

“힌트는 고모님께서 주셨죠. 필요한 건 아들이 아니라 파트너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의미 없는 말은 잘하지 않는 샬롯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녀는 묘한 감상에 젖어 있었다. 편안한 침묵이 내려앉는 동안 두 사람이 탄 차가 막힘없이 곧게 뻗은 도로를 달렸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네게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사실 기대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배우는 건, 사람들이 내가 바란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녀가 불쑥 털어놓은 감상은 다소 대답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셰어는 잠시 생각하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저도 고모님 생각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는데요.”

“그래. 그래서 기쁘구나.”

꾸밈 하나 없는 대화는 낯설고 불편했다. 셰어는 어색함에 치를 떨며 속도를 높였다.

“결국 저랑 잘해 보실 거면서 왜 그렇게 저한테 못되게 구셨습니까?”

샬롯은 그새 심드렁해진 얼굴로 폰을 들여다보며 투덜거렸다.

“너 하는 꼴을 봐라. 어찌나 얄미운지. 내가 중매 서면서도 네가 진짜 결혼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네 부인 될 사람한테 죄짓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래도 설마 그 정도는 아닐 텐데. 만날 때마다 태반은 싸웠던 요한이 떠올라 셰어는 괜히 심란해졌다.

주마다 제도가 다르지만 서부에서는 동성혼이 허용된다. 딱히 그 점을 의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샬롯이 결혼 얘기를 꺼내니, 셰어는 자연스럽게 요한과 같이 사는 상상을 떠올리고 말았다.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싸우겠군. 셰어는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했다. 사실 매번 바락바락 대드는 요한의 성격도 만만치는 않았다. 셰어는 요한이 사귀는 동안은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다는 것을 헤어진 후에야 실감하게 되었다. 수틀리면 말다툼은 물론 몸싸움까지 불사하는 게, 성질이 보통이 아니었다.

“딱 저 같은 사람 만나서 지지고 볶으면서 잘 살 테니 걱정하지 마시죠.”

셰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사라진다. 누구도 그 짧은 순간을 보지 못했으며, 셰어 그 자신도 웃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덕분에 샬롯의 집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샬롯의 차를 주차장에 댄 후, 셰어는 그녀의 집 앞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차로 옮겨 탔다.

원래는 남은 주말을 휴식으로 보내려 했으나, 그는 충동적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목적지는 딱 한 번 가 본 적 있는 요한의 집이었다. 요한을 만나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열받아서 파르르 떠는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었지만 왠지 그곳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이 맞기는 했다. 방마다 환하게 불이 켜진 집이 보였다.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 위한 높은 담은 여전했으나 닫혀 있던 문이 반쯤 열려 있었던 것이다.

셰어는 혀를 차며 차에서 내렸다. 아마도 문단속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이 근방에는 사람이 살지 않기는 했지만 요한은 너무 경계심이 없다. 예고도 없이 불청객이 들이닥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한 듯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큰 창이 난 저택이 보였다. 투명하고 큰 창문이 쇼케이스처럼 집 안의 풍경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요한은 여전히 이렇게 무방비하게 살고 있는 듯했다.

집 앞에 서 있는 레몬 나무도 여전했다.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커다란 레몬 나무는 막 물을 준 것처럼 물기를 머금은 채 반짝거린다. 집 앞에 깔린 잔디도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꼭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 놓은 듯한 집이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

셰어는 집 앞에 주차된 낯선 차를 발견했다. 세련된 디자인의 새빨간 컨버터블, 요한의 차는 아니었다. 요한의 차는 범블비를 모델로 튜닝한 노란 클래식 카로, 그 눈이 시리도록 빨간 컨버터블 옆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었다.

요한이 새 차를 산 것일까? SF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미래적인 형태의 컨버터블이 불쾌감을 자극한다. 자신이 알던 요한이 아닌, 다른 존재로 바뀌는 과정을 목격한 듯했다. 이렇게 하나둘씩 바뀌다 보면 언젠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요한을 발견하고 말 것 같다.

셰어는 차가운 눈으로 주차된 차를 훑어보았다. 나란히 주차된 두 대의 차를 보니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두 차의 운전석 간격이 크게 달랐다. 빨간 컨버터블의 운전석은 요한처럼 덩치가 큰 남자가 타기 어려울 만큼 운전석 시트가 앞으로 바짝 당겨져 있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집, 열려 있는 문, 운전석 간격이 다른 낯선 차. 모든 단서가 요한이 낯선 이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열받네…….”

음습한 목소리가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셰어는 괜히 흐트러짐 하나 없는 머리칼을 매만졌다. 과민 반응이다. 집에 찾아올 만한 손님과 반드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요한이 손님과 집에서 대체 뭘 하고 있을지가 너무도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요한만 엮이면 모든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계획은 모두 뭔가에 취한 듯 휘청거리는 감정에 휘둘려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건 진짜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셰어는 어느새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손이 뭔가에 이끌린 것처럼 벨을 눌렀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그 소리를 듣자 셰어의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요한이 일요일에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따져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앞뒤 생각도 하지 않고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는 게 새삼 믿기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문이 활짝 열리며 요한이 불쑥 튀어나왔다. 가장 먼저 음식 냄새와 함께 달큼한 술 냄새가 났다. 그리고 뒤이어 시트러스 계열의 향기가 난다. 셰어는 그것이 레몬 특유의 시큼한 향기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어딘가에 레몬즙이 튀었는지 요한이 다가오자 새콤한 냄새가 훅 끼쳤다. 그 향기가 무슨 작용이라도 하는지 머릿속이 온통 산란했다.

셰어는 요한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하얀 셔츠에 청바지, 전에도 본 적 있는 차림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그날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요한이 자신을 사랑하던 때로.

요한은 셰어를 밀치며 튀어나오더니, 현관문을 등진 채 집을 수비하듯 버티고 섰다. 팔짱을 끼고 선 그의 얼굴은 험악하게 구겨져 있었다.

“야, 너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불퉁하게 튀어나온 말이 셰어를 현실로 끌어 내렸다.

“남의 집에는 왜 마음대로 들어와? 일요일인데 넌 할 일도 없냐?”

“손님 있어?”

제 입에서 튀어나온 물음이 어찌나 구차한지, 셰어는 일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감상보다 초조함이 더 앞섰다.

“애인?”

담담하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행히 예상보다 차분했다. 요한은 불투명한 감정이 일렁거리는 셰어의 눈을 잠시 어려운 문제를 보듯 바라보았다.

“네가 알 바 아니잖아.”

매정하게 선을 긋는 말에는 오히려 웃을 수 있었다. 멋대로 간격을 좁히는 상대와의 거리를 요한이 의식하고 있는 듯해, 셰어는 그것이 기껍기까지 했다.

“왜? 우리가 이 정도 얘기도 못 할 사이인가.”

“야, 마음 같아서는 너 아는 척도 안 하고 싶거든.”

어떻게 하면 그 마음이 바뀌는데? 남루한 말들이 혀 밑에서 아우성친다. 셰어는 들끓는 속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지랄 안 떨어도 용건 마치면 가.”

“용건이 대체 뭔데?”

요한은 피곤하다는 듯이 얼굴을 거푸 쓸어내렸다. 셰어는 희미하게 달아오른 그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려는 것처럼 오래 바라보았다. 듣는 말마다 기분이 더러운데 뭐 하러 여기까지 저 얼굴을 보러 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듯했다.

정말 정신이 나갔나 보지. 사람 꼴 우스워지는 것도 한순간이다. 셰어는 자조했다. 그 잠깐도 참지 못한 요한이 까칠하게 재촉했다.

“용건이 뭐냐니까. 나 들어가 봐야 해.”

예전 같았으면 요한을 잡아 대며 어떤 새끼와 같이 있었던 거냐고 화를 내기라도 했을 텐데, 지금의 셰어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전처럼 굴다가 요한이 진심으로 싫어하는 티라도 내면 왠지 심히 유감스러울 것 같았다. 어쩌면 꽤 오랫동안 회복이 안 될 만큼.

셰어는 한숨을 쉬며 시선을 거두었다. 가뜩이나 얄팍해진 이성이 곧 끊어질 것 같았다. 정제되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용건 끝났다.”

그 말에 요한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답지 않게 차가운 웃음에 아래로 향했던 셰어의 시선이 다시 요한에게로 끌려갔다.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 입술 사이로 그보다 배는 삐딱한 말이 튀어나왔다.

“어이없네. 너 진짜 여기까지 뭐 하러 왔냐? 설마 헤어진 애인 바짓가랑이 붙잡고 질질거리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예기치 못하게 약한 부분을 찔린 탓에 날카로운 것이 할퀸 것처럼 갈비뼈 안쪽이 뜨끔했다. 셰어는 뒤늦게 흐트러진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요한은 이미 한 차례 허물어진 포커페이스 너머의 감정을 읽은 듯했다. 요한이 영 떨떠름한 얼굴로 어물거렸다.

“야, 너…….”

“뭘 또 캐물어? 너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이렇게 불편해할 거면서.”

입을 딱 다문 얼굴에 그야말로 불편하다고 쓰여 있는 듯했다. 셰어는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불편한 티를 내니 속이 편치 않았다.

“그냥 용건 있어서 왔고, 용건 끝나서 가는 거라고 쳐.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했다.”

“아…… 너는 진짜 사람 마음 불편하게 왜 그러냐?”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미안하다고.”

“망할, 그놈의 사과 좀 그만해!”

언제는 사과 한마디 없다고 빈정거리더니, 이제는 사과를 해도 지랄이다. 셰어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요한은 혼자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열이 받았는지 그는 셔츠 앞섶을 쥐고 펄럭거리기까지 했다.

사나운 손길에 하얀 셔츠 깃이 나풀거리며 뒤집힌다. 칠칠치 못하게.

그럴 상황이 아니기는 했지만 너무 신경이 쓰였다. 셰어는 삐뚤어진 것을 항상 바로 세워 놓고, 라벨을 늘 정면으로 맞추어 세우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야무지게 뒤집힌 셔츠 깃은 요한의 손길에 흐늘거리는 와중에도 제 모양을 찾을 것 같지가 않았다.

셰어는 우스운 모양으로 뒤집어진 그의 셔츠 깃을 바로 세워 주었다. 셔츠를 펄럭거리던 손이 그대로 굳어졌다. 요한은 마치 셰어가 파렴치한 짓이라도 한 것처럼 서슬 퍼런 눈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얼굴만 보러 오기는 뭘 얼굴만 보러 와.”

무슨 오해를 하는지 뻔히 보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셰어도 할 말이 있었다.

“그럴 생각이면 네 옷을 벗겼겠지.”

“발뺌하지 마. 어? 네가 내 옷깃을, 어? 이렇게 야릇하게 만졌는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요한이 셰어를 따라 하는 것처럼 제 셔츠 깃을 야릇하게 쓰다듬었다. 그 손짓은 정말 대놓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더러웠다. 요한은 셰어가 인상을 팍 구기자 흥분이 한풀 꺾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야?”

의심이 미처 걷히지 않은 얼굴이 좀 멍청하고 귀여워 보였다. 셰어는 속으로 탄식했다. 저 얼빠진 짓 하는 게 귀여워 보이다니, 진짜 갈 데까지 갔다.

정작 사람을 이렇게 망쳐 놓은 장본인은 말짱해 보였다. 그를 보니 괜히 속이 비틀려 셰어는 심술궂게 웃었다.

“넌 내가 옷깃만 만져 줘도 꼬시는 것 같나 봐.”

“아니, 네가 개수작을 부린 게 하루 이틀이어야지.”

“맨살이라도 닿으면 청혼인 줄 알겠다.”

“이거 봐. 또 개수작이네. 너 하기만 해 봐.”

셰어는 요한의 뺨을 쿡 찔렀다. 요한의 낯빛이 싸하게 굳어졌다. 그 얼굴을 보니 왠지 등줄기가 지끈거리며 당겨 오는 듯해 셰어는 짐짓 시선을 그의 턱 아래로 미끄러뜨렸다. 보기 좋게 뻗은 목에 자리한 완벽한 형태의 결후가 느릿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 상황에서 침을 왜 삼켜. 셰어는 한숨을 삼켰다. 어색함에 냉큼 손을 떼려 했으나, 요한이 더 빨랐다. 그는 셰어의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 세게 움켜쥐었다.

“야, 너는 내가 하는 말이 다 장난 같지?”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탓에 긴장한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짧은 힘겨루기 끝에 셰어는 요한의 손을 뿌리쳤다. 그 잠깐 사이에 어찌나 손목을 세게 쥐어짰는지 그의 손이 닿았던 곳이 다 욱신거렸다. 셰어는 붉은 손자국이 남은 손목을 감추듯 소맷단을 끌어 내리며 픽 웃었다.

“청혼했는데 대답이 너무 험악하네.”

그러자 이번에는 팔뚝을 붙잡혔다. 셰어는 우악스러운 힘에 떠밀려 새빨간 컨버터블에 다리를 부딪쳤다. 요한이 무게를 실어 짓누르는 바람에 허리가 뒤로 위태롭게 꺾였다.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면 낮은 보닛 위로 넘어지고 말 것 같다. 그러면 분명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요한과 주말을 함께 보내던 손님도 그 소리를 들으면 나와 볼 수밖에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이 이렇게 차 위에 엉켜 있는 꼴을 본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불순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분노로 일렁거리는 새파란 눈이 셰어를 노려보았다.

“이런 걸로 농담하지 마. 네 입에서 그딴 농담이 나올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

농담처럼 청혼 얘기를 꺼낸 것이 잘못이었다. 요한이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줄 알면서도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아 셰어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까 괜히 요한과 결혼하면 어떨지를 상상하는 바람에 그 생각이 머릿속에 콕 박혀 버린 모양이다. 일찍이 요한에게 셰어의 인상은 진지한 관계에 부적합한 사람으로 찍혀 있었으니, 그것도 다 그의 업보였다.

셰어는 위팔을 붙든 요한의 팔을 더듬었다. 조심스럽게 팔뚝 안쪽과 팔꿈치를 쓰다듬자 팔을 움켜쥔 악력이 더 강해진다. 셰어는 진정하라는 듯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보이는지는 알겠는데, 나 그런 농담은 안 해.”

“농담이 아니면 뭔데. 넌 아무한테나 그런 말을 막 하냐?”

셰어는 그의 팔을 붙잡은 채 고개를 들었다. 요한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입술은 턱 끝에 부딪쳤다. 쪽, 장난처럼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은 지나치게 간지러웠다.

그래서 더 아까웠다. 둔한 주제에 잽싸기만 해서는, 입술을 1초도 내어 주지 않았다. 셰어는 몸을 바로 세우며 요한의 팔뚝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줄곧 셰어를 아프게 쥐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간다.

요한은 복잡한 얼굴로 입술이 스친 곳을 마구 문질러 댔다. 잔뜩 쓸린 턱은 물론이고, 그의 얼굴이 온통 울긋불긋했다.

“불쾌했으면 미안한데 그냥 한 말 아냐.”

셰어는 엉망으로 구겨진 재킷을 가볍게 털어 냈다. 이제 입에 붙은 사과가 제법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셰어는 자신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딱히 내키지 않아 몇 번 한 적 없는 말이었지만 그가 바란다면 말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무슨 헛짓거리야, 지금.”

요한은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 혼란이 가시지 않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셰어는 그가 더 흔들리기를, 진자처럼 크게 휘청거리다 못 이기는 척 자신의 품에 쓰러져 주기를 바랐다.

뭔가가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집 안에서 들렸다. 괴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셰어는 자신도 모르게 요한이 등진 문을 바라보았다. 분명 접시 같은 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요한은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급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 너 또 이런 식으로 멋대로 들어오면 진짜 신고할 거야.”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집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셰어는 문 앞에 선 채 망설였다. 문 너머의 소란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혹시 위험한 상황에 부닥친 게 아닐까? 요한도 신체적으로 쉽게 밀릴 만한 몸은 아니었으나, 그는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무르게 구는 면이 있었다. 나쁜 사람에게 걸리면 뼛골까지 싹싹 발라 먹힐 게 뻔하다.

셰어는 요한이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를 떠올리며 확신했다. 요한이라면 상대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아 줄 만한 호구였다. 그런 뒤에도 상대가 괜찮으냐고 물어보면 저를 아껴서 걱정해 주는 줄 알고 또 바보같이 웃으면서 ‘나는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마.’라는 식의 헛소리를 지껄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그랬듯이.

“내가 그 꼴은 또 못 보겠네.”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셰어는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으로 들어선 셰어가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식탁 위에 걸터앉아 있는 한 여인이었다. 입구를 등지고 있었기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그 새빨간 컨버터블의 주인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대담한 색상의 셔츠와 꼿꼿하게 등을 바로 세우고 앉은 자세가 왠지 그런 차를 선호할 듯한 인상을 풍겼다.

셰어의 구두 밑에 밟힌 깨진 유리 조각이 빠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그 소리에 지레 당황한 셰어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주변은 난장판이었다. 사방에는 깨진 접시와 와인병이 굴러다니고, 처참하게 뭉개진 음식물 찌꺼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셰어가 서 있는 곳까지 유리 조각이 튀어 있었지만 식탁 주변은 그럭저럭 말끔했다. 그 주위를 닦아 낸 것으로 보이는 천 뭉치가 한구석에 뭉쳐져 있었다. 아마도 식탁보인 듯했다.

여자는 그 난장 속에서도 평온하게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여자의 맨발이 까딱거린다. 맨발에 붕대처럼 감긴 하얀 냅킨에 희미한 핏자국이 찍혀 있다. 그녀가 발을 까딱거릴 때마다 점점이 배어난 핏자국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혼자 노래를 흥얼거리던 여자가 문득 셰어를 돌아보았다. 노래가 뚝 끊겼다.

“손님이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녀는 예상치 못한 방문자에 당황한 듯 크게 뜬 눈을 깜빡였다. 셰어는 그녀의 얼굴 곳곳에서 요한의 흔적을 발견했다. 요한과 닮은 새파란 눈, 짙고 선명한 눈썹, 유독 동그란 귀. 정확히는 요한이 그녀를 닮은 것이리라.

셰어는 레일라 바네스에게 정중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저는 셰어라고 합니다.”

“요한을 만나러 온 거죠? 하필이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네요. 민망해라.”

레일라는 셰어를 알아보지 못했다. 셰어는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신문에는 종종 자신의 얼굴이 실리곤 했으나 레일라와는 길게 얘기를 나눠 본 적도 없었으니, 이런 자리에서 만나면 알아보기 어려울 터였다.

다만 레일라는 확실히 특이한 사람이긴 했다. 셰어는 레일라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집에서 슬리퍼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간 레일라가 발끝을 움츠리며 웃었다. 그녀가 발을 흔들 때마다 하얀 천 조각이 나풀거린다.

“약간의 사고가 있어서.”

“괜찮으십니까?”

“그럼요. 아무 문제 없어요. 저기, 저쪽에서 기다릴래요? 요한은 금방 올 거예요.”

레일라는 거실 쪽을 가리켰다. 셰어는 잠시 고민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요한은 자리를 비웠고, 집은 엉망진창이다. 레일라는 발을 다쳐 식탁 위에 앉아 있다. 셰어는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당장은 이 자리를 뜨면 안 될 것 같았다.

식탁에 앉아 있는 레일라는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어설프게 응급 처치를 한 발을 까딱거리며 만화 주제가를 흥얼거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저 태평한 사람이라기에는 주위의 풍경이 지나치게 살풍경하다. 레일라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셰어는 겸손한 미소를 가장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금방 온다고 하니 여기서 기다리지요.”

그 말에 사람 좋게 웃던 레일라의 입술이 미묘하게 일그러진다. 눈에 띄게 경계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낯선 사람에게 난장판이 된 집을 보인 것 외에도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셰어는 그녀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려 일부러 사교적인 화제를 던졌다.

“집 앞에서 봤는데 차가 멋지더군요.”

“그렇죠? 차 볼 줄 아시네요.”

“요한이랑은 취향이 다르신가 봅니다. 두 대가 나란히 서 있는 걸 보니 재미있어서요.”

“내 아들 취향이 별로죠. 그 애한테 멀쩡한 취향을 가진 친구가 있다는 게 놀랍네요, 챈들러.”

레일라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낯선 이름이 튀어나왔다. 셰어는 일순 흐트러질 뻔한 표정을 가다듬으며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레일라 바네스가 이름을 잘 못 외우는 편이던가? 그런 얘기는 전혀 들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레일라는 수완이 좋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기본 중의 기본인 이름을 틀리게 부르다니. 그렇다면 이건, 엿 먹이는 건가. 셰어는 슬며시 굳어지려는 입술을 올려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먼저 걸어오는 싸움을 피한 적은 없지만 상대는 요한의 어머니였다. 셰어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갔다.

“전 요한의 차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어쩜,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무서운 게 없나 봐.”

클래식 카가 정비에 손이 좀 가기는 해도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을 텐데, 아마 레일라는 걱정이 많은 편인가 보다. 셰어는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그 얼굴을 요한에게 동조하는 친구의 웃음으로 이해한 레일라가 한숨을 푹 쉬며 한탄했다.

“그놈의 몬스터 트럭 같은 고철 덩어리, 내가 언젠가 버리든지 해야지.”

셰어는 위화감을 느꼈다. 요한의 차는 큼직한 바퀴가 붙어 있는 덩치 크고 험악한 몬스터 트럭과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할 만한 실수는 아니었다.

그때 구급상자를 든 요한이 복도 끝에 나타났다. 그는 셰어를 보자마자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휘둥그렇게 뜬 눈이 셰어를 원망하듯 노려본다. 마치 네가 왜 여기 있느냐고 묻듯이.

그 놀란 얼굴을 보니 괜히 심사가 뒤틀려, 셰어는 보란 듯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요한이 황급히 다가와 레일라와 셰어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레일라가 그 서슬에 놀라 요한에게 눈짓을 보냈지만 요한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잠시라도 틈을 보이면 덤벼드는 맹수를 앞에 둔 것처럼 셰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셰어는 사람을 찢어 죽일 듯한 매서운 시선을 마주하면서도 유유히 웃고 있었다. 레일라가 옆에 있으니 적당히 맞추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요한은 그 의미를 오독했는지 되레 사나워진 얼굴로 낮게 윽박질렀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솔직하게 요한에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셰어는 눈살을 찌푸리며 쥐어짜 내듯 말했다.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거든.”

“내 집에 네가 들어올 수밖에 없는 일이 대체 뭔데?”

“여기서 이렇게 얘기할 만한 일은 아니고.”

셰어가 레일라를 곁눈질했다. 피차 가족 앞에서 치정 싸움을 벌이기 난감했던 요한 역시 금세 입을 다물었다. 당장 멱살이라도 쥐고 싸울 듯했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레일라는 애매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지금 상황, 나만 이상해 보이니?”

요한은 구급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레일라, 치료해야지.”

“내가 하면 돼. 요한, 손님은 저기에 계속 세워 둘 거니?”

요한은 말없이 셰어를 노려보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짜증이 난 게 분명하다. 셰어는 먼저 답을 주기로 했다.

“저는 잠시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요한, 정리되면 잠깐…….”

“알았다고!”

셰어가 말을 맺기도 전에 짜증 섞인 대답이 먼저 터져 나왔다.

레일라는 유독 예민하게 구는 요한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의 요한 같았으면 무슨 설명이라도 했을 터였으나, 그는 묵묵히 구급상자를 뒤지느라 바빴다. 구급상자를 거의 탈탈 털어 엎을 듯 뒤적이느라 덜컹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결국 대답을 듣기를 포기한 레일라가 허탈하게 웃으며 셰어에게 인사했다.

“그러면 잘 가요, 셰인.”

요한의 등이 굳어졌다. 셰어는 그 등에서 답을 찾았다. 레일라는 일부러 이름을 잘못 부른 게 아니다. 그녀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다. 요한이 이토록 긴장할 만큼 치명적인 문제가.

셰어는 다시 요한의 집 앞에 섰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쉬는 날이면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는 사이좋은 모자였다. 레일라에게 정확하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한이 그토록 긴장하는 걸 보면 쉬운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여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어도 요한의 속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셰어는 업무용 전화를 꺼내 연락처를 뒤졌다. 문제가 뭔지는 몰라도 머리에 대한 것이라면 그쪽으로 잘 아는 의사를 소개해 줄 생각이었다. 실력도 출중하고 입도 무거운 사람이니 어쩌면 요한의 걱정을 덜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은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집 앞에 나타났다. 레일라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안타까워, 셰어는 그를 안아 주고 싶었다. 햇살처럼 늘 해맑기만 하던 이가 요즘에는 매일 구름이 잔뜩 낀 날씨처럼 흐린 얼굴이었다.

그를 위로하고 싶다. 그 의지 외에는 어떤 작정도 없이 손이 먼저 뻗어 나갔다. 요한은 자신의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앉는 손길을 내치지 않았다. 셰어는 요한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그저 위아래로 토닥일 뿐인 단조로운 접촉인데도 배 속에서 나비가 파닥거리는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번진다.

어떻게 하면 요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도와준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셰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아는 의사가 있어. 입도 무겁고, 뇌 쪽을 아주 잘 봐. 너한테 소개하고 싶은데.”

“원하는 게 뭐야?”

어설프게 토닥이던 셰어의 손이 뻣뻣해졌다. 요한은 자신의 어깨에 겨우 얹어놓은 셰어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책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요한은 당연히 셰어가 자신의 약점을 이용하리라 믿고 있었다.

“뻔히 다 아는 사이에 말 돌리지 말자. 원할 때마다 너한테 대 주면 되냐?”

셰어는 느릿하게 손을 거두어들였다. 순수하게 건넨 호의가 모욕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굳은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자 낭패감에 짙게 물든 눈이 셰어를 향했다. 요한은 웃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런 말 싫으면, 그래. 다시 사귀자. 원한다면 그까짓 각서도 한 번 더 쓰고.”

“넌 내가 겨우 그 짓 하나 때문에 너한테 이러는 거라고 생각해?”

“아니면 뭔데?”

셰어는 대답하지 못했다. 요한이 잔뜩 흐린 얼굴로 축 처져 있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요한이 전처럼 활짝 웃는 얼굴로 자신만을 바라보기를, 종일 시시콜콜한 얘기를 떠들며 귀찮게 굴기를 바랐다. 그에게 다시 사랑받고 싶다.

입 밖에 내면 부스러질까 봐 두려울 만큼 연약한 소망이었다. 셰어는 그토록 연약한 소망은 한 번도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됐어.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냥 솔직하게 말해. 뭐든 들어준다니까.”

요한은 실랑이하기도 성가시다는 듯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날카로운 한숨 소리가 속을 뜨끔하게 할퀴는 듯했다.

다시 사귀자는 말 한마디면 이토록 속을 긁어 놓는 요한 대신 전처럼 달콤하게 구는 요한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욕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셰어가 바라는 것은 이해관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런 척하는 게 아니라 진심을 원했다.

“필요 없다고 했어. 너랑 거래할 생각 없다고.”

요한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피곤함에 절어 있던 새파란 눈 속에 지금은 조용히 타오르는 정체 모를 감정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더 건드리면 폭발할 것처럼 위태롭게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왜?”

고요한 물음이 셰어의 입을 막았다. 계속 같은 질문이 돌아오고 있었지만 셰어는 한 가지도 대답할 수 없었다.

그를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바이올렛.”

음울한 목소리가 셰어를 위협했다. 착각인가 의심한 것이 무색하게도 요한은 조롱이 담긴 눈으로 셰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선뜩한 것이 셰어의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패닉이었다.

요한이 바이올렛의 정체를 안다. 요한의 말 한마디면 온 세상이 바이올렛의 정체를 알게 된다.

셰어의 머릿속에 가장 최악의 악몽이 떠오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바이올렛의 정체가 터지면 메일함을 테러 하던 불순한 스토커들은 셰어의 일상에 끼어들 것이고, 겨우 샬롯의 신임을 얻은 것도 의미 없는 일이 된다. 아니, 사적인 일이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샬롯의 성정을 고려한다면, 스캔들이 터지는 즉시 그녀의 손으로 직접 셰어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여태 네가 사람 가지고 논 건 뭔데. 아닌 척하면 내가 네 말을 믿을 줄 알았어?”

눈을 크게 뜬 채 악몽을 보는 것처럼 경악한 셰어의 눈을 바라보며, 요한은 전에 본 적 없는 비릿한 웃음을 베어 물었다.

“이제 비밀은 너 하나, 나 하나 사이좋게 나눠 가졌네. 넌 그걸로 거래할 생각이 없다고 했지만 난 있어.”

“뭐?”

셰어는 겨우 되물었다.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턱 막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요한이 남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다. 요한이야말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성자 같은 사람일 것이라 믿은 것은 셰어의 착각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셰어는 낯선 이를 보는 눈으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이목구비였지만 요한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을 얼마든지 상처 입힐 준비가 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 의사 연락처 넘겨. 그리고 레일라에 대한 얘기가 새어 나가면 난 바로 네가 바이올렛이라는 걸 터트릴 거야.”

셰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의 비밀이 더 치명적인지는 자명하다. 요한은 레일라의 비밀을 들켰지만, 셰어는 그 자신에 대한 비밀을 들켰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셰어가 대답했다.

“그렇게 하지.”

“아, 한 가지 더.”

요한이 셰어의 가슴팍을 쿡쿡 찔렀다. 그는 그 안에 든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안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었다.

“내가 부르면 와서 대 줘. 그게 대체 어떤 기분인지 나도 좀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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