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26)

* * *

묵직한 것이 상체를 짓누르고 있다. 셰어는 그 무게에 저항하려 했으나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할 수조차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에 덮인 반듯한 이마가 희미하게 찌푸려진다. 짜증스럽게 한숨을 뱉으며 눈을 뜨자, 큼직한 손이 셰어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어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로 인해 더 깊게 이마를 맞대게 된 가슴이 규칙적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셰어는 미처 가시지 않은 졸음에 취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셰어는 요한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팔을 베고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폭 안긴 자세가 낯설었다. 빈틈없이 겹쳐진 이불 아래의 몸은 모두 나신이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느껴지는 적나라한 체온이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욕실에서의 정사 이후, 셰어는 유독 예민하게 경계하는 요한을 달래 뒤처리를 하고 침대에 눕혔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요한은 뒤처리쯤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계속 우겨 댔다. 하지만 셰어에게 관계 후의 처리에 대한 책임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욕실에서 이어진 오랜 논쟁에서는 결국 체력이 우세한 셰어가 이겼다. 요한은 내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표정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샤워가 아니라 고문이라도 당하는 듯했다.

‘그렇게 싫었어?’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말없이 천장을 노려보던 것이 얼마간이었던가. 셰어는 불편한 침묵을 깨고 물었다. 요한은 잠든 척이라도 할 셈인지 눈을 감은 채 이불을 코끝까지 푹 덮었다.

저러다 숨 막혀 죽겠다.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하며 요한을 보고 있었다. 그때 무슨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쉰 요한이 셰어를 향해 돌아누웠다. 셰어는 갑자기 줄어든 거리에 조금 당황했다.

졸음이라고는 한 점 묻지 않은 또렷한 눈이 셰어를 마주 본다. 매번 성깔을 부리고 실실거리기만 하더니, 그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셰어는 괜히 술렁거리는 마음이 불편해 인상을 찌푸렸다. 이불 속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손이 셰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좋았어. 너는?’

요한은 매번 도가 지나치다. 이번에는 도가 지나치게 간지럽게 굴고 있었다. 셰어는 그것에 저항하듯 심상하게 대답했다.

‘나쁘지 않았어.’

좋았으면서 웃기고 있네. 그렇게 말하듯 요한의 눈이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는 욕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깍지를 끼며 깊게 손을 얽는다.

‘다음번에는 더 기분 좋을 거야.’

요한이 암시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욕실에서 뒤가 찢어질 듯 성기를 받아들이는 게 버거워 엉엉 울면서도 앞으로는 흥건하게 싸지르는 것을 보았는데, 참 한결같이 끈기가 있었다. 셰어는 심술궂게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그래. 기대할게.’

그 뒤로는 한참이나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말을 지껄이다 잠들었다. 기억나는 내용은 하나도 없었지만 몇 번인가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됐든 너무 늦게 잠든 게 틀림없다. 방 안은 암막 커튼을 친 탓에 어둑했으나 셰어는 직감적으로 아직 알람이 울리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오랜 습관에 따라 이른 시간에 기상하는 것에 익숙해진 몸은 정해진 시간보다 앞서 잠에서 깨어났으나, 피로에 무거워진 몸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정확한 시간을 확인하려 폰을 찾아 베개 밑을 더듬자 셰어를 안고 있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요한은 셰어의 머리에 제 턱을 비비적거리며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탁하게 잠기고 쉰 목소리로 그가 중얼거렸다.

“왜…… 꿈꿨어? 너 자면서 자꾸 짜증 내더라. 너는 어떻게…… 꿈에서도 그렇게 짜증을 내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흐릿했다. 도로 잠에 빠져드는지 셰어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은 느려지다가 곧 머리를 감싸 쥔 채 그대로 멈추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셰어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조금 빠져나왔다.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간격을 벌리자 요한이 응석이라도 부리듯 칭얼거리며 셰어를 다시 끌어안았다. 허리를 감은 팔은 응석 같은 소리를 낸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척추를 으스러뜨릴 듯 강건했다. 셰어는 요한의 품에 안긴 채 눈살을 찌푸렸다.

불편하게, 이렇게 안고 자는 이유가 뭐야. 셰어는 자신이 자면서 왜 짜증을 냈는지 알 것 같았다.

귀찮게 구는 남자를 내키는 대로 걷어차 버릴 수도 있었으나 어제 욕실에서 요한이 힘겹게 울던 것이 떠올라 참았다. 요한은 목덜미에 울긋불긋한 열꽃이 필 만큼 울어 댔다. 처음이라고 봐주지도 않았으니 한껏 벌어졌던 몸속도 영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다. 셰어는 짐짓 부드럽게 말했다.

“불편해. 이거 놔.”

요한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오히려 셰어를 더 꼬옥 끌어안았다. 불편하게 몸을 꽉 안은 채로 잘 자라고 등을 토닥거리기까지 하는 것이 어이가 없어 셰어는 조금 웃고 말았다. 요한이 잠결에 취해 달래듯 속삭였다.

“10분만. 조금만…… 더 자자. 어?”

“하아…….”

이걸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셰어는 요한의 가슴에 이마를 거칠게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숨 막히도록 바짝 안긴 자세가 영 거슬렸으나 등을 다독이는 손길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요한이 셰어의 머리칼 사이로 입술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음…… 좋다.”

“난 별로야.”

심술이 솟아 셰어는 끝내 뾰족한 한마디를 뱉었다. 이미 잠에 혼곤하게 취한 요한은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잠든 채였다.

유독 아무한테나 잘도 치댄다 싶었더니 요한은 밤을 보낸 상대에게도 상당히 귀찮게 치대는 경향이 있었다. 밤에 만나는 상대와는 깔끔하게 거리를 두기 바라는 셰어가 선호하는 유형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셰어는 요한이 싫지 않았다. 실제로 몸은 아주 잘 맞았고, 지랄 같은 성질도 보다 보니 그럭저럭 귀엽게 봐 줄 만했다. 그와의 관계를 그저 하룻밤만으로 끝내기에는 조금 아쉬워졌다.

“셰어.”

요한이 잠꼬대처럼 셰어의 이름을 불렀다. 낮고 깔깔한 목소리가 닿은 곳이 전부 다 간지러웠다.

침대 밑에 놓인 폰이 울린다. 알람이 울릴 시간이 된 것이다. 요한은 그 소리만은 듣기 싫었는지 질색을 하며 돌아누웠다. 베개에 한껏 고개를 파묻은 채 새근거리는 숨을 뱉는 것이 알람 소리를 듣자마자 일어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요한은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는데도 새근거리며 잘만 잤다.

웅크린 그의 어깨와 목덜미에는 깨물리고 빨린 흔적이 점점이 남아 있다. 셰어는 알람을 끄고는 요한의 등을 관찰했다. 보통은 보일 법한 곳에 흔적을 잘 남기지 않는 편이었으나, 어쩐지 하필 요한의 귀 밑으로 손가락 두 마디쯤 아래에 붉은 울혈 하나가 남아 있었다. 요한이 유독 거칠게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계산한 것보다 더 위쪽에 자국이 남은 모양이었다. 셰어는 둥글게 남은 울혈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요한은 자면서도 뭔가를 느끼는지 목을 움츠리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정신 못 차리고 자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손을 뗐다. 셰어는 맨살이 훤히 드러나 추워 보이는 어깨에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출장은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 * *

요한은 으슬으슬한 한기에 떨며 잠에서 깼다. 목이 바싹 마르고 갈라져 있었다. 욕실에서 격렬한 정사를 치렀기 때문인지 혹은 그 뒤로 한참 실랑이를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이 영 좋지 않았다. 무겁게 느껴지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문득 침대 옆 테이블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아직 7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미세한 체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남자의 흔적을 찾아 옆자리를 더듬던 요한이 몸을 일으켰다.

“셰어?”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술에 취해 음란한 꿈이라도 꾼 것인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리는 몸은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렸다. 요한은 제대로 말리지 않은 탓에 우스운 모양으로 마른 머리칼을 대충 손으로 빗어 넘기며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셰어는 떠났다. 요한은 방 안은 물론 욕실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셰어를 찾는 것이었다는 사실에 좀 허무해졌다. 셰어에게 입 맞출 때만 해도 하룻밤만이라도 그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으나, 설마 이런 식으로 인사도 없이 이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와, 이 개새끼가.”

한 번 잤으니 볼일은 끝났다는 건가. 아무리 하룻밤뿐인 상대라고 해도 아침은 먹이고 보낼 것이지. 인사도 없이 사라져?

요한은 셰어의 악랄함을 속으로 신랄하게 씹어 댔다. Page 6에 뻔질나게 오르내리는 자신마저도 이런 식으로 상대를 대한 적은 없었다.

하필 그때 책상 위에 놓인 옷이 눈에 들어왔다. 옷걸이에 단정하게 걸린 채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셔츠와 바지는 요한의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그게 이제야 보였는지 모르겠다. 요한은 셔츠를 집어 들었다. 셔츠는 그럭저럭 자신에게도 맞을 것 같았다. 엉망으로 젖어 버린 옷 대신 셰어가 두고 간 것이리라.

셔츠에서 셰어가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싸하고 묵직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이자 우습게도 뾰족해진 마음이 금세 누그러들었다. 요한은 셔츠에 코를 처박고 그의 냄새를 맡았다.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든다. 당장 눈앞에 그가 있었더라면 힘껏 안아 줬을 텐데.

셰어와의 정사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단순히 포지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셰어에게 안긴 것은 다소 충격적인 일이었으나, 결론적으로는 그것에 대한 거부감보다는 그를 가졌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물론 고를 수 있다면 셰어를 안고 싶었으나, 요한은 지난밤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보다 셰어의 취향 자체가 요한에게는 낯선 세계였다. 요한은 욕을 한다거나 손을 가볍게 묶는 정도의 거친 섹스를 해 본 적은 있었으나, 셰어가 지나가듯 말한 것처럼 본격적인 플레이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사실은 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바이올렛의 소설을 읽었을 때, 요한은 어떤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바이올렛과 자고 싶었다. 자신조차 모르는 숨은 욕망을 바이올렛만은 이해할 것 같았다. 욕망이 적나라하게 투사된 글은 기저에 숨은 욕망을 자극했다.

요한은 셰어에게서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셰어와 있으면 순식간에 발화점을 돌파한 욕망이 뱃속에서 타올랐다. 불 위에 선 것처럼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는 위험한 촉매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요한은 셔츠를 끌어안은 채 침대에 드러누웠다. 연락처도 아니고 제 향기가 듬뿍 밴 옷만 남기고 사라지다니, 사람을 자극하려는 의도라면 그는 성공했다. 잡히면 다시는 이런 식으로 달아나지 못하게 발목을 똑 분질러 버릴까 보다. 그러면 셰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무섭게 화를 낼 것이다. 요한은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예쁘게 웃어 주는 걸 보고 싶으니 아주 똑 분질러 버리는 대신 발목이라도 붙잡고 늘어지는 게 더 나을 터였다.

밤새 잠들었던 열기가 몸속에서 다시 움튼다. 요한은 끈적하게 머릿속에 눌어붙는 망상을 떨치려 셰어가 남기고 간 셔츠와 바지를 침대 위에 나란히 펼쳐 놓았다. 침대 위에 사람처럼 사지를 뻗고 누워 있는 셔츠와 바지가 좀 우스웠다.

유심히 그 모양을 보다 보니 뭔가가 허전했다. 넥타이가 없다.

“아, 내 넥타이 못 쓰게 됐네.”

좋아하던 거였는데 아깝게 되었다. 역시 받아 낼 빚이 있으니 셰어를 꼭 다시 만나야겠다. 요한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은 미처 치우지 못한 젖은 옷과 수건으로 엉망이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던 재킷에서 미끄러져 나와 바닥에 처박혀 있던 폰이 진동한다. 요한은 조심스럽게 폰을 집어 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어지간히 여기저기 부딪치고 다닌 것 같은데 다행히 망가지지는 않은 듯했다.

요한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이른 시간부터 로마노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얘는 왜 새벽부터 일을 하고 있냐…….”

그 이유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이해하게 되었다. 메시지는 한 건이 아니었다.

[이사님, 바이올렛에 대한 단서를 찾았습니다. 본인에 대한 내용은 아니고 바이올렛의 법정 대리인에 대한 정보입니다.]

[사진]

[클리포드 로펌 대표 로널드 클리포드입니다. 바이올렛이 영화 판권 계약을 하던 날 벡스터를 방문한 유일한 외부인이라고 하네요.]

사진은 조악한 CCTV 캡처 화면이었다. 주위의 풍경을 보면 벡스터 미디어가 홀로 사용하는 2층 건물의 출입구에 달린 CCTV로 보인다. 요한은 벡스터 미디어 바로 맞은편에 있는 컵케이크 가게의 로고를 화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로마노프가 경비원이라도 매수한 모양이다. 요한은 신중하게 사진을 확대했다.

화면 속의 중년 남성은 신사 클럽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생김새였다. 세련된 안경과 단정하게 잘 빗어 넘긴 짧은 머리, 몸에 잘 맞는 핏의 정장과 브리프케이스. 남자는 하얀 봉투를 들고 있었다. 조악한 화면 때문에 어떤 봉투인지는 알아볼 수 없었지만 요한은 그것이 바이올렛의 계약과 관련된 서류일 것이라 짐작했다.

만일 클리포드 로펌 대표가 바이올렛의 대리인이라면 이상한 일이었다. 클리포드는 동네 구멍가게 같은 로펌이 아니었다. 개인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클리포드는 기본적으로 대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대형 로펌이었다. 바이올렛은 분명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영화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바이올렛은 클리포드에 의뢰를 할 수 있을 만큼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요한이 메시지를 읽은 것을 알았는지 로마노프에게서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더 알아볼까요?]

요한은 즉시 그러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멈추었다. 셰어와의 관계는 아직 모호했으나, 왠지 그와 잠자리를 가진 후에 바이올렛의 행적을 추적한다는 것이 바람이라도 피우는 것 같아 꺼려졌다. 애초에 바이올렛을 찾는 목적이 불순했던 것이 문제다.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자고 싶어 했던 사람을 만나려 한다는 것 자체가 요한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처럼 여겨졌다.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던 요한은 한참 만에 로마노프에게 답장했다.

[이제 됐어.]

그러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요한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폰을 내려놓고는 샤워 부스로 들어섰다.

이제 바이올렛은 안녕이다.

길게만 느껴지는 출장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요한을 맞이한 것은 뜻밖의 소포였다. 요한은 관리인이 가져다준 수상쩍은 박스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소포는 두 개였다. 그것을 현관까지 손수 가지고 온 남자는 관리인에게 소포를 전달하며 셰어가 보낸 선물이라고 전했다고 한다.

요한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선물을 준다는 건, 사귀기 전에 알아 가는 과정이라는 건가? 설마 화대일 리는 없지 않은가.

요한은 조심스럽게 그중 더 작은 상자를 먼저 뜯어 보았다. 포장지에도 익숙한 로고가 박혀 있어 짐작은 했었지만 역시 그 넥타이였다. 셰어가 망가뜨린 요한의 넥타이. 주름 하나 없이 곱게 포장된 넥타이를 만지작거리던 요한이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이거 먹고 떨어지란 건 아니겠지.”

어지간하면 이런 의심까지 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삭막한 가정을 하게 된다. 물론 셰어가 정말 그런 의도였다고 해도 요한은 먹고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기필코, 아주 지독하게 엮이고 만다.

요한은 나름대로 굳은 다짐을 하며 다른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생각지도 못한 물건이었다. 요한은 선불 휴대 전화의 전원을 켰다. 기본 설정으로 세팅된 전화는 깔끔한 새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새 제품 그대로의 상태였으나 연락처에만 단 하나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C, 군더더기 없이 알파벳 하나뿐인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는 뻔했다. 요한은 즉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잠시 이어지다 뚝 끊어졌다. 동시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회의 중이니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통화 거절 시 기본으로 발신이 설정된 메시지가 분명했다. 정 없는 메시지를 잠시 노려보다 요한은 손가락을 움직였다.

[너셰어맞지지금장난하냐나한테이런걸왜줘아침에는인사도안하고갔더라쪽지라도하나남기면손가락이부러지시나연락처를꼭이렇게신박한방법으로줘야만했냐이러는이유가대체뭔지궁금해죽겠으니까회의끝나면바로전화해라새벽부터말도없이사라지더니어찌나바쁘신지온우주의일이란일은전부너혼자하시는듯]

듯, 까지 쓰다 말고 요한은 손을 멈추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으니 그동안 서운했던 것들이 울컥 치밀어 장문의 메시지를 쓰고 말았다. 그런데 조금 진정하고 쓴 걸 다시 읽어 보니, 괜히 말도 안 되는 일로 트집을 잡는 것 같았다. 요한은 쓰던 것을 모두 지우고 딱 한 마디로 답장했다.

[ㅇ]

아무래도 그동안 셰어에게 너무 매달리는 모습만 보여 준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멋대로 사라져도 선물이나 던져 주면 자신이 좋아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물론 요한은 셰어가 선물을 준 것이 좋았지만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요한은 침대에 드러누워 얼마 전부터 스트리밍 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한 V Pictures의 영화를 인기순으로 주파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좋아하던 영화들도 많았는데 어쩐지 집중이 되지 않아 자꾸 뒤로 가기를 누르고 말았다. 결국 요한은 1시간 내내 한 편의 영화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답장은 한 시간 반 뒤에 왔다.

[?]

“미친 거 아냐?”

딱 물음표 하나뿐인 메시지를 보자 갑자기 혈압이 올라 심장이 벌렁거렸다. 요한은 셰어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신호가 가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지고 메시지가 왔다.

[회의 중이니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요한은 침대에 누워 뒹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무슨 놈의 회의를 몇 시간이나 해? 회의 중인데 답장은 대체 왜 하냐고.”

요한은 주먹 이모지를 셰어에게 보냈다. 보내자마자 메시지를 읽었는지 말풍선 색깔이 변했다. 이번에는 금방 답장이 왔다.

[!]

“아, 얘 진짜 미친놈 같아…….”

요한은 괴로워하며 베개를 퍽퍽 후려쳤다.

* * *

“좋은 일 있니?”

샬롯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경쾌하게 서명을 마친 그녀가 펜 뚜껑을 닫았다. 줄곧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으면서 어떻게 사람 기분을 알아차린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눈이 정수리에도 달리셨나. 셰어는 여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특별한 건 없는데요.”

“그래?”

다 안다는 듯이 웃는 샬롯의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셰어는 대답 없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어느덧 통상적인 퇴근 시간을 훌쩍 지나고 있었다.

셰어는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연구소 프로젝트 쪽 인수 합병 문제로 장장 몇 시간 내내 회의실에 붙잡혀 있었다. 인수를 앞둔 스타트업 기업의 원천 기술 특허가 문제였다. 하필이면 그보다 규모가 큰 기업의 기술 특허와 유사하다는 소송이 제기되는 바람에 한창 진행 중이던 인수 합병 절차가 거의 백지화되었다.

좋은 일은 없었다. 재미있는 일이라면 하나쯤은 있었지만.

“안됐네. 오늘은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일찍 들어가지 그러니.”

샬롯은 속아 주겠다는 듯이 과장되게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며 결재를 마친 서류를 돌려주었다. 하여간 눈치가 귀신같은 사람이었다.

“알겠습니다.”

셰어는 그린 듯 반듯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셰어는 잠시 서랍 속에 넣어 두었던 선불 휴대 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마침 기다린 것처럼 메시지가 도착했다.

[장난?]

셰어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메시지를 보내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있을 요한의 얼빠진 얼굴이 떠올라 웃음을 참기가 곤혹스러웠다. 답장을 미루고 서랍 안에 두 대의 휴대 전화를 나란히 내려놓자 두 개의 화면에 번갈아 가며 빛이 들어온다.

하나는 온종일 전쟁처럼 치러 낸 회의에 대한 내용을 공유하기 위한 메일 알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한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셰어는 둘 중 어느 것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피로한 와중에 혹사당한 뇌가 욱신거린다. 잠깐이라도 머리를 쉬게 할 필요가 있었다.

셰어는 철저하게 사생활과 공적인 생활을 분리했다.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도 프로필이 뜨고, 뉴스에도 종종 얼굴을 비치는 몸으로 취향에 맞는 생활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플레이 파트너는 항상 검증된 상대를 구할 수 있는 은밀한 사교 클럽에서만 구하고, 연락은 반드시 즉시 없앨 수 있는 선불 휴대 전화를 사용한다. 실효성에 대한 부분은 미지수지만 비밀 유지 각서를 작성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비록 요한 바네스는 예외였지만 그에게도 안전을 위해 몇 가지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하룻밤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라면 계획과 준비가 필요했다.

요한이 메시지를 몇 통이나 보내고 있는지 폰이 계속 진동했다. 셰어는 연신 밀려 올라가고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재미있네]

[이럴줄알았냐]

[하나도재미없어]

[?]

[!]

[이딴거만보낼거면폰은왜줬어?]

[차라리편지를써라백만년뒤에나확인하게]

진짜 말 많네. 메시지를 읽는 와중에도 계속 메시지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오오]

[내말씹으니까맛있어?]

셰어는 끝없이 밀려드는 메시지를 보다 못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한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의 신호 끝에 전화는 거절당했다. 그리고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은 회의 중이니 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요한은 이상한 부분에서 삐뚤어진 게 틀림없었다. 셰어는 그와 대화를 나누기를 포기하고 용건만 간단히 보냈다.

[10시 퍼시픽 호텔]

보내자마자 말풍선 색깔이 변하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내가메모장이냐]

[내가스케줄러야?]

[10시에뭐호텔?]

[그시간에거기서뭐할건데]

메시지가 도착하는 속도가 거의 대화할 때만큼 빨랐다. 띄어쓰기를 안 해서 그런가. 셰어는 요한의 메시지를 잠시 곱씹었다. 아무래도 요한은 선물을 보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어쨌든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긴 했으니 만나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

할 말은 다 했으니 오든 말든 요한의 선택이었다. 만일 그가 오지 않는다면 다른 상대를 부르거나 혼자 잠들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셰어는 브리프케이스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여태 불을 훤하게 밝히고 있는 사무실들을 돌아보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로비로 내려오자, 출입문 게이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반색을 하며 셰어에게 다가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먼저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저번에 미팅 때 잠깐 뵈었죠. 유니콘 네트워크 연구팀 팀장 데일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종일 이어진 마라톤 같은 회의에 시달리게 한 원흉이었다. 스타트업 기업인 유니콘 네트워크와는 인수 합병을 위해 몇 차례 미팅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연구팀 팀장인 데일은 아주 초반의 인수 적합성 판단 단계에서만 미팅에 참석했다. 그는 기술 설명회에서 발표를 했고, 구체적인 인수 과정에 대한 얘기로 넘어가기 전에 보드 멤버에서 빠졌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로?”

안면이 있는 얼굴이라 해도 셰어에게 그들을 모두 친절하게 만나 줘야 할 의무는 없었다. 약속도 없이 방문한 이들을 모두 만나 줘서야 비서에게 월급을 주고 스케줄을 관리하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셰어는 습관처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요한에게 통보한 시각까지 호텔에 도착하려면 10분 안에 출발해야 한다. 남은 시간을 헤아리는 셰어의 건조한 눈빛을 살피던 데일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바쁘시겠지만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특허 관련해서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키는 대로만 하자면 이대로 무시하고 요한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셰어는 공적인 일을 위해 사적인 일을 희생하는 생활에 지나치게 적응되어 있었기에, 그 타성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셰어의 반듯한 이마가 희미하게 찌푸려진다.

“짧게 하지요. 5분, 그 이상이 될 것 같으면 내일 방문 약속을 잡으세요.”

데일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어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그 얘기라는 게 5분을 너끈히 넘길 만한 화제인 것이 틀림없다.

이성이 말한다. 저 긴장한 얼굴을 보라지. 사회생활에 인이 박여 이런 짓이 실례라는 것쯤은 뻔히 알 만한 남자가 대책 없이 이곳까지 온 것은 분명 중대한 사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 것이라면 당장 듣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일이다. 고작 섹스를 위해 무시하기에는 지나치게 큰 리스크다.

브리프케이스에 든 두 개의 폰 중 하나가 진동하고 있었다. 셰어는 둘 중 어느 것인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진동하는 폰을 꺼냈다. 요한이었다. 그는 항상 나쁜 타이밍에 전화를 건다. 어쩌면 요한에게 선불 휴대 전화를 보낸 것은 실수인지도 모른다.

“전화…… 안 받으십니까?”

데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셰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고 액정 화면만 노려보는 사이 전화는 끊겼다. 부재중 전화 알림이 뜨는 것과 거의 동시에 화면에 요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바람맞히면죽는다]

[늦지마]

셰어는 긴 한숨을 뱉으며 폰을 브리프케이스에 쑤셔 박았다. 피로로 약간 충혈된 눈이 데일을 잠시 바라본다. 데일은 겨우 몇 초도 채 되지 않을 정적을 굳은 얼굴로 견디고 있었다. 이성은 이 남자와 얘기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실수다.

“내일 비서실로 전화해서 약속 잡으세요. 팀장님 편한 시간으로 맞추겠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약속을 얻은 것만으로도 남자는 다소 안도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셰어는 끝까지 배웅하겠다며 차 앞까지 따라오는 데일을 뒤로한 채 차에 탔다. 문이 닫히자 기사는 조용히 미리 말해 두었던 행선지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조용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고용주의 취향을 고려한 탓에 차 안은 옷자락 스치는 소리마저도 요란스럽게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지금 당장 들어야 할 만큼 중요해 보이는 일을 듣지 않고 미룬 것은 실수다. 하지만 고작 하룻밤 뒤로 밀린 것으로 난리가 날 만한 일이라면 데일이라는 남자도 순순히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셰어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했다.

[가는 중이니까 너나 늦지 마.]

누군가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는 것이 지루하지 않은 적은 드물었다. 셰어는 시트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으며 불쾌한 울렁거림을 참았다. 지금,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불쾌하다.

* * *

[가는 중이니까 너나 늦지 마.]

요한은 셰어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고작 한 줄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사이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P에 도착했다. 펜트하우스, 퍼시픽 호텔이 BNB 계열의 호텔 체인이니 셰어가 기다리고 있을 방 또한 최소한 프레지던트 레벨 이상일 것이라는 점은 요한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그게 펜트하우스일 줄은 몰랐지만.

어느 곳이나 퍼시픽 호텔이라면 베일리 가문의 사람들을 위한 펜트하우스가 준비된다.

요한 역시 부족함 없이 자라 부유한 이들과 부대낄 일이 많았으나, 몇 대에 걸친 부를 세습 받은 이들과 어울릴 때면 이처럼 위화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들의 삶은 모두 레디메이드였다. 태어나자마자 장차 물려받을 회사의 주식을 증여받고, 데뷰탕트 때 정해진 파트너와 손을 잡으며, 부모가 졸업한 명문대에 입학하는 등 모든 삶이 매끈하게 포장된 대로처럼 정해져 있었다.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순조롭게 걷는 그들의 삶은 일견 부럽기도 했으나, 요한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해 보였다.

요한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망설이지 않고 정면에 보이는 문을 열었다. 감히 자신 앞에 닫혀 있는 문은 없을 거라 믿는 듯한 태도였다. 문은 열려 있었다. 요한은 제집에라도 들어가는 사람처럼 유유히 문 너머로 걸어 들어갔다.

문 너머의 공간은 까다로운 상류층 고객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 태가 났지만 그만큼 감성적인 구석은 없었다. 대리석이 깔린 복도를 지나 도시를 테마로 한 미술 작품이 걸려 있는 벽에서 꺾으면 탁 트인 거실이 드러난다.

“셰어.”

초조해지려는 마음을 억누르며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요한의 의도보다 더 경직되어 있었다.

망할, 한 번도 호텔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이렇게 긴장해 본 적이 없는데. 요한은 입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하필 그 처음의 상대가 셰어일 게 뭔가. 우위를 점하고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셰어를 묘하게 위축된 상태로 만나자니 입 안이 마르는 듯했다.

어쩌면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은 호텔에서 만난 사람들이 꼭 섹스를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당장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짓 중 성적이지 않은 일은 한 가지도 없었다.

요한은 망상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거실에 멈춰 섰다. 모던한 테마로 꾸며진 거실은 소리가 울릴 만큼 넓었다. 큼직한 가구들로 채워진 공간은 허전함을 지우기 위함인지 생화와 상징적인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었으나,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완벽한 공간은 오히려 쇼윈도에 장식된 물건처럼 이질적인 세계 같았다.

조명을 낮춰 둔 탓에 주위는 어두웠다. 거실의 한 벽면을 차지한 술이 진열된 장식장은 펜던트형 전등의 불빛에 아늑한 고동색으로 물들어 있다. 전등 아래, 길쭉한 바 테이블의 표면이 묵직한 빛으로 반들거린다. 그 외에 다른 조명은 없었다. 그나마 탁 트인 너른 창을 통해 도심의 불빛들이 환하게 쏟아졌기에 사물을 구별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요한은 찬란한 야경의 불빛이 부서지는 창을 등지고 서 있는 셰어를 발견했다. 그는 재킷과 넥타이를 소파에 아무렇게나 내던진 채 셔츠와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커프스 링크를 빼느라 집중하고 있던 얼굴이 요한을 흘깃 쳐다보았다.

“늦었어.”

커프스 링크가 빠지는 미세한 소음이 유독 크게 들렸다. 이어 들리는 셔츠 소매가 사박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이는 듯해 요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무심하게 한 번 닿았다 도로 떨어져 나간 시선이 뭔가를 잡아끄는 듯했다. 예를 들면 그 시선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을.

“네가 너무 일찍 온 거지.”

핀잔을 주려던 말은 그 말을 뱉은 요한에게도 지나치게 다정하게 들렸다. 셰어는 뭐가 우스운지 혼자 웃었다. 그는 소매에서 떼어 낸 커프스 링크를 쥔 채 길쭉한 바 테이블로 향했다. 어둑한 가운데 스치듯 보인 옆모습은 찰나였으나 요한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움켜쥐면 그 모양대로 손자국이 남을 것처럼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드물게 보였던 셰어의 웃는 얼굴과는 좀 달랐다. 기억보다 더 예뻤다.

요한은 자석에 끌리는 것처럼 셰어를 따라갔다. 셰어는 커프스 링크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손목시계를 풀고 있었다. 고작 시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리 아래가 근질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시계를 푸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 것 같다니. 슬슬 위기감이 느껴지는 아랫도리의 사정을 감추려 테이블 맞은편에 서자, 속을 읽기 어려운 모호한 표정의 셰어가 요한을 마주 본다. 위에서 쏟아지는 어스름한 조명 탓에 유독 색이 짙어 보이는 눈은 마치 사람을 작정하고 홀리려는 듯했다.

“내가 왜 보자고 했는지 알겠어?”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요한은 셰어가 한 말을 반쯤 흘려들었다. 요한은 그 입술이 답을 기다리듯 굳게 닫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난 뒤에야 조금 멍하게 되물었다.

“뭐?”

“집중 안 하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셰어가 인상을 찌푸린다. 키스하고 싶었다. 하면 싫어하겠지. 요한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아니. 생각을 좀 하느라. 좀 멍청한 생각인 것 같긴 한데. 어쩐지, 네가 날…….”

꼴리게 하려고 작정한 것 같아. 요한은 뒷말을 삼켰다. 그 셰어가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요한은 어쩐지 억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일부러가 아니면 왜 커프스 링크를 그렇게 야하게 빼는데. 시계는 왜 그렇게 느릿하게 풀어서 저 희고 부드러워 보이는 손목을 보여 준단 말인가. 당장이라도 그를 붙잡고 따져 묻고 싶었다.

“내가 너를, 뭐?”

셰어는 뭐라 따지기도 어렵게 담백하게 되물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 지나치게 결백해 보인 탓에 요한은 대답하는 대신 바에 놓여 있던 술병을 잡았다. 셰어와 대화할 용기를 얻기 위해서는 알코올이 필요했다. 잔이 보이지 않았기에 급한 대로 뚜껑을 열고 병째로 술을 들이붓는데, 하필 독한 술을 삼키는 타이밍에 맞춰 셰어가 물었다.

“내가 너한테 수작 거는 것 같아?”

“큽!”

술이 기도로 역류할 뻔했다. 요한은 시뻘게진 얼굴로 곧 죽을 듯 기침을 해 대며 바에 팔을 기댔다. 가까스로 병을 내려놓은 채 셰어를 보자 그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요한을 보고 있었다. 그 눈은 상대를 조금 한심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요한은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면 말고. 차라리 웃지?”

본래 셰어의 성격대로라면 지금은 신랄하게 비웃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속 모를 얼굴로 요한만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 시선이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요한은 독한 술이 긁고 간 식도가 바싹 마르고 창자가 지글거리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셰어를 테이블 위로 쓰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참다못한 요한이 먼저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생각 중이니까 그 입 좀 다물어.”

요한은 당당하게 명령하는 그의 태도가 어이없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만 할 거면 나를 여기까지 왜 불렀는데?”

셰어는 침묵했다. 그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뭔가를 감정하듯 요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아, 요한은 괜히 움츠러들려는 가슴을 되레 쭉 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턱을 치켜든 얼굴은 고집스럽게 눈을 치떴음에도 훤칠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셰어가 뭔가를 참듯 눈썹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도 지금 너랑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말도 더럽게 안 듣는 너랑.”

비록 그 말은 욕처럼 들렸으나 요한은 그의 단조로운 말투에서 어떤 간질거리는 감정을 포착했다. 착각일지도 모르는 미묘한 감정의 실마리는 술보다 더 효과적으로 용기를 불어넣었다. 요한은 바 위에 팔을 괸 채 셰어에게 몸을 기울였다. 셰어가 다가오면 입을 맞출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그는 가까워지는 요한의 얼굴을 여전히 불투명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먼저 다가가지는 않지만 그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요한의 등줄기를 저리도록 곤두서게 했다.

“셰어, 나한테 할 말 있지. 지금 해.”

짐짓 여유를 가장하며 기회를 주겠다는 듯 너그러운 투의 말을 지껄이자 셰어가 요한의 목덜미를 느리게 감싸 쥐었다. 단단한 손마디가 목줄기에 감기는 것이 꼭 짐승의 아가리가 다물리는 듯해 요한의 낯빛이 굳어졌다.

셰어의 손이 요한을 아래로 눌렀다. 힘을 강제하는 손길에 놀란 요한은 반사적으로 버티려 했으나, 이내 순순히 머리를 숙여 주었다. 차가운 바 테이블의 냉기가 요한의 뺨에 스며들었다. 요한을 테이블 위로 엎드리게 한 셰어가 그를 칭찬하듯 긴 손가락으로 귀 밑과 턱 아래를 슬슬 긁어 주었다. 흡사 개를 칭찬하는 듯한 태도였다. 묘하게 굴욕적인 손길에 요한의 얼굴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뭐…… 하는 건데, 이건.”

“쉿. 가만히.”

날카로운 쉿 소리에 흠칫 놀란 요한의 새빨간 귀를 셰어가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놀라 움찔거리는 목을 짓누르는 손길은 생각보다 억셌다. 요한은 그를 쉽게 떨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힘을 뺐다.

귀를 아주 베어 먹을 듯 잘근거리던 이는 금세 물러났다. 요한은 씨근거리는 숨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눈만 굴려 셰어를 바라보았다. 셰어는 묘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요한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옅은 흥분이 번진 눈이 젖어 있는 것이 요한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바에 가려진 하반신에 갑작스럽게 열기가 몰려 바지 속이 갑갑해진다.

“착하네. 그래도 잘 모르겠어. 너랑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네가 잘 따라올 수 있을지…… 없을지.”

셰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것이 이상하게 아쉽게 느껴져 요한은 그 손이 떨어진 후에도 바 위에 기대 있었다. 차가웠던 테이블이 체온으로 데워져 미지근해졌다. 그 순순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셰어가 요한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기분 좋다. 요한은 셰어의 손을 붙잡아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볼을 비볐다. 이 정도는 받아 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 정답이었는지 셰어는 요한의 간지러운 짓에 응해 주었다.

뺨을 문지르는 셰어의 손가락은 누군가를 다정하게 어루만진다기보다는 표면의 질감을 확인하는 사무적인 손길에 더 가깝다. 요한은 그것이 셰어답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랑 하고 싶은 게 뭔데? 말해 봐.”

“내 취향이 좀 남다른 건 너도 알겠지. 저번에 경험해 봤으니까.”

“뭐…… 그렇지.”

요한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어쩐지 대화가 순수한 멜로드라마처럼 흘러갈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들었다. 뺨을 만져 주던 손이 멀어졌다. 셰어는 처음처럼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애로 사항이 많아. 특히 나 같은 사람은.”

“그래, 그건 그렇겠네.”

모르긴 몰라도 추문 하나 없는 베일리 가문의 왕자님에게 가학적인 성적 취향이 있다는 스캔들이 나면 굉장한 파장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베일리 가문에 팔든, 언론에 공개하든 최소한 수천만 불의 가치가 있는 스캔들이다. 사실을 폭로해서 한몫 챙겨 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리가 없다.

“나도 손 놓고 당할 수는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그렇지. 아, 나는 걱정 안 해도 돼. 잠자리 얘기 떠들고 다닐 만큼 매너 없지는 않거든.”

“그래?”

웃음기 어린 그 물음은 어쩐지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요한은 그가 참 까다로운 남자라는 생각을 했다. 그냥 애인 하자 한마디면 될 것을 한참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 아무래도 상대가 먼저 얘기하고 싶어 하는 듯해 가만히 있었는데, 계속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선수를 치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까지 하던 참이었다.

“그럼 너랑은 내 취향대로 놀아도 괜찮겠다. 넌 입이 무거우니까.”

눈을 가늘게 뜬 셰어의 얼굴에 위태로운 정염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사라졌다. 요한은 흐트러지려는 숨을 골랐다. 가뜩이나 불편하던 바지 속이 이제 아프기까지 했다.

요한은 확신했다. 셰어는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정한 게 분명하다. 오늘 이곳에서 만나는 목적은 망상 속 그렇고 그런 짓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오히려 달갑게 느껴졌다.

“안 될 거 없지. 근데 네 취향에만 맞추면 내가 좀 아쉬울 것 같은데?”

하지만 요한은 마냥 순순하게 셰어가 바라는 대로만 따라갈 생각이 없었다.

“내 취향은? 서로 공평해야지, 셰어. 안 그래?”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기분 좋게 웃자 셰어의 미간이 단번에 찌푸려진다. 셰어는 대답 없이 등을 돌려 소파로 향했다. 요한은 그가 그대로 재킷을 챙겨 방을 나가더라도 놀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뜻밖에 셰어는 서류 한 장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조명이 떨어지는 테이블 위에 그가 서류를 내려놓자, 새하얀 종이가 반사판처럼 환하게 보인다. 요한은 그 서류의 정체가 무엇인지 쉽게 알아보았다.

비밀 유지 각서.

셰어는 요한이 서류를 읽는 내내 입을 다문 채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표정을 기민하게 관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한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비밀 유지 각서가 먼저 필요한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래 그런 취향이 있으면 이렇게까지 철저해야 할 일이던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요한은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정리해 보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넌 나랑 계속 만나고 싶은 거지?”

“그래.”

“근데 왜 그 말은 안 해?”

뭘? 묻는 듯한 눈이 요한을 향했다. 매사 능숙한 것처럼 구는 주제에 셰어는 연애에 대해서는 묘하게 부족한 면이 있었다. 요한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굴러다니던 펜을 꺼내 적당히 서류에 서명하며 투덜거렸다.

“이딴 거 꺼내기 전에 고백이 먼저지. 넌 진짜 순서가 엉망이야.”

시원하게 서명을 마친 서류를 셰어에게 내밀자 그는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요한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들끓는 감정이 무서울 만큼 집요한 시선에 깃든다. 그 얼굴을 보자 요한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널 좋아해.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좋았어. 나랑 만나 줄래?”

고백은 어려울 거 하나 없이 흘러나왔다. 줄곧 생각하던 말을 하는 것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요한은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으로 셰어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셰어가 손을 뻗어 요한을 움켜쥐어 당기고 입을 맞추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요한은 유독 거친 입맞춤을 받으며 셰어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이제 연인이 되었으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입맞춤이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드잡이하는 것처럼 거칠게 서로의 옷을 벗기던 몸들이 뒤엉켜 소파 위에 쓰러졌다. 침실은 지나치게 멀었다. 셔츠 단추는 제대로 풀지 않은 채 뜯어 버렸고, 바지는 겨우 앞섶만 풀어 헤친 채 성급한 손이 먼저 드나들었다. 가쁜 숨이 섞이는 소리가 지나치게 넓은 공간에 울린다. 숨소리는 이내 잡아먹을 듯 얽히는 입술과 혀에 묻혀 사라졌다.

먼저 위를 선점한 것은 셰어였다. 셰어는 이미 터질 듯이 발기한 요한의 성기를 세게 움켜쥐며 그를 소파에 찍어 눌렀다.

낮은 조도에 묻혀 유독 색이 짙어 보이는 머리칼이 요한의 이마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소파에 드러누운 채 셰어를 바라보는 요한의 눈이 열에 취한 듯 풀려 있었다. 몽롱한 눈 속에 남은 이성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한은 셰어의 손에다 좆질을 하듯 허리를 밀어 올리며 셰어의 등허리를 슬슬 쓸어내렸다. 뜨거운 손이 지나는 곳마다 열이 번지는지 달아오른 얼굴로 눈살을 찌푸린 셰어가 입 속으로 욕설을 씹어 댔다.

“많이 참고 있으니까 도발하지 마.”

억세게 휘어잡힌 성기가 아파 요한은 눈썹을 구겼다. 그는 한 손을 뻗어 셰어의 목덜미를 감싸 쥐어 당기며 입술을 부딪쳤다.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셰어의 얼굴이 미세하게 풀어지는 게 보인다.

“왜 그렇게 딱딱하게 얘기해? 다 좋아서 이러는 건데.”

요한이 버클과 지퍼까지 풀어 헤쳐 헐거워진 셰어의 바지 속에 멋대로 손을 밀어 넣으며 단단해 보이는 가슴에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손이 셰어의 엉덩이를 쥐고 주무르자 힘이 들어가 부풀어 오른 요한의 팔뚝에 헐겁게 걸려 있던 바지 허리춤이 금세 흘러내린다.

셰어는 요한의 다리 사이에 파고든 무릎을 밀어붙이며, 한결 부드러워진 손길로 손에 쥔 성기를 흔들었다. 찌푸린 눈썹 아래 느릿하게 감긴 요한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할딱거리는 숨을 뱉던 입술이 셰어에게 달려들었다.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달려드는 것에 떠밀려 이번에는 셰어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순식간에 위치가 역전된 탓에 셰어는 머리가 어지러운 듯 습관처럼 욕설을 중얼거렸다. 요한에게는 그것마저도 유혹으로 들렸다.

“오늘따라 입이 왜 이렇게 험해?”

요한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술을 부딪쳤다. 셰어의 말은 기다림을 모르는 입술에 짓눌려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결국 방종한 입술은 아프게 물어뜯겼다. 멋대로 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요한은 순순히 셰어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에게서 떨어진 후에야 요한은 제 숨이 지나치게 가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험하다. 요한은 진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떠올렸으나 일말의 이성마저도 뜨거운 물에 녹은 설탕처럼 순식간에 풀어졌다. 가파르게 치솟는 욕망도, 그것을 부추기는 셰어의 눈 속에 든 것도 모두 절제를 모르고 부피만 키울 뿐이다.

“험하다고, 이게. 마음먹고 험하게 말하면 너 울겠는데.”

어쩐지 음습하게 젖은 셰어의 눈이 요한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굴 말 한마디에 질질 짜는 애 취급을 하는 건지. 요한은 그의 착각을 고쳐 주고 싶었다. 거침없이 뻗은 손이 셰어의 가슴 위를 더듬었다. 들숨과 함께 부풀어 오른 가슴이 너른 손바닥 아래 단단하게 차오른다. 피부에 달라붙은 손바닥 아래 자그마한 돌기가 쓸려 점차 꼿꼿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힘이 들어간 셰어의 턱이 고집스러운 선을 그렸다.

“해 봐. 얼마나 험할지 좀 궁금하네.”

요한은 허리를 밀어 올려 제 성기를 셰어의 손에 스스로 비벼 대며, 셰어의 목이며 어깨, 가슴 위를 간지럽게 쓸어 댔다. 입술은 부딪치는 각도를 바꾸며 깊게, 때로는 얕게 엉켜들었다. 엉망으로 젖은 입술이 이에 뭉개지고 누구 것인지 모를 타액이 흘렀다.

셰어의 입 안은 한 번도 단단한 것을 먹어 보지 않은 것처럼 무르고 부드러웠다. 요한은 매서운 말만 뱉는 이의 것이라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입 안을 헤치고 어르듯 혀를 빨아 댔다. 요한의 성기를 감아쥔 손아귀가 위협하듯 성기 뿌리를 옥죄었다. 요한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입술을 떼자 셰어가 요한의 입술을 세게 깨물며 이죽거렸다.

“멍멍아, 발정 났어? 쓸모도 없는 물건 이렇게 비벼 대면 뭐 해.”

“윽, 하아…… 너 죽는다, 진짜.”

“짖지 말고 예쁘게 굴어 봐. 내가 너그럽게 봐줄 마음이 들게.”

이 새끼, 취향 진짜 나쁘네. 요한이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지껄이자 셰어의 손아귀가 더욱 모질게 좆을 쥐어짰다.

“아, 아파! 미친 새끼야…… 후으, 공평하게, 해야지. 왜 너만 내키는 대로 해?”

“공평하게.”

말을 길게 늘이며 요한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 비꼬는 게 분명했다.

“공평한 게 뭔데? 난 여태 내 취향대로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데 이게 뭐가 공평해.”

좆을 부러뜨릴 듯 쥐어짜던 손이 느슨해졌다. 피가 몰리며 생긴 얼얼한 통증이 혈관을 타고 번지는 느낌이 지독한 탓에 요한은 몸을 웅크린 채 숨을 골라야 했다. 셰어가 이번에는 부드러운 손길로 요한의 성기를 쓰다듬었다. 그 나긋한 손길이 스칠 때마다 찌릿한 감각이 밀려들어 요한은 셰어의 귓전에 뜨끈한 숨을 연신 흘려야 했다.

“너 내가 시키는 대로 다 할 수 있어?”

쉽게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예감이 들었다. 요한은 열이 몰려 발갛게 달아오른 셰어의 귀를 물고 빨았다. 축축한 혀가 작은 귓구멍을 파고들자 상냥한 척하던 손길이 도로 우악스러워진다. 기둥을 거칠게 틀어쥐는 것도 모자라 요도를 후벼 팔 듯 비비는 손가락이 잔혹할 만큼 선명한 감각을 일깨웠다. 통각과 접붙어 있는 그것은 명백한 쾌감이었다. 요한은 탁한 신음을 흘리며 셰어의 귀를 사납게 씹어 댔다.

“우리, 조금만 이따 얘기하면 안 될까?”

타액으로 범벅이 된 새빨간 귀를 놓아주자 셰어와 눈이 마주쳤다. 속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눈이 요한을 바라본다. 요한은 그 눈이 꼭 자신을 질책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잘못을 얼버무릴 때처럼 비죽 웃고 만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좀 급해서, 죽겠는데.”

먼저 입술을 겹쳐 온 것은 셰어였다.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접촉이 농밀한 입맞춤으로 쉽게 변질되었다. 요한은 셰어가 쉽게 뭉개지는 크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고 혀를 내어 핥았다. 혀가 얽히고 입술이 입술을 물었다. 가쁜 숨이 쏟아지는 것마저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녹아내린 크림처럼 흐물거리는 셰어의 혀가 달았다. 입술에 닿는 그의 모든 것이 달게만 느껴져 위험했다.

어둑한 가운데 근육의 섬세한 형태가 뚜렷하게 두드러진 가슴과 배를 핥으며 아래로 내려가자, 셰어의 두 손이 요한의 머리 위로 올라온다. 요한은 그 손이 당장이라도 머리칼을 휘어잡을 것만 같아 혀뿌리가 단단하게 굳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셰어의 손을 일부러 뿌리치지는 않았다. 셰어는 상대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잃는 것이 불안한 듯했다. 요한은 그 정도의 투정쯤은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었다. 셰어는 이런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일전에 셰어는 상대를 배려할 생각도 없이 내키는 대로 박아 댔지만, 그와는 달리 매너를 아는 요한은 상대를 충분히 안심시켜 줄 생각이었다.

요한은 이로 브리프 밴드를 물어 내리며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누운 셰어를 바라보았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그의 눈에 어린 열기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덮칠 듯해 혀 밑에 침이 고였다. 그를 한입에 넣어 삼키고 싶었다.

이미 완전히 발기해 브리프 밴드를 거의 밀어 올리고 있던 성기가 브리프 밴드가 내려간 순간 튀어나와 요한의 얼굴에 함부로 부딪쳤다. 딱 제 주인을 닮아 버릇이 없었다. 요한은 그것을 타이르듯 움켜쥔 채 느릿하게 문지르며 크기를 가늠했다. 손안에서 부쩍 크기를 키운 물건은 흔들 때마다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확실히 입에 넣기에 부담스러운 크기였다.

어쩐지, 저번에 이걸 빨았더니 턱이 뻐근하게 아팠다. 망설이는 것을 알았는지 셰어가 조금 전 머리칼을 휘어잡은 것과는 퍽 대조적인 부드러운 손길로 요한의 머리를 눌렀다. 어쨌든 강압적인 면이 있는 것은 여전했다.

“보기만 하면 뭐 해. 빨아야지.”

푹 잠긴 목소리에서 감추지 못한 갈급한 욕망이 뚝뚝 떨어졌다. 입술에 문질러지는 선단을 선선히 입에 머금으며 요한은 셰어의 바지를 벗겨 내렸다. 셰어는 뜨끈한 입 안으로 성기가 빨려 들어가는 자극에 취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하아…….”

눅눅한 숨을 뱉으며 고개를 숙인 얼굴이 눈가부터 발긋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요한은 그 얼굴을 핥아 먹을 듯 바라보며 턱이 뻐근하도록 큰 성기를 삼켰다. 그래도 한 번이라도 빨아 본 적이 있는 크기라 삼키는 것이 전보다 고되지는 않았다.

셰어의 발목을 타고 기어오른 요한의 손이 종아리 안쪽을 지나 오금을 붙잡았다. 성기를 뿌리까지 삼키는 것과 동시에 무릎 안쪽의 여린 살을 더듬는 손길이 더해지자 벌어진 허벅지에 유려한 근육이 두드러진다.

머리칼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요한의 머리를 꾹꾹 눌러 내고 있었다. 요한은 그 손길에 응해 고개를 움직이며 관대하게 열린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었다.

여기다 싸게 해 주면 좋겠는데.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굵은 선단이 목젖을 쿡 쑤셨다. 요한은 생리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참으며 셰어를 노려보았다. 열 오른 눈이 얼얼했다.

“그 얼굴, 진짜…….”

진짜, 뭐? 요한은 눈으로 물었으나 셰어는 뒷말을 들려주지 않았다. 은근히 머리를 짓누르는 걸 보니 대답해 주기 싫은 것 같았다. 요한은 어쩔 수 없이 하던 일에나 집중하기로 했다. 입에 머금고 있던 성기를 뱉어 내며 비릿한 맛이 배어 나오기 시작하는 귀두를 혀로 살살 핥자, 셰어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빠르게 치밀어 오르는 쾌감을 견디는 얼굴이 정욕을 부추긴다.

요한은 타액으로 미끈거리는 성기를 쥐고 흔들며 꼿꼿하게 선 기둥 아래의 음낭을 입술로 지분거렸다. 흥분으로 바짝 올라붙은 음낭을 뾰족하게 세운 혀끝으로 핥으며 입술을 열어 비비자, 입 안에 밀려들어 온 살덩이가 혀에 눅진하게 달라붙는 듯했다.

게걸스럽게 뭔가를 빠는 젖은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셰어가 종종 욕설을 삼키는 소리가 섞인다. 요한은 침대 위에서 욕을 들으면서 흥분하는 취향은 없었으나 셰어가 욕하는 것만은 달랐다. 그가 참기 어려운 듯 갈라진 목소리로 흐트러진 숨과 함께 욕설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야릇했다.

배에 바짝 붙도록 곤두선 성기가 질금거리며 물을 흘려 대는 바람에 요한은 제 것을 한 손으로 움켜쥔 채 입을 크게 벌려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셰어의 성기를 삼켜야 했다.

비릿한 맛이 번지는 목구멍을 은근히 쿡쿡 찔러 대던 성기가 점차 거칠게 입 안을 들쑤시기 시작한다. 입천장이며 목젖, 혓바닥을 가리지 않고 찔러 대는 탓에 잘못 찔린 목구멍이 욱신거리고 신 침이 고여 타액이 턱까지 질질 흘렀다.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게 입에다 대고 거칠게 추삽질을 하는 것이 버거워 요한이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미지근한 정액이 요한의 입술이며 입 안에 뿌려졌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과 엉킨 정액이 흘러 얼굴이 엉망으로 젖었다.

요한은 먼저 입 안에 남은 정액을 삼키며 떨떠름한 얼굴로 셰어를 노려보았다. 불그레하게 달아오른 셰어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열기가 피부 밑을 기어 다니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짜증도 못 내게 농염한 얼굴이었다. 요한은 배 안이 조여드는 듯해 제 성기를 더욱 바투 쥐었다. 아직 제대로 한 것도 없는데 저 얼굴을 보니 흘리고 말 것 같다.

셰어가 한 손으로 제 성기를 쥐고는 꾹 다물린 요한의 입술에 마지막 남은 정액을 덧바르듯 귀두를 문질러 댔다. 비릿한 맛이 입 안으로 번진다. 요한은 기꺼이 그것을 핥아 먹었다.

“예쁘네.”

셰어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슬며시 가늘어진 눈이 웃는 듯했다.

예쁘긴, 네가 예쁘지. 요한은 그런 생각을 삼키며 정액과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는 그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는 웅얼거렸다.

“응, 고마워.”

희끄무레한 것들을 샅샅이 핥자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한층 느긋해진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매끄러운 혀와 공손한 태도였다. 요한은 얌전히 그의 손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혀를 길게 내어 비릿한 피부를 핥았다.

사정 후라 예민해진 곳을 핥았기 때문인지 셰어의 성기가 다시 형태를 갖추려 하고 있었다. 요한은 반쯤 선 기둥 아래의 음낭을 빨며 고개를 숙였다.

혀가 음낭 아래로, 회음부보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잠시나마 머리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셰어의 손이 일순 우악스럽게 변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혀를 내민 채 위로 끌려 올라간 요한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아, 좀…… 잘 빨고 있는데 왜 이래?”

“지랄 마.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셰어는 무섭게 굳은 얼굴로 요한을 노려보고 있었다. 거기 좀 핥았다고 사람을 아주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요한은 한숨을 푹푹 쉬며 셰어에게서 손을 떼고 두 손을 들어 올려 안심하라는 듯이 손바닥을 보였다.

그 순종적인 사인에도 셰어는 날이 선 눈빛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요한은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싫다는 사람을 묶어 놓고 멋대로 할 때는 언제고, 이 치사한 새끼가.

본심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요한은 갓 사귀기 시작한 애인과 다투고 싶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온건하게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기분 좋게 해 주겠다는데 왜? 거기 좀 핥는 게 뭐가 어때서.”

“이게 지금 누굴 놀려?”

“내가 널 안고 싶어 하는 게 왜 널 놀리는 거야? 넌 그때 나 놀리려고 그랬어?”

“하아…… 미치겠네.”

셰어가 허공을 노려보며 깊은 한숨을 뱉었다. 열기가 미처 가시지 않아 여태 불그레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그가 냉엄하게 명령했다.

“비켜. 이건 아니야.”

요한은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와중에도 차갑게 명령하는 셰어를 보며 화난 얼굴도 참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불공평하다. 항상 내키는 대로 상대를 휘두르는 셰어와 달리 요한은 셰어와의 관계에서 매번 열위에 있다. 요한은 애인에게는 얼마든지 져 줄 수 있었으나 이처럼 배려할 가치도 없는 취급을 받는, 절대적인 을의 위치에 놓이는 것만은 달갑지 않았다.

“뭐가 아닌데. 오늘 있었던 일도 다 없던 일로 치고 싶어?”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뜻밖에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요한은 잠시 입을 굳게 다문 채 숨을 골랐다. 입을 열면 당장 윽박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셰어는 요한이 말이 없는 사이 여유를 되찾았는지 한결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런 건 안 맞으면 답도 없어. 노력으로 맞춰 갈 수도 없는 부분이고.”

정작 그 말을 하는 셰어는 관계를 위해 어떤 노력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오늘 밤 셰어가 어떤 의도로 이런 자리를 준비한 것인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라면 그와는 가망이 없다. 요한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쉽게 끝을 맺지 못했다. 마주 본 셰어의 눈 속에 타들어 갈 것을 알면서도 달려들고 싶은 불꽃 같은 것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꼴사납게 매달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요한은 창피하지 않았다. 자신을 투명 인간처럼 취급하던 사람이 이제 손길을 허락하고 때로는 예쁘게 웃어 주기도 한다. 지금도 셰어에게 닿을 때면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그가 웃으면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았다. 요한은 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셰어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린 것처럼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미소를 보자 요한은 매달리는 것보다 더한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네가 나한테 맞추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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