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6)

* * *

어떤 취미든 궁극적으로 장비에 대한 욕심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은밀한 취미를 가진 부유한 고객들을 상대하는 도리스의 서비스는 남달랐다. 도리스가 성인지 이름인지, 혹은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인지는 누구도 몰랐으나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도리스가 무엇을 할 줄 아는지 잘 알았다.

도리스는 원하는 도구를 만들어 준다. 그것이 채찍이든, 목줄이든, 밧줄이든 도리스가 만들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셰어는 부드럽게 손질된 가죽을 매만졌다. 특유의 질감이 살아 있는 검은 가죽은 오래 감아 두어도 피부에 자극이 가지 않을 만큼 말랑하다. 셰어에게 가죽을 들어 보여 주던 남자가 가죽을 뒤집어 부드러운 가죽의 뒷면을 펼쳤다.

“원하신다면 피부에 닿는 부분을 좀 더 부드럽게 가공할 수 있습니다. 자국이 남지 않게요.”

남자는 서비스직 특유의 훈련을 거친 발음으로 말했다. 셰어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뇨. 이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약간은 자국이 남는 쪽이 더 좋으니까. 요한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선물을 고르는 사람은 셰어였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매끄럽게 웃으며 가죽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했다.

“그럼 모레까지 완성품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살포시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한 남자가 가죽과 몇 가지 도구를 브리프케이스에 차곡차곡 정리하고는 옷차림을 다듬었다. 셰어의 사무실에 선 완벽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영락없이 훤칠한 기업가로 보였다.

“그럼 살펴 가시지요.”

셰어는 사무실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굳이 문 앞까지 배웅이 필요한 상대는 아니었다.

화면 보호기가 해제된 모니터 화면 속에는 퇴근 시간 전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떠올라 있었다. 셰어는 서랍 속에서 연이어 울리는 진동을 무시하며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그 상대가 요한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셰어의 파트너들은 대개 용건이 있을 때만 메시지를 보냈다. 그들은 주로 같이 가고 싶은 곳이 있다거나 저녁에 시간이 되는지를 묻기 위해 연락했다.

반면에 요한은 종일 특별한 용건 없이도 잘도 메시지를 보냈다. 셰어는 요한이 분명 저녁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에 가자고 하거나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는 둥 시시콜콜한 얘기를 잔뜩 늘어놓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하루에도 수십 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셰어는 아주 가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퇴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질리도록 이어지는 진동음에 결국 백기를 든 셰어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진]

[너그거알아?]

[캡슐머신으로그린티라테도만들수있는거]

[진짜맛있어]

[너네사무실에도이거있냐하나사줄까]

사진을 보니 이상한 녹조 같은 것이 하얀 머그잔에 담겨 있었다. 셰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한은 얼마 전까지는 복사기에 꽂혀서 제 손을 복사한 종이에 연예인처럼 사인을 해서 주더니, 오늘은 이상한 걸 먹고 있었다.

셰어는 짧게 답장했다.

[녹조?]

바쁘지 않을 때였는지 요한에게서 금방 답장이 왔다.

[녹조아니라고]

[네것도테이크아웃해간다]

그러든가 말든가 셰어는 요한이 주는 정체 모르는 것들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때마침 퇴근 시간이 되었다. 급한 일은 그럭저럭 정리되었고, 나머지 일은 가져가서 해도 무리가 없을 터였다. 셰어는 퇴근 준비를 하며 요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퇴근해. 늦지 마.]

이상할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밀 유지 각서를 쓴 뒤로 약 3개월이 지났다. 셰어는 일을 하고, 때때로 요한을 만나고, 그가 여의치 않은 날에는 다른 파트너를 만났다. 몇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셰어가 차에 타자마자 꼭 기다린 것처럼 요한에게서 답장이 왔다.

[미안나조금늦을것같아]

[한30분쯤?]

[천천히출발해금방갈게]

또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셰어는 답장하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 중 하나였다. 셰어의 일은 궤도에 올라 순조로워졌으나 요한은 일이 점점 바빠졌다. 요한은 자세한 얘기를 들려주지 않았지만 일이 많아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만만치 않게 일이 많은 셰어가 말하기 우스운 부분이었으나 그는 요한이 바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줄이라도 채워서 집에 처박아 두고 싶었다. 혼자 사용하는 3층짜리 저택은 셰어가 자주 들어가지 않아도 관리인들의 손에 의해 잘 유지되고 있을 것이다. 셰어는 그곳에 요한이 있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대리석이 깔린 바닥은 딱딱하지만 침실에 깔린 카펫은 오래 바닥을 기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두껍고 푹신하다. 손수 꼬리를 달아 준다면 어떨까. 요한은 질색하겠지만 늘 그렇듯 결국 자신에게 복종할 터였다.

플레이에 능숙한 다른 파트너들과 달리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요한에게도 장점이라는 게 있다면, 그가 맹목적으로 셰어를 따르려 한다는 점이다. 그 맹목성은 여느 DS 관계에서 서브가 지닌 성질과 닮았다.

어쩌면 평생 가져 볼 수 없을, 완전한 종속.

셰어는 요한을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내 재조립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요한을 볼 때마다, 능숙하게 키스를 하거나 남자의 성기를 삼키는 요한을 볼 때마다 치미는 충동이었다.

셰어는 차라리 요한이 무력하기를 바랐다. 방문을 열 수도 없고 물 한 잔 제 손으로 마시지 못하는 그를 하나하나 보살피는 것을 상상했다. 나쁘지 않았다.

[늦어서미안]

[나도얼른보고싶어]

보고 싶다는 말 같은 건 한마디도 한 적 없는데 요한은 답장이 없는 셰어를 편한 대로 해석했다. 아마 또 토라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셰어는 요한의 착각을 고쳐 주지 않았다. 애인을 달래기 위해 요한이 무엇을 어떻게 할지가 슬슬 궁금해지고 있었다.

러시아워로 꽉 막힌 도로의 교통 체증은 좀처럼 쉽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져온 회사 일을 다 마치고도 도착까지는 시간이 꽤 남았기에 셰어는 그새 쌓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무심한 얼굴로 화면을 넘기던 셰어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셰어 님, 오늘도 시간을 내기 어려우신가요?]

파트너 중 한 명인 댄 화이트였다. 댄은 평소에는 다른 파트너들처럼 깔끔한 편이었으나 최근에는 도가 넘게 질척거리고 있었다. 그는 요한만큼이나 메시지를 자주 보냈다. 대부분의 내용은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줄 수 없는지 묻는 것이었다.

글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슬럼프가 왔을 때의 댄은 매번 셰어에게 끈질기게 만남을 청하곤 했다. 셰어와 파트너들은 모두 독점적인 관계가 아니었기에 얼마든지 다른 상대를 만날 수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댄은 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슬럼프의 댄은 셰어 외의 다른 파트너를 만나려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는 플레이를 해도 해소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댄 화이트는 슬슬 정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셰어는 댄에게 짧게 답장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잠깐 만나죠.]

여태까지는 귀여운 투정쯤으로 받아 주곤 했었지만 계속 이런 의존적인 관계가 이어져서는 안 된다. 목적이나 수단으로서가 아닌, 서로가 필요한 관계는 독이었다. 어차피 영구적일 수 없는 관계에서 특별한 감정을 기대해 봤자 남는 것은 상처뿐일 것이다. 서로를 위해 그만두는 게 나았다.

셰어는 한참 만에 요한의 집 앞에 도착했다. 요한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처음 요한이 집에 초대한 것은 한참도 전의 이야기였지만, 서로가 바쁘다 보니 이제야 기회가 생긴 것이다.

바다를 마주 보고 선 해안가의 새하얀 저택은 어느 부호의 여름 별장을 연상시켰다. 담장은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을 만큼 높았고, 사방에는 CCTV가 깔려 있다. 경비원이 없는 문은 셰어의 차가 그 앞에 서자 활짝 열렸다.

담장 너머의 풍경은 단출했다. 주차장까지 이어진 직선 도로 외에는 잔디와 커다란 풀장, 선베드뿐이었다. 아무래도 요한은 조경에는 취미가 없는 듯했다. 우스운 것은 집 앞에 제법 실한 레몬 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쩌자고 저렇게 큰 레몬 나무를 덜렁 심어 뒀는지. 저 많은 레몬을 따다 레모네이드라도 만들려나 보다. 셰어는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레몬 나무를 보고 혼자 웃었다. 신이 나서 레몬을 따는 요한의 모습이 상상이 된다.

높은 담장만으로 사생활 보호 문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지, 저택의 절반가량은 집 안이 훤히 보이는 큰 창이었다. 차에서 내린 셰어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는 집 안을 보며 혀를 찼다. 하여간 요한은 조심성이 없었다. 아마 저 유리창에 달라붙어 헐떡거리다 보면 누가 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셰어는 심술궂은 생각을 떠올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은 역시나 열려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편한 스트라이프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요한이 달려 나왔다. 살짝 헝클어진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것이 꼭 주인을 맞으러 달려 나온 대형견 같았다. 그는 그중에서도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는 레트리버를 닮았다.

셰어는 무심코 요한의 머리칼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뒤늦게 자각하고는 자연스럽게 손을 떼어 냈다.

“30분은 늦는다더니.”

면박이라도 주듯 툭 쏘아붙이는 말투는 싸늘했다. 요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셰어의 손을 집 안으로 잡아끌었다.

“아, 좀 늦었지. 제시간에 못 맞출 뻔했다니까.”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음식 냄새가 확 풍겼다. 식재료나 칼과 도마, 냄비, 소스볼 등은 조리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요한은 조리대를 마주 보고 놓인 아일랜드 식탁 앞에 셰어를 앉혔다. 식탁 위에는 하얀 라넌큘러스를 중심으로 화사하게 장식된 센터피스와 리스를 두른 길쭉한 초, 두 개의 테이블 매트가 놓여 있었다. 셰어는 테이블 매트 위에 완벽하게 세팅된 커트러리와 접시들을 훑어보았다.

그사이 요한은 큼직한 그릇에 담긴 샐러드와 차가운 새우 요리를 가져오고 있었다. 레스토랑의 가르송이라도 된 듯한 그의 모습을 관찰하던 셰어가 물었다.

“네가 한 거야?”

“응, 멋있지. 나 요리 잘해.”

요한은 까만 철판 위에 정갈하게 담긴 그릴 요리 위에 능숙하게 버터 소스를 끼얹었다. 달구어진 철판에 소스가 흘러 치이익 소리를 피워 올린다. 노릇한 거품이 지글거리며 향긋한 버터 냄새가 퍼졌다.

테이블 위의 음식들은 모두 근사했다. 요리를 잘한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했다.

셰어는 아리송한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집에 초대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저 섹슈얼한 신호로만 읽었을 뿐, 이렇게까지 데이트에 가까운 의미일 줄은 몰랐다.

요한은 길쭉하게 썬 스테이크를 집게로 집어 셰어의 접시 위에 올려 주며 말했다.

“이거 먼저 먹어 봐. 이건 따뜻할 때 먹어야 더 맛있어.”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탓에 집게를 든 요한의 팔뚝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또렷하게 보인다. 셰어는 작품을 감상하듯 식탁 옆에 선 요한을 훑어보았다. 셔츠에 청바지, 그저 편안해 보이는 차림인 줄 알았는데 은근히 야릇한 구석이 있었다.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요한이 셰어를 돌아보며 웃었다.

“너 그거 먹으면 나랑 결혼하고 싶어질걸.”

아무래도 요한은 그 시선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한 듯했다. 사심 없이 으깬 감자 요리까지 셰어의 접시에 덜어 주고는 그 맞은편에 가서 앉는 게, 제가 차린 상이 제법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그 뿌듯한 얼굴이 우스워 셰어는 일부러 평소보다 더 느릿하게 스테이크를 썰었다. 퍽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지만 내심 긴장은 했는지 요한의 시선이 셰어의 나이프 끝에 오래 머무른다. 셰어는 말없이 적당한 크기로 썬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래 씹었다.

“별로야?”

셰어는 묵묵히 으깬 감자를 한 입 먹었다.

“별로냐고. 왜 말이 없어?”

참을성을 잃은 요한이 길쭉하게 썬 스테이크를 자르지도 않고 한입에 넣었다. 커다란 고기를 잘도 씹어 삼키는 얼굴은 꼭 ‘맛있기만 한데.’ 하고 생각하는 것 같다. 더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셰어가 웃는 것을 본 요한이 그제야 웃음을 되찾았다.

“너무 맛있어서 말이 안 나오지?”

“그래, 맛있어.”

셰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음식은 맛있었다. 요한의 자찬만큼 결혼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높은 기준에 맞추어진 자신의 입맛에 맞을 만큼 맛있었다. 요한은 미리 디캔터에 따라 놓은 와인을 셰어의 잔에 부어 주었다.

테이블 장식도, 음식도, 와인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요한은 수십 번, 수백 번은 해 본 것처럼 능숙하게 음식을 집어 주고 와인을 잔에 채워 주었다. 아마 그는 이토록 능숙하게 호스트 노릇을 할 만큼 많은 사람을 자신의 맞은편에 앉혔을 것이다. 어쩌면 결혼하고 싶을 만큼 맛있다는 말도 다른 누군가에게서 들은 찬사일지도 모른다.

이 나이 먹고 상대가 연애 경험이 많다는 것 따위에 불쾌감을 느끼는 게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셰어는 속에 시커먼 욕망이 차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요한은 술기운이 올라 희미하게 상기된 얼굴로 실실 웃었다.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좋다. 아주 들어와 살래?”

“취했어?”

“진짜 잘해 줄게. 공주님…… 아니, 왕자님처럼.”

맛있는 것도 맨날 해 주고, 욕조에 물도 받아 주고, 잠들 때까지 안고 재워 주고…… 요한은 제가 할 줄 아는 일을 중얼중얼 늘어놓았다.

그 얼굴이 일그러지며 우는 것을 상상했다. 누군가는 사랑스럽다고 생각할 그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었다. 셰어는 새삼 자신과 요한이 참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꺼 두는 것을 잊었던 셰어의 선불 휴대 전화였다. 셰어는 화면에 떠오르는 댄 화이트의 이름을 확인했다. 희미하게 굳어지는 셰어의 얼굴을 본 요한이 물었다.

“급한 일이야? 받아 봐.”

“안 받아도 돼.”

“지금 네 얼굴이 어떤지 알아?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아. 정말 안 받아도 돼?”

때마침 전화가 끊어졌다. 그리고 화면에 댄 화이트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전화받아요계속무시하면죽어버릴거야]

댄 화이트가 이런 식으로 셰어를 협박한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댄은 자해를 하며 셰어를 협박했고, 셰어는 문제가 될 것 같으면 적당히 댄의 투정을 받아 줬다.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댄은 겁이 많아서 자해를 해도 자잘한 상처만 낼 뿐 치명상을 입히지 못했다.

셰어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끈질긴 진동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댄. 셰어는 화면에 떠오르는 그의 이름을 노려보았다.

요한은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로 셰어를 바라본다. 그의 앞에서 이 전화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셰어는 불길하게 진동하는 전화를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전화 받아야겠어. 식사하고 있어.”

셰어가 요한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퍽 다정하게 그를 달래자, 요한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웃음은 평소와는 달랐다. 요한에게서 종종 보이는 낯선 얼굴이었다. 평소의 요한은 정원에 핀 꽃처럼 생동하는 활기가 느껴졌으나, 때때로 꽃을 그럴싸하게 모사한 조화처럼 그답지 않을 때가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여러 면이 있지만 요한이라면 그렇지 않을 줄 알았다. 셰어는 그것이 거슬렸지만 지체할 겨를이 없었다.

셰어는 현관을 나선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부엌에서 현관까지 거리가 꽤 먼 탓에 전화는 그새 두 번이나 끊어졌다. 셰어는 가까스로 다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받았습니다.”

저편의 상대는 말이 없었다. 거친 숨소리가 쌕쌕 들려왔다. 셰어는 댄이 울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희미하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셰어는 딱딱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바쁜데,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하세요.”

- 셰어 니임…….

댄은 쉬어 빠진 목소리로 울먹였다. 발음이 흐리멍덩한 것이 아무래도 술에 취한 것 같았다. 셰어는 벌써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기가 어려웠다.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한숨을 들었는지 댄이 어눌한 말투로 빠르게 지껄여 댔다.

- 저 좀, 조금만 도와주세요. 미칠 것 같아요. 아무리 해도, 흐…… 어떻게 해도 안 돼요. 셰어 님이 아니면…….

애절하게 매달리는 말이 위험하게 들렸다. 이런 상대일수록 여지를 주면 안 된다. 셰어는 차가운 말투로 잘라 말했다.

“이러지 않는 게 약속 아니었습니까? 오늘은 안 된다고 했잖아요. 왜 나만 나쁜 사람 만들어요. 약속을 안 지킨 건 그쪽인데.”

- 하, 하지만…… 우리는 달랐잖아요. 특별하잖아요. 파티에도 같이 갔고, 제가 다치면 와 주시고…….

“뭔가 착각하고 있네요. 나는 모두에게 똑같이 대했습니다.”

- 하, 하지만, 하지만…….

댄은 하지만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글을 쓴다는 사람이 그 말 외에는 한 가지도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 조금 우스웠지만 셰어는 잠시 그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참에 정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참을 하지만이라는 말 외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웅얼거리던 댄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술주정뱅이의 주정을 받아 주는 것만 같아 셰어는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그 때문이었다. 완만하게 끝내야 하는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뾰족한 말이 나간 것은 요한의 집 앞에서 이런 구질구질한 통화를 하는 게 달갑지 않아서였다.

“이제 그만두는 게 좋겠습니다. 잘 지내요.”

셰어는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끝에 희미하게 오열하는 소리가 들린 것을 보면 상대는 아마 기다려 주었어도 대답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피로가 밀려들었다. 셰어는 선불 휴대 전화의 전원을 껐다. 얼마나 오래 알았든, 얼마나 깊게 얽혔든 끝은 허무할 만큼 쉬웠다. 어떤 끈으로도 묶일 수 없는 관계의 종결은 그런 것이었다.

셰어는 전화를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식탁 앞에 홀로 앉아 있는 요한이 보인다. 그는 표정 없이 앉아 길쭉하고 가느다란 와인 잔의 다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속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 셰어는 먼저 말을 걸지 못했다.

곧 셰어를 발견한 요한의 얼굴에 생생한 감정이 깃든다. 요한은 여느 때처럼 활짝 웃었다. 걱정이라곤 하나 없는 사람처럼 웃는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늦었잖아. 음식 다 식었는데 뭐라도 더 만들어 줘?”

왜 그런 얼굴이지? 셰어는 목 끝까지 치민 물음을 삼켰다. 어느 쪽이 먼저 끝을 내든 관계의 유통 기한은 길지 않을 것이다. 진심을 나누기에는 과분한 관계였다.

셰어는 요한의 옆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턱을 드는 그에게 입을 맞추자 간지럽게 닿는 숨에서 희미한 술 냄새가 난다.

“아니. 네 침실 보여 줘.”

요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그 입술이 얼마나 난잡해질 수 있는지 잘 알면서도 셰어는 그의 웃는 얼굴이 소년처럼 말갛다고 생각했다.

* * *

요한은 불현듯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막상 눈을 뜨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전히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몸을 뒤척이자 품 안의 셰어가 낮게 신음한다. 셰어는 무슨 꿈을 꾸는지 짜증스럽게 한숨을 푹 쉬었다. 요한은 그의 찌푸린 미간에 입술을 살짝 눌렀다 뗐다.

요한은 셰어가 좋았다. 처음에는 그냥 그의 얼굴이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은 그의 좋은 점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발견했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의 좋은 점을 남들보다 빨리 찾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셰어는 무섭고 까칠하지만 섬세하고 겁이 많다. 요한은 그가 사람을 곁에 두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얼핏 알 것 같았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끼는 것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때때로 셰어가 뭔가 계산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볼 때면 요한은 모르는 척 얘기하고 싶었다.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우리는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예전 같았으면 쉽게 했을 그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요한에게도 이상한 일이었다. 왠지 그에게는 그 어떤 입에 발린 말도 할 수 없었다. 요한은 셰어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리 죽여 바닥을 더듬자 한데 뭉쳐진 옷가지들이 잡힌다. 요한은 제멋대로 엉켜 있는 옷 더미를 헤치고 차갑게 식은 기계를 찾아냈다. 전원이 꺼져 있는 셰어의 선불 휴대 전화였다.

요한은 전화를 든 채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불도 켜지 않고 욕실 문을 잠근 채 전화의 전원을 켜자 창백한 불빛이 타일 벽에 희게 번진다. 그는 거울에 비친 제 얼굴에 서린 낯선 표정을 발견했다.

불안. 연인을 믿지 못하고 모두가 잠든 시각 연인의 전화를 뒤지는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남자는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요한은 그의 눈을 피해 거울을 등지고 섰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요한은 전원이 켜지고 있는 화면을 초조하게 들여다보았다. 마음을 아낌없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강한 마음을 가졌다 해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은, 특히 그 마음의 일부도 돌려주지 않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마음은 조금씩 닳아 가 요한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요한은 자신을 잃어 갔다. 사람들 앞에서는 예전처럼 말하고 행동했지만 요한은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보이지 않을 정도였던 균열은 조금씩 커져 요한을 허물고 있었다. 요한은 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메시지 보관함을 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메시지 보관함에는 여섯 명에게서 온 메시지밖에 없었다. 요한은 그 여섯 명 중 하나였고, 나머지 다섯 명은 모두 낯선 남자의 이름이었다. 그는 메시지를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다.

“하아…… 이 개새끼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요한은 거친 숨을 골랐다. 무미건조한 단어들로 구성된 대화는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있었다. 때때로 격정을 이기지 못해 죄를 청하는 남자들의 메시지에 대한 셰어의 답장은 간결했다.

[퍼시픽 호텔 10시]

익숙한 단어를 본 요한의 숨이 일순 멎었다가 다시 가늘게 이어졌다.

그들이 모두 연인인지, 혹은 섹스 파트너인지는 몰라도 일회성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심지어 그들은 모두 셰어가 자신을 만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 사이에 끼어든 것은 자신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연인 같은 게 아니었다. 만날 장소와 약속 시간만 알려 주면 그만인, 다른 다섯 남자와 똑같이 의미 없는 관계였다.

분노 때문인지 벌거벗은 몸에 한기가 스미는지 몸이 떨렸다. 요한은 욕실에 걸린 배스로브를 걸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잠든 셰어를 보자 가슴께에 맺혀 있던 것이 팍 터지는 듯했다.

요한은 침실 조명을 켰다. 갑자기 방 안이 눈이 시리도록 밝아지자 요한 역시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웠다. 셰어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려 덮으며 희미하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요한은 침대 옆에 서서 차분하게 말했다.

“일어나.”

“몇 시인데……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셰어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요한은 이불을 걷어 젖히고 셰어를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렸다. 무방비한 상태였던 셰어는 크게 저항할 새도 없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충격에 잠이 완전히 깼는지 셰어가 몸을 일으키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왜 이래? 아까 맞은 걸로는 부족해?”

“너 나가.”

“뭐?”

요한은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셰어에게 집어 던졌다. 분노로 굳어지는 셰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요한이 재차 명령했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라고.”

요한은 손마디가 희게 질릴 만큼 세게 움켜쥐고 있던 전화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셰어가 입을 다물었다. 또 그 얼굴이었다.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얼굴. 요한은 익숙한 그의 얼굴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 말도 듣기 싫으니까 그냥 좀 꺼져.”

“그렇게 못 하겠다고 하면?”

셰어는 태연하게 물었다. 몸을 일으키며 셔츠를 주워 입는 그는 조금도 잘못한 게 없는 사람 같았다. 그 때문에 요한은 자신이 뭔가 오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셔츠와 바지를 입은 셰어가 침대 위에 놓인 전화를 들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요한이 뒤져 본 메시지 보관함을 한 번 훑어보더니 전원을 껐다.

“예의 없게 굴지 마. 남의 메시지나 훔쳐보는 버릇은 어디서 배웠어?”

“지금 그게 중요해? 할 말이 그게 끝이면 나가.”

“요한.”

셰어의 입으로 발음되는 요한이라는 이름은 지나치게 나긋했다. 달콤한 마음이라도 품은 것처럼 애틋하게 들린다. 셰어의 눈은 협상가의 그것처럼 지극히 냉정한데도 그의 목소리는 솜털처럼 부드럽게 들렸다.

“처음부터 우리가 독점적인 관계라는 말은 한 적 없잖아.”

요한은 할 말을 잃었다.

여태 알아 왔던 셰어라는 남자에 대한 모든 인상이 요한의 안에서 부서졌다. 때때로 상냥하게 바라보던 눈빛이나 무척 소중한 것을 다루듯 닿았던 입술, 영영 놓치지 않을 것처럼 붙잡던 손길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해일처럼 밀려드는 감정에 쓸려 산산이 흩어졌다.

“요한,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내가 원하는 게 뭐냐고.”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요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묵직한 것이 내려가는 식도며 가슴께가 죄다 뜨끈하게 아팠다.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다. 그만 꺼져 주라.”

입을 다문 셰어의 얼굴이 무섭게 얼어붙는다. 요한은 그를 볼 때면 술렁거리던 마음속의 뭔가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전 같았으면 두려웠을 셰어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 * *

영화에서 실연의 아픔을 맛본 주인공은 흔히 두 가지 유형으로 그려진다. 위대한 인물은 아련하게 슬픔을 떨치고 일어나 성공을 거둔다. 반면에 범인(凡人)은 술을 마시고 울고 성토를 하며 전 애인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요한은 둘 중 어느 유형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처럼 공들여 옷을 고르고 적당한 시간에 출근했다. 미끈한 얼굴에는 질 나쁜 수면의 흔적조차 없었다. 요한은 분 단위로 쪼개 놓은 일정을 무탈하게 소화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그의 변화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가장 먼저 요한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은 벳시였다.

“이사님, 헤어지셨어요?”

그녀의 물음은 질문이었으나 동시에 확신이었다. 몇 초라도 짬이 나면 폰을 들여다보던 요한이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때까지 폰을 몇 번 꺼내 보지도 않았다. 그 얼굴이 정말 큰 장점이라는 인물과 헤어진 것이 틀림없다.

3개월하고도 1주일이다. 요한의 연애가 한 달 만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만하면 얼굴 하나만 보고 사귄 것치고는 오래 만난 셈이었다. 요한은 결재 칸에 번짐 하나 없이 완벽한 서명을 하며 물었다.

“티 많이 나?”

흐트러짐 하나 없이 손질된 머리칼,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혈색 좋은 얼굴, 이상적인 넥타이 매듭과 주름 없이 다려진 셔츠 등등을 찬찬히 살피던 벳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티 하나도 안 나요.”

“그럼 됐어.”

요한이 서명을 마친 서류를 정리해 결재판 사이에 끼우자 벳시가 냉큼 그것을 받아 챙겼다. 요한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펜 뚜껑을 닫았다. 그 얼굴에 우울한 기색은 없었다.

“네 말대로 한동안은 연애를 좀 쉴까 봐.”

농담처럼 한마디 툭 던지고 싱긋 웃는 얼굴은 오히려 홀가분해 보였다. 요한은 펜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벳시.”

“네?”

요한의 손가락 사이로 빠진 펜이 책상 위를 데구루루 굴렀다. 구르던 펜은 얼마 가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책상 위에서 멈추었다.

“너도 레일라가 이제 감이 떨어졌다고 생각해?”

벳시는 침착하게 요한의 물음을 곱씹었다.

레일라 바네스가 예전 같지 않다. 요한이 본격적으로 회사 일에 관여하기 시작하며 퍼진 소문이었다. V Pictures를 창립한 것은 분명 대단한 업적이었으나, 요한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겠다는 뜻을 내비치자마자 그 업적도 빛이 바랬다. 레일라 역시 다른 한물간 CEO들처럼 능력 없는 자식에게 애써 일군 기업을 넘겨주려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었다.

소문의 당사자인 요한의 귀에까지 들어올 정도였으니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 것인지는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벳시는 요한의 낯빛을 살폈으나 평소처럼 별생각 없는 얼굴로 앉아 있는 그에게서는 어떤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벳시는 짐짓 새침하게 대답했다.

“제 의견이 무슨 상관인가요?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문제가 되나요? 실적만 좋으면 그 얘기도 쏙 들어갈걸요.”

“그렇지 않으면?”

요한은 남의 일을 얘기하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레일라가 나한테 회사 일을 맡긴 게 정말 실수라면, 내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서 모든 걸 다 망친다면 그때는 무슨 일이 생길까?”

사실은 이 모든 게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레일라의 실수라면. 요한은 뒷말을 삼켰다. 가뜩이나 여론이 좋지 않은 지금, 레일라의 병에 대한 것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다. 주주들이 즉시 레일라의 실각을 안건으로 들고나와도 할 말이 없다.

어쩌면 레일라는 정말 실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한은 자신을 함부로 대했던 사람들을 몇이나 떠올릴 수 있었다. 대개 사람들은 요한의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요한의 존재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수가 그렇게 대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사님, 요즘 좀 이상하신 것 같아요.”

벳시가 불안이 깃든 눈으로 요한을 살폈다.

“예전에는 안 그러셨잖아요. 왜 이렇게 비관적이에요?”

항상 거침없이 얘기하는 벳시가 또 아픈 곳을 찔렀다. 요한은 힘없이 그러게, 하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누군가와 이별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이상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을의 자리에서 갑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을 한없이 갉아먹었던 연애의 끝은 덤덤하면서도 허무했다. 관계가 끝났다고 모든 것이 마법처럼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갉아먹힌 요한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일상은 요한을 그 자리에 둔 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간다.

벳시는 요한의 의욕을 북돋아 주려 애써 씩씩하게 그를 달랬다.

“기억 안 나세요? 이사님이 예전에 제가 할 일 못 할 일 너무 많아서 힘들어할 때 그러셨잖아요. 자신을 믿으라고. 사람이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면서요. 이사님도 자신을 믿으세요! 할 수 있어요.”

그녀의 웅변은 그럭저럭 감동적이었으나 요한에게는 조금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벳시…… 나 엿 먹이려고 이러는 거 아니지?”

“왜요? 이사님이 하신 말씀인데요.”

요한은 새삼 자신이 저렇게 정신 빠진 소리를 했던가 하고 성찰했다. 머릿속이 매일 화창하기만 했던 시절 했던 말이 되돌아오자 괜히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너 자신을 믿어. 다 잘 될 거야.

먹고 버린 사탕 껍질처럼 알맹이 없는 충고였지만 과거의 요한이 남긴 위로는 현재의 요한의 안에 선명하게 남았다. 훅 불면 날아갈 만큼 가벼운 말일지라도 무겁고 나쁜 말보다는 가볍고 좋은 말이 낫다.

요한을 따라 웃던 벳시가 말했다.

“이사님, 지금 웃을 때가 아니에요. 일하셔야죠.”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일이 반이나 남았네가 아니라 반밖에 안 남았네라는 생각으로…….”

요한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벳시가 눈으로 쌍욕을 하고 있었다. 요한은 얌전히 마우스를 잡았다. 모니터를 응시하는 그의 머릿속에는 이제 지나간 애인에 대한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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