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쿨한 거 좋아하네.
셰어는 북적거리는 박람회장의 인파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남자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요한 바네스, 그의 구 스토커 겸 원나잇 파트너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디스플레이 제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가 구경 중인 제품에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지난해에 전시된 디스플레이와 유사한 것으로, 롤업 방식이냐 롤다운 방식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그저 쇼핑이나 하러 다니는 멍청한 스토커인 줄 알았더니 요한 역시 출장을 온 모양이었다. 패드를 들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뭔가를 기록하는 것을 보니 나름대로 열심히 일을 하는 중인 듯했다.
“거기 재미있는 게 있나 봐요?”
샬롯이 말을 꺼내자 함께 의전을 수행 중이던 임원들의 시선이 셰어에게 쏠렸다. 셰어는 담담한 표정으로 둘러댔다.
“작년에 본 것과 비슷한 디스플레이가 있어서요. 아직 양산은 어렵다던데 제품 자체는 나쁘지 않네요.”
“연구소 프로젝트 매니저답네요. 상품성보다 다른 것을 우선시하는 게. 그래도 기업 입장에서는 시장화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가 관건이겠죠.”
말에 가시가 있었다. 은근슬쩍 신경전을 걸어오는 나긋한 말투에 셰어가 입술을 끌어 올려 미소 짓자 일행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글쎄요. 그렇다기보다는 연구소 프로젝트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할 수 있는 생각이죠. 기술 로드 맵을 짤 때도 단계라는 게 있으니까요. 가치 있는 기술을 배양해 양산까지 가는 게 연구소의 궁극적인 목적 아니겠습니까?”
샬롯이 흔치 않게 웃었다.
“과연, 프로젝트를 이끄는 분이 이리 잘 아시니 걱정이 없습니다.”
샬롯이 몸을 돌려 예정된 코스대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뒤를 따라 일행들이 차례로 걸음을 옮겼다. 셰어는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가며 피로로 욱신거리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지난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스트레스를 섹스로 푼 것은 좋았다. 비록 제대로 된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일단은 폭발이 임박한 탄의 뇌관을 제거한 셈이니 또 하루분의 스트레스는 쉽게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것이 있었다. 셰어는 그것이 바이올렛의 스토커와 육체적으로 얽힌 부담인지, 요한 바네스의 존재 자체에 대한 꺼림칙함인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서로 없었던 일로 치자고. 쿨하게.’
단지 그는 요한이 매우 거슬렸다.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사람을 열받게 만든 주제에 살 좀 맞붙였다고 흥미가 떨어진 것처럼 구는 게, 기분이 더러웠다.
집안에 풍파를 불러일으킨 사건이 터지던 날, 아버지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날 그리고 인사 발령이 뜨던 날과 같이 어떤 불길한 사건이 있었던 날마다 셰어의 신경을 긁던 서늘한 예감이 들었다. 등 뒤가 오싹하게 당기는 불쾌한 예감. 그 예감에 끌려 셰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보던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어깨가 부딪히는 인파 속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얼굴에 서려 있던 몽롱한 기운이 흩어지고, 요한의 푸른 눈에서 묘한 고집이 날을 세우는 것이 보였다. 셰어는 입술을 비틀었다.
꼭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 같은 눈으로 사람을 보면서, 쿨하게 좋아하네.
셰어는 요한에게서 등을 돌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느릿해졌던 셰어의 걸음을 따라 덩달아 느려진 일행의 걸음이 한결 빨라졌다.
한번 치밀어 오른 불쾌감은 뇌리를 선뜩하게 적시며 눌어붙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쁜 일은 꼭 연달아 터진다던가. 살갑게 굴지는 않더라도 일부러 부딪치는 일은 없던 샬롯은 박람회장을 도는 내내 묘하게 셰어의 신경을 긁어 댔다. 적당히 흘려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셰어의 미소는 점차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어제의 대화가 샬롯의 적의를 점화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짧은 대화의 어느 부분이 그녀를 자극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셰어는 그녀와의 대화를 몇 번이고 복기해 보았으나 명확한 사유를 찾지 못했다.
흐릿하게나마 짐작 가는 부분은 하나였다. 말장난하는 종이 쪼가리 말고 진짜 세상을 보라는 샬롯의 충고.
샬롯은 흔치 않게 엔지니어 경력이 있는 CEO였다. 본래 경영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기획본부를 돌기 마련인 다른 후계들과는 달리 그녀는 연구 센터를 시작으로 연구소와 공장을 주로 돌았다. 한때는 그것 때문에 공학도인 샬롯이 경영에는 자신이 없어 꽁무니를 빼는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지만, 그녀가 경영 전반에 서면서 그런 소문도 금세 불식되었다.
샬롯의 경영 방식은 기존의 경영학도다운 CEO들과는 달랐으나 효과적이었다. 기술과 현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경영 방식은 그녀의 아이덴티티가 되었다.
셰어는 그것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현장 중심적인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샬롯은 책상 앞에서 만들어진 기획서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쩌면 필요한 수준의 의심보다 더 많이, 연구소 프로젝트처럼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일의 결과물을 과소평가할 만큼 깊은 불신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람회장 앞에 호텔로 돌아가는 차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셰어는 차 문을 열기 위해 달려 나오는 기사를 대신해 샬롯의 차 문을 열었다. 종일 웃느라 피로한 얼굴은 그럼에도 부드러운 미소를 그려 냈다. 샬롯은 흠결 없는 그의 얼굴을 무심하게 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셰어는 그녀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부드럽게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저 좀 태워 주시죠, 고모님.”
“안 될 거 없지.”
뜻밖에 샬롯은 선선히 동승을 승낙했다. 두 사람을 태운 차가 곧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승을 허락한 샬롯도, 정작 먼저 합승을 제안한 셰어도 한동안은 말이 없었다. 고요하게 움직이는 차창 밖의 풍경이 점차 삭막한 도로로 바뀐다. 다시 호텔과 쇼핑센터가 즐비한 도심이 나오려면 한참은 더 가야 할 듯했다.
셰어는 습관처럼 시계를 확인했다.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호텔까지는 20분가량 더 가야 했다.
“시간을 얼마나 더 낭비할 셈이니? 할 말이 있을 텐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샬롯이었다. 그녀는 에둘러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셰어는 굳이 따지자면 적당히 변죽을 울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녀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말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뼈와 살을 깎아서라도 샬롯이 원하는 기준에 맞춰야 했다.
“제 방식이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 알아요. 저라고 발로 안 뛴 건 아니지만 고모님에게는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서 말장난 치는 것처럼 보이겠죠.”
“네 변명이나 듣자고 시간 낸 거 아니다.”
“저는 합의점을 찾으러 온 겁니다.”
셰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샬롯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잠깐의 공백이었다. 그녀는 창밖의 풍경만 응시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아직은 들어 줄 만하다는 뜻이었다.
“배우려고요. 고모님이 하신 것처럼. 연구소, 공장 돌면서 진짜 세상을 보면 아마 고모님 뒤를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죠.”
“그러니 너를 내 다음 타자로 낙점 찍어라?”
말해 뭐 할까. 셰어는 대답하는 대신 미소 지었다.
“저밖에는 없어요, 고모님. 뒷배 든든한 다른 베일리들이 저처럼 고모님 말씀이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고분고분 따를까요?”
셰어 역시 다른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셰어와 독신인 샬롯은 다르지만 닮은 꼴이었다.
그들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늘이 부여하는 고귀한 핏줄, 왕이니 귀족이니 하는 것들은 유명무실해졌으나 금권은 영원하다. 수 대에 걸쳐 부를 쌓은 베일리, 가문의 이름 자체가 모든 닫힌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렇기에 열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 간의 물밑 경쟁은 치열했다.
모두가 동지이자 적이었다. 그나마 직계로 이어진 핏줄이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다. 가족의 해체가 만연한 세태에 어울리지 않게 강한 가족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
왕좌의 주인인 샬롯은 아직 입지가 공고했으나 직계가 없는 그녀의 자리가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했다. 하지만 샬롯은 만만하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내 자리에 큰 미련 없다. 이 자리는 자격 있는 사람에게 갈 거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셰어는 눈썹을 찌푸렸다. 안타까움을 가장하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보는 샬롯의 눈썹이 꼭 닮은 모양으로 찌푸려진다. 두 얼굴은 거울을 보듯 닮았다.
“고모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그 자리는 가장 힘 있는 사람한테 갈 거예요. 그 사람이 자격이 있든, 없든.”
“힘이 있는 사람이 꼭 자격이 안 될 거라는 보장이라도 있니?”
“없죠. 저는 그보다 나은 선택에 대해 말하는 거예요.”
눅눅해진 손바닥을 감추려 가볍게 주먹을 쥔 손을 여유 있게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셰어는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그는 흔들림 없는 샬롯의 시선이 자신을 검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셰어는 그 시험을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평생 무수히 많은 시험을 치르며 살아왔다. 시험이라면 두렵지 않았다.
“자리에는 미련 없으셔도 가문의 미래는 걱정하시겠죠. 자격 있는 후계를 직접 키우는 건 왜 안 됩니까? 고모님이 바로 그 힘의 원천인데요.”
“네가 내게 그 말을 처음 한 사람은 아니지. 그래, 그렇게 자신 있다면 묻자. 그 후계가 꼭 너여야만 하는 이유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셰어는 지금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분기점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샬롯이 답을 채근했다. 여느 때처럼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완고한 심판자처럼 보였다.
“그 힘의 원천인 내가, 굳이 널 택해야 하는 이유가 뭐니?”
“제가 고모님의 이상에 가장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셰어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부여된 의무는 등이 휘도록 무거웠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고꾸라지기 십상이었으나 셰어는 등을 빳빳하게 세우고 제 옷을 입은 양 의무를 걸쳤다.
“제가 얼마나 완벽한 아들이었는지 아시잖아요. 아버지께서 타계하시기 전에도, 후에도. 저만한 아들은 없을 거예요.”
우수한 성적과 흠결 없는 커리어, 추문 하나 흘리지 않는 결벽적인 사생활은 그처럼 가혹한 조건 속에서 탄생했다.
의무와 셰어의 관계는 돔과 섭의 관계와 닮았다. 자신의 의무에 한하여 셰어는 완벽한 섭이었다. 돔의 명령에 의심조차 품지 않고 틀림없이 수행해 내는 유능한 섭.
“나는 아들은 필요 없다.”
샬롯이 느릿하게 말했다. 셰어의 입술이 미세하게 굳어진다. 그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읽어 낸 샬롯이 한결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단번에 풀어지는 듯했다.
“내가 필요한 건 파트너지. 그래, 네가 하는 걸 봐서 뭐가 되든 되어 보자.”
반쯤은 허탈해서, 반쯤은 안도해서 평소보다 느슨해진 웃음이 새어 나온다. 셰어는 그것을 일부러 감추지 않았다. 완벽한 아들이 아닌 파트너를 원하는 샬롯에게 약간의 인간적인 면을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미리 인사하죠, 파트너.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글쎄다. 그건 두고 봐야겠지.”
창문을 살짝 내린 샬롯이 담배를 꺼내 물며 투덜거렸다. 대체 호텔에는 언제 도착한다니.
셰어는 샬롯이 불을 붙이기 전에 먼저 점화한 라이터를 내밀었다. 담배를 문 그녀의 입술이 실룩거리는 것이 꼭 심술을 부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불을 사양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였다.
“파트너로서가 아니라 고모로서 순수하게 궁금한 게 있는데.”
반쯤 담배를 피우다 말고 샬롯이 불쑥 말을 꺼냈다. 셰어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 결혼을 안 한 이유가 있니?”
질문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셰어는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었다.
“글쎄요. 전 착한 아들이라 아버지께서 정해 주시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이었는데요.”
결말은 고모님도 아시겠죠. 뒷말을 굳이 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아들은 샬롯이 고약하게 인상을 구겼다. 셰어가 결혼은커녕 누군가와 약혼하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는 병원에서 지병인 심장병으로 급사했고, 셰어는 하루아침에 가장이 되었다.
이혼한 어머니와는 거의 왕래가 없고,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동생이 둘이나 딸린 가장. 퍽 절박해 보이는 겉과 달리 실상은 풍족한 유산 덕분에 여느 집의 청년 가장처럼 끼니를 위해 밥벌이를 한 적이 없었다. 원래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동생들도 성인이 되며 제각기 살길을 찾아갔다. 부모의 자리가 비자 그들은 제 인생을 되찾은 것처럼 자유롭게 바깥세상으로 날아갔다.
끝까지 베일리 가문이라는 이름에 묶인 것은 셰어뿐이었다.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잃은 셰어는 어떤 도움도 없이 남들보다 더 치열하게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왜요, 이번에는 고모님께서 제 짝을 점지해 주시게요?”
그저 분위기를 풀려 던진 말이었다.
“못 할 거 없지.”
뜻밖에 샬롯은 긍정했다. 독신으로 살 것을 공표한 뒤로 평생을 결혼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셰어는 영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결혼 자체를 안 좋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나는 그렇다 쳐도 너는 결혼 생각이 있었잖니. 그렇다면 내가 장차 파트너가 될지도 모르는 조카를 도와줄 수도 있겠지.”
“좋습니다.”
오래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어쩌면 결혼은 샬롯의 시험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셰어가 얼마나 그녀의 의지를 따라올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 위한 시험. 불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모님의 안목을 믿어 보죠.”
창밖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샬롯이 입술만 움직여 미소 지었다.
“너무 쉽게 대답하는 거 아니니?”
“고민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래, 그렇다면야…….”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샬롯이 흥미를 잃은 듯 창을 도로 올렸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매캐한 담배 냄새가 차 안에 남았다. 셰어는 불쾌함을 감추며 시트에 등을 기댔다.
필요에 따라 흡연을 하기도 했지만 셰어는 기본적으로는 담배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특히 타인의 담배 냄새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텔에 도착했다. 샬롯이 기사가 문을 열어 주자마자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올라가 버린 탓에 호텔 정문 앞에는 셰어만이 남았다. 그는 잠시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긴 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일찍 샤워를 하고 잠들면 좋겠지만 방에는 민폐 덩어리 하나가 혹처럼 붙어 있다. 요한 바네스. 박람회장에서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끈질긴 얼굴이 떠올라 셰어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한참을 미적거리다 셰어가 호텔방에 돌아왔을 때, 방에는 민폐 덩어리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덩어리가 둘이었다.
그리고 그 두 민폐 덩어리들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딱 붙어 있었다. 정확히 딱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셰어에게는 거의 그렇게 보였다. 고작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는 딱 붙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넥타이를 풀던 것인지, 고쳐 매어 주던 것인지 요한이 낯선 남자의 넥타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어색한 얼굴로 남자에게서 떨어지며 말했다.
“어?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안녕하세요.”
이건 또 뭐야.
셰어는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하는 남자와 요한을 훑어보았다. 낯선 남자는 멀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동양계로, 정장을 입어도 말간 얼굴 탓에 학생처럼 어려 보였다. 순간 셰어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요한 바네스의 취향이 이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던가 하는 것이었다.
“누구시죠?”
셰어는 정중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물었다. 남자는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 한결같이 웃는 얼굴이었으나 요한은 대번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한은 남자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변명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빨리 챙겨서 가려고 했거든? 근데 호텔 쪽에서 갑자기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거야.”
그저 누구냐고 물었을 뿐인데 요한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설명만 한참을 늘어놓았다. 장황한 설명을 들어 보면 요점은 이러했다.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호텔 쪽에서는 요한을 위해 다른 방을 배정해 주었고, 처리하다 보니 또 체크인에 문제가 있어서 여태 기다리는 중이라는 것이다.
정작 물은 말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셰어는 짜증을 누르며 되물었다.
“그래서 이분은 누구신데?”
대답은 요한이 아닌 남자가 직접 했다.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네요. 안녕하세요, 바네스 이사님 현지 수행 가이드 제이입니다.”
“네.”
까칠한 단답에는 아무리 유들유들한 가이드라도 조금 불편했는지 그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어졌다. 셰어는 굳이 분위기를 사교적으로 이끌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요한을 보자마자 치솟은 짜증이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분위기를 얼음장처럼 싸늘하게 만드는 셰어의 냉랭한 표정에 당황한 요한이 셰어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
“야, 왜 그래. 내가 말도 없이 사람 데려와서 그래? 화 많이 났어?”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해?
짜증을 쏟아 내려던 셰어는 입을 다물었다. 요한에 대한 모든 일이 다 짜증스럽기는 했으나 그 화풀이를 남이 보는 앞에서 하지 않을 만큼의 이성은 아직 남아 있었다. 셰어는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낯선 사람이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는 거 불쾌해. 네 가이드지 내 가이드는 아니니까. 나 놀러 온 거 아니야. 보안에 민감한 자료도 있는데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다.”
‘내 방’이라는 말에 또 난리라도 칠 줄 알았는데, 뜻밖에 요한은 축 늘어진 얼굴로 셰어에게 어깨를 붙여 왔다.
“아, 진짜 미안해. 내가 그건 생각 못 했다. 우리 아무것도 안 만졌어. 맹세해.”
우리. 셰어는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으며 차게 웃었다. 새삼스럽지만 요한은 정말로 사람 빡치게 만드는 재주가 탁월했다.
냉랭한 비웃음에 지레 찔끔한 요한이 셰어의 어깨를 감싸 쥐고 살살 쓰다듬으며 치댔다. 불쌍한 척 풀 죽은 얼굴을 기울이는 것이 제법 가련했다.
“화내지 마. 얼른 보낼게. 어?”
이게 어디서 끼를 부려.
셰어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 사이의 묘한 분위기를 살피던 가이드가 눈치껏 먼저 캐리어를 들고 나가며 인사했다.
“저, 그럼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이사님, 천천히 내려오세요.”
“네? 아, 네. 금방 갈게요.”
요한은 눈치도 없이 방긋방긋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셰어는 자신의 옆에 딱 달라붙은 요한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불시에 목이 뒤로 홱 젖혀진 요한이 억세게 머리칼을 감아쥔 셰어의 손목을 붙잡으며 엄살을 떨었다.
“아, 아파, 미친놈아! 갑자기 왜 이래?”
“너 지금 장난쳐?”
“아니, 다른 사람 들인 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 새끼가 뻑하면 머리채부터 잡네.”
눈물이 찔끔 배어난 요한의 눈이 셰어를 뾰족하게 노려본다. 그러니까 저 눈이 문제였다.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저 눈.
“순진한 척 개수작 부리지 마. 어제 너 뭐라고 했어? 쿨하게 지내자며. 자꾸 앞에서 알짱거리고 다른 놈이랑 붙어 있는 꼴을 굳이 나 보란 듯이 보여 주는 이유가 뭐야?”
“뭐라는 거야, 진짜……. 아, 이거 좀 놓고 얘기하자고! 나는 뭐 손 올릴 줄 몰라서 안 올리는 줄 아냐?”
악을 쓰며 제법 사납게 성깔을 부려 대는 것이 오히려 셰어를 자극했다. 그 성질을 아주 꺾어 놓을 생각으로 목이 뒤로 홱 젖혀지게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화가 나 씩씩거리는 요한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오르며 핏대가 선다.
셰어는 요한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선 채 가쁘게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목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말해. 자꾸 사람 성질 돋우는 이유가 뭔지.”
“적당히 하라고 했다. 이거 놔. 나도 더는 안 참아.”
“참지 마. 어쩔 건데?”
요한의 팔꿈치가 셰어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생각보다 제법 매서운 일격에 손에서 힘이 잠깐 빠진 사이, 셰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요한이 몸을 돌려 셰어의 머리를 세게 쥐어박았다. 골이 얼얼할 만큼 세게 쥐어박힌 탓에 머리가 징징 울린다. 셰어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요한을 노려보았다.
요한은 새집이라도 지은 것처럼 마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씨근덕거렸다.
안 참는다더니. 따귀라도 때릴 줄 알았건만 고작 때린다는 게 어린애 꿀밤 먹이듯 머리를 쥐어박는 거였다. 하여간 웃기는 놈이다. 셰어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뭘 좋다고 웃어. 미쳤냐?”
꼴에 이빨은 있다고 짖어 대는 게 같잖았다. 셰어는 요한을 훑어보았다. 요한은 제법 까다로운 셰어의 취향과는 꽤 동떨어진 타입의 남자였다. 가볍고, 생각 없고, 바이올렛의 스토커인 데다가 SM 성향도 없는, 그저 흥미로 접근하는 바닐라.
어쩌면 그 명제를 조금은 수정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요한 바네스는 가볍고, 생각 없고, 바이올렛의 스토커지만 바닐라는 아닐지도 모른다. 셰어는 요한이 좆을 밟히며 질질 싸던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렇다면 뭐가 어떻다는 건데? 셰어는 자신에게 자문했다. 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셰어를 불만스럽게 노려보던 요한이 짜증을 터트렸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딱 한 번만, 그와 제대로 된 플레이를 해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이 짜증스러워 셰어는 평소보다 더 사납게 내뱉었다.
“많이 참고 있으니까 적당히 해. 너, 한마디만 더 해 봐. 이 방에서 두 발로 못 걸어 나갈 줄 알아.”
요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사람을 찢어 죽이기라도 할 듯 흉흉하게 눈을 치켜뜨는 것이 두렵기보다는 등줄기를 찌릿 당기게 만든다.
요한의 입술이 움직인다. 셰어는 그 입술을 뭉개 버리고 싶었다.
“좆 까.”
셰어는 당장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몸을 억눌러야 했다. 반항적인 요한의 태도에 부채질당한 폭력적인 충동이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가학적인 욕망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플레이를 할 때다. 그것도 정제된 욕망을 약속된 방식으로 해소해야만 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플레이에서도 욕망 자체에 휘둘리게 되면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상호 용인되지 않은 폭력은 분란의 씨앗이 될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뻗어 나가는 거친 마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주먹을 말아 쥔 셰어의 손바닥에 깊은 손톱자국이 남는다.
그와 대치하듯 마주 보고 선 요한은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불그레하게 상기된 낯빛으로 굳어진 얼굴은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격렬한 감정을 응결시킨 것 같다. 요한이 서늘하게 말했다.
“넌 내가 너 좋다고 매달리고, 맨날 속도 없는 놈처럼 실실 웃고 다니니까 만만하지?”
셰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속에서 화가 요동치는 것이 또렷하게 보이는, 굳어진 요한의 얼굴이 심히 자극적이었다. 살얼음이 언 것처럼 싸늘한 겉을 조금만 부서뜨려도 절절 끓는 화가 용암처럼 넘쳐흐를 듯했다.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요한이 인상을 구겼다. 을러대는 투로 말을 뱉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너한테 쉬운 놈처럼 보이는 건 이해하는데, 그래도 사람 간에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지. 적당히 좆같이 굴어. 너는 도가 지나쳐.”
줄곧 셰어의 머릿속을 선뜩하게 적시던 불쾌한 감각이 기어코 이성을 마비시켰다.
“계속 깔짝거리면서 사람 열받게 만든 게 누군데.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도가 지나쳐?”
“그러니까 내가 대체 언제 그랬냐고! 아, 미친 새끼. 말이 안 통하네.”
요한이 펄펄 날뛰며 발광을 했다. 답답함을 호소하듯 잔뜩 힘이 들어간 손가락으로 허공을 찢어발기는 시늉을 하는 것이 셰어가 보기에는 그저 우스웠다.
그 손으로 가이드라는 남자의 넥타이를 쥐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오해의 소지는 충분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셰어는 완벽한 상태로 정리된 침대를 훑어보았다. 침대는 머리카락 한 올 떨어지지 않은 무결한 상태였으나 혹시 모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 침대 위에서 사이좋게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을지도.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 입술에서는 비틀린 말이 흘러나온다.
“그 가이드랑 내 침대에서 뒹구는 것까지 보여 주려고 했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요한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일그러졌다.
“와, 이거 완전 병이네. 넥타이 좀 고쳐 매 줬다고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
“넌 넥타이를 매번 그런 식으로 고쳐 주나 봐. 흘리고 다니는 데도 정도가 있지.”
“이게 진짜!”
요한이 셰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악력은 제법 세었으나 멱살을 별로 쥐어 본 적이 없는지 옷깃을 쥔 손은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셰어는 그 손을 쉽게 뿌리칠 수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순순히 그에게 잡혀 주었다.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이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가까이 다가온다. 나쁘지 않았다.
“왜 말을 그따위로 해? 내 태도가 뭐. 그게 너랑 나 사이에 있는 문제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 우리 일만 얘기하자고. 네가 원하는 대로.”
멱살을 쥔 손이 크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셰어는 요한이 어느 대목에서 동요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고작 한 단어일 뿐이었으나 둘을 하나로 묶는 말의 힘은 작지 않았다. 멱살이 잡힌 채 요한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에 붙어 서 있던 셰어는 그의 눈 속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감정을 보았다.
“자꾸 이딴 식으로 말할 거면 나 너랑 할 말 없어.”
고집스럽게 간격을 벌리려 드는 말은 오히려 간격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요한의 눈 속에 든 것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불신과 기대. 서로를 불살라 먹는 두 감정이 소생과 절명을 끝없이 반복하며 요동치고 있었다. 이분된 감정의 소모적인 교착 상태는 좀처럼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분명 피곤해질 것이다. 습관적으로 골치 아픈 인물과 얽히기를 거부하는 이성이 고개를 들었으나 이번에는 충동이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충동이 일갈했다.
가질 수 있는 것을 가지는 게 나쁜가? 제발 가져 달라고 이렇게 알랑거리는데, 그걸 가지는 게 뭐가 나빠서.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셰어가 물었다. 그는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물었다.
답은 어이없을 만큼 단순한 욕망이다. 그저 하룻밤의 기회. 어떤 표적도 맞히지 못할, 소리만 요란한 공포탄.
요한은 담담하려 애쓰며 말했다.
“그런 거 없다고. 말했잖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자고.”
“잘 생각하고 말해.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지금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저 손을 뻗기만 하면 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굳어진 요한의 목덜미를 감싸 쥐며 눈을 맞추자 그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인다. 불시의 습격에 저항도 하지 못하고 붙잡힌 상대는 놀란 것 같기도 했고,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셰어는 그의 겁이 흥미로웠다. 요한은 세상에 무서운 것 하나 없는 놈처럼 바락바락 달려들더니 지금은 두려운 것을 참듯 크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비치는 두려움의 정체가 자신인지, 혹은 그 너머의 욕망인지는 모호했다.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극한까지 몰아붙이면 요한은 또 전처럼 억울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릴 것이다. 그 얼굴은, 조금 자존심 상하게도 자신의 취향이었다.
“네가 바라는 게 그거라면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그게 진짜 네가 원하는 거야?”
요한의 숨이 가빠진다. 셰어는 새근거리는 숨이 입술에 닿는 것이 좀 간지럽다고 생각했다. 그저 고개를 조금 기울이기만 해도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그것을 요한 역시 의식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로의 입술을 응시하는 열렬한 시선이 날카로운 창처럼 따갑게 내리꽂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실수하고 말 것 같다.
예고 없이 울린 단조로운 전화벨 소리에 요한이 불에 덴 것처럼 셰어에게서 떨어졌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셰어는 혀 밑까지 치밀어 오른 험악한 말들을 삼켰다. 일시적으로 통제를 잃었던 이성이 빠르게 수복되며 급격한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이상하게 어정거리는 걸음으로 책상 쪽으로 다가가는 요한의 뒷모습을 보며 셰어는 입가를 손으로 덮었다. 그러지 않으면 입 밖으로 욕이 쏟아질 것 같았다.
“여보세요. ……네, 알겠어요. 지금 내려갈게요.”
통화는 짧았고,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호텔 측에서 준비해 두었다는 방이 정비된 모양이다. 요한은 미묘한 열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셰어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망설임이 반짝였다.
“방이 준비됐다는데.”
“그럼 나가.”
애써 감정을 죽인 한마디를 뱉자 요한의 얼굴이 굳어진다. 셰어는 그를 방치한 채 욕실로 향했다. 매번 뭐 마려운 똥강아지처럼 뒤를 따라오곤 했던 요한은 이번에는 셰어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셰어는 욕실 문을 닫고도 잠시 문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잠금장치가 없는 문을 벌컥 열고 요한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바깥에서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요한이 방을 떠난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깊은 허무감이 셰어를 무기력하게 잠식했다. 한 번쯤 실수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완벽한 찰스 베일리는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