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6)

* * *

도심이 오렌지 빛깔로 물든 석양에 잠겨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셰어는 창밖의 풍경을 잠시 바라보았다. 멍하게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모니터를 노려보며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이 짜증스러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시시각각 하늘의 빛깔이 변하는 것을 보니 되레 하는 일 없이 시간만 흐르는 게 초조하기만 했다.

새벽, 요한의 집을 나온 후 셰어는 집보다 더 친숙한 호텔로 향했다. 늘 지내던 호텔에서는 익숙한 향기가 나고, 항상 완벽하게 준비된 방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만 셰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낯선 표정으로 자신을 보던 요한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셰어는 요한과의 관계가 영원할 것이라 기대한 적은 없었으나 그렇게 건조하게 끝날 줄은 몰랐다. 요한은 울지 않았고,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지도 않았다. 단지 요한은 조용히 분노를 삭이며 셰어를 그의 인생에서 추방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전까지만 해도 별이라도 따 줄 것처럼 애틋하던 감정이 그렇게 단번에 말라붙을 수가 있나?

속이 끓었다. 어쩌면 요한은 금방 사랑에 빠지는 만큼 금방 사랑이 식어 곧 다른 사람을 좋다고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개처럼 꼬리를 치며 다른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요한을 상상하자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도 꽃다발을 안겨 주고 근사한 음식을 대접할 것이다. 세상에 귀한 것이라고는 오직 연인밖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을 퍼부을 것이다.

셰어는 거친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잖은 망상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잠시 커피라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셰어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수석 비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필요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뇨, 내가 할게요.”

셰어는 느릿한 걸음으로 탕비실로 향했다. 셰어의 사무실에 딸린 탕비실에는 버튼 하나만 누르면 원두를 갈아서 커피를 내려 주는 기계가 있었다. 셰어가 에스프레소 버튼을 누르자 기계가 돌아가며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난다. 금세 커피 특유의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자그마한 컵 속에 고이는 까만 액체를 보며 셰어는 문득 요한이 마시던 녹조 라테를 떠올렸다. 그린티라테라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녹조 라테 같은 그것을 요한은 맛있다고 좋아했다. 그는 생긴 건 에스프레소만 마실 것처럼 생겨서는 단것이라면 환장을 했다. 셰어는 그 나이 먹고도 쉬는 날에 어머니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는 남자를 우습다고 해야 할지, 귀엽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화는 예전처럼 고요했다. 셰어의 파트너들은 쓸데없는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시시콜콜 일상을 떠들어 대는 메시지가 없으니 수시로 집중력을 잃을 일도 없을 터였다.

분명 없어야 했는데.

“상무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수석 비서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빠르게 속삭였다.

“커피 한 잔 마실 틈이 없네.”

셰어가 혀를 차자 비서가 송구스럽다는 듯이 민망한 웃음을 짓는다.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자각이 있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 셰어는 자신을 타이르듯 잠언 삼아 외워 온 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아무 문제도 없는 척을 해야 한다. 숨을 쉬는 것처럼 당연했던 일을 하는 게 위태롭게 느껴졌으나 셰어는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찾으셨다고요.”

“왔니?”

샬롯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매캐한 담배 연기가 훅 끼쳤다. 창을 열어 두었는데도 자극적인 담배 냄새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실내 흡연이 금지된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샬롯의 사무실은 여전히 흡연 구역이었다. 그 탓에 그녀의 사무실만 단독으로 빠진 스프링클러 작동 버튼을 매번 껐다 켜야 하는 비서들만 바빴다.

셰어는 불쾌한 내색 없이 샬롯의 맞은편에 앉았다. 반도 채 피우지 않은 장초를 재떨이 끝에 살짝 걸쳐 둔 샬롯이 미간을 꾹꾹 눌렀다. 공교롭게도 그녀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길지 않은 침묵 끝에 말했다.

“너 결혼해야겠다.”

뜬금없는 말에도 셰어는 놀라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결혼을 하게 된다면 이처럼 상대를 통보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혼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사업이었다. 두 집안의 인수 합병을 고려할 때 오직 한 명의 기호는 큰 의미가 없었다. 셰어는 스스럼없이 인수 조건을 물었다.

“상대는 누구인가요?”

“글쎄. 장군의 딸?”

샬롯이 눈썹을 찡그리며 냉소했다. 그새 여유를 되찾은 샬롯이 재떨이에 걸쳐 두었던 담배를 입에 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지간한 꼴통들은 다 뚫어 봤는데 딱 하나 안 뚫리는 꼴통이 있더구나.”

셰어는 손을 휘저어 담배 연기를 흩어 냈다. 어지간히 열받아 있더니 과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방위 산업이군요.”

방위 산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한번 공고한 관계를 맺어 두면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끊길 일이 없는 밥줄. 그만큼 진입 장벽이 높아 아무나 감히 넘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BNB 그룹은 몇 차례나 방위 시장 진입을 시도했으나 그만큼 규모 있는 BNB 그룹의 힘으로도 기존 플레이어들이 쌓아 둔 벽을 깨기는 어려웠다.

물론 거기에는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 꼴통 새끼가 여자가 회장인 기업은 글렀다잖니. 그 총 맞아 뒈져 마땅한 새끼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샬롯이 피로한 얼굴로 셰어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난 얼굴이 셰어에게 피에 매긴 의무를 상기시켰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이제 그 값을 치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어째. 그 잘난 남자인 네가, 몸이라도 팔아서 문을 열어 보든지.”

“그렇게 까칠하게 말씀 안 하셔도 저 이 결혼 합니다.”

셰어는 그녀의 도발을 유들유들하게 웃어넘겼다. 샬롯은 성의 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얇은 서류 봉투를 셰어에게 밀어 주었다. 클리포드 로펌의 로고가 인쇄된 서류 봉투 안에 든 것은 한 부의 혼전계약서였다.

“읽어 봐. 그래도 네 몸값인데 네가 잘 알아야 하지 않겠니?”

얼굴도 보기 전에 계약서부터 들이밀다니, 과연 조신하기도 하셔라. 셰어는 속으로 조소했다.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일이 막상 현실로 닥치자 거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언제부터 이런 것을 불쾌하게 느끼게 되었을까?

셰어는 빗속을 뚫고 달려와 상처 많은 장미를 건네던 남자를 생각했다. 어두운 복도 끝에 서서 빗물을 뚝뚝 흘리던 남자. 바깥의 불빛에 반짝이던 남자의 눈, 보는 이를 들뜨게 만드는 그의 눈.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셰어는 몇 줄 읽어 보지도 않은 계약서를 충동적으로 내려놓았다.

“모르세요? 이런 건 포주만 알면 되는 거랍니다.”

그는 이런 감정은 알고 싶지 않았다.

“비싸게 팔아 주세요. 전 그거밖에 안 바라니까.”

구불구불한 철로를 따라 도는 장난감 기차처럼 선로 전환기 스위치를 한 번 누르는 것만으로 노선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셰어는 무한대 기호처럼 꼬인 매듭을 그리는 클리포드 로펌의 로고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토요일 오후 1시에 시간 비워 두렴. 클리포드 대표가 픽업하러 갈 거다. 그쪽에서도 변호사를 대동하고 나올 테니 정신 바짝 차리고.”

샬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불신 어린 눈이 셰어를 관찰한다. 잔잔해 보이는 물 밑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를 보려는 듯 그녀의 눈은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답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왔지만 셰어는 자신이 평소처럼 완벽한 상태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샬롯과 대화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문제가 많았다. 일에 집중할 수 없고, 감정은 변덕스럽게 들썩인다. 의미 없이 알림도 뜨지 않은 전화를 확인하고, 창밖을 보며 한숨짓고, 서랍 속에 처박아 둔 주인 없는 목줄을 버리려다 끝내 버리지 못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서랍을 여닫는다.

셰어는 요한을 생각했다. 매일같이 그가 나누어 준 일상의 편린이 예기치 못한 순간 되살아나 때때로 셰어를 따갑게 찔렀다. 조금 성가실 뿐이었던 따끔거림은 점차 깊은 통증으로 변했다.

요한이 좋아하는 날씨, 색깔, 음식, 요한이 신나게 손바닥을 복사했던 일이나 종이 냅킨에 자신을 그리며 히죽 웃던 얼굴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살가운 말 한마디 해 준 적 없어도 항상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얼굴. 기억 속 그의 얼굴은 부스러질 듯 연약하게 반짝였다.

이게 대체 뭘까? 셰어는 먹먹한 가슴께를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시나요?]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을 파트너의 메시지가 새로운 알림을 띄웠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담백하게 느껴졌던 예전과 달리 그의 메시지가 스팸 메시지처럼 성가셨다. 셰어는 답장하지 않은 메시지를 지웠다.

창밖의 풍경은 바뀌어 갔지만 셰어의 일상은 똑같이 흘러갔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꾸역꾸역 처리하며 하루를 보내고, 일을 마치면 호텔에서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다. 타인이 끼어들 만한 틈은 없었다. 몇 차례 만남을 청하던 메시지를 무시하자 이제는 메시지를 보내는 파트너도 연락이 띄엄띄엄했다. 도리스에 직접 목줄 제작을 의뢰할 만큼 의욕적이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어떤 욕구도 생기지 않았다.

시간은 착실히 흘렀다.

셰어는 정오가 가까워졌을 무렵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토요일 오전 11시 47분. 매일 같은 시각에 눈을 뜨던 평소의 생활 패턴이 완전히 어그러져 버렸다. 셰어는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베개에 도로 머리를 처박은 채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망할…….”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셰어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숙취를 없애기 위해 수영이라도 하러 가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이미 로널드 클리포드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호텔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클리포드 로펌의 대표 로널드 클리포드는 아주 성실한 남자였다. 쟁쟁한 고객들만을 상대하기에 그는 기본적으로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다. 시간에 철저하고 틀리는 법이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로널드의 입이 무겁다는 것이다. 찔리는 것이 많은 입장에서 실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뢰였다.

준비를 마친 셰어는 간신히 늦지 않게 로널드 클리포드의 차에 탔다. 살짝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는 셰어를 곁눈질하며 로널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고객에게 신뢰감을 주는 특유의 미소였다.

“딱 맞게 오셨군요. 그럼 출발하지요.”

“네, 가시죠.”

차가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널드는 미리 준비해 둔 서류 봉투를 셰어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는 샬롯이 보여 준 것과 같은 혼전계약서가 들어 있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몇 줄의 항목에 파란색으로 메모가 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그쪽과 조정이 필요한 항목입니다. 가면서 천천히 읽어 보시지요.”

셰어는 눈으로는 혼전계약서의 내용을 훑어보며 로널드의 설명을 대강 흘려들었다. 어차피 로널드가 동행하는 이상 셰어가 더 관여해야 할 일은 없었다. 혼전계약서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은 셰어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만날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런…… 아직 못 들으셨나요?”

로널드는 반응하기 곤란한 농담을 들은 것처럼 허허 웃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보다 어떤 조건으로 혼인이 성사되는지가 더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종종 발생하는 문제였다. 로널드는 태블릿을 조작해 간단한 프로필 파일을 보여 주었다.

“빅토리아 스텔론, 방위사업청 청장의 손녀딸입니다.”

프로필 파일은 간단했다. 활짝 웃고 있는 금발 미녀의 사진과 함께 몇 줄의 소개가 전부였다. 25살, 명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인재, 부모의 직업과 자산 규모 등. 큰 흥미를 끌지 않는 건조한 소개를 훑어본 셰어가 태블릿을 로널드에게 돌려주었다.

“그렇군요.”

특별히 덧붙일 말이 없었다. 로널드는 셰어에게 결혼에 대한 몇 가지 사담을 떠들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셰어는 그저 눈을 감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은 숙취가 짙은 피로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약속 장소는 호텔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이 미어터지는 바람에 보통은 한 달 전부터 웹 사이트를 들락거려야만 겨우 입장이 가능한 곳이었으나, VIP 고객을 위한 공간은 언제 가더라도 항상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개별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완벽하게 세팅된 테이블이 놓인 공간이 나타난다.

VIP 고객을 위한 공간에는 테이블이 몇 없었고, 각 테이블 간의 거리는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멀었다. 약속 상대는 이미 도착해 있었다. 가장 안쪽 창가 자리에 앉은 이가 셰어와 로널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진보다 더 생기 넘쳐 보이는 빅토리아 스텔론과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생긴 매서운 인상의 중년 남성이었다.

“처음 보는 변호사인데 만만치 않아 보이는군요.”

로널드가 웃는 얼굴로 복화술을 하는 것처럼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속삭였다. 셰어는 뻣뻣한 입술에 익숙한 미소를 걸며 대답했다.

“행운을 빕니다.”

남의 일처럼 팔자 좋은 소리를 지껄이자 로널드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하지만 어차피 서류와 말로 하는 전투는 셰어의 몫이 아니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스물다섯 살의 빅토리아는 햇살처럼 활짝 웃으며 셰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피앙세가 될 남자의 얼굴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 얼굴이 유난히 어려 보인 탓에 셰어는 괜히 속이 불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스물다섯 살은 너무 어렸다.

“사진보다 실물이 낫네요. 반가워요. 빅토리아 스텔론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찰스 베일리입니다.”

“알아요. 사실은 작년 연말 파티에서 본 적이 있어요. 저도 셰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러세요.”

연말의 파티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기에 셰어는 그녀를 어느 파티에서 만났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변호사들 간에도 간단한 통성명이 오갔다.

건조한 목적을 위해 만난 것치고 식사의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특히 몇 잔의 와인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자주 웃었고, 셰어는 그럭저럭 상황에 맞는 농담을 던질 수 있었다. 사교 목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대화는 매끄럽게 이어졌다.

수월하지 않을 듯했던 협의도 예상보다 매끄럽게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연신 부드러운 무드를 유지하는 로널드의 태도에 감화된 양 협상은 순조로웠다. 줄곧 막힌 파이프처럼 교착 상태에 머물러 있던 일들이 오늘만은 순조롭게 풀리는 것 같았다.

셰어는 거의 비워진 와인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즉시 알아차린 소믈리에가 새로운 와인을 꺼내 들고 오고 있었다.

그 뒤로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다져진 몸에 어울리는 완벽한 슈트를 입은 남자가 들어선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끌려갔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는 예술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은 조각처럼 근사했다. 그가 걷고, 숨 쉬고, 말하는 것 자체가 초당 수억을 호가하는 광고에 등장하는 완벽한 인물처럼 눈길을 잡아끌었다.

셰어는 주위의 소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이들처럼 셰어 역시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요한.”

셰어의 입술이 희미하게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작은 탓에 바로 그의 옆에 앉은 로널드도, 맞은편에서 셰어와 대화를 나누던 빅토리아도 셰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듣지 못했다.

꼭 그 부름을 들은 것처럼 요한이 셰어를 바라보았다. 짙은 눈썹 아래 시리도록 푸른 눈이 매서워진다. 요한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 그는 셰어를 피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셰어는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불쾌해졌다.

그를 놓칠 수 없다. 셰어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거칠게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반쯤 기능을 정지한 이성을 되살렸다.

이 자리는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인수 합병을 준비하는 자리다. 무작정 안 좋게 헤어진 남자의 뒤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

머리로는 아는데도 눈살을 찌푸린 요한의 얼굴이 셰어의 머릿속에 통증처럼 깊은 잔상을 남겼다. 셰어는 자신을 바라보는 놀란 눈들을 향해 의례적으로 미소 지었다.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던 사무적인 미소는 어딘지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잠시, 실례합니다.”

다른 말이 나오기도 전에 셰어는 빠른 걸음으로 요한의 뒤를 쫓았다. 셰어를 알아본 호기심을 품은 시선들이 급하게 레스토랑을 가로지르는 그를 향했지만, 그 순간 셰어는 자신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을 잃었다. 복잡한 계산은 지워지고 한 가지만이 셰어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의 눈앞에 보이는 문제는 오직 하나였다.

요한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몇 걸음의 차이는 끈질기게 좁혀지지 않았다. 셰어가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을 알아차렸을 텐데도 요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단호한 등이 이별한 날처럼 완고한 거절을 의미하는 것 같아 셰어의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그대로 레스토랑을 빠져나갈 줄 알았던 요한은 화장실로 들어섰다. 셰어는 그 뒤를 따라 느리게 닫히는 문 너머로 들어섰다.

화사한 빛 아래 요한이 있었다.

“왜 따라와?”

세면대 앞에 선 채 거울을 노려보던 요한이 셰어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셰어는 거울 속에 비친 요한을 보며 숨을 골랐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를 따갑게 찔렀다. 셰어가 요한을 바라보듯 요한 역시 셰어를 관찰하고 있었다.

흐트러진 셰어의 머리칼과 살짝 구겨진 셔츠, 한쪽 셔츠 소매가 재킷 소맷단보다 훌쩍 길게 내려온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확인한 요한이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요한은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고개를 슬쩍 기울인다. 뭔가를 고민하듯 눈썹을 찌푸린 얼굴은 꼭 셰어를 놀리는 것처럼 근사했다.

“나 왜 따라오냐고. 스토커같이.”

담담하게 묻는 요한은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셰어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따뜻한 빛깔의 부분 조명과 우드 톤의 소품으로 아늑하게 장식된 공간은 오히려 긴장만 고조시킬 뿐이었다. 셰어는 그 공간의 중력이 지나치게 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무거운 공기가 몸을 짓눌렀다.

“네가 도망가니까.”

꽉 잠긴 목에서는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스로 돌아봐도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생활은 엉망진창이고, 후줄근한 모습을 미처 감추지 못한 채 정신없이 이별을 고한 남자의 뒤를 쫓아왔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다. 셰어는 자조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을 보자마자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달아나니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돌아온 것은 날카로운 비웃음이었다. 언제 웃었냐는 듯이 표정을 굳힌 요한이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습관이 눈에 익었다. 요한은 이따금 쑥스러울 때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렇게 함부로 문질러 대곤 했다.

“이 새끼 진짜 미친놈이네.”

손 아래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기는커녕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꺼지라고 했잖아. 말귀 못 알아들어? 이번에는 네가 먼저 여기 와 있었으니까 내가 친절하게 비켜 준 거고. 앞으로도 마주치면 서로 적당히 잘 피해 가기로 하자. 어?”

요한은 고저 없이 건조한 말투로 빈정거렸다. 그가 한숨을 뱉었다. 지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볼일 있으면 마저 보고 갈 길 가. 난 볼일 다 봤으니까.”

꽃을 안기며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남자는 사라지고 낯선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셰어를 보는 요한에게서는 이별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헤어진 뒤로 생활이 퍽 윤택해졌는지 화사하기만 한 얼굴이 얄미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상태인 그와 달리 어이없을 만큼 쉽게 망가진 자신의 일상이 떠올라, 셰어는 울컥 치미는 것을 삼켰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이게 다 쉽지? 내키는 대로 쥐고 흔들다가 아무 데나 내버리고 가면 그만이지, 너는.”

흠잡을 데 하나 없이 멀끔한 얼굴에 희미한 혐오가 번진다. 셰어는 자신이 본 것이 믿기지 않아 요한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요한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말은 똑바로 해. 바람피운 게 나야, 너야? 내가 말 한마디로 깔끔하게 헤어져 줬으면 알아서 죄송합니다, 할 것이지 어디서 피해자 행세야.”

“차라리 울고불고 지랄을 떨어.”

“너 뭐 하자는 거야?”

요한의 물음이 셰어를 뜨끔하게 찔렀다. 셰어는 자신도 그 물음의 답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요한을 쫓아온 것인지, 왜 그를 붙잡고 앞뒤 안 맞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셰어가 침묵하자 요한이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이제 와서 구질구질하게 뭐 하자는 건데. 딱 여섯 명을 채워야 하는데 한 명이 빠지니까 아쉬워? 너 좋다는 등신 같은 새끼가 나 말고는 없대?”

여섯 명. 요한의 말의 한 부분이 셰어의 머릿속에 박혔다. 역시 그 부분이 문제라면 고치면 되는 것이다.

“정리하면 되겠어?”

“뭐?”

“그 사람들 다 정리하면 되겠냐고.”

결혼이라면 모를까, 파트너들을 정리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실 그동안 연락이 드문드문했던 탓에 이미 거의 정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지하기만 한 셰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요한이 헛웃음을 흘렸다.

“너 진짜 뭐 하냐.”

질린다는 듯한 말투와 그의 얼굴에 번진 냉소가 그 무엇보다 날카로운 무기처럼 느껴졌다. 그 얼굴을 보자 정확하게 짚을 수 없는 몸속 어딘가가 욱신거리는 듯해 셰어는 태연한 표정으로 가장해야 했다.

“말해. 그럼 내가 어떻게 할까?”

계약 조건을 묻는 것처럼 차분한 셰어의 얼굴에 비굴한 기색은 없었으나, 그 말은 꼭 매달리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리며 작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 나 이런 거 진짜 싫어하는데. 욕설에 묻힌 희미한 말이 셰어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어떻게 할 필요 없어. 헤어졌으니까.”

“그 입 좀.”

일순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참느라 셰어의 말끝에 힘이 들어갔다. 요한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살피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을 뿐이었다.

셰어는 자꾸 허물어지는 이성을 가까스로 쌓아 올렸다. 이곳은 호텔 레스토랑이다.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화장실이고, 바깥에는 사람들이 있다. 소리를 지르면서 싸워서는 안 된다.

“그 입 좀 조심해. 헤어졌다는 말 한마디라도 더 하면 너…….”

“너 대체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래? 헤어졌다고.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헤어지는 거야. 둘 중 하나라도 끝내길 원하면 쫑나는 게 연애거든. 넌 둘이서 사귀어 본 적은 없어서 몰라?”

거울을 보던 요한이 셰어를 노려보았다. 열렬한 애정을 담은 채 반짝이던 눈은 그곳에 없었다. 그의 눈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비딱하게 치켜 올라간 채 비꼬는 말을 뱉는 입술은 신랄하기만 했다.

이성이 녹아내렸다. 생각을 앞질러 손이 먼저 뻗어 나갔다. 셰어는 요한의 재킷을 움켜쥐었다. 얼어붙은 요한의 얼굴에 당혹이 서리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한 감정이 셰어의 안에서 들끓던 충동을 부추겼다. 단단한 외피를 부수고 튀어나온 충동에 휘둘려 셰어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요한이 팔을 들어 셰어를 밀어내려 했으나 입술이 부딪친 것이 더 빨랐다. 기억처럼 부드러웠는지를 떠올릴 새도 없었다. 그 감촉을 인지하기도 전에 요한이 셰어를 밀어냈다. 그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재킷을 추스르며 씩씩거렸다. 요한의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 개새끼가 더럽게 어딜 비벼?”

셰어는 제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웃었다. 냉담하게 굳은 얼굴보다는 차라리 벌겋게 달아오른 꼴이 더 봐 줄 만했다.

“좆도 빨아 준 사이에 입술 좀 비볐다고 그럴 거 없잖아.”

요한이 싫어할 것을 알면서도 셰어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면서도 그를 속였지만 셰어는 그것이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의 세계에서 연인 간의 미덕에 진실함은 없었다. 완벽해 보이는 부부에게도 각자의 사정은 있다. 많은 부부가 손을 잡고 파티에 참석할 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환상의 커플인 양 다정하지만, 뒤로는 혼전계약서의 허점을 찾는 데 전념한다. 하물며 영원할 리 없는 연인에게 진실할 필요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셰어는 요한을 나름대로 신뢰했다. 요한은 셰어의 수많은 단점을 이해했고, 영원히 변치 않을 것처럼 사랑을 주었다. 그의 눈은 꼭 관대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해. 그 맹목적인 눈을 보면 셰어의 냉소적인 마음에도 기대라는 것이 부풀었다. 그는 정말 모든 것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

그런 눈으로 사람을 흔들어 놓고.

“내가 더러워? 내가 다른 놈들이랑 붙어먹고 있을 때도 넌 내가 좋다고 했어. 처음부터 다 알았으면서, 이제 와서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하지 마.”

셰어는 요한의 삐뚤어진 넥타이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 손이 떨어지자마자 요한이 셰어의 손이 닿았던 곳을 거칠게 털어 냈다.

“사랑한다며. 근데 이제 내가 더러워?”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꺼져. 더 험한 말 하기 전에.”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이 꼭 자신만큼 돌아 있는 것 같아 셰어는 자꾸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냉랭하게 남처럼 이별을 고하던 그날보다 차라리 미친 듯이 화를 내는 지금의 요한이 더 기꺼웠다. 셰어는 남의 손 타는 걸 질색하는 고양이처럼 예민하게 굴고 있는 요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슈트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어깨와 팔뚝을 느릿하게 쓸어내리자 손바닥 아래의 근육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것이 느껴진다.

“내키는 대로 지껄여 봐. 누가 겁먹나.”

“야.”

요한이 셰어의 어깨를 세게 밀쳐 냈다. 방심하던 찰나에 밀쳐진 터라 셰어는 엉겁결에 뒤로 밀쳐져 문에 등을 부딪쳤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셰어가 고개를 들었다.

요한은 꼭 더러운 것을 만진 것처럼 손을 옷자락에 탁탁 털며 말했다.

“걸레같이 굴지 마. 손톱만큼 남은 정도 떨어져.”

그 참신한 모욕에는 제아무리 셰어라도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셰어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꼭 미친놈을 보듯 자신을 노려보는 요한의 얼굴을 보자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셰어는 웃음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눈가를 매만졌다.

“걸레 같다고.”

아무래도 요한은 정말 걸레같이 구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르는 게 분명하다.

두 사람이 한데 뒤엉켰다. 옷깃을 잡아당기고 밀쳐 대는 손길에 팽팽하게 당겨진 옷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고,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제멋대로 섞였다. 요한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가 그다음 번에는 셰어가 세면대에 밀쳐져 등이 거울에 닿을 만큼 한껏 젖혀졌다.

서로 사정을 봐주지 않고 덤벼드는 탓에 아무렇게나 휘둘러진 주먹은 서로의 몸 이곳저곳을 때렸고, 몇 번인가 걷어차인 바짓단은 금세 지저분해졌다.

요한의 등이 잠기지 않은 칸의 문에 부딪혔다. 두 몸이 한 몸처럼 맞붙은 채 뭔가에 떠밀리듯 칸 안으로 밀려들어 간다. 철컹,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셰어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잠근 것이다.

“문은 왜 잠가. 그러면 누가 쫄 줄 알고?”

파티션에 어깨를 비스듬히 기댄 요한이 셰어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단단한 구두가 사정없이 정강이를 걷어차는 바람에 셰어의 미간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그 화풀이를 하듯 셰어가 요한의 벨트를 뜯어내듯 풀었다. 몇 번인가 발길질을 시도하던 요한이 이내 셰어의 머리칼을 마구 잡아당겼다.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진 셰어의 목덜미에 두드러진 핏대가 맥박이 뛸 때마다 팔딱거린다.

옷 위로 성기를 붙잡힌 요한이 숨을 헐떡이며 셰어의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요한이 쥐어 당기는 대로 고개를 젖힌 셰어가 목이 졸리는 듯한 소리를 흘리며 웃어 댔다.

“이거 놔, 이 개 같은…….”

“걸레라며. 흐…… 걸레 같은 짓은 아직 하지도 않았는데 걸레 소리를 들으면, 내가 억울하지.”

요한이 입 속으로 욕설을 짓씹듯 뱉어 댄다. 험한 말을 지껄여 대도 손안의 성기는 직접적인 자극에 반응해 착실하게 부피를 키우고 있었다.

살 기둥의 윤곽이 두드러진 바지 앞섶이 벌써 눅눅해지기 시작했다. 옷 위로 습기가 배어 나오는 선단을 손바닥 전체로 덮은 채 지근지근 누르듯 문지르자, 몇 겹의 천 아래로 미끈거리는 선액이 고여 뭉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당장, 이거 놔. 경고했다. 너 후회할 짓 하지, 아…….”

요한의 숨은 한창 드잡이질을 할 때보다 더 거칠었다. 희미한 열기에 젖은 그 얼굴을 핥듯이 바라보며 셰어가 속삭였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뭘 끝내? 누구 마음대로 끝내. 조금만 만져 줘도 좋다고 흘리면서, 싫다고.”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던 찰나, 요한이 셰어의 팔을 뒤로 잡아 꺾으며 그를 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 서슬에 연약한 칸막이 문이 덜컹거린다. 셰어는 문에 부딪힌 머리가 얼얼해 인상을 찌푸렸다.

열에 풀어진 얼굴에 한눈을 팔고 말았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는 요한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어깻죽지가 뒤로 한계까지 당겨진 탓에 팔이 빠질 듯 아팠다. 셰어는 문이 덜컹거리도록 거칠게 몸을 뒤틀었으나, 요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버클을 푸는 소리와 함께 지퍼가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설마.

셰어가 무섭게 굳어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친 숨을 쉬느라 크게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단단한 흉곽이 셰어의 등에 닿았다. 요한의 구두가 셰어의 구두 옆에 나란히 붙어 서며 발끝을 밀어 지익 하고 밑창이 끌리는 소리가 난다. 그와 바짝 닿아 있는 다리가 긴장한다. 둔부를 덮은 재킷 위로 묵직한 것이 닿았다. 당장이라도 옷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흉흉한 것이 셰어의 엉덩이를 쿡쿡 찔렀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솟았다. 셰어가 세게 몸을 비트는 통에 문이 부서질 듯 흔들린다. 셰어의 팔을 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놔.”

“가만히 있어. 먼저 덤빈 게 누군데.”

요한이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요한이 제 성기를 꺼내 쥔 채 수음하듯 문지르고 있었다. 단단한 성기가 셰어의 재킷 등허리를 연신 찔러 대며 투명한 선액을 펴 바른다.

셰어는 문에 도로 이마를 처박은 채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꼭 뒤를 범하기라도 할 것처럼 사람을 밀어붙이기에 무슨 짓을 하려나 했더니, 고작 한다는 게 수음이었다. 요한은 이 와중에도 무르기 그지없었다. 셰어와 달리 요한은 아무리 화가 나도 상대를 끝까지 상처 입히지는 않는다.

셰어는 그의 그런 점이 좋았다.

“요한, 이거 놔.”

“하아…… 씨, 조용히 좀 해. 너 때문에, 내가, 후…… 공공장소에서, 아……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빨아 줄까?”

물음과 동시에 셰어의 등을 짓누르던 무게가 숨이 턱 막힐 만큼 버거워진다.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머리가 둔해지도록 훅 끼치는 정사의 냄새에 셰어는 무의식적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핥았다. 셰어의 목덜미에 흐릿한 신음과 함께 뜨끈한 숨이 쏟아졌다. 오싹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저 화풀이 같은 도발이었는데, 끝이 좋지 않았다. 이미 갑갑할 만큼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바지 앞섶을 노려보며 셰어가 빈정거렸다.

“걸레같이 뒹군 기분은 어때?”

“망할…… 좋겠어?”

요한은 이미 정액으로 엉망이 된 재킷에 제 성기를 몇 번 문질러 닦아 낸 후에야 셰어를 놓아주었다. 요한은 말없이 흐트러진 제 옷차림을 정리했다. 강직한 턱선이 두드러지도록 입을 굳게 다문 그 얼굴을 보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절이 빠질 듯 얼얼한 어깨를 감싸 쥔 채 셰어가 느리게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나갔다. 쥐가 난 것처럼 저린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재킷을 벗으며 세면대 앞으로 다가가는 셰어의 뒤를 따라 요한이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은 채 세면대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 거울 앞에 섰다. 요한은 정액이 엉겨 붙은 손을 씻어 내고, 셰어는 정액이 묻어 엉망이 된 재킷을 물에 적신 페이퍼타월로 대충 닦아 낸다. 얼룩은 제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얼룩만큼이나 희미해진 흥분이 두 사람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흐트러진 숨은 가라앉지 않았고, 표정을 감춘 얼굴은 희미하게 상기되어 있다. 적막한 공간에 울리는 숨소리는 그다음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배설이나 폭력을 닮은 짧은 부딪침은 정체 모를 응어리가 아직 둘 사이에 남아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설령 원망이나 의미 없는 욕정일 뿐이라도 상관없었다. 셰어에게는 둘 사이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라도 존재한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셰어는 얼룩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재킷을 적당히 개켜 팔에 걸친 채 거울 너머로 보이는 요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숨길 기색이 없는 그 노골적인 시선에 요한이 눈썹을 사납게 구겼다. 그가 쏘아붙였다.

“뭐.”

무슨 말을 해야 그를 잡을 수 있을까.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고민을 하며 셰어는 입을 열었다.

“요한.”

겨우 이름만 불렀을 뿐이었는데, 문이 열렸다. 익숙한 남자가 화장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로널드 클리포드, 클리포드 로펌의 대표. 비현실적인 시공간을 깨고 현실의 감각이 밀려들어 왔다. 로널드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전화를 몇 통이나 했습니다, 상무님.”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공기를 읽은 로널드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벗어 든 슈트 재킷과 구겨진 셔츠, 희미하게 상기된 셰어의 얼굴이 뭔가를 암시하는 듯했다. 그 흐트러진 차림을 살피던 로널드가 셰어의 뒤에 선 요한을 바라보았다. 흡사 상대를 스캔하는 듯한 그의 시선을 차단하며 셰어가 로널드의 팔뚝을 붙잡았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죠.”

셰어는 뒤에 서 있는 요한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이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요한은 아무 기척도 내지 않고 서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로널드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셰어는 로널드의 눈 속에 번지는 곤혹스러운 기색을 읽었다. 요한 바네스, 바이올렛의 스토커를 알아본 그의 눈이 꼭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새로운 이름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 이름 앞으로 흔적이 남는 거래를 할 때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특히 셰어처럼 신원을 철저히 감추어야 할 경우, 전문가의 도움 없이 바이올렛으로 활동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랫동안 BNB와 거래해 온 클리포드 로펌의 대표 로널드는 그간 쌓아 온 신뢰의 값만큼 제 몫을 해냈다.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바이올렛의 뒤를 밟는 스토커들을 따돌려 왔다. 대부분의 스토커는 로널드의 선에서 간단히 처리되곤 했으나 그중에서도 골치 아픈 부류는 존재했다.

요한 바네스는 로널드 클리포드의 악몽이었다. 요한은 오랫동안 바이올렛의 주위를 맴돌았다. 흔한 스토커들과 달리 그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교묘하게 줄타기했으나, 늘 특별히 제재를 가하기 어려울 만큼의 선을 지켰다. 그 때문에 처음 요한을 접한 이들은 그를 무해한 팬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요한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바이올렛을 추적하며 그들을 압박해 왔다. 결국 아슬아슬한 수위에 도달해서야 그의 이름이 셰어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셰어는 그 악몽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요한은 불면과 무질서를 선사한 악몽답지 않게 순결한 얼굴로 셰어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멍하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얼굴을 보자 셰어의 뱃속에 뜨거운 것이 뭉친다. 조금 전까지 주먹다짐을 하고 엉겨 붙어 있던 남자였다. 때와 장소도 잊고 저지른 미친 짓을 또다시 시도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미치겠군.

머릿속을 채우는 음탕한 상상을 지우며 셰어는 로널드의 등을 밖으로 떠밀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화장실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로널드가 성급하게 물었다. 손가락 두 마디가량 열려 있던 문틈 너머로 불길하게 선명한 빛이 비친다. 셰어는 느리게 닫히고 있던 문을 완전히 닫았다. 둔탁한 소음이 흐려져 있던 로널드의 눈 속에 이성의 빛을 밝혔다.

“약간의 해프닝일 뿐입니다. 그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셰어는 금세 평정을 되찾은 얼굴로 단언했다. 요한은 아직 바이올렛의 정체를 모른다. 흔치 않은 성벽, 다섯 명의 파트너, 완벽히 감추지 못한 정황이 증거가 될 수도 있었으나 요한은 여태까지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그 외에는 아무 단서도 남기지 않았으니, 그 둔한 남자는 아마 앞으로도 바이올렛의 정체를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셰어는 자신을 달래듯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도 불쑥 치미는 어떤 불쾌한 예감이 들쑤셔 대는 것을 느꼈다. 구두 속에 숨어든 모래알이 발바닥을 쿡쿡 찌르는 것처럼 뭔가가 자꾸 거슬렸다. 인사도 없이 자리를 뜨던 순간, 이상할 만큼 고요하던 요한이 셰어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등을 따갑게 찔러 대던 뾰족한 시선과 거울 속에 비치던 요한의 정적인 옆얼굴이 번갈아 겹쳐진다. 낯선 얼굴이었다. 감정이 걷혀 나간, 뭔가를 셈하는 듯한 요한의 얼굴은 익숙하지 않았다. 셰어는 애써 불안을 감췄다.

“그보다 다른 얘기를 하는 게 좋겠군요.”

“네, 일단…… 오늘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어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이한 내용의 대화가 오갔다. 셰어는 근원 모를 초조함을 묵살하며 걸음을 옮겼다. 요한에게서 멀어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선명한 오점 같았다. 결혼을 의논할 상대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만이 명백한 정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셰어는 자꾸 틀린 답을 떠올렸다.

오늘은 아니다. 분명 오늘은 아니지만, 다음 기회가 있을 것이다. 셰어는 마지막으로 굳게 닫힌 문을 길게 일별하고는 단호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셰어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말쑥한 차림을 되찾은 요한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그를 모르는 이들은 그저 훤칠한 인상의 미남에게 흥미를 보이며 눈길을 주었으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어울리지 않게 차분한 요한의 태도에 낯섦을 느꼈을 터였다. 요한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로마노프에게서 온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네, 맞습니다. BNB 그룹은 클리포드 로펌과 10년 넘게 법률 자문 계약을 이어 왔습니다.]

사실 별것 아닌 내용이었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이라면 열에 일곱은 클리포드 로펌과 거래를 한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많은 기업은 오랫동안 거래 관계를 이어 왔고, BNB 그룹 역시 그런 기업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한 조각의 퍼즐은 다른 조각을 끌어들인다. 눈에 익은 남자의 얼굴을 본 찰나, 요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자신을 덧없이 스쳐 간 수많은 증거였다. 바이올렛은 클리포드 로펌의 로널드를 법정 대리인으로 세웠다. 바이올렛을 찾아 참석한 행사에서 매번 셰어를 마주친 것이며, 셰어의 독특한 취향, 다섯 명의 파트너, 관계에 시니컬한 그의 태도까지 모두가 다 증거였다.

셰어는 바이올렛이다. 확률 높은 가설이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로비 한가운데 선 채 심각한 얼굴로 폰을 들여다보는 요한을 여러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때로는 흥미를, 때로는 불쾌감을 담은 시선이 그를 향했으나 요한은 한 가지도 느낄 수 없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요한은 바이올렛을 만나고 싶다는 뜻을 여러 루트를 통해 몇 번이나 전달했다. 셰어는 처음부터 자신이 바이올렛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도 그랬을까?

그러자 파티에서 마주칠 때마다 매번 혐오스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질색하던 셰어가 다른 의미로 인식된다. 그것이 그저 귀찮게 다가오는 이에 대한 불쾌함이 아니라 스토커에 대한 거부감이라면, 그 혐오가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가 의문이었다.

요한은 꼭 뒤늦은 사랑의 열병이라도 앓는 것처럼 돌아오라 말하던 셰어를 떠올렸다.

진심도 아니면서 제법 애절한 척을 잘하는 개자식이었다.

셰어는 처음부터 그저 귀찮게 구는 스토커를 가지고 놀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배려 없이 몸을 부딪치는 행위며 매섭게 몰아세우던 말, 비밀 유지 각서, 섹스 파트너나 다름없던 취급들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상냥한 해석처럼 단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두렵고 어색해서 그렇게 대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만한 바이올렛의 스토커였기에, 함부로 대할 만한 상대여서 그렇게 취급을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요한은 홧김에 로마노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말고 폰을 도로 집어넣었다.

셰어가 바이올렛이든 아니든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제 더는 볼 일 없는 사이니까.

그리고 그로부터 정확히 7일 후, 요한은 셰어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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