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6)

Vol. 2

요한은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평소 요한은 한번 잠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잘 깨지 않았으나, 낯선 잠자리 탓인지 얕은 잠은 쉽게 깨었다. 암막 커튼을 쳐 두어 주위는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요한은 눈꺼풀에 무겁게 달라붙는 잠기운을 떨치려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침실과 이어진 욕실에서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눈을 뜨면 혼자일 줄 알았건만 셰어는 아직 떠나지 않은 듯했다. 요한은 뻐근한 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허리 아래가 작신 얻어맞은 것처럼 쑤셨다.

저 무도한 새끼. 요한은 욕실을 노려보았다. 익숙하지 않은 셰어의 방식에 맞추는 것은 여전히 버거웠지만 전부 싫은 것만은 아니었다. 요한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묘하게 가라앉는 마음을 쉽게 추스를 수 없었다.

셰어의 취향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는 이해했다. 상대를 지배하고 고통을 주는 것에서 쾌락을 찾는다.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경험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빠르게 달아오른 몸이 식으면 머릿속에는 식은 촛농처럼 눌어붙은 냉소적인 생각이 희게 남았다.

셰어와의 관계가 묘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의 섹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머릿속을 희게 지우는 정사 중에서도 예민한 감각은 살아 있었다. 요한은 셰어의 눈 속에서 욕정을 읽었으나 그 외에 다른 감정의 잔여물은 엿볼 수 없었다. 온도가 다른 눈이 치부를 훑어 내리는 가운데, 자제를 잃고 허물어진 몸을 함부로 내보인 것에 대한 거부감이 치밀었다. 그토록 육욕적인 것에 충실한 관계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 찜찜한 기분은 그저 복종하는 관계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발생하는 짧은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요한은 복잡한 생각을 지우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새 물소리가 멎었다. 요한은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저 문이 열리고 셰어가 나오면, 혹시라도 그가 차가운 얼굴로 뾰족한 말을 던지면 기분이 참 더러울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네.”

셰어는 수건 한 장만 허리에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매번 꼭 배스로브를 챙겨 입던 셰어가 그토록 자유분방한 모습으로 돌아다닐 줄은 몰랐던 터라 요한은 내심 당황했다.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침대로 다가온 셰어가 이불을 들추었다.

“몸은? 내가 보기에는 괜찮아 보이던데.”

사무적으로 뭔가를 확인하는 듯한 얼굴은 무심했다. 그 때문에 요한은 자신이 셰어가 처리해야 하는 일 중 하나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요한은 그 시선이 불편해 괜히 헛기침을 했다. 하필 목이 깔깔해 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멀쩡하겠지, 뭐. 나 원래 튼튼해.”

“그래, 그렇더라.”

입술을 비틀어 웃는 셰어의 얼굴은 꼭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셰어는 무슨 짓을 하는 대신 얌전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는 흐트러진 요한의 머리칼을 슬쩍 쓰다듬어 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더 자고 가.”

그의 손길이 묘하게 다정하게 느껴져 요한은 괜히 속이 간질거렸다. 단지 욕정만이 아닐 수도 있다. 이토록 세심한 손길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감정이 없는 것일 리가 없다. 쉽게 반하는 만큼 간단히 들뜨는 마음이 금세 자랐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셰어를 붙잡은 것은 그 간질거리는 감정이 취기를 닮은 용기를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셰어는 요한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지만,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눈짓을 했다. 손을 떼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요한은 그 눈짓을 못 알아들은 척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불쾌해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셰어는 요한을 피하지 않았다. 어디 무슨 짓을 하는지 보자는 듯이 끈질긴 시선이 요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이 가볍게 부딪치며 간지럽게 살점이 마찰하는 소리가 쪽 하고 울린다. 셰어는 인상을 험악하게 찌푸렸다. 이런 간질거리는 짓에 면역이 없는 게 분명했다. 요한은 장난에 성공한 악동처럼 웃었다.

“너는 정 없게 아침 인사가 뭐 이래. 명색이 애인인데 뽀뽀 정도는 해 주지.”

셰어가 요한의 손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그가 조금도 친절하게 굴지 않았는데도 요한은 예상과 달리 상처받지 않았다. 단순한 머리는 셰어가 성깔을 부리는 것마저도 쑥스러움으로 치환했다.

“어, 그럼 출근 잘해.”

한결 기분이 좋아진 요한은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대로 침실을 나설 줄 알았던 셰어가 침대 위로 올라와 요한을 밀어 눕혔다. 두 사람의 무게가 실리며 매트리스가 출렁거리는 것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요한은 배 위를 짓누르는 셰어의 무게에 당황해 그를 보았다. 그리고 불꽃처럼 일렁이는 눈과 마주쳤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걸린 것 같다. 요한은 셰어의 허벅지를 밀어내려 짚었다. 맨살이 손바닥에 감기는 촉감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밀어내려던 손이 아교라도 칠한 것처럼 착 달라붙었다. 갈증이 인다. 요한은 저도 모르게 반쯤 풀어진 수건 사이로 보이는 셰어의 새하얀 허벅지를 힐끔거렸다.

뾰족하게 치켜 올라간 셰어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진다. 요한은 셰어의 표정이 정말로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든 사이 체온이 높아진 요한의 가슴 위를 서늘한 손이 쓰다듬더니 이내 긴장으로 부푼 가슴 근육을 한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살 만한가 봐. 힘들까 봐 봐줬더니. 이렇게 멀쩡한 거 보니까 도전 의식이 생기네.”

“좀, 지랄 말고 출근하라고.”

“왜? 자신 있어서 아침부터 꼬드긴 거 아냐?”

“아니, 내가 대체 뭘 꼬드겨. 너는 뽀뽀도 꼬드기는 거로 쳐?”

요한은 그의 허벅지 안쪽을 훔쳐본 게 내심 찔렸지만 뻔뻔하게 우겨 봤다. 가슴을 덮은 손이 대뜸 유두를 꽉 쥐어 비틀었다. 요한은 치미는 신음을 참으며 목을 울렸다. 크게 들썩이는 몸을 찍어 누른 셰어가 그를 비웃었다.

“누가 지금 그거 때문에 이래? 하도 열렬하게 보길래 난 또 아침부터 입술 터지게 빨고 싶어서 보는 줄 알았지.”

하여간 하나라도 져 주는 법이 없다. 슬그머니 배 아래로 내려오는 손을 붙잡으며 요한이 코앞에 다가온 잘생긴 셰어의 이마를 세게 들이받았다. 제법 둔한 소리와 함께 셰어가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요한을 노려보았다.

“이게 진짜 아침부터.”

요한은 욱신거리는 이마의 통증을 무시하며 인상을 썼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덤비기는 왜 덤벼? 상무님, 출근 안 해?”

셰어는 불길하게도 뭔가를 계산하는 듯한 눈빛으로 잠시 요한을 노려보았다. 워커홀릭으로 유명한 그가 설마 이런 문제로 일을 그르칠 리가 없다. 요한 역시 스토킹과 애정의 경계를 오가는 리서치를 통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셰어의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요한은 그가 정말 출근을 안 하겠다고 선언할까 봐 두려워졌다. 그냥 섹스라면 모를까, 아침부터 어제 시달린 것처럼 셰어의 취향에 맞춰 주는 것은 무리였다.

잔뜩 졸아붙은 요한을 바라보던 셰어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떨지 마. 내가 너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안 떨었거든.”

긴장이 풀린 요한이 흐느적거리며 침대에 늘어졌다. 셰어가 좋긴 했지만, 아무리 겪어도 미묘하게 고압적인 그의 태도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생전 이렇게까지 남의 비위를 맞춘다거나 숙이고 들어갈 일이 없었기에 요한은 셰어가 불편하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요한은 문득 셰어는 이런 관계에 만족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진다. 요한은 처음부터 셰어가 원하는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한 것과 실제는 달랐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중간부터는 내키는 대로 조르고 멋대로 굴기만 했다. 요한은 그쪽의 경험이 거의 전무했으나 그런 것이 플레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연인과의 정사라고 정의하기에는 뭔가가 부족했다. 셰어와의 관계는 요한이 아는 ‘사랑을 나누는 것’과도 달랐다. 한쪽이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관계, 허락 없이는 상대를 만지는 것조차 불가한 관계는 요한이 아는 그 어떤 섹스와도 닮지 않았다.

뿌리 모를 잡종 같은 밤이 지나고 남은 것은 묘한 열기와 긴장감, 혼란이었다.

“더 자고, 이따 일어나면 연락해.”

어느새 완벽하게 차려입은 셰어가 다가와 요한의 폰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디 뒀나 했더니 거실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옷가지에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요한은 싱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요한의 상태가 미심쩍었는지 셰어가 요한을 살폈다.

“왜 그래?”

그의 물음은 독촉 같았다. 요한은 실없이 웃으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인사.”

“까불어, 자꾸.”

셰어는 따가운 눈빛만 한 번 쏘아 주었을 뿐 입맞춤 한번 없이 그대로 방을 나섰다. 설마 정말 이대로 그냥 갈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온 방 안을 울릴 만큼 크게 들렸다. 일부러 세게 문을 닫은 것이 틀림없다.

요한은 콧등을 찌푸리며 흥 하고 코를 울렸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예상대로 냉담한 반응에 새삼 섭섭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요한은 셰어가 테이블에 놓아두고 간 폰을 집어 들며 투덜거렸다.

“아, 거참 되게 비싸게 구네. 나도 비싼 사람인데.”

요한은 셰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자기야출근잘해♡]

[XOXO]

셰어라면 메시지를 보자마자 치를 떨며 싫어할 것이 분명하다. 그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게 참 아쉬웠다. 요한은 킥킥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노곤한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 *

[자기야출근잘해♡]

[XOXO]

셰어는 요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샐 것 같았다. 평소 요한의 말투와도 전혀 다른 이 괴이한 메시지는 분명 항의의 표시였다.

아주 귀엽게 놀고 있네. 셰어는 그 메시지를 지우려다 말았다. 이까짓 메시지에 동요하는 것 자체가 요한에게 말리는 것 같았다. 셰어는 밤을 보낸 상대가 달라붙는 일에는 익숙했으나 애인이라는 명목으로 이토록 간지러운 짓을 벌이는 것은 처음 겪었다. 반면 요한은 그런 낯간지러운 짓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수작질을 걸었다. 역시 애인 노릇이라는 게 자신에게 맞지 않는 짓인 것만은 틀림없다. 분명 오래가지 못할 짓이었다.

셰어는 호텔 앞에서 대기 중인 차에 탔다. 업무용 전화를 확인하자 그새 쌓인 메일과 연락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적인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보고 메시지가 연이어 들어온다.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셰어는 긴급한 건을 위주로 확인하고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매일 체크할 일을 모두 점검했을 때쯤 주차를 마친 차가 얌전히 엔진을 꺼뜨렸다. 회사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그때까지 셰어는 요한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사무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면면들이 인사를 건넨다. 파일을 챙긴 수석 비서가 가장 먼저 셰어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무실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일정 브리핑을 받는다. 여러 기업의 인수 절차를 진행 중이라 거의 매일같이 회의며 외부 약속이 잡혀 있었다. 셰어는 일정들을 보고받으며 머릿속에 되새기다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전날 비서실에 연락해 약속을 잡기로 했던 데일이라는 남자와의 약속이 빠져 있었다. 단순히 아직 연락을 주지 않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제나 오늘 중에 데일이라는 사람한테 연락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셰어는 브리프케이스 안을 굴러다니던 남자의 명함을 찾았다. 개인 전화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신호만 끈질기게 갈 뿐 연결되지 않았다. 그를 살피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계속 연락해 볼까요?”

“네, 연락되면 오늘 중으로 약속을 잡아 주세요. 웬만하면 다른 일정이랑 겹치더라도 조정해서 잡으세요.”

“알겠습니다.”

비서가 데일의 연락처를 빠르게 받아 적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고요한 사무실에는 셰어만이 남았다. 먼 곳에서 각기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소음이 들려온다. 한창 바쁜 아침 시간이었다. 20분 뒤면 임원 회의가 시작된다. 그 뒤로는 마라톤 같은 회의의 연속이었다. 짬이 날 때마다 다른 업무를 처리하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메일함에는 그새 수신자, 참조자로 셰어를 끼워 넣은 메일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실시간으로 쭉쭉 늘어나는 메일을 보다 말고 셰어는 마우스를 내던지듯 놓으며 의자에 등을 푹 파묻었다. 집중력이 쉽게 흩어지고 있었다.

전날 급한 일로 방문했다는 사람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비정상적인 이상 징후를 빠르게 포착한 무의식이 사이렌을 울리고 있었다.

“하아…….”

쓸모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후회가 남는다. 어제 호텔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요한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이상하게 요한과 같이 있으면 평소 같지 않게 유치해지고 자꾸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요한은 셰어가 쌓아 온 무결성을 쉽게 훼손했다.

관계의 계기를 만든 것은 요한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요한의 잘못이 아니었다. 셰어는 그가 선을 넘는 것을 몇 번이나 용인했다. 한 번, 두 번이 된 실수는 이제 조금씩 셰어를 붕괴시키고 있었다. 이미 시작된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다.

브리프케이스에서 꺼내지 않은 선불 휴대 전화가 진동한다. 셰어는 의식적으로 신경을 긁어 대는 진동음을 무시했다. 세 번, 세 통의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진동이 울리고 전화는 다시 잠잠해졌다.

지금쯤 요한은 준비를 마치고 호텔을 나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도 죽을 것 같다고 울기에 오후에나 일어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과연 제 입으로 튼튼하다고 한 말이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요한을 떠올리자 그에게 부딪힌 이마가 다시 아파 오는 듯해, 셰어는 제 이마를 매만졌다. 다행히 이마는 평소처럼 매끈하기만 했다. 흐릿한 웃음이 새는 것은 그저 그 남자가 하는 짓이 어이가 없어서다.

한번 요한을 떠올리기 시작하자 그에 대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 간다. 요한의 존재감은 지나치게 생생했다. 기가 죽어 우울한 표정을 짓던 것도, 열에 들떠 한껏 풀어진 얼굴로 매달리던 것도, 빨개진 이마로 사납게 인상을 구기던 것도 눈앞에 실재하는 것처럼 선명했다.

이런 건 좋지 않았다. 셰어는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16분이다. 그는 중요 표시된 메일을 제대로 읽기 시작했다. 회의 시작 5분 전이 되면 비서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 전까지 메일함에 쌓이고 있는 일을 조금이라도 처리해야 했다.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지속적인 붕괴를 막기 위해.

하룻밤 사이 풍파가 많았기에 임원 회의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연구소 프로젝트의 주요 인수 안건 중 하나인 유니콘 네트워크가 기술 특허 관련 송사에 휘말린 것이 예상보다 더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기업을 굳이 인수할 이유는 없으니, BNB 그룹은 유니콘 네트워크 인수를 포기하고 손을 털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특허 분쟁이 발생한 이후, 셰어는 유니콘 네트워크 인수를 백지화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려 했다.

문제는 아침부터 유니콘 네트워크를 고소한 기업이 동방과학기술그룹에 인수된다는 기사가 터진 것이었다. 동방과학기술그룹, 통칭 동방과기는 BNB 그룹과 비슷한 규모의 국영 기업으로, 특허 소송을 악질적으로 제기해 돈을 버는 것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동방과기는 본격적인 인수가 결정되기 전, 유니콘 네트워크 인수 의지를 밝힌 적 있는 경쟁 업체였다.

“소송을 건 의도야 뻔하지 않습니까? 발 빼라는 거죠. 기술이 필요하니까. 이 시점에서 그쪽 의도대로 인수를 포기하는 게 정말 옳을까요?”

유니콘 네트워크의 핵심 기술을 높게 평가했던 CTO가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셰어는 내심 그의 의견에 동조했으나 쉽게 말을 꺼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관 부서 임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CTO와 CFO의 설전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돈을 다 물어요? 소송은 이제 시작인데 돈을 얼마나 태울 줄 알고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돈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핵심 기술이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를 봐야죠.”

“자금 회수 기간은요? 계열사들 자금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계열사 살리려고 증자라도 한 번 하면 유동성은 올해 목표치를 크게 하회하게 될 겁니다. 인수에 소송까지 태울 돈, 충분하지 않다고요.”

복잡한 대화가 오가는 가운데 침묵하던 샬롯이 입을 열었다.

“PM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프로젝트 매니저, 셰어에게 묻는 말이었다. 셰어는 복잡한 머릿속을 부유하는 정보들을 엮었다. 회의에서 오간 모든 얘기는 각자의 주장일 뿐, 정확한 사실로 판명된 정보는 드물었다. 셰어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유니콘 쪽 인사와 접촉 중입니다. 현재까지 취합된 내용만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다음 회의 때까지 정보를 더 모아 보죠.”

다음 임원 회의까지 남은 기간은 고작 3일이었다. 그 안에 충분한 정보를 모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으나, 매일 상황이 급변하는 마당에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샬롯은 말없이 셰어를 응시했다. 언성을 높이던 임원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채 샬롯의 말을 기다린다. 빔 프로젝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릴 만큼 짙은 적막이 깔렸다.

합격인가, 불합격인가. 샬롯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셰어는 그녀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불만족했는지 알 수 없었다. 칼끝이 명치를 겨누는 듯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렇게 하세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샬롯은 짧은 대답을 끝으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 버렸다. 합격인가, 불합격인가. 셰어는 그 답을 아직 알 수 없었다.

셰어는 데일에게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을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데일과 연락됐습니까?]

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는지 비서에게서는 즉시 답장이 왔다.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유니콘 측에 확인해 보니 오늘 무단결근했다고 합니다.]

데일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다. 그리고 그에게 문제가 생긴 이유는 데일이 이번 특허 소송에 대해 위험한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셰어는 낭패감을 감추려 회의 자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무표정한 셰어의 얼굴을 관찰하던 샬롯과 눈이 마주쳤다.

샬롯의 눈이 슬며시 가늘어진다. 좋지 않은 징조를 포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지지부진한 회의가 끝나고 임원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 셰어는 모든 사람이 회의실을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샬롯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세요]

군더더기 없는 명령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하다. 심판의 시간이었다.

셰어는 짐짓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회사 안에서는 어디에나 사람들의 눈과 귀가 있다. 조금이라도 침울한 기색을 보였다가는 프로젝트에 문제가 있어 회장과 상무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샬롯의 사무실로 향하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샬롯의 비서가 정석대로 매끄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상무님.”

음료를 준비하지 않은 것을 보니 대화가 길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아니면 샬롯이 실망스러운 답에 화가 나 물 한 잔 내어 주지 않기로 한 것이라거나.

셰어는 부디 후자가 아니기를 바라며 샬롯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뭐가 문제죠?”

문이 닫히자마자 샬롯이 즉시 본론을 물었다. 과연 음료 한 잔 내어 주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시급한 사안이니 차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인사치레 할 시간도 아깝다는 의미였다. 셰어는 샬롯의 앞에 마주 앉으며 웃었다.

“글쎄요. 근검하신 회장님 덕분에 커피 한 잔 못 얻어먹는 게 문제 아닐까요?”

“의뭉 떨지 말고 대답하세요. 나를 회장이라고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되지, 상무.”

꼬리를 밟혔다. 심장이 다 서늘해지는 듯했으나 셰어는 흔들림 없이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별건 아닙니다. 그쪽 정보원의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 뿐입니다.”

샬롯은 침묵했다. 회의실에서와는 무게가 다른 침묵에 셰어는 오그라들려는 폐를 의식적으로 부풀렸다. 샬롯은 큰소리를 내는 대신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 대체 뭐가 문제니? 이런 일로 골치 썩힐 애가 아니었잖아. 정보원을 파악했으면 당장에 정보부터 뽑아내야지. 점수도 못 내고 패를 잃어?”

그녀의 말투는 조곤조곤했으나, 이번의 실수가 큰 실점으로 이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뼈아픈 실수였다. 셰어는 가면처럼 얼굴에 덧씌워져 있던 미소를 지웠다.

“네, 이번에는 제가 실수했습니다. 만회할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판에 박힌 말로 샬롯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는 불분명했으나 셰어가 약속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하룻밤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중요한 프로젝트에 오물이 튀었고, 그 오물을 씻을 방법은 아직 도출되지 않았다.

“난 이런 거 단지 사소한 실수라고 치부 안 해. 알잖니.”

“네, 회장님이 하인리히의 법칙을 신봉하시는 건 잘 알죠.”

“알면 이제 사소한 실수는 안 해야지. 난 대형 사고가 터질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없다.”

한 번이라도 더 실수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샬롯의 파트너 자리를 놓고 이 자리에 앉은 이상 자리를 얻거나, 영영 잃거나 둘 중 하나였다. 셰어는 부드럽게 입술을 끌어 올려 웃었다. 베일리 가문에 대를 이어 전해져 오는, 신뢰를 보장하는 미소였다.

“그럴 겁니다.”

샬롯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술궂게 입술을 비틀었다.

“넌 정치를 해야 했어. 아무리 봐도 딱 정치할 얼굴이라니까.”

“회장님, 전 정치랑은 안 맞으니 쫓아낼 생각 마세요.”

셰어는 그녀를 따라 삐딱하게 웃었다. 서로 꼭 닮은 얼굴들이 마주 보았다. 샬롯은 한결 편안해 보이는 자세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연구원처럼 신중한 눈이 셰어를 향했다.

“저번에 한 말 아직 유효하니? 결혼 말이야.”

셰어는 잠시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샬롯이 중신을 서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제법 중요한 일이었는데도 워낙 복잡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다.

순간 이유 없이 요한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셰어는 그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이미 충동으로 망친 일을 수습하기도 버거웠다. 셰어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개할 만한 사람이 생기셨나 보죠? 저는 언제든 좋습니다.”

샬롯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뾰족하게 세웠다.

“그새 만나는 사람이 생겨서 마음이 바뀐 줄 알았더니.”

“그런 사람 없습니다.”

셰어는 즉시 부정했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것을 들키면 이번의 실수가 감정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낙인찍히고 말 것이다. 연애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는 사람으로 찍히는 것은 위험했다. 특히 샬롯처럼 공과 사의 구별이 뚜렷한 사람에게 그런 문제가 노출되는 것은 완전히 내쳐지기에 알맞은 일이었다.

중신을 서려는 것처럼 말을 꺼낸 것도 그 문제를 떠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셰어는 샬롯의 모든 것을 의심했다. 그녀는 의미 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귀인을 만나게 해 줘야겠구나. 네가 얼른 자리를 잡으려면 한 손이라도 더 거드는 게 좋겠지.”

“감사합니다.”

트집 잡을 것 하나 없이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셰어를 향해 샬롯이 혀를 찼다.

“일단 만나 보기라도 하고 감사 인사를 하렴.”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이제 그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 * *

“요한, 목이 왜 이래? 세상에. 이게 다 뭐야?”

레일라가 놀란 얼굴로 요한의 머플러를 잡아 내렸다. 화려한 레오파드 무늬의 머플러 아래에 드러난 목덜미에는 푸릇한 멍 자국이 희미하게 올라와 있었다. 요한은 흐트러진 머플러 자락을 여미며 그저 웃었다.

관계를 가질 때마다 셰어는 요한에게 눈에 띄는 흔적을 한두 가지씩 남기곤 했다. 처음에는 목덜미에 남은 울혈 그리고 이번에는 희미한 멍 자국이었다. 단순한 실수인 줄 알았는데 비슷한 일이 또 생기니 이제는 이게 의도가 아닌가 싶었다.

모처럼 한가해진 레일라와 아이스크림을 먹기로 한 날인데, 그 때문에 아주 난감해졌다. 요한은 능청스럽게 눈썹을 찌푸리며 하소연했다.

“마사지를 너무 과하게 받았나 봐. 지금 목 아래로는 안 아픈 데가 없어.”

“무슨 마사지사가 이렇게 형편없어? 잘생긴 내 아들 목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놨네.”

다행히 그 말을 믿었는지 레일라가 한숨을 쉬었다. 조금 안도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요한은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레일라가 편견이 없다고 해도 셰어와 때리고 맞는 플레이를 한다고는 얘기할 수 없었다.

셰어와 비밀을 유지하겠다는 각서를 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레일라가 불륜을 혐오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레일라는 셰어가 곧 약혼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물론 약혼에 대한 부분은 오해였지만, 불륜을 혐오하는 레일라가 요한이 셰어와 얽힌 것을 알게 된다면 제대로 설명을 듣기도 전에 미친 듯이 화를 낼 것이 뻔했다.

미안해, 엄마. 요한은 속으로 사과하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레일라의 앞에 전부 놓아 주었다.

“눈 높은 레일라가 잘생겼다고 말해 주니 기분이 좋네. 이거 다 먹어. 내 사랑이야.”

“이걸 나 혼자 어떻게 다 먹으라고 그래. 너도 먹어.”

“요즘 살이 너무 빠졌어. 피곤해? 다이어트할 생각 말고 많이 먹어.”

요한은 레일라가 좋아하는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자그마한 스푼 가득 떠서 그녀의 입 앞에 들이밀었다. 밉지 않게 눈을 흘긴 레일라가 곧 아이스크림을 받아먹었다. 겉보기에는 매사 철저할 것 같은 레일라이지만 은근히 노골적인 재롱에 약했다.

“너 때문에 구두를 너무 많이 먹었어. 어쩌면 좋아.”

레일라가 한숨을 푹 쉬며 근심 어린 얼굴로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을 휘저었다. 요한은 묘한 얼굴로 레일라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상하게 문맥에 맞지 않는 단어가 끼어 있었다. 구두를 먹을 리가 없지 않은가. 요한은 평소 그녀를 놀릴 때처럼 쾌활하게 웃었다.

“뭐야. 레일라, 정말 피곤한가 봐. 구두를 어떻게 먹어?”

녹은 아이스크림을 휘젓던 스푼이 멈추었다. 레일라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회오리 무늬가 그려진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심각한 그녀의 표정이 섬뜩하게 느껴진 탓에 요한의 얼굴이 경직된다.

“그러게. 요즘 좀 피곤한가 봐. 오늘은 일찍 자야겠다.”

다행히 레일라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녀는 남은 아이스크림을 해치우며 최근 본 영화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요한은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태도에 안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사소한 해프닝이라 생각해 웃어넘겼던 일들이 전과 달리 우습지 않게 느껴졌다. 요한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레일라가 중요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적이 몇 번이었던가? 얼마 전에도 레일라는 요한에게 바로 그다음 날 떠나기로 한 출장에 대해 한 마디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때 요한은 레일라가 성가신 일을 미루려 몰래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보니 그녀가 정말로 얘기하는 것을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 사실 오늘은 중요한 얘기를 하려고 시간을 낸 거야.”

스푼을 내려놓은 레일라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요한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자꾸 나쁜 생각이 떠올랐다. 영화와 멀어질 수 없는 환경으로 인해 평생 온갖 영화를 섭렵하며 살아온 요한의 머릿속에서 그간 보아 온 영화의 가장 불길한 대목들이 플래시백 되고 있었다. 단순한 미디어 중독의 부작용이다. 요한은 자신의 상태를 그렇게 진단하고도 안심하지 못했다.

“여태까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게 두려고 했어. 나는 평생 일만 하고 살았으니 너만은 자유롭게 살기를 바랐지.”

서두가 예상보다 더 비장한 탓에 요한은 혀가 녹을 것처럼 달고 진득한 초콜릿 무스 아이스크림을 한입 가득 물었다. 밀려드는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서는 극도로 단 것이 필요했다.

“이제는 너도 일을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어.”

돈 많은 백수 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선언이었다. 요한은 심란한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레일라의 눈빛은 단호했다. 요한은 이럴 때의 레일라는 아무리 떼를 쓰고 구슬리려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말없이 눈만 굴리던 요한이 반쯤 체념한 채 물었다.

“대체 왜? 나는 회사 일은 잘 알지도 못해. 레일라가 잘하고 있으니 됐잖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많을 거야. 전문 경영인이라거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요한. V Pictures를 잘 운영할 사람은 많으니 너는 너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될 거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요한은 혼란스러워졌다. 오늘 아침, 레일라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기로 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항상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면 두 사람은 시시껄렁한 일에 대해 웃고 떠들어 댔다. 재미있었던 일, 여행이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 때로는 사소한 고민을 얘기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심각한 화제는 별로 없었다.

레일라는 주위를 슬쩍 곁눈질하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다른 놈들을 어떻게 믿니. 그놈들이 내 평생 일군 회사를 훔쳐 가면 어쩌려고.”

테이블 위를 함부로 짚은 손에 밀린 스푼이 바닥에 떨어져 맑은 소리를 낸다. 섬뜩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요한은 레일라의 손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그녀의 회사를 훔치려 한다니.

레일라는 한 번도 이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다. 규모에 비해 인원이 많지 않은 V Pictures의 정규 멤버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해 왔다. 작은 벤처 기업일 때부터 함께해 온 직원들이었기에 레일라는 그들을 모두 가족처럼 친근하게 대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야.”

레일라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했는지 지저분해진 손을 어색하게 말아 쥐었다. 요한은 아이스크림이 묻은 그녀의 손을 묵묵히 닦아 주었다. 손이 말끔하게 닦일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중요한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문맥에 전혀 맞지 않는 단어를 쓰며, 터무니없는 의심을 한다. 흔히 의학 드라마 마니아들이 병리학적 용어를 줄줄 읊을 줄 아는 것처럼 요한은 이러한 증상이 어떤 질병으로 인한 것인지 알았다.

알츠하이머.

V Pictures의 수장, 벤처 기업의 전설로 남은 성공의 주역인 레일라 바네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질병이다. 요한은 자신이 어이없는 착각을 한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평소답지 않은 얘기를 한 레일라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시한부 환자처럼 세상의 온갖 잡스러운 문제를 모두 초월한 얼굴로 요한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요한은 막막한 심정을 감추며 거의 다 녹아 무슨 맛인지도 모르게 된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뿌리 없는 물풀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던 것은 레일라가 건재할 때의 얘기였다. 요한은 한 번도 그녀 없이 홀로 서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레일라는 아직 젊었고, 늘 활기찼고, 실패해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기에 요한은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떨어진 의무가 요한을 무겁게 짓눌렀다.

짧은 정적을 깬 것은 레일라였다.

“게다가 아들, 너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잖아.”

머리가 얼얼하도록 매서운 직구였다. 요한은 심각한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웃어 버렸다.

“그건…… 그렇지. 레일라, 사실이라고 그렇게 막, 말해도 돼?”

“안 될 건 또 뭐니.”

요한은 한 번뿐인 인생을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이 많았고, 갖고 싶은 것도 많았다. 마음이 가지 않는 일을 하며 살기에는 생이 너무 짧았다. 어떤 사람은 그런 요한을 두고 얕고 가볍다고 혹평했으나, 요한은 그런 자신이 좋았다.

‘세상에 무거운 사람만 있으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어. 요한, 생각해 봐. 사람이 제각각인 데에는 다 이유가 있어.’

한때 레일라는 너무 가볍다는 이유로 애인에게 차이고 우는 요한을 그렇게 위로했었다.

어쩌면, 날고 기는 사람이 즐비한 V Pictures에도 하나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요한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웃었다.

“레일라, 나 같은 사람도 쓸 만한 데가 있겠지?”

“당연하지.”

레일라는 더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듯이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남은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한입 만에 끝장냈다. 어딘지 허한 표정으로 빈 유리 볼을 노려보던 레일라가 말했다.

“요한, 식사하러 가자. 단거 먹으니까 배고파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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