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6)

* * *

출장지의 공항은 좁고 사람은 많았다. 이 시기에는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호텔 방값도 몇 배나 뛰어오른다. 이 도시를 유명하게 만든 세 가지인 카지노, 쇼, 국제기술박람회 중에 요한의 흥미를 끄는 것은 없었다.

요한은 공항에서부터 즐비한 슬롯머신에 지폐를 투입했다. 머신보다는 딜러와 함께 하는 게임을 즐기지만 오늘의 운세를 볼 겸 마수걸이를 하는 것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세 칸의 그림이 각기 제멋대로 멈추었다. 역시 하나도 맞지 않았다.

“더럽게 안 맞네.”

재수가 없으려나 보다.

요한은 캐리어를 끌고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반짝이는 웰컴 사인을 지나 입국장을 나서자 가이드가 깃발을 들고 있었다.

“V Pictures 바네스 이사님?”

“네, 반가워요.”

“제이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동양계로 보이는 남자는 젊었다. 맨 인 블랙에 나올 법한 검정 슈트를 칼같이 차려입은 몸은 잘 다듬어져 있었으나 얼굴은 무척 앳되어 학생처럼 보였다. 우연이겠지만 하필 취향인 외모였다.

“일정대로 가신다면 호텔로 바로 이동하시죠?”

싱긋 웃는 얼굴이 선해 보여 요한은 그를 따라 웃었다.

취향이면 무얼 하나. 이 남자도 애인이 있을지 모르는데. 아니면, 약혼자라거나. 곧 요한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며 캐리어를 남자에게 넘겼다.

“네, 호텔로 가요.”

사막 위에 금전의 힘으로 지어진 도시의 풍경은 찬란했으나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삭막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물과 전기를 끌어와 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한들 살을 태우는 따가운 볕과 팍삭한 길가의 풍경을 바꿀 수는 없었다.

요한은 창밖의 풍경을 심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갤러리에는 하룻밤 사이 새로운 폴더가 생겼다. 진지한 얼굴로 콧수염을 달고 있는 셰어, 은은하게 미소 짓는 뺨 위에 동글동글한 홍조를 그린 셰어, 진중한 얼굴에 칼자국이 그려진 셰어. 모두 셰어의 기사 사진이었다.

스토커 같은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으나 요한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셰어는 기사 사진이 유독 잘 나왔기에 낙서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 때문에 요한은 거의 새벽까지 잠을 설쳤고, 비행 내내 물 한 잔 마시지 않고 기절하듯 잠들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시간이 나면 지울 것이다. 요한은 몇 번이나 뒤로 밀린 다짐을 또다시 되새겼다.

“출장은 자주 오시나요?”

제이라는 남자는 보기보다 이 일에 경험이 많은지 주눅 들지 않은 태도로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때쯤이면 거의 매년 와요. 별로 달라진 건 없어 보이네요.”

“그런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새로운 걸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기대해야겠네.”

백미러로 제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심 없는 얼굴로 눈을 휘며 웃고 있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요한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으나 그의 말을 새겨듣지는 않았다. 매년 가이드들은 비슷한 말을 했지만 그들이 준비한 코스가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관광 자원에 한계가 있는 것을 어쩌겠는가.

요한은 그저 일정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랐다. 명목상으로는 출장이었으나 특별히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요한의 직함이 이사지만 사실 하는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출장지에서 할 일이란 일정대로 돌아다니는 것만이 전부였다. 어차피 출장 보고서는 여느 때처럼 관련 기사를 열심히 찾아본 그의 비서가 작성하게 될 것이다.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게.

차가 도심으로 들어서자 본격적인 교통 체증이 시작되었다. 본래 첫날의 일정은 호텔에 체크인하고 박람회장을 돌아보는 것이었으나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듯했다.

“차가 이렇게 막혀서 어쩌죠. 아무래도 오늘은 체크인하고 쉬셔야겠는데요.”

“잘됐지, 뭐. 난 급한 거 없으니 천천히 가요.”

홀로 사람 많은 박람회장을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던 요한으로서는 내심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끔찍한 도로의 정체 속에서 요한은 금세 지쳤다. 폰을 들여다보는 것도 멀미가 나 그는 편한 자세를 찾으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이내 축 늘어졌다. 넋이 반쯤 나간 그의 얼굴을 살피며 제이가 웃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곧 호텔에 도착합니다.”

물론 그 후로도 정체는 계속되었고 곧 도착하는 일은 없었다.

제이는 줄곧 선하게 웃는 얼굴로 요한을 달랬다. 이제 그의 미소가 마냥 선해 보이지 않았다. 보채는 클라이언트를 달래기 위해 특화된, 아주 상업적인 미소였다.

차가 호텔에 도착한 것은 요한이 지루함에 지쳐 차 밖으로 탈출을 시도하기 직전이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지루한 도로에서의 운전에도 용케 지치지 않은 제이가 축 늘어진 요한을 이끌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얼른 들어가서 쉬셔야죠.”

“고생했어요.”

그나마 남아 있던 인사치레를 할 정신은 체크인을 하는 것과 함께 소멸했다. 요한은 침대를 보자마자 그 위에 드러누웠다. 분수가 보이는 창밖의 아름다운 풍경보다 완벽하게 정리된 침대가 더 반가웠다.

방 안까지 캐리어를 운반해 준 제이는 호텔 카드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럼 내일 오전 9시에 픽업하러 오겠습니다.”

요한은 대답하는 대신 손을 휘저었다. 곧 카펫에 묻혀 둔해진 발소리가 멀어지고 방문이 조용히 닫혔다.

요한은 고요 속에서 시트에 이마를 문질렀다. 방 안에서는 호텔 특유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몸을 굴려 창 쪽을 향해 돌아눕자 창밖의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때마침 분수 쇼가 시작되었는지 조명에 물든 물줄기가 연이어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 죽겠다…….”

왜 보고 싶지. 얄밉도록 잘난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웬만한 기업의 경영진들은 대부분 참석하는 박람회이니 BNB 그룹에서도 참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중에 자신의 갤러리 지분을 빠르게 잠식 중인 셰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다시 벌떡 일어선다. 요한은 흐트러진 차림을 대충 다듬고는 방 밖으로 날듯이 걸어 나갔다.

쇼핑을 해야겠다. 생각해 보니 급하게 짐을 꾸리느라 챙겨 온 옷이 다 별로였다. 요한은 약혼을 앞둔 셰어와 뭘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었으나 그에게 근사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것은 옛 애인을 마주칠 일을 앞두고 한껏 치장하는 심리와 닮아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른 요한 앞에 엘리베이터 홀이 나타났다. 그는 6개의 엘리베이터 중 가장 일찍 도착한 4번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리고 4번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 직후, 맞은편 2번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운 정장을 입은 사람들은 행진이라도 하듯 줄을 맞춰 내렸다.

군함처럼 장엄한 중년의 여인이 선두에서 무리를 이끌었다. BNB 그룹 회장 샬롯 베일리. 경제는 몰라도 샬롯의 얼굴은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박람회는 처음인 임원들도 있으니 다시 말하죠. 이 시간부로 아침까지는 자유 시간입니다.”

샬롯이 몸을 돌려 자신을 따라오던 이들을 마주 보았다. BNB에서 잔뼈가 굵은 임원들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으나 그들 중에서도 몇 명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고 말았다.

포커페이스의 남자, 셰어는 샬롯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떤 멍청이 때문에 말이 길어지겠군.

샬롯이 말을 이었다.

“시간은 금입니다. 자기 주머니에 든 금을 어떻게 쓸지는 본인 마음이겠죠? 카지노에서 놀든, 쇼를 보든, 술을 마시든 생각대로 하세요.”

생각대로. 샬롯은 그 부분에 강세를 두었다. 그 자리에 있을 만한 역량을 지닌 청중들은 분명 그녀가 내키는 대로나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생각대로라고 말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샬롯이 예시로 든 짓을 실제로 해도 된다고 이해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참고로, 나는 우리 회사에 수지 안 맞는 짓을 하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쉬세요. 샬롯은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몸을 돌렸다.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양 임원들은 사방으로 황급히 흩어졌다. 꼿꼿하게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는 오직 셰어뿐이었다.

“왜 따라오니?”

방문 앞에서 멈춘 샬롯이 짐짓 새치름하게 눈을 치떴다. 셰어는 그녀의 손에 들린 카드 키를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는 신사처럼 문을 열었다.

“아마도 오늘 할 수 있는 일 중 제일 값진 일을 하러? 샬롯 베일리와 식사를 하려면 백만 불을 내야 한다는 말이 있던데요.”

“그래서 너는 얼마를 내게?”

“사랑스러운 조카에게 공짜로 내줄 시간 정도는 있잖아요, 고모님.”

“너도 참 뻔뻔하기는.”

샬롯은 시중을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답게 셰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얼핏 보인 그녀의 옆얼굴이 흐릿하게 웃고 있는 것을 셰어는 놓치지 않았다.

샬롯은 바에 진열된 위스키를 꺼내 얼음도 없이 두 잔에 나눠 따랐다.

“연구소는 잘 되어 가니?”

처음부터 영 꺼림칙한 화제가 튀어나왔다. 동부가 터전이던 셰어가 낯선 서부까지 날아와야만 했던 이유.

BNB 그룹은 연구 단지가 밀집한 서부에 신규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했다. 목적은 하나였다. 앞으로 수백 년을 먹고살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하는 것. 중대한 일이지만 보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타수를 잡은 것은 당시 갓 기획본부의 수장이 된 셰어였다. 셰어는 1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프로젝트를 끌고 가며 청사진을 구현했다. 기초부터 되짚어가며 기반을 다질 시간은 없었다. 셰어는 단시간 내에 그를 증명해야 했고, 오랜 인고가 필요한 것을 잉태하고 싶어 하는 기업은 없었다.

결국 핵심은 돈이었다. 셰어는 필요한 기술을 지닌 기업들을 빠르게 인수했다. 모든 과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베일리가의 승계에 대한 불신을 잠식시킬 만큼은 충분히.

그리고 프로젝트가 1차로 마무리되었을 무렵, 예정되어 있던 셰어의 전무 승진이 보류되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임원을 단 베일리들은 모두 매년 승진을 거듭하여 경영권을 세습하였다. 오랜 관례가 깨진 것이다.

“글쎄요. 부디 고견을 들려주세요, 고모님. 가족 좋다는 게 뭡니까.”

셰어는 제 몫의 잔을 느릿느릿 비웠다.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술은 금세 속을 뜨끈하게 데웠다.

유수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셰어의 승계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뭘 모르는 이는 샬롯이 왕좌를 나눠 가질 생각이 없기 때문이라 험담했으나 셰어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샬롯을 잘 알았다. 샬롯은 아들뻘인 조카의 앞날을 막을 만큼 절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손을 쓰려 했다면 더 은밀하고도 확실한 수를 썼을 것이다.

“셰어, 네게 해 줄 말은 하나다. 말장난하는 종이 쪼가리 말고 진짜 세상을 봐.”

“그거 우리 아버지도 생전에 많이 하셨던 말인데 핏줄이 참 무섭기는 무섭습니다.”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묻긴 왜 묻니?”

샬롯이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피곤한 얼굴로 목덜미를 주무르며 여태 잔을 들고 있는 셰어를 바라보았다.

“마시고 가렴. 나이를 먹으니 고작 두 시간 비행도 힘들어서 말이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셰어는 남은 술을 단번에 비우고는 빈 잔을 그녀의 잔 앞에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서 두 개의 빈 잔이 나란히 마주 본다.

“갑니다. 푹 쉬세요.”

샬롯 베일리와의 조찬은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와 나누는 술 한 잔은 얼마의 값을 매길 수 있을까?

셰어는 그 값이 백만 달러보다는 크기를 바랐다. 요동치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그걸로도 부족했다.

잠을 이루기 어려운 밤이었다. 셰어는 샬롯과 짧은 대화를 나누며 값비싼 시간을 보냈으니 나머지 저녁 시간을 술독에 처박기로 했다. 고작 반 잔의 위스키로는 속을 달랠 수 없었다. 방에서 홀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것도 그다지 내키지 않아 셰어는 호텔 바로 향했다.

근사한 뷰를 즐기기 위해 높은 층의 바를 찾는 사람이 많았으나 셰어는 정반대였다. 그는 소리가 쉽게 새어 나가지 않을 만한 지하를 찾았다. 프리미엄 멤버십을 자랑하는 여느 호텔이 그러하듯 그곳에도 특별한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래된 오크 나무 냄새와 묵은 술 냄새가 날 것 같은 공간. 그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자 마개가 열린 것처럼 강렬한 음악이 쏟아졌다.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재즈였다.

평소 같으면 노친네 같은 취향을 상종할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만 셰어는 지금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존재하지도 않는 향수를 품을 수 있는 곳. 그곳은 주로 연배가 있는 편인 고객들을 위해 금주법이 유효하던 시절의 감성을 재현한 바였다.

술을 주문하고, 술을 마신다. 두 가지를 반복하며 셰어는 시간을 낭비했다. 느릿느릿 마신 술은 쉽게 취하지 않았다.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낯선 사람이 말을 붙여 왔다. 셰어는 낡은 바의 콘셉트만큼이나 닳고 닳은 작업 멘트라고 생각했다.

“글쎄요.”

“아, 기억났어요.”

테이블 위에 놓인 촛불의 노르스름한 빛에 달구어진 셰어의 눈동자가 낯선 이를 향했다. 슬쩍 치켜 올라간 짙은 눈썹은 무표정한 얼굴에서 유독 시선을 끌었다. 셰어는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이.

낯선 남자는 그 시선에 긴장하면서도 제법 자신이 있는 모양인지 셰어를 향해 은근히 몸을 기울였다.

“여기 사람이 아니죠? 나도 그래요.”

“그래서요?”

그럴듯한 말이었으나 호텔 바를 찾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이 지역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이니 특별히 귀 기울일 만한 말은 아니었다. 셰어의 심드렁한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남자는 더욱 짙게 미소 지었다.

“정말 기억난다니까요. 더 홀의 파티에서 당신을 본 적이 있어요, 주인님.”

‘더 홀’이라는 말에 셰어는 남자를 다시 찬찬히 살폈다.

더 홀은 아무나 드나들 수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비밀 클럽이었다. 이름만 비밀 클럽인 보통의 사교 클럽과는 달랐다. 회원의 추천이 아니면 가입 심사를 받을 수도 없고, ‘더 홀’이라는 이름도 알려지지 않아 ‘그 클럽’이라는 모호한 이름으로 불린다.

셰어가 결벽적인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 또한 더 홀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소수의 클럽 회원들은 강박적으로 보안에 집착하고, 서로 간의 유대 또한 남다르다. 그렇기에 더 홀에 대해 사소한 것이라도 누설한다면 모든 회원이 등을 돌리게 된다. 결국 남는 건 파국뿐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더 홀을 입에 올리는 이 남자는 과연 그곳을 알까?

짧게 정돈된 머리칼, 그럭저럭 귀엽게 생긴 얼굴, 팔뚝의 여러 번 덮은 흔적이 있는 너절한 타투와 주사를 잘못 놓은 흔적으로 보이는 멍 자국들 그리고 값비싼 옷.

질이 좋지 않은 남자임이 분명했다. 셰어의 기억에 없는 남자였다.

“목줄을 찬 개 다섯을 끌고 있었죠.”

하지만 남자가 셰어의 성벽을 아는 것은 분명했다.

그를 취조해 보고 싶어진다. 셰어는 제법 체격이 좋은 남자의 몸을 눈으로 감정했다. 셰어의 치부를 파헤치려는 시도는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셰어는 철저히 배후를 캐내 보복했다. 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더는 누가 적인지를 기억하는 게 의미가 없어질 정도였다.

이번에는 과연 누구일까.

오랜 경험으로 짐작건대, 남자는 새벽이 되기 전에 셰어를 유혹한 목적이 무엇인지, 더 홀에 대한 단서는 누가 주었는지를 친절히 고해바치게 될 것이다.

함정으로 뛰어드는 듯한 위험한 추락감이 셰어를 자극했다. 샬롯과의 독대가 남긴 찜찜함은 독한 술로도 쉽게 씻기지 않았다. 더 강렬한 자극이 필요했다. 곧 바닥까지 자신을 내어 주게 될 질 나쁜 남자처럼.

불량 식품은 취급하지 않지만 이곳은 환락의 도시였다. 하룻밤 불장난쯤은 아무래도 좋은 법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되든, 처리만 깔끔하게 한다면 불장난은 불장난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기억이 나네요.”

셰어는 잔 옆에 지폐를 내려놓았다. 술값을 치르고 나갈 때였다.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이해한 남자가 기쁜 듯 웃었다. 피차 알 만한 사이에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셰어가 무슨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주인을 따르는 시종처럼 몇 발자국 떨어진 채로 제법 착실하게.

늦은 시간이었지만 호텔 엘리베이터에는 잠들지 않는 카지노만큼이나 사람이 많았다. 여러 사람이 타고 내리는 동안 두 남자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방이 위치한 층에 도착했을 때, 셰어가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남자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같은 층에 내렸다. 사분거리는 발소리가 나란히 이어졌다.

그리고 맞은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셰어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양팔 가득 쇼핑백을 낀 채.

“어…….”

요한 바네스가 입술을 살짝 벌린 채 바보 같은 소리를 흘렸다. 그의 얼굴이 선명한 당혹에 물들어 있는 것이 기도 차지 않았다. 셰어는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요한이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그를 향해 성큼 다가가며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아니야.”

셰어는 더 다가오려는 그를 손을 들어 제지했다. 요한은 ‘기다려’ 명령을 들은 개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이렇게 보니 목줄을 차면 썩 잘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심하게 굴고 싶은 마음을 부추긴다. 셰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데?”

“스토커라고 생각하고 있잖아.”

“잘 아네.”

“아, 진짜 아니라니까!”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복도가 쩌렁쩌렁 울렸다. 정말 민폐였다.

셰어는 갑자기 모든 것이 다 귀찮아졌다. 그는 얌전히 뒤를 따라오던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안 되겠어요. 그만 가 줘요.”

칼같이 잘라내는 셰어의 태도에 기가 질려 남자는 우물쭈물하다 곧 쉽게 포기하고 돌아섰다. 남자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것을 흰 눈으로 보던 요한이 불쑥 사나운 말투로 내뱉었다.

“볼 때마다 남자가 바뀌네, 넌.”

셰어는 헛웃음을 흘렸다. 요한 바네스가 그토록 공격적인 말투로 말할 수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날을 세우는 모습이 제법 신선했다. 물론 그것이 보기 좋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너? 어디서 함부로 말을 까. 너 나 알아?”

“알지, 왜 몰라. 명함 주고 통성명했으면 아는 사이지. 뭐, 한 침대에서 뒹굴기라도 해야 아는 사이로 쳐주나?”

“그럼 너랑은 평생 모르는 사이로 지낼 수 있겠네. 갈 길이나 가.”

“아오! 아!”

저 혼자 열이 뻗쳐 펄펄 날뛰는 요한을 보고 있자니 셰어는 새삼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밀려드는 듯했다. 험악한 손길로 그를 밀치고 방으로 향하자, 셰어에게 떠밀려 쇼핑백을 와르르 쏟은 요한이 주섬주섬 바닥에 널브러진 쇼핑백을 주워 들고는 그 뒤를 따라갔다.

“어디 가?”

“내가 어디를 가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요한은 자꾸 뭔가를 쏟고 주우면서도 끈질기게 셰어를 따라갔다. 방 안까지 우격다짐으로 들이닥칠 기세라, 결국 셰어는 방문 앞에 삐딱하게 서서 요한을 노려보았다.

품 안 가득 쇼핑백을 안고 있는 그는 왠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요한의 팔 안에 위태롭게 얹혀 있던 쇼핑백 몇 개가 또다시 흘러내렸다. 나쁜 예감이 든다. 셰어는 아주 지겹다는 티가 물씬 나는 말투로 물었다.

“왜, 또 우연히 옆방이거나 앞방이거나 그래? 이 스토커 새끼야.”

“어, 아니…….”

“똑바로 말해. 새끼 소리 들으니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어?”

요한은 쇼핑백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제 주머니를 뒤졌다.

셰어는 발에 차이는 쇼핑백을 피해 한 걸음 물러섰다. 쇼핑백에서 쏟아진 것들은 전부 옷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할 일이 쇼핑밖에 없는 인간인가. 슬슬 짜증이 나다 못해 어이가 없어지려 했다.

요한이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호텔 카드 키를 들어 보였다. 호텔의 로고가 박힌 종이 카드 홀더에 적혀 있는 숫자가 공교롭게도 셰어의 호텔 룸 넘버와 똑같았다.

“같은 방? 장난해?”

“아니…… 나는 이거 모르는 일이다? 진짜야.”

“네가 아니면 누가 이딴 개수작을 부려, 이 미친 새끼야.”

셰어는 바닥에 널브러진 쇼핑백을 구두 끝으로 툭 걷어찼다. 곱게 포장된 셔츠가 복도 바닥으로 반쯤 쏟아졌다. 흥분으로 달아올라 있던 요한의 얼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셰어를 제법 매섭게 노려본다. 늘 생글거리던 눈매는 날이 서니 꽤 날카로웠다.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내 말 못 알아들어? 분명 무슨 착오가 있었을 거라고.”

“그걸 내가 어떻게 믿고?”

또 버럭 소리라도 지를 줄 알았던 요한이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거친 한숨을 쉬었다. 화를 참는 얼굴이 딱 한 대 갈겨 주고 싶을 만큼 야릇해 보인 탓에 셰어는 눈썹을 찌푸렸다.

요한이 문을 열었다. 어떤 조작 같은 걸 한 게 아니라 정말 그 문을 열 수 있는 카드가 맞기는 했는지 문은 부드럽게 열렸다. 그는 흔히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문을 연 채 셰어를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일단 들어가서 확인해. 난 교양 없이 복도에서 개지랄 떠는 꼴 널리 광고할 생각 없으니까.”

셰어는 잠시 그의 표정을 관찰했다. 몸에 밴 매너로 문을 열어 주기는 했으나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 씩씩거리는 숨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는 굳은 얼굴이 그의 속을 훤히 드러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속이는 것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같잖은 수작이라 한들 자신보다 더 큰 남자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셰어로서는 피할 이유가 없었다.

셰어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요한이 퍽 정중한 태도로 문을 닫았다. 복도에 엉망으로 던져 놓은 쇼핑백들은 그대로 방치한 채로.

“안 주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셰어는 의미 없이 물었다.

“필요 없어.”

제법 싸늘한 투로 말하는 것이 꼭 남의 발이 닿은 물건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 안에는 두 개의 캐리어가 있었다. 하나는 요한의 가이드인 제이가 손수 가져다준 요한의 캐리어였고, 나머지 하나는 호텔 직원이 방으로 운반해 준 셰어의 캐리어였다. 사이좋게 나란히 놓여 있는 캐리어를 본 두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셰어는 한숨을 쉬며 뻑뻑한 눈가를 문질렀다. 긴 하루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사이 호텔 전화를 든 요한이 컨시어지 쪽으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 옆으로 다가간 셰어가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살짝 찌푸린 눈이 자신을 향해 굴러오는 것을 마주 보며 셰어가 건조하게 덧붙였다.

“얘기는 내가 해.”

요한은 대답 없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시든가. 대략 그런 의미였다.

- 네, 컨시어지입니다.

때마침 전화가 연결되었다.

“내 방에 지금 낯선 사람이 들어와 있습니다. 동시에 체크인이 된 것 같은데요.”

눈이 동그래진 요한이 전화에 들리지 않게 입술만 움직여 욕설을 지껄였다.

“내 방? 너 지금 내 방이라고 했어? 이게 어디가 네 방이야. 체크인은 내가 먼저 했으니까 따지고 보면 이건 내 방이지.”

셰어는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밀쳤다. 어푸푸 같은 소리를 내며 쭉 밀려난 요한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전산 시스템에 문제가 있어서 오버부킹 된 분들이 모두 체크인 처리됐어요. 지금 다른 분들도 문제가 있으신 분들이 많아서 조치 중입니다.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곧 다른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통화를 오늘 여러 번 치러본 모양인지 컨시어지의 직원은 매끄럽게 말을 쏟아 냈다. 셰어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쯤 되겠습니까? 나도 일정이 있는데요.”

- 정말 죄송합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가능한 한 빨리 조치하여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컨시어지와의 통화에 집중한 사이, 축축한 것이 셰어의 손바닥을 핥았다.

셰어는 말없이 요한을 노려보았다. 회심의 일격이라도 성공한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요한이 셰어의 손목을 놓아주고 있었다.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이 셰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알겠습니다.”

더 할 말이 있었지만 셰어는 일단 전화를 끊었다. 영 정신 사납게 구는 물건이 옆에 있으니 통화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요한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짜.”

“개 새끼가 따로 없네.”

“응, 네 얘기?”

더 말을 섞을 시간이 아깝다. 셰어는 혐오를 감추지 않으며 요한의 옆을 지나쳐 욕실로 향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정적인 감정이 꺼려지지도 않는지 요한은 그 뒤를 따라 욕실까지 들어왔다. 그는 천방지축으로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고 무조건 주둥이를 들이미는 버릇 나쁜 개 같다.

코를 때려 줘야겠는데. 셰어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큼직한 욕실 거울에 두 남자의 모습이 비친다. 세면대 앞에 선 셰어는 거울을 통해 욕실 문 앞에 수문장처럼 버티고 선 요한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시선과 맞닿았다.

“아직 얘기 안 끝났잖아.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화난 사람처럼 딱딱하게 얘기하고 있었지만 요한의 눈은 셰어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무엇 하나 숨길 줄 모르는 눈이었다. 아마 그는 평생 자신을 숨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셰어는 재킷을 벗어 샤워 가운과 함께 걸려 있는 행거의 옷걸이에 걸었다. 넥타이를 풀어 함께 걸고 제집이라도 되는 양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요한이 못 볼 꼴이라도 본 것처럼 성큼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런 미친…… 갑자기 옷은 왜 벗어?”

“왜겠어?”

덤덤하게 질문을 되돌려 주며 셔츠를 벗자 요한의 턱에 한껏 힘이 들어간다. 조각처럼 번듯한 선이 두드러진 도톰한 입술이 꾹 다물렸다. 입술 중앙의 우묵한 골이 깊게 패는 것을 보며, 셰어는 새삼 자신의 악질적인 스토커가 늘 이렇게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너랑 놀아 줄 시간 없어. 나가.”

“내 방에서 내가 왜 나가?”

곧 죽어도 한마디 더 하겠다고 아릉대는 요한의 목소리는 전보다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셰어는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세면대 앞에 섰다.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올려놓자 금속이 차가운 돌을 긁는 소리가 찰그랑거리며 울린다.

“마음대로 해, 그럼.”

셰어가 눈을 들었을 때,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스토커는 조금 전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울긋불긋하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타고 오른 열기가 그의 얼굴을 적시는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

요한이 한숨을 길게 뱉었다. 그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아무렇게나 문질렀다. 그 손바닥에 붉은 물감이라도 묻어 있었던 것처럼 그의 손이 닿은 피부가 뻘겋게 달아올랐다.

“늘 이런 식이야? 아닌 척하면서 흘리고 다니는 게 네 수법이냐고.”

함부로 문지른 탓에 눈가마저 붉게 물든 요한이 셰어를 노려보았다.

흘린다고. 셰어는 조소를 담아 그의 말을 곱씹었다.

“이게 흘리는 것 같다면 병원에 가 보는 게 어때.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으니.”

셰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나신이 되어 샤워 부스로 들어섰다. 타인에게 맨살을 보이는 것을 조금도 꺼리지 않는 태도에 되레 질겁한 것은 요한이었다. 그는 셰어가 벨트를 풀 때부터 시선을 목 아래로 떨어뜨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으며 샤워 부스 문이 닫힌 후에도 한참이나 얼어 있었다.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나치게 일상적인 소음이 비일상적인 사건의 충격을 조금씩 지워 갔다. 요한은 욕실 문을 세차게 닫고는 잰걸음으로 침대 앞에 섰다.

두세 명이 뒹굴어도 충분할 만큼 큰 침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는 요한이 도착하자마자 뒹굴었던 탓에 시트가 조금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침대의 컨디션보다 더 큰 문제는 침대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셰어와 한 침대에 눕는 것을 상상했다. 보지 않으려 했으나 얼핏 보고 말았던 셰어의 몸이 단번에 뇌리에 새겨졌다. 조화로운 신체를 유지하는 것을 하나의 과제처럼 수행한 듯 보기 좋게 근육이 붙은 몸이 시트 위에 눕는 것을, 그의 경멸이 담긴 눈이 자신을 쏘아보는 것을 떠올렸다.

“미치겠네.”

셰어에게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정직하게 욕구가 반응했다. 요한은 아름다운 야경이 훤히 보이는 창 앞에 서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을 외면하기 위해 애썼다. 갑갑하도록 부푼 바지 속의 물건도, 남이 무슨 생각을 하든 태연하게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셰어도 그리고 하나뿐인 침대까지도.

바깥의 야경에 집중하기 위해 애쓴 것이 무색하게도 욕실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끊어지자마자 온 신경이 등 뒤에 쏠렸다. 침조차 제대로 삼키기 어려운 긴장감이 짙게 깔렸다. 욕실에서 들리는 기척이 예민하게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으나 요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뒷머리를 잡아채는 것에는 저항하였으나, 눈이 창에 비친 셰어의 상을 좇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셰어는 하얀 샤워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호텔 가운일 뿐인데 그가 걸치니 꼭 몸에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갈증에 입술이 말랐다.

“아직도 안 갔네.”

셰어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손대기 성가신 일을 목전에 둔 사람처럼 일말의 의욕도 없는 어조였다. 그것이 거슬려 요한은 괜히 언성을 높였다.

“내 방이야. 난 안 나갈 거라고 했어.”

“그러든가.”

땡깡 같은 말을 비꼬듯이 받아친 셰어는 침대에 누워 방의 불을 모두 꺼 버렸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불빛에 물든 요한이 얼떨떨한 얼굴로 셰어를 돌아보았다. 이불 속에 누워 폰을 잠시 만지던 셰어가 이내 자세를 고치며 잠들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설마, 지금 이대로 자려는 건 아니겠지.

요한이 의혹 어린 눈으로 잠잠한 침대를 노려보았다. 적막한 가운데 고요한 숨소리만 새근새근 들렸다.

“자? 설마 지금 자려는 거야?”

대답 대신 베개가 날아왔다. 요한은 침대 앞에 떨어진 베개를 주워 품에 안았다. 침대 옆으로 다가가자 짜증을 참는 듯 거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희미한 어둠에 젖은 셰어의 얼굴이 상상보다 더 야릇하게 느껴져 요한은 그를 따라 한숨을 쉬었다. 피로와 짜증으로 구겨진 미간을 문질러 펴 주고 싶은 충동이 요한의 가슴속에서 빠르게 부풀었다. 그보다 더 농도 짙은 일을 저지르고 싶은 욕망 또한 똑같이 크기를 키웠다.

요한의 머릿속이 시끄러워졌다. 셰어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반복으로 학습된 단순한 연상 작용이다. 셰어와 음탕한 장면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떨어진 적이 없었으므로 그를 떠올릴 때면 꼭 살색의 망상이 끼어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망상을 부추기는 것은 셰어였다. 그는 꼭 의도한 것처럼 외설을 노출했다.

“넌 겁도 없다. 내가 엄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뾰족한 투정이 요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눈을 감은 셰어가 졸음에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까불지 마.”

무방비한 면을 노출하고도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이 특유의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는 평생 누군가의 숭배와 복종을 거름으로 자라난 존재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지배자가 아닌 자로는 살아 본 적도 없어 또 다른 가능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일견 순진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의 자신감이 요한의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짐승처럼 덤벼들어 셰어를 엉망으로 만들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발 아래 배를 까고 드러눕고 싶기도 했다.

진자처럼 양 끝을 오가는 충동에 번민하던 요한은 욕실로 달아났다. 눈을 감은 셰어의 얼굴을 더 오래 들여다봤다가는 분명 고소당할 만한 짓을 할 것 같았다.

욕실에는 셰어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과 시계, 그가 사용한 어매니티의 향기가 욕실을 습하게 맴돈다.

요한은 거울에 비친 제 꼴을 비웃었다. 천둥을 겁내는 아이처럼 베개를 꼭 안고 있는 것이 우스꽝스러워 요한은 베개를 몇 번이나 팡팡 두드려 팼다. 누군가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느낌은 사랑에 빠질 때마다 느낀 것이었으나, 이토록 강렬하게 삶의 축이 그에게 옮겨 가 휘둘리는 것은 도저히 즐길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우스운 꼴을 잔뜩 보인 뒤였지만 요한은 셰어와의 기묘한 줄다리기에서 밀리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이쪽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군다면 똑같이 대해 주면 된다.

하지만 집에서 샤워할 때처럼 느긋하게 샤워를 마친 후 요한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셰어는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확실히 그는 같은 방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있다는 것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요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의 옆에 풀썩 드러누웠다. 셰어를 등지고 누운 채 이불 속에 몸을 웅크리자, 두껍고 푹신한 호텔 이불 특유의 질감 너머로 옆에 누운 이의 체온이 느껴지는 듯했다.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모로 누워 머리를 베개에 짓누르자, 푹신한 베개에 눌린 귀에서 맥박이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처음부터 균일하지 않았던 박동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

요한은 자세를 바꿔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러자 트인 두 귀에 셰어의 숨소리가 유독 생생하게 들려왔다.

요한은 불쑥 그의 이름을 불렀다.

“셰어.”

잠든 이는 대답이 없었다. 요한은 그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얌전하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셰어의 얼굴을 바라본다.

안 어울리게 자는 얼굴은 왜 이렇게 순한 건데.

요한은 속으로 의미 없는 욕설을 쏟아 냈다. 아예 몸을 일으켜 앉아 그를 내려다보자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던 침이 유독 큰 소리를 내며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바싹 마른 목구멍은 여전히 따갑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 산만한 기척 때문인지 셰어의 반듯한 이마에 희미한 골이 생긴다. 요한은 그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꼭 더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심 품은 흑심이 착각을 일으킨 것인지도 모른다.

목 아래까지 덮여 있는 이불을 슬그머니 끌어 내리자, 잠결에 슬쩍 흐트러진 가운 사이로 강직한 선을 그리는 쇄골과 융기한 가슴 근육이 보인다.

요한은 충동적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 끝에서 영근 물방울이 셰어의 뺨 위로 뚝 떨어졌다. 감겨 있던 셰어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밀려 올라가며 잠에 취해 몽롱한 눈동자가 비친다. 그는 반도 채 뜨지 못한 눈을 도로 감으며 요한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잠자던 사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강경한 힘이 요한의 머리를 짓눌렀다.

방심하던 찰나에 무력하게 그의 손에 눌려 고개를 숙인 요한이 눈을 깜빡였다. 요한의 젖은 머리칼을 올올이 감아쥔 셰어의 손이 요한을 제 아랫배 쪽으로 누르고 있었다.

요한의 콧등이 슬며시 벌어진 가운 자락 사이로 미끄러진다. 따뜻한 체열에 물든 바디 워시 향기가 풍겼다. 달았다. 코앞에 성대한 만찬이라도 차려진 것처럼 침이 고여 귀 밑이 시큰해졌다.

얼굴에 함부로 문질러지는 피부가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 아래에는 조밀하게 짜인 복근이 부딪힌 코가 아프도록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흥분으로 씩씩거리는 숨이 절로 샜다.

“미친…… 잠버릇이 대체.”

사람을 시험에 들게 만든다. 욕설을 뱉자 그것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칼을 쥔 손아귀 힘이 더욱 세졌다. 요한은 눈을 치켜떠 셰어의 얼굴을 보려 했으나 번듯한 선을 그리는 턱과 부드럽게 기운 목덜미밖에 볼 수 없었다.

“좀.”

고개를 묻은 배가 울리는 느낌에 요한은 숨을 멈추었다. 셰어가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요한의 머리를 그보다 더 아래로 누르고 있었다. 두피가 아프게 당기는 느낌에 요한은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머리를 수그렸다. 셰어가 다리를 벌리자 가운이 쉽게 벌어지며 코와 입술에 부드러운 음모가 스쳤다.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올라 더는 뜨끈한 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잠에 취했든, 자신을 다른 이로 착각했든 이제 상관없었다. 물고 빨고 싶다. 셰어가 완전히 녹아 흐물거릴 때까지 입 안에서 굴리고 남은 기운 한 방울까지 전부 쥐어짜 삼키고 싶다. 그리고 그를 욕심껏 취하고 싶다.

뱃속에서 들끓는 열망이 바싹 타들어 간 목구멍을 불살라 증기 같은 숨이 샌다. 열에 달뜬 요한의 입술이 벌어졌다.

한숨 섞인 목소리가 셰어의 입에서 눅눅하게 흘러내렸다.

“보채지 말고.”

머리칼을 억세게 쥐고 있던 셰어의 손가락이 풀어지며 단단한 손끝이 두피를 지그시 눌렀다. 오싹했다.

“잘해 봐.”

그는 관대한 주인처럼 허락했다. 요한은 욕망을 억제할 이유를 한 가지도 찾을 수 없었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요한이 말했다. 깔깔한 목구멍만큼이나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할 생각 하지 마. 네가 시작한 거야.”

대답하는 대신 셰어의 손바닥이 요한의 뒷머리를 묵직하게 두드렸다. 그 모욕적인 손길이 마지막 한 줌의 망설임을 흩어 놓았다.

요한은 유독 부드러운 거웃에 반듯하게 날이 선 콧등을 비비며 그 틈 사이로 비치는 살결에 입술을 문질렀다. 바디 워시 냄새에 희미한 체향이 묻어나는 것이 묘하게 배 속을 간지럽게 만든다. 배 속이 나비라도 든 것처럼 간지러운 감각이 짙어질수록 인장을 찍듯 입술로 누르던 행위가 끈질긴 구애처럼 끈적하게 바뀐다.

운동으로 다져진 것이 분명한, 미학적인 근육이 뚜렷한 선을 그리는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다리를 벌리자 뭔가를 채근하듯 셰어의 다리가 요한의 옆머리를 밀었다. 그 탓에 장골에 눈썹 뼈를 부딪친 요한이 지끈거리는 눈썹을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 급해, 너. 무드 없게.”

그래도 별수 있나.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려야지. 요한은 얌전히 잠든 성기를 움켜쥐고 느릿하게 훑어 올렸다.

발기하지 않은 채로도 상당한 크기인 성기는 잘 다듬어진 그의 몸처럼 예쁘게 생겼다. 비현실적인 섹스 판타지를 위해 빚어 놓은 것처럼 예쁘장한 모양에 험악한 크기를 갖춘 완벽한 성기가 오럴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요한의 취향을 완전히 비틀어 저격했다.

슬며시 혀를 내어 부드러운 표피를 핥자 머리칼 사이로 파고든 셰어의 손가락이 그를 독려하듯 두피를 문질렀다. 두피에도 성감대가 있다던 어느 옛 애인의 말이 맞는지 손끝이 닿는 지점에서부터 오싹한 감각이 번졌다.

요한은 입을 열어 아직 말랑하고 부드러운 성기를 머금었다. 이가 닿지 않게 주의하며 좆을 끝까지 삼키고 혀에 닿는 여린 살갗을 지분거리자 여태 얌전하던 것이 쉽게 크기를 부풀렸다.

혀를 짓누르며 목구멍이 빠듯하도록 부푸는 것이 갑갑해 슬쩍 고개를 뒤로 물리자, 성급하게 빠져나간 성기가 이에 살짝 긁히며 셰어가 나지막한 숨을 닮은 신음을 흘렸다.

“흐음…….”

잘하고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옆으로 기우는 고개가 열락에 신음하는 것처럼 묘한 각도로 꺾여 있는 것이 욕구를 부추겼다. 요한은 그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싸 쥐고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였다. 엄지에 닿는 장골을 따라 그리듯 문지르자 입천장을 찌르는 성기의 경도가 금세 바뀐다. 요한은 오럴을 즐기지 않을 뿐 오럴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잠든 사이 높아진 체온에 달아오른 살결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 식욕을 닮은 욕망이 치밀어 이미 한 번 적신 살 기둥을 뱉어 내 손에 쥐고 흔들었다. 타액에 젖은 성기가 손안에서 부피를 더욱 키우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셰어를 전부 입에 넣고 녹아 없어질 때까지 혀로 굴리고 싶었다. 예민한 귀두를 입술로 잘근거리며 혀로 굴리다 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한 기둥을 핥으며 내려가자 셰어의 손가락이 거칠게 요한의 머리칼을 헤집는다. 요한은 입을 벌려 그 아래의 음낭을 빨았다. 큼직한 성기만큼이나 제법 묵직한 음낭을 입 안에 머금은 채 얇은 표피를 핥고 젖은 입술로 문지르자, 손에 쥔 좆이 흔드는 대로 뻣뻣하게 까딱거릴 만큼 단단해진다.

셰어가 나른한 한숨을 뱉으며 허리를 움직였다. 꼭 어딘가에 좆을 박는 행위를 연상케 하는 움직임에 요한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미친 새끼. 왜 이렇게 야해.

이유 없이 떠오르는 욕설과 함께 좆을 게걸스럽게 삼키자, 목구멍까지 성기를 처박고도 부족함을 느끼는지 셰어가 허리를 비벼 올렸다. 그새 단단해진 귀두가 점막을 연신 쑤셔 대는 것이 역해 요한은 치미는 욕지기를 참으며 고개를 물렸다. 건방지게 머리칼을 휘어잡아 당기고 목구멍까지 좆을 처박으려 드는 셰어의 행태가 의외로 거슬리지 않았다.

셰어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던 요한의 한 손이 슬금슬금 그의 등 뒤로 돌아가 단단히 올라붙은 엉덩이를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착 감겨드는 엉덩이의 감촉이 유난히 찰지게 느껴져 입 안의 성기까지 달게 느껴졌다.

길쭉한 손가락이 엉덩이 골 아래로 미끄러진다. 크림처럼 부드러운 피부가 손가락 아래에서 뭉개지는 것이 자극적이다.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굳게 다물린 곳을 짐짓 무심하게 지나쳐 회음부를 쓰다듬자 손바닥에 감싸인 엉덩이의 근육이 딱딱하게 뭉치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이쪽은 처음인가 싶었는데 정말 그런 모양이다. 새침 떠는 곳을 흐물거릴 때까지 핥고 싶어 손이 그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급해지려는 마음을 달래려 볼기를 주무르던 손에 힘을 주자 혀 밑의 침샘이 아리도록 타액이 고여 입에 문 좆을 빨 때마다 추접스러울 만큼 젖은 소리가 난다.

요한의 성기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남의 좆을 빨며 발기한 적은 없었지만 흐트러진 셰어를 멋대로 주무르고 있자니 배 아래에 열이 뻐근하게 뭉치는 듯했다.

부드럽고 말랑한 좆이 입 안에서 단단해지는 것도 좋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살결을 내키는 대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입만 열면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소리만 하는 남자가 나른한 숨을 뱉으며 머리를 만져 주는 것이 무엇보다 더 자극적이었다.

그가 다리를 벌리고 울며 매달린다면 어떨까. 상상이 다음 단계로 이어진 순간, 셰어가 두피가 확 당기도록 머리칼을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요한은 입에 머금고 있던 좆을 반 넘게 뱉어 내야 했다.

짜증스럽게 눈썹을 찌푸린 요한이 눈을 치켜떴을 때, 마찬가지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셰어와 눈이 마주쳤다. 전에 없이 흉흉한 눈빛이었다.

완전 좆 됐는데.

근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 요한의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그렇기에 실제로 그가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전무했다. 요한은 대신 입에 물고 있던 좆을 혀 전체로 퍽 농염하게 적시고는 입술을 오므리며 빨아 뱉었다.

좁아 든 셰어의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지더니 요한이 좆을 완전히 뱉었을 때쯤에는 이마 위에 불뚝 핏대가 선 것마저 보였다. 요한은 심장이 울렁거렸지만 짐짓 태연한 척 제 머리칼을 쥔 셰어의 손을 떼어 냈다.

“뭐. 내 입술에 먼저 좆 비빈 건 너였는데.”

셰어의 얼굴에 싸늘한 웃음이 번진다. 요한이 무슨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그가 요한의 다리 사이를 발로 세게 밟았다. 움찔거리며 튀어 오른 허리가 좆이 발바닥에 사정없이 짓밟히는 바람에 벌벌 떨리며 도로 내려앉았다. 요한은 셰어의 발목을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야, 너 이거 안 치워?”

“내가 까불지 말랬지.”

반쯤 발기한 상태였던 좆은 셰어의 발에 밟히는 것을 자극으로 인식하는지 오히려 조금 전보다 더 꼿꼿해지고 있었다. 고통이 미묘한 자극으로 변질되는 것에 휩쓸려 요한은 그의 발에 은근슬쩍 제 좆을 비볐다.

뭔데 이게 좋지. 혼란스러운 눈을 본 셰어의 얼굴에서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이 서서히 걷혔다. 요한은 그것이 불안해 아무 말이나 떠오르는 대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난 잘못 없다? 난 옆에 얌전히 누워 있었는데 네가 내 얼굴을 네 좆에 처박았다고, 미친놈아. 아니, 그래서 내가 좆을 빨긴 했는데…… 너도 막 신음하고 좋아했거든?”

“이거 아주 버릇이 더럽게 들었네.”

셰어의 발가락이 오므라들며 좆을 꼬집듯 아프게 밟았다. 버럭 소리를 지를 뻔한 것을 참느라 요한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역시 어디서 힘으로 밀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으나 급소를 밟힌 상태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요한은 셰어의 발목을 달래듯 살살 문지르며 앓는 소리를 했다.

“좆 터질 것 같다고……. 아, 미친…… 어디 망가지면 네가, 책임질 거야?”

“책임만 지면 돼?”

셰어가 은근한 말투로 되묻는 것과 동시에 좆을 짓밟는 힘이 한층 더 거세졌다.

“악! 이, 이 개새끼가…….”

큰 덩치를 꼴사납게 웅크리며 요한이 눈물이 찔끔 번진 눈으로 셰어를 노려보았다. 표정 없는 셰어의 얼굴에서 유독 음영이 짙은 눈만이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책임이라. 그럼 망가지더라도 다시 고쳐 주기만 하면 되겠네. 얼마면 될까, 이건.”

값을 감정하듯 냉랭하게 가라앉은 셰어의 눈을 마주하자 요한의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배어 나왔다. 셰어는 진심으로 좆을 밟아 터트리기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 존나 잘못 걸렸다. 반쯤 넋이 빠진 요한이 무심코 생각을 입 밖으로 주절거렸다.

“그래, 너 잘못 걸렸어. 난 너처럼 생각 없이 몸부터 비벼 대는 변태 바닐라 새끼를 제일 싫어해.”

“뭔 소리야…….”

몸부터 비벼 대기는, 대체 누가. 따지고 보면 몸부터 비빈 쪽은 셰어였다.

억울함에 눈물이 삐죽 샌다. 요한이 씩씩거리며 붉어진 눈을 감추려 고개를 숙이자 유독 잔인하게 몰아붙이던 셰어의 발이 완급을 주며 지근지근 좆을 밟아 댔다.

“아…… 으으, 좀. 개새끼야.”

요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떨었다. 질금거리며 쿠퍼액을 뱉어 내던 좆이 욱신거렸다. 발을 조금만 더 떼어 주면 쌀 수 있을 것 같다. 좆을 밟히면서 사정하는 게 좀 이상하기는 한데 왠지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한의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 푸른 눈동자가 흠뻑 젖어 있었다. 셰어는 그의 속눈썹이 젖어 뭉치는 것을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폭력적인 자극을 견디다 못해 요한이 눈을 질끈 감자 꾹 다물린 입술이 흡사 울먹이는 것처럼 비죽였다.

“짜증 나게.”

셰어가 중얼거렸다. 표정 없는 얼굴은 한결같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치미는 것을 참는 것처럼 음울했다.

잔혹하게 성기를 짓밟던 발이 떨어졌다. 요한은 얼얼한 좆을 감싸 쥐며 사정했다. 문지를 것도 없이 정액을 질질 쏟아 내는 제 성기를 멍하게 보는 요한의 얼굴을 셰어가 바라보고 있었다. 줄곧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채.

“하아…… 씨. 뭐야, 이게.”

이렇게 빨리 싸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고작 발에 밟힌 것 따위로.

혼이 빠진 요한의 머리칼을 셰어가 움켜쥐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요한의 이마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허공을 떠돌던 눈이 겨우 셰어를 마주 보자, 셰어가 느릿하게 그의 머리를 아래로 눌렀다.

“좆을 세웠으면 너도 책임은 져야지.”

그의 성기는 어쩐지 입에 넣고 빨 때보다 더 흉흉한 기세로 부풀어 있었다. 이제 입에 넣기 조금 부담스러운 크기로 변한 좆을 쥐며 요한은 눈썹을 찌푸렸다.

“어차피 빨게 해 줄 거였으면 불쌍한 내 좆은 왜 괴롭힌 거야?”

나도 좆대가리를 확 씹어 버릴까 보다. 괜히 한 소리를 했다가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요한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벌렸다.

끝이 젖기 시작한 성기는 확실히 전부 입에 넣기에는 버거운 크기였으나 절반가량을 삼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볼이 우묵해지도록 깊게 빨아들이며 미처 삼키지 못한 기둥을 손에 쥐고 슬슬 문지르자, 머리칼을 쥔 손아귀 힘이 조금 느슨해진다.

요한이 슬쩍 눈을 들어 보자 좀 전보다 눈에 띄게 풀어진 표정의 셰어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락에 녹아내린 눈이 느리게 깜빡이는 것이 퍽 고혹적이었다.

요한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남의 좆을 터트릴 기세로 밟아 댈 때는 눈물이 찔끔 나게 무서웠는데, 이렇게 보니 예쁘긴 했다. 알맹이는 괴팍하지만 겉만은 자신의 취향이었다.

그 때문인지 확 물어뜯어 버릴까 했던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조금 더 정성껏 빨아 주고 싶은 마음이 슬슬 피어올랐다. 사실 요한은 연인을 눕혀 놓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뼈가 녹아내리도록 눅진하게 애무를 퍼붓는 것을 즐겼다. 애가 타 애원할 때까지 물고 빨아 댄 뒤의 연인은 어찌나 간절한 표정으로 매달리던지. 그 애달픈 얼굴이 요한의 머릿속에서 셰어의 얼굴에 덧씌워진다. 요한은 느릿하게 머리를 움직여 두꺼운 살 기둥을 목구멍 깊숙이 삼켰다.

그것을 칭찬하듯 셰어가 요한의 귓불을 살짝 꼬집었다. 도톰한 살점이 꼬집히는 뭉근한 통증이 끝에서 찌르르한 쾌감으로 바뀐다. 녹은 시럽처럼 달큼한 셰어의 목소리가 요한의 귀를 더욱 붉게 달아오르게 했다.

“후…… 잘하네.”

“으음…….”

쑥스럽게 얘는 뭘 이런 걸 칭찬하고 그러지. 요한은 눈썹을 슬쩍 찌푸리며 목을 울려 애매하게 대답했다. 목구멍에 박힌 좆에서 비릿한 맛이 번지는 것이 느껴졌다. 셰어가 흐릿하게 웃는 듯했다. 어쩐지 그 웃음이 불길했다.

잠시 다정했던 손길이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칠어져 머리를 꾹꾹 짓눌렀다. 도저히 삼킬 수 없을 것 같았던 성기 뿌리까지 모두 입에 처박아 대는 바람에 숨이 막혔다. 침대를 짚은 요한의 팔은 숨통이 막혀 비틀거리는 사이 맥을 못 추고 휘청거렸다.

“컥…… 으, 윽. 흐!”

“남자 좆을, 얼마나 빨았으면, 이렇게 잘해?”

입에다 대고 좆질이라도 하듯 퍽퍽 박아 대는 짓이 제법 성미에 맞았는지 셰어가 달아오른 얼굴로 얕게 헐떡였다. 숨이 막혀 벌어진 요한의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 입술과 닿아 있던 음모까지 흠뻑 적셨다. 붉게 충혈된 요한의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번졌다.

억울한 듯 찌푸려진 얼굴을 보며 셰어는 더욱 거칠게 벌어진 입술을 들쑤셨다. 자꾸 치켜들려는 요한의 뒤통수를 세게 누르자 욱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괴로운 기색이 역력한데도 끝까지 좆을 삼키고 목구멍까지 조여 대는 것이 물건은 물건이었다.

“좋아?”

“으으응…….”

요한이 짜증스러운 티를 내며 단박에 부정적인 소리를 냈다. 뾰족하게 날이 선 눈매는 제법 매서웠으나 그의 목소리에 맹맹한 비음이 잔뜩 섞이는 바람에 그저 투정을 부리는 것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좋지도 않은데, 자는 사람 좆을 왜 빨아. 그렇게 굶었어?”

“후, 윽…… 크, 으응.”

점차 좁아 드는 목구멍을 굵은 선단이 득득 긁어 댈 때마다 시트를 움켜쥔 요한의 손이 더욱 희게 질렸다. 셰어가 붉게 달아올라 핏대가 선 목을 쥐자 가뜩이나 좁은 기관이 급하게 조여든다.

요한은 물기가 잔뜩 어린 눈으로 셰어를 고집스럽게 노려보다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묵직하게 젖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감겼다. 찌푸린 눈썹이 좆이 깊게 처박힐 때마다 움찔거렸다.

“흐으…….”

“기분 나빠.”

탄식 같은 한숨이 셰어의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파정의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컥컥거리며 버둥거리는 요한을 억세게 움켜쥐던 손이 사정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떨어졌다.

요한은 하도 시달려 부어오른 듯한 목구멍에 끈적하게 눌어붙는 것을 삼키며 뻣뻣해진 고개를 들었다. 어찌나 사납게 쑤셔 박았는지 턱이 뻐근하고 입술이 터져 따끔거렸다. 입술에 덕지덕지 묻은 타액과 정액을 대충 닦아 내며 관절이 어긋난 것만 같은 턱을 주무르자, 셰어가 못마땅한 얼굴로 요한을 쏘아본다.

요한은 어이가 없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거 아주 웃긴 놈이네. 남의 입술을 다 찢어 놓으면서 싸질러 놓고 뭐가 기분 나빠?”

“네 얼굴이 마음에 안 들어.”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살짝 벌어져 있던 요한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요한은 잠시 말없이 턱관절을 주무르다 한숨을 쉬었다.

“너 취향 진짜 이상해.”

눈이 삔 것도 아니고. 이 얼굴이 대체 어떻게 싫을 수가 있냐.

한 차례의 사정이 관대함 같은 것을 선사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셰어는 눈썹만 조금 찌푸릴 뿐 평소처럼 사납게 굴지 않았다. 반면 요한은 폭풍 같은 사건 후의 후유증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요한은 낯선 이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에 결벽이 있을 만큼 완고한 금욕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는 낭만이나 연애의 절차를 제법 중시하는 편이었다. 구애 상대에서 싫어하는 사람으로, 모호하게 정의해 두었던 셰어가 별안간 물음표로 떠올랐다.

불현듯 머릿속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문제가 거스러미처럼 일어나 속을 깔끄럽게 긁었다.

“너 약혼한다며.”

“넌 그 짓 하고 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거야?”

삐뚜름하게 치켜 올라간 셰어의 입술이 이내 딱딱하게 다물렸다. 요한은 그것이 긍정에 가까운 대답이라는 것을 읽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분명 셰어는 먼저 나서서 곧 약혼을 할 예정이니 이러면 안 된다느니 하는 말을 지껄일 타입은 아니었다. 그 탓에 하마터면 가정파괴범이 될 뻔했다.

요한은 여태 얼얼한 턱을 대충 문지르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들러붙은 끈적거리는 것을 씻어 내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 뒤를 셰어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요한은 욕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태연하게 자신을 따라 걸음을 멈춘 셰어를 노려보았다.

“뭐야?”

“샤워할 거면 같이 하지. 늦었는데.”

셰어는 이상한 의도는 없다는 듯이 담백한 말투로 말했다. 정말 시간이 늦었으니 같이 샤워를 해서 시간을 절약하자는 듯이. 그 무해한 표정이 오히려 수상했다. 요한은 재빨리 욕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특별한 잠금장치가 없는 욕실 문은 싱겁게 다시 열렸다.

요한은 셰어가 무례하게 코앞에서 닫힌 문을 도로 열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당황했다. 그사이 셰어는 요한을 앞질러 먼저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부스 문을 닫으려는 셰어를 요한이 황급히 뒤따라가 붙잡았다. 나신으로 환한 불빛 아래에 나란히 서자니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끈질기게 눈만을 직시하는 시선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한 셰어가 보란 듯이 요한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본다.

의도가 뻔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이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눈 바로 안 해? 내가 왜 너랑 샤워를 같이 해?”

“왜, 좆도 빨아 준 사이에 부끄러워?”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미친놈아.”

그는 서로 적당히 만족했으니 이제 그만 선을 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모양이다. 요한은 어쩌면 셰어는 몸을 섞은 상대에게 좀 치근덕거리는 경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칼같이 목적에만 충실할 것 같은 평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면이었다.

“피곤하게 굴지 마. 들어올 거야, 말 거야?”

셰어가 까칠하게 물었다. 대화를 포기한 요한이 그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린 채 새 수건을 허리춤에 감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어휴. 그래, 너 먼저 씻으세요. 많이 씻으세요. 할 일도 많으신데 씻고 얼른 자라, 자.”

요한은 샤워 부스에 들어가는 대신 세면대 앞에 서서 비릿한 냄새가 나는 얼굴을 씻고 칫솔에 치약을 듬뿍 짰다. 샤워 부스의 문을 아직 닫지 않은 셰어가 격렬하게 칫솔질을 시작한 요한을 비웃었다.

“볼 것도 없는 게 싸매긴 왜 싸매.”

“야!”

요한이 입 안 가득 차오른 거품을 세면대에 뱉으며 버럭 소리치자 샤워 부스 문이 냉큼 닫힌다. 바로 샤워기 레버를 잡아당긴 셰어가 얄밉게 입술만 움직여 말했다. 뭐.

쏟아지는 물 아래 고개를 숙여 몸을 적시는 그는 의외로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요한의 얼굴이 기분 나쁘다고 했던 주제에.

요한은 입 안의 치약 거품을 헹궈 내며 부스 쪽을 힐끔거렸다. 셰어에게서 풍기던 바디 워시 냄새가 욕실에 습하게 번지고 있었다.

셰어의 견갑골 아래에 우스운 모양으로 거품이 남아 있다. 셰어가 몸을 씻어 내는 내내 이상하게 그곳의 거품만 유독 씻기지 않고 남아 있어 요한은 저도 모르게 그 거품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을 해 줄까, 말까. 고민하며 짐짓 심각한 얼굴로 젖은 턱을 훔치는 찰나, 셰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꼭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살짝 벌어진 입술을 달싹이다 굳게 다물었다. 요한은 저런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처음, NOB의 발코니에서 술에 취해 잠든 자신의 따귀를 때려 정신을 차리게 해 줬을 때 셰어의 표정이 딱 저랬다. 요한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셰어는 늦은 시간이라서인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와.”

요한은 간질거리는 눈썹 위를 문질렀다.

“넌 사람을 무슨 개 부르는 것처럼 부르냐.”

“네 수준이 딱 그래. 머리 나쁜 개.”

그냥 개도 아니고 머리 나쁜 개라니 기분이 더 나빴다. 요한은 허리에 감았던 수건을 바스켓에 던지고는 부스 문을 아무렇게나 열고 들어섰다. 바닥에 고인 얄팍한 물기가 발바닥 아래에서 찰박인다.

덩치 큰 남자 둘이 들어서도 그다지 좁지 않은 샤워 부스 안은 습기가 고여 숨이 막혔다. 셰어는 요한이 들어오는 것을 보지도 않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얼굴을 씻어 내고 있었다. 그의 등에 여태 남아 있는 거품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요한이 입술을 비죽였다.

“멍멍. 그렇게 잘나신 분이 혼자서는 거품도 제대로 못 씻고. 잘나서 좋으시겠어.”

제법 세차게 벅벅 문지른 탓에 셰어의 등에 희미하게 붉은 손자국이 남는다. 거품이 풀어져 흘러 내려가는 것을 따라 시선이 아래로 내려간다.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 보는 등과 허리, 그와 이어지는 섬세한 곡선의 엉덩이가 물에 젖어 유독 부드러워 보인다. 요한은 유려하게 솟아오른 둔덕 사이의 감촉을 기억했다. 크림을 휘젓는 것처럼 부드러운 피부.

기억을 더듬는 요한의 손가락이 움찔 떨렸다. 그때 셰어가 불쑥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요한은 외설적인 상상을 한 것이 괜히 찔려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셰어가 요한의 턱을 쥐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으나 어쩐지 심술궂어 보였다.

“꼬시지 말고, 씻어.”

“허.”

요한의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졌다.

“병원은 네가 가야겠다. 등 씻어 준 게 대체 어디가 꼬시는 건데…….”

“너 나 만지면서 이상한 생각 했잖아.”

미친놈, 눈치가 왜 이렇게 빨라.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한 말을 단속하며 요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상상에도 죄가 있던가. 실제로 한 짓이라고 해 봐야 얌전히 등에 묻은 거품을 씻겨 준 것뿐이었으니 요한은 조금 억울해졌다.

손에 바디 워시를 짜낸 셰어가 성의 없이 한 손으로 거품을 대충 만들어 낸 채 요한의 배를 문질렀다. 긴장으로 뻣뻣해지는 배 위에 두드러지는 근육의 형상을 건조하게 쓸던 손길이 갑자기 야릇하게 변했다. 요한은 급히 아래로 미끄러지는 셰어의 손목을 붙잡았다. 셰어의 손끝이 거의 거웃에 닿아 있었다.

“네가 이렇게 만졌는데.”

아직 떨어지지 않은 셰어의 손가락이 젖은 배 위에 간지럽게 거품을 덧발랐다. 슬쩍 찌푸린 눈이 요한을 시험하듯 바라본다. 요한은 마른침이 넘어가며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티가 나지 않기를 바랐다.

“이게 꼬시는 게 아니라고?”

셰어는 요한의 손을 쉽게 뿌리치고는 손에 묻은 거품을 씻었다. 거품이 엉킨 요한의 배에 물이 튀어 묽어진 하얀 거품이 아래로 툭툭 떨어졌다. 요한은 슬쩍 힘이 들어가려는 아래를 감추려 무심코 손을 내렸다. 그 손이 가리는 부위를 힐끔 쳐다본 셰어가 픽 웃었다.

“너 누굴 바보로 알아?”

“너 진짜 성격 나쁘다.”

눈치챘다고 해서 그걸 꼭 말로 해 줘야 하나. 요한은 달아오른 얼굴에 튄 물기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툭 까놓고 말하는데, 난 약혼 앞둔 사람이랑 뭔가를 할 생각이 없거든? 이건 실수야.”

“그래서?”

셰어는 침착한 말투로 되물으며 요한을 바라보았다. 그다지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요한은 그것에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서로 없었던 일로 치자고. 쿨하게.”

“알았어.”

즉답이 돌아왔다. 셰어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니 어쩐지 불안해져 요한은 그의 안색을 살폈다. 거품을 모두 헹궈 낸 셰어가 요한의 어깨를 퍽 친근하게 밀어 자리를 바꾸어 주며 웃었다. 어디서 본 적 있는 미소였다. 선거 포스터를 찍으면 참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한 적 있는, 바로 그 얼굴이었다.

따뜻한 물이 쏟아지는 것을 맞으며 요한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셰어를 마주 보았다. 셰어는 웃으며 말했다.

“씻고 나와.”

“어…… 그래.”

셰어는 꼼꼼하게 수건으로 몸을 말리고 욕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행동 중에 유별난 구석은 없었으나 요한은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 새끼는 뭔데 쿨하지…….”

그럴 것이라 짐작하긴 했으나 역시 구질구질하게 미련을 품은 것은 이쪽뿐인가 싶었다. 요한은 한숨을 푹푹 쉬며 빠르게 몸을 씻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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