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어디서 진동이 울리는 듯한 환청이 들린다. 셰어는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이상 증세를 무시하며 바로 내일 있을 임원 회의에서 보고할 자료에 집중했다.
데일이 실종된 후 이틀 동안 여러 루트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으나 의사 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만한 정보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결과물도 없이 회의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보고 자료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수집된 정보를 토대로 발생 확률이 높은 시나리오들을 열거한 것에 가까웠다.
셰어는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보고 자료로 샬롯을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창밖은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프로젝트팀은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 한창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셰어는 문 너머에 있을 팀원들과 불이 꺼지지 않는 비서실을 떠올렸다. 불확실한 결과물에 초조했지만, 연일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는 사람들을 더 닦달해 봤자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셰어는 뻐근한 눈가를 매만지며 폰을 확인했다. 슬슬 집중력이 바닥나고 있으니, 한참 전부터 신경 쓰이던 진동의 원인을 확인할 때가 되었다. 늦은 시간이라 업무용 폰은 잠잠했으나 그런 목적으로만 사용하는 선불 휴대 전화는 메시지가 몇 통이나 들어와 있었다.
메시지함에 들어가자 익숙한 이름들이 화면에 떠오른다. 요한, 댄, 조나단, 베인, 에릭, 브랜. 셰어는 그중 가장 상위에 있는 요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분명 한동안 바쁠 것이라고 얘기했는데도 그는 37통의 메시지를 보냈다.
“스토커, 습성을 못 버렸네.”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가 가득한 메시지를 훑는 사이 셰어의 입술이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다. 답장도 없는 사람에게 37통의 메시지를 보낸 것을 보면 요한은 아직 스토커 같은 끈질긴 습성을 버리지 못한 게 틀림없다. 37이라는 숫자가 좀 섬뜩하긴 했으나, 그가 보낸 메시지를 하나하나 읽어 보면 그 내용이라는 게 시시하기 짝이 없어서 그다지 위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요한의 메시지는 대부분 일상에 대한 것이었다. 어젯밤 꿈에 셰어가 나왔는데 기분이 이상했다거나, 점심으로 먹은 샌드위치에 든 올리브가 싫었다거나, 커피 쿠폰으로 무료 아메리카노를 얻을 수 있는 걸 알고 있었는지, 오늘은 비가 오니 우산을 챙기라든지 하는 잡다한 얘기들.
셰어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메시지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바쁜 와중에 쓸모도 없는 걸 왜 읽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한번 읽기 시작하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떨어져 있어도 자신의 통제가 닿는 곳에 요한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주인이 신경 써 주지 않아도 착하게 집을 지키고 있는 개를 보는 것처럼, 셰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티 나게 신경 쓰는 요한이 마음에 들었다.
셰어의 시선은 마지막 메시지에서 멈추었다.
[상무님아직도바쁘냐이사님도내일부터출근한다이제나도바쁘실예정섭섭해하지마]
이사라는 직함만 달았지 일은 거의 안 하는 게 아니었나? 셰어는 눈썹을 찌푸렸다. 요한이 한창 바이올렛의 뒤를 밟고 다닐 때만 해도 그는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바이올렛만을 찾았다. 셰어는 요한에게서 이사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직접 받고도 그에게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하기야 박람회 때 열심히 돌아다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의외로 일을 할 때는 하는 타입인지도 모른다. 셰어는 밤에 만나는 상대와 이런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힘내라는 말이라도 해 줘야 할까.
셰어는 문득 제 꼴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답장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무시하면 될 것을.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이런 일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쓸데없는 것에 자꾸 주의를 빼앗기는 것이 슬슬 불쾌하게 느껴졌다. 셰어는 선불 휴대 전화의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때마침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셰어는 전원이 꺼진 전화를 서랍에 넣으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여태 데일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고 있던 비서였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로 하얀 서류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데일이 보낸 소포입니다. 퀵으로 보낸 것 같은데, 방금 도착했어요.”
그녀의 음성이 긴장으로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셰어는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서류 봉투를 잠시 노려보았다. 침착하게 서류 봉투를 개봉하던 손길이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봉투 안에 든 것은 한 뭉치의 서류였다. 셰어는 두꺼운 서류를 재빠르게 넘기며 속독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셰어는 한참 만에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10분 뒤에 팀원들 회의실로 소집하세요. 내일 회의 장표, 처음부터 다시 짭니다.”
“알겠습니다.”
비서가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셰어는 울렁거리는 속을 누르며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정보원은 사라졌지만 그가 가진 정보는 남아 있다. 이 정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지는 충분히 검토해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었으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만은 분명했다.
교착 상태에 머물러 있던 프로젝트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 * *
평소대로라면 회의 시간 5분 전이면 나타나곤 하던 살롯은 회의 시간이 임박해서야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착석하자마자 미리 뽑아서 들고 온 자료를 펼치며 말했다.
“시간 없으니 연구소 프로젝트부터 시작합시다.”
시작도 하기 전부터 샬롯은 심기가 불편한 듯했다. 셰어는 타는 속을 달래려 앞에 놓여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화면에 미리 띄워 둔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넘기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요약 장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유니콘은 인수하면 안 됩니다.”
CTO와 CFO의 표정에서 희비가 엇갈렸다. 격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 임시직인 임원의 특성상 매년 성과 관리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성과 평가 항목에 연구소 프로젝트 진행도가 들어 있는 CTO와 재무 안정성이 들어 있는 CFO의 이해관계가 상이한 것은 당연했다.
CTO는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이제 막 회의가 시작됐으니 말을 아끼려는 듯했다. 셰어는 보고를 경청하는 이들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유니콘은 특허 분쟁에서 질 겁니다. 다음 장표를 보시면 유니콘의 기술 특허에서 중대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슬라이드가 넘어갔다. 셰어는 구성을 고려하여 보기 좋게 배열한 화면을 보며 쉬운 용어로 요점을 설명했다. 그는 기술에 대한 부분은 완벽하게 알지 못했지만, 어차피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그 모든 디테일을 세세하게 아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다. CTO와 샬롯. 셰어는 두 사람의 반응을 살폈다.
CTO는 여전히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아직은 입을 열 생각이 없는지 입을 굳게 다문 채였다. 하지만 쉽게 안도할 수는 없었다.
샬롯이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물었다.
“이 자료, 어디서 받은 겁니까? 유니콘 쪽 정보원이 이걸 다 주던가요? 회사의 치부나 마찬가지인데.”
“그쪽 정보원은 이직을 원하더군요. 온전하지 않은 특허보다 이미 핵심 기술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데려오는 게 더 이득이죠. 값도 더 싸게 치고요.”
침묵하던 CTO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래도 같은 업계인데…… 이런 식으로 이직하면 곤란할 텐데요?”
“외부 자문 형태로 계약하면 됩니다. 법인 하나 끼고 세탁하면 문제 될 거 없습니다.”
외부 자문 업체는 언제든 자를 수 있다. 대놓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기술만 빼먹고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샬롯이 처음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물었다.
“그걸 그 정보원이 수락하겠다고 했습니까?”
한고비를 넘었다. 셰어는 이번 난관의 끝이 다가왔음을 알았다.
“수락하게 될 겁니다.”
데일은 신변을 위협당하고 있다. 어제 도착한 소포에 함께 첨부된 편지가 그의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흔한 이야기였다.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회사는 나쁘지 않았으나, 데일은 더 큰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데일이 꿈꾸는 기업에서는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결혼하고 식구가 늘어나면서 본격적으로 이직을 준비하는 것도 먼 얘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때마침 기회가 생겼고, 데일은 기회를 잡기로 했다.
인수가 무산되고 특허 소송에 휘말린다면 유니콘은 회생할 수 없을 것이다. 사장은 오랫동안 알아 온 직원의 배신에 분노해 이를 갈고 있다고 한다. 데일은 칼을 갈며 자신의 신상을 추적하는 사장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숨어 있다고 했다. 위기에 몰린 짐승을 유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터였다.
자신 있게 대답하는 셰어를 잠시 바라보던 샬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합시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한 차례의 시험이 지나갔다. 셰어는 들뜨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차분한 표정으로 다음 안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아닌 척했으나 나름대로 긴장을 하긴 했었는지, 혈관을 빠르게 도는 피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처럼 손끝이 욱신거렸다.
한 가지 실수를 해결하니 바로 그 실수를 저지르게 된 계기인 남자가 떠올랐다. 앞으로 바빠질 예정이라고 했던 남자, 그로 인해 셰어는 크고 작은 문제를 겪어야 했다. 결말이 좋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셰어는 요한의 몸이 생각났다.
셰어는 그의 맹목적인 애정을 시험하고 싶었다. 요한은 익숙하지도 않은 취향에 맞춰 몸을 내어 주고, 답장도 주지 않는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셰어는 요한이라면 아무리 바쁘더라도 자신이 부르면 즉시 달려와 꼬리를 흔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모습을 보면 흡족한 기분이 들 것 같다. 단지 그뿐이었다.
* * *
요한은 보낸 메시지만 가득한 화면을 쭉쭉 올려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는 어제저녁에 보낸 것이었다.
[상무님아직도바쁘냐이사님도내일부터출근한다이제나도바쁘실예정섭섭해하지마]
그런데 막상 출근해 보니 생각보다 바쁘지 않아서 셰어에게 연락할 시간이 충분했다. 하지만 요한은 메시지를 더 보낼 수가 없었다. 하필 마지막에 그런 내용의 메시지를 보낸 터라, 답장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더 붙이려니 좀 민망했던 것이다.
3일 전, 셰어는 복잡한 일이 생겨 바쁠 것 같다는 메시지 한 통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요한은 3일 내내 연락이 안 될 만큼 바쁜 일이라는 게 무엇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벳시, 넌 애인이 연락이 없으면 얼마나 기다려 줄 수 있어? 음…… 미리 바쁘다고 얘기한다면.”
인수인계 자료를 정리하던 요한의 비서 벳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사님, 또 연애해요?”
“내가 언제는 연애 안 한 적 있어?”
“그러니까요. 이사님은 연애를 좀 쉴 필요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중독이야.”
요한이 사랑에 빠질 때마다 어떤 주접을 떠는지 익히 겪어 잘 알았던 벳시는 벌써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벳시는 본래 로마노프와 함께 요한을 담당하는 비서였으나, 자질구레한 일들의 대부분은 로마노프가 담당하곤 했다. 그녀는 주로 회사 업무와 관련된 일을 전담했다. 처음 V Pictures에 입사한 이래로 4년 가까이 요한의 비서로 일했으니, 여태 요한을 거쳐 간 비서 중 가장 오래된 베테랑인 셈이었다.
벳시는 모든 면에서 유능했으나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녀는 때때로 요한을 조금 덜떨어진 동생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요한이 때때로 끝도 없이 별난 짓을 벌이곤 했기 때문에, 벳시의 무례한 취급도 모두에게는 적절한 조치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답장 없는 전화를 내려놓은 요한이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벳시가 정리해 놓은 자료를 죄다 흐트러뜨렸다.
“벳시, 너무 오랜만이라 까먹었어? 내가 상사인 건 기억하지?”
“전 3일 이상은 못 기다려요. 솔직히 연락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요? 전화가 없던 시절에도 편지로 연락했는데, 아예 연락이 없는 건 그냥 마음이 없는 거죠.”
벳시가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요한은 그녀의 논리에 설득당해 심술을 부리는 중이었던 것을 잊었다. 하필 3일이라니. 정확하게 오늘이 셰어와 연락이 안 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요한은 심각해진 얼굴로 턱을 괴었다. 전보다 조금 마른 듯 뚜렷한 선이 두드러진 얼굴은 한결같이 근사했다. 그 잘생긴 얼굴을 잠시 감상하던 벳시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렸다.
“이사님, 연애해서 그런지 더 잘생겨지셨네요.”
“그치? 고마워. 걔도 그걸 좀 알아야 하는데.”
근데 입만 다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벳시는 목까지 치민 말을 삼켰다. 그녀는 말없이 요한의 앉은키만큼 쌓인 서류를 그의 앞에 밀어 주었다. 요한은 조금 질린 얼굴로 서류의 탑을 바라보았다.
“벳시, 이거 언제까지 봐야 해?”
“내일까지요.”
“농담이지?”
“농담일까요?”
벳시는 방긋 웃으며 제일 위에 놓인 회사 소개서를 요한의 앞에 내려놓았다. 레일라는 요한이 필요한 정보를 다 배우기까지 딱 한 달의 기한을 주었다. V Pictures의 매출 규모도 모르는 요한을 쓸 만하게 만들려면 스파르타식 교육이 필요했다.
“오늘은 제가 기본적인 걸 말씀드리겠지만 내일부터는 각 부서장이 교육할 거예요. 명색이 이사인데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 얼마나 부끄러우시겠어요?”
벳시는 구구절절 맞는 말만 했다. 요한은 자세를 바로 하며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하기로 했으니 그 역시 대충 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요한은 목표로 한 일에 대해서만은 근성이 있는 편이었다.
그때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폰이 진동했다. 요한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C의 메시지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오늘 퍼시픽 호텔 10시]
셰어의 메시지는 늘 간결했으나 이번에도 썰렁할 만큼 짧고 단조로웠다. 며칠 내내 연락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사람이 보냈다기에는 지나치게 간단한 메시지였다.
할 말이 그뿐인가. 요한은 가라앉은 얼굴로 회사 소개서를 펼쳤다.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요한은 셰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이 바쁜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낼 짬이 난다면 좀 더 부드러운 말을 건넬 수도 있지 않은가. 반대의 상황이라면 요한은 저보다 더 나은 얘기를 몇 가지도 더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답장이 없는 셰어에게 요한은 보고 싶다고 했고, 바빠도 몸은 잘 챙기라고 했고,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말을 전했지만 셰어게서 돌아온 것은 그 어떤 말에 대한 답변도 아니었다.
요한은 그에게 바쁜 일은 정리가 잘 되었는지, 이제 다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었다. 혹시 셰어가 얘기를 들어 줄 여유가 된다면 자신에게 있었던 일도 들려주고 싶었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며칠간의 복잡한 심경을 그가 들어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요한은 앞에 쌓인 일들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할 일이 있으니 오늘 셰어를 만날 수는 없을 터였다. 그에게 갈 수 없다고 얘기해야 하는데, 온종일 셰어의 연락만 기다린 사람처럼 바로 답장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메시지를 대놓고 훔쳐본 벳시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애인과 연락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메시지가 오가는 수준을 보니 요한이 꼼짝없이 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벳시는 자신의 상사가 연애할 때마다 주접을 떠는 게 싫었지만, 그보다 요한이 어디서 개 밥그릇만도 못한 대접을 받는 게 더 싫었다.
“이사님, 오늘 보실 부분이 좀 많은데 휴대폰 전원을 잠깐 꺼 두시는 게 어떨까요?”
벳시가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하자 요한은 의심 없이 순순히 전원을 끄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기운 없이 서류를 팔락거렸다. 수심에 잠긴 그의 얼굴이 안타까워 벳시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여간 저렇게 생긴 얼굴로 불쌍하게 축 처져 있으니,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벳시는 사랑의 아픔을 다른 일로 치유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는 요한을 잠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외워야 하는 글자와 숫자들이 끝없이 펼쳐졌다. 요한은 매출 흐름과 수익 구조를 달달 외우며 셰어를 원망했고, 투자 포트폴리오를 보며 셰어를 궁금해했으며, 부서별 진행 과제를 살피며 셰어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운하던 감정은 밤이 깊어질수록 술에 물을 탄 것처럼 묽어졌고, 복잡한 감정의 칵테일에 달콤한 감상이 농도 짙게 깔렸다. ‘어쩌면’이라는 기대는 강력했다. 어쩌면 셰어는 연락 한 번 하기 힘들었을 만큼 정말 많이 바빴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셰어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연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토록 짧은 메시지밖에 보내지 못할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자 단조로운 몇 글자의 메시지가 퍽 낭만적인 약속의 말처럼 느껴졌다. 요한의 시선이 꺼진 휴대폰 화면을 향하는 횟수는 늘어났고, 그 간격은 점차 짧아졌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벳시가 싸늘하게 빈정거렸다.
“이사님, 그렇게 좋으세요?”
몇 분째 넘어가지 않는 보고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던 요한이 민망한 듯 웃었다.
“이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닌 걸 어떡해.”
벳시는 혀를 차며 요한의 손에 들려 있던 보고서를 빼앗았다. 이래서 남의 연애 문제에는 끼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무슨 취급을 받든 마냥 좋기만 한 시기인지 요한은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벳시는 요한이 항상 처음부터 내일 없이 감정을 퍼부어 대니 그 지속 기간이 터무니없이 짧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음이란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요한이 헤어질 때도 똑같이 했던 말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좋아 죽던 상대와 칼같이 헤어진 날도 요한은 이유를 묻는 벳시에게 같은 말을 했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그러니 마음이 가는 대로 해야지.”
첫사랑을 시작한 10대도 하지 않을 법한 순진한 낭만주의자의 말에 벳시는 그저 웃고 말았다. 어찌 보면 그만한 순수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대개 순수한 감정이란 현실에 마모되어 쉽게 손상되기 마련이었으나, 줄곧 현실과 유리된 삶을 살아온 덕분인지 요한은 본연 그대로의 순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를 매일 현실에서 재현할 수 있는 남자와 연애하는 것은 어떨까를 잠시 상상해 보던 벳시는 금세 치를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몽상가와 연애하는 것은 한 번쯤이라면 해 볼 만한 경험이나 영원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상이란 매일 크리스마스처럼 찬란할 수 없고, 꿈은 반드시 깨기 마련이다.
“대단한 로맨티시스트 나셨네요. 계속 그렇게 흘끔거리실 거면 그냥 연락해 보세요. 어차피 진도는 대충 다 나갔으니 나머지는 내일 마저 하죠.”
“그래도 돼?”
요한은 여태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반색하며 냉큼 폰을 집었다. 요한은 전원이 켜지는 동안, 그 짧은 시간을 견디지 못해 다리를 달달 떨어 댔다. 그 때문에 책상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진동한다.
벳시는 아니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책상 위에 널려 있던 자료들을 과격한 소리를 내며 정리했다. 사탕이라도 문 것처럼 달콤하게 풀어져 있는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속이 꼬이려 했다. 남은 이 시간까지 야근을 시켜 놓고, 본인은 연애를 하느라 활짝 편 얼굴을 보니 참 얄미웠다.
“어디가 그렇게 좋으세요?”
그녀가 심술궂게 묻자, 요한은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얼굴?”
“그렇겠죠……. 그리고요?”
여태 요한이 만나 온 이들의 면면을 이미 대부분 알고 있던 벳시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요한은 매번 첫눈에 반하곤 했다. 그리고 뻔하게도, 첫눈에 반하기 위한 기본 조건은 혹할 만한 외모였다.
요한은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다.
“다른 건 모르겠고 얼굴이, 정말 큰 장점이야.”
그러니까 결국 얼굴이 다라는 말이었다.
“아, 네…….”
벳시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대체 얼굴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리고 또 하나는 역시 오래는 못 가겠네 하는 것이었다. 벳시는 요한의 애인 후보를 머릿속으로 몇 명쯤 떠올려 보다 말았다. 요한을 스쳐 간 사람은 해변의 모래알만큼 많았다. 오래가지 못할 것이 뻔한 상대를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 * *
어제까지만 해도 끈질기게 메시지를 보내던 요한은 한참 전에 보낸 메시지에도 답장이 없었다. 일이 바빠질 예정이라고 한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셰어는 호텔로 이동하며 요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는 신호가 가기도 전에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무리 일이 바쁘다 하더라도 굳이 전화를 끌 필요까지야 있었을까. 셰어는 흘러가는 차창 밖의 풍경을 불만스럽게 노려보았다. 맨날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개에게 물린 기분이었다. 간이든 쓸개든 다 빼 줄 것처럼 매달릴 때는 언제고 건방지게 전화를 꺼 두다니.
어쩌면 일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바쁜 것인지도 모른다. 요한의 화려한 과거는 가십에 그다지 민감하지 않은 셰어 역시 알고 있었다. 요한은 매일같이 스캔들이 터지는 Page 6의 얼굴마담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아무리 모르려고 해도 속세와 거리를 둔 자연인이 아니고서야 모를 수가 없었다.
요한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는 상대가 바뀌었으니 이번에도 그의 기준으로는 감정의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셰어는 요한의 열렬한 구애가 진심일 수도 있다는 것은 일부 긍정했으나, 그 유효 기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완전히 확신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대체품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가치는 없다. 손실을 대비해 안전 재고를 마련해 두지 않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셰어는 요한의 이름 아래로 줄지어 선 메시지들을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오늘 저녁 시간이 어떠냐는 공손한 물음이었다. 셰어는 그중 적당한 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퍼시픽 호텔 10시]
답장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을 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곧 가겠다는 답장이 왔다. 셰어는 메시지를 확인한 후 폰을 꺼 버렸다.
대체품이 다섯이나 있으니 아무 문제 없다. 설령 그 대체품 중 일부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다른 대체품이 있으니 공백은 없을 것이다. 문제가 없다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되새기고도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셰어는 모래알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뻑뻑한 눈을 감았다.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열이 오른 눈알 뒤에서부터 시작된 뻐근한 동통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호텔에 가서 샤워를 하고 플레이를 즐기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셰어는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오늘 할 만한 플레이가 뭐가 있을지를 고민했다.
잠든 것처럼 고요히 눈을 감은 셰어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씩 부딪치기 시작하는 차창을 투과한 불빛이 얼룩처럼 번진다. 가늘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비 냄새는 그다지 상쾌하지 않다. 셰어는 비 한 방울 맞지 않았으나 어디서 비 냄새가 스멀스멀 끼쳐 오는 듯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는 딱히 좋아하는 날씨는 없었지만 싫어하는 날씨는 많았다. 그중에서도 비가 오는 날은 최악이었다.
셰어는 컨시어지에 손님이 도착하면 바로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한 후, 더러운 기분을 씻어 내기 위해 착실하게 움직였다. 오물을 뒤집어쓴 듯한 기분을 지우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아주 오래, 긴 샤워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셰어의 머릿속에서 과격한 플레이가 시뮬레이션되고 있었다. 에네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파트너의 배가 빵빵하게 부풀도록 관장액을 주입하고 애원의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입을 좆으로 틀어막고 싶었다. 그 와중에 파트너가 몇 가지 실수를 한다면 더는 질질 흘리지도 못하게 묶은 채 가죽 패들로 엉덩이와 허벅지를 때려 줘도 좋을 것이다.
침실에 비치된 커다란 금고에 둔 패들은 맞는 면이 좁고 단단해, 보통의 패들보다 더 아프고 유독 선명한 흔적이 남았다. 그것으로 허벅지와 엉덩이를 고루 때려 주면 다음 날에는 어디에 앉는 것 자체가 곤혹스러울 것이다. 고통을 달콤하게 여기는 그의 파트너라면 어딘가에 앉는 것만으로도 속옷을 적실지 모른다.
그런 곤혹스러운 사태를 막으려면 인자하고 세심한 주인으로서 정조대를 채워 줄 필요가 있다. 앞도 뒤도 막아 주면 그의 파트너는 앉을 때마다 엉덩이가 아무리 간지러워도 조신하게 속옷을 적시지 않을 수 있다. 그러고도 조신하지 못한 짓을 한다면, 아마 이전에 한 플레이가 제법 다정한 것이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종일 개처럼 카펫이 깔린 호텔 바닥을 기어 다니며 위아래로 셰어의 좆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오직 셰어의 것만을.
상상은 플레이 파트너와 DS의 경계를 오간다. 셰어는 그중 절반가량은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플레이를 할 때만 돔과 서브의 관계가 될 수 있는 셰어의 파트너들은 대부분 일상에 지장을 주는 플레이를 선호하지 않는 편이었다. 셰어 역시 그 부분은 이해했으나 상상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어느새 셰어의 머릿속에서 그 과격한 플레이의 상대는 요한으로 바뀌어 있었다. 요한의 목에 목줄을 채울 것이다. 하얀 꼬리가 달린 플러그를 꽂아 주면 손가락보다 조금 두꺼운 것을 삼키는 것도 버거워하는 요한은 제대로 기지도 못하고 바닥에 늘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목줄을 당기면 요한은 배 안이 엉망으로 짓눌려도 네발로 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남자라면 목이 졸리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바닥을 기는 것을 택할 것 같았다.
그러게 얌전히 뒤를 잘 따라왔으면 좋았잖아. 사람 빡치게 하지 말고.
셰어는 미적지근한 한숨을 토해 냈다. 만성적인 욕구 불만이 지속되고 있었다. 플레이를 통해 욕망을 푼다 해도 목 끝까지 차올랐던 수위만 낮아질 뿐, 해소되지 못한 욕구는 셰어의 안에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수십 개의 이빨을 가진 욕망이 등 뒤에서 덮쳐 와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다. 셰어는 그 위험한 욕망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허기진 욕망을 달래기 위해 주기적으로 먹잇감을 던져 주는 것뿐이었다.
긴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었던 10시가 훌쩍 지난 시각이었다. 인기척은 없었다. 셰어는 빠르게 치솟는 불쾌감을 누르며 전원을 꺼 두었던 선불 휴대 전화를 켰다. 밋밋한 배경 화면이 떠오르자마자 메시지가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중 태반은 요한이 보낸 것이었다. 셰어는 요한의 메시지를 읽지도 않고 삭제했다. 이미 요한의 기회는 지나갔다.
[셰어 님, 사고가 나서 오늘은 못 갈 것 같습니다. 다치지는 않았는데 차도 퍼지고 도로도 꽉 막혀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운이 나쁜 날이었다. 셰어는 파트너에게 적당히 답장을 보낸 후 전화를 아무 데나 던져두었다.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는 한참 굵어져 있었다. 물에 번진 네온사인과 도심의 불빛들이 아련하게 뭉그러진다. 찬란한 마천루 아래 차가 줄지어 선 도로의 젖은 아스팔트는 물 위로 떠오른 범고래의 등 같다. 대로변을 따라 알록달록한 우산을 쓴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일상적인 풍경이 이상하게 멀게만 느껴진다. 셰어는 이래서 비가 오는 날이 정말 싫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요란한 발소리가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지른다. 셰어의 파트너 중에 이토록 무례하게 들이닥치는 상대는 없었다. 쿵, 쿵,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리고 복도 끝에서 멎었다.
창을 향해 서 있던 셰어가 뒤를 돌아보았다. 침입자는 어두운 복도 끝에 선 채 빗물을 하염없이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야경의 어스름한 불빛에 물든 남자는 손에 바스락거리는 뭔가를 들고 서 있다. 남자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요한은 손에 든 것을 셰어를 향해 내밀며 그에게 다가갔다. 순간 그가 내민 것이 칼이라도 된 양 심장이 뜨끔해져 셰어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요한은 셰어가 물러나는 것을 보고도 거침없이 셰어의 앞까지 다가갔다. 셰어의 등이 창에 닿아 서늘하고 축축한 냉기가 끼쳤다. 그의 앞을 수비하듯 가로막은 요한의 두 눈은 셰어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채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셰어는 그가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후에야 그가 손에 든 것이 꽃다발이라는 것을 알았다. 플로리스트의 손에 의해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한 다발씩 묶어 파는 크고 풍성한 꽃다발이었다. 생생한 장미 특유의 향기가 코를 찔렀다. 셰어는 그 꽃다발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벙벙해졌다.
요한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희고 미끈한 이마를 드러낸 채 웃었다.
“사실은 못 올 뻔했는데…… 사고가 났거든. 길이 너무 막혀서 차를 버리고 왔어. 아무래도 나 좆 된 거 같지?”
“너 미쳤어? 사고가 났는데 차도 버리고 여길 왜 와?”
“그러게. 나도 내가 좀 미친 것 같아.”
요한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계속 실실 웃기만 했다. 가시 돋친 말이 몇 가지나 생각났지만 셰어는 입을 다물었다. 사고가 난 도로에다 차를 버리고 몇 블록일지 모를 거리를 비를 맞으며 걸어온 남자가, 형편없이 수수한 꽃을 내미는 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셰어는 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요한은 셰어가 대단한 것이라도 해 준 것처럼 기쁘게 웃었다.
“너, 그 꽃 드니까 정말 예쁘다.”
정말 정신이 나가기라도 했는지 요한이 허튼소리를 했다. 셰어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 미친 짓이 제법 달콤하게 느껴지는 게, 덩달아 미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요한은 부르면 항상 온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엉망인 꼴이 되어도, 늦더라도, 그는 반드시 온다.
기묘한 만족감이 피어오른다. 그것이 셰어의 등 뒤를 바짝 쫓아오던 욕망의 허기진 배 속을 채웠다. 오래지 않아 다시 속이 빌 것이 뻔했지만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던 격렬한 감정이 놀랍도록 평온해졌다.
처음으로 느껴 보는 평화였다.
셰어는 줄기의 가시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새빨간 장미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자잘한 상처가 난 부드러운 꽃잎이 셰어의 손가락에 밀려 흐트러진다. 항상 완벽하게 다듬어진 물건만을 가졌던 셰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장미는 왜 샀어?”
“너 장미 싫어해?”
외계인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요한과 하는 대화는 때때로 다른 세계의 사람을 만난 것처럼 같은 말을 쓰고 있으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았다.
셰어는 행사에서 의례적으로 건네주는 꽃다발을 받은 적이야 있었지만 이렇게 극적으로 형편없는 꽃다발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남자에게 이런 짓을 할 생각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지, 셰어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샀냐고.”
“내가 연락도 못 하고 늦었잖아. 너 화났을 거 같아서.”
그러니까 화난 애인을 달래고자 오는 길에 꽃을 산 모양이었다. 셰어는 영락없이 토라진 애인 취급을 당한 것이 묘하게 거슬렸다. 고민할 것 없이 당연하다는 듯한 요한의 태도가 숱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요한은 분명 자신의 다음번째 애인에게도, 그다음 번째 애인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사과를 할 것이다.
“너는 매번 이런 식으로 애인을 달래 주나 봐.”
셰어는 삐딱하게 이죽거렸다. 요한이 자신의 화를 풀어 주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가 당장 수십 가지쯤 떠올랐다. 아마 요한은 그중 하나도 상상해 내지 못할 것이다.
할까 말까를 고민하는 셰어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서늘한 눈빛을 마주한 요한이 억울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아, 또 왜 이러실까. 오랜만에 보는데 우리 좀 사이좋게 지내면 안 돼? 나 진짜 너 보고 싶었단 말이야.”
은근슬쩍 셰어의 허리를 감아 오는 요한의 손길에 반성하는 기색이란 없었다. 요한은 빗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기울여 셰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목덜미에 빗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지는 바람에 셰어는 눈살을 찌푸렸다.
요한은 젖은 몸을 셰어에게 기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퍽 가련한 척하는 얼굴로 입이라도 맞출 듯 고개를 기울이자 얼음처럼 냉담하게 굳어진 셰어의 입술에 간지러운 숨이 닿았다.
“너는 3일 내내 연락도 없었으면서. 나도 일하느라 늦은 건데 계속 이렇게 화낼 거야? 어?”
요한은 셰어의 얼굴 곳곳에 연신 쪽쪽거리며 입을 맞춰 댔다. 그럴 때마다 그에게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고 시나브로 옷이 젖어 든다.
어째서 불쾌하지 않을까. 옷이 젖는 것도, 눅눅한 비 냄새가 나는 것도 전부 싫어하는 것뿐인데.
셰어는 멋대로 입을 맞춰 대는 요한의 얼굴을 밀어냈다.
“빗물 흘리지 말고 당장 욕실로 꺼져.”
“갈 거야. 안 그래도 으슬으슬 추워 죽겠다.”
줄곧 끈덕지게 달라붙을 것 같았던 요한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춥다며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아직 날씨가 서늘한데 칠칠치 못하게 비를 맞고 다닌 것이 문제다.
셰어는 눈살을 찌푸리며 요한의 이마와 뺨, 목덜미를 번갈아 더듬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다. 춥다고 엄살을 떠는 것이 혹시 열이라도 나서인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요한은 묘한 눈으로 셰어가 하는 짓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꼭 저를 놀리는 듯해 셰어는 이를 갈 듯 을러댔다.
“안 가?”
“간다니까. 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요한이 재빨리 셰어의 입술을 훔치고 달아났다. 셰어는 그가 닿았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희미하게 비 냄새가 나고, 무척이나 축축했다.
잽싸게 달아나는 요한의 뒤로 긴 웃음이 꼬리처럼 늘어졌다. 그를 잡아다 멋대로 구는 버릇을 고쳐 줄 수도 있었지만 셰어는 그러지 않았다.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꽃에 약이라도 발랐나. 셰어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장미를 노려보았다. 뾰족뾰족한 가시가 선 줄기가 유독 날카로워 보였다. 그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수더분한 꽃다발을 얌전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바닥에는 요한의 흔적이 점점이 남아 있었다. 반들거리는 물기가 남은 대리석은 자칫 잘못 밟으면 넘어져 머리를 깨기에 알맞다. 셰어는 물기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요한은 그새 욕실에 들어가 씻기 시작했는지 문이 닫힌 욕실에서는 시원한 물소리가 쏟아지고 있었다.
묘한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쫄딱 젖어 있을 요한의 나신을 환한 불빛 아래에서 확인하고 싶은, 지극히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었다.
셰어는 소리 없이 욕실 문을 열었다. 욕실은 습기로 가득 차서 시야는 뿌옇고, 물기를 짠 옷은 세면대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 허연 증기를 뿜어내는 샤워 부스 안에서 움직이는 살색의 형태가 야릇한 감상을 부추긴다.
머리를 감는지 두 손을 머리칼 사이에 묻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요한이 수상한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셰어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미친, 깜짝이야! 뭐야, 노크도 없이. 심장 떨어질 뻔했잖아.”
요한이 씩씩거리며 성질을 부리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던 셰어가 짐짓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그새 몰래 자위라도 했어?”
“뭐래. 애인이랑 호텔 와서 자위하는 미친놈이 어딨어. 너, 안 나가?”
볼 거 다 본 사이이면서도 요한은 뭐가 부끄러운지 몸을 틀어 서며 셰어를 힐끔거렸다. 셰어가 그곳에 서 있는 것이 썩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쭈뼛거리는 그 얼굴이 우스워 셰어는 조금 웃고 말았다. 요한이 어떻게 생각하든 셰어는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자위하는 거 보여 주면 나갈게.”
“그냥 거기서 실컷 봐라.”
요한은 해탈한 얼굴로 몸을 활짝 편 채 거품을 씻어 냈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요한은 셰어가 영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자 마음을 비운 듯했다. 그는 아예 보란 듯이 거품이 뚝뚝 흐르는 몸을 틀어 그럴듯한 포즈를 취하기까지 했다. 패션 화보에 나올 법한 과장된 자세를 취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터진 웃음이 번진다.
“너 이런 거 연습해?”
“소방관 달력이 많거든. 갖고 싶으면 말해.”
“필요 없어. 그딴 게 대체 왜 많아?”
“아, 레일라가 섹시한 소방관을 좋아해.”
하마터면 레일라는 또 누구냐고 쏘아붙일 뻔한 셰어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잠깐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니 V Pictures의 총수, 요한의 모친이 레일라 바네스였다. 어쩐지 깊게 대화해 보지 않아도 레일라 바네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셰어가 입을 다문 사이, 요한은 드물게 울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꼭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봐 줘야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셰어는 그런 질문을 해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관계는 상대적이다. 셰어가 물음을 던지면 요한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할 것이다. 섹스만을 목적으로 시작된 관계가 일상으로 넘어가면 그다음부터는 둑이 터지듯 서로의 생활에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어진다. 어느 쪽을 택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요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그런 적 없어? 내가 하는 일에 자신이 없었던 적.”
상담 시간이 시작된 모양이다. 질문의 내용이 제법 무거웠다. 셰어는 난감함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답을 무조건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일반론을 가져와 대답했다.
“있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
“잘하도록 해야지.”
“야, 너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냐?”
셰어는 적당한 스몰 토크나 목적이 있는 대화에는 능숙했으나, 이토록 진지한 화제에 관해 얘기를 나눠 본 적은 드물었다. 반면에 요한은 대화의 단계라는 게 없는 듯했다. 그는 안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은 상대와 나눌 만한 대화, 막 사귀기 시작한 애인과 나눌 만한 대화, 오랜 지인과 나눌 만한 대화의 주제를 따로 나누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처럼 거리감 없는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셰어는 어렵사리 적당한 말을 끼워 맞췄다.
“이게 성의 운운할 문제인가? 자신이 있든 없든 잘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와야지.”
“그건 그렇긴 한데……. 뭐, 잘해야지…… .응.”
몇 번이고 잘해야 한다는 말을 주문처럼 웅얼거리던 요한은 이내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묵묵히 샤워를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셰어는 속이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토록 우울한 얼굴로 내내 입을 닫고 있는 것은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셰어는 어쩔 수 없이 묻고 말았다.
“무슨 일인데?”
셰어는 물음과 동시에 후회했다. 어떻게 해 줄 수도 없고, 어떻게 해 줄 생각도 없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더구나 요한과 자신은 이런 얘기를 나눌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셰어는 요한이 너무 심각한 얘기를 늘어놓을까 봐 긴장했다.
“자세히는 말 못 해. 아무튼, 고마워.”
하지만 셰어는 정작 요한이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자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나한테 자세히 말 못 할 일이 뭔데?”
“집안일이야. 이건 진짜 말 못 해.”
“그럼 처음부터 얘기를 꺼내지를 말든가. 얘기는 네가 먼저 꺼냈으면서 왜 이제 와서 말을 못 하겠대.”
“아니, 그냥 물어본 거잖아.”
요한이 아주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를 보자 셰어도 속이 갑갑해졌다. 왜 이딴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요한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게 기분이 더러웠다.
이런 걸 알아서 뭘 어쩌려고. 이 남자에게 진짜 애인 노릇이라도 해 줄 셈인가. 셰어의 머릿속에 서늘한 물음이 떠올랐다. 불투명하던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일이 힘들어서 그런다, 일이.”
셰어는 요한이 엉뚱하게 말을 돌리려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는 캐묻지 않았다. 모든 것이 명징해졌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샤워를 마친 요한이 물을 끄고 샤워 부스에서 나오자 셰어의 시선이 그를 따라간다. 요한은 물을 철벅철벅 흘리며 아무렇게나 타월을 집어 들어 물기를 닦아 냈다. 물기가 닦여 나간 요한의 몸에는 아직 지난 정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셰어는 무심코 그의 등에 남은 울혈을 손끝으로 콕 찔렀다. 빨간 멍울이 진 등을 찔리는 바람에 흠칫 놀란 요한이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 셰어를 노려보았다.
“너…… 나랑 이러려고 만나?”
요한이 파르르 떨며 화를 내는 꼴이 우스웠다. 그저 등을 찌른 것뿐인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요한의 낯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셰어는 웃음이 번지려는 입술을 억지로 내렸다.
“순진한 척하지 마. 너도 이럴 생각으로 달려온 거 아냐?”
“아니, 내 순정을 이렇게 매도하네.”
순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래서, 아니라고?”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 셰어를 마주 보던 요한의 얼굴이 점점 달아올랐다. 무슨 상상을 하는지 뻔히 보였다. 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희미하게 달아오른 살결을 보고 있자니 셰어 역시 같은 것이 떠올랐다.
셰어의 시선이 요한의 허리 아래로 내려간다. 그의 몸이 선명하게 달아올라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뜨거운 열을 품은 손이 셰어의 눈을 가렸다. 눈앞은 손바닥에 가려져 캄캄했지만 그래도 망막에 남은 잔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흐트러진 숨소리가 다가오는 것을 알았지만 셰어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익숙한 어매니티의 향기가 다가오고 입술이 닿았다.
그는 어째서 이렇게 뜨거울까? 셰어는 의문을 품었다. 맞닿은 몸이며 손, 입술, 숨결까지 전부 열이 절절 끓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 열을 탐하며 셰어가 요한의 뒤통수를 할퀴듯 감싸 쥐었다. 맞닿은 입술이 관대하게 벌어졌다. 셰어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는 혀는 정중하게 입 안을 파고들었고, 불씨를 들쑤시듯 열점을 훑으며 뱃속에 잠든 욕망을 깨웠다.
셰어의 입술을 새로 빚어낼 듯 느릿하게 비벼 대던 요한이 고개를 기울여 입술을 떼자, 젖은 입술에 가느다란 숨이 스친다. 요한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 좀 감아. 민망하게.”
여태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는 이유가 고작 그거였던가. 요한이 뱉는 음절마다 입술에 간질거리는 숨이 닿는다. 그 숨이 달고 간지러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싫어.”
떨어졌던 입술이 허겁지겁 다시 겹쳐졌다. 어디가 터졌는지 셰어의 입 안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그와 닿은 곳부터 시작된 지끈거리는 열감이 몸속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지나치게 서로에게 몰두하는 입맞춤은 까마득한 높이에서 추락하는 감각과도 닮았다. 앞은 캄캄하고, 발밑의 땅은 멀어지며,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뛴다. 그 추락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셰어의 눈을 가리던 뜨거운 손이 뺨으로 미끄러진다. 애틋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허락하며, 셰어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